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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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감정은 인간의 영원한 미스테리가 아닐까한다. 사랑의 종류에도 여러가지 있지만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최소한 남녀가 아니라도 서로 사랑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은 각자 서로에게 '난 저 사람을 사랑해!'라는 아주 통속적인 것을 말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미쳐야만 할 수 있다고 본다. 이성적인 인간은 사랑을 할 수 없다. 우리들은 이성적이기 때문에 동물과 다른 존재라고 하지만 오히려 감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라 부를 수 있다. 동물들의 행동은 감정이 아닌 본능이라 다른 관점에서 봐야 한다.

 

한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한다. 한 남자는 유부남이고 한 여자는 미혼이다. 이 사실은 두 남녀가 다 인지하고 있지만 둘은 사랑에 빠진다. 이런 상황은 우리가 TV 드라마에서 지겹게 보는 익숙한 패턴이지만 여전히 드라마 내용으로 방영되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흥미인지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관점에선느 '미친거 아냐?'라고 외칠 만한 일이다. TV 드라마가 아니라 내 주변 누군가 했다고 하면 말이다. 맞다! 미쳤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감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역사는 이성적인 존재들의 머리로 발전 했을 지 몰라도 감정이라는 감정을 갖고 있는 인간들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으로 발전과 퇴보를 거듭하여 더 큰 발전을 이뤘다고 본다. 정반합이라는 과정이 아마도 맞을텐데 인간이 이성만 갖고 있다면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고 조종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어떤 일을 하든 충분히 이성적으로 행동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평소에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아도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이성보다 감정을 우선하고 이성적으로 옳지 않다고 판단을 내려도 순간 나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벌이는 사건들이 많다.

 

사랑은 바로 그 감정의 범주에 속하는 아주 다루기 어려운 놈이다. 사랑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사랑은 어려워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사랑은 함부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심지어 사랑에 대해 단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는 사람이 사랑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온갖 충고를 하기도 하고 카사노바와 같이 늘 사랑을 하지만 사랑은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여전히 자신의 사랑을 찾아 헤매고 다니기도 한다.

 

10대와 20대, 30대, 40대 등등 나이게 따라 사랑에 대해 느낌, 개념, 접근 하는 방법등은 다르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10대와 20대 때 가졌던 사랑에 대한 감정과 두근거림은 들 하지 모르고 또한 어느 정도 절제하는 측면도 강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결혼을 한 후에 이성에 대한 감정은 미혼일 때에는 다른 감정으로 접근하게 된다. 그 부분은 결혼 한 상대방과의 묵계적인 합의일 수도 있고, 인간 세상의 도덕적인 잣대로 인한 눈치일 수 도 있다만 결혼하여 함께 생활하며 그 전과는 다른 사랑이라는 새로운 감정라고 볼 수도 있다. 사랑은 모른다는 전제하에 모르는 이야기를 열심히 쓰고 있다.

 

알랑 드 보통의 책을 처음 접한 것이 '불안'이라는 책이라 당연히 작가가 철학자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 책 '우리는 사랑일까'라는 책은 소설이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전지전능한 작가의 시점에서 내용이 이어니고 내레이션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 책은 특이하게도 그걸 뛰어넘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에 대해 단순하게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비평도 하고, 그 의의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둘의 감정과 행동과 생각에 대해 소설의 핀트와는 상관없이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철학이나 각종 인문학에 근거하여 설명한다.

 

흔히 남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보다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원한다. 여자는 반대라고 이야기한다. 책에는 우연히 만난 두 남녀가 사랑을 하고 서로 알아가며 점점 상대방과 나는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미혼일 때 10년을 연애하며 상대방을 알게 된다고 하여도 막상 결혼하여 같이 생활을 하면 또 다른 면을 보고 같이 생활하며 부대끼는 면에 힘들어 하고 서로 맞추어 가는 과정이 필요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거의 결혼을 통해 이 부분을 거쳐가고 외국은 동거를 통해 서로 탐색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 같은데 - 외국에서 생활해 본 적은 없고 일방적으로 그들이 보여주는 정보를 통해 습득한 것이라 불안정하다만 - 우리나라에도 사실 결혼이라는 과정을 거친 후에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커플들이 서로 갈라지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혼인신고가 곡 나쁜 측면보다는 좀 더 참아보고 좀 더 상대방과 나와의 합일점을 찾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아닐까 한다.

 

동거나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같이 생활하는 것은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다는 무의식이 잠재하고 있어 어려운 상황을 둘이 함께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헤어진다는 편한 결론을 내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한다. 사랑은 사랑이고 생활은 생활이다 보니 말이다.

 

사랑이라는 감정만으로는 생활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변수를 다 감싸않지 못하는 것은 모순일 수 있어도 그것이 남녀간의 사랑이 갖는 한계가 될 수 있어 보인다. 남녀간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어느 정도 조건적인 사랑의 감정이 포함되기 때문에 남을 사랑하기 전에 나에 대한 사랑이 먼저 앞 설 수 있다. 그걸 미처 자각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 부지기수이고.

 

이성을 보고 사랑을 느끼고 그 감정만이 전부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후 부터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사랑을 더욱 지속시켜 주는 힘이 되고 상대방을 사랑하기 전에 자신에 대해 사랑 할 줄 모른다면 남을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이라는 영원한 인류의 화두는 결코 책 한권으로 설명할 수 없고 설명 될 수 도 없다. 나이를 먹으면서 다양한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남녀간의 풋풋한 사랑, 성인이 되어 만들어 가는 사랑, 부모님에게 일방적으로 받는 사랑, 내가 부모가 되어 주는 일방적인 사랑, 처음의 사랑감정과는 달리 배우자와 나이를 더해감에 따라 부족하기도 하고 넘치기도 하는 사랑....

 

'우리는 사랑일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면 그건 사랑일까, 집착일까, 환상일까, 아님 사랑이 식은 것일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왜 '우리는 사링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되는 것일까?

 

20대와 달리 사랑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이 사랑을 더욱 힘들게 하지만,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드라마와 영화가 여전히 사람들에게 환호를 받고 눈물을 자아내는 것은 누구나 다 사랑에 굶주려 있기 때문이 아닐가하는데 그 굶주림을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영원히 없다.

 

나와 내 배우자와의 관계는 사랑일까? 지금이 어느 시대라고 사랑하지 않으면서 감정을 속이면서 살고,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살까? 고로, 나는 '우리는 사랑일까'라는 고민을 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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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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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게 되면 여러가지 반응이 나온다. 어떤 책은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반추하게 되거나 향후 살아갈 날에 대해 그려보거나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나 마음을 다른 방식으로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거나 세상을 어떤 관점이나 시선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대부분 그런 것들이 나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 본다.

 

또 다른 책은 아무 생각없이 집중해서 읽게 된다. 흔히 말해 몰입해서 책 페이지가 넘어가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줄거리를 쫓아가며 읽게 되는 책들이 있다. 대부분 추리, 스릴러 장르의 책들이 그럴 할 것이다. 가장 곤란한 경우는 책이라 불리는 종이에 글자가 인쇄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꼭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의 반응이 나온다.

 

한 가지는 처음 접하는 분야나 내 스스로 이해하기 힘든 책을 읽게 될 때 종이 위에 있는 글자를 읽기에 벅차고 무슨말인지 모를 때가 있는 경우인데 이런 반응은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생각하는 책으로 변하게 된다. 어려운 책들도 아닌데 그냥 종이 위에 활자라고 불리는 글자가 찍혀 있는 책들은 책에 기술만 있고 철학이나 영혼이 없을 때 느끼게 된다.

 

그 외에도 책을 읽게 되면 다양한 반응이 내 안에서 나오게 된다. 가장 좋은 책은 아무래도 읽으면서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책이 아닐까 한다. 비록, 그런 책이 가장 좋일 수 있어도 꼭 필요한 책이 아닐 수도 있다. 음식도 편식을 하면 몸의 불균형으로 인해 특정 요소는 넘치고 특정 요소는 부족하여 어느 곳에서 탈이 나는 것처럼 말이다.

 

'1Q84'는 1,2권을 읽었을 때 좀 특이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스트셀러라는 것은 그 시대의 상황이나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의 접점을 잘 집어냈거나 우연히 건드려서 생긴다고 보는데 가장 인기를 끄는 장르를 이야기하라면 환타지 장르를 들 수 있는데 '1Q84'는 환타지 장르라고 하기에는 힘들지만 환타지 요소를 갖춘 추리, 심리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저자는 1,2권으로 끝낸 것으로 알고 있다. 2권의 끝 장면도 흔히 말하는 열린 결말로 독자의 상상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결론이였는데 독자들의 열화같은 성원에 힘입어 3권을 집필하여 출판한 것으로 알고 있다. 1,2권 자체를 출판된지 1년도 훨씬 넘은 시점에 읽게 되었고 - 여전히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올라있었지만 - 3권도 출판된지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서야 읽게 되었다.

 

워낙 오랜 시간이 지나 3권을 처음 읽을 때 1,2권의 감각이 들어오지 않았고 어떤 내용인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거의 새로운 책을 읽는다는 생각이 들정도였으니 말이다. 심지어 책의 두께는 700페이지가 넘었다. 솔직히 이렇게 두꺼운 페이지를 채우면서 소설을 쓴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라고 여겨진다.

 

1,2권이 2명이 주인공의 시점으로 교차되어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반해 3권은 3명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새롭게 추가된 - 이미 1권에서 존재가 좀 미미하게 출현하기는 했지만 - 인물은 남녀 주인공이 이뤄지기 위해서 필요한 모티브로 등장을 했다고 본다. 굳이 그 인물이 없어도 이야기 흐름에 큰 지장은 없지 않았을까 한다.

 

소설중에 약간 당황한 것은 이 책 자체가 전지전능한 작가의 관점에서 쓰고는 있지만 각 단락의 인물이 자신이 벌어지고 느끼는 내용 위주의 관점으로 문체가 서술되다고 갑자기 각 단락의 주인공의 시점이 아닌 신이라고 할 수 있는 - 책의 내용을 창조한 사람은 작가이니 - 작가가 논평을 하고 자신의 관점에서 서술을 한다는 것이다.

 

읽은 사람에 따로 반응은 다르겠지만 굳이 3권을 펴 낼 필요는 없었다고 본다. 더구나, 이렇게 긴 페이지를 할애하며 이야기를 엮을 필요는 더더욱 없어 보였다. 책의 중간까지는 상당히 느릿하게 후반부를 준비하면서 각종 기초 작업을 하는데 사족이 좀 많다는 생각도 읽을 때는 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생각하니 그렇다.

 

후반부는 어떤 결론으로 끝날지가 점점 궁금해 지면서 흥미롭게 몰입해서 읽게 되었다. 빨리 읽어버리자는 생각도 들어 더 집중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환타지 소설이라 그 세부 내용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가 될 것이다. 그래도 몇 가지 하자면 책에는 2개의 세계가 존재한다. 달이 하나인 세계와 달이 두 개인 세계가 따로 따로 존재를 한다. 두 개의 세계에는 각자 살아가는 인물들이 있다. 그 인물들이 서로 겹치는지 완전히 다른 세계인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2개의 세계는 서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느 것이다. 서로 동일한 공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각각의 덴고와 아오마메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까 한다. 차원의 벽을 뚫고 나라는 존재가 침입하거나 도착할 수는 있지만 각각의 차원에 있는 존재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달이 하나인 세계에서 달이 두 개인 세계로 간 아오마메에게는 분명히 달이 두 개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아오마메가 있었을 것일라고 보는데 말이다.

 

달이 두 개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총 3명인데 이들은 그렇다면 달이 하나인 세계에서 달이 두개인 세계로 흘러들어갔다는 이야기인데 두 세계에서 존재하는 각각의 자신의 존재가 있었을 것이라 보는데 또 다른 자신들은 어디로 갈 것일까? 최소한 각종 공상과학이나 차원을 이야기하는 책이나 영화에서 보면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나란 존재는 현재에만 존재할 뿐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 나와 똑같은 존재가 그 차원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이야기하는데 이 책에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알지 못하는 것인지 너무 버라이어티해진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냥 생략한다.

 

이렇게 쓸데없는 딴지를 건 것은 그냥 궁금해서이다. 분명히 각 차원에는 자신의 차원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존재가 있을 텐데 말이다. 나 자신이 그렇게 다른 차원에서 나와 똑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지는 않지만 많은 픽션에서 과학적 근거를 갖고 그런 요소를 집어넣는다고 보는데 그 요소가 잘못된 과학적 지식일지 모르겠지만 알고 있는 상식을 갖고 이야기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하루키라는 사람은 참으로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별 내용도 없고 뜬금없는 소재를 갖고 이렇게 엄청난 페이지를 꽉꽉 채워 써서 전개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무엇보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만든다는 사실 자체가 더욱 대단하다. 그래도 역시 1Q84 3권을 꼭 낼 필요가 있었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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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다마링크
기욤 뮈소 지음, 이승재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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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있는 상태로 책을 접했으며 곧장 알았을텐데 표지없이 덩그라니 제목만 보이는 책의 겉표지를 본 후 작가가 기욤 뮈소라고 하여 내가 알고 있는 그 기욤 뮈소인지에 대해 반신반의를 했다. 혹시나 해서 소개하는 것을 읽어도 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책이 출판된 것도 꽤 시간이 되었고 그에 대한 소개글도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다보니 확신이 들지 않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바로 그 '기욤뮈소'라 판단하고 대여를 하게 되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검색한 지금에서야 '구해줘'등을 저술한 바로 그 '기욤 뮈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읽었떤 기욤 뮈소의 책들이 조금은 말랑말랑하고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만큼 빠른 속도로 내용이 진행되고 추리적인 각색을 통해 흥미를 일으키지만 결국에는 사랑 이야기를 하는데 '스키다마링크'는 조금은 빡빡하면서 퍽퍽하고 진행 속도는 안단테가 맞지 않을까 싶고 최근 작품과는 달리 추리소설에 바탕을 두면서 시대의 고민을 담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첫 출판작이라 가다듬고 이야기할 것들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은 전부 다 풀어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페이지도 상당히 길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기욤 뮈소가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갔다고 볼 수 있을텐데 단순히 추리 소설 장르로 볼 때는 전개될 내용이 크게 호기심을 자극하지는 않는다.

 

추리 소설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다음 내용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 예상을 하지만 그 예상을 빗나가는 내용으로 전개되고 지속적으로 독자의 궁금증을 유발하는것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스키다마링크'도 역시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될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유지를 하지만 책 페이지를 침 묻혀가며 넘기기에는 힘이 부족하다.

 

'모나리자'가 어떤 이유로 지금과 같은 시대적인 아이콘과 미의 최고 자리에 올랐는지 잘 모르겠지만 서양인들에게 '모나리자'는 하나의 종교와 같은 상징으로 불리고 있다 할 정도로 여러 문학작품 - 연극, 영화, 소설등 - 에서 끊임없이 확대 재 생산되고 있다. 묘하게도 그런 작품들이 하나같이 추리 형식 분야의 소재로 '모나리자'를 접근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광고를 할 때도 '모나리자'라는 타이틀을 전면에 내세울 때 사람들이 더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키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또야!'라는 사람들의 시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많은 노력을 요하지 않을까도 싶다.

 

기욤 뮈소는 프라스 사람이지만 그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배경들이 대부분 미국인 경우가 많고 꽤 많은 장소가 등장하는데 작가들이 대부분 자신의 글에 등장하는 배경을 직접 가 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스키다마링크'는 그의 첫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나오는 지역이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등 상당히 다양하여 이렇게 답사를 갈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있었을까 하는 괜한 궁금증이 지금 생긴다.

 

대부분 소설 작가들이 투자라는 것을 통해 부를 획득하지 않지만 - 자신의 작품으로 부를 형성한다. - 그들의 작품 세계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읽게 되면 어쩌면 이렇게 잘 묘사하는지 감탄할 때가 있는데 이 책에도 작가와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유전공학분야에 대해 이제 막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인 2000년대 초반에 썼다는 것이 대단하다.

 

2010년도에 나온 작품은 아직 읽지 못했지만 '기욤 뮈소'의 작품은 이로써 그의 첫 작품까지 읽었으니 다 읽었다고 할 수 있다. 굳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지만 2009년 작품이 솔직히 별로라고 생각하며 이제는 '기욤뮈소'의 작품 세계가 발전이 없다는 인상을 접했는데 그의 초기 작품을 통해 2010년도 작품도 읽고 싶다는 엉뚱한 결론을 내리게 한 작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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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김관오 옮김 / 아르테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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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외모를 빛나게 하기 위해서는 화장을 하거나 성형수술을 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나의 진정한 모습을 얼마든지 감출 수 있다. 내 초라한 몸매도 화려한 옷을 통해 마음만 먹으면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이런 방법을 쓰더라도 나에게서 풍기는 악취나 향기를 감출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향수를 뿌린다고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향수가 성에 머무는 귀족들이 아무 곳에서나 대,소변을 해결 하여 그 냄새를 해결 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지만 향수 자체는 냄새를 아주 잠시 못 맡게 할 뿐 없애주지는 못한다. 이처럼 심하게 나는 악취를 없애는 방법은 그 냄새가 나는 원인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것이다. 깨끗하게 청소를 하거나 아예 없애버리거나 내가 그 냄새의 진원지에서 떨어지는 것 이외에는 해결책이 없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은 외적인 것에 너무 치중하여 각 사물의 내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장님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바로 눈 앞에 펼쳐지며 현혹하는 사물에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아무리 아름다운 외면을 치장하고 있다고 해도 그와 이야기를 하면 그가 진저으로 내면의 아름다움까지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아직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내면을 얼마든지 화려한 겉모습을 감출 수 있어도 세월이라는 시간 앞에서 우리의 내면은 우리의 외면을 압도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그 고유한 향기를 풍긴다. 또는 악취를 풍긴다. 이건 감출래야 감출 수 없는 진정한 본 모습이다. 엣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중에 한 사람의 얼굴에는 그 사람의 세월과 인간됨이 묻어 나온다고 한다. 그처럼 나이가 들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부정하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모습이 들어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있다. 그는 현재 아파트의 수위로 근무하고 있는 여자다. 겉 모습은 어느 동네에 가도 볼 수 있는 아줌마 파마를 한 펑퍼짐한 몸매의 소유자다. 이 정도까지 소개가 이어지면 당연하게 생각나는 이미지가 있다. 전철에서 빈 자리가 생기면 가방을 던지는 모습과 같은 전형적인 아줌마의 모습이면서도 약간은 비하의 이미지가 떠 오르게 된다.

 

또 한 사람이 있다. 아무나 갈 수 없다는 서울에 있는 대학을 졸업했다. 말끔한 모습으로 넥타이를 매고 머리는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으며 투 버튼의 양복을 입고 있다. 이 정도의 소개면 당연히 그 사람은 상당한 학벌과 지식을 갖고 있는 엘리트라는 이미지로 바라보게 된다. 아니, 난 그렇게 본다.

 

상대방과 대화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단지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그 앞에서 괜히 함부로 이야기를 하거나 내 얇은 지식이 들어날까봐 노심초사하게 된다. 두 사람이 등장하지만 정말로 두 사람의 이미지대로 그들의 내면도 우리가 갖고 있는 바로 그 이미지대로 일까?

 

'고슴도치의 우아함'은 실제로 작가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 이를 모티브로 집필한 소설이다. 소설속의 주인공은 오히려 그러한 이미지를 외부 사람들에게 그 이미지를 더욱 각인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이 엄청난 문학적 소양이 있고 박학다식하며 매일같이 일반 사람들은 커녕 전문가들도 쉽게 읽지 않는 전문분야의 책까지 읽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노력한다.

 

책의 내용이 그래서 그런지 단순하게 대화와 같은 문체는 술술 읽을 수 있지만 내면으로 들어가 묘사하는 장면은 쉽게 읽을 수 없는 문체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 아니라 어딘지 철학책 같은 느낌도 든다.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것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향기일 듯 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것만 듣는 다고 하는데 그만큼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고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 이면을 들여다 보기보다는 바로 눈 앞에 펼쳐지고 귀에 들리는 것만 반응할 때 여러 생각할 필요가 없다.

 

바로 그런 이유로 나도 모르게 상대방의 내면을 보려 하기 보다는 전혀 쓸데없는 스팩에 현혹되고 학벌에 주눅들고 갖고 있는 부에 동경하고 겉모습에 심취하게 된다. 물질(돈)이라는 것은 너무 가까이해서도 멀리 해서도 안되는 요물과도 같은 존재이기에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물질로 판단하려 하지 말고 그가 풍기는 진정한 향기를 맡도록 해야 한다.

 

소설에도 수위인 주인공의 내면을 올바로 알아보는 사람이 나온다. 우습게도 그 인물이 서양인이 아니라 - 책의 배경이자 작가는 프랑스인이다 - 동양인이라는 것이 역설적으로 상대방에 대해 편견을 갖지 않고 볼 수 있는 힘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주인공을 알아본 사람은 주인공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기를 얻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가 한결같은 공정함이 아닐까 한다.

 

스스로 주인공의 내면을 알아 볼 정도의 인격을 갖고 있고 그에 수반되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고 있으니 눈 앞의 매트릭스에 속지 않고 각 사람들의 내면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데 결국 바로 그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주인공은 비록 훌륭한 내면을 갖고 있었지만 약간 삐뚫어지고 뒤틀린 시선을 소유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내면을 가꾸는 시간보다 외면에 투자하는 시간이 더 많아지고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보여주려 하는 것에만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고슴도치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동물이다. 잘못하면 고슴도치의 강력한 가시에 찔릴 수 있기 때문에 더더욱 피하지만 고슴도치의 내면을 보려는 노력 자체를 포기하지 말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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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책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4
카를로스 마리아 도밍게스 지음, 조원규 옮김 / 들녘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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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선택하는데 있어 다른 사람들의 리뷰가 많은가의 여부도 꽤 괜찮은 선택인 듯 하여 리뷰를 50건 이상 있는 것으로 목록을 적었다가 도서관에서 검색하여 찾아 보는데 이 책은 책의 제목때문에 추리 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이상하게 이 책은 분명히 대여가 되어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항상 도서관에서 찾으려면 쉽지가 않았다. 더이상 안 되겠다는 생각에 작정하고 이 책을 찾기로 결심을 하고 찾았는데 찾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책의 두께가 무척 얇은 것이 겨우 100페이지 정도의 책이였던 것이다.

 

아무리 찾아도 쉽게 찾지 못한 것은 내가 갖고 있는 선입견 때문에 무조건 일정 분량 이상을 생각하고 책을 찾으니 발견 되지 않았던 것인데 마음을 비우고 새롭게 찬찬히 찾으니 있었다. 책의 두께를 보고선 도대체 이 책은 어떤 종류의 책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 섹션은 소설분야인데 이렇게 얇은 책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보통 분량이 얇은 소설은 다른 것들과 엮어 두꺼운 형태로 출판되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 책은 그런 고정관념을 깼것도 그렇지만 우리나라도 아닌 외국, 그것도 우리에게는 생소한 아르헨티나의 작가 책이니 더더욱 그 호기심이 생겼다. 책이 두껍지도 않으니 마음만 먹으면 그 즉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갖게 되고 말이다.

 

책의 초반부에 책을 통해 사망한 사람들에게 대해 나열되어 있는데 '와~~ 책이 정말 위험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책을 읽으며 걷다가 죽은 사람, 걸어가는데 책이 떨어져 죽은 사람, 서고에서 책을 빼 내려다가 떨어져 죽은 사람등등 책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설마 이렇게 끝까지 이런 사례들로 내용이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겠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내용은 2-3페이지로 끝나고 소포로 책을 전달받았는데 그 대상자가 책을 읽으며 걷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여 동료가 그 책을 다시 돌려주며 책과 연관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책의 줄거리이다.

 

책을 읽는 사람들 중에 독서편력이라는 용어를 쓸 만한 사람들의 책에 대한 집착내지 애정은 대단하다. 일본에서 오타쿠라는 용어로 극단적으로 한 가지 분야에 집중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 있는데 그처럼 책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은 단순히 책을 읽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책을 소장하고 귀한 책을 찾아 간직하는 것에 크나큰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소설가 신경숙씨의 집은 책으로 도배가 되어 있는 것으로 사진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도 개인이 갖고 있는 책이 2만원이나 되는 사람들도 등장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들인데 과연 그것이 꼭 필요한 가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집착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점 말이다.

 

책을 소장하는 것도 그다지 많지 않고 대부분의 책을 도서관에서 대여해서 보는 내 입장에서는 움베르토 에코가 책이 대단히 많이 있는 사람의 서재의 책을 그 사람이 꼭 다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책이 쌓이다 보면 더이상 놓을 공간이 없어 처치곤란해 질 수 있다. 그런 점때문에 책을 구입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어도 책을 소장해야 겠다는 물욕이 없다는 것이 나에게는 더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한다.

 

책을 그렇게 소장하고 애지중지하는 사람들을 당연히 비판할 수는 없다. 그 어떤 취미나 집착보다는 더 우아하고 고상한 일이니 말이다. 해서 한 번 읽은 책은 돌려보자는 운동이 벌어 진 적도 있었다. 자신이 읽은 책을 아예 공공장소에 놓고 - 이를테면 전화기 위 같은 곳 - 읽고 싶은 사람이 가져가라는 문구를 쓴 운동은 괜찮은 방법으로 보인다.

 

실제로 한 번 읽은 책은 다시 보게 되는 경우가 그렇게 흔하지 않으니 말이다. 이 소설에서는 책이라는 것에 대한 소설이기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작가들의 이름과 작품이 나오는데 대부분 남미 계열 작품이나 작가라서 잘 모르는 사람들 투성이지만 그 현학이라고 할 수도 있는 지식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읽고 자신을 발전시키거나 지적인 놀이로 즐기면서 주인공은 책을 읽는 내가 되어야 하지 책이 되어서는 안 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 정도로 책을 읽지도 않고 있고 함몰되지도 않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이 세상 사람들 중에 0.001%에 드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니 나같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먼나라 이야기지만 꼭 책이 아니라 자신만이 갖고 있는 집착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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