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기후위기, 기술봉건주의


  이번 호에서 핵심으로 삼을 수 있는 말이다.


  핵은 민주주의에 반한다. 핵 자체가 거대 자본과 결합될 수밖에 없으며, 다른 곳을 희생으로 삼기 때문이다. 핵발전소가 건설된 곳을 보라. 핵발전소가 안전하다고 주장하면서도 도심에는 짓지 않는다. 


  도심에서 먼 곳에 핵발전소를 짓고, 전기를 공급하느라 먼 거리를 송전선로를 건설한다. 무엇보다도 핵발전에 관해서 시민들이 관여할 수 있는 길이 별로 없다. 그러니 민주주의와 먼 것이 바로 핵발전이다.


체르노빌,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같은 사고를 겪었으면서도 다시 핵개발을 들고 나오고 있다. 비용이 저렴하다고? 세상에 핵폐기물을 처리하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러한 에너지 정책에도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하고,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기후위기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여러 정책들과 기후위기가 겹쳐 있기 때문인데, 반민주적일수록 기후 정책에 관심이 없다. 미래를 끌어 현재에서 소비해버리고 만다. 그런 점을 이번 호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 '기술봉건주의'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났다. 봉건주의는 이미 지나간 시대라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영주로 등장한 것이 거대 플랫폼들과 아이티 기업들이라니... 그들이 영주가 되고 거기에 종사하는 기술자들은 기사가 되고, 그럼 시민들은? 자칫하면 농노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


열심히 소비하고 생산하지만 결국 이윤은 몇몇 소수에게 돌아가고, 오히려 청소년들의 정신적 위기가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관점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녹색평론이 주장하는 것에 경청해야 한다. 지금 닥친 위기들이 갑자기 나타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경고해왔던 일들 아닌가. 그러한 경고에 눈 감고 발전, 성장만을 외친 결과가 양극화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냥 근본적인, 너무 급진적인 주장이라고 치부하지 말고, 왜 이런 주장을 녹색평론이 하는지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더 나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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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로 속에 들어간 기분. 앞으로 나아가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앞에 보이는 대로 갈 뿐이지만, 제대로 가고 있는지, 결국 나갈 수는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오른쪽으로만 돌면 결국 출구가 나온다고 하던데... 시집에는 이러한 오른쪽이 없다. 오른쪽이라고 생각하면 왼쪽이 되고, 왼쪽인가 싶으면 오른쪽이다. 이런 끝없이 헤맬 수밖에 없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출구가 보이련만, 미로가 훤히 밝혀지련만, 미로를 내려다볼 위는 없다. 오로지 미로 속에 있을 뿐이다. 미로 밖은 보이지 않는다.


  내 눈 높이보다 높은 미로들, 내 이해 범위를 벗어난 시어들. 시들. 그러한 시를 쓴 시인(들)


이해하길 포기하고 그냥 간다. 언젠가는 나가겠지. 나가더라도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 없다. 논리로, 한 단계 한 단계를 밟으며, 기억하며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 


이래서 시집은 미로다. 시라는 미로 속에 우리를 들여보낸다. 그리고 출구를 찾으라고 한다. 하, 갑자기 다이달로스가 생각났다. 그는 미궁을 만들었다. 그런데 자신이 미궁에 갇혔다. 미궁 밖으로 만든 사람은 나갈 수 있을까?


그가 갇힐 때 아리아드네의 실을 준비하지 못했을 텐데... 하지만 다이달로스는 미궁을 만든 사람. 탈출할 방법은 하늘을 나는 것. 그는 새의 깃털을 모아 날개를 만들어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이렇게 미궁은 아리아드네 미로 속에 들어간 기분. 앞으로 나아가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앞에 보이는 대로 갈 뿐이지만, 제대로 가고 있는지, 결국 나갈 수는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시인을 다이달로스라고 하더라도 시인 자신도 시집이라는 미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시인이 아리아드네의 실을 쥐고 있다면 모를까, 시인은 시를 쓰자마자 아리아드네의 실을 잃었을 테니. 시인 역시 시집이라는 미궁에 갇힌 존재가 아닐까. 아무리 시인 자신이 다이달로스라고 말한다 해도, 시인은 다이달로스처럼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수 없다.


시인이 다이달로스라고 해도 미궁에 갇힌다면 이 시집을 읽는 나는? 당연히 미궁 속에서 헤맨다. 헤매다 헤매다 그럼에도 계속 헤맨다. 오른쪽으로 찾으려고,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으려고 애쓴다.


애쓰면서 그렇게 시집의 끝에 다다른다. 시집의 끝. 출구인가? 아니다. 여전히 미궁 속이다. 에라, 이런... 황혜경 시집은 이렇게 나에게는 미궁이 된다. 나는 여전히 미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러다 이 시집 제목을 생각한다.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어떻게? 과거가 되는 길이 바로 쓰는 것 아닐까 한다.


어떤 특검이 사초 쓰는 자세로 수사를 하겠다고 했다. 사초(史草) 역사의 기록이다. 쓰는 행위다. 그런데 사초는 현재가 아니다. 쓴다가 현재지만 이미 쓴다에는 과거가 포함되어 있다. 쓰는 행위는 과거로 가는 행위다. 적극적으로 과거로 가서 현재에 남겨 놓는다는 의미다.


결국 쓰는 것은 과거로 가서 과거를 현재로 끌어온다는 의미다. 사라질 것들, 잊혀질 것들을 붙들어 놓는 행위. 이것이 쓴다는 행위다. 쓰면 보게 된다. 언젠가는 보겠지. 황혜경이 쓴 이 시집의 출구를... '목도(目睹)'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을 기억하려 한다. 그 구절을 쓴다. 보기 위해서.


이렇게 쓰기는 보기다. 그리고 쓰기는 아리아드네의 실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래 걸릴 수는 있지만.


'두 눈을 뜨고도 분별하지 못하던 것들이 보이는 때가 오고 있다

눈여겨보려고 한다'


황혜경,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문학과지성사. 2018년 초판 2쇄. '목도' 중에서.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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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5-07-05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같은 표현도 맥락에 따라 현저히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새삼 절감합니다. 과거에 얽매이는 것과 과거에는 분별하지 못한 것을 드디어 보기에 과거를 ˝눈여겨 보는 것˝과는 하늘과 땅차이겠죠~~~. 멋진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좀 난해한 시집같다는 느낌은 들지만 사유에서 배울 게 있어 보여요~~많은 시들이 그렇지만요

kinye91 2025-07-06 08:27   좋아요 0 | URL
저에게 시는 미로 속을 헤매는 기분을 느끼게 해줘요. 무언가 명확하지는 않는데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게 해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미로를 나오듯이, 시를 이해하는 순간이 오겠지 하면서요.
 

  처음에 이 시집 제목을 읽었을 땐 즐거움이 넘치는 시들이 실려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시들다는 말이 좋지 않은 의미로 쓰이니까, 시들지 않는다는 말이 들어 있으므로, 젊고 건강하게 발랄하게 지내는 생활이 표현되어 있지 않을까 했는데...


  시집을 읽으면서 발랄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어둡다. 쓸쓸하다. 외롭다. 처연하다는 말이 먼저 떠올랐다. 왜 그럴까?


  시 구절을 이해하기 힘든데, 시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 힘든데... 마치 우주가 까만 어둠에 싸여 있듯이, 시인의 말들은 그냥 어둠 속을 배회하는 낱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럼에도 이상하게 마음에 남는 시가 있고, 그 시들이 우주의 어둠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드무개 마을'이라는 시에서 '드무개'? 하다가 찾아보니 남해에 드무개 마을이 있단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마을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마을을 시로 표현하는데, 무언가 어둡다. 


'죽은 새끼 짐승, 어둠에 젖어, 늙은 여자의 빈 젖만 빨던, 목소리가 근심스러웠다 등등' 이런 시어들로 인해서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도 어두운 삶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여기에 '우체통'이라는 시도 그렇다. 우체통은 나와 다른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 마음을 나눠주는 역할, 그래서 설렘이 있는, 희망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하는데, 시인의 우체통이란 시를 읽으면 그렇지 않다. 쓸쓸하다. 그냥 홀로 외롭게 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다 어둡지는 않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것. 시인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올리브 동산에서 만나요'라는 말. 그리고 날짜가 적혀 있는데 2020년 9월 10일이다. 잠깐 의문에 잠겼다. 시인은 불의의 사고로 2020년 7월 24일에 영면했다고 한다. 그런데 9월 10일이라니?


이 의문은 발문을 읽고 풀렸다. 시인의 49재 날이 바로 9월 10일. 올리브 동산은 시인이 쉬고 있는 곳, 우리는 그곳에 있는 시인을 시집을 통해서 만날 수밖에 없다. 이 구절이 어디에 있을까? 유고시집이니 시인이 시인의 말을 쓰지는 않았을 텐데...


읽다가 '환상통을 앓는 행성과 자발적으로 태어나는 다이달로스의 아이들'(62-64쪽)이라는 시 첫구절이 '올리브 동산에서 만나자'라는 것을 발견했다. 


다이달로스의 아들이 누구인가? 이카루스 아닌가. 이카루스의 날개라는 말은 많이 쓰는데, 그는 결국 추락하지 않았던가. 하늘로 날아오르기를 바랐으나 결국 땅으로 바다로 추락하고 만 이카루스. 


그렇다고 올리브 동산에서 만나자라는 말을 추락하자는 말로 이해하면 안 된다. 이 말은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잇어야 하고,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계와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사람들이 함께 지낼 수 있는 그런 장소를 만들고, 그 장소에서 서로 어울리자는 말로 해석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곳으로 어떻게 가는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진적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그때는 아이가 되지 않으니. 나이든다는 것, 그것은 어릴 적 순수함을 하나씩 잃어간다는 뜻. 즉 식물로 따지면 시들어간다는 뜻. 다르게는 익어간다고, 성숙해진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뜻을 잠시 놓아두자.


이렇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진적으로 가다가는 올리브 동산에서 만날 수가 없다. 하늘로 비상해야 한다. 비상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적어도... 우주를 가로질러, 다른 우주로 가려면 그냥 나아가서는 갈 수가 없다. 빛보다 빠른 속도로 가더라도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럴 때 우주를 가로지르는 길로 가야 한다. 


시인은 말한다. '아이는 불가피한 귀결로 자란다. 웜홀 웜홀'('환상통을 앓는 행성과 자발적으로 태어나는 다이달로스의 아이들'에서. 64쪽)


웜홀로 가면 시들지 않는다. 아이는 아이로 다른 세계로 간다. 이것이었구나, 시인이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이 시 구절은 '친애하는 언니'(66-67쪽)라는 시에 나온다.


그래, 웜홀을 통과해 가면 시들지 않지. 시들기 전에 다른 세계에 도달하지. 그렇게 만날 수 있지. 그러한 올리브 동산에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시인이 그렇게 웜홀을 통과했다고 믿으련다. 그는 그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기다리고 있겠지. 


그의 시 중에 '일랑일랑' 시를 읽으며 그가 이미 뿌리내리고 있는 올리브 동산을 나는 이 시집을 통해서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일랑일랑


  어린 묘목을 사왔다


  8월이 살찌고 햇살이 과수원으로 긴 숨을 불어넣던 날 줄무늬 수박이 계절의 한가운데를 가르면 눈물 많은 복숭아가 먼저 생겨 제 울음을 토해내던 날


  1,630마일을 건너 신부를 데려왔다


  늙은 삼촌은 새장가를 갔다 데려온 신부는 맨발이었다 뿌리 휑한 신부는 과수원에 자주 들락거렸다 발이 큰 삼촌이 무서웠는지 맨발인 자기 발이 부끄러웠는지 


  심장이 붉은 토마토가 온점을 찍는 날이 늘어갔다 낯선 곳에서 매미가 울었다 알 수 없는 곳으로 울음이 흘러가고 곳곳에 여름의 문장으로 환한 날이었다


  여물지 못한 안부가 이국의 단어로 속살거리는 저녁 어둠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며든다 신부는 설익은 잠을 잤다


  곯은 자두는 단내가 심했다 복숭아가 낙과하고 으깨진 과육은 개미굴의 낙원이었다 신부는 알이 작은 참외를 곧잘 깎아 먹었다


  껍질을 풀어 생애를 더듬는 이국의 당신


  우거진 넝쿨에서 포도가 자랐다 한여름 소화되지 못한 응어리가 초록으로 폭발하듯 신부는 막 깨어난 알맹이를 삼켰다 두번째 뿌리를 내릴 곳에 맨발이 닿고 온 마을에 묘목이 옮겨졌다


  또다른 지구가 태어나고 있었다


김희준,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2021년 1판 6쇄. 104-105쪽


일랑일랑을 찾아보니 동남아시아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피는 꽃 이름이라고 한다. 향기가 좋다고 하는데... 향수의 원료가 된다고 하니.


동남아시아에서 온 꽃나무와 동남아시아에서 온 이주민이 연결되는 시. 그리고 두번째 뿌리를 내린다는 말에서, 올리브 동산은 특정한 어느 지역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사는 곳을 올리브 동산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시인이 올리브 동산으로 가자고 하고, 거기서 만나자고 한 것은 그곳을 시간이 지나서야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시간을 건너뛰어 또는 그럴 필요 없이 바로 여기를 올리브 동산으로 만들면 된다고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시가 꼭 어둡지는 않다. 우주를 채우고 있는 암흑물질(암흑에너지)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해서 암흑이지만, 그 어둠이 우주를 지탱하고 있으니, 이 시집에서 느꼈던 어둠을 우주의 어둠으로 생각하고 싶어졌다. 그러면 광활한 우주를 우리는 여행하고 있게 되니까.


김희준이라는 시인의 시집을 통해 이렇게 우주를 여행하고, 웜홀로 다른 세계로 곧장 나아가기도 한다. 그의 시에서 '일랑일랑'의 향기를 맡는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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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정치인이 있다면?


  상대가 똥을 쌌다고 생각했나 보다. 똥 싼 상대를 감싸주지 않고 똥 쌌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닌다.


  그냥 놔두었으면 그가 똥을 쌌든 싸지 않았든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을 텐데...


  오히려 말을 함으로써 똥을 사람들에게 퍼뜨렸다. 똥 냄새가 천지에 진동하게 했다. 그러면서 내가 똥 싼 것도 아닌데 왜 똥 싼 사람을 비난하지 않고 자신을 비난하냐고 한다.


  자신이 똥 싼 얘기를 하지 않았다면 똥에 관해 사람들은 생각도 하지 않고, 이야기도 하지 않고 똥 냄새로 괴로워하지도 않았을 텐데.


자신이 똥 냄새를 퍼뜨려놓고, 왜 그러냐고 하면 무어라 해야 할까? 똑같이 똥 냄새 퍼뜨리는 사람이 되기 싫어 입 다물고 있어야 하나?


이미 퍼진 똥 냄새를 막는 길은 그 냄새를 인식하게 한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것. 그가 더 이상 그러한 말을 퍼날라 세상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는 것.


하지만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니, 네가 잘못했어, 당신이 잘못했어라고 말하기보다는 그의 말이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 그를 그냥 놓아두는 것.


그렇게 그가 속이 터질 것 같아 대나무숲에 들어가 떠들어대더라도 대나무숲에 들어가게 할지언정 우리들에게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할 것.


그런 생각을 했다. 모 정치인 때문에 더러워진 내 귀를 씻으면서. 그러다 이윤학의 이 시집을 읽으면서 이 사람이 왜 그랬을까 퍼뜩 떠오른 생각. 아, 이 사람에겐 어른이 없구나. 이 사람은 어른을 만나지 못했구나, 어른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어른을 알아보지 못해서 그렇게 귀가 닫혔구나, 입만 살았구나. 그 입으로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해서 사람들 마음을 어지럽혔구나.


이런 사람을 조용하게 하는 것. 그가 남들 앞에서 이상한 소리를 하지 못하게 그를 홀로 놓아두는 것. 왜 그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나? 이미 다독거림은 지나갔는데... 그냥 놓아두고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다면, 강제로라도 남 앞에 서지 못하게, 남들에게 말을 퍼뜨릴 수 없게 해야겠지.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아야겠지. 그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모 정치인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시. 바로 이윤학의 '어머니 말씀'이다. 물론 그가 이 시를 들을 귀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를 비난(욕)하지는 않으련다. 똑같은 사람이 되기 싫어서. 다만,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으련다. 그가 더 냄새를 퍼뜨리지 않게 그냥 조용히 있게 하고 싶어서.


이 시에서 말하는 어머니와 다른 태도겠지만,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아닐까 하고... 


   어머니 말씀


똥독도 항상 다독거려야 한다.

다독거리지 못하면

휘젓지나 마라.


못 박힌 

소나무 작대기로

휘젓지나 마라.


네게만 냄새 난다.


이윤학, 그림자를 마신다. 문학과지성사. 2005년. 105쪽.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설해목'이란 글이 있다. 그 글의 마지막에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인 것을' (법정, 무소유. 범우사.1996년. 2판 49쇄. 39쪽.)


자기 지식만을 자랑하며 남의 약점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부드럽게 남을 바라보고 대하는 자세를 지닌 정치인을 이제는 기대해도 될 때가 되지 않았나. 이 시에 나오는 어머니 말씀과 법정 스님의 설해목에 나오는 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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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너무도 멀리 와버렸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 어디서 멀리 왔을까? 바로 흙에서다.


  흙에서라고? 흙은 바로 우리 곁에 있지 않은가. 지금도 우리 발 밑에...


  발 밑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겐.


  그들에겐 콘크리트나 아스팔트로 포장된 땅만 보인다. 땅은 있되, 흙은 없는 상태.


  그것이 현대 도시인들의 생활이다. 김기택 시인은 그래서 '그는 새보다도 적 게 땅을 밟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흙이라 하지 않았는데, 흙이 아니더라도 땅이라는 우리가 발 딛고 살아야 할 것에서도 멀어졌는데, 하물며 흙이랴!


시골에나 가야 아니면 등산을 가야 흙을 밟게 되는데, 그래서 흙의 소중함을 잃고 사는 것은 아닌지.


이러한 흙에 대한 애정을 담은 시집이 바로 이 [흙의 경전]이다. 흙을 경전처럼 소중히 여긴다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기후 재앙에 시달리지는 않았을 텐데.


흙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쫓겨나는 모습이 이 시집에 담겨 있다. 물론 흙과 멀어지는 사회만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역사적으로 우리가 겪은 개발, 독재, 분단 등이 이 시집에 실려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흙'이다. 땅이다. 무엇에 덮이지 않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러한 땅.


그래서 이 시집에 나오는 인물들은 땅에 살아가는 존재, 논이나 밭에 내려온 새들도 함께 살아야 할 소중한 존재로 여긴다. 이런 인물들에게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유흥이라는 이름으로 - 이 시집에 골프장 건설로 땅을 잃게 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니, 골프장을 과연 땅이라고, 골프를 치는 사람들을 보고 땅을 밟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골프장에 깔린 잔디들은 도시에 깔린 아스팔트, 콘크리트와 별 다를 것이 없다- 사람들을 흙에서 멀어지게 한 역사가 과연 우리에게 행복을 주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시집의 뒤에는 연작시가 실려 있는데, 우리 개발의 역사 속에서 흙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개발로 인해 우리는 기후 재앙이라는 위기에 빠지게 되었으니, 흙, 땅. 그것은 우리의 생존에 필수임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날이 더워지고 있다. 흙과 멀어져 더더욱 더워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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