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로 보는 페미니즘 미술
고경옥 지음 / 현실문화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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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페미니즘을 미술 전시를 통해 실현했던 과정을 살펴본 책이다. 페미니즘이라는 말에서 연상할 수 있듯이 주로 여성 작가들의 전시를 다루고 있다. 그렇지만 페미니즘 전시가 여성 작가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남성 작가들도 참여하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페미니즘이란 특정 성만이 주장하는 이론이나 실천이 아니라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성의 구분을 떠나서 사람들이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하고 누려야 한다는 주장이자 실천이다. 그러니 페미니즘을 특정 성으로 가두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이야 페미니즘에도 다양한 이론이 있고, 다양한 실천이 있으며, 이들이 같지 않음을 인정하고 있지만 한때 페미니즘을 단일한 운동으로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렇게 단일한 운동으로 생각하면 페미니즘이 지닌 다양성을 보지 못하게 된다. 페미니즘 자체가 다양성을 포함하고 있는 운동이고, 나만큼이나 다른 존재들도 중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운동이니, 어느 범주로 국한시켜 다른 범주들을 배제하는 것은 페미니즘과 맞지 않다.


이 책에 실린 여러 전시들을 보면 그 점을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여러 전시를 통해서 페미니즘 미술을 보여줬다고 하지만, 그들이 전시한 작품들을 보면 표현기법에서부터 주제까지 너무도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함,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하는 모습. 이것이 바로 페미니즘 미술이고, 또 페미니스트들이 지녀야 할 자세 아니던가.


하여 이들 전시에는 페미니즘을 강조했다고 비판을 받는다든지, 페미니즘적 요소가 부족하다고 비판을 받기도 하고, 또 서로 다른 작품들이 한 공간에서 전시되는 바람에 전시의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다.


하지만 그런 전시가 바로 페미니즘의 실천 아니겠는가. 어느 하나로 가두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열려 있는, 다름을 받아들이는 전시들.


많은 전시들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고, 그런 전시들이 어떻게 페미니즘과 연결되는지, 주요 작가들은 누구인지 잘 설명해주고 있는 책이다.


여기에 서울에서의 전시만이 아니라 부산에서 활동한 작가들에게도 한 장을 할애해서 설명하고 있으니, 이런 책의 구성 역시 페미니즘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페미니즘을 표방한 미술 활동이 서울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오히려 다른 지역에서도 활발한 활동들이 이루어졌을 텐데, 그에 대한 연구들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 현실에서 부산 지역의 전시를 살펴봄으로써 지역을 확대한 점이 이 책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연구를 확장해서 부산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이루어진 전시들에 대한 연구, 그것들이 지닌 의미를 찾는 연구들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좋은 점은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작품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인데, 바로 이 점이 아쉬운 점이 되기도 한다. 많은 경우 작품이 사라져 지금은 볼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자로만 남은 그림이나 또는 설명을 통해서 이런 그림이겠지 하고 짐작할 수밖에 없는 그림들이 있는데, 그나마 이렇게라도 이름이라도 남은 작품은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당대에 전시되었음에도 역사에서 사라져버린 작품들이 얼마나 많을까. 지금은 전시회에 도록들이 잘 되어 있어 작품들이 사진으로도 남겨지지만 당시에는 사진으로도 남지 않은 작품들이 꽤 있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고, 자신들의 주장을 살린 전시회를 오랫동안 개최해왔다는 사실. 그러한 활동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 우리 미술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책에 나온 80-90년대 페미니즘 전시를 했던 모임들... <시월 모임>, <터>, <30캐럿> <그리뮤패 둥지>, <만화패 미얄> 그리고 '여성미술연구회' 여기에 부산에서 활동했던 미술가들과 그들이 협업해서 했다는 전시 <99여성미술제:팥쥐들의 행진>


이런 여러 전시에 대한 설명을 만나볼 수 있는 책. 더불어 각 전시회에 참여했던 작가들과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 우리가 지나온 과거에 페미니즘이 미술작품의 전시를 통해 어떻게 실천되고 있었던가를 보여주는 책이다.


그림 하나를 보자. <시월 모임>의 두 번째 전시, [반에서 하나로]에 나온 작품이라고 한다. 제목이 현모양처인데... 과연 여성을 동등한 대상으로 대하고 있었는지, 과거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 지금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고경옥, 전시로 보는 페미니즘 미술. 현실문화연구(....A). 2026년.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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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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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소아 작품 읽기.


어렵다. [불안의 서]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왜 불안일까? 인간이 실존에 대해서 불안감을 느낀다는 말일까? 아니면 삶 자체가 불안일까? 죽음을 향해 가기 때문에 삶은 불안할 수밖에 없는가. 


읽어보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느끼는 불안은 아니다. 불안은 행동하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온다.


행동하는 인간은 이것저것 재지 않는다. 고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한다. 행동을 통해서 삶을 살아간다. 아니, 살아간다는 의식을 하지 않고 그냥 살아간다. 그러니 행동하는 인간에게는 불안이 스며들 틈이 없다.


즉 여유가 없다. 하지만 사색하는 인간은 이것저것 많은 고민을 한다. 행동하기 이전에 생각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세상을 본다고 하기보다는 세상을 만든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있는 세상에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없는 세상을 있게 만들어내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해야 할까. 또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게 될까. 이러한 생각과 고민들이 결국 삶을 불안하게 한다.


불안에서 벗어나는 길은 생각을 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인데, 사색하는 인간은 행동보다 생각이 앞서고, 그것을 자신도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불안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 책은 페소아가 만난 사람에게서 받은 글이라고 하면서 시작을 하는데, 이 글을 쓴 사람은 페소아의 또 다른 페소아라고 할 수 있다. 즉 페소아들 중 한 명인 소아레스가 이 글을 쓴 주인공인데... 자신이 몇 년 동안 일기처럼 쓴 글이 바로 이 책, [불안의 서]다.


회계보조원으로 일할 때 그는 행동을 하기 때문에 불안에 싸이지 않는다. 그냥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잠시 틈이 나면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그는 불안을 느낀다. 수많은 자아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글로 남긴다.


글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세상을 만든다고 할 수 있는데, 길고도 긴 여정을 짧은 글들로, 그러니까 일기라고 할 수 있는 글들로 이 책을 이끌어가고 있다.


글에 년도가 나오는 장면도 있는데, 1910년대로 먼 과거로 돌아가기도 하지만, 대체로 이 책에 실린 글들은 1930년대에 쓰인 글이다. 페소아가 1935년에 세상을 떴다고 하고, 이 책에서는 1934년이 마지막 해로 나온다.


그러니 이 [불안의 서]는 소아레스라는 또 다른 페소아가 쓴 자신의 내면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가끔 겹치는 내용도 나오는데, 일기를 몇 년에 걸쳐 쓰다 보면 자신이 생각하고 느낀 것이 비슷해질 때가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경구들, 적어놓고 때때로 들여다보고 싶은 구절들이 많은데, 우리가 행동하는 인간이라도 늘 행동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행동 사이 사이에 그 틈을 생각이 파고든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과 다른 세상에 들어가게 된다.


낯선 세상. 의식하지 않았던 세상을 의식하게 되고, 그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생각하고... 그러니 행동하는 인간이라도 이 책에 나오는 구절들을 들여다볼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페소아(소아레스)가 창조한 세상이 어떠한지 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 때문인데... 그렇게 이 책은 '불안'에 떠는 영혼의 이야기라 할 수도 있지만, 사색하는 인간이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창조자로서의 불안. 당연한 것 아닌가. 자신이 세상을 만들어가는데 어찌 불안이 없겠는가. 이런 불안을 달래기 위해서, 어쩌면 그 불안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소아레스가 글을 써서 남기고 이를 페소아가 출간하게 되었으니... 이 책에 나오는 구절, 소아레스든 페소아든 그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글은 내 영혼의 구원이다.' (30쪽)


많은 구절들이 마음에 와닿는데, 그 중 이해가 잘 안되는 구절들이 있으면 또 다른 번역본을 찾아보기도 했다. 포르투갈 어를 모르니, 할 수 있는 일이 다른 번역본과 비교하는 것인데... 의미는 통하는데 문장이 다른 경우가 꽤 있다.



한 예로 '권태는 할 일이 없어서 병적인 분노가 치솟는 것과는 또 다른 상황이다. 그보다 훨씬 더 질환적인 상태, 뭔가를 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으리라는 감정이다. 이것은 곧, 할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권태도 따라서 지독해진다는 의미다.'(735쪽)는 문장이 있는데, 머리로 잘 들어오지 않는다. 


하여 다른 번역본을 찾아보니 '할 일이 없어서 지겨운 건 권태가 아니다. 권태는 무슨 일이든 할 가치를 못 느끼는 상태인 더 심각한 병이다. 이런 상태일 때는 할 일이 많을수록 더 심한 권태를 느끼게 된다.'(불안의 책. 문학동네. 오진영 옮김. 2015년. 546쪽.)고 되어 있다.


앞의 문장보다 뒤의 문장이 그래도 이해하기가 더 쉬운데... 하여 포르투갈 어를 모르는 나 같은 사람은 어쩔 수 없다. 이해 안 되면 다른 번역본을 찾아보기. 그래도 안 되면 내 상상으로 그 공백을 메우기.


이렇게 읽기 역시 쓰기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것이 이 책을 읽은 소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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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 극우가 온다
정민철 지음 / 페이지2(page2)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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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 극우를 누가 불러왔나?

 

기득권이다. 보수든, 진보든 이미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기득권 세력이 1020을 극우로 만들고 있다.

 

물론 모든 1020이 극우가 되지는 않는다. 연령이 같다고 해도 생각은 다양하고, 지역이 같다고 해도 생각이 또 다르고, 경제적 능력이 비슷하다고 해도 생각은 다르고 학력이 같다고 해도 생각과 행동이 다른 것이 인간이니까. 하지만 흐름으로 이야기하면 1020이 보수화, 극우화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 저자가 제목에 쓴 말을 그대로 쓴다.

 

보수는 그들을 이용하고, 진보는 그들을 가르치려 들지만, 본질적으로 그들을 극우로 만든 것은 보수냐 진보냐를 가를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도 이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우선 그들에게 막대한 상실감을 안겼다는 것.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게 했으니까.

 

'헬조선'(hell조선)이라는 말,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는 말이 일반적으로 쓰이고, 부모 세대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고, 스펙도 더 많이 쌓았지만 정작 부모 세대보다 잘살 가능성이 거의 없는 처음 세대라고, 즉 부모보다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첫세대.

  

물러설 곳이 없다. 이육사 시 '절정'을 생각한다.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 .../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 상황 아닌가. 이런 이들에게 너희가 노력을 안 해서 그렇다고 하면? 말이 안 된다. 먹히지도 않는다.

 

시인은 생각해 본다고 했지만, 1020들은 행동을 한다. 생각이 아니다. 행동이다. 우리를 이렇게 만든 자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

 

이렇게 만든 자들?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보수 쪽이 아니다. 이들이 쉽게 만나고, 또 그들의 도파민을 팍팍 뿜어내게 한, 다 좌파들 탓이라고 하는 극우 유튜브들을 만난 그들은, 진보 쪽을 향해서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됐어. 너희들 때문이야! 외치고 있다.

 

그런데, 진보는? 애들이 뭘 몰라서 그래. 사실을 몰라서 그래. 사실만 알면 생각을 바꿀 거야. 한단다. 참 낙관적인 진보다.

 

낙관적인 진보가 아니라 세상물정을 모르는 진보다. 이러고서야 어디 진보라고 할 수 있나? 진보는 현재를 보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미래를 보고 현재를 미래로 끌어가는 사람들 아닌가. 그런데 이들은 현재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이대로 가면 10, 20년 뒤에는 극우가 우리나라 권력을 장악한다. 파시즘의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유럽을 보라.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다는 유럽에서도 극우가 세력을 얻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현실을 제대로 보라. 지금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이대로 가면 극우가 우리 사회를 점령한다. 이미 점령되어 가고 있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학교를 보면 안다. 학교에서 과연 민주주의 가치가 교육되는가? 민주시민 교육을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웃기는 소리다. 그런 수업에서 학생들은 잔다. 아니면 딴짓을 한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낸다. 귀로 들어온 소리가 마음에 담기지 않는다.

 

교사가 옳은 소리를 하면 꼰대소리라고 한다. 선생님이 뭘 모르고 하는 소리란다. 또 남을 혐오하는 말을 하면서도, 혐오 동영상을 보면서도 그냥 재미로 한단다. 재미? 끝이다.

 

이런 학교의 모습만 봐도 이미 우리 사회는 극우가 (이때 극우는 혐오를 기반으로 하는 집단이다. 남을 몰아내는 것을 자신의 존립 기반으로 삼는 집단) 자리를 잡고 있다.

 

학교만 그런 줄 알았다. 이 책을 읽기 전엔. 하여 학교에서 스마트폰을 금지하면 나아질 줄 알았다. 그런데 더 심각한 집단이 있단. 바로 군대다. 20대 초반의 남성들로 구성된 집단. 여기서도 핸드폰을 허용한다.

 

군대에서 핸드폰 허용. 다름을 거의 허용하지 않는 군대에서 핸드폰을 사용했을 때,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또는 틱톡 등등을 통해 목소리 큰 사람의 (주로 선임병이겠지만) 관점을 담은 영상들이 공유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따분하고 단조롭고 또 왠지 자신이 피해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군대에서 어떤 영상들이 돌까? 그들의 시선을 잡고 그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영상, 주로 극우 논리를 주입하는 영상이 그들에게 공유된다고 한다.

  

다른 영상을 보기도, 다른 생각을 말하기도 힘든 군대에서 18개월, 훈련소 생활을 뺀다고 해도 16개월 이상을 그와 비슷한 극우 영상들을 보게 되면 자연스레 극우 논리가 주입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전역해서는 학교나 자신이 있던 곳으로 가서 그러한 논리를 주장하게 된다고.

 

이미 학교, 군대를 통해 습득한 극우 논리를 하루 아침에 바꾸기는 힘들다. 여기에 엄청난 알고리즘의 위력. 비슷한 영상만 계속 추천하고, 심지어 그 영상들이 자극적이어서 재미까지 있다면...

 

이게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1020이 뭘 몰라서, 사실을 몰라서 그런다고... 아니, 그들에겐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 힘들어하는 자신들에게 사이다 같은 통쾌함을 주는 영상, 도파민을 팍팍 분비시키는 영상이 더 좋다.

 

이 점을 놓치면 그들을 설득할 수가 없다. '3'라고 하지. 3초 안에 그들의 시선을 잡아야 한다. 그런데 자칭 진보라는 사람들, 정말 설명이 길다. 길어서 도저히 끝까지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또 왜 이리 평이하고 도덕적인가. 더 보고 싶지 않다. 재빨리 다른 영상으로 넘어간다.

 

현실이 이렇다. 이런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과거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바로 이런 현실을 알고 이를 활용하는 사람이 이 책의 저자 정민철이다.

 

이들의 언어로, 이들의 감수성에 맞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 지금 외롭다고, 고립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 많이 활동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 지원을 '진보' 쪽에서 해주어야 한다고 요청한다.

 

절박한 요청이다. 그러면서 그는 가족들이 밥상에서 대화할 것을 추천하고 있다. 가족이라는 1차 집단에서 서로가 소 닭 보듯 살아온 모습이 1020을 극우로 내몰기도 했다는 것. 훈계가 아니라 대화를, 주입이 아니라 이해를 바탕으로 대화를 하라고...

 

서로의 마음을 전달하라고. 그러면 조금씩 달라질 것이라고. 온라인을 통한 대항 활동도 중요하지만 대면을 통한 이해와 공감의 장을 넓혀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읽으면서 등골이 서늘했다. 큰일이군. 하지만 늦지 않았다고, 이런 문제제기를 하는 청년이 있으니. 이런 청년이 고립되지 않고 더 많은 청년들과 연대할 수 있다면, 지금 우려하는 상황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정치권이 정신차려야 한다고... 저자가 제기한 요청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받아들여야 늦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이런 목소리 들을 수 있는 정치권이 진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그러한 정치인들을 '진보'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


한 가지 명심할 점은 1020이 극우화 된다고 해서, 모든 1020이 극우 쪽으로 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 중에서도 다양한 정치적 성향이 나타나고, 극우로 가는 1020 못지 않게 진보로 가는 1020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면을 통한 이해와 공감의 장을 넓혀가려는 노력이 필요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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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콜로니
최돈미 지음, 정은귀 옮김 / 문학사상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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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머리에 남아 있다. 이 시집에 나오는 한 구절일 뿐인데... '이이이'


시인은 '이'를 참 여러 가지로 풀이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냥 '이'라고 쓰면 읽는 사람은 많은 이'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것 저것 할 때의 '이'. 이때의 '이'는 상대를 지칭하는 언어가 된다. 이봐 할 때의 이. 그리고 둘을 의미하는 이. 이 '이'를 시집 제목과 연결지으면 남과 북이 될 수 있다. 또한 몸에 기생하면서 피를 빨아먹는 '이'를 뜻할 수도 있는데, 이는 분단이나 반공에 기생해서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존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빨을 뜻하는 '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때의 '이'는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존재가 된다. 자칫하면 상대를 물어뜯는 이가 될 수도 있고.


이런 사전적 의미나 상징적 의미를 떠나서 차마 말을 할 수 없을 때 입에서 신음처럼 나오는 소리로 '이'를 생각할 수도 있다. 시집에는 고문을 당하는 사람이 나오니, 그에게 언어는 불필요하다. 자신의 몸에서 나는 소리 '으'보다 더 이를 악물고 참아내지만 어쩔 수 없이 나오는 소리 '이'를 낼 수밖에 없다.,


참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를 시인은 그냥 '이'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이이'라고 중첩이 되고 있는데, 이 구절이 계속 머리에서 떠나지 않게 된다.


반복을 통해서 각인이 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차마 말로 하지 못하는 감정을 이런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언어로 내 편, 네 편을 가르고, 내 편이 아니면 처단해야 하는 상황에서 말을 할 수 없게 된 존재들이 내는 말. '이이이'


시집을 읽으면 이 '이이이'를 '아아아'로 바꾸게 된다. 이렇게 시를 쓸 수 있구나. 이렇게 분단 상황에서 겪은 우리 현실을 이런 형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구나.


자료와 사진과 다른 사람의 글들, 그리고 시인 자신이 쓴 글씨와 자신의 가족사까지... 시에 모두 들어 있다. 어느 하나로 표현할 수 없다는 듯이, 여러 요소들이 모여 한 편의 시를 구성한다.


'DMZ' 비무장지대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 하지만 비무장지대라는 말이 무색하게 무장이 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지대. 무장한 군인들이 서로 총구를 맞대고 있는 공간. 그곳이 바로 비무장지대 아닌가. 그러니 비무장지대라는 말을 거울에 비춰 거꾸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시에 나오는 거울 단어처럼... 그냥 글자가 거꾸로 뒤집힌 것이 아니라 의미도 뒤집힌. 그렇다면 '콜로니'는 무엇인가? 식민지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어떤 집단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나의 의미만을 지니고 있지 않으니, 이 '콜로니'라는 말도 거울에 비춰보자. 


그냥 볼 수 없는 말을 찾아내야 한다. 이 시를 읽으려면. 'DMZ'가 냉전시대 분단을 상징하는 말로 우리나라의 과거 비극을 담고 있는 말이지만, 이곳은 평화의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 자연이 풍부한 생태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곳이 바로 'DMZ' 아닌가.


지금 이곳에는 지뢰를 비롯한 온갖 무기들도 있지만 인간에 의해서 멸종이 될 뻔한 많은 생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온갖 것들이 공존하는 장소로 존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한데... 콜로니 역시 (식)식민지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가 지금은 다양한 존재들이 공존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생명들이 살아가는 집단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강자의 이데올로기가 점령하고 있는 말의 뜻을 재해석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시에서 말하는 '거울 단어'인데... 


그렇다면 '좌빨'이라는 말을 무슨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그들을 배척만 하는 사람들에게 또는 '계몽령'이라는 말을 쓰면서 '어게인'이라고 다시 돌아오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들을 거꾸로 보여주자. 


그들의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그 말이 과연 우리 사회에서 쓰여야 하는지를 살피게... 시집에 이런 시가 있다. 보자.



문장을 거꾸로 읽으면 된다. 아마 이 시집을 읽는다면 '좌빨'이란 말도 '계몽령'이란 말도 쏙 들어갈 것이다. '이이이' 정말, 그런 말을 쓸 수 있단 말이야? 하면서.


말이 필요없다. 이 시집, 읽으면 형식에서도 내용에서도 감탄하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 현대사를 생각하고, 그러한 과거에서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특히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언어에 대해서... 


그런 언어를 한번 거울에 비춰보자고... 그 언어가 보여주지 않고 있는 면을 찾아보자고. 그것을 볼 수 있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라고.


시집에 대한 자세한 해설은 '번역 후기'와 '추천사'에 잘 나와 있으니 그 부분을 참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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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efox 2026-05-29 0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네요. 시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상당히 눈길을 끄는 방식으로 시대정신을 잘 전달한 것 같아요. 좋은 시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kinye91 2026-05-29 09:18   좋아요 0 | URL
네. 이런 역사는 반복되면 안 되겠죠. 제겐 형식과 내용에서 모두 신선한 충격을 준 시집이었어요.
 
루가노 리포트 - 21세기 자본주의의 유지 방안
수전 조지 지음, 이대훈 옮김 / 당대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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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그냥 쉽게 시장자본주의, 최대의 이윤을 창출하는 경제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방안 연구를 의뢰한다. 의뢰받은 학자들은 모두 익명으로 연구를 하고, 발표를 하며, 종합 보고서에도 익명으로 서명한다.


그들끼리도 서로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대면을 하지 않고 서면이나 메일을 통해서 연구 결과를 공유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연구결과를 종합해서 시장자본주의가 살아남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일은 인구를 줄이는 일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지구에 대한) 충격 = 소비* 테크놀로지*인구'이기 때문인데... 소비와 인구가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구가 늘면 늘수록 소비가 늘 수밖에 없으니, 지구에 가하는 충격, 즉 지속가능한 시장자본주의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인구를 줄여야 한다.


얼마나? 이 보고서는 21세기 직전에 쓰여졌으므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2020년 세계 인구를 60억에서 80억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적절한 인구는 40억이므로, 60억이 될 것이라고 가정하면 20억을 줄이는 정책을 펼쳐야 하고, 80억이라고 가정한다면 절반을, 즉 40억을 줄일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만 시장자본주의가 제대로 유지될 수 있다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 윤리, 경제, 정치, 심리 분야에서 적절한 방안을 제시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이 보고서는 분석과 진단, 그리고 해결방안 제시로 구성되어 있다. 진단과 분석에서 20억을 줄여야 한다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줄일 수 있는가로 나아가는데, 이것은 아주 단순하게 계산을 하면 출산율은 줄이고, 사망률은 높이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인구는 줄게 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지금 인구 소멸을 걱정하고 있어서 이 보고서와는 전혀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지구 전체로 보면 과잉인구는 지구에서 우리 인류의 존속을 위협하는 요소 중 하나가 될 수는 있다. 지금처럼 승자독식으로 간다면....


현재 지구에서 생산되는 재화들을 공정(? 무엇이 공정인지, 산술적인 나눗셈으로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하게 나누고, 지속가능한 생활방식으로 바꾼다면 지금의 인구로도 지구에서 살아가기에 충분하겠지만, 이윤 창출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본주의에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


또한 이 보고서는 시장자본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그것이 유지되는 방안을 마련하는 목적이었으므로, 인구를 반드시 줄여야 한다고, 인구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소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또 테크놀로지(기술)를 이용해 환경을 보호하면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전혀 없다. 오직 가장 단순한 인구를 줄이자로 가고, 그것에 대한 방안, 아마 읽으면서 기겁을 할 만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정복, 전쟁, 기근, 전염병 등을 요한묵시록의 네 기사에 빗대어 이야기를 하면서 이들을 통해서 인구를 줄이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고, 또 예방이라고 해서 출산율을 낮출 수 있는 방안이라는 것이 피임 및 불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이렇게 2부로 가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방법이라고 제안된 것들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나 기타 다른 홀로코스트, 또는 제노사이드를 떠올리면서 그것보다 더하네 하는 생각이 들 만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러한 일들을 해야 한다고 하니, 이거 보고서가 아니네... 사실이 아니네, 상상이네. 상상인데, 이런 세상으로 가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이네... 우리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면 소수가 정말로 이런 세상으로 우리를 끌고 갈지도 모르겠네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저자가 '루가노 리포트'를 통해 시장자본주의의 본질을 드러내고,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갔을 때 어떤 존재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록'을 통해 이 보고서에 있는 방법들과 반대되는 방법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우리는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고 있으니...


읽다가 이런 기괴한, 정말 비인간적인 방법을 제시한 이 책은 못 읽겠다 하는 사람들은 '부록'을 읽고 '후기'를 읽는 것이 좋겠다. 그러면 왜 저자가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루가노 리포트'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이 책에 제시된 방법 중에 이미 실행된 것들, 그 중에 하나가 민영화, 집중화 등인데 그것들이 일으키는 피해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으니, 이 책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우리가 겪게 될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실은 이 보고서에서 예견한 대로 가지는 않고 있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여전히 자본이 세계를 움직이고, 몇몇 소수에 의해서 세계가 요동치고 있으니. 또한 전쟁은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환경파괴로 인한 신종 감염병이 유행하기도 하니, 이 보고서에서 제안하고 있는 방법들을 살피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다른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공멸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길이다. 이 보고서는 공멸하지 않기 위해 특정 존재들을 없애야 한다고 하지만, 아니다. 다른 존재들과 함께할 때 공존할 수 있다. 그 방법을 찾는 것이 바로 진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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