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미 - 내 이름의 새로운 철자
오드리 로드 지음, 송섬별 옮김 / 디플롯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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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책이 학교 도서관에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강이 쓴 [채식주의자]를, 영국에서 주는 유명한 문학상을 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노벨문학상을 타는 데 이바지한 작품조차도 학생들에게 어떻게 이런 책을 읽힐 수 있느냐고 도서관에서 퇴출시켜야 한다는 운동을 하는 나라에서, 과연 이 책이 학교 도서관에 비치될 수 있을까?


있겠다. 왜냐하면 읽히기 전에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또 대부분 책을 도서관에서 퇴출시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책을 잘 읽지도, 제대로 읽지도 않으니까. (다 그렇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대부분은 그렇겠지만)


오드리 로드의 책은 꽤 번역이 되어 있다. [시스터 아웃사이더], [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 [블랙 유니콘]. 그리고 [자미]. 물론 오드리 로드에 대한 평전도 있다. 그만큼 유명한 인물이다. 하지만 다른 작품들은 평등을 향한 오드리 로드의 주장을 담은 책이기에 도서관에 소장하는 것을 별로 문제삼지 않을 것이다. 평등을 반대하지는 않으니까. 지금은 성소수자에 대한 불평등을 대놓고 자행할 수 없는 시대니까.


하지만 성소수자로 자라나면서 자신의 경험을 풀어낸 [자미]는 다른 대우를 받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아직도 성소수자 이야기가 전기로 나오면 그것을 읽는 학생들이 성소수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렇지만 이 책은 도서관에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 특히 자라나는 세대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저자가 전기나 회고록, 또는 자서전이라는 이름 대신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서 '자전신화'라고 했는지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서전과 신화를 합친 말. 그렇다. 이 책이 쓰인 때가 1980년대 미국이지만 미국에서도 과연 이때 성평등이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런 면에서 그러한 불평등, 어려움을 겪고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 이제는 성인이 된 흑인이자 여성이고 페미니즘 운동가이자 성소수자인 오드리 로드의 성장기는 거의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성장하기 전에 스러져 간 사람이 많으니까. 잊힌 사람도 있고, 스스로 물러난 사람도 있으니, 이 책에서도 어린 나이에 삶을 마감한 친구 제너비브(제니)의 이야기도 있듯이, 살아남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신화'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사람'이라는 그러한 말이 생각나듯이, 오드리 로드는 살아남아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니, 단순한 자서전이 아니라 '자전신화'라고 할 만하다. 그러니 성소수자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더라도,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것을 이겨내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로도 이 책은 의미가 있으니, '위인전' 읽히기 좋아하는 이 나라에서 오드리 로드의 이 이야기는 읽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오드리 로드의 다른 책들 (사실 읽은 책이 [시스터 아웃사이더]밖에는 없지만)과는 다르게 20대까지 삶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즉 운동가로서의 오드리 로드의 주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그러한 운동가가 되는 오드리 로드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흑인으로 태어나 겪게 되는 일들, 흑인여성으로서 겪게 되는 온갖 차별들, 여기에 흑인여성 레즈비언으로 겪게 되는 더 많은 일들이 시간 순서대로, 오드리 로드가 성장하면서 겪게 되는 일, 감정, 사랑 등이 펼쳐진다.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가는 오드리 로드를 만날 수 있으며, 그가 경험하는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사랑으로 오드리 로드는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불평등을, 불합리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으리라.


그렇다고 이 책이 여성들에게만 의미가 있지는 않다. 이 책에서는 레즈비언으로 나오지만 이는 오드리 로드가 그러한 성향을 지녔기 때문이고, 성소수자들이라면 대다수가 겪었던 일들이기 때문에, 성에 따라서 이 책을 읽고 말고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성소수자가 아닌 사람들고 그렇고.


이 책 제목이 된 '자미'는 캐리아쿠 말로 '친구이자 연인으로서 함께 일하는 여성들을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자신이 사랑한 여자들로부터 받은 삶들이 오드리 로드를 '전사'로 이끌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그러한 '전사'가 나오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어떤 책을 두고 도서관에 있을 만하다 아니다는 논쟁도 할 필요가 없어야겠고.


20대 초반까지의 삶을 다룬 이 책을 먼저 읽고 오드리 로드의 다른 책들을 읽으면, 이 책에서 오드리 로드가 깨달아가는 것들이 어떻게 주장으로 발현되고, 사회를 바꾸는 '전사'로서 하는 주장의 맥락을 더 잘 파악할 수 있겠단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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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의 눈물 (리스타트 에디션) - 우리는 이미 최악의 독재 속에서도 변화를 일궈냈다
조국 지음 / 다산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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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4일 11시. 헌재 선고가 있기 전에 이 책을 읽고 싶었다. 윤석열 대통령(이후 직위 생략)의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조국이라는 생각에.


윤석열이 검찰총장이 될 때 민정수석으로 검증을 담당했던 사람이 조국이고, 조국이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이 되자 가장 반대를 하고 조국에 관한 수사를 한 사람이 윤석열이니, 둘은 상극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자신들도 상극인 줄 몰랐으리라. 검찰 개혁이라는 대의 앞에서 한 편에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윤석열이 검찰 개혁을 하겠다고 한 것이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검찰총장이 되기 위한 임기응변이었는지는 본인만이 알 것이고, 적어도 조국은 그렇게 믿었을 테니. 


(윤 총장에 대해 당시 집권세력 전체가 기만당했고 그 결과 오판을 했다-41쪽 => 이 말은 좀더 생각해 봐야 한다. 당시에도 윤석열을 검찰총장으로 임명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하니...집권세력 전체는 아니고, 당시 검찰개혁을 추진에 매진하던 집권세력이라 하는 편이 좋을 듯. 왜냐하면 윤석열은 검찰개혁을 하겠다고 면접 때 이야기했다고 하니, 검찰개혁에 다른 것들이 잘 보이지 않았을 수도)


이 책을 읽으면서 둘이 '법'에 대해 지니고 있는 생각이 반대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조국은 이 책 전반에 걸쳐서 '법의 지배 rule of law'를 말하고, 그것이 법치주의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윤석열은 '법을 이용한 지배 rule by law'(67쪽)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의 지배는 법을 고정불변의 것으로 놓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법은 변해야 한다. 그리고 법을 변하게 하는 사람은 법조인이 아니라 그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판결을 통해서 법조인이 법을 시대에 맞게 적용하는 경우가 있지만, 시대를 읽고 사람을 이해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법조인의 법 적용은 달라지니, 법을 바꾸는 존재는 시민들이라고 해야 한다. 즉 시민들을 위한 법인 것이다. 


반대로 법을 이용한 지배에서 법은 고정불변의 것이다. 법은 어떤 형태로든 지켜져야 할 것이다. 문구 그대로... 아니, 문구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법조인의 선고대로. 따라서 법을 이용한 지배에는 약자를 고려하는 일은 없다. 오히려 법을 알고 집행할 수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다. 


800원을 횡령했다고 해고된 운전기사의 이야기는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것이 법을 이용한 지배다. 이런 법을 이용한 지배에서 수천억 원을 횡령한 사람들이 처벌받는 경우는 별로 없다. 마찬가지로 같은 법조인들(법조인들을 판사, 검사, 변호사로 나누면, 이들이 모두 같은 대우를 받지는 않는다. 자신과 같은 일을 하던 사람들, 판사-판사, 검사-검사, 변호사-변호사가 서로를 같은 법조인들이라고 여긴다고 정리하자)에게도 법은 무한정 관대하다.


조국은 그러한 법의 적용에 반대한다. 지금까지 윤석열 정부에서 일어난 일을 보면 법의 지배가 아니라 법을 이용한 지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그들은 이 책에 나온 법가의 '상앙'의 예를 자신들에게도 적용해야 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지닌다.


조국은 이 책에서 자신의 그간 행적을 통렬히 반성하고 있다. 자신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할 수 있었음에도 또는 해야만 했음에도 하지 못했던 일들로 인해 자신을 비롯해 우리 사회가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 조국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비록 지금은 영어의 몸이 되었지만, 그가 적절히 견제하지 못한 '법을 이용한 지배'를 하고자 하는 자들로 인해 교도소에 갇힌 몸이 되었으니, 어느 정도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할 수 있겠지만...


조국이 책임을 지는 것은 교도소에서 나온 다음에 어떻게 실천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가 이 책에서 말한 많은 개혁들, 정책 방향들을 이제 '조국혁신당'을 통해서, 그 당을 통해서 다른 당들과 연합해,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실현하도록 해야 한다. 아직은 그가 교도소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지만, '조국혁신당'은 건재하니, 그 당을 통해서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일 것이라 믿는다.


왜냐하면 이 책의 맺음말에서 루쉰의 말을 빌려 '등에 화살이 박히고 발에는 사슬이 채워진 몸이라 날지도 뛰지도 못하지만, 기어서라도 앞으로 가려고 한다'(325쪽)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조국의 결심이겠지. 그가 이 책을 쓴 것은 2014년이다. 그 책의 전면 개정판이다. 그래서 윤석열 정부 이후의 일들도 이 책에 나온다. '법'을 통해서 자신의 신념과 희망을 이야기하고,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가 해야 할 일, 그가 어떻게든 앞으로 가려고 한다 했으니, 지켜볼 일이다. 우리 역시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하고 실천해야 하고.


헌재 선고를 앞두고 이 책을 읽고 싶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윤석열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 그가 말하는 '법의 지배'와 '법을 이용한 지배'가 어떤 쪽으로 갈지 판가름 나는 날. 


우리 사회는 다시 '법을 이용한 지배'를 허용할 것인지, 이제 다시는 그런 '법을 이용한 지배'는 용납될 수 없음을 보여줄지, 그리고 디케가 눈물을 흘리지 않게 만들지 눈 부릅뜨고 지켜보기 위해서... 


그 전에 이 책을 읽으면 좋겠지만, 그 후에 읽어도 좋겠단 생각을 한다. 그가 또 우리들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보기 위해서. 


덧글


내가 읽은 책은 2023년 판인데, 이 글을 쓸 때 알라딘 상품 검색에서 찾을 수가 없다. 내용이 아마 달라지진 않았으리라. 혹 추가된 내용이 있더라도 큰 의미는 없으리라 생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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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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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이크의 마지막 글이라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책으로 엮어 나온 글들이다. 어두운 시대를 살았던 사람. 나치의 광기를 피해 라틴아메리카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 그러나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았던 사람이 바로 츠바이크다.


참으로 어두운 시대, 그 어두운 시대에서도 빛을 발견하려고 했던 사람이니 그의 글을 읽으면 어떤 위로를 받는다. 지금 시대에 그의 글을 통해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이 시대 역시 어두운 시대임을 반증하겠지만.


나치의 광기가 그가 살았던 시대를 어둡게 만들었다면 지금 우리 시대를 어둡게 만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대두하는 신나치들... 이와는 다르지만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이 우리들 생활을 잠식해서 자본으로 인한 무역전쟁과 국가간의 전쟁까지 일으키려 하는 모습, 그리고 여전한 종교 갈등. 당시에는 유대인이 약자였다면 지금은 유대인이 강자가 된 세상. 강자와 약자의 처지는 바뀌었지만 어두운 시대는 사라지지 않았으니...


처음에 실린 글은 자본주의 시대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는 글이다. 물론 이 글은 대놓고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 만난 사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가? 자신의 필요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 안톤이라는 사람을 통해 츠바이크는 이런 세상을 꿈꾼다.


'모든 사람이 이런 상호 신뢰의 비결을 배운다면, 경찰도 법원도 교도소도 돈도 필요 없을 거라고. 필요한 만큼만 대가를 받고 능력이 닿는 한 힘껏 돕는 이 청년처럼 모두가 산다면, 부조리가 반복되어 '사회문제'가 되는 우리의 복잡한 경제 시스템도 어쩌면 해결될지 모른다.' (22쪽)


처음에 만나는 글부터 따스하게 다가온다. 어둠보다는 밝음이 먼저 우리 마음에 와 닿는다. 그러다 다음 글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필요한 건 오직 용기뿐!'이라는 글이다.


용기, 이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고, 사회를 바꿀 수도 있다.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을 위로해줄 수 있는 용기, 잘못을 잘못이라고, 잘못이 아님을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용기다. 나중에가 아니라 바로 그때에.


그런 용기가 한 사람뿐만 아니라 사회를 바꿀 수 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이 어두운 시절에'라는 글이다. 어두운 시절이 그때만이 아니고 지금도 어두운데, 여기서 우리는 별을 찾아야 한다. 그 별을 찾아 보여주고, 별과 같은 삶,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용기이기도 하다.


'영원한 별들이 얼마나 찬란하게 하늘에 떠 있는지 알려면, 먼저 어두워져야 합니다. 몸과 숨을 분리할 수 없듯이 영혼과 자유를 분리할 수 없음을 인식하기 위해 먼저 어둠의 시간이, 아마도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간이 우리에게 닥쳐야 했습니다.' (116쪽)


어둡기 때문에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빛나는 별을 보고 자신의 삶을 그쪽으로 향하게 해야 한다는 말. 명심해야 한다.


짧은 글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어느 글 하나 버릴 것이 없다. 특히 마지막 글은 작가가 작품을 통하여 미래를 선취하고 있음을, 그래서 작품을 읽으면서 그런 미래를 방지하려는 노력을 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가 언급한 빈센테 블라스코 이바녜스가 쓴 [묵시록의 네 기사]를 읽지는 않았지만, 츠바이크의 설명에 의하면 그 소설에 등장한 하르트로트라는 인물이 히틀러의 전신임을 보여주면서 '작가가 정치학 교수보다 당대와 미래를 더 잘 이해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보여주었다'(130쪽)고 하고 있으니, 작품을 통해 우리는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 현실의 세상을 바꿔갈 수 있음을 생각한다.


이처럼 이 책은 어두운 시대 빛을 보여주는 츠바이크의 글들을 모아놓아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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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마트에서 울다
미셸 자우너 지음, 정혜윤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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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죽었다.' 


뜻하지 않게. 너무 일찍.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엄마와 갓 화해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느끼는 상실감을 말로 할 수 있을까? 엄마가 암에 걸렸다는 말을 듣자마자 미셸은 엄마에게 달려간다. 자신이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그동안 엄마가 자신의 일생에 사사건건 간섭했다고, 엄마에게서 벗어나야 한다고, 반항도 하면서 엄마의 기대에 어긋난 행동도 하면서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려 했던 미셸에게 엄마의 암은 충격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온다. 엄마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의 차원에서 다가온다. 자신의 모든 것이 얼마나 엄마에게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엄마가 예전처럼 해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깨닫게 된다.


할 수 있는 일. 엄마 곁에 있는 일. 엄마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하는 일. 잊혔던 한국의 감성을 살리려 하지만 미셸은 미국인이지 한국인이 아니다. 아니, 사실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미셸은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니다. 


엄마와 이별하기 전 미셸은 미국인이 되지 못하는 자신을 힘들어했다. 그런데 엄마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이제는 한국인이 되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워지기 시작한다.


엄마의 상실 속에서 미셸은 자기만의 애도 시간을 갖는다. 충분한 애도 시간이 없으면 상실의 아픔을 견딜 수가 없다. 


먼저 미셸은 회피하려고 한다. 엄마의 상실에서 다른 일로 관심을 돌리려 아빠와 함께 베트남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베트남 여행이 치유를 해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상실의 아픔을 외면한다고 해서 마음 속에 아픔이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이 미셸의 꿈 속에서 엄마가 항상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엄마를 잃는 꿈으로 나타난다. 미셸은 상심 속에서 지내며 심리치료를 받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치유가 되지 않는다. 상실의 아픔은 충분한 애도를 통해서 치유될 수밖에 없다.


하여 미셸은 엄마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리고 엄마와 관련 있는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다. 우리 식으로 하면 유튜브를 보면서 음식 만들기를 따라하는 것. 잣죽부터 김치까지... 그러면서 차츰 미셸은 자신이 치유되어감을 느끼게 된다.


엄마 상실의 아픔을 담은 곡들을 쓰고 앨범을 내기도 하는데, 이 앨범이 나중에 유명해져서 미셸을 한국에서 공연까지 하게 한다.


이렇게 미셸은 자신의 인생에서 거의 전부였던 (엄마의 말에 따르면 항상 상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지 말고 10%정도는 남겨두어야 한다고 했다고 하니, 엄마 역시 미셸에게 10%정도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를 잃고 엄마와의 일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인생을 찾아간다.


극심한 상실의 고통, 그러나 그 고통을 이겨나가면서 자신의 세계를 갖춰가는 미셸의 모습이 이 책에 잘 나와 있다.


무엇보다도 엄마와 딸이 겪는 갈등과 이해,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깨달아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읽으면서 마음에 커다란 울림이 생기는데, 상실의 아픔을 회피가 아니라 직접 대면하면서, 공통의 경험을 다시 체험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다잡아가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게 된다.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미셸이 엄마의 죽음 이전의 미셸이었다면, 이제는 한국인으로도 미국인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미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엄마에 대한 충분한 애도. 그런 애도의 마음이 절절하게 드러나 있기에 이런 경험은 우리 모두가 한번은 겪어야 하기에, 미셸을 통해서 미리 경험한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감동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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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는 두뇌를 믿지 않는다 - 운, 재능,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요한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
브라이언 키팅 지음, 마크 에드워즈 그림, 이한음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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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과학자들을 천재라고 부른다. 과학계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그들을 보통사람이라고 하지는 않으니까. 그렇지만 그런 천재들이 우리들과 다른 사람일까? 천재들은 우리와 다른 존재로 본다면, 노력이라는 것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이미 타고난 천재들이 업적을 이룰테니까.


그런데 아니다. 천재들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보통사람이다. 보통사람인데 남들보다 뛰어난 업적을 이룬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고 모두가 천재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 상을 받았다는 것은 물리학계에서 뛰어난 성과를 이루었다는 얘기니... 그들이 성공을 거둔 이유를 찾으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을 수 있겠다.


이 책은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9명의 과학자를 만나 질문하고 대답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그런 대담에서 이 책이 견지하고 있는 방향은 이들은 보통사람과 다른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보통사람과 같지만 노력을 하고, 남들을 배려하고 함께 경쟁하면서 존중하는, 그럼에도 하나의 이론에 머물지 않고, 편견에 물들지 않고 끊임없이 증거를 찾아 노력하는 사람이었다는 것. 또 성과를 이룬 다음에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 무엇보다 이들이 지닌 자세는 겸손이다.


겸손은 자신을 높여 다른 사람들을 밀어내지 않는 자세다. 자신을 열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바로 겸손이다.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은 주변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많다. 함께할 사람이 많다.


그리고 겸손한 사람은 마음이 닫혀 있지 않다. 다른 사람에게 열려 있다. 열려 있으므로, 자신의 주장만을 고수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주장도 살핀다. 살필 때 편견을 지니지 않는다. 객관적인 증거가 나오면 흔쾌히 인정한다.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과학자가 지녀야 할 태도다.


이 책에 나온 아홉 명의 과학자들이 공통으로 지닌 태도가 그렇다. 자신의 업적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들은 꾸준히 발전해온 과학에 한 발을 더 내디뎠을 뿐이라고... 또한 자신들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은 후대들이 해결할 것이라고.


지금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영원히 해결하지 못할 일은 아니라고, 자신들은 그러한 미래를 위해서 지금 할 일을 하면 된다는 자세를 지닌 사람들이다.


이들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이유에 관한 학설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과학에 관한 책이 아니다. 삶에 관한 책이다.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책이다. 그것을 과학자들을 빌려 말하고 있을 뿐이다.


삶을 살아가는데 과학자와 비과학자를 나눌 필요가 없으니, 어떤 분야에서 업적을 이룬 사람이 지닌 자세는 다른 사람들도 배울 필요가 있다. 물론 배운다고 똑같이 따라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 자신의 삶의 방향에 대한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과학책이 아니라 삶의 자세에 대한 책이다. 읽으면서 그래 이렇게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이 말이 성공은 운이 좌우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노력(기술)이 좌우한다고 해석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


즉 누구에게나 운은 70%정도 있다. 삶의 성공 여부를 가리는데 운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 장소에 그 시대에, 그 사람들과 함께 어떤 일을 했다는 것, 그것은 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 성공하지는 않는다. 바로 기(技) 30%가 작동해야 한다.


즉 실력, 노력이 반드시 작동해야지만 성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공한 사람들은 운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력에 의해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이 30%의 노력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실패한다면? 그것은 70% 운에 속한 일이다.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또는 다른 세대에게 넘기면 된다는 것. 그렇게 되기까지 30%를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밀어붙이면 된다는 것을 이 책에 나오는 과학자들을 통해서 생각하게 됐다.


이런 점에서 청소년, 청년들이 읽으면 좋겠단 생각이 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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