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미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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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병모가 2011년에 발표한 소설 <아가미>가 새 옷을 입고 다시 출간되었다. 구병모의 소설 중에 가장 좋다는 평이 있기에 어떤 내용일까 궁금해 서둘러 구입해 읽었다. 내가 최근에 읽고 새삼 반한 <파과>와 <네 이웃의 식탁>에 비하면 덜 과격하고 덜 현실적인 내용이지만, 구병모 작가 특유의 예리한 시선과 섬세한 표현은 이 작품에도 분명히 존재한다. 


내용은 이렇다. 식구라고는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어머니뿐이고, 이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는 한 여성이 어느 날 밤 다리 위를 걷다가 강으로 떨어진다. 죽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대로 죽는 것도 괜찮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그때,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강바닥 밑에서 올라와 여인을 건지고 뭍까지 데려가 준다. 여인은 인간인 것도 같고 물고기인 것도 같은, 혹은 인간도 아니고 물고기도 아닌 것 같은 그 '존재'가 자신을 구해줬다는 사실을 신기하게 여긴다.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 아름다운 존재를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누군가에게 계속 말을 건다. 


여인의 말을 시작으로 이야기의 장면이 계속 바뀐다. 공통점은 이야기의 중심에 아가미를 가진 남자가 있다는 것이다. 아가미를 가진 남자가 아직 어린 소년이었을 때, 그를 구해준 할아버지와 그의 손자는 소년을 '곤'이라고 불렀다. 작가가 작중 인물의 입을 빌려 말하길, 곤은 장자의 첫 구절에 등장하는 북쪽 바다의 물고기의 이름이며, 그 크기는 몇 천 리나 되는지 모를 정도로 크다. 곤은 가만히 놀며 잘 지내는 것이 아니라 '붕'이라는 새로 변신을 시도한다. 


작가는 지옥 같은 우리네 일상 곳곳에 어쩌면 아가미를 가진 남자 '곤'과 같은 순수하고 기적적인 존재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 같다. 곤을 발견해 곤이 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오로지 우리네 인간의 몫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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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빈 공간 - 영혼의 허기와 삶의 열정을 채우는 조선희의 사진 그리고 글
조선희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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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조선희의 포토 에세이 <내 마음의 빈 공간>이 출간되었다. 사진에 문외한인 나조차 알 정도로 유명한 작가라서 속이 꽉 찬 나날을 보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저자가 솔직하게 드러낸 '마음의 빈 공간'은 예상과 달리 넓고 휑했다. 언제나 20대로 살아가고 싶은 저자에게 나이에 맞게 살라고, 행동하라고, 너는 지금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들. 한 달 혹은 두 달을 채 버티지 못하고 나가는 어시스턴트 친구들.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는 이 바닥.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디지털이니 뭐니 모르는 용어들... 어쩌면 이렇게 내가 가진 고민들과 꼭 닮았는지. 스쳐 지나간 적도 없는 저자가 친한 언니처럼 다정하게 느껴졌다. 


저자는 이제야 깨달았다고 말한다. 삶에서 틀린 것이란 없다. 그저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는 남과 다른 것이지, 남보다 틀린 것이 아니다. 사람은 저마다 역량이나 크기에 걸맞은 '자기 자리'가 있다. 자기 자리를 가지는 데에는 약간의 흔들림과 뒤틀림이 필요하다. 가구를 이리저리 옮기며 자리를 찾듯, 사람의 들고남도 저마다 자리를 찾는 데 필요한 과정일 뿐이다. 그동안 살면서 괴롭고 불안하지 않았던 시절은 없었다. 어쩌면 그 괴로움과 불안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괴로움과 불안에 짓눌리지 말고 가볍게 앞으로 나아가자. 


가볍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마음은 물론 몸도 가벼워져야 한다. 저자는 스님이 된 친구 효원의 말을 인용한다. 효원은 늘 지금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집에 돌아가면 두 켤레의 신발만 남기고 정리하라고 말한다. 물론 저자는 두 켤레의 신발보다 훨씬 많은 물건을 소유하고 있다. 어쩌면 영영 두 켤레의 신발만 남기고 나머지는 싹 다 정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에 신발 두 켤레만 남기는 법은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이제 그들을 '마음의 빈 공간'에 들이고 그들에게만 오롯이 집중하며 살겠다고 말하는 저자는 여전히 멋지고 새롭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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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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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활동하는 작가 중에 히가시노 게이고만큼 다작하는 작가가 또 있을까. 발표하는 작품의 수와 작품의 완성도가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 모양인지 점점 작품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지는 점은 아쉽지만, 그래도 언젠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전성기를 방불케 하는 뛰어난 작품을 선보일 것이라는 기대에는 변함이 없다. 이를테면 <용의자 X의 헌신>이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백야행>을 뛰어넘는 놀라운 작품을. 


오랜만에 다시 읽은 <용의자 X의 헌신>은 역시 대단하다. 전남편과 이혼하고 도시락 집에서 일하며 중학생 딸 미사토를 키우고 있는 하나오카 야스코는 어느 날 끔찍한 사건에 휘말린다. 야스코의 전남편 도가시가 야스코의 집으로 찾아와 돈을 내놓지 않으면 딸을 괴롭히겠다고 협박하며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참다못한 미사토가 우발적으로 도가시의 목을 졸랐고, 딸의 모습을 본 야스코도 함께 도가시를 살해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옆집 남자 이시가미가 야스코를 찾아와 야스코 모녀를 도와주겠다고 말한다. 야스코는 고등학교 수학 교사이기도 한 이시가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시가미의 청을 받아들이고, 그 즉시 이시가미는 모녀의 완전 범죄를 위한 알리바이를 마련한다. 


천재 수학자이기도 한 이시가미가 단 하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천재 물리학자 유카와 교수의 등장이다. 사건의 수사를 맡은 구사나기 형사는 테이토 대학 물리학과 소속의 유카와 교수에게 자주 조언을 구하는데, 사건 관련자 중에 이시가미가 있다는 걸 알게 된 유카와가 평소와 다르게 사건에 큰 관심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한때 테이토 대학의 2대 천재라고 불렸을 만큼 지능이 뛰어나고 자신이 몸담은 학문에 대한 열정도 엄청난 유카와와 이시가미는 오랜만에 사건을 계기로 재회해 특별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마침내 의문의 살인 사건을 사이에 두고 한 판 승부를 벌인다. 


그저 한 여자를 사랑했을 뿐인 남자와 그저 여러 남자에게 사랑을 받았을 뿐인 여자가 뜻하지 않은 우연이 겹치고 실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중대한 일들을 저지르면서 점점 나락으로 빠져들어가는 모습이 안타깝고 비극적이다. 그렇다고 애초에 이시가미가 야스코 모녀의 일에 개입하지 않았기를, 야스코 모녀가 도가시에게 속절없이 당했기를 바랄 수도 없다. 그랬다면 이시가미는 야스코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은 것이 되고, 그렇다면 살인으로 시작된 이 소설이 사랑으로 끝나는 일도 없었을 테니. '추리 소설 역사상 가장 처절하고 가장 아름다운 한 편의 서사시'라는 홍보 문구가 과장이 아니라고 느껴질 만큼 작품 자체가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부디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작품을 뛰어넘는 작품을 꼭 다시 써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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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E 2023-01-22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야베미유키도 다작 작가네요 ^^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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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당장 말기 암 진단을 받는다면 당신은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존 그린의 소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의 주인공인 열여섯 살 소녀 헤이즐은 말기 암 환자다. 열세 살에 갑상선암 판정을 받았고, 그 후 몇 년을 수술과 입원, 통원 치료로 보냈다. 학교에 다니는 것도, 친구를 사귀는 것도 헤이즐에게는 몸에 큰 무리를 주는 위험한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헤이즐에게 한 소년이 다가온다. 암 환우 모임에서 만난 어거스터스는 골육종을 앓고 있고 한쪽 다리가 의족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잘생겼고 다정하다. 헤이즐과 어거스터스는 서로 첫눈에 반하고 급속히 친해진다.


큰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오디션 프로그램에 열광하는 헤이즐과 비디오 게임에 매진하는 어거스터스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10대 청소년이다. 또한 헤이즐과 어거스터스는 책을 무척 좋아하는 독서광이기도 하다. 헤이즐과 어거스터스는 서로가 가장 좋아하는 책 - 헤이즐은 <장엄한 고뇌>, 어거스터스는 <새벽의 대가> - 을 함께 읽기로 한다. 거의 매일 만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 이야기를 나누던 헤이즐과 어거스터스는 <장엄한 고뇌>의 뒷이야기를 듣기 위해 암스테르담에 사는 작가를 직접 만나러 가기로 한다. 당연히 헤이즐과 어거스터스의 부모는 맹렬히 반대하고, 헤이즐과 어거스터스는 어쩌면 생애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여행을 준비한다. 


죽음을 실감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에, 자기 자신의 죽음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남겨질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까지 부담 져야 하는 헤이즐과 어거스터스의 상황이 무척 슬프고 안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드리우는 그림자에 짓눌리지 않고 살아있는 한순간 한순간을 최대한으로 즐기려고 애쓰는 어린 연인의 모습이 사랑스럽고 감동적이다. 청소년 소설이라고 얕잡아 봤다가 눈물 줄줄 흘리며 책장을 덮은 어른들이 많았다는 이유를 알겠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 <안녕 헤이즐>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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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 하버드 법대, 젊은 법조인이 그린 법정 실화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 레즈네비치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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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일어난 사건이 기묘할 정도로 강렬하게 자신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경우가 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의 저자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 레즈네비치도 그런 경험을 했다. 1992년, 하버드 법대에 재학 중이던 저자는 방학 동안 루이지애나의 한 법률 사무소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다. 근무 첫날, 저자는 이상하게 자신의 마음을 잡아끄는 한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1983년, 리키 랭글리라는 사내가 이웃에 사는 여섯 살 소년 제러미 길로리를 성폭행하고 잔인하게 살해한 후 방치한 사건이다. 


이 책은 저자 알렉산드리아의 이야기와 가해자 리키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저자 역시 리키나 제러미 못지않은 끔찍한 사건의 피해자임이 드러난다. 1978년, 정부 변호사인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어머니 슬하에서 쌍둥이 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저자는 겉보기엔 부족할 것이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형사 전문 변호사로 개업해 열심히 가족들을 부양했고, 어머니는 법대에 진학해 가사 전문 변호사가 되었다. 쌍둥이 오빠는 병을 앓았지만 점점 건강해졌고, 뒤이어 태어난 동생들은 사랑스러웠다. 


문제는 할아버지였다. 저자의 할아버지는 저자와 여동생들이 어릴 때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했다. 저자는 훗날 이를 부모님에게 말씀드렸지만 부모님은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고, 고통은 오로지 저자의 몫으로 남았다. 법대에 진학해 리키 랭글리 사건을 알게 된 저자는 아동 성폭행 피해자인 제러미와 가해자인 리키에게서 어린 시절의 자신과 할아버지를 본다. 그때까지 저자는 사형제 폐지론자였지만 리키 랭글리만큼은 사형을 선고받길 원했다. 리키가 죽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저자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제러미의 어머니 로렐라이가 리키의 선처를 요청한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이 낳은 아들을 잃은 로렐라이가 도대체 왜 아들을 죽인 가해자의 선처를 요청하는 것인지 저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로렐라이는 재판정에서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자신 또한 리키를 용서한 것은 아니다. 아니, 평생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리키가 사형을 당하면 리키의 어머니 베시가 나처럼 아들을 잃게 된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를 늘려선 안 된다. 저자는 로렐라이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할아버지가 묻혀 있는 고향으로 향한다. 


이 책은 가정 내 성폭행 및 아동 성폭행 피해자인 저자가 자신을 겁탈했던 가해자와 자신을 방관했던 주변 가족들과 화해하는 과정을 그린다. 화해에 이르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저자는 할아버지와 대화를 시도했다가 더 큰 상처를 입는다. 저자의 부모는 저자가 그 사건을 언급하는 것을 여전히 꺼린다. 저자의 오빠는 저자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모르며, 저자와 마찬가지로 할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 저자의 여동생은 사건 자체를 잊기로 결심했다. 


저자는 세상 사람 모두가 자신이 겪은 일을 무시하고 홀대해도 자신은 끝까지 그 일을 기록하고 알리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가해자를 드러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는 걸 막기 위한 행위이기도 하지만, 저자 자신이 입은 피해와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고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저자는 실제로 리키 랭글리 사건을 조사하고 이 책을 집필하면서 끔찍하게만 여겼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새롭게 보게 되었고,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도 깨닫게 되었다. 부디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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