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노예 남편 아내 - 2024 한국인 최초 퓰리처상 수상작
우일연 지음, 강동혁 옮김 / 드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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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넷이 나열되어 있는 제목. 주인, 노예, 남편, 아내. 이렇게 네 개의 낱말이 있으면 짝을 짓고 싶은 마음이 든다. 어떻게? 간단하다. 순서대로 짝을 지으면 된다. 주인과 노예. 남편과 아내. 짝이 지어질 수 있는 낱말들이고 관계다.


우선 주인-노예의 짝. 주인이 있으면 노예가 있고, 노예가 있으면 주인이 있다. 종속적인 관계. 상-하 관계다. 또한 자유가 있고 없음의 차이를 지닌 짝이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귀속된 관계. 이것이 주인-노예의 짝이다. 불평등, 부자유... 지금은 통용되지 않는 노예라는 말. 그러니 이 낱말의 짝은 지금은 폐기되어야 한다.


이 책이 미국에서 발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 쉽게 주인-노예의 짝을 찾을 수 있다. 아, 백인 주인과 흑인 노예구나. 흑인이 노예로 해방되지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겠구나 하는 짐작을 할 수 있다. 게다가 백인 주인이라고 하면 여기 성별은 주로 남성을 연상한다.


그런데 다음 짝이 걸린다. 남편-아내라니... 남편과 아내를 상-하 관계로 놓을 수는 없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놓을 수도 없다. 하지만 이 짝에서 가부장 시대를 읽는 사람은 주인-노예의 짝과 같은 의미로 읽을 수도 있겠다.


같은 노예 생활을 하더라도 집으로 돌아오면 흑인-남성은 흑인-여성 위에 군림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지레짐작하고, 이 책도 그러한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구나 할 수 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주인-노예와 남편-아내의 짝이 연결되는 지점이다. 분명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이라는 수식어구, 이 말을 당당하게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아직도 주인-노예와 짝을 이루는 남편-아내가 있을 수도 있다.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으로 이야기했지만,,, 현실에서는 어떤지? 지금 시대에 이 가정이 가정으로만 끝났으면 좋겠다.


그러니 지금으로부터 150년도 더 전에, 노예제가 있던 미국에서 주인-노예와 남편-아내의 짝은 분명 연결이 되었으리라. 상하, 지배-종속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이런 짐작으로 책의 첫장을 넘기면 어? 아니네... 하게 된다. 당연히 주인-남편, 노예-아내 짝을 연상했던 사람에게는 낯선 짝이 등장한다. 주인-아내, 노예-남편의 짝이 이 책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미국 남부, 노예제가 극성을 부리던 곳에서 살던 윌리엄과 엘렌. 이들은 부부로 살아가지만 남부에서 부부로 인정받지 못한다. 함께 살지도 못하고 가끔 만나볼 뿐이다. 게다가 엘렌은 피부가 하얗다. 아버지가 백인이고 피부 역시 하얗지만, '한 방울의 법칙'에 의해 엘렌은 노예가 된다. 나중에 탈출해서 강단에 설 때도 이런 엘렌을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백인 노예'라는 표현으로 엘렌을 지칭하기도 한다.


탈출하기 위해서, 체포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위장이다. 피부가 하얀 엘렌이 백인 청년으로 분장하고, 윌리엄은 그의 노예로 시종을 들면서 떠나는 모습으로 위장한 것. 물론 그들의 주인에게는 비밀로 하고 새벽에 몰래 각자 빠져나온다. 기차역까지.


기차에서 그들은 주인과 노예로 행세하면서 배를 갈아타고 다시 기차를 타고 배를 타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보스턴에 도착한다. 북부.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여긴 곳. 하지만 아니다. 노예 사냥꾼들이 들이닥쳐 언제 어디서 그들을 잡아갈지 모른다.


도망노예법에는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는 북부 주에 살더라도 기존의 노예 주인들이(받아들이기 힘들더라도 그들을 이렇게 지칭하자. 사람이 사람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은 이 당시에는 통하지 않았으니..) 그들을 잡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법을 실행하는 것이 연방 해체를 막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다수였고.


하여 크래프트 부부는 캐나다로 다시 떠난다.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 곳. 하지만 캐나다 역시 미국 남부에서 배로 한 번에 올 수 있는 곳. 노예 사냥꾼에게 잡혀갈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곳이다. 생활이 보장되지도 않고. 하여 안전한 곳. 노예를 인정하지 않는 곳인 영국으로 떠나가는 그들 부부. 


결국 남부 메이컨에서 북부 보스턴을 거쳐, 캐나다에서 다시 영국으로 가는 여정, 다시 영국에서 미국으로 와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이 여정이 바로 이 부부가 자유를 찾아 떠난 길이다. 많은 위험도 있었고, 더 많은 도움도 있었고, 자신들의 상황을 공개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도 했던 부부.


위험 상황에서도 이들 부부가 타협하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했기 때문이기도 한데... 자신들이 겪은 자유를 찾는 여정을 강연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또 아직 떠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떠날 수 있음을 알리기도 하는 부부의 모습.


이런 이들이 있었기에 미국은 노예 해방이라는 길로 점점 나아가게 된다. 연방이 해체되면 안 된다는, 그래서 노예제를 옹호하는 남부 사람들과 타협하던 정치인들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게, 연방 해체의 위험, 전쟁까지도 불사하게 만든 거대한 흐름. 이 흐름은 한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크래프트 부부를 비롯해 먼저 탈출한 사람들, 노예제 폐지에 앞장섰던 사람들, 또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준 사람들, 그리고 지속적으로 자유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과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노예 해방이라는 큰 물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크래프트 부부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자신들의 힘으로 탈출해 자유를 얻고, 그 자유를 자신들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 누려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


이 여정은 남부에서 북부로 왔을 때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여정은 북부에서, 그리고 영국에서도 계속된다. 노예 해방 선언이 있고, 남북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그 이후까지.


이렇게 이 책은 크래프트 부부의 일생을 담고 있다. 소설이 아니다.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다. 하여 작가는 확실하지 않는 점은 가정으로 이야기한다. 그렇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으로. 즉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전달하지 않고, 사실 전달을 원칙으로 하지만 짐작할 수 있는 부분, 논란이 되는 부분에서는 저자의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 점이 이 책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선 용어부터. 저자는 노예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노예-소유자라는 말도 쓰지 않고. 그 점이 좋았다. 노예라는 말 대신 '예속 피해자'라는 말을 쓴다. 그렇다. 남에게 예속당하는 피해를 입은 사람이다. 이 용어는 명확하게 자신의 의지가 아닌 남의 힘에 의해 자유를 잃었다는 점을 명시한다.


노예 소유자라는 말도 그렇다. 왠지 합법적인 느낌을 주는데, '예속 가해자'라고 하면 남의 자유를 힘으로 빼앗았다는 느낌을 확실히 준다. 가해자라는 말 때문에... 소유자라는 말이 가치중립적이라면 가해자라는 말은 가치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이 용어에서부터 노예제란 바로 가해-피해의 관계임을 말해주고 있으니... 다음으로 '남편-아내'의 관계다. 저자는 이들 부부가 떨어져 지낸 기간이 꽤 됨을 알려준다. 이들이 영국에 머물 때 각자의 일로 몇 년씩 떨어져 있기도 한다. 


남편은 아프리카에서 일을 하고, 아내는 영국에서 자신의 일을 하는 관계. 지금에 보면 대등한 부부 관계다. 서로의 일을 하면서 함께하는 부부. 이를 '따로 또 같이, 같이 또 따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당시에 부부가 이렇게 긴 기간을 떨어져 있는 것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나 보다. 특히 엘렌에게 더 많은 책임을 지우려는 모습도 나타났다고 하고, 말년에 이들이 재판에 임하기도 하는데, 이런 부부 관계가 재판에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했다고.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주인-노예 관계의 잘못을 인정하고, 없애려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가정에서는 '주인-노예' 관계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음을... 크래프트 부부를 바라보는 시각을 통해 전해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크래프트 부부가 자유를 위한 여정에서 아내 엘렌이 주인으로 분장한 것은 이후에도 엘렌이 독립적으로 살아가게 됨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저자 역시 이런 부부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니, 비록 그들 부부의 내밀한 사생활을 알 수는 없지만 저자는 이렇게 '같이 또 따로,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크래프트 부부의 모습을 '주인-노예' 관계를 청산한 평등한 부부의 모습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자, 이렇게 이 책은 크래프트 부부가 자유를 찾아 떠나는 긴 여정을 통해 '주인-노예'의 관계가 '남편-아내'의 관계에서 작동하지 않음을, 두 쌍의 낱말은 서로 짝을 이루지 못함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권력이 작동하는 관계고, 하나는 권력이 작동해서는 안 되는 관계니까.


역사 책에서 쉽게 만나지 못하는 크래프트 부부의 여정. 이 여정을 따라가면 미국에서 노예 해방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여기에 평등이란 인종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님도... 다른 많은 관계에서도 바로 이 평등이 작동해야 함을...


빛바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한 태도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꼭 읽어야 할 책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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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 회고록 - 꿈이 모여 역사가 되다
이해찬 지음 / 돌베개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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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다. 좀더 오래 살았어야 할 사람인데...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는데... 그래서 작가 유시민이 이 책의 끝에 쓴 발문 '어느 공적인 인간의 초상'의 한 구절이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남은 시간 그가 사적인 욕망을 충족하는 즐거움을 한껏 누리기를 응원한다.'(561쪽)


사적인 욕망을 충족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공적인 일을 그만두지 않았고, 그 공적인 일로 베트남에 갔다가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으니... 아마도 그는 철이 든 이후에는 죽기까지 늘 공적인 삶을 살았던 그야말로 '공인(公人)'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의 삶을 최민희와의 대담 형식을 빌려 기록한 책. 그의 삶만이 아니다. 그의 삶을 통해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를 볼 수 있게 하는 책이다.


독재 시대를 거쳐 민주화 시대를 살아온 그. 그는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던 사람이고, 역사를 만들어온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한 일에 공과가 있겠지만, 공과를 떠나서 그는 민주화를 염원했고, 민주적 정당을 만들려고 자신의 삶을 바쳤다는 사실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평생을 그러한 민주화와 민주적 정당을 만드는 데 헌신한 사람. 그 사람이 담담하게,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고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가 걸어온 길.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이기도 하고, 민주적 정당 만들기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 과정에서 좌절도 있었겠지만, 그는 새로운 출발로 삼고 다시 시작한다.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 아니겠는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고, 87년 민주화 이후에는 정계에 진출해 국회의원이 되어 정치를 통해 우리나라 민주화를 완성하려 한다. 민주화의 완성으로 가는 길에 정당의 민주화가 있다.


정당이 한 사람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거나, 또는 계파로 나뉘어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려는 모습을 보이면 그것은 민주적인 정당이 아니다. 당원들의 권리와 참여를 보장하는 정당, 민주적 절차를 지키는 정당, 이권에 휘둘리지 않고 공적인 목표를 추진하는 정당. 그래서 그때그때 정책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앞날을 생각해서 정책을 제시하는 정당, 그러한 정당이 민주적 정당이다.


이 책에는 이해찬이 자신이 몸 담고 있던 정당에서 탈당하는 장면이 몇 번 있다. 민주적 정당이 아니라 예전의 정당으로 퇴행하는 것을 참지 못했던,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준 탈당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탈당 이후 그는 다시 자신이 있던 정당으로 돌아간다.


자기와 뜻이 맞는 사람을 모아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 그곳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려는 것은 어쩌면 민주적 정당 건설이 아니라 자신이 권력을 휘두르는 일이라고, 그것은 공적인 일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렇게 밖에서 활동하면 거대 정당들이 민주적 정당으로 탈바꿈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힘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힘들더라도 그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이라고 바꿔가려고 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이해찬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국회의원으로서, 정당원으로서 민주적 정당을 만들려고 노력을 했다면, 관료로서의 그는 어떠했을까? 이 책을 읽어보면 그가 서울시 정무부시장, 교육부장관, 국무총리를 역임하는데, 무엇보다 그가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를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치밀하게 준비하고, 열린 토론을 하고, 정책을 거시적인 안목에서 마련하고, 일의 체계를 마련했으며, 불필요한 예산을 없애 정작 필요한 곳에 예산이 투입되도록 한 것들. 과감하고 결단력 있게 일을 추진한 그의 실행력을 이 회고록을 통해 볼 수 있다.


관료 문화를 바꾸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데, 책의 뒷부분에 그가 그러한 관료 생활을 한 지 꽤 지난 뒤에 현재의 관료들을 만나고 한 생각은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2018년쯤부터는 당정협의를 할 때 공무원들의 분위기가 달랐어요. 얘기를 들어 보니 강남 3구 출신, 특목고 출신, SKY대학 출신들이 공무원 사회의 주류를 이루게 됐다고 하더구만, 시험 준비에서부터 그 사람들을 따라갈 수 없게 된 거지. 공정하게 시험을 쳐서 뽑는다는 것이 사회구조적으로는 불공정한 결과를 가져왔어요. 우리 사회 장래로 볼 때 굉장히 나쁜 거예요. 보수적인 엘리트 카르텔이 각 분야를 좌지우지할 테니까.'(547쪽)


이 말,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사적인 이익이 아닌 공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한 이야기니까. 서울시 정무부시장, 교육부 장관, 국무총리를 한 사람이 공무원 사회의 모습, 즉 관료들의 모습을 보고 우려를 한 것이니, 그야말로 '공정하다는 착각'을 어떻게 부수어야 하는지 우리 모두가 생각해 봐야 한다.


그가 태어난 것은 이승만 정권 때이지만 이 책의 중심은 대학에 들어간 박정희 독재 정권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긴급조치로 대표되는 독재 정권의 만행, 그에 대한 반대, 그로 인한 투옥, 그리고 다시 서울의 봄과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쳐 87민주화 투쟁으로 쟁취한 형식적 민주주의. 그 다음은 이제 정당 정치인으로서, 관료로서 이 나라의 민주화를 완성하려 한 그의 삶이 펼쳐진다.


그가 한 말 중에 새겨두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가치는 역사에서 배우고 방법은 현실에서 찾는다'(173쪽)는 말과,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열정과 책임감, 그리고 균형이 중요해요,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열정과 책임감과 객관성이 중요하지. 재야 운동은 열정과 책임감과 희생이 필요해요. 핵심이 달라, 정치는 균형, 학문은 객관성, 운동은 희생, 헌신이지.'(205쪽)는 말이다.


열정과 책임감은 기본이다. 이 기본 위에 더 갖춰야 할 덕목이 다르다는 말인데, 정치는 균형이라면, 이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상대가 반드시 필요하다. 즉 상대는 없애야 할 존재가 아니라 함께해야 할 존재다. 대화와 타협. 이것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고, 정당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같은 정당 내에서도 모두 같은 의견만을 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견이 펼쳐지면서, 그 의견들이 대화와 타협을 통해 균형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민주적 정당의 모습이겠고, 이해찬이 바라는 정당 아니었을까.


이제 그는 떠났다. 하지만 그가 이루려는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일은 미래 세대에게 맡겨져 있다. 그 일을 마다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마지막으로 그의 삶에서 고문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고문받은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는데, 고문이 얼마나 그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는지는, 정계를 은퇴하고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고문받던 시절의 일이 꿈에 나타난다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한 고문을 한 자들, 과연 두 발 뻗고 잘 자고 있는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이 겪었던 일. 이해찬도 피해갈 수 없었고, 그것이 그의 마음에 또 몸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겼는지를 더욱 깨닫게 만든 이 회고록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해찬의 삶을 통해서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를 살필 수 있으니,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읽어보면 좋다. 늦었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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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바디스 걸
버지니아 로버츠 주프레 지음, 김나연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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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회를, 아니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의 주모자 이름, 엡스타인. 단순한 성추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다. 단순한 성추문이 아니라 권력과 연계된 권력형 범죄다.


돈과 권력을 쥐고 어린 여성들을 유인해 착취하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저 자신이 이용할 만한 또는 자신을 보호해줄 만한 사람에게 그들을 넘기는 행위를 버젓이 한 인물. 


파렴치한이라는 말로는 부족하고, 극악한 범죄자라고 해야 할 인물인데, 이 인물이 처벌받은 것은 그가 온갖 짓들을 하고 난 뒤였으니...


처벌을 피하고 피하다 결정적인 증인들이 나서자 결국 감옥에 가고 만 엡스타인, 또 그 조력자인 맥스웰. 하지만 이들이 저지른 짓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받은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상처는 평생을 간다. 언제 어디서든 튀어나와 삶을 힘들게 한다. 왜 그랬냐고, 의지로 벗어날 수 있지 않았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극도의 무력감과 공포감에 빠져 있는 사람은 어떤 행동도 할 수가 없다. 그들이 시키는 행동만 할 수 있을 뿐.


극도의 공포감에 싸이게 되면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 몸이 굳어버린 듯, 발이 땅에 붙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 엡스타인과 맥스웰은 어린 소녀들을 또 여성들을 그러한 상태에 빠뜨린다. 그런 불안에 싸인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


이들은 그렇게 사람을 조종한다. 사람을 이용한다. 자신들의 돈과 권력을 이용해서. 여기에 권력을 지닌 자들과의 친분을 과시함으로써 자기를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이런 사람이 바로 엡스타인이었다.


오로지 자신만 있는 사람... 남의 고통을 오히려 자신의 쾌감으로 바꾸는 사람. 그런 사람은 반성을 할 줄 모른다. 그가 감옥에서 죽었다고 하는데 자살로 판정받고 있지만 자살이라면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감옥에 있는 자기 처지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일 테니... 이래저래 그는 죽어서까지도 피해자들에게 고통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엡스타인에게 피해를 입었던 사람 중 한 사람인 버지니아 로버츠 주프레. 어린 나이에 엡스타인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고, 그를 벗어나지 못해 세계 곳곳을 다니며 온갖 인간들에게 성노예처럼 부려졌던 사람.


탈출할 수 있지 않았냐고? 엡스타인이 물리력으로 감금하지는 않았다고, 돈을 지불하지 않았느냐고, 그러니 당신은 성노예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런 것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 처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쉽게 하는 말이지만, 당시 상황에서 버지니아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고 해야 한다.


집에도 갈 수 없는,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고 있던 사람이 어떻게 그에게서 벗어나 자신만의 생활을 할 수 있었겠는가. 버지니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약물로 도피하는 것이었다. 순간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하지만 순간의 고통은 잊을 수 있을지 몰라도 고통은 지속되고, 자신의 삶이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생각도 강해진다. 하여 탈출을 시도하고, 여기에 조력자가 되는 남편 로비를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새로운 삶을 살다가 엡스타인에 대한 소식을 듣고, 딸이 태어나자 딸이 살아갈 세상은 자신이 살아온 세상처럼, 아니 엡스타인과 같은 사람이 계속 처벌받지 않고 살아가면 안 된다는 마음을 먹고 적극적으로 고발을 하고 증언을 하기 시작한다.


자신에 대한 비난, 가족에 대한 위협에도 정의를 위해 굴복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싸우게 되는 버지니아. 결국 버지니아의 증언은 신빙성이 있음이 확인되고, 수많은 다른 증인들이 나타남으로써 엡스타인과 맥스웰은 법의 심판을 받는다.


버지니아는 법인을 만들고 피해자가 더이상 고통받지 않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려고 한다는 것으로 이 회고록은 끝을 맺는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회고록은 '딸-죄수-생존자-전사'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딸' 한 가정의 자식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성추행을 경험하고 삶이 왜곡되기 시작하는 버지니아.


버티기 힘들었을 때 도움을 준다는 명목으로 다가온 맥스웰과 엡스타인. 그러나 이들은 버지니아를 죄수처럼 다루고, 버지니아는 생존자가 되기 위해 그들이 시키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생존이 아님을 깨닫고, 결국 그들에게서 벗어나 호주로 가서 새 삶을 산다.


새로운 삶. 과거를 잊고 사는 삶. 하지만 트라우마는 언제 어디서든 나타난다. 여기에 언론에 보이는 가해자들의 얼굴은 버지니아를 더욱 힘들게 한다. 딸이 태어나자, 이대로 생활하면 안 된다는, 딸에게는 더 나은 세상이 되게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적극적으로 가해자들과 싸우는 전사가 된다.


이런 내용... 솔직히 읽기 힘든 책이다. 이런 경험을 내놓기까지 버지니아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자신의 상처를 다시 반추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해묵은 상처를 다시 후벼파는 일이 되었을 텐데도, 정의를 위해서 그 상처를 다시 드러내 보인 버지니아의 용기.


끝났을까? 아니, 아직도 진행 중이지 않나. 이런 가해자들이 여전히 처벌받지 않고 지내고 있지 않나. 책의 끝부분에서 머리가 쭈뼛해지는 내용은 이 회고록에서도 가해자들 중 몇몇의 이름을 버지니아는 밝히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들이 어떻게 보복을 할지 두렵기 때문인데... 그들은 이 사회에서 막강한 권력과 재력을 지니고 있고, 그것을 이용해서 피해자를, 피해자의 가족들까지도 더욱 힘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데... 이것이 남 나라, 남의 이야기일까?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났지 않은가.


그러니 읽기 힘든 내용일 수밖에 없다. 가해자가 처벌받고 피해자가 위로와 공감을 얻어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행복한 결말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니까.


그럼에도 버지니아는 자신의 상처를 다시 내보였다. 자신이 힘들지라도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게 해야 하니까. 가해자가 버젓이 판치는 세상이 되면 안 되니까. 이 책을 쓴 이유가 그것이라고 하니. 긴 말 필요없다. 이 책을 읽어보면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는 일을 하는 작자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알 수 있으니...


버지니아는 이런 세상을 꿈꾼다.


'나는 꿈꾼다. 약탈자들이 비호받는 대신 죗값을 치르고 상처 입은 이들이 수치심 속에 숨는 대신 따뜻한 연민으로 보호받는 세상, 막강한 권력을 쥔 자들도 여느 누구와 다름없이 엄중한 법의 심판을 받는 세상을.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큰 낙인이 찍히는 세상, 착취의 늪에 빠졌던 이들이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시간이 얼마나 흘렀든 자신을 망가뜨린 이들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세상을 갈망한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아직 우리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

고로 이 책이 우리를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현실로 단 한 걸음이나마 더 다가서게 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단 하나의 삶이라도 지켜낼 수 있다면, 나는 나의 소명을 다한 셈이다.'(653쪽)


우리도 버지니아처럼 자신의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세상의 정의를 실현하기를 소망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로 인해서 우리 세상은 조금씩 좋은 쪽으로 변해왔다. 미국이나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겠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어 정의를 실천하려 한 버지니아. 그러나 버지니아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비록 버지니아는 갔지만 그가 바라던 것은 사라지지 않고 이 책을 통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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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미셸 회고록 - 우리가 기억해야 할 단 한 명의 프랑스 여성
루이즈 미셸 지음, 김영신 옮김 / 불란서책방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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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미셸. '역사가 지우려 했던 이름'이라는 문구를 보면서, 그러면 안 되지, 기억할 만한 사람이겠거니 하면서 읽게 된 책.


파리 코뮨에 참여한 사람이라고, 그 전에는 교육을 통해서 여성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했고, 파리 코뮨에 이어 사람들의 평등과 자유를 위해 투쟁을 한 사람이다.


자신의 행동에 후회를 하지 않고 끝까지 당당했던 사람. 오히려 재판정에서 자신의 주장을 명확하게 펼치던 사람. 그렇다. 자신이 옳다고 한 일이니,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감옥에 가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 당당한 일이라고 주장했던 사람.


그가 감옥에서 쓴 이 회고록에 의하면 혁명에 참여한 여성들이 어떠한 일을 겪었는지 알 수가 있고, 프랑스 대혁명부터 파리 코뮨까지 프랑스에서 혁명이 계속되지만 성공하지는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혁명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루이즈 미셸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주장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렸으며, 그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 회고록을 보면 당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비방했는지를 알 수 있고,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많은 일들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된다.


혁명을 위해서 강연을 하고 강연비를 받은 것을 무슨 귀족적인 생활을 하는 양 왜곡한다든지, 강연료를 횡령한 듯이 모함을 한다든지 하는 일들, 지금도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겪는 일 아닌가.


여기에 증인을 매수해 진실을 가리는 행위도 빈번한데, 루이즈 미셸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회고록 뒤에 실린 재판 기록을 보면 그 점이 상세하게 나타나는데... 혁명을 왜곡하기 위한 권력자들의 모습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음을 잘 보여준다.


많은 왜곡들에도 불구하고 루이즈 미셸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한 강연도 멈추지 않는다. 이는 권력자에 대한 미움만큼 약한 자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단지 사람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라 동물들에 대한 사랑도 회고록 곳곳에서 나타나는데, 생명에 대한 사랑이 바로 약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권력자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나타나는 것이다.


회고록 곳곳에 있는 시를 통해서 루이즈 미셸이 지닌 시적 감수성을 만나볼 수 있는데, 이러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기에 혁명에 투신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혁명가 하면 단호하고 메마른 사람을 연상하기 쉬운데, 회고록에서도 루이즈 미셸을 무슨 마녀처럼 묘사하는 권력자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오히려 혁명가는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생명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사람임을 이 회고록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이 회고록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레 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위고다. 빅토르 위고에 대한 루이즈 미셸의 애정, 존경이 잘 드러나고 있고, 자신이 쓴 시를 위고에게 보내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루이즈 미셸은 시인으로서도 재능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여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런 상황에 굴복하기 보다는 그 상황을 극적인 장면으로 인식하곤 했다고 하니 이런 시적 감수성을 지닌 사람을 권력이 굴복시킬 수는 없었으리라.


회고록을 읽으면 루이즈 미셸이 겪은 일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에도 진행되는 일임을 생각하게 되는데, 권력이 어떻게 자신들에 반대하는 사상을 지니고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탄압하는지 루이즈 미셸을 통해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파리 코뮨을 거치면서 민중들의 평등과 자유를 설파했던 루이즈 미셸, 그의 이야기를 이 회고록을 통해서 만나보는 것도 현재를 인식하는 데 의미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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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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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이 쓴 [이병한의 아메리카 탐문]을 읽지 않았다면 이 책을 읽지 않았으리라. '자수성가'라는 말로 정리되는 책이라고 생각했으니.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쉽게 '라떼는~'을 말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된 사람들을 사회의 책임보다는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J.D.밴스. 솔직히 모르던 이름이었다. 모르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그 이름을 들었어도 관심이 없었다는 뜻인데, 세계 최강대국이라고 하는, 우리나라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미국의 부통령이 바로 이 사람이다.


그것도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있는 정부에서 그 다음의 자리인 부통령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니, 내게 호감을 줄 리가 없다. 그런 사람이 쓴 책을 읽을 일도 없다고 여겼고.


40세에 부통령이 된 사람이니 좋은 환경에서 출세가도를 달린 사람이겠거니 했다가, 이병한의 글을 읽고 아니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는데, 자신이 성장한 환경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 정말 '꼰대'라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나이 불문하고 그들은 환경에 매몰돼 자신을 돌보지 않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 자신은 그 소굴을 벗어났으니까. 그런 소굴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그들이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니까.


과연 그럴까? 이 책을 읽으면서 밴스 역시 사회, 국가에 책임을 묻기보다는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것을 이겨내고 지금의 자리에 올랐으니까. 비슷한 환경인데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실패하는 것을 사회나 국가에 미룰 수는 없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과연 밴스가 극도의 가난을 경험했던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그는 가난을 경험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가난한 생활을 했다는 말이 아니다. 그가 살던 곳은 미국에서도 가난한 마을이었고, 대다수의 가정이 불완전했고 폭력적이었으며, 많은 아이들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술이나 마약의 유혹에 빠져들었다.


그도 그럴 수 있었다. 그의 집안이 지닌 폭력성. 말보다는 몸으로 해결하려는 모습들. 수없이 이혼을 하고 마약에까지 손 대는 엄마. 아빠 없이 자란 밴스. 여기까지 그가 자란 환경을 보면 그 역시 폭력과 마약, 그리고 성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그는 빠져나왔는가? 아니 그는 이런 환경에서도 또다른 환경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사실 돈이 없어서 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다른 것을 지니지 못했다고는 할 수 없다. 물론 고급 음식점에 가지 못하고, 유기농 음식을 먹는 대신에 패스트푸드로 끼니를 때웠지만, 굶주림의 단계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에는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있었다. 또한 자신을 끝까지 보호해주려는 누나가 있었고. 이들이 다른 삶이 있음을 보여주었으니... 그에게는 진흙탕 같은 현실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공부를 하고 대학을 가는데, 대학에 가기 전 해병대에 입대에 학비를 마련하고, 어느 정도 성장을 한다. 대학에서도 공부에 집중에 약 2년만에 졸업하고 예일대 로스쿨에 입학한다.


미국에서도 명문이라고 할 수 있는, 유명 정치인들이 나온 예일대에 다니면서 연애를 하고, 자신의 삶을 다른 세계로 옮기게 되는데... 여기까지의 과정을 쓴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성공담이다. 이 성공담을 통해서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그런 환경을 벗어나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게 될까를 고민하는데...


개인이 중요함을 이야기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개인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혼자서 그런 환경을 벗어기는 무척 힘들다.


밴스 역시 할머니, 할아버지, 누나, 이모들이 있었고, 자신에게 모범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우연히, 정말 우리가 말하는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처럼 그는 운이 좋았다고 자신도 이야기한다. 여기에 그는 백인이다. 자신은 와스프(WASP)가 아니라고 하지만 백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미국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태어났다거나 라틴아메리카 출신이라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조건이라는 뜻이다. 이런 우연이 없었다면 그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알 수 없다.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해보자. 전적으로 자신을 받아들여 줄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자신에게 다른 삶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려운 환경에 그냥 빠져들기만 하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음을 깨닫게 되고 노력하려는 자세를 갖추게 될 것이다.


노력하라고, 이렇게 또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자신이 믿는, 자신을 전적으로 지지해주는 사람이 이야기한다면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개인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만 해서는 안 된다. 개인의 책임이 물론 크지만, 그러한 개인에게 다른 삶을 보여줄 수 있는 환경,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회와 국가는 그런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주변에 있게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공동체 아니겠는가?


즉 좋지 않은 공동체가 아니라 힘든 환경에서도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는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할 수 있다는, 충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 정보,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와 국가의 의무다.


밴스는 부통령이 되었다. 과연 그는 그런 환경과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을까? 미국에 대한 정보가 많이 부족한 내게는 그가 그런 정책을 펼치는지 알 수가 없지만, 트럼프라는 사람이 그런 정책을 펼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 그가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환경과 기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학교다. 의무교육이 거의 이루어지고 있는 세상이니, 학교에서 다른 삶을 경험할 기회를 충분히 주어야 한다. 교육개혁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고, 학교를 통해서 다른 삶을 만나고, 보게 되고 또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하며, 미래를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또한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가 자신만이 겪고 있는 일이 아님도 알게 될 것이고.


신뢰받는 교사들이 있다면 학생들의 삶에 좋은 영향을 줄 것이고, 또래 집단들을 통해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을 것이다. 밴스가 예일대 로스쿨에 들어가서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고 하는데, 그런 것을 명문이라고 하는 학교에서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 전, 의무교육을 받는 동안 모든 학생들이 경험할 수 있게 한다면, 좋지 않은 환경에서 지내고 있는 아이라도 다른 삶을 꿈꿀 수는 있을 것이다.


여기에 마을 환경을 개선하고, 위기 가정에서도 아이들이 마음을 줄 수 있는 대상을 찾을 수 있는 제도적 지원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는 잘 서술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다는 내용은 없다. 구체적인 대안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략 환경을 어떻게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아 아쉽다.


밴스가 말하듯이 지지해 줄 수 있는 사람, 다른 삶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람이 주변에 있어야 한다는 것 말고, 사회가 국가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서도 자신의 생각을 알려주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 미국 부통령이 된 지금, 그가 이 책에서 쓴 내용을 과연 실천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었을 텐데, 그 점이 없으니... 


자수성가한 사람, 진흙탕에서도 꽃을 피워낸 사람의 이야기로 읽기에는 좋지만... 그가 과연 자신처럼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이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정책을 펼치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런 정책을 펼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인데, 개인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사회 제도를 바꾸려는 모습을 밴스가 보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점에서 아쉬운 마음이 드는 책이다.


참고로 힐빌리는 가난한 마을 사람을 일컫는다고. 화이트 트래시 white trash 또는 레드 넥red neck이라고도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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