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온 미래 - AI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
장강명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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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 이후 우리의 삶은 확 달라졌다. 인간을 넘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분야에서 인간이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한 것. 이제는 챗지피티 시대다. 많은 대학에서 시험 답안에 챗지피티를 이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자신의 학습 성과를 검토한다는 시험에서도 챗지피티라는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는 인간. 이제 인간은 이러한 기계(기계라고 하면 지능이 없다고 여기기 쉽지만, 로봇이라는 말에는 기계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고, 차페크의 '로섬의 유니버셜 로봇'에서 로봇들은 이미 지능이 있다. 인간에게 저항하고 인간을 쫓아내고 있으니...)의 도움 없이는 하지 못할 일들이 많이 생겼다.


단순한 일에 도움을 받는 것을 넘어 이제 인간이 기계의 보조 역할을 하게 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불안감. 위기의식.


알파고는 그 점을 명확하게 보여줬다. 인공지능이 바둑에서만큼은 안 되리라는 예측이 무색해지고, 지금은 인간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니, 그래서 이제 프로기사들은 인공지능 바둑프로그램으로 학습을 한다고 한다.


바둑 해설도 마찬가지고... 바둑 방송을 거의 보지 않지만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보게 된 장면인데, 기사라 한 수를 놀 때마다 승리 확률이 화면에 나왔다. 이것이 바로 알파고 이후 바둑계에 생긴 변화다.


그 돌이 지닌 의미를 따질 필요는 없다. 오직 이길 확률이 얼마나 되느냐가 중요하다. 이렇게 이기기에 최적화된 알파고와 같은 바둑 인공지능들을 인간은 이길 수가 없다. 이기기 위한 확률을 너무도 빠른 시간에 계산해내고, 이길 확률이 높은 (가장 확률이 높은 수를 꼭 두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질 확률이 있는 수를 놓는 경우는 없을 테니) 수를 놓는 인공지능을 인간이 이길 수는 없다.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존재, 이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존재 앞에 선 인간의 무력함을 보여준다. 바둑계는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를 먼저 경험했다. 그것도 아주 처절하게... 그리고 바둑계는 엄청나게 변했다고 한다.


이 변화를 받아들인 사람도 있고,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도 있지만, 변한 것만은 사실이다. 변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이 이 책에 나와 있는데, 그럼에도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음은 확실하니, 바둑이 무엇인지, 바둑이 인간에게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정리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


바둑은 예술인가, 스포츠인가 그냥 게임(놀이)인가?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고, 또 우리나라에서도 때에 따라 바둑이 자리한 분야가 달라지기도 했지만,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바둑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정립해야 한다. 


이렇게 바둑계는 미래를 먼저 경험했다. 그렇다면 다른 분야는? 우리 분야가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아니다. 바둑계에 먼저 일어났을 뿐이다. 곧 다른 분야에서 이런 일은 생겨난다.


단적으로 미술에서도 음악에서도 또 문학에서도 인공지능이 인간의 자리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간이 쓴 작품과 구분할 수 없는 경지에까지 올랐다고도 한다. 또한 챗지피티는 학생들의 공부에 필수가 되고 있으니... 자신의 학업까지도 챗지피티에 의지하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으니..


이런 현실에서 바둑계가 겪은 경험을 살필 필요가 있다. 그들이 어떻게 느꼈고, 어떻게 대응했으며, 어떠한 변화를 겪었는지... 작가 장강명이 많은 바둑 관계자들을 만나 들은 이야기, 그들이 경험한 세계가 이 책에 펼쳐진다. 그야말로 먼저 온 미래를 겪은 사람들, 분야 이야기다.,


그리고 바둑계가 겪은 일은 이제 예술계에서도 겪고 있다. 예술, 인간의 창조성이 발휘되는 분야,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겨졌던 예술도 인공지능이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그렇다면 예술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가?


인공지능보다 못한(이러한 우열의 개념을 예술에 적용한다는 것 자체가 예술에 대한 모독이라고 하지만, 예술 분야만큼 우열을 나누고 평가하는 곳이 있었던가 하면, 아니라고 하기 힘들다. 그것을 인공지능처럼 명확하게 수치로 밝힐 수 없었을 뿐. 직관으로 또는 권위로 우열을 나누지 않았던가)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과연 그때도 예술을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을까?


무서워졌다. 그렇다고 이러한 대세를 거스를 수도 없는데... 분명 기술은 퇴보하지 않는다. 한번 나온 기술은 더 발전된 쪽으로 나아가지 사라지는 쪽으로 가지 않는다. 마치 엔트로피 법칙처럼.


이렇게 바둑계가 경험한 인공지능 이야기를 인간의 다른 여러 분야를 끌어와 이야기를 하다가 책의 뒷부분에 가면 인공지능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조지 오웰을 중심으로 삼아 기술 발전이 우리에게 가할 수 있는 위험을 생각해야 한다고. 무조건 기술발전에 열광할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판단하고 오랜 시간에 걸쳐 평가하고 지켜봐야 한다고...


그래서 장강명은 오웰의 [1984]를 좋은 소설, 성공한 작품으로 평가한다. 왜냐하면 이 소설 속 세계가 너무나 끔찍해서 사람들은 그런 세계가 오지 않도록 하려고 노력했으니까. 이 말을 이 작품에 적용하면 인공지능이 인간을 보조로 격하시킬 세상은 너무도 암담하기에 그런 세상이 오지 않도록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 작가가 한 말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인공지능이 이것까지 할 수 있다면, 그 다음은 상상할 수가 없다.


'내 생각에는 인공지능이 아직 할 수 없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따로 있다. 좋은 상상을 하는 것, 우리가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 그렇게 미래를 바꾸는 것이다.' (340쪽)


이 책이 조지 오웰의 [1984]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기를... 우리 모두 인공지능이 펼칠 미래를 한번 상상해보고, 그것이 과연 우리에게 바람직한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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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술 왕국 - 연산군부터 윤석열까지, 권력은 왜 신을 빌리는가 카이로스총서 117
김가현 지음 / 갈무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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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부터 윤석열까지 권력은 왜 신을 빌리는가'라는 작은 제목.


조선시대 몇몇 왕들을 살피면서 윤석열까지 분석하고 있는 이 책은 주술이라는 사적인 영역이 정치라는 공적인 영역에 들어왔을 때 어떻게 파국에 이르는지를 잘 살피고 있다. 아니 이미 파국에 접어들 징조가 보이는 정권이 주술을 활용한다고 해야 할까.


주술은 예방적 차원이 아니라 결과를 옹호하기 위해서 끌어들일 때가 더 많기 때문이다. 합리적이지 않을 때,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얻지 못할 때, 그렇지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싶을 때 동원하는 것이 바로 주술이다.


주술은 합리와 이성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이기 때문에, 여기에 어떤 과학적 합리성이라든지, 논리를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냥 그렇게 하면 좋대 이것이 바로 주술 아닌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좋지 않다고 해 하는 것. 


이분법이다. 따르든지 따르지 않든지. 여기에 이성으로 분석하고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주술은 철저하게 사적인 영역이다. 개인의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기도를 하든, 굿을 하든 그것이 개인에 국한될 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이 남과 엮이면, 남을 저주하는 데 쓰이거나 (이 저주의 효과가 있든 없든 이것은 남을 해코지 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니 이미 좋지 않다) 공적인 영역으로 들어오면 커다란 문제를 일으킨다.


조선시대의 역사를 볼 때 주술이 공적인 영역에 들어온 경우가 많았겠지만 이 책에서는 세 명의 왕을 대상으로 이야기한다.


연산군, 광해군, 고종. 두 명의 왕은 조나 종이 붙지 못하고 군이 되었는데, 이는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뜻이고, 고종은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한 역할을 한 왕이니, 이 세 왕에 대한 평가가 어떻든 그들에게는 부정적인 면이 많음은 인정해야 한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주술을 권력 행사에 활용했고, 결국 권력이 붕괴되었다는 것인데, 저자는 '주술 의존형 권력 붕괴 모델'이라고 4단계를 제시한다. (38-41쪽, 239쪽)


1단계 : 권력 기반의 취약성과 불안의 발현 (취약한 정통성을 가진 권력의 불안)

2단계 : 공적 시스템의 붕괴와 고립 (소통을 거부하는 고립)

3단계 : 비합리적 대안의 부상과 도구화 (이성적 근거가 결여된 대안에의 의존)

4단계 : 자기 파괴적 악순환과 몰락 (자기 파괴적 몰락)


이 단계를 보면, 앞에서 언급한 세 왕에게 모두 해당이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안 속에서 소통을 하지 못하고 주술에 빠져 결국 권력을 잃게 되고 만다.


하지만 이들은 조선시대라는 시대 상황 속에 있었다. 왕국이었다. 절대 권력으로 존재한 왕은 신하들의 의견을 듣기도 하지만 자신의 말을 일방적으로 전할 수도 있었다. 비록 조선시대에 삼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라고 해서 왕을 견제하는 기관이 있기는 했지만 이들이 지닌 한계는 명확했다. 


그럼에도 유교를 표방한 조선에서 주술에 의존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었다. 하여 주술에 의존하는 왕들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신하들은 수시로 상소를 통해 바로잡을 것을 건의했다. 그럼에도 그것을 굽히지 않고 밀어붙였던 왕들의 최후는 결국 몰락이었다. 주술을 정치의 보조수단이 아니라 주요 수단으로 활용했던 왕들의 최후.


연산군 때의 무당이나 광해군이 풍수지리를 신봉해 궁궐을 짓고 천도를 하려 했던 이유, 또 고종이 비선 특히 흥선대원군과 민비(명성황후라고 해야 하나 - 이 둘 역시 강력하게 주술을 이용했으니)에게 휘둘린(?) 모습들은 위의 네 단계에 맞아떨어진다.


이런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이렇게 하면 망한다는, 절대로 이들과 같이 하면 안 된다는... 그래서 역사의 기록을 살피고 미래를 예측해 현재를 살아가고자 하는 것 아니겠는가.


특히 권력을 휘두르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더더욱 그래야 한다. 그 권력이 자신의 사적인 영달을 위해서 쓰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발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권력자의 말과 행동은 사적이지 않고 공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가 실시하려 하는 정책은 공개되어야 하고 토론되어야 하며, 합리적이어야 한다. 즉 공개되어야 하고 많은 논의를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 여기에 다른 사람들의 비판이 있어야 하고, 이러한 다양한 의견들을 통해 공적인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 


이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모습이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의견을 막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며, 사적인 영역을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정치가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를 할 자격이 없다. 


그런 자격 없는 사람이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할 의무가 국민들에게 있기도 하고. 그러니 이 책의 끝부분에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주술적 언어가 정치를 잠식하려 할 때 그것을 한낱 가십으로 소비하지 않고, 공동체를 위협하는 명백한 위험 신호로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퇴보한 역사의 민낯 앞에서 우리가 마땅히 짊어져야 할 시대적 책무다.'(240쪽)


이런 민주주의 나라에서, 선진국이 되었다는 대한민국에서 세상에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손바닥에 왕(王) 자를 쓰고 나왔는데, 그런 사람을 지지할 수가 있단 말인가? 왕국이 아니라 민국인데... 민국에는 왕이 없는데, 있어서는 안 되는데...  그런데도 대통령의 부인을 '국모'(222쪽 주 참조)라고 하는 국회의원이 있다는 사실에 할 말을 잃기도 하는데... 이건 그냥 가십으로 취급할 문제가 아니다. 아주 심각한 문제다.


왕(王)처럼 군림하는 사람이 대통령인 민주주의 국가는 없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런 대통령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그러한 사고를 지닌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그 다음 단계는 이 책에서 언급한 권력 붕괴 4단계를 밟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렇게 되기도 했고.


읽으면서 연산군, 광해군, 고종의 실패를 모두 합친 실패를 한 권력자가 현대 우리나라에 있었다는 사실. 세 왕들이 행했던 것들을 모두, 마치 선물 종합세트처럼 다 행한 그러한 인물이 존재했다니... 이 책에는 그러한 모습이 잘 분석되어 있는데, 그런데도 여전히 자신의 행동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 왕국이 아닌데, 왜 여전히 왕국이라는 느낌이 들게 하는지...


이런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어떻게 되는지, 저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맺는다.


'주술에 빠진 권력은 단순히 세상을 잘못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기어코 파괴하고야 마는 것이다.' (226-227쪽)

'무속은 그 자체로 현세의 이익과 복을 추구할 뿐, 사회 전체의 공동선을 지향하는 윤리적 체계나 공공성이 결여되어 있다.'(235쪽)


무속을 없애자는 말이 아니다. 공과 사를 구분하자는 것이다. 사적인 것이 공적인 영역에 들어오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고. 


명쾌한 분석, 구체적인 역사적 사례. 그리고 이해하기 쉬운 설명으로 주술이 어떻게 권력에 이용되었고, 그들이 어떻게 몰락해 갔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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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는 팔레스타인 제노사이드에 침묵하는가 - 잔해 속의 그리스도
문터 아이작 지음, 김상기 옮김 / 동연출판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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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휴전 협정을 맺었다는 뉴스를 얼마 전에 보았다. 휴전 협정이라니? 이들이 언제 전쟁을 했던가? 이스라엘이 일방적으로 가자를 공격하여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죽거나 쫓겨난 사건 아니었던가. 여기에 무슨 휴전? 그냥 잠시 이스라엘이 공격을 멈추었다고 봐야겠지.


공격을 멈추었다는 표현을 이 책을 쓴 문터 아이작이 본다면 어이 없어 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분쟁'이 아니라, 그러니까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니까.


몇 십 년에 걸친 학살. 하지만 세계는 이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인권을 중시하는, 홀로코스트는 절대로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이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참극에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이상하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에서 벌이는 일들을 용납해서는 안 되는데...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이들은 하마스의 무차별 공격으로 이스라엘이 방어에 나섰다고 옹호하고 있다. 


이에 문터 아이작은 몇 십 년 동안 이스라엘에 의해 자행된 일들을 고려하지 않은, 역사적 맥락을 제거하고 한 시점을 분쟁의 시작으로, 아니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방어라고 말하는 것은 사기라고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옹호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 역시 학살에 동조하는 일이라고...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침공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의해 국제사법재판소에 기소되기도 했다. 이 책에 보면 '(2024년) 1월 26일, 국제사법재판소는 이스라엘이 집단학살방지협약을 위반하는 행동을 저질렀을 '개연성'이 있다고 판결했다'(162쪽) 그러면서 임시 명령을 내렸다고 하는데, 기가 막힌 일은 다음에 있다. 


'국제사법재판소의 임시 명령이 나온 다음 날,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위스, 핀란드, 호주 캐나다 정부는 신속하고 단호하게 대응했다. ...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기구, UNRWA에 대한 자금 지원을 중단하기로 했다'(163쪽)니...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을 보면 비록 '개연성'이라고 했지만 이스라엘이 집단학살방지협약을 어겼다는 판결인데, 이스라엘에 압력을 넣는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을 돕는 기구에 대한 억압에 들어간 것. 그것도 우리가 인권 선진국이라고 믿고 있는 나라들에서.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만큼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미디어를 움직이고 있고, 또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굳건한 동맹을 맺고 있으니... 그 동맹으로 인해 트럼프가 강제하다시피 휴전 협정을 맺었지만, 가자 지구에 대한 공격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고 하니...


그러한 공격이 학살임을 증언하고 있는 문터 아이작. 그는 팔레스타인에서 목회 활동을 하는 기독교 목회자이다. 그의 종교가 이슬람이 아니라 기독교다. 그래서 그는 서구의 기독교가 이런 학살에 침묵하고 있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의 교리와도 맞지 않는다고, 세계의 기독교가 이러한 학살에 침묵하는 것은 학살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그는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팔레스타인이 처한 현실을 알리고 있다. 함께 행동하자고 하고... 단순히 기도가 아니라 행동이 필요하다고 성경을 인용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놀랍다. 이슬람을 증오하는 것이야 이해하겠는데, 같은 기독교도들이 살해되고 있는데도 기독교 단체들이 침묵하고 있다니... 아니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민족, 국가가 중요한가? 이들이 어느 민족, 인종, 나라 사람이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나? 그러면 안 되지 않나?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었음을 팔레스타인 목회자인 이 책의 저자 문터 아이작이 말하고 있다.


'너무 오랜 세월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은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무시당하고, 비인간화되고, 심지어 악마화되어 왔다. 우리는 종종 팔레스타인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경험이 폄하되고, 존재 자체가 배제되었다.'(230쪽)고 토로하고 있으니... 이건 아니다 싶다.


이런 내용, 경악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이 책 곳곳에 나타나는데... 그렇다고 문터 아이작이 하마스를 지지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하마스는 이슬람이고 이 책의 저자는 기독교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폭력에 반대하는 관점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역시 비폭력, 사랑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지 않은가. 그러니 기독교도가 폭력에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폭력도 구분하고 있으니... 


하마스를 반대하지만 그런 그이지만 하마스의 변화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하마스 역시 자신들이 반대하는 것은 유대인이 아니라 시온주의라고 하고 있는데, 이 책의 저자 역시 시온주의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시온주의는 침략주의고, 폭력이라고.


분명 학살이 일어났고, 이에 대해서 세계 곳곳에서 이러한 학살에 반대하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를 반유대주의로 뭉뚱그려 비난하는 것은 문제다. 이들이 이스라엘의 학살에 반대하는 것은 반유대주의가 아니다. 홀로코스트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 책에 보면 이러한 반대 운동에 유대인들도 많이 참여하고 있다고 하니, 가자 지구 침공에 반대하는 것을 반유대주의로 몰아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


또한 기독교 단체에서 이러한 학살에 침묵해서는 안 된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성경에도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 너희가 이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마태복음 25:40, 45)라는 말이 있다. 앞의 문장은 천국에 가는 사람을 의미하고, 뒤의 문장은 지옥에 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천국과 지옥에 가는 것이 어려운 사람을 도왔느냐, 모른 체 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는데, 지금 세계에서 가장 작은 자에 속하는 사람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지 않는다면 그러한 기독교인이 어떻게 천당에 갈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꼭 기독교인만이 아니겠지만...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읽으면서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마음이 답답해지기도 했고, 그럼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에 조금의 위안을 받기도 했는데...


저자는 책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희망을 선택한다. 살아남기를 선택한다. 존재하기를 선택한다.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끝까지 주장하기를 선택한다. 우리는 회복할 것이다. 회복의 뿌리를 인내에 두고, 우리 민족을 위한 정의를 요구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회복할 것이다.' (382쪽)


이런 희망, 이런 인내를 그들은 '수무드'라고 한다고 한다. 너무 오래 걸리지 않게 팔레스타인이 회복되기를... 종교인들이 이러한 환난에 빠진 사람들과 함께하기를... 그들에게 희망이 되기를, 이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저자가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사람들과 함께한 '잔해 속의 그리스도'가 많은 반향을 얻었다고 한다. 재난을 겪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그리스도.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야 학살이 없어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정보를 다양한 방면에서 얻는 것이 중요하니까.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진 출처 : https://www.instagram.com/p/DQdkMLugZT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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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25-12-06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kinye91 2025-12-07 00:2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등대들, 조용히 빛나는
문선희 지음 / 가망서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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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에 배웠던 노래 '등대지기'가 있다. 이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때 그 노래 가사가 떠올랐는데...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자고

한겨울에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바로 이것이었다. 이 책에 나오는 등대들, 등대가 아니다. 고공 탑(CCTV탑, 송전탑, 송신탑, 굴뚝, 대교 주탑, 타워 크레인, 철탑, 광고탑, 종탑, 사일로, 전광판, 고가도로 교각) 이다. 평소에는 사람이 오르지 않는 곳. 아니 사람이 지낼 수 없는 곳.


등대는 그래도 사람이 지낼 수 있다. 외롭고 힘들고 또 어둡고 캄캄한 곳에서 한줄기 빛을 쏘아 다른 이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 등대고, 그곳을 지키는 사람이 바로 등대지기다.


하여 등대지기는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존재다. 그런 등대지기의 마음을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이라고 노래했다.


그러면 고공탑에 오르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 자신들만 잘살기 위해서 오를까? 아니다. 이들은 다함께 잘살기 위해서, 아니 살기 위해서 오른다. 아무리 외쳐도 듣지 않을 때, 자신들의 목소리를 다른 존재들이 들을 수 있게.


이들이 고공탑에 오르기까지 수없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다. 제발 들어달라고... 그런데 듣지 않는다. 듣지 않으니 듣게 해야 한다. 누가 외치는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게 해야 한다. 그 방법이 바로 고공탑으로 오르는 것.


평소에는 사람이 없는 곳, 사방이 트인 높은 곳. 사람이 지낼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는 곳. 그곳으로 오른다. 올라서 보라고, 들으라고 한다. 그렇게 그들은 사람이 지낼 수 없는 곳에서 많은 날들을 보낸다.


자신의 목소리를, 약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등대가 어둠 속에서 빛을 내어 다른 존재들을 인도하듯이 그렇게 그들은 고공탑에 올라 약자들의 외침을 남들이 보고 들을 수 있게 한다. 등대와 같은 고공탑. 등대지기와 같은 고공 농성자들.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나선 사람들. 이들 덕분에 많은 것들이 좋아지곤 했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고공탑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는 현실.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고공탑에 올라야 할까?


그들이 고공탑에 올라가지 않도록 낮은 곳에서부터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는 없을까?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작가는 이러한 고공탑들을 찾아 기록으로 남겼다. 소중한 작업이다. 어떤 고공탑은 철거되었고, 어떤 고공탑은 아예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기도 하고,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지워버리고 있으니,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는 작가가 있음에 이들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사진을 흑백으로 처리했다. 그리고 수평선과 바다의 이미지를 보여 바다 위 등대처럼 보인다. 또 흑백이기 때문에 어둠 속에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외로워보이기도 한다.


지독한 외로움, 괴로움. 그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빛을 보내려 하던 사람들. 그들의 마음이 바로 등대지기 노래의 가사처럼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작업을 해준 작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고, 앞으로 이렇게 높은 탑들에 사람들이 오르지 않는 사회였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고용노동부 장관이 민주노총 위원장을 했던 사람이지 않은가. 노동자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장관이 되지 않았나. 그러면 이제 노동자들이 고공탑에 오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공탑에 올랐던 많은 사람들이 노조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경우가 많았으니 더더욱. 


사진만이 아니라 그 사진에 얽힌 사연들이 이 책에 실려 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이 등대지기 노래가 생각난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보여줬던, 길을 알려줬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마음.


이러한 일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러한 기록을 남겨준 작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 말 역시 마음을 울린다.


'세상은 그들을 약자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들을 초인이라 부른다. 초인적 인내력으로 세계와 독대한 단독자. 백마 대신 굴뚝을 타고 온 초인.' (97쪽)


이육사 시인의 '광야'에 나오는 구절을 빗대어 표현한 이 말. 여기에 덧붙이자면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란 시에 손님이 온다고 되어 있다. 그 손님이 어떤 형상으로 오는지 아는가? 바로 '고달픈 몸'으로 온다고 했다.


고공탑에서 고달픈 몸으로 우리에게 온 손님. 그들을 작가는 굴뚝을 타고 온 초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을 맞이할 때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다는 마음을 지녀야 하고, 그들을 잊지 않고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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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불평등 - 글로벌 자본주의 변동으로 보는 한국 불평등 30년
최병천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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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보는 관점을 버리라고 한다. 불평등하면 좋지 않은 것, 없애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기 쉬운데, 인류 역사상 모두가 평등한 시대는 없었기에, 어쩌면 인류 역사 내내 우리는 불평등의 시대를 살아온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다 다르듯이 똑같은 생활을 하라고 하면 아마 견디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평등이라고 해서 무조건 같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나 대동소이(大同小異)라는 말 또는 '따로 또 같이, 같이 또 따로'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같을 수는 없다. 비슷할 수는 있어도. 그렇다면 불평등을 다름으로 인식하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수 있다.


불평등을 무조건 없애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껴안고 가야 할 것. 다만 불평등의 부작용을 최소화 하는 방법을 찾는 것. 이것을 우리가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평등하기 위해서 위를 깎아 아래를 고이면 된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위는 놓아두고 아래를 올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면 평등 개념이다. 그렇다면 불평등도 마찬가지다.


불평등하니까 위를 아래로 내리자가 아니라 아래를 위로 올리자, 위하고 똑같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래도 생활을 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리자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이 책을 읽은 소감이 바로 그렇다. 불평등에 대해서 무조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 불평등을 받아들이고, 격차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격차를 줄이는 것이 위를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아래를 올리는 방안, 위와 아래가 함께 올라갈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고, 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층과 하층이 어떤 집단인지부터 합의가 되어야 한다. 상층과 하층에 대한 합의가 없으면 논의가 산으로 갈 수 있다. 서로 다른 계층을 두고 정책을 제시하면 어느 쪽도 만족하지 못할 대책이 나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하층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자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서 하층은 고령층이라고 한다. 수입이 없는 고령층. 그렇다. 노인빈곤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 노인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이니, 수입이 없는 고령층을 하층이라고 보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 고령층에 대해서 어떤 정책을 펴야 하는가? 지금 실시하고 있는 기초연금 제도를 손보고, 즉 '지급대상자를 70%로 하지 않고, 월 288만원(2022년 부부 기준이다)+물가상승분만큼으로 대상자를 동결하'(369쪽)고 '절감된 예산으로는 75세 이상 저소득층 노인에 한해 보충연금을 도입해서 추가 지급을 해야 한다'(369쪽)고 주장한다.


(참고로 2025년 기초연금 수급대상자는 부부가구의 경우 364만 8천원이 기준이고, 단독 가구의 경우는 228만 원이다. 이를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한 것과 비교해보면 3년동안 물가상승률을 4%라고 가정해도 약 325만원이 된다. 한 가구당 40만 원 정도의 예산이 절감되는 셈인데... 정밀한 계산이 필요하다. 물론 그는 보충연금을 일몰제로 하자고,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소멸되는 법으로 하자고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보편 복지냐 선별 복지나는 논쟁이 있어야 한다. 공론화를 통해 우리 현실에 맞는 정책이 입안되고 실시되어야 한다)


이렇듯 이 책에는 구체적인 정책이 제시되어 있으니 참조해 볼 만하다. 여기에 우리가 잘못 알고 있다고 지적하는 사항이 몇 있는데, 이는 불평등이 꼭 경제 위기와 함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경제가 위기에 처했을 때 역설적으로 불평등이 축소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고, 또 경제가 활성화될 때 특히 수출이 늘 때 불평등이 확대되는 경향이 있다고 튱계를 통해 주장하고 있다.


이는 수출 산업이 주로 대기업을 비롯한 규모가 큰 곳에서 이루어지고, 이들 기업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이 높기 때문인데... 


불평등이 우리나라 국내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경제, 또 세계 정세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수시로 강조하고 있다. 특히 중국과의 관계는 우리나라 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적절한 분석과 대책이 필요하다고 한다.


농어업과 같은 생존에 필수적인 분야를 저부가가치 산업이라고 여기에 대한 투자보다는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대기업과 같은 규모가 큰 기업에 투자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견 타당하면서도, 그럼에도 농어업을 포기할 수는 없는 현실을 감안해서 농어업 종사자들에 대한 지원, 투자 등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으면 했는데...


사실 계층 간 불평등도 심각하지만, 지역 간 불평등도 심각하고 농어촌은 거의 소멸 위기에 처해 있으니, 이는 생산성을 넘어 우리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여기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우리나라 하층은 고용되지 않은 고령층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지원이 절실하다는 것. 여기에 상위에 있는 노동자들을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위에 있는 노동자들을 올릴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


수출로 인해 대기업이 살아가나고 대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이 상승하는 만큼, 그에 따른 협력업체들 (중소기업)의 노동자 임금도 상승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 즉 수출이 잘 되어 대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이 상승해서 불평들의 폭이 확대되는, 저자가 주장하는 '좋은 불평등'을, 함께 상승해서 불평등의 폭이 좁아지게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것은 결국 분배를 통해서 할 수밖에 없는데, 세금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도 저자가 좀더 정리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세금이 불평등의 격차를 줄이는데 큰 역할을 할 테니까. 그런 역할을 하는 예가 바로 저자가 제시한 기초연금인데... 


또한 저자는 대학의 등록금 인하에 대해 '대학 등록금 동결정책은 대학 교육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사회진출을 위해 학생들에게 필요한 교육 공급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 등록금 동결은 해지하되, 저소득 학생의 경우 장학금 지원을 강화하면 된다'(344쪽)고 부정적인 생각을 보이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논의가 더 필요하다.


오히려 장학금을 지급하는 쪽이 아닌 고등학교 무상교육처럼 등록금을 대폭 낮추고, 교육에 필요한 재원을 세금을 통해 마련하는 방안을 고민해 보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저자 역시 '복지 정책이 2차 분배이고, 노동 정책이 1차 분배라면 교육 정책은 0차 분배다'(348쪽)고 교육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에 따른 재원을 개인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마련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저자의 주장에 참고할 사항이 많은데, '좋은 불평등'이란 역설적인 표현으로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점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으니, 정책 입안자들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특히 불평등의 원인을 국내와 국외를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저자의 관점은 배울 필요가 있다. 지금 세계는 한 국가만으로 존재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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