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차일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상력. 기발하다는 표현을 하면, 누구나 생각할 수 없고, 특별한 사람만이 생각할 수 있다는 쪽으로 여겨질 수 있다.


특히 작가들의 상상력에 대해서는 작가라서 지닌 상상력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렇기에 이런 상상력은 작가에게 맡기고 우리는 현실에 충실하자는 쪽으로 가기도 한다.


그런가? 상상력이 작가에게만 필요한가?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 자기만의 상상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을 글로 옮겨 남에게 읽히는 사람이 작가일 뿐이다.


옥타비아 버틀러 소설을 몇 권 읽었다. [킨]을 비롯하여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재미있게 읽었다.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기도 하면서.


이번 작품은 단편소설집이다. 일곱 편의 소설이 실렸다. 모두 다른 내용이지만,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단지 가상의 세계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바라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또는 우리가 겪지 않았으면 하는 세계가 그려져 있기도 하고.


첫작품인 '블러드 차일드'부터 그렇다. 테란이 틀릭의 숙주가 된다. 숙주가 되어 아이를 낳게 된다. 그것도 여성은 인간의 아이를 낳아야 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남성이 숙주가 되어 다른 생명체의 아이를 낳아야 한다.


이런 세상. 보호자가 필요한 세상이고, 수술을 통해서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는 현실임에도 누군가는 해야한다는, 그래야 테란이 보호를 받고 종족을 유지할 수가 있다. 즉 누군가의 희생으로 종족이 유지되는 세상이다.


테란을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틀릭을 외계 생명체로 바꾼다면, 외계 생명체가 인간을 보호하면서 자신들의 종족을 재생산하는 대상으로 인간을 이용하는 세상? 어쩌면 외계 생명체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키는 일들이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음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외계 생명체와 인간의 갈등과 공생을 다룬 소설이 하나 더 있는데, '특사'라는 소설이다. 외계 생명체가 지구에 온다면 침공일까? 그들과 공생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처음에는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아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겠지만, 소통하려는 노력 속에서 서로가 타협할 수는 없을까?


'특사'라는 소설은 외계 생명체와 공생하는 인간의 존재를 보여준다. 앞으로 우주 시대라면 그렇게 살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최근에 감염병이 창궐하는데, 감염병으로 인류가 글을 읽는 능력을 잃거나 말을 하는 능력을 잃은 사회를 그리고 있는 '말과 소리'라는 소설은 섬뜩하다.


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도구인 말과 글을 잃는다면 어떻게 될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넘어갈까? 그렇게 될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다 그럴 수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되고 인류는 혼란에 빠지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말과 글을 기억할 수 있다. 기억한다는 것이 질투를 유발할 수도 있긴 하지만 그들로 인해서 희망은 남아 있게 된다. 이 소설은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소설로 읽힌다.


이 소설집에서 무엇보다도 소설의 역할이 무엇인지,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마사의 책'이다. 신이 마사에게 인류를 구원할 능력을 주고 한 가지를 하라고 한다. 마사는 무엇을 선택할까? 그리고 마사는 자신의 선택을 기억하기를 원할까?


어쩌면 작가는 인류를 위해서 무언가 한 가지를 하는 사람이다. 작가의 책이 바로 그렇다. 인간에게 꿈을 주는 역할을 작품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 또 작품이 인간에게 주는 의미를 이야기하는 소설로 읽을 수가 있다.


소설 외에 두 편의 수필이 실려 있는데, 한 편은 버틀러가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짤막하게 쓴 글이다. 비록 짧지만 버틀러의 삶을 엿볼 수 있어서 좋은 글이고, 한 편은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재능이나 영감을 잊으라는 말, 오로지 습관에 기대라고 하는 말. 그렇다. 버틀러의 말대로 '습관은 실제로 나타나는 집요함이다'(279쪽)


이런 습관이 버틀러를 유명한 작가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버틀러를 흔히 SF작가로 분류한다. SF작가든 아니든, SF소설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버틀러의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과거, 미래, 현재에 대한 SF의 사고가 무슨 쓸모가 있을까? 대안적인 사고와 행동을 경고하거나 고려하는 SF의 경향은 무슨 쓸모가 있을까? 과학과 기술, 혹은 사회 조직과 정치 방향이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한 SF의 탐구는 무슨 쓸모가 있을까? 기껏해야 SF는 상상력과 창조력을 자극할 뿐이다. SF는 독자와 작가를 다져진 길 밖으로, '모두'가 말하고 행하고 생각하는 좁고 좁은 오솔길 밖으로 끌어낸다. 지금 그 '모두'가 누구든 간에 말이다.' (274쪽)


이게 어디인가? 버틀러의 소설이 바로 이렇게 '좁고 좁은 오솔길 밖'으로 우리를 끌어내고 있으니... 주어진 길에서 벗어나는 즐거움. 새로운 길을 걷는 즐거움. 버틀러 소설에서 느낄 수 있다. 그것이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엄마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 이우, 점점 눈이 보이지 않게 되어 섬으로 돌아온 남자 정모, 듣고 말할 수 있지만 어느 순간 말하지 못하게 되어 남들에게 듣지도 못한다는 소리를 듣는 아이 판도. 판도를 데려다 키운 이삐 할미.


섬에 사는 주요 인물 넷이다. 이 중에 소설을 이끌어가는 서술자로 등장하는 인물은 이삐 할미를 빼고는 셋. 


섬과 연결된 뭍에 사는 사람으로는 정모의 친구이지만 사업가 아버지를 둔 태원이 있고, 이우를 정모에게 맡긴 이우의 엄마 연수가 있다. 


태원이 간혹 서술자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는 섬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대비하기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그가 사는 삶은 섬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과는 반대의 삶, 즉 아버지 아래에서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정모는 모든 일을 접고 섬에 들어온다. 그가 하려는 도서관 만드는 일은 서울에서 하는 활동과는 상관 없다. 그는 섬에서 다른 삶을 살게 된다. 마찬가지로 소위 문제아라는 소리를 듣는 이우도 마찬가지다. 


이우가 어긋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누구에게도 이해를 얻지 못한 이우는 사고로 인해 섬으로 보내진다. 그간 살아왔던 삶과는 전혀 다른 삶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 


판도는 그렇다고 할 수 없지만, 아예 어린 시절에 혼자가 되어 이삐 할미의 손에서 자랐기 때문에 전의 삶과 지금의 삶을 비교할 수 없지만, 그가 말을 잃게 된 과정을 보면, 판도 역시 다른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정모, 이우, 판도는 섬에서 다른 삶을 산다. 이때 삶은 그동안 살아왔던 삶과 비교하면 긍정적인 쪽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태원 역시 다른 삶이긴 하지만 그 삶은 부정적인 쪽으로다. 정모의 말을 빌리면 학창 시절에 말썽피우던 태원에게서 느낄 수 없던 거리감을 돌아온 태원에게서 느껴진다고 했으니... 이는 돈만 아는 아버지 영도를 닮아간다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섬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뭍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 긍정적인 쪽으로 변화를 이끌어낸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섬에서 사는 사람들은 각자 섬이기도 하지만 또 연결되어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상처를 알아도 그 상처를 더 덧내지 않고 감싸 안아주는 생활들.


특히 소설의 처음에 등장하는 이우의 변화가 바로 '섬'의 긍정적인 모습을 잘 드러낸다. 이우가 점점 변해가는 모습.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 그러면서 자신을 긍정하게 되는 모습 속에서 소설은 '섬'이라는 장소가 주는 긍정성을 보여준다.


제목은 '당신의 아주 먼 섬'이지만, 갈 수 없는 섬이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가 닿은 섬도 아니지만, 열려 있는 섬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섬'이라는 제목을 지닌 정현종과 함민복의 시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 소설은 이 두 시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정현종 시는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이고 함민복 시는 '물 울타리를 둘렀다 / 울타리가 가장 낮다 /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모두 짧은 시다. 하긴 섬이 은 뭍에 비하면 작으니, 섬에 관한 시도 짧아야 한다.


그렇다면 소설은? 시보다는 길어야 하겠지. 이 시들이 하고 싶은 말을 정미경의 이 소설에서 다 하고 있다고 본다.


서정적 자아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통해 소설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섬, 그리고 그 섬을 어느 정도 엿본 사람들의 이야기, 모두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지만, 울타리가 길이 될 수 있는 사람들 관계.


우리는 모두 독립된 존재이기도 하지만 연결된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사실을 이 시들이 보여주고 있다면, 정미경은 세 인물을 통해서 닫힌 존재들이 조금씩 열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다.


이렇듯 작가는 '섬'이라는 장소를 통해서 사람들의 관계를 보여준다. 닫혀 있는 듯하면서도 열려 있는, 그렇다고 쉽게는 갈 수 없는 그런 섬,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관계임을.


당신은 이해하기 힘든 존재이지만 아주 먼 섬이 갈 수 없는 섬은 아니니, 당신에게 갈 수 있는 길은 열려 있다는, 당신이라는 섬이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지만 그 울타리는 길이기도 함을, 이 소설을 통해 생각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아들의 연인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미경 소설집을 읽다. 7편의 소설이 묶여 있다. 공통된 주제를 찾기 힘들지만, 소설이란 원래 삶을 표현하는 문학 아니던가. 그러니 삶에서 겪음직한 일들이 이 소설집에서 표현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전체적으로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욕망'에 대해서 생각했다. '욕망?' 무엇에 대한 욕망일까? 다양한 욕망이 있겠지만, 우선 '돈'에 대한 욕망을 꼽을 수 있겠다.


돈이라는 말, 자본이라는 말, 어느 정도는 생계에 꼭 필요한 돈. 이 돈을 위해서 살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대부분 돈 앞에서 무력해지는 인간들의 모습 아닌가?


'돈'은 어느 정도는 있어야겠지만, 더 많아지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이를 욕망으로 바꾸어보자. 욕망은 삶을 능동적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욕망이 충족된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내가 이룰 것을 다 이루었노라 한다면? 그 다음 삶은 어떤 모습을 띨까?


'너를 사랑해, 들소, 내 아들의 연인'에서는 돈을 매개로 욕망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안정된 자리를 잡지 못해서, 돈 때문에 위기 상황에 처한 자산관리사와 여전히 시간 강사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관계. 그것이 너를 사랑한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들은 사랑을 위해서 또다른 매개체를 필요로 할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것이 바로 '돈'이다. 자신들이 바라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돈'.  그 돈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이용해서 욕망을 실현시키려 하지만, 과연 그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 그들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까?


너를 사랑한다고 하는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는, 어쩌면 욕망의 크기 앞에서 자신들의 사랑을 이용하는 그런 관계. 이런 관계의 뒤틀림이 '들소'라는 소설에서 잘 나타난다.


조각가. 예술가다. 돈하고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주인공이 남편과 갈등을 하는 이유는 돈에 있다. 자신의 일을 돈과 관련지어 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상적인, 사회사업가라 할 수 있는 남편에게 반했지만, 함께 살아가면서는 그 점이 바로 싫어지는 이유가 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돈을 위한 예술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사회사업을 한다고 하지만, 그 사회사업에는 '돈'이 필수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 그것을 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그 사람을 떠날 수밖에 없다. 이별이든 죽음이든.


소설 속 남편의 죽음은 그래서 필연이다. 다만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찾는다면 다시 남편의 일에 대해서 욕망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작품이 들소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이미 사라져 버린 동물. 여기서는 이제 '돈'은 개입하지 않는다. '돈'이 개입하지 않을 때 예술은 자기만의 특징을 지니게 된다. 


'돈'에 얽힌 이야기는 '내 아들의 연인'으로 넘어가면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 대 관계의 문제가 된다.


가난한 사람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이 살아온 환경과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관계가 문제가 된다. 결국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관계 대 관계의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런 관계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차이, 그 사람을 욕망하지만, 그 사람이 지닌 관계는 용납할 수가 없는, 용납할 수가 없다는 말이 적확한 것이 개인으로서 만났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 주변의 사람들과 만났을 때는 문제가 도드라져 보이게 된다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욕망의 테두리에 개인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개인이 지니고 있는 관계들까지는 받아들이기 힘들고, 또 내 욕망의 테두리가 아닌 내가 지니고 있는 관계의 테두리로 확장하면 그 개인조차도 받아들이기 힘들어지게 된다.


사랑에도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관계가 있음을, 그러한 집단이 서로 다르면 어울리기 힘들어짐을 '내 아들의 연인'이라는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욕망의 끝을 보지 않으려는 몸부림, 아니 욕망의 끝을 본 다음에는 더 이상의 삶에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됨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바로 '밤이여, 나뉘어라'다.


늘 내 앞에 있던 존재, 천재라고 불리던 친구가 몰락한 모습,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나 역시 내 욕망의 끝을 보게 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나는 친구의 몰락한 모습을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그 친구 역시 아마도 자신의 욕망의 끝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견딜 수 없게 된다. 결국 순간이여 멈추어라 하고 말하는 순간, 사람의 삶은 끝나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늘 욕망해야 한다. 인간이 용납할 수 없는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추동하는 욕망. 그러니 돈을 위해서 사랑을 이용하는 것은 관계의 파탄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또한 맹목적인 이상 추구 역시 파탄날 수밖에 없다. 현실을 떠난 이상은 공허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욕망을 갖지 않아서도 안 된다. 욕망이 없는 상태, 이를 갈망이 없는 상태라고 한다면 그때부터는 삶이 무의미해진다. '밤이여, 나뉘어라'에 나오는 천재처럼. 


결국 이 소설집을 읽으며 어떤 욕망을 지녀야 하는가? 욕망이라는 말이 부정적이라면 어떤 갈망을 지녀야 하는가로 바꾸면 된다.


다양한 내용의 소설들이지만, 돈에 대한 욕망이 결코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함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과 욕망(갈망)을 상실했을 때의 인간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


삶이란 이렇게 다양한 욕망과 갈등들이 얽혀 있는 것임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지의 제왕 - 전6권 세트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읽어봐야지만 하다가 미루고 또 미뤘던 소설. 반지의 제왕. 영화를 먼저 보아서 그런지, 굳이 소설을 읽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에 선뜻 손에 잡지 못했던 소설이다.


그러다 영화와 소설이 같지 않음을, 서로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옴을 알고 있으면서 읽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톨킨의 이 작품을 르 귄이 엄청나게 칭찬하고 있으니, 안 읽을 수가 없다.


사서 소장하면서 꼼꼼하게 읽으면 좋겠지만, 그렇게까지는 못하고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다. 예전 판본이다. 예전 판본답게(?) 글자도 작고 빽빽하다. 눈이 피곤하다. 게다가 6권이나 되지 않나.


1부, 2부, 3부 각 2권씩.


오랜 시간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지만, 읽다보면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음을 깨닫게 된다. 그만큼 흥미롭다. 물론 읽으면서 영화에서 받던 인물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영화와 다른 점을 찾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놀란 점은 호빗 족의 나이다. 프로도를 어리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는 영화에서 호빗들이 작은 키로 나오기 때문에 착각한 것이다. 소년의 모험이 아니다. 호빗의 나이로 프로도는 50이 되어서야 모험에 나서게 된다. 


함께 모험에 나서는 샘이나 메리, 피핀 역시 어린 나이라고 할 수 없고. 하지만 나이가 중요하랴? 자신의 공간을 떠나지 못했던 존재가 다른 공간을 여행한 다음에 다시 돌아오게 되는 성장소설의 구조라고 해도 좋다.


환상적인 장면이 많이 나와 환상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인간이 중심이 된 세상만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이 지금처럼 문명을 이루지 않고 살던 시대, 자연과 공생하면서 살던 시대를 생각하면, 이 소설에 나오는 환상적인 장면들은 어떻게 우리 인간이 자연을 떠나게 되었나를 생각할 수도 있게 한다.


그래서 엔트 족들이나 요정들의 이야기를 그냥 환상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이제는 자연과 소통을 할 수 없게 된,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 1기, 2기, 3기라고 시대를 구분하고 3기가 반지의 시대라고 하지만, 이 반지의 시대는 아직 인간이 자연과 분리가 되지 않은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반지의 시대가 지나면 인간의 시대가 되고, 자연은(요정이나 엔트와 같은 다른 존재들은) 뒤로 물러나게 된다.


이 장면을 읽을 때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에서 동물들의 크기가 점점 줄어드는 장면, 인간이 철(총)을 이용해 신을 죽이는 장면이 떠올랐다. 톨킨은 이 소설에서 인간이 죽이지 않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히 그들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인간이 중심인 시대로 흐르게 됨을 보여준다.


반지를 운반하는 사명을 띤 프로도, 그를 수행하는 샘, 그리고 같은 호빗족으로 프로도와 함께 하겠다는 메리와 피핀, 여기에 여행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아라고른(영화에서는 아라곤으로 나온다)과 요정 레골라스, 난장이 김리 그리고 보로미르. 이들을 인솔하는 마법사 간달프.


이야기는 단순하다. 반지를 없애기 위해서 조력자들과 함께 떠난다. 그 과정에서 갈등도 겪고, 어려움도 겪는다. 그러나 결국은 반지를 없앤다. 


단순히 이렇게만 판단할 수가 없음을 소설을 읽어가면서 알게 된다. 반지를 운반하는 여정에 함께 하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소설은 빌보가 쓴 이야기를 프로도가 이어서 쓰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의 모험이 이야기로 전승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 반지를 운반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프로도는 책을 끝내지 않는다. 책을 끝낼 사람은 샘이다.


프로도가 끝까지 반지를 운반하는데 함께 했던 충실한 조력자 샘. 샘은 호빗 마을에 돌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모험의 끝이다. 영웅들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들의 삶으로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샘의 말로 끝난다.


"자, 내가 돌아왔어."(6권 228쪽)


소설은 위대한 여정을 끝난 인물들의 위대한 삶으로 끝나지 않는다. 혁명은 위대함을 넘어서 일상으로 돌아와 일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 때 완성된다.


파괴된 것들의 재건. 일상성의 회복. 여기에 영웅은 퇴장해야 한다. 소설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프로도로 끝맺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이야기를 완성하지 않고 샘에게 다음 이야기는 샘의 이야기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이런 점에서 왕이 된 아라고른으로 이야기를 끝맺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위대한 마법사인 간달프도 또 반지 운반자였던 프로도도 모험의 시대가 끝났을 때 물러나야 한다. 그들이 그렇게 모험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일상의 회복 아니겠는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살아가는 사회. 그런 모습이 일상이 된 사회여야 한다고 톨킨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그들의 모험은 일상에서 끝나야 한다. 그러니 샘이 자신이 돌아왔다고 하는 말로 소설을 끝맺을 수밖에 없다.


반지를 없애고 사우론을 퇴치하면서 소설이 끝날 거라 생각했는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호빗으로의 귀환. 그리고 호빗에서의 또다른 일들. 그 일들이 끝나고서야 비로소 일상이 회복됨을 보여주고 있어서 더 좋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그냥 읽어보면 될 것을.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로이카 2023-07-29 1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안녕하세요? <밤의 언어>에서 르 귄이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톨킨을 알게 된 사람들을 부러워 한다고 고백했었지요. 르 귄의 <반지의 제왕> 해석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늘 kinye91님이 읽으신 것을 몇 년 후에 읽고 있더라구요. 어쩌면 이 <반지의 제왕>도 몇 년 뒤에는 읽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kinye91 2023-07-29 13:22   좋아요 1 | URL
에로이카 님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르 귄의 말을 조금 바꾸면 저는 조금 더 젊은 시절에 르 귄의 작품을 읽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요. 소설도 또 다른 글들도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르 귄이 말한 작품들을 읽고 싶어지기도 했고요. 저 역시 르 귄이 말한 작품들을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미친 아담 미친 아담 3부작 3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소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부다. 제목은 미친 아담이다. 1권에 나왔던 게임의 이름이기도 한데, 멸종된 동물의 이름을 불러주는 집단, 또는 게임이었다.


아담1이 신의 정원사 집단을 이끌고, 2권에 등장했던 토비가 거기에 참여했다가 나오게 되는 과정, 그리고 그들이 인류가 절멸하는 해까지 오게 된 과정을 거쳐 이제는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서술하고 있다.


인류가 멸절되면 디스토피아라고 할 수 있는데, 크레이크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했다. 새로운 인류를 통해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인류를 창조하려고 했는데, 그들을 크레이커라고 부른다.


크레이커들은 평화주의자다. 그들은 육식을 하지 않는다. 또한 폭력을 모든다. 성욕에 휩싸이지도 않는다. 그러니 이들만 있느면 세상은 평화로울 수밖에 없다. 자연과도 마찬가지다. 크레이크가 원했던 세상이 이런 세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류는 신의 홍수에서도 살아남았다. 멸절되지 않았다. 노아는 자기 가족들과 살아남았지만, 크레이크가 일으킨 질병은 모두를 멸절시킬 수가 없었다.


신의 정원사들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나 미친 아담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평화주의자니까, 그런 세상에 살아남아도 크레이커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범죄자들이 모두 없어지지 않았다면? 여기서 고통공 죄수들이 나온다. 토비를 괴롭혔던 인물도 들락날락했던 감옥. 이곳에서 살아남은 자들에겐 인간성이란 없다.


그렇다. 이들은 살아남아서 사람들을 사냥한다. 동물들뿐만이 아니라. 또한 여자들을 강간한다. 강간하고 쓸모없다고 판단되는 여자들은 죽인다. 그런 욕망만 남아 있는 자들이다.


이제 살아남은 토비와 동료들, 또 크리이커들에게 그들은 커다란 위협이 된다. 생명이 위태롭게 된다. 특히 폭력을 모르고, 거짓을 모르는 크레이커들은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기 쉽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과 싸워야 한다. 그들을 물리쳐야 한다. 토비와 젭은 그렇게 그들을 물리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토비와 가까워진 블랙비어드라는 크레이커에게 글을 가르친다.


이제 이야기 전달자 토비가 사라지면 이야기는 블랙비어드가 이어받아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블랙비어드 역시 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이제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로 전환이 된다. 사람들은 다시 시작한다. 3권은 1,2권을 거쳐 대단원을 장식한다. 크레이크가 질병을 전파하기 전부터 있었던 일이 이번에는 젭을 통해서 전개된다. 젭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이런 젭의 이야기는 토비를 거쳐서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리고 크레이커들과 살아남은 사람들, 또 동물들이 협력하는 장면이 나온다.


새롭게 시작하는 지구다. 새롭게 탄생한 인류도 나온다. 기존 인류와 크레이커들의 혼종. 그렇게 세상은 다시 시작한다.


세 권을 합치면 1,700쪽이 넘는 방대한 양이지만, 읽기에 지루하지 않다. 게다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넘나들기에 여러 생각을 할 수가 있게 된다.


젭을 통해서 현대 컴퓨터 사회의 문제점을 알 수 있게 되고, 정보를 통제하는 자들이 어떤 권력을 누리는지, 그런 세상에 사는 것이 어떤 위험성이 있는지도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런 사회가 소설처럼 한 순간 붕괴되지는 않겠지만, 작가는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살아야 하는지, 자연과 어떻게 관계맺어야 하는지, 또 다른 존재들과 맺는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이 3권은 소중하다. 새로운 삶들을 만들어가는 모습이 나오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인류의 모습이.


그럼에도 작가는 완전한 유토피아는 없음을 젭의 죽음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완전한 유토피아란 없다. 불완전한 세상을 살아갈 뿐이다. 다만, 그 불완전한 세상에서 우리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함을,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아주 흥미로운 미친 아담 시리즈.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한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