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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평전 - 지조의 시인·한국학자 ㅣ 역사 속에 살아 있는 인간 탐구 42
김삼웅 지음 / 지식산업사 / 2024년 4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얼마 전에 도올 김용옥 님의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라는
책을 읽고, 그 책에서 잠깐 등장한 조지훈 시인을 달리 보게 되었다고 이야기했었는데 기억나니? 그래서 조지훈 시인에 대한 책을 찾아보았는데, 아빠가 좋아하는 김상웅
님이 쓰신 <조지훈 평전>이 있더구나. 그래서 그 책을 사서 이번에 읽게 되었단다. 김상웅 님이 쓰신 평전들을
아빠가 많이 읽었는데, 최근에는 안 읽은 것 같구나. 여전히
우리나라의 역사 인물에 대해서 평전을 쓰고 계시는구나. 최근 사진을 봤는데, 세월의 흔적이 많이 보이시더구나. 건강히 오랫동안 많은 훌륭한 인물들을
소개해 주셨으면 한다.
아빠는 조지훈 시인이라고 하면
청록파 시인으로 대표적으로 <승무> 정도만 기억하고
있지, 그 외에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단다. 그런데 조지훈
시인은 그저 한 사람의 시인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되겠더구나. 그가 살았던 시대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있어 가장 암울하고 어두웠던 시대였는데, 그런 시대를 살면서 권력에 빌붙어 편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그는 불의에 쓴 소리를 내면서 독재에 항거하는, 그야말로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도 보여주었단다. 이 책에는 조지훈 님의 글들도 많이 발췌되어 많이 실려 있는데, 시도 좋지만 그의 산문들이 더욱 좋았단다. 오늘날의 지난 정권에도
깔맞춤인 글들도 있었단다.
1.
조지훈 시인은 1921년 1월 11일
경북 영양에서 태어났단다. 중종 시대 개혁가로 이름 날린 조광조의 후손이었어. 아버지 조헌영 님은 일본 유학 후 항일 투쟁을 하셨고 3.1운동 6주년 기념 시위를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어. 할아버지는
마을 서당에서 한학을 가르치셨는데, 조지훈 시인은 어려서 학교에 다니지 않고 이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아버지를 통해 얻은 와세다대학의 <통신강의록>으로 독학했다고 하는구나. 17살 때 서울로 올라와서 고서점을
내기도 했다. 이 즈음 한용운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일송
김동삼이라는 분이 독립 운동을 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형무소에서 시신을 찾아가라고
했어. 그런데 일제가 무서워 아무도 찾아가지 않고 있을 때, 만해
한용운은 김동삼 님의 시신을 업고 심우장에 모셔와 장례를 치렀단다. 조지훈은 이런 한용운의 모습을 보고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고 했어.
…
조지훈은 19살에 <문장>지에 <고풍의상>이라는 시가 당선되면서 정식 시인의 길을 걷게
되었어. 그리고 20살의 그의 대표작 <승무>라는 시를 발표했단다. <승무>라는 시가 인생을 어느 정도 살고 난 시인의 작품일
거라 생각했는데, 20살의 청춘의 시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단다. 천재는
다르긴 다른가 보다. 조지훈 시인은 <백지>라는 동인지를 출간하여 활동 영역을 넗혀 나갔단다.
…
1939년 독립운동가의 딸 김위남과 결혼하였고, 아내의 이름이 남자이름처럼 보여서 조지훈 시인은 아내에게 ‘김난희’란 예명을 지어주었단다. 1941년에는 오대산 월정사에서 비승비속인
생활을 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에서 <큰사전> 편찬위원으로 일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검거되었는데 조지훈 시인은 어리다고 금방 풀려났다고 하는구나. 아까 1921년생이라고 했으니
1942년이라고 하면 우리나라 나이로 해도 22살이구나.
1943년에는 고향에 내려와 있었는데, 징용 통지가 날라왔어. 다행히 신체검사에서 불합격하여 징용을 가지 않아도 되었다고 하는구나. 하지만
조지훈 시인은 일제에 압박에도 친일로 변절하지 않았단다. 그는 시인으로써 순수시를 추구하면서 일제를
외면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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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조지훈은
반대편이었다. 일제말기 수많은 문인이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귀축영미’를 저주할 때, 그는 침묵하거나 순수시를 통해 조선의 전통과 불교적
선(禪)에 심취하였다. 그리고
해방공간에서 너도나도 인민과 조국, 계급을 주창할 때도 자신의 패턴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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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중에 변절자에 대해서도
비판했지만, 개과천선한 변절자에 대해서는 욕하지 않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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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조지훈은
변절행위를 매섭게 질타한다.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은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천선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이라 한다. 일제 때 경찰에 관계하다 독립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
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를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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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45년, 그의 나이 25살에
드디어 해방이 되었단다. 그는 해방된 조국을 위해 자신의 힘을 보태겠다는 생각으로 조선청년문학협회 등
여러 조직에 참여해서 활동을 했단다. 그리고 명륜전문학교, 경기여고교사, 여자의전 등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어. 그의 청춘은 해방과 함께 꽃길만
걸었으면 좋았을 것을…
2.
해방 후 1946년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집>이라는 시집을 발표했는데, 조지훈에게는
이 시집이 첫 시집이었단다. 해방 후 조지훈은 순수시를 많이 쓰셨지만,
민족주의 진영의 소신파였어. 조지훈 시인이 그렇다고 순수시를 쓰고 사회참여시를 쓰지 않은
것은 아니야. 나중에 이승만, 박정희 독재 시절에는 참여시뿐만
아니라 독재를 따갑게 비판하는 평론도 많이 쓰셨단다.
…
1947년 10월, 27살에 고려대 교수로 임용되었어. 하지만 얼마 안가 6.25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단다. 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는 납북되었고, 전쟁 통에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매부도 죽고, 할아버지는 자진하였다고 하는구나. 정말 힘든 시절이구나. 조지훈 시인은 피난을 가게 되었고, ‘공군종군문인단’에 들어 군인과 함께 움직이면서 창작 활동을 했단다. 이 단체에 들어서
그는 평양까지 다녀오기도 했대.
…
전쟁이 끝나고 이제 다시 문인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고 창작 활동을 했단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의 작품들을 찾아 모아 전집을 기획했단다. 전에 도올 김용옥 님의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한용운 전집 작품은 끝내
끝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말았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복귀하는데 힘을 써야 할 정부는 이승만
독재를 위해 계략만 꾸미고 있었단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조지훈 시인은 이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 그동안 지향했던 순수시를 접고 저항시를 쓰기 시작했단다. 4.19를
앞두고 지은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시는 시라기 보다 격문이라고 볼 수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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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가
우리 무엇을 믿고 살아 왔는가 동포여!
정말 우리 무엇을 바라고 살아왔는가 서러운 형제들이여!
서른 여섯해 동안의 그 숨막히는 굴욕(屈辱)을
피눈물로 되찾은 이 땅위에
갈등(葛藤)과 상잔(相殘)과 유리(流離)와 간난(艱亂)이 연거푸
덮쳐와도
입술을 깨물고 허리띠를 졸라매며 우리 말없이 살아온 것은 참으로 무엇을 기다림이었던가
그것을 말해다오 그것만을 말해다오 하늘이여!
우리의 단 하나의 보람 단 하나의 자랑 단 하나의 숨줄마저 무참(無慘)히도 끊어진 오늘
겨레여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가, 정말로 우리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살아야 하는가
원통한 원통한 백성들이여!
자유세계(自由世界)의 보루(堡壘)에 자유(自由)가 무너질
때 철(鐵)의 장막(帳幕)을 무찌를 값진 무기(武器)가
같은 전선(戰線)의 배신자(背信者)의 손길에 꺾이었을 때,
아 자유를 위해서 피흘린 온 세계(世界)의 지성(知性)들이여!
우리는 무엇에 기대어 싸워야 하는가. 무엇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그것만을 말해다오 그것을 가르쳐다오 자유(自由)의
인민(人民)들이여!
공산주의(共産主義)와 싸우기 위하여 공산주의를
닮아가는 무지가 불법(不法)을 자행하는 곳에
민주주의(民主主義)를 세운다면서 민주주의의 목을
조르는 폭력(暴力)이 정의(正義)를 역설(逆設)하는 곳에
버림받은 지성(知性)이여 짓밟힌 인권(人權)이여 너는 정말 무엇을 신념(信念)하고 살아가려느냐.
무엇으로써 너의 그 아무것과도 바꿀 수 없는 긍지(矜持)를
지키려느냐
그것을 말해다오 그것만을 말해다오 하늘이여!
백성을 배신(背信)한 독재(獨裁)의 주구(走拘) 앞에 연약한 민주주의의 충견(忠犬)은
교살(咬殺)되었다.
온 나라의 마을마다 들창마다 새어나오는 소리 없는 울음소리.
사랑하는 동포여 서러운
형제들이여 목을 놓아 울어라. 땅을 치며 울어라. 내 가슴에
응어리진 원통한 넋두리도 이제는 다시 풀길이 없다.
찢어진 신문과 부서진 스피커 뒤로 난무(亂舞)하는
총칼, 이 백귀야행(白鬼夜行)의 어둠을 어쩌려느냐.
정말로 정말로 잔인한 세월이여!
새아침 옷깃을 가다듬고 죽음을 생각는다.
육친(肉親)의 죽음보다 더 슬픈 이 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이여!
진주(眞珠)를 모독(冒瀆)하는 돼지, 그 돼지보다도
더 더럽게 구복(口腹)에만 매여서 살아야 할
이 삼백 예쉰 날을 울어라 삼만 육천날을 울기만 할 것인가.
원통한 백성들이여!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살아야 하는가 짓밟힌 자유여!
정말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가 불행(不行)한
불행한 신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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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2월에 쓴 <지조론>에서는 당시 독재를 찬양하는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단다. 그리고 4.19 혁명 당시 대학 교수들이
동참할 때 조지훈 시인도 함께 동참을 하면서 행동하는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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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조지훈은 4월혁명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혁명 대열에 직접 참여하고, 혁명 후에는 이의 성공을 위해 다른 지식인들이 하기 어려운 발언을 쏟아냈다.
이 논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조용히 힘을 기르라. 먼저 황폐한 학원을 재건하고 출발전야의 제2공화국이 제군의 피를
헛되이 하지 못하도록 깨끗하고 거창한 압력을 주라. 반동세력의 대두를 막기 위하여 그들을 국민 앞에
고발하고 주권자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하여 국민을 계몽하는 선두에 나서라. 무엇보다 먼저 제군들이 그것을
분별하는 눈을 마련해야 하고, 제군들이 먼저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바는 아니지만, 제군들의 고귀한 피가 또 한 번 뿌려져야 할 때야 올런지도 모른다는 의구는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 그런 불행이 오지 않도록 막기 위해서는 제군의 발언권이 증대되어야 하고, 그 발언권은 제군들이 자중하는 위의와 단결과 정화 속에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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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
혁명이 성공한 후에도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어. 안일하고 방향을 잃은 대학생들에게 조언을 하고, 민주당
등 정치계에도 쓴소리를 했단다. 이런 것은 오늘날에도 교훈으로 삼아야겠구나. 대통령 탄핵 인용이 되었다고 해서 방심하고 안일한 자세를 가지면 안 된다. 아직
내락 세력들이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야. 이번 대선에는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를 하여 살아있는
민주세력의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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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조지훈은
이 시기 누구 못지않은 영향력 있는 논객이었다.
“혁명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참으로 혁명정신은 지하에서 통곡하고 병원의 베드 위에서 저주하고, 학원의
캠퍼스 구석구석에서 침통한 우수와 뉘우침의 안개 속에 싸여 있다. 오직 순정과 의분으로 혁명에 임했던
학생들이 독재정권을 무너뜨림으로써 자족하고 물러설 때 식자들은 그것을 찬양하고, 그런 자세가 어쩌면
새로운 혁명의 전형으로서의 영예를 성취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대는 마침내 바로 그대로 맹점이 되고 말았다. 혁명정신은 과연 어디로 갔는가?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먹는다”는 속담대로 피는 학생들이
흘리고 공은 정치가들이 따로, 민중의 신임은 혁명대변 세력이 받고, 칼자루는
반혁명 세력이 쥐었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은 바로 인세무상(人世無常)의
그것을 다시 한번 깨우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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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단다. 그들이 일정 시간이 지나면 정권은 민간에게 이양한다는 말만 믿고 처음에는 그렇게라도 나라가 바로 선다면 괜찮다는
생각을 가졌어. 하지만 군인들이 정체를 서서히 드러내면서 권력에 대한 야욕을 알고 나서는 조지훈 시인은
태세전환을 하여 비판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였단다. 결코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지.
3.
시인으로서의 활동도 열심이셨단다. 1961년 9월에는 국제시인회의를 위해 벨기에에 갔다가 세계일주도
하셨다고 했어. 한국에 돌아와서는 한국고전국역위원회의 3대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셨어. 이 단체는 민족문화연구소로 이름을 바꾸고 조지훈 시인이 1대 연구소장을 맡기도 했단다. 민족문화연구소에서는 <한국문학사대계> 총 7권을
발표하였는데, 이 책에서는 식민사관을 청산하려는 노력을 했어. 그리고<한국민족운동사>도 저술하였단다.
40대의 조시훈 시인은 국학연구에 몰두하였어. 1960년대 중반에는 한일협정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는 등 여전히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셨어. 그가 이렇게 열심히 활동을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건강이 썩 좋지는
않았다고 하는구나. 특히 소화기 계통이 어렸을 때부터 안 좋았는데, 그
병으로 결국 1968년, 우리나라 나이로 48세에 적은 나이에 삶을 마감하시고 말았단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시로 썼는데 그 시를 가족들 앞에서 직접 낭독하셨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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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297)
절정
나는
어느새 천길 낭떠러지에 서 있었다. 이 벼랑 끝에 구름 속에 또 그리고 하늘가에
이름
모를 꽃 한 송이는 누가 피어 두었나
흐르는
물결이 바위에 부딪칠 때 튀어 오르는 물방울처럼 이내 공중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 그런 꽃잎이 아니었다.
몇만
년을 울고 새운 별빛이기에 여기 한 송이 꽃으로 피단 말가
죄
지은 사람의 가슴에 솟아오르는 샘물이 눈가에 어리었다간 그만 불붙는 심장으로 염통 속으로 스며들어 작은 그늘을 이루듯이 이 작은 꽃잎에 이렇게도
크낙한 그늘이 있을 줄은 몰랐다.
한 점 그늘에 온 우주가 덮인다
잠자는 우주가 나의 한 방울 핏속에 안긴다 바람도 없는 곳에 꽃잎은 바람을 일으킨다 바람을 부르는 것은 날 오라 손짓하는 것 아 여기 먼 곳에서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보이지 않는 꽃나무 가지에 심장이 찔린다.
무슨
야수의 체취와도 같이 전율할 향기가 옮겨 온다
나는
슬기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한 송이 꽃에 영원을 찾는다. 나는 또 철모르는 어린애도 아니었다
영원한 환상을 위하여 절정의 꽃잎에 입맞추고 길이 잠들어버릴 자유를 포기한다
다시 산길을 내려온다 조약돌은
모두 태양을 호흡하기 위하여 비수처럼 빛나는데 내가 산길을 오를 때 쉬어가던 주막에는 옛 주인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 이마에 주름살이 몇 개 더 늘었을 뿐이었다. 울타리에 복사꽃만 구름같이
피어 있었다 청댓잎 잎새마다 새로운 피가 돌아 산새는 그저 울고만 있었다.
문득
한 마리 흰 나비! 나비! 나비! 나를 잡지 말아다오. 나의 인생은 나비 날개의 가루처럼 가루와 함께
절명(絶命)하기에 - 아
눈물에 젖은 한 마리 흰나비는 무엇이냐 절정의 꽃잎을 가슴에 물들이고 사(邪)된 마음이 없이 죄 지은 참회에 내가 고요히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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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오늘은 조지훈 시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았단다. 이 책을 읽으니 그가 달리 보이더구나. 누군가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조지훈 시인이라고 이야기해야겠구나.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의 시들을 좀 읽어야 하는데, 아빠가 읽은 조지훈 시인의 시는 교과성에 실린 것뿐. 조지훈 시인의 시집이나 산문집을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좀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팬심으로…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 이상.
PS,
책의 첫 문장: 조지훈은 1921년 1월 11일(음 1920년 12월 3일)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주실)동 202번지에서 조헌영과 유노미의 3남 1녀 사이 차남으로 태어났다.
책의 끝 문장: 연구가 부족하고 능력 또한 못 미쳐서, 선생의 향내 나고 매운 문학과 넓고 깊은 학문의 세계를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언저리만 맴돌다 나온 것이 아닌가
두렵다.
<지조론>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된다. "지조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써 먼저 그 지조의 강도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음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영리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一朝)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 P6
고루거각이 어찌 나의 멋이 될 수 있겠는가. 다만 멋 아닌 멋으로 멋을 삼아 법당을 돌고 싶으면 법당을 돌고, 염주를 세고 싶으면 염주를 세고, 경(經)을 읽고 싶으면 경을 읽으며, 때로 눈을 들어 먼 신을 바라고 때로는 고개 숙여 짐짓 무엇을 생각나니 나의 선(禪)은 곧 멋밖에 아무것도 없는가 보다. 오늘을 모르는 세상에 내일을 생각함은 어리석은 일일러라. 내일을 모른다 하여 오늘에 집착함은 더욱 어리석은 일일러라. 다만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나를 사랑하지 않으며 남을 도우려고도 않아 들녘에 피었다 사라지는 이름 모를 꽃과 같고자 하노라. - P127
1950년대 고래대학교 국문과 제자들 사이에는 ‘지다(知多)’ 선생으로 통하셨다는 이야기를 제자분들로부터 들었다. 워낙 박학다식이라서 지어 올린 별호였다고 한다. 그때도 아버지께서는 빙긋이 웃으시면서 "그 위에다 내 성(姓)을 올려놔 봐. ‘조지다’가 되는군" 좌중이 박장대소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 P135
조지훈은 변절행위를 매섭게 질타한다.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은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천선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이라 한다. 일제 때 경찰에 관계하다 독립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 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를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 P168
<20세기의 한국>을 조감한다는 것은 곧 우리 근대문화의 거의 전 과정을 부관(俯觀)하는 일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희랍 ‘델피’의 신전에 새겨진 경구로서 소크라테스를 통하여 알려진 교훈이거니와 오늘의 한국-우리들의 민족적 자아의 모습을 찾는데 일조가 될까하여 이 책을 엮었다. 제 눈으로 제 눈을 볼 수는 없다. 역사의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이 거울에 비친 20세기 세계사상의 한국의 모습이 과연 얼마나 정확한 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자아는 각자가 체득할 수밖에 없으니 제 모습을 찾는 일깨우는 것만으로 이 책의 사명은 다한다고 할 수 있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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