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크리스마스, 카프카 씨 - 카프카 서거 100주기 기념 앤솔러지
한유주 외 지음 / 카프카의방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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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작년은 카프카가 죽은 지 100년이 되던 해였다. 하여 카프카 서거 100주년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여러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책도 여러 권 나오고.


죽어서 더 명성을 누리게 된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이 카프카일 텐데, 그만큼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형용사까지 지니고 있으니, 아마 앞으로도 잊혀지지 않는 작가로 남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행사나 책이 나왔겠지만, 이 책은 카프카에게서 영감을 받아 쓴 소설을 실었다. 네 명의 작가가 각자 자신에게 영향을 준 카프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설로 섰다.


한유주의 '암담'은 제목 자체에서 불안함, 불명확함, 불확실성 등이 느껴진다. 암담하다는 말을 우리는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쓰기 때문이다. 사실 카프카 작품들이 이러한 불안, 암담함을 많이 드러내고 있기는 한데, 이러한 분위기를 한유주가 받아서 쓴 것.


배경은 인도다. 낯선 곳이다. 아마도 유럽 사람들에게 인도란 다른 세계, 그들이 탐험하고자 했던 세상이기도 했으리라. 물론 카프카 생존 시에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였으니 탐험과는 거리가 있지만, 인도인들의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 또 영어가 아닌 그들의 언어는 낯선 것임이 틀림없으리라. 인도는 지금 우리에게도 낯선 나라이니까.


낯섬과 만나는 불안함. 그 속에서 지내야 하는 모습을 '암담'이라는 제목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인도'보다는 카프카 소설 중에서 '실종자'를 더 많이 떠올렸으니...


미국으로 건너가는 젊은이 이야기. 낯선 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불안함, 도대체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 이리저리 헤매는 모습. 그런 곳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 그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 '실종자'이고, 한유주가 쓴 '암담'을 읽으면서 '실종자'에 나오는 카알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미국에 도착한 카알이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암담'이었으니... 어디 그만 그런가? 이제 인공지능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도 미래에 대해, 자신의 삶에 대해 '암담함'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카프카의 소설에서 보여주는 불안감이나 한유주가 확장한 암담함은 지금도 우리 삶을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카프카 문학의 현재성!


김태용이 쓴 '카프카 씨, 영화관에서 울다' 역시 불안함, 무언가가 명확하지 않은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카프카가 1913년 11월 20일에 쓴 일기'영화관에 있었다. 울었다,'(52쪽에서 재인용)라는 내용에서 착안한 소설이라고 한다.


카프카가 영화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 대해 김태용이 나름대로 해석해서 풀이한 소설이라고 보면 된다. 영화관이 어떤 곳인가? 남과 소통하기 보다는 자기만의 세계로 다른 세계를 관찰하는 곳 아닌가.


다른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지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수는 없는, 오로지 자신만의 세계로 받아들여야 하는 장소, 그곳이 바로 영화관 아닌가. 영화와 소설의 차이나 다른 것들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그냥 떠오르는 대로 영화관을 생각하면, 우선 어둡다. 그리고 단절된 세계다. 나만의 의자에 앉아 내 앞에 펼쳐지는 세상을 혼자 곱씹으면서 받아들이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오면 이제 현실로 돌아온다. 다른 세상에서 현실로...


물론 김태용의 소설은 다르다. 다른 인물이 등장하고, 주인공의 구두를 가져간다. 이는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는 간접경험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러한 경험이 내 삶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음을 말해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하는데...


민병훈이쓴 '예언자의 꿈'은 카프카 소설 중에서 '다리'를, 김채원이 쓴 '더블'은 카프카 소설 중에서 '공동체'를 오마주한 작품이다.


카프카가 다리를 서술자로 삼고 있다면, 민병훈은 그 다리를 찾아 가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중간중간에 소설 '다리'에 나온 구절들을 인용하고 있다. 서술자가 달라졌으므로, 내용도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는 비슷하다.


'더블' 역시 카프카 소설에서 배제되는 여섯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카프카는 여섯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내용으로 이미 존재하던 다섯을 중심으로 썼다면 김채원은 나중에 온 여섯이 그러한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다리'나 '공동체' 모두 번역된 소설집에서 두 쪽짜리 소설이다. 아주 짧은 소설인데, 그 소설 나같은 경우는 읽고는 그냥 잊고 말았는데, 소설가들은 그러한 소설에서도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소설을 쓴다. (이 소설들 덕분에 다시 카프카의 두 작품을 찾아 읽었다. 정말 짧았다. 이 짧은 소설에서도 자기 나름대로 소설을 이끌어가는 작가들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다.)


무언가 자신의 마음을 울리는 작품을 그냥 넘기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으로 다시 재탄생 시키는 작가의 모습들. 그것이 바로 문학을 하는 사람들의 자세 아닌가 싶다.


카프카가 우리 곁을 떠난 지 100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그의 문학은 이렇게 우리 곁에 있고, 또 다른 작가들로 인해 더욱 풍성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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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꿈
정보라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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쓱쓱 읽힌다. 재미 있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게 된다. 얼마 시간이 걸리지도 않는다. 아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꺼번에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무서워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는 이야기가 바로 귀신 이야기이니, 무섭고도 재미 있는 이야기가 바로 귀신 이야기다.


이 소설도 일종의 귀신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귀신 이야기? 귀신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귀신이 무엇이지? 정말 존재하나? 이런 의문을 가지면 소설을 소설로 읽지 못하게 된다. 문학은 문학으로서의 길을 가기 때문에, 문학에서 귀신이 필요하면 귀신을 등장시킬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귀신으로 인해 소설이 더 소설다워지기도 한다.


귀신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억울한 일은 당한 사람이 죽음에 임해 하늘로 가지 못하고 지상에 남아 그 억울함을 풀려고 한다고 했다. 억울한 죽음이 귀신이 되게 한다고 하면, 이 소설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것 또 귀신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억울함이 있고, 그러한 억울함을 풀 수 있다는 것이다.


귀신을 보는 한 남자에게 고등학교 동창이 나타난다. 너라면 풀 수 있을 거라며... 귀신이 된 친구, 교통사고라고 하지만 아니다. 그러니 귀신이 된 것. 귀신을 볼 수 있는 사람 김태경. 이 남자는 동창생인 강문석의 부고를 받고 조문을 간다. 그리고 거기서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김태경과 만나는 여자 성연. 죽음으로 태어나 다른 생명의 죽음으로 자신의 생명을 연장한 여자. 당연히 귀신들을 볼 수 있다. 이 둘이 만나면 어떻게 되는가? 성연은 다른 이의 목숨으로 자신의 목숨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태경의 목숨과 성연의 목숨은 반대가 될 수 있다는 것. 


문제는 이들이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 둘의 사랑이 정상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은 귀신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이들의 사랑을 변태라고 할 수는 없다. 남의 생명으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성연에게 남에게 받는 고통은 생명에 대한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내 생명 유지에 남의 생명을 끊을 수밖에 없는 생명체들의 업보는, 자신의 생명에서 고통을 인식하고 감내해야 함을 성연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이 둘에 강문석의 죽음이 끼어들고, 강문석의 죽음을 쫓아가는 와중에 또다른 죽음이 있음을 알게 된다. 강문석과 함께 살던 여자의 죽음. 둘의 죽음이 모두 억울한 죽음이다. 


해원, 씻김굿. 소설은 이런 과정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그것이 쉽지는 않다. 원한을 푸는 일이 어디 간단하겠는가? 그렇게 하기까지는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렇다고 그러한 원한을 대신 갚아줄 수는 없는 일.


사건에 사건을 거듭하면서 태경과 성연의 사랑과 강문석에 대한 여인의 사랑이 중첩되면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니 사랑을 빙자해서 한 사람을 착취한 인생이 어떤 결말을 맞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한 삶을 산 자, 남을 속이고 이용하고 착취한 자의 죽음이 과연 억울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남들 눈에는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당사자에게는 억울한 일일 수 있다. 그렇지만 자신으로 인해 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은?


사랑을 빙자해 한 여성을 착취한 인간이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은 인간이 있었다는 현실에 기반한 이 소설은 다른 결말을 택한다.


귀신이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실에서 풀지 못한 원한을 귀신을 통해서 풀어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해원, 씻김이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서 씻김굿 한판을 벌였다고 보면 된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아직도 사랑을 이용해서 상대를 착취하는 존재들이 있다. 그들이 현실에서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온전한 사회가 아니다. 그런 자들이 존재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작가는 귀신을 통해서 온전함으로 우리를 이끌어가고 있다.


사랑은 남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성연과 태경을 통해 보여주고, 강문석을 통해서는 그것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인간의 최후가 어떤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이 소설은 귀신을 보여줌으로써 원한을 풀어가는 한판의 씻김굿이 된다. 우리 역시 이 소설을 읽으며 이러한 씻김굿에 참여하게 된다. 더이상 원한이 넘치는 사회가 아닌, 그러한 원한들이 풀려 씻겨나가는 세상, 서로가 서로를 위한 마음을 지니고 사는 세상. 그 세상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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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6-07 2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보라 작가의 귀신 이야기는 서늘하면서도 뭔가 위로받는 느낌이 들어 좋더라구요. 씻김굿이라는 단어가 잘 맞는다는 느낌이 드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kinye91 2025-06-08 08:1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정보라 작가 소설을 읽으면서 저도 위안이 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귀신의 한을 풀어주기도 하지만,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도 한다고 생각해요.
 
포션 1
정보라 지음 / 읻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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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다. 제목이 단 한 글자. 무엇을 이야기할까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표지를 보면 여우의 모습이 보인다. 그렇다면 '호'는 여우다. 여우하면 구미호를 떠올리니, 이건 전설의 고향과 비슷한 이야기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총 3부로 나뉘어 있지만, 디지털 문학상을 받은 작품답게(?) 내용들이 각각 끊어져 있다. 딱 그 내용만 연재될 수 있도록,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를 지니고, 그 다음 이야기를 기대할 수 있도록. 


디지털 문학이라고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런 형식이 아미도 예전에 신문에 연재되던 소설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신문에 연재되던 소설 역시 그 자체로 이야기가 있지만,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하면서 끝을 맺었으니...


하여 이 소설은 읽기에 편하다. 여우를 만나고 어려움을 겪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이야기. 전설의 고향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현대로 끌어왔다. 


버스 사고가 난다. 혼자만 살아남는다. 우연이다. 이 우연을 구미호와 관련짓는다. 구미호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지만 이루어질 수 없다. 할머니가 구미호의 존재를 알아낸다. 헤어짐. 그러다 할머니가 쓰러지고, 이제는 저승사자라 할 수 있는 존재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구미호에서 벗어난다.


이 정도면 쓰러진 할머니 역시 일어나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여기서 전설의 고향과 갈라진다. 현실에서 일어난 사고는 어쩔 수가 없다. 환상 속에서 치유가 가능할지라도 현실에서는 아니다.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임. 그리고 거기서 나아감.


소설은 그 점을 보여준다. 구미호 역시 마냥 인간을 이용하는 존재로 그려지지 않는다. 구미호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 그렇지만 함께할 수 없을 때 물러나는 것. 그것까지 보여준다.


순수한 사랑. 그런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 조건을 걸며 이리 재고 저리 재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그런 사랑에는 위험이, 파경이 뒤따르지만 이 소설 인물들처럼(남자 인물이나 구미호나) 조건 없이 그 자체로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사랑의 결말과는 관계없이 사랑하던 그 순간만은 서로가 행복했음을 보여준다.


소설 2부의 마지막에 구미호가 한 말, 그것이 이런 순수한 사랑을 말해주고 있다. "해치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과 평생 같이 살고 같이 죽는 걸, 나도 해보고 싶었어, 그 사람이 당신이라서." ... '"행복했던 거.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198쪽)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면서, 어쩌면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같은 일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 환상을 끌어들이듯이, 이 소설의 주인공을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


작가의 상상을 따라가면서 읽으면 되는, 재미 있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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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숲
니콜 크라우스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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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를 읽고 흥미를 갖게 된 작가. 그가 쓴 세 번째 장편이라고 하는데, 읽으면서 어라, 작가가 직접 등장한다고? 소설이니 작가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게 된 소설.


소설 속 작가를 작가가 창조한 작가라고 보면, 이 작가는 소설 속에 등장해서 자신의 소설을 써나가고 있다고 봐야 하는데, 어디에도 그런 이야기가 없다.


두 인물의 이야기가 교차되고 있는데, 한 사람은 엡스타인이라는 68세 노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39세 작가이다. 변호사로서 성공한 삶을 살던 엡스타인.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꾼다. 가지고 있던 것을 남들에게 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스라엘로 간다. 


또 한 사람은 작가인 니콜. 이 소설을 쓴 니콜 크라우스와 같은 이름이다. 작가라고 착각하게 하는 장치라고 해두자. 성공한 소설가다. 어느 순간 소설 쓰기 힘들어지고 남편과의 관계도 멀어진다. 이때 홀린 듯이 이스라엘로 간다.


이 두 사람이 지닌 공통점은 유대인이라는 것밖에는 없다. 한 명은 나이든 남자, 한 명은 젊은 여자. 직업은 변호사와 소설가. 여기에 공통점을 찾으면 이들은 그것을 정점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인생에서 (또는 일에서) 정점에 오른 적이 있다는 점이다.


정점에 오른다. 그것은 이제 다른 길로 가야함을 뜻한다. 자신이 온 길은 끝났음을 인식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점이다. 이들이 도달한 정점이 바로 '어두운 숲'이다. 숲에는 도달했으나 앞길은 보이지 않는, 과거 역시 볼 수 없는 그러한 숲이다. 새로운 길을 내야 한다.


이 새로운 길이 무엇일까? 엡스타인은 사막으로 걸어들어가고, 니콜은 사막에서 나온다. 둘의 방향은 다르다. 그런데 집에 도착한 니콜의 눈에 이미 자신이 있다. 지난 날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여겨지는 자신.


어두운 숲에서 돌아온 니콜이 과거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것은 현실과 타협해야만 한다는 이야기인가? 그렇지 않으면 엡스타인처럼 사막으로 가야만 하는 것인지.


여기에 한 인물이 더 첨가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카프카. 물론 카프카는 엡스타인 하고는 관계가 없다. 하지만 부모를 생각하면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다만 다르게 반응했을 뿐이다. 엡스타인의 부모, 특히 아버지가 굉장히 폭력적이었고, 위협적이었다는 서술은 나오지만, 카프카가 평생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던 반면에 엡스타인은 아버지에게 주먹을 날리고, 그에게서 벗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부모를 기리는 기부를 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즉, 카프카와 비슷한 엄격한 아버지에게서 자랐지만 엡스타인은 그것에 머물지 않고 나아감으로써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기부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에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마지막까지 지니고 있던 그림을 처분하려고 하는데, 심부름하는 사람의 실수로 그림이 분실되고 만다. 엡스타인이 실종되듯이.


니콜은 카프카가 남긴 원고를 받았고 (합법이 아니라, 프리드만이라는 정체가 모호한 사람이 갖고 온 짐꾸러미에 있다고 여겨지는 것). 그것을 읽는다. 카프카가 살아서 이스라엘에 살았다고? 이건 허구다. 분명한 허구기 때문에 소설에서 카프카를 등장시키는 것은 실제가 아니라 허구임을 명심하게 한다. 


그런데도 카프카를 등장시킨 이유는 카프카가 문턱을 넘지 못했던 사람, 즉 경계에 살았던 사람이라고 니콜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카프카가 문턱을 넘었을 수도 있다고 여기는데, '천국과 이 세상 사이의 문턱은 환상에 불과하며, 사실 우리는 천국을 떠난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라는 것이 카프카의 생각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 우리는 지금도 바로 거기에 있으면서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지도 모른다.'(329쪽)고 니콜의 생각이 바뀌게 된다.


카프카 역시 생전에 넘지 못했을지 몰라도 그는 죽어서 그러한 문턱을 넘었다. 우리에게 문턱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은 문턱을 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이 소설에서는 카프카가 죽지 않고 이스라엘에서 정원을 가꾸고, 나중에는 사막에서 홀로 살다가 죽었다고 함으로써 문턱을 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니콜이 사막에서 홀로 지내는 집은 카프카가 마지막에 지냈다는 집이라고 니콜이 추정하고 있으니... 당연히 소설적 장치다) 


니콜이 다시 사막에서 돌아오는 것은, 비록 집에서 이미 자신을 보지만, 그것은 니콜은 이곳과 저곳을 나누는 문턱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읽은 작품에서도 유대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느꼈는데, [사랑의 역사]에는 억압받는 유대인들의 모습만 나온다면, 이번 소설에서는 억압하는 유대인들의 모습도 나온다. 그렇다. 유대인들 역시 자신들이 억압받았다는, 홀로코스트에 갇혀 있기만 하면 그것은 문턱을 절대로 넘지 못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엡스타인의 코트를 팔레스타인이 가져간 것이나 (물론 고의가 아니라 실수다), 니콜을 사막에 보내는 것은 이스라엘인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이제 유대인은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를 봐야 하는데, 그들 역시 정점에 이르러 어두운 숲에 도달했는데, 여전히 이제는 보지 않아도 될 과거만 보고, 더 나은 미래를 보지 않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하여 유대인들의 모습에 대해서 비판적인 모습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 이후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지 생각하면, 참...


그런 점을 모두 떠나서 우리도 삶의 정점에 이른다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도 한다. 우리 모두 한번쯤은 어두운 숲에 들어가지 않겠는가. 과거는 보이지 않고, 미래 역시 보이지 않는 그러한 숲에. 그때 내가 갈 길이 어디인가? 그것을 찾으려면 이미 내게 있는 길을 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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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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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기 전에 작가의 말을 먼저 읽었다. 작가의 말이 두 편이나 있다. 초판을 냈을 때 썼던 작가의 말과 신판을 냈을 때 작가의 말. 그런데 작가의 말이 많이 달라졌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기에, 작가의 말이 주는 울림은 그대로다. 이 책에 쓰인 작가의 말이 과거의 말, 그때는 그랬지라는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초판 작가의 말에 있는 제목은 '생존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이 소설집의 내용을 잘 드러낸 제목이다. 제목이 된 '너의 유토피아'만 봐도 그렇다.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다. 기계문명이 모두 파괴된 세계.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 여기서 살아가는 로봇의 이야기. 너의 유토피아. 


만족도 설문을 할 때 1에서 5까지의 숫자를 놓고 선택하라고 한다. 이 소설에서는 0부터 10까지 중에서 선택한다. "너의 유토피아는?" 세상에 인간이 사라지고 황폐하게 변한 지구에서 유토피아 지수는 높을 수가 없다. 0이다. 그런 세상은.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있으면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지닐 수 있다.


지옥 속에서도 천국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인간 아니던가. 루쉰의 말이 나오는 소설 '여행의 끝'에서도 희망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다고, 결국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 소설 역시 좀비(?)로 변한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희망이 있으면 좋겠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인간이 인간을 먹는 그런 세상이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디스토피아.


'여행의 끝'이 유토피아는 아니더라도 자신이 살 수 있는 곳이면 좋겠지만, 아니다.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관계만 남은 곳. 그런 곳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차별과 혐오를 없애야 한다.


차별과 혐오에 대한 이야기가 '그녀를 만나다'에 나온다. 왜 성적 지향을 가지고 혐오 표현을 남발하고 차별을 하나? 차별이 폭력으로 나아가기도 하는데, 자신이 폭력을 저질러 놓고도 "짜릿하지 않아요?"('그녀를 만나다'에서. 235쪽)라고 하는 인간. 그런 인간들이 존재하는 사회. 그 사회야말로 디스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직도 차별금지법은 제정이 되지 않고 있다.


하여 이 소설의 마지막은 유토피아다. 차별과 혐오가 발붙일 수 없는 사회니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지금 젊은 나이의 사람이 무려 100살이 넘은 나이가 된 시대. 평균 수명이 130세 정도인 시대. 그 시대에 군대에서도 성전환이 자유롭고, 군인들도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보장받는 사회. 그러한 사회에서 과거를 기억하는 인물이 마지막에 예전을 떠올린다.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변희수 하사를 기억합니다." ('그녀를 만나다'에서. 269쪽) 


기억이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 작동해야 한다. 우리가 기억하자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억해야 변화 시킬 수 있다. 기억하는 사람이 많아야 변화의 힘이 더욱 세진다.


정보라는 '2020년은 무서운 해였다'(초판 작가의 말. 355)라고 했는데, 신판을 내면서 제목을 '계속 싸우는 이야기'라고 했다. 그러면서 '2022년은 무서운 해였다'(신판 작가의 말. 364쪽)고 하고 있다.


2024년은 더 무서운 해였다. 비상계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짓으로 그 해를 마무리했으니... 깨어 있는 국민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디스토피아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렇다. 정보라가 계속 싸우는 이야기라고 한 것은, 이러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쪽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기도 했고.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계속 싸워야 한다. 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계속 시위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겠다.


이렇게 계속 싸우는 이야기를 '씨앗'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자연을 정복했다고 여기는 인간들에게 씨앗들을 심어 싸움이 끝나지 않았음을, 자연은 스스로 생존 방식을 찾아가고 있음을, 당신들의 복제에 다양성으로 맞서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식물인 줄 알고 읽다가 어, 인간과 대화를 해, 그런데 인간이 복제 인간이야? 왜 똑같다고 표현을 하지? 식물은 유전자조작으로 인해 똑같은 또 씨앗으로 다음 대를 이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런 사회가 인간인들 가만 놓아두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 이렇게 작가가 설정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언급한 소설만이 아니다. 다른 소설들도 재미와 감동을 준다. 영어로 된 작품이 두 편 실려 있는데, 이 작품들은 '상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상실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따스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다. (One More Kiss, Dear라는 소설과 Maria, Gratia Plena라는 소설이다.)


작가의 상상력을 따라가면서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눈 감고 듣지 않으려 했던 우리 사회의 암울한 모습들을 소설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다.


발견, 이것은 다른 관점을 지니게 하고, 다른 관점은 다른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내딛게 한다. '여행의 끝'에서 루쉰의 말이 그렇게 긍정적으로 쓰이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이 작품집을 보면 희망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루쉰의 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작가 역시 '생존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들이라고 했다가 계속 싸우는 이야기'라고 하지 않았나 싶다. 우리는 계속 싸워야 한다. 그것이 상실에 맞서는 우리의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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