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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여자들에게 : 엉망인 여성해방론
다나카 미쓰 지음, 조승미 옮김 / 두번째테제 / 2019년 9월
평점 :
전공투 투쟁이 한참이었던 때에 신좌파 운동에 함께했던 일본의 여성들은 운동권 내부에서조차 성별 구분에 따라 남성들은 대의에, 여성들은 그 위대한(?) 대의를 위한 뒷바리지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을 것을 강요받았다. 이 책에서도 여러 번, 비슷한 내용이 반복된다.
여자들은 투쟁하는 남자들 뒤에서 투쟁 전단지를 등사기로 긁고 등사판을 밀고, 혁명가인 척하는 남자의 활동 자금을 벌고, 또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돌본다. 이렇게 투쟁에서도 생활에서도 책임이 중하고 부담이 무거운 일상을 담당한다. (이에 대해 조금 감사를 받았다 한들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이런 것에 아무런 의문 없이 여자들에게 불이익을 주면서 혁명론이나 전략, 전술을 짤 때 빙산의 보이지 않는 부분은 배제하는 게 신좌익 남자들이다. 그러면서 "나는 결혼을 한다면 운동은 하지 않는 여자랑 할 거야."라고 말하는 남자가 과연 우리 동지인가? 이런 의문을 제기해도 듣는 둥 마는 둥 흘려 버리고서는 공식 회의석상에서는 "국제 프롤레타리아주의니 뭐니 베트남 민중연대"니 뭐니 하며 뚫린 입이라고 술술 잘도 말하는 남자를 고발해야 한다. 근본적으로는 혁명파 내부에 있는 남녀 차별을 고발해야 한다. (268쪽)
이런 현상은 일본에만 혹은 우리나라에만, 혹은 일본과 우리나라의 운동권에서만 나타났던 건 아니고, 노예 해방 운동을 함께하던 백인 남성들이 백인 여성들을 회의장 입구에서 출입을 가로막았다거나 소련 혁명 성공 이후에 많은 여성들이 권력에 핵심에서 축출되었던 사례들은 이런 현상이 가부장제의 전 세계적 실천임을 확인해준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심상정 의원이 떠오르는데...
가까이에서 보거나 직접 들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남성 중심의 운동권 문화에 반발해 서울대학교 총여학생회를 만들고 초대 회장을 맡았었더라는, 가히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 막막한 현실에 포기하지 않고 그 현실 너머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만들어갔던 여성. 그런 여성, 그런 여성들이 있기는 하다. 저자도 바로 그런 여성들 중의 한 명이다.
같이 읽고 있는 파스텔 핑크의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에는 '공산주의'에 마음을 빼앗겼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고닉은 미국 전역을 돌며 과거 공산주의자로 살았던 수십 명을 인터뷰하며, 공산주의가 남긴 실패와 아이러니에 대해 말한다. 책 소개에는 이 기록이 "조직의 토대와 존재 이유를 고민하는 오늘날의 여러 급진적 사회운동과도 맞닿아 있다"고 쓰여 있다. 공산주의의 '환영'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끼게 되는건, 90년대말 한국 대학생 기독 부흥 운동의 언저리에 있었던 경험 때문이다. 현실에 발 디딘 채로 이제 막 발견한 새로운 세계를 향한 질주, 노력, 헌신. 나는 그에 대해 1, 그래, 1 정도는 아는 사람이라서, 그 때의 감정, 결심, 그리고 함께 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날 때, 아쉬움과 아련함이 동시에 일어난다.
'깨닫게 되었을 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기독교가 그렇고, 공산주의가 그러하다. 한없이 낭만적 미래를 상상하는 것도, 자신의 변화를 주위에 알리며 그들을 '포섭'하려 하는 것도 기독교와 공산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공산주의의 이상은 평등에 기초한다. 따라서, '정해진' 운명에 순응해야 한다는 이전의 관념과 문화의 반대편에 존재한다. 인권 개념과 연관지어 실천적으로 적용된다면, 인간이 탐욕과 욕망으로 가득찬 존재임를 좀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었더라면, 공산주의야말로 완벽한 인간 사회의 지향점이 되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공산주의의 미래는 핑크빛이 맞다. 그래서 그 이상향 실험은 이미 실패하였고.
그랬던 여성들, 혁명의 동지이며 일원이었던 여성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외침에 떨치고 일어섰던 여성들은, 자신은 혁명의 일원이 아님을, 남성과 같은 위치에 있지 않음을 발견한다. 그녀들의 노동은 '자연적'이라고 여겨지며 그러한 노동의 지속한 수행이 여전히 여성에게'만' 강제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충격에 빠진다.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여자'임을 발견하는 순간. 그 부조리함에 대한 논증과 현실에 대한 비판, 그리고 거침 없는 반성이 반복해 이루어진다.
거친 면이 적잖이 보이고, 논리의 전개에서 아쉬운 면이 없지 않으나,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맡겨진 문제에 대면하는 그녀의 용기에 응원을 보내며 간신히 읽기를 마쳤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책을 다 읽지는 않더라도, 저자에 대한 짧은 글이라도 읽고 싶다면, 역사적인 문건이라 불리는 <변소로부터의 해방>이라도 읽기를 권하고 싶다. 저자에게 박수를, 그리고 이 책을 마저 읽은 우리 모두에게 박수를 보낸다.
재산 보전과 상속을 목적으로 한 경제 체제는 여자의 성적 욕구를 남자와 가정에 매어 놓음으로써 순혈주의를 유지하려고 한다. 여자한테만 적용하는 일부일처제가 그것이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마음과 몸의 영위 과정에 반하는 일부일처제는 여자와 아이가 남자에게 의존하게끔 하는 경제 구조를 바탕에 깔고 있다. 또 체제에 위기가 오더라도, 사람들의 마음의 핵심에 성을 더럽고 천하고 부끄러운 것으로 경멸하는 의식 구조가 자리 잡도록 해서 지금까지 위기를 극복해 왔다. 일부일처제는 본질적으로 여자의 경제적 자립과 성적 욕구를 틀어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성을 업신여기는 의식 구조는 여성에 대한 억압을 더 강하게 한다. (345쪽)
계급사회란 ‘누구하고도 제대로 만날 수 없게 하는 체제‘를 말한다. 아픔을 아프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실제로 아프지 않은 사람이 아니고, 언제까지나 자신이 빛 쪽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이다. 아픔을 아프다고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주문에 걸린 사람이다. - P191
여성해방이란 여자들이 힘을 모아 여자가 살기 힘든 현실을 깨부수는 것이며, 동시에 서로 갈등하고 미워해 온 여자와 여자의 관계성 속에 에로스를 되살리면서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자에게 에로스는 나의 자궁, 즉 나의 자연과 내가 서로 소통하는 가운데 나온다. 소통은 ‘여자인 것‘에서 오는 아픔과 대화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 P214
몇 차례나 되풀이하지만, 우리에게는 항상 두 가지 본심이 있다. 체제의 가치관에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은 나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나 이런 두 사람이 항상 공존한다. 속마음과는 달리 우리는 체제의 가치관을 뿌리칠 것이냐, 받아들일 것이냐를 놓고 고민하다가 겉으로는 체제의 가치관을 뿌리치는 척하고, 살아 있는 자신의 내면은 체제의 가치관에 계속 종속하게끔 내버려둔다. 이런 금욕주의는 어김없이 내 안에서 고름으로 변한다. - P277
우리는 여성의 해방 문제를 성의 해방 문제로 제기한다. 성을 부정하는의식 구조에서 자신을 해방할 것을 제기한다. 스스로 내부에 있는 발기부전(=성을 부정하는 의식 구조가 규정하는 정신적인 다양한 무기력함)을 해체하기 위해, 남자와 권력에 대한 투쟁을 결의하자. 그 결의를 호소한다.
여자에서 여자로, ‘변소‘에서 ‘변소‘로! 단결이 여자를 강하게 한다. 같이할까요? - P358
여자들은 투쟁하는 남자들 뒤에서 투쟁 전단지를 등사기로 긁고 등사판을 밀고, 혁명가인 척하는 남자의 활동 자금을 벌고, 또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돌본다. 이렇게 투쟁에서도 생활에서도 책임이 중하고 부담이 무거운 일상을 담당한다. (이에 대해 조금 감사를 받았다 한들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이런 것에 아무런 의문 없이 여자들에게 불이익을 주면서 혁명론이나 전략, 전술을 짤 때 빙산의 보이지 않는 부분은 배제하는 게 신좌익 남자들이다. 그러면서 "나는 결혼을한다면 운동은 하지 않는 여자랑 할 거야."라고 말하는 남자가 과연 우리동지인가? 이런 의문을 제기해도 듣는 둥 마는 둥 흘려 버리고서는 공식 회의석상에서는 "국제 프롤레타리아주의니 뭐니 "베트남 민중연대"니 뭐니 하며 뚫린 입이라고 술술 잘도 말하는 남자를 고발해야 한다. 근본적으로는혁명파 내부에 있는 남녀 차별을 고발해야 한다. - P370
여자에게 결혼이란, 또 결혼식이란, 아내로 엄마로 암컷의 생을 살아 내기 위한 결의를 세상에 알리는 창구이다. 생각건대 공인된 포르노인 결혼은 거리에서 남녀 간 성행위 퍼포먼스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더욱 우스운 것은 거리를 지나며 그 퍼포먼스를 본 사람들이 누구도 성행위를 보지 않았다고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와 비슷하게 입모아 거짓말을 하는 꼴이다. 이렇게 결혼 포르노가 상연되어 왔다. 그러니까 모두가 결혼이 포르노인 것을 알고 있는데도, 포르노라고 외친다면 이 세상의 중심 뼈대에 금이 갈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이 공인된 포르노 ‘결혼‘이 계속 상영될 수 있다는 소리이다. 이런 속임수를 숨기려고 ‘예술이냐 외설이냐‘ 왈가왈부한다. 마치 결혼 이상으로 외설적인 것이 있는 것처럼 여기게 하고서 체제를 정비한다. - P63
그러나 고통은, 어둠은, 그것을 고통으로, 어둠으로 느끼는 개인에게는 항상 절대적인 것이다. 물론 이것이 아픔에 한 번 매달리게 되면그것에서 떠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어둠은 이 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에서 자신이 벗어나고 말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래서 어둠을 어둠으로 제대로 느끼고 따지며 묻는 중에 이 사회의 가치관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인지 깨달을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새로운 가치로 창조할 수 있을 터이다. 스스로 오직 어둠을 향해 달리는 가운데, 진정한 주체성이 확립된다. 이것은 관념론이 아니고, 분명 변증법적인 발전이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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