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스탕스
이우 지음 / 몽상가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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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이야기할 책은 이우 님의 <레지스탕스>라는 책이란다. 이우라는 작가의 책은 이번이 처음인데,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제목 <레지스탕스> 때문이란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2차세계대전이 배경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한 어떤 소년의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단다. 책 소개도 제대로 안 보고 책 제목만 보고 선택한 아빠가 잘못이 있지만, 나름 재미있게 잘 읽었단다. 그럼, 바로 책 이야기를 시작할게.

기윤. 미술 전공. 서른 살을 앞든 나이에 첫 전시회를 열었단다. 그러나 보기 좋게 망하고 지도교수 마저 혹평을 내놓았어. 미술에 소질이 없나, 접어야 하나, 싶었지. 전시회를 마치고 고향 집에 내려와 쉬고 있다가 옛 고등학교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났단다. 다들 평범하지만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것 같아 보였고, 자신만이 이루지 못할 꿈을 쫓는 기분이었어. 친구 수형이는 기윤에게 절친이었지만 한 동안 잊고 지내던 민재 이야기를 꺼내서 기윤은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하게 된단다.

 

1.

기윤은 비평균지역에서 3순위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아버지와 심한 다툼까지 했어. 아버지는 좋은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라면서 고등학교 재수를 하라고 했지만, 누가 고등학교를 재수하겠니, 기윤은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그 3순위 고등학교에 입학했단다. 수형과 친했는데, 에어맥스 나이키 운동화를 계기로 일진에서 짱을 먹고 있는 상민과 친해지게 되었단다. 기윤은 일진 애들이 멋져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일진의 짱인 상민과 친해졌으니 기윤도 일진의 멤버가 되었어. 상민은 기윤에게 잘 해주어,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일진의 힘으로 해결해 주기도 했어.

그런데 얼마 후 새로 나온 에어맥스 신상품을 샀는데, 그것이 상민의 심기를 건드렸어. 그 전에 에어맥스는 상민의 에어맥스보다 등급이 떨어지는 신발이었는데, 이번 에어맥스는 상민의 에어맥스보다 더 비싸고 좋은 것이었어. 이것이 상민의 심기를 건들인 것이었어. 이후 기윤은 일진에서 빠르게 왕따를 당하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어. 점심시간에 상민의 무리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식당에 가지 않고 도서관에 갔단다. 책을 읽는 것은 아니고 대출만 했다가 읽지도 않고 다시 반납했어. 독서왕은 되고 싶으나 책은 읽기 싫었거든

2학년이되고 인근 커다란 종합병원장 아들 서민재가 전학을 왔단다. 종합병원장 아들이 왜 이런 학교에 와? 다들 의문이 들었지만 사정이 있겠지? 라는 생각하고 물어보지는 않았어. 민재는 늘 책을 끼고 다니는 아이였어. 점심시간에 도서관에 짱 박혀 있는 기윤과 늘 책을 끼고 다니는 민재가 만날 확률은 무척 높을 수 밖에 없었어. 민재가 읽으려는 책을 기윤이 대출하고 있어서 그들은 처음 말을 섞게 되었단다.

이후 민재는 기윤에게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기윤은 읽지 않았으니 대충 얼버무렸단다. 그리고 난생 처음 책을 읽어 보았단다. 둘은 책 이야기를 하면서 절친이 되었고, 우연히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둘이 갇히는 사고가 나서 좀더 친밀한 이야기도 나누게 되어, 기윤은 인간 민재를 조금 알게 되었단다. 이 학교에 오기 전에 서울에 있는 과학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사고나 나서 크게 아픈 다음 다시 2학년부터 다시 학교를 다녔는데, 적응을 하지 못하고 이곳으로 전학을 온 곳이라고 했어. 그럼 형이라고 불러야 하냐고 하자, 생일이 빠른이라서 나이는 똑같다고 했어. 그냥 친구하자고그리고 민재는 시인이 되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 했어. 둘은 절친이 되었지만, 기윤은 여전히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냈고, 성적을 조작하다가 부모님과 선생님께 걸려 크게 혼나기도 했어. 반면 민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고 시험을 볼 때마다 일등을 했단다. 아무튼 둘은 엄청 친해졌단다.

 

2.

어느날 기윤은 민재의 집에 놀러 갔어. 민재의 집안 분위기는 무척 무거웠지. 민재의 아버지는 무서운 분으로 억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신대. 민재의 또 하나의 꿈은 아버지의 억제로부터 해방하는 것이었어. 민재의 어머니는 민재가 열한 살 때 암으로 돌아가시고, 지금은 새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데, 민재는 이모라고 부르고 있었어. 딱 봐도 민재가 집에서는 그리 행복하지는 않을 것 같구나.

수학여행 때 친구들과 진실 게임을 하게 되었는데, 민재의 이전 학교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알고 있던 친구가 있었어. 이에 민재는 크게 당황하고 충격을 받아 그 자리를 뛰쳐나갔어. 나중에 기윤이가 민재를 찾아왔는데, 민재는 그때 숨겨두었던 자신의 아픈 과거를 모두 이야기해주었어. 민재는 이전 학교에서 교생 선생님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데, 둘은 비밀 연애를 했어. 그런데, 실수로 선생님과 함께 찍은 적나라한 사진이 유출되는 사건이 일어났단다. 모든 학생들이 그 사진을 보게 되었고, 민재는 놀림과 조롱을 당하게 되었어. 그리고 교생선생님은 그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만 자살하고 말았단다. 교생선생님이 죽고 민재는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했으나 다행히 죽기 전에 발견되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단다. 한참 입원을 하다가 학교에 갔지만 적응을 하지 못하고 전학 온 것이라고 했어. 민재의 아픈 과거까지 다 들은 기윤은 비밀을 공유한 사이가 되어 더욱 친해지게 되었단다.

..

기윤은 일진들에게 여전히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어. 기윤은 더 이상 당하지만 않겠다면서 상민에게 반항을 했어. 상민과 무리들은 기윤을 불러내어 일방적으로 때리고 있었는데, 이때 영화처럼 민재가 나타나 기윤의 편에 써서 싸웠단다. 얼마 후 민재가 오기 전에 부른 경찰들이 출동하면서 싸움을 끝이 났단다. 이 일로 학교에서는 징계 위원회가 열렸고, 상민의 친구 관석은 퇴학 당하고 상민은 전학을 가게 되었어. 기윤과 민재는 당한 입장이라는 것이 밝혀져 일주일 정학으로 마무리가 되었단다. 둘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몰래 학교 강당에서 둘 만의 파티를 하기도 했단다.

 

3.

3이 되었어. 새로운 선생님이 한 분 오셨어. 별명은 독사. 감 오지? 독사는 두발 규제를 엄격하게 하고, 학교 규범을 군대식으로 했어. 학생들은 독사의 압제에 아무 소리도 못하고 따라야 했어. 민재는 독사를 보고 있을 수만 없다면서 기윤에게 함께 저항하자고 했어. 레지스탕스, 저항 조직을 만들자고 했단다. 그들은 다른 친구들까지 설득하여 독사에 저항하는 레지스텅스 지하조직을 만들었어. 멤버는 모두 여섯 명. 먼저 게릴라 작전을 펼쳤어. 계란을 투척하고 벽에 독사에서 보내는 메시지를 적기도 했어. 그들은 은밀하게 일을 벌여 누가 일을 벌였는지는 아무도 몰랐어. 학생들은 반응은 좋았지. 선생님들도 의견이 나뉘어 독사 선생님의 규제를 비난하는 선생님들도 있어.

하지만 민재는 이런 게릴러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어. 아직은 모르지만 뭔가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자고 했지만, 학생들의 호응을 크게 받아 기분이 좋아진 기윤은 게릴라 작전의 확대하자고 했어. 둘은 이 일로 말다툼도 했단다. 그리고 며칠 뒤, 학교에는 민재가 실명으로 쓴 대자보가 붙었어.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신문기자까지 불러서 학교의 실태에 대해 이야기했어. 결국 학교장이 나서서 민재와 학생들의 의견을 들어주는 것으로 해결했단다. 역시 펜이 칼보다 강했던 거야.

다시 기윤과 민재는 친해졌고, 둘은 함께 제주도 일주 여행도 다녀왔어. 그리고 고3답게 공부도 열심히 했단다. 민재는 당연한 듯 의대에 합격했어. 그런데 민재는 의대 입학이 아닌 모험을 계획하고 있었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북유럽까지 갔다가 아프리카와 중동을 거쳐 돌아오는 계획이었어. 하지만왠지 불안불안 하더니만, 지은이는 이 소설을 비극으로 끝을 내려고 마음 먹은 것 같구나. 출발을 위해 페리호를 타는 날, 페리호를 타기 전에 기윤과 약속을 했는데, 기윤을 만나러 오는 길에 그만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단다.

기윤은 통곡을 하며 슬퍼하였지만, 민재는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단다. 기윤은 자신만의 장례식을 한번 더 했단다. 민재가 남긴 시들을 모아 책을 만들고, 그 책을 고등학교 명예의 전당에 몰래 갖다 두었단다. 민재는 기윤에게 우상이면서 명예의 전당에 오를만하다고 생각했어.

….

소설은 다시 서른 살을 앞둔 기윤의 시간으로 돌아왔어. 과거를 회상하면서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지. 그러면서 지금까지 자신은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닌 모방을 한 것이라는 깨닫고,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하면서 소설은 끝이 났단다.

소설이 재미있게 잘 읽히기는 하지만, 익숙한 플롯과 예상되는 줄거리가 다소 아쉬웠단다. 그래도 충분이 읽어볼 만한 소설이었다고 총평을 하고 싶구나. 지은이 이우 님의 다른 책들은 어떤 책이 있는지 한번 살펴도 봐야겠구나.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소복이 쌓인 눈 위에 어둠이 물들고 있었다.

책의 끝 문장: 그림 속 보잘것없는 사내는 이제 더 이상 민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너는 왜 구레나룻을 기르고, 통바지를 입고, 그렇게 요란한 신발을 신는 거야?"
"글쎄, 멋있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일종의 저항이라고나 할까. 그래, 멋으로 저항을 하는 거지. 이 재미없고 감옥 같은 학교를 향해서."
- P17

"이곳처럼 야생적이지 않았어. 이미 학생들도 학교를 초월한 어른들의 가치가 물들어 있었거든. 권력지향적이고 자본주의적이었다고 할까. 부모님이 어떤 직업이고 알만큼의 권력과 부를 소유했는지가 중요했어. 보다 중요한 건 권력과 부를 소유했는지가 중요했어. 보다 중요한 건 권력을 세습하고 부를 상속할 수 있는지의 여부였지. 그게 가능하다면 이미 무언가를 성취한 거나 다름없었거든. 또 어느 정도의 성적을 갖고 있으며 어떤 학교를 갈 수 있는지도 중요한 요인이었지. 이러한 잣대로 비슷한 조건을 가진 애들끼리 몰려다니며 어른들과 유사한 권력 놀이를 했어. 오히려 물리적인 힘에서 오는 권력은 야만스러운 것에 불과했지.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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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1)

아무리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악한 수단을 사용한 데 따르는 정신적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죄를 지으면 벌을 면하지 못하는 게 삶의 이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다른 맥락에서 볼 수도 있다.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악한 수단으로 선한 목적을 이룰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나는 이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당성 여부를 따지기 전에, 악한 수단으로는 선한 목적을 절대 이루지 못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어떤 연역적, 논리적인 추론의 산물이 아니다.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을 보고 체험한 끝에 경험적, 직관적인 판단이다.


(32)

스탈린과 히틀러 같은 비범한 사람들인류를 구원하려는 신념에 입각해 모든 종류의 폭력을 사용할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구축했던 사회체제를 가리켜 우리는 전체주의라고 한다. 이 체제는 인간의 생명과 권리를 학살하고 억압하는 제도화된 악이었다. 스탈린과 히틀러, 그리고 이들의 지시를 받아 대량 학살을 저질렀던 수많은 부하들이 전당포 노파 자매를 죽인 것 때문에 라스꼴리니꼬프가 겪어야 했던 끔찍한 정신적 번민과 고통에 시달렸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한 죄악을 저지름으로써 어떤 선한 목적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핟. (전체주의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나치의 마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독일 출신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추천한다.) 인류는 20세기의 전체주의 경험을 통해 나쁜 수단으로는 결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51)

너는 지식인이야. 너는 무엇으로 사느냐. 너는 권력과 자본의 유혹 앞에서 얼마나 떳떳한 사람이었느냐. 관료화한 정당과 정부 안에서 국회의원, 장관으로 일하는 동안 비판적 지성을 상실했던 적은 없었느냐. 성찰을 게을리하면서 주어진 환경을 핑계 삼아 진실을 감추거나 외면하지 않았느냐. 너는 언제나 너의 인식을 바르게 하고 그 인식을 실천과 결부시키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느냐.


(71)

19세기 유럽 자본주의국가의 노동 대중이 처했던 극단적 빈곤과 전적인 무권리 상태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노에 공감한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그에 버금가는 고난을 겪는 것을 나는 보았다. 또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종식할 방법을 모색한 그의 집요한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우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노동권과 사회권은 마르크스와 같은 이상주의자 국유화를 핵심으로 하는 중앙 통제식 계획경제와 일당독재는 사회를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되는 연합체를 만드는 적절한 방법이 될 수 없다.


(94)

다시 <인구론>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우리 모두는 갖가지 편견과 고정관념을 지니고 산다.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모든 종류의 통념이 논리적 경험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일일이 시험하고 검토할 수 없는 일이기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관념과 사고방식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는 맬서스와 얼마나 다른가. 내가 옳다고 믿는 것, 내 신념을 받치고 있는 수많은 통념들 가운데 그릇된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없을 것인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 속에도 그런 것이 없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인구론>과 멜서스는 금이 간 거울이다. 내 생각도 그릇된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일그러져 있지 않은지 경계하면서 나를 비추어 본다. 생각은 때로 감옥이 될 수 있다!


(113)

푸시킨은 200년 전 전제정치와 농노제도가 실시되던 동토(凍土) 러시아에서 자유를 노래했다. 인류가 오늘날까지도 온전히 실현하지 못한 휴머니즘과 민중에 대한 사랑을 문학으로 꽃피웠다. 당대의 현실에 대해 그가 느꼈을 분노, 환희, 절망, 그 모든 것이 생생하게 전해 오기에, <대위의 딸>을 읽으면 가슴 깊은 곳이 아려 온다. 푸시킨은 황제의 권력으로 모독할 수 없었던 고귀한 영혼이었다. 얼어붙은 땅에서 솟아오른 꽃이었다. 두꺼운 먹구름도 빛을 가리지 못한 밤하늘의 별이었다. 그 별은 오늘도 문명의 하늘에서 빛나고 있다. 푸시킨!


(122)

맹자는 제후의 지위를 가진 자로서 왕을 죽이고 새 왕조를 세웠던 주 무왕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은나라 주왕이 폭정으로 인의를 해쳤고 간언하는 충신을 모두 죽였으며 백성을 도탄을 빠뜨렸으니 군주로서의 정당성 또는 정통성을 이미 상실했다고 본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무왕은 반역자가 아니며, 주나라의 정통성을 의심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왕조를 바꾸는 역성혁명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사상을 반길 왕이 있을까?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덕으로 선정을 펴라는 맹자의 왕도 정치 이론을 부국강병에 몰두하던 전국시대 왕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그 이후 여러 통일 왕조들에서도 맹자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의심해본다.


(134)

보수가 이념이 아니라 연속성과 안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전통적인 제도와 관습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라면, 맹자는 정말 멋진 보수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흔히들 보수가 물질적 이익과 세속적 출세를 탐낸다고 하지만 진짜 보수주의자는 이익이 아니라 가치를 탐한다. 진짜 보수주의자는 다른 누군가와 싸우는 전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에 정체성의 닻을 내린다. 타인을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을 성찰한다. 누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실의에 빠지지 않으며 깊은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난다.


(175)

권력을 스스로 일구어낸 사람은 이런 걱정을 피할 수 없다. 선거로 대통령이나 총리를 뽑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은 선거를 통해 권력을 차지한다. 선거에 이기는 데 큰 공을 세운 참모들이 있기 마련이다. ‘개국공신들은 높은 직위를 얻어 정권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선거전에 능한 사람이라고 해서 국정 운영이나 국가행정을 잘한다는 보장이 없다. 공은 있으나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자리를 주면 국정이 꼬이고 국민의 지지를 잃기 쉽다. 그러나 자리를 주지 않으면 불만을 터뜨리고 권력자를 원망한다. “술을 마시면 자신의 공을 다투고, 술에 취해서는 함부로 큰 소리를 지르고 칼을 뽑아 들고 기둥을 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중요한 자리를 주면 국정은 망가지고 최고 권력자는 민심을 잃게 된다.


(183)

정치는 위대한 사업이다. 짐승의 비천함을 감수하면서 야수적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일이다. 설사 한신과 유방이 빛을 좇는 불나방처럼 권력을 향한 본능에 이끌려 투쟁의 소용돌이에 뛰어들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덕()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인의(仁義)를 존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만하면 충분하지 아니한가. 비록 성인의 반열에 오를 만한 덕성을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때로 맹목적 욕망과 시기심에 휘둘렸다 할지라도, 그러한 마음과 능력을 발휘하여 결과적으로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었지 않은가. <사기>를 덮으며, 한신과 한고조가 겪었던 인간적 고통과 비극적 죽음에 대해, 이 모든 것들이 기록해 인류에게 선사한 역사가 사마천의 삶에 대해 깊은 존경과 높은 찬사를 바친다.


(200)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처음 읽은 후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솔제니친과 소련 국민을 가두고 죽였던 강제노동수용수와, 그런 야만적 장치를 불가결한 구성 요소로 보유했던 사회주의 체제는 사라졌다. 동서 이데올로기 전쟁의 포화 속에서 때로는 부당하게 비난받았고 때로는 터무니없이 이 찬양받았던 작가 솔제니친도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으면서, 엄청난 세상의 변화를 다 견디고 내 마음에 남는 것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결국 남은 것은 사람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혹독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는 사람. 땀 흘려 일하는 사람. 때로 보상받지 못하는 노동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게 유용한 것을 만드는 일에 즐거움에 느끼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런 사람의 모습에서 얻는 감명이 세월을 견디고 내 마음에 그대로 남아 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218)

곳곳에서 우생학회가 만들어졌는데 대표적인 것이 1926년 결성한 미국 우생학회였다. 이 학회는 부자와 권력자들이 우수한 유전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말할 것도 없고 유럽에서도 남부와 동부는 열등한 민족이 살기 때문에 이민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정신병, 발달 장애, 간질 환자들에 대해서는 강제로 불임 시술을 하자고 제안했다. 실제로 미국의 수많은 주들이 불임법을 도입했다. 독일 나치 정권은 미국의 불임법을 복제한 법률을 만들었으며, 우생학에 의거해 순수한 독일인 혈통을 보존하는 사업을 벌였고, 유대인과 유색인종과 동성애자 학살을 정당화했다. 진화론은 확실히 오남용의 위험이 큰 이론이다.


(258)

조지의 사상은 사실 그리 과격하지도 위험하지도 않았다. 토지소유권을 근거로 지주가 취득하는 지대를 공동체의 것으로 만들자고 했을 뿐이다. 그래서 조지의 사상을 가리켜 토지공개념또는 지공주의(地公主義)라고도 한다. 조지는 마르크스와 달리 사유재산제도의 폐지 또는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주장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폐기하자고 하지도 않았다. 토지를 국융화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조세 징수를 통해 생산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은 사람이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근거로 진보의 경제적 과실을 독점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진보와 빈곤이 동시에 존재하는 부조리를 해소하자고 했을 따름이다. 자연이 또는 하느님이 준 토지를 특정한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사회적 범죄라고 보았던 그의 사상은 전통적인 경제학의 울타리를 넘어 철학과 종교의 영역에 걸쳐져 있었다. 조지의 지대 이론은 논리적으로 명확하며 누구나 경험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 설명의 논리 구조는 리카도의 차액지대론과 똑같다.


(264-265)

조지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피에르 프루동과 샤를 푸리에, 카를 마르크스와 같은 19세기 유럽 사회주의자들과 달랐다. 하지만 한 가지,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만큼은 예외였다. 조지는 그 누구에게도 토지를 개인적으로 소유하면서 자식들에게 상속할 권리는 없다고 확신했다. 만인이 땅을 이용할 공동의 권리를 지닌다는 것이 그에게는 창조주의 뜻인 동시에 자연법의 당위적 요구였다.


(273-274)

우리는 정보의 바다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신문 방송이 시시각각 전하는 뉴스와 인터넷에서 만나는 정보들은 과연 얼마만큼의 진실을 함유하고 있을까? 누구도 알지 못한다. 모든 정보의 진실성 여부 또는 진실 함유도를 정확하게 따지려면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웬만한 것은 다, 누가 특별히 허위라는 문제 제기를 하고 분명하게 입증하지 않는 한, 대충 어느 정도는 사실이려니 여기게 된다. 이것이 평범한 사람들이 언론 보도를 대하는 기본자세이며, 우리네 삶의 어찌할 수 없는 한계다. 우리는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정보를 숨 쉬고, 왜곡과 거짓을 마시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의심해볼 수밖에 없다. 내가 가진 생각은 정말 내 생각일까?


(279-280)

처음 읽었을 때 숨이 막혔다. <차이퉁>이 카타리나 블룸의 명예를 짓밟은 방식이 너무나도 리얼했기 때문이다. 내가 현실에서 보고 경험했던, 그리고 현재에도 목격할 수 있는 언론의 행태와 정말로 똑같았다. <차이퉁>은 주로 두 가지 방법을 썼다. 첫째는 검찰청 조사실에서 오간 이야기를 악의적으로 왜곡해 중계방송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문명국가의 형법이 금지하는 불법적인 피의 사실 유포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다. 검사나 검찰 수사관 중에 누군가가 <차이퉁> 기자와 정보 밑거래를 하지 않는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국가기관과 언론기관이 한통속이 되어 저지르는 불법행위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결코 원치 않았던 S의 아파트 방문, 얼마짜리인지도 몰랐던 반지, S의 별장 열쇠 등에 관한 사항을 비롯하여 <차이퉁>이 내밀한 사생활 관련 정보를 왜곡 보도해 자신을 모욕하는 데 대해, 그리고 그런 일을 바로 잡을 방법이 사실상 전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카타리나 블룸은 절망감을 느낀다.


(313)

인생의 고비마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이번이 여섯 번째인 것 같다. 다시 카를 읽으며 사회와 역사의 진보,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생각한다. 카의 말마따나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그런 의미에서 모든 시대의 역사는 현대사임에 분명하다. 고대사 연구 프로젝트인 소위 동북공정은 만족할 줄 모르는 오늘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제어할 수 없는 영토 확장 욕망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다.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제국주의 침략 전쟁의 행동은 그들이 미래에도 침략 전쟁의 죄악을 부인하도록 역사 교과서 수정을 강제한 일본 정부 당국자들의 행동은 그들이 미래에도 침략 전쟁을 벌일 의사가 있음을 증명한다. 조선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고, 대한민국 건국 이후 국가권력이 저지른 인권유린 범죄를 정당화하려한 형태는 그들의 마음속에 극우 파시즘 사상이 똬리 틀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시대의 역사는 현대사임에 분명하다.


(327-328)

여기서 핵심은 표현의 자유. 생각과 감정은 그 사람만의 것이다. 표현하지 않으면 남이 알지 못한다. 사회가 간섭하거나 침해할 수 없다. 하지만 글이나 말로, 행동으로, 혼자 또는 여럿이 함께 그것을 표현하면, 같은 생각과 감정을 가진 이들이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면 사회가 알게 된다. 이것을 억압하면 절대적 양심의 자유와 생각의 자유, 삶을 원하는 대로 설계할 자유를 해치게 된다. 그래서 모든 민주주의 문명국가의 헌법은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불가침의 기본권으로 보장한다. 우리나라 헌법도 마찬가지다. 밀의 견해를 받아들인 것이다. 조심하자. 밀 혼자만 또한 밀이 최초로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와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를 비롯한 선각자들의 철학을 계승해 더 높은 수준에 올렸을 따름이다.


(346-347)

말은 1859년 그 옛날에 쓴 책에서 그런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어리석은 자를 대통령으로 뽑은 이후 화나고 아프고 어이없는 일들을 견디고 이겨낸 이들에게, 계엄의 밤 국회에서 계엄군을 막아섰던 시민들에게, 남태령의 기적을 만든 젊은이들에게, 눈보라를 맞으며 헌법재판소 앞에서 밤을 지새웠던 남녀노소에게, 무한히 큰 감사의 마음을 얹어 그 말을 전하고 싶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오늘 우리를 본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대들은 인간의 모든 자랑스러운 것의 근원을 보여주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해도 됩니다.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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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드 1 - 엘파바와 글린다
그레고리 머과이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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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이야기할 책은 작년 말에 본 영화 때문에 읽게 된 책이란다. 너희들과 함께 재미있게 본 뮤지컬 영화 <위키드> 1편이 그 영화야. <위키드>라는 뮤지컬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본 적도 없고 무슨 내용인지도 몰랐는데, 작년에 영화를 보고 그 뮤지컬이 <오즈의 마법사> 프리퀄에 해당하는 이야기란 것을 알았어. 예전에 인터넷 서점을 서칭하다 보면 <위키드>라는 소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유심히 보지는 않았단다. 그런데 이번에 본 영화 <위키드> 때문에 원작 소설도 유심히 찾아 보았단다. 영화가 개봉되면서, 원작소설 <위키드> 개정판이 나왔는데, 그 책이 여섯 권이나 되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단다.

지은이 그레고리 머과이어는 <오즈의 마법사> 팬심으로 <위키드>라는 소설을 썼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위키드>의 주인공 중에 한 명인 서쪽 마녀의 이름도 <오즈의 마법사> 지은이 라이먼 프랭크 바움의 알파벳 L, F, B를 따서 엘파바로 지었다고 하는구나. 원작 <오즈의 마법사>에서 서쪽 마녀는 이름이 따로 없었고, 서쪽 마녀로만 불리었거든. <위키드> <오즈의 마법사>의 이야기와 교차되는 부분도 있어 재미있었고, <오즈의 마법사>의 주인공들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지은이 그레고리 머과이어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것도 좋았단다.

좀 찾아보니 <오즈의 마법사>도 한 권이 아니라 시리즈로 14권이나 되더구나. 그것도 기회가 되면 읽어보고 싶지만, 장담은 못하겠구나. 이번에 <위키드>를 읽기 전에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오즈의 마법사 1>은 먼저 읽어보았단다.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던 오즈의 마법사의 줄거리를 다시 한번 머리에 새기고 <위키드>를 읽어보니 이해가 확실히 되더구나. 나중에 너희들도 혹시 <위키드>를 읽고 싶다면, 그 전에 <오즈의 마법사>를 읽는 것을 추천한단다. , 그러면 오늘은 <위키드> 1, 부제는 엘파바와 그린다에 관한 이야기를 해줄게. 아참, 뮤지컬 또는 영화 <위키드>는 소설 <위키드>에서 많이 각색되었단다. 그럼 바로 시작하자.

 

1.

이 책의 앞쪽에 보면 오즈의 나라의 지도가 나온단다. 책을 보다가 지명이 나오면 어디에 위치에 있는지 들쳐보면서 읽기도 있단다. 오즈의 나라의 중앙에서 동쪽으로 넓게 퍼진 먼치킨랜드라는 곳이 있어. 그 곳에 프렉스 목사와 멜리나 부부 사이에 엘파바가 태어났는데 녹색 피부를 가지고 태어났고, 태어났을 때부터 강한 이빨을 가지고 태어나서, 산파의 손가락을 깨물어 산파의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도 일어났단다. 녹색 피부를 가지고 태어나서 다들 엘파바를 꺼렸는데 유모는 엘파바를 다른 아이와 차별 없이 보살폈단다. 엘파바의 녹색 피부에 이런저런 소문이 많았는데 엄마 멜리나의 불륜으로 태어났다는 소문이 있었고, 그 불륜남이 준 녹색병에 든 기적의 영약을 먹은 적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엘파바의 피부가 녹색이라고들 했어.

엄마 멜리나는 남편보다 다른 남자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란다. 멜리나는 얼마 후에 쿼들링이라는 지방에서 온 터틀 하트라는 사람과 또 사랑에 빠졌단다. 프렉스 목사가 외출할 때마다 멜리나는 터틀 하트와 밀회를 가졌고, 얼마 후에 또 임신을 하게 되었단다. 유모는 이번에도 녹색 피부의 아기가 태어날까 봐 다른 동네에 가서 약을 지어와서 멜리나에게 주었단다. 그래서 다행히 정상색의 피부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양쪽 팔이 없고 다리도 불편한 기형 아이가 태어나고 말았단다. 그 아이가 엘파바의 여동생 네사로즈란다.

….

오즈의 나라는 오즈마라는 오즈의 여왕이 다스렸는데, 오즈마가 쥐약을 잘못 먹고 죽었고 딸 오즈마 티페타리우스는 나이가 어려서, 아버지 파리트리우스가 섭정을 하고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러다가 기구를 타고 온 사람이 오즈의 마법사가 되었고, 쿠데타를 일으켜서 권력을 잡게 되었단다. 그 이후 오즈는 오즈의 마법사의 독재정치가 시작되었단다.

 

2.

, 이제 갈린다 이야기를 해보자. 갈린다는 길리킨 지방의 프로티카라는 작은 상업 도시에서 태어났단다. 17살에 장학생으로 시즈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어. 영화와 달리 기차를 타고 시즈 대학에 가게 되었는데, 기차 안에서 영화에도 나오는 염소 교수인 딜라몬드를 만나게 되었단다. 오즈의 나라는 말하는 동물들도 나오고, 그들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어. 갈린다는 시즈 대학 크레이지 홀에 도착을 했어. 학장은 마담 모르블이라는 사람이었고, 부쩍 자란 엘파바도 시즈 대학에 입학을 했는데, 갈린다와 엘파바는 같은 기숙사 배정을 받았단다. 이에 갈린다는 룸메이트를 바꿔달라고 학장에서 이야기했지만 거절당했어. 갈린다와 엘파바는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는데 그 말다툼은 대화로 변하고 그 대화의 양도 늘어났단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오즈의 동물들은 사람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즈의 마법사는 점점 동물들의 권한을 줄여나갔단다. 공부의 기회도 제한하고, 취업의 기회도 제한했어. 마담 모리블 학장도 이런 정책에 지지를 하면서 동물들은 말을 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단다. 시즈 대학의 염소 교수 딜라몬트는 이런 정책에 반발을 했단다.

시대 대학의 다른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도 할 텐데, 모든 친구들의 이야기를 할 수는 없고, 아빠가 메모하거나 생각하는 사람들만 틈틈이 이야기를 할게. 마스터 보크라는 친구가 있어. 어린 시절 엘파바와 같이 지낸 적도 있는데, 엘파바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어. 마스터 보크는 갈린다에 푹 빠져서 사귀자고 이야기를 했지만, 갈린다는 단칼에 거절했단다. 그런데도 보크는 계속해서 갈린다에게 구애를 했단다.

첫 여름방학, 엘파바와 보크는 집에 가지 않고 학교에 남았어. 딜라몬트 교수의 일을 도와주시고 했지. 한편 갈린다는 친구들과 휴가를 즐기고 있었어. 어느날 엘파바는 길린다의 초대장을 받게 되었어. 하지만 엘파바는 가지 않으려고 했단다. 보크는 엘바파에게 가라고 함께 가자고 설득을 했어. 보크는 여전히 갈린다를 좋아했고 갈린다를 볼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엘파바는 결국 보크, 또다른 친구 애버릭과 함께 갈린다에게 갔지만, 갈린다는 초대장을 보낸 적이 없다는 거야. 알고 보니 갈린다와 함께 휴가를 보내던 다른 친구가 장난으로 초대장을 보낸 것이었어. 위 이야기는 적고 보니 전체 이야기의 큰 영향이 없는 작은 에피소드로구나.

....

여름 방학 마지막 날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어. 염소 교수 딜라몬드가 죽는 거야. 사고사라고 알려졌지만, 누가 봐도 타살로 보였어. 동물의 권한을 축소해 가던 상황에서 그 정책에 반대하는 딜라몬드의 죽음. 갈린다의 딜라몬드의 죽음을 추모하면서, 딜라몬드가 갈린다 발음이 어려워 불렀던 글린다로 개명하기로 했단다.

한 해가 지나고 엘파바의 동생 네사로즈도 입학을 했단다. 네사로즈의 몸이 불편하니, 네사로즈를 보살펴 줄 유모도 함께 왔어. 엘파바는 동생이 입학하면서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갈린다, 아니 글린다에게 해 주었단다. 엘파바에게는 네사로즈 말고 남동생 셴이 또 있었는데, 셴을 낳다가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했어. 셴은 고향에서 아버지와 함께 지내고 있다고 했어.

 

2.

글린다는 학교 생활을 하면서 정신적으로 한 단계 성숙한 모습을 모였단다. 엘파바와도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어. 글린다의 보호자 아마 클러치도 시즈 대학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날 아마 클러치가 위독하다고 양호실에 머물고 있다고 했어. 글린다가 찾아가니, 아나 클러치는 귀신 들린 듯 헛소리를 하다가 그만 죽고 말았단다. 그가 죽기 전에 한 이야기는 딜라몬드를 죽인 건 그로메틱이라고 했어. 그로메틱은 마담 모리블 학장의 기계 인간이었어. 그러니까 딜라몬드의 죽음의 배후에 마담 모리블이 있다는 거지. 하지만 증거는 없었어. 딜라몬드가 죽었을 때 현장에 그로메틱이 있었는데, 그건 그로메틱이 목격자로 있었던 것이라고 마담 모리블은 이야기했어.

마담 모리블은 어느날 글린다, 엘파바, 네사로즈만 따로 불러서 비밀 임무를 수행해 달라는 요청을 했단다. 자신이 오즈의 마법사의 비밀업무를 맡고 있다면서, 그들에게 비밀 업무의 조력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어. 그래서 엘파바와 글린다는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러 에메랄드 시로 가게 되었단다. 오즈의 마법사를 만난 엘파바와 글린다는 딜라몬드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만, 오즈의 마법사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단다. 그들은 다시 시즈 대학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엘파바는 시즈로 돌아가지 않겠다면서 글린다와 헤어져 사라졌단다. 엘파바는 동물들의 차별을 없애는 운동을 하겠다고 했어.

 

3.

5년이 지났어. 글린다와 친구들은 시즈 대학을 모두 졸업했단다. 엘파바는 에메랄드 시의 한 수녀원에서 지내고 있었어. 시즈 대학의 졸업생 중에 한 명인 피예로는 에메랄드 시에서 우연히 엘파바를 만났단다. 시즈 대학에서 만난 이후 처음이었어. 이후 피예로는 가끔씩 엘파바를 찾아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어. 피예로 자신은 시즈 대학을 졸업해서 아이가 벌써 셋이라고 했어. 글린다도 어떤 준남작과 결혼을 했다고 했어. 엘파바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았어. 엘파바는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동물들의 인권을 되찾기 위해 비밀조직에서 활동을 했고, 오즈의 마법사의 권력을 무너뜨리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었단다.

피예로와 엘파바가 자주 만나면서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이 싹트고 말았단다. 아무래도 피예로가 유부남이다 보니 그들은 몰래 만나 사랑을 키워갔단다. 하지만 엘파바는 자신의 비밀 임무는 피예로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어. 피예로는 엘파바가 어떤 일을 하는지 몰래 뒤를 밟았어. 엘파바는 드디어 거사를 벌이는 날이었어. 엘파바의 타겟은 오즈의 마법사의 측근인 마담 모리블이었어. 그런데 예기치 못한 아이들 무리들이 끼어 들어서 거사를 성공시키지 못하고, 자신은 부상당한 채 수녀원으로 숨어들어갔단다. 피예로는 엘파바가 집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엘파바의 집에 왔는데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비밀 경찰들이었단다. 그렇게 피예로는 경찰에 잡히게 되었어.

여기까지가 <위키드> 1권의 이야기란다. 앞서 이야기했듯 뮤지컬이나 영화 <위키드>의 줄거리와는 많이 다르지? 엘파바가 아직 마법을 부리지도 못하고, 서쪽 마녀가 아닌 동물 권리 운동가로 활약을 하고 있으니 말이야. <오즈의 마법사>는 어린이를 포함한 모든 연령층을 위한 책이지만, <위키드>는 성인을 위한 소설인 듯 하구나. 잘못된 국가의 권력을 제거하려 시도도 나오고, 찐한 사랑이야기도 나오고 말이야. 오즈의 나라에 우리나라 민주주의 시스템이 있었다면 오즈의 마법사를 탄핵시켰을 텐데, 좀 아쉽기는 하구나. 정권이 바뀐 세상이 이리 아름답다는 것을 오즈의 사람들도 알아야 하는데 말이지

, 그럼 오늘은 이만조만 간에 2권 이야기도 해줄게.

 

PS,

책의 첫 문장: 마녀는 오즈 위로 2킬로미터 정도 상공에서 바람 앞자락을 타고 균형을 잡았다.

책의 끝 문장: 야클 엄마가 너를 편히 돌봐 줄게.


유모는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몰랐다. 엘파바는 악마의 씨일까? 반은 인간이고 반은 요정일까? 설교자로서 아빠가 제 구실을 못한 벌일까, 아니면 몸가짐이 헤프고 기억력이 나쁜 엄마에게 내려진 벌일까? 아니면 그저 모양이 괴상한 사과나 다리 다섯 개 달린 송아지처럼 단순한 기형에 불과할까? 유모는 악마와 신앙, 민간 전승 따위의 영향으로 자기가 세상을 보는 눈이 흐릿하고 혼란스러운 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멜레나와 프렉스 부부가 분명 아이가 아들일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프렉스는 일곱 번째 아들이었고 그의 아버지 역시 일곱 번째 아들이었으며, 심지어 그는 집안의 7대 목사였다. 어찌 다른 성의 아이가 감히 이토록 상서로운 순서를 따를 수 있겠는가?
유모는 어쩌면 이 초록색 아기 엘파바가 부모를 파멸로 몰아넣기 위해 자기만의 성과 색깔을 고른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64

"아, 과학은 자연을 해부하여 보편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부분으로 축소하지요. 마술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마술을 조각조각 나누는 것이 아니라 찢어진 부분을 잇지요. 분석보다는 통합니다. 기존의 것을 파헤치기보다는 새로이 조립하지요. 정말로 재능 있는 사람의 손에서는(이 대목에서 그레일링 교수는 머리핀에 찔려 비명을 질렀다.)…… 예술입니다. 사실 누구나 마술을 우월한, 아니 가장 훌륭한 예술이라 할 거예요. 마술은 회화나 연극, 암송 같은 여러 예술과 다른 면에서 우월합니다. 마술은 세계를 꾸미거나 표현하지 않아요. 세계가 되는 거예요. 더없이 고귀한 소명이라 할 수 있죠." - P252

"아니야. 나한테 영혼이 있다는 증거가 어딨어?"
"영혼이 없다면 어떻게 너한테 양심이 있을 수 있겠니?"
- P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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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밀양, 약산 김원봉이 태어난 도시다. 약산의 평생지기 석정 윤세주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약산의 고모부 백민 황상규를 비롯해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독립유공 애국지사만 80여 명이다. 안동과 더불어 인구대비 가장 많은 숫자다. 한마디로 독립유공자의 산실과 같은 장소다. 2018년 봄 약산의 생가터에 밀양시가 의열기념관을 세우고 나서 밀양을 찾아야 할 이유가 더 분명해졌다. 그러나 2019년 들어 밀양시가 친일파 박시춘을 중심으로 한 <가요박물관> 건립을 추진 중이다. 지사들의 얼굴에 먹칠하는 부끄러운 일이다. 약산의 생질 김태영 박사와 밀양 출신 청년들을 중심으로 가요박물관 건립을 막고 있다.


(28-30)

반 토막 난 독립운동사에 약산의 이름을 올려야겠다고 결심한 첫 번째 이유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친일파 7인 김백일, 김홍준, 신응균, 이응준, 이종찬, 백낙준. 이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만주군에 복무하면서 독립군을 때려잡던 인사들이다. 게다가 해방 후에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아래 다시 국군으로 돌아와 보란 듯이 현역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더 높은 자리로 영전했고 각각 군 사령관과 참모총장, 국방부 장관이 됐다.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제2묘역에 묻힌 일본군 장교 출신 신태영과 이응준이 대표적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요 인사 묘역과 불과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들이 묻힌 장군 제2묘역이 있다. 의도했든 아니든 이들 친일파의 묘역이 애국지사 묘역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한 탓에 친일파 무덤이 애국지사 무덤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형태다. 더 화가 나는 건 이름 없이 쓰러져간 수만의 독립군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대한독립군 무명 용사 위령탑역시 친일파 묘역 입구 하단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위령탑 아래가 의열단 출신 김익상과 김상옥, 박재혁, 곽재기, 최수봉, 이종암 등이 잠든 애국지사 묘역이다. 한마디로 친일파의 무덤이 조국 독립을 위해 청춘과 목숨을 다 바친 애국지사와 순국선열보다 더 높고 양지바른 곳에 위치해 있다는 말이다.


(75-76)

1910년에 태어나, 약산보다 정확히 12살 어렸던 박차정 지사는, 집안이 모두 독립운동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대한제국 탁지부 주사를 지냈던 부친 박용한은 일제의 침략에 분노해 자결했다. 숙부 박일형과 친척들, 오빠들도 모두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 외가 쪽 역시 독립운동가 김두전과 김두봉이 친척인 집안이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신간회, 의열단 등에서 활동한 큰오빠 박문희, 둘째 오빠 박문호 등과 함께 박차정 지사 역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일찍이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일신여학교 시절부터 지역을 대표하는 독리운동가로 활약했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 1월 서울 여학생 시위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했다. 그러나 근우회 사건으로 구금된 다음 일경의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병석에 누워있던 박차정 지사를 의열단에 몸담고 있던 둘째 오빠 박문호가 불렀고, 지사는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합류했다. 1930년 봄의 일이다.


(100)

<의열단 공약 10>

1. 천하의 정의를 맹렬히 실행한다.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해 신명을 희생한다.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히 자라야 의열단원이 된다.

4. 단의(團義)를 우선하고, 단원의 의()도 급히 실행한다.

5. 의백 일인을 선출해 단체를 대표케 한다.

6.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매월 일차식 사정을 보고한다.

7.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초회(招會)(부름)에 반드시 응답한다.

8. 피사(被死)(죽음을 피하지) 아니하며 단의의 전력을 다한다.

9. 하나의 아홉을 위하여 아홉이 하나를 위해 헌신한다.

10. 단의(團義)를 배반한 자는 척살한다.


(103)

그러나 백민 황상규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우리 독립운동사의 큰 족적을 남겼다. 1차 의열단 의거 실패 후 감옥에서 6년여를 보냈다. 출소 후에도 밀양에서 지역 운동을 전개하며 지역 리더로서의 역할을 실천했다. 1927 12월부터는 신간회의 밀양지회장으로 선출되고 왕성한 활동을 벌인다. 하지만 고문 등으로 이미 몸이 쇠약해진 상태, 한때 관운장이라 불릴 정도로 강인한 그였지만 과로 등이 겹치며 결핵성 복막염을 앓았다. 1929 11월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황상규는 진상조사단이 돼 몸을 돌보지 않고 사건을 알렸다. 결국 더 이상 버티질 못했다. 1930년 초 황상규는 다시 고향에 돌아와야만 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듬해 9월 황상규는 눈을 감는다. 사인은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발생한 폐결핵과 복막염 악화. 의열단의 정신적 스승이자 행동하는 지성인이었던 백민 황상규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135)

부산 출신 박재혁은 1920 9월 초 상하이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에 도착한다. 1920 9 14일 고서상으로 위장한 박재혁은 부산경찰서 서장 하시모토 슈헤이와 마주한다. 그리곤 고서 상자 속에서 미리 준비한 폭탄을 꺼내들고 하시모토에게 나는 상하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들을 잡아 우리 계획을 깨뜨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인다라고 외치며 폭탄을 투척한다. 폭탄에 맞은 서장은 수일 뒤 사망했다.

박재혁 역시 현장에서 폭탄을 맞아 부상을 당하고 체포됐다. 1921 3,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과 상처로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사형 선고 전, ‘왜놈의 손에서 욕보지 말고 차라리 내 손으로 죽겠다라고 결심한 뒤 곡기를 끊고 단식하다 옥사하였다. 의열단다운 결기였다.


(149-150)

김산은 의열단 의백 김원봉과 의열단원 김성숙과 특히 사이가 가까웠다. 베이징에서 자주 모임을 가질 만큼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이였다. 이 만남은 훗날 황포군관학교라는 공통분모까지 이어진다. 그만큼 각별한 사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단 김산과 약산 모두 책벌레였다. 특히 두 사람이 다 러시아 문학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두 사람은 만나면 할 이야기가 많았다. 물론 그만큼 머리도 비상했다. 중앙학교-덕화학교당-금릉대-신흥무관학교를 거친 약산의 비상한 머리야 익히 알려진 바고, 김산 역시 신흥무관학교-난카이대-협화의대-황포군관학교-중산대 등을 거친 수재였다.


(232-233)

그런데 이곳(금릉대학)이 우리 역사에서 더욱 중요하게 평가돼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1935 7, 기라성 같은 애국지사들이 금릉대학교 강당인 대례당에 모여 민족혁명당을 만든다. 면면이 화려했는데 의열단 출신은 약산을 필두로 석정 윤세주, 진이로, 박효삼이 함께 했고, 신한독립당 출신으로 지청천과 신익희, 윤기섭이, 조선혁명당 출신은 최동오와 김학교가 함께 했다. 김두봉과 조소앙, 김규식, 김상덕, 최창익, 허정숙, 안광천 등도 동참했다. 220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함께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김구는 위해 중앙집행위원회의 집행위원장 자리를 공석으로 두었으나 마지막까지 고사했다. 임시정부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위원장이 공석인 상황에서 서기부와 조직부와 실질적으로 권한을 행사했다. 서기부의 부장은 약산, 조직부의 부장은 김두봉이 맡았다.


(302-303)

두 사람(김구, 김원봉)은 진심으로 화합해 조국 독립을 바랐다.

우리 두 사람은 3.1운동 이후 해외에서 일본제국주의를 향해 계속 분투했다. 그러나 과거에는 한 개의 강적에 대한 투쟁을 통일적으로 강하고 유력하게 진행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군중을 떠난 우리 두 사람의 특수환경의 영향도 없지 않았으나, 주로는 우리가 민족적 경각성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민족혁명의 전략적 임무를 정확히 파악 실천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과거 수십 년간 우리 민족운동 사상의 파쟁으로 인한 참담한 실패의 경험과 중국민족의 최후의 필승을 향하야 매진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민족적 총 단결의 교훈을 이전의 착오를 통해 통감한다. 우리 두 사람은 신성한 조선 민족 해방의 대업을 위해 동심협력할 것을 동지동포 앞에 고백하는 동시에 목전의 내외 정세와 현 단계의 우리 정치 주장을 이하에 진술하려 한다.”


(328)

다만 1942년 인도의 영국군 총사령부는 조선민족혁명당에게 인도 버마 전선에 공작원 파견을 요청한 것이 사실이다. 이 시기는 이미 약산이 임정과 광복군 참여를 결정한 상황, 약산은 최종적으로 광복군 이름으로 공작원을 인도에 파견한다. 그리고 43 5월 인도 주둔 영국군과 조선민족혁명당은 조선민족군선전연락대파견에 관한 협정을 맺었다. 이에 따라 43 8월 최성오와 주세민 등을 인도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추가 파병은 이뤄지지 못했다. 약산이 영국군과 가까워지는 상황을 임정 내부에서 용인하지 않았다. 영국군과 공동 작전을 수행했기에 훈장을 받은 것으로 파악되자 정확하게 확인된 바는 없다. 돌아보면 약산은 임정 참여 선언 후 광복군 부사령관 군무부장으로 역할했지만 내부에서 끊임없는 견제를 당하며 주요 작전에서 배제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특히 1945년 광복군과 미국 OSS측의 합작훈련 추진 과정에서 약산은 광복군 부사령임에도 불구하고 작전에서 배제됐다. 약산이 임정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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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

우리가 추상미술 앞에서 난해함을 느끼며 갸우뚱할지라도,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이미 추상적 이미지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상품은 추상적으로 디자인되어 있고, 우리는 그 추상적 이미지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느낍니다. 주변의 모든 건축물은 추상적으로 디자인된 공간을 무척 좋아하고, 심지어 그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휴식을 취하고 있죠. 21세기에 와서는 누구나 좋아하는 미적 취향이 된 기하학적 추상’. 기하학적 추상에 숨겨져 있는 거부할 수 없는 미적 매력을 누구보다 앞서 또렷이 느낄 수 있는 심미안을 갖췄던 사람.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떳떳이 예술가. 그가 바로 몬드리안입니다.

(37)

그렇습니다. 그림을 꼭 사진 찍은 것처럼 눈에 보이는 대로 똑같이 그려야 하는 절대적 이유가 있을까요? 그 고정관념을 제거하면, 그림은 평면 위에 화가가 그리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장이 됩니다. 이렇게 유럽의 회화는 20세기 초에 이르러 회화는 눈에 보이는 것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것이라는 오래된 고정관념을 깨고 벗어납니다. , 그리고 싶은 것이 무엇이든 화가가 더 자유롭게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죠. 바로 이것이 피카소와 브라크가 20세기 초에 활짝 연 현대미술 혁명의 요체입니다.

(69)

그렇다면, 몬드리안은 고작 십자 모양(+)으로 어떻게 미의 진리를 회화에 표현한 것일까? 그는 하얀 캔버스 평면 위에 여러 개의 수직선과 수평선을 직각 대립시켜 그렸을 때 자연스럽게사각형 평명()이 생성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수직선과 수평선을 많이 사용할수록 사각형 평면()의 수 역시 자연스럽게 늘어나는 것을 발견합니다. 더불어, 그 사각형 평면들이 놓인 위치크기모두 제각각임을 발견합니다. 몬드리안 화면 전체에 평형상태를 만들기 위해 수직선과 수평선을 이리저리 이동시키며, 사각형 평면()위치 관계크기 관계를 조율합니다. 그 목적은 캔버스 화면 전체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평화로운, 즉 평형상태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의 성취를 위해 필요하다면 사각형 평면()에 빨강, 파랑, 노랑, 흰색, 회색 등을 채워 사각형 색 평면을 만들어 색채 관계를 조율합니다.

(89)

수업이 트렌드에 매우 뒤처져 있다고 여긴 달리가 대학 울타리 안에서 고분고분할 리 만무했습니다. 교수보다 전위적이며 다른 학생보다 훨씬 뛰어난 그림을 그린다고 자신한 나르시시스트 달리는 반바지에 망토를 걸치고 다니며 괴짜 짓을 일삼기 시작합니다. 신임 교수 취임식에서 교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취임식장을 박차고 나사 1년 정학 처분을 받습니다. 그 이후에도 괴짜 기질을 참지 못한 달리는 대학 미술사 시험 도중 심사위원인 교수들에게 심사위원들을 합쳐놓은 것보다 내가 더 똑똑하고, 주어진 문제를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심사받기를 거부한다고 말하며 퇴학당합니다. 이렇게 착실히 학교 다녀 교수가 되리라 믿은 달리 아버지의 꿈은 산산조각이 됩니다.

(128-129)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폭발 이미지에서 크나큰 충격을 받은 달리. 이제 달리의 관심사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의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원자의 세계가 되었죠. 그는 세상의 모든 물질이 원자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 그리고 원자 속 세계가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과학적 사실에 흥분합니다. 그는 물질세계의 본질을 회화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해답이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에 있다고 여기며 원자물리학, 양자역학 공부에 빠져듭니다. 프로이트보다 하이젠베르크와 아인슈타인을 신봉하기 시작하죠.

(204-205)

제가 현대미술사에 기록되는 위대한예술가를 망나니라고 표현하는 것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에서 숱하게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을 살펴보면 아마 고개가 끄덕여질 겁니다. (정말 쓸지 말지 고민을 많이 했지만 잭슨 폴록의 진짜 면모를 허례허식 없이 전하기 위해) 한 가지 에피소드를 풀어보자면, 폴록은 자신을 아껴준 스승 벤턴의 아내 리카와 불륜을 저지릅니다. 한술 더 떠 25세 폴록은 술에 찌든 상태로 리타로 찾아가 청혼까지 하지만 리카는 거절하죠. 그녀의 거절에 화를 주체할 수 없었던 폴록은 벤턴을 찾아가 빌어먹을 놈, 내가 너보다 더 유명해지고 말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역사에 기록하는 위대한 인물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역사에 기록될 위대한 업적을 이룬 것과 인간성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죠.

(227)

세상이 돕는 이런 긍정적 상황에서 예술가로서 체면을 차리고 작업도 더욱 열심히 할 만했지만, 우리의 폴록은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벽화> 작업으로 창작의 고통을 느낀 것이 치유하기 어려운 큰 상처가 되었는지 알코올 중독과 그로 인한 난폭함은 점점 커져만 갔죠. 만취해 술집의 기물을 부수며 난동을 부리는 건 기본. 사람들과 싸우는 것도 예삿일. 급기야 술집에서 폴록의 출입을 제한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렇게 뉴욕 술집에서 블랙리스트에 오른 그는 눈이 오면 취한 채 도로를 나뒹굴며 차량의 통행을 방해하고, 눈 위에 오줌을 흩뿌리며 전 세계에 오줌을 싸겠다고 고성방가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보통 망나니라고 부르지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위대한 예술가상과는 꽤 다른 모습입니다.

(233)

폴록의 회화를 살펴보면 여전히 초현실주의 영향이 지대함을 알 수 있습니다.(무의식을 활용해 예술 창작을 하고 싶었던) 초현실주의자들이 작은 종이위에 이성의 통제 없이 자유롭게 손을 써서그림을 그리는 자동기술법. 그것을 폴록은 거대한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손만이 아닌 몸 전체를 써서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초현실주의자들과는 꽤 다른 점이 발견됩니다. 화가가 그림 안으로 들어가 그림의 일부가 된다는 느낌을 받고 싶어 한다는 것, 그림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며 화가가 그림을 그림으로써 그림이 자기만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고 믿는 것. 폴록이 창작 과정에서 중시하는 이런 생각과 느낌은 폴록이 스스로 일종의 샤먼이 되어 그림과 교신하는 행위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런 점은 초현실주의자들에게 발견되지 않는 플록의 특징이죠.

(282)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을 알리며 미국은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으로 명확히 헤게모니를 잡게 됩니다. 그때 뉴욕 미술계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전쟁을 피해 미국에 왔던 유럽 미술가들은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버렸고, 미술관과 갤러리 등 제도권에서 미국 미술가들을 차별하는 분위기는 여전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내부 상황은 크게 달라져 있었습니다. 유럽의 전위 예술가들과 수년간 교류했던 미국 미술가들의 예술 세계가 크게 성숙한 것이죠. 더불어, 승전국이자 세계의 패권을 잡은 국가의 국민으로서 생긴 자부심은 미국 미술가들 사이에 유럽의 예술을 추종하던 기성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자. 그리고 독자성을 가진 진정한 미국적 예술을 창조하자!’는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310)

내가 젊은 청년이었을 때 예술은 고독한 작업이었습니다. 갤러리도, 수집가도, 평론가도, 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황금기였습니다. 우리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대신 비전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상황이 그렇지 않습니다.”

비관적인 연설. 모든 것을 가졌기에 잃을 일만 남아서일까?” 66세의 로스코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비전만이 찬란히 넘쳐흐르던 젊은 날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심리 속 로스코의 내면에 남겨진 색채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오직 검정과 회색뿐이었습니다.

(319)

,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를 다른 시각으로 관찰하면, ‘복제의 시대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온라인 미디어에서 텍스트, 이미지, 영상이 무한히 반복적으로 복제되고 있고, 이제는 그 영향이 오프라인까지 범람하며 무엇이 원본이고 복제본인지’,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 되었죠. 이런 현대 사회의 특징을 (일찍이) 1960년대에 예리하게 간파해 예술에 절묘하게 녹인 예술가가 바로 앤디 워홀입니다.

(339-340)

더 나아가 워홀은 이런 미국의 사회 구조 속에서 하나의 진실을 발견합니다. 바로 기업이 상품을 반복적으로 생산하고, 미디어 광고를 반복적으로 노출하고, 소비자가 된 미국인은 광고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며 소비를 반복한다는 진실. 다시 말해, ‘반복 생산, 반복 노출, 반복 소비의 문화를 발견합니다. 워홀은 미국의 사회 구조 속에 숨겨진 이 진실을 자신의 전매특허 미학으로 승화시키기로 합니다. 한마디로 반복’. 캠벨 수프 캔 하나를 그리던 워홀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시중에 판매 중인 32종의 캠벨 수프 캔을 반복적으로 그리기 시작합니다. 크기도, 형태도, 형식도 모두 완벽하게 표준화된 32개의 <캠벨 수프 캔>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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