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밀양, 약산 김원봉이 태어난 도시다. 약산의 평생지기 석정 윤세주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약산의 고모부 백민 황상규를 비롯해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독립유공 애국지사만 80여 명이다. 안동과 더불어 인구대비 가장 많은 숫자다. 한마디로 독립유공자의 산실과 같은 장소다. 2018년 봄 약산의 생가터에 밀양시가 의열기념관을 세우고 나서 밀양을 찾아야 할 이유가 더 분명해졌다. 그러나 2019년 들어 밀양시가 친일파 박시춘을 중심으로 한 <가요박물관> 건립을 추진 중이다. 지사들의 얼굴에 먹칠하는 부끄러운 일이다. 약산의 생질 김태영 박사와 밀양 출신 청년들을 중심으로 가요박물관 건립을 막고 있다.


(28-30)

반 토막 난 독립운동사에 약산의 이름을 올려야겠다고 결심한 첫 번째 이유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친일파 7인 김백일, 김홍준, 신응균, 이응준, 이종찬, 백낙준. 이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만주군에 복무하면서 독립군을 때려잡던 인사들이다. 게다가 해방 후에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아래 다시 국군으로 돌아와 보란 듯이 현역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더 높은 자리로 영전했고 각각 군 사령관과 참모총장, 국방부 장관이 됐다.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제2묘역에 묻힌 일본군 장교 출신 신태영과 이응준이 대표적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요 인사 묘역과 불과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들이 묻힌 장군 제2묘역이 있다. 의도했든 아니든 이들 친일파의 묘역이 애국지사 묘역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한 탓에 친일파 무덤이 애국지사 무덤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형태다. 더 화가 나는 건 이름 없이 쓰러져간 수만의 독립군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대한독립군 무명 용사 위령탑역시 친일파 묘역 입구 하단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위령탑 아래가 의열단 출신 김익상과 김상옥, 박재혁, 곽재기, 최수봉, 이종암 등이 잠든 애국지사 묘역이다. 한마디로 친일파의 무덤이 조국 독립을 위해 청춘과 목숨을 다 바친 애국지사와 순국선열보다 더 높고 양지바른 곳에 위치해 있다는 말이다.


(75-76)

1910년에 태어나, 약산보다 정확히 12살 어렸던 박차정 지사는, 집안이 모두 독립운동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대한제국 탁지부 주사를 지냈던 부친 박용한은 일제의 침략에 분노해 자결했다. 숙부 박일형과 친척들, 오빠들도 모두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 외가 쪽 역시 독립운동가 김두전과 김두봉이 친척인 집안이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신간회, 의열단 등에서 활동한 큰오빠 박문희, 둘째 오빠 박문호 등과 함께 박차정 지사 역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일찍이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일신여학교 시절부터 지역을 대표하는 독리운동가로 활약했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 1월 서울 여학생 시위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했다. 그러나 근우회 사건으로 구금된 다음 일경의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병석에 누워있던 박차정 지사를 의열단에 몸담고 있던 둘째 오빠 박문호가 불렀고, 지사는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합류했다. 1930년 봄의 일이다.


(100)

<의열단 공약 10>

1. 천하의 정의를 맹렬히 실행한다.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해 신명을 희생한다.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히 자라야 의열단원이 된다.

4. 단의(團義)를 우선하고, 단원의 의()도 급히 실행한다.

5. 의백 일인을 선출해 단체를 대표케 한다.

6.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매월 일차식 사정을 보고한다.

7.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초회(招會)(부름)에 반드시 응답한다.

8. 피사(被死)(죽음을 피하지) 아니하며 단의의 전력을 다한다.

9. 하나의 아홉을 위하여 아홉이 하나를 위해 헌신한다.

10. 단의(團義)를 배반한 자는 척살한다.


(103)

그러나 백민 황상규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우리 독립운동사의 큰 족적을 남겼다. 1차 의열단 의거 실패 후 감옥에서 6년여를 보냈다. 출소 후에도 밀양에서 지역 운동을 전개하며 지역 리더로서의 역할을 실천했다. 1927 12월부터는 신간회의 밀양지회장으로 선출되고 왕성한 활동을 벌인다. 하지만 고문 등으로 이미 몸이 쇠약해진 상태, 한때 관운장이라 불릴 정도로 강인한 그였지만 과로 등이 겹치며 결핵성 복막염을 앓았다. 1929 11월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황상규는 진상조사단이 돼 몸을 돌보지 않고 사건을 알렸다. 결국 더 이상 버티질 못했다. 1930년 초 황상규는 다시 고향에 돌아와야만 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듬해 9월 황상규는 눈을 감는다. 사인은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발생한 폐결핵과 복막염 악화. 의열단의 정신적 스승이자 행동하는 지성인이었던 백민 황상규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135)

부산 출신 박재혁은 1920 9월 초 상하이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에 도착한다. 1920 9 14일 고서상으로 위장한 박재혁은 부산경찰서 서장 하시모토 슈헤이와 마주한다. 그리곤 고서 상자 속에서 미리 준비한 폭탄을 꺼내들고 하시모토에게 나는 상하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들을 잡아 우리 계획을 깨뜨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인다라고 외치며 폭탄을 투척한다. 폭탄에 맞은 서장은 수일 뒤 사망했다.

박재혁 역시 현장에서 폭탄을 맞아 부상을 당하고 체포됐다. 1921 3,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과 상처로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사형 선고 전, ‘왜놈의 손에서 욕보지 말고 차라리 내 손으로 죽겠다라고 결심한 뒤 곡기를 끊고 단식하다 옥사하였다. 의열단다운 결기였다.


(149-150)

김산은 의열단 의백 김원봉과 의열단원 김성숙과 특히 사이가 가까웠다. 베이징에서 자주 모임을 가질 만큼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이였다. 이 만남은 훗날 황포군관학교라는 공통분모까지 이어진다. 그만큼 각별한 사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단 김산과 약산 모두 책벌레였다. 특히 두 사람이 다 러시아 문학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두 사람은 만나면 할 이야기가 많았다. 물론 그만큼 머리도 비상했다. 중앙학교-덕화학교당-금릉대-신흥무관학교를 거친 약산의 비상한 머리야 익히 알려진 바고, 김산 역시 신흥무관학교-난카이대-협화의대-황포군관학교-중산대 등을 거친 수재였다.


(232-233)

그런데 이곳(금릉대학)이 우리 역사에서 더욱 중요하게 평가돼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1935 7, 기라성 같은 애국지사들이 금릉대학교 강당인 대례당에 모여 민족혁명당을 만든다. 면면이 화려했는데 의열단 출신은 약산을 필두로 석정 윤세주, 진이로, 박효삼이 함께 했고, 신한독립당 출신으로 지청천과 신익희, 윤기섭이, 조선혁명당 출신은 최동오와 김학교가 함께 했다. 김두봉과 조소앙, 김규식, 김상덕, 최창익, 허정숙, 안광천 등도 동참했다. 220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함께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김구는 위해 중앙집행위원회의 집행위원장 자리를 공석으로 두었으나 마지막까지 고사했다. 임시정부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위원장이 공석인 상황에서 서기부와 조직부와 실질적으로 권한을 행사했다. 서기부의 부장은 약산, 조직부의 부장은 김두봉이 맡았다.


(302-303)

두 사람(김구, 김원봉)은 진심으로 화합해 조국 독립을 바랐다.

우리 두 사람은 3.1운동 이후 해외에서 일본제국주의를 향해 계속 분투했다. 그러나 과거에는 한 개의 강적에 대한 투쟁을 통일적으로 강하고 유력하게 진행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군중을 떠난 우리 두 사람의 특수환경의 영향도 없지 않았으나, 주로는 우리가 민족적 경각성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민족혁명의 전략적 임무를 정확히 파악 실천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과거 수십 년간 우리 민족운동 사상의 파쟁으로 인한 참담한 실패의 경험과 중국민족의 최후의 필승을 향하야 매진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민족적 총 단결의 교훈을 이전의 착오를 통해 통감한다. 우리 두 사람은 신성한 조선 민족 해방의 대업을 위해 동심협력할 것을 동지동포 앞에 고백하는 동시에 목전의 내외 정세와 현 단계의 우리 정치 주장을 이하에 진술하려 한다.”


(328)

다만 1942년 인도의 영국군 총사령부는 조선민족혁명당에게 인도 버마 전선에 공작원 파견을 요청한 것이 사실이다. 이 시기는 이미 약산이 임정과 광복군 참여를 결정한 상황, 약산은 최종적으로 광복군 이름으로 공작원을 인도에 파견한다. 그리고 43 5월 인도 주둔 영국군과 조선민족혁명당은 조선민족군선전연락대파견에 관한 협정을 맺었다. 이에 따라 43 8월 최성오와 주세민 등을 인도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추가 파병은 이뤄지지 못했다. 약산이 영국군과 가까워지는 상황을 임정 내부에서 용인하지 않았다. 영국군과 공동 작전을 수행했기에 훈장을 받은 것으로 파악되자 정확하게 확인된 바는 없다. 돌아보면 약산은 임정 참여 선언 후 광복군 부사령관 군무부장으로 역할했지만 내부에서 끊임없는 견제를 당하며 주요 작전에서 배제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특히 1945년 광복군과 미국 OSS측의 합작훈련 추진 과정에서 약산은 광복군 부사령임에도 불구하고 작전에서 배제됐다. 약산이 임정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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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

우리가 추상미술 앞에서 난해함을 느끼며 갸우뚱할지라도,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이미 추상적 이미지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상품은 추상적으로 디자인되어 있고, 우리는 그 추상적 이미지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느낍니다. 주변의 모든 건축물은 추상적으로 디자인된 공간을 무척 좋아하고, 심지어 그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휴식을 취하고 있죠. 21세기에 와서는 누구나 좋아하는 미적 취향이 된 기하학적 추상’. 기하학적 추상에 숨겨져 있는 거부할 수 없는 미적 매력을 누구보다 앞서 또렷이 느낄 수 있는 심미안을 갖췄던 사람.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떳떳이 예술가. 그가 바로 몬드리안입니다.

(37)

그렇습니다. 그림을 꼭 사진 찍은 것처럼 눈에 보이는 대로 똑같이 그려야 하는 절대적 이유가 있을까요? 그 고정관념을 제거하면, 그림은 평면 위에 화가가 그리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장이 됩니다. 이렇게 유럽의 회화는 20세기 초에 이르러 회화는 눈에 보이는 것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것이라는 오래된 고정관념을 깨고 벗어납니다. , 그리고 싶은 것이 무엇이든 화가가 더 자유롭게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죠. 바로 이것이 피카소와 브라크가 20세기 초에 활짝 연 현대미술 혁명의 요체입니다.

(69)

그렇다면, 몬드리안은 고작 십자 모양(+)으로 어떻게 미의 진리를 회화에 표현한 것일까? 그는 하얀 캔버스 평면 위에 여러 개의 수직선과 수평선을 직각 대립시켜 그렸을 때 자연스럽게사각형 평명()이 생성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수직선과 수평선을 많이 사용할수록 사각형 평면()의 수 역시 자연스럽게 늘어나는 것을 발견합니다. 더불어, 그 사각형 평면들이 놓인 위치크기모두 제각각임을 발견합니다. 몬드리안 화면 전체에 평형상태를 만들기 위해 수직선과 수평선을 이리저리 이동시키며, 사각형 평면()위치 관계크기 관계를 조율합니다. 그 목적은 캔버스 화면 전체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평화로운, 즉 평형상태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의 성취를 위해 필요하다면 사각형 평면()에 빨강, 파랑, 노랑, 흰색, 회색 등을 채워 사각형 색 평면을 만들어 색채 관계를 조율합니다.

(89)

수업이 트렌드에 매우 뒤처져 있다고 여긴 달리가 대학 울타리 안에서 고분고분할 리 만무했습니다. 교수보다 전위적이며 다른 학생보다 훨씬 뛰어난 그림을 그린다고 자신한 나르시시스트 달리는 반바지에 망토를 걸치고 다니며 괴짜 짓을 일삼기 시작합니다. 신임 교수 취임식에서 교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취임식장을 박차고 나사 1년 정학 처분을 받습니다. 그 이후에도 괴짜 기질을 참지 못한 달리는 대학 미술사 시험 도중 심사위원인 교수들에게 심사위원들을 합쳐놓은 것보다 내가 더 똑똑하고, 주어진 문제를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심사받기를 거부한다고 말하며 퇴학당합니다. 이렇게 착실히 학교 다녀 교수가 되리라 믿은 달리 아버지의 꿈은 산산조각이 됩니다.

(128-129)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폭발 이미지에서 크나큰 충격을 받은 달리. 이제 달리의 관심사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의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원자의 세계가 되었죠. 그는 세상의 모든 물질이 원자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 그리고 원자 속 세계가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과학적 사실에 흥분합니다. 그는 물질세계의 본질을 회화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해답이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에 있다고 여기며 원자물리학, 양자역학 공부에 빠져듭니다. 프로이트보다 하이젠베르크와 아인슈타인을 신봉하기 시작하죠.

(204-205)

제가 현대미술사에 기록되는 위대한예술가를 망나니라고 표현하는 것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에서 숱하게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을 살펴보면 아마 고개가 끄덕여질 겁니다. (정말 쓸지 말지 고민을 많이 했지만 잭슨 폴록의 진짜 면모를 허례허식 없이 전하기 위해) 한 가지 에피소드를 풀어보자면, 폴록은 자신을 아껴준 스승 벤턴의 아내 리카와 불륜을 저지릅니다. 한술 더 떠 25세 폴록은 술에 찌든 상태로 리타로 찾아가 청혼까지 하지만 리카는 거절하죠. 그녀의 거절에 화를 주체할 수 없었던 폴록은 벤턴을 찾아가 빌어먹을 놈, 내가 너보다 더 유명해지고 말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역사에 기록하는 위대한 인물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역사에 기록될 위대한 업적을 이룬 것과 인간성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죠.

(227)

세상이 돕는 이런 긍정적 상황에서 예술가로서 체면을 차리고 작업도 더욱 열심히 할 만했지만, 우리의 폴록은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벽화> 작업으로 창작의 고통을 느낀 것이 치유하기 어려운 큰 상처가 되었는지 알코올 중독과 그로 인한 난폭함은 점점 커져만 갔죠. 만취해 술집의 기물을 부수며 난동을 부리는 건 기본. 사람들과 싸우는 것도 예삿일. 급기야 술집에서 폴록의 출입을 제한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렇게 뉴욕 술집에서 블랙리스트에 오른 그는 눈이 오면 취한 채 도로를 나뒹굴며 차량의 통행을 방해하고, 눈 위에 오줌을 흩뿌리며 전 세계에 오줌을 싸겠다고 고성방가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보통 망나니라고 부르지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위대한 예술가상과는 꽤 다른 모습입니다.

(233)

폴록의 회화를 살펴보면 여전히 초현실주의 영향이 지대함을 알 수 있습니다.(무의식을 활용해 예술 창작을 하고 싶었던) 초현실주의자들이 작은 종이위에 이성의 통제 없이 자유롭게 손을 써서그림을 그리는 자동기술법. 그것을 폴록은 거대한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손만이 아닌 몸 전체를 써서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초현실주의자들과는 꽤 다른 점이 발견됩니다. 화가가 그림 안으로 들어가 그림의 일부가 된다는 느낌을 받고 싶어 한다는 것, 그림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며 화가가 그림을 그림으로써 그림이 자기만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고 믿는 것. 폴록이 창작 과정에서 중시하는 이런 생각과 느낌은 폴록이 스스로 일종의 샤먼이 되어 그림과 교신하는 행위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런 점은 초현실주의자들에게 발견되지 않는 플록의 특징이죠.

(282)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을 알리며 미국은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으로 명확히 헤게모니를 잡게 됩니다. 그때 뉴욕 미술계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전쟁을 피해 미국에 왔던 유럽 미술가들은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버렸고, 미술관과 갤러리 등 제도권에서 미국 미술가들을 차별하는 분위기는 여전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내부 상황은 크게 달라져 있었습니다. 유럽의 전위 예술가들과 수년간 교류했던 미국 미술가들의 예술 세계가 크게 성숙한 것이죠. 더불어, 승전국이자 세계의 패권을 잡은 국가의 국민으로서 생긴 자부심은 미국 미술가들 사이에 유럽의 예술을 추종하던 기성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자. 그리고 독자성을 가진 진정한 미국적 예술을 창조하자!’는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310)

내가 젊은 청년이었을 때 예술은 고독한 작업이었습니다. 갤러리도, 수집가도, 평론가도, 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황금기였습니다. 우리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대신 비전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상황이 그렇지 않습니다.”

비관적인 연설. 모든 것을 가졌기에 잃을 일만 남아서일까?” 66세의 로스코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비전만이 찬란히 넘쳐흐르던 젊은 날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심리 속 로스코의 내면에 남겨진 색채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오직 검정과 회색뿐이었습니다.

(319)

,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를 다른 시각으로 관찰하면, ‘복제의 시대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온라인 미디어에서 텍스트, 이미지, 영상이 무한히 반복적으로 복제되고 있고, 이제는 그 영향이 오프라인까지 범람하며 무엇이 원본이고 복제본인지’,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 되었죠. 이런 현대 사회의 특징을 (일찍이) 1960년대에 예리하게 간파해 예술에 절묘하게 녹인 예술가가 바로 앤디 워홀입니다.

(339-340)

더 나아가 워홀은 이런 미국의 사회 구조 속에서 하나의 진실을 발견합니다. 바로 기업이 상품을 반복적으로 생산하고, 미디어 광고를 반복적으로 노출하고, 소비자가 된 미국인은 광고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며 소비를 반복한다는 진실. 다시 말해, ‘반복 생산, 반복 노출, 반복 소비의 문화를 발견합니다. 워홀은 미국의 사회 구조 속에 숨겨진 이 진실을 자신의 전매특허 미학으로 승화시키기로 합니다. 한마디로 반복’. 캠벨 수프 캔 하나를 그리던 워홀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시중에 판매 중인 32종의 캠벨 수프 캔을 반복적으로 그리기 시작합니다. 크기도, 형태도, 형식도 모두 완벽하게 표준화된 32개의 <캠벨 수프 캔>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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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2)

바질은 이모진 비슬에게 달려가 자전거에 앉은 채 공연히 그녀 앞에 있었다. 그때 바질의 얼굴 무언가에 끌렸는지 이모진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를 똑바로 쳐다보다가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미인으로 자라 몇 년 후면 많은 무도회에서 여왕으로 뽑힐 아이였다. 지금은 큼직한 갈색 눈동자와 아름다운 모양의 큼직한 입술, 여윈 광대에 어린 짙은 홍조 때문에 땅의 요정처럼 보였고, 아이가 아이다워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 얼굴을 좋아하지 않았다. 잠깐이지만 바질은 미래를 내다보는 기분이었고, 이모진의 생기가 마력처럼 단숨에 그를 덮쳤다. 여자란 그와 정반대되는, 그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존재임을 난생처음 깨달으면서, 즐거움과 고통이 뒤섞인 포근한 냉기가 엄습해왔다. 이 명확한 경험을 그는 즉각적으로 의식했다. 여름 오후-보드라운 대기, 그늘진 산울타리와 소복이 핀 꽃들, 오렌지빛 햇살, 웃고 떠드는 소리, 길 건너편에서 뚱땅거리는 피아노-는 이모진에게로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이 모든 것을 떠난 향기는, 앉아서 방실거리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이모진의 얼굴로 스며들었다.


(63)

오랜 전통처럼 사내아이들은 어른이 된다는 개념에 집착한다. 어리다는 이유로 가해지는 제약을 이따금 푸념하면서 말이다. 반면에 소년으로 지내는 것이 마냥 좋은 시절도 오랜 기간 존재하는데, 그 만족감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표현된다. 바질은 조금만 더 나이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더러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그에게 긴 바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긴 바지가 갖고 싶긴 했지만, 의상으로 따지자면 풋볼 유니폼이나 경찰 제복, 심지어 밤에 뉴욕 거리를 누비는 괴도 신사들의 실크해트와 긴 망토만큼의 낭만도 없었다.


(112-113)

열다섯 살은 참으로 애매한 나이다. 손가락을 딱 짚으며 그땐 이랬었지라도 말하기가 곤란한 것이다. 우울한 제이퀴즈는 열다섯 살을 언급하지 않고,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이라곤 소년기의 한창인 열세 살과 일종의 가짜 청년인 열일곱 살 사이의 언젠가, 두 세계 사이를 끊임없이 오락가락하면서 생소한 경험들로 끊임없이 떠밀리고 어떤 대가도 치를 필요가 없던 시절로 되돌아가려 헛되이 몸부림치는 시기가 찾아온다는 것뿐이다. 다행히도 그 시절에 우리가 어떻게 처신했는지는 우리 자신도 또래들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해 여름 바질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는지 들여다보기 위해 커튼을 걷어보려 한다.


(175-176)

창밖으로는 지나가는 차들의 빛줄기가 가을의 황혼을 가르고 있었다. 이 자동차들 안에는 위대한 풋볼 선수들과 사랑스러운 데뷔탕트들, 신비로운 여성 모험가들과 국제 스파이들이 타고 있었다. 부유하고 유쾌하며 매혹적인 이 사람들은 뉴욕의 화려한 댄스파티와 비밀스러운 카페에서, 혹은 가을 달 아래의 옥상 정원에서 이루어질 눈부신 만남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바질은 한숨 지었다. 이런 낭만적인 일에는 나중에 낄 수 있으리라. 먼저, 가지 넘치고 화술이 능란한 동시에 강인하고 진중하며 과묵한 사람이 될 것. 너그럽고 솔직하고 헌신적이면서도, 약간은 신비롭고 섬세하며 애수 어린 비통함까지 깃든 사람이 될 것. 밝으면서도 어두운 사람이 될 것. 이런 점들을 조화롭게 버무려 단 한 사람으로 녹여낼 것. , 그러려면 할 일이 있었다. 완벽한 인생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바질은 야망의 황홀경에 취하고 말았다. 잠시 더 그의 영혼은 질주하는 빛을 따라 대도시로 향했다. 그러다 그는 결연히 일어나 담배를 창턱에 비벼 끈 다음 전기스탠드를 켜고 완벽한 인생의 요건들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257-258)

구제 불능의 주벌이 소유욕을 내뿜으며 다가오자, 바질의 심장은 분홍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장을 이리저리 배회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우유부단함의 안개에 갇혀버린 바질은 베란다로 나갔다. 때 이른 눈이 대기에 흩뿌려지고 있었고, 별들은 차가워 보였다. 별들을 올려다본 언제나처럼 그의 별들, 야망과 고투와 영광의 상징들이 보였다. 별들 사이로 바람은 그가 항상 귀 기울여 찾던 높은 원음(原音)을 나팔 소리처럼 울렸고, 전투를 위해 찢겨 가늘게 흩어진 구름은 열병식을 거행하며 지나갔다. 비할 데 없이 찬란하고 장엄한 광경 앞에, 사령관의 노련한 눈만이 그곳에서 하나의 별이 사라졌음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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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2)

도화서 화원들은 궁궐 외에 주문을 받곤 했던 양반 고객들은 대부분 북촌(北村))’에 살았다. 당시 북촌은 벌열 양반과 왕의 인척들이 사는 조선조 최고의 부촌이었다. 화원들의 후원자가 될 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북촌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화원 입장에서는 궁에서 멀지 않고, 부수 입을 올릴 수 있는 서화 가계들이 있는 광통교 근처이고, 자신들의 후원자가 사는 북촌에서도 멀지 않은 지역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었다. 이 세 곳이 모두 연결되는 중심부가 지금의 인사동 지역이었다. 이러한 입지는 후에 인사동이 서화와 전전(典籍), 고미술 거래의 중심지가 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29)

안중식은 솜씨 좋은 서화가였을 뿐 아니라 국민 계몽의 필요성을 느낀 개화사상가이기도 했다. 1906년에는 대표적인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대한자강회(大韓自彊會)에 회원으로 가입했으며, 이듬해 <대한자강회월보> 8호 첫 페이지에 을사늑약에 항의하다가 자결한 충신 민영환(閔泳煥)(1861~1905)을 기리는 <민중정공혈죽도>를 그려 싣기도 했다. 또한 이듬해에는 어린이용 교과서 <유년필독>과 진보적이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잡지 <청춘(靑春)>, <아이들보이>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1913년에 창간된 <아이들보이>에는 군복을 입고 백마를 탄 우리나라의 옛 무사를 그린 삽화가 표지화로 실리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근대적인 면모를 보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보면 전통적 기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한계도 있다.

 

(88)

고희동은 그동안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역사적 의미와 새로운 조형 방법을 후진에게 가르친 미술 교육자로서 높이 평가받았다. 화단을 형성하고 이끌어나간 미술 행정가의 성격이 강해 일부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최초였음에도 결국 서양화를 포기하고 동영화로 돌아온 화가로서의 정체성 문제는 더욱 그에 대한 평가를 박하게 만들었다. 이런 치우친 평가가 과연 정당한지 의문이다.

실제 전하는 그의 작품들은 당대에 활동한 대표적인 화가들 못지않은 개성과 미덕을 가지고 있다. 원근이 살아 있는 생동감 넘치는 산수화나 뛰어난 색채감을 보이는 개성적인 화면은 다른 화가들에게서 보기 어려운 새로운 면이다. 이는 현대에 와서 더욱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화가로서의 고희동에 대해 더욱 정치한 연구가 필요하다.

 

(154)

첫눈에 반한 김기창은 박래현이 도쿄로 돌아가자 계속 편지를 보내 그녀의 환심을 산다. 김기창의 4년간의 끊임없는 열정에 박래현에 처음에는 바위 덩어리처럼 시커먼 물체처럼 보였던 그에게 애정을 느끼게 되어, 결국 두 사람은 4년 뒤 결혼한다. 결혼한 두 사람은 부부 이전에 예술적 동반자였다. 미술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면서 미술세계를 넓혀갔다. 같은 공간에서 살며 작업하다 보니 두 사람의 예술세계는 서로 다른 듯 닮아갔다. 마치 피카소와 브라크의 그림이 서로 닮아 예술의 동반자임을 드러냈듯이, 김기창과 박래현의 그림은 어느 시기까지 서로 비슷한 면을 많이 보였다.

 

(205)

이렇듯 빼어난 감성으로 좋은 그림을 그렸던 최재덕이었지만, 북으로 가서는 자신의 화풍을 제대로 이어나가지 못했다. 그의 감성적이고 예민한 예술적 성향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주창하는 북한의 예술론과는 어울리지 않는 면이 많았을 것이다. 그가 계속 남쪽에 남아 그림을 그렸다면 또 어떤 작품을 남겼을지,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앞서 박고석은 최재덕이 북쪽으로 가고, 이중섭이 남쪽으로 왔으니 비긴 셈이다라고 했지만, “이중섭이 북쪽에 남고, 최재덕이 남쪽에 남았으면 또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혹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다면 어쩌면 남북의 미술이 지금보다 더 풍요롭지 않았을까? 역시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다.

 

(235)

사람들이 현대사옥을 정경 유착의 결과물로 이야기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이 건물 건축의 첫째 의문은 건축의 허가가 정당했는지의 문제이다. 우선 크기가 너무 크다. 지금도 너무 커 위압감을 느낄 정도인데 1983년에는 어떤 정도였을지 상상이 될 것이다. 더구나 이곳은 창덕궁이 바로 옆에 있어 건축법상 이렇게 높고 큰 규모의 건물이 들어서서는 안 된다. 실제 주변 다른 곳의 경우 고도제한을 받는다. 이런 높은 건물이 어떻게 허가를 받을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309-310)

2001년 월북한 서양화가 배운성의 작품 48점이 발견되자 한국미술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때 발견된 작품이 대부분 유화 작품이어서인지 주로 그의 유화 작품에 대해서만 언급되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이나 한국에서 배운성이 미술세계가 주목을 받은 것은 유화보다는 판화 부문이었다. 배운성이 한국에 돌아왔을 1940년 당시에도 한국 화단과 언론에서의 관심은 그의 기구한 삶과 함께 뛰어난 판화 실력이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서 대서특필한 기사도 세계적인 판화가라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실제 배운성은 여러 살롱전과 공모 전람회에서 판화로 입상했으며, 개인전에서도 유화 못지않게 판화를 전시하곤 했다.

 

(338)

2009년 일본의 명문 학교인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는 개교 80주년을 맞아 학교 역사를 대표할 만한 단 한 명의 작가를 선정하고자 했다. 교수와 학생들의 엄격한 추천과 심사를 거쳐 일본화, 서양화, 조각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가장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가 한 명을 선발했다. 그 한 명이 바로 1949년에서 1953년까지 이 학교를 다닌 한국인 조각가 권진규(1922~1973)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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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

그런데 말이야, 태곳적부터 사람은 그놈의 답답증 때문에 말을 내지르다 보니 문자가 생겨났고 답답증 때문에 소리를 내지르다 보니 음악이 생겨났고 모양을 나타내어 보고 싶은 답답증 때문에 그림이나 조각 같은 게 생겨났을 성싶은데, 그래서 그놈의 답답증 때문에 종교니 철학이니 윤리 도덕이니, 그게 다 춥고 배가 고파서 생겨난 게 아니란 말이야. 답답증, 다시 말하면 마음이 춥고 배고파서 생겨난 건데 그래서 인간은 동물보다 복잡해졌단 말이야.

 

(588-589)

여덟이에요. 나인 그렇다 치고, 난 엉큼하질 못해서 탁 털어놓는 거예요. 마음은 간절하면서 안 그런 체하는, 소위 그 숙녀라는 물건들을 보면 메스꺼워서 원, 나같이 솔직만 하다면 세상은 아주 살기 좋고 밝아질 거예요. 한국 사람들의 병이 바로 그거 아니에요? 남이 갖다주어서, 그래야 겨우 먹고 싶지도 않지만 권하니까 먹는다는 식으로 말에요. 배 속은 비어서 꾸럭꾸럭 소리가 나는데 한 푼어치 가치도 없는 체면치레는 사실 치사한 거예요. , 결혼 문제에도 그래요. 따지고 보면 목적은 간단한 데 공연한 사탕발림을 한단 말예요. 결혼이라는 것도 수지계산의 범주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거예요.”

 

(627-628)

운명이라든가 행운이라든가 혹은 부조리라든가 막연한 말인데 한편 근본적인 것일 수도 있고…… 한데 그런 것 밀쳐놓고, 아득바득 애쓰는 그 껍데기만 살짝 벗겨본다면? 역시, 역시 그렇거든. 의리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현상이 쌓이고 무너지고 한단 말이야. 마치 좁은 골목에서 사람들에게 떠밀리고 떠밀리다가는 큰길로 나와 있었다는 것과 비슷하게……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지만 본인의 의사하고는 상관이 없이 천재가 되어 있기도 하고 천치가 되어 있기도 하고, 그게 운명이라든가 행운이랄 수 없는 게 오늘이거든. 역학적인 것이란 말일세. 사람의 의사와는 무관한, 저절로 움직이는 역학적 현상이란 말일세. 사람의 의사와는 무관한, 저절로 움직이는 역학적 현상이란 말일세. 운명과 마찬가지로 자연도 물러나 버린 빈터에서 인간이 주인만 되었더라면…… 망상이지 망상일세. 어디 본인의 의사만의 부재한가? 그 타의라는 것도 타인의 의사가 아니란 말이야. ()자를 빼어버린 타, 다만 타, 그것뿐이지. 홍수를 이루며 떠내려가는 사물의 의사가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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