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년째 마음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분노라고 할 수 있다. 무엇에 대한 분노인가?
정작 분노해야 할 것에는 분노하지 않고 있지는 않은지... 김수영 시인의 '고궁을 나오면서'란 시에 보면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노'하는가라는 구절이 있다.
정작 분노해야 할 것에는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시집에는 이상하게도 앞을 보지 못하는, 또는 눈을 빼버린이라는 구절이 많이 나온다. 눈이 없는, 있어도 보지 못하는 존재들이 많이 나오는 시집이다.
'시력을 잃은 눈동자가 씹힌다'('훔친 사과' 중에서 - 18쪽), '맹인 여자를 만났다'('사라지는 마을' 중에서-35쪽), '귀를 막고, 눈을 막고 입을 막고' ('기차' 중에서-44쪽), '고양이의 노란 눈알이 떽떼구르르 굴러나왔어요'('고양이는 고양이일 뿐' 중에서-58쪽), '금방 어디론가 사라질 눈' ('좌절' 중에서-59쪽), 등등.
보지 못하는 눈과 보지 않는 눈은 어떻게 다를까? 보지 않으려 들면 보이지 않으니, 결국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 어쩌면 우리는 귀를 닫고 눈을 감고 입만 열고 산 것은 아닌지. 그래서 작은 일에는 분노하지만, 특히 자신에게 관계된 일에는, 정작 분노해야 할 일에는 눈 감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이런 생각을 하면 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반 년째, 눈 멀고 귀 닫고, 그러나 입은 열어 자기 소리만 내는 그런 존재들을 수없이 봐왔기 때문에...
어떻게 그런 태도가 통하고 있는지... 아무리 사람이 제 잘난 맛에 산다고 하지만 적어도 옳고 그름은 판단해야 하지 않나. 옳고 그름조차도 생각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만 하고, 하고 싶은 행동만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런 사람이 눈에 띄지 않으면 좋으련만, 왜 이리 눈에 잘 띄는지...
하여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면 내 마음이 타 버린다. 분노는 불이다. 이 불을 마음의 평정이라는 물로 꺼야 하는데, 물이 불을 이기지 못할 때도 있으니, 그러면 안 된다. 분노를 잡아 멈추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마냥 분노에만 머무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나를 위해서도, 또 분노에 차 있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없으므로, 사회적으로 가득 차 있는 분노들을 끌 수 있는 그런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과 반대가 되어야 한다. 귀를 열고, 눈을 뜨고, 그러나 입은 좀 다물고.
윤진화 시집을 읽다가 6개월... 분노로 들끓던 내 마음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분노를 잡아챌 수 있기를 바라고.
분노
육중한 무게의 분노가 헐떡인다
조금만 더 가면 저 분노를 낚아챌 수 있다
분노가 운동화 끈을 더 단단히 동여맨다
출발선에서 나와 함께 출발했던 분노,
언제부터인가 나보다 먼저
앞서간다
유유자적 신문을 꺼내 읽는다
-저개발지역 철거민 참사, 연쇄살인범 강호순,
주한미군 만취 상태 방화, 장애인 쇠사슬 감금
......
또박또박 큰 소리다
나이보다 커져가는 붙잡고 싶은 저 분노,
뒤돌아서 웃는 아멸친 분노,
비워둔 수신함에 쌓이는 스팸 메일만큼이나
지워버리고 싶은 분노가
다시 뛴다
속도를 낸다
분노가 내 손에 잡힐 듯 말 듯,
가까이 다가가 놈의 목을 감싸 넘어뜨린다
허방에서 뒹굴다 진흙이 묻은 분노,
고개를 서서히 꺾는다
분노가 입가의 피를 쓰윽 훔치더니
내 목을 짓누른다, 속삭인다
-이제 그만 쉬고 싶다,
나도 저 뒤에서 남들처럼 살고 싶다
분노의 눈물이 내 몸을 적신다
윤진화, 우리의 야생 소녀. 문학동네. 2011년. 70-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