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단체 선거, 사전투표일이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많은 사람들이 사전투표에 참여했다고 한다. 현재까지 저번 선거 때보다 투표율이 높게 나왔으니... (아직은 진행형이지만)


  투표하기 전까지 수많은 소리들을 듣는다. 자신을 지지해달라는 소리들. 자기가 무엇을 하겠다는 소리들. 이 일에는 자신이 적임자라는 소리들. 상대를 비방하는 소리들. 소리, 소리, 소리 들.


  수많은 소리들에 싸여 살아가고 있지만 평소에는 그 소리들을 잘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지낸다. 그러다 선거철이 되면 다른 모든 소리들을 누르는 후보자들의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이래도 안 들을래? 이래도 안 들려? 하는 듯이 사방에서 여러 소리들이 들려온다. 그 소리들, 색깔로 바꾸면 무슨 색깔일까? 


소리를 볼 수 있을까? 볼 수 없겠지. 듣다와 보다는 다르니까. 하지만 듣다와 보다가 같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 몸의 감각기관이 다를 뿐, 외부의 존재를 내게로 들여오는 과정이 바로 '보다/듣다'일 테니.


장시우 시집을 읽다가 와, 이 시인, '소리'에 대해서 이렇게 많은 시를 썼나 하는 생각을 했다. 시집에 실린 시들이 대부분 소리다. 소리, 소리, 소리. 그런데 소리를 볼 수 있겠단 시들이 있다. 또 시 중에 '소리에 빛깔이 있다면'(114-115쪽)이라는 시도 있다.


그래, 소리에 빛깔이 있다는 말은 색이 있다는 말이니까. 소리 역시 자신들만의 색채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말소리로 사람을 구분하기도 하니... 소리에 색깔이 있고, 그 소리들은 그 사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소리, 개성 있는 소리, 자신만의 소리를 듣지/보지 못하고 그것을 뭉뚱그려 보고/듣는다면 어떨까?


그런 세상은 참 삭막하지 않을까? 그런 세상이라면 사람을 어느 한 쪽으로 딱 규정하고 다른 면은 마치 없는 것처럼 여기고 대우하지 않을까? 이런 세상이라면 사람들끼리 교류가 없어지고, 오로지 내 편 아니면 다 편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 지배하지 않을까.


시인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많은 소리들을 읽으면서, 문득 색깔이 떠올랐고, 그러다 아주 오래 전 학창시절, 미술 시간에 배웠던 삼원색을 합치면 검은색이 되고, 빛의 색깔을 합치면 하얀색이 된다는 것이 떠올랐다.


'검은/하얀'의 짝을 '어둠/밝음'으로 치환한다면(이렇게 나누는 것도 색깔에 대한 고정관념이겠지만) 지금 세상에 나도는 수많은 소리들을 합치면 무슨 색깔이 될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무슨 색깔이 들까? 2024년 겨울부터 2025년 봄까지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 그들을 '빛의 혁명'을 이룬 사람들이라고 한다. '빛의 혁명'이라는 이름 기가 막히다. 바로 이 빛의 색깔들이 합쳐지면 흰, 밝은 색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엄이라는 어둠을 몰아내는 밝은 빛, 이것이 바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내는 소리들의 합이었다. 그렇다. 이렇게 소리는 빛의 색깔을 띨 수 있다.


하지만 소리가 다 그런가? 빛의 색깔이 아닌 어둠의 색깔을 지닌 소리들도 있지 않은가? 사람을 벼랑으로 내모는 소리. 그런 소리들이 합쳐지면 검은, 어둠의 색깔로 변한다. 세상 역시 캄캄한 어둠의 세상이 된다.


지금 선거에 나선 사람들의 말,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말. 과연 빛의 말일까 아닐까. 그들의 말이 합쳐져 밝은 색이 될까, 아니면 어두운 색이 될까? 그것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바로 그러한 판단, 어두운 색으로 가는 말들을 막을 수 있는 귀,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빛의 말들이 더 우세해지도록 하는 일. 우리 스스로 빛의 말들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남에게 상처주는 말, 남을 비방하는 말, 자신만을 드러내는 말, 그 말들은 합쳐지면 어두워진다. 다른 존재를 가린다. 그리고 자신마저도 가린다. 아니 자신의 좋지 않음을 가린다. 그런 어두운 존재와 함께 어둠 속에 갇힐 것인가, 아니면 빛과 같은 밝은 말, 합쳐져 더 밝은 세상이 되는 그런 말들을 하는 사람은 다른 존재들도 환한 세상에 있게 한다.


합쳐져 어두운 소리를 내는 소리들이 합쳐지지 않게. 그 소리들이 합쳐지지 않고 각자의 소리만을 낸다면, 그 소리 역시 제 색깔을 지닌 소리일 뿐이니까. 물론 합쳐져 밝은 소리가 되는 소리는 홀로 소리를 내도 좋지만 합쳐 소리를 내도 좋다. 밝은 세상을 만드는 소리니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소리들은 어떤 소리인가? 우리의 소리에는 어떤 빛깔을 입혀야 하나? 아니 인위적인 색이 아니라 자연스런 빛의 색깔이 되도록, 그래서 우리 소리들이 합쳐져 하얗고 밝은 색이 세상을 뒤덮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장시우 시집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말도 어두운 색으로 가는 말이 아니라 밝은 색으로 가는 말이 되도록 해야겠다는...


자, 시인처럼 우리 주변의 소리들은 무슨 색깔일지, 우리도 한번 생각해 보자. 특히 사람들이 내는 소리를.. 


 소리에 빛깔이 있다면


소리에 빛깔이 있다면

이 방 안에 가득한 고요는

창밖에서 가끔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는

세탁기 빙빙 돌아가는 저 소리는

벽 너머 들려오는 누군가 씻는 물소리는

타닥타닥 글을 쓰며 내가 만드는 소리는

주전자에서 물 끓어오르는 저 소리는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나팔꽃 벙그는 소리는

참새 떼 달음박질하듯 나무를 옮겨 가며 지저귀는 저 소리는

온 종일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방 안에 가득할 때

그 색들은 무슨 빛깔이어야 할까

그저 가기 서운했던가

검정 비닐을 데리고 가는 저 바람의 색은 또,

지금 후두둑 떨어지는 소나기

저 빗방울 소리는 어떤 색일까

소리에 맞는 색을 찾아 주느라

나는 온종일 햇살을 켠다


장시우. 이제 우산이 필요할 것 같아. 걷는사람. 2021년. 114-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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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은 이 시집의 '후기'에서 김기창 화백의 미수전(米壽展)에서 본 그림을 보고, 환한 웃음을, 폭소를 터뜨렸다고 한다. 그러한 웃음이 초월로서의 웃음이 아니라, '헤게모니 -권력(들)에 대한 검색과  전복으로서의 웃음'(95쪽)이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웃음은 불의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읏음으로서 권력을 넘어서는 경우. 하지만 대부분은 그러한 웃음을 웃지 못한다.


  권력은 웃음조차도 탄압하기 때문이고, 이러한 탄압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이 시집에서 말하는 '다친 무릎'이 되기 때문이다. 


  권력에 의해 '다친 무릎'들도 있지만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몰아가는 '다친 무릎'들도 있다. 


이 시집에는 외부의 힘으로부터 다친 존재들과 스스로 외부의 힘에 동화되어 다친 무릎들이 나오는데...


우선 외부의 힘에 스스로 동화되는 다친 무릎들은 시집의 앞부분에 실려 있다.  그 중에서 '식탁이 밥을 차린다''제국주의가 간다'는 자본주의 논리에 편승해 자신을 거기에 맞추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자신이 그것들을 소비한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반대로 그것들이 사람을 소비한다. 사람은 그것들이 '나를 소비해'라는 말을 요청으로, 부탁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그것들을 거부했을 때 자신이 사회에서 낙오된다는 느낌, 뒤떨어진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그것들의 요청을 명령으로 받아들인다.


당연히 따라야 할 것으로, 따르지 않으면 자신에게 좋지 않다고 여기면서... 그러니 내가 신용카드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신용 카드가 나를 소비하고 / 신용 카드가 나를 분실 신고한다'('식탁이 밥을 차린다' 중에서. 9쪽)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니나리치가 너를 부른다 / 향기로운 너를 만들어 주겠다고 / 크리스찬 디오르가 너를 부른다 / 불란서 멋쟁이로 꾸며주겠다고'('제국주의가 간다' 중에서. 12쪽)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주객전도(主客顚倒)의 상황. 이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사회. 여기에 자신의 몸을 어떻게 하는가. 성형천국이라는 말을 듣는 나라 아니던가. 몸 어디 한 군데쯤은 손을 대야 사회에서 부끄럽지 않다고 여기는 풍조.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성형의 세계로 들어가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사람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남의 이목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이 시집이 2000년에 나왔는데, 이러한 소비풍조, 또는 사람이 상품에 끌려다니고, 또 스스로 상품이 되어 자신을 포장하는 모습은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줄지는 않았다. 그러니 앞에서 인용한 시들이 말하는 것을 그냥 웃으면서 넘길 수는 없다. 


오히려 광고를 통해 사람을 이렇게 상품에게 종속되게 하거나 스스로 상품이 되고자 하는 모습을 웃어넘길 수 있어야 하는데, 시인이 바라는 것은 바로 그러한 웃음일 텐데... 상품으로, 또는 상품이 되어 만족스러워 하며 내는 웃음이 아니라.


다음에 시집에 실린 외부의 힘에 의해 '다친 무릎'들이 나온다. 이는 어쩔 수 없는 힘에 의해 다칠 수밖에 없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시인은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들과의 연대를 꿈꾸면서.


외부의 힘에 의해 '다친 무릎'들은 누구인가? 아예 '다친 무릎'이라는 구절이 제목에 들어간 시도 있는데,('<다친 무릎>에서 시작된 인생'. 60-61쪽) 이 시를 읽고 다른 시들을 찾아보면 쉽게 '다친 무릎'이 어떤 존재들인지 알게 된다.


시집에 나오는 존재들을 살펴보면 '일본 대사관 앞 수요 집회에 할머니들'('여왕의 날씨'에서. 44쪽)과 '스페인 기병대에 학살당하고 능욕된 ... 홍인의 어머니와 딸들'('신촌 맥도날드 점'에서. 47쪽)이고, '1980년 5월 19일 광주 / 좌유방부 자창 우측흉부 관통상 / 열아홉 살 처녀 손옥례'('신촌 맥도날드 점'에서. 48쪽) '들'이다. 


이런 존재들이 권력에 주눅들지 않고 권력에 대해 정면으로 웃을 때 그때 웃음은 전복적인 힘을 발휘한다. 너희들이 아무리 우리를 밟아도 우리는 일어선다. 결코 밟힌 채로만 있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현. 이것은 사회의 소수자들이 자신들을 지칭하는 말로 '이반, 퀴어'라는 말을 써서 그 의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과 통한다.


이 시집에서 '일반'이라는 말을 비틀어 '이반'이라고, 'ㄹ'을 탈락시킨 말로 자신들을 지칭하는 그러한 모습과 비슷한 시가 나오는데, 그 시 제목이 '<일상>에서 ㄹ을 뺄 수만 있다면'(68-70쪽)이다.


'일상'에서 'ㄹ'을 빼면 '이상'이 된다. 보통, 보편이라는 일상에서 'ㄹ'을 빼면 '이상'이 된다. 보통과 다른이라는 의미의 이상하다의 이상일 수도 있겠고, 우리가 바라는 희망의 '이상'일 수도 있다. 즉 일상에 매몰되어 이상을 보지 못하면, 다른 말로 '다친 무릎'들을 보지 못하면 결코 '이상'에 도달할 수가 없다. 


시인은 이 시에서 'ㄹ'을 무릎으로 보고 있는데, 무릎을 꿇고 있는 형상을 'ㄹ'에 빗대고 있어서 우리가 일상에서 반드시 'ㄹ'을 빼야 함을, 누군가의 다친 무릎을 괴고 생활해서는 안 됨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의지가 실현되는 때로 시인은 상상의 시간을 만들어낸다. 비록 현실에는 없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은 올 수 있고, 또 와야만 한다. 우리가 만들어내야만 하는 시간. 바로 13월의 13일. 13이라는 서양에서 불길하다고 여기는 숫자를 시인은 이 시집에서 권력관계를 뒤집는 시간으로 설정한다.


이것 역시 웃음의 힘이다. 불길한 시간, 금기의 시간은 권력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 그런 시간을 '다친 무릎'들이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권력의 시간을 뒤집어버리는 것. 너희가 그렇게 떨고 있는 시간을 우리는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자신감. 긍정성, 낙관.


시인은 '13월 13일의 사랑'(77-78쪽)과 '13월 13일, 마지막 축제'(79-80쪽)에서 그러한 뒤집음, 환한 웃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친 무릎'들이 서로를 부등켜안으며 함께 웃으며 살아가는 세상. 그러한 세상을 꿈꾸며, 더이상 '다친 무릎'들을 만들어내지 않는 사회를 꿈꾸는 시인. 그러한 시들.


시집을 읽다가 몇몇 기사가 떠올랐다. 우리 사회는 '다친 무릎'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나? 우선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에 말도 안 되는 광고를 한 (차마 그들의 광고 문구를 쓸 수가 없다. 쓴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모독이다.) 모 기업(굳이 안 밝혀도 다 아니까),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말도 안 되는 막말을 하며서 시위를 하는 몇몇 단체 사람들... 그리고 장애인 시위에 대한 이번 판결. 


지하철역 시위를 하면서 스티커를 붙이고 글을 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사람들에게 대법원에서 벌금형을 확정했다는 기사. (‘지하철역 시위’ 전장연 대표, 공동재물손괴 벌금형 확정)


이 기사를 보면서 이 시집에 나온 '다친 무릎'이라는 말이 떠올랐고, 우리가 그들의 다친 무릎을 보듬고 고쳐주려고 하지는 못할망정, 다친 무릎을 더 세게 내려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는 시인이 시에서 말했던 'ㄹ'을 빼는 행위와는 정반대의 판결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들 시위 방법의 정당성을 묻기 전에 먼저 국가와 사회가 책임을 다했는지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요즘 헌법, 헌법하는데, 헌법 10조에 보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되어 있고, 34조에는 1항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와 2항 '국가는 사회보장, 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고 되어 있다. 분명 '모든' 국민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장애인들이 이동할 권리는 행복추구권에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에도 포함이 된다. 그러니 장애인들이 이동할 수 있도록 제반 시설을 마련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국가의 의무가 실행되지 않아서 의무를 시행하라고 시위를 하는데, 시위의 방법을 가지고 유, 무죄를 따지는 것은 '다친 무릎'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


법원은 국가에게 시위의 책임을 먼저 물어야 하지 않나? 국가가 너무 포괄적이라면 지방자치단체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조항을 실천할 의무가 있기 때문인데...


그러니 시위의 적절성으로 판결하기 전에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부작위로 인한 장애인들의 불편'을 먼저 따졌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이러한 생각은 더 짙어졌는데, 왜냐하면 장애인들은 우리 사회의 '다친 무릎'들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여러 생각을 하게 한 시집이다. 시인이 후기에서 한 말처럼 '나의 시가 그런 유쾌한 검은 폭소의 실존적 울림을 가졌으면 좋겠다'(95쪽)고 했는데, 정말 그러한 웃음을 웃고 싶다. 그러한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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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난두 페소아. 이름을 많이 들었다. 읽은 책은 하나도 없었지만, 한번은 읽고 싶었던 책들. 제목이 [페소아와 페소아들]란 책도, [불안의 책] 또는 [불안의 서]라고 번역된 책도 제목에 끌리게 되었다.


  무언가 분열된 자아를 지닌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는 제목들. 페소아와 페소아들이라면 이는 하나로 정리될 수 없는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일 텐데... 그런 분열된 자아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불안을 느끼지 않을까.


  불안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는 어쩌면 지금 우리가 말하는 다중우주에 살고 있지 않았을까. 수많은 페소아들은 지구가 아닌 다른 우주에 존재하면서 어느 때 문득 지구에 살고 있는 페소아를 찾아오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  


다중우주라는 개념을 그냥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우리 인간의 뇌 역시 우주라고 하니, 뇌라는 우주에는 너무도 다양한 '나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을까. 때로는 이런 '나'가, 때로는 저런 '나'가 내 의식 속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지 않을까. 


그러면 나라는 존재가 다양한 우주에 함께 존재한다면... 그런 '나'가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다면, 그들은 각자가 과연 '나'인가? 아니면 그런 '나들'이 모두 합쳐져 '나'라고 할 수 있는가? '나'를 정의하기도 힘든데... 페소아의 '시가집'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 책의 제목이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다.


많은 영혼... 그렇다. 바로 다중우주 아닐까. 어느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수많은 '나들' 그런 나를 어찌 하나로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페소아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시가집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로 노래로 불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포르투칼어를 모르니, 이에 대해서는 넘어가고.


하지만 느낌이 그러니.. 이 시가집에 실린 시 중에 '이것'이란 시가 있는데, 이 시를 보면 이것이다, 저것이다 보다 상상을 통해 느낀 것이 더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이 바로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고.


    이것


사람들은 나의 흉내며, 거짓말이라고 한다

내가 쓰는 모든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느낄 뿐이다.

상상을 통해.

마음은 쓰지 않는다.


내가 꿈꾸거나 겪는 것 모두,

내게서 실패하거나 끝나는 것,

그것은 다른 무언가 위의

옥상 같은 것. 바로 그

무언가가 아름다운 것.


그래서 나는 가까이 있지 

않은 것 가운데서 쓴다

내 얽힘으로부터 자유로이,

아닌 것에 대해 진지하게.

느낌? 읽는 사람이 느끼라지!

                  - 1934년 4월 출판.


페소아.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문학과지성사. 2018년 1판 2쇄. 101쪽.


이 시를 읽고 제목이 된 시를 읽으면 페소아란 존재 역시 다양한 페소아들이 모여 페소아가 됐다는 것, 우리 역시 많은 '나들'이 모여 '나'가 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느끼는 '나'가 중요하니까. 그렇게 페소아의 이 시가집을 읽었다. 복잡한 나를, 어느 하나의 나를 배제하지 않고, 그런 나도 나임을 생각, 아니 느끼면서.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매 순간 변해왔다..

끊임없이 나 자신이 낯설다.

나를 본 적도 찾은 적도 없다.

그렇게 많이 존재해서, 가진 건 영혼뿐.

영혼이 있는 자에겐 평온이 없다.

보는 자는 보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느끼는 자는 그 자신이 아니다.


내가 누군지, 내가 뭘 보는지에 주의를 기울이며,

나는 내가 아니라 그들이 된다. 

나의 꿈 또는 욕망 각각은,

태어나는 것이지, 나의 것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의 풍경,

나의 지나감을 지켜본다.

다양하고, 움직이고, 혼자인.

내가 있는 이곳에선 나를 느끼지 못하겠다.


그래서 낯설게, 나는 읽어나간다,

마치 페이지처럼, 나 자신을.

다가올 것을 예상치 못하면서,

지나가버린 건 잊어가면서.

읽은 것을 귀퉁이에 적으면서

느꼈다고 생각한 것을

다시 읽어보고는 말한다. "이게 나였어?"

신은 안다, 그가 썼으니. 

                                 1930.8.24.


페소아.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문학과지성사. 2018년 1판 2쇄. 78-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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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있는데, 알라딘에서 이 책을 찾을 수가 없다.

  헌책방에서 구한 책인데... 구상 시인을 딱히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의 '초토의 시'는 알고 있고, 시선집도 읽은 적이 있고, 또 화가 이중섭의 친구라는 점,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언급되는 '응향 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 책을 헌책방에서 만났을 때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상 시인의 삶이, 그리고 그가 만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에 있으니까.


  1993년에 출간된 책이다. 지금으로부터 30년도 더 전에 나온 책. 그런데 책의 수명이 이토록 짧았던가.


  세상이 급속도로 변해간다지만, 책이 귀했던 시절, 책도둑은 용서가 되던, 아니 책을 훔쳐서라도 읽고 싶어했던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도서관, 서점에서 누가 책을 훔쳐간단 말인가. 아마 공짜로 준다고, 책나눔이라고 해서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난 책들을 나눔 행사를 해도 가져가지 않으려 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그러니 30년도 전에 나온 책을 찾기 힘든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도 많이 팔리지 않은 책은,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해도 찾기 힘들다. 출판사도 책도 사라진 상태가 되기 십상이다. 이 책을 찾지 못하는 것이 내 무능한 검색 실력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하여간,


구상 시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내가 드문드문 알고 있었던 사실들에 더 자세한 사항을 추가할 수 있는 그런 책이다. 그의 삶을 통해서 우리나라 현대사를 다시 경험할 수도 있었고, 최근에 일어난 비상계엄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나라 현대사... 일제강점기, 해방, 분단, 전쟁, 독재... 이 시기를 오롯이 겪은 시인이다. 천주교 신자로 공산주의와는 대척점에 있는 시인. 


해방직후 북한에서 발간한 [응향]이란 시집으로 인해 북한에서 탄압을 받고 월남한 시인. 그럼에도 반공을 표방하지만 독재를 하는 정권에는 올곧게 맞섰던 시인. 


그의 글 중에서 최근 일어난 비상계엄을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 있다. 비상계엄에 소극적으로 대응한 군인들... 그들의 선조가 있었던 셈인데... 지휘권을 지니고 있을수록 더욱 올바른 판단과 그것을 실행할 신념을 지녀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


1952년 5월 부산에서 일어났던 정치파동이다. 이승만이 국회의원들을 잡아가고 개헌을 한 사건. 이 사건에 당시 육군참모총장이 군인들에게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많은 지휘관들이 고초를 겪었지만, 그들은 정치에 자신들이 이용되는 행위를 반대했다고 하니...


이런 과거가 있는 우리나라 군대인데... 이런 것을 배워야 하는데... 물론 선조들의 군인정신을 배운 군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비상계엄이 실패로 돌아갈 수 있었겠지.


하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정권의 속성이 변하지 않음을,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깨어 있는 국민과 불의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군인, 경찰들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군에 관련된 업무를 한 구상 시인이었기에 그 당시의 정치파동을 직접 겪어서 이런 글을 남겨 놓았으니,이때 발표된 성명서, 군대에 있을 때 교육자료로 써도 좋을 듯하다. 또한 지휘관들에게는 이 성명서를 읽고 생각하고 따르게 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고.


참, 시인의 삶을 쓴 책에서 비상계엄과 군인들을 만나다니... 이토록 굴곡진 우리나라 현대사라니.. 참.


이 책 뒷부분에 실린 구상 시인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시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를 읽으면 어느 정도 우리나라 현대사와 구상 시인의 삶을 만날 수 있다. 


구상 시인의 글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살아온 그의 삶과 그가 만난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참고로 이승만 때 정치파동에 동원하려는 군인들을 막는 그 성명서의 일부를 옮겨 적는다. 불의한 명령에 따르면 역사의 죄인이 된다는 그 성명서. 육군참모총장 명의로 발표되었다는데... 12월 3일 비상계엄 때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어떠했지? 생각하기도 싫다.


'(전략) 현하(現下)와 같은 정치변동기에 승(乘)하여 군의 본질과 군인의 본분을 망각하고 정사(政事)에 관여하여 경거망동하는 자가 있다면 건군(建軍) 역사상 불식할 수 없는 일대 오점을 남기게 됨은 물론 누란(累卵)의 위기에 있는 국가의 운명을 일조에 멸망의 심연에 빠지게 하여 한을 천추에 남기게 될 것이니 제군은 국가의 운명을 쌍견(雙肩)에 지고 조국 수호의 본연의 사명에 영념명심(念念銘心)하여 일심불란(一心不亂) 헌신하여 주기 바란다. (하략)' ('무등병 복무' 중에서. 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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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합이 아닌 네트워크


  이번 호에 실린 글 중에 우리나라 지방자치를 이야기하는 글의 제목이다. 광역시와 도를 통합하겠다는 시도가 있었는데, 그런 통합이 과연 바람직한가에 대한 문제제기.


  통합이 자칫 독점으로 갈 수 있고, 다양성보다는 단일성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래서 통합보다는 다양한 지역들의 네트워크가 더 바람직하다고... 다양성이 확보되면서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는 관계를 만들어간다면 어느 힘센 지역이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글.


이 글을 세계에 적용하자. 지금 세계는 전쟁 중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미국과 이란-레바논 전쟁. 후자를 과연 전쟁이라고 해야 하는지, 일방적인 침공이라고 해야 하는지는 논란이 있고, 트럼프조차도 이는 전쟁이 아니라 군사작전이기 때문에 의회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것이 전쟁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한 나라를 폭격하는 행위가 단순한 군사 작전이라고? 이 상태가 바로 힘센 자들이 다른 곳들을 통합하려 할 때 벌어지는 일이다.


강자의 논리만 내세워 약자를 핍박하는 것. 자칫 통합이란 이런 식으로 강자에게 흡수되는 약자들의 모습을 지니게 될지도 모른다. 트럼프가 각종 전쟁(자기 말대로 군사작전)을 벌이는 이유도, 약자들과의 협력 네트워크가 자신들의 이익을 해치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들을 자신들에게 통합했을 때 미국의 이익이 더 커지기 때문이고, 지금까지 지녀왔던 패권을 잃지 않는 길이기 때문에,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나라들을 용납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트럼프는 통합을 바라는 자, 결코 네트워크로 주체성을 지니면서 협력을 하는 상태를 원하는 자가 아니다. 그런 자이기에 자신의(그는 미국의 국익이라고 하지만, 미국에서도 자신과 비슷한 기득권을 지닌 자들의 이익을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미국 시민들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통합하려는 모습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한다.


하여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통합이 아니라 네트워크다. 어디선가 읽었던 내용인데, 성덕대왕신종(일명 에밀레종)을 매달기 위한 줄을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 종을 매달 구멍에 맞는 하나의 쇠줄은 종을 지탱하지 못하고 끊어져 버렸다고. 


그렇게 굵은 줄 하나로는 매달 수 없었는데, 작은 줄 여럿을 꼬아 놓으니 종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었다는... 굵은 줄 하나를 통합이라고 보면, 작은 줄 여럿이 꼬여 있는 것은 네트워크라 할 수 있다. 


지구도 마찬가지다. 몇몇 강대국으로 통합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나라들이 서로 네트워크로 협력할 때 인류를 위해서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네트워크를 거부하는 자, 바로 트럼프다. 그는 세계를 미국이라는 나라로 통합하려 한다. 군사적이든 경제적이든. 왜 그럴까?


통합은 성장주의의 토대


통합을 하려는 이유는 덩치를 키우려는 것이다. 왜 덩치를 키우는가? 바로 성장을 위해서다. 큰 것이 더 클 가능성이 많고 작은 것은 큰 것에 병합당할 수 있기에 덩치를 키우는 것. 그래서 통합은 바로 성장주의의 토대다.


많은 언론에서 성장률, 성장률한다. 성장률이 적으면 경제가 어렵고 마치 나라가 위험에 빠질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 성장이 안 된다면 우리가 살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연 성장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가? 과거에 비해 지구는 전체적으로 얼마나 성장했는가?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런데 과연 사람들이 행복해졌는가? 평등해졌는가? 성장의 과실을 있는 자들이 거의 독식하지 않았던가. 불평등이 더 늘고, 사람들은 더욱 바쁘고, 힘들게 살지만 살림은 나아지지 않는 상태. 


게다가 통합이 무조건 내쪽이 되어야 한다는 강압으로 나아가니, 그렇지 못한 존재들은 그 선 밖으로 추방당하고 있는 상황.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성장을 추구해온 결과 아니던가.


바로 성장하기 위해서 통합을 하고, 통합을 하면 거기에 들지 못하는 존재들은 밀려날 수밖에 없는 상황의 반복. 미국이 패권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성장이 지지부진하다고 여기는 트럼프는 미국의 성장을 위해서 통합, 관세든 전쟁이든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강력한 방법을 쓰고 있다. 


이런 미국식 통합이 트럼프 이전부터 있었다는 사실. 그것이 이번 호에 실린 '페트로 달러와 기후위기'라는 글에 잘 나와 있다. 석유 거래를 달러로만 하겠다고 사우디아라비아와 비밀 협정을 맺었다는... 이게 무슨 짓인지...세계적으로 거래되는 화폐조차도 통합을 하려 한 이유는 바로 자신들의 성장을 위해서였으니... 각 나라가 석유를 거래하는 화폐를 자국의 화폐로 해보라. 달러가 패권을 유지할 수가 없다. 페트로 달러를 통합이라고 한다면, 각국의 화폐를 네트워크라 할 수 있다.


이런 성장을 위한 통합이 결국 군사력까지 동원해 세계를 더욱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는데...


성장주의는 제로섬 게임


바로 이렇게 통합을 통한 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제로섬 게임이다. 한 곳이 플러스(+)가 되면 다른 곳은 마이너스(-)가 된다.


다 같이 성장하지 못한다. 뭐 함께 성장한다 치자. 그건 인간에게만 해당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보면 제국주의부터 인간도 함께 성장한 경우는 거의 없지만.


인간의 성장이 자연의 소멸로 가고 있지 않은가. 자연자원을 파괴하면서 인류의 성장을 추구하는 것 아닌가. 지구만으로 부족하니 이제는 달에서 자원을 얻자는 주장도 나오고, 화성에도 이주를 하자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인류의 성장은 다른 존재들의 쇠퇴로 이어짐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장이 제로섬 게임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이 지점에 인류가 머리를 맞대어도 신통치 않을 판에, 인류끼리도 성장을 위해서 서로를 갉아먹고 있다. 미국의 성장을 위해 다른 나라를 압박하는 트럼프 행정부처럼. 


이제 이런 성장주의, 제로섬 게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통합을 주장하기보다는 네트워크를 주장해야 한다. 통합이 아니라 연합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덩치를 키우는 일이 아니라 작은 덩치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나라끼리도 연합, 한 나라 안에서 지역끼리도 연합. 그리고 그 지역은 서로가 서로를 알고 의논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여야 하지 않을까? 그런 소규모 지역들이 네트워크로 연결이 되면 그것이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이번 호를 읽으면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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