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말이야.

얼마나 아팠을까?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나간 사람들 말이야.

 

(93)

하나의 눈송이가 태어나려면 극미세한 먼지나 재의 입자가 필요하다고 어린 시절 나는 읽었다. 구름은 물분자들로만 이뤄져 있지 않다고, 수증기를 타고 지상에서 올라온 먼지와 재의 입자들로 가득하다고 했다. 두 개의 물분자가 구름 속에서 결속해 눈의 첫 결정을 이룰 때, 그 먼지나 재의 입자가 눈송이의 핵이 된다. 분자식에 따라 여섯 개의 가지를 가진 결정은 낙하하며 만나는 다른 결정들과 계속해서 결속한다. 구름과 땅 사이의 거리가 무한하다면 눈송이의 크기도 무한해질 테지만, 낙하 시간은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한다. 수많은 결속으로 생겨난 가지들 사이의 텅 빈 공간 때문에 눈송이는 가볍다. 그 공간으로 소리를 빨아들여 가두어서 실제로 주변을 고요하게 만든다. 가지들이 무한한 방향으로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어떤 색도 지니지 않고 희게 보인다.

 

(218)

집담과 밭담들, 돌로 된 집들의 벽체들만 남기고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어. 아버지가 집에 들어서자 마당 가득 붉은 게 흩어져 있어서 놀랐는데, 달아오른 고추장 장독이 터진 거였어. 집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총소리가 들렸던 팽나무 아래로 달려가보니 일곱 명이 죽어 있었대. 그중 한 사람이 할아버지였어. 가호마다 주민 명부를 대조한 군인들이, 집에 없는 남자는 무장대에 들어간 걸로 간주하고 남은 가족을 대살(代殺)헌 거야.

 

(243)

보이지 않는 눈송이들이 우리 사이에 떠 있는 것 같다. 결속한 가지들 사이로 우리가 삼킨 말들이 밀봉되고 있는 것 같다.

 

(273)

1948년 정부가 세워지며 좌익으로 분류돼 교육 대상이 된 사람들이 가입된 그 조직에 대해 나는 알고 있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정치적인 강연에 청중으로 참석한 것도 가입 사유가 되었다. 정부에서 내려온 할당 인원을 채우느라 이장과 통장이 임의로 적어 올린 사람들, 쌀과 비료를 준다는 말에 자발적으로 이름을 올린 사람들도 다수였다. 가족 단위로도 가입되어 여자들과 아이들과 노인들이 포함되었고, 1950년 여름 전쟁이 터지자 명단대로 예비검속되어 총살됐다. 전국에 암매장된 숫자를 이십만에서 삼십만 명까지 추정한다고 했다.

 

(311)

모든 소리의 잔향이 허공의 눈송이들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내가 내쉬는 숨소리도 눈의 입자들 속으로 삼켜졌다.

여기쯤 멈춰 서서 엄마는 저 건너를 봤어. 기슭 바로 아래까지 차오른 물이 폭포 같은 소리를 내면서 흘러갔어. 저렇게 가만히 있는 게 물 구경인가. 생각하며 엄마를 따라잡았던 기억이 나. 엄마가 쪼그려앉길래 나도 옆에 따라 앉았어.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317-318)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 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 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었으니까. 휴전선 너머에 여전히 적이 있었으니까. 낙인찍힌 유족들도, 입을 떼는 순간 적의 편으로 낙인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골짜기와 광산과 활주로 아래에서 구슬 무더기와 구멍 뚫린 조그만 두개골들이 발굴될 때까지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고, 아직도 뼈와 뼈들이 뒤섞인 채 묻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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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漁港)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만큼 바다빛은 맑고 푸르다. 남해안 일대에 있어서 남해도와 쌍벽인 큰 섬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사철은 온난하여 매우 살기 좋은 곳이다. 통영 주변에는 무수한 섬들이 위성처럼 산재하고 있다. 북쪽에 두루미 목만큼 좁은 육로를 빼면 통영 역시 섬과 별다름이 없이 대부분의 집들이 송이버섯처럼 들앉은 지세는 빈약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민들은 자연 어업에, 혹은 어업과 관련된 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일면 통영은 해산물의 집산지이기도 했다. 통영 근처에서 포획하는 해산물이 그 수에 있어 많기도 하거니와 고래로 그 맛이 각별하다 하여 외지 시장에서도 비싸게 호가되고 있으니 일찍부터 항구는 번영하였고, 주민들의 기질도 진취적이며 모험심이 강하였다.

 

(85-86)

큰딸 용숙은 열일곱 때 출가를 시켰으나 과부가 되었고 지금 나이가 스물네 살이다. 둘째가 용빈이, 셋째가 용란이다. 그는 열아홉이며 그 다음이 용옥이, 막내가 열두 살짜리 용혜다. 고모할머니 봉희가 살아 있을 때 용혜는 봉룡이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다고 했다. 돌아갈 날을 몰라 칠월 백중에 제사를 모실 때도 고모할머니는 용혜를 보고 언짢게 혀를 끌끌 차곤 했다. 그러나 김약국은 용혜를 두고 연순을 연상하였다. 입 밖에 말을 내지는 않았으나 어떤 때는 심한 착각을 일으키는 일까지 있었다. 김약국은 연순이가 어릴 때 봉제 영감이 그랬듯이 용혜를 노랭이라 부르며 사랑하였다. 다른 딸들은 모두 머리털이 칠빛처럼 검었는데 용혜만은 밤색 머리칼이었다.

 

(206)

논쟁에는 흥미가 없다. 하여간 너는 과대망상증에 걸려 있어. 너의 그 크나큰 사상과 이상은 영웅들에게나 맡겨둬라. 네가 항상 말하는 그 영웅들에게 말이다. 너는 네 분수에 넘는 망상에 사로잡힌 환자다. 너의 행위는 일보의 전진커녕 백보의 후퇴가 아니냐 말이다. 바로 이번 일이 그 표본이다. 넌 대체 뭘 했냐 말이다. 쓸데없이 아가리 놀린 것밖에 더 있었나? 그 아가리 놀린 것으로 누구 한 사람이 구제됐는가? 바늘귀 떨어진 것만큼이라도 조선의 자주성에 도움이 되었단 말인가? 너는 매만 맞고 집안을 시끄럽게 했을 뿐이지 일본 놈의 통치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207)

나를 묶어두려고 의식적으로 과소평가를 하는군. 허지만 난 언제나 걸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부딪칠 것입니다. 반드시 무엇에 부딪칠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형과 같이 안일하게 산다면 그건 사는 게 아니고 죽은 겁니다. 역사는 없을 겁니다.”

역사가 없음 어떠냐? 역사는 곰팡내 나는 기록이지, 사람은 어떤 입지적 조건이나 생활양식 속에서도 그 당대를 살게 마련이니까.”

교묘한 회피군요. 물론 나도 역사는 그 당대에서 끝나는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끝나면 다시 시작되죠. 마치 사람이 죽고 또 사람이 태어나듯이……”

되풀이되는 건 없으니만 못하다.”

왜 되풀이되는 거요. 진화하는 거죠.”

 

(302)

새터 아침장은 언제나 활기가 왕성한 곳이다. 무더기로 쏟아놓은 갓잡은 생선이 파닥거리는 것처럼 싱싱하고 향기롭다. 삶의 의욕이 넘치는 규환(叫喚) 속에 옥색 서린 아침, 휴식을 거친 신선한 얼굴들이 흘러간다. 새벽별은 밝고 축림, 전화도, 장대 방면에서는 호박, 고구마, 야채 등을 이고 지고 북문 안을 넘어서는 촌부들, 안뒤산 큰개, 작은개에서는 조개를 이고 충렬사를 지나오는 아낙들, 발개와 첫개에는 어장 배에서 생선을 받아가지고 판데굴을 지나오는 장사꾼들, 삼면 바다에서는 기관선으로부터 통구멩이까지 해초, 생선을 실은 어부들이 바다의 새벽을 뚫는다. 아니 그뿐이야. 통영 읍내에서도 비단 장수, 화장품 장수, 실 장수, 과일 장수, 본시장의 모든 장가꾼들은 서둔다. 이 무수한 움직임과 발소리들은 새터로 향하는 것이다. 새벽이 걷히고 옥색 아침이 서리면 읍 사람들은 장바구니를 들고 거리에 나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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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하지만 해리, 수학은 인간이 발견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학문이잖아요. 하나가 나오면 거기에 뒤따라 또 하나가 나오는 식이죠. 게다가 원리가 개념이 모두 다 발견되잖아요. 수학은…… 수학은…… 모든 내용이 하나로 조화되어 있지요. 하지만 역사학은 달라요. 역사학은 수천조에 달하는 인류의 생각과 행위를 다루는 학문이에요. 따라서 역사학자는 골라잡을 수밖에 없어요.

 

(294)

모든 인류가 모여 살던 하나의 행성. 나중에 다른 유인 행성도 생겨나긴 했지만 우리 행성이 최초의 유인 행성이었어요. 하늘은 열려있어 푸름을 맘껏 뽐내고 모든 사람이 생활할 공간과 들판은 드넓었으며 다정한 가정과 친절한 사람들이 사는 곳. 우리는 그곳에서 수천 년 동안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곳을 떠나 여기저기를 방랑해야 했어요. 그러다가 동적 일부가 트랜터 한구석에 정착해 식량을 재배하면서 약간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곳 트랜터에서 우리의 관습과 우리의 꿈을 가꾸며 살 수 있게 된 거예요.”

 

(498)

첫째, 은하계 역사에 전제 지배를 무너뜨리려는 수많은 혁명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개별 행성에서, 때로는 행성군에서, 또 때로는 제국자체에서, 또는 제국 시대 이전 지방 정부에서도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혁명은 종종 전제를 또 다른 전제로 바꾸는 것으로 끝나 버렸습니다. 다시 말해 결국 하나의 지배계급이다. 다른 지배계급으로 대치되고만 것이지요. 그리고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억압당한 채로 남게 되었습니다. 어떤 때는 이전보다 더욱 상태가 악화하기도 했지요.”

 

(574-575)

그렇다면 좋습니다. 어떤 전쟁도 치르지 않고 은하제국이 붕괴하여 파편화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제가 트랜터를 장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효과적으로 통치하기에 충분히 작은 영역에 제가 강력한 정부를 수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은하계의 그 나머지 세계에 대해서는 자유를 부여하고 각자 독자적인 관습과 문화에 따라 자기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렇게 되면 은하계는 무역, 관광, 통신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을 통해 다시 새롭게 작동하는 전체가 될 것입니다. 또 가까스로 뭉쳐 있는 현재의 통치하에서는 불가피할 수밖에 없는 붕괴라는 비참한 운명을 피하게 될 것입니다. 제 희망은 사실 건전한 겁니다. 말하자면 수백만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 전쟁이 아니라 평화, 노예제가 아니라 자유를 원하니까요. 잘 생각해 보시고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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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노명식 지음 / 책과함께 / 2011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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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이야기할 책은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이란 책이란다. 아빠가 프랑스 혁명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찾아보다가 알게 되어 구입했던 책이란다. 파리 역사상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인 프랑스 혁명과 파리 코뮌의 이야기라서 관심이 갔고 책의 평점도 좋아서 구입하게 되었단다. 당연히 외국 작가의 책이라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지은이가 노명식이라는 우리나라 역사가시더구나. 이 책을 처음 쓴 것도 지금으로부터 40년에 쓰셨다고 했어. 그리고 아빠가 읽은 책은 2011년 개간본이란다. 인터넷 검색을 보니 노명식 님은 2012년에 고인이 되셨더구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책을 번역 없이 읽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구나.

이 책이 우리나라에 나온 1980년이라고 하는구나. 우리나라 1980년은 또 다른 군사 독재가 시작되던 해로 정치적 혼동으로 시위가 끊이지 않던 시기였단다. 마친 프랑스혁명 전후에 시위가 끊이지 않았던 시기와 비슷하게 말이야. 결국 1987년 우리나라는 민주화를 이끌어내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 동안 끊임없는 국민들의 항쟁의 결과였단다. 그런 유사한 상황 때문에 1980년대에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느낌이 달랐을 것 같구나. 2024년 또다른 정치적 혼란이 일고 있단다. 역대 최악의 친일파 정권에 나라 살림은 손 놓고 있어서 고삐 풀린 황소 같은 상황민심은 80년대 만큼 들끓고 있지만 아직은 다들 각자도생 하느라 거리로 나서지는 않는 것 같구나. 그를 찍은 사람들이 원망스럽구나.

아빠가 프랑스 혁명에 관한 책을 많지는 않지만 몇 권 읽어봤는데, 오늘 이야기할 <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라는 책이 가장 좋았던 것 같아. 누군가 프랑스 혁명에 관한 책을 추천한다고 하면 이 책을 추천할 것 같구나. 사실 이 책을 이번에 읽으려던 책은 이 책이 아니었단다. 아빠가 에밀 졸라의 <패주>라는 소설을 읽으려고 폈거든그런데 에밀 졸라의 <패주>라는 책이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과 파리 코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해서 그 책을 읽기 전에 배경 지식을 좀 쌓고 읽으려고 <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을 먼저 읽게 된 것이란다. 그런데 이 책 참 보물 같은 책이로구나. 이 책이 품절되지 않고 계속 판매되어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램이란다.

 

1.

프랑스 혁명은 너희들도 알고 있는 것처럼 1789년에 일어났단다. 그 이전의 프랑스는 어떠했는가?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나? 먼저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가 있었단다. 1715년 프랑스의 인구는 1500만명 정도였는데, 1789년에는 2400만명에서 2600만명이었대. 불과 몇 십 년 만에 1000만명 정도가 늘어난 거지.. 그렇게 인구가 갑자기 급증했는데, 물자의 증가는 따라가지 못했어. 그래서 물가가 급등해서 살기가 어려워졌다는구나.

모든 사람이 살기 어려워졌을까? 오늘날도 물가가 상승하면 서민들부터 힘들어지는 것처럼 당시에도 신분이 낮은 사람들부터 힘들어졌단다. 당시 프랑스에는 3개로 나뉘어진 신분제도가 있었는데, 1신분은 성직자들이었고, 2신분은 귀족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이 3신분으로 가장 많이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3신분 중에는 대다수가 농민들이었고, 소수의 부르주아들이 있었단다. 농민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힘이 없었어. 세금도 이중 삼중 과제로 내어 수입의 80~90%를 내고 있었어. 영주에 세금을 내고, 교회에 세금을 내고, 나라에 세금을 내고 그랬지.

그런데 부르주아들은 좀 여유가 있었단다. 신대륙이 발견되면서 상업이 발달하였는데, 부르주아들은 큰 돈을 벌게 되었거든. 비록 3신분이지만 큰 돈을 가지고 있었어. 하지만 그들은 3신분이다 보니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단다. 그런 것이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어. 지은이 노명식 님은 부자들의 불만이 쌓일 때 혁명이 일어난다고 했는데 공감이 가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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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번영하고 발전하는 18세기 프랑스에서 바로 그러한 계급 사이의 불균형이 날카롭게 의식되었다. 혁명은 가난한 사람들이 일으키지 않는다. 부유해진 사람들이 자신의 실력이 무시되고 멸시당한다고 느낄 때 모순된 제도를 타도하기 위하여 혁명을 일으킨다. 바르나브(Antoine Barnave)가 열렬한 혁명가가 된 동기는, 일곱 살 때 어머니와 함께 극장에 갔을 때 클레르몽 통네르라는 귀족에게 자기들의 좌석을 내주어야 했던 억울하고 불쾌한 기억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많은 부르주아들이 품고 있었던 불평불만과 자존심의 훼손이 그들로 하여금 앙시랭레짐을 미워하게 하고 그것을 없애버리는 혁명으로 치닫게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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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년 흉작이 일어나면서 농민들은 더욱 가난해졌고, 물가는 더욱 치솟았단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라는 특별한 조치를 하지 않았단다. 지금 우리나라처럼 말이야.

당시 인쇄술 보급과 함께 루소의 사회계약설 등을 비롯한 여러 계몽 사상이 퍼지게 되었어. 특히 부르주아들의 자녀들이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계몽 사상을 쉽게 접할 수 있었지. 그들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어.

부르주아들이 3신분이긴 하지만 경제력이 있다 보니 군대 등 국가의 일부 고위직을 갖고 있었는데,  2신분 귀족들이 이것에 불만을 품고 법을 바뀌어 고위직은 모두 귀족들이 갖게 되었단다. 어찌 보면 귀족들의 횡포이니 왕이 나서서 중재를 해야 하지만 왕은 무능했단다. 귀족들이 무능한 왕을 이용한 것이지. 귀족이 고위직을 다 차지하게 되자 왕권도 약화되었단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이다 보니 나라 빚은 점점 늘어가는데 1신분과 2신분은 세금을 안내고 있었어. 자꾸 오늘날 우리나라 현실과 오버랩이 되는구나. 세손 부족이 늘어나는데 부자감세를 하고 있는 우리나라와 비슷해.

각 신분의 대표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삼부회가 1789 5월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렸어. 3신분도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2신분은 3신분 대표들을 멸시하고 굴욕을 주었단다. 이에 불만을 품은 3신분은 독립적인 또 다른 의회인 국민의회를 창설했단다. 1신분들 중에도 국민의회에 합류하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찬반 투표가 이루어졌고 근소한 표차로 국민의회에 참석하게 되었단다. 배신을 느낀 루이 16세는 회의장 문을 잠그고 그들을 회의장 안으로 못 들어오게 했어.

그래서 국민의회는 베르사유 궁전 안 테니스 코트로 가서 회의를 했단다. 이곳에서 그 유명한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 선언된단다. 헌법 제정을 요구하고 국민의회가 공식적인 국민의 대표회의체로 인정하라는 것이었어. 1789 7월 더욱 거세지는 혁명의 물결. 나라에서는 국민의회를 인정하지 않고 탄압하려고 하자 파리 시민들은 결국 7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하였단다. 그렇게 국민의회 세력은 권력을 잡게 된단다. 1789 8월 봉건제 폐지를 선언했어. 농노는 바로 해방이 되었지만 토지 처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면서 매매를 통해 정리하기로 했는데 그것이 4년이나 걸렸다고 하는구나. 실책 중에 하나였지. 그리고 인권 선언도 발표되었는데, 내용을 읽어보면 오늘날 헌법에 적용해도 좋을 만큼 선진적이었단다. 교회 재산 및 토지 반환에 대한 갈등도 심했는데 11월 국민의회의 표결을 통해 국가에 반환되었다고 하는구나. 갑작스레 권력을 잡긴 했지만 여전히 계층간의 대립은 심했어. 그리고 혁명파 내부에서도 부르주아와 민중들 사이의 혁명에 대한 온도차도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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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바스티유를 함락시킨 지 2 2개월 사이에 프랑스 국민은 새 국민으로 변하였다. 그 새 국민의 마음속에 지난 6월 이후 3개월 사이에 갑자기 분노와 불만이 쌓였다. 지금까지 왕당파를 노려보던 프랑스 민중의 눈은 혁명을 반역하고 민중을 배신한 푀양파로 돌려지고 있었다. 민중의 분노와 불만은 막 제정된 결함투성이의 헌법을 그대로 두지 않을 태세였다. 그 헌법을 진정한 민주주의 헌법으로 새로 만들고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는 데는 앞으로 1년이면 족하였다. 혈통의 특권적 지배를 무너뜨린 민중은 이제 돈의 특권적 지배를 오래 참고 견딜 생각이 없었다. 푀양파와 같은 보수적 부르주아는 헌법의 제정으로 혁명은 끝났다고 생각했으나 민중은 혁명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혁명은 계속 민중의 힘에 의해 추진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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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루이 16세도 외국 세력과 손잡고 반전을 노리고 있었어. 심지어 프랑스를 탈출하려는 시도도 했는데 실패하고 말았단다. 이 장면은 앙투아네트 이야기할 때 해주었는데 기억나지?

 

2.

1791년 헌법이 제정되면서 프랑스는 입헌군주제를 채택했단다. 입헌군주제는 왕은 있지만 헌법 체제 안에서 권한을 행사해야 하는 제도였어. 그렇다 보니 왕의 권한은 대폭 축소되어 독자적인 권한은 거의 없었단다. 입법의회가 생겼는데 입법의회는 부르주아들과 일부 귀족들로 구성되었어. 그런데 농민의 권리를 너무 주지 않았단다. 선거권도 없었대. 농민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폭동도 일어났다는구나. 그래서 입헌군주제는 1년만에 폐지하고 파리 시의회인 파리 코뮌이 주도적으로 행정을 이끄는 시대라 되었단다. 이 시의회의 리더는 법무장관 당통이 이끌게 되었단다.

===============

(128)

파리 코뮌이란 무엇일까? 그 뜻은 파리 시의회(City Council)라는 뜻이었다. 파리는 본래 행정구역이 60구로 나뉘어 있었는데, 1790 5월에 48개의 섹시옹(section)으로 개편되었다. 섹이옹마다 1800명 정도의 능동 시민이 있었는데, 그들의 대표자들이 시 코뮌을 구성하는 반혁명 세력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런데 8 10일 사건을 계기로 각 섹시옹이, 특히 노동자들의 섹시옹이 그들의 코뮌 대표자들을 수동 시민으로 교체하여 코뮌의 능동 시민을 압도하게 되었다. 수동 시민은 선거권도 피선거권도 없었으므로 압력에 의하여 능동 시민과 수동 시민의 차별을 없애고 보통선거에 의하여 새 국회인 국민공회 소집을 가결하였으므로 코뮌의 불법성은 현실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합법성의 기분은 이미 개정하기로 선포한 낡은 헌법의 원리에 의하여 측정될 것이 아니라 새 헌법의 원리에 의하여 측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새 헌법의 원리에 보통선거의 원리였다. 그런데 이 보통선거의 원리를 입법회의로 하여금 승인케 한 것은 파리 코뮌이었으니, 입법회의는 파리 코뮌의 실력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

당시 프랑스와 프로이센 전쟁의 분위기가 일어나고 있었어. 여러 계파가 다양한 이유로 전쟁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자코뱅당의 로베스피에르 중심의 일부만 반대 의견을 냈단다. 그렇게 되자 자코뱅 당은 분열하게 되었단다. 로베스피에르 중심의 산악파는 부르주아를 비판하고 민중을 옹호하였고, 자코뱅 클럽을 결성했단다. 온건 진영은 지롱드파로 모이게 되었어. 지롱드 파가 좀더 우세한 조직이었지. 이런 상황에서 왕정을 공식으로 폐지하고 공화정을 출범하게 되었단다. 그러면서 루이 16세에 대한 처형 여부 결정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거의 50 50으로 양분되었어. 아슬아슬한 표차로 루이 16세 처형이 결정되어 삶을 마감하고 말았어.

공화정이 출범하긴 했지만 순탄치 않았단다. 각 계파들의 알력 다툼은 점점 심해지고 반대파들을 꼬투리 잡아서 단두대로 보내기 일쑤였어. 프랑스 혁명의 유력 인사들의 많은 이들의 삶이 단두대에서 마감했단다. 산악파가 권력을 잡게 되면서 그들 간에도 내부 분열이 일어났고, 산악파에서 관용파로 분류되면 당통도 제거되고 마라도 암살당했단다. 그러면서 로베스피에르가 거의 독재를 하다시피 했어. 공안위원회를 만들면서 공포 정치를 시행했지. 언제 어떻게 어떤 이유로 죽을지 몰랐어. 로베스피에르의 입장에서는 민중을 위한다고 했지만 너무 과격했어. 로베스피에르의 위협을 느낀 반대파들도 결국 헌법을 이용하여 로베스피에르도 단두대로 보냈단다. 이 부분은 아빠가 몇 달 전에 이야기해 준 <조제프 푸세>에서 자세히 이야기했었지. 로베스피에르를 죽인 것이 혁명력 테르미도르에 죽였기 때문에 그들을 테르미도르파로 불렀다고 하는구나. 혁명력이란 혁명이 성공하고 나서 달력을 새로 만든 것이란다.

로베스피에르를 죽이긴 했는데 테르미도르파는 뛰어난 리더도 없고 노선도 애매했어. 지은이께서 이야기하시기로는 왕이 없는 입헌군주제 노선이라고 했어. 정말 애매하구나. 그렇다 보니 이때가 기회가 싶어 왕당파들도 재건의 움직임을 보였는데 테르미도르파에 의해 진압되었단다. 그러면서 등장한 것이 총재정부라는 정부 형태였단다. 이때가 1795 1월이었어. 총재 정부는 5명의 총재가 공동으로 국가 행정을 운영하는 것이었는데 일각에서는 부르주아 공화국이라고도 불렀어. 이런 정부 형태를 민중들이 좋아하겠니? 당연히 싫어하겠지. 그래서 또 여기저기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인 세력들이 등장하였는데 이때 나폴레옹도 처음 역사에 등장하게 된단다. 강력한 리더가 없어서 그런지 좌파와 우파간에도 계속 쿠데타를 일어났는데, 총재 중 한명인 시에예스가 나폴레옹과 손잡고 쿠데라를 일으켜 성공하게 된단다. 그리고 총재 정부를 끝내고 통령 정부를 세우게 된단다.

 

3.

통령 정부는 3명의 통령이 공동으로 정부를 이끌어가고 임기는 10년이라고 했어. 그런데 나폴레옹은 법을 바꾸어 1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고 2통령과 3통령의 권한을 축소했단다. 자신이 1통령인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이후 또 법을 바꾸고 임기를 없애 종신 통령이 되었단다. 그러면서 반대파인 왕당파와 공화파의 세력을 제거해 나갔어. 결국 헌법을 한차례 더 개정하여 그는 황제가 되었단다. 왕이 아니고 황제가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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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나폴레옹이 왕이 아니라 황제간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부르봉 왕가의 왕족들이 루이 16세의 어린 아들을 루이 17세라고 칭하였고, 그가 일찍 죽자 루이 16세의 큰 동생 프로방스 백작이 루이 18세라고 자칭하면서 왕정의 회복을 주장하고 있는 판국에, 그들의 왕정을 부정하면서 다른 왕정을 창업한다는 것은 논리상 모순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스스로 혁명의 아들로 자처하고 있었는데, 혁명이 낳은 왕이란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 역사상 프랑스인 최초의 군인 황제인 샤를마뉴의 정통 계승자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아헨에 있는 샤를마뉴의 사당을 참배했을 뿐만 아니라 샤를마뉴처럼 가톨릭교회의 성별을 필요로 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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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은 교황에게 부탁해서 대관식까지 했단다. 교황도 자신의 입지를 키우는데 나쁘지 않다고 대관식에 응했단다. 노트르담 성당에서 진행되었는데, 나폴레옹은 관을 받아 자신이 직접 위에 얹었다고 하는구나. 황제를 불러들이긴 했지만 스스로 관을 쓰면서 자신의 힘에 의해서 황제가 되었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라고 했어. 그렇게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전쟁을 통해서 주변국을 점령하고 동맹국으로 만들었단다. 그리고 그 나라에 자신의 가족이나 친척들을 왕에 세우는 족벌 정치를 했어. 그렇게 국토를 넓혀나갔지만 주변국에서 반기를 들기도 했어.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반기를 든 것을 시작으로 오스트리아 등 동부에서도 독립 투쟁을 했단다. 그 때마다 진격해서 진압을 하였지만 프랑스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단다.

그 와중에 무리한 러시아 원정이 독이 되었어. 러시아 원정은 추위와 병으로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러시아 전술에 속아서 많은 군인들이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단다.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원정을 갔지만 약 10만명만이 돌아올 수 있었어. 그렇게 되자 나폴레옹은 1814년 실각하고 말았단다. 나폴레옹이 실각되었지만 여전히 프랑스는 유럽의 중심이었단다. 프랑스 내에서는 부르주아는 여전히 영향력을 과시하였어. 하지만 극빈자들도 여전히 많았어. 노동자들 중에도 극빈자들이 많아서 불만이 쌓여갔지.

나폴레옹이 실각된 이후 백성들의 지지에 의해 루이 16세의 동생 프로방스 백작이 루이 18세가 되어 왕이 되었단다. 정부 조직은 1789년 이념을 기초로 구성하기로 했단다. 그런데 1815년 엘바섬을 떠난 나폴레옹이 3 20일 파리에 입성하면서 위협하자 루이 18세는 파리를 탈출하였단다. 나폴레옹이 다시 권력을 잡나 싶었으나 그의 권력은 100일로 끝이 나고 말았지.

그는 다시 실각되었고 루이 18세는 돌아왔단다. 루이 18세가 프랑스 혁명 이후 계속 외국에서만 지내서 프랑스 사정을 잘 모르고 민심도 잘 몰랐대. 그리고 자신과 친분이 있는 망명 귀족들을 데리고 와서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었어. 이렇게 하니 국민들의 불만이 또 쌓일 수밖에 없지. 거기에 나폴레옹이 100일 천하 동안 일으킨 전쟁에서 연합국에 패한 것에 대한 제2차 파리조약이 이루어졌어.

나폴레옹이 첫 실각 당시 맺어진 1차 파리조약에서는 아무런 배상금을 받지 않겠다고 했는데

2차 파리조약에서는 참을 수 없었지. 연합국은 프랑스 땅의 2/3를 차지하게 되었고 전쟁 배상금도 내야 했으며 프랑스 정치도 감시 받는 상황이 되었단다. 루이 18세도 이런 열악한 조건에서 의회와 손을 잡고 노력을 했으나 1824년 루이 18세는 죽고 샤를 10세가 왕위에 올랐단다.

 

4.

샤를 10세는 꼴통 왕당파로 왕당파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어. 샤를 10세는 돌아온 망명 귀족들의 옛 재산을 찾아주기까지 했단다. 시민들의 불만은 점점 치솟았어. 그 불만이 쌓이고 쌓여 1830 7월 혁명이 일어나고 샤를 10세는 쫓겨났어. 그리고 루이 필리프가 왕위에 올랐는데 루이 필리프는 프랑스 혁명 초기에 혁명군 진영에 있던 사람으로 역시 혁명파였던 오를레앙 공의 아들이었어. 7월 혁명 이후 왕정을 시작해서 그들은 7월 왕정이라고 불렀어. 여전히 노동자의 생활은 열악했고 국민의 분열은 계속되었는데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어. 노동자 시위가 계속 일어나고 정부는 무력 진압하게 되었어. 노동자들은 이제 7월왕정에 불신을 가지고 공화파를 지지했단다.

그런데 1840, 7월 왕정의 실책이 또 나왔어. 나폴레옹의 유해를 파리로 이장했고 나폴레옹을 영웅화했단다. 1840년대 내내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시민들은 불만이 계속되었고 곡물이 대흉작이 되면서 물가는 치솟고 주식은 곤두박질치면서 경제 사정까지 악화되었어. 다시 시위와 폭동이 증가하였고 무력 봉기까지 일어났단다. 1848년 공화파 주도로 2월혁명이 일어나고 결국 루이 필리프는 퇴위했단다. 공화파 주도로 대통령 선거를 하게 되었는데 의외의 인물이 당선되었단다. 나폴레옹의 조카인 샤를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이 대통령이 된 거야. 나폴레옹의 향수를 자극해서 말이지.

나폴레옹 3세는 가톨릭교회를 중시하였어. 그는 직권 이후 언론을 탄압하고 자유를 탄압했고 대통령이 된 지 1년 뒤에는 황제가 되었단다. 국내 정치에서는 이렇게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고 있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성과도 있었다고 하는구나. 영국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이탈리아 전쟁에 관여하여 이탈리아 통일에도 기여를 했대. 그런데 오히려 이건 독이 되었다는구나.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거대란 견제 세력이 생긴 거야.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교황의 힘도 세지면서 프랑스와 대립하게 되었어.

프랑스 내부에서는 나폴레옹 3세에 대한 국민여론이 안 좋아지고 그것은 공화파의 의회 의석수가 늘어나는 결과를 냈단다. 나폴레옹 3세는 대의동맹을 맺어서 위기 타개를 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어. 그 와중에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 원정에서 실패를 했고, 프로에센은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승리를 하면서 프랑스도 넘보려고 했어. 1869년 선거에서 야당이 압승을 하면서 황제의 권력은 많이 약화되었단다. 그리고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에 결국 전쟁이 일어났는데 당연히 이길 줄 알았던 이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말았단다. 그러면서 나폴레옹 3세는 퇴위하게 되었고 다시 제정 시대가 끝이 났단다.

1870 9월혁명으로 프랑스는 다시 공화정으로 돌아섰어. 프로이센은 전쟁에서 이긴 후 계속 프랑스로 진격하여 파리를 포위했단다. 포위를 뚫는 시도를 잇달아 했지만 실패하고 고립된 파리는 물가가 폭등하면서 궁핍한 생활이 이어졌어. 4800여명의 파리 시민이 사망을 했다는구나. 파리 고립이 길어지면서 파리 내부에서도 항복하자는 의견과 항전하자는 의견으로 양분되었어. 파리 시민들의 시위대와 이를 진압하던 수비대 사이에서 우발적으로 총격전이 벌어져서 50여명이 사상자가 발생했어. 당시 프랑스 정부의 파브로라는 사람이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와 비밀리에 휴전 협정을 했고 보르도에 의회를 만들게 되었단다.

이 소식을 들은 파리의 국민방위대는 반박을 했어. 휴전 협정 내용은 파리 시민을 더욱 열받게 했단다. 알자스 지방과 로렌 지방을 독일에 넘기기로 했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프로이센 군대가 파리를 48시간 동안 점령하기도 했다는구나. 이런 굴욕적인 조건을 어떤 파리 시민이 받아들이겠는가. 파리 국민방위대 중심으로 저항을 했단다. 그리고 파리 내부에서 또다른 의회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파리 코뮌이란다. 이미 파리 코뮌은 프랑스 혁명 초기 때 있었던 파리 시의회인데 이를 부활한다는 의미였어. 보르도 의회는 베르사유로 이동했고, 파리 코뮌의 국민방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정부군을 파리로 보냈단다.

그렇게 정부군과 국민방위대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단다. 같은 동족끼리 총을 겨누는 상황이 벌어진 거야. 72일간 이어졌는데 그야말로 처참하기 그지 없었단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유서 깊은 건물들이 많이 불타고 말았대. 이 내전을 역사는 파리 코뮌 사건이라고 하는데 몇몇 지도자의 잘못된 선택에 의해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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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432)

파리 코뮌 기간 중 벌어진 공전의 참변은 프랑스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유럽 문화와 현대 문명의 중심지 파리에서 어떻게 하여 그런 끔찍하고 야만스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코뮌 직후부터 거기에 대한 갖가지 해석이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역사학의 생명은 해석에 있다고 하지만 파리 코뮌에 대한 해석만큼 오늘날까지 극심한 대립을 보이는 것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는 아마도 파리 코뮌의 해석이 처음부터 유달리 현저한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농후하게 띠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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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예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루브르 궁전도 이때 화재가 일어나 서쪽 건물이 완전히 무너졌고 그때의 잘못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복원하지 않고 무너진 상태 그래도 두었다고 하는구나. 여기까지가 책의 내용을 정리해 본 것이란다. 길게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맥락이 잘 안 이어지는 부분도 있는 것 같구나. 그건 아빠의 역량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이니 양해 바란다. 그리고 너희들이 나중에 커서 이 책은 꼭 읽었으면 좋겠구나. , 이제 에밀 졸라의 <패주>를 읽어야겠구나.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태양왕 루이 14세가 죽은 1715년 당시 프랑스의 인구는 1,400만에서 1,500만으로 추산되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89년에는 2,400만 내지 2,600만으로 추산된다.

책의 끝 문장: 끝으로 코뮌은 제3공화국의 불행한 서장으로, 코뮌이 없었더라면 제3공화국의 탄생이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루이는 흔히 말하는 ‘사람 좋은’ 사람이었다. ‘사람 좋은’ 사람이라는 개념에는 유능하다든가 흑백이 분명하다든가 의지가 꿋꿋하다든가 책임감이 강하다든가 혹은 믿음직하다든가 하는 따위의 뜻은 들어 있지 않다. 루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뚱뚱한 몸집에 어디로 보나 호인형 남자였다. 미식가이고 무도회와 사냥을 즐기고 특히 열쇠를 만드는 취미가 있었다. 취미를 취미 삼아 즐기는 정도라면 골치 아픈 정무에 휴식을 제공하는 오락거리쯤으로 생각하겠지만, 루이는 골치 아픈 정치는 아예 질색이고 사냥과 열쇠 만들기에만 전념하는 편이었다. 그는 국왕 참의회에서 골치 아픈 일이 논의되면 곧 피곤해져서 회의석상에서도 졸곤 했다고 한다. 그러한 인물이었으니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다 한들 무슨 유익한 일을 과단성 있게 해낼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프랑스 혁명과 같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에 직면하여 어찌 일을 제대로 판단하여 책임성 있게 처리할 수 있었겠는가? - P52

따라서 자코뱅의 세 번째 전통은 참 민주주의의 이상이었다. 평등주의적 민주의의이며, 진정한 자유에 대한 갈망과 사랑의 표현이었다. 자코뱅이 제정한 1793년 헌법의 제5조는 "정부가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면 봉기는 인민 전체에게도, 인민 각자에게도 가장 신성하고 불가결한 의무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자유 수호의 최후 수단으로서의 민중 봉기를 국민의 권리를 규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무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자코뱅의 자유에 대한 사랑과 민주주의의 이상이 어느 정도의 것이었던가를 말해 주는 단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 P179

나폴레옹 제국은 족벌 제국이었다. 황제의 형제들과 친척 및 부장들을 위성국가의 통치자로 봉하였다. 그러한 그가 1810년에는 가장 사랑하는 막내 동생 루이를 네덜란드 왕위에서 몰아내고 네덜란드를 프랑스에 합병하였다. 루이가 네덜란드의 밀무역을 철저히 단속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륙봉쇄의 성패가 나폴레옹의 운명을 좌우하고 나폴레옹 제국의 모든 정책은 대륙봉쇄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해안 지역들을 프랑스에 합병하게 된 이유도 거기 있었고, 심지어 교황령이나 일리리아 지방까지도 무리하게 합병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그런데 영국해에 접해 있는 가장 중요한 네덜란드에서 밀무역을 막지 못한다면 대륙봉쇄의 운명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 P258

샤를도 형 루이처럼 67세의 홀아비였으나 형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활동적이고 정렬적이고 명쾌한 성격만이 형과 다른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경력과 사상도 매우 달랐다. 샤를은 왕당파의 두목으로서 헌장을 우습게 여기고, 프랑스 혁명을 악마의 장난으로 믿고, 왕권신수설을 진심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이 이제 왕권신수설을 부정한 헌장을 준수해야 하는 입헌군주가 되었으니 과연 그가 얼마나 헌장에 충실한 것이며 정당정치의 군주로서의 임무에 성실할 것인가는 매우 의심스러웠다. - P305

그런데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산업혁명을 경험한 선진 산업국가들은 빈부의 격차가 생기는 원인을 미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누구의 눈에도 명백히 나타난 빈부의 격차를 어떤 방법으로든지 줄이긴 해야 했다. 이런 생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여 실천에 옮기려는 운동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는데, 이를 사회주의라고 하고 그 운동을 사회주의운동이라 한다.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은 갖가지 이론과 형태로 19세기 선진 산업국가들의 역사를 색칠한다. 특히 19세기 프랑스의 역사가 그렇다. - P329

이제 국민은 공화정을 확정할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프랑스는 1815년 이래 한번은 보수적인 또 한번은 자유주의적인 입헌주정을 시도했으나 두 번 다 실패하고 말았다. 전자는 프랑스 혁명 자체를 부정하려다가 실패하고, 후자는 프랑스 혁명은 인정하였으나 상층 및 중층 부르주아의 이익에 지나치게 집착하다가 실패하였다. 오를레앙 왕가는 프랑스 혁명이 내세운 국민주권의 원리를 시인하면서도 신흥 부르주아에 의한 권력 독점을 위해 지나친 제한선거를 고집하다가 무너졌다. 복고 왕정은 정통파를 만들어내고, 7월왕정은 오를레앙파를 만들어내어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정치를 매우 복잡하게 만들지만, 그들이 프랑스의 정치 무대를 차지하는 일은 영원히 다시 오지 않는다. - P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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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사회는 그렇게 쉽게 붕괴하지 않아요. 당신은 가이아로서 얘기하는데, 가이아는 자유로운 각 개인이 모여 사는 사회를 이해할 수 없어요. 이성과 정의에 근거해 확립된 규칙이 사회와 시대가 변하면서 그 유용성이 사라졌는데도 관성적으로 존속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 경우에는 그 규칙이 무용하게 되었다거나 심지어 해롭게 변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도 그런 규칙을 위반하는 것 자체가 정당할 뿐 아니라 유용할 수 있어요.”


(195-196)

왜냐고요? 낭만주의자들은 대체적으로 그들이 죄를 저질러 응징자에게 벌을 받았다고 추측하지요. 그러나 이들은 응징자가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벌을 주었는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아요. 이처럼 뜬구름 잡는 이야기는 믿을 수 없어요. 오히려 모든 분야를 로봇에 의지함으로써 사회가 나약해지고 퇴폐적으로 되면서, 아주 따분해지거나 혹은 사람들이 살려는 의지 자체를 잃어버리게 되어 발전이 정체되다가 마침내는 사멸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지요.

두 번째로 파견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 로봇 없이 살아가면서 은하계 전체를 개발했지만, 지구에는 방사능 오염이 심해지면서 점차 생물이 살 수 없는 행성으로 변질되어 갔지요. 첫 번째로 파견된 그룹에게 영향을 받은 이후 지구에도 로봇화가 추진되어 그렇게 되었다는 게 통설이지요.”


(252)

생각해 보세요. 생태학적 균형이 완벽하게 이루어져 있는 유인 행성은 한 군데도 없어요. 아마 지구에만 생태학적 균형이 이루어져 있었겠죠. 그곳에서 인류가 진화했다고 하니까. 그 전에는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인류를 비롯해서 고급 문명을 발전시켜 주변 환경을 개발할 수 있는 어떤 지적 생물체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틀림없어요. 그것은 계속 변화하면서 자연적으로 생태계 균형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해요. 그러나 다른 유인 행성들은 인간들이 동식물체를 번식시키는 등 인위적으로 주변 환경을 조심스레 가꾸면서 지구처럼 만들어 온 것이지요. 하지만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조성한 생태계는 그 자체로 불균형을 이룰 수밖에 없어요. 인간들에게 필요한 생명체들만 퍼뜨렸을 테니까 그 종류가 극히 한정될 수밖에 없었겠죠.”


(654-655)

지스카르는 죽기 직전에 로봇공학 3원칙의 제1조에 우선하는 또 하나의 로봇 원칙을 생각해 냈습니다. 우리는 달리 합당한 이름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그것을 제0조라고 불렀습니다. 0조는 로봇은 전 인류에게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되며 또한 위험을 간과함으로써 인류에게 위해를 끼쳐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히 제1조는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봇은 제0조와 상충될 때를 제외하고는 인간에게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 또는 위험을 방관함으로써 인간에게 위해를 끼쳐서도 안 된다.’ 2조와 제3조도 역시 수정되어야 합니다.”


(671)

로봇들은 우주인들이 사라진 이후로 인류의 역사에서 아무런 중요한 역할도 하지 못했어. 가이아도 아주 최근까지는 마찬가지 처지였지. 로봇들은 피조물이고 가이아는 로봇들의 작품일세. 따라서 로봇들과 가이아가 그 로롯공학 3원칙에 얽매여 있는 한 그들은 인간의 의지에 복종할 수밖에 없어. 다닐이 기울여온 지난 2만 년 동안의 노력과 가이아의 오랜 발전에도 불구하고, 트레비스가 말한 한 마디 단어, 바로 인간은 그러한 노력과 발전에 종지부를 찍게 될 거야. 이는 결국 인간이야말로 우리 은하계에서 지성을 가진 유일한 유기체가 될 것이며 심리역사학도 계속 유효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네.”


(672-673)

초공간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때 우리의 은하계는 하나의 점에 불과하지요. 내가 아는 한 우리는 어떠한 다른 은하계에도 가 본 적이 없고 다른 은하계의 지적인 생명체도 우리를 찾아온 적이 없어요. 하지만 언젠가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만일 외계종이 침략해 올 경우, 그들은 우선 우리 인간들끼리 반복하게 만드는 방안을 모색할 겁니다. 우리는 그런 소모적인 싸움에 익숙하잖아요. 침략자들이 우리가 서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 우리 모두를 지배하거나 파괴하겠지요. 그래서 유일하고도 진정한 방어는 반복과 시기를 없애고 침략자들에게 최대한 적극적으로 맞설 수 있는 갤럭시아를 건설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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