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적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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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서로 연결이 되지는 않지만, 별 상관이 없다. 한편 한편이 완성된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제목이 된 소설은 경쾌하다. 자본주의의 적이라고 하면 공산주의를 생각해야 하는데, 아니다. 이미 공산주의는 이 세상에서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적은 무엇일까? 소설은 그런 자본주의의 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세상을 자신들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삶을 '자폐'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자폐 가족'이 바로 자본주의의 적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은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을 어려워한다. 관계맺기를 어려워하니 다른 사람들처럼 살 수가 없다. 현대 문명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이 그들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들이 된다. 그러니 그냥 자신들의 힘으로 살려고 한다.


자본주의는 필요가 아니라 수요를 창출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서 상품을 생산해야 한다. 하지만 이 자폐 가족에게는 새로운 물품이 별로 필요없다. 그냥 그들이 자급할 수 있으면 한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간다. 그러니 자본주의의 적이 될 수밖에.


이런 과정을 경쾌하게 그려낸다. 어쩌면 궁상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을 발랄하게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고 있으니, 그렇다. 우리가 기후 위기를 걱정하고, 환경 문제를 걱정하지만, 지금처럼 자본주의 생산방식에서, 자본주의 생활방식을 버리지 않는 한, 기후 재앙이나, 환경은 나아질 수가 없다.


결국 자본주의는 우리의 생활을 먹고 사는 불가사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본주의를 이겨낼 수 있다. 그 점에서 이 소설은 참조할 만하다. '자폐 가족'이라는 말로 표현했지만, 이를 생태학자들의 용어로 바꾸면 '자급자족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먹을거리는 자신이 생산하고, 가능하면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공장에서 생산한 물품보다는 자신이 직접 만들어내는 물품을 쓰면서 사는 삶. 자급자족의 삶. 


그런 삶으로 생활이 바뀌면 자본주의가 초래한 온갖 병폐들을 없앨 수가 있다. 이 소설 '자본주의의 적'에서 그 점을 생각할 수 있다.


이 소설과 꼭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에 나오는 시골 사람들의 모습이 딱 그렇다. 그들 역시 '자본주의의 적'에 나오는 '자폐 가족'과 비슷하다. 크게 욕심 내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


그런 삶이 경쾌하게 그려지고 있어서 읽으면서 웃음을 머금게 된다. 가볍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는 않게 읽을 수 있는 소설들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재미있게 읽었다. 그냥 재미가 아니라 울림이 있는 소설이었다. 그 소설을 읽은 뒤 이 소설집을 읽으니 연결되는 지점이 많다.


'검은 방'이라는 소설은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였다면, 이 소설은 어머니를 중심에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의 회상을 통해서 전에 읽었던 소설을 떠올릴 수가 있게 된다. 여기에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과도 연결이 되고.


한 시대 무엇을 위해서 살았던가? 과연 그런 사회는 도래했는가? 하지만 이에 대한 대답보다는 바로 우리 삶, 스스로를 돌아보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생각을 한다.


대체로 이 작품집에 실린 소설들이 경쾌하지만 그렇지 않은 소설도 있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아무리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무겁지 않게 표현하고 있지만, '계급의 완성'이라는 작품은 결코 가볍지 않다. 경비원으로 일하는 사람에게 자신들이 먹을 수 없는 음식을 선물이랍시고 주는 사람들, 평생을 힘겹게 일하지만 얻는 것이라고는 상한 몸밖에 없는 사람들.


우연히 발바닥, 그것도 보드랍고 '연분홍 빛 발바닥'이라고 소설에서 표현한 태어날 때는 누구나 갖고 있는 그 발바닥을 땅 한 번 제대로 밟아보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관리라는 명목으로 - 사실 그들은 관리하지 않아도 어릴 적 갖고 태어난 발바닥을 그리 험하게 만들지 않는다. 다만, 관리하면서 더욱 더 보드랍게 관리를 할 뿐이다. 땅에 발디디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 그런 발바닥을 유지하고 있는데, 죽어라 일만 하는 사람은 너무도 거칠고 갈라진 발바닥을 지닐 수밖에 없는 현실.


그렇다. 어떤 이는 계급을 '냄새'로 구분했지만, 정지아는 이 소설에서 '발바닥'으로 구분했다. 땅을 딛고, 우리를 나아가게 하는 존재인 발바닥. - 물론 손도 마찬가지다. 소설에서는 아내의 손을 이렇게 표현했다 -. 아들의 발바닥을 보는 순간 그는 '아들의 발만큼은 태어났을 적 그대로, 보들보들, 야들야들,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복숭아꽃 빛깔로 되돌려주고 싶었다'(211쪽)고 생각했다.


아들의 발바닥을 정리해주지만, 그것이 그때뿐이리라. 이 소설에서 말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바로 계급은 이렇게 해서 완성이 된다. 소설 제목이 '계급의 완성'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슬프고도 무거운 내용이다. 하지만 작가는 가볍게 표현하고 있다. '해학적 표현'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작가는 우울에 찌들지 않게 그림으로써,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있음을, 그런 희망을 우리가 지녀야 함을 생각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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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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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등장한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시간은 결코 균일하지 않다. 시간은 누구냐에 따라 다 다르게 느껴진다. 여기에 사람들은 흔히 죽음을 앞두고 자신들이 살아온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고 한다. 아주 짧은 시간에 인생 전체에 걸친 긴 시간이.


이처럼 시간은 다르다. 시계에서 볼 수 있는 균등하게 분절된 시간이 아니다. 어떤 시간은 한없이 늘어지고, 어떤 시간은 그냥 건너뛴다. 그렇게 다른 시간. 같은 시간을 살아도 다르게 느끼는 시간. 이것이 삶이다.


누구나 다 다른 삶. 그래서 시간이 다르듯이 삶도 달라야 한다. 삶이 같아야 한다고 할 수 없다. 천선란이 쓴 소설 [천 개의 파랑]이다.


파랑, 색깔이다. 그 색깔이 파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리가 될까? 시간이 그냥 기계적인 시간, 수학적인 시간으로 누구에게나 똑 같은 시간이 될 수 없듯이, 파랑 역시 마찬가지다. 파랑은 어떻게 보고 느끼느냐에 따라 다 다른 파랑이 된다. 마치 우리들의 삶처럼.


우리들이라고 했지만, 이 우리들은 인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존재라고 해야 한다. 인공지능에 관심이 많은 지금, 과연 인공지능을 인간과 같은 존재로 봐야 하는지를 논의하기도 한다. 복제인간에 대한 논의를 넘어서... 


이 소설에는 로봇이 나온다. 경마 기수로 만들어진 로봇. 이는 인간의 흥미를 위해서 로봇을 이용했다고 할 수 있다. 로봇만이 아니다. 경마를 하려면 말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말에는 속도가 필요하다. 경마가 무엇인가. 인간들이 자동차 경주를 하듯, 말을 경주시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일 아닌가.


이런 경마에 참여시키는 말은 생명체로 인정받지 못한다. 오로지 이윤을 추구하는 도구일 뿐이다. 로봇도 마찬가지다. 사람 기수에 비해 효용도가 높기 때문에 도입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니 경마에 동원된 로봇 기수나 말은 생명체로 인정받지 못한다. 오로지 경마에 쓸모 있을 때까지만 존재해야 하는 도구일 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어느 순간 칩이 하나 자리를 잘못 찾아 들어가 학습 능력이 있는 로봇이 된 콜리가 있다. 다른 생명체와 교감이 가능한 로봇. 그래서 말이 힘들어 하자 스스로 말에서 떨어진다.


고장난 로봇. 폐기될 뿐이다. 또 너무 혹사당해 무릎 관절이 나간 말, 투데이. 역시 도태되어야 할 존재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떤가? 주류에 끼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도 과연 도태되어야 하는가?


저마다 다른 시간을 살고 있던 사람들. 무언가 하나씩 결핍을 안고 살던 사람들. 보경, 은혜, 연재. 이 가족에게 콜리는 다른 시간을 살되, 함께 하는 시간도 있어야 함을 알게 해주는 존재가 된다. 로봇을 통해서 가족들은 닫혀 있던 세계에서 열린 세계로 점차 나아가게 되고. 여기에 수의사 복희와 말 관리인 민주, 연재의 친구가 되는 지수가 함께 등장한다.


그들은 로봇을 생명체로 대한다. 로봇도 생명체로 대하는 이들에게 말은 함부로 도태시켜서는 안 될 존재다. 이렇게 경주마로서의 생명이 끝난 말 투데이를 살리기 위해 그들이 함께 하는 과정. 이 과정이 콜리가 투데이에게서 떨어지는 짧은 시간에 다 펼쳐진다.


콜리가 천 개의 파랑이 있다고 하듯이, 삶도 모두 다른 삶들이 있고, 이들의 시간 역시 다르게 흘러가겠지만, 이 다름 속에서도 함께 함이 있음을, 결국 삶은 라이프니츠의 말을 빌리면 '창이 없는 단자'가 아닌 '창이 있는 단자'임을 생각하게 한다.


이 열린 창으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함께 하는 시간이 있음을, 그래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음을 로봇 콜리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지만, 말을 함으로써 느끼는 것이 있을 수 있음을, 보경 가족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삶은 다양함을, 그것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모든 것에는 존재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를 인정해야 함을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된다.


처음에 콜리의 독백으로 시작해서, 다시 콜리의 독백으로 끝난다. 여기에 중간 중간 서술자로 등장하는 보경, 은혜, 연재, 복희를 통해서 로봇의 관점에서 본 사람들의 삶과 사람들이 겪는 삶들이 교차되어 나타난다.


이미 처음에 이별이 표현되어 있기에 소설은 이 이별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는데, 이를 끝부분에서 작가가 직접 개입함으로써 해결하고 있다. 소설을 비극으로 이끌어가지 않고, 삶에서 겪는 이별을 통해서 한층 더 성숙해지는 그런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그러니 소설에서 극적인 반전을 느낄 수는 없지만, 콜리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해서 예상치 못한 결말을 맞게 된다.


그 점이 이 소설을 SF소설로 만들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저런 요소들을 떠나서 소설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빈 공간을 서로가 채워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서 좋다. 파랑이 천 개의 파랑일 수 있듯이, 이들의 삶 역시 천 개의 삶이고, 이들의 시간 역시 천 개의 시간일 수 있음을. 


이런 다양함이 결국 서로의 비움을 채워줄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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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물질의 사랑 - 천선란 소설집
천선란 지음 / 아작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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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란이 쓴 단편 소설집이다. 8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서로 연결이 안 되는 소설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연결이 되기도 한다.


우리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 각자 존재하는 하루하루들이 모여 삶을 이루고 있으니, 또 전혀 다른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으니.


자신이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늘 일어나고, 그러한 일들이 쌓이고 쌓여 나란 인간을 만들어가고 있듯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소설들이 모여 한 작품집을 이루고, 그런 작품들을 읽으면서 인생에 깊이와 넓이를 더한다. 전혀 현실에서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들이라도, 현실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인생에 무언가를 더해줄 수 있다.


우리는 불가능을 꿈꾸므로. 전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을 상상하고, 그런 상상을 통해서 현실을 견디기도 하므로.


소설집 제목이 된 '어떤 물질의 사랑'이 그렇다. 사랑에 과연 형태가 있을까? 한계가 있을까? 사랑에 국경이 없다는 말, 나이가 없다는 말은 많이 하지만, 외계인과 사랑에 빠진다? 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성으로 변한다? 이런 일들... 너무도 이상하지만 이상하지 않게 여기는 존재.


이 소설은 그런 점을 보여준다. 이상한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세상에 이상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똑같으면 그것이 어떤 즐거움을 주겠는가? 사랑은 그래서 형체가 없다. 사랑은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과정 중에 있는 무엇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변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떠날 수 있다. 온전히 상대방을 느끼고 받아들이기에 어떤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사랑에 대해서, '어떤 물질의 사랑'이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이 이 소설에만 나타나 있지는 않다. '마지막 드라이브'라는 소설을 보면 교통사고 실험을 하는 '더미'가 느끼는 사랑, 그런 더미를 바라보는 사람의 사랑이 나온다. 로봇인 더미가 사랑을 느낄 수 있는가? 단지, 입력된 명령어 대로 느끼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이런 사랑을 어떤 특정한 형태로 규정짓는 일이다. 사랑은 무엇이다라고 정의하는 일이다. 결코 무엇이라고 정의될 수 없는 사랑을. 그러므로 더미의 사랑은 사랑이다. 우리가 사랑을 느끼는 것을 뇌의 작용 또는 호르몬 작용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없듯이, 사랑 또한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무엇이 아님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즉, 이상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사랑.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사랑이다.  


이 작품집을 읽으면서 작가는 인간이 없는 세계를 꿈꾸고 있단 느낌을 많이 받는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인간들은 지구에 해를 끼치는 존재로 그려진다. 지구의 생물들을 멸종시키거나(레시,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 또는 스스로들 외계인과의 전투에서 죽어간다.(두하나) 아니면 감정을 없애버리려고 하거나(그림자놀이) 유전자를 통해 자식을 만들려고 한다.(너를 위해서) 


과학기술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기도 하겠지만, 그런 과학기술로 인해서 인류는 파멸의 길로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음을, 그런 사회가 결코 행복한 사회는 아님을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는다. 천선란의 소설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많은 고난에도 어떤 희망이 있다.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현재가 비록 힘들지만,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다.


'두하나'라는 소설에서 외계인과의 전쟁에서 죽어간 사람들, 또는 그들에 의해 같은 인간을 죽이게 된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준 다음에, 그 결과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렇게 표현한다.


참혹한 과거지만, 이겨내야 함을... 하지만 여기엔 조건이 있다. 진정한 반성, 참회가 있어야만 용서가 있을 수 있음을... 반성과 참회가 없는 존재에겐 용서도 없음을... 무엇이 먼저여야 하는지를 잊은 자들에게는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없을 것이다.


'삶을 재건하기 위해 모두가 바빴다. ...... 뒤늦은 용서는 사회 속에서 누구에게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았다. 이 상황을 올바르게 헤쳐나갈 수 있는 선구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래도록 불안할 것이다. 오래도록 의심할 것이다. 오래도록 용서할 것이고, 오래도록 받지 못한 용서가 토양에 쌓여 침전되고 그렇게 지구가 될 것이다.('두하나'에서. 256쪽)'


진정한 반성과 참회가 있어도 용서는 오래 갈 텐데, 그것조차도 하지 못하는 족속에겐 용서란 없다. 용서란 무작정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따라서 용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잘못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반성은 바로 사랑에서 나온다. 


하여 이 소설집은 '사랑'에 관한 소설집이다. 무엇이라 딱 고정된 사랑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사랑. 어떤 특정한 형체가 없는 사랑. 무한한 사랑이기에 시간의 제약도 공간의 제약도 없다. 사랑은 흐름 속에 있다. 그 흐름 속에 우리가 함께 하고 있음을, 이 소설집을 읽으며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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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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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소설이다. 읽기 시작하자마자 몸 상태가 안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뗄 수가 없었다. 소설의 구성도 흥미를 자극하고.


사실과 허구를 적절히 섞었다는 점에서도 성공을 했다고 한다면, 한 여성의 기구한 삶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결론을 섣불리 내리지도 않는다. 결론은 독자의 몫이다. 다만 소설을 통해서 주인공의 목소리를 들려줌으로써 주인공에게 공감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생각은 든다.


어린 시절 가족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 캐나다로 이민 오는 과정에서 죽은 어머니. 그럼에도 가족을 돌보지 않아 겨우 열세 살의 나이에 하녀로 일을 시작하다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은 그레이스.


이 그레이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레이스가 기억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찾아내려는 젊은 정신의학자 사이먼이 그레이스와 면담을 한다. 이렇게 소설은 그레이스의 이야기와 사이먼의 관점이 교차하면서 진행이 되는데, 각 부가 바뀔 때마다 사건의 기록이나 다른 구절들이 앞부분을 장식한다.


그리고 각 부는 퀼트 패턴의 이름이라는데, 이는 소설이 퀼트를 하듯이 각 조각들을 짜맞추는 식으로 구성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끝까지 읽으면서 과연 그레이스는 살인범일까를 찾아보지만 명확한 답은 없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다만, 그레이스가 처한 그 상황을 통해서 당시 여성, 그것도 하층민 여성들의 생활이 어땠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림자 노동이라는 말이 지금은 흔하게 쓰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게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 그러면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대가라고는 주인의 선처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단지 월급만이 아니라 몸까지도 탐하는 주인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그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고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겼던 당시의 상황.


그렇다고 상류층에 해당하는 여성들이 당당하게 자신들의 삶을 살았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작가는 그 점을 사이먼이 묵고 있는 집의 여주인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그들의 삶 역시 남편의 삶에 종속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작품에는 여러 죽음이 나오지만 세 여자의 죽음이 의미가 있다. 그레이스의 어머니는 살기 위해서 살던 곳을 떠나 낯선 나라도 오는 도중에 죽는다. 이는 어머니의 삶은 남편에게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장소라도 비참한 삶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남편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남편에 종속된 삶들이 이르게 되는 종착지. 


다음 죽음은 메리 휘트니의 죽음이다. 그레이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메리. 매사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부잣집 아들과 사랑에 빠져 임신을 하고, 불법으로 낙태 수술을 하고 나서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전형적인 하층민 하녀들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아무리 똑똑해도 자신의 처지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삶에 대한 태도를 그레이스에게 가르쳐준 메리지만, 자신의 삶에는 그런 지혜를 적용하지 못했다. 적용할 수 없는 구조였으리라. 임신시킨 사람에게 청혼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애를 낳아도 자신이 키울 수밖에 없는데, 사생아를 낳았다는 이유로 쫓겨날 가능성이 농후했으니, 이를 비밀로 할 수밖에 없었던 메리. 당시 하녀들이 겪을 수밖에 없던 삶.


이런 메리의 죽음으로 그레이스는 큰 혼란을 겪는다. 실신도 하고. 이것이 이 소설의 복선이다. 위기 상황에서 그레이스는 정신을 잃는다. 기억을 하지 못한다. 낸시와 주인인 키니어가 죽었을 때를 흐릿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세 번째 죽음은 그레이스도 관련된 낸시의 죽음이다. 그레이스가 마지막으로 만난 가정부 낸시. 그레이스와 비슷한 처지지만 낸시는 집주인의 내연녀 역할을 한다.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 오래 가지 못한다. 이를 죽음으로 표현한다. 한데, 그냥 죽음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지배층들의 윤리가 무너진다. 그러니 낸시의 죽음은 질투로 인한 죽음이어야 한다. 하층민들이 벌이는 질투. 상층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하층민 여성들이 통상 겪은 결과.


작가는 이렇게 세 죽음을 통해 당시 여성들의 삶을 퀼트처럼 잘 짜맞추어 간다. 여기에 상류층 여성들의 위선을 사이먼의 어머니나, 또 소령의 부인 등을 통해서. 더하여 남성들이 지닌 이중성. 위선들까지도.


읽으면서 계속 추리를 하게 만들지만, 작가는 아무래도 그레이스에게 더 많은 공감을 표하고 있나 보다. 그레이스가 서술자로 등장하는 부분에서 독자들도 그레이스에게 공감을 하게 만들고 있으니.


누가 살인자일까는 중요하지 않다. 그레이스의 삶을 통해서 당시 하층민 여성들의 삶을 들여다본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과연 그러한 삶이 지금은 달라졌을까 생각을 해야 한다. 어쩌면 그때보다는 보이지 않는 그런 차별이 보이기 시작했고, 보이지 않는 노동들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차별과 그림자 노동이 존재함을 생각해 봐야 한다.


  더이상 이런 그레이스들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 아니, 그래도 그레이스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지 못한 그레이스의 어머니, 메리, 낸시들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소설. 역시 애트우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다.


  읽으면서 캐나다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고 해서 검색을 해보니, 미국에서 애트우드의 이 소설을 원작으로 드라마로 만들었다고 한다.


  드라마를 본 사람들 평가를 몇 살펴보니 상당한 호평들이 많던데... 관심 있는 사람은 드라마를 찾아 보아도 될 듯하다. 


  소설을 먼저 읽고 드라마를 보아도 좋을 듯하고, 드라마를 본 다음에 소설을 읽어도 좋을 듯한데, 난 역시 드라마 쪽은 좀 거리가 멀어서 이렇게 소설로만 읽어도 좋은 소설이었으니...


<사진 출처> 넷플릭스/미드/그레이스(Alias Grace)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시녀 이야기],[증언들],[미친 아담 3부작 -오릭스와 크레이크, 홍수의 해, 미친 아담]에 이어 정말 애트우드 소설에 감탄을 하게 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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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수 있는 여자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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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살벌하다. 먹을 수 있는 여자라니... 먹는다는 행위는 삶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행위인데, 세상에 먹을 수 없는 여자도 있나 하지만, 있다.


먹는다는 행위가 능동적인 행위 같지만, 상당히 수동적임을 알 수 있다. 먹는다는 행위는 어떤 틀에 맞춰 있을 때가 많다. 사실 우리는 장소에 따라서 먹는 음식도 다르고, 먹는 방법도 다르지 않은가. 심지어는 의상까지도 다르게 해야 하니.


그렇다면 먹을 수 있는 여자라는 말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여자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다른 관계들에 의해 틀지워진 삶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가는 삶. 주인공 메리언 이야기다. 전도 유망한 변호사 피터와 연애 중인 메리언은 어느 날 피터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이유는 없다. 그냥 몸이 움직인다. 이것은 무엇일까? 피터라는 남성으로부터 조여오는 틀을 몸이 먼저 거부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도망친 메리언에게 피터는 결혼하자고 말한다. 그냥 그렇게 둘이 결혼을 한다면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때부터 메리언에게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이 하나 둘 생겨난다. 먹을 수 없는 음식이 생겨난다는 것은 메리언이 결혼을 했을 때 자신의 뜻대로 행동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는 것이다.


우선 직장을 그만두어야 한다. 남성이라는 성별을 지닌 친구를 만날 때도 눈치를 봐야 한다. 애를 낳으면 애에 종속되어 다른 활동을 할 수 없다. 또한 남편의 취향에 맞게 집안을 꾸며야 한다. 남편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등등.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생기고 이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자신의 취향에 맞게 자유롭게 먹었던 음식도 이제는 남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을 잃어간다.


그러니 먹을 수 없는 여자가 되어 간다. 하나 둘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이 늘어갈 때 메리언은 피터와 결혼을 앞둔 파티에서 또다시 도망친다.  다른 남자 덩컨에게 가지만, 덩컨 역시 메리언과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덩컨은 메리언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존재로밖에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덩컨은 오로지 자신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


메리언은 결국 피터와 헤어지게 되고, 직장도 다시 구하려고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메리언은 여자 모양의 케이크를 만든다. 이것을 먹는 메리언. 그래서 제목이 먹을 수 있는 여자다. 이중의 뜻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이제 자신의 의지대로 먹을 수 있게 된 메리언, 또 하나는 메리언을 먹을 수 있는 여자 케이크.


먹을 수 있는 여자는 여성의 몸을 한 케이크를 먹음으로써 메리언은 자신이 먹을 수 있는 여자임을 보여준다. 이제는 어떤 음식이든 제 뜻대로 먹을 수 있다. 이는 강요된 여성성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모습이다. 이제는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살아가려 한다는 선언이다. 


남자 또는 다른 어떤 관계에 종속된 삶이 아니라 자신이 주체로 살아가겠다는 선언. 이 선언이 바로 여자 모양의 케이크를 먹는 메리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애트우드가 쓴 거의 첫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음식을 비유로 들어서 여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실 천박하게 먹는다는 표현을 여성에게도 쓰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처음 이 제목을 보면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먹을 수 있는 여자는 자신에게 만만한 여자라고. 그러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어, 아니네, 하게 된다. 먹을 수 있는 여자는 세상을 당당한 주체로 살아가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되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 자신을 찾아낸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도 당당하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녀이야기]나[증언들] 또는 [미친 아담 3부작]과 같지는 않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흥미를 돋우는 소설이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애트우드의 첫소설, 그리고 다음 소설들에서 애트우드가 다루는 내용들이 어느 정도 나타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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