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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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우리나라 부를 대표하는 곳. 부자들이 사는 곳. 이곳 아파트 값이 얼마나 비싼지 보통 사람들은 전세로 들어가 살기도 힘들다. 일반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하지만 강남이 처음부터 이렇게 부촌이었을까? 아니다. 강남은 강북에 비해 허허벌판이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곳이 바로 강남이다.


이 강남 개발을 둘러싸고 얼마나 많은 이권들이 오갔을까? 이제는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지만, 강남 개발로 떼돈을 번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들이 떼돈을 벌 때, 순전히 자신의 노력만이 아니라 운과 연줄이 작동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강남 개발을 둘러싼 이야기. 역사 책이 아니라 소설로 만날 수 있다. 바로 이 책이다. 강남몽. 우리나라 고전소설에 '몽(夢)'자 들어가는 소설이 많은데 이는 현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꿈을 빌려온 것이다.


황석영 역시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사람살이가 어쩌면 꿈과 같이 덧없는 가상의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378쪽. 작가의 말에서)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강남몽'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유를 대고 있다.


즉, 강남 개발에 뛰어들어 떼돈을 번 사람들의 삶이 가상 현실과 같다고, 그들이 사는 삶은 진정 우리가 추구하는 삶일까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소설이 문제적 개인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이 강남몽은 강남 개발을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리들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주요 인물이 5명이다. 이들은 서로 얽히고설킨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개발에 따르는 인물 군상을 황석영이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시작은 박선녀다.(1장 백화점이 무너지다) 유흥업소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박선녀는 김준의 내연녀가 되는데, 김준은 일제시대 일제의 정보원 노릇을 하다가, 해방 후에는 미군 정보국에 붙어 지낸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바탕으로 정보를 얻어 은퇴한 뒤에 개발 사업에 뛰어든다. 이렇게 김준의 이야기가 펼쳐진 다음에는(2장 생존만으로는 부족하다) 부동산업자가 등장한다.(3장 길 가는 데 땅이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세사기에도 공인중개사가 개입되어 있다고 하는 말들이 있는데, 당시는 더했다. 부동산업자와 짜고 땅값을 올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개발과 관련된 유흥업소, 건설업자, 그리고 부동산업자가 나왔으면 다음에는 누가 나와야 할까? 소설은 현실을 반영하듯이 조폭들이 등장한다.(5장 개와 늑대의 시간) 개발이 되면 상가가 많아지고, 이 상가를 끼고 주먹들이 진출하는 것이다. 단지 주먹만으로? 아니다. 이들 역시 권력을 끼고 활동을 한다. 


강남 개발을 둘러싼 하이에나들이라고 할 수 있는 네 주체가 나왔다. 이들의 삶은 부를 향해 가고 있지만, 그런 부는 모래 위에 지은 집에 불과하다.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소설은 '몽'자를 달고 있는 역할을 하듯이 미리 손을 털고 나온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들 몰락한다.


현실의 부귀영화가 덧없다고 하는 '몽자류' 소설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고전소설의 결말을 따라가면, 이 중 누군가가 깨달아야 한다.


"아, 이것이 아니었구나!" 


현시대에 이렇게 고전소설의 주인공처럼 깨달을까? 아니다.이들은 실패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고, 다른 더 강한 외부 조건을 향해 가려고 할 것이다. 마치 국내 자산이 부족하면 외국 자산을 끌어오듯이.


나라 경제가 파탄났을 당시 국제 통화 기금(일명 IMF)에서 기금을 받고, 그들이 제시한 대로 노동유연화 정책을 펼치게 된 것처럼, 현실은 고전소설에서 말하는 깨달음으로 가지 않는다. 그냥 없는 사람만 더 힘들어질 뿐이다.


그렇다고 소설에서까지 이렇게 현실의 비참함을 고스란히 보여주어야 할까? 황석영은 여기서 한발 나아간다. 현실을 깨지는 못하겠지만, 그런 현실 속에서도 꿈 속 삶이 아닌 현실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음을.(5장 여기 사람 있어요)


마지막 장에 나오는 정아를 통해서 현실을 사는 사람이 끝까지 살아남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몽'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정아가 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함께 갇혀 있던 박선녀가 자신이 정아 집안 사람들을 위해 다 해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한 말.


"사모님이 다 해줄 수 있단 말씀 다신 하지 마세요." (338쪽) 


이 말로 황석영은 꿈이 아닌 현실을 사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강남 개발로 떼돈을 벌고 여전히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앞에 나온 네 사람의 삶은 '몽'에 가깝다면, 정아의 삶은 꿈이 아닌 현실이다. 이렇게 꿈과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황석영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생각하게 한다.


소설을 읽다보면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이름들이 나온다. 소설이라서 약간 변형을 가했지만, 강남 한복판에서 무너진 백화점이라면 누가 모르겠는가? 또한 강남 개발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들이 추구했던 삶이 '몽'에 불과해야 한다고, 그런 꿈은 깨게 해야 한다고 마지막 장에서 '여기 사람 있어요'라는 말을 통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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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전달자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0
로이스 로리 지음, 장은수 옮김 / 비룡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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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같음 상태'만 유지되는 사회가 있을까? 질문을 하지 않는 사회. 아마도 그런 사회가 늘 같음 상태의 사회이리라.


질문은 나와 다름을 인식하고, 다름을 통해서 함께 하려고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데, 다름조차도 주어진 채로 살아가는 사회라면, 그래서 질문을 할 수 없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행복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온갖 차별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차별을 없애는 일은 좋지만, 차별이라는 명목으로 차이까지 없애는 일, 차이를 없애기 위해서 선택조차 없애는 사회는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없다.


선택이란 다름을 인식하는 일. 또한 책임을 지는 일.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책임을 질 일이 없다. 자신의 생명, 직업, 가족 등을 선택하지 못하고 주어진 대로만 살아가야 하는 사회. 그 사회에는 미움도 질투도 없다. 다만 사랑도 우정도 없다.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갈 뿐이다.


따라서 이런 사회에서는 기억도 없다. 개인의 기억, 집단의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해서는 안 된다. 기억이란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는 일. 기억이 있다면 늘 같음 상태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사회는 바로 그런 사회다. 모든 생활이 통제되는 사회. 하다못해 사람들이 통제하기 힘든 식욕, 색욕까지도 통제하는 사회. 가장 개인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부도 위원회에서 지정해주는 사회니, 색욕이 발동할 수가 없다. 알약으로 해결해 버린다. 누구도 의문을 갖지 않은 채.


자신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는 모두 감시되고 있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 존재들은 '임무 해제'라고 해서 다른 세계로 보내진다. 말이 좋아 임무 해제지, 그것은 죽음이다. 그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존재들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기억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기억은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지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돌발적인 상황이 생겼을 때 과거에서 해결책을 가져오는 역할을 누군가는 해야 한다. 그래서 그 사회는 누구도 기억을 가지면 안 되지만, 단 한 사람만은 모두의 기억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런 임무를 맡은 사람을 기억 보유자라고 한다.


그는 모든 기억을 갖고 있기에, 이 사회에서 유일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기계처럼 살아가는 사회에서 홀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 고독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신은 인류가 그동안 겪어왔던 기억들을 모두 소유하고 있으므로. 이렇게 기억 보유자로 선택된 조너스. 그가 기억을 전달받으면서 깨닫게 되는 일.


그가 살고 있던 세계가 진실한 세계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고, 임무 해제가 무엇을 뜻하는지 진실을 알게 되면서, 그는 하나밖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회에서 탈출하게 된다.


어쩌면 기억 보유자는 판도라의 상자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모든 기억이 담겨 있다. 이 기억은 그만이 간직해야지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서는 안 된다. 판도라 상자처럼 열려서는 안 된다. 이 사회는 그렇게 기억 보유자에게만 기억할 수 있는 책임을 지우고 있다.


하지만 조너스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로 한다. 기억은 상자 속에 담겨 있기만 해서는 안 된다. 기억은 각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기억을 사람들에게 돌려주려 조너스는 탈출한다.


그 다음은 아마도 혼란이겠지. 고통이겠지. 선택하지 않았던 삶에서 선택하는 삶으로 돌아간다는 일은 고통과 용기를 수반하니까. 또한 책임을 동반하니까. 


소설은 조너스가 떠난 다음 마을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조너스가 희망을 품고 다른 세계로 가는 장면에서 끝난다. 마찬가지다. 조너스가 마을을 떠날 때 겪게 되는 고통, 좌절을 마을 사람들도 겪게 되겠지.


눈 내리는 날, 언덕을 힘겹게 조너스가 오르듯이, 마을 사람들도 돌아온 기억 때문에 힘겨움을 겪게 될 터이다. 다만 조너스는 언덕에 올라 다른 세계를 본다. 다른 세계로 갈 썰매를 탄다. 마을 사람들도 아마 이 힘겨움을 겪으면서 누군가는 내리막을 달리는 썰매를 탈 것이다.


이렇게 소설은 디스토피아 세상을 그리고 있다. 사람들은 아무런 의문 없이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행복'이라는 말은 있을 수 있어도 행복을 느낄 감정은 없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말은 쓰일 수가 없는 사회다. 


"절 사랑하세요?" ... "아버지 말씀은 네가 매우 일반화된 단어를 사용했다는 거야. 그 단어는 너무 무의미해서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지." ... "넌 이렇게 물었어야 했어. '어머니 아버지는 저와 즐거우세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래'란다." (216-217쪽)


이런 사회다. 개인의 감정은 철저하게 감춰야 하는 사회. 이런 사회에 책은 필요없다. 책은 해악이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는 책을 읽을 수가 없다. 책의 존재조차 알리지 않는다. 기억 보유자에게만 책은 존재한다.


'늘 같음 상태'가 바로 이렇다. 하지만 기억의 저장소는 책이다. 또 늘 같음 상태에 균열을 내는 것은 예술이다. 기억 전달자가 된 전 기억 보유자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조너스는 색깔을 볼 수 있는 능력(미술이라고 해도 좋겠다)이 있었다. 예술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 그런 능력이 그들을 기억 보유자가 되게 한다.


하나의 세계로 달려갈 때 여러 세계를 보게 만들어주는 역할, 그것이 바로 예술의 역할임을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고, 책은 인류의 기억 저장소임을 말해준다.


그러니 이 소설은 과거의 소설이 아니라, 고도로 발전해 가는 세계, 앞으로 최첨단 아이티(IT) 기술이 발전해, 인공지능을 비롯한 기술발전으로 디지털화 되어 가는 세상에서 아날로그적 삶에 대해서 생각해야 함을 제시하는 미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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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씨 집안 자녀교육기
쑤퉁 지음, 문현선 옮김 / 아고라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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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소설이다. 중국 소설가를 많이 알지 못한다. 몇몇이 우리나라에 꽤 알려져 있고 쑤퉁 역시 유명하다고 하는데,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의 소설도 처음이었고.


총 네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제목이 된 소설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네 편을 관통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생각해 보면, 인생이란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 인생에 무엇이 개입해 우리의 삶을 다른 쪽으로 흘러가게 할 수도 있음이라 할 수 있다.


마씨 집안 자녀 교육기도 마찬가지다. 어떤 부모가 자식이 망나니로 살길 원하겠는가? 하지만 자식이 부모 뜻대로 살아주지는 않는다. 마씨 집안도 마찬가지다. 그렇더라도 개망나니 소리를 듣는 마쥔도 자기 아버지에게는 꼼짝하지 못한다.


잘못을 했을 때마다 아버지에게 뺨을 맞던 마쥔. 이 집안 사람들은 남의 뺨을 치는 것이 유전인지 마쥔의 아들까지도 그러한데... 


우리말로 하면 술상무, 그들이 좀 고상하게 부르는 프로 드링커가 되어 살지만, 술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유머러스하게 표현된 작품이다.


자기 뜻대로 안 되는 인생이라지만, 마쥔 역시 이혼하고 또 눈 먼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가는데, 자기 뜻대로 살아간다고 생각했지만, 그 역시 뜻하지 않는 여러 흐름에 휩쓸려 살다 갔을 뿐이다.


이런 점을 '1934년의 도망'에서 더 잘 알 수 있다.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도망간 사람 쫓기를 강 앞에서 포기하는 인물. 


자신이 그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돌아서는데... 그래서 자식은 다른 사람의 품에서 자라게 된다. 가부장적인 남성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소설이지만, 그럼에도 남성들 역시 여러 사건에 얽혀 휘둘리며 사는 모습을 보인다.


'양귀비의 집'이나 '결혼한 남자'라는 소설을 보면 이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세상의 흐름에 자신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


격동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계획한 대로 살아가기 힘든 삶의 모습이 이 소설집에 잘 드러나 있다. 그렇게 인생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많은 일들로 이루어짐을...


소설의 내용이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데도 비극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작가의 글쓰기 방식 때문일지도 모른다.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희화화 해서 표현하고 있고, 중간중간 작가가 직접 개입해서 직접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작중 인물에 대해서 거리를 두게 하고 있다.


이 거리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설 속에 빠져들게 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읽게 한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보면서 그래, 인생이란 이렇게 뜻대로 안 될 때가 많지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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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가 노래하는 곳 (리커버 에디션)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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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소설과 추리소설, 그리고 사랑소설의 요소가 모두 갖춰진 소설이다. 어느 한쪽으로 이야기하기 힘들지만, 전체적으로는 생태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동안 자연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살아왔던가. 자연 속에서 사는 사람을 '자연인'이라고 경외하는 경우도 있지만, 문명화되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경원하는 경우도 많지 않았던가. 또한 자연에서 섭리를 배운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자연이 관대하지는 않지만, 인위적으로가 아니더라도 자연은 죽고 삶이 교차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은 죽고 삶에 대해서 자연과 같은 관점을 가지게 된다. 여기에 다른 행동을 하는 소위 문명인이 자연에 들어오면 그는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자연에서는 사랑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사랑을 하는 동안에 죽음도 함께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자연에서 벌어지는 일을 사람들 관계에 적용하면, 생태와 추리와 사랑이 함께 어우러질 수밖에 없다.


소설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과거로 갔다가 다시 현재로 오는 과거-현재-과거-현재의 구성을 택하고 있다.


이렇듯 소설은 두 시간이 교차하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만나 진행이 된다. 어린 시절의 카야와 살인혐의로 재판을 받는 카야. 


그 사이에 17년의 시간이 있다. 1952년에 엄마와 누나, 오빠들이 떠나고 아버지와 홀로 남게 되는 카야. 그러다 아버지마저 죽고. 


1969년, 한 사람이 죽는다. 그 사람을 살해한 용의자로 카야가 지목되고, 카야는 재판을 받게 된다. 1970년. 카야는 무죄 선고를 받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단순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어릴 적 홀로 남겨진 소녀. 주민들에게 쓰레기 소녀, 마시(marsh:습지) 걸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던 소녀. 그런 소녀에게 글을 가르쳐 준 테이트, 또 생활을 알게 모르게 도와주는 흑인 점핑 가족. 그리고 카야는 모르지만 뒤에서 조용이 카야를 응원하던 사람들.


사회에서 격리된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자연과 어울리는 일. 주변의 자연을 관찰하는 일. 엄마에게서 받은 그림 솜씨로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정리하고 그려내는 일.


이런 카야를 사람들은 쓰레기라고, 마시 걸이라고 부르면서 무시한다. 무시하면서 그냥 살아가게 하면 되지만, 남성적 욕망에 충실한 소위 문명인들은 카야를 가만두지 못한다. 외로움에 사람이 그리웠던 카야에게 다가와 카야를 이용했던 체이스. 카야가 거부하자 그를 겁탈하려고까지 한다. 겁탈에 실패했을 때 체이스가 생각하는 일은, 카야를 자신의 통제권에 두는 것.


자연에서 우두머리 수컷이 암컷들을 휘하에 거느리듯이 사회에서 인정받는(적어도 겉으로는) 생활을 하는 체이스는 카야가 자신을 거부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지속적인 위협. 카야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자연에서 카야는 답을 찾는다.


재판과정에서 묘사되는 검사와 변호사의 논증도 재미있게 펼쳐지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던 카야에게 그런 일은 너무도 고통스러웠으리라.


그들은 카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재판을 관람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하지만 카야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주는 사람도 있다. 테이트, 그는 비록 한번 카야를 떠나기는 했지만, 다시 돌아온다. 돌아와 카야에게 인간의 사랑을 느끼게 해준다. 물론 카야가 인간의 사랑을 느끼는 것은 흑인 점핑 부부에게서이다. 


나중에 점핑의 죽음에 이르러 카야가 점핑은 자신의 아버지였다고 하는 말... 이는 카야도 이제는 자연에서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카야의 눈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생명들을 만나게 되고, 카야의 운명을 통해서 인간이 자연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를 알 수 있고, 그럼에도 테이트와 카야를 통해서 인간의 사랑이, 김남주 시인의 말을 빌면 인간의 사랑만이 줄 수 있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재판 결과를 향해 가는 시간이 서로 교차하면서 흥미를 자아내기도 하지만, 그 동안 카야가 살아온 삶들을 통해서 자연이 얼마나 소중한지, 카야가 함께 지내려 하는 자연이 우리에게도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 수 있다.


여러 특징이 융합된 소설이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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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연대기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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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된 소설이다. 1950년대에 나왔다고 할 수 있는데, 지금부터 70여 년 전에 이런 상상력을 지니고 있었다니...


낯선 존재를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해서 많은 작가들이 그려냈는데,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화성은 인간이 만약 생명체가 있다면 이 행성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비록 낯선 생명체는 우리와는 다른 형태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을 거라 표현한 경우도 있었고, 그들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 작품도 있었지만, 외계 생명체를 동등한 존재로 여기는 작품들도 있었다.


이 작품은 외계 생명체에 대한 두려움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화성에 생명체가 있고, 지구와 교류를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에 대한 여러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몇 번이나 화성에 로켓을 보내 탐사하지만 실패를 한다. 그러다 화성에 인간들이 이주해 살기 시작하고, 그 인간들이 화성에서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연대기란 제목을 달고 있듯이, 1999년에서 시작하여 2026년에 끝난다.


오래 전에 쓰인 소설이라 우리가 지나쳐 온 시기와 아직 도달하지 않은 시기가 소설에 겹쳐 나오는데...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화성에 인간을 보내지 못했다. 화성 이주는 여전히 비현실이다. 비록 화성에 우주인들이 가서 지내다 겪는 모험을 다룬 '마션'이란 작품이 있기는 하지만, 화성은 아직도 미래형이다.


그런데도 이 소설은 화성에 인간이 이주해서 살고, 화성에 살던 인간들이 사라지는 과정을 담고 있다. 화성인이 감염병으로 많이 죽어나가는 장면은 지구상에서도 많이 벌어졌던 일이고, 화성인을 적으로 여기던 일도 신대륙(?)에 도착한 서구인들이 했던 행동과도 비슷하지만... 한 가지는 화실히 다르다.


화성에 살고 있는 존재들이 지구인에 비해 결코 열등하지 않다는 사실... 이 점이 소설 도처에서 나오고 있는데.. 이들은 지구인의 마음에 남아 있는 존재로 자유자재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지구인을 화성에서 살지 못하게 하기도 하는데...


소설의 끝부분에선 인간의 가족으로 여겨지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나중에 이들은 화성인으로 바뀌게 된다. 결국 화성에는 지구인은 없게 된다. 지구가 전쟁으로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지구로 돌아간 인간들도 있지만, 이 화성에서 인간은 결국 사라지게 된다.


이는 화성이란 행성은 화성인들이 살아가는 행성이지, 인간이 또다른 식민지 개념으로 지구인을 정착하게 하고, 화성인을 몰아내서는 안 되는 행성이란 말이기도 하다.


평화롭게 공존하면 좋겠지만, 소설에서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여러 편에서 나오고 있다. 평화롭게 공존하려면 대등한 존재로 여기고 대등하게 대우해야 하는데, 화성은 지구인이 이주해서 살아가야 할 행성이라는 관점에서는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다.


이는 화성을 지구로 옮겨도 마찬가지다. 국경선을 긋고 이주가 자유롭지 못하며, 서로가 서로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현실 아닌가. 이 좁은 지구라는 곳에서도 그런데, 우주로 범위를 넓힌다고 달라지겠는가.


처음부터 화성인이 등장해서, 화성인으로 마무리되는 소설이다. 중간중간 인간이 나오지만, 그 인간들이 화성에서 몰락해 가는 과정이 표현되어 있다.


짧은 소설들이 묶여 있는데, 연대기 순으로 짜여 있어 읽어가면서 흐름을 느낄 수가 있다. 무엇보다도 화성을 배경으로 한, 외계인이 등장하는 소설임에도 터무니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화성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지금, 과연 우리는 화성에 가게 되면 어떻게 살게 될까? 어떻게 지내는 것이 좋을까를 이 소설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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