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난 어떤 영화도 싫어하지 않습니다. 싫다는 감정을 합리화하기에는 영화는 너무나 만들기 어려운 법이거든요. 제아무리 형편없는 실패작이라고 해도요. 영화가 별로면 나는 그냥 좌석에 앉아 끝나기를 기다립니다. 머지않아 끝날 테니까요. 영화를 보다 나가는 건 죄악입니다.”


(261)

잡담은 건너뛰자는 겁니까?” 빌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렌 레인은 확실히 아름다운 여자였지만, 그는 아름다운 여자들은 지천으로 널렸으며 아름다움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전에 배운 뒤였다. 아름다움은 여자를 지고한 위치에 올려 배경과 무관하게 숭배의 대상이 되도록 하는 한편, 빌은 아름다운 여자가 말할 때는 귀를 기울여야 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상대로 절대 헛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빌이 몸을 뒤로 기대며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다른 어떤 노동도 무언의 진실을 포착하고자 하는 내 탐구심을 충족시켜 주지 못해서예요. 참으로 순순하고 드러난 적 없어서 관객들이 왜 진즉 알아차리지 못했나 하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그런 진실 말이지요. 이번에 묶인 영화들은, 그러니까 나이트셰이드와 파이어폴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이 연옥 속에 갇힌 남자들과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지요. 남자와 여자가 평등해질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겁니다. 동일노동동일임금이 실현될 날은 올지도 모르겠지만, 그마저도 아직은 닦이지 않은 길이고요. 우리가 감히 소년과 소녀의 차이가 받아들여지기를 바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서로의 섬약한 인간성을 존중할 수 있을까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며, 일어난다면 대체 그건 언제쯤일까요?”


(318)

맞아.” 얼이 말했다. “우리는 영화를 마무리하는 그 순간까지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마차 행렬에 함께 오른 개척자들이지. 하지만 , 다른 일자리 구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이 모든 건 그냥 하나의 잔상이 될 거야.” 얼은 두 팔로 사무실을 아우르며 영화 만드는 경험 전체를 가리켰다. “내가 자기를 유혹해서 파운틴 애비뉴의 흐름 속에 끌어들인 이래 지금까지 자기가 겪었던 속도와 압박감을 생각해 봐, 이네스. 그걸 세 배로 곱해. 그리고 다시 제곱. 그런 다음 야간 촬영 때문에 가장 친한 친구의 출산 기념파티에 못 갔는데 자기가 휴가를 내지 못한 이유를 그 친구가 이해해 주지 않는 나날을 더해 봐.”


(404)

그 영화는 워너에서 만들었는데 워너 영화들이 다들 그렇듯 촬영 일정이 몇 주밖에 안 됐어요. 영화를 공장처럼 찍어 냈던 시절이니까. 감독 마이클 커티즈는 헝가리인이라 억양이 강했지요. 촬영장은 펄펄 끓습니다. 당시에는 조명으로 아크 등을 사용했고 필름 감도 때문에 빛이 많이 필요했던데다 릭의 카페에서 도박하고 술 마시고 나치에게서 달아나려고 하는 모두가 정장을 입고 있었거든. 알다시피 원작은 희곡입니다. <모두가 릭의 카페에 찾아온다>. 각본가는 네 사람, 그중에는 쌍둥이 엡스타인 형제와 하워드 코크도 있었지요. 쪽 대본이 날아다니고, 버려지고, 새 대사를 시험해 보기 일쑤예요. 스튜디오 전속 배우들은 자기 장면에서 실력을 보여 주려고 난리고, 잉그리드 버그먼은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모두를 매료시키고, 클로드 레인스는 그중 단연 돋보이고 완벽하지요. 그리고 경력의 정점에 선 보가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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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드 3 - 리르 이야기
그레고리 머과이어 지음, 임재서 옮김 / 민음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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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 오늘은 아빠가 가끔씩 읽고 있는 위키드 시리즈 3권의 이야기란다. 위키드 시리즈는 각 권마다 부제가 붙어 있는데, 3권의 부제는 리르 이야기란다. 리르, 생각 나지? 2권에서 엘파바의 아들로 99.99999% 추정되는 그 아이피예로와 불륜으로 낳은 아이로 추정되는 그 아이리르도 생각해보면 참 불쌍한 아이로구나. 태어나기도 전에 아빠는 죽었고, 엄마는 자신이 자기의 엄마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거기다가 예상치 못한 사고로 엄마도 일찍 죽어서 고아가 된 아이오즈라는 나라가 고아에게 복지를 잘 해주는 것도 아니고, 혼자 된 리르가 살아가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 이야기가 3권에 펼쳐진단다. 그럼 곧바로 이야기를 해줄게.

도로시가 동쪽마녀 네사로즈와 서쪽마녀 엘파바를 죽인 이후 다시 자신의 고향인 캔사스로 돌아갔단다. 오즈를 다스리던 오즈의 마법사도 홀연히 사라져서 오즈의 나라는 권력 공백 상태가 되었는데, 그때 글린다가 잠시 권좌에 않아 통치를 하다가 곧바로 도로시의 친구 허수아비가 통치하게 되었단다. 허수아비가 오즈를 다스리는 것은 원작에도 나오는 이야기잖니. 그런데 그 허수아비가 사실은 도르시의 친구가 아니고, 다른 사람인 것 같다는 이야기가 있었어. 아무튼 얼마 후 허수아비는 불미스러운 일로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고, 허영심 가득한 신성 황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시절, 이야기는 시작된단다.

 

1.

엘파바가 죽고 나서, 도로시는 엘파바가 죽었다는 증거를 오즈의 마법사에게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 증거로 엘파바의 빗자루를 가져가겠다고 하자, 리르는 그 빗자루는 이제 자신의 것이라고 했단다. 그래서 도로시는 오즈의 마법사에게 보여주기만 하고 다시 돌려준다고 하여 리르는 도로시 일행과 함께 에메랄드로 향했단다. 에메랄드에 도착하고 나서 도로시는 고향으로 떠났고, 리르와 허수아비는 함께 에메랄드 시를 떠나려고 했단다. 허수아비는 원래 오즈의 왕을 물려 받았는데, 왕 자리가 싫었고, 글린다가 다른 밀짚인간에게 왕을 넘길 계획을 갖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앞서 불미스러운 사고로 왕 자리에서 쫓겨난 허수아비는 도로시의 친구 허수아비가 아니고, 글린다가 고용한 가짜 허수아비였던 것이란다.

성을 빠져 나온 다은 리르와 허수아비는 헤어지고, 리르는 노르를 찾아보려고 했어. 노르 혹시 기억나니? 키아모코에서 살 때 체리스톤 사령관이 이끈 군인들이 사리마의 가족들을 모두 납치해가서 행방불명이 되었잖아. 그런데 노르만이 오즈의 마법사에게 잡혀 있었던 것을 엘파바가 구출하려고 하다고 실패했잖니.. 리르는 에메랄드 시에 왔으니 노르를 찾아보려고 했어. 리르와 노르는 엄마는 다르지만, 아빠가 같은 사람이잖아. 어찌 생각하면 가족이니까리르에게 유일하게 남은 가족.

리르는 다시 글린다를 찾아가 만났고, 글린다에게 노르 찾는 일을 도와달라고 하니, 노르는 남쪽 계단 및 지하세계의 감옥에 갇혀 있을 것이라고 했어. 그리고 그곳은 네사로즈와 엘파바의 남동생인 셸이 그곳을 관리하고 있다고 했어. 리르는 셸을 만나고 셸은 리르를 데리고 지하감옥에 갔단다. 하지만 노르는 이미 그곳에 없었어. 버려지는 돼지 시체에 숨어서 탈옥을 했다는 거야. 노르도 똑똑하구나. 리르는 다시 지상에 와야 하는데, 셸은 이미 돌아갔고 혼자서 미로 같은 지하감옥의 길을 찾기란 쉽지 않았어. 그런데 그때 엘파바의 빗자루가 갑자기 날아 올라 리르를 안전하게 지상까지 데려다 주었단다. 감옥에서 나온 리르는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군에 입대한단다. 시민군으로 복무하면서 가끔씩 노르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노르의 흔적은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어. 시민군으로 있으면서 글린다의 경비대로 차출되기도 했어.

4~5년이 흐르고, 리르는 7의 창이라는 부대로 쿼들링 지역으로 출정을 하게 되는데 이 부대의 대장이 체리스톤 사령관이란다. 노르의 가족들을 납치해 간 바로 그 체리스톤 사령관. 그들이 쿼들링으로 가는 이유는 쿼들링 총독이 납치되어서 그곳 치안을 담당해야 한다고 했어. 그러니까 말은 출정이지만, 전투가 아닌 사회구조업무에 해당했단다. 그곳에서 또 3~4년을 지냈단다.

리르는 어느날 작전에 투입되는데, 체리스톤은 벵다 마을이 반란을 일으켜 그것을 진압해야 한다고 했어. 그런데 그 방법이 무척 잔인하구나. 마을을 모두 불태우는 것이었어.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고, 벵다 마을을 불태우는 것은 오즈의 성에서 내려온 명령이었어. 리르도 그 작전에 포함되어 거짓 반란인줄 모르고 벵다 마을에 불을 질렀단다. 리르는 어떤 소녀가 부모에 딸을 살리려고 강물에 빠뜨리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가. 리르는 그 소녀를 구출하려고 강을 살펴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단다. 강한 죄책감을 갖게 된 리르는 그날로 군대를 떠났단다.

그리고 키아모코로 돌아왔어. 노르가 감옥을 탈출하여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왔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 하지만 그곳에도 노르는 없었어. 하지만 유모가 아직 살아 있었고, 엘파바의 말하는 원숭이 치스터리가 아직 그곳에 있었어. 며칠 동안 그곳에 머물다가 빗자루를 타고 그곳을 떠났단다. 가는 길에 중상을 입은 백조 여왕을 만났어. 백조 여왕은 정체 모를 용들의 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다고 했어. 최근에 수녀를 상대로 한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했는데, 그것도 용들의 짓이라고 했어. 백조 여왕은 새들의 회의가 가는 길이었는데 이렇게 중상을 입어 그곳에 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리르에게 대신 가서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해 달라고 했어. 그리고는 백조 여왕은 그만 죽고 말았단다.

리르는 백조 여왕의 부탁을 받고 새들의 회의에 참석하려고 다시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올랐단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용들의 공격을 받아 망토와 빗자루를 빼앗기고, 그대로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단다. 그러면서 정신을 잃고 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단다.

위키드 3권의 구성이 현재와 과거를 오가면서 이야기를 해주었어. 소설의 첫 부분에 리르가 중상을 입은 채 발견이 되는데, 그 이유는 소설이 한창 진행된 다음 과거를 이야기해주면서 그 이유가 밝혀지게 된단다. 그런데 아빠는 그냥 시간의 흐름대로 이야기를 해 준 거야.

 

2.

에메랄드 시로 가는 마차를 몰던 오치 맹글핸드라는 사람이 마차를 몰고 가다가 시신을 발견하게 되어 놀랐는데, 자세히 보니 아직 죽지 않았지만 중상을 입어 정신을 잃은 청년이었단다. 오치는 그 청년을 마차에 태워 세인트글린다 수녀원에 데리고 와서 치료해 달라고 했단다. 수녀원에 있는 몇몇 수녀들은 그 청년이 오랜 전 이곳에 머물다가 엘파바와 함께 떠난 리르라는 것을 알아봤어. 의사 수녀는 리르의 상태를 보더니 오래 살지 못살 것이라고 이야기했어. 원장님을 그래도 리르를 보살펴야 하니까 얼마 전에 수녀원에 들어온 신임수녀 캔들에게 리르를 보살피라고 지시했단다.

캔들은 도밍곤이라는 악기 연주를 아주 잘 했는데, 날마다 리르 옆에서 도밍곤을 연주해 주었단다. 캔들은 자신의 몸으로 니르에게 온기를 불어넣어주는 등 치료를 하였고, 결국 니르가 깨어났단다. 그리고 둘은 몰래 수녀원을 탈출하게 된단다. 그들은 버려진 농장에서 지냈고, 캔들의 보살핌으로 리르가 많이 회복되었어. 그리고 캔들은 임신을 하게 된단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된 리르는 용들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 에메랄드 시에 갔다가 군대 동료 트리즘을 만나 놀라운 소식을 들었단다. 벵다 마을의 방화를 명령한 사람이 황제였는데, 그 황제가 다름 아닌 리르의 삼촌, 그러니까 엘파바와 네사로즈의 동생 셸이라고 했어. 셸이 오즈의 황제가 되어 오즈를 다스리고 있던 거야. 그리고 자신을 이름 없는 신의 제1의 창이라고 불렀대. 트리즘은 용들을 훈련시키는 드래곤 부대에 소속되어 있다고 했어. 트리즘은 황제의 못된 짓을 알고 있었지만,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밖에 할 수 없었대. 하지만 리르를 만났으니 리르와 함께 일을 벌이기로 했어. 그동안 트리즘도 찜찜한 일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마음을 먹을 수 있었어.

리르는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용들을 죽이기 위해 독약을 바른 먹이를 용들에게 주고, 빼앗긴 빗자루를 다시 훔쳐왔단다. 용들은 이것을 먹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대성당이 무너지는 사고가 났단다. 리르와 트리즘은 도망을 갔고, 세인트글린다 수녀원에서 숨어 지냈단다. 우연히 그곳에는 글린다도 잠시 머무르고 있었어.

얼마 후 리르와 트리즘을 쫓는 체리스톤 사령과 군인들이 세인트글린다 수녀원에 찾아왔단다. 원장 수녀는 리르는 그곳에 없다면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어. 수녀원을 강압적으로 쳐들어갈 수 없는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체리스톤 사령관의 부대는 수녀원 밖에서 진을 치고 기다렸어. 원장 수녀와 글린다는 리르와 트리즘을 어떻게 탈출시킬 것인가에 대해 작전을 짰단다. 리르는 빗자루를 타고 탈출을 하고 트리즘은 글린다의 경비대로 위장하여 탈출하기로 했단다. 리르는 몰래 빗자루를 타고 수녀원을 탈출한 다음, 새들의 회의가 열리는 장소가 갔단다. 새들에게 용들의 궤멸 소식을 전하면서 이제 다시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다고 했단다. 그 동안 용들이 하늘을 지배하여 새들이 하늘을 제대로 날지 못했거든.

리르의 소식이 전해지자 새들 수천 마리가 한꺼번에 하늘을 날아올랐단다. 리르는 임무를 다 마치고 캔들이 머무르고 있는 농장으로 돌아왔단다. 그곳에는 나스토야 여왕 일행이 와서 머무르고 있었는데, 캔들은 임신한 몸으로 그들 일행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어. 임신하게 되면 그 자체로 엄청 힘든 일인데, 다른 사람들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란다. 캔들은 리르에게 자신보다 남들을 더 챙긴다면서 불만을 이야기하기도 했어.

나스토야 여왕은 2권에서 잠깐 언급했었는데, 다시 이야기를 해줄게. 나스토야 여왕은 원래 코끼리였는데, 오즈의 동물 차별법이 생기면서 인간으로 변신하여 반은 인간 반은 코끼리 형상의 사람이었어. 이제는 너무 늙어서 혼자서는 움직일 수도 없었단다. 리르와 인연이 있던 여왕이 리르를 찾아왔던 것인데, 나스토야 여왕은 리르의 농장에서 삶을 마감했단다. 리르는 나스토야 여왕과 그들의 일행을 배웅해 주고, 다시 농장에 왔는데 캔들이 사라졌단다. 녹색 빛깔의 피부를 띤 아기만 남겨둔 채 말이야녹색 피부라니누구의 후손인지 알겠지?

여기까지 위키드 3리르 이야기란다. 아빠의 잘못된 기억력으로 일부 잘못된 내용이 있을 수 있는 점은 언제나 이해해 주길 바라고지은이 그레고리 머과이어에 의해 오즈라는 나라가 더 구체적이면서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 같더구나. 뮤지컬 <위키드>는 위키드의 1권과 2권을 다뤘는데, 위키드 전체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를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왕좌의 게임>이나 <반지의 제왕>처럼 말이야. <위키드 시리즈> 4권의 부제는 겁쟁이 사지 이야기란다. 오즈의 친구 겁쟁이 사자는 또 어떤 삶을 살았었는지 기대되는구나. 조만간 또 이야기해줄게.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닥치는 대로 잔혹한 짓을 범한다는 소문은 헛소문이 아니었다.

책의 끝 문장: 아기는 깨끗이 씻기어 초록색 피부를 드러냈다.

 


하지만 어느 쪽 교육 방침도 공통의 가정을 깔고 있었으니 그것은 아이의 성장과 변화가 주어진 조건에 대한 반응이라는 견해였다. 그러나 우리는 거꾸로 아이에게 반응하는 것이 세상의 숙명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남다른 개성 때문이든, 악마적인 아름다움이나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 때문이든, 아이들은 세상 속으로 아장아장 걸어 들어가 세상을 망쳐 버리고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는다. 끝없이 양보하는 쪽은 오히려 세상이다. 세상은 그렇게 굴복함으로써 스스로를 갱신하고 쇄신한다. 바로 여기에 비밀이 있다. 살기 위해 죽는 것. - P199

"소리 멋지지. 미래를 읽을 줄 아는 자는 아주 드물어. 너는 캔들이 현재를 읽을 줄 안다고 말했지. 하지만 과거를 읽는 것도 재주는 재주야. 과거를 느끼고 과거에서 새로운 힘과 지식을 얻는 거지. 언제나 과거로부터 배우는 것이라고나 할까. 내 생각으로는 이름 없는 신이 너에 대해 알게 되면 그것도 인간의 커다란 힘이 될 거야. 슬프게도 다른 많은 좋은 생각들처럼 아직까지는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았지만." - P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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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메두사, 메두사, 메두사. 반복해서 나의 이름이 불리고 판결이 내려지면서, 나의 삶, 나의 진실, 평온하던 나날, 영글었던 생각이 전부 무너졌다. 그래서 무엇이 남았냐고? 이 삐죽삐죽한 바위섬과 제대로 죗값을 치르게 된 거만한 여자, 그리고 뱀들의 이야기가 남았다. 잔혹하게도, 변화는 내게 예외 없이 괴물 같았다. 또 한 가지 진실은 내가 외롭고 화가 났다는 것. 그리고 분노와 의로움은 결국 똑 같은 뒷맛을 남긴다.


(62)

내가 소중한 존재이며, 사랑받고 축복받는 존재임을 아는 삶,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 허용되고 또 격려되는 삶, 다른 사람의 시선이라는 커다란 거울 속에서 내가 완벽하다고 느끼는 삶…… 그런 삶이 나의 삶일 수도 있을까? 어쩌면 페르세우스가 그 답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발. 나는 신들에게, 유독 한 신에게 간청했다. 당신은 나에게 너무 큰 벌을 줬어요. 아테나, 제발 내게 이 한 줄기 달빛만은 허락해주세요.

나는 기다렸다. 그러나 아테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78)

달콤한 위험을 맛본 적이 있는지? 그것이야말로 최상이면서 동시에 최악의 별미다. 그 무엇도, 정말이지 그 무엇도 그만큼 자극적이고 특별하며 유혹적인 맛이 없기에 최상이고, 한번 맛보고 나면 그 후로 먹는 모든 것이 밋밋하게 느껴지기에 최악이다.


(201)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 핏속에 운명의 지도가 새겨져 있었다고 믿는다. 그 지도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신들에 의해? 아니면 인간의 탄생과 별빛의 신비로운 조합에 의해? 그들은 인간의 삶이 완벽하게 계획되었으며 다만 우리가 알지 못할 뿐이라고 믿는다. 인간은 이미 마련된 길을 걸음 뿐이고 그 길에서 벗어나면 무너지고 죽는다고. 반면 인간이 백지상태로 태어났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인간이 샘물처럼 깨끗한 상태로 태어나고 자신의 태풍을 일으킨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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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평전 - 지조의 시인·한국학자 역사 속에 살아 있는 인간 탐구 42
김삼웅 지음 / 지식산업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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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얼마 전에 도올 김용옥 님의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라는 책을 읽고, 그 책에서 잠깐 등장한 조지훈 시인을 달리 보게 되었다고 이야기했었는데 기억나니? 그래서 조지훈 시인에 대한 책을 찾아보았는데, 아빠가 좋아하는 김상웅 님이 쓰신 <조지훈 평전>이 있더구나. 그래서 그 책을 사서 이번에 읽게 되었단다. 김상웅 님이 쓰신 평전들을 아빠가 많이 읽었는데, 최근에는 안 읽은 것 같구나. 여전히 우리나라의 역사 인물에 대해서 평전을 쓰고 계시는구나. 최근 사진을 봤는데, 세월의 흔적이 많이 보이시더구나. 건강히 오랫동안 많은 훌륭한 인물들을 소개해 주셨으면 한다.

아빠는 조지훈 시인이라고 하면 청록파 시인으로 대표적으로 <승무> 정도만 기억하고 있지, 그 외에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단다. 그런데 조지훈 시인은 그저 한 사람의 시인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되겠더구나. 그가 살았던 시대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있어 가장 암울하고 어두웠던 시대였는데, 그런 시대를 살면서 권력에 빌붙어 편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그는 불의에 쓴 소리를 내면서 독재에 항거하는, 그야말로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도 보여주었단다. 이 책에는 조지훈 님의 글들도 많이 발췌되어 많이 실려 있는데, 시도 좋지만 그의 산문들이 더욱 좋았단다. 오늘날의 지난 정권에도 깔맞춤인 글들도 있었단다.

 

1.

조지훈 시인은 1921 1 11일 경북 영양에서 태어났단다. 중종 시대 개혁가로 이름 날린 조광조의 후손이었어. 아버지 조헌영 님은 일본 유학 후 항일 투쟁을 하셨고 3.1운동 6주년 기념 시위를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어. 할아버지는 마을 서당에서 한학을 가르치셨는데, 조지훈 시인은 어려서 학교에 다니지 않고 이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아버지를 통해 얻은 와세다대학의 <통신강의록>으로 독학했다고 하는구나. 17살 때 서울로 올라와서 고서점을 내기도 했다. 이 즈음 한용운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일송 김동삼이라는 분이 독립 운동을 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형무소에서 시신을 찾아가라고 했어. 그런데 일제가 무서워 아무도 찾아가지 않고 있을 때, 만해 한용운은 김동삼 님의 시신을 업고 심우장에 모셔와 장례를 치렀단다. 조지훈은 이런 한용운의 모습을 보고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고 했어.

조지훈은 19살에 <문장>지에 <고풍의상>이라는 시가 당선되면서 정식 시인의 길을 걷게 되었어. 그리고 20살의 그의 대표작 <승무>라는 시를 발표했단다. <승무>라는 시가 인생을 어느 정도 살고 난 시인의 작품일 거라 생각했는데, 20살의 청춘의 시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단다. 천재는 다르긴 다른가 보다. 조지훈 시인은 <백지>라는 동인지를 출간하여 활동 영역을 넗혀 나갔단다.

1939년 독립운동가의 딸 김위남과 결혼하였고, 아내의 이름이 남자이름처럼 보여서 조지훈 시인은 아내에게 김난희란 예명을 지어주었단다. 1941년에는 오대산 월정사에서 비승비속인 생활을 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에서 <큰사전> 편찬위원으로 일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검거되었는데 조지훈 시인은 어리다고 금방 풀려났다고 하는구나. 아까 1921년생이라고 했으니 1942년이라고 하면 우리나라 나이로 해도 22살이구나. 1943년에는 고향에 내려와 있었는데, 징용 통지가 날라왔어. 다행히 신체검사에서 불합격하여 징용을 가지 않아도 되었다고 하는구나. 하지만 조지훈 시인은 일제에 압박에도 친일로 변절하지 않았단다. 그는 시인으로써 순수시를 추구하면서 일제를 외면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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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조지훈은 반대편이었다. 일제말기 수많은 문인이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귀축영미를 저주할 때, 그는 침묵하거나 순수시를 통해 조선의 전통과 불교적 선()에 심취하였다. 그리고 해방공간에서 너도나도 인민과 조국, 계급을 주창할 때도 자신의 패턴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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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중에 변절자에 대해서도 비판했지만, 개과천선한 변절자에 대해서는 욕하지 않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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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조지훈은 변절행위를 매섭게 질타한다.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은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천선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이라 한다. 일제 때 경찰에 관계하다 독립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 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를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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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45, 그의 나이 25살에 드디어 해방이 되었단다. 그는 해방된 조국을 위해 자신의 힘을 보태겠다는 생각으로 조선청년문학협회 등 여러 조직에 참여해서 활동을 했단다. 그리고 명륜전문학교, 경기여고교사, 여자의전 등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어. 그의 청춘은 해방과 함께 꽃길만 걸었으면 좋았을 것을

 

2.

해방 후 1946년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집>이라는 시집을 발표했는데, 조지훈에게는 이 시집이 첫 시집이었단다. 해방 후 조지훈은 순수시를 많이 쓰셨지만, 민족주의 진영의 소신파였어. 조지훈 시인이 그렇다고 순수시를 쓰고 사회참여시를 쓰지 않은 것은 아니야. 나중에 이승만, 박정희 독재 시절에는 참여시뿐만 아니라 독재를 따갑게 비판하는 평론도 많이 쓰셨단다.

1947 10, 27살에 고려대 교수로 임용되었어. 하지만 얼마 안가 6.25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단다. 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는 납북되었고, 전쟁 통에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매부도 죽고, 할아버지는 자진하였다고 하는구나. 정말 힘든 시절이구나. 조지훈 시인은 피난을 가게 되었고, ‘공군종군문인단에 들어 군인과 함께 움직이면서 창작 활동을 했단다. 이 단체에 들어서 그는 평양까지 다녀오기도 했대.

전쟁이 끝나고 이제 다시 문인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고 창작 활동을 했단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의 작품들을 찾아 모아 전집을 기획했단다. 전에 도올 김용옥 님의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한용운 전집 작품은 끝내 끝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말았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복귀하는데 힘을 써야 할 정부는 이승만 독재를 위해 계략만 꾸미고 있었단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조지훈 시인은 이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 그동안 지향했던 순수시를 접고 저항시를 쓰기 시작했단다. 4.19를 앞두고 지은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시는 시라기 보다 격문이라고 볼 수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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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가

 

우리 무엇을 믿고 살아 왔는가 동포여!

정말 우리 무엇을 바라고 살아왔는가 서러운 형제들이여!

 

서른 여섯해 동안의 그 숨막히는 굴욕(屈辱)을 피눈물로 되찾은 이 땅위에

갈등(葛藤)과 상잔(相殘)과 유리(流離)와 간난(艱亂)이 연거푸 덮쳐와도

입술을 깨물고 허리띠를 졸라매며 우리 말없이 살아온 것은 참으로 무엇을 기다림이었던가

그것을 말해다오 그것만을 말해다오 하늘이여!

 

우리의 단 하나의 보람 단 하나의 자랑 단 하나의 숨줄마저 무참(無慘)히도 끊어진 오늘

겨레여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가, 정말로 우리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살아야 하는가 원통한 원통한 백성들이여!

 

 자유세계(自由世界)의 보루(堡壘)에 자유(自由)가 무너질 때 철()의 장막(帳幕)을 무찌를 값진 무기(武器)가 같은 전선(戰線)의 배신자(背信者)의 손길에 꺾이었을 때,

아 자유를 위해서 피흘린 온 세계(世界)의 지성(知性)들이여!

우리는 무엇에 기대어 싸워야 하는가. 무엇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그것만을 말해다오 그것을 가르쳐다오 자유(自由)의 인민(人民)들이여!

 

공산주의(共産主義)와 싸우기 위하여 공산주의를 닮아가는 무지가 불법(不法)을 자행하는 곳에

민주주의(民主主義)를 세운다면서 민주주의의 목을 조르는 폭력(暴力)이 정의(正義)를 역설(逆設)하는 곳에

버림받은 지성(知性)이여 짓밟힌 인권(人權)이여 너는 정말 무엇을 신념(信念)하고 살아가려느냐.

무엇으로써 너의 그 아무것과도 바꿀 수 없는 긍지(矜持)를 지키려느냐

그것을 말해다오 그것만을 말해다오 하늘이여!

 

백성을 배신(背信)한 독재(獨裁)의 주구(走拘) 앞에 연약한 민주주의의 충견(忠犬)은 교살(咬殺)되었다.

온 나라의 마을마다 들창마다 새어나오는 소리 없는 울음소리.

 사랑하는 동포여 서러운 형제들이여 목을 놓아 울어라. 땅을 치며 울어라. 내 가슴에 응어리진 원통한 넋두리도 이제는 다시 풀길이 없다.

 

찢어진 신문과 부서진 스피커 뒤로 난무(亂舞)하는 총칼, 이 백귀야행(白鬼夜行)의 어둠을 어쩌려느냐.

정말로 정말로 잔인한 세월이여!

 

새아침 옷깃을 가다듬고 죽음을 생각는다.

육친(肉親)의 죽음보다 더 슬픈 이 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이여!

 

진주(眞珠)를 모독(冒瀆)하는 돼지, 그 돼지보다도 더 더럽게 구복(口腹)에만 매여서 살아야 할

이 삼백 예쉰 날을 울어라 삼만 육천날을 울기만 할 것인가.

원통한 백성들이여!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살아야 하는가 짓밟힌 자유여!

정말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가 불행(不行)한 불행한 신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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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2월에 쓴 <지조론>에서는 당시 독재를 찬양하는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단다. 그리고 4.19 혁명 당시 대학 교수들이 동참할 때 조지훈 시인도 함께 동참을 하면서 행동하는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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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조지훈은 4월혁명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혁명 대열에 직접 참여하고, 혁명 후에는 이의 성공을 위해 다른 지식인들이 하기 어려운 발언을 쏟아냈다. 이 논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조용히 힘을 기르라. 먼저 황폐한 학원을 재건하고 출발전야의 제2공화국이 제군의 피를 헛되이 하지 못하도록 깨끗하고 거창한 압력을 주라. 반동세력의 대두를 막기 위하여 그들을 국민 앞에 고발하고 주권자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하여 국민을 계몽하는 선두에 나서라. 무엇보다 먼저 제군들이 그것을 분별하는 눈을 마련해야 하고, 제군들이 먼저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바는 아니지만, 제군들의 고귀한 피가 또 한 번 뿌려져야 할 때야 올런지도 모른다는 의구는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 그런 불행이 오지 않도록 막기 위해서는 제군의 발언권이 증대되어야 하고, 그 발언권은 제군들이 자중하는 위의와 단결과 정화 속에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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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이 성공한 후에도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어. 안일하고 방향을 잃은 대학생들에게 조언을 하고, 민주당 등 정치계에도 쓴소리를 했단다. 이런 것은 오늘날에도 교훈으로 삼아야겠구나. 대통령 탄핵 인용이 되었다고 해서 방심하고 안일한 자세를 가지면 안 된다. 아직 내락 세력들이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야. 이번 대선에는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를 하여 살아있는 민주세력의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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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조지훈은 이 시기 누구 못지않은 영향력 있는 논객이었다.

혁명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참으로 혁명정신은 지하에서 통곡하고 병원의 베드 위에서 저주하고, 학원의 캠퍼스 구석구석에서 침통한 우수와 뉘우침의 안개 속에 싸여 있다. 오직 순정과 의분으로 혁명에 임했던 학생들이 독재정권을 무너뜨림으로써 자족하고 물러설 때 식자들은 그것을 찬양하고, 그런 자세가 어쩌면 새로운 혁명의 전형으로서의 영예를 성취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대는 마침내 바로 그대로 맹점이 되고 말았다. 혁명정신은 과연 어디로 갔는가?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먹는다는 속담대로 피는 학생들이 흘리고 공은 정치가들이 따로, 민중의 신임은 혁명대변 세력이 받고, 칼자루는 반혁명 세력이 쥐었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은 바로 인세무상(人世無常)의 그것을 다시 한번 깨우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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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단다. 그들이 일정 시간이 지나면 정권은 민간에게 이양한다는 말만 믿고 처음에는 그렇게라도 나라가 바로 선다면 괜찮다는 생각을 가졌어. 하지만 군인들이 정체를 서서히 드러내면서 권력에 대한 야욕을 알고 나서는 조지훈 시인은 태세전환을 하여 비판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였단다. 결코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지.

 

3.

시인으로서의 활동도 열심이셨단다. 1961 9월에는 국제시인회의를 위해 벨기에에 갔다가 세계일주도 하셨다고 했어. 한국에 돌아와서는 한국고전국역위원회의 3대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셨어. 이 단체는 민족문화연구소로 이름을 바꾸고 조지훈 시인이 1대 연구소장을 맡기도 했단다. 민족문화연구소에서는 <한국문학사대계> 7권을 발표하였는데, 이 책에서는 식민사관을 청산하려는 노력을 했어. 그리고<한국민족운동사>도 저술하였단다.

40대의 조시훈 시인은 국학연구에 몰두하였어. 1960년대 중반에는 한일협정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는 등 여전히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셨어. 그가 이렇게 열심히 활동을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건강이 썩 좋지는 않았다고 하는구나. 특히 소화기 계통이 어렸을 때부터 안 좋았는데, 그 병으로 결국 1968, 우리나라 나이로 48세에 적은 나이에 삶을 마감하시고 말았단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시로 썼는데 그 시를 가족들 앞에서 직접 낭독하셨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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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297)

절정

 

나는 어느새 천길 낭떠러지에 서 있었다. 이 벼랑 끝에 구름 속에 또 그리고 하늘가에

이름 모를 꽃 한 송이는 누가 피어 두었나

흐르는 물결이 바위에 부딪칠 때 튀어 오르는 물방울처럼 이내 공중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 그런 꽃잎이 아니었다.

 

몇만 년을 울고 새운 별빛이기에 여기 한 송이 꽃으로 피단 말가

죄 지은 사람의 가슴에 솟아오르는 샘물이 눈가에 어리었다간 그만 불붙는 심장으로 염통 속으로 스며들어 작은 그늘을 이루듯이 이 작은 꽃잎에 이렇게도 크낙한 그늘이 있을 줄은 몰랐다.

 

한 점 그늘에 온 우주가 덮인다 잠자는 우주가 나의 한 방울 핏속에 안긴다 바람도 없는 곳에 꽃잎은 바람을 일으킨다 바람을 부르는 것은 날 오라 손짓하는 것 아 여기 먼 곳에서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보이지 않는 꽃나무 가지에 심장이 찔린다.

무슨 야수의 체취와도 같이 전율할 향기가 옮겨 온다

 

나는 슬기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한 송이 꽃에 영원을 찾는다. 나는 또 철모르는 어린애도 아니었다 영원한 환상을 위하여 절정의 꽃잎에 입맞추고 길이 잠들어버릴 자유를 포기한다

 

다시 산길을 내려온다 조약돌은 모두 태양을 호흡하기 위하여 비수처럼 빛나는데 내가 산길을 오를 때 쉬어가던 주막에는 옛 주인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 이마에 주름살이 몇 개 더 늘었을 뿐이었다. 울타리에 복사꽃만 구름같이 피어 있었다 청댓잎 잎새마다 새로운 피가 돌아 산새는 그저 울고만 있었다.

 

문득 한 마리 흰 나비! 나비! 나비! 나를 잡지 말아다오. 나의 인생은 나비 날개의 가루처럼 가루와 함께 절명(絶命)하기에 - 아 눈물에 젖은 한 마리 흰나비는 무엇이냐 절정의 꽃잎을 가슴에 물들이고 사()된 마음이 없이 죄 지은 참회에 내가 고요히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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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오늘은 조지훈 시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았단다. 이 책을 읽으니 그가 달리 보이더구나. 누군가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조지훈 시인이라고 이야기해야겠구나.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의 시들을 좀 읽어야 하는데, 아빠가 읽은 조지훈 시인의 시는 교과성에 실린 것뿐. 조지훈 시인의 시집이나 산문집을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좀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팬심으로

,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 이상.

 

PS,

책의 첫 문장: 조지훈은 1921 1 11( 1920 12 3)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주실) 202번지에서 조헌영과 유노미의 3 1녀 사이 차남으로 태어났다.

책의 끝 문장: 연구가 부족하고 능력 또한 못 미쳐서, 선생의 향내 나고 매운 문학과 넓고 깊은 학문의 세계를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언저리만 맴돌다 나온 것이 아닌가 두렵다.


<지조론>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된다.
"지조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써 먼저 그 지조의 강도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음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영리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一朝)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 P6

고루거각이 어찌 나의 멋이 될 수 있겠는가. 다만 멋 아닌 멋으로 멋을 삼아 법당을 돌고 싶으면 법당을 돌고, 염주를 세고 싶으면 염주를 세고, 경(經)을 읽고 싶으면 경을 읽으며, 때로 눈을 들어 먼 신을 바라고 때로는 고개 숙여 짐짓 무엇을 생각나니 나의 선(禪)은 곧 멋밖에 아무것도 없는가 보다. 오늘을 모르는 세상에 내일을 생각함은 어리석은 일일러라. 내일을 모른다 하여 오늘에 집착함은 더욱 어리석은 일일러라.
다만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나를 사랑하지 않으며 남을 도우려고도 않아 들녘에 피었다 사라지는 이름 모를 꽃과 같고자 하노라.
- P127

1950년대 고래대학교 국문과 제자들 사이에는 ‘지다(知多)’ 선생으로 통하셨다는 이야기를 제자분들로부터 들었다. 워낙 박학다식이라서 지어 올린 별호였다고 한다. 그때도 아버지께서는 빙긋이 웃으시면서 "그 위에다 내 성(姓)을 올려놔 봐. ‘조지다’가 되는군"
좌중이 박장대소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 P135

조지훈은 변절행위를 매섭게 질타한다.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은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천선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이라 한다. 일제 때 경찰에 관계하다 독립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 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를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 P168

<20세기의 한국>을 조감한다는 것은 곧 우리 근대문화의 거의 전 과정을 부관(俯觀)하는 일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희랍 ‘델피’의 신전에 새겨진 경구로서 소크라테스를 통하여 알려진 교훈이거니와 오늘의 한국-우리들의 민족적 자아의 모습을 찾는데 일조가 될까하여 이 책을 엮었다. 제 눈으로 제 눈을 볼 수는 없다. 역사의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이 거울에 비친 20세기 세계사상의 한국의 모습이 과연 얼마나 정확한 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자아는 각자가 체득할 수밖에 없으니 제 모습을 찾는 일깨우는 것만으로 이 책의 사명은 다한다고 할 수 있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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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기차가 조금씩 속도를 줄이는 것이 느껴집니다. 편지를 마쳐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요. 도착역을 알리는 방송이 곧 나오고 기차는 역사 안으로 들어설 테지요. 때가 되면 우리는 옷가지와 부려놓는 짐을 챙겨들고, 열차에서 내린 후 영원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야 할 거예요. 풍화된 것들 것 바람에 흩어져 없어지고 말겠죠. 그렇지만 나는 덜컹거리는 열차 위에 아직 타고 있고, 여전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 당신이나 지호처럼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이 편지를 쓴 것은 아니예요. 하지만요, 베레나, 이것만큼은 당신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당신의 기억이 소멸되는 것마저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순리라고 한다면 나는 폐허 위에 끝까지 살아남아 창공을 향해 푸르게 뻗어나가는 당신의 마지막 기억이 이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딸이 낳은 그 어린 딸이 내게 그렇게 말한 후 환하게 웃는 장면이요.


(198-199)

오래전, 스스로 너무 늙었다고 느꼈지만 사실은 아직 새파랗게 젊던 시절에 할머니는 늙는다는 게 몸과 마음이 같은 속도로 퇴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굳는 속도에 따라 욕망이나 갈망도 퇴화하는. 하지만 할머니는 이제 알았다. 퇴화하는 것은 육체뿐이라는 사실을.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어김없이 인간이 평생 지은 죄를 벌하기 위해 신이 인간을 늙게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마음은 펄떡펄떡 뛰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는데 육신이 따라주지 않는 것만큼 무서운 형벌이 또 있을까? 꼼짝도 못하는 육체에 수감되는 형벌이라니. 나이를 점점 먹으면서 할머니를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치매나 언젠가 차게 될지 모르는 오줌 주머니가 아니었다. 할머니의 악몽에까지 찾아오는 공포는 언젠가 남편이 입원해 있던 요양병원에서 보았던 뇌졸중 환자처럼 전신이 마비되고도 또렷한 의식을 지닌 채 울부짖으며 여생을 살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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