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물질의 사랑 - 천선란 소설집
천선란 지음 / 아작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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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란이 쓴 단편 소설집이다. 8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서로 연결이 안 되는 소설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연결이 되기도 한다.


우리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 각자 존재하는 하루하루들이 모여 삶을 이루고 있으니, 또 전혀 다른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으니.


자신이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늘 일어나고, 그러한 일들이 쌓이고 쌓여 나란 인간을 만들어가고 있듯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소설들이 모여 한 작품집을 이루고, 그런 작품들을 읽으면서 인생에 깊이와 넓이를 더한다. 전혀 현실에서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들이라도, 현실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인생에 무언가를 더해줄 수 있다.


우리는 불가능을 꿈꾸므로. 전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을 상상하고, 그런 상상을 통해서 현실을 견디기도 하므로.


소설집 제목이 된 '어떤 물질의 사랑'이 그렇다. 사랑에 과연 형태가 있을까? 한계가 있을까? 사랑에 국경이 없다는 말, 나이가 없다는 말은 많이 하지만, 외계인과 사랑에 빠진다? 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성으로 변한다? 이런 일들... 너무도 이상하지만 이상하지 않게 여기는 존재.


이 소설은 그런 점을 보여준다. 이상한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세상에 이상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똑같으면 그것이 어떤 즐거움을 주겠는가? 사랑은 그래서 형체가 없다. 사랑은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과정 중에 있는 무엇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변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떠날 수 있다. 온전히 상대방을 느끼고 받아들이기에 어떤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사랑에 대해서, '어떤 물질의 사랑'이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이 이 소설에만 나타나 있지는 않다. '마지막 드라이브'라는 소설을 보면 교통사고 실험을 하는 '더미'가 느끼는 사랑, 그런 더미를 바라보는 사람의 사랑이 나온다. 로봇인 더미가 사랑을 느낄 수 있는가? 단지, 입력된 명령어 대로 느끼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이런 사랑을 어떤 특정한 형태로 규정짓는 일이다. 사랑은 무엇이다라고 정의하는 일이다. 결코 무엇이라고 정의될 수 없는 사랑을. 그러므로 더미의 사랑은 사랑이다. 우리가 사랑을 느끼는 것을 뇌의 작용 또는 호르몬 작용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없듯이, 사랑 또한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무엇이 아님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즉, 이상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사랑.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사랑이다.  


이 작품집을 읽으면서 작가는 인간이 없는 세계를 꿈꾸고 있단 느낌을 많이 받는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인간들은 지구에 해를 끼치는 존재로 그려진다. 지구의 생물들을 멸종시키거나(레시,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 또는 스스로들 외계인과의 전투에서 죽어간다.(두하나) 아니면 감정을 없애버리려고 하거나(그림자놀이) 유전자를 통해 자식을 만들려고 한다.(너를 위해서) 


과학기술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기도 하겠지만, 그런 과학기술로 인해서 인류는 파멸의 길로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음을, 그런 사회가 결코 행복한 사회는 아님을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는다. 천선란의 소설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많은 고난에도 어떤 희망이 있다.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현재가 비록 힘들지만,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다.


'두하나'라는 소설에서 외계인과의 전쟁에서 죽어간 사람들, 또는 그들에 의해 같은 인간을 죽이게 된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준 다음에, 그 결과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렇게 표현한다.


참혹한 과거지만, 이겨내야 함을... 하지만 여기엔 조건이 있다. 진정한 반성, 참회가 있어야만 용서가 있을 수 있음을... 반성과 참회가 없는 존재에겐 용서도 없음을... 무엇이 먼저여야 하는지를 잊은 자들에게는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없을 것이다.


'삶을 재건하기 위해 모두가 바빴다. ...... 뒤늦은 용서는 사회 속에서 누구에게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았다. 이 상황을 올바르게 헤쳐나갈 수 있는 선구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래도록 불안할 것이다. 오래도록 의심할 것이다. 오래도록 용서할 것이고, 오래도록 받지 못한 용서가 토양에 쌓여 침전되고 그렇게 지구가 될 것이다.('두하나'에서. 256쪽)'


진정한 반성과 참회가 있어도 용서는 오래 갈 텐데, 그것조차도 하지 못하는 족속에겐 용서란 없다. 용서란 무작정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따라서 용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잘못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반성은 바로 사랑에서 나온다. 


하여 이 소설집은 '사랑'에 관한 소설집이다. 무엇이라 딱 고정된 사랑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사랑. 어떤 특정한 형체가 없는 사랑. 무한한 사랑이기에 시간의 제약도 공간의 제약도 없다. 사랑은 흐름 속에 있다. 그 흐름 속에 우리가 함께 하고 있음을, 이 소설집을 읽으며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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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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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소설이다. 읽기 시작하자마자 몸 상태가 안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뗄 수가 없었다. 소설의 구성도 흥미를 자극하고.


사실과 허구를 적절히 섞었다는 점에서도 성공을 했다고 한다면, 한 여성의 기구한 삶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결론을 섣불리 내리지도 않는다. 결론은 독자의 몫이다. 다만 소설을 통해서 주인공의 목소리를 들려줌으로써 주인공에게 공감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생각은 든다.


어린 시절 가족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 캐나다로 이민 오는 과정에서 죽은 어머니. 그럼에도 가족을 돌보지 않아 겨우 열세 살의 나이에 하녀로 일을 시작하다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은 그레이스.


이 그레이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레이스가 기억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찾아내려는 젊은 정신의학자 사이먼이 그레이스와 면담을 한다. 이렇게 소설은 그레이스의 이야기와 사이먼의 관점이 교차하면서 진행이 되는데, 각 부가 바뀔 때마다 사건의 기록이나 다른 구절들이 앞부분을 장식한다.


그리고 각 부는 퀼트 패턴의 이름이라는데, 이는 소설이 퀼트를 하듯이 각 조각들을 짜맞추는 식으로 구성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끝까지 읽으면서 과연 그레이스는 살인범일까를 찾아보지만 명확한 답은 없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다만, 그레이스가 처한 그 상황을 통해서 당시 여성, 그것도 하층민 여성들의 생활이 어땠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림자 노동이라는 말이 지금은 흔하게 쓰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게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 그러면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대가라고는 주인의 선처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단지 월급만이 아니라 몸까지도 탐하는 주인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그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고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겼던 당시의 상황.


그렇다고 상류층에 해당하는 여성들이 당당하게 자신들의 삶을 살았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작가는 그 점을 사이먼이 묵고 있는 집의 여주인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그들의 삶 역시 남편의 삶에 종속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작품에는 여러 죽음이 나오지만 세 여자의 죽음이 의미가 있다. 그레이스의 어머니는 살기 위해서 살던 곳을 떠나 낯선 나라도 오는 도중에 죽는다. 이는 어머니의 삶은 남편에게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장소라도 비참한 삶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남편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남편에 종속된 삶들이 이르게 되는 종착지. 


다음 죽음은 메리 휘트니의 죽음이다. 그레이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메리. 매사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부잣집 아들과 사랑에 빠져 임신을 하고, 불법으로 낙태 수술을 하고 나서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전형적인 하층민 하녀들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아무리 똑똑해도 자신의 처지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삶에 대한 태도를 그레이스에게 가르쳐준 메리지만, 자신의 삶에는 그런 지혜를 적용하지 못했다. 적용할 수 없는 구조였으리라. 임신시킨 사람에게 청혼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애를 낳아도 자신이 키울 수밖에 없는데, 사생아를 낳았다는 이유로 쫓겨날 가능성이 농후했으니, 이를 비밀로 할 수밖에 없었던 메리. 당시 하녀들이 겪을 수밖에 없던 삶.


이런 메리의 죽음으로 그레이스는 큰 혼란을 겪는다. 실신도 하고. 이것이 이 소설의 복선이다. 위기 상황에서 그레이스는 정신을 잃는다. 기억을 하지 못한다. 낸시와 주인인 키니어가 죽었을 때를 흐릿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세 번째 죽음은 그레이스도 관련된 낸시의 죽음이다. 그레이스가 마지막으로 만난 가정부 낸시. 그레이스와 비슷한 처지지만 낸시는 집주인의 내연녀 역할을 한다.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 오래 가지 못한다. 이를 죽음으로 표현한다. 한데, 그냥 죽음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지배층들의 윤리가 무너진다. 그러니 낸시의 죽음은 질투로 인한 죽음이어야 한다. 하층민들이 벌이는 질투. 상층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하층민 여성들이 통상 겪은 결과.


작가는 이렇게 세 죽음을 통해 당시 여성들의 삶을 퀼트처럼 잘 짜맞추어 간다. 여기에 상류층 여성들의 위선을 사이먼의 어머니나, 또 소령의 부인 등을 통해서. 더하여 남성들이 지닌 이중성. 위선들까지도.


읽으면서 계속 추리를 하게 만들지만, 작가는 아무래도 그레이스에게 더 많은 공감을 표하고 있나 보다. 그레이스가 서술자로 등장하는 부분에서 독자들도 그레이스에게 공감을 하게 만들고 있으니.


누가 살인자일까는 중요하지 않다. 그레이스의 삶을 통해서 당시 하층민 여성들의 삶을 들여다본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과연 그러한 삶이 지금은 달라졌을까 생각을 해야 한다. 어쩌면 그때보다는 보이지 않는 그런 차별이 보이기 시작했고, 보이지 않는 노동들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차별과 그림자 노동이 존재함을 생각해 봐야 한다.


  더이상 이런 그레이스들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 아니, 그래도 그레이스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지 못한 그레이스의 어머니, 메리, 낸시들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소설. 역시 애트우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다.


  읽으면서 캐나다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고 해서 검색을 해보니, 미국에서 애트우드의 이 소설을 원작으로 드라마로 만들었다고 한다.


  드라마를 본 사람들 평가를 몇 살펴보니 상당한 호평들이 많던데... 관심 있는 사람은 드라마를 찾아 보아도 될 듯하다. 


  소설을 먼저 읽고 드라마를 보아도 좋을 듯하고, 드라마를 본 다음에 소설을 읽어도 좋을 듯한데, 난 역시 드라마 쪽은 좀 거리가 멀어서 이렇게 소설로만 읽어도 좋은 소설이었으니...


<사진 출처> 넷플릭스/미드/그레이스(Alias Grace)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시녀 이야기],[증언들],[미친 아담 3부작 -오릭스와 크레이크, 홍수의 해, 미친 아담]에 이어 정말 애트우드 소설에 감탄을 하게 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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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수 있는 여자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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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살벌하다. 먹을 수 있는 여자라니... 먹는다는 행위는 삶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행위인데, 세상에 먹을 수 없는 여자도 있나 하지만, 있다.


먹는다는 행위가 능동적인 행위 같지만, 상당히 수동적임을 알 수 있다. 먹는다는 행위는 어떤 틀에 맞춰 있을 때가 많다. 사실 우리는 장소에 따라서 먹는 음식도 다르고, 먹는 방법도 다르지 않은가. 심지어는 의상까지도 다르게 해야 하니.


그렇다면 먹을 수 있는 여자라는 말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여자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다른 관계들에 의해 틀지워진 삶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가는 삶. 주인공 메리언 이야기다. 전도 유망한 변호사 피터와 연애 중인 메리언은 어느 날 피터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이유는 없다. 그냥 몸이 움직인다. 이것은 무엇일까? 피터라는 남성으로부터 조여오는 틀을 몸이 먼저 거부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도망친 메리언에게 피터는 결혼하자고 말한다. 그냥 그렇게 둘이 결혼을 한다면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때부터 메리언에게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이 하나 둘 생겨난다. 먹을 수 없는 음식이 생겨난다는 것은 메리언이 결혼을 했을 때 자신의 뜻대로 행동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는 것이다.


우선 직장을 그만두어야 한다. 남성이라는 성별을 지닌 친구를 만날 때도 눈치를 봐야 한다. 애를 낳으면 애에 종속되어 다른 활동을 할 수 없다. 또한 남편의 취향에 맞게 집안을 꾸며야 한다. 남편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등등.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생기고 이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자신의 취향에 맞게 자유롭게 먹었던 음식도 이제는 남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을 잃어간다.


그러니 먹을 수 없는 여자가 되어 간다. 하나 둘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이 늘어갈 때 메리언은 피터와 결혼을 앞둔 파티에서 또다시 도망친다.  다른 남자 덩컨에게 가지만, 덩컨 역시 메리언과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덩컨은 메리언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존재로밖에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덩컨은 오로지 자신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


메리언은 결국 피터와 헤어지게 되고, 직장도 다시 구하려고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메리언은 여자 모양의 케이크를 만든다. 이것을 먹는 메리언. 그래서 제목이 먹을 수 있는 여자다. 이중의 뜻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이제 자신의 의지대로 먹을 수 있게 된 메리언, 또 하나는 메리언을 먹을 수 있는 여자 케이크.


먹을 수 있는 여자는 여성의 몸을 한 케이크를 먹음으로써 메리언은 자신이 먹을 수 있는 여자임을 보여준다. 이제는 어떤 음식이든 제 뜻대로 먹을 수 있다. 이는 강요된 여성성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모습이다. 이제는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살아가려 한다는 선언이다. 


남자 또는 다른 어떤 관계에 종속된 삶이 아니라 자신이 주체로 살아가겠다는 선언. 이 선언이 바로 여자 모양의 케이크를 먹는 메리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애트우드가 쓴 거의 첫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음식을 비유로 들어서 여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실 천박하게 먹는다는 표현을 여성에게도 쓰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처음 이 제목을 보면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먹을 수 있는 여자는 자신에게 만만한 여자라고. 그러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어, 아니네, 하게 된다. 먹을 수 있는 여자는 세상을 당당한 주체로 살아가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되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 자신을 찾아낸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도 당당하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녀이야기]나[증언들] 또는 [미친 아담 3부작]과 같지는 않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흥미를 돋우는 소설이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애트우드의 첫소설, 그리고 다음 소설들에서 애트우드가 다루는 내용들이 어느 정도 나타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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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저택 폴라 데이 앤 나이트 Polar Day & Night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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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연대기]를 재미있게 읽었다. 한 작품을 재미있게 읽으면 다음 작품도 찾아 읽게 된다. 브래드버리의 이 작품 역시 [화성연대기]를 읽었기에 읽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핼로윈 데이라고 온갖 귀신들, 유령들 차림을 하고 즐기는 서양 축제. 우리나라에서도 이제는 핼러윈 축제를 즐기기 시작했는데...


이 소설은 그런 핼러윈 축제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시월의 저택에 핼러윈을 맞이하여 친족들이 모인다. 그런데 친족들의 구성이 특별하다. 인간 가족이 아니다. 유령 가족이다. 여기에 인간인 아이 티모시가 있다.


고양이도, 생쥐도 거미도 있고, 온갖 유령들이 시월의 저택에 모인다. 미라도 있는데, 이들에 대한 이야기 한편한편이 재미있다. 짧은 소설들이 실려 있는데, 각자 독자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서로 연결이 된다.


일종의 연작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읽으면서 가족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문학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은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특히 어린아이들에게는 상상의 이야기들이 현실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이야기가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면 문학은 자리를 잡을 수가 없게 된다. "에이, 그거 소설이잖아!" "소설 쓰고 있네!" 하는 소리는 사실이 아닌 허무맹랑한 소리, 들으나마나한 소리라는 의미로 쓰인다.


이런 반응이 주류가 되면 문학은 설 자리를 잃는다. 이 소설집에서 '오리엔트 북행 특급'이란 소설은 특히 이런 점을 생각하게 해준다. 창백한 남자, 그를 간호하는 여자. 하지만 남자는 합리주의 앞에서 죽어가고 있다. 이 남자의 병이 무엇인지 알게 된 여자는 남자를 합리주의에서 보호해주려 한다.


이때 남자가 생기를 얻게 되는 사건이 생기는데, 그것은 바로 아이들에게 유령이야기를 해주는 것이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에게서 남자는 생기를 얻게 된다. 이것이 바로 문학이다.


하지만 소설집의 끝부분에 가면 이 저택은 파괴되고 만다. 문학이 저 멀리 밀려난 시대를 상징하듯이.  


독자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면서 작가 역시 생기를 얻는 것. 아마도 문학이 쇠퇴하는 시기에 그러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우리와 함께 존재해야 한다고 브래드버리가 말하는 듯하다. 


또한 문학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 시월의 저택에 온갖 종류의 존재들이 함께 하면서 다양한 사건을 만들어 가듯이.


이렇게 문학에 대한 은유로 이 소설집을 읽어도 괜찮겠단 생각을 했는데, 이 점 말고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만화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미국에서 발간되었을 때는 삽화도 있었을텐데, 그 삽화까지 같이 실렸으면 참 좋았겠단 생각. 그리고 이 작품을 토대로 애니메이션을 만들면 참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이미 만들었는지는 확인해보지 않았다. 다만 유령을 다룬 애니메이션은 꽤 있으니...)  


이런 점에서 이 소설집은 아이들(청소년들)이 읽으면 좋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것은 소설 속에서 다양한 삶들에 대한 이해와 삶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원히 존재하는 유령들에게 입양되어 자라는 티모시에게 천 번 고조할머니(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 하면서 천 번을 거슬러 올라가는 할머니)가 넌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이때 티모시는 "아뇨. 여러분처럼 되고 싶지 않아요." (221쪽)라고 하면서 "...제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깨달으려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삶을요...."(221쪽)고 한다.


즉 죽음이 있기에 삶이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중한 삶을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함을 천 번 고조할머니의 말을 통해서 독자에게 전해주고 있다.


결국 유령이야기는 삶의 이야기다. 무한한 삶을 사는 존재들을 통해 유한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에게 삶을 돌아보라고 하는 것이다. 티모시라는 아이가 온갖 유령들과 함께 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문학의 이야기이자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통해서 상상 속에서 우리는 현실을 바라보는 거울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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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반양장) 창비청소년문학 107
천선란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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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끝에 실린 작가의 말로 이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뒤틀린 어른이 뒤틀린 아이를 만들고,그 아이가 자라 뒤틀린 어른이 되어 다시 뒤틀린 아이를 만드는 세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렇게 온전한 어른이 사라진 세상이 되기 전에, 상처와 슬픔이 무기가 되어 또 다른 출혈을 일으키는 세상으로 향하지 않도록, 그런 마음으로 썼다.' (389쪽)


불모지의 땅을 산 사람이 있다. 그 땅에 화원을 만들겠단다. 미친 소리로 치부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화원엔 식물들이 자란다. 나인은 그런 화원에서 자란 아이다.


어느 날 나인은 실종된 아들을 찾는다는 전단지를 발견하고, 그 아이가 사실은 죽었음을 알게 된다. 가출이 아니라 죽음. 죽음에 관련된 아이. 그리고 그를 은폐하는 어른들. 나인 역시 모른 체 하면 그만이다. 누구도 알려고 하지 않는 일이기에.


하지만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나인은 외면하지 못하다. 그러다 그 즈음 자신이 지구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외계인.


그렇다. 우리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외계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외계인이라고 부르면서 그를 인정하면 얼마나 다행일까 싶지만, 외계인이라 언급하는 순간, 다름이 차별이 될 가능성이 많아진다.


외계인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박원우는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한다. 물론 그의 가정형편도 거기에 한몫 보탰겠지만.


원우는 미친 놈 소리를 듣지만 그것으로 죽음에까지 이르러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권도현이라는 친구에게 밀려 죽게 된다. 그렇다면 권도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원우를 살리려 해야 했지만, 그의 부모는 원우의 죽음을 무마하려 한다. 없던 일로, 원우는 그냥 가출한 학생이 되어야 했다.


전후 사정을 숲으로부터 전해들은 나인. 나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친구들과 힘을 합친다. 물론 여기에는 친구들만이 아니라 어른들의 도움도 받게 되고. 원우의 문제는 해결된다.


다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인과 어울리는 친구들과의 관계, 이들은 나인을 무조건 믿어주고 함께 행동했다. 외계인이든 아니든 친구라는 관계가 달라지지는 않으니까. 


그렇지만 문제가 해결된 후 이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나인 또한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하고. 


그렇게 사람들은 함께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따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나인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보면 이 소설은 나인의 성장을 다룬 소설이 된다. 나인은 여러 일을 겪으면서 성장한다. 외계인이든 아니든 자신이 나고 자란 이 땅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한.                                        

이렇게 소설은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식물성을 띤 외계인 나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가 그것이다.


나인이 지구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지구에 뿌리를 내렸다는 말, 이는 바로 지구에서 함께 고통받으면서도 그것을 이겨내려는 삶을 선택했다는 말이다.


힘들다고 그냥 떠나버릴 수는 없음을. 그 힘듦 속에서도 삶을 찾아야 함을, 나인의 성장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 도현이나 주변 친구들이 원우를 대하는 태도는 다름을 차별로 인식하고 행동하는 경우다. 


작가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할 때,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할 때 우리가 종족이 다른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며 언제나 마음이 편안해졌다.'(389쪽)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다름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과연 이런 자세를 지닌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인의 친구인 현재나 미래처럼 무조건 믿어주는, 그래서 다름은 그냥 다름일 뿐인 그런 자세를 지닌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세상엔 도현이처럼 친구였다가도 그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해 배제하고 차별하는 태도를 지닌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그들이 행하는 행동이 소설처럼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겠지만, 죽음과 비슷한 상태로 몰아가지는 않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도현이 주변 사람들이 원우를 배척하듯이. 다름이 바로 차별이 되어 배제하듯이.


그런 사회가 잘못된 사회고, 그런 어른들이 많은 사회가 바로 뒤틀린 어른들 사회라면, 바로 이 뒤틀린 어른들 사회를 바로잡으려고 하는 나인과 같은 아이가 있어야 한다. 그런 아이들이 외계인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공연히 튀는 아이들이라고. 하지만 이런 아이들로 인해 뒤틀린 어른 사회가 재생산을 멈춘다. 이런 외계인 같은 아이들이 있어야만 뒤틀린 사회가 바로잡힐 수 있다.


소설이 흥미로우면서도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게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뒤틀리지 않은 외계인 같은 존재들을 우리가 찾으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으므로.


그러므로 이 소설을 읽고는 주변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 역시 뒤틀린 어른들이 아닌지 하고. 이런 뒤틀림을 보여줄 외계인 같은 존재들이 주변에 있는지를... 그리고 주변에 있다면 감사해야 한다.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


그들을 경원하고 몰아내려고 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뒤틀림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외계인을 주인공으로 했지만, 굳이 외계인이라고 하지 않아도 좋다.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생명을 죽이는 일에 분노하는 사람.


나인은 분명 외계인인 누브 족으로 나오지만, 이렇게 나인과 닮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사회에는 이런 외계인들이 많으니, 그들을 찾아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다. 찾으려는 마음을 먹는 순간부터 마음이 따스해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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