수전 손택 - 영혼과 매혹
다니엘 슈라이버 지음, 한재호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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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이, 『해석에 반대한다』의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의 손택이 박사학위를 받지 못 했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 책의 저자 다니엘 슈라이버는 손택이 엄청나게 가부장적인 대학 세계에 속한 여성이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147) 논문을 마치지 못한 걸 후회하기도 했고, 박사학위를 받으려 계획까지 세웠지만, 결국 손택은 박사학위를 받는데 실패했다. 나중에 제안 받은 수많은 강사 직, 명예 박사학위, 교수 직도 대부분 거절했고, 진짜 박사학위를 너무 존중하기에 명예 박사학위를 받을 수 없다는 이유를 대기도 했다.

 


그의 에세이적인 글쓰기와 학술적 글쓰기가 기본적으로 상반되는 것이기도 했지만, 박사학위나 대학교수의 직함보다 훨씬 더 강렬한 아우라가 그에게는 있었다. 1963년 가을, 손택의 출판인은 소설 『은인』의 뒷표지 전면에 케네스 버크와 한나 아렌트의 찬사에 가까운 소개말 대신 스물 아홉이었던 손택의 사진을 실어 출간했다. 흑백 사진은 해리 헤스가 찍었는데, 멋스럽게 자른 새카만 단발머리를 하고 현대적인 유명 디자이너의 옷을 입은, 기막히게 호화로운 아름다움을 지닌 젊은 여성을 담고 있었다(139). 니체를 말하는 하버드대 출신의 31세의 여성. 미모의 여성. 지성미를 발산하는 손택은 그렇게 유력 신문사의 후광에 힘입어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된다. 저자는 이를 지적인 주체와 대상화된 아름다운 여성 이미지의 공생이라고 평한다.(139) 평생 동안 손택은 그런 대중적 관심의 중심에 있었고, 자신의 정치적 행동을 위해 그런 평판과 명성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명성이란 결국 인정의 문제다. 인정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타인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그런 대단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었을 때에만 나는 비로소 그런 사람이 된다. 박사 학위조차 갖지 못한 손택이 가부장적이고 비평과 비난이 공존하는 주류 예술 문화의 중심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활약할 수 있었던 건, 작가로서의 그녀의 천재적 역량과 지적이면서도 독보적인 그녀만의 매력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수많은 평론가들과 매스미디어, 대중의 호의와 적의를 오가는 절대적이고 폭발적인 관심이 존재했다.

 


이미지에 대한 불편한 감정은 NBC에서 가진 에드윈 뉴먼과의 인터뷰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어떤 예술가에게든, 언론의 관심은 일반적으로 굉장히 파괴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언제나 골칫거리죠. 그게 긍정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모든 관심의 정도라는 걸 추가적으로 고려해야 하니까요. 자기 작업을 외부인의 시선에 비추어 생각하기 시작하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 인식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죠. (…) 그러면 자기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됩니다. (237)

 


이 두 가지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는 실제로 이런 일들을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사람들은 예술가 내면의 어떤 점에 대해 환호하고 열광하지만, 다음 순간 예술가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하게 되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 점점 예술가는 자신의 일에 집중하지 못할 테고, 결국 사람들은 그를 외면한다. 대중적 관심은 곧 영향력이고,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 때,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가 실제로 중요한문제라고 말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다. 손택은 어떻게 했을까.

 


많은 선배 작가처럼, 손택도 문학을 향한 첫 번째 시도로 일기를 꾸준히 썼다. “게으름 외에는 그 무엇도 내가 작가가 되는 길을 가로막을 수 없다. (…) 글쓰기가 왜 중요할까? 그 주된 이유는 이기주의에서 나오는 것 같다. 나는 작가라는 페르소나를 갖고 싶을 뿐, 꼭 써야 할 말이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 안 될 건 또 뭔가? 자존감을 약간만 쌓으면 이 일기가 기정사실화하듯 꼭 써야 할 말이 있다는 자신감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02)

 



결국에는 내 안에 사람들에게 전해 줄 만한 무언가, 사람들에게 보여줄 만한 무언가가 있는가의 문제인데, 손택은 그것을 이렇게 해결한다. 자존감을 쌓음으로써, 꼭 써야 할 말이 있다는 자신감을 얻음으로써, 그리고 작가라는 페르소나를 얻음으로써.


 

손택은 그렇게 존재했다. 알려진 게 아니라 선포된 채로. 스스로의 힘으로. 혼자.

 

 


 






손택의 절대적이고 냉혹한 분노는 흔히 인용되는 서양문화 전반을 향한 비판에서 절정을 맞는다. "진실은 모차르트, 파스칼, 불 대수, 셰익스피어, 의회정치, 바로크양식 교회, 뉴턴, 여성해방, 칸트, 마르크스, 발란친의 발레가 이 특정 문명이 세계에 초래한 것을 속죄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인들은 인류 역사의 암이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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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6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06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06 1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06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08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16 1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단발머리가 아니다. 나는 곱슬머리다. 그냥 곱슬머리가 아니라, 숱이 많고 머리카락이 굵고 두꺼운 초강력 곱슬머리다. 내 머리카락 만지다가 놀라는 미용사들을 한 두 번 본 게 아니다. 대학교 4학년 2학기 때, 이 세상에 매직 스트레이트 펌’(일명 매직)이라는 게 등장했다. , 매직이란 얼마나 놀라운 단어인가. 나는 학교 미용실에서 그 신기하다는 매직을 했는데, 내려가는 길에 만난 친구, 대학생활 4년 동안 수업과 점심을 함께했던 친구가 나를 못 알아보고 지나쳤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는 놀란 눈으로 내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진심을 다해 중얼거렸다. “, 취직, 되겠다.”

 


나는 워낙 초강력 악성 곱슬이어서 원하는 스타일이라는 게 없다. 안 되는 스타일이 너무 많고, 불가능에 가까운 스타일이 더 많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매일 매일 머리를 감은 후에 송혜교가 광고했던 분홍색 드라이어를 사용해 만져주면 되는데, 그건 너무 비싸고 그리고 매일 아침마다. 못 할 일이다. ‘단발머리라는 닉네임을 쓰면서 실제로 내가 찰랑찰랑한 단발, 상큼한 단발, 예쁜 단발, 고준희 단발을 할 수 없는 이유다.

 




 


현재의 스타일은 나름 내 머리카락에 최적화된 형태인데, 먼저는 머리카락을 매직으로 직모처럼(보통의 머리카락처럼) 보이도록 쭉쭉 펴고, 아래부분에 굵은 웨이브를 넣어주는 거다. 일년에 두 번 미용실에 간다. 보통은 4, 10월 이렇게 가는데,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6월에 미용실에 다녀왔고, 그리고 화요일에 미용실에 갔다.

 


꺼내 주신 가운을 입고 가방에서 핸드폰과 『책, 이게 뭐라고』를 꺼냈는데, 원장님이 갑자기 물으신다. 혹시, 무슨 책 놓고 가지 않았어요? 책이요? 아니요. (저는 책 잃어버리고 그런 사람 아닙니다. 헤헤) 아니, 누가 책을 놓고 갔는데. 근데, 찾아가지를 않아요? , 그러니까 좀 됐는데. 그냥 책도 아니고 대여책이야. 대여책이요? 혹시 책 제목이 뭘까요? 무슨 무슨 충동? 뭐더라? 잠깐만요. 여기에, 아니 여기 있다. 뜨아아아아아아악!!! 어머, 이건!!!


 

내 책이다. 이 책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도서관에서 대출한 후 잃어버려 집을 홀딱 뒤집고, 도서관 3층을 샅샅이(내가) 찾아보았으나, 결국 찾지 못해 도서관에 변상한 그 책이었다. 근데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책 잃어버리고 어디서 잃어버린 줄도 모르는 정신 없는 이는 바로 나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미용실에 와서 책 꺼내는 사람은 좀처럼 없는데, 책 꺼내는 모습을 보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말씀하셨다고. 그 책을 읽고 페이퍼를 썼던 게 2년 전이다. 일년에 두 번 미용실에 오니까 3회의 미용실 방문을 스쳐 지나고, 이제야 비로소 이 책은 내게로 돌아왔다.

 

파마약을 바르시면서 원장님이 물으신다. 근데, 그게 무슨 내용이에요? 읽어보지도 않았네. 책이 있어도 읽지를 않아, 하하하. , . 그 책은 그러니까, 푸른 수염 이야기 현대판인데요. 돈 많고 능력 있는 남자가 가난한 여자랑 결혼해서, 잘해 주는 척 하면서 결국에는 여자를 억압한다는 이야기에요. (‘죽인다는 이야기는 뺐다) , 푸른 수염 이야기는 뭐야? , 그러니까, 푸른 수염 이야기는 동화 같은 건데요

 


참 예쁜 목이야.” 진정으로 생각에 잠긴 듯 부드럽게 들리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어린 식물의 줄기 같은 목.”


그가 내 뒷목에 키스할 때 그의 부드러운 수염이 스치는 것과 축축한 입술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나는 내가 걸친 의상 중에서 목걸이만 남겨야 했다. 그 날카로운 칼날이 내 드레스를 두 조각냈고 옷은 땅에 떨어졌다. 참수대의 틈새에서 자라는 작은 초록 이끼가 내가 온 세상에서 바라보는 마지막 광경이 될 터였다.

그 무거운 칼이 휙 하는 소리. (66)

 



원장님께 더 자세한 내용을 말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 해야하나. 아무튼 2년 만에 재회한 책을 꼭 끌어안고 발걸음도 가볍게 집으로 돌아왔다. 10센티 넘게 머리카락을 잘랐지만 스타일이 똑같으니 몇 개월 전의 나로 돌아온 듯한 기분인데, 오전 내내 엄마를 기다린 온클 장인 아롱이는 푸들 아니냐며 격하게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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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1-06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단발머리님이 어마어마한 곱슬이라니,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그러나 책에 대한 일화를 읽으며, 아, 모든 것은 결국 자기가 있어야할 자리가 어딘지 알고 찾아가는구나... 했어요.

단발머리 2020-11-06 14:31   좋아요 0 | URL
저는 극 강력 곱슬로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밀이에요!!!
책을 다시 찾아서 너무 반갑기는 해요. 저는 모른 척 했는데, 그 책은 저를 찾아왔네요. 호호호

다락방 2020-11-06 14: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맞다, 그리고요 단발머리님.
제가 오늘 점심먹으면서 영화 [북 오브 러브]를 봤거든요. 여주인공이 탕웨이인데 긴 웨이브 머리에요. 그녀랑 채링크로스 84번지 책의 인연으로 편지를 주고 받던 남자가 그녀를 만났을 때 ˝난 당신이 단발머리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와, 너무 단발님 생각났어요! 단발님 우리 모임에서 만났을 때 멤버들이 단발머리님 머리가 심지어 제일 길다고 했었던, 바로 그 날이요! 아, 너무 좋아!! >.<

단발머리 2020-11-06 14:34   좋아요 1 | URL
저도 제가 단발머리인줄 알았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중학교 때 학칙 때문에 엄격한 의미의 짧은 단발머리인 적이 있었죠. 전 3년 동안 버섯돌이와 바가지를 오갔습니다. 많이 어두웠죠. 그 때가 저의 흑역사이고, 중세이고, 암흑기네요. 제 머리가 좀 길기는 하지만, 일단 단발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기는 합니다. 긴 단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좋은 날이었죠. 좋은 시절이었어요. : )

얄라알라 2020-11-06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재밌어요. 읽다 계속 큭큭

단발머리 2020-11-06 21:51   좋아요 0 | URL
잠깐 작은 웃음이라도 전해드렸다면, 그것은 저만의 큰 기쁨입니다 ㅋㅋㅋㅋㅋㅋ

2020-11-06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06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이 2020-11-06 1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극강렬곱슬이라니..... 더덕단에는 너무 양파 같은 이들이 많군요..... 오늘도 새로운 모습! 중고딩때 단발님 사진 보고싶다 ㅋㅋㅋㅋ

단발머리 2020-11-06 21:52   좋아요 0 | URL
저의 양파껍질 탈곡은 계속되오니 앞으로도 많은 사랑 부탁드려요.
큰 기쁨 필요하실 때 언제든 알려주세요. 와인 한 병의 위로와 기쁨을 제 중딩 사진으로 전해드리리!!

반유행열반인 2020-11-06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악성곱슬로서 머리 모양의 고충 공감되요. 미용실 가면 단발...안 해줘요. 파마...안 해줘요. 온리 매직만 해주네요. 그리고 저도 지금 책 이게 뭐라고 읽는 중이에요 ㅋㅋ여러 가지 겹치는 페이퍼 ㅋㅋㅋㅋ

단발머리 2020-11-06 21:54   좋아요 1 | URL
단발 안 되고, 파마 안 되고, 네네... 저는 염색도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ㅎㅎㅎㅎ 스타일이라고 할 수도 없는 스타일을 원치않게 고수하게 되네요. 저도 지금 <책, 이게 뭐라고> 읽고 있어요. 장강명이랑 좋은 밤 되시어요!

stella.K 2020-11-06 2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곱슬인데. 새삼 반갑네요.
어렸을 땐 곱슬이 그렇게 싫었는데 나이들고보니 파마 안 해서 좋더군요.
저는 계절이 한 번씩 바뀔 때마다 한 번씩 가죠.
염색은 두 달에 한 번 정도하는데 그럼 머리가 그나마 좀 차분해져요.
저는 장도연 같은 커트 머리 해 보는 게 소원인데
다들 말리더군요. 관리 어렵다고. 아무래도 이번 생은 어렵지 싶어요.ㅠ

단발머리 2020-11-06 21:57   좋아요 1 | URL
오늘 곱슬 고백의 밤인가봐요. ㅎㅎㅎㅎㅎㅎ 제가 stella.K님 댓글로 추정하건대 단정한 곱슬이신거 같아요. 그래서 염색으로 차분해지시는 것 같아요. 그 점, 진심으로 매우 축하드립니다. 장도연 스타일도 너무 이쁘죠. 하지만 말리시는 이유가 있더라구요.
저는 이번에 미용실 갔을 때는, 짧게 치면 윤택 같아진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ㅠㅠㅠ

퍼론 2020-11-06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악성곱슬에 새치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흰머리로 미용실 문제적 고객입니다

단발머리 2020-11-06 21:58   좋아요 0 | URL
전 초강력 악성 곱슬이지만 아직 흰머리의 기세가 그렇게 당당하지는 않습니다.
저도 문제적 고객이라 들어갈 때 나올 때 폴더 인사를 미용실 원장님께 올립니다. 왠지 모르게 화이팅!입니다!

2020-11-07 0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07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 2020-11-08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파마가 금방풀리는 직모.. 왜 여기서 tmi??? ㅋㅋㅋ 2년만에 재회한 책의 인용부분 괜찮은데요? ㅎㅎㅎ 피로물든 방이라 ㅋㅋ 킵킵!

단발머리 2020-11-16 10:46   좋아요 0 | URL
제 방에서 직모는 질투의 대상인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특별히 쟝쟝님만 봐줍니다.
<피로 물든 방>의 첫번째 추천인이 마거릿 애트우드에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지요.
 




















회사에 다닐 때니까 백 만년 전 일이다. 옆자리의 J씨는 나보다 1개월 먼저 들어왔지만 수습 기간도 끝나지 않은 신입이라서 친하게 지냈다. 같은 신입이어도 J씨는 회사 생활에 아주 잘 적응한 터여서, 마음 편히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었는데, 이를 테면 입사는 확정되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입사 전, 부서 야유회에 따라가서 즐거운 카드놀이 시간에 부장님, 차장님, 과장님 돈을 몽땅 따버렸다는 소문이 있었다. 위아래로 모든 사람들과 허허허, 사람 좋은 웃음을 주고 받곤 했다.

 

일이라는 게 오래했다고 다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케이스도 종종 나오는 것이라서, 당시로서는 아주 기초적인 건이었겠지만, 과장님께 직접 여쭤 보기 어려운 것들은 J씨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그러면 컴퓨터에서 해당 서식이나 폼을 뽑아 주기도 했는데, 같이 J씨 모니터를 쳐다보다 이런 폴더를 보게 됐다. ‘나의 꿈 나의 미래’.

 

사람마다 정렬하는 법이 제각각이겠지만 우리 부서는 보통 국가나 고객별로 폴더를 정리하고 또는 한글, 영문, 이런 식으로 폴더를 만드는 편인데, ‘나의 꿈 나의 미래는 일단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걸로 보였다. 나의 꿈 나의 미래? 비웃으려고 웃은 건 아니지만, 일단 웃기는 했고,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J씨도 적잖이 부끄러워했다. 그 파일도 좀 보여달라고 반은 진심으로, 반은 농담으로 말했는데, J씨는 나의 꿈 나의 미래를 클릭하지 않았다.

 


과장님 리뷰를 마치고, 그날 중으로 나갈 서류를 영문팀에 맡기고 나면 그 서류가 돌아올 때까지는, 그러니까 4 50분부터 5 30분까지는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여유롭게 오케이 사인과 함께 돌아올 서류를 기다리는 시간이면 조랑조랑 옆자리의 J씨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특히 자주 하는 이야기가 로또 이야기였다. J씨는 로또가 당첨되었을 때, 의외로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면서, 내게 로또가 당첨되었을 때의 행동 방침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했다. 첫째는 당첨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책상 서랍에 로또를 넣어놓고 평소와 똑같이 출근하고 퇴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니까, 그 로또가 이 서랍 안에 있는 거에요. 이야아! J씨는 키가 180센티미터에 가깝고 큰 덩치에 하얀 얼굴의 호감형이었는데, 로또 이야기를 마치고 이야아! 하고 외칠 때는, 생후 8개월의 아직 소근육이 발달하지 않은 영아가 팔 전체를 휘두르듯 양팔을 휘저었다. 이야아!!

 

 

J씨에게 있었던 나의 꿈 나의 미래가 내게도 있었던가. 나는 없었던 것 같다. 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 잘하는 것도 없었다. 수학을 못 해서 문과에 갔고, 중학교때부터 찜해 두었던 학과에 갔지만, 취직 하기 직전까지 내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전혀 알지 못 했다. 추상적으로도 구체적으로도, 내 삶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 알지 못 했다. 상상조차 못 했다.

 


우리가 왜 오래 건강하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기다리는 사람이 없고, 기다리는 저녁, 기다리는 세상이 없다면요. 지키고 돌봐야 할 것이 없다면요. (『아무튼, 메모』, 119)


 

이 문단은 몸에 대한 이야기지만, 나는 이것을 꿈에 대한 이야기로 읽는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는 것. 그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는 뜻이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뜻이다. 꼭 해야할 일이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일. 아직은, 하고 싶은 일.

 


몇 년 전, 내 인생에 페미니즘이라는 폴더가 생겼다. 차곡차곡 여성의 '말들을 모았다. 저번주부터는 내 인생에 프랑스어라는 폴더가 생겼다. 파일 한 두개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중이었는데, J씨처럼 나도 폴더로 만들어 보았다. 폴더명으로 뭐가 좋을까. 나의 꿈 나의 미래는 너무 거창하다.

 

 

나의 꿈 나의 취미

나의 꿈 나의 공부

나의 꿈 나의 필기

나의 꿈 나의 불어

나의 꿈 나의 오늘

 

아니면, 나의 꿈 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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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1-05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멋있어. 너무 멋있어. 오늘 글 너무 좋은데 좋으면서 멋있어. 하트 뿅뿅입니다! ♡.♡

단발머리 2020-11-05 14:27   좋아요 0 | URL
으허허허허허허허허허! 부끄럽네요!

비연 2020-11-05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불어! 저도 늘 배워보고 싶다 생각만 하는데. 완전 멋짐뿜뿜 단발님!

단발머리 2020-11-05 14:35   좋아요 0 | URL
제가 시작은 했는데 사실 걱정이 태산입니다. 멋져질려면 한 2년은 꾸준히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요? ㅎㅎㅎ

rendevous 2020-11-05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더들이 채워지는 만큼 삶도 충만해질 것만 같은 기분을 들게 하는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

단발머리 2020-11-05 15:43   좋아요 1 | URL
제가 워낙 알라딘을 애정하는지라 개인적인 글을 올릴 때가 자주 있는데, 오늘이 그 날이네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자냥 2020-11-05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글 정말 하트 100개에요.
단발머리 님 인생의 ‘페미니즘’ 폴더- 조용히 응원합니다.

단발머리 님 글이 좋아서 <아무튼 메모>까지 읽어 보고 싶어지네요(전 사실 정혜윤식 글쓰기 타입 안 좋아하거든요;;; 하하하하)-

단발머리 2020-11-05 17:08   좋아요 1 | URL
보내주신 하트와 응원 매우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잠자냥님! (와락) 제가 잠자쟝님이라 불렀는데도 손절하지 않으시고! (와락)

전 정혜윤을 처음부터 좋아했네요. 사회참여 글쓰기도 너무 멋지다고 생각하고요 ㅎㅎㅎㅎㅎㅎ

다락방 2020-11-06 14:12   좋아요 1 | URL
저도 정혜윤의 글쓰기 타입을 안좋아해서 잠자냥 님의 댓글이 너무 반가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런 거 반가워하기 ㅋㅋㅋㅋㅋ)

수이 2020-11-05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 폴더도 아무튼 메모도 프랑스어라는 폴더도 이방인도 모두 좋기만 해서 단발머리님이 커다란 하트로 보일 지경입니다.......

단발머리 2020-11-05 18:45   좋아요 0 | URL
에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 그렇습니까? 그렇게 전 하트부자가 되었습니다!

2020-11-05 1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06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혜윤의 책은 이번이 네번째다.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침대와 책』 그리고사생활의 천재들』을 읽었는데, 그녀의 책을 읽고 페이퍼를 썼던 게 2013년이었으니까, 그 때에도 이런 식으로 화려하면서도 발랄한 산문을 구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싶어 나는 좀 신기하고 의아했다. 저자 소개에 따르면 정혜윤은 마술적 저널리즘의 세계를 개척하고 싶다고 하는데,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마술적 저널리즘.

 


2020년 한 해가 이렇게 다 지나갈 듯 싶어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에 데일리 노트라는 걸 적어봤다. 시간별로 하루 종일 내가 했던 일들을 적어보는 거였는데, 6시 아침기상, 6 30분 아침 식사(1), 8시 아침 식사(2), 9 30분 설거지, 10시 빨래 및 알라딘, 11시 아침독서, 이렇게 적다가 매일 반복되는 식사 준비, 빨래, 설거지, 청소 그리고 간간히 이루어지는 독서를 빼놓고 보니, 마땅히 쓸 말이 없어 결국에는 아침, 점심, 저녁 메뉴만 남아 버려 데일리 노트가 식단표처럼 되고 말았다.

 



사실 우리의 운명은 늘 변화 중이다. 앞으로 다가올 나의 인생이 내 영혼의 어떤 반응일 가능성은 적지 않다. 우리는 대체로 과거는 짐스러워하고 미래에는 눈을 감는다. 그러나 메모를 한다는 것은 미래를 생각하고 그 미래를 위해 힘을 모으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가장 좋은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다고 믿는다. (43)

 


정혜윤은 메모함으로써 미래를 생각하고 그 미래를 위해 힘을 모으라고 했는데, 나의 하루는 먹고, 자고, 그리고 꼭 해야만 하되 하지 않으면 티가 나는 일들로 이루어져 있어, 오늘을 어떻게 의미 있는 날로, 역사적인 날로 만들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올 한 해는 개인인 나로서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도, 아니 전 세계적으로도 의미 있고, 중요한 한 해였다. 2월에는 가족들과 터키를 다녀왔고, 3월에는 이사를 했다. 상반기에만 아이들 개학이 3번 이상 연기되어 아이들이 계속 집에만 있었고, 여름 휴가도 가지 못했다. 8월에는 부산에 다녀왔고, 추석에도 옴짝달짝 못 했다. 평생을 교회--학교밖에 모르고 살던 내 인생에 처음으로 교회가 빠져버려, 교회 의자에 앉아 예배하던 시간마다 허전한 마음을 흘려 보내야만 했고, 그리고 이렇게 찬 바람이 부는 가을 앞에 섰다.

 

초반에 확진자가 많아 걱정하기도 했지만, 마지막 한 명까지 찾아내는 끈질긴 확진자 추적과 국민들의 협조로 도시 봉쇄나 셧다운 없이 우리나라는 코로나에 잘 대응하고 있다. 감히 세계 최고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BTS가 빌보드차트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빅뱅, 엑소, 세븐틴, 아스트로, 슈퍼주니어, 샤이니, 인피니트, 블락비 등등 우리가(아니지, 내가) 보기엔 너무나도 비슷한 보이그룹을 가진 우리로서는 BTS가 수많은 보이그룹 중의 하나일지 모르지만, 현재 BTS는 전 세계 최고, 최대 음악 시장에서 가장 탐내는 아티스트가 되었다. 우리의 예상보다 BTS는 훨씬 더 유명하고, 훨씬 더 대단하다.  

 

이만큼이 과거의 기록으로서의 메모이다. 사건과 사실의 기술로서의 메모. 하지만 정혜윤이 말하는 꿈의 기록으로서의 메모 역시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꿈은 결심의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또한 실패의 기록일 수도 있을 테니까. 꿈만큼 실패도 우리 인생에서는 소중하니까.

 


 

아이와 함께 치과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이 책을 읽었다. 아이는 게임에, 나는 책에 빠져서 내리는 역을 지나쳐 버렸다. 아이에게 한참 잔소리를 하고, 반대방향 열차를 타고 돌아왔다. 세일행사하는 서브웨이 터키 샌드위치 2개를 사고, 빼빼로 3개를 사면서 아이와 화해했다. 책을 읽으면서, 얼마 전 속상했던 일들을 정혜윤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해주는 문단을 만나 돌아오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나도 메모를 해야겠다. ‘아무튼, 메모의 길로 들어서겠어. 작은 결심을 하기도 했다.

 

 



어제 밤, 그리고 오늘 하루 종일 마음을 아프게 했던 박지선씨의 일을 말하고 싶다. 그녀의 죽음이, 그녀와 그녀 어머니의 죽음이 안타깝다. 고통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니까. 죽음이라는 커다란 문 앞에서 당신 마음을 헤아린다는 말, 이해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떠나버린 그녀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으니, 그녀 덕분에 웃을 수 있었던 시간조차 어디로든 갈 곳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꼭 그녀의 이름을 여기에 남겨두고 싶다. 여기 내 방, 내 서재, 내 페이퍼에

 


 

멋쟁이 희극인 박지선씨, 고마웠어요.

이제 쉬어요. 이제 아프지 말고 편히 쉬세요.



어느 날 정말로 ‘갑자기 결심했다. 달라지기로, 뭔가를 하기로, 그만 초라하게 살기로, 제일 먼저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떠보는 일을 그만뒀다. 누가 나를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지 관찰하는 일도 그만뒀다. 누군가 나를 좋게 생각한다고 "넌 내게 딱걸렸어!" 기뻐하는 일도, 나쁘게 생각한다고 앙심 품는 일도 그만뒀다. 남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걱정하는 일도 그만뒀다. 삶이 간결해져서 좋았다. 그 대신 앞으론 뭘 할까만 생각했다. 세상 어디선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거기 가서 그 일을 잘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세상이 필요한데 세상이 과연 나를 필요로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세상에 관심을 가질 마음이 있는데 세상도 나에게 관심을 가질 마음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건 마치 나에겐 사랑이 필요한데 누가 나를 사랑해줄지 알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그때 당시 나는 더는 무의미하게 살고 싶지 않았고, 무의미하게 살지 않은 것, 그것이야말로 행복이라고 믿었다. - P32

우리는 파도를 견뎌낼 것이다. 우리는 작은 새들이 거친 바닷바람 위로 가볍게 놀듯이 떠오르는 것을 배울 것이다. 우리는 고래처럼 멀리 갈 것이다. 도리가 없지 않은가? 다른 방법이 없다. 하기로 한 일이 있다면 세상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해야 한다. 지금 해야 할 일, 그 일을 잘해내야 한다. 너무 큰 기대는 말고, 거창한 의미 부여 없이. 예측불허를 견디며. 그일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가 해야 한다고 믿으며, 나는 네루다의 말처럼 이런 "슬픈 눈동자를 보면서 꿈꾸는 법을 배웠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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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1-04 0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에게 늘 알라딘이 있지만 단발님과 제가 본격 알라딘을 하는 시간은 다르네요.
많은 것들이 이번 해에 변했지만 여성들의 죽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제만 해도 또 유명 가수의 불법촬영에 한 여성이 자살을 선택했죠. 남자들이 아무리 감성 쳐바른 가사를 써내서 노래한다해도 여성들을 범죄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게 정말 구역질나는데 이게 변하질 않네요.
이번 해가 전체적으로 우울하지만 요 며칠은 특히 더 우울해요.

우리 서로 격려하면서 잘 지내봅시다, 단발머리님. 남은 2020년도 그리고 앞으로 남은 시간들도요.

단발머리 2020-11-04 09:24   좋아요 0 | URL
기사 읽고 나니 너무 암담하고 답답하더라구요. 그 남자가 특별히 나쁜 사람이야라고 말하고 싶은데 이런 경우가 왜 이렇게 많은지 곰곰히 생각하면 더 우울하구요 ㅠㅠ 연인을 믿을 수 없는 세상이라니....

우리 서로 격려하면서 잘 지내요, 다락방님. 그래도 정신으로요. 그래도, 다시 힘을 내고, 그래도, 다시 서로를 격려하면서요.

2020-11-04 0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04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05 1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05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콤플렉스』를 읽을 때는 프로이트에 대해 좀 넓은 마음을 갖게 되었더랬다. 여성성과 남성성이 고정된 정체성이라기 보다는 변화가능하다는 입장(103)이나 성욕이 가진 종족 번식 이상의 의미를 주장(107)했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케이트 밀렛의 주장을 들어보면 그게 아니다. 프로이트에 대해 다시 뾰족해질 수 밖에 없다.

 


여성주의자들에게 단골로 공격받았던 남근 선망 이론. 반혁명기 페미니즘 반란에 이용되었던 가장 해롭고 파괴적인 무기인 남근 선망 이론은 결과적으로 남근을 결핍한 여성은 문명을 이룩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나아갔다. 프로이트가 여성성의 세 가지 특징으로 꼽은 수동성과 마조히즘, 나르시시즘은 수동적인 여성만이 정상임을 강조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문단은 여기다. ‘여성성전통적 역할에 대한 가부장제 환상이 종교를 통해 강화되었던 시대가 지나고, 새로운 시대에는 그 역할을 과학이 맡았다는 주장. 새로운 시대의 스피커는 과학이었다. 객관성과 중립성이라는 옷을 입은 과학.

 


실제로 가부장제 사회 질서와 성 역할, 남성과 여성에 대한 기질적 차별화 등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종교에서 나오지 않았다. … 낡은 태도가 새롭게 정식화된 것은 과학, 특히 심리학과 사회학, 인류학과 같은 새로운 사회 과학에서부터였다. … 보수적 사회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리고 사회생활에서 혁명적 변화를 수행하는 데서 난처해하고 꺼리는 대중을 만족시키기 위해, 새로운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과학이라는 최신식 언어로 별개 영역이라는 낡은 원칙을 다시 포장해야 했다. 이들 중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 프로이트는 의심의 여지없이 당대 성 정치학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강력한 반혁명적 힘이었다. (355)

 


개론서일 뿐이지만 프로이트를 2권 읽고 나니, 소설의 몇몇 장면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한편으로는 의심했고, 또 한 편으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인데, 프로이트를 읽고 나서는 그 장면들이 새롭게 보인다. 이를 테면, 남자와 여자, 너와 나 사이의 가장 중요한 용무는 섹스뿐이라고 그렇게나 목놓아 부르짖던 필립 로스의 『죽어가는 짐승』.




 












꼭 필요한 매혹은 섹스뿐이야. 섹스를 제하고도 남자가 여자를 그렇게 매혹적이라고 생각할까? 섹스라는 용건이 없다면 어떤 사람이 어떤 다른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매혹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런 용건 없이 누구에게 그렇게 매혹될까? 불가능하지. (28)

 

필립 로스는 프로이트주의자가 확실하다. 나 혼자 확신한다.

 
















아니면, 『속죄』의 서재 scene. 소설가를 꿈꾸는 열 세살 소녀 브리오니는 조용한 서재 안쪽에서 언니 세실리아와 동네오빠 로비의 알 수 없는 행동을 목격한다. 충격을 받은 그녀는 그 날 밤, 단편적인 사실과 상상력을 교묘히 조작해(알라딘 책소개) 로비에 대해 악의적으로 말하게 되고, 이 일 때문에 로비는 평생 동안 고통받게 된다. 부모 사이의 성교가 보편적으로 가-피학적으로 인식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브리오니는 언니와 동네오빠와의 정사 장면을 primal scene (원색 장면; 부모의 성교 장면에 대한 아동기 회상이나 환상)으로 인식한 것은 아닐까. 나 혼자 추측한다.

 















“And so the lion fell in love with the lamb…,” he murmured. I looked away, hiding my eyes as I thrilled to the word.

“What a stupid lamb,” I sighed.

“What a sick, masochistic lion.” (274)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인이라서, 에드워드는 스스로를 마조히즘 사자라 칭한다. 사랑을 얻기 위해 고통을 선택하는 마조히즘 뱀파이어 사랑장인 에드워드. 두 사람 오래오래 행복하길. 나 혼자 흐뭇하다.

 


프로이트를 읽으며 소설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나 싶었는데, ‘이달의 인물은 '푸코'라고 한다. 그렇다면 뭐, 나는 푸코에게 간다. 성큼성큼은 아니고 살금살금 간다. 살금살금 푸코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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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0-11-01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꺄악 다들 시작하신 겁니까!!! 쇼님도 단발머리님두!!!

단발머리 2020-11-01 21:19   좋아요 0 | URL
아니요, 아직입니다. 그니까 이 페이퍼는 푸코를 읽고 있다,가 아니라, 푸코에게 가려고 합니다,라는 예고 페이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0-11-01 21:32   좋아요 0 | URL
그럼 저두 한 장 쓰고 잘까요 ㅎㅎㅎㅎ

단발머리 2020-11-01 21:33   좋아요 0 | URL
네네 네네네! 아주 좋은 생각이네요🤗

han22598 2020-11-01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죄의 브리오니..머리속에 오랫동안 남은 캐릭터였어요. 그런 생각도 해봤어요. 브리오니가 여자가 아니고, 남자 였더라도 자신이 흠모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때, 브리오니 처럼 행동했을까? 그리고 부모의 성교를 피-가학적으로 관계로 이해하는 것도 남자,여자 동일한 걸까요? ..궁금하면 프로이트 책을 읽어야하는 건가요?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0-11-04 09:33   좋아요 1 | URL
브리오니가 남자였다면 세실리아를 흠모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랬다면 역시나 충격적이겠죠... 원색 장면에 대한 내용은 저도 팟캐스트에서 지나가는 길에 들은 거라 잘은 모르겠는데요. 프로이트 저작 중에 <늑대인간>이라고 있잖아요. 그 사람이 그런 증후군이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프로이트 책 많이 읽으시고 나서 han님이 저 알려주세요^^

2020-11-02 1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04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0-11-02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로스가 프로이트 주의자 라는 단발머리님의 추측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휴먼 스테인의 필립 로스는 제게 너무나 실망이었거든요. 글을 너무 잘쓰는데 안티페미니스트..가 드러나는 소설이었죠. 프로이트 주의자, 라고 하면 그 모든게 연결이 되지 않나 싶어요.

성정치학도 많이 읽으셨네요, 단발머리님. 아아, 저는 단발머리님의 독서를 대체 어떻게, 언제 따라잡을 수 있단 말입니까! ㅠㅠ

단발머리 2020-11-04 09:37   좋아요 0 | URL
다시 필립 로스를 읽게 되면 좀 다르게 읽힐 거 같아요. 글을 잘 쓰는 안티페미니스트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뭐.... 안타까울 뿐이죠.
저는 다락방님의 독서를 좀처럼 따라잡을 수 없는 걸요. 앞으로도 따라 잡을 수 없을것 같고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