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인터뷰 대상자의 이름이 익숙해 책을 찾아보게 됐다. 박홍규. 박홍규? 박홍규라면반 정도 읽다가 현재는 행방이 묘연해 오랜 기간 읽고 있어요중인오리엔탈리즘』의 번역자 아닌가? 확인해 보니 맞았다. 그 박홍규 교수가 이 책의 주인공이다.

 


박홍규 교수는 영남대학교에서 1991년부터 2018년까지 노동법을 가르쳤고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한평생 매일같이 도서관에 다니며 빈센트 반 고흐, 이반 일리치, 조지 오웰, 헤르만 헤세, 레프 톨스토이와 마하트마 간디, 한나 아렌트와 헨리 데이비드 소로, 미셸 푸코와 루쉰과 몽테뉴 등에 관한 150여 권의 책을 쓰고 번역했다. 오전 2-3시 기상, 여름에는 오전 7시에 아내와 함께 논일을 나가고 퇴근 후 한 시간 더 일하면서 600평의 땅을 일궈 나간다. 자급자족의 실천이다. 인터뷰 형식이어서 그의 삶과 독서, 개인과 사회에 대한 그의 생각을 비교적 편안하게 들을 수 있다.

 



교수님이 1980년대에 푸코의감시와 처벌』을 먼저 우리말로 옮기셨던 것도 사이드를 번역하게 되신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푸코 말씀을 해주셔서 말인데, 1995년이었나요? 교수신문사에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번역서 10권을 꼽았는데, 그중 제가 옮긴 책이 두 권이나 있었어요. 『오리엔탈리즘』감시와 처벌』 10권 중에서 2권을 차지했었는데요, 제 자랑 같지만 이건 퍽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웃음) (120)

 

 


『오리엔탈리즘』을 번역하게 된 사연이 무척이나 흥미롭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그 책을 읽고 있는 박홍규 교수를 보고 한국에서 온 영문과 교수가 이런 책도 읽느냐 물었다고 한다. 10여 년이나 된 이 책이 왜 한국에 번역이 안 됐는지 궁금하다 했더니, 그는 그 책을 번역할 사람이 없을 거다, 한국에서는 별로 관심도 없고, 자기가 보기에 그 책이 읽힐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한다. 오기가 생긴 박홍규 교수는 그 날밤 아내에게 내가 이 책을 번역하겠노라 말했다고. 이는 하나의 에피소드일 뿐이지만, 그의 말을 찬찬히 따라가 보면 한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팽배했던 서양에 대한 맹신과 서양 중심적 사고가 그를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번역으로 이끌었던 게 아닌가 싶다.

 

또 한 가지는 그가 가진 위치, 서울의 좋은 대학, 한국을 대표하는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그의 위치가 변방으로서의 아시아를 인식하게 했던 것 같다. 세계 최고라고 하는 하버드 대학에서조차 누구는 아버지가 대법원장이네, 누구는 아버지가 대법관이네, 라며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는 그들로서는, (자기들이 보기에 시골의) 지방대를 나온 박홍규 교수가 자신들과 같은 세계의 중심’, 하버드에 속한다는 걸 참아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너서클은 점점 더 좁아진다. 자신이 내부에 속한다고 안심하는 이들은 그 원을 점점 더 작게 그린다. 그들만의 법칙대로라면, 박홍규 교수는 처음의 원이 그려질 때부터 원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위치에서만 볼 수 있는 무엇인가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변방으로서의 자기 인식오리엔탈리즘의 진실을 밝혀줬다고 할까.

 

 


가난하고 외로웠던 어린 시절, 빈집에 들어가기 싫어 헌책방을 헤매던 중학교 남자아이의 이야기는 진지하고 성실한 독서로 이끄는 힘이 외로움에 있음을 확인하게 한다. 기쁜 일이 있을 때 책을 읽지 않는다고, 슬플 때, 분할 때, 억울할 때 읽는다는 유시민 작가의 말도 기억나게 한다. 부제도 고독한 독서인. 추천사를 쓴 정혜윤 피디도 이 책은 시종일관 고독의 책이었다고 말한다.

 


어젯밤에 시작해 반 정도 읽었다. 나도 잠시 고독하고 싶으니, 끝이 없는 것처럼 이어지는 휴일이지만, 오늘은 모두 늦잠 자기를

나도 좀 고독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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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1-30 10: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글을 정말 빠져들게끔 쓰시는 것 같아요. 읽다가 책에 있는 내용 인용인줄^^;

단발머리 2021-01-30 18:35   좋아요 2 | URL
위의 책이 인터뷰책이라 술술 읽혀요. 에피소드 따라적어서 쉽게 읽혔나봐요^^

수이 2021-01-30 10: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으로 달려갑니다~~~~~ 쓩쓩~~ 단발머리님 동거인들은 모두 오늘 대책 없이 늦잠 자소서! 단발머리님의 고독을 응원합니다!!

단발머리 2021-01-30 18:36   좋아요 1 | URL
왜 토요일에 평일보다 더 일찍 일어나냐고요!!!! 😡😡😡 알게 되면 연락줘요. 알기 전에는 연락 말아요!!!

난티나무 2021-01-31 00:18   좋아요 0 | URL
이 또한 또다른 우주의 법칙... 왜 주말에 더 일찍 일어나냐 했더니 그냥 눈이 떠진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하더이다.ㅋ

유부만두 2021-01-30 11:3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독을 원합니다.

내 고독 어디 있니, 작고 소중한 나의 고독아 ... 웨어 아 유? ㅠ ㅠ

단발머리 2021-01-30 18:35   좋아요 3 | URL
고독이, 제가 여기 위의 글 올리자마자 집 나가더라구요.
유부만두님 댁에 간 거 아니에요? 오늘 저녁에 자고 내일 아침에는 저희집으로 돌려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유부만두 2021-01-30 21:07   좋아요 1 | URL
아뇨, 안 왔어요. 어뜩해요...제 고독이도 집 나간지 오래됐어요. 얘들이 같이 있나?.. ㅠ ㅠ

단발머리 2021-01-30 21:46   좋아요 0 | URL
어머나 그래요? 애네들이 도대체 어디에 갔을까요?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밖은 추운데요.
일단 문자 하나 남겨보고 기다려보기로 해요, 유부만두님!
혹 늦게라도 유부만두님 댁으로 가게되면 내일 아침만 먹여주시고, 저희집 고독이는 얼른 집에 가라 보내주세요. 꼭이요!!!

유부만두 2021-01-30 22:02   좋아요 0 | URL
그럼요, 그럼요. 둘이 같이 있다면 낫겠어요. 애들 밥 걱정은 마세요. 단발님 고독이 제가 잘 먹이고 그럴게요. 근데 얘들 들어오면 다신 못 나가게 묶어놔야겠어요.

단발머리 2021-01-30 22:08   좋아요 0 | URL
휴우~~ 한시름 덜었네요. 유부만두님 식단이면 정말 걱정없습니다! 핸드폰 위치 추적하는 거 있더라구요. 저희집 애들도 해준 적 없는데 고독이한테는 꼭 해줘야겠어요.

붕붕툐툐 2021-01-30 19: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은 후 사이드의 책을 읽고 싶었는데, 게으르게도 책은 안 찾아보고 있었어요. 단발머리님 덕분에 알게 되었네용~👍
전 반대로 늘 고독해서 읽었어요~ㅋㅋㅋㅋ

단발머리 2021-01-30 21:47   좋아요 1 | URL
전 오랫동안 <오리엔탈리즘>이 ‘읽고 있어요‘ 중입니다. 야금야금 읽어야 하는데 말이지요.
고독해서 읽으셨다니 부러운 마음 뿐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1-01-31 15:51   좋아요 1 | URL
툐툐님 댓글 읽고 제 고독이 흑흑흑 울고 있습니다. 난 왜 이렇게 시간이 안 나는거지 ㅠㅠ

단발머리 2021-02-01 09:38   좋아요 1 | URL
저도 붕붕툐툐님 부러울 따름입니다!!
오늘 온라인 수업 개학했어요. 저희집 고독이 잠깐 마실 보낼까요, 수연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21-02-01 0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01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직 두 권 밖에 못 읽었지만 푸코를 읽으며 보냈던 외로운 밤의 기억이 내게는 이렇게도 또렷한데... 그들, 프랑스 지식인들의 책을 읽을 독자층에 나는 포함되지 않는다, 알려주며 하는 말. 그러니까 읽지 않아도 돼. 

무엇이냐! 도전을 부르는 이 도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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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1-27 09: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게 뭡니까! 이...이..... 욕할뻔 했잖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푸코 읽어야겠는데요? 물론 저는 성의 역사 다 읽었습니다만? 후후후후훗

단발머리 2021-01-27 09:47   좋아요 1 | URL
욕은 저랑 같이 하시고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프랑스 사회는 언어가 계층화 되어 있어서, 그니까 일테면 지식인의 말과 일반인의 말이 다르다고 설명하고 있어요. 푸코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지식인‘만‘을 대상으로 말하고 쓴다고 해요. 성의 역사를 다 읽으신 분이라면 푸코의 다른 책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지식인이니까요!!!

다락방 2021-01-27 09:47   좋아요 1 | URL
그보다는 지식인이 아닌데 지식인의 글을 읽느라 제가 토할뻔 했던것 같습니다. 흠흠.. (슬픔)

단발머리 2021-01-27 09:51   좋아요 1 | URL
전 푸코 책, 롤랑 바르트 책, 데리다 책, 라캉 책, 다 읽고나서, 나도 지식인이야!!! 하고 싶은데, 현실은 <성의 역사>도 완독 못 한 사람.... (시무룩)

얄라알라 2021-01-29 08:03   좋아요 0 | URL
프랑스 사회 언어 계층화는 무척 흥미롭네요. 영미권 이야기만 듣다보니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정말 ˝지식인/일반인˝ 말이 다르다니! 여성명사 남성명사만 구별하는 게 아닌가봐요?

수이 2021-01-27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단발머리 2021-01-27 10:44   좋아요 1 | URL
😡😡😡😡😡😡😡😡😡

미미 2021-01-27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머×저 얼마전 롤랑 바르트 읽다 놨는데..뜨끔한 기분..하..ㅠㅇㅠ

단발머리 2021-01-27 10:55   좋아요 1 | URL
롤랑 바르트도 그 나쁜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전 미미님 편입니다!

수이 2021-01-27 10:58   좋아요 1 | URL
그래도 롤랑은 푸코보다는 나은 거 같아요. 롤랑 글 하나도 기억 안 나는 1인_ 읽었던 거 같긴 한데....... 먼산 바라본다

단발머리 2021-01-27 11:17   좋아요 1 | URL
두 분 다 읽으셨으니 저도 롤랑 바르트!! 읽고 먼산보기 ( “)

잠자냥 2021-01-27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쳇 알았어 안 읽어. 흥피칫.

단발머리 2021-01-27 12:14   좋아요 1 | URL
이런 자세야말로 진정한 지식인의 자세라고 저 역시 생각합니다! 락방님은 욕을 할뻔 하셨고요, 수연님은 부르르르르르르 떠셨다 합니다.
저는 여러분께 이르려고 캡처를 했습니다. 이렇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스티븐 호킹에게 관심이 있어서도, 블랙홀에 흥미가 있어서도 아니다. 해설을 맡았다는 이종필 교수를 유튜브에서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이종필 교수 때문도 아니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집어 들었던 건 오로지 책의 크기 때문이다. 작고 얇아서. 특수 상대성이론과 일반 상대성이론과 열역학 제2법칙과 엔트로피는 항상 매혹적이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우주, 내가 발 딛고 있는 지구의 움직임과 그 움직임의 규칙에 대해 들을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 이해의 차원이 아니다. 내가 가늠할 수 없는, 내가 알지 못하는 법칙과 운동에 의해, 나의 세상이 살아 숨 쉰다는 것, 나의 우주가 움직인다는 것. 그게 중요하다. 나 역시 살아있다고 느낀다.

 

1부는 스티븐 호킹의 BBC 리스 강연을 담았고, 2부는 이종필 교수의 해설이다. 다 이해하겠다는 욕심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읽는 처지이어서 역시 2부가 읽기 편했다. 과학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가진 분들이 읽기에는 쉬운 책이고, 호킹복사, 일원성 연산자, 끈 이론 등을 간단하게라도 이해하고 싶은 분들에게는 좋은 안내서가 될 듯하다. 여러 법칙과 규칙 중에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바로 이것.

 


다른 천체는 물론 그렇지 않다. 질량이 똑같더라도 크기가 얼마인가에 따라 표면중력도 달라지고 평균밀도도 달라진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블랙홀 대머리 정리no hair theorem’라 부른다. 모든 블랙홀은 서로를 구분할 수 있는 독특한 성질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머리카락이 긴 사람들은 저마다 개성 넘치게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뽐낼 수 있지만, 머리카락이 없는 대머리의 헤어스타일은 오직 하나뿐이다. (108)

 


떠오르는 헤어스타일은 물론 머리카락 없는 대머리이고, 제일 먼저 떠오른 남자는 M. F. 그 남자가 아니라, J. S. 바로 그 남자였다.  

 

 















2.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우치다 다쓰루의 두 번째 책이다. 정년퇴임을 앞두고 진행한 마지막 강의 창조적 글쓰기의 내용을 책으로 묶었다. 책 제목이나 목차를 봐서는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가 주요할 것 같지만, 반 정도 읽은 현재로서는 언어에 대한 생각을 더 치열하게 풀어냈다는 느낌이다. 소쉬르의 애너그램 연구에 대한 이야기는 이해하기 어려웠어도 재미있게 읽었다. 제일 흥미로운 챕터는 당연히’ <2 : 하루키가 문학의 광맥과 만난 순간>이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은 1919년 『대장 몬느』, 1925년 『위대한 개츠비』, 1953년 『기나긴 이별』, 1982년 『양을 쫓는 모험』이라는 서사의 ‘광맥이 확실하게 존재한다는 것뿐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구멍을 파는 동안에 어느 날 문득 문학적 계보의 도도한 흐름과 마주쳤습니다. 광맥이라는 말은 땅속 깊이 있기는 한데 언제 생겼는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매장량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그때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기 발밑을 자기 곡괭이를 사용해 파내려가는 동안 ‘누구의 것도 아닌 흐름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글쓰기라는 것을 확신했다고 생각합니다. (57)


저자는 알랭 푸르니에의 작품이, 피츠 제럴드에게로, 레이먼드 챈들러에게로, 무라카미 하루키에게로 연속적으로 이어졌던 역사적 상황을 설명한다. ‘화자의 약하고 아름답고 사악하고 무구한 또 다른 자아의 영원한 실종이라는 주제가 네 개의 작품에 거의 동일하게 그려지고 있다(54)는 것인데, 네 개의 작품을 관통하는 광맥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자신이 누군가의 구조를 그대로 베끼고있다는 사실을 작가는 인지할 수도,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성공했다. ‘금맥을 찾아낸 하루키에게 박수를.

 
















3. 타이탄의 도구들

 

새해맞이 기념으로 자기계발서 한 권 읽었다. 유명하신 분들, 사회적으로도 크게 성공하신 분들 한 자리에 모신 것까지는 좋았는데, 가끔 서로 간의 주장이 어긋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고 끝내 성공하고. 욕심내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한 번의 인생, 우리 모두 더 행복하고 더 값진 삶을 원하지만, 해답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명상, 아침 일기 쓰기, 메모하기 등은 삶을 새롭게 구획 짓는 (이미 알고 있는) 좋은 제안들이다. ‘오늘의 메뉴’, ‘한살림, 마트 다녀오기만 적지 않고 다른 것도 적고 싶다<모든 길은 스스로 열린다>의 이런 문단이 눈에 들어온다.

 


자신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사람, 남들은 다 잘 아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걱정하지 마라. 남들도 잘 모른다. 모른다는 것이 핵심이다. 꼭 알지 않아도 된다. 그냥 앞으로 계속 가면 된다. “꼭 비결을 캐내고, 뭔가를 알아야만 열심히 몰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방식에서 벗어나야 자연스럽게 몰입이 된다. 무엇이 나를 창의적인 몰입으로 이끄는지 거의 4년 동안 배우고, 묻고, 생각했지만 얻은 답은 없었다. 다만 아무것도 모르는데도 어느새 내 자신이 저절로 몰입을 허용하고 있었다.” (206)

 


그냥 앞으로 계속 가면 된다는데, 그곳에 길이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한 길을 모르는데도 일단 앞으로 걸어갈 수는 있다. 끝까지 모른 채로 살아가는 게 인생이니까. 멈추지 말고 걸어가면 된다는 것이고, 그 길은 바로 내 발 앞에.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구나, 누구든 답은 이미 알고 있다.



 














4. 올랜도

 


주인공 올랜도는 16세기(1588) 영국에서 16세의 미소년으로 등장해 30세에 남자에서 여자로 성이 바뀌는 놀라운 사건을 겪는다. 그녀는 이후 300여 년을 살아가다가 1928년에는 36세의 여인이 되어 있다. 작품 내에서는 이 소설이 전기임을 여러 번 강조하는데, 오히려 울프는 전기적 요소와 판타지적 요소를 혼합함으로써 전기소설에 대한 고정관념에 도전한다. ‘장르에 대한 도전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받는 듯하다.

 


두 성은 서로 다르지만, 서로 섞여 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 양성은 유동적이며, 남자답거나 여자답게 보이게 하는 것은 옷뿐이고, 그 속의 성은 겉과는 정반대인 경우가 흔히 있다. 이로써 생기는 분류와 혼란은 누구나 경험한 바 있다. (167)

 


잠자는 숲속의 공주와 비슷한 며칠간의 깊은 잠이후 올랜도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한다. 터키에 파견된 영국 대사로서 격무에 시달리던 젊은 남성 올랜도는 이제 터키의 집시들과 함께 산과 들을 떠도는 자유로운 여성이 된다. 쌍둥이처럼 닮은 두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을 통해 남성의 삶으로, 여성의 삶으로 살아진다’. 소재의 특이성만큼이나 역사를 가로지르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가히 독보적이다.    

 

작가와 작품을 얼마나 유기적으로 보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작품 속의 모든 장치를 작가를 이해하기 위한 단서로만 해석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글로 쓰인 모든 것들은, 모든 문장은 결국 작가를 투영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고 묻게 된다. 올랜도의 말은 버지니아 울프의 말이고, 올랜도의 물음이 버지니아 울프의 물음이라는 걸 기억할 때, 이 소설의 모든 말과 물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반짝반짝 빛난다. 『댈러웨이 부인』보다 더 편안하게 읽히고, 『댈러웨이 부인』만큼 재미있다. 사실은, 훨씬 더 재미있다.

 


그렇게 그는 어둠 속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얼굴 한쪽을 뭔가 부드럽지만 묵직한 것으로 얻어맞았다. 기대로 잔뜩 긴장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깜짝 놀라 칼에 손을 가져갔다. 이마와 뺨을 여러 차례 얻어맞았다. 건조한 한파가 너무 오래 계속된 터여서, 이것이 빗방울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까 비가 얼굴을 때리고 있었던 것이다. (55)

 


버지니아 울프를 읽지 않았던, 내 모든 지난날이 아깝고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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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1-26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번책 저도 침실에 두고 조금씩 보고 있어요^^ 말씀하신 모든 (계속 ˝나도나도!˝ 이럼ㅋㅋ)부분에 공감이예요!
마지막 울프에 대한 아쉬움도요♡

단발머리 2021-01-26 11:00   좋아요 1 | URL
공감 100%를 완성해주신 미미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전 앞으로도 계속 쉬운 과학책을 읽어갈 생각이에요. 순수하게 ‘몰라도 괜찮다‘의 마음으로 이어지는 독서가 너무나 즐겁네요.
울프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모두 흐아아아앙아앙 ㅠㅠㅠㅠ

수이 2021-01-26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마지막 문장에 제 가슴을 묻습니다 ㅠㅠ 왜 왜 왜 그랬어?! 왜 울프 언니를 젊은 시절 안 읽었어?! 이 못난 수연아 ㅠㅠ 하염없이 눈물이 나옵니다

단발머리 2021-01-26 11:02   좋아요 0 | URL
저도 주일밤 1시가 넘어서 책장을 덮으며 수연님과 같은 말을 되뇌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는 질문을 끝내 묻고야 말았죠.
나는 왜..... 한살이라도 젊을 때 이 책을 읽지 않았던 거야!!! 이 좋은 책을, 왜 ㅠㅠㅠ

유부만두 2021-01-26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랜도가 그렇단 말이지요? 댈러웨이 부인보다 더 말이죠? 호로롱 (넘어가는 소리)

단발머리 2021-01-26 11:33   좋아요 0 | URL
컴온컴온컴온!! 컴온을 부르는 소리입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

다락방 2021-01-26 1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올랜도> 내용 모르고 있었는데 오늘 단발머리님 페이퍼 읽고 충격 받았습니다. 이런 내용이었다니.. 당장 사야겠어요!

오늘 인용문들이 다 기가 막히게 좋으네요. 아마도 그래서 단발머리님이 인용하셨을테지만요. 저는 우주, 지구 이런거에 너무 관심이 없어서 책도 전혀 안읽는데, 단발머리님 짱 멋져요! 저도 관심을 가져야되는데...라는 생각만 이천번째 하고 있어요 ㅠㅠ

그나저나 제목에서 J. S. 가 누구일까 했었답니다? 그러나 본문을 읽으니 누군지 알겠네요. ㅋㄷㅋㄷ

단발머리 2021-01-26 11:35   좋아요 0 | URL
젠더 연구에 있어서 꼭 살펴봐야하는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하더라구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문장들이 전 너무 좋더라구요. 물론 다 이해한 건 아니지만요 ㅠㅠㅠㅠ 버지니아 울프는 천재가 확실합니다!!!

J.S.는 제가 최근에 관심을 갖게 된 1인으로서, 슬쩍 보기엔 M.F.와 매우 비슷해 보이나 두 사람이 추구하는 세계는 사뭇 다르오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1-26 11:38   좋아요 0 | URL
이 페이퍼에 언급하신 것만 읽어도 울프는 천재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천재가 아닐 수 없는 겁니다. 저도 울프 천천히 다 읽어보도록 해야겠어요. 하아.. 왜이렇게 읽을 작가와 책이 많은건가요, 단발머리님? 좋으면서 싫고 싫으면서 좋으네요. 흑 ㅜㅡ

단발머리 2021-01-26 11:44   좋아요 1 | URL
전 사실 아직도 모르는 작가가 너무 많고 또 하나의 작품도 읽지 않은 작가들이 어마무시하니까요. 주요작, 대표작만 읽어도 괜찮겠다,생각하고 살아왔거든요. 근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버지니아 울프는 다 읽는 게 좋을거 같아요. 어렵기도 할테지만요. 꼭, 전체를 읽어보고 싶은 작가에요. 저 역시 그래요. 좋으면서 싫고, 싫으면서 좋아요 ㅠㅠㅠ 우리 오래오래 건강하게 책 읽읍시다요!!!

비연 2021-01-26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이탄의 도구들>은 어떨까요. 추천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단발머리님의 추천이 제게는 제일 힘이 셀 듯.

단발머리 2021-01-26 21:02   좋아요 1 | URL
저는 일단 별을 세 개 주었습니다. 일반의 자기 계발서들처럼 알고 있는 이야기가 많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래도 깨달음을 주는 문단이 3-4개는 되었던 것 같습니다^^

2021-01-26 1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26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21-01-26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께서 말씀하신 책이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이었군요. 이종필 교수는 대중과 함께 하는 물리학자로 이름 높은 분이기에 그분이 풀어쓴 호킹의 블랙홀 이론이 궁금해집니다. 단발머리님 덕분에 좋은 책 알아갑니다. 감사합니다.^^:)

단발머리 2021-01-26 21:05   좋아요 1 | URL
이종필 교수님이 자기도 블랙홀 전문가가 아니니 공부하면서 최대한 쉽게 썼다 하셨는데 정말 쉽게 쓰려고 노력하신 듯 해요.
이해할 수 없는 것들 뿐이었지만 읽는 시간은 무척 즐거웠습니다. 아주 얇은 책이라 겨울호랑이님은 금방 보실 듯 해요^^

han22598 2021-01-27 0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학과 과학을 모두 섭렵하신 단발머리님이시닷!

단발머리 2021-01-27 16:45   좋아요 0 | URL
우앗!! 너무 부끄럽습니다. 따뜻하고 넓은 마음 감사해요, han님! 💜
 



















 

The woman, animalized; the animal, sexualized. That’s the sexual politics of meat. (Preface to the 20 Anniversary Edition)

 


사회화 과정을 통해 배우기는 하지만, 육식은 명백히 개인적인 체험이다. (192)

 


채식주의 단어를 낳는 마지막 형태는 개인들이 채식주의 관련 텍스트들을 읽은 일이 계기가 돼 육식을 중단한다고 말할 때 발견된다. (212)

 



결국,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두 개의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육식을 중단하거나 육식을 계속하거나.

 

여성을 동물화하고, 동물을 성애화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육식의 성정치다. ‘죽은 동물의 사체고기라고 부르는 것. 이것이 바로 가부장제가 육식을 통해 이 세상을 지배하는 방식이다. 동물권을 위해 육식을 거부할 수 있고, 건강을 위해 육식을 거부할 수도 있다. 다만, 이렇게 맛있고 고소한 남의 살을 거부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필요하다. 한국의 식단은, 특별히 전통 식단은 이런 결심을 이어 나가는데 완벽한 완충지대가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까운 곳에서 먹는 것을 살펴줘야 하는 1인이 육식을 거부했을 때, 나는 그 애 손을 꼭 잡고 한참을 중얼거렸다. 학교 성적 말고 아무것도 묻지 않는 인권 사각지대인 대한민국 10대인 네가, 공식적으로 비공식적으로 성적 대상화된 한국의 10대 여자 청소년으로 사는 네가, 채식주의자까지 된다면. 네 앞에는 얼마나 많은 난관이 존재하겠느냐. 너는 왜, 왜 육식을 거부함으로써 불러일으키는 이 모든 소란스러움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려 하느냐. 난 결국 그 애를 말리지 못했고, 2가지 식단을 준비했다. 엉망진창 식단이 매일 그렇게 이어졌고, 난 아직도 익숙해지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만나 밥을 먹을 때 사람들은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묻는다. 그건 너무 중요한 문제지만, 그 문제에 대한 답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질문은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 이지만, 대답은 질문한 사람이 하고 만다. , 이상한 애구나. , 까다롭네. 물론 속으로 말이다. 그 애가 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를,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다만 모른 척할 뿐이다.

 


채식주의를 실천할 때의 갖은 어려움을 옆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나로서는, 그 결정이 쉽지 않다. 사실 피하고 싶다. 채식주의 선배님과의 통화에서 위로를 얻는다. 탄수화물 좀 많이 먹어도 괜찮아. 빵까지 채식 빵으로 먹는 건 쉽지 않아. 고깃국물, 멸칫국물까지 적용하는 건 사실 좀 어려워. 고깃덩어리, 고기 그 자체를 먹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도 괜찮아.

 

식재료를 사는 사람은 나니까 고기를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줄여나갈지 생각한다. 먼저는 양을 줄이고 그다음으로는 종류를 줄여 보기로 한다. 소고기를 넣지 않은 미역국, 돼지고기를 넣지 않은 카레, 참치를 넣지 않은 김치볶음밥을 좀 더 자주 만들기로 한다. 우유, 생크림크림치즈를 줄인다. 달걀을 줄인다. 치킨을 줄인다. 연어 초밥을. , 연어 초밥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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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21-01-18 2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옷 원서닷!!!!!!! 부럽!!!!

저도 헬렌니어링 저 책 다 읽었어요. 헤헤 이 책에도 나오니 반갑더라고요.

단발머리 2021-01-18 23:23   좋아요 1 | URL
최근 저의 최애 원서로 아주 폼나는 원서라 하겠습니다. 표지는 원서가 더 나은 것 같더라구요. 주제를 더 잘 보여주고요.

헬렌니어링 책에는 제가 좋아하는 구절이 정말 산더미 같습니다.
간단히 먹어라. 그 시간에 친구와 이야기를 나눠라.
조리하지 말고 먹어라. 그 시간에 바느질을 해라.
자동 아멘입니다.

난티나무 2021-01-18 23:16   좋아요 1 | URL
아멘.
아 진짜 간단히 먹으면서 친구랑 이야기 한없이 하면 좋겠어요!!!!!
오늘은 단발머리님과 이야기 나눴으니 기쁨기쁨!!!

단발머리 2021-01-18 23:19   좋아요 1 | URL
난티나무님과 이야기 나누다 보니 저 책을 한 번 더 읽고 싶네요.
다른 은혜의 말씀이 무궁무진하니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커피 한 잔 가지고 마주 앉아도 마음 통하는 친구이면 마냥 즐겁지요.
저도 난티나무님과 이야기 나눴더니 스타벅스가 부럽지 않네요!!!!!

난티나무 2021-01-18 23:28   좋아요 1 | URL
하트 뿅뿅 ~~~~~!!!!! ☕️💗 아우 이모티콘에서 하트 엄청 오래 찾았어요.ㅋㅋㅋ
소박한 밥상 저도 틈틈이 읽어야 겠다고 생각하는 책 중 한 권입니다.
그럼 이만! 뿅뿅!!!!!!

단발머리 2021-01-18 23:31   좋아요 1 | URL
좋은 날 되세요! 전 난티나무님 덕에 굿나잇이에요! ❤️🧡💛💚💙💜💕

수이 2021-01-18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 원서다!!!! 알록달록_ 근데 저....저는....... 차마 육식을..... 흑흑 부끄럽다요.

단발머리 2021-01-18 23:41   좋아요 0 | URL
저 원서로 말씀드릴것 같으면 바다를 건너온 책으로서 다정한 친구의 선물입니다^^
부끄러운 일은 아니에요. 저도 아직 치킨과 치킨버거는 좋아하거든요. 그래도 같이 함 울까요. 흑흑 ㅠㅠㅠㅠ

수이 2021-01-18 23:44   좋아요 0 | URL
치킨, 삼겹살, 우육탕 좋아하는 나 같은 건 죽어야 해 흑흑흑 ㅠㅠ 다정한 벗의 선물 아 넘 멋져요.

단발머리 2021-01-18 23:47   좋아요 0 | URL
치킨, 순대, 갈비탕도 만만치 않아요. 나도 울고 있어... ㅠㅠㅠ 흐미
다정한 친구랑 다정한 친구의 선물이 딱 세트지요.

미미 2021-01-18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원서 읽는 분이셨군여! 대단대단👍

단발머리 2021-01-18 23:42   좋아요 1 | URL
저는 원서 읽는 단발머리는 아니구요 ㅠㅠㅠㅠ 원서를 사는 단발머리입니다.
이 책은 제가 도전할만한 책은 아닌데 다정한 친구 덕에 몇 군데 밑줄을 그어보았지요^^

han22598 2021-01-19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딴 이야기일 수 있는데, 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닌, 판단하기 위한 질문.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 물어보고 들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자에게는 말해줄 수 있는데, 그리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생길 수 있는데...
그런 기회들이 많이 파생되는 질문들이 자주 생겨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단발머리 2021-01-22 10:58   좋아요 0 | URL
채식주의에 대한 질문이란 건, 판단하기 위한 질문 같다는 생각이 전 자주 들어요. 아닐 수도 있을테고, 어쩌면 으레 움츠러들 수도 있었을 거고요.
중요한 건 물어보고 ‘듣는 거‘라고 생각해요. han님 말씀처럼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질문을 일단 했다면, 좀 들어줬으면 합니다^^

비연 2021-01-19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육식... 육식.. 이 책 읽으면서 육식이 줄었는데... 흠냐. 암튼 이 책 좋은 책은 분명 ㅎㅎ;

단발머리 2021-01-22 10:59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참 좋았어요. 부담스러운 구절을 만난게 여러번이었지만요.
우리의 마지막은, 흠냐 ㅎㅎㅎㅎㅎㅎ
 

















1. 슬픔이여 안녕


 

시릴이 나를 향해 성큼 걸어와 내 팔에 손을 얹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나는 그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가 멋지고 매력적이라고 여겼을 뿐이다. 나는 그가 내게 준 쾌락을 사랑했을 뿐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나는 떠날 터였다. 이 별장을, 이 청년을, 이 여름을. 아버지가 나와 함께 있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내 팔을 잡았다. 우리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183)

 


감각적이다,라는 말이 이 소설처럼 잘 어울리는 소설이 있을까. 열 일곱의 세실과 젊은 아버지, 아버지의 애인 엘자와 죽은 엄마의 친구였던 안이 별장에 모인다. 한국의 가장 추운 겨울날, 뜨거운 햇빛과 바다 수영, 모래사장에서의 해수욕을 마음껏 즐겼다. 무책임하다고 말하고 싶은 구절에는 형광펜을 쭉 그었다. 안에 대한 죄책감을 털어내는 장면과 시릴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세실에게 실망했다. 세실이 평생 동안 괴로워하며 살기를 바란다. 죄책감과 후회, 부끄러움 속에서.


 















2.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7<페티시스트 : 사랑의 존재론 혹은 페티시즘으로의 초대>를 읽었다. 페티시즘의 시작을 유기체의 경계를 살피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매혹은 나의 외부에 있는 무언가가 인접한 거리에서 나에게 손을 대는 것으로서, 매혹에 의해 는 그것에 말려들고 끌려들어간다(254). ‘사랑은 이러한 매혹을 표현할 때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데, 다시 말해 사랑이란 매혹에 의해 야기된 감정이다(256). 무언가에 매혹되어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감정을 고양시킨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승과 고양의 운동이 아니라 하강과 침몰의 운동이다.(256) 하강과 침몰의 운동으로서의 사랑. 모두 피하고 싶은,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리 되고 마는. 섹스와 젠더에 대한 설명도 아주 풍부하고 쉽게 쓰여있지만, 이런 구절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버틀러의 말대로 젠더적 실천이 우리를 젠더적 주체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젠더적 실천의 수행을 통해 젠더적 주체로 만들어지는 이 과정 속에서 권력의 작동을 발견하는 것은, 푸코를 읽었다면 아주 쉬운 일이다. (267)

 


푸코를 두 권 읽었지만 이해가 쉽지 않은 1인은, 푸코를 시작으로 대머리 사랑의 별천지 세상을 열어가고 있는 똑똑이 친구에게 물어볼 참이다. 젠더적 실천의 수행을 통해 젠더적 존재로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권력의 작동은 잘 발견되고 있나요?

 

페티시즘에 대한 정리도 귀담아 들을 만하다. 저자에 따르면, 남성들의 페티시즘은 사물조차 생식기로 귀착시켜 인간 신체의 대체물로 느끼고, 이를 움켜쥐고 주무르면서 자신의 소유물임을 확인하는 능동성을 특징으로 하는 데 반해, 여성들의 페티시즘은 인간이라는 인격과 무관하고 신체와도 무관하며, 성적 대상과 상대방의 성기에도 관심이 없기에 무성적이라는 것이다. (287)

 

이진경의 책은 어려워서 끝까지 다 읽은 적이 없는데, 이 책에서는 그래도 한 챕터를 건졌다는 생각에 나름 뿌듯하다.




 















3. 슬픈 열대를 읽다  

 


고전 읽기 전문가 양자오의 『슬픈 열대를 읽다』. 『슬픈 열대』는 학술서라고 할 수 없는 글로서, 특정 장르로 규정될 수 없다고 한다. 어느 정도는 일기이고 어느 정도는 여행기이며 어느 정도는 민족지이지만, 산문은 아니고 수필도 아니다. “나는 여행을 혐오한다. 그리고 탐험가 또한 싫어한다.”라고 시작되는 여행기. ‘정상적인 학술 문헌에 어울리지 않는 정신과 유달리 활달하고 거리낌 없는 스타일(67)슬픈 열대』는 도전을 부르는 책이기는 하다.

 

레비스트로스는 직접 원주민 사회로 들어가 자료를 축적하는 것보다 인류 사회에 보편적이고 선험적인 구조가 존재하는지 연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연구를 바탕으로 친족 연구 영역에서 언어학의 구조주의적 방법론을 인류학에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이기도 하다(91). 박사 논문인 <친족의 기본 구조>에서는 근친 상간 금지집단간 여성 교환법칙을 발견했다. 어김 없이 푸코 선생 등장한다.

 



 



내가 읽는 모든 책들이 푸코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나는 그를 사양한다. 반사!!!

 


레비스트로스는 고백한다. 진정한 인류학자는 첫 번째 현지 조사를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온 후 다시 현지 조사를 떠나지 않는다고. 한 번은 꼭 가 봐야겠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한 번의 여행을 특별한 현상에 대해 가졌던 매혹에서 빠져나와 다양한 현상의 한계와 시시함을 냉정하게 꿰뚫어 보고 인류학의 진정한 목적을 발견했다면, 그는 앞으로 탐구해야 할 대상을 원래 살던 환경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즉 그는 이제 자신이 살고 있는 익숙한 환경에서도 구조를 볼 수 있는 안목과 재능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니 다시 여정을 떠날 이유가 있겠는가? (230)

 


제일 좋았던 구절은 여기. 낯설기 위해 반드시 떠날 필요는 없다는 것. 떠나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하다는 것. 진정한 인류학자가 아니어서 그런가. 나는 떠나고 싶은데. 집을 나가고 싶은데.

 
















4. 다락방의 미친 여자

 

알라딘의 좋아하는 이웃님이 추천해 주신 책이다. 품절 상태인데 도서 예약 서비스를 통해 만났다. 산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의 공동 작업이라는 점이 인상깊다. 서로를 대상으로 말하고 쓰고 고쳐 쓰고 다시 말하는 과정이 하나의 결과물로 탄생했다는 것이 그러하고, 두 사람의 노력이 11의 합 2가 아닌, 3 혹은 5 혹은 9 정도로 도약할 수 있음을 여는 글을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집안의 천사로 남편의 즐거움을 위한 안식처가 될 것을 요구 받는 여성의 이미지는 천사-여자에서 결국에는 죽음-천사로 종결된다(94-5). 자신의 개성과 가능성을 죽이고, 이야기가 없는 삶으로 들어가야만 그녀는 희생할 수 있는데, 이는 죽어있는 삶을 살기에 가능하다. 죽음의 삶, 삶 속의 죽음만이 이를 실현해준다. 2<전염된 문장>여성 작가가 된다는 것의 불안에 대해 말한다.

 


포기하도록 훈련받는다는 것은 거의 필연적으로 나쁜 건강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다. 인간이라는 동물의 욕구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강렬한 것은 자신의 생존, 쾌락, 그리고 자기주장이기 때문이다. (142)

 


19세기 문화가 사실상 여성들을 병들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이 고통을 받았던 여성의 질병은 반드시 여성성에 대한 훈련의 산물만은 아니었다. 그 질병이 바로 그러한 훈련의 목표였다. (143)  

 


이상적인 여성은 아픈 여성’, 이상화된 여성은 죽은여성이다. 이것은 19세기만의 일은 아니다.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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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21-01-16 17: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 저도 떠나고 싶어요. 바다 보고 싶습니다.ㅠㅠ
2. 세실... 동감이고요.
3. 푸코 두 페이지 읽고 포기한 자로서 반사! 동참하고 싶네요.
4.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여기에도 한 명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책도 사야 겠습니다.

단발머리 2021-01-18 10:29   좋아요 0 | URL
1. 저는 집만 나갈 수 있어도 감사합니다.
2. 세실은.... 아, 이 애증의 감상
3. 푸코는 현재진행중입니다 ㅠㅠ
4.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쩜쩜쩜..... 저도 포함됩니다.
5. 아픈 여성, 죽은 여성 말고 차라리 시끄러운 여성으로.....
<다락방의 미친 여자> 현재는 품절 상태이고요. 구하시려면 차라리 원서가 빠를 수도 있을 거 같아요.

미미 2021-01-16 18: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퍼가렵니다 냠냠^^*

단발머리 2021-01-18 10:29   좋아요 1 | URL
헤헤헤! 퍼갈내용이 있을까요?*^^*

수이 2021-01-16 2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다락방의 미친 여자 엄청 벽돌책 아닌가요?! 스리슬쩍 지나가면서 우와 두꺼워 어마어마해 그랬던 기억이 살짝..... 세실은 사강만이 창조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닌가 싶어요. 나이든 여자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라면 안의 입장에서 슬픔이여 안녕_을 구술하는 걸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퍼뜩! 오 그대는 천재야!!!

단발머리 2021-01-18 10:31   좋아요 1 | URL
네 벽돌책이 맞습니다. 다 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작만은 호기로웠습니다.
전, 뭐랄까. 세실은 별로지만 이 소설은 너무 맘에 들어요. 자주 자주 꺼내보고 싶을 것 같아요. 열일곱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마다요. 좋은 책 추천 감사해요, 천재 수연님!!!

syo 2021-01-16 2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묵묵하고 꼼꼼한 독서중인 단발님!

단발머리 2021-01-18 10:32   좋아요 1 | URL
묵묵하고 꼼꼼하게 읽어야겠어요!!!! 쇼님이 쓴대로, 그렇게!

붕붕툐툐 2021-01-16 2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번 제가 쓴 줄.. 사랑 받고 싶어서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는게 요즘 깨닫는 저의 모습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해야 할텐데요~ 푸코 반사에서 웃고 갑니다!!^^

단발머리 2021-01-18 10:33   좋아요 1 | URL
사랑 받고 싶다는 마음이 전, 자연스러운 거라 생각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사랑과 관심과 인정을 요구하지 않습니까 ㅠㅠㅠ 푸코는 반사입니다. 명심해주세요. 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