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자서전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시현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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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싸서(정가 2만 8천 원) 살까 말까 망설였던 책인데 도서관에 있길래 냉큼 빌렸다. 808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인데도 이틀 만에 읽어버렸을 만큼 재미있었으므로 책을 사서 읽었어도 후회는 안 했을 것 같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영국을 대표하는 추리 소설의 여왕이다. 1890년 영국 데번에서 태어나 1976년 런던 교외의 저택에서 사망했다. 이 책은 저자가 60세가 되던 해인 1950년에 집필을 시작해 1965년에 완성되었다. 저자는 이 책을 마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만 자서전을 끝맺어야 할 듯싶다. 삶에 관한 한 말해야 할 것은 모두 말했으니." 하지만 그 후, 그러니까 저자의 마지막 10년은 전보다 더 화려하고 찬란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영화화, <쥐덫>의 연장 공연, 해마다 급격하게 늘어나는 판매량, 대영 제국 훈장 수여 등등 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졌다(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 책은 저자의 어린 시절부터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세계 대전에 이르는 저자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가 빼곡히 담겨 있다. 작가로서의 삶보다는 개인의 삶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저자의 창작에 대한 태도나 글쓰기 비결 등이 궁금한 사람에게는 다소 아쉬울 수 있다(그런 내용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저자는 귀족은 아니지만 부유한 부모 슬하에서 막내딸로 태어났다. 유모와 하인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부족할 것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어머니의 뜻에 따라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집에서 혼자 책을 읽으며 지식을 습득했다. 저자는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고 출산하고 가정을 꾸리며 사는 삶을 꿈꿨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과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으며 상황은 달라졌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참전한 오빠 대신 돈을 벌어야 했고, 전쟁 중에 간호사와 약제사로 일하며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추리 소설을 썼다. 결혼 후 더는 글을 쓰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워낙 인기가 많아서 그만둘 수 없었다.


저자는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에 대해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여자도 남자가 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시끄럽게 떠들어 대자 바보가 아닌 남자들은 당연히 이에 찬성했다', '여성이 자신을 약자로 규정하는 바람에 우리는 이제 원시 부족의 여성과 같은 신세가 되었다', '우리는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위대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네들은 ... 연약함과 섬세함과 예민함을 내세운 덕분에 끊임없이 보호받고 사랑받을 수 있었다.' (199~200쪽에서 발췌) 등등의 발언을 요즘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불 보듯 뻔하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저자가 정작 페미니스트들의 귀감이 되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저자는 여자가 직업을 가지기 힘들었던 시대에 작가 외에 간호사, 약제사, 사진사 등 여러 직업을 가졌다. 이혼한 여자는 천대 받던 시대에 과감히 이혼했고, 조카뻘인 남자와 재혼했다. 여성의 외부 활동이 자유롭지 않았는데도 젊을 때부터 세계 방방 곡곡을 여행했으며, 다수의 남자들과 사교 활동(때론 연애)을 했다. 웬만한 남자보다 훨씬 돈을 많이 벌고, 훨씬 유명했다는 사실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작가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여러모로 매력적이고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한 번쯤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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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안부를 묻는 밤 - 세상에서 단 한 사람, 든든한 내 편이던
박애희 지음 / 걷는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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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나를 더 아끼고 사랑해주는 엄마가 더 이상 내 곁에 없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13년 차 라디오 작가 박애희의 에세이 <엄마에게 안부를 묻는 밤>을 읽는 내내 떠올린 생각이다. ​ 


저자의 어머니는 매일 같은 시각, 라디오로 흘러나오는 저자의 오프닝을 듣고 문자를 보내줬다. 어쩌다 DJ가 외롭다고 말하면 '딸 외로워?'라고 물었다. 저자가 그동안 엄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원고에 담으면 '딸, 엄마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라는 답장이 돌아왔다. 그렇게 평생 라디오를 통해 엄마한테 편지를 보내면 어김없이 답장이 돌아오는 나날이 이어질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엄마가 세상을 떠나버렸다. 방송 일을 시작한 지 13년째 되던 해 겨울이었다. ​ 


갑작스러운 이별은 저자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도 있었고, 멍하게 있다가 보이스 피싱에 걸려들 뻔한 적도 있었다. 엄마 생각을 할수록 마음이 아팠다. 엄마가 유난히 힘든 삶을 사셨기 때문이기도 하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저자의 어머니는 이른 나이에 결혼해 세 자녀를 얻었다. 술 좋아하는 남편 대신 고된 식당 일을 하며 식구들을 건사했다. 세 자녀를 출가시키고 이제 좀 편하게 살 수 있겠다 싶을 때 난데없이 큰 병이 발견되었다. 이별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지만, 사랑하는 엄마와의 이별은 준비한다고 그 아픔이 덜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 


저자는 휴대폰에서 엄마의 번호를 여전히 지우지 못하고 있다. 가끔 못 견디게 문자를 보내고 싶을 때가 있어서. 아직도 힘들 때면 엄마 생각이 제일 먼저 나서 말이다. 엄마가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날이 내게도 올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하다. 남은 날을 모두 엄마에게 바쳐도, 엄마가 내게 바친 날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차오른다. 나에게 잘해줬든 못해줬든 간에 나를 배에 품어주고 세상에 낳아준 유일한 존재인 엄마. 그런 엄마에게 오늘은 안부 인사 내지는 문자라도 보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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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기대선 여자 빙허각
곽미경 지음 / 자연경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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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에 '빙허각 이씨'라는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나서 집어 든 책이다. <규합총서>, <청규박물지> 같은 책을 남겼고, 한중일 3국을 대표하는 실학자 99인 중 유일한 여성 실학자로 이름을 올리고도 '이선정'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아니라 '빙허각 이씨'로 기록된 그는 과연 어떤 삶을 살다 갔을까. 교과서는 알려주지 않는 구체적인 생애가 궁금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빙허각 이씨(이선정)는 1759년(영조 35년) 평양감사를 지낸 이창수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했던 선정은 바느질 같은 가사 일을 배우는 것보다 글공부하는 걸 훨씬 더 좋아했다. 어느 날 선정은 아버지에게 세 가지 선물을 받고 싶다고 청했다. 첫째,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싶다. 둘째, 청나라 연경에 가보고 싶다. 셋째, 자신이 평생을 같이 할 배필을 아버지가 직접 구해주길 바란다. 당시 여자는 부모가 정해준 배우자와 결혼해 순종하며 사는 게 도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선정은 자신이 바라는 걸 당당하게 요구했고, 막내딸을 유난히 아꼈던 선정의 아버지는 어려운 청마저도 모두 들어주었다. ​ 


이창수의 막내딸이 영특하다는 소문은 궁궐 안까지 들어갔고, 소문을 들은 세손(훗날 정조)은 이창수와 선정을 궁궐로 불러들였다. 세손은 선정을 보는 순간 그 미모와 지성에 반했고, 선정 또한 세손의 학식과 성품을 확인하고 연정을 품었다. 하지만 선정은 왕의 여자로 살고 싶은 마음보다 평생 자유롭게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고, 이창수는 선정의 마음을 헤아려 서유본에게 시집보냈다. 서유본의 집안은 대대로 학식이 높고 남녀 가리지 않고 공부를 장려하는 가풍을 지녔으니, 웬만한 남자보다 똑똑하고 공부 욕심이 많은 선정을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 


작가는 서문에 "여성의 시각에서 남성과 대립하고 갈등하는 삶이 아닌, 남성과 평등하면서도 서로 존중하고 의리를 지켜내는 진짜 사랑을 담고 싶었다."라고 썼다. 과연 선정의 삶은 여느 조선 여인들의 삶에 비하면 파격적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진보적이고 진취적이다. 이창수의 여식, 이병정의 여동생으로 불리는 게 싫어서 스스로 기댈 빙(憑), 빌 허(虛), 집 각(閣) 자를 써서 빙허각이라는 호를 짓고, '허공에 기대어 산다'는 뜻대로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겠다는 각오를 세웠다는 것도 늠름하고 멋지다. ​ 


하지만 그런 선정의 삶 또한 내 눈에는 답답하게 보였다. 사내로 태어났으면 과거 급제는 떼 놓은 당상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명석했던 선정이건만, 혼인을 치르자마자 남편 뒷바라지에 아이들 육아에 시집 살림을 전부 떠맡아 하느라 글공부조차 제대로 할 수 없어 힘들어하는 모습. 남편이 벼슬에서 물러나고 집안에 곤궁해지자 결국 선정이 몸소 차 농사를 지어 장사에 나서야 했던 모습. 이런 모습은 결국 여성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남성 중심 사회 구조의 재확인 같은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 


선정의 삶이 워낙 알려지지 않은 탓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허구이거나 사실인지 구분하기 힘들다는 점도 아쉬웠다. 선정은 정말 정조의 후궁이 될 뻔했을까. 선정이 연경에 갔을 때 건륭제의 마음에 들었다는 건 과장이 아닐까. 선정처럼 머리 좋고 공부하기 좋아하는 며느리를 선정의 시부모와 시댁 식구들은 마뜩잖게 여기지 않았을까(시어머니는 마뜩잖게 여겼다고 나온다). 생애에 관해 알려진 것이 많지 않아 대부분을 상상으로 메울 수밖에 없다는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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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1
백세희 지음 / 흔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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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부전장애(가벼운 우울 증상이 지속되는 상태)를 가진 저자와 정신과 전문의의 대화를 녹취해 풀어쓴 책이다. 이 책이 화제가 되자 환자와 의사의 대화를 녹취해 풀어쓴 것이 책이 될 수 있는지를 두고 인터넷상에서 상당한 갑론을박이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출판까지 된 걸 보면 법적 문제가 되지는 않는 것 같고 윤리적 문제가 남을 순 있겠지만 환자 본인이 공개한 거라서 괜찮은가 보다. ​ 


책의 내용에 관해서도 이런저런 말들이 많은데, 내가 보기엔 별점 테러를 받을 정도의 책은 아닌 것 같다. 저자는 12주에 걸쳐 자신의 증상들을 의사에게 호소한다. 그냥 좀 우울해요, 저 혹시 허언증인가요, 내가 나를 감시해요, 특별해지고 싶어요, 자존감이 낮아요, 제가 예뻐 보이지 않아요 등등 누구나 겪어봤거나 또는 주변에서 겪는 것을 보았을 법한 증상들이 연이어 나온다.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도 털어놓기 힘든 고민이나 자기 내면의 못난 부분까지도 솔직하게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서 저자가 참 용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저자가 말하는 증상을 찬찬히 귀담아들은 의사는 이런저런 설명과 처방을 들려준다. 끝없는 우울과 불안을 호소할 때면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비교하며 더 나아진 점을 찾아보라고 조언하기도 하고, 직장 생활과 인간관계에서 크고 작은 좌절을 경험할 때면 그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 도전해보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의사의 조언과 충고를 하나씩 받아들이면서 저자는 느리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치료를 잘 받다가 이따금 고꾸라지는 모습까지도 가감 없이 보여준다. ​ 


저자의 증상이 나와 백 퍼센트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라서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저자와 비슷한 증상이 있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 - 적어도 전문의의 상담을 받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할 - 것 같다. 같은 형식으로 저자의 다른 증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상담 내용을 담은 책이 나온다면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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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팔 독립선언
강세영 지음 / 상상출판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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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의 민족' 마케터인 저자가 만 28세, 독립 3년 차, 직장인 5년 차를 겪어내며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진솔하게 담은 에세이집이다. ​


저자에게 독립은 오랜 숙원이었다. 경기도에 있는 부모님 집에서 서울 동쪽 끝에 위치한 회사로 가기 위해 하루에 3시간씩, 일주일에 5일을, 대학생 때부터 7년간 '지옥철'로 불리는 지하철에서 보냈다. '지하철 좀비로 살 것이냐, 은행의 노예가 될 것이냐'를 두고 치열하게 고민하다 결국 노예가 되는 길을 택했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직장까지 걸어서 15분 걸리는 위치에 집을 구했다. 보일러를 고치면 세면대 호스가 끊어지고, 세면대 호스를 고치면 이번엔 싱크대 문짝이 떨어지는 단점 많은 집이지만, 그래도 좋다. 더 이상 지옥철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까. 세상에 둘도 없는 '나의 첫 집'이니까. ​ 


이 책은 총 7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이십팔 독립선언'과 제2부 '나약한 인간이라'에는 저자가 가족의 품을 떠나 독립생활을 시작하면서 경험하고 생각한 것들이 솔직하게 적혀 있다. 난생처음 혼자 살면서 깨달은, 스스로를 먹이고 입히는 일의 어려움부터 혼자 살다가 갑자기 죽으면 누가 나의 죽음을 알고 찾아와 뒤처리를 해줄까 하는 불안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나온다. 제3부 '이십팔춘기', 제4부 '그분을 봤네요', 제5부 '스물여덟의 제이지'에서는 저자가 이십 대를 지나며 사회 초년생으로서, 마케터로서, 직장인으로서 겪은 애환을 소개한다. '신나게 쓰지도 않는데 모을 돈이 많지 않다', '분명 대학생 때보다 많은 돈을 벌고 있는데... 내 월급은 다 어디로 갔을까?'라는 문장에 크게 공감하며 밑줄을 그었다(대체 어디로?). 제6부 '취향 뭐 그거'와 제7부 '이십구 독립만세'에는 저자가 뒤늦게 자신의 취향을 찾아가고 할머니의 죽음을 겪으며 생각한 것들이 나온다. ​ 


저자는 독립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인정하면서도 누구나 한 번쯤 혼자 살아보는 경험을 해야 한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타인과 철저히 단절된 공간은 상상 이상으로 나를 성장시킨다. 가족과 함께 거실에서 공중파 드라마를 볼 시간에 혼자서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는다. 누구의 눈치를 보거나 다른 사람의 취향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 색상과 디자인의 물건을 구입해 좋아하는 방식으로 집을 꾸민다. 언제 집에 들어오든 밖으로 나가든, 언제 잠을 자든 일어나든, 모든 것이 오롯이 내 선택이고 내 책임이 되는 경험. 그 경험을 해본 사람만이 진정한 성장을 한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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