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 중요한 것들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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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팬심 때문이었다,라고 쓰면 어슐러 르 귄의 명성에 누가 되려나. 어슐러 르 귄이 말년에 쓴 글을 모은 산문집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의 서문에 의하면, 어슐러 르 귄은 수필 쓰기를 늘 버거워했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슐러 르 귄은 좋아하는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산문집 <노트북>을 읽게 되었다. <노트북>에 실린 글이 전부 주제 사라마구가 여든다섯, 여든여섯에 블로그에 쓴 글이라는 걸 알고 자신도 비슷한 글을 써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이 책의 공을 주제 사라마구에게 돌리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아니면 말고...).


이 책에는 여든을 넘긴 어슐러 르 귄의 노년에 대한 생각과 문학에 대한 생각, 젠더 갈등, 정치 이슈 등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다. 어슐러 르 귄은 나이를 먹고부터 '스스로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만큼 늙는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게 되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나 운동 또는 식이요법으로 노화를 늦출 수 없고 막을 수도 없다. 사람이 나이 들고 결국에 죽는 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누구에게나 벌어지는 것이고, 이는 결국 "신체 단련이나 용기의 문제라기보다 장수라는 운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사고방식, 운동, 식이요법 따위로 노화를 늦출 수 있다고 하는 건 노화에 대한 오해를 확산시키는 것이고, 노인들을 모독하는 것이다.


어슐러 르 귄은 여성 작가를 홀대하거나 아주 배제하는 문단의 오랜 관행에 대해서도 가차 없이 비난한다. 신경증으로 따지면 마르셀 프루스트와 버지니아 울프 모두 유명하다. 하지만 마르셀 프루스트의 병증은 천재성의 증거로 받아들여진 반면, 버지니아 울프의 병증은 스스로가 '병든 여자라는 걸 증명'하는 히스테리 발작으로 취급당했다. 최고의 문학상은 가혹하리만치 남성 작가들에게 우호적이다. 남성 작가들은 자기들끼리 최고를 향한 경쟁, 문학 패권을 위한 인맥 형성에 골몰한다. 새로운 문학, 우리가 읽어보기 전까지 필요한 줄도 몰랐던 문학은 소외된 여성(또는 일부 남성) 작가들로부터 나오는데, 지치고 게으른 독자들은 문학상 수상작만 읽고자 한다.


어슐러 르 귄의 독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어슐러 르 귄은 '허세 부리고 가식을 떤 대가로'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걷어찰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하고, '끝을 모르고 과대평가받는' 제임스 조이스와 필립 로스를 볼 때마다 화가 치민다고 말하기도 한다. 애정하는 대상에 대해선 하염없는 찬사를 퍼붓는다. 버지니아 울프, 주제 사라마구에 대해 그렇고, 캐서린 스토킷의 소설 <헬프>와 레베크 스클루트의 소설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에 대해 그렇다.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고양이! 어슐러 르 귄은 마지막 반려묘 파묘와의 만남과 일상을 총 세 챕터에 걸쳐 상세히 서술한다. 독설가인 줄만 알았던 르 귄 여사가 실은 고양이라면 껌뻑 죽는 '냥집사'였다니. 반전 매력에 허우적거리는 독자가 설마 나만은 아니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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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당신들 베어타운 3부작 2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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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의 인기는 엄청났지만, 솔직히 나는 그 소설을 읽고 '재미있다' 이상의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그랬던 내가 지난해 <베어타운>을 읽고 프레드릭 배크만을 다시 보게 되었고, <베어타운>의 후속편 <우리와 당신들>을 읽고 프레드릭 배크만에 홀딱 반했다. 보통 작가가 어느 정도 반열에 오르면 전작을 뛰어넘는 신작을 선보이기 힘들어지는 법인데, 어떻게 프레드릭 배크만은 전작보다 훌륭한 신작을 계속해서 선보일까. 그의 멈추지 않는 성장이 놀랍다.

<우리와 당신들>은 <베어타운>의 결말 직후 시점에서 시작된다. 아이스하키를 제외하면 자랑거리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쇠락한 소도시 베어타운. 청소년 아이스하키 팀이 극적으로 전국 대회 준결승에 진출하며 베어 타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지만, 우승을 앞두고 하키 팀의 주장이자 에이스인 케빈이 하키팀 감독의 딸 마야를 성폭행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마을 일대에 파란이 일어난다. 마을 사람들은 시합 직전 케빈을 팀에서 쫓아낸 감독을 비난하고, 성폭행 피해자인 마야를 가리켜 '걸레', '창녀'라고 욕한다.

<베어타운>이 사건의 발생과 진행을 그린다면, <우리와 당신들> 사건의 심화와 증폭을 그린다. 마야의 아버지이자 아이스하키 팀의 단장인 페테르는 강압적인 방식으로 쫓겨나 실업자 신세가 된다. 마야는 학교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의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친구 아나와 함께 섬으로 떠난다. 아이스하키 팀 선수들 대다수가 베어타운 팀의 라이벌인 헤드 팀으로 이적한다. 케빈의 친구 벤이는 헤드 팀으로 이적하지도 않고 베어타운 팀 훈련에도 참가하지 않은 채 방황한다. 이 와중에 또 한 사람의 비밀이 폭로되면서 마을은 혼란의 소용돌이로 빠져든다.

62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한달음에 읽어내릴 수 있었던 건, 프레데릭 배크만의 서술과 묘사가 훌륭해서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그린 베어타운이라는 한 커뮤니티의 모습이 내가 속한 공동체의 모습과 비슷해서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쉽게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입에 올리지만, 현실에서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판가름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데에만 급급하다. 가해자를 옹호하기 위해선 눈 닫고 입 막으면 그만이지만, 피해자를 돕기 위해선 제 팔이나 다리 한 쪽이라도 잘라야 한다. 마야처럼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너무 쉽게 무시되고 묵살되는 이유다.

이 소설에는 여느 남성 작가의 소설에서는 보기 힘든 멋진 여성 캐릭터도 다수 등장한다. "나는 피해자가 아니에요. 나는 생존자예요."라는 말로 벤이에게 용기를 준 마야, 위기에 빠진 친구를 물심양면으로 돕는 아나, 하키는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편견과 맞서 싸우는 신임 하키팀 감독 샤켈, 교장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녀들에게 호신용 무술을 가르치는 교사 예아네테, 남동생 벤이를 강하게 키우면서도 헌신적으로 보살피는 누나들, 마을의 정신적 지주인 라모나 할머니 등이다. 소수자, 가난한 자, 낮은 곳에 있는 자의 삶을 외면하지 않는 작가가 다음엔 어떤 소설을 선보일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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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2-08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분량이 어마 무시하군요...

620쪽이라, 전작도 읽어서 이번 작품은
또 어떨 지 기대가 되네요.

키치 2019-02-12 19:50   좋아요 0 | URL
전작도 분량이 어마어마한데 이 책까지 쓰다니 대단하죠 ^^

han22598 2019-02-12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베라는 남자 솔직히 중간에 읽다가 관뒀는데 ㅎㅎㅎ 요거 한번 읽어봐야겟네요^^

키치 2019-02-12 19:52   좋아요 0 | URL
저도 <오베라는 남자>는 그냥 그랬는데 최근작들은 정말 좋아요. 추천합니다^^
 
너무 한낮의 연애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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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을 읽고 너무 좋아서 뒤늦게 찾아 읽은 김금희 작가의 소설집. 표제작 <너무 한낮의 연애>를 비롯해 <조중균의 세계>, <세실리아>, <반월>, <고기>, <개를 기다리는 일>, <우리가 어느 별에서>, <보통의 시절>, <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등 아홉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앞에 실린 <너무 한낮의 연애>, <조중균의 세계>, <세실리아> 등이 더 마음에 들었다. 세 작품 모두 주인공이 직장에서 당장 쫓겨날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고, 그런 주제에 과거의 일을 추억하거나(<너무 한낮의 연애>, <세실리아>) 자기보다 못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을 지켜보면서(<조중균의 세계>) 현실이 주는 고통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 결국 이들은 마땅한 대안이나 찾고자 했던 정답을 찾지 못한 채 떨떠름한 기분으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데, 이는 <경애의 마음>에서도 반복된다.


앞에 실린 세 작품이 <경애의 마음>을 읽고 느낀 기분 좋은 충격의 연장으로서 마음에 들었다면, 뒤에 실린 작품들은 김금희 작가가 그려온 또 다른 세계를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가정의 붕괴로 인해 위태로운 일상을 보내는 여자 고등학생의 일상을 그린 <반월>, 집 나간 개를 찾다가 미처 알지 못했던 진실을 목도하게 되는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개를 기다리는 일>, 고아원 출신의 간호사가 고아원으로부터 돈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받고 어린 시절의 일들을 떠올리는 <우리가 어느 별에서> 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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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3 - 근대의 절정, 혁명의 시대를 산 사람들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3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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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주경철 교수의 책. 1권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서 2권, 3권을 읽어보려고 했는데, 마침 중고서점에 3권이 있어서 구입해 읽어보았다. 2권을 발견하면 2권도 읽어보기로.


이 시리즈는 중세 말부터 근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서양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3권은 총 8장으로 구성되며, 해적, 표트르 대제, 마리 앙투아네트, 로베스피에르, 모차르트, 볼리바르, 와트와 아크라이트, 나폴레옹 등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남성 중심의 해적 세계에서 활약한 여성 해적들, 척박한 러시아를 유럽형 근대국가로 바꾸고자 노력했던 표트르 대제, 음악가가 궁정이나 교회에 고용되어 활동하는 관습을 깨고 최초로 프리랜서로 활동한 모차르트, 오랫동안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볼리바르의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세계사의 비화를 알 수 있어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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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광금지, 에바로드 - 2014 제2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연합뉴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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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약칭 '에바)' 시리즈의 오랜 덕후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호기심에 구입한 책이다. 픽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주인공 박종현은 작가가 기자 시절에 취재한 실제 에반게리온 덕후 두 명을 모델로 만들어낸 인물이라고 한다. 소설의 제목인 '열광금지, 에바로드'도 박종현의 모델이 된 에반게리온 덕후들이 실제로 만든 단편 다큐멘터리의 제목이다(이쯤 되면 픽션이 아니라 거의 논픽션...)


이 소설은 쉽게 말해 에반게리온 덕후 박종현의 성장담이다. 종현은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와 재봉 일을 하며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어머니 슬하에서 태어났다. 원래도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어느 날 돌연 어머니가 집을 나가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고, 중학생이던 종현은 그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막막한 종현의 삶의 유일한 낙은 에반게리온이었다. 종현은 친구의 집에서 에반게리온을 본 이후로 그것만 반복해 보았고, 그걸 볼 때만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이후 종현은 고등학교, 대학교에 진학하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다양한 일들을 겪는다. 그리고 종국에는 에반게리온 덕후들의 꿈인 스탬프 랠리에 도전하고 그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기록한다.


종현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매우 좋아하는 덕후지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덕후의 모습(자기 세계에만 빠져 있고 사회성이 부족한)은 아니다. 오히려 종현은 너무 이른 나이에 사회를 알아버렸고, 잃어버린 유년기를 찾기 위한 방편으로 애니메이션을 본다. 종현은 앞이 캄캄할 때마다 덕후로서의 자아로 문제를 해결한다. 이를테면 고등학교 애니메이션 동아리에서 코스프레 의상을 만들던 기억을 떠올려 의상학과에 진학한다거나, 대학 졸업 후 진로가 막막해지자 에반게리온이 탄생한 일본에서의 취업을 고려하는 식이다. 우여곡절 끝에 취업에 성공한 후 과도한 업무, 불안한 장래, 부모의 병치레, 죽음 등의 문제를 겪으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원동력 또한 에반게리온 스탬프 랠리였다.


장강명 작가의 <댓글부대>, <표백> 같은 작품에 비하면 훨씬 밝고 가벼우니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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