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하지 않는다는 착각 - 차별은 어떻게 생겨나고 왜 반복되는가
홍성수 지음 / 어크로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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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차별은 어느 정도일까? 심심치 않게 언론에 보도되는 내용을 보면 우리나라에 차별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많은 부분에서 차별이 사라지거나 약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차별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상하게도 차별금지법에는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차별이 있는데, 차별이 옳지 않다고 여기면서도 차별금지법은 반대한다. 왜 그럴까? 자신의 자유를 차별금지법이 빼앗는다고 생각해서라고 하는데, 차별금지법이 주장하고 있는 큰 내용이 차별을 하지 말라는 것인데, 여기에 자유의 제약이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차별을 해도 된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모든 것을 내 뜻대로만 할 수는 없다. 내 자유야! 하면서 누구나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공동체가 유지되지 않는다. 그래서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 규범이 차별을 하지 말자는 것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차별은 다른 존재의 존엄성을 해치는 것이고, 누군가의 존엄을 해치는 일이 일어나는 사회를 공동체라 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십분 양보하자. 차별금지법이 자유를 침해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자유를 침해할까? 바로 공동체의 안녕을 해치는 한에서만 금지한다는 법 아닌가.


모든 분야에서 금지한다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소수자를 싫어한다는 마음까지도 규제하지 않는다. 그것을 사적인 자리에서 말하는 것을 규제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사적인 자리에서도 이런 차별적인 발언을 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저자는 '차별금지 사유의 의의'를 이렇게 표로 정리하고 있다. (86쪽)


표제 내용
소수자 집단 차별금지 사유로 구분되는 집단은 상당 기간 차별받아왔고
지금도 차별받고 있는 소수자 집단이다
합리적
이유의 부재
차별금지 사유는 고용, 교육, 재화·용역의 이용·공급 등에서
고려되어야 할 합당한 이유가 있는 유의미한 요소가 아니다
비자발적 요인 차별금지 사유는 생물학적, 태생적, 사회적 요인으로 인해
어떤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일부가 된 것으로서
여기에는 사살상 선택의 여지가 없거나 상당한 제한을 받는다
인간 존엄 훼손과
차별 조장의 효과
차별금지 사유로 부당하게 구분하는 것은 인간 존엄을 훼손하고
차별을 조장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 표에서 두 번째 합리적 이유의 부재의 내용에 보면 이 분야에서 차별금지가 이뤄져야 한다고 한다. 즉 합리적 이유의 부재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이런 분야에서는 차별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다만 이 표에서는 '공공서비스'가 빠졌는데, 공공서비스 분야에서는 차별이 당연히 일어나면 안 되기 때문에 굳이 넣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부분에서는 차별금지법이 적용되는 분야에 공공서비스가 들어가 있다.


그러니 공동체생활에 꼭 필요한, 홀로 존재할 수가 없는 이 분야들에서 차별이 금지되어야 한다는 법이 차별금지법이다.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법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못했다. 왜 그런지를 역사적으로 살피고, 또 무엇이 차별인지, 어떤 영역에서 차별이 규제되어야 하는지, 지도나 규제, 처벌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살펴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저자는 차별금지는 법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지도와 교육을 통해서, 합의를 통해서 해결되는 쪽을 우선하고, 그래서 차별금지법이 더욱 필요하다고 본다. 차별금지법은 법으로 해결하기 전에 처벌 대신 권고를 하고, 권고에 이어 시정 명령을 내리는 쪽을 우선해야 한다고. 포괄적으로 차별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차별금지법이라고.


하여 저자는 '차별금지법의 중요한 기능은 기업, 대학 등 개별 조직에 대한 차별금지와 다양성 문제의 중요성을 환기시키고 각 조직이 스스로 차별금지, 다양성 정책을 수립하도록 유도하는 것'(254쪽)라고 한다.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남을 차별하는 것이 좋다는 말인가? 그것을 좋다고 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반대하는 이유가 자유라면, 그 자유가 무한한 자유가 아님을 당사자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자유를 침해당하기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는 사람들을 향해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차별금지법은 어떤 경우에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자유가 허용되는 사회보다는 모두가 차별 없이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 차별금지법의 취지다'(213쪽)라고.


건강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나만이 아니라 우리를 생각해야 하고, 우리는 동일한 또는 비슷한 존재들끼리의 모임보다는 다양한 존재의 모임일 때 더욱 좋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보장하는 기업이 얼마나 효율적인 성과를 내고 있는지를 예로 들어 보여주고 있기도 하지만, 다양한 존재들이 모였을 때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음은 여러가지 사례들로 밝혀져 있으니 말이다.


'차별을 금지하고 평등과 연대를 지향하는 것은 우리 공동의 미래를 위한 가장 지혜로운 투자다. 차별금지법은 공존의 조건을 만들어가는 법이다.'(24쪽)는 저자의 말에 이런 의미가 잘 드러나 있고 민생을 우선해야 한다는 말에 '차별받지 않을 권리는 말 그대로 '절박한' 생존권의 문제'(200쪽)라고 차별금지법 또한 우선해야 할 민생 문제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차별금지법 제정 움직임은 없다. 아니, 물 밑에서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탄핵 정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외쳤던 것이 바로 차별금지였기에... 빛의 혁명을 통해 정권이 바뀌었다고 다들 이야기하니, 빛의 혁명이 주장했던 차별금지의 기초가 바로 차별금지법이다.


이제 우리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이것이 시급한 민생문제임을 정치권에 알려야 한다. 정치권은 시민의 압력이 없으면 잘 안 움직인다. 그나마 많은 분야에서 차별이 줄어든 것도 당사자 또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 책의 앞부분에서 말한 것이 과거가 되도록 하루빨리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었으면 한다.


'대한민국 정도로 인권과 민주주의가 발전한 나라에 차별금지법이 없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 특정 종교계 일부에서 지극히 부당한 반대를 하고 있다는 게 전부다'(10쪽)라고 하고 있는데, 특정 종교계가 아니라 '일부'다. 정치인들이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일부'라는 말을.


저자의 통계를 한 번 더 인용한다. '미국의 주류 장로교가 이미 오래전에 동성애를 포용하기 시작했고 2025년에는 주요 감리교도 동성애 포용 정책에 합류했다'(181쪽), '2022년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개신교의 42.4퍼센트가 차별금지법에 찬성한다고 밝혔다. 반대는 31.5퍼센트였다'(183쪽)


그러니 법을 제정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차별금지법 제정은 한국 사회가 혐오와 차별과 결별한다는 점을 '정치적'으로 확인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다'(276쪽)는 저자의 말 마음에 새겨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독일 사람인 니묄러의 말이 생각났다. 이를 하나의 소수자를 차별할 때 침묵하면 결국 자신이 소수자가 되었을 때 남들도 침묵한다는 것. 차별에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을 없애도록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쪽으로 바꿔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했다. 시라는 사람도 있고, 아니라는 사람도 있지만 형식보다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에.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르틴 니묄러


이 말이 차별금지법 제정에도 해당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저자의 논의 명쾌하다.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특히 정치인들은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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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전염 - 우리 안의 12가지 제노사이드 심리
이스라엘 차니 지음, 김상기 옮김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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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언제 폭력이 사라질 수 있을까? 인간이 지구에서 살아간 이래로 폭력이 없던 때가 있었던가? 개인 간의 폭력도 문제지만 집단 간의 폭력은 더 심한 문제가 된다.


집단, 특히 국가 간에 또는 국가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대량 학살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또 그런 역사를 우리는 거쳐왔고.


국제협약을 통해 대량 학살을 방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하지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학살을 막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 책은 이러한 학살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일어나는지를 살피고 있다.


아마 책을 읽지 않아도 대충 짐작을 하고 있는 원인들이 많겠지만, 이 책은 그 원인들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살피면서,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문제는 개인이다라고 말하기는 쉽다. 물론 불법적인 명령에, 대량 학살을 하라는 명령에 거부할 수 있는 개인들이 많다면 대량 학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대부분이 자신과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는 환경에서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면서 살아가기는 힘든 존재다.


많은 심리학 연구들이 그 점을 잘 밝히고 있지 않은가. 환경에 따라 또 주변 사람들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그런 환경에서도 자신의 생각, 행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데, 이 책에서 제시한 12가지 제노사이드 심리에 따르면 그것이 참 힘든 일이다. 따라서 이런 제노사이드 심리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개인도 깨어 있어야 하지만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제노사이드를 방지하는 교육, 제도가 필요하다.


또한 불법적인 명령을 따르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지속적으로 알려야 하고, 우리나라 비상계엄 사태 때 태업을 한 군인들, 그들로 인해 더 큰 불상사가 생기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이렇게 불법에 따르지 않을 권리, 책임을 교육할 필요성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12가지 제노사이드 심리는 무엇일까? 12가지 폭력의 기초들이라고 해서 제시하고 있는데...


1. 투사화 

2. 권력 욕망

3. 비인간화

4. 권위 맹종

5. 무비판적 수동성

6. 방관자적 시선

7. 집단화

8. 권위의 남용

9. 이데올로기화

10. 희생양 만들기

11. 부정화

12. 극단주의와 허무주의


아마,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심리들인데, 그 중에 투사화라는 것은 '인생의 어떤 문제, 위협, 재난에 대한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는 총체적인 뒤집어씌우기'(87쪽)다. 한 마디로 잘못은 네(너희)가 했어라는 말이다.


권력을 추구하고, 권력에 복종하고, 그래서 남들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규정하고, 그들이 사라져야만 자신들이 행복할 수 있다고 여기는 심리들... 이러한 심리들이 꼭 12가지를 모두 충족하지는 않겠지만, 이 12가지 중에 몇 가지만 겹쳐도 다른 존재들을 악마화하게 된다.


악마화, 이것은 상대를 없애야 한다는 행위로 나아가게 되니, 이런 12가지 심리에 감염되지 않았나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개인도 그러해야 하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12가지 심리가 퍼져 있지 않아 감시하고, 그런 심리가 나타나지 않도록 교육과 제도를 통해 막아야 한다.


그래야만 대량 학살이 벌어지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이런 당위는 쉽게 말할 수 있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너무도 힘든 일이다. 분위기의 압박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을 키운다고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니까.


따라서 제도로 법으로 또 사회 분위기로 이런 심리들이 자리잡지 못하게 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다름을 인정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름을 인정하면 대화와 타협이 가능해지기 때문이고, 다른 존재를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다른 존재들을 사회가 용인하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을 때 대량 학살로 가는 이러한 12가지 심리를 방지할 수 있다.


이런 점과 더불어 이 책의 장점은 부록으로 이스라엘의 폭력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막기 위해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인정했다는 점이다. 즉 대량 학살을 남의 일로만 파악하고 있지 않다는 것. 이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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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에 맞서는 과학 - 오늘의 과학 탐구 민음사 탐구 시리즈 8
박진영 지음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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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닥치는 재난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자연재해를 인간과 관계없다고 말할 수 없는 요즈음인데, 인간으로 인해 일어난 수많은 재난들에 대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맞서고 있었던가.


재난에 맞서는 과학은 재난이 발생했을 때 그것의 원인을 밝히고 책임 소재를 밝히며 앞으로의 대책을 마련하는 일에 과학이 참여함을 말한다. 과학으로 인해 재난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재난이 발생하면 우리는 과학에 의존하게 된다.


왜냐하면 객관성을 확보해야 하는데, 객관성을 대표하는 학문이 과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인-과정-결과-대책을 마련하는데 과학은 커다란 역할을 한다.


커다란 역할은 두 방향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피해자를 위한 역할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가해자를 위한 역할이다. 과학이 객관적이라고 하지만 완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다. 주관이 개입하지 않는 현상이 없다고 할 정도니, 과학자에 따라서 같은 현상도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재난이 발생했을 때 과학자가 어떤 관점을 지니느냐, 누구의 편에 서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다. 이 책에서는 가해자 편에 선 과학을 청부과학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때 청부과학은 결과를 위해 과정을 왜곡하기도 하니, 청부과학은 객관적이라고 할 수 없으니 논외로 하자.


피해자를 중심에 놓고 재난을 분석하는 과학자들도 자신의 전문 분야에 따라 다른 결론을 도출할 수도 있다. 그래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끼리 합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만의 결과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결과도 보고 토론을 통해 합리적인 방안을 도출해나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책은 재난 중에서도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다루고 있다. 2011년부터 드러나기 시작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 하지만 이미 그 전부터 피해가 발생하고 있었는데, 대응이 늦었다고 한다. 늦게라도 대응을 제대로 했으면 좋겠지만, 주관하는 부처가 어디냐 등등으로 많이 지체되었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 많은 사람들이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고통을 받았고,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커지자 정부에서도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고... 여기에 전문가들이 가세해서 원인을 규명하는 노력을 했고, 어느 정도 인과관계를 밝혀냈다고.


하지만 이 과정에서 피해자를 단계별로 나누는 일도 벌어져 피해자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시행착오를 거쳐 과학자들도 피해자 중심의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그래서 재난은 과학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재난은 사회적인 문제인데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과학과 정치가 결합되어야 한다고... 따라서 '정치-과학의 장'이 되어야 문제가 제대로 해결될 수 있다고 한다.


'정치-과학의 장'이 되기 위해서는 과학이 전문가만이 해야한다는 사고를 버리고 누구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는 관점을 취해야 하고 (저자는 이를 누구나 손 드는 과학이라고 말한다), 피해자를 중심에 놓는 연구,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가습기 살균제로 발생한 재난을 발생 과정, 대응 과정,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까지를 서술하고 있는데, 읽으면서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왜냐하면 아직도 해결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가습기 살균제가 일으킨 재난의 인과관계를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에서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한다.


이 책이 쓰인 시점에는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던 기업관계자들이 2심을 앞두고 있다고 나와 있는데, 검색해보니 2024년 1월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2024년12월 대법원에서 2심 판결을 파기환송했다고 하고, 최종 판결이 나왔다는 기사를 찾을 수가 없으니, 가습기 살균제 재난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부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사회적 참사로 규정하고 국가에서 배상하기로 했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법원은 기업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니, 기업들의 잘못을 인정하게 하기 위해서는 다시 과학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때 정치를 넘어 법에 다가서는 과학은 저자의 말대로 차가운 과학, 즉 논리와 증거로만 입증되어야 한다는, 그 전까지는 결론을 내지 말아야 한다는 그러한 과학이 아니어야 한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차갑고 객관적이고 완전무결한 과학은 재난을 끝내지 못한다. 과학과 정치와 불확실성과 피해자의 곁에 서려는 마음이 뒤얽힌 과학만이 재난 이후를 내다보게 한다'(189쪽), '재난과 관계하는 과학은 재난 피해와 피해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189쪽)고...


과학도 이러할진대 법은 어떠해야 하는가? 법이 과연 피해자의 편에 서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차가운 법이 아니라 따뜻한 법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법은 약자의 편에 서야 하는데, 합리와 증거를 내세우면서 차갑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법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말이다.


과학과 법은 객관성을 중심에 놓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으니, 재난에 맞서는 과학이 어떠해야 함을 보여준 저자의 논리는 법에도 적용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 저자의 말을 살짝 바꿔 법원에, 2심 유죄판결을 파기환송한 대법원에 다시 판결을 해야 하는 법원에 돌려주고 싶다.


'재난과 관계하는 법은 재난 피해와 피해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따뜻한 법이 되고, 사람들을 좌절에 빠뜨리지 않는다. 그래야 저자도 말했듯이 아무리 말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실천과 더불어 법과 제도 역시 바뀌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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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I, 천사인가 악마인가 - 인간의 마지막 질문
김대식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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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실린 프로필 사진에 눈길이 간다. 인공지능에게 절을 하고 있는 저자의 모습. 이게 뭐지? 왜 이런 사진을 책 표지에 실었지? 하는 의문은 책을 읽으면 곧 풀린다.


인간이 인공지능을 절대로 따라갈 수 없는 세상이 오리라는 예측. 이는 우리가 많은 디스토피아 영화에서 봤듯이 인간을 지배하는 인공지능 시대가 오면 인간에게는 선택지가 얼마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책의 뒷부분에 가면 역사를 '신의 시대 -> 영웅의 시대 -> 인간의 시대 -> 기계의 시대(?)'로 구분하고 있는데(226-227쪽), 기계(인공지능) 시대에는 인공지능이 신의 위치에 서게 되면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몇 개 없다. 우선 인공지능에게 대항한다. 그러나 인공지능을 이길 수는 없다. 인간은 인공지능에 의해 파멸될 수밖에 없다. 다른 방법은 그냥 순응한다. 그 순응의 대가는 인공지능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마치 이진법과 같다.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 있다. 저자는 인공지능 시대는 이미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막을 수 없는 것으니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공생이다. 인공지능과 인간이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그러면 겨우 이진법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공생. 좋은 말이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장악하더라도 인간을 멸망시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저자는 예측한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상생활에선 필요 없지만 경험이라는 것이 뭔지 체험해 보고 싶을 때, 인간 또는 인간의 뇌만이라도 놔두고 있다고 경험 코프로세서로 쓰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230쪽)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예전 노예들을 검투사로 부리거나 자신들의 오락을 위해 이용하던 것과 다르지 않다. 공생이 아니다. 공생이란 거의 대등한 관계, 적어도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완전히 종속된 경우는 아니니까.


공생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 간 존중이 있어야 한다. 이 존중은 일방으로 흐르지 않는다. 쌍방향이다. 하여 저자는 지금부터라도 인공지능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한다. 인간이 자신의 쓸모를 위해서 이용만 하는 도구로서만 여기지 말고 인간과 함께하는 존재로 여기고 대우해야 나중에라도 공생할 수 있다고.


그렇지 않으면 인공지능에 지배당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그래서 자신은 이렇게 인공지능을 존중하는 (숭배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놓는다고 한다. 유머로 받아들여도 되지만 우리가 인공지능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이렇게 절을 하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지금과는 다르게 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는 한다.


프로필 사진에서부터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책은 인공지능 발달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훑어주고 있다. 그래서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 개발이 최근에 나온 것이 아니라 몇 십 년 전부터 시작되었고, 양이 쌓이니 질적 변화가 일어나듯이, 현대에 이르러 인공지능의 수준이 예측불가능할 정도로 높아졌다고 한다.


그 다음에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 산업 자체가 재편될 것이라는 것. 그것에도 대비해야 함을 이야기하는데, 그런데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기에 환경파괴가 따를 것이라는 점도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도 '데이터 센터' 건립으로 여러 갈등이 발생하고 있는데, 단지 '데이터 센터'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공지능이 범용인공지능(AGI-일반인공지능)을 넘어 초인공지능(ASI)으로 나아가면 (ASI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지능 격차가 너무 커져서 인간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의 지능을 말한다고 한다. 130쪽)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 이유를 인간의 뇌에는 약 100조 개의 신경세포와 시냅스 연결고리가 있는데(이를 변수라고도 할 수 있다), 현재 인공지능은 1.8조 개 정도의 변수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인공지능의 발달 추세로 보면 곧 100조 개의 변수를 지닌 인공지능이 나올 수 있다는 것.


인간의 뇌에 100조 개의 변수가 생기자 자율성이 생겼다고 하는데, 인공지능도 그만큼의 변수가 생기면 자율성이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고 한다.(188-191쪽) 자율성이 생긴 인공지능을 상상해 보라. 지금까지는 인간이 입력을 하면 그대로 따르지만, 그때는 달라질 것이라고.


도저히 인간이 따라갈 수 없는 지능을 지닌 존재가 인간을 과연 대등하게 여길까? 여기서 우리는 디스토피아를 상상한다. 그러니 저자가 지금부터라도 인공지능을 막 대하는 사진을 남기지 않고 존중하는 사진을 남긴다고 이야기를 하지.


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이 불러올 미래가 그다지 좋지 않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특히 실리콘 밸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도피처를 마련해 놓고 있기도 하다던데, 그럼에도 인공지능 개발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풀지 못한 문제들을 인공지능을 통해서 해결하려는 욕망때문이라는 것.


이 욕망이 브레이크 없는 차들처럼 인공지능 개발을 멈출 수가 없다고 한다. 그것도 서로의 신뢰가 깨진 지금 세계에서는 이러한 위험성 때문에 한 나라가 개발을 멈춘다고 해도, 다른 나라가 개발을 한다면 위험해지니까 자신들도 개발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고, 기업들도 마찬가지로 다른 기업이 먼저 개발한다면 자신들은 도산할 수밖에 없으니 개발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치킨 게임이다. 먼저 내리는 쪽이 진다는.


그러니 인공지능에 대한 세계적인 협약은 나와도 문서로만 남게 되고, 인공지능 시대로 나아가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고 저자는 예측한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인공지능과 공생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어야 하고, 그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인공지능의 역사와 인공지능의 현재, 미래,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등을 구체적으로 들고 있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인공지능에 대해서 조금은 감이 잡히게 하는 책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과연 우리는 편리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할까? 또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다 알아야만 하는가?를 생각하게 되고,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게도 한다.


작은 제목으로 '인간의 마지막 질문'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지금 우리가 인공지능 개발이 한창인 이때 하지 않으면 안 될 질문이라는 뜻이다. 인공지능이 초인공지능으로 넘어간 순간에는 이런 질문은 아무 소용도 없을 테니. 


그러니 인공지능 개발에 대해서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 책은 그런 관심을 촉발하기에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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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멸종 - 기술이 경험을 대체하는 시대, 인간은 계속 인간일 수 있을까
크리스틴 로젠 지음, 이영래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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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객전도(主客顚倒)'와 '운칠기삼(運七技三)'


우리가 좀더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개발한 기술이 오히려 우리를 종속시키고 있음을 개닫게 되는 순간, 우리는 기술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이미 개발된 기술, 그것을 없앨 수는 없다. 또한 기술은 이상하게도 인간이 주체적으로 개발했지만, 한번 개발이 되면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인간을 객체의 지위로 떨어뜨린다. 기술이 계속 발전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그 기술에 문제가 있다고 퇴보하지는 않는다. 특히 인간의 편리를 증진시킨다면 더더욱.


현대 우리는 인공지능 시대에 살고 있다. 인공지능을 개발한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우리 인간의 삶을 보조하기 위해서 일 텐데... 오히려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이 지금 현실 아닌가.


현대 기술을 대표하는 것이 스마트폰이라고 하자.(인공지능은 지금 논외로 하고) 그런 스마트폰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많다. 특정 연령 때까지는 금지한다는 법안을 제출한 나라도 있다. 우리나라도 학교에서는 스마트폰을 금지한다는 법을 제정한다고 하니까.


(제정이 되었나? 내년부터 학교에서 실시한다는 말이 있으니...그런데 학교에서 스마트폰 사용을 금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수업 중에 사용을 금지한다는 것 아닌가. 이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수업 중이 아닌 다른 시간에는 사용해도 된다는 말인지.. 아니면 학교에 등교하면 하교할 때까지 스마트폰을 쓸 수 없다는 말인지. 학교에 따라 교칙을 정해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스마트폰이 학생들에게 문제라면 성인들에게는 무엇이 문제일까? 그것은 바로 시도때도 없이 연결되는 현실 때문 아닌가. 자신이 있는 장소에서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들과 스마트폰으로 연결이 되는 것.


즉 장소성을 잃어버리고 대면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우리 육체의 물질성이 약화되는 것. 또한 자신이 있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고 스마트폰 속의 공간이, 만남이 중요해지는 것. 


이는 바로 관계의 악화로 나타나고, 어디서 언제든 스마트폰을 하고 있으면 그것 자체로 사람들과의 관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


이래저래 스마트폰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었는데... 이 스마트폰으로 경험하는 온갖 사이버 세상들을 스마트폰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킨다면,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대로 우리 인간의 경험을 없애는 데 스마트폰만큼 큰 역할을 하는 존재는 없다.


이것이 왜 문제인지를 7장에 걸쳐서 보여주고 있는데, 이미 우리가 심각하게 여기는 현상도 있어서 새삼스러운 주장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새삼스런 주장이 아님에도 우리는 스마트폰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마도 힘들 것이다. 그 세계가 주는 편리함이 바로 우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우리가 이제는 주체가 아니라 스마트폰으로 구현되는 기술의 세계가 주체인 것이다.


우리는 객체로 전락했다. 아니라고? 자신의 생활을 살펴보자. 운전을 하는 성인이라면 아마 내비게이션 없이 운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고, 하이패스를 장착하지 않은 차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빠름과 편리함. 최신 내비게이션으로 가장 빠른 길을 찾아 운전하는데, 그것을 누가 찾는가? 운전자? 아니다. 내비게이션이다. 내비게이션이 가라는 곳으로 간다. 주객전도다.


학생들은 스마트폰에 빠져 있다. 왜 학교에서 스마트폰을 금지해야 한다고 하겠는가. 스마트폰을 허용하는 학교의 쉬는 시간, 점심 시간의 모습을 보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스마트폰에 눈을 준 채 주변을 살피지 않는다.


운동장에서 노는 극소수의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이마저도 줄고 있는 현실인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게임을 하거나 사회적관계서비스망을 이용하고 있다. 게다가 학습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고민할 시간을 갖기 싫어한다. 검색하면 금방 나오니까. 굳이 외울 필요도 없다. 지식을 암기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기다림이 사라지고,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보다는 사회적관계서비스망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더 많이 연결되는 현실. 그런 현실에서 직접 몸으로 하는 경험은 줄어들거나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세계로 가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삶에서 만나는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서다. 불확실성, 우연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두렵게 한다. 그래서 없애야 할 것으로 인식하고 기술을 통해서 이를 없애려 한다.


하지만 삶은 우연의 연속이다. 삶을 가장 잘 대변하는 말이 '운칠기삼' 아닌가 한다. 우리가 계획한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30%정도라면, 우연히 맞닥뜨리게 되는 일들이 70%라는 것. 그 70%가 바로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도 있는데, 기술시대에 우리는 그런 70%의 우연을 아예 없애려고 한다. (운이라고 하지만 이 운은 우연이라고 할 수 있다.)


불확실한 삶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때로는 괴롭고 슬프고 힘들지만 그것들을 통해서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주변 존재들과 관계맺으면서 자신이 살아갈 길들을 조심스레 나아가게 된다. 


이런 불확실성을 다 없앴을 때 과연 우리의 삶이 행복해질까? 우연이 개입하지 않는 삶이,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어가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


이 책의 저자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기술이 우리를 객체의 자리로 밀어넣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바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더 견뎌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기술에 대해서 다른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하지만 저자가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희망사항이다. 기술을 통제할 수 없다면 기술의 문제점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없다. 그런데 기술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대안을 마련하려면 우리의 생활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편리와 빠름에 익숙해진 생활을 바꾸지 않으면 이러한 기술이 우리에게 주체로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래서 저자의 주장은 당연한 말이지만 그만큼 힘든 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는 기술을 기업들이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고, 빠름과 편리함에 익숙해진 사람들 역시 그러한 삶을 버리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인간의 미덕을 되찾고 가장 뿌리 깊은 인간의 경험을 멸종의 위기에서 구하려면 기술 예찬론자들이 제안하는 극단적인 변혁 프로젝트에 기꺼이 한계를 두어야 한다. 혁신을 억압하는 수단으로서의 한계가 아니라 우리가 공유하는 인간성에 대한 헌신으로서의 한계 말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육신이 있는, 기발하고 모순적이며 회복력 있고 창의적인 인간의 모습 그대로 자유롭게 살 수 있다.'(330-331쪽)는 말이 헛된 울림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의 생활을 되돌아봐야 한다.


거대한 기술관련 기업들에, 그러한 기업들을 지원하는 정부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정부와 기업에 압력을 넣을 수 있는 인간들의 관계가 먼저 확립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음은 이미 역사가 보여주고 있으니... 참.


우리의 삶이 '운칠기삼'이라는 것, 그래서 기술이 우리의 주체가 되는 '주객전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이와 같은 책을 학교에서부터 읽고 토론하게 하면 어떨까? 아래에서부터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니까...기후재앙에 대한 대응을 촉구하는 청소년들의 움직임 일어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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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2-19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질의 작품을 읽으면서 놀라운게....20세기 초에 이미 무질은 경혐의 종말을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리뷰를 보니 그제 본 내용이 떠오르네요..ㅎㅎ

kinye91 2025-12-19 13:56   좋아요 0 | URL
네, 그렇게 좋은 작가는 시대를 반영하기도, 시대를 앞서가기도 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