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를 담아 애정을 고백하는 법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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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다. 그러나 거쳐야 할 일이다. 겪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한에서는.


소설의 배경은 중2다. 우리나라에서 중학교 2학년 때를 사춘기가 가장 심한 때, 또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하고, 친구 관계가 가장 중요하게 작동하는 때라고 한다.


친구 관계! 정말 중요하다. 부모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길 때 제일 먼저 찾는 존재가 바로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처음 겪게 되는 일이다. 그러니 서투를 수밖에 없다. 서툰 행동과 말 때문에 오해가 생기고 친구 관계가 틀어질 때도 있다.


서툰 행동과 말 때문에 틀어지지 않으려면 자신을 감추어야 한다. 친구에게 맞추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친구가 뭘 원하는지 알아서 그에 맞게 행동하고 말을 해야 한다. 특히 친구가 권력을 지니고 있을 때에는.


위계, 그렇다. 서열이 생긴다. 여러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지내야 하기 때문에 성향별로 또는 누군가의 주도로 몇몇끼리 모이게 되고, 그것이 굳어지면 다른 모임에 끼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이미 속해있는 모임에서 떨어져 나오지 않도록 안간힘을 써야 한다.


중학교 교실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이 소설 역시 그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학생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 그것을 관찰하면서 가까스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하는 다니자와 유카. 초등학교 때 친했던 노부코는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지만 당당하게 맞선다. 자신의 소리를 낸다.


그런 노부코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다니자와. 그렇다. 숨 막힐 것 같은 교실 생활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노부코를 통해 다니자와 역시 관찰자로서 지내온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아무 것도 달라질 것이 없음을.


자신이 자신에게도 방관자였고, 자신을 자신이 가장 부끄러워하고 비난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노부코가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순간 이미 달라진 자신을 발견한다. 이제는 과거 관찰자, 방관자로만 지내던 자신과는 달라진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그것이 내가 싫어하는 나의 최후였다'(354쪽)고 말한다.


다니자와가 좋아하던 이부키와의 관계에서 위악적인 모습을 보인 것도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남을 잘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이부키에게서 이런 소리를 들으며, 다니자와는 더욱 과거의 자신과 결별하게 된다.


'제일 싫었던 건, 다니자와가 그걸 꾹 억누르면서 분명 자기가 제일 싫어할 방식으로 나에게 쏟아냈다는 거야. 네가 싫어하는 네가 나보다 상처받은 얼굴로, 자기에게 상처를 줬어' (364-365쪽)


이 구절에서 이 소설의 제목을 연상할 수 있다. '적의를 담아 애정을 고백하는 법'이라는 제목을. 이는 친구들과의 관계를 관찰하면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그러면서는 속으로는 관찰하는 자신을 높이고 관찰당하는 친구들을 낮추는 다니자와의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그것이 결국 자신을 낮추는 것밖에는 되지 않음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이부키를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니자와가 노부코를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노부코는 자신을 관찰자의 자리에 놓지 않고 주체의 자리에 놓고 있으니까.


주체의 자리에 선 학생은 친구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다. 아니, 친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자신을 누르지 않는다.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그런 모습을 이 소설에서 시종일관 보여준 존재는 이부키다. 그런 이부키를 통해서 다니자와 역시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중반까지는 무섭다. 여학생들 사이의 따돌림, 모임에서 떨어져 나오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그런 모습들이. 여기에 자신을 싫어하면서도 자신을 지키려 애쓰는 다니자와의 모습. 여기에 사춘기 남녀관계가 끼어들면서 더욱 힘들어지는 친구들과의 관계들이.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자신을 바로보게 되는 다니자와의 모습. 남의 눈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눈만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를, 살아있는 몸을 알아가는 다니자와의 모습을 통해서 소설은 무서움에서 응원으로 마음을 옮겨가게 한다. 스스로를 찾아가는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행동을. 


중학교 2학년이 주요 배경인 이 소설에, 한 학급에서도 철저하게 위계가 나뉘어진 아이들의 모습, 그런 위계를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 그럼에도 그것을 없애지 못하고 있는 현실. 여기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한 소녀의 모습을 통해서, 과연 이런 일을 모두가 겪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따돌림, 괴롭힘 등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다름'과 어떻게 공존하느냐를 배우는 과정으로 학교 생활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부모에게서 떠나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할 때, 이 때 자신이 주체로 당당하게 설 수 있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하는 소설. 


다니자와처럼 자의식이 강한 사람도 힘들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그 과정을 힘들게 거쳐가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적의를 담아 애정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애정은 애정을 담아 고백할 수 있는 그러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이부키처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학창시절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학교의 모습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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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계절에 잠시 큐큐퀴어단편선 6
천선란 외 지음 / 큐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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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큐큐퀴어단편선6]이다. 앞서 발간된 1-5를 읽어보지 않고 이 소설집부터 읽게 된 이유는 천선란의 작품을 전부 읽겠단 욕심이 있어서였다.


빠져드는 작가가 있다는 사실을 기뻐해야 하고, 그것에 행복해 하기도 하는데, 지금은 꼭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은 작가가 꽤 있다. 그만큼 소설 세계에 빠져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수록된 작가와 소설은 다음과 같다.


천선란 '검은 혀', 이반지하 '잉글리시 켐퍼', 오호두 '모노의 봄',

 서장원 '흰 밤', 정보라 '지향', 박선우 '사랑의 방학'


소설을 기획한 의도에 맞게 '다름'을 다루고 있다. 퀴어란 말 자체가 다름이라는 말인데, 이 책의 제목이 된 '서로의 계절에 잠시'라는 제목의 소설은 없다. 그런데 서로의 계절이라는 말에는 이미 '다름'이 들어 있다. 그리고 '잠시'라는 말에는 내 것으로 만든다는, 영원히 소유한다는 그러한 개념이 들어있지 않다.


다름은 하나가 아니고, 영원이 아니며 그러므로 지속이 아니라 순간이고 변화다. 순간이고 변화면 그것이 어떻게 유지될까 하는데, 아니다. 바로 만남의 순간에 충실한 것이다. 그 만남의 순간에 상대의 과거-현재-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 나와 만나고 있는 존재, 그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혀가 검든 아니든 무슨 상관인가, 다양한 인종, 민족이라는 이유로 차별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나와 상태가 다르다고 내가 잘하는 것을 못한다고 내가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있는가, 왜 다름을 그냥 인정해주지 않는가.


마지막에 실린 '사랑의 방학'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학교 다닐 때 만약 방학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공부하는데 최선을 다해도 방학이 없으면 그 관계가 지속이 될까. 그리고 방학이 끝나고 나면 방학 전과 후가 같은 존재일까. 학생은 같은 학생이라고 하겠지만 분명 방학이라는 기점을 통해 달라진 학생이 된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존재는 없다. 세상에는 다 다른 존재들이 있다. 이들 존재들이 관계맺는 순간, 그것이 바로 서로의 계절에 잠시 머무르는 순간이다. 그렇게 관계를 맺는데, 그런 관계가 지속되더라도 같음을 유지하면서 지속되지 않는다.


관계의 지속이 변하지 않음의 영원함이 아니다. 관계의 지속은 오히려 다름의, 변화의, 순간 순간의 모습을 서로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점을 '사랑의 방학'이라는 소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소설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퀴어단편선'이라는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이다. 퀴어라는 말이 지닌 의미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변했으니까. 그렇게 퀴어란 변하지 않음이 아니라 변함이니까. 순간순간 변하는 존재들, 그러한 변화를 통해서 맺어가는 관계는 내 틀 안으로 상대를 끌어들이려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신도 상대의 틀로 완전히 들어가서는 안 된다.


경계에서 서로 맞물리는 삶. 이 경계는 수축과 팽창을 지속하면서 새로운 선을 만들어간다. 그것이 바로 이 소설집이 말하는 것이리라.


하여 이 소설집에 실린 첫소설 '검은 혀'를 쓴 천선란의 작가 노트에서 한 구절을 빌린다.


'우리는 서로의 세계에 잠시 머물렀다 가는 낯선 이방인이다. ...타인의 세계를 너무 쉽게 이해하려 들지만 않으면 된다.' (37쪽)


이것이 바로 '서로의 계절에 잠시'라는 말이리라. 타인의 세계만이 아니다. 자신도 타인과 마찬가지다. 자신은 이렇다고 규정짓고, 변하지 않는 무엇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신도 자신에게 외계인이다. 그러니 자신을 다 이해했다고, 나는 이런 존재라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나 역시 내가 모르는 '나'가 많이 있으며, 그러한 '나'는 순간적으로 변화고 방금 전의 '나'와는 '다른 나'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 박새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모노의 봄'이다. 멀리 멀리 숲의 끝까지 가서 모노는 기존과는 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이 소설집은 다른 존재들과 어울리기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이 바로 자신을 하나로, 변하지 않는 존재로 규정짓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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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엔 원년의 풋볼 (무선)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4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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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일어나는 시간대는 셋. 하나는 만엔 원년이라고 할 수 있는 1860년. 이때 농민봉기가 일어난다. 폭력이다. 둘은 패전 직후. 우리나라로 치면 해방직후다. 이때는 조선인 부락을 습격하는 일본인들의 모습. 또다른 폭력이다. 셋은 1960년. 미국과 안보조약을 체결하는 것에 반대하는 시위. 이것 역시 폭력 시위다.


소설은 1960년대로부터 시작한다. 주인공이 거쳐온 시대를 거쳐 그는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니, 그 시대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지 못하는 지식인의 부끄러움 - 해설에서는 수치심이라고도 하는데 -이 나타나 있다.


전후 일본, 이제 경제발전이 되어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일본이지만 지식인들은 미국에 종속되어 있다고 느끼고, 또한 과거 자신들이 벌인 전쟁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다는 생각도 지니고 있었으리라. 그것이 그들을 수치심 속에 살게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을 패배시킨 나라에 의존하는 모습. 그러한 수치심을 만엔 원년에 일어났던 농민봉기와 연결짓는다. 농민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일으킨 봉기. 폭력이긴 하지만, 농민들을 누르고 있었던 것 또한 폭력 아니던가. 커다란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 여기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농민들. 학살당하는 농민들. 그들을 지도했던 서술자의 증조부의 동생은 행방불명이 된다. 홀로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하여 그 후손들은 수치심을 지니고 있었는데...


패전 직후 제자리를 잡아가는 조선인 마을을 습격하는 골짜기 일본 사람들. 이들에 의해 조선인 한 명이 죽게 된다. 과연 정당한 폭력인가? 자신들의 패전에도 잘살아가는 조선인들에게 증오심을 품는 것은 그간 자신들이 조선인들에게 가했던 폭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하여 서술자의 형 S는 두번째 습격에서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한다. 그는 폭력을 폭력으로 이어가는 것에 반대했던 것이다.


첫번째 조상은 폭력 저항을 주도하다 사라지고, 두번째로 형은 폭력 현장에서 목숨을 잃는다. 이에 다시 세월이 흘러 1960년대 동생 다카시는 마을 청년들을 선동해서 조선인이 운영하는 슈퍼마켓을 습격한다. 또다른 폭력이다. 이 폭력은 양쪽으로부터 자신을 몰아 스스로 죽음의 길로 가겠다는 동생 다카시의 의도이기도 하다.


이런 폭력을 추적하면서 서술자는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는 사실. 그런 폭력이 아니라 폭력을 끊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현대에 동생 다카시에 의해 벌어진 폭력은 더이상 다른 폭력을 부르지 않는다. 조선인 주인은 그 일을 무마하고 자신이 할 일을 한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섰던 둘째 형도 마찬가지다. 그 형 역시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양쪽 어디에 서지 않고 폭력의 한 가운데에 자신을 놓아두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농민 폭동, 아니 혁명이라고 해야 하나, 그것을 주도했던 증조부의 동생은 어떤가?그는 폭력을 통해서 얻은 것도 있었지만, 많은 농민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거기에 대한 책임. 결국 지하 골방에서 평생을 보내는 것으로 참회를 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참회가 되었을지는 의문이다.


다만, 그는 글을 통해 누구도 죽지 않는 혁명의 모습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이는 오에겐자부로가 폭력이 아닌 평화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런 그이기에 일본의 재무장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고, [오키나와 노트]나 [히로시마 노트]와 같은 폭력으로 인해 피해를 본 장소를 찾고 그런 민중들에게 지지를 보내게 된다.


만엔 원년의 폭동이 정당한 폭력이었는지의 여부를 떠나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는 점, 혁명은 어떠해야 하는가, 혁명을 이끄는 사람을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행동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 결국 고민하고 번뇌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끝까지 민중을 책임진다는 것이 자신의 죽음으로 책임을 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죽음은 자신의 두려움, 책무를 똑바로 들여다보고 자신이 행한 결과이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남들에게는 그러한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에 나온 친구의 자살 모습이 바로 그런 점을 보여주지 않을까.


진실을 말한다는 것, 진실을 본다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그것이 어떠한 폭력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 어쩌면 진실은 폭력으로 해결하는 것보다 더 힘든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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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평전 - 솥에서 난 성자
김형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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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원불교 대종사 소태산 박중빈. 어렸을 때 이름은 박진섭, 그 다음 이름은 박처화, 그 다음이 박중빈. 오랜 구도 끝에 진리를 발견한 사람. 발견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에게 알린 사람.


하지만 그가 살던 시대는 일제시대. 민족이 억압을 받던 시대. 민중을 구원한다는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민족 구원? 아니다. 민족이라는 한계를 정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원하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하지 않는다. 조선인, 일본인, 그리고 세계인을 구원하려는 목표를 세운다. 이것이 종교다. 특정 집단에 국한되지 않는. 지금은 특정 집단에 국한되어 다른 집단을 배제하고 있지만, 종교의 처음이 그랬을까?


배제가 아니라 포용 아니었던가. 누구나 나와 같은 존재라는 인식. 그래서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 나만이 진리를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깨우치는 세상. 그렇다고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강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도록 이끌어주는 과정. 이것이 종교의 본질이다.


소태산! 한자어로 살필 필요가 없다고 한다. 당시에는 한자를 많이 쓰던 시대였고, 호(號)라든지 자(字)라든지 본명 외에 다른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주로 한자를 썼으니, 박중빈 역시 자신의 호를 한자로 음차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솥에 산'이라고 부른다. 솥을 생각한다. 솥이 무엇인가. 하나의 존재가 다른 존재로 바뀌는 공간 아닌가. 그렇게 바뀌기 위해서는 그냥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열기와 습기 등을 견뎌내야 한다. 그것을 견뎌내면 다른 존재로 바뀌게 된다. 그것을 하는 존재가 바로 솥이다.


쌀과 물을 넣고 끓이면 밥이 되듯이 솥은 하나의 세상에서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솥에 산'이라는 이름에는 이미 다른 존재로 변한 자신을 말해주고 있으며,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변하게 한다는, 함께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솥에는 어떤 존재들이 들어갈까? 소위 귀하다고 할 수 있는 존재들이 들어갈까? 아니다. 솥에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얻을 수 있는 존재들이 들어간다. 그냥 보통 존재들. 그것들이 솥에 들어가서 우리들을 살게 해주는 존재가 되어 나온다. 그렇다고 솥에 보통 것들, 귀하지 않은 것들만 들어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솥에는 귀한 존재들도 들어간다. 당시 귀하던 고기도 솥에 들어가 삶아지지 않던가. 그러면 다른 음식이 되어 나온다.


즉 '솥에 산'에는 바로 이런 의미가 있다. 약한 하층민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특권층도 포함한 모두를 아우르는 진리. 그것을 설파하고 함께하겠다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 맞게 소태산은 약한 사람들이 더 힘들어지지 않는 삶을 살게 한다. 간척사업을 해서 식량난을 해결하고 자금을 확보하려든지, 당시 가장 약한 층에 속했던 여성들도 동등한 대우를 받고, 동등한 활동을 하게 한다든지, 일제 순사 출신까지도 포용을 하며, 일본인인 경찰 고위 관료조차도 함께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 다양한 종교를 아우른다. 진리의 길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 사람을 배척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끌어들이려고 하지도 않는다.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도록 할 뿐이다. 그 사람이 스스로 깨치지 못하면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도 강조한다.


지금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를 소태산의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엄혹한 일제시대, 어떤 사람들은 소태산이 더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3.1운동 당시 제자들의 태도에서도 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소태산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때가 오지 않았다는 판단도 있고, 종교를 민족의 한계로 국한시키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있다.


이런 소태산의 모습에서 예수나 부처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들 역시 민족적 요구와 진리 추구 사이에서 민족의 입장에 서라는 요청을 받지 않았던가. 하지만 민족의 경계 내에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적인 종교로 설 수 있지 않았을까.


즉, 종교는 경계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허무는 것이기 때문에, 민족이라는 경계를 나눌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은 핍박을 받고 있지만, 핍박하는 사람들이 다른 민족 전체는 아니니, 다른 민족의 성원들과 함께 그러한 억압을 떨쳐내고 진리의 길에 들어서려고 하지 않았을까.


솥은 자신에게 들어온 존재들을 가리지 않는다. 그 각각 다른 존재들이 솥 안에서 하나가 된다. 여럿이 하나가 되는 일, 내가 어거지로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만법귀일(萬法歸一)이다. 소태산은 그런 일을 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하나가 된 법은 어디로 갈까? 일귀하처(一歸何處)라고 묻는다고 한다.


어디로 가긴. 다시 만법(萬法)으로 가지. 그 만법은 예전과 같은 만법이 아닌 변한 만법. 즉 만이지만 하나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솥에서 다른 존재로 하나가 된 존재는 다시 여럿에게로 돌아간다. 여럿에게로 돌아가는 하나. 그 만법과 하나가 바로 원이다. 일원이다. 돌고돈다.


하여 원불교의 상징이 원이다. 돌고 돎. 엄혹한 시대를 살았던 소태산 박중빈. 그가 당시 사람들에게 남겼던 진리의 길. 그것은 희망의 길이자 행복의 길이었을 것이다. 솥 속에서 다른 존재로 변한 사람들은 자신이 걸어왔던 길과는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소태산이 우리에게 보여준 진리의 길일 것이다.


참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평전이었는데,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에서 만법귀일이 아니라 만법이 만법으로, 경계를 허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계를 만들고 더 높고 튼튼하게 쌓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나와 다른 너는 몰아내야 할 존재가 아니라 함께해야 할 존재라는 것. 솥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뜨거운 열기를 함께 견뎌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다른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 뜨거움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서로가 서로를 안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소태산의 사상이기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종교를 떠나서 한 사람의 일생을, 고민을, 그가 한 실천을 알아가는 과정 자체로 이 책은 큰 의미를 지닌다. 많은 사람이 읽으면 좋을 책이다.


부처님 오신 날. 소태산 그의 사상과 실천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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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라 - 2024 제7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작
김아인 지음 / 허블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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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전세계가 팬데믹을 겪었다. 아마도 이러한 질병이 코로나19로만 끝나지 않을 거라는 예상을 한다. 암울한 현실이 반복될 수도 있다. 이것이 인간과 다른 존재들의 거리가 무너진 데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거리의 붕괴는 바로 인간이 추구한 과학기술에 있다.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는 인간의 삶이 예측하지 못하는 질병을 유발하고, 그것이 인간의 삶을 옥죄게 된다.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고자 하는 일들이 인간을 더 힘들게 하는 역설. 그럼에도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인간.


이제는 인공지능이다. 이보다 더한 기술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지금도 쓰이고 있는 기술을 더욱 밀어붙이고 있다. 인간 냉동기술.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


예로부터 있었다. 영생을 추구하기 위한 많은 방편들, 약물들을 발견 또는 개발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런데도 모두 실패했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니까. 아니, 유한해야 하니까. 그것을 깨뜨렸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 없다.


이 지구에 죽지 않은 인간들이 계속 태어나고 살아간다면? 과연 지구가 버틸 수 있을까? 우주를 개척하면 된다고? 하지만 우주 역시 무한하지 않다. 죽음이 없는 존재는 무한증식할 수밖에 없다. 그들을 채울 공간이 있을까? 


이런 상상은 하지 않는다. 육체를 지닌 인간이 무한하다면 문제가 되니, 소설은 육체를 소멸시키고 영혼(정신)만 남긴다. 인간을 데이터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유한한 공간에 무한을 수용할 가능성이 있다. 


뇌 또는 영혼, 정신이 데이터로 남아 있다고 살아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하지 말자. 그렇게라도 인류를 살아남게 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라는 질문은 윤리, 철학과 연결되는 질문이다.


소설은 그 질문은 독자에게 남겨두고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육체와 분리된 정신이 아니라 육체까지도 보존하는 기술이 있다면? 지금 냉동기술이 사실 그러한데, 지금보다 발전한 모습이 무엇이냐면, 이 소설에서는 냉동된 육체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정신은 데이터화되어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 세대에 전염병을 치유할 수 있는 치료제가 나오면 육체를 깨어나게 해서 계속 살아가게 하면 된다. 여기까지가 소설에서 나온 과학기술의 발전이다.


이런 과학기술을 토대로 운영되는 집단은 권력을 지닌다. 인간에게 신과 같은 위치에 선다. 과학기술이 신이라면 이를 다 받아들일까? 세상에서 신을 섬기는 자들 중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존재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학기술을 파괴하는 것이 신에 대한 인간의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집단들. 


또한 과학기술이 이윤으로만 쓰이는 것을 막고, 많은 사람을 구하는 쪽으로 사용되기를 바라는, 본래 추구했던 목표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고 여기는 집단도 있다. 그리고 인간의 유한한 생명을 받아들이고, 무한을 추구하는 행위가 잘못되었으니 그러한 과학기술은 파괴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자, 당신은 어느 쪽에 설 것인가? 소설 속 인물인 페이, 하라바야시 가스미, 황신부는 이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자신이 어떤 입장에 설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웨이쉬안이 있다. 거대 기술 회사에서 장의사로 일하는(장의사라고 하기보다는 정신이 추출된 나머지 육체를 처리하는 일을 하는 사람) 웨이쉬안. 그가 페이의 죽음 이후에 겪게 되는 일들이 바로 이 다양한 관점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엮이면서 겪게 되는 일이다.


소설은 어떤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페이도, 가스미도. 다만 웨이쉬안 스스로 결정한다. 자신의 의지로 자신은 어떤 세상을 살아가려 하는지를...


그는 자신의 선택과 같이 남들에 의해서 다른 사람의 삶도 선택되어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한다. 스스로 결정하도록. 거대과학기술 회사인 AE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던 페이의 삶, 육체를 보존하면서 정신과 연결시키는 기술을 개발한 가스미, 그러한 기술은 파괴되어야 한다고 하는 황신부. 이들 역시 자신들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웨이쉬안의 선택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는 다른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길을 놓아두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내가 내 삶을 결정하듯이,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삶을 결정해야 한다는. 결국 세상은 더욱 발전할 것이고, 온갖 과학기술이 나올 것이다.


그러한 세상에서 선택은 온전히 내 몫이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이 온전한 내 몫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하고, 어떤 집단의 이익에만 종사해서도 안 되며,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지만.


인류가 대처할 수 없는 감염병이 유행하는 디스토피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 소설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를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현실에서 상용되고 있는 기술들도 있으니, 그것이 꼭 먼 미래의 일은 아니라는 생각. 그래서 더더욱 선택의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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