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의 일본사 - 음식으로 읽는 일본 역사 이야기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류순미 옮김 / 더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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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에는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가 담겨 있다. 아니 그 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의 문화, 역사가 담겨 있다고 해야 한다.


하나의 음식이 그 나라에만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지구화, 세계화 시대라고 하는데, 음식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음식을 살피는 일은 세계의 문화와 역사를 살피는 일이 되기도 하는데, 한 나라를 중심에 놓고 살펴보면 좀더 구체적으로 음식이 어떠한 경로를 거쳐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를 알게 된다.


이 책은 일본의 역사를 중심으로 일본 음식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 음식들이 많이 나와 친숙하기도 하고, 책을 읽다보면 우리나라 역사와 일본 역사가 겹치는 부분이 많음도 알게 된다.


지정학적으로 이웃 나라인 일본과 우리가 엮이지 않을 수 없었을 테고, 여기에 중국까지 합치면 이 삼국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문화 교류를 이 책을 통해서 만나게 된다. 여기에 일본은 서양 여러 나라와 교류도 했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서 다른 문화, 음식을 받아들이게 되기도 했고.


우선 문명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 음식은 제철 음식, 지역 음식일 수밖에 없다. 수렵, 채집이 중심이 되는 음식문화가 형성될 수밖에 없는데... 일본 역시 마찬가지다. 수렵, 채취 문화에서 정착 생활로 들어가면서 일본에서도 쌀을 중심으로 하는 음식문화가 만들어지고... 여기에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을 중심으로 음식 문화를 이룬다.


그러다 이제 다른 나라들과 교류를 하기 시작한다. 특히 문명이 발달한 나라와의 교류를 통해서 다른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이 먹는 음식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똑같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살아온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문화에 맞게 변용해서 받아들이는 것, 일본 역시 마찬가지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된장은 우리와는 좀 다르게 미소된장이 중심이 되고, 또 서양에서 받아들인 빵이나 비스킷도 일본의 문화에 맞게 변용된다.


젓가락 문화가 일본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라는 것도 새삼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여기에 일본에서는 불교가 자리를 잡으면서 육식을 금지하는 시대가 길어졌고, 따라서 고기 문화가 그다지 발전하지 못해, 고기를 통하지 않고 영양소를 흡수하기 위한 음식문화가 발달했다는 것.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에 육고기를 금지했으니 물고기를 이용한 음식 문화가 발달했으며, 육지에서 교류하기 위해서 부패를 막기 위한 방법이 개발되었다는 것, 그러다 근대화가 되면서 서양식이 들어오게 되지만, 그것 역시 일본의 문화에 맞게 변용이 되었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즉 역사를 통해서 보면 한 나라의 음식 문화를 그 나라에 국한되지 않는다. 세계와 연결이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랑하는 김치만 해도 그렇다. 김치의 중심 재료인 배추나 고추 역시 세계와 교류하면서 들어오게 된 것 아닌가. 


이 점을 생각하면 원산지가 어디냐로 그 음식의 근원을 이야기하고, 자신들의 음식문화라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다. 원산지를 넘어 음식은 교류를 통해 다양한 나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어떠한 음식이든 그 나라의 고유한 음식문화라고 해야 한다. 다른 나라의 음식문화를 자기들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음식문화의 교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이 책은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한 나라의 음식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 나라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 속 문화교류를 공부한다는 말이 된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는 한국의 역할(삼국시대부터 조선까지)을 무시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 좋다. 자국 중심주의에 빠져 다른 나라에서 받아들인 것들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의 저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다만 저자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 시대에 많은 조선 사람들이 일본으로 이주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불행한 일이다'(252쪽)고 하고 있는데, 이보다는 일본이 잘못한 일이라고 했어야 한다. 불행이라는 말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반성하지 않고 조선인에게 일어난 일이 유감이라는 표현밖에 안 되기 때문... 그 점은 아쉽지만...)


이렇듯 이 책은 문화의 교류를 자료를 통해서 서술하고 있으며, 그것이 긍정적이다 부정적이다 하지 않고 일본의 특성에 맞게 어떻게 바뀌어 수용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가령 이런 구절을 보자. '고기가 일본의 음식문화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은 재일조선인과 한국인이 시작한 야키니쿠다.'(251쪽) 


육식문화, 특히 고기를 굽는 음식문화가 자리를 잡은 것에 한국인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으니.


이렇게 이 책은 일본 역사를 통해서 일본 음식이 어떠한 변화를 겪었는지, 어떤 음식들이 등장했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어서 일본의 음식문화에 대한 전체적인 개괄을 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면서 저자는 세계화 시대의 음식문화가 지닌 위험성도 이야기한다. 자국의 음식문화의 재료를 무역에만 의존했을 때, 다른 말로 하면 식량자급률이 많이 떨어졌을 때 생길 수 있는 위험을 간과하지 말하야 한다고...


일본의 식재료 자급률이 약 40%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약 20% 내외라고 하니 저자의 경고가 일본에만 해당하지는 않을 테다. 하여 저자의 이 말은 우리에게도 해당이 되니 이 말을 명심했으면 한다.


'식재료를 단순히 가격이 싸다, 비싸다는 기준만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식재료가 만들어진 과정을 고려한 복잡한 '음식'의 시스템을 떠올리는 것이 중요해진다. '지산지소(지역생산, 지역소비)도 그러한 대처법의 하나가 될 것이다. 식탁은 농업, 수산업, 축산업과 직결되고, 식탁이 농업, 수산업, 축산업을 키운다.'(261쪽)


이 책을 읽고 난 뒤 내 식탁도 생각하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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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된 이상 포항으로 간다
정보라.최의택 지음 / 요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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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내 뜻과 무관하게 당하는 사고. 그 사고를 해결하기 위한 포항가는 길에서 두 사람이 겪는 우여곡절. 그런 우여곡절 속에 관계를 맺어가는 존재가 바로 우리가 아닌가 합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듯 속도감 있게 읽히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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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를 부탁해 소설x만화 : 보이는 이야기
박서련 지음, 정영롱 만화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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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 제사. 엄격한 형식을 고수한다면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일. 부모의 제사만이 아니라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까지 4대를 제사 지낸다는 종가집 맏며느리.


잊을 만하면 제사가 돌아오지 않을까? 부모의 제사를 함께 모셔도 명절 두 번에 네 번의 제사가 되는데, 부모를 따로 모시면 명절 두 번에 여덟 번의 제사. 그러면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제사를 지내야 한다. 이때는 잊을 만한 시간도 없다.


간소하게 지내면 괜찮겠지만 어디 그런가? 특히 종갓집에서는 더 심하다. 집안 사람들이 모두 모여 콩 심어라 팥 심어라 한다면 제사를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못 견딜 일이 된다. 얼마나 부담이 많이 되면 제사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곤 할까?


하지만 제사가 지니는 긍정적인 역할도 있다.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 또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이러한 것이 제사라고 한다면 형식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다.


살아 생전 본인이 좋아하던 음식 중심으로, 또 현대인의 생활에 맞게 시간도 조정하고 한다면 제사를 고인에 대한 애도 표현으로, 즉 고인에 대한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하는 시간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의 부담이 아니라 고인과 관계 맺었던 사람들이 고인과 자신들의 마음을 잇는 시간으로 제사를 활용한다면 좋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도 제사는 여전히 힘든 일이다. 


이 작품은 그러한 제사를 대행하는 사람이 나온다. 집안일을 대행하듯이, 제사 역시 집안일 중 하나니까 대행을 할 수 있다. 주관하는 사람이 따로 있을 뿐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니까.


그런 설정, 지금 제사 대행업이 있는 줄은 모르겠는데, 음식은 해주는 업체가 있는 줄 알고 있지만 직접 절까지는 아닐 테지만, 소설에서는 절까지도 하는 대행업을 하고 있다. 하긴 중요한 것이 마음이라고 한다면야 뭐.


부정적인 생각을 지닌 사람이 있겠지만, 제사가 점점 없어지는 추세고, 이런 추세 속에서 가족들이 애도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제사 대행업체를 통해 제사를 지내는 일도 생길 수 있겠다.


아이들 돌잔치, 부모님들 회갑잔치(요즘은 거의 하지 않지만 더 연세가 드시면 잔치를 하는 경우도 있으니.. 팔순 또는 구순 잔치 등)와 각종 상조회를 보라. 많은 집안일이 대행으로 바뀌었지 않은가. 그러니 제사 역시 그렇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으니, 이 작품을 읽으면서 그리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마음을 다해 제사를 치러주는 인물을 통해서 결국 제사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마음을 잇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앞부분이 '둘이 먹다 하나가'라는 박서련이 쓴 소설이고, 뒷부분이 '죽어도 모르는'이라는 정영롱이 그린 만화다. 소설은 제사 대행업을 하는 수현의 관점에서, 만화는 죽은 정서(이름을 바꾸기 전에는 영란)의 관점에서 전개가 된다. (소설에 나오는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는 속담에서 제목을 따왔다고 한다)


같은 사건을 다른 두 화자가 서술하고 (보여주고) 있는데, 소설도 소설로 읽어도 좋고, 만화도 만화로만 봐도 좋다. 두 작품을 함께 보면 더욱 좋고. 물론 책의 순서대로 소설부터 읽어야 한다. 수현이 정서의 집으로 가고, 제사상을 차리는 장면까지가 소설이니까. 그 다음 부분이 만화에서 더 이어지니.


두 작가의 작업이 이렇게 잘 맞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소설과 만화가 잘 연결이 된다. 그러면서 마음을 여는 장면을 만나면서 감동을 받게 된다. 제사 역시 그렇다. 제도와 형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애도하는 마음, 즉 마음을 잇는 일이라는 점을 소설과 만화가 잘 보여주고 있다.


하여 작품은 제사의 문제점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의 마음, 죽은 사람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는 일, 그것은 또 산 사람들의 마음과도 잇는 일임을 생각하게 된다. 애도하고 추모하는 방식으로서의 제사를 생각하게 되고, 그것을 대행업체에 맡기든 본인들이 직접 하든지 간에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제사가 되도록, 산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는 제사가 아니라 산 사람들의 마음도 풀어주는, 그래서 죽은 사람의 마음이 당연히 풀리는 그러한 마음과 마음의 만남이 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책에서 더 좋은 것은 소설가와 만화가, 그리고 편집자가 이 작품을 위해서 주고받은 내용들이 실려 있다는 점이다. '창작일지'라는 이름으로. 그것 역시 좋았다. 이런 식으로 작품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이.


짧지만 긴 울림을 주는 소설과 만화다. 좋았다. 이런 작품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이 작품집 중 소설에 나오는 한 부분을 인용한다. 진정한 제사란 바로 이런 것. 화려하고 형식, 규격에 맞는 제사가 아니라. 하, 이런 제사. 누가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제사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제사상 앞에 이부자리를 편 부부의 이야기다. 부부는 해도 지지 않은 초저녁에 상을 차리고 제사상을 받으실 시어미니 묘까지 산보를 다녀온다. 돌아온 후에는 상 앞에 자리를 갈고 잠깐 누웠다 다시 어머니 묘에 간다. 그렇게 날이 저물기도 전에 제사가 끝난다. 어느 해에 제사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유식한 학자가 그 집 앞을 우연히 지나다 부부를 보고 무슨 짓이냐고 묻는다. 남편은 대답한다. 어머니가 늘 말씀하신 소원이, 내가 금슬 좋은 부부 사이를 이루는 것이었으니 아내와 사이좋게 누워 있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마땅하고, 어머니는 눈이 어두워 밤길을 다니지 못하시니 모시러 갔다 다시 모셔다드리는 게 이치지요. 학자는 그들의 제사야말로 가장 훌륭한 제사임을 인정하고 만다. 

  제사란 그런 것이다. 결국은 마음이 으뜸이고 형식은 거들 뿐.'(4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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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멸종 - 기술이 경험을 대체하는 시대, 인간은 계속 인간일 수 있을까
크리스틴 로젠 지음, 이영래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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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객전도(主客顚倒)'와 '운칠기삼(運七技三)'


우리가 좀더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개발한 기술이 오히려 우리를 종속시키고 있음을 개닫게 되는 순간, 우리는 기술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이미 개발된 기술, 그것을 없앨 수는 없다. 또한 기술은 이상하게도 인간이 주체적으로 개발했지만, 한번 개발이 되면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인간을 객체의 지위로 떨어뜨린다. 기술이 계속 발전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그 기술에 문제가 있다고 퇴보하지는 않는다. 특히 인간의 편리를 증진시킨다면 더더욱.


현대 우리는 인공지능 시대에 살고 있다. 인공지능을 개발한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우리 인간의 삶을 보조하기 위해서 일 텐데... 오히려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이 지금 현실 아닌가.


현대 기술을 대표하는 것이 스마트폰이라고 하자.(인공지능은 지금 논외로 하고) 그런 스마트폰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많다. 특정 연령 때까지는 금지한다는 법안을 제출한 나라도 있다. 우리나라도 학교에서는 스마트폰을 금지한다는 법을 제정한다고 하니까.


(제정이 되었나? 내년부터 학교에서 실시한다는 말이 있으니...그런데 학교에서 스마트폰 사용을 금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수업 중에 사용을 금지한다는 것 아닌가. 이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수업 중이 아닌 다른 시간에는 사용해도 된다는 말인지.. 아니면 학교에 등교하면 하교할 때까지 스마트폰을 쓸 수 없다는 말인지. 학교에 따라 교칙을 정해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스마트폰이 학생들에게 문제라면 성인들에게는 무엇이 문제일까? 그것은 바로 시도때도 없이 연결되는 현실 때문 아닌가. 자신이 있는 장소에서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들과 스마트폰으로 연결이 되는 것.


즉 장소성을 잃어버리고 대면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우리 육체의 물질성이 약화되는 것. 또한 자신이 있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고 스마트폰 속의 공간이, 만남이 중요해지는 것. 


이는 바로 관계의 악화로 나타나고, 어디서 언제든 스마트폰을 하고 있으면 그것 자체로 사람들과의 관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


이래저래 스마트폰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었는데... 이 스마트폰으로 경험하는 온갖 사이버 세상들을 스마트폰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킨다면,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대로 우리 인간의 경험을 없애는 데 스마트폰만큼 큰 역할을 하는 존재는 없다.


이것이 왜 문제인지를 7장에 걸쳐서 보여주고 있는데, 이미 우리가 심각하게 여기는 현상도 있어서 새삼스러운 주장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새삼스런 주장이 아님에도 우리는 스마트폰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마도 힘들 것이다. 그 세계가 주는 편리함이 바로 우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우리가 이제는 주체가 아니라 스마트폰으로 구현되는 기술의 세계가 주체인 것이다.


우리는 객체로 전락했다. 아니라고? 자신의 생활을 살펴보자. 운전을 하는 성인이라면 아마 내비게이션 없이 운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고, 하이패스를 장착하지 않은 차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빠름과 편리함. 최신 내비게이션으로 가장 빠른 길을 찾아 운전하는데, 그것을 누가 찾는가? 운전자? 아니다. 내비게이션이다. 내비게이션이 가라는 곳으로 간다. 주객전도다.


학생들은 스마트폰에 빠져 있다. 왜 학교에서 스마트폰을 금지해야 한다고 하겠는가. 스마트폰을 허용하는 학교의 쉬는 시간, 점심 시간의 모습을 보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스마트폰에 눈을 준 채 주변을 살피지 않는다.


운동장에서 노는 극소수의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이마저도 줄고 있는 현실인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게임을 하거나 사회적관계서비스망을 이용하고 있다. 게다가 학습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고민할 시간을 갖기 싫어한다. 검색하면 금방 나오니까. 굳이 외울 필요도 없다. 지식을 암기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기다림이 사라지고,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보다는 사회적관계서비스망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더 많이 연결되는 현실. 그런 현실에서 직접 몸으로 하는 경험은 줄어들거나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세계로 가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삶에서 만나는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서다. 불확실성, 우연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두렵게 한다. 그래서 없애야 할 것으로 인식하고 기술을 통해서 이를 없애려 한다.


하지만 삶은 우연의 연속이다. 삶을 가장 잘 대변하는 말이 '운칠기삼' 아닌가 한다. 우리가 계획한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30%정도라면, 우연히 맞닥뜨리게 되는 일들이 70%라는 것. 그 70%가 바로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도 있는데, 기술시대에 우리는 그런 70%의 우연을 아예 없애려고 한다. (운이라고 하지만 이 운은 우연이라고 할 수 있다.)


불확실한 삶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때로는 괴롭고 슬프고 힘들지만 그것들을 통해서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주변 존재들과 관계맺으면서 자신이 살아갈 길들을 조심스레 나아가게 된다. 


이런 불확실성을 다 없앴을 때 과연 우리의 삶이 행복해질까? 우연이 개입하지 않는 삶이,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어가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


이 책의 저자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기술이 우리를 객체의 자리로 밀어넣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바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더 견뎌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기술에 대해서 다른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하지만 저자가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희망사항이다. 기술을 통제할 수 없다면 기술의 문제점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없다. 그런데 기술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대안을 마련하려면 우리의 생활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편리와 빠름에 익숙해진 생활을 바꾸지 않으면 이러한 기술이 우리에게 주체로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래서 저자의 주장은 당연한 말이지만 그만큼 힘든 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는 기술을 기업들이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고, 빠름과 편리함에 익숙해진 사람들 역시 그러한 삶을 버리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인간의 미덕을 되찾고 가장 뿌리 깊은 인간의 경험을 멸종의 위기에서 구하려면 기술 예찬론자들이 제안하는 극단적인 변혁 프로젝트에 기꺼이 한계를 두어야 한다. 혁신을 억압하는 수단으로서의 한계가 아니라 우리가 공유하는 인간성에 대한 헌신으로서의 한계 말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육신이 있는, 기발하고 모순적이며 회복력 있고 창의적인 인간의 모습 그대로 자유롭게 살 수 있다.'(330-331쪽)는 말이 헛된 울림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의 생활을 되돌아봐야 한다.


거대한 기술관련 기업들에, 그러한 기업들을 지원하는 정부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정부와 기업에 압력을 넣을 수 있는 인간들의 관계가 먼저 확립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음은 이미 역사가 보여주고 있으니... 참.


우리의 삶이 '운칠기삼'이라는 것, 그래서 기술이 우리의 주체가 되는 '주객전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이와 같은 책을 학교에서부터 읽고 토론하게 하면 어떨까? 아래에서부터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니까...기후재앙에 대한 대응을 촉구하는 청소년들의 움직임 일어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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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2-19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질의 작품을 읽으면서 놀라운게....20세기 초에 이미 무질은 경혐의 종말을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리뷰를 보니 그제 본 내용이 떠오르네요..ㅎㅎ

kinye91 2025-12-19 13:56   좋아요 0 | URL
네, 그렇게 좋은 작가는 시대를 반영하기도, 시대를 앞서가기도 하는 것 같아요.
 
남자들의 방 - 남자-되기, 유흥업소, 아가씨노동
황유나 지음 / 오월의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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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상품으로 대하는 태도, 자신이 돈을 지불했으니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 이것은 인권에 위배되는 생각과 행동이다.


사람은 상품이 아니다. 물론 자신의 노동력을 상픔으로 판매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노동자들도 자신을 상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유독 사람을 상품으로 여기는 분야가 있다. 바로 유흥업소다. 요즘은 남녀 불문하고 상품으로 취급한다고 하지만 (호스트 바 같은 경우?), 그럼에도 여성은 더 상품처럼 대우받는다. 그래도 된다는 듯이. 


유흥업소를 찾는 대다수의 사람이 남성이고, 유흥업소에서 이들을 접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여성이라는 현실. 여기에 충격적인 것은 우리나라 법이다. 아직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즐기는 사람들이 남성이고, 그들을 즐겁게 해줘야 하는 사람들이 여성이라는 인식이 법에 남아 있다고 생각하니 씁쓸하다.


'식품위생법 시행령 제22조 제1항'에 보면 '유흥종사자란 손님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노래 또는 춤으로 손님의 유흥을 돋우는 부녀자인 유흥접객원을 말한다.'고 되어 있다.


유흥종사자가 '부녀자'로 법에 명시되어 있다. 여성이 유흥종사자란 말이다. 남성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우습지 않은가. 사람이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 술을 마시거나 노래 또는 춤을 추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어찌 여성이어야만 하는지.


법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으니 이도 문제지만 단순히 법을 넘어서 사회적인 인식이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가부장제가 오랫동안 지속된 우리 사회의 모습이기도 한데... 물론 저자가 지적하듯이 '부녀자'를 '사람'으로 바뀐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이 법에 나온 문구는 바뀌어야만 한다.


이 책은 유흥업소 종사자들의 생활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들이 어떠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그들을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한 상품으로 여기는 남성들의 모습, 그러한 모습을 '남자들의 방'이라는 제목으로 다루고 있다.


'남자의 방'이 아니라 복수형인 '남자들의 방'이라고 한 이유는, 어떤 특정한 남성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라는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구조적으로 '남자들'의 사고와 행동이 고착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래서 이러한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순히 법 개정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법은 빠져나갈 구멍이 늘 있기 마련이니까.


하여 남성 여성 구분없이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데, 이 당연한 말이 쉽지 않음은 저자 역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기업의 접대비 손금계산에 유흥업소에서의 접대비를 불포함한다거나, 경찰이나 검사를 대상으로 한 유흥업소 접대는 성매매 유무와 상관없이 뇌물로 강도 높게 처벌하는 방법은 고려해볼 법하다'(219-220쪽)고 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유흥업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고, 이러한 업종이 계속 살아남는 이유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 제도의 문제임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남자다움에 대해서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도 포함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바로 '남자다움'이 '남자 되기'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은 그런 일이 없겠지만 -없어야하겠지만- 예전에는 남자들이 군대에 가기 전에 집단적으로 성매매를 하던 일들이 그런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어쩌면 남자들도 남자다움 또는 남자되기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책이 바로 [맨박스]란 책이었는데, 이 책과 연결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저자 역시 '남성 만들기는 타자로서의 여성 없이는 불가능하다'(52쪽)고 하고 있으니... 여성들을 타자화하고 그들을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한 수단, 상품으로 삼음으로써 만들어지는 남자 되기 또는 남자다움이란 바로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말한 내용에서 여성을 남성으로 바꾸어도 통하지 않을까 한다.


'사람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여자가 되는 것이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 조홍식 옮김. 을유문화사. 1988년 중판.  326쪽 프랑스어 원문은 이렇다고 한다. “On ne naît pas femme: on le devient.”)


  다양한 종류의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공통점은 이들이 남성의 즐거움을 위해서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것. 여기에 그들의 인권은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고 상품으로 취급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일은 성별을 불문하고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남자들의 방 따위는 필요 없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방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하여 저자가 말한 바와 같이 '종속적인 (성별) 권력관계와 이를 합리화하는 경제논리'(220쪽)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별과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인간이라는 점에서 존중받아야 하고, 칸트의 말처럼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


하여 '유흥산업을 비롯한 성매매산업은 여성을 멸시하고 혐오하는 행위가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평범하게 여겨지는 특정한 장소이고, 그 특정한 장소가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린 게 한국 사회다.'(223쪽)는 말이 나올 수 없게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세상 아니겠는가. 


이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남자다움, 여자다움' 또는 '남자 되기, 여자 되기'가 아니라 '사람다움, 사람 되기'가 아닐까 한다. 


성별이 사람의 삶에 권력 관계로 들어서지 않도록 해야함을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계속 경험해 오지 않았던가. 


이 책은 이렇게 남성들의 유흥을 위해 상품이 된 여성들의 삶을 조망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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