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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노명식 지음 / 책과함께 / 2011년 6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이야기할 책은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이란
책이란다. 아빠가 프랑스 혁명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찾아보다가 알게 되어 구입했던 책이란다. 파리 역사상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인 프랑스 혁명과 파리 코뮌의 이야기라서 관심이 갔고 책의 평점도 좋아서
구입하게 되었단다. 당연히 외국 작가의 책이라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지은이가 노명식이라는 우리나라 역사가시더구나. 이 책을 처음 쓴 것도 지금으로부터 40년에 쓰셨다고 했어. 그리고 아빠가 읽은 책은 2011년 개간본이란다. 인터넷 검색을 보니 노명식 님은 2012년에 고인이 되셨더구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책을 번역 없이
읽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구나.
이 책이 우리나라에 나온 1980년이라고 하는구나. 우리나라
1980년은 또 다른 군사 독재가 시작되던 해로 정치적 혼동으로 시위가 끊이지 않던 시기였단다. 마친
프랑스혁명 전후에 시위가 끊이지 않았던 시기와 비슷하게 말이야. 결국
1987년 우리나라는 민주화를 이끌어내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 동안 끊임없는 국민들의 항쟁의 결과였단다. 그런 유사한 상황 때문에 1980년대에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느낌이
달랐을 것 같구나. 2024년 또다른 정치적 혼란이 일고 있단다. 역대
최악의 친일파 정권에 나라 살림은 손 놓고 있어서 고삐 풀린 황소 같은 상황… 민심은 80년대 만큼 들끓고 있지만 아직은 다들 각자도생 하느라 거리로 나서지는 않는 것 같구나. 그를 찍은 사람들이 원망스럽구나.
아빠가 프랑스 혁명에 관한 책을
많지는 않지만 몇 권 읽어봤는데, 오늘 이야기할 <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라는 책이 가장 좋았던 것 같아. 누군가 프랑스 혁명에 관한 책을 추천한다고 하면 이 책을 추천할 것 같구나.
사실 이 책을 이번에 읽으려던 책은 이 책이 아니었단다. 아빠가 에밀 졸라의 <패주>라는 소설을 읽으려고 폈거든… 그런데 에밀 졸라의 <패주>라는
책이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과 파리 코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해서 그 책을 읽기 전에 배경 지식을 좀 쌓고 읽으려고 <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을
먼저 읽게 된 것이란다. 그런데 이 책 참 보물 같은 책이로구나. 이
책이 품절되지 않고 계속 판매되어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램이란다.
1.
프랑스 혁명은 너희들도 알고
있는 것처럼 1789년에 일어났단다. 그 이전의 프랑스는
어떠했는가? 왜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나? 먼저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가 있었단다. 1715년
프랑스의 인구는 1500만명 정도였는데, 1789년에는 2400만명에서 2600만명이었대.
불과 몇 십 년 만에 1000만명 정도가 늘어난 거지..
그렇게 인구가 갑자기 급증했는데, 물자의 증가는 따라가지 못했어. 그래서 물가가 급등해서 살기가 어려워졌다는구나.
모든 사람이 살기 어려워졌을까? 오늘날도 물가가 상승하면 서민들부터 힘들어지는 것처럼 당시에도 신분이 낮은 사람들부터 힘들어졌단다. 당시 프랑스에는 3개로 나뉘어진 신분제도가 있었는데, 1신분은 성직자들이었고, 2신분은 귀족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이 3신분으로 가장 많이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3신분 중에는 대다수가 농민들이었고, 소수의 부르주아들이 있었단다. 농민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힘이 없었어. 세금도 이중 삼중 과제로
내어 수입의 80~90%를 내고 있었어. 영주에 세금을 내고, 교회에 세금을 내고, 나라에 세금을 내고 그랬지.
그런데 부르주아들은 좀 여유가
있었단다. 신대륙이 발견되면서 상업이 발달하였는데, 부르주아들은
큰 돈을 벌게 되었거든. 비록 3신분이지만 큰 돈을 가지고
있었어. 하지만 그들은 3신분이다 보니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단다. 그런 것이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어. 지은이 노명식
님은 부자들의 불만이 쌓일 때 혁명이 일어난다고 했는데 공감이 가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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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번영하고
발전하는 18세기 프랑스에서 바로 그러한 계급 사이의 불균형이 날카롭게 의식되었다. 혁명은 가난한 사람들이 일으키지 않는다. 부유해진 사람들이 자신의
실력이 무시되고 멸시당한다고 느낄 때 모순된 제도를 타도하기 위하여 혁명을 일으킨다. 바르나브(Antoine Barnave)가 열렬한 혁명가가 된 동기는, 일곱
살 때 어머니와 함께 극장에 갔을 때 클레르몽 통네르라는 귀족에게 자기들의 좌석을 내주어야 했던 억울하고 불쾌한 기억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많은 부르주아들이 품고 있었던 불평불만과 자존심의 훼손이 그들로 하여금 앙시랭레짐을 미워하게 하고
그것을 없애버리는 혁명으로 치닫게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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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75년 흉작이 일어나면서 농민들은 더욱 가난해졌고, 물가는 더욱 치솟았단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라는 특별한 조치를 하지
않았단다. 지금 우리나라처럼 말이야.
…
당시 인쇄술 보급과 함께 루소의
사회계약설 등을 비롯한 여러 계몽 사상이 퍼지게 되었어. 특히 부르주아들의 자녀들이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계몽 사상을 쉽게 접할 수 있었지. 그들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어.
…
부르주아들이 3신분이긴 하지만 경제력이 있다 보니 군대 등 국가의 일부 고위직을 갖고 있었는데, 2신분 귀족들이 이것에 불만을 품고 법을
바뀌어 고위직은 모두 귀족들이 갖게 되었단다. 어찌 보면 귀족들의 횡포이니 왕이 나서서 중재를 해야
하지만 왕은 무능했단다. 귀족들이 무능한 왕을 이용한 것이지. 귀족이
고위직을 다 차지하게 되자 왕권도 약화되었단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이다 보니 나라 빚은 점점 늘어가는데
1신분과 2신분은 세금을 안내고 있었어. 자꾸 오늘날 우리나라 현실과 오버랩이 되는구나. 세손 부족이 늘어나는데
부자감세를 하고 있는 우리나라와 비슷해.
…
각 신분의 대표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삼부회가 1789년 5월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렸어. 3신분도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2신분은 3신분 대표들을 멸시하고 굴욕을 주었단다. 이에 불만을 품은 3신분은 독립적인 또 다른 의회인 ‘국민의회’를 창설했단다. 1신분들 중에도 국민의회에 합류하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찬반 투표가 이루어졌고 근소한 표차로 국민의회에 참석하게 되었단다. 배신을
느낀 루이 16세는 회의장 문을 잠그고 그들을 회의장 안으로 못 들어오게 했어.
그래서 국민의회는 베르사유 궁전
안 테니스 코트로 가서 회의를 했단다. 이곳에서 그 유명한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 선언된단다. 헌법 제정을 요구하고 국민의회가 공식적인 국민의 대표회의체로 인정하라는 것이었어. 1789년 7월 더욱 거세지는 혁명의 물결. 나라에서는 국민의회를 인정하지 않고 탄압하려고 하자 파리 시민들은 결국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하였단다. 그렇게 국민의회 세력은 권력을
잡게 된단다. 1789년 8월 봉건제 폐지를 선언했어. 농노는 바로 해방이 되었지만 토지 처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면서 매매를 통해 정리하기로 했는데 그것이 4년이나 걸렸다고 하는구나. 실책 중에 하나였지. 그리고 인권 선언도 발표되었는데, 내용을 읽어보면 오늘날 헌법에
적용해도 좋을 만큼 선진적이었단다. 교회 재산 및 토지 반환에 대한 갈등도 심했는데 11월 국민의회의 표결을 통해 국가에 반환되었다고 하는구나. 갑작스레
권력을 잡긴 했지만 여전히 계층간의 대립은 심했어. 그리고 혁명파 내부에서도 부르주아와 민중들 사이의
혁명에 대한 온도차도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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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바스티유를
함락시킨 지 2년 2개월 사이에 프랑스 국민은 새 국민으로
변하였다. 그 새 국민의 마음속에 지난 6월 이후 3개월 사이에 갑자기 분노와 불만이 쌓였다. 지금까지 왕당파를 노려보던
프랑스 민중의 눈은 혁명을 반역하고 민중을 배신한 푀양파로 돌려지고 있었다. 민중의 분노와 불만은 막
제정된 결함투성이의 헌법을 그대로 두지 않을 태세였다. 그 헌법을 진정한 민주주의 헌법으로 새로 만들고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는 데는 앞으로 1년이면 족하였다. 혈통의
특권적 지배를 무너뜨린 민중은 이제 돈의 특권적 지배를 오래 참고 견딜 생각이 없었다. 푀양파와 같은
보수적 부르주아는 헌법의 제정으로 혁명은 끝났다고 생각했으나 민중은 혁명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혁명은 계속 민중의 힘에 의해 추진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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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루이 16세도 외국 세력과 손잡고 반전을 노리고 있었어. 심지어 프랑스를
탈출하려는 시도도 했는데 실패하고 말았단다. 이 장면은 앙투아네트 이야기할 때 해주었는데 기억나지?
2.
1791년 헌법이 제정되면서 프랑스는 입헌군주제를 채택했단다. 입헌군주제는 왕은 있지만 헌법 체제 안에서 권한을 행사해야 하는 제도였어. 그렇다
보니 왕의 권한은 대폭 축소되어 독자적인 권한은 거의 없었단다. 입법의회가 생겼는데 입법의회는 부르주아들과
일부 귀족들로 구성되었어. 그런데 농민의 권리를 너무 주지 않았단다.
선거권도 없었대. 농민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폭동도 일어났다는구나. 그래서 입헌군주제는 1년만에 폐지하고 파리 시의회인 파리 코뮌이
주도적으로 행정을 이끄는 시대라 되었단다. 이 시의회의 리더는 법무장관 당통이 이끌게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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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파리
코뮌이란 무엇일까? 그 뜻은 파리 시의회(City Council)라는
뜻이었다. 파리는 본래 행정구역이 60구로 나뉘어 있었는데, 1790년 5월에 48개의
섹시옹(section)으로 개편되었다. 섹이옹마다 1800명 정도의 능동 시민이 있었는데, 그들의 대표자들이 시 코뮌을
구성하는 반혁명 세력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런데 8월 10일 사건을 계기로 각 섹시옹이, 특히 노동자들의 섹시옹이 그들의
코뮌 대표자들을 수동 시민으로 교체하여 코뮌의 능동 시민을 압도하게 되었다. 수동 시민은 선거권도 피선거권도
없었으므로 압력에 의하여 능동 시민과 수동 시민의 차별을 없애고 보통선거에 의하여 새 국회인 국민공회 소집을 가결하였으므로 코뮌의 불법성은 현실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합법성의 기분은 이미 개정하기로 선포한 낡은 헌법의 원리에 의하여
측정될 것이 아니라 새 헌법의 원리에 의하여 측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새 헌법의 원리에 보통선거의
원리였다. 그런데 이 보통선거의 원리를 입법회의로 하여금 승인케 한 것은 파리 코뮌이었으니, 입법회의는 파리 코뮌의 실력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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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프랑스와 프로이센 전쟁의
분위기가 일어나고 있었어. 여러 계파가 다양한 이유로 전쟁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자코뱅당의 로베스피에르 중심의 일부만 반대 의견을 냈단다. 그렇게
되자 자코뱅 당은 분열하게 되었단다. 로베스피에르 중심의 산악파는 부르주아를 비판하고 민중을 옹호하였고, 자코뱅 클럽을 결성했단다. 온건 진영은 지롱드파로 모이게 되었어. 지롱드 파가 좀더 우세한 조직이었지. 이런 상황에서 왕정을 공식으로
폐지하고 공화정을 출범하게 되었단다. 그러면서 루이 16세에
대한 처형 여부 결정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거의 50대 50으로
양분되었어. 아슬아슬한 표차로 루이 16세 처형이 결정되어
삶을 마감하고 말았어.
공화정이 출범하긴 했지만 순탄치
않았단다. 각 계파들의 알력 다툼은 점점 심해지고 반대파들을 꼬투리 잡아서 단두대로 보내기 일쑤였어. 프랑스 혁명의 유력 인사들의 많은 이들의 삶이 단두대에서 마감했단다. 산악파가
권력을 잡게 되면서 그들 간에도 내부 분열이 일어났고, 산악파에서 관용파로 분류되면 당통도 제거되고
마라도 암살당했단다. 그러면서 로베스피에르가 거의 독재를 하다시피 했어. 공안위원회를 만들면서 공포 정치를 시행했지. 언제 어떻게 어떤 이유로
죽을지 몰랐어. 로베스피에르의 입장에서는 민중을 위한다고 했지만 너무 과격했어. 로베스피에르의 위협을 느낀 반대파들도 결국 헌법을 이용하여 로베스피에르도 단두대로 보냈단다. 이 부분은 아빠가 몇 달 전에 이야기해 준 <조제프 푸세>에서 자세히 이야기했었지. 로베스피에르를 죽인 것이 혁명력 테르미도르에
죽였기 때문에 그들을 테르미도르파로 불렀다고 하는구나. 혁명력이란 혁명이 성공하고 나서 달력을 새로
만든 것이란다.
로베스피에르를 죽이긴 했는데
테르미도르파는 뛰어난 리더도 없고 노선도 애매했어. 지은이께서 이야기하시기로는 왕이 없는 입헌군주제
노선이라고 했어. 정말 애매하구나. 그렇다 보니 이때가 기회가
싶어 왕당파들도 재건의 움직임을 보였는데 테르미도르파에 의해 진압되었단다. 그러면서 등장한 것이 총재정부라는
정부 형태였단다. 이때가 1795년 1월이었어. 총재 정부는 5명의
총재가 공동으로 국가 행정을 운영하는 것이었는데 일각에서는 부르주아 공화국이라고도 불렀어. 이런 정부
형태를 민중들이 좋아하겠니? 당연히 싫어하겠지. 그래서 또
여기저기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인 세력들이 등장하였는데 이때 나폴레옹도 처음 역사에
등장하게 된단다. 강력한 리더가 없어서 그런지 좌파와 우파간에도 계속 쿠데타를 일어났는데, 총재 중 한명인 시에예스가 나폴레옹과 손잡고 쿠데라를 일으켜 성공하게 된단다.
그리고 총재 정부를 끝내고 통령 정부를 세우게 된단다.
3.
통령 정부는 3명의 통령이 공동으로 정부를 이끌어가고 임기는 10년이라고 했어. 그런데 나폴레옹은 법을 바꾸어 1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고 2통령과 3통령의 권한을 축소했단다.
자신이 1통령인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이후
또 법을 바꾸고 임기를 없애 종신 통령이 되었단다. 그러면서 반대파인 왕당파와 공화파의 세력을 제거해
나갔어. 결국 헌법을 한차례 더 개정하여 그는 황제가 되었단다. 왕이
아니고 황제가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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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나폴레옹이
왕이 아니라 황제간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부르봉 왕가의 왕족들이 루이 16세의 어린 아들을 루이 17세라고 칭하였고, 그가 일찍 죽자 루이 16세의 큰 동생 프로방스 백작이 루이 18세라고 자칭하면서 왕정의 회복을 주장하고 있는 판국에, 그들의
왕정을 부정하면서 다른 왕정을 창업한다는 것은 논리상 모순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스스로 혁명의
아들로 자처하고 있었는데, 혁명이 낳은 왕이란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 역사상 프랑스인 최초의 군인 황제인 샤를마뉴의 정통 계승자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아헨에 있는
샤를마뉴의 사당을 참배했을 뿐만 아니라 샤를마뉴처럼 가톨릭교회의 성별을 필요로 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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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은 교황에게 부탁해서
대관식까지 했단다. 교황도 자신의 입지를 키우는데 나쁘지 않다고 대관식에 응했단다. 노트르담 성당에서 진행되었는데, 나폴레옹은 관을 받아 자신이 직접
위에 얹었다고 하는구나. 황제를 불러들이긴 했지만 스스로 관을 쓰면서 자신의 힘에 의해서 황제가 되었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라고 했어. 그렇게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전쟁을 통해서 주변국을 점령하고 동맹국으로
만들었단다. 그리고 그 나라에 자신의 가족이나 친척들을 왕에 세우는 족벌 정치를 했어. 그렇게 국토를 넓혀나갔지만 주변국에서 반기를 들기도 했어.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반기를 든 것을 시작으로 오스트리아 등 동부에서도 독립 투쟁을 했단다. 그 때마다 진격해서
진압을 하였지만 프랑스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단다.
그 와중에 무리한 러시아 원정이
독이 되었어. 러시아 원정은 추위와 병으로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러시아 전술에 속아서 많은 군인들이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단다.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원정을 갔지만 약 10만명만이 돌아올 수 있었어. 그렇게 되자 나폴레옹은 1814년 실각하고 말았단다. 나폴레옹이 실각되었지만 여전히 프랑스는
유럽의 중심이었단다. 프랑스 내에서는 부르주아는 여전히 영향력을 과시하였어. 하지만 극빈자들도 여전히 많았어. 노동자들 중에도 극빈자들이 많아서
불만이 쌓여갔지.
나폴레옹이 실각된 이후 백성들의
지지에 의해 루이 16세의 동생 프로방스 백작이 루이 18세가
되어 왕이 되었단다. 정부 조직은 1789년 이념을 기초로
구성하기로 했단다. 그런데 1815년 엘바섬을 떠난 나폴레옹이 3월 20일 파리에 입성하면서 위협하자 루이 18세는 파리를 탈출하였단다. 나폴레옹이 다시 권력을 잡나 싶었으나
그의 권력은 100일로 끝이 나고 말았지.
그는 다시 실각되었고 루이 18세는 돌아왔단다. 루이 18세가
프랑스 혁명 이후 계속 외국에서만 지내서 프랑스 사정을 잘 모르고 민심도 잘 몰랐대. 그리고 자신과
친분이 있는 망명 귀족들을 데리고 와서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었어. 이렇게 하니 국민들의 불만이 또 쌓일
수밖에 없지. 거기에 나폴레옹이 100일 천하 동안 일으킨
전쟁에서 연합국에 패한 것에 대한 제2차 파리조약이 이루어졌어.
나폴레옹이 첫 실각 당시 맺어진 1차 파리조약에서는 아무런 배상금을 받지 않겠다고 했는데
2차 파리조약에서는 참을 수 없었지. 연합국은 프랑스 땅의 2/3를 차지하게 되었고 전쟁 배상금도 내야
했으며 프랑스 정치도 감시 받는 상황이 되었단다. 루이 18세도
이런 열악한 조건에서 의회와 손을 잡고 노력을 했으나 1824년 루이
18세는 죽고 샤를 10세가 왕위에 올랐단다.
4.
샤를 10세는 꼴통 왕당파로 왕당파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어.
샤를 10세는 돌아온 망명 귀족들의 옛 재산을 찾아주기까지 했단다. 시민들의 불만은 점점 치솟았어. 그 불만이 쌓이고 쌓여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나고 샤를 10세는 쫓겨났어. 그리고 루이 필리프가 왕위에 올랐는데 루이 필리프는
프랑스 혁명 초기에 혁명군 진영에 있던 사람으로 역시 혁명파였던 오를레앙 공의 아들이었어. 7월 혁명
이후 왕정을 시작해서 그들은 7월 왕정이라고 불렀어. 여전히
노동자의 생활은 열악했고 국민의 분열은 계속되었는데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어. 노동자 시위가 계속
일어나고 정부는 무력 진압하게 되었어. 노동자들은 이제 7월왕정에
불신을 가지고 공화파를 지지했단다.
그런데 1840년, 7월 왕정의 실책이 또 나왔어. 나폴레옹의 유해를 파리로 이장했고 나폴레옹을 영웅화했단다. 1840년대
내내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시민들은 불만이 계속되었고 곡물이 대흉작이 되면서 물가는 치솟고 주식은 곤두박질치면서 경제 사정까지 악화되었어. 다시 시위와 폭동이 증가하였고 무력 봉기까지 일어났단다. 1848년
공화파 주도로 2월혁명이 일어나고 결국 루이 필리프는 퇴위했단다. 공화파
주도로 대통령 선거를 하게 되었는데 의외의 인물이 당선되었단다. 나폴레옹의 조카인 샤를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이 대통령이
된 거야. 나폴레옹의 향수를 자극해서 말이지.
나폴레옹 3세는 가톨릭교회를 중시하였어. 그는 직권 이후 언론을 탄압하고 자유를
탄압했고 대통령이 된 지 1년 뒤에는 황제가 되었단다. 국내
정치에서는 이렇게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고 있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성과도 있었다고 하는구나. 영국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이탈리아 전쟁에 관여하여 이탈리아 통일에도 기여를 했대. 그런데
오히려 이건 독이 되었다는구나.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거대란 견제 세력이 생긴 거야.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교황의 힘도 세지면서 프랑스와 대립하게 되었어.
프랑스 내부에서는 나폴레옹 3세에 대한 국민여론이 안 좋아지고 그것은 공화파의 의회 의석수가 늘어나는 결과를 냈단다. 나폴레옹 3세는 대의동맹을 맺어서 위기 타개를 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어. 그 와중에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 원정에서 실패를 했고, 프로에센은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승리를 하면서 프랑스도
넘보려고 했어. 1869년 선거에서 야당이 압승을 하면서 황제의 권력은 많이 약화되었단다. 그리고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에 결국 전쟁이 일어났는데 당연히 이길 줄 알았던 이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말았단다. 그러면서 나폴레옹 3세는 퇴위하게 되었고 다시
제정 시대가 끝이 났단다.
1870년 9월혁명으로
프랑스는 다시 공화정으로 돌아섰어. 프로이센은 전쟁에서 이긴 후 계속 프랑스로 진격하여 파리를 포위했단다. 포위를 뚫는 시도를 잇달아 했지만 실패하고 고립된 파리는 물가가 폭등하면서 궁핍한 생활이 이어졌어. 4800여명의 파리 시민이 사망을 했다는구나. 파리 고립이 길어지면서
파리 내부에서도 항복하자는 의견과 항전하자는 의견으로 양분되었어. 파리 시민들의 시위대와 이를 진압하던
수비대 사이에서 우발적으로 총격전이 벌어져서 50여명이 사상자가 발생했어. 당시 프랑스 정부의 파브로라는 사람이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와 비밀리에 휴전 협정을 했고 보르도에 의회를 만들게
되었단다.
이 소식을 들은 파리의 국민방위대는
반박을 했어. 휴전 협정 내용은 파리 시민을 더욱 열받게 했단다. 알자스
지방과 로렌 지방을 독일에 넘기기로 했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프로이센 군대가 파리를 48시간 동안 점령하기도 했다는구나. 이런 굴욕적인 조건을 어떤 파리
시민이 받아들이겠는가. 파리 국민방위대 중심으로 저항을 했단다. 그리고
파리 내부에서 또다른 의회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파리 코뮌이란다. 이미 파리 코뮌은 프랑스 혁명
초기 때 있었던 파리 시의회인데 이를 부활한다는 의미였어. 보르도 의회는 베르사유로 이동했고, 파리 코뮌의 국민방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정부군을 파리로 보냈단다.
그렇게 정부군과 국민방위대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단다. 같은 동족끼리 총을 겨누는 상황이 벌어진 거야. 72일간
이어졌는데 그야말로 처참하기 그지 없었단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유서 깊은 건물들이 많이 불타고 말았대. 이 내전을 역사는 파리 코뮌 사건이라고 하는데 몇몇 지도자의 잘못된 선택에 의해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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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432)
파리
코뮌 기간 중 벌어진 공전의 참변은 프랑스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유럽 문화와 현대
문명의 중심지 파리에서 어떻게 하여 그런 끔찍하고 야만스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코뮌 직후부터
거기에 대한 갖가지 해석이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역사학의 생명은 해석에 있다고 하지만 파리 코뮌에
대한 해석만큼 오늘날까지 극심한 대립을 보이는 것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는 아마도 파리 코뮌의
해석이 처음부터 유달리 현저한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농후하게 띠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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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예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루브르 궁전도 이때 화재가 일어나 서쪽 건물이 완전히 무너졌고 그때의 잘못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복원하지 않고 무너진 상태 그래도 두었다고 하는구나. 여기까지가 책의 내용을 정리해 본 것이란다. 길게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맥락이 잘 안 이어지는 부분도 있는 것 같구나. 그건
아빠의 역량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이니 양해 바란다. 그리고 너희들이 나중에 커서 이 책은 꼭 읽었으면
좋겠구나. 자, 이제 에밀 졸라의 <패주>를 읽어야겠구나.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태양왕 루이 14세가
죽은 1715년 당시 프랑스의 인구는 1,400만에서 1,500만으로 추산되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89년에는 2,400만 내지
2,600만으로 추산된다.
책의 끝 문장: 끝으로 코뮌은 제3공화국의
불행한 서장으로, 코뮌이 없었더라면 제3공화국의 탄생이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루이는 흔히 말하는 ‘사람 좋은’ 사람이었다. ‘사람 좋은’ 사람이라는 개념에는 유능하다든가 흑백이 분명하다든가 의지가 꿋꿋하다든가 책임감이 강하다든가 혹은 믿음직하다든가 하는 따위의 뜻은 들어 있지 않다. 루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뚱뚱한 몸집에 어디로 보나 호인형 남자였다. 미식가이고 무도회와 사냥을 즐기고 특히 열쇠를 만드는 취미가 있었다. 취미를 취미 삼아 즐기는 정도라면 골치 아픈 정무에 휴식을 제공하는 오락거리쯤으로 생각하겠지만, 루이는 골치 아픈 정치는 아예 질색이고 사냥과 열쇠 만들기에만 전념하는 편이었다. 그는 국왕 참의회에서 골치 아픈 일이 논의되면 곧 피곤해져서 회의석상에서도 졸곤 했다고 한다. 그러한 인물이었으니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다 한들 무슨 유익한 일을 과단성 있게 해낼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프랑스 혁명과 같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에 직면하여 어찌 일을 제대로 판단하여 책임성 있게 처리할 수 있었겠는가? - P52
따라서 자코뱅의 세 번째 전통은 참 민주주의의 이상이었다. 평등주의적 민주의의이며, 진정한 자유에 대한 갈망과 사랑의 표현이었다. 자코뱅이 제정한 1793년 헌법의 제5조는 "정부가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면 봉기는 인민 전체에게도, 인민 각자에게도 가장 신성하고 불가결한 의무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자유 수호의 최후 수단으로서의 민중 봉기를 국민의 권리를 규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무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자코뱅의 자유에 대한 사랑과 민주주의의 이상이 어느 정도의 것이었던가를 말해 주는 단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 P179
나폴레옹 제국은 족벌 제국이었다. 황제의 형제들과 친척 및 부장들을 위성국가의 통치자로 봉하였다. 그러한 그가 1810년에는 가장 사랑하는 막내 동생 루이를 네덜란드 왕위에서 몰아내고 네덜란드를 프랑스에 합병하였다. 루이가 네덜란드의 밀무역을 철저히 단속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륙봉쇄의 성패가 나폴레옹의 운명을 좌우하고 나폴레옹 제국의 모든 정책은 대륙봉쇄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해안 지역들을 프랑스에 합병하게 된 이유도 거기 있었고, 심지어 교황령이나 일리리아 지방까지도 무리하게 합병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그런데 영국해에 접해 있는 가장 중요한 네덜란드에서 밀무역을 막지 못한다면 대륙봉쇄의 운명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 P258
샤를도 형 루이처럼 67세의 홀아비였으나 형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활동적이고 정렬적이고 명쾌한 성격만이 형과 다른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경력과 사상도 매우 달랐다. 샤를은 왕당파의 두목으로서 헌장을 우습게 여기고, 프랑스 혁명을 악마의 장난으로 믿고, 왕권신수설을 진심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이 이제 왕권신수설을 부정한 헌장을 준수해야 하는 입헌군주가 되었으니 과연 그가 얼마나 헌장에 충실한 것이며 정당정치의 군주로서의 임무에 성실할 것인가는 매우 의심스러웠다. - P305
그런데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산업혁명을 경험한 선진 산업국가들은 빈부의 격차가 생기는 원인을 미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누구의 눈에도 명백히 나타난 빈부의 격차를 어떤 방법으로든지 줄이긴 해야 했다. 이런 생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여 실천에 옮기려는 운동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는데, 이를 사회주의라고 하고 그 운동을 사회주의운동이라 한다.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은 갖가지 이론과 형태로 19세기 선진 산업국가들의 역사를 색칠한다. 특히 19세기 프랑스의 역사가 그렇다. - P329
이제 국민은 공화정을 확정할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프랑스는 1815년 이래 한번은 보수적인 또 한번은 자유주의적인 입헌주정을 시도했으나 두 번 다 실패하고 말았다. 전자는 프랑스 혁명 자체를 부정하려다가 실패하고, 후자는 프랑스 혁명은 인정하였으나 상층 및 중층 부르주아의 이익에 지나치게 집착하다가 실패하였다. 오를레앙 왕가는 프랑스 혁명이 내세운 국민주권의 원리를 시인하면서도 신흥 부르주아에 의한 권력 독점을 위해 지나친 제한선거를 고집하다가 무너졌다. 복고 왕정은 정통파를 만들어내고, 7월왕정은 오를레앙파를 만들어내어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정치를 매우 복잡하게 만들지만, 그들이 프랑스의 정치 무대를 차지하는 일은 영원히 다시 오지 않는다. - P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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