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시간 - 아픔과 진실 말하지 못한 생각
조국 지음 / 한길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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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평생 진영논리에 함몰되어 박사모와 같은 레벨로 불리며 살 것을 안다. 충분히 예상한다. 반면에 똑똑하며 사리 분별이 정확한 중도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의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그때 그때 다르게 투표할 것이다. 지난번에는 박원순이, 이번에는 오세훈이 서울시장이 될 수 있었던 건 중도의 이러한 현명한결정 때문이다. 나처럼 한결같은 마음으로 한쪽만을 애정하는 집토끼들의 생각이란 건, 뭐 들어볼 필요도 없다. 그래서 이 글은 들어볼 필요도 없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다. 그렇다는 걸, 나도 알고 시작한다는 뜻이다.

 


 

조국의 시간을 읽었다. 빨리 읽고 싶기도 했고, 읽기 싫기도 해서 천천히 사고, 책이 도착해서도 좀 미루고 있다가, 지난 주말에야 간신히 손에 들었다. 우리나라를 반으로 갈라놓았던 회오리 같던 시간을 돌아보고 다시 돌아본다.

 

 

도대체 검찰개혁이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세상에, 검찰개혁이 나랑 무슨 상관인가. 나는 큰 죄를 짓기에는 너무 평범한 사람이 아닌가. 검찰에 불려 가기엔 너무 소심한 사람 아닌가. 검찰개혁이 완수된다는 게 무슨 뜻인가. 아니, 검찰을 개혁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 김영삼 정부 이후 문민정부이고, 대통령이 검찰총장을 임명하는 이 시대에, 왜 검찰을 개혁해야 하는가. 왜 검찰이 개혁의 대상인가. 조국의 법무부 장관 임명과 조국의 법무부 장관 취임, 그리고 조국의 법무부 장관 사임의 전 과정에서 보인 검찰의 대대적인 저항은 조국은 안 된다는 확신에 대한 답이다. 조국이면 절대 안 되는데, 왜냐하면 조국은 평생 검찰개혁을 외쳤기 때문이다. 이론과 실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대중적 지지를 거머쥔 똑똑한 서울대 교수이기 때문이다. 그의 개인사가 문제가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안다. 이 정도의 압수수색과 이 정도의 전 방위적 신상 털기식 수사라면 어느 한 사람 괜찮을까마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모두 다 자신은 조국보다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래서, 검찰개혁이 나랑 무슨 상관인가. 조국은 발기발기 찢어졌고, 자기 몸 하나 추스르기도 어려운데. <조선일보>는 성매매 기사에 조국과 그의 딸 일러스트를 함께 넣어 패륜적 악행을 일삼고, ‘, 그래? 미안!’ 사과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단군 이래 언론의 최고 먹잇감이었던 조국과 그의 가족은 그렇게 조리돌림 당해도 괜찮은 이유가, 검찰개혁인데. 도대체 검찰개혁이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조국과 그의 가족은 검찰과 언론과 야당의 전방위적 공세에 더해 여론의 뭇매를 맞아야 했단 말인가.

 

 

나는 조국에 대한 검증과 압수수색과 신상털기가 지나쳤다고 생각한다. 임은정 검사는 도를 지나친 정도가 아니라, ‘조국 죽이기’, ‘조국 사냥이었다고 말한다.

 


타깃을 향해 신속하게 치고 들어가는 검찰권의 속도와 강도를 그 누가 견뎌낼 수 있을까요. 죽을 때까지 찌르니, 죽을 밖에요. 수사가 사냥이 되면, 검사가 사냥꾼과 몰이꾼이 되면, 수사가 얼마나 위험해지는지를 더러 보아왔습니다만, 표창장 위조 혐의에조차 사냥꾼들이 저렇게 풀리는 걸 보며 황당해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겠지요. (158, 임은정 검사 페이스북, 2019 10 14)

 


오슬로 대학 박노자 교수의 말도 옮긴다.

 


재작년 연말에 이미 누적된 조국 기사량100만 건 정도였습니다. 최순실 관련 기사량의 10배나 된 거죠. ‘국정농단도 아니고 그저 한 가정의 문제임에도 보수, 극우 언론들의 과다한 왜곡, 편파 보도는 거의 테러수준이었습니다. 본인과 특히 가족들이 감당해야 하는 그 부담을 생각하면 절로 동감을 하게 됩니다. ‘문제에 대한 지적을 당연히 할 수 있고 해야 하지만, ‘조국 대전국면에서의 융단 폭격식언론 보도들은 인권 침해적 요소들이 대단히 심각했습니다. 이 조리돌림은 한국 언론사의 수치스러운 기억이 될 겁니다.” (180, 박노자 교수 페이스북, 2021 5 7)

 


『시사인』 고제규 편집장의 말이다.

 


윤석열 검찰이 조국 전 장관을 허위작성공문서 행사, 업무방해, 뇌물수수 등 모두 12개 혐의로 불구속기소했다. 8 27일 강제 수사에 들어간 지 126일 만에, 100명이 넘는 수사진을 투입한 결과다. 이명박 전 대통령 수사(88)를 넘어 박근혜 전 대통령 수사(151)에 버금가는 기간이고 수사진 규모다. … 수사가 길어질수록 검찰의 목적은 눈에 보였다. 조국 구속. 결과는? 돌팔이 수준의 수사라는 걸 누구보다 검사들이 가장 잘 알 것이다. 100여 명이 투입되어 126일을 수사하고, 수사 타깃이었던 조국 전 장관을 구속조차 못 시켰다. 검찰로서도 수치라고 평가할 것이다. (167, 고제규 편집장 페이스북, 2019 12 31)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자는 이에게 다른 사람이 묻는다. 너는? 너는 어떤데? 나는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도덕성을 보수보다 진보에 더 엄격하게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서 보수는 마음대로 타락해도 괜찮다는 것인가? 걔네들은 원래 그런 애들이니까. 그러니까 괜찮다는 뜻인가. 군인을 동원해 시민들에게 총을 발사하고 국가의 부를 개인적으로 착복해 3대로 이어가는 전직 대통령은 노년에도 마냥 행복하고, 친구에게 후원받은 돈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부끄러워하던 이는 세상을 등졌다. 매섭게 몰아칠 질타와 위선적이라는 비난과 그리고 실망했다는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자신의 실수가 부끄러워서 그래서 세상을 버렸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는 사람에게 자격이 필요한가. 물론이다. 지도자에게 그에 맞는 도덕성을 요구할 수 있는가. 물론이다. 막대한 권한을 위임받아 그 권한을 행사하는 자리에 앉게 될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비전을 물을 수 있는 자격이 언론에는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완벽한 사람이어야 하는가. 나는 조국 국면에서 사람들이 조국에게 완벽을 요구했다고 생각한다. 완벽하지 않으니 안 된다는 것인가. 완벽하지 않으니 죽으라는 말인가. 이 모든 사태는 검찰 때문이다. 국민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임명한 법무부 장관이 자기 생각에부적격하다고 생각한 검찰은 총장부터 말단검사까지 한 몸이 되어 조국과 그의 가족을 죽이려 들었다. 검찰 개혁이 싫어서. 그리고 언론이 한 편이 되었다.

 

검찰 개혁을 주장하려는 사람은, 그의 가족과 친척과 친구는, 어처구니없는 중상모략에 시달려야 하고, 검찰의 피의사실 유포를 감당해야 하고, 아버지의 비석이 언론의 기삿거리가 되어야 하고, 이혼했지만 사이좋게 지내는 동생의 개인사가 모두 공개되어야 하고, 자녀의 중2 시절 일기장이 압수당해야 하고, 집에서 나온 쓰레기봉투를 뜯어 그 안을 살피는 기자들에게 아무 말 못 해야 하고, 20대 여성이 혼자 사는 집에 늦은 밤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깡패 같은 기자들에게 제발 가 달라 부탁해야 하는가. 그것이 온당한 일이었나.   

 


그래서, 내가 궁금한 건 이거다. 만약 어떤 사람이 우리 사회를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자고, 우리 사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한다고 말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완벽해야 하는가. 완벽한 자격을 갖춘 사람만이 더 나은 사회와 삶을 위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인가. 자신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만 말할 자격이 주어지는가. 자신의 삶, 가족, 친구와 관련 없는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하는가. 우리 집 아이들은 학원에 다니지 않으니까, 이 나라의 미친 사교육과 선행 학습은 나와 상관이 없는가. 우리 집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으니까, 세월호 단원고 아이들을 추모해서는 안 되는가. 우리 부모님들은 건강하고 행복하시니 노인 복지에 대해서는 말하면 안 되는가.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들 잘 키우고, 내 새끼들, 내 친구들하고만 행복하게 하하호호 잘 살면 되는가. 이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니까. 나는 검찰에 불려 갈 일은 없을 테니까. 이건 나와 상관없는 일인가.

 

 

검찰에 불려갈 주제도 안 되는 나는, 여러 밤 고민하고 또 생각한다. 바른말을 하는 사람, 감히 완벽하지도 않은 인간인 주제에 그런 말을 하는 사람, 감히 검찰에 맞서려는 사람은  조국처럼 된다. 그 사람이 우리나라 최고의 형법 전공 법학자여도, 서울대 법대 교수여도. 이렇게 처참하게 짓밟힌다. 조국처럼 만신창이가 된다. 검찰개혁의 이유와 증거가 바로 조국이다. 조국 전 장관이 그 증거다. 

 

언론이 조국 펀드라고 대대적으로 떠들던 사모펀드재판건에서 대법원이 정경심 교수의 무죄를 확정했다. 언론에서 다루어 주지 않으니 사람들은 모른다. 그렇게 똑똑한 검사들이 밤낮으로 덤볐는데도 조국을 구속시키지 못 했고, 이제 남은 건 동양대 표창장 하나다. 동양대 표창장 하나가 작은 일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동양대 표창장이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보다 10배 중요한 일이라고 묻는 중이다.

 

 

대한민국이 반으로 갈라지는 모세의 기적 같은 시간 동안 내가 바랬던 건 딱 하나였다. 조국 전 장관이 죽지 않는 것. 검찰의 괴롭힘에 시달려 죽지 않는 것.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는 말을 남기고 죽지 않는 것. 지지 않는 것. 울지 않는 것.

 


가족 구성원 전체가 도륙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고통은 엄청났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았다. 죽을 수 없었다.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나의 흠결을 알면서도 응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생환(). 그것이면 족했다. (280쪽) 

 


그는 살아남았고, 살아서 이 책을 썼다. 죽지 않았다. 죽지 않고 살았다. 그것이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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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7-02 13:02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모든 것은 똑같은 상태에서 그가 검찰 출신이었다면 결과가 같았을지 의문입니다. 산장에서 접대영상 찍힌 ‘그 남자‘는 이제 고개 당당히 들고 다니고 출국 금지 시켰던 사람들이 타깃이 되고 있는 기막힌 상황은 ‘그 남자‘가 검찰 출신이기 때문이겠죠. 실상은 임명권자 위에 서 있는 권력.

단발머리 2021-07-02 14:54   좋아요 4 | URL
산장에서 접대영상 찍힌 그 남자의 무사 출국이 검찰이 원하던 바였겠죠. 그게 안 되니 출국 금지시켰던 사람들을 기소하는 것 아니겠습니다. 법 위에 있죠, 우리 나라 검찰은요...

잠자냥 2021-07-02 13:21   좋아요 8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조국에게 분노한 이유는, ‘모두 다 자신은 조국보다 깨끗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간 조국이 보여준 이미지와 너무 배치되는 일들이 벌어져서가 아닐까 합니다. 설사 그것이 표창장 위조처럼 가벼운(?) 행위라 할지라도, 조국이 그간 보여준 이미지와는 분명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기에 사람들이 배신감을 느낀 게 아닐까요. 그건 박원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성범죄는 아무리 그동안 민주당을 지지했어도 도저히 또 찍어줄 수는 없게 만든 것이죠.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은 없겠죠. 다만 그 터는 방식과 횟수는 진영을 떠나서 똑같아야 한다고 봅니다.
이제 윤석렬과 그의 가족들을 똑같은 방식으로 털면 됩니다. 기대하지는 않지만요...

단발머리 2021-07-02 15:01   좋아요 7 | URL
사실 위 책에는 조국 전 장관의 반성이 절절합니다. 저는 그런 사과가 과도하다고 생각하지만, 조국 전 장관은 자신 때문에 상처 입은 모든 사람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하고 있거든요. 표창장과 관련해서 (저는 위조가 아니라 위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간 보여준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으니 사람들이 분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 있지요. 문제는 그 정도가 ‘조폭 언론‘을 통해 어떻게 확대되었는지 꼭 살펴야한다는 겁니다. 보수가 잘못해서 벌점 얻으면 마이너스 1점이지요. 근데 진보는 잘못해서 벌점 얻으면 마이너스 1,300점입니다. 보수 언론도 진보 언론도 모두 다 함께 물어뜯으니까요. 보수언론은 보수에 관대하고 진보에 적대적이고, 진보언론은 보수에 적대적이고 깨끗한 척 해야하기에 진보에 적대적입니다. 진보 몰락의 기울기가 훨씬 더 가파르다는 걸 말하고 싶습니다.

윤석열과 그의 가족들을 똑같은 방식으로 털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도 조국처럼 핍박받아서는 안 됩니다.
다만, 조국 수사의 10분의 1로 4시간만 털어도 윤짜장은 고개 들고 다니지 못할 겁니다.

청아 2021-07-02 15:08   좋아요 3 | URL
아 단발머리님 마지막 말 공감1000입니다.

잠자냥 2021-07-02 15:12   좋아요 3 | URL
아니요, 저는 윤석렬만큼은 그만큼 똑같이 털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윤석렬이니까요. 남의 가정에 피눈물 나게 했으니까 똑같이 당해봐야 합니다. 그 집에 가서 짜장면도 시키고, 자식이 없으니 자식 일기장 대신 김명신 일기장이라도 털어야 할까요? 암튼 그런데 그 사람은 장모와 자기 대변인 사퇴 문제도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하더라고요? 전형적인 윤로남불입니다. 조폭개........아휴 말을 더 안하겠습니다....

단발머리 2021-07-02 18:08   좋아요 2 | URL
미미님/ 공감 1000 감사합니다^^

잠자냥님/ 윤석열도 조국만큼 털려야 된다는 말씀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 심정에는 완벽하게 동의합니다. 근데 피눈물 나게 하고 짜장면 시키고 일기장 빼앗지 않아도 말입니다. 그 집은 그냥 두어도 될 듯 싶습니다. 장모 판결에 대해 윤짜장이 ˝법 적용에 누구나 예외 없다˝라고 말했다죠. 누구나 예외 없고, 자기는 예외죠. 하늘 위에 사십니다, 그 분은.

곰곰생각하는발 2021-07-02 13:3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마테우스라는 알라디너가 이 리뷰를 보았으면 좋겠네요..

단발머리 2021-07-02 15:02   좋아요 1 | URL
하아... 글쎄요.

페넬로페 2021-07-02 13:4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일단 저도 잠자냥님의 생각과 같습니다
아마 그런 이유로 진보진영인 사람들도 조금 힘이 빠진건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요즘 약간의 니힐리스트 또는 아나키스트가 되어가는것 같아요^^

단발머리님께서 페이퍼에 적으신 문장들의 울림이 너무 좋네요~~
좀 울컥했어요^^
그러면서 안타까워요
조금만 더 잘하고 살 수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털어서 먼지나지 않는 사람없다는 논리가 아닌 다 가진 사람한테 거는 소시민의 작은 희망 정도입니다^^

단발머리 2021-07-02 15:04   좋아요 6 | URL
전 진영에 갇힌 사람이니까 진영에 갇히지 않는 분들의 의견이 좀 더 중립적일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삐뚤어진 한국의 언론이 그 ‘중립적‘인 판단의 근거가 되고 있다는 걸 모른 척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읽는 내내 저도 여러번 울컥했습니다. 힘든 독서였어요 ㅠㅠ

테레사 2021-07-02 14: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더 강하게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그래서 보수는 마음대로 타락해도 괜찮다는 것인가? 걔네들은 원래 그런 애들이니까. 그러니까 괜찮다는 뜻인가. 누군가 거악에 분노 안하고 위선에 더 분노하는 현재를 자신은 받아드리기..너무 힘들다고 말하더군요
. 특히 박원순은 구체적인 사실로 드러난 것이 현재까지 인권위의 성희롱혐의뿐임에도(물론 성희롱을 옹호해서는 안되지만요) 사실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말하는 것조차 2차가해라고 입을 닫게 하는 사람들은, 도저히 저로서는 감당이 안되네요.

단발머리 2021-07-02 15:09   좋아요 3 | URL
거악에 분노하지 않고 위선에 분노하는 현재를 받아들여야겠죠.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다고 말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들여다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그런 시선이 가능하도록 했던 검찰, 언론, 야당의 공조와 그 악행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잠자냥 2021-07-02 14:3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조국이 LA조선일보 상대 미국소송에서 승리해서 조선일보 폐간이 앞당겨지길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단발머리 2021-07-02 15:06   좋아요 3 | URL
네, 저도 잠자냥님 의견에 완전 동의합니다.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지는 경우를 실사로 꼭 보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조선일보는 그럴 자격이 충분하니까요.

blueyonder 2021-07-02 15:0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절절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단발머리 2021-07-02 15:04   좋아요 4 | URL
읽어 주시고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다 2021-07-02 15: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조국펀드가 무죄인데 왜 정경심이 징역 4년 받고 감옥에서 못 나오고 있는지요? 조국과 정경심 재판이 남아있고 사모펀드 쟁점도 여전한데요. 이제 남은 건 표창장 하나라는데, 과연 그럴까요?

그리고 언제부터 민주당 정권과 그 지지자들이 진보인가요? 이거야말로 기레기들의 프레임 아닐까요?

단발머리 2021-07-02 20:48   좋아요 3 | URL
사모펀드 관련해서 5촌 조카는 유죄이지만 정경심 교수는 무죄입니다. 대법원 판결이니 확정이지요. 사모펀드 쟁점은 끝났습니다. 입시비리 관련해서 정경심 교수는 유죄이지만 앞으로 법정에서 계속 다툴테니 아직 확정된 건 아닙니다.

민주당 정권은 사실 중도보수에 가깝죠. 70년 전에 내전이 일어나고 ‘빨갱이‘라는 손짓 하나로 사람 죽이던 나라입니다. 제대로 된 진보가 살아 남았겠습니까. 설마 국민의힘당이 진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다다 2021-07-02 23:43   좋아요 0 | URL
정경심 교수가 조국 전 장관 5촌 조카 조범동과 횡령죄 공범이 아니다라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고 해서 무죄라고 볼 수가 있는지요? 1심에서 유죄를 선고한 사모펀드 관련 금융실명제법 위반, 범죄수익은닉, 미공개정보이용에 대한 법적 공방이 아직 진행중인데요.

조국 전 장관은 2019년 8월에 <5촌 조카가 사모펀드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했고, 투자처도 모른다고 했죠. 그런데, 며칠 전 5촌 조카가 대법원 유죄 확정됐죠. 조국 전 장관의 거짓말이 확인된 셈이기도 한데, 뭐가 그렇게 당당한지 연일 SNS에 조국대장경을 쓰고 계시더라구요.

네 국민의 힘은 반동수구와 보수가 동거하는 정치세력이라고 봅니다.

조국과 그의 가족에 대한 검찰의 수사방식 그리고 언론보도 형태가 아주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고, 조국 전 장관에 대해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다가도 조국 전 장관의 태도나 제가 경험한 민주당 지지자 대다수가 보이는 반응을 보면 정말 이것 밖에 안되는 사람들인가 싶고 실망감이 큽니다.

모두들 단발머리 님 글에 지지와 공감을 보이는데, 혼자 딴지를 거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는 않네요. 함께 사는 공동체엔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도 있구나 하는 정도로 받아들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단발머리 2021-07-03 08:20   좋아요 0 | URL
대법원에서 공모 부분에 대해서 무죄가 확정되었는데 뭐가 더 남았는지 모르겠네요. 1심에서 유죄였던 사항에 대한 최종판단이 대법원 판결 아닌가요?

5촌 조카는 유죄가 확정되었습니다. 조국 전 장관이 거짓말 한 것으로 이해하실 수도 있겠죠. 하지만 조국 전 장관이 5촌 조카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5촌 조카가 자기는 관여하지 않았다, 자기는 아무 죄도 없다, 해서 조국 전 장관은 그 말을 그대로 믿었지만, 알고 보니 5촌 조카가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다다님의 이 문장, ˝조국과 그의 가족에 대한 검찰의 수사방식 그리고 언론보도 형태가 아주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고, 조국 전 장관에 대해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다가도 조국 전 장관의 태도나 제가 경험한 민주당 지지자 대다수가 보이는 반응을 보면 정말 이것 밖에 안되는 사람들인가 싶고 실망감이 큽니다.˝가 제가 이 글을 쓴 이유입니다.

실망할 수 있고 욕할 수 있습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또 지지하던 정당을 바꿀 수도 있겠지요. 제가 말하는 건, 이 정도의 행적에 대해 이 정도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검찰 권력의 미친 활개와 언론의 잔악무도함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못한 만큼 혼내면 됩니다. 그게 법이 지배하는 사회,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 아닙니까. 아이가 컵 하나 깼다고 정신 잃을 정도로 두드려 패야겠습니까. 조국한테는 그러지 않았습니까. 100군데가 넘는 곳을 압수수색하면서 조사 과정에서 조국 장관 동생의 편을 들었던 후배의 집, 임시숙소, 차량등을 3회나 압수수색하고 수차례 검찰 조사를 받도록 했습니다. 그게 온당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게 자연스러운 거겠죠.
전 저 나름의 생각을 표현했을 뿐입니다. 다다님 의견을 딴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다 2021-07-03 10:21   좋아요 0 | URL
대법원에서 공모 부문에 대해서 무죄가 확정되었는데 뭐가 더 남았는지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정경심 교수는 기존 1심에서 사모펀드 관련해서 횡령죄 공모 뿐 아니라 자본시장법 위반, 금융실명제법 위반, 범죄수익은닉법 등을 위반하였다는 판단이 있었고, 현재 2심이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5촌 조카 조범동의 재판 과정에서 일부(횡령죄 공모)가 무혐의로 인정 된 사실을 가지고 ‘대법원에서 정경심씨가 사모펀드 관련 무죄판결을 받았다‘고 성급하게 말씀을 하시면 곤란하다는 뜻입니다. 단발머리님께선 조국 사모펀드 사건(‘기업사냥을 통한 부의 축적‘) 과정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신 듯 한데, 이게 그렇게 가벼운 사안이 아닙니다.

다다 2021-07-02 15: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온 사회가 다 썩었는데도 정치인들에게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댄다는 항변은 아무 소용이 없다. 권력에는 언제나 그만한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그리고 시민들은 사회 전체가 부패의 늪에 빠져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인들에게 보통사람들보다 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게 싫은 사람은 정치를 그만두면 된다.˝ 동아일보, 정치인과 도덕성, 유시민

지금 다시 읽어도 명문이네요.

단발머리 2021-07-02 20:41   좋아요 2 | URL
네, 저도 명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레삭매냐 2021-07-02 20: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참 할 말이 많지만 글로
다 형언할 수가 없는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전에 책부터 만나봐야
하는데, 아무래도 좀 시간
이 걸릴 것 같네요.

단발머리 2021-07-02 20:44   좋아요 3 | URL
레삭매냐님의 말씀을 저도 좀 들어보고 싶습니다.

쉽지 않은 읽기였어요. 기억을 돌아볼수록 그 집 식구들이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게 놀랍고도 다행이라 여겨질 뿐입니다.
저도 미루고 싶었지만 결국에는 읽고 말았네요.

붕붕툐툐 2021-07-02 22: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살아줘 고맙다. 그리고 지금 언론들과 치열하게 싸워줘 고맙다. 딱 그 마음입니다. 단발머리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저도 책은 나중에나 읽게 될 거 같아요. ㅠㅠㅠ

단발머리 2021-07-03 08:22   좋아요 1 | URL
네, 저도요. 그 기간에는 세상이 온통 조국 세상이라 저도 뉴스 보는 게 싫었거든요. 이번에 여러 자료랑 같이 읽는데, 어떻게 버텼대 ㅠㅠㅠ 이런 생각 많이 했습니다. 힘든 독서지만 그래도 전 이 책 읽기를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ㅠㅠㅠ
 


 















통증의 한 가지 저주는 통증이 없는 사람에게 거짓말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환자는 멜로드라마 같은, 비현실적이고 상투적인 은유로 통증을 표현하려 안간힘을 쓴다. 당뇨 신경병에 걸린 노숙인은 작은 신경들이 산소 부족으로 죽어 허벅지와 발이 덴 듯한 통증을 이렇게 묘사했다. "얼음송곳처럼 따갑고 찌르는 것처럼 아파요…" (163)

 


흔히 쓰는 말 중에 내가 싫어하는 게 저 애, 저거, 저거 꾀병이야.” 하는 말이 있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자신의 아이에게 누가 그런 말을 할까 싶겠지만 나는 많이도 보았다. 주변의 엄마들도, 가까운 사이의 어떤 분도 아이들이 어릴 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저거, 저거 꾀병이야. 하긴 육아서의 바이블삐뽀삐뽀 119 소아과』에서도 아픈 아이에게 혜택을 주지 말라고 쓰여 있기는 했지만, 난 아이가 아프다고 하면 그 말을 믿어주는 편이었다. 그렇게 많이 다친 게 아니어도, 어디가 다친 건지 당최 모를 때조차도, 아프다는 그 말을 믿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을 때는, ~ 한 번 불어주고 후시딘 발라주고 캐릭터 밴드를 붙여주고는 했다. 그건 내가 통증이란 타인이 공유할 수 없다는 진실을 알아서라기보다는. 믿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나도 많이 아팠으니까.

 

다른 통증은 차치하고 우주의 섭리에 의한 생리통만 해도 내 우주는 너무 버거웠다. 어느 정도 생리통이 심했냐 하면 출산의 고통에 비견될 만큼 심했다. 5분 진통이 와서 분만실에 들어가기 직전에도 출산의 괴로움이 생리통의 강도와 비슷해 도와주던 간호사님이 이제, 들어가실께요!’라고 소리칠 때 그래? 이게 정말 다야?’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작고 딱딱한 책상, 생리통 때문에 엎드려 있는 친구를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왔다. 내가 아는 고통이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모를 일이다. 남자는 물론 여자도 마찬가지. 겪은 사람만 아는 통증이었다.

 


이 책은 통증의 역사를 다루고 각종 통증을 유발하는 원인을 추적한다. 통증을 이겨내려는 인류의 지난하고 고단한 과정을 보여주고, 눈부시게 발전한 현대 의학의 위업 속에서도 여전히 나아는 통증의 괴로움에 관해 기술한다. 통증의 근본 원인을 추적하려는 의학적 노력에 더해 마취제를 비롯해 통증을 감소시킬 약제와 약품에 대해 논한다. 무엇보다 통증에서 벗어나고자 전국 혹은 전 세계 병원을 투어하는 환자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자신의 몸에 대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의사, 어느 환자에게나 똑같이 처방하고 다음 주에 만나자는 의사, 환자에게 필요한 바로 진통제를 처방해주지 않는 의사. 통증에서 벗어난 사람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통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또 하루를, 그다음 하루를 통증과 씨름한다.

 


커트가 말했다. "길을 벗어나면 제자리로 돌아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군. 뭐 생각나는 거 없어?" 내가 대답했다. "내 인생이 그랬어요."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이라고 덧붙이고 싶었다. 듣고 싶어 한 말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커트와 함께 있는 것이야말로 잘못된 길에 빠진 것이 아닐까, 이렇게 약해진 몸으로는 예전의 나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커트는 모든 여자가 좋아할 만한 남자다. 얼굴과 마음씨가 훌륭하고 지적이고 재치 있는데다 하늘빛 눈망울의 소유자이니까. 남부러울 것 없는 커트를 생각하면 혼란스러웠다. 사귀는 내내 그랬다. 커트를 보기만 하면 언제나 가슴속에 불이 타올랐다. 하지만 커트와 사귀면서 나는 건강과 체력과 역량과 솔직함을 잃었다. (104)

 


이 책의 백미라고 한다면. (, ‘통증 일기를 백미라고 말하는 나의 이 잔인함에 용서를 구한다) 이 책의 백미라고 한다면, 당연히 저자의 통증 연대기, 통증 일기다. 오랫동안, 인류는 고통과 통증이 잘못된 행동에 대한 징벌이라고 여겼다. 저자 역시 그랬다. 탐내서는 안 되는 남자를 탐내서. 너무 근사한 남자를 꼬시려고 해서. 완벽한 그와 첫날밤을 보낸 후부터 그녀는 경추증, 척추관 협착증, 후두 신경통, 충돌 증후군, 회전근개 증후군으로 인한 통증으로 고통당한다. 자신의 통증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통증에서 자유롭기 위한 여정들은 한 편의 소설과 같이 아름답고 눈물겹다. 아마도 그녀의 기록이 진실에 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에서 얻을 수 있는 감동과 슬픔과는 또 다른 결의 여러 감정이 그녀의 통증일기에는 살아있다. 솔직한 것이 무엇에든 답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녀가 자신의 통증에 솔직하게 맞서는 장면들은 그녀의 숭고한 용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서 더욱 그녀에게 감동하게 된다. 미안한 마음이지만, 그녀의 통증과 고통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많은 것을 배운다.  

 


대다수 사람들은 행운을 자기가 타고난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당연히 나이듯 행운이 당연히 내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행운이 행운인 것은 언제든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때고 그늘에 내던져질 수 있는 것이다. 동전이 뒤집히듯 내 삶도 뒤집히고 또 뒤집혔다. 역사적으로 좋은 시기(대다수 시기와 비교할 때), 좋은 나라(질적으로, 양적으로), 좋은 혈통, 좋은 몸, 좋은 심장, 좋은 신장, 좋은 폐, 그리고 또 …… 동전이 뒤집히는 건 반갑지 않았다. (305)


 

자신이 가지고 있는 행운이 원래부터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건 없다. 돈과 시간, 열정과 체력 혹은 긍정적인 성격에 타고난 유머 감각.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마저도. 이 모든 건 동시에 혹은 차례로 어느 때고 그늘에 내던져질 수 있고, 눈앞에서 이내 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인생이란 자고로 경거망동하지 말고, 나대지 말고, 까불지 말아야 한다. 오만방자하지 않았던 그녀마저 이렇듯 소중한 것 하나를 잃어버리지 않았던가. 행운이 나와 함께함을 기뻐하고,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고, 그리고 이 책을 마저 읽어야겠다. 그녀가 통증에서 자유로워졌기를 고대하면서.  





하지만 대체 왜? 통증은 행복의 대가였을까, 행복을 누린 벌이었을까? 통증의 어원은 처벌을 뜻하는 라틴어 ‘포이나 ‘poena, ‘갚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포이네‘’ poine’, ‘지옥에 떨어진 영혼이 겪어야 하는 처벌과 고통’을 뜻하는 고대 프랑스어 ‘펜peine’이다. - P37

인간은 통증을 느낄 때 남에게 동정심을 일으키려는 듯한 행동을 취하지만 대다수 동물은 동료가 부상당하면 상처가 나을 때까지 본능적으로 거리를 둔다. 게다가 부상당한 동물은 상처 부위가 쓸릴까봐 무리나 가족에게서 떨어져 지낸다. 사람이 다가가면, 달아나려고 미친 듯 몸부림을 친다. 다리를 살펴보려고 접근하면 사슴은 머리를 필사적으로 뒤틀며 반대쪽 다리로 공격한다. 사슴이 아니라 여우나 늑대였다면 물었을 것이다. - P41

나는 툭하면 기침이 났는데, 그때마다 동네 병원을 찾아가 의사가 처방전 쓰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48시간 안에 나을 걸 알았으니까. 예외는 한 번도 없었다. 처방전을 쓰는 행위는 일종의 제의적 만족감을 선사했다. 귀에 닳은 투약지시를 의사가 읊을 때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의사가 처방전을 건네는 순간 기침은 사실상 멈추었다. 처방전은 적의 퇴각을 타전하는 전보였다. 전투가 며칠 끌 수는 있겠지만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 P55

환자의 시간은 아무 가치가 없다. 프랑스 작가이며 매독으로 죽은 그자비에 오브리에는 1870년에 이렇게 썼다. "질병은 가난 못지않은 실패다. 내 옆에서 기다리던 환자들에게는 실업급여를 타려 기다리던 실업자의 남루함이 묻어 있었다. - P70

고통을 감수하려면 가장 원초적인 본능을 이겨내야 한다. 그러려면 (고통을 언제나 부정적으로 여기는) 생물로서의 본능보다 (고통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문화적 신념을 우위에 두고, 통증의 영적 의미를 육체적 의미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사람들이 성인과 순교자를 떠받드는 것은 고통을 대하는 태도가 여느 인간과 다르기, 아니 초인적이기 때문이다. - P91

텍사스 대학 오스틴 캠퍼스의 로버트 A허머 박사 연구진은 미국에 사는 성인 2만여 명을 9년 동안 추적 조사한 유명한 연구에서 교회 출석과 사망률 사이에 놀라우리만치 강력한 통계적 상관관계가 있음을 밝혀냈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출석한 기독교인은 교회에 가지 않는 사람보다 평균 6년을 더 살았으며 두 번 이상 출석한 사람은 평균 7년을 더 살았다. 죽는 시점도 종교의 영향을 받는 듯하다. 독실한 신자는 중요한 종교 기념일을 앞두고 죽는 일이 드물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중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출석한 기독교인이 8년을 더 살았으며 두 번 이상 출석한 사람은 14년이나 더 살았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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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1 0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6-21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Jeremy 2021-06-21 13:06   좋아요 2 | URL
뭐, 제가 딱히 한국책이나 만화책 아니면 그냥 아마존에서 책을 살 수 밖에 없는
미국생활 30년 넘은 사람이라서지 특별하게 멋질 건 없답니다.

제 시간으로는 일요일 이른 오후라 단발머리님 글 읽고 꽂힌 김에
일필휘지로 그냥 댓글 길게 썼는데
월요일 시작하셔서 바쁘실텐데 이렇게 성의껏 답글 써주시니
상냥하신 마음씀씀이에 감사드리며
편안하고 좋은 한 주를 보내시길 바래봅니다.

단발머리 2021-06-29 08:43   좋아요 0 | URL
Jeremy님 방에 놀러갔다가 좋은 글, 좋은 책 소개에 깜짝 놀라고 왔습니다. 앞으로 서재에서 자주 뵈어요!
한주가 벌써 다 지나버렸네요 ㅠㅠㅠ 이번 한 주도 좋은 시간 되시길요^^

mini74 2021-06-21 18: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란 유난히 통증을 참는 것에 대해 후한 점수를 주는 것 같아요. 사람마다 통증의 정도가 다 다른데도요. 저도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

얄라알라 2021-06-23 13:02   좋아요 1 | URL
아 정말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제 지인의 어머니는 산통을 참으시다가, 어금니가 다 부서지셨다고하는..

그게 미덕이었던 시절이 있었겠죠? 설마 지금은 아니겠죠?

단발머리 2021-06-29 08:46   좋아요 2 | URL
미니님/ 네, 맞아요. 고통에 대한 호소가 그렇게 받아들여지요. 근데 최근에 정희진 선생님 글 읽으면서는, 어쩌면 다른 사람은 내 고통을 끝까지 이해할 수 없으니, 특히 육체적 통증 같은 경우요.... 아픈 사람도 아프지 않은 사람을 배려해야한다는 문장이 기억에 남더라구요. 저도 감사하면서 살려구요.

북사랑님/ 지금은 출산시에 무통 주사를 맞으니까요. 어금니가 부서질 정도는 아니지 싶어요. 그렇다고 아프지 않다는 건 아니구요.

수이 2021-06-21 22: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대지 말고 조심조심 엉금엉금

단발머리 2021-06-29 08:46   좋아요 0 | URL
조심조심 한발한발. 오늘도 그렇게 살자구요. 찬찬히 조심조심.

얄라알라 2021-06-23 1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글 읽다보니 ˝꾀병˝이야말로, 저평가된, 제대로 파보면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를 끌어낼 거리인데요.
이런 느낌이에요 내가 호소하면 고통, 네가 말하면 꾀병..

단발머리 2021-06-29 08:47   좋아요 1 | URL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 뭡니까. 자매품은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불륜이 있겠습니다 ㅎㅎㅎ

2021-06-24 0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6-29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6-29 0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 2021-06-24 18: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어디서 봤나 했더니, 정희진샘의 신간이었군요! 고통이나 통증은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는 주제라 살짝 꿍 비껴있었는 데, 흥미가 생기네요? (통증일기에 백미를 가져다 붙이신 것 처럼... 흥미가 생긴다는 표현도 좀 거시기 하지만 서도 ㅎㅎㅎ) 단발님 리뷰 좀더 읽고 읽을지 말지 생각해 봐야겠읍니다 ^^

단발머리 2021-06-29 08:52   좋아요 1 | URL
저 다 읽었고요. 무척이나 흥미로운 시간이었어요. 말 그대로 연대기라서 별로인 지점도 사람마다 있을 수 있겠고요. 전 고통에 관심이 있어서, 재미있었어요. 통증일기는, 일기니까 에세이에 가까운데, 이 사람이 하버드 영문과 수석졸업생이잖아요.
소설 같아요. 그냥 툭툭 써내는데, 파바박 찌르는 느낌? 전 좋았어요. 크흑.

- 2021-06-29 09:29   좋아요 0 | URL
하바드 영뭉과 수석의 느낌이 한글에서도 느껴지면 워떡한데??? ㅋㅋㅋ 저자가 여자네요 ㅋㅋ 남자였음 안보려고 해따 ㅋㅋ

2021-06-29 1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6-29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6-29 1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6-29 1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6-29 1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6-29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딩 2021-07-07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단발머리 2021-07-18 19:28   좋아요 0 | URL
초딩님 인사가 늦었어요 ㅠㅠ 축하감사드려요!
 




 













1. 태어난 게 범죄 / Born a crime

 

이번이 두 번째다. 노아 트레버를 좋아한다. 저자의 경험 자체가 특별하다 보니 내용도 흥미진진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텐데, 노아 트레버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세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이 발견될 경우 조사 끝에 온 가족이 범법자가 될 소지가 다분했기에 다정한 가족은 항상 불안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혼혈 가족의 모습이다.

 


노아의 어머니는 친척 아주머니 집에서 부모로부터 버려진(?)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자랐다. 닭 한 마리로 열 네명이 나눠 먹어야 했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릴 때는 돼지의 먹이를, 개의 먹이를 훔쳐 먹었다. 그랬는데도, 그랬음에도. 그녀에게는 영어가 있었다.

 


There she had a white pastor who taught her English. She didn’t have food or shoes or even a pair of underwear, but she had English. She could read and write. (65)

 


그녀에게 영어는 새로운 삶을 열어가는 도구이자 계급 상승을 위한 발판이 되어주었다. 영어는 더 나은 삶으로 가는 사다리가 되어 주었으되,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금빛 사다리가 되어 주었다. 다민족, 다언어 사회에서 지배자의 언어를 배운다는 건 그런 의미일 것이다. 동시에 그것이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언어, 그 영어라는 점도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영어가 가지는 위상은 어마어마하고, 영어에 쏟아붓는 에너지, , 시간, 열정, 관심은 가히 전 국가적이라 할 만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영어는 먼나라 이웃나라 딴 나라에 속해 있다. 무엇을 위해서 혹은 무엇 때문인지는 더 이상 묻지 말자. 더 이상 물을 힘도 없으니, 그냥 이 문장을 기억하기로 하자.

She didn’t have food or shoes or even a pair of underwear, but she had English.




 













2. 오만과 편견 / Pride and prejudice

 


중간중간 재미있는 대목만 읽었던 걸 빼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걸로 이번이 세 번째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첫 번째 읽을 때는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사랑이 제일 큰 관심사였다면, 두 번째 읽을 때는 다아시의 이모 캐서린 부인과 엘리자베스의 한판 대결이 아주 볼만했다. 이번에는 콜린 씨다. 베넷 가문의 넷째 딸 리디아는 겉만 번지르르하고 사기꾼 기질이 다분한 위컴과 함께 야반도주하고, 리디아가 상속받을 재산이 형편없기에 위컴에게 버림받고 불명예만 뒤집어쓴 채 집으로 돌아오게 될까, 온 가족이 염려하고 있던 찰나. 베넷 가문의 친척이며, 법적으로는 베넷 가문의 상속자인 콜린 씨가 베넷 씨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베넷 씨, 저희 콜린스 부부는 베넷 씨 이하 모든 가족분들께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베넷 씨가 지금 빠져 계신 절망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할 것으로 믿습니다. 시간이 아무리 흐른다고 해도 절망의 원인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베넷 씨와 베넷 부인을 위로하는 의미에서 말씀드리자면, 저로서는 따님이 본디 악한 성격을 타고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 제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가급적 마음을 달래시고 못난 자식일랑 영원히 마음에서 내치시어 자기가 저지른 가증스러운 죄악의 열매를 스스로 거두게 하십시오. (389)  

 


소설 속에서는 콜린 씨를 거구로 그리지만 느낌으로는 영화 속 자그마한 콜린의 모습이 그의 말과 행동에 훨씬 잘 어울린다.



 


편지에서는 자신을 한껏 낮춘 듯하지만 구절구절 그의 허영과 위선, 그리고 오만함이 묻어난다. 무식함과 재채기, 그리고 사랑을 인생 사 감추기 어려운 3종 세트라 하지만, 원래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생각이라는 건 감출 수 없는 게 아닐까 싶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듯하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거나, 칭찬하는 척하면서 은근 디스하는 말들은, 말하는 이의 생각과 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투명하게 비춰준다. 예의를 지키는 모습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고 싶지만, 결국은 마음이다. 마음은 잘 감춰지지 않는다. 심보를 바르게 하자. 다시 한번 다짐해본다.

 
















3.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선생님의 책을 처음 읽었던 9년 전에도, 2021년의 지금도 선생님의 문체는 통통 튀고 발랄하다. ‘다이어트에도 영성이 필요하다?!’는 글에서 만난 문단이다.

 


동양의학의 양생술은 단연 최강급이다. 양생은 정, , 신의 순환이 핵심인데, 그러기 위해선 덜 먹고 잘 자야 한다. 특히 술과 고기, 기름진 음식을 절제하는 것이 양생술의 대원칙이다. 그런 점에서 수양이나 양생을 한다는 건 그 자체로 이미 다이어트다. 특히 중요한 건 저녁에 소식하는 것이다. (89)  

 


인생의 의미, 공부의 즐거움, 고전이라는 바다, 함께 공부하는 벗에 대한 찬사를 넘어 이제 의역학과의 접합이 시작된다. , , 더 많이, 가 아니라, 일상의 리듬을 바꾸고 내용과 태도를 바꾸고 감각과 활동, 그리고 관계의 변화를 이루어가는 수행으로서의 다이어트를 추천한다. 소비와 유흥이 아닌 저녁이라. 그것이 진정한 휴식으로 가는 길이란 말이냐. 푸라닭 블랙알리오와의 정면승부는 영원히 미뤄져야 한단 말이냐.

 
















4. 통증 연대기

 


성별, 인종, 계층은 통증 치료에 영향을 미친다. 카 박사의 환자 중상당수는 박사 말고는 진통제를 처방해줄 의사를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실제로도 그랬다). 이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상당수가 소수 민족, 여성, 기초생활 수급자, 산재연금 수급자, 정신질환자, 약물 남용 경험이 있는 환자다. (197)

 


환자가 통증을 호소할 때 성별에 따라 치료가 달라진다는 주장은 종종 제기된 바 있다. 남성이 통증을 호소하면 마약성 진통제, 수술, 완벽한 검사 혜택을 누릴 가능성이 크지만, 여성이 통증을 호소하면 우울증과 불안을 치료하는 향정신성 의약품을 처방받는다. (한 조사에 따르면 같은 증상을 호소하고 같은 진단 결과가 나온 환자에 대해 여성은 항우울제를 처방 받을 확률이 남성보다 82퍼센트 높았으며 항불안제를 처방받을 확률은 37퍼센트 높았다.) 여성은 통증 치료를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않거니와, 적극적일 경우 히스테리로 치부되기 쉽다. (198)

 


성별, 인종, 계층에 따라 다른 통증 치료법이 적용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을 법한 이야기임에도 충격적이다. 흑인이기 때문에, 여성이기 때문에, 가난하기 때문에 통증의 치료에 쓰일 진통제조차 제대로 처방받지 못한다는 현실을, 통증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개인은 알아차리기 어렵다. 내가 만난 의사가 어떠한가에 따라 통증은 생각보다 쉽게 사라질 수도, 영원히 함께할 수도 있다. 성별, 인종, 계급의 편견 속에 통증은, 여전히 그만 아는 그 무엇이 되어 그를 구속한다. 통증에서의 해방은 정녕 불가능한 일인가. 현재시간 오후 11 29. 이 날이 다 가기 전에 조금 더 읽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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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6-19 23:5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읽다가 영어 나와서 놀랬어요ㅋㅋㅋㅋㅋ아우..평생 공부중ㅋㅋ질병연구도 주로 성인남성을 기준으로 이루어져서 여성들의 경우 오진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라구요. 원서좀 손닿는 곳에 꺼내놔야겠어요!🤨

단발머리 2021-06-20 12:22   좋아요 3 | URL
전 의사 대다수가 남자라서 그런거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일 극단적인 경우로는…. 산부인과에서 만나는 남자 의사와 여자 의사의 경우가 있겠지요.
제 원서들은 주로 김치냉장고 위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1-06-20 00: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만과 편견 번역본도 읽지 않은 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반성은 조금만 하고 가을쯤 도전해볼까요. 단발님이 추천해주신 책은 모조리 다 읽고 싶거든요!!

단발머리 2021-06-20 12:24   좋아요 3 | URL
오만과 편견 안 읽은 축복을 맘껏 누리시고요 ㅎㅎㅎ 저 바빠요. 어제 수연님이 말씀하신 책과 책들 빌리러 도서관 가야하거든요.

레삭매냐 2021-06-20 08: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트레버 노아의 책 <태어난 게 범죄>
의 영어 제목이 <Born a Crime>라니
너무 멋지네요. 제목 한 번 잘 뽑았다는.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다가
못 다 읽고 반납했네요. 재밌었는데...

다시 빌려서 마저 읽어야겠습니다.

그렇지요, 영어가 재산이지요.

단발머리 2021-06-20 12:27   좋아요 4 | URL
제목 진짜 잘 뽑았죠? 보통 이런 에세이가 작가의 매력에 업혀가기 마련이지만 이 책의 작가는 워낙 이력 자체가 특별하니까요. 저는 아주 잼나게 읽었어요.
영어가 재산이지요, 흑. 부자가 되고 싶어요ㅠㅠㅠ

그렇게혜윰 2021-06-20 08: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고미숙 작가에게 통통튄다는 말이 딱이네요!

단발머리 2021-06-20 12:28   좋아요 2 | URL
통통 & 발랄 & 유쾌가 고미숙 선생님 3종 세트로서 ㅋㅋㅋㅋㅋㅋㅋㅋ

han22598 2021-06-20 12:1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여성들의 고통은 정신적인 이유로 많이 취급했다는 여러가지 근거들중의 하나인 히스테리 (hysteria) 라는 진단자체도 과거에 있었던 걸루 기억해요. 히스테리는 자궁적출술을 한 여성들에게 극단적으로 보이는 증상이라는 식으로 결부 시켰던 과거와 근래에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을 지칭한 사회적 거부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기도 한 것 같아요. ㅠㅠ

단발머리 2021-06-20 17:00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저도 히스테리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읽은 것 같아요. 여성에게 가해진 사회적 압박에 대해서는 못 본체 하고 그 모든 원인을 자궁 때문이라고 돌리는 과학 아닌 과학이 횡횡하던 시대가 있었죠. 인용한 글에서도 여성의 고통에 대한 진단 중 항우울제 비중이 높다는게, 그런 믿음이 현재까지 이어진 거라 생각되요. 휴우 ㅠㅠㅠ 갈 길이 멉니다.

다락방 2021-06-21 1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실 여러번 읽은 책이 별로 없거든요. 물론 있기는 하지만요. 근데 단발머리님이 오만과 편견 세 번 읽으셨고 읽을 때마다 다른걸 발견하셨다니까 아, 나도 다시 읽어볼까 싶어져요. 사실 제 경우에는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여러번 읽었고 읽을 때마다 다른 구절에서 좋아서 자지러지지만 말입니다. 크-

어떤 책이든 여러번 읽는 책이 있다는 건 좋은것 같아요, 단발머리님. 그건 분명 삶의 작은 기쁨일 거예요.
훗.

단발머리 2021-06-26 10:57   좋아요 0 | URL
저는 여러 번 읽는 책을 여러 권 가진 사람이야말로 진짜 행복한 사람 아닌가 싶어요. 아직도 읽어야할 책,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지만 자꾸 손이 가는 책이 있기는 해요. 오만과 편견도 제게 그런 책 중의 하나구요^^ 다락방님에게는 새벽 세시와 바람이 부나요,가 있다면 제게는 오만과 편견 그리고… (하나 더 장만해야겠어요^^)

책 읽는 기쁨이야말로 삶의 알짜배기 기쁨이지요!!!
 




 


























나의 의문과 웃음이 고미숙 선생님에게 닿아 있어서 기쁘다. 고미숙 선생님의 책은 이렇게 네 권을 읽었고 이 책이 다섯 번째다. 많이 읽지 않았는데도 굳이 밝혀 두는 건, 이 정도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와 수준이었음을 기록하기 위해서다. 선생님의 연암 박지원 하트뿅뿅 사랑에 감복해 열하일기 3종 세트를 도전해 보았으나 실패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글쓰기 책이지만 인간이란 무엇인가, 에서 시작한다. 인간은 서는존재이고, ‘사이의 존재이다(27). 인간은 생각을 생각하는 존재이고(31), 달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달리는 힘을 멈출 수 있는 존재이다. 앎은 세계를 향해 무한히 뻗어 나가는 것이며, 또한 내부를 향해 깊이 침잠하는 것이기에,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다름 아닌 무지다(40). 생명을 보존하려면 자연의 이치와 천성을 알아야 하며, 그 속도와 리듬에 대한 앎이 바로 생명의 원동력이다.


 

하여, 우리가 일상적으로 해야 할 실천은 간단하다. “간절히 궁금해하는 것” (운성스님, 명상-유튜브) 무엇에 대해? 세계의 근원에 대해서, 존재의 심연에 대해서. 어떻게? “마음을 텅 비운 채, 우주적 가능성으로!” 모든 배움의 기초가 질문인 것도 그 때문이다. (41)

 


궁금해할 것이 두 가지다. 세계의 근원과 존재의 심연. 내가 궁금한 두 가지와 맞닿아있다. 빅뱅과 인간의 의식. 시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설명하려 애썼지만 사실 이해하기 어려운 시간의 개념을 제시한 카를로 로벨리는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에서 이렇게 말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과학적 발견은 그저 과학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인지도 모른다. 과학을 통해 발전된 세계관이 분명하고 정확한 의미에서는 거짓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여러 해석을 가질 수 있으며, 각각의 해석들 역시 어느 정도까지만 진실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81)  

 


인류는 우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어디까지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아는 것이 거짓일 수 있다는 정도다. 우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만 해석이 가능하다. 미시적 차원의 세계에서는 불연속성이 발견되고, 모든 움직임에 우연한 요소인 본질적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결국 어떤 입자의 움직임은 입자의 존재에 대한 확률의 변화가 된다. 그리고 그 입자가 어느 방향으로, 왜 움직이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현재의 우리는 알 수 없다.

 


빅뱅이 일어난 이후의 세계에 대해, 우주에 대해, 지구에 대해 과학자들은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빅뱅 이전에는, 빅뱅 이전에는 어떠했는가.



 












물리학자들은 우주가 무한에 가까운 고밀도에, 크기도 없는 순수한 에너지로 시작했다는 데 동의한다. ‘특이점이라 부르는 이 상황에서는 물리학 법칙들이 무너진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과학자들도 대폭발이 일어나던 그 첫 순간, 즉 처음 10초 동안 일어난 일을 해석하지 못한다(10초는 1초의 100만분의 1 100만 분의 1 100만 분의 1 100만 분의 1 100만 분의 1 100만 분의 1 100만 분의 1 10분의 1초다.) (『신의 언어』, 71)

 


인간은 육체 속에 산다. 진화론에서는 진화의 과정에 영혼이 출현한 시기를 특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 어느 곳에서도 마음이 발견되지 않았듯, 영혼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 영혼은 보이지 않는다. 영혼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에게 영혼은 없는 걸까. 인간, 알고리즘으로서의 유기체인 인간은 그렇게 살고 그렇게 분해되어 없어지는 걸까. 내 몸을 이뤘던 원자는 영원히 존재할 테니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걸까. 우주에 다시 없는 독특한 결합으로서의 , 나의 죽음 이후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걸까. 의미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면, 무사히 벗어난다면,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기독교적 세계관, 내세관 속에서 자랐다. 인간에게 영혼이 있고,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고, 그리고 구원과 파멸이 있다고 배웠다. 그렇게 믿는다. 다른 답을 찾는 이유는 내가 가진 해답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세상을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다. 다른 해답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이전 세계에서는 내 부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중요했다. 유전과 환경 중, 유전의 대부분과 환경의 상당 부분이 부모에 기인했다. 생물학적으로 연결된 존재인 부모가 계급을 결정했고 삶을 결정했고 인생을 결정했다. 우리는 아무도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는데, 부모 때문에 삶의 많은 부분이 결정되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때문에 전 세계가 골머리를 앓았다.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영상으로 보는 건 괴롭고 힘든 일이다. 지금도 계속되는 비극이 언제쯤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 뉴욕의 사망자 집단 매장과 인도의 갠지스강 시신 유기 등은 이 세계의 종말 같은 모습이다. 이제는 어느 나라에 사는지가 중요해진 걸까. 어제도, 오늘도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때문에 죽는다. 전염병, , 성인병, 각종 질병으로 죽는다. 사건, 사고 때문에 죽는다. 노화로 인해 죽는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부자들만 불멸을 원하는 게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죽음은 쉽지 않다. 죽음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우리의 현실이고 우리의 미래다. 부자들만 불멸에 가까운 제2의 삶을 살아갈 만한 비용을 지불할 수 있을 뿐이다.

 

 


어제는 도서관에 갔다. 희망 도서로 신청한 책을 가져가라 하기에 받으러 갔는데, 멀리 이 책의 표지가 보인다. 나도 모르게, , 그거 제 책 아닌데요, 라고 말할 뻔했다. 오른쪽 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왼쪽, 내가 신청한 책이 맞았다.

 
















나는 잘 웃는 사람이고 쉽게 웃는 사람이다. 요 며칠 웃을 일이 없었는데, 책을 살짝 넘겨보다가 마스크 너머로 푸핫!’ 하고 소리 내 웃어버렸다. 뒹굴기와 달리기. 이 책의 부제는 <생물과 인간, 40억 년의 딥 히스토리>로서 인간 행동의 진화 과정을 추적하되, 그 연구의 시작이 단세포 미생물, 박테리아의 조상들이다. 많은 박테리아는 자력으로 움직일 수 있고 매일 살아남기 위해 임의적인 움직임을 지속한다고 한다. 유익한 물질을 만났을 때는 달리기 운동을 통해 가까이 간다. 해로운 물질을 만났을 때는 뒹굴기 운동을 통해 도망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박테리아가, 생존을 위해, 오직 살겠다는 일념 하나로 뒹굴기 운동과 달리기 운동을 한다는 건데, 사진을 보는 순간 너무 웃겼다. 뒹굴기와 달리기라니. 하하하. 뒹굴기와 달리기라니. 유익한 사람에게는 달려가고 해로운 사람에게서는 도망쳐라. 뒹굴어서 도망쳐라. 도서관 2층 계단 앞에 서서 한 번 더 웃었다.





 




뒹굴기와 달리기를 너머, 유성 생식과 우리의 친구 척추동물을 지나, 행동적 유연성의 진화와 수다 떨기의 힘, 뇌에서의 고차 인식과 기억 그리고 마음과 감정에 대해 읽어보겠다. 그 어디에서도 영혼을 찾을 수 없다 해도 괜찮다. 내게는 뒹굴기와 달리기가 있으니. 뒹굴기와 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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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6-15 23: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미숙샘 좋아요! 전 열하일기 읽고 너무 좋아서 열하일기 완역본을 읽었어요~ 그 부분에선 저의 은인이세요~ 이 책도 흥미 돋네요~ 뒹굴기와 구르기. 넘나 귀여운 것!ㅎㅎㄹㅎㅎ

단발머리 2021-06-16 10:04   좋아요 3 | URL
고미숙 팬미팅 가는 건가요? ㅋㅋㅋㅋㅋ 열하일기 완역본 읽으셨다니 너무 멋지세요! 오래오래 뿜뿜하셔도 될듯 합니다^^

2021-06-16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6-16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ni74 2021-06-16 08: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보니 박테리아도 나름 귀엽네요 ㅎㅎ

단발머리 2021-06-16 10:27   좋아요 3 | URL
네네~ 뒹굴기랑 달리기 넘 귀엽지요. 뒹굴고 달리고 달리고 뒹굴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6-21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명과 분노 저 책장에 이미 꽂아둔 책이에요. 안그래도 ‘저건 언제 읽지?‘ 했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니까 곧 만나야겠구나 싶어요. 물론, 단발님이 이 책을 읽으신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서 제가 똭- 마주친 건 어떤 뜻이 있는건 아닐까..

하늘의 뜻...

단발머리 2021-06-26 10:52   좋아요 0 | URL
완전 하늘의 뜻이지요 ㅎㅎ 저 그제 도서관에서 <운명과 분노> 봤거든요. 또 잠시, 다락방님 생각😘

Conan 2021-06-29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미숙 선생은 저도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열하일기, 임꺽정, 호모쿵푸스를 읽었고 동의보감이랑 몇권 사놓은 책은 아직 못읽고 있습니다. 책이 하나같이 너무 재미있더라구요^^

단발머리 2021-07-01 20:46   좋아요 1 | URL
네, 고미숙 선생님의 책은 대부분 재미있지요. 전 열하일기를 읽는게 목표입니다. 열하일기는 좀 어렵더라구요^^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 인간의 시계로부터 벗어난 무한한 시공간으로의 여행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보희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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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로벨리의 책은 세 번째다. 이런 책을 읽을 때 신난다. 구체적으로는 과학책. 읽고 있는 문장이, 따라 읽는 문단이 무슨 뜻인지 몰라도 그냥 읽어도 되니까 신난다. 읽는 책을 모두 이해하면서 읽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마는(생각해보니 알라딘 우주에는 많이들 계시다), 나는 그런 사람은 못 되니까, 그냥 읽는다.

 

카를로 로벨리는 이탈리아 태생의 세계적인 이론 물리학자로, 양자 이론과 중력 이론을 결합한 루프 양자 중력이라는 개념으로 블랙홀을 새롭게 규정한 우주론의 대가라고 한다. 양자 중력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나가면서 전 세계 과학자들과 일궈낸 협업과 우정이 진솔하게 그려져 있고, ‘시간 없는우주에 대한 시각을 제시한다. 무엇보다 과학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감동적이다.

 


과학적 사고란 우리의 무지를 의식하는 것이다. 나는 한발 더 나아가 과학적 사고란 우리의 무지가 얼마나 방대하고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역동적인지를 의식하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를 전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확신이 아닌 의심이다. 그리고 바로 이 의심은 데카르트가 남긴 뿌리 깊은 유산이기도 하다. 과학을 신뢰해야 하는 이유는 과학이 확신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100)

 


서구를 중심으로 발달해왔던 과학은 이제 명실상부 가장 강력한 사고 체계다. 누구도 과학자의 논증과 판단과 실험 결과에 쉽게 반대할 수 없다. 이전 시대 종교가 가지고 있던 절대적인 지위를 과학이 승계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여기. 가장 난해하고 첨예한 과학적 발견과 논의의 선봉장에 선 사람이 말한다. 과학적 사고란 우리의 무지를 의식하는 것이다. 과학은 마치 철을 정제하듯 정답을 찾아가는 일련의 과정이다. (101) 그의 전공이 가설과 논증을 중시하는 이론물리학이기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걸까.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라는 난제들을 머릿속으로상상하고 가설을 만들고 이를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과정에서 각 분야 최고의 지성들 간의 협업은 필수적이다. 자신의 가설을 제안하고 토론을 통해 다른 배경, 다른 전공의 지식인들이 가설 속의 빈틈을 찾아내고 이를 보완해가며 논문을 완성해가는 과정은 나만 옳다는 편협된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뤄낼 수 없다. 무지에 대한 인식, 상대에 대한 인정이 절대적으로필요하다.

 


양자 중력과 루프 이론에 대한 설명 역시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무슨 말인지 모를 뿐만 아니라 무슨 말인지 몰라도 되니 즐겁다. 이 내용을 가지고서 시험 보지 않을 테니 즐겁고, 그런데도 이 책을 계속 읽을 수 있어서 즐겁다.

 


공간은 중력장 그 자체이므로, 이 루프들이 공간 속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결국 루프 그 자체가 공간인 것이다! 루프들이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방정식을 통해 깨달은 사실은 바로 이것이었다. (58)

 


각각의 해가 공간 속에 존재하는 닫힌 형태의 곡선인 루프는 양자 중력장에서 패러데이의 역선의 역할을 할 수도 있는데, 저자에 따르면 루프 그 자체가 공간이라고 한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자가 루프에 흠뻑 빠진 거는 확실히 알겠다.

 





제일 중요해 보이는 6장의 제목은 <시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이다. 대다수의 사람은 공간과 시간을 분리된 개체로써 이해하고(저만 그런 거 아니지요), 시간을 연속적인 의미로 파악한다. 보통은 사건을 시간순으로 정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선후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시간과 공간이 분리된 각각의 개체라기보다는 한 개체의 두 측면에 가깝다는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하고 10년 후,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통해 시간 개념을 더욱 가변적인 개념으로 만들었지만(140), 그것이 확립된이론인 것과는 별개로, 그 사실을 개념이 아닌 실제로 받아들이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시간은 흘러간다.

 


<시간의 부재> 챕터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다룬다. 144쪽에서부터 153쪽까지. 근본적으로 시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시간이란 각각의 물체가 다른 물체에 비해 변화하는 방식임을 기술하면서, 보편적 변수인 시간의 존재가 관찰을 통해 얻은 결과가 아닌 하나의 가정일 뿐임을 논증한다. 관심 있는 모든 분의 1독을 권한다. 제일 중요한 질문이 남았다. 163, 만약 시간이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금 흐르고 있는 이 시간, 즉 우리가 느끼는 시간은 무엇일까? 저자가 답한다.

 


시간이란 미세한 규모의 차원에서 일련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지만 보다 큰 규모, 즉 거시적인 차원에서만 드러나는 창발 현상이라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시간은 이 세상의 세부 요소를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무지의 효과라고 볼 수 있다. (165)

 


시간도 마찬가지다. ‘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단 하나의 양성자에는 이전도 이후도 존재하지 않으며, 관련 방정식에도 시간변수는 등장하지 않는다. … 결국 시간은 그저 엔트로피화의 방향에 지나지 않는다. 엔트로피의 증가가 관찰되는 방향을 시간이라고 부를 뿐이다. 물체가 낙하하기 때문에 아래라는 개념이 생겨나듯, 엔트로피가 증가하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170)

 



나는 어렸을 때부터 키가 컸고 노안이었다. 6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단체 사진을 찍을 때 맨 뒷줄 정중앙 자리에 앉았는데, 친구 어머니께서 가운데 이분이 선생님이시니?’라고 물으셨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생 아니냐는 말을 들었고, 중학교 1학년 때는 3학년이냐고 물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3학년 취급을 당했고,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교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어쩔 수 없이) 고등학생이군, 하는 말을 들었다. 항상 실제의 나이보다 외모가 앞서 나가는 바람에 내 나이를 찾지 못하다가 스물여섯. 그때부터 사람들이 내 나이를 내 나이에 맞춰 보기 시작했고, 일찍이 노안이었기에 오히려 30대에는 내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작년, 그리고 올해를 거치면서 급속도로 늙어가고 있다는 걸,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느낀다. 눈 아래쪽, 주름의 진폭이 예사롭지 않다. 평소에 사지 않는 조금 비싼 로션을 하나 샀고 (아이크림 안 쓰는 사람), 게으른 성격임에도 어쩔 수 없이 나름 꾸준히 발라보았지만,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가속도가 붙은 모양새다.

 


시간은 그저 엔트로피화의 방향에 지나지 않는다는 건 동의할 수 있지만, 왜 이 방향이냐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내가 싸워야 하는 대상은 시간이나 시간의 흐름으로 인한 노화가 아니라, 열역학 제2법칙이라는 걸 발견했다는 게, 이 책의 수확이라면 수확이라 할 수 있겠다이제, 네 차례다. 싸우자! 열역학 제2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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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6-12 19:3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냥 읽습니다.
습관적으로.

단발머리 2021-06-12 19:45   좋아요 4 | URL
레삭매냐님의 이 댓글은 뭐랄까요.
위로가 되는군요 ㅎㅎㅎ 감사합니다^^

- 2021-06-12 19:4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크흐흐 ㅋㅋㅋㅋ 맞아 ㅋㅋㅋ 문돌이는 이런 책 읽으면 이해못하고 시험 안봐도 되니 편해져요.. 동감.. 그나저나 카를로 슨상이 루프에 빠진 사진은 해리포터 닮으셨고, 제 최고의 적인 시간의 존재를 지워주셨으니 그저 좋아서 지금의 저는 영원합니다!! 만세!

다락방 2021-06-13 08:31   좋아요 2 | URL
저도 사진 보면서 그랬어요.

“..해리니?”

단발머리 2021-06-14 12:56   좋아요 1 | URL
루프에 빠진 해리 보지 마시고요. 루프를 보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게 루프랍니다. 열쇠고리처럼 생겼지요. 막 서로 얽여가지고 그거를 푼다, 못 푼다 대결하는 것 같단 말이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루프는 공간 그 자체라고 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아 신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청아 2021-06-12 20: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해못해도 뇌에 좋은 영향을 준다더군요ㅋㅋㅋㅋㅋㅋ그게 어딥니까 으핫~♡ 멋짐요!

단발머리 2021-06-14 12:58   좋아요 2 | URL
저도 그렇게 믿고 있어요. 근데 뭐랄까요. 제가 알지 못하는 내용이지만 작고 예쁘고 새책이라서 그런지 완독할 수 있었거든요. 책은 모름지기 그래야하지 않을까 싶어요. 어려운 책일수록 얇고 예쁘게^^

그레이스 2021-06-12 20: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전 두권 읽었는데 문과도 이해할 수 있을듯요^^

단발머리 2021-06-14 12:58   좋아요 3 | URL
네, 저는 솔직히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작가가 쉽게 쓰려고 상당히 노력하는 거는 느껴져요.
그레이스님 문과시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반갑습니다^^

그레이스 2021-06-14 13:02   좋아요 3 | URL
저는 이과 출신이데 지금 보니 문과쪽 성향이 더 맞는듯요^^

단발머리 2021-06-14 14:12   좋아요 1 | URL
우앗!! 제가 항상 흠모하는 이과시군요. 반가워요, 그레이스님^^

붕붕툐툐 2021-06-13 00: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와~ 전 이분 초면인데~ 벌써 세번째 책이시군요! 리뷰 읽고 완전 읽고 싶어졌어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보면-전 영화만 봤어요-같은 방향으로 노화되는게 축복인 듯!ㅎㅎ
저도 단발머리님처럼 노안에서 제 나이 보이다가 다시 노화 급행열차 탑승 중입니다~ㅎㅎㅎㅎ

단발머리 2021-06-14 13:00   좋아요 3 | URL
툐툐님께도 즐거운 독서가 될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카를로 로벨리의 다른 책은 <모든 순간의 물리학>과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입니다. 많은 애용 부탁드리고, 얼른 노화 급행열차에서 내리세요. 저도 다음 정거장에서 내릴거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1-06-13 03:5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 궁금했는데 이 리뷰를 보니 역시 제가 범접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느낌이 더 강해져 버렸어요. ㅠ.ㅠ

단발머리 2021-06-14 13:01   좋아요 3 | URL
아..... 어려운 책이기는 한데 그래도 초보자를 대상으로 쉽게 쓴거라고 하더라구요. 저도 이해하고 리뷰를 썼다기보다는 그냥 읽었다는데 의의를 뒀고요. 카를로 로벨리의 다른 책들도 전 추천하고 싶네요.

다락방 2021-06-13 08: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와 단발머리님 짱 멋져요. 저는 읽어본 적 없는 작가인데 세번째라니! @.@
저도 노안이었어요. 저는 한 서른부터 사람들이 제 나이로 봤던 것 같아요. (깊은 슬픔..)

단발머리 2021-06-14 13:03   좋아요 4 | URL
만약 한 권만 읽으신다면 전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추천하고 싶어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걸 설명하는 부분도 좋았지만, 우리 인간이 이 넓고 거대한 우주에서 무엇인가에 대해서 과학자의 시선으로 해석하는 부분이 좋았어요. 우리는 기억이다, 이런 부분이요. 우리 이제, 제 나이 찾아갔으니까요. 더 이상 물러서지 말아요... 히잉 ㅠㅠ

초딩 2021-07-07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단발머리 2021-07-18 19:29   좋아요 0 | URL
초딩님!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1-07-08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단발머리 2021-07-18 19:30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인사가 늦었어요 ㅠㅠ 축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