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올리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친구들과 『Olive, Again』을 같이 읽고 있다. 일주일에 한 챕터씩 읽기가 계획인데 미루는 성격이라 금요일 오후쯤 되어야 아! 올리브! 하고 책을 찾아 이리저리 헤맨다. 숙제가 급한 초등학생처럼 바쁜 마음으로 읽기를 시작하지만, 소설 자체가 갖는 이야기의 힘 때문에 나도 모르게 휘리릭 빨려 들어간다. 올리브를 읽는 시간이 참 좋다.

 


올리브는 오지 말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58)

 


이 구절이 좋았다. 올리브가 자신의 집으로 오라는 잭의 전화를 받고 그의 집에 막 도착했을 때, 영화로는 도저히 그려낼 수 없는 올리브의 생각이 그대로 표현되는 장면. 올리브는 오지 말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올리브의 생각 속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상황. 그런 순간이 좋다. 전능자가 되어 버리는 것 같은. 상황과 생각, 계획과 예상 그 밖에서 마치 인형 같은 주인공을 내려다보는 순간. 올리브는 오지 말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구절을 읽고 이 책을 사야지! 하고 결심했다.

 

 

소설은 흔히 가볍고 쉬운 이야기라 여겨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특히 역사의 격랑’, ‘이념 간의 갈등’, ‘세대 간의 불화와 타협같은 거대 담론을 주제로 삼지 않으면 더더욱 그런 취급을 받아왔다. 이 세상에 태어나 부모의 사랑으로 성장하고, 사랑을 주지 않는 엄마 때문에 괴로워하고, 자신을 기억하는 예전 학교선생님 덕분에 용기를 얻고, 먼 도시로 아들을 떠나보내고, 남편과 사별 후 새로운 사랑을 만나고, 이제 더는 혼자 살 수 없어 요양원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이 모든 과정은 인간으로서 너무나 소중하고 중요한 경험들이다. 하지만, 이런 순간, 이런 경험들은 모두 하찮게 여겨진다. 중요한 일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사실, 인간으로서의 불행과 행복은 이런 작은 순간에 맺혀 있는데도 말이다.

 

가까운 친구 중에 엄마를 집에 모시고 있거나 아침저녁으로 돌보거나 저녁을 챙겨드리는 친구들이 모두 넷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맙고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는 일이 너무 버거울 때, 그때 느끼는 무력감과 죄책감은 다른 어떤 말로도 설명이 안 된다.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울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 모든 일을 사랑과 도리, 효와 애정의 문제로만 설명한다. 개인에게만 책임을 전가한다. 그 모든 무거운 짐을 껴안는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 딸, 며느리, 손녀는, 말 그대로 생존의 위협을 느낀다. 하지만, 말할 수가 없다. 불평할 수가 없다. 그것은 사랑이 부족해서이고,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하지 않은 일이고, 효심이 부족해 생기는 마음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어나 이생을 살고 늙어가고, 그리고 죽음을 준비해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낸 이 소설이 좋았다. 무리 부인하려 해도 우리는 결국 인간이고, 그래서 또는 그러므로,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숨기지 않고 말해줘서 좋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건 다른 인간의 관심과 애정, 따뜻한 음식과 다정한 손길이라는 걸 말해줘서 좋았다. 

 


좋았던 또 하나의 구절은 바로 여기다.

 


잠시 뒤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아내에게 수잰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말할 것이다. 대화의 구체적인 내용은 한 가지도 밝히지 않을 것이다. 수잰이 그를 어떻게 도와주었는지는 그만의 비밀로 남겨둘 것이다. 사람들이 오래도록 혼자 간직하는 숱한 비밀을 생각해보면, 그런 정도의 비밀은 전혀 나쁠 게 없다고, 그는 일어서면서 생각했다. (189)

 


만나자마자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들이 있다. 해결책을 찾는다기보다는 고민의 토로가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그럴 때는 그냥 들으면 된다. 고민을 넘어 쉽게 비밀을 털어놓는 사람들도 있다. ! 하는 놀라운 이야기가 펼쳐져도 차분히 그 이야기를 듣는다. (단발머리의 고민 상담소 : 비밀 보장) 내게 말할 수 있는 정도의 비밀이라 내게 말하는 것일 테니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경우의 수는 없다. 마주 앉아 가만히 비밀 이야기를 들을 뿐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웬만큼 비밀을 털어놓은 후 어떤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이제 네 차례야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저요? , 뭐요? 제 고민이요? 아니, 제 비밀이요? 그니까? ? 작은 거밖에 없어요. 제 고민은 다 자잘하고. … 제 비밀이요?

 


비밀이라. 이 세상에 완전한 비밀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비밀이라고 말했는데 온 세상이 이미 다 알고 있는 경우도 무척 많은데. 하지만 내게도 한두 개의 비밀은 있다. 그 사실 자체가 비밀은 아니지만, 지난한 과정과 구구절절한 사연이 비밀인 비밀. 난 누구에게도 그 비밀을, 비밀들을 말하지 않았다. 글로도 한 번도 쓴 적이 없다. 만약 내가 아주 오래 살게 된다면, 그 일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났다면, 내 심경에 변화가 생긴다면, 94세쯤에 비밀과 비밀들에 대해 쓰고 싶다. 내가 내렸던 바보 같은 결정과 그로 인한 파장,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과 그래야만 했던 결정과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후회에 대해 쓰고 싶다. 내 잘못은 하나도 없다고 소리쳤던 수많은 밤과 밤처럼 어두웠던 낮과 눈물의 기도들과 내 기도의 응답에 대해 쓰고 싶다. 94세쯤에 그 사람들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면. 하지만 그전에는 말하고 싶지 않고 생각하고 싶지 않고 쓰고 싶지 않다. 내 비밀은, 내게는 이렇게나 크다.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버니가 수잰을 위로해줄 때, 앞으로 그녀가 간직하게 될 비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비밀의 책임은 네가 지고 가는 게 좋겠다고 말할 때, 좋았다. 수잰에게 말하지 못하는 비밀을 자신만의 것으로 간직한 버니의 말을 들으며 내가 안심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비밀도 그냥 가지고 있어도 된다고 버니가 허락해 주는 것처럼 느껴져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올리브를 읽는 시간이 좋다. 올리브를 읽는 시간이 참 좋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1-05-03 1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07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1-05-04 07: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저도 너무 좋아요. 번역본 읽기 위해 원서도 다시 이북으로 읽거나 보고 있는데 처음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른 감동들이 찾아와서 막 눈물도 나고 그래요.
저는 이번편에서 수잰이 그런 환경 속에서도 잘 자라왔다고 말하는 장면이 너무 좋았어요. 그런 환경에서 살면서도 결코 망가지지 않았다고 하잖아요. 남편은 아내를 학대하고 엄마는 아들을 학대하고 아들은 여성혐오살인을 했는데, 거기에서 바람핀 거 가지고 내가 잘못했어, 하면서 고통스러워하는 수잰을 보면서 인간이란 대체 무엇일까.. 싶더라고요. 왜 어떤 이는 여자를 찔러 죽이는데 어떤 이는 바람핀걸로 고통받나. 왜 특히 그 부분 있잖아요. 아버지가 바람피웠던 사실을 알고는 아버지처럼 될까봐 너무 걱정된다는, 그 부분이요. 저는 거기서 너무 아팠어요. 저도 다시 올리브 다시 읽으면서 너무 좋아서 그 부분에 대해 페이퍼 쓰고 싶었는데 바빠서 못썼네요.

다시 올리브는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어요 단발머리님.

단발머리 2021-05-07 12:03   좋아요 1 | URL
전 무엇보다 이렇게 인간으로서 중요한 경험들이 사소하게 여겨지는게 그런게 너무 아쉬워요. 수잰에게 버니는 사실 동네 아저씨잖아요. 아빠의 대리인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수잰을 아는 사람… 이런 관계가 무척 중요한거 같아요. 근데 요즘은 점점 더 이런 관계를 갖기가 어려운 거 같아요. 이사도 잦고 또 아무래도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강해지고 그러니까요. 전 그 챕터 읽으면서는 그런 생각이 많이 들더라구요. 느슨하지만 긍정적인 관계, 인사를 나눌수 있는, 경쟁하지 않는 관계…

다시 올리브는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어요. 저한테도 그래요.

mini74 2021-05-04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들과 같이 읽으신다니
부러워요. *^^* 같이 밥 먹으면 식구라는데 같은 책 읽으며 감정을 공유한다는 건 마음의 식구가 되는 건가요 ㅎㅎ

단발머리 2021-05-07 12:08   좋아요 1 | URL
‘마음의 식구’라는 미니님 표현은 제가 오래오래 기억하고 사용하고 싶어요. 같은 책을 읽는 건 그 어떤 일보다 마음을 나누는 일이 맞는 거 같아요. 그런 면에서 알라딘 이웃님들도 제게 그런 마음의 식구입니다*^^

공쟝쟝 2021-05-10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럴 땐 (꼭 이럴 때만) 제가 나이어린게 다행입니다. 94세에 단발님 비밀 이야기의 굳 리스너가 될겁니다. 제가 번호표 1번 뽑아써요? 예약이예요.

단발머리 2021-05-13 07:54   좋아요 0 | URL
우아아아아아아앙!!!! 번호표 1번이 쟝쟝님이라면 94세가 아니라 74세 정도로 확 당길까 해요. 예약증은 문자로 발송됩니다.
시간 엄수하시고요. 번호 지나가면 기다리셔야 돼요!!!

초딩 2021-06-04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월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좋은 밤 되세요~

단발머리 2021-06-07 12:59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초딩님!! 제가 답이 늦었네요!
오늘 월요일이지만 좋은 날 되시길 바래요!

서니데이 2021-06-04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축하드립니다^^

단발머리 2021-06-07 12:59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축하해 주셔서 감사해요!!!
오늘 좋은 날 되시길 바랍니다!
 










전통과 통념으로 퉁쳐졌던(?) 주장들이 ‘과학’의 옷을 입었을 때 어떤 일이 있어났는가에 대한 고발. 가치중립적이지 않은 과학에 대한 맹신이 어떻게 기득권을 보호하고 여성을 억압하는지 세세히 보여주는 책.








양심의 가책 없이 모성 거부 증후군에 대해 읽을 수 있는 어머니는 거의 없었다. 여성이면 누구나 때때로 "왜 그런지, 알고 싶어 하는 성가신 두 살배기의 열 번째 요구를 외면하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가 혼자 15분 동안 계속해서 울부짖게 내버려 두게 되고, 네 살짜리와 이야기하는 동안 딴 데 정신을 팔거나 혹은 아이를 "거부했다." 집을 티끌 하나 없이 말끔하게 유지하려고 애쓰는 전업 엄마는 분개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영아나 취학 전 자녀를 마치 다 자란 적수처럼 순간적으로 미워하게 된다. 모성이 "충족"을 뜻한다면 이러한 순간적인 적대감은 정상적이고 선하고 고결한 것에 대한 배신이자 은밀한 파괴임에 틀림없다. 과학은 이러한 감정들을 어머니-아이 관계라는 에덴 동산에 있는 뱀 같은 타락이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 결과는 괴로운 자기의심이었다. - P320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쟝쟝 2021-04-27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등! 을 축하드립니다!! (혹시 제가 일등할까봐... 걱정했거든요..? 안심ㅋㅋㅋ) 저도 이제부터 부지런히 읽어야겠어요! 바쁘다 바빠... 매월 말일마다...ㅠㅠ

단발머리 2021-04-27 16:13   좋아요 0 | URL
(ㄷㄷㄷ 들어온 이후로) 월말마다 마음 편안한 날이 하루도 없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들 수고많으세요!!! 저는 바버라 다른 책 읽고 있다는 거를, 그것을 나는 강조하고 싶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1-04-27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월 중순까지만 해도 저는 제가 1등을 할 줄 알았는데 말이죠;;; 잠깐 한 눈을 팔다가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다니...... 4월도 며칠 안 남았으니 얼른 커피 사발 앞에 놓고 읽어야겠습니다. 저 색연필은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단발머리님, 저걸로 줄 그으면 다 제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올 거 같아서요.

단발머리 2021-04-27 16:24   좋아요 0 | URL
물론 저도 그렇게 알았습니다. 수연님 바쁜 틈을 타서 제가 과감한 깜빡이 신공과 엑셀 밟기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좋은 결과를 이루고야 말았습니다(소감은 윤여정급) 저 색연필은 스테들러 노리스 슈퍼 점보 색연필이며 (일명 코끼리 색연필) 색상은... 이것이 중요합니다. 레드가 아니라 보르도입니다. bordeaux 보르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상 생활자의 요가 - 생각 많은 소설가의 생각 정리법
최정화 지음 / 창비교육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구원으로서의 요가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편 읽어봤는데, 이 책은 또 나름대로 의미와 재미가 있다

 


학교에서 제일 많이 나를 곤란에 빠뜨린 과목은 늘 체육이었다. 한 번도 내가 체육을 좋아하게 되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심한 욕을 듣거나 매를 맞은 때도 체육시간이었다. , , 수 시간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7)

 


여기까지. 여기까지 나랑 똑같다. 나와 달라지는 지점은 저자가 장편소설을 준비하면서 체력 보충을 위해 요가를 시작하는 지점부터다.

 


동네 주민을 위한 요가 수업에 일 년 반 정도 나간 적이 있는데, 거의 무료에 가까운 강좌라서 50대부터 70대까지의 어머님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스트레칭에 가까운 쉬운 동작이 주를 이뤘고, 그런데도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자세가 꽤 있었다. 하고 싶어서 시작한 게 아니고 언니가 접수해 주어서, 같이 가주어서 시작한 운동이라 툭하면 빠지기 일쑤였다.

 

꾸준히 하다 보니 순서에도 익숙해지고, 묘기처럼 보였던 쟁기 자세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잘하려고 한 적이 없고 그냥 몸에 좋으려니, 언니가 하자고 하니까, 수업 끝나고 언니들이랑 잠깐 놀 수 있으니까, 그렇게 수업에 참여했다. 안 되는 자세를 해보려고 힘써 본 적이 없었다. 하다가 안 되면 매트 위에 살포시 누워버렸다. 다리로 하는 동작들은 어렵지 않았지만, 코어의 힘이 약하고 팔 힘도 약해서 팔을 이용해 몸을 떠받치는 동작은 모두 어려웠다. 드세요! 하고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하나 늦게 시작해서, 그만! 하시기 전에 혼자 내려왔다. 무리하지 말라, 는 선생님의 충고를 지나치게 충실히 따랐다. 무리한 적이 없으니 힘들지도 않았다. 운동을 마치고 느끼는 몸의 개운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개운할 만큼 애쓰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이런 나다. 심지 않고 거두려 하고, 노력하지 않고 얻으려 하고, 애쓰지 않고 받으려 하는, 도둑 심보를 가진 나. 하지만 지금의 나는 결국 이런 나다. 열심히 하지 않는 나. 포기가 쉬운 나. 늦게 시작하고 먼저 끝내는 나. 요가 매트 위에 누워 자체적으로 휴식 시간을 갖는 나.

 


내가 가장 어려워했던 동작은 아무 힘도 쓸 필요 없는 사바 아사나였다. 지금은 틈만 나면 하는 동작인데 처음에는 그 자세로는 아무래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일단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은 나를 이완하지 못하게 했다. 모르는 사람이 곁에 누워 있는데 내가 어떻게 힘을 풀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내는 소리들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누군가는 거친 호흡을 하고 있다. 나는 사바 아사나 시간에 오히려 더 몸에 긴장이 들어갔다. 혼자 살고, 혼자 일하는 생활에 익숙해져서 누군가와 그렇게 가깝게 있다는 것은 나를 긴장 상태로 몰고 갔다. (68)

 


45분 요가 수업을 마치면 마지막 수련 자세는 사바사나(Sabasana)’. 사바사나는 말 그대로 매트 위에 누워있는 게 전부다. 턱을 당기고 다리를 편안하게 벌리고, 팔을 몸 옆에 그대로 놓고 손바닥을 위로 가게 하고 손가락에 힘을 빼고. 호흡을 길게 들이마시고 내쉬고. 호흡을 통해 몸을 치료하는 수련이 사바사나다. 요가는 미용상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련을 위한 운동이다. 복잡한 동작을 배우고 익혀서 이효리 같은 동작을 따라 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원하는 바가 그쪽이라면 그쪽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 사진 참조), 결국 요가 수련을 통해 도달하고자 목표는 명상이다. 사바사나는 명상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길목이다. 단순하게 누워서 쉬는 자세 같지만, 사바사나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그것이 사바사나가 쉽지 않은 이유다.


 



45분 요가 수업을 마치면 사바사나. 나는 사바사나가 너무 좋았다. 수련에 열심히 참여하지도 않았는데, 내내 쉬었는데, 공식적으로 쉬는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매트에 똑바로 누워 팔, 다리, 손가락의 힘을 빼고 명상에 빠지는 그 짧은 5분이 그렇게나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빛 때문에 깨어난(?) 나는, 다른 분들은 이미 선생님과 인사하기 위해 바르게 앉아 있는 걸 보게 됐다. 나는 이제 막 일어났는데. 괜히 옆에 있던 언니에게 짜증을 냈다. 언니! 나 왜 안 깨웠어요? 그 다음 주였다. 이번에는 나도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바르게 앉았는데, 내 앞에 옆의 옆에 앉으신 분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혼잣말하신다. 아이고, 누가 코를…… 그 누구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았다.

 


차가운 마룻바닥. 피곤하지 않은 오전 시간. 모르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눈을 감고 있노라면 걱정이, 염려가, 딴생각이 몰려올 것 같기도 하다만. , 나는 사바사나 전문가가 되어서는 끝도 알 수 없는 명상의 저 어느 깊은 곳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고 만 것이다

! 나의 명상이여! ! 나의 사바사나여!

 


별로였던 요가 수업을 계속하게 해준 나의 즐거운 사바사나 시간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다음 수업부터 사바사나시간에는 진정한 명상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 했다. 처음에는 딴생각을 했고, 그다음에는 오늘의 할일을 생각했다. 그다음에는 혼잣말을 하고, 마지막에는 오늘의 기도를 했다. 의식을 놓치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50분 수업 시간 중에서 가장 애쓰는 시간이 되었다. 진정한 명상에 빠지지 않기 위해. 의식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물론 수면은 사바사나와 다르다. 수면은 생리적인 의식 상실 상태로서, 외부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 상태인 데 반해, 사바사나는 의도적으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다. 몸과 마음의 피로를 풀어주며 몸의 순환에 집중하며 에너지와 호흡을 느끼는 수련이다. 하지만, 깊이 있는 명상의 순간과 수면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꿈과 환상과 깨달음은 수면과 사바사나 중 어느 한 곳에만 속한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며 몸의 긴장을 이완시키고, 얕게 호흡하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어가는 과정은 수면인가 아니면 사바사나인가.

 


즐거운 사바사나 시간은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지만, 코로나 시대에는 홈트를 통해 새로운 사바사나 시대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무리하지 않기. 늦게 시작하고 빨리 끝내기. 마무리는 사바사나로. 이제 결심만 남았다. 어디 보자, 결심이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이냐.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1-04-07 11: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책은 또 뭐죠? ㅋㅋ 이것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아니 세상에 읽을 책 왜이렇게 많아? 참 그래서 좋으면서 싫으네요.

사바아사나 저도 진짜 좋아해요! 사바아사나를 위해 다른 모든 수련을 견디는게 아닐까 싶을 만큼요. 크-
저는 사바아사나가 쉬운 자세라고 하지만 처음에 그 자세를 못잡았어요. 저같은 경우는 인용하신 문장처럼 누가 신경쓰여서가 아니라 원체 거북목과 라운드 숄더가 심해서 누우면 어깨가 땅에 닿질 않았어요. 그래서 사바아사나 시간에 선생님이 돌아다니시다가 항상 제게 오셔서는 양 손으로 살면시 제 어깨를 바닥을 향해 눌러주셔야 했답니다.

아, 사바아사나 할 때가 너무 그립네요. 요즘 너무 요가를 안해서..
사바아사나 시간에 주무시는 분 많아요. 저도 까무룩 잠들 때도 있었어요. 어떤 날은 눈물이 또르르 흐르기도 했어요. 사바아사나에 온전히 나를 맡기기 위해서 사람들은 요가를 하는게 아닐까, 뭐,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 사바아사나에 대한 글을 단발님의 리뷰로 읽다니 진짜 너무 행복합니다. 요가 만세 단발머리님 만세!
단발머리님의 사바아사나와 요가를, 홈트를, 명상을 응원합니다.

아, 맞다. 저는 쟁기자세 여전히 못한답니다? 다리가 뒤로 안넘어가는데 뱃살 때문일까요? ( ˝)

단발머리 2021-04-08 09:56   좋아요 1 | URL
저는 다락방님 요가 이야기가 너무 좋아요. 안 되는 자세에 도전하는 거나 흠뻑 젖는 땀 이야기나 선생님 이야기 전부 다요. 전 운동을 원래 좋아하지도 않고 앞으로도 크게 전념하고픈 마음은 안 들지만, 어떤 운동이든 하게 된다면 그건 요가일 거 같아요. 요가가 저한테 맞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부끄럽네요.

전 집에서 그 유명한 ‘요가 소년‘과 요가하다가 사바사나 하는데, 집에서도 그렇게 깊은 명상의 세계로 빠져들었어요. 전 정말 놀라고 말았습니다. 아, 장소를 가리지 않는 이 집중력이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 사바사나를 그렇게 좋아해요.

응원 감사합니다. 요가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요? ( ˝)

미미 2021-04-07 12: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이구~찜합니다!! (요가 책으로 좀 하다 말았던 1인🙄)

단발머리 2021-04-08 09:45   좋아요 1 | URL
이 책 말고도 요가에 대한 에세이가 여러 권인데 어쩌다보니 전 4권 정도 읽은 것 같아요. 요가는 안 하고 요가책 읽는 포스^^

공쟝쟝 2021-04-07 12: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앗, 나의 사바사나!!!! 맞아요 사바사나 최고죠 ㅠㅠ 쟁기자세도 너무 좋지 않나요?? 저도 모닝 요가로 아침을 여는 그런 멋진 백수를 꿈꾸었으나... 당분간은 러닝 한우물만 파자로 (24시간이 모자라)~ 그치만 단발님의 요가글 기다릴꺼예요! 글구 전 디아님의 요가책도 추천해요! (더덕모임에서 다락방님께로 갔던 책..ㅋㅋ)

다락방 2021-04-07 12:27   좋아요 4 | URL
요거는 제가 단발머리님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 절반쯤 읽었어요. 호호.

공쟝쟝 2021-04-07 13:12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읽고 단발님께 전하세요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1-04-08 09:44   좋아요 1 | URL
저, 어제 침대 위에서 쟁기자세 되는 게 맞는가, 이게 정말 맞는가 확인하는 위험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쟝쟝님의 러닝이 전 더 근사해요. 뛸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런닝이 최고 아닌가요. 저 요가에 진심 아닌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러분의 합동 작전으로 저 요가 열심히 할까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1-04-07 17: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가하다가 사바아사나 하다가 코 고는 모습 사운드 모두 다 재현됐습니다 쿠쿠쿠쿠

단발머리 2021-04-08 09:42   좋아요 0 | URL
증강현실 ㅋㅋㅋㅋㅋㅋ

붕붕툐툐 2021-04-07 20: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바사나 진짜 너무 좋죵? 넘나 기다려지는 시간~ㅋㅋㅋ 저 며칠 전에 물구나무서기 성공해서 혼자 신났어요~ 물론 젤 쉬운 기초동작으로요~ㅎㅎ
요가가 수련이라 너무 좋아요~ 내 몸을 돌아보고 살펴볼 수 있는 시간. 단발머리님 페이퍼 읽으니 또 요가에 대한 애정이 불끈!!

단발머리 2021-04-08 09:42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요가를 하는 분들은 모두 사바사나 좋아한다고 그러시대요. 저도 이제 슬슬 다시 요가 매트를 펴볼까 싶은데 워낙 작심하루라 좀 걱정스럽기는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회주의 페미니즘 - 여성의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완전한 자유
낸시 홈스트롬 엮음, 유강은 옮김 / 따비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서대에 놓지도 못하고 손을 벌벌 떨며 책을 읽을 수도 있겠고, 한 발짝이 아니라 두 발짝 혹은 세 발짝 멀찍이 떨어진 채로 읽을 수도 있다. 일단 이 책은 그냥 들고 읽기에는 너무 무겁고 (832), 읽다 보면 가끔 이 책에서 멀리 멀어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다른 세상 이야기 같은 난해한 주제들). ‘여성의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완전한 자유라는 부제로 낸시 홈스트롬이 여러 작가의 글을 묶은 책이다. 관심 있는 주제만 찾아 읽어도 좋겠고, 시간적인 여유가 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봐도 좋겠다. 시간적 여유가 충분한데 약속한 시간을 넘겨서 다 읽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만. 먼저 읽은 사람들은 공통으로 1 <, 섹슈얼리티, 재생산>이 좋았다고 하는데, 나도 1부가 제일 좋았다. 그리고 리스 멀링스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정치 전략에서 젠더의 지도를 그리다가 기억에 남는다.

 


1991 7, 조지 H. W. 부시가 공화당의 흑인 보수주의자 클래런스 토머스를 연방대법원의 판사로 지명했을 때, 그와 함께 일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변호사 애니타 힐은 토머스가 자신을 성희롱한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생중계된 인사청문회에서 토머스는 부정한 행동을 한 적이 없다고 잡아떼면서 청문회를 건방진 흑인들을 때려잡는 하이테크 린치라고 규정했다(612). 전통적인 흑인 민권단체, 교회 연합체, 민족주의자들은 토머스 임명에 찬성했다. 애니타 힐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토머스 임명은 인준되었다. 흑인이었으되 백인이었던 토머스의 활약(?)으로 민원운동의 성과들은 크게 저지되었다.

 

 

토머스는 대법관에 오른 지 4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여성, 빈민과 노동자, 모든 미국인의 민주적 권리와 기회를 약화시키는 조치를 지지했다. 그것도 캐스팅보트를 쥔 인물로서 말이다. (615)

 


노예 해방운동의 동지였던 백인 남성들은 중요한 의사 결정 자리에는 백인 여성들이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백인의 인종차별주의에 함께 저항했던 흑인 남성들도 흑인 공동체의 지도력을 흑인 여성들과 나누려 하지 않았다. 성차별주의에 함께 저항했던 백인 여성들은 항상 운동의 중심에는 자신들이 있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가장 큰 절망은 언제나처럼, 흑인 여성들에게 있다. 그녀들은 그 시간을, 그 고통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 속 마야의 친할머니, 미세스 핸더슨. 시내에서 백인 여성에 대한 성희롱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다리가 불편한 아들을 감자 바구니에 숨기는 사람. 백인들의 비웃음 속에 둥둥 떠내려온 흑인의 시체를 옮긴 후 충격에 휩싸여, 백인들은 왜 이렇게 우리를 미워하죠? 라고 묻는 십 대의 손자에게 아무런 답도 줄 수 없는 사람. 그녀가 견뎠던 시간이 한없이 무겁다. 나의 남자들. 남편과 아들, 조카와 사위가 흑인 남자라는 이유로 무차별적이고 비이성적인 폭력의 희생자가 될 때 느끼는 절망. 토머스의 인준에 찬성한 흑인들의 심정을 아주 이해 못 할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결정이었지만, 그런 결정을 해야만 했던 흑인들의 절망을 혹은 희망을 모른 척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역사적 투쟁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해방을 추구하는 과정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이 가진 잠재력의 완전한 실현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계급 착취, 인종차별, 젠더 종속에 맞선 투쟁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실현되려면 이론과 실천 속에서 이 셋이 통일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의 민족으로서 우리 투쟁에 완전하고 평등하게 참여하는 데서 여성들을 배제할 수 없다. 어느 아프리카계 형제가 가나의 속담을 인용해서 내게 말한 것처럼, “우리는 모두의 손을 보태야 한다.” (619)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멈출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페미니즘이 여성 해방에서 시작되었지만, 거기에 머무를 수 없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계급 착취와 인종 차별, 젠더 종속에 대한 투쟁은 함께 가야 한다. 모두의 손을 보태야 한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1-04-01 1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 읽으셨군요!! 고생하셨습니다, 단발머리님!!

단발머리 2021-04-01 19:17   좋아요 1 | URL
감사해요, 다락방님! 수고가 많았습니다, 제가 🙄

다락방 2021-04-01 1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밑줄 그어진 책 보는 거 너무 좋아요! 😍

단발머리 2021-04-01 19:23   좋아요 1 | URL
책을 구입한 사람만 누리는 기쁨이랄까요 ㅎㅎㅎㅎ 저 이 책 네번을 대출하고 이번에 줄치면서 읽으니 넘 좋더라구요.
역시 책은 사야 제맛입니다! 😍

미미 2021-04-01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완독 수고하셨어요!😉👍👍

단발머리 2021-04-01 21:15   좋아요 1 | URL
우아아앙!! 감사합니다! 미미님도 수고 많으셨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공쟝쟝 2021-04-01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독이다 💕🌟🔥 우리 함께 손을 보탭시다~~!! 고생하셨어요 단발님!

단발머리 2021-04-02 07:22   좋아요 1 | URL
쟝쟝님처럼 꼼꼼하게는 못 읽었 ㅠㅠㅠㅠ그래도 완독에 방점을 찍습니다.
고마워요, 쟝쟝님!!! 😘

수이 2021-04-02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고생하셨어요 단발머리님!! 강조하신 문장 넘 좋아요. 가슴 속 깊이 새겨 넣습니다. 마야 안젤루 책 얼른 읽으러 가야겠어요.

단발머리 2021-04-02 11:52   좋아요 0 | URL
우앗!! 전 진짜 고생 많았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름 보람이 있어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고생만 남을 뻔 했습니다. 수연님 진작에 4월책으로 이동하셨다는 소문 돌던데 말이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주』는 자전적 이야기이다. 민주화 운동을 했던 아버지, 그의 부재와 그가 없는 생활에 대한 기록이다. 출소한 후에도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어머니가 짊어져야 했던 삶의 고단함, 외로움 그리고 가난에 대한 이야기다.

 

다장르, 다매체, 혼합 언어 텍스트라는 김혜순 시인의 추천사처럼 이 책은 민주화 운동의 여러 기록을 그녀의 문장과 함께 나란히 품고 있다. 실제 책이 되어가던 중, 원고를 받아본 소설가 한강은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이 책은 에세이보다 소설로 이름 붙이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에세이를 초과하는 것들이 들어 있어서요. 그래서 전화했어요. (293)

 

 

읽는 내내 힘들었다. 대통령을 마음껏 욕해도 되는 이 시대, ‘민주화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오기까지의 피와 땀과 눈물과 희생을 다 잊어버린 이 세대에, 그의 아버지가 겪었을 고초와 고통을 엿보는 일이 힘들었다. 나 하나 고생하는 것은 괜찮지만, 나의 신념 때문에 가족들이 고생하는 것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슬펐고, 무능한 남편을 원망하는 아내의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았고, 남보다 더 서먹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이 촘촘히 쌓여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읽는 일이 쉽지 않을 때는 노트를 꺼내 한 장을 넘기고 빈 종이 맨 위에 이렇게 쓰곤 했다. 말하기를 통해 그녀의 고통은 극복될 수 있는가. 그녀의 고통을 지우는 방법은 토해내는 것인가.

 

간혹 글쓰기 책에서 글쓰기의 효용혹은 글쓰기의 효과에 대해 언급할 때가 있다. 해방으로써의 글쓰기, 자유롭게 하는 글쓰기, 자신의 힘과 목소리를 찾아오는 과정으로서의 글쓰기. 나는 글쓰기가 가진 힘에 대해서는 긍정하지만, 고백의 괴로움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기억을 재구성하고, 편집하고, 가공하고, 과거를 현실로 복원하는 과정의 고통이, 가슴에 품은 외로움 혹은 서러움보다 더 큰 것이라 혼자 가늠하고는 했다.

 

한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예단하는 것 자체가 몰지각한 일일 수 있겠지만, 나는 프리모 레비가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쓰지 않았다면 자살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더 나은 사람들이 죽고, 더 못 한 사람들이 살아남았다는 생존자로서의 죄책감과 과거를 복기하는 데서 오는 고통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생각했다.

 

 

고통을 기억한다는 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슬픔을 어루만진다는 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고통을 이기는 방법은 고백인가. 고통을 이기는 방법은 극복인가. 나는 노트에 그 문장들을 적었다. 고통을 이기는 방법은 고백인가. 고통을 이기는 방법은 극복인가. 답은 <작가의 말>에 있었다.

 


나의 이야기는 나의 삶이기도 했으므로, 나는 나의 삶을 외면하면서, 가슴속 응어리 같은 것이 까닭 없이 왈칵 쏟아지려 하는 때에도 슬픔을 냉소하면서, 멀어져가는 나의 존재를 묵묵히 일별하며 허깨비처럼 지냈다.


  시간이 지나면 잊힐 거라고, 괜찮아질 거라고, 삶은 그런 거라고 자신을 타이르려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내 안의 누군가가 그러한 삶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곳으로 가자. 그곳으로. 그 사람은 내게 진주로 가자고 했다. 나는 왜 그곳으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진주행 비행기표를 끊고 숙소를 결제하고 낯선 도시로 향했다. (279, 작가의 말)

 

 


나의 한글 공부와 관련이 있는 이 세상 유일한 사람인 엄마는 내게 한글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했다. 엄마처럼 나도, 내가 누구에게서 어떻게 한글을 배웠는지 모른다. 어떤 힘,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나를 도와서, 나는 한글을 읽게 되었고 알게 되었고 쓰게 되었다. 장혜령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를 도왔던 그 미지의 힘을 생각했다. 그녀의 아픔과 고통과 외로움이, 그녀의 말과 목소리와 외침이 들려왔다. 내가 아는 말, 내가 이해하는 언어로 들려왔다.

 


나에 대해 쓴다고 해서 나의 이야기가 되지는 않는다.

나의 이야기는 당신을 향해 쓰이고, 당신에게 가닿음으로써 비로소 나의 이야기가 된다. 이제 그것을 알 것 같다. (294)

 


그녀의 이야기가 나를 위해 쓰였고 나에게로 와서 비로소 그녀의 이야기가 되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 말해줘서, 멈추지 않아 줘서 그리고 이 소설을 써줘서 고맙다. 그녀에게 고맙다.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부만두 2021-02-03 18: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멈추지 않고 계속 읽으시는 당신, 고맙고 (좀 얄밉습니다)

단발머리 2021-02-03 19:44   좋아요 1 | URL
고맙고, 감사합니다. 아주아주 많이요😘

2021-02-03 1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03 1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03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03 2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붕붕툐툐 2021-02-03 2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은 꼭 읽어줘야 하는데, 읽기가 쉽지 않다는 게 함정이에요..ㅠㅠ kbs라디오 문학관에서 정지아님의 <검은방>을 듣는 데도 몇 번을 끄고 싶었다는..ㅠㅠ

단발머리 2021-02-03 20:17   좋아요 2 | URL
전 진짜 읽기 힘든 작가가 한강이거든요. 근데 이 책 작가가 한강에게서 수업들었더라구요. 정지아님의 <검은방>은 처음 들어요.
붕붕툐툐님 못 들으시면 저도 못 들을 듯 해요 ㅠㅠ

붕붕툐툐 2021-02-03 20:24   좋아요 1 | URL
오~ 분위기가 한강 작가님이랑 비슷한가요? 그냥 내가 이리 편히 사는게 누군가 피흘린 희생 덕분인데, 난 평소에 암 생각없이 살았다는 부채감과 미안함 같은 거죠.. 근데 그 마저도 외면하고 싶어하니, 사람이 참..ㅠㅠ

단발머리 2021-02-04 16:58   좋아요 1 | URL
진지한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전 한강님 작품은 <채식주의자> 밖에 안 읽어봐서요. 저의 짐작일 뿐이지만요^^

2021-02-03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04 17: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n22598 2021-02-04 0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고향이 전라도인데, 중학교 때 그 당시 광주에서 학교다니셨던 선생님들이 본인이 겪었던 이야기를 계속계속 이야기 하셨어요....끊임없이.....이 작가와 비슷한 이유때문에 그렇게 하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단발머리 2021-02-04 17:06   좋아요 1 | URL
han님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광주가 가졌던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광주분들이 감당할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저희는 영화나 소설을 통해서만 엿볼수 있었는데 말이지요ㅠㅠ 그 선생님께서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이었다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ㅠㅠ

얄라알라 2021-02-04 14: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han님 이야기하시니, 저도 중학교 때, 윤리(도덕이었나?) 선생님께서 수업은 조금 하시고, 베트남 참전 이야기, 차마 묘사하기 어려운 죽음의 과정 이야기를 자꾸자꾸 하셔서, 그 분 얼굴 체구, 음성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어요. 너무 큰 고통은 발화해도 뽑아내려해도, 안 지워지시는 거겠죠? 어른이 되고 나니, 조금 이해되지만 그 땐 괴기스러웠어요

단발머리 2021-02-04 17:15   좋아요 1 | URL
아.. 그 선생님도 트라우마가 있으셨던 걸까요? 사실 학생들은 그냥 듣는 입장일 수 밖에 없는데 ㅠㅠ 듣기만 하는 입장에서는 힘들수도 있었겠어요.

얄라알라 2021-02-04 17: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로 그랬어요. 슬래시 영화(?)라 하나요.....그런 묘사를 어린아이들에게 왜 하셨을까요?......

단발머리 2021-02-04 17:24   좋아요 1 | URL
어머나, 그건 좀 무섭네요 ㅠㅠ 어린아이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일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