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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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가지고는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소설이다. '일곱 해의 마지막'이라니... 그런데 책을 넘기면 처음에 시인 백석에 대한 소개가 나온다. [문장] 1940년 1월호에 발표된 백석 소개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장을 넘기면 소설이 시작하는 '1957년과 1958년 사이'라는 제목이 나오고, 그 밑에 한 편의 시가 인용되어 있다.


  백석이 쓴 시란다. 일부분이다. 그런데 처음 듣는 제목이다. 아마도 나중에 발간된 전집에는 수록이 되었겠지만, 내가 갖고 있는 백석 전집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석탄이 하는 말'이란다. 


  '우리 빨갛게 타련다 / 일곱 해의 첫해에도 / 일곱 해의 마지막 해에도'(9쪽)


 이 시에서 제목을 따왔다. 제목에 대한 뜻은 잘 모르겠지만, 소설은 1957년부터 1959년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멀리 삼수로 발령이 난 백석. 그곳에서 노동을 해야 하는 백석. 그러나 소설은 백석이 좌절하면서 시와 멀어지고, 결국 시를 버리는 쪽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북쪽에서 백석은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하는 시와 그들이 생각하는 시가 달랐기 때문이다. 이런 장면을 작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새로운 사회주의 공화국의 시들이 건설되고 있었다. 새로운 시들은 공장에서 미리 제작한 벽체를 올려 아파트를 건설하듯이 한정된 단어와 판에 박힌 표현만으로 쓰였다.'(162쪽)


시는 이래서는 안 된다. 특히 백석이 생각하는 시는 이것이 아니다. 그러니 그는 시를 쓸 수가 없다. 안 쓰는 것이 아니라 못 쓰는 것이다. 그가 쓰는 시는 그쪽에서는 시가 아니다. 개인의 푸념에 불과하다. 서정은 사치다. 아니 반동이다. 그러니 백석은 이제 시를 쓸 수가 없다. 


가장 개인적이고 자유로와야 할 예술가들조차도 하나의 틀에 갇힌 작품활동을 해야 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에서 문학은 살아남을 수가 없다.


'수령이 문학에서 낡은 사상 잔재를 반대하는 투쟁에 나서라고 교시를 내린 뒤, 전국의 도서관과 도서실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이 소장중인 책들 가운데 반당 반혁명 작가의 책들을 회수해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거기서 불타는 한 권 한 권은 저마다 하나의 세계였다. 당연히 서로의 주장이 엇갈리고, 지향점은 다르고, 문체는 제각각이다. 그렇게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고, 현실은 그 무수한 세계가 결합된 곳이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고, 또 추악한 세계가 있다. 협잡이 판치는 세계가 있고, 단아하고 성실한 세계가 있다. 어떤 세계는 지옥에, 또 어떤 세계는 천국에 가깝다. 이 모든 세계가 모여 다채롭고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빛을 발하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 한 권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인 한 명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현실 전체가 몰락하는 것이다. ...언어와 문자는 언어와 문자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리얼리즘이란, 그런 언어와 문자가 스스로 실현되는 현실을 말한다.'(190-191쪽) 


이 표현을 보면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떠오르고, 나치의 퇴폐예술을 퇴치한답시고, 많은 예술작품을 태워버린 일이 떠오를 수 있다. 이런 일이 그 이후에도 일어나고 있었음을 김연수는 이렇게 백석을 통하여 직설적으로 비판한다. 문학은 자유로워야 한다. 어떤 형식으로든 문학은 간섭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니, 벗어날 수밖에 없다. 문학을 사상으로 옥죌수록 문학은 다른 언어들을 통하여 그 통제에서 벗어나려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당대에는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는가? 아니다. 소설에서 백석이 결코 포기하지 않았음을 삼수에서 아이들의 시를 읽고 감상평을 써 주는 장면을 통해서 보여준다.


미래세대들이 쓴 시를 보면서 백석은 자신의 시를 미래세대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래야 한다. 아무리 통제가 거세더라도, 통제는 언젠가 풀린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천불'이라는 말을 통해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문학을 통제하려던 모습을 '지불'이라고 한다면, 그런 통제를 한순간에 뒤집어 엎는 것이 바로 '천불'이다. 


이 천불이 현재의 모든 것을 태워버리겠지만, 그 자리에서 다시 새로운 것이 태어난다. 그렇게 문학은 전복을 꿈꾼다.


문학을 묻어두려해도 문학은 천불을 통해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된다. 백석은 한때 남과 북에서 모두 잊힌 시인이었지만, 지금 적어도 남한에서는 시인들의 시인으로 불리고 있다. 그는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그의 시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이렇게 백석은 '천불'을 통해서 다시 우리에게 왔다. 아니, 그는 우리들의 문학이 다시 불타오를 수 있는 숯이 되었다. 그는 그런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석탄이 하는 말'을 통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소설 끝부분에 나타난 '지불과 천불'을 작가가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보자.


'화전민들이 개간하기 위해 피우는 불이 땅속 뿌리로 타들어가는 지불이라면, 그래서 석 달 열흘씩 하얀 연기를 뿜어내는 보이지 않는 불이라면, 천불은 저절로 생겨나 순식간에 숲 전체를 활활 태우며 나무들을 서 있는 숲으로 만든다고 했다. 그 불을 보고 두메의 화전민들은 생을 향한 어떤 뜨거움을, 어떤 느꺼움을 느낀다고 했다. 불탄 그 자리에서 새로운 살길이 열리는 것이기에.' (238쪽)


이렇게 쓰고보니, 문학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는 소설같지만, 그렇지 않다. 백석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백석의 과거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북쪽의 생활까지를 소설 속에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김연수가 쓴 [굳빠이, 이상]과는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백석에 대해서 관심있는 사람, 이 소설을 읽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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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샹보 거리
가브리엘 루아 지음, 이세진 옮김 / 이상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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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루아. 역시 애트우드 책을 읽다가 읽어야지 결심한 작가. 그렇게만 생각했다. 이 책을 펼치면서 작가 약력을 보기 전까지는.


이런 이런, 가브리엘 루아가 바로 그 작가였구나. 머리 속에서 사라진 기억을 탓해야 하는지, 참... 오래 전에 한 방송사에서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선정된 책들은 웬만하면 사서 읽었는데...


  그때 선정된 책 중에 가브리엘 루아가 쓴 [내 생애의 아이들]이 있었다. 교사로 근무하면서 만났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소설이라고 해도 좋고, 수필이라도 해도 좋을 그런 작품이었단 느낌이 남아 있는데...


  잔잔하단 느낌. 그냥 읽으면서 마음이 편해지는 작품이었다. 그런 기억은 있다. 작가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런데 이 작품도 그 작가의 작품이었다니... 참.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내 생애의 아이들]보다 더 앞선 시기를 다루고 있다. 작가의 자전소설이라고 생각하면, 작가의 어린시절부터 교사가 된 시점까지를 다루고 있다.


  짧은 소설, 최성각 용어대로 하면 '엽편소설'이라 할 만한 작품들이 많은데, 아주 어린 시절, 어린아이의 눈으로 본 어른들의 모습부터, 점점 자라면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소설집이 진행될수록 나온다.


결코 상류층이라고 할 수 없는, 어쩌면 우리나라 작품 '검정 고무신'을 연상하게 하는 그런 인물들과 배경이 나오는데, 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추억에 잠길 수가 있다.


이미 지나온 세계에 대한 향수라고 할까?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어린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해야 할까? 이 소설집은 그러한 마음이 들게 한다.


비록 배경이 캐나다의 시골 마을이지만, 우리나라 50-6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어린 소녀의 눈으로 본 마을 사람들, 그리고 가족들, 그들의 이야기.


어려운 환경임에 분명하지만, 소설은 우울하지 않다.우울한 내용이 나와도 그런 일이 우리 인생에서 거쳐야 할 통과의례처럼 여겨진다. 한편의 동화를 읽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한 아이의 성장기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소설은 시간이 흐르다가 마지막 소설에 이르러서는 서술자가 교사가 되어 끝난다. 아련하게 과거를 추억하게 하는, 우리가 거쳐온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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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3-20 12: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 《내 생애의 아이들》 잔잔하고 따뜻하게 기억하는데 그 전의 시간이라니 궁금하군요
담아갑니다^^

kinye91 2023-03-20 12:53   좋아요 2 | URL
잔잔하고 따뜻한 소설이었어요. 읽으면서 마음이 포근해지는 느낌을 주는 소설이라서 좋았어요.

은하수 2023-03-20 13:01   좋아요 1 | URL
네 그럴거 같아요
품절이라서 어쩔수없이 중고로..ㅠ
그래도 잘 읽어보겠습니다^^*
 
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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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라 딱 정의할 수 없는 삶이다. 우리가 계획한 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어느 순간,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무엇인가에 휩쓸려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는 것이 삶이지 않을까?


한 가족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삶도 있겠지만, 그런 삶을 분명 거부하지 않고, 또 큰 불만도 없는데, 그 틀에서 벗어난 삶으로 나아가는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지 않은가.


앨리스 먼로가 쓴 소설집. 우연찮게도 첫소설집과 마지막 소설집을 읽게 되었다. 이 소설집에서 이 작품을 끝으로 더이상 작품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 후 작품을 썼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으니, 그냥 그렇게 생각한다.


첫번째 소설집에서는 여성들의 삶을 주로 다루었다면, 이 소설집에서는 딱히 여성들의 삶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그냥 우리들 삶이 나온다.


목적을 정해놓고, 또는 틀을 정해놓고 그 틀에 맞춰사는 삶이 아니라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변하는 삶들.


그래서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정상가족'이란 말을 떠올렸다. 과연 정상가족이라는 말이 통용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집이다.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우리말대로 백년해로하는 삶, 그것이 정상가족일까? 그런 삶을 정상이라고 하는 언어로 규정지으면, 다른 삶들은 정상에서 벗어난 삶이 되지 않을까?


먼로의 이 소설집에서는 이런 정상성이 정상이 아님을, 어쩌면 우리 삶은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삶들도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소설에서 이런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제목부터 그렇다. '일본에 가 닿기를'. 우리 삶이 이럴지도 모른다. 나는 편지를 쓴다. 그리고 병에 담아 태평양에 놓아둔다. 그 편지가 일본에 가 닿기를 바라면서.


즉, 목적지가 명확하지 않다. 가 닿을 수 있을지, 닿지 않을지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나는 편지를 쓴다. 그것이 삶이므로.


이런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받아들여야 한다. 정상이라고 규정되어야 할 삶은 없다. 삶은 모두가 정상이다. 그러니 정상가족이란 말도 없다. 아니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정상가족이다.


모든 삶은 정상이고, 모든 가족은 정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삶.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으면 피하려고 할 것이다. 마음은 이미 떠났지만 몸은 떠나지 못하는 삶을 정상이라는 틀에 가둬놓고 살아가게 된다. 과연 그런 삶이 정상일까? 먼로는 그렇게 묻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의 끝에서 주인공은 '정상'이라는 말에 갇히길 거부한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그녀는 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다음에 다가올 일을 기다렸다.'('일본에 가 닿기를' 중에서. 41쪽)


바로 이것이 삶이고, 삶은 그렇게 우연과 우연히 겹쳐 이루어진다는 생각. 수많은 우연들 중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집이다.


여기에 이 소설집 끝부분에 실린 네 편의 소설들은 앨리스 먼로의 자전적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먼로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이 소설들을 읽으면 먼로의 소설에 나온 인물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먼로 소설을 읽으려면 이 소설집에 실린 네 편의 단편 소설을 먼저 읽으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 한편 한편 모두 읽을 만한 소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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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컬렉션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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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트우드가 쓴 책을 읽다가 발견한 소설가다.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했는데, 기억에 없다. 어느 순간부터 노벨문학상은 문학상이고, 내가 읽는 작품은 작품이다라는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


한때는 노벨문학상을 탔다고 하면 꼭 읽어봐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는데, 이제는 노벨문학상이 무엇이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상을 받았다는 사실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소개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꼭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읽으면서 애트우드의 추천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첫소설부터 버지니아 울프가 쓴 '자기만의 방'을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작업실'이란 소설인데, 작품을 쓰기 위해서 집이 아닌 작업실이 필요하다는 여성의 말. 이 작품이 꽤 오래 전에 쓰였는데, 지금도 집은 이런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씁쓸한 마음이 일기도 하고.


조금은 나아졌으려나? 이 소설에서 이런 표현이 나온다. 생각해 보자.


'집은 남자가 일하기에는 아주 좋다. 남자가 일감을 가져오는 집은, 말끔히 청소가 되어 있고 일하기에 딱 좋도록 남자 중심으로 새로 배치할 수도 있다. 남자에게는 일이 있다는 걸 누구나 알아준다. 따라서 으레 전화를 받는 일도, 어디 두었는지 모를 물건을 찾는 일도, 아이들이 왜 우는지 알아보는 일도, 고양이 먹이를 주는 일도 기대하지 않는다. 방문을 닫아걸어도 무방하다. 방문이 닫혀 있고 그 방 안에 엄마가 있다는 걸 아이들이 안다고 생각해 보라.(생각해 보라고 남편에게 말했다.) 왜냐, 아이들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도 용납하기 어려울 테니까. 여자가 허공을 응시한 채, 남편도 자식도 없는 엉뚱한 곳을 바라보는 건 자연의 섭리를 저버린 짓과 마찬가지라고 여길 테니까. 그러니 여자에게 집이란 남자와 같은 곳이 아니다. 여자는 누구들처럼 집에 들어와서 이용하고 마음대로 다시 나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여자는 곧 집이다. 떼려야 뗄 수 없다.' ('작업실'에서. 13쪽) 


하지만 작업실을 얻었다고 해도 집에서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살지 못한다. 임대해 나간 작업실에서도 주인은 남자다. 여자는 보조 역할을 할 뿐이다. 게다가 남자 주인은 여성 임대인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허락을 받는 일, 형식적인 허락이야 받지만, 언제든 마음대로 여성 임대인의 작업실을 드나들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마치 호의를 베푸는 듯한 태도로.


여성 임대인이 이런 태도를 용납하지 않으면 그때부터 태도가 돌변한다. 어떤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여성 임대인을 비난한다.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된다.


결국 집이든 작업실이든, 여성은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받기가 힘들다. 지금은 좀 나아졌다고 하겠지만 먼로의 소설 당시는 그렇다.


이렇게 여성은 남성의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다.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생활을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


이 소설집에는 주인공이 대부분 여자다. 그만큼 여성의 삶에 관심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소설이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란 소설이다.


어린 시절에는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그리 하지 않는다. 집안일에도 물론 어느 정도의 분리는 있지만, 계집아이가 아버지를 돕는 일을 막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이 되면 성에 따른 일의 구분이 생기고, 행동에도 차이가 난다.


말을 도살하는 장면에서, 말이 도망치려고 했을 때 그동안 아버지의 일을 도와주던 딸은 말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문을 닫으라는 아버지의 말을 거역한다. 문을 열어둔다.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아가는 순간이다.


자연과 인간의 삶이 닫히지 않고 열리는 순간을 표현했다면, 그동안 소심했던 남동생은 반대로 행동한다. 말을 도살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이, 문을 닫지 않은 누나를 비난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버지의 말이 성차를 확인하게 한다.


"계집애일 뿐이니까."('사내아이와 계집아이'에서. 227쪽)


이 성차는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많은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비관으로 끝나지 않는다.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소설집의 마지막 소설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서 이 점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마살레스 선생님은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하지만, 자신만의 세계를 꾸준히 살아간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 딱하다는 표현이 어울리지만, 서술자는 딱하다는 표현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선생님은 이 각박한 세상에 행복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 마음에 남는다.


'우리는 도대체 왜 딱한 마살레스 선생님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걸까. 분명코 하고도 남을 이 상황에. 그건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 우리를 방해하기 때문이고, 그 음악은 선생님이 사는 저쪽 나라에서 보낸 코뮈니케이기 때문이다.'('행복한 그림자의 춤'에서. 386쪽. 코뮈니케-문서에 의한 국가의 의사 표시를 뜻하는 프랑스어로, 외교상의 공문서, 정부의 공식 성명서 따위를 이른다.고 주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집에서는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지금과는 다른, 그렇지만 어쩌면 지금도 통용되고 있는, 그런 삶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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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3-13 11: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머 표지가 좀 많이 화사해졌어요^^
전 구판으로~~좀 칙칙했죠
저도 이 책 보면서 아파트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저 녹색 원룸들 위 옥탑방 한칸 나만의 비밀장소로 갖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매일 거기로 출근도장 찍는 상상이요. 거기서 책보고 화분키우고 점심 해먹고 내방아 잘 있어 이러면서 걸어서 집으로 퇴근하는 그런 상상이요. 상상하게 하는 힘이 삶을버티게 해주는 앨리스 먼로의 책이 었어요.

kinye91 2023-03-13 19:57   좋아요 1 | URL
꽤 오래된 소설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생각할거리를 주고 있어요.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그 중 하나고요.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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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은 유명한 시인이다. 이렇게 시작한다. 그를 만난 적은 없다. 단지 얼굴을 본 적은 있다. 안치환 시노래 콘서트에서. 그때 정호승이 나와서 시를 낭송했다. 


안치환이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르는데, 시도 좋지만 노래도 좋았다. 거기에 정호승이 직접 낭송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으니, 그런 호사가 없었다.


2007년이었다. 서강대에서 이루어졌던. 그렇게 정호승을 시로만이 아니라 노래로도 만났다. 그때 받았던 안치환의 사인. 여기에 정호승 시도 있다.


그리고 이제는 시와 산문이 하나가 된 책으로도 만나게 되었다.


정호승의 시가 먼저 한 편 나온다. 그리고 그 시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시와 산문.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다르지 않음을 글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시도 좋지만 시와 관련된 산문을 읽으면서 시인 정호승이 아닌, 인간 정호승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정호승이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 시가 어떻게 해서 우리 곁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연.


한편 한편의 시와 산문이 다 좋다.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글을 통해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인간 정호승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이 책의 묘미가 있다. 시인의 개인 생활에 대해서 우리는 잘 모르고 있지 않은가.


그냥 시를 통해서 만나든지, 아니면 산문을 통해서 짐작을 할 뿐인데, 이 책은 정호승 자신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를 통해서 산문으로 풀어내주고 있다. 


살아온 이야기, 살아가는 모습, 그리고 삶을 대하는 태도. 그렇게 정호승은 시와 산문을 통해서 시와는 다르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책에서는 정호승이 만난 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을 통해서 깨달은 바를 이야기하고, 또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은 모든 존재를 사랑으로 보려는 자세가 나타나 있어서, 자신만을 중심으로 여기는 삶을 반성하게 한다.


또한 첫글에서 말하고 있듯이 온전한 삶만이 삶이 아니라 깨어진 삶도 삶임을, '산산조각'이라는 시를 통해서, 그 시와 관련된 이야기를 통해서 전해주고 있다.


그렇다. 우리 삶은 바로 이것이다. 삶의 순간순간이 모두 삶이고, 그것이 온전한 삶임을. 꼭 온전한 삶을 찾으려 헤맬 필요가 없음을. 그냥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면 된다는 마음을 갖게 한다.


정호승의 시하면 마음에 위안을 준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책에 실린 산문들도 그렇다. 마음에 위안을 주는데 시와 산문을 가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그냥 생각날 때마다 한편씩 읽어도 좋을 책이다. 곁에 가까이 두고 틈틈이 읽으면 좋을 책.


덧글


읽다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


윤동주에 관한 글이다. 윤동주의 무덤을 찾아갔던 일화를 이야기해주는 글에서,, 류기천 씨의 말이라고 하는데...


"... 윤동주의 친어머님은 일찍 죽고, 그 후에 윤동주는 새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그 어머니가 중풍을 일으켜..." (440쪽)


내가 알기론 윤동주는 새어머니 밑에서 자란 적이 없는데... 검색을 해보니, 어머니 김룡(김용) 씨는 1948년에 돌아가신 걸로 나와 있다. 그렇다면 용정에 있는 류기천 씨의 이 말에 대해서 책에서 부연 설명을 해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운데 한 명인 윤동주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책을 읽고 윤동주의 가족관계에 대해서 잘못 알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우려가 생겼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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