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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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은교가 장안의 화제가 되고, 박범신 소설 <은교>가 원작임을 알았다.

영화와 소설, 둘 다 본 지금 같으면서 다른 두 개의 이야기가 자꾸 겹치려고 한다.

 

원작소설을 읽으면 영화의 빈 곳들(마치 현처럼 팽팽하던, 음악처럼 상징적이던!)이 채워지는 느낌이랄까.

소설은 중반부까지는 독립적으로도 흥미로우나 후반부로 가면서 좀 늘어진다.

전략적으로 시만 써서 위대한 시인으로 남으려는 시인 이적요가

은교라는 소녀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늙음을 회한한다.

'늙음'에는 죄가 없는데 세상 사람들은 늙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폄하한다.

'늙은 죄'로 은교에 가 닿을 수 없는 그의 깊은 슬픔이 (내 나이 이미 많기에) 와 닿았다.

 

 

그의 제자 서지우는 공대생으로 소설쓰기의 재능이 없으나, 스승에 대한 미련한 충성으로

스승 이적요가 심심풀이로 쓴 대중적인 미스테리 소설 '심장'으로 단번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시만 쓰는 사람이 재미로 쓴 소설을 자기가 쓴 것인 양 등단한' 서지우는 고통에 시달린다.

그의 '재능 없음' 역시 예술가로서는 큰 죄다. 마치 이적요의 늙음처럼-

그는 스승이 사랑하는 은교-에 대한 사랑을 저지름으로써 스승에 대한 모반을 꿈꾼다.

 

 

'시인의 일기'와 '서지우의 일기'라는 형식으로 풀어간 소설이 영화와 다른 점은

작가가 '은교'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지우가 다른 단편 하나를 더 훔쳐서 문학잡지에 게재하는 설정으로 나온다.

영화를 봤다면, 그밖의 세세한 차이들을 살펴보면서 읽는 것도 흥미로운 독서가 될 것이다.

 

 

남이 쓴 소설을 자기 이름으로 낸다는 이야기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악의>도 있다.

박범신의 경우 오랫동안 순문학 쪽보다는 '대중문학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지냈는데

그래서 문학판을 비판하는 직설적인 문장도 눈에 띈다. 마치 작가 자신의 심경을 대변하는 듯한-.

사실 그러고보면 박범신 소설을 제대로 읽은 건 처음이다. 영화 덕분이다.

이 책 겉표지는 진부한데, 속표지는 마치 잘 염색한 옷감처럼 색이 곱고 단아하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반역에 대해 알지 못했다. 말하자면 그는 평생 동안 오로지 주인이 주입해준 생각,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짐을 지고 걸어갈 뿐인 '낙타' 같은 존재였다. 니체가 말한바 '낙타의 시기'가 그에겐 영원했고, 따라서 자기반역을 통해 세계를 독자적으로 이해하는 '사자의 시기'는 그에게 도래하지 않았다. (중략) 그러므로 그는 생의 마지마까지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으며,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지닌 죄의 심지였다. -35p

 

 

"난 장르문학이라는 말 안 받아들이네. 문학 앞에 붙는 어떤 관형사도, 알고보면 층위를 나눠 세우고 패를 가르려는 수작이야. 우리 문학판 너무 협소하고 못돼먹었어. 양반 상놈을 아직도 가르려는 패거리가 많은 게 이 동네거든. 자네는 양반을 사고 난 필요한 돈을 얻으면 되지." 우리 한번, 문학판을 갖고 놀아보세, 라고 마음속으로 나는 덧붙였다. -67p

 

 

나는 늘 왜, 라고 묻는 습관을 갖고 있다. 나는 왜 너를 만났는가. 나는 왜 네게 빠져들어갔는가. 나는 왜 너를 이쁘다고 생각하는가. 아, 나는 왜 불과 같이, 너를 갖고 싶었던가.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모든 게 끝나버릴 질문이겠지. 사람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라고 설명하다.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 네가 알아듣기 편하도록 쉽게 설명하자면, 사랑을 본 적도 만진 적도 없어서 나는 그 말, 사랑을 믿지 못한다. (중략)

가능한 대로 나는 '사실적'으로 고백하고 깊다. 보고 만질 수 있는 말들의 조합을 사실적 문장이라고 한다는 것은 너도 알테지. 네가 순결하고 착하고 깊고 빛난다고 나는 늘 생각해왔지만, 그렇게 모호한 어휘들로 내 사랑을 설명하고 깊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왜 네게 빠기게 됐는가를 종일 생각하다가 먼저 떠오른 것은, 너의 손이다. -92p

 

 

하지만 너와 나 사이 그 가파른 시간의 단층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단 말인가. 별빛처럼 단번에 네 눈, 머리, 가슴에 나의 열일곱 시절을 박아넣어, 너의 온 정신을 적실 길이 있다면 좋으련만. -109p

 

 

보통 여자애,

에 불과했다. 이적요 시인이 본 경이로운 아름다움이란 은교로부터 나오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단지 젊음이 내쏘는 광채였던 것이다. 소녀는 '빛'이고, 시인은 늙었으니 '그림자'였다. 단지 그게 전부였다. -163p

 

 

나는 그 무렵, 분명히 연애를 하고 있었고, 내게 연애란, 세계를 줄이고 줄여서 단 한 사람, 은교에게 집어넣은 뒤, 다시 그것을 우주에 이르기까지, 신에게 이르기까지 확장시키는 경이로운 과정이었다. 그런 게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나의 사랑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세상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고유명사였다. -2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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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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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에 대해서 꾸준히 쓰고 있는 작가 김이설. 이번 소설도 예외는 아니어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남편을 둔 식당에서 일하는 아기 엄마가 주인공이다. 동동거리며 하루 12시간을 꼬박 일하고, 서울에서 경기도로 봉고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며, 백일 된 갓난아기에게 젖도 줄 수 없는 여자. 아버지는 암으로 누웠고 두 동생은 돈만 축내고 열일곱 살 때부터 집을 위해 일했던 여자. 그런 여자의 삶은 TV 프로그램인 동행에 나올 만하다.  

상황이 좋아지기는커녕 점점 나빠질 뿐이고, 인생은 함정 투성이지만 주인공은 말미에서 "나는 누구보다 참는 건 잘했다. 누구보다도 질길 수 있었다. 다시 시작이었다."라고 중얼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걸 선택한다. 여자의 생활력은 곧 생명력으로 이어질 것처럼 강하고 질기다. 그리하여 재투성이지만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역설 같다.

작가는 물가를 배경으로 한 단편 두어 편을 함께 엮고 싶었지만 여력이 없었노라, 작가의 말에서 고백한다. 그러게, 200페이지가 좀 못 되는 분량이 아쉽긴 하다.  

아름다운 여성의 뒷모습이 그려진 유화풍의 표지는, 소설의 내용보다 미화된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소설 속 여자가 벌어먹고 사는 도구인 '짧은 치마'를 상징하는 듯하다. 겉표지를 벗기면 드러나는 황금색 속표지가 단정하니 더 마음에 든다. 마치 발현되지 못하고 감춰진 여자의 고귀한 마음을 상징하는 것처럼.   

   
 

뜨거운 죽 한그릇을 앞에 두니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로지 뜨거운 이걸 잘 먹여야겠단느 생각뿐이었다. 크게 한술 떴다가 입천장을 데었다. 아이를 먹일 때는 호, 호, 호, 세 번씩 불어 식혀 먹였다. 아이 한 번, 나 한 번, 아이 한 번, 나 한 번. 아이는 죽 그릇이 다 빌 때까지 입을 쩍쩍 벌려, 주는 족족 다 받아먹었다. 손톱보다 작은 이가 박힌 아이의 붉은 입안을 볼 때마다 가슴이 저릿했다. 분명 내 가슴을 열어 젖을 먹여 키운 아이였는데, 내 손으로 먹을 걸 떠먹여주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아, 잘 먹었다. 빈 그릇을 보여주자 아이가 맑게 웃었다. 자알 머거따! 저도 나를 따라 혀 짧은 소리를 냈다. 먹을 걸 주니 이제야 엄마로 인정하는 모양이었다. 나에게 웃는 아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덥혀졌다. -1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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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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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 김이설 신작이 나왔군요. 얼른 읽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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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남겨져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박도영 옮김 / 북스피어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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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부른 노래를 CD로 만들다니, 북스피어다운 깜찍한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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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미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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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페이지짜리 짧은 소설(책값이 좀 아깝다)인 아가미는 <위저드 베이커리>에 이은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위저드 베이커리에서도 차용한 환타지가 여기서도 나온다. 전작이 발랄하고 오락성이 좀더 강하다면, 이번 작품은 순수문학을 좀더 지향하고자 한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좀 어정쩡한 느낌도 든다.  

구병모의 <아가미>는 은유를 품고 있다. 아가미를 지닌, 반짝이는 비늘을 가진, 물 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남자 곤. 그의 존재 자체가 은유하는 건 살기 팍팍한 인생에 대한 반대편 이미지에 다름 아니다. 사실 곤이라는 인물의 설정이 강하다보니 여타 사건들은 그냥 흘려보내게 된달까, 묻혀버리는 경향도 있다.  

해류, 강하, 노인, 곤, 그리고 이녕. 그들의 인생은 고달프고 곤의 유영만이 빛난다. 위저드에 비해 덜 재미있었지만, 어떤 문장들은 좋았다. 기본기가 탄탄한 작가다. 아직 좋아한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책 소개에서 줄거리를 너무 자세히 써놓은 느낌도 든다. 거기에 거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으니 안 읽어보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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