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 불감증 사회.

 

이게 우리 사회를 일컫는 말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좋지 않은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소 잃고 외양간이라도 고치면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도대체 벌써 몇 번째 소를 잃었는데... 외양간을 고치기는 커녕 그냥 놓아두고, 거기다가 다시 소를  키우고 있었던 말인가.

 

대형참사가 일어난 다음에 이래선 안된다 근본부터 고쳐야 한다고 말들을 많이 하지만 이상하게도 대형 참사는 연이어 일어나고 만다.

 

소는 잃었어도 외양간을 고칠 사람이 없는 상태. 어쩌면 외양간 고치는 것보다는 소를 잃는 것이 더 싸게 먹힌다는 자본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근본부터 철저히 고치는 것은 당장 표나지 않고 자본이 많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하지 않으려 하고 그때그때 대증요법만 난무하고 있으니... 거기에 누구도 제대로 책임지려고 하지 않으니, 소도 잃고 외양간도 고치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하기도 싫은 참사가 일어나고 제대로 해결도 되지 못했는데.. 학생들의 수학여행을 전면 금지한다는 그런 대책만 나오지, 더 큰 사고 일어나지 않도록 사회 전반에 걸친 철저한 점검 얘기는 나오지 않고 있다.

 

근본적인 대책.. 그것은 우리 사회의 지향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녹색평론 이번호 특집은 5월에 영면하신 이 땅의 스승의 기리며인데... 그 중에서 무위당 장일순 선생에 관한 글이 실렸다. "무위당의 삶과 사상"

 

그는 사회운동이 한창일 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태운동을 시작했고, 협동조합운동을 시작했다. 그 때는 그게 무슨 운동이냐고 지금 그렇게 한가한 운동을 할 때가 아니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운동이 한 시대만 보고 하는 것이 아닌 사람의 삶을 제대로 영위하게 하기 위한 사회를 건설한다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면 무위당은 그런 운동은 단지 사회변혁운동으로 국한되어서는 안된다고, 생명, 생태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오래 전부터 주장해 왔다.

 

그런 그의 사상이 그가 세상을 뜨고 나서 주목을 받게 되고, 그의 사상을 이어받아 실천하는 사람이 많아졌는데... 다시 재건된(?) 녹색당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렇듯 무위당은 외양간을 제대로 고쳐야 한다고...오래 전부터 주장해왔는데.. 그의 사상을 제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대형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터.

 

이런 사고도 사고지만 이제 세계화다 자유무역협정이다 뭐다 해서 우리 사회는 정말로 외양간조차 지키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말 위기에 처했는데...

 

정치권은 나 몰라라 하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언론에서 다루어주지 않으니 그냥 싸게 외국 물품을 구입해서 좋은 것 아니냐고 하고 있는데...

 

녹색평론 이번 호를 읽어보면 이런 자유무역협정이 우리의 먹을거리에까지 엄청난 파장을 미친다는 사실... 우리의 삶을 유지시켜 주는 농업이 고사될 위기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우리는 지금 더 큰 위기에 처해 있는 셈이다. 보이지 않는 위기. 그러나 분명 우리에게 닥칠 위기. 그렇게 위기는 닥치고 있는데... 힘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외면하려고만 하고 있다.

 

녹색당이나 기타 다른 시민단체, 농민단체에서 그러면 안된다고 외치고 있는데..이 외침이 멀리멀리 퍼져나가지 않고 있다. 더 멀리 퍼져나가야 하는데.. 그래서 이번 지방자치 선거에 녹색당 후보로 나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당선보다는 녹색당이 지향하고 있는 점을 알리는데 주안점을 두고 선거 운동을 한다고 하는데...

 

위기다. 위기다. 이것은 양치기 소년의 외침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타이타닉호를 타고 있다는 말을, 세월호를 타고 있다는 말로 바꾸어야 한다.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재앙을 막지 않음으로써 얼마나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는지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런 일이 또다시 일어나서는 안되는데... 우리 사회 전체가 그런 위기에 처해 있는데... 왜 모르쇠로 일관하지... 모르쇠할 사항이 아니라는 점을 녹색평론이 이렇게 강조하고 있는데...

 

제발, 이제는 외양간이라도 고치자. 소 잃었다고 외양간 고칠 필요없다고 하지 말고, 다시는 소를 잃지 않게 외양간을 튼튼하게 고치자. 외양간보다도 더 중요한 우리 사회... 우리의 삶을 잃지 않도록 정신차리고 고치도록 하자.

 

사고가 난 순간, 그 순간부터는 더 힘들어진다. 사고가 나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우리의 삶을 위해서 우리가 정신차리자. 그러기 위해서 깨어 있자. 우리 사회의 진로를 우리가 깨어 있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녹색평론은 지금 우리 사회의 파수꾼이다. 이 파수꾼이 위기라고, 위험하다고 외치고 있다. 결코 카산드라의 외침으로 만들지 말자. 그래야 한다. 이런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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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 - 칼을 품은 춤, 세도정권을 겨누다
이상각 지음 / 서해문집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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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조선 후기, 다시 한 번 조선을 중흥시킬 수 있었던 군주. 그러던 그가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하고, 어린 나이의 순조가 왕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겪게 되는데... 정순왕후는 정조의 개혁정책을 지지하던 신하들을 하나하나 내치고 만다. 이러니 순조는 왕이 된 처음부터 허수아비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자신의 아버지가 이루려 했던 정치가 사그러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무능력한 왕으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참 오래도 왕 노릇을 했는데.. 무려 30년이 넘게 왕노릇을 했지만, 그야말로 이름뿐인 왕이었을터. 그러던 그가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그의 아들에게 정치를 맡기게 되는데...

 

왕이 살아있음에도 세자에게 정치를 맡기는 경우가 종종 있어왔으니 그것은 별 무리가 아니었고... 이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왕도 있었지만, 순조는 정치적으로 욕심이 없던 왕이라는 평가를 받으니 그는 그냥 쉬고 싶었을 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아들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하고 자신은 뒤로 빠지게 되는데...

 

그 아들이 바로 효명세자다. 우리 역사에서 별로 다루어지지 않는 인물. 그러나 3년간 실질적으로 조선을 다스렸던 왕노릇을 했던 세자다. 그가 왕이 되지 못한 이유는 축출당해서도 아니고 병으로 갑작스레 죽었기 때문인데... 3년간 조선을 다스리다 갑자기 죽어 왕이 되지도 못하고,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고 꿈을 접어야 했던 사람.

 

그의 죽음으로 인해 조선은 중흥의 기회를 완전히 잃고 말았으니... 그가 세도정치를 견제하려는 정책을 펼치고 있었음에... 그의 죽음과 함께 세도정치는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었으니... 효명세자의 죽음과 더불어 조선은 몰락의 길을 밟았다고 해야 하겠다.

 

간간히 효명세자의 이름을 듣기는 했으나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알지 못했는데.. 이 책의 제목에서 강조하는 것은"칼은 품은 춤, 세도정권을 겨누다"이니, 그는 세도정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서 왕권을 강화하려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그가 채택한 방식이 바로 '궁중 무용'이었으니... 춤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이런 왕권 강화를 통해 세도정치를 척결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중심에는 늘 친인척들이 문제가 되는데.. 고려시대에도 외척들의 힘이 왕권을 누른 적이 있었고, 조선 초기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으니, 그래도 왕의 힘이 강했을 때, 태종같은 왕은 자신의 자손을 위해서 외척들을 일소해버리는 피비린내나는 숙청을 하기도 했는데, 왕권이 약화된 상태에서는 이러한 숙청은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신권의 강화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친인척들을 등용하는 방법을 조선 후기에 썼다고 할 수 있고, 이렇게 신권을 견제하려던 외척 등용이 결국은 왕권을 약화시키고 세도정치를 하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세도정치...여기에는 백성들의 삶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들의 권력을 잃지 않는 정치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들이 말하는 어떤 명분도 결국은 자신들의 정권유지로 귀착이 되고, 이들은 이러한 정권유지를 위해서라면 어떤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다.

 

왕이 자신의 조카라해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동안에만 친인척일 뿐이다. 자신들의 정권에 칼을 들이대려고 하면 어떤 방법을 택해서든 왕의 권력을 무력하게 하려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 성공한다. 왜냐하면 이미 이때는 왕의 권력이란 종이호랑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러니 효명세자가 세도정치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칼을 직접 들이대어서는 안되었다. 간접적으로 돌려서 칼을 대어야 한다. 그래서 그가 채택한 방법이 바로 예악, 즉 궁중 무용이다. 이 분야는 신하들보다 자신이 더 잘알았고, 이를 통해서 왕실의 힘을 회복하려고 했다.

 

하지만 과연 그런 궁중 무용, 즉 예악으로 세도정치를 견제할 수 있을까? 이것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세도정치를 타파하는 방법으로는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궁중무용이 이루어지는 공간에 참여하는 사람들 역시 친인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친인척은 세도정치의 중심에 있다. 그러니 예악을 정비한 것은 왕실의 위엄을 높이는 방법이기는 했겠지만, 결국 세도정치를 견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세도정권이 이러한 예악에 대해서 반대를 하지 않은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고.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정치를 펼치려고 하나, 당시 환경이 도와주지 않는다. 잦은 자연재해와 온갖 사회문제들이 발생하고, 이를 해결해야 할 관료들은 백성들의 안위보다는 자신들의 영달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백성들이 죽고 다치고 굶주리는 것보다는 자신들의 벼슬자리 유지에 더 관심이 많았다. 아무리 효명세자가 명령을 내린다해도 밑에서 움직여주지 않고, 또 세자의 주변에 있는 막강한 세도정권이 그들 부패한 관료들을 뒤봐주고 있으니 세상이 변화될 리가 없다.

 

지금...우리도 이렇게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집단들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은가. 효명세자는 이렇게 세도정권과 부패한 관리들에 포위되어 있었으니 그의 개혁정책이 먹혀들 이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대리청정 3년 만에 갑작스레 죽고 만다.

 

그의 죽음과 더불어 조선의 중흥은 멀어지고 말았으니...어쩌면 우리는 영·정조 이후에 마지막으로 찾아온 중흥의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순조 이후 헌종, 철종, 그리고 고종에 이르러 조선은 몰락의 길을 걸어가니 말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효명세자에 대한 이야기. 역사책이라서 역사적 사실을 건조하게 나열한 것이 아니라, 팩션이라는 장르를 이용하여 효명세자의 일대기를 재구성해 낸 책이다. 따라서 역사소설을 읽듯이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럼에도 '예악'에 너무 중점을 두어서 그가 도대체 어떤 정책을 펼쳤는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어쩜 그는 자신의 정책을 펼치지도 못하고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사회에서 그가 3년 동안 했던 백성을 위한 정치가 어떤 것이었는지 이 책을 통해서 알기는 힘들다. 다만, 그가 세도정권을 견제하려고 했던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니...그게 조금 아쉽다. 조선의 중흥은 세도정치를 견제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국민이 되게, 그들이 실질적으로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정치를 펼치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일반 백성에게는 왕이나 세도정권이나 그들을 수탈하는 집단에 불과할 수도 있기에.. 효명세자의 어떤 정책이 백성을 위하는 나라를 건설하려고 했는지를 밝혔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재난이 일어났을 때 구휼정책을 폈다는 것 말고. 그럼에도 이 책은 효명세자라는 사람에 대해서 자세하게 조명하고 있다는 장점은 확실히 지니고 있다. 조선 말기 세도정치에 대해서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밑그림이 그려졌으니 말이다.

 

이런 세도정치, 지금의 정치와 닮은 점이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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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보이는 창" 98호를 읽다.

 

한 때 '개미와 베짱이'라는 우화에서 우리는 베짱이를 게으름뱅이의 전형으로, 그러면 망한다는 것을 보여준 대상으로 배워왔다. 놀이는 게으름과 통하고, 그것은 곧 인생을 잘못 산 것으로 치환되는 그런 시대.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베짱이 다시 보기가 이루어졌고, 베짱이는 그냥 논 것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조명을 받았다.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고, 오히려 일만 하는 개미가 골병이 들어서 힘들어하는 내용으로 바뀌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베짱이는 예술가라고 해도 그것은 놀이가 아니다. 그는 논 것이 아니라 일을 한 것이다. 이런 상황을 공유한다면 베짱이나 개미나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 또는 하고 싶은 일을 한 것에 불과하다.

 

여기에 놀이가 들어설 틈은 없다.

하지만 '호모 루덴스'라 말이 있듯이 인간은 놀이적 인간이다. 놀지 못하는

 

인간은 인간으로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놀이는 인간의 본질과도 같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아이들을 놓아두면 아이들은 기가 막히게도 놀이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즐겁게 논다.

 

이런 내용은 미하엘 엔데의 소설인 "모모"에서도 나온다. 그 소설에서 모모는 가진 것 없는 누더기를 입은 소녀지만 남들보다 많은 시간을 갖고 있는, 남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소녀로 나오는데.. 이 소녀와 함께 있으면 환경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모모와 함께 있는 그 자리에서 아이들은 온갖 놀이를 만들어낸다. 아주 즐겁게...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시간을 잊고 즐긴다.

 

이것이 진정한 놀이다. 이런 놀이가 우리 삶에서 낭비라고 생각되고, 놀이를 부정적인 대상으로 치부하여 거부하는 문화를 만들어간 것이 요즘 우리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사회 상황도 상황이리만큼 놀이를 추구한다는 것은 무슨 죄를 짓는 듯한 느낌까지 주고 있으니...

 

삶창 저번 호는 '잠 좀 자자'가 기획이었다. 우리는 밤에 너무도 많은 시간을 가지려고 했다는 것. 이것이 결국 우리를 피곤에 절게 했다는 것을 다루었는데..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을 할까?

 

이번 호의 기획이 이것과 연결된다. 즉, '놂'을 찬양한다.  '놂'...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이다. 놀지 못한다는 것은 삶에서 유머가 없다는 얘기와 같다. 이는 늘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긴장 상태는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긴장을 이완시켜 주지 않으면 긴장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소모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하여 이 '놂'은 우리에게 명사로 다가와서는 안된다. 이 '놂'은 우리가 연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그냥 실행하고 즐겨야 할 동사다. '놂'은 곧 '놀다'다. 잘 놀아야 한다.

 

아이들도 잘 놀게 해야 한다. 하여 잘 논다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니 생각을 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놀 시간을 주어야 한다. 결국 논다는 것은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하여 아이들에게 시간을 주어야 한다. 전자기기에 매달려 보낼 시간이 아닌, 학원이나 학교에서 공부에 찌들어 보내야 할 시간이 아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보낼 시간... 너무도 무료해서 도저히 무언가를 하지 않음면 안되게 할 시간.. 그래서 무언가를 자신들이 만들어갈 시간. 그 시간이 바로 '놂'의 시간이 된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어른들에게도 놀 시간을 주어야 한다.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을 자랑하지 말고, 놀 시간이 많게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 휴일도 지금 많은 것이 아니다. 더 늘려야 한다. 실질적인 휴일을.

 

그래서 국민들이 놀 시간이 많으면 자연스레 '놂'은 우리의 문화가 된다. 이제 '놂'은 '놀이'라는 명사에서 '놀다'라는 동사가 된다. 우리는 즐겁게 놀 수 있다. 즐겁게 놀아야 한다. 고통을 잊게 해주는 것은 웃음이라는 말이 있다.

 

사회가 어지러울수록 놀이는 필요하다. 잘 노는 사람... 그 사람은 삶이 풍요로운 사람이다. 그런 풍요로운 삶들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사회... 좋은 사회다.

 

'놂'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이번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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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세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곽복록 옮김 / 지식공작소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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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는 전기 작가로 유명하다. 그런데도 아직 그의 이름을 듣는 것에 비해서는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 그가 자살했다는 사실도 잘 알지 못했고..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도 잘 알지 못했다. 그가 한1960년대까지는 살아있지 않았을까라는 막연한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 책은 츠바이크의 자서전이라고 해도 좋다. 그가 자신이 살아온 세계를 바라보며 시간 순서대로 내용을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겪은 일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가 만난 사람들 이야기도 많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유럽의 지성사를 알게 되기도 한다.

 

츠바이크가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극작가이자 전기작가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시인으로 이름이 났고, 그의 작품들은 대단한 인기를 끌어서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이 되어 그의 작품이 읽혔으며, 또 그는 수집가로서도 능력을 발휘하여 작가의 친필 원고들을 많이 모았다고도 한다.

 

그러니 그의 생애를 좇는 이 책은 츠바이크 개인사이기도 하고, 당대 유럽의 지성사가 되기도 한다.

 

제목이 "어제의 세계"다. 어제의 세계란 이미 지나간 세계를 뜻한다. 자신이 지금 발딛고 있는 세계가 아니라 지금 있는 자리까지 거쳐온 세계를 말한다. 그래서 그런 세계는 바로 자신을 만들어낸 세계이기도 하다.

 

2차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영국에서 츠바이크 자신이 생각한 것으로 이 책을 끝맺고 있는데.. 그에게 어제의 세계는 긍정의 세계이기도 하고 부정의 세계이기도 하다.

 

마치 자신의 그림자를 보는 듯한... 그러나 그림자는 빛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모든 그림자는 궁극적으로 빛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벽과 황혼, 전쟁과 평화, 상승과 몰락을 경험한 자만이, 그러한 인간만이 진정으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52쪽)

 

그는 자신을 고향이 없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그는 자신의 고국을 등지고 마는데... 단지 육체적으로 고국을 등졌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어느 한 나라에 국한된 사고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코스모폴리탄. 세계주의자. 그는 유럽을 자신의 고향으로 삼고 살았는데... 그것이 바로 그가 살았던 어제의 세계였는데.. 이런 어제의 세계에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웠고, 이 그림자는 너무나도 어둡고 커서 결국 빛을 몰아내 그를 어제의 세계에서 격리해 버리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

 

범 유럽주의자임을 자처했는데.. 세계는 국가로 나뉘어 전쟁을 치르고 있는 현실. 그 현실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는 지성인. 그가 바로 츠바이크다.

 

오스트리아라는 지정학적인 약소국에서 태어났다는 것.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알려진 작가라는 것.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것.

 

이것이 결국 2차세계대전 때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되자 자신의 목숨을 끊게 되는 결과를 낳게 하는데...

 

전쟁을 피해 남미의 브라질로 이주해 나름대로 삶을 유지해가던 그에게 또다른 전쟁은 그를 견디지 못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에게 전쟁으로 점철된 어제의 세계는 이제는 사라져야 할 세계인데... 그가 원하는 어제의 세계는 국경으로 사람들을 가르지 않는, 세계의 지성인들이 자유롭게 교류하는 그런 세계였는데... 함께 공존하는 그런 사회. 그 사회를 여지없이 깨뜨려버린 히틀러라는 사람. 그에 대한 증오가 이 책에서는 가감없이 나오고 있다.

 

이 책이 지금 우리 사회에 의미가 있는 것은... 우리도 츠바이크처럼 어제의 세계를 겪었기 때문이 아닐까? 공동체로 서로 평화롭게 지내던 어제의 세계도 우리는 겪었고, 츠바이크가 겪었던 두 번의 전쟁과 같은 비극을 우리 역시 겪었으며, 히틀러만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독재자들을 겪었으니...

 

그 어제의 세계가 그냥 어제로만 머물었으면 츠바이크의 이 책은 서양의 과거를 겪었던 한 지식인의 초상에 불과했을텐데... 우리도 츠바이크와 비슷하게 어제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지는 않았는지.

 

다만, 그는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어제의 세계로부터 도피하고 말았지만...우리는 이 세계를 오늘도 겪고 있지는 않은지.

 

그렇다면 이미 우리에게는 먼저 간 길이 있으니.. 그 길을 우리에게 맞게 다시 만들어 가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이것이 이 책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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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름이 약동하는 오월임에도 우리의 마음은 아직도 겨울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새로운 옷을 입고 즐기기 시작할 때, 아직도 어두운 심연에서 차갑게 드러누운 채 세상에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존재들이 있고...

 

까르르 까르르 밝은 웃음으로 세상을 더욱 환하게 밝혀줄 존재들이 그 웃음을 미처 다 웃지도 못하고 우리와 다른 곳으로 가버린 이 시절.

 

구구한 변명은 필요없다. 우리의 잘못이다. 오월을 오월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봄을 봄으로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일만이 남았다. 황금연휴라고 하는 이 때 전국민의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우리가 했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야 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우울하여 여행은 포기하고... 헌책방 나들이로 대체하였다.

 

헌책방은 자신의 첫주인에게서 떠난 책들이 다른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곳. 자신의 생명이 아직도 다하지 않았음을 절절하게 보여주고 있는 곳. 이처럼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삶이 계속 이어진다면... 마음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려나...

 

강은교의 "풀잎"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시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사랑법' 아니던가. 또 '우리가 물이 되어'인데...

 

지금 이 때는 '우리가 물이 되어'와 어울리지 않는다. 강은교의 '물은' 긍정의 물이자 생성의 물, 생명의 물인데... 올 4-5월 우리게에 다가온 물은 부정의 물이자 소멸의 물, 죽음의 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는 어느 정도 위안을 준다. 마음을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해준다고 할까? 마음 속에 꽉 차 있던 어떤 울분, 억울함 등을 시를 통해 달래보려 한다. 그래서 강은교의 시집을 서슴없이 고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시에는 죽은이를 관장한다는 '비리데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저승에 가서 자신의 부모를 살릴 물건을 가져와 살렸다는.

 

이 시집에도 '비리데기의 여행' 5곡(曲)이 실려 있다. 그에 대한 시를 읽으며 마음을 조금 달래보고... 그러다가 이미 하늘로 간 혼들에 대한 마음에 김소월의 시를 읽으며 달래본다.

 

초혼(招魂)

 - 김소월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이렇게 애타게 혼을 부르는 일이 없기를...

 

강은교의 이 시집에도 수록되어 있는 '사랑법'을 보자.

 

  사랑법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있는 누워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위에 있다.

 

강은교, 풀잎. 민음사. 1994년 초판 20쇄. 90-91쪽.  

 

이제 우리가 진정으로 이들을 사랑하는 법은 무엇일까? 우리 시대 우리 사회를 사랑하는 법은 무엇일까? 그러한 사랑법.

 

가장 큰 하늘은 바로 우리의 등 뒤에 있다는데.. 바로 우리들 자신이 하늘을 엎고 있는 그런 존재들인데... 하나하나 소중한 하늘같은, 아니 하늘인 우리들이 잘 살 수 있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그런 사회.

 

우리 어른들이 그런 사회를 이제 약속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법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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