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집을 고른 것은 착각에서 비롯되었다. 한승태라는 이름 때문. 한승태라는 작가를 만난 건 [퀴닝], [어떤 동사의 멸종]이었다. 노동 현장을 직접 경험하면서 쓴 글들.


  우리나라 노동 현장이 얼마나 열악한지, 또한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책이었기에, 한승태라는 이름을 보고는 아, 그 작가가 시도 썼구나 하는 착각을 한 것.


  그런데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 읽다 보니 시 내용 중에 나이 오십이란 말이 가끔 나온다. 시와 시인을 일치시키면 안 된다지만, 시에서 시인은 자신을 드러내는 경우가 꽤 있으니, 이 경우 분명 시인의 나이는 오십 즈음일 텐데... 앞서 말한 한승태는 이보다는 한참 젊은 나이니... 이런 우연이. 어떻게 같은 이름을 가진 작가가 비슷한 시기에 책을 내지. 참...


그럼에도 이 시집을 읽으면서 다른 한승태의 작품도 떠올랐으니... 공동체라는 말,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아니겠는가. 그 사회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또 그런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이 시집을 통해서 알 수 있으니...


여기에 '피라미드' 같은 시는 다단계 노동의 모습을,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유리하게 해석하는, 공동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모습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우리 현실 아닌가.


권력자들의 모습, 발뺌하는 그들의 모습, 그것도 자식의 안위를 위해서는 어떻게든 빠져나가려는 모습을 뉴스에서 심심치 않게 보아 왔는데, '단단해지는 것들'이란 시에서 만나게 되니... 이런 나쁜 것들이라는 상스러운 말이 절로 나오게 하는 시이기도 하고.


하지만 역시 힘 있는 자들은 어떻게든 빠져나갈 길을 마련한 것이 우리 현실이었으니, 공동체는 고독을 느끼기보다는 연대를 느껴야 하는데, 고독한 자의 공동체라고 한 것은, 공동체에서 객체로 존재하는 우리 현대인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그러나 '아전, 인수의 나라'라는 시를 읽으면서는 이런, 시대를 관통해서 이런 사람들이 꼭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이런 사람들이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


아전인수(我田引水),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로운 쪽으로 해석을 하고 행동을 하지만, 그것이 힘 있는 자들이 일상적으로 행했을 때, 그 사회 공동체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데... 지금도 이 시에서 한 말이 유효하다면, 그렇게 되지 않게 해야겠지.


시인이 이런 시를 쓴 것은 단지 보여주기만이 아닐 테니까. 자, 봐라, 이것이 문제다. 문제가 보이니 이제 해결할 차례다. 그것 아닌가. 그래야 공동체가 살지 않는가.


시를 읽자. 그리고 이 시에 나오는 사람, 집단을 생각해 보자. 과연 바람직한가. 이 사람들이 공동체에서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사회의 운명도 달라지지 않을까.


아전, 인수의 나라


  실록에는 고려가 망하고 세종 때까지도 백성 중 자신이 고려의 신민臣民이라 여기는 자들이 여럿이라는 한탄이 보인다 임란 이후 명明을 호란 이후 청淸을 부모로 여기고 그의 신민이 되고자 하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조선이 망하고 일본 식민지가 되어서도 인민人民은 일부가 일본 신민이었을 뿐 나머지는 조선 신민이라 여겼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에 패한 일본이 조선에서 쫓겨나고 상해 임시정부는 국토와 인민 주권을 되찾았어도 자신이 일본 신민이라 여기는 자는 여전히 남았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을 부모로 여기고 그의 신민이 되고자 열심인 자도 여럿이다


한승태, 고독한 자의 공동체, 걷는 사람. 2023년. 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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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을 읽다가 왜 시인이 이런 말을 하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검색을 해보니 시인이 병으로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랬구나, 그래서 이런 말이 나왔구나. 병으로 고생을 한 것이 이 시집에 영향을 주기도 했겠구나 하는 생각.


 '서른살 무렵,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카프카가 죽은 나이까지는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런데 하느님은 내 소원을 잘못 알아들으신 것 같다. 카프카가 쓴 것처럼 쓸 수 있을 때까지 살게 해달라는 이야기로. 그리하여 나는 그 누구보다 오래 살고, 어쩌면 영원히 살게 될지도 모른다.'('시인의 말'에서. 114쪽) 


  하아, 이렇게 해서 또 카프카를 만나는구나. 시집에 실린 시 중에 '단식하는 광대'라는 시가 있는데, 이 제목을 보는 순간, 카프카의 '단식 광대'가 떠올랐으니... 


카프카가 쓴 것처럼 쓸 수 있을 때까지라는 말, 카프카 작품은 대부분 미완성이다. 과정이다. 그러니 시인은 영원히 살게 될지 모른다고 했는지도. 이는 자신의 작품을 딱 떨어지게 완결하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는 상태로 놓아두겠다는 것.


시인은 고정된 무언가를 사람들에게 전달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미정형을 정형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고 싶다는 바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시집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현실에 마음 아파하는 시들도 꽤 있으니, 현실을 생각하면서 읽어도 좋다. 그러다 이 시 '어떤 보병'을 읽으며 시인의 모습이 바로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으니...


  어떤 보병


글자들의 사막을 지나

도시들의 시궁창을 지나

별과 얼음 녹은 진창길을 지나


  여름

    가을


너덜거리고 찢어진 마음의 끝단이

어느 검고 부드러운 가죽 장화 속으로

몰래 

기어들어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벗기 싫어

밤새 알지 못하는 어느 주홍빛 막사 앞에서

나는 보초를 섰습니다


흠뻑 젖은 외투 위로

가벼운 밤눈이 또다시 내리고 있습니다


진은영, 훔쳐가는 노래, 창비. 특별한정판 1쇄. 2023년. 57쪽.


시인은 이렇게 보초를 서는 존재. 너덜거리고 찢어진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과 함께 하는 존재. 그러한 존재인 시인은 세상을 가장 낮은 곳에서 본다. 더 이상 낮출 수 없는 곳까지 자신의 눈을 낮춰 이제 그 눈으로 세상을 본다.


하여 시인의 눈은 높고 크고 아름다운 것들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낮고 작고 아름답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존재들도 본다. 그 존재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모두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훔쳐가지 못하게 지키는 보초가 된다. 자신은 흠뻑 젖을지라도...


이 시를 읽고 'Bucket List -시인 김남주가 김진숙에게'를 읽으면, 마음 한 켠이 아려온다. 가장 낮은 곳에서 보는 눈을 가진 시인이 높은 곳에 올라 있는 김진숙을 본다. 그 거리를 메울 수 있다면, 시인은 기꺼이 그를 지키는 보초가 되리라. 그래서 시인 김남주를 통해 김진숙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고.


많은 시들이 가슴에 와닿았는데... 좋다. 시인의 건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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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읽으며 시는 은유구나 한다. 하나의 존재를 다른 하나로 연결하는 언어. 누구나 볼 수 있는 연결이 아니라, 도대체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나를 고민하면서 찾아야 하는 연결. 은유.


  시는 아주 먼 은유다.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들을 거쳐 표현하고자 하는 마지막 존재까지 이른 상태. 그 과정을 시인은 알고 있겠지만, 독자는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는 어렵다. 중간이 생략되어 있고, 이 생략된 중간을 잇고, 그것들이 연결되는 지점들을 찾아야 한다. 그것도 시인의 언어와는 다른 독자의 언어로.


  이 시집에는 '직유법'(30-31쪽)이라는 시가 있다. 직유법이면 이해하기 쉽다. 왜냐하면 직유는 말 그대로 직접 비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유는 한 존재의 속성을 드러내 준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이 '당신같이 당신처럼 당신인 듯이'인데 뒷말이 생략되어 있다. 직유는 바로 이 뒷말이 있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그림자처럼 어두워졌다 / 비 맞는 벤치같이 나는 하릴없어서 / 멀리 당신을 등대처럼 놓아주었다 / 물수제비같이 떠가는 것을 보며 / 미아처럼 나는 하릴 없이'처럼 풀이하는 말이 있다. 꾸며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시인은 이러한 직유법을 잘 쓰지 않는다. 직유법을 쓸 때도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서 쓴다. 그래서 이 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뒷말을 감춘다. 


이러니 시는 직유라기보다는 은유다. 감추어져 있다. 직유는 은유로 가는 징검다리다. 너무 멀어서 도저히 건널 수 없다면 사람들이 건널 생각을 하지 않을 테니. 직유라는 징검돌을 중간 중간에 놓는다. 그렇다고 징검돌들이 너무 가까이 있지는 않다. 편하게 간다면 은유가 아니다.


다시 이 시집의 제목을 보자. '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다.


아름답다는 말이 통하려면 두 존재가 있어야 한다. 아름다운 존재와 그것을 보는 존재. 그런데 여기서 '혼자'라고 하면 하나가 된다. 아름다움은 분리가 아니다. 하여 '혼자와 더불어 나는 혼자였다'('살아 있는 무대' 중에서. 69쪽)고 표현하고 있다. 은유는 이미 많은 것들을 품고 있는 혼자다.


아름다웠던 사람이 혼자고, 혼자는 나다. 그러므로 나는 아름답다. 홀로 존재하는 것, 이것은 저마다의 개성, 특성을 지니고, 그러한 아름다움은 비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 혼자는 이미 아름다움을 체현하고 있는 존재이고, 이런 아름다운 존재가 살아가는 세상이 무대가 된다. 결국 우리는 무대 위에서 삶을 연기하고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연기하는 혼자들, 그것이 바로 인간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데...


은유다. 직유가 아니라. 이 '혼자'라는 말에서 많은 것을 찾아내야 한다. 아니,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야 한다. 시인이 감추어두었던 많은 연결고리들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지점과 저 지점을 잇는 존재들은 시인이 알고 있는 것 말고도 많다. 그것들을 만들어내는 것. 시인이 찾아내지 못한 것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시를 읽는 독자들이 할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아름다운 혼자고, 자신의 삶을 연출해야 한다. 시인이 '걸어나갔다 나의 보폭으로 // 살아 있는 무대의 / 빛 속으로'('살아 있는 무대' 중에서. 70쪽)라고 표현한 것이 바로 이것 아닐까.


그래서 시는 은유다. 감춰져 있는 의미를 찾는 일. 만들어내는 일. 그러한 일을 하는 작업. 때로는 즐겁지만 고통스러운 활동. 시를 읽는 일. 이현호 시집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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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 기후위기, 기술봉건주의


  이번 호에서 핵심으로 삼을 수 있는 말이다.


  핵은 민주주의에 반한다. 핵 자체가 거대 자본과 결합될 수밖에 없으며, 다른 곳을 희생으로 삼기 때문이다. 핵발전소가 건설된 곳을 보라. 핵발전소가 안전하다고 주장하면서도 도심에는 짓지 않는다. 


  도심에서 먼 곳에 핵발전소를 짓고, 전기를 공급하느라 먼 거리를 송전선로를 건설한다. 무엇보다도 핵발전에 관해서 시민들이 관여할 수 있는 길이 별로 없다. 그러니 민주주의와 먼 것이 바로 핵발전이다.


체르노빌,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같은 사고를 겪었으면서도 다시 핵개발을 들고 나오고 있다. 비용이 저렴하다고? 세상에 핵폐기물을 처리하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러한 에너지 정책에도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하고,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기후위기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여러 정책들과 기후위기가 겹쳐 있기 때문인데, 반민주적일수록 기후 정책에 관심이 없다. 미래를 끌어 현재에서 소비해버리고 만다. 그런 점을 이번 호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 '기술봉건주의'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났다. 봉건주의는 이미 지나간 시대라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영주로 등장한 것이 거대 플랫폼들과 아이티 기업들이라니... 그들이 영주가 되고 거기에 종사하는 기술자들은 기사가 되고, 그럼 시민들은? 자칫하면 농노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


열심히 소비하고 생산하지만 결국 이윤은 몇몇 소수에게 돌아가고, 오히려 청소년들의 정신적 위기가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관점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녹색평론이 주장하는 것에 경청해야 한다. 지금 닥친 위기들이 갑자기 나타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경고해왔던 일들 아닌가. 그러한 경고에 눈 감고 발전, 성장만을 외친 결과가 양극화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냥 근본적인, 너무 급진적인 주장이라고 치부하지 말고, 왜 이런 주장을 녹색평론이 하는지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더 나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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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로 속에 들어간 기분. 앞으로 나아가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앞에 보이는 대로 갈 뿐이지만, 제대로 가고 있는지, 결국 나갈 수는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오른쪽으로만 돌면 결국 출구가 나온다고 하던데... 시집에는 이러한 오른쪽이 없다. 오른쪽이라고 생각하면 왼쪽이 되고, 왼쪽인가 싶으면 오른쪽이다. 이런 끝없이 헤맬 수밖에 없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출구가 보이련만, 미로가 훤히 밝혀지련만, 미로를 내려다볼 위는 없다. 오로지 미로 속에 있을 뿐이다. 미로 밖은 보이지 않는다.


  내 눈 높이보다 높은 미로들, 내 이해 범위를 벗어난 시어들. 시들. 그러한 시를 쓴 시인(들)


이해하길 포기하고 그냥 간다. 언젠가는 나가겠지. 나가더라도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 없다. 논리로, 한 단계 한 단계를 밟으며, 기억하며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 


이래서 시집은 미로다. 시라는 미로 속에 우리를 들여보낸다. 그리고 출구를 찾으라고 한다. 하, 갑자기 다이달로스가 생각났다. 그는 미궁을 만들었다. 그런데 자신이 미궁에 갇혔다. 미궁 밖으로 만든 사람은 나갈 수 있을까?


그가 갇힐 때 아리아드네의 실을 준비하지 못했을 텐데... 하지만 다이달로스는 미궁을 만든 사람. 탈출할 방법은 하늘을 나는 것. 그는 새의 깃털을 모아 날개를 만들어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이렇게 미궁은 아리아드네 미로 속에 들어간 기분. 앞으로 나아가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앞에 보이는 대로 갈 뿐이지만, 제대로 가고 있는지, 결국 나갈 수는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시인을 다이달로스라고 하더라도 시인 자신도 시집이라는 미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시인이 아리아드네의 실을 쥐고 있다면 모를까, 시인은 시를 쓰자마자 아리아드네의 실을 잃었을 테니. 시인 역시 시집이라는 미궁에 갇힌 존재가 아닐까. 아무리 시인 자신이 다이달로스라고 말한다 해도, 시인은 다이달로스처럼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수 없다.


시인이 다이달로스라고 해도 미궁에 갇힌다면 이 시집을 읽는 나는? 당연히 미궁 속에서 헤맨다. 헤매다 헤매다 그럼에도 계속 헤맨다. 오른쪽으로 찾으려고,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으려고 애쓴다.


애쓰면서 그렇게 시집의 끝에 다다른다. 시집의 끝. 출구인가? 아니다. 여전히 미궁 속이다. 에라, 이런... 황혜경 시집은 이렇게 나에게는 미궁이 된다. 나는 여전히 미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러다 이 시집 제목을 생각한다.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어떻게? 과거가 되는 길이 바로 쓰는 것 아닐까 한다.


어떤 특검이 사초 쓰는 자세로 수사를 하겠다고 했다. 사초(史草) 역사의 기록이다. 쓰는 행위다. 그런데 사초는 현재가 아니다. 쓴다가 현재지만 이미 쓴다에는 과거가 포함되어 있다. 쓰는 행위는 과거로 가는 행위다. 적극적으로 과거로 가서 현재에 남겨 놓는다는 의미다.


결국 쓰는 것은 과거로 가서 과거를 현재로 끌어온다는 의미다. 사라질 것들, 잊혀질 것들을 붙들어 놓는 행위. 이것이 쓴다는 행위다. 쓰면 보게 된다. 언젠가는 보겠지. 황혜경이 쓴 이 시집의 출구를... '목도(目睹)'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을 기억하려 한다. 그 구절을 쓴다. 보기 위해서.


이렇게 쓰기는 보기다. 그리고 쓰기는 아리아드네의 실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래 걸릴 수는 있지만.


'두 눈을 뜨고도 분별하지 못하던 것들이 보이는 때가 오고 있다

눈여겨보려고 한다'


황혜경,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문학과지성사. 2018년 초판 2쇄. '목도' 중에서.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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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5-07-05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같은 표현도 맥락에 따라 현저히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새삼 절감합니다. 과거에 얽매이는 것과 과거에는 분별하지 못한 것을 드디어 보기에 과거를 ˝눈여겨 보는 것˝과는 하늘과 땅차이겠죠~~~. 멋진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좀 난해한 시집같다는 느낌은 들지만 사유에서 배울 게 있어 보여요~~많은 시들이 그렇지만요

kinye91 2025-07-06 08:27   좋아요 0 | URL
저에게 시는 미로 속을 헤매는 기분을 느끼게 해줘요. 무언가 명확하지는 않는데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게 해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미로를 나오듯이, 시를 이해하는 순간이 오겠지 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