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 With Frida Kahlo 활자에 잠긴 시
박연준 지음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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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본다는 것은 결국 내 마음을 본다는 것이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보면서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내 마음에 불편한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지독하게 사랑한다는 것. 한 사람에게 내 모든 것을 내주고도 아쉬움이 남아서 끝내는 목숨까지 내놓는 사랑을 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고 이해한다 한들 선뜻 내 것으로 취하고 싶지는 않은 까닭이다. 그래서 이 책이 프리다 칼로에 관한 책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애정하는 박연준 시인이 쓰지 않았다면, 이 책은 영영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이 책이 프리다 칼로의 작품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번역'이라고 말한다. 프리다 칼로라는 인간을 탐험하는 책은 더더욱 아니며(그런 책은 이미 너무 많다), 프리다 칼로를 사랑하는 개인의 독백쯤에 해당하는 책이라고 소개한다. '개인의 독백'이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게, 이 책은 프리다 칼로에 관한 글보다는 저자 개인에 관한 글이 더 많다. 그러나 모든 글이 결국엔 프리다 칼로로 귀결된다. 프리다 칼로 하면 떠오르는 처절한 인생과 지독한 사랑,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미칠 수도 없는 범인(凡人)의 애달프고 무상한 마음이 담담하게 적혀 있다. 


이 책은 프리다 칼로를 전혀 모르거나 너무 잘 아는 사람보다는, 프리다 칼로를 조금 알고 더 알고 싶은 사람이 읽으면 좋다. 나처럼 프리다 칼로를 멋지다고 여기면서도 (감히) 닮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그러니까 경외하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면 프리다 칼로가 한결 가깝고 편하게 느껴질 테니.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넓게 보면 프리다 칼로 역시 나처럼 당신처럼 사랑 때문에 잠 못 들고 삶의 무게에 짓눌렸던, 그래서 긴 밤을 더욱 길고 괴롭게 보냈던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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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수집 생활 - 밑줄 긋는 카피라이터의 일상적 글쓰기
이유미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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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수집 생활>의 저자 이유미의 직업은 카피라이터이다. 카피라이터가 되려면 으레 대학에서 국문학이나 광고학을 전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저자의 전공은 가구디자인이고 졸업 후 오랫동안 미술학원 강사, 편집 디자이너 등 카피와는 전혀 상관없는 직업을 전전했다. 그런 저자가 온라인 쇼핑몰 '29CM'의 카피라이터로 전격 발탁된 비결은 무엇일까. 


저자에 따르면, 그 비결은 단연 소설 읽기와 필사다. 저자는 하루 동안 여러 권의 책을 돌려 읽는다. 잠들기 전에는 주로 긴 호흡의 장편소설을 읽고, 출퇴근길 지하철에서는 짧은 호흡의 에세이나 자기계발서를 읽는다. 회사 사무실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루틴처럼 필사를 한다. 책을 읽으며 수시로 밑줄을 긋거나 모서리를 접어놓은 문장들을 출근 후 워드파일에 타이핑한 다음 파일로 정리해 놓는다. 보통 30분에서 1시간 정도 걸린다. 


이렇게 '수집'한 문장들은 저자가 카피를 쓸 때 귀하고 요긴한 재료가 된다. 이를테면 서유미의 소설 <당분간 인간>을 읽고 "자판기 커피의 양은 초면인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면서 마시기에 적당했다."라는 문장을 필사해 두었다면, 나중에 커피잔 광고 카피를 쓸 때 문장을 살짝 변형해 "처음 만난 사람과 어색한 대화를 나누며 마시기에 적당히 작은 커피잔" 이라고 쓰는 식이다. 


엄연히 저작권이 있는 작가의 문장을 저자가 상업적 용도로 가공해 사용하는 것이 과연 적법한지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인터넷 서점 리뷰를 쭉 보니 나와 같은 의문을 품은 분들이 많은 듯하다), 매일 책을 읽고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수집해 필사하는 습관만큼은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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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남긴 증오
앤지 토머스 지음, 공민희 옮김 / 걷는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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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9월. 미국의 힙합 뮤지션 투팍(2PAC)이 총에 맞아 사망했다. 흑인의 삶을 솔직하게 담아낸 음악으로 인권 운동을 하기도 했던 투팍은 '당신이 아이들에게 심어준 분노가 모두를 망가뜨린다(The Hate U Give Little Infants Fucks Everybody, THUG LIFE)'라는 유명한 랩을 남겼고, 이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아마존과 뉴욕타임스 1위를 동시에 석권하고, 2017년에 이어 2018년에도 아마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로 선정된 앤지 토머스의 소설 <당신이 남긴 증오>는 바로 이 투팍의 가사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제목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평범한 16세 흑인 소녀 스타다. 스타는 흑인 거주 지역에서 태어나 지금도 흑인 거주 지역에서 살고 있지만, 교육열 높은 부모님의 뜻에 따라 백인 거주 지역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이로 인해 (흑인이 대부분인) 동네에선 백인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 다닌다고 미운 오리 새끼 취급 당하고, (백인이 대부분인) 학교에선 흑인이라고 역시 미운 오리 새끼 취급 당하는, 이중의 시련을 겪고 있는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파티에 참석한 스타는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 칼릴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귀가하다가 큰 사건을 겪는다. 칼릴이 백인 경찰이 쏜 총에 맞고 그 자리에서 사망한 것이다. 충격을 받은 스타는 유일한 목격자로서 사건의 진실을 밝혀야한다는 책임과 얼굴과 이름이 알려지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부담 사이에서 고민한다. 그동안 경찰과 언론은 칼릴이 마약 거래상이었고 사건 당시 총으로 경찰을 위협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선량하고 성실한 경찰 한 사람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사건을 왜곡 수사, 보도한다. 사건의 여파는 점점 커져서 동네에선 집회와 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그 때마다 경찰이 출동해 최루탄을 던지고 탱크까지 투입한다. 스타는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인종 차별, 혐오와 배제에 관한 소설이라고 하면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연상하기 쉽지만, 이 소설은 여느 하이틴 소설처럼 밝고 경쾌하다. 복잡한 가정사와 어려운 생계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부모님, 스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오빠 세븐, 흑인인 스타를 차별하지 않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백인 친구들과 남자 친구 크리스 등 스타의 주변 인물들도 매력적이다. 끔찍하고 절망적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는 와중에도 서로의 기념일을 챙기고 파티를 열고 배려를 아끼지 않는 모습이 따스하고 정겹다. 


이 책은 나에게 두 가지 깨달음을 주었다. 첫째는 내가 흑인 인권운동의 역사와 현실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마블 시리즈의 영화 제목으로만 알았던 '블랙 팬서(Black panthers)'는 1996년 흑인들의 힘을 보여주자는 골자로 휴이 뉴튼이 설립한 흑인 무장 조직 단체의 이름이기도 하다. 1995년 일리노이의 14세 흑인 소년 에밋 틸은 식료품점에서 계산대 일을 보던 점원에게 휘파람을 불었다는 이유로 심한 구타를 당했고 총상을 입은 채 사망했다. 당시 린치에 가담한 백인은 기소되지 않았고 전원 백인 배심원단에 의해 무죄로 풀려났다. 책에서 저자는 에밋 틸을 비롯해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도 마땅한 사죄나 보상을 받지 못한 자들의 이름을 호명한다. 이중에는 17세, 12세, 고작 7세에 불과한 어린 아이도 있다. 


둘째는 혐오와 차별의 대상은 달라도 그 양상은 비슷비슷하다는 것이다. 스타의 아버지는 말한다. "칼릴이 마약을 팔다 붙잡히면 평생을 감옥에서 썩거나 아니면 제대로 된 직업을 못 구해서 다시 마약을 팔아야 할 수도 있어. 그게 사회가 우리에게 주는 증오란다. 우리에게 맞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어둔 것. 그게 터그 라이프야." 흑인에게 맞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평생 고통받게 하는 것이 터그 라이프라면, 여성에게 맞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평생 고통받게 하는 것이 가부장제이고, 무산계급에게 맞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평생 고통받게 하는 것이 자본주의다. 백인이 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흑인으로 살지도 못하는 스타를 보면서, 남성이 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관습적 의미의) 여성으로 살고 싶지도 않은 나를 본 것은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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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헤어지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F 지음, 송아람 그림, 이홍이 옮김 / 놀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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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직후 아마존 재팬 에세이 분야 1위에 오르고 전국 서점에서 품귀 현상을 일으킨 화제의 책이다. 저자 에프(F)는 이름도, 성별도, 나이도 밝혀지지 않은 익명의 작가인데, 우타다 히카루의 데뷔곡 <Automatic>을 들으면 초등학생 때 학원 끝나고 집에 가던 버스 안에서 보았던 풍경이 떠오른다는 걸 보면(참고로 <Automatic>은 1998년에 발매되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이거나 나보다 조금 어리지 않을까 싶다. 


에프의 첫 책인 이 책은 사랑, 연애, 섹스, 인간관계, 외로움 등을 주제로 쓴 65편의 에세이를 담고 있다. 글 중간중간에 송아람 작가의 일러스트 만화가 함께 실려 있다. 남이 블로그나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에 쓴 글을 읽을 때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설렁설렁 읽기 좋은 글이 대부분인데, 이따금 눈길이 오래 머무는 문장이 있다. 이를테면 "멋있으니까 좋아진 거다. 하지만 멋있지 않은 면도 사랑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동경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라든가, "자기 자신을 찾으려는 사람은 거울을 보려 하지 않는다. 운명의 상대를 찾는 사람은, 자신도 상대방도 제대로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라든가, "좋은 여자란 곁에 있으면 좋은 여자고, 결국 있어도 없어도 좋은 여자, 그리고 쉬운 여자, 다시 말해 뭘 해도 상관없는 여자가 된다."라든가. 


제목만 보고 사랑과 연애에 관한 글이 대부분일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에 관한 글이 많다. 인상적이었던 글 중에는 '사회인 일 년 차가 기억해두면 좋을 열 가지'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당신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사람은 당신이 무슨 일을 해도 마음에 안 들어 한다, 일이란 다음 의뢰를 받을 수 있을 때까지가 일이다, 바빠도 한가한 척을 하면 사람이 붙게 되어 있다, 야근이 많은 회사는 조만간 무너지게 되어 있으며 당신도 무너뜨릴 것이다, 주말에 무얼 할지는 수요일쯤에 정해두어야 한다 등의 조언을 읽으며 - 사회인 일 년 차를 훨씬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 가슴을 치며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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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하나로 할리우드를 접수하다! - 특수의상 제작자 바네사 리의 마법 같은 할리우드 정복기
바네사 리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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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산 건 저자가 아니라 저자가 함께 일하는 할리우드 배우들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보니 저자의 삶이 여느 할리우드 배우들의 삶이나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지는 영화 속 이야기보다도 흥미롭고 감동적이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가 은막 뒤에 있다고나 할까. 


저자인 바네사 리(이미경)은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용강중학교와 수도여고를 졸업했다. 두 살 무렵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다리가 조금 불편했지만 성장 과정에서 큰 시련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 후 취업 현장에서 장애로 인한 차별을 겪게 되자 1995년 미국으로 떠났다. 손재주가 좋아 LA 자바시장에서 패턴 메이커로 일하다 우연히 본 신문 광고를 통해 특수 의상 제작자로서 할리우드에 입성했다. <다키스트 아워>, <언더월드 2>, <엑스맨 3>, <나니아 연대기>, <트랜스포머 3>, <어벤저스>, <헝거게임>, <토르>, 한국 영화 <인랑> 등에 나오는 특수의상 대부분이 저자의 작품이다. 저자처럼 차별과 편견을 견디다 못해 한국을 떠나는 인재가 대체 얼마나 될까. 저자 같은 분이 한국 영화계에서 일했다면 한국 영화 수준이 한층 더 높아지지 않았을까. 


이 책은 그저 저자가 지나온 삶을 회고하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할리우드는 어떤 업계이고 특수의상 제작은 어떤 일인지, 할리우드 최고의 특수의상 제작사가 하는 일은 무엇인지, 특수의상 제작사로서 저자가 그동안 제작한 의상은 무엇이며 누구와 함께 일했는지 등이 빼곡히 적혀 있는, '예비' 할리우드 특수의상 제작사를 위한 가이드북으로도 손색이 없다. 저자와 함께 작업한 배우들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브래드 피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게리 올드만, 앤서니 홉킨스, 강동원 등등... 


마블 시리즈의 팬인 나로서는 로다주, 크리스 헴스워스, 앤서니 홉킨스 등등의 이야기가 단연 가장 흥미로웠다. 로다주는 엄청난 젠틀맨이고, 크리스 헴스워스는 만날 때마다 팔뚝 근육이 커져서 저자를 애먹였으며, 영화 <토르>에서 아버지 오딘 역을 맡았던 앤서니 홉킨스는 불평불만 한 번 말한 적 없는 반면 아들들 역을 맡은 두 배우 - 크리스 헴스워스와 톰 히들스턴-는 의상이 무겁네, 덥네, 땀이 나네 등등 투덜거리는 일이 잦았다고 ㅋㅋㅋ 아 귀엽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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