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모옌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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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소, 삼십 년 전의 어느 장거리 경주'


다 다른 내용이지만, 공통점을 굳이 찾으라면, 주인공들이 잘사는 사람,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투철한 공산주의 사상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하층민, 우리가 서민이라고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공산주의가 자리를 잡아갈 무렵, 만인이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지만, 과연 그런 세상이 왔을까, 이들은 혁명 전후를 비교하지만, 혁명 이후에 무엇이 나아졌는지 묻고 있다.


아니, 혁명을 통해서 과연 사람들이 지닌 기본적인 감정을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점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겪게 되는 여러 일들이 체제를 막론하고 일어날 수 있음을 모옌은 보여주고 있다.


그것도 공산주의가 한창 자리를 잡아가야 할 때를 배경으로 그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별반 다르지 않음을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공산주의 사회의 허구성, 폐쇄성, 폭력성을 직접적으로 고발하는 소설도 아니다. 어느 체제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경직된 관료들, 그런 사회에서도 나름대로 융통성을 발휘해서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 소설에 잘 나와 있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읽다보면 그 체제에서도 참 많은 문제들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체제의 우월성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살피고, 그들이 잘살아가는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해야 함을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평생 모범 노동자로 살던 사람이 정년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정리해고 되는 모습, 그런 사회가 어찌 공산주의 사회겠는가? 체제와 상관없이 이윤을 남기지 못하는 공장은 사라지고, 노동자들은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게 되는 처지. 그들을 도와줄 체제는 없다.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에 나오는 주인공은 살 길을 찾다가 연인들이 사랑을 나눌 장소를 만들어 돈을 버는 라오 딩, 이 소설에서 딩 사부로 불리는 사람이다. 그가 겪는 일은 우리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각자도생. 이것을 이 소설은 유머러스한 문체로 풀어가고 있다.


'소'는 더 해학적이다. 우리나라 김유정의 소설을 연상시키는 소설인데, 불까기한 소를 살리기 위해 밤새도록 끌고다녀야 하는 순박한? 시골 소년과 노인. 이들의 노력에도 소는 죽고, 그 다음이 풍자적이다. 그 소를 키우는 생산대에 주지 않고 자신들이 요리해 먹은 간부들이 식중독에 걸려 죽을 고비를 겪는 내용.


그렇다. 어떤 사회에서도 윗사람들은 잘먹고 잘산다. 그들은 없는 사람들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특출난 재주가 있다. 그런 재주를 이 소설에서 잘 볼 수 있다.


마지막에 실린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에서 '우파'로 몰리면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지만, 우파들이 어떻게 우파가 되었는지를 해학적이고 풍자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냥 우파가 필요했을 뿐이다. 세상에 행진할 때 오른발이 먼저 나갔다고 우파라니?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어느 마을이든 우파가 꼭 필요했기에 이런 이유로도 우파가 될 수 있었음을, 마을의 장거리 경주를 배경으로, 과거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소년의 눈으로 본 그 우파나 또 그 마을 사람들의 모습인데...


오래 전 마오쩌뚱이 중국을 공산주의 사회로 만들려고 했던 시대에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음을 모옌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고, 해학적으로 표현한 이 소설들을 통해서 경직된 사회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있음을, 그런 것이 바로 삶임을 알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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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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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소설에는 어떤 특징이 있다. 사회 문제를 다루면서도 개인을 놓치지 않고, 또한 사랑이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랑이 서로를 파멸로 이끌기도 하고, 구원으로 이끌기도 한다. 어쨌든 사람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그의 소설을 통해서 생각하게 되는데...


이 소설에서도 어김없이 사랑이 나온다. 그런데 이 사랑이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다. 서로 소통이 안 되는 사랑이다. 사랑이 개인을 넘어서야 하는데, 개인에 갇힌 사랑이 이 소설에서 사람들을 파국으로 이끌게 된다.


하지만, 그런 개인에 갇힌 사랑도 개인의 소멸로 끝나지 않음을, 결코 감출 수 없음을, 어떻게든 살아남아 개인에 갇힌 사랑이 어떤 일을 불러일으켰는지를 보여주게 된다.


소설은 현재로부터 시작한다. 입양된 아이. 엄마를 모르는 아이. 여기까지는 상투적이다. 친부모를 찾아 한국에 온다는 설정. 우리가 많이 본 상황 아닌가.


그런데 한국에 와서 상황이 복잡해진다. 진실이 안개 속에 갇힌다. 김승옥 소설 '무진기행'처럼 짙은 안개가 친엄마를 찾는 여정을 가린다.


그 안개는 세월이 만든 안개가 아니다. 사람들이 만든 안개다. 사람들이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과거다. 그러니 그들은 가린다. 소설 속에서는 이를 매생이국에 빗대어서 이야기하고 있다. 겉으로는 별로 뜨거워 보이지 않으나 속은 엄청 뜨거운 매생이국.


엄마를 찾아 온 이야기가 지나면 엄마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첫번째 장의 주인공은 이제 '너'로 나온다. 그리고 엄마의 과거이야기. 다음은 엄마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 마지막 부부분에서는 양관의 주인이 된 또 다른 남자의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통해 소설은 진실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간다. 그러나 안개는 완전히 걷히지 않는다. 그 안개 속에서 또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은 바로 독자의 몫이라는 듯이.


소설 속에 나온 조선소 노동자들의 파업.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겪었던 문제다. 이 파업을 둘러싸고 깊은 심연이 생긴다. 서로 건너갈 수 없는 심연.


파업 중에 노동자들이 사망하고, 그 사망원인을 한 사람에게 전가한다. 그 역시 견디지 못하고 투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둔 아이들의 개인에 갇힌 사랑이 서로를 더 견디지 못하게 한다.


여기에 또다른 소통 불능의 집. 양관이 등장하고. 하지만 양관은 소통불능의 집에서 소통의 집으로, 서로 건널 수 없게 된 심연을 건널 수 있게 하는 날개 역할을 하게 된다. 심연 속에 갇힌 외로움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 양관이다. 


말들을 모아 들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 즉 말을 가두지 않고 날아다니게 하는 것. 양관은 바람의 말 아카이브가 된다. 이렇게 엄마를 찾아온 카밀라는 결국 엄마를 만난다. 거기까지다. 그 이후는 읽는 사람들이 상상해야 한다.


입양과 파업과 죽음. 그리고 아버지를 찾는 과정이 교차하면서 소설은 점점 흥미를 더해간다. 각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장면. 


제목과 연결지어 생각해 본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다음에는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고 소설이 시작되기 전에 나온다.


소설을 읽다 보면 죽은 엄마의 말로도 이 구절이 나오는데 (228쪽) 세월이 흘러도 사라질 수 없는 사랑이다. 그리고 이 사랑이 결국은 심연을 건너게 한다. 사랑은 사람으로 하여금 심연을 건널 수 있게 날개를 만들어준다.


양관이 바람의 말 아카이브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흥미진진하게, 부모찾기라는 서사로 읽을 수 있지만(엄마는 찾았지만, 아빠가 누구인지는 읽는 사람이 추측해야 한다), 그보다는 무언가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사랑으로 심연에 빠질 수도 있지만, 다시 사랑으로 심연에서 빠져나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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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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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보이', 경이로운 소년이다. 초능력이다. 남의 생각을 읽을 줄 아는. 남의 생각을 읽을 줄 안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다른 사람에게 공감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공감하면서 공명할 수 있는 능력. 이 공명의 능력은 혼자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공명은 퍼져나가야 한다. 물결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듯이, 공감은 공명을 통해 사람들에게 퍼져나간다. 이런 공감의 능력, 공명이 바로 우리들을 좀더 나은 삶으로 이끄는 동력이 된다.


이 소설은 사고로 아빠를 잃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빠를 잃는 순간, 특별한 능력을 얻게 된다.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냥 그렇게 초능력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면 이 소설의 배경인 1980년대를 빼놓은 것이 된다.


전두환 독재시대... 많은 사람들이 제 할 말을 못하고 살던 시대. 자기 마음을 감추고 살아야만 했던, 그런 시대에 공감하는 능력, 사람들과 공명하는 능력은 초능력이다. 그리고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아이를 통해서 사회의 문제를 드러낸다.


아빠, 결코 애국자와는 거리가 먼 아빠가 간첩을 잡기 위해 희생한 사람으로 둔갑한다. 정보부에 의해서. 이는 자신이 권력을 쥐기 위해서 사건을 조작하던 당시 권력을 추구하던 인간들의 모습을 권대령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나타낸다.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인간들까지.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등장해야 한다. 고문당하는 사람들, 그 마음을 읽었기에 견딜 수 없었던 주인공. 그가 탈출해 만나는 사람들. 그들이 겪어야 했던 시대의 아픔. 그 아픔을 알아가면서 그도 조금씩 성장해 간다.


물론 그 아픔을 알게 되면서, 사람에게 마음을 주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은 점점 사라진다. 당연한 일이다. 이미 자신의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기 때문에, 그 사람 이외의 사람들 마음을 자연스레 읽을 수는 없게 된다.


그렇다고 그 마음 읽는 능력을 온전히 잃게 되지는 않는다. 다른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아닌,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있는 정답을 찾는 행위가 아닌, 질문을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사람들 마음을 읽게 된다.


이런 전개 방식으로 인해서, 소설은 주인공의 엄마를 통해서 분단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강토로 살아가려고 하는 희선을 통해서 1970년대 박정희 시대를 소환하기도 한다.


1987년이 되기 전까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시기를 거쳤던 우리나라. 그 시기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다른 사람 마음을 읽는, 고아가 된 주인공 김정훈을 통해서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1986년을 거치면서, 1987년... 소설은 그 87년에서 끝난다. 우리 시대의 겨울도 그렇게 끝났으면 좋으련만, 지금 우리는 그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으니, 소설 이후의 세계를 우리는 살고 있다.


여전히 우주는 젊고, 우리는 할 일이 있다. 소설의 끝에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 만약 누군가 그런 짓을 하려고 든다면, /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 뭐라도 할 것이라고 /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 우린 혼자가 아니라고' (319쪽)


아직도 갈 길은 멀지만, 그만큼 우리에게 당도하지 못한 밝고 따스한 별빛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그 빛들은 언젠가 도달할 것이라는 믿음은 잃지 않는다.


답이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답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임을, 그 답을 제대로 찾기 위해서는 질문을 잘해야 함을 이제는 알기 때문에...


마음을 읽는 능력을 잃어가지만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질문을 하게 되는, 이제는 주변을 볼 수 있게 되는 주인공처럼, 그렇게 우리는 지내왔기에.


그럼에도 역사는 직선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세상은 단선적이지 않다. 복잡하게 나아간다. 앞으로도 옆으로도 때로는 뒤로도. 하지만 소설에서 말하듯이 이미 겪은 일들은 우리에게 답을 찾는 능력을 주었다. 소설에 바보와 모범생과 천재의 읽기가 나오는데, 적어도 우리는 바보의 읽기는 끝냈으므로.


처음에는 상황이 비극적이지만 밝고 경쾌하게 진행되던 소설이 조금씩 무거워지더니, 우리나라가 거쳐온 독재 정치를 정면으로 다루고, 1987년으로 나아간다. 


고립된 개인,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각한 개인들의 사회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고 공명하는 사회로 나아간 우리 사회의 모습을 사고로 초능력을 얻은 주인공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가볍지만 무겁다고 할 수 있고, 무겁지만 경쾌한 전개를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소설 마지막 부분, 행갈이를 한 그 문장들... 왜 2023년인 지금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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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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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독립운동 역사에서 슬픈 학살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슬픈 학살? 이런 말이 성립할 수 있나?


학살은 잔인하다고 표현해야 하지 않나? 하지만 잔인함보다도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는 사건이 바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일어났다. 소위 말하는 민생단 사건.


스탈린이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킨 이유가 여럿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조선인들이 일제의 첩자노릇을 하지 않나 하는 의심. 그 의심을 송두리째 없애기 위해서 강제 이주를 시켰다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민생단이란 단체는 독립운동에서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죽이게 하는 역할을 했다. 나라를 구한다는, 여기에 세상을 구한다는 거창한 명분을 담고 행동한 사람들이 서로를 믿지 못한다? 이는 서로를 죽임으로써 그 믿지 못함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니...


소설은 김해연이라는 지식인을 서술자로 택한다. 그는 독립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러니 소위 만철(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근무한다. 식민지 시대, 일제에 부역하는 일을 하는 것. 그 일에 그는 잘못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게 지내던 그에게 이정희라는 사랑이 찾아오고, 어느날 이정희가 죽었다고, 그 죽음에는 독립운동이 관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랑을 잃고 폐인처럼 지내던 그는 용정에서 간도로 가고, 거기서 이정희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고, 여옥이라는 여인과 다시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 또다시 일본 토벌대에 의해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는 공산주의 조직에 가담하게 되고, 무장투쟁을 하는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학습하고 무장투쟁을 위한 몸을 만들게 된다. 이때 바로 민생단 사건이 소설에 등장한다.


민생단, 첩자로 일제에 독립군의 활동을 알려주던 역할을 하는 단체라고 여기고, 민생단원을 색출해 제거하기로 한다. 하지만 민생단원이 누구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결국 민생단은 자신들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상대를 숙청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다.


저자가 민생단원이다, 하면 총살이다. 그냥 죽음이다.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이렇게 죽어간 독립운동가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자신과 사상이 다른 사람을 민생단원으로 몰아 처단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음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중학시절 뜻을 같이 했던 네 명의 인물들이 어떻게 다른 길을 가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지를 이정희를 사랑했던 김해연을 통해 하나하나 밝혀지게 된다.


서로를 팔아버리는 이유가 어쩌면 한 여성 때문일 수도 있음을, 자신의 개인적 사랑 때문에 이들은 서로를 죽이기에 이르게 되고...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은 김해연은 자신의 복수를 하지 못한다. 왜? 그에게는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에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는, 아이들의 아버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본 다음에는 그를 죽일 수 없게 된다.


그는 역사의 흐름에 휘말려 서로 죽이는 관계가 된 친구들과 다른 위치에 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랑을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정희를 둘러싼 네 명의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죽이게 되지만, 과연 그것이 사랑일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다. 소설에서 사랑을,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김해연뿐이고, 이정희는 그것을 깨닫는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실린 이정희의 편지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바로 세상을 구하려고 뛰어든 사람들, 어떤 사상으로 무장하기 전에 바로 그들을 움직인 것은 사랑 아니겠는가? 그러던 것이 사상으로 인해서 사랑을 잃게 되면 죽음이 찾아오게 된다. 사랑을 잃고 사상만으로 건설한 세상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일 수 있음을, 그런 세상은 만들어질 수 없음을, 김해연이 겪어온 일들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다. 이 세상은 지옥이지만, 이 지옥에서도 천국을 맛볼 수 있음은 바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계산하지 않는 사랑. 그런 사랑을 본 김해연은 복수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가 복수를 한다면 그 자신 또한 사랑을 버린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우리나라 역사에 부끄러운 과거로 남은 민생단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그럼에도 사랑을 잃지 않아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사랑에 있음을, 사랑이 없는 세상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임을, 그 사랑은 집착이 결코 아니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개인은 개인으로 살아남아야 함을, 그냥 역사 속에 자신을 묻어버리면 그때 그에게 사랑은 올 수 없음을, 그에게는 오로지 사상만이 남고, 그 사상은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죽일 수 있음을 김해연과 그가 만나는 다른 인물들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김연수 소설은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그 역사적 사건이 한복판에서도 개인을 중심에 놓고 있다. 앞에 읽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도 그랬는데, 이 소설 역시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개인의 사랑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정희가 어떻게 죽게 되었을까? 과연 범인은 누구인가 하는 생각에 끝까지 읽어야만 전모가 밝혀지는 소설이기에 흥미진진하게 읽게 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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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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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반. 소설은 이 시기를 배경으로 전개되고 있다. 1991년을 중심으로 1990년에 벌어진 일들, 그리고 그 일들과 관련하여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재로 점점 깊어지고 있으며, 공간 역시 우리나라에서 외국으로 점점 넓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필연의 세계에서 우연의 세계로 들어가는 시대, 또 당위의 시대에서 선택의 시대로, 집단에서 개인으로 넘어가는 시대를 다루고 있다.


서술자는 소위 운동권이라 불리는 학생이다. 그러나 운동권이 지니고 있는 당위와 필연은 1990년을 기점으로 변하게 된다.


소위 공산권의 몰락. 그리고 해외여행 자유화. 우리나라에 불어닥친 이런 바람들로 인해서 세상을 변혁하겠다는 필연의 세계에 자신들을 올려놓았던 사람들이, 그 세계에서 내려와 우연의 세계에서 자신의 선택을 강조하는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또한 집단 윤리가 중시되고, 집단 윤리에 따라 희생이 강요되던 세상에서 개인의 선택이나 감정을 중시하는 시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런 모습을 작가는 90년대 만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운동권으로 불리는 사회에서 개인의 사랑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초반에 그려지고 있지만, 그런 사랑으로 인해서 소설은 과거의 인물들을 불러내게 된다.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지닌 정민과 내가 소설의 중심에 있다면, 이 나를 중심으로 강시우(이길용)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어쩌면 나를 통해 들려주는 강시우의 이야기를 통해서 필연의 세계에서 우연의 세계, 당위의 세계에서 선택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강시우의 과거 이야기를 통해 우리나라 현대사의 한복판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1960년대 필로폰 밀수부터 시작해서, 노동자, 광주민주화운동 이후의 이야기, 노동자를 대하는 지식인들의 태도, 이길용을 강시우로 변신시키는 정보당국의 모습...


여기까지가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살아가는, 필연과 당위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라면, 이길용을 만난 상희의 변화, 그리고 상희의 죽음을 알게 된 이길용이 강시우로 살아가게 되는 모습에서 이제는 필연에서 우연으로, 당위에서 선택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프락치로서의 삶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를 이용하는 삶. 자신에게 주어진 흐름을, 자신이 선택함으로써 자신 인생의 주체는 자신임을 보여주는 강시우의 모습. 그런 모습을 통해서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개인은 속절없이 그 흐름 속에서 잊혀져 가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소설을 통해서 찾아보려는 노력을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강시우의 모습을 통해서, 과연 우리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잃고만 살 수 있는가? 아니다. 우리는 그런 흐름 속에서도 자신을 찾을 수 있고, 또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을 강시우가 된 이길용이 보여주고 있다. 소설 제목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우리는 자신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점. 그 점을 시대의 흐름 속에 휩쓸려 살아가던 나와 강시우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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