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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 자서전 - 바람만이 아는 대답
밥 딜런 지음, 양은모 옮김 / 문학세계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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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매년 시월이면 언론에서는 그 해 노벨 수장자의 후보들에 대해 기사를 내놓곤 한단다. 노벨상과 우리나라는 인연이 없는 것이라 관심 밖일 수도 있는데, 몇 년 전부터 고은 시은이 유력 후보 중에 한 명으로 거론되면서, 매년 노벨 문학상의 후보군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 같구나. 하지만, 예상하던 후보군 밖에서 수상자가 나오기 일쑤이고특히 작년에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된 이후 출판사들은 멘붕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어. 왜냐하면 노벨 문학상 수상자 특수를 누릴 수 없는 사람이 수상자가 되었거든.. 수상자가 다름 아닌 음유시인으로 부르는 가수 밥 딜런이었어.. 한참 동안 그가 노벨 문학상을 받을 가치가 있느냐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고 하는데, 미국 음악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 낸 공로를 인정하였다고 하는구나. 아빠도 의외라는 생각을 했지만, 이유가 있으니 수상을 했겠지, 이정도 생각만 했단다. 작년에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졌을 때 밥 딜런의 책을 조회해봤을 때 그가 쓴 자서전 한 권만 조회되었던 기억이 나는구나. 밥 딜런이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그의 책들이 더 출간된 것 같긴 한데... 아무튼... 작년에는 노벨 문학상 특수는 없었어.

아빠도 밥 딜런에 대해서 잘 몰라. 그가 음유시인으로 부른다는 것은 알지만, 아빠가 좋아하는 음악가도 아니기 때문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어. 학창시절에 팝송을 즐겨 듣던 시기도 있었지만, 밥 딜런의 노래를 좋아하지는 않았으니까. 그의 노래 중에 아는 것도 "Knocking on a heaven's door" 하나 뿐이었어. 그래도 그가 노벨 문학상을 탔다고 하니 궁금하긴 하더구나.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말이야. 2004년에 쓴 그의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 그의 히트곡을 제목으로 딴 우리나라 번역서. 원서의 제목은 <Chronicles>이라고 하는구나. 번역서의 제목을 더 멋있게 잘 지은 듯 하구나.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 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은 휙휙 지나서 일년이 흘렀구나. 이 책에 대해 잊고 있다가 너희들과 함께 알라딘 중고서점에 갔다가 이 책을 발견하고, 아 이, .. 읽기로 했었지.. 하면서 구매한 것이란다.

....

 

1.

미국 사람, 다른 시대, 다른 삶,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글을 읽는 건 쉽지 않았어. 자서전이라기 보다, 그의 일기장을 쭉 보는 듯했어. 오랜 전 일들도 자세히 적혀 있는 것 봐서는 분명 어렸을 때부터 일기를 썼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어. 정말 솔직하고 자세하게 적혀 있었어. 이야기도 시간적인 순서도 아니고, 마음 가는 대로 쓴 듯했어.

1941년생의 로버트 짐머만이 이름이 밥 딜런의 본명이란다.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하면서, 예명을 지은 것인 밥 딜런이었고 그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지도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단다... 그는 덜루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고, 히빙이라는 곳에서 자랐대. 1959, 음악을 하고 싶어서 무작정 고향을 떠나 미니애폴리스에 도착을 하였고, 그곳에 살고 있던 사촌이랑 같이 지내면서, 포크 음악을 하려고 했지. 그곳에서 다른 포크 음악을 하는 이들을 만나 같이 연주도 하고, 많은 음악도 들었다고 하는구나. 그는 많지는 않지만 연주를 해서 돈도 벌었대. 거기서 만난 사람으로부터 우연히 우스 거스리의 음악을 듣게 되었는데, 밥 딜런은 우스 거스리의 음악을 듣고 신이 출현하는 것 같다고 했어. 이후 우스 거스리를 우상으로 생각하게 되고, 우스 거스리의 책과 음악에 흠뻑 빠져들었어. 그리고 우스 거스리의 노래만 불렀어. 팬 케이크라는 사람을 알게 되는데, 그가 충고하기를 우스 거스리의 노래만 부른다고 우스 거스리가 될 수 없다고 했어. 이미 많은 뮤지션들이 우스 거스리의 노래를 부르지만, 그를 넘어설 수 없다고 했어. 하지만 밥 딜런은 여전히 우스 거스리를 존경하였고, 그를 만나고 싶어했어.

1961, 무작정 뉴욕으로 왔어. 클럽 <개스라이트>에서 연주를 하고, 그의 명성도 점점 커져갔어. 라디오 포크 음악 쇼에도 출현하고, 사랑도 하게 되었어.. 그가 뉴욕에 있는 민속학 센터에 머무르기도 했는데, 그곳에는 포크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가들이 많아서 그들과 교류하였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많은 책들을 읽을 수 있었어. 밥 딜런은 이때 읽은 많은 책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자서전에 싣고 있는데, 내용들이 자세한 것으로 보아 독후감을 썼던 것 같더구나. 이 때 뿐만 아니라 그는 늘 책을 많이 읽었는데, 이런 것들이 그를 음악가를 뛰어 넘어 시인이 될 수 있었던 밑바탕이 아니었나 싶구나. 이 자서전에는 그의 음악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가 읽은 많은 책에 대한 이야기도 실려 있단다.

 

2.

그는 본격적으로 음악을 직접 만들게 되었는데, 세상 세태를 노래의 소재로 했어. 그가 음악적으로 성장하는데 많은 만남이 있었겠지만, 아빠가 생각하기에 아치볼드 맥클리쉬라는 연극 연출가의 만남이 중요한 만남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구나. 아치볼드와 음악적 견해가 커서 논쟁도 많이 했지만, 그들은 만나면 음악 이야기뿐만 아니라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했어. 아치볼드는 이미 밥 딜런을 시인으로 여겼대.

세상은 그를 음악만 하게 두지 않았어. 1968년을 전후로 미국은 혼란의 시기였고, 전국이 불타는 듯했어. 여기저기 소요도 많았고 말이야. 케네디 대통령, 킹 목사, 말콤 X가 암살당한 것도 모두 1960년대였어. 그래서 그는 그런 세상 세태에 대해 노래를 했지. 그로 인해 세상을 그를 저항시인으로 평가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사건 사고가 있을 때마다 기자들이 그의 집을 찾아왔어. 그런데 정작 밥 딜런은 그것은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라고 했어. 그런 평가에 대해 늘 부담을 갖고 있었어. 어떤 때는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언론이 자신의 작품을 평가하는 것도 부담이었지. 언론은 그를 예언자, 메시아, 구세주라는 명칭까지 주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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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내게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을 지키고 먹여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잘난 체하는 인간들이 나를 대변자라느니 심지어 시대의 양심이라느니 하면서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다. 웃기는 일이었다. 내가 한 일이라곤 새로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고 강하게 표현하는 노래를 부른 것뿐이었다. 나는 내가 대변하게 되어 있다는 세대와 공통적인 것이 별로 없고 잘 알지도 못했다. 불과 10년 전에 고향을 떠났고 누구에게도 큰 소리로 내 의견을 외친 일이 없었다. 앞날의 내 운명은 삶이 인도하는 대로 가게 되어 있었고, 무슨 문명을 대표하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솔직히 이런 상황이었다. 나는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보다는 목동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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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을 과대 평가는 언론들에 대해 맹렬히 비난했단다. 어딜 가나 언론이 문제구나. 그래도 그가 많은 젊은이들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음악을 통해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 아닐까 싶구나.

 

3.

1987년 밥 딜런은 이제 자신의 전성기가 지났다고 생각을 했대. 새로운 것은 없다 후배 음악가들이 자신을 뛰어 넘었다고 생각하던 그 시기.. 그런데 그 즈음, 그는 새로운 영감을 받게 되었대.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음악을 해야 한다는 영감그것은 어느날 갑자기 느꼈다고 했어. 음악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건 그런 것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 그는 그것을 느꼈다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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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고 다차원으로 돌아왔다. 나도 놀랄 지경이었다. 몸이 약간 흔들렸지만 즉시 높이 날고 있었다. 이 새로운 일이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일어났다. 에너지의 차이가 감지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것뿐이었다. 변화가 일어난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에너지는 수많은 각도로부터 왔고, 그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나는 새로운 능력을 가졌고 그것은 모든 다른 인간의 필요조건을 능가하는 것으로 보였다. 다른 목적이 있었다면 그것도 얻었을 것이다. 새로운 연주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30년 이상 공연을 해왔지만 그 단계에 가 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었다.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누군가가 나를 새로 만들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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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음악은 자신의 음악을 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다른 사람들이 했던 음악을 따라 했을 뿐일지도 몰라. 그것이 음악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말이야. 그것은 음악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일 거야. 틀에 잡힌 생각들.. 우리는 대부분 그런 틀 안에 갇혀서 살고 있잖아. 그런데 그 틀이 있다는 존재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살고 있잖아. 밥 딜런이 새로운 영감을 얻고 새로운 음악을 하려는 새로운 열정이 생긴 것은 그런 틀을 깨고 더욱 성장한 것이 아닐까 싶구나. 너희들도 나중에 너희들이 좋아서 하는 것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슬럼프가 오고, 매너리즘에 빠질 때도 있을 거야. 그럴 때는 혹시 일정한 틀 안에서만 즐긴 것은 아니었나 한번 고개를 들어보렴.. 그럼 저 멀리 틀이 보이고, 그 틀 밖에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볼 수 있을 테니 말이야.. 밥 딜런은 다시 한번 열정을 가지고 새로운 음악을 할 수 있었어.

그렇게 새로 깨닫게 된 밥 딜런에게 노래는 무엇이었을까? 그에게 노래는 꿈이었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야. 그리고 그는 이 책을 쓴 2004년까지도 자신만의 음악을 하고, 아마 그 이후에도 꿈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 음악을 하지 않았을까 싶구나.

 

4.

책 뒤쪽에 밥 딜런의 노래 몇 곡을 해석과 함께 실어놓았단다. 우리나라 번역서의 제목으로 뽑은 <바람만이 아는 대답>도 있었어. 원제는 <blowing in the wind>였어. 아빠는 이 노래를 알지 못했어. 그래서 유튜브에서 찾아서 들어보았단다. 책에 있는 가사와 해석을 보면서 들었는데, ()와 같은 노랫말인 것 같구나. 그는 역시 시인이었어.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봐야

Before you call him a man?

진정한 인생을 깨닫게 될까?

 

How many seas must a white dove sail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이 바다 위를 날아봐야

Before she sleeps in the sand?

백사장에 편안히 쉴 수 있을까?

 

Yes, and how many times must the cannon balls fly

전쟁의 포화가 얼마나 많이 휩쓸고 나서야

Before they're forever banned?

영원한 평화가 찾아오게 될까?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다네.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How many years can a mountain exist

산은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나야

Before it is washed to the sea?

씻겨서 바다로 가게 될까?

 

How many years can some people exist

사람은 얼마나 긴 세월이 흘러야

Before they're allowed to be free?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는 걸까?

 

How many times can a man turn his head

And pretend that he just doesn't see?

언제까지 고개를 돌리고 모르는 척 할 수 있을까?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다네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How many times must a man look up

얼마나 많이 올려다 보아야

Before he can see the sky?

진짜 하늘을 볼 수 있을까?

 

How many ears must one man have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Before he can hear people cry?

타인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How many deaths will it take 'til he knows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That too many people have died?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을 알게 될까?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다네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다네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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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그 삶과 음악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1
제러미 시프먼 지음, 임선근 옮김 / 포노(PHONO)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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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클래식을 즐겨 듣지는 않지만, 모차르트는 좋아한단다. 예전에 한때 모차르트만 들었을 때도 있었어. 짧은 삶을 살았지만, 수많은 주옥 같은 음악을 남긴 모차르트. 그는 천재였거나 외계인이었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 그 짧은 삶에 그런 훌륭한 음악들을 그렇게 많이 남길 수 있었겠니. 그래서 예전부터 모차르트의 삶에 어땠을까? 관심이 많았단다. 영화 <아마데우스>가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 속 주인공의 이미지가 모차르트의 이미지를 각인되어 있지 않을까 싶구나. 그리고 예전에람세스의 작가로 유명한 크리스티앙 자크가 소설로 쓴 모차르트( 4)도 읽었단다. 모두 4권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지은이의 상상력까지 가미되어 재미있게 읽었던 생각이 나는구나.

그리고 필립 솔레르스라는 사람의 <모차르트 평전>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은 평전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했어. 지은이의 철학적 지식과 수필이 어우러져 있는 기행문 같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어. 당시 그 책을 읽고 나서, 실망을 하고 모차르트의 다른 책을 읽어볼까 찾아봤던 기억이 나더구나. 그런데, 맘에 드는 책이 없었던 걸로 기억해. 이번에 읽은 책도 의도적으로 구입한 것은 아니냐. 인터넷 중고서점을 둘러보다가 모차르트라서 살펴보았던 것이란다. 지은이 제러미 시프먼이라는 사람은 음악가 평전 전문 작가인가 싶을 정도로 음악가의 전기에 대한 책들을 많이 썼더구나. 베토벤, 차이콥스키 등등지은이에 대해 좀더 알아보니,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가 겸 음악가 겸 교사 겸 방송인 겸 음악 잡지 편집자라고 하는구나. 그래서 읽어보겠다고 구입했어.

 

1.

이 책의 제목을 잘 뜯어보면, 책의 구성을 알 수 있단다. 모차르트, 그 삶과 음악. 책의 제목에 맞게 모차르트의 삶에 대한 이야기와 모차르트의 음악을 장르별로 설명해 주었단다. 소년 시절의 음악, 건반악기를 위한 음악, 교향곡과 합주곡, 극음악, 실내악곡, 합장 음악으로 구분하여 그의 음악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어. 음악은 설명도 좋지만, 감상하는 것만 하겠니? 아빠는 집에서 이 책을 읽을 때는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면서 읽었단다. 오랜만에 모차르트 음악을 집중해서 들어도 참 좋구나. 지금 너희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때도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고 있어.

모차르트의 삶을 이야기해 볼게. 시현이는 얼마 전에 <모차르트> 위인전을 읽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 모차르트의 짧은 삶 동안 유럽 세계를 그리 평화로운 시기는 아니었다고 하는구나. 모차르트가 태어났을 때 시작한 7년 전쟁을 비롯하여 3번의 큰 전쟁이 있었대. 그리고 시대로 개혁과 변화의 시대였어. 로마신성제국의 요제프 2세의 개혁의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로 끝났다고 하는구나. 이런 전쟁들과 시대상이 모차르트의 짧은 삶을 살게 했을 수도 있다고 지은이는 생각하더구나.

모차르트는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일반적으로 부르는 이름이란다. 그리고 모차르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교육열을 가지고 있었어. 음악적 재능이 있다 싶은 두 아이, 모차르트와 누나 난네를을 데리고 음악 여행을 했어. 모차르트가 신동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인데, 동시대 사람들은 어떤 평가를 했을까?  어떤 한 남작이 그를 평가한 것을 한 번 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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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이를 테면 프리드리히 멜키오르 폰 그림 남작도 다른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이렇게 그 어린 영혼에게 정복당했다.

“어디서 이런 아이를 다시 만나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기가 막히게 매력적인 아이입니다. 그 아이의 말씨와 행동은 동심의 순수한 아름다움과 풋풋함이 어우러져 찬란한 생명력과 원기가 넘쳐 흘렀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그 쾌활함은 그 아이가 제대로 영글기도 전에 시들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적정조차 떨쳐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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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먼 길을 여행하다 보니, 여러 가지 병에 걸리기도 했어. 어렸을 때 이런 무리한 여행이 허약체질로 갖게 한 것은 아닌가 싶구나. 잠시 잘츠부르크에 돌아왔다가 육 개월 만에 다시 여행을 떠났어. 이번에는 3년 반이라는 긴 기간 동안의 여행이었어. 독일 남부 지역,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네덜란드 등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콘서트를 했단다. 이번에도 어린 아이들에게 무리한 여행 일정이라서 병에 많이 걸렸대. 누나 난네를은 향수병까지 걸렸어. 아버지 레오폴트는 아이들을 부려먹고 돈만 긁어 모은다고 비난을 받았어. 3년 반 만에 고향에 돌아와보니 모차르트는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어. 고향에 돌아온 지 9개월 만에 다시 빈에 갔다가 1년 만에 집에 왔단다. 이 때 나이가 고작 13살이었어. 그리고 이미 이때 많은 곡들을 작곡을 했단다. 그 어린 소년에게 여기저기 작곡 의뢰가 들어왔는데, 이탈리아 여행에서 오페라 작곡을 의뢰 받기도 했어. 이탈리아 여행에서 교황도 만났고, 14살에 황금박차 훈장을 받기도 했단다.

그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 통제하의 생활이었어. 물론 그의 재능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도 그의 아버지였지만, 모차르트 본인은 행복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게 되더구나.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도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통제와 간섭을 여전히 받게 돼.

 

2.

모차르트가 커 가면서 이성에 눈을 뜨기도 했고, 그것으로 아버지와 갈등을 겪기도 했어. 아버지와 여행을 가지 못하게 되면, 아버지는 모차르트의 엄마를 시켜서 동행하기도 했어. 엄마의 역할은 모차르트를 감시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엄마의 입장에서는 내키지 않은 것이었단다. 모차르트와 그의 엄마는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일과를 자세히 써서 편지로 보내야 했단다. 모차르트는 여행 중 만하임에서 알로이지아 베버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지고, 이를 편지에 썼더니, 아버지는 경악을 했어. 그래서 만하임을 떠나서 파리로 가라고 했어. 모차르트는 알로이지아 베버와 헤어져 파리로 가게 되었어.

파리에서 모차르트와 엄마는 불행한 생활을 했단다. 그 와중에 병이 생긴 엄마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파리에서 죽고 말았어. 그때 모차르트의 마음은 어땠을까? 엄마가 돌아가시고 쓴 편지가 있는데, 모차르트의 상실한 마음이 절절히 적혀 있었단다. 편지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그런데 아버지는 엄마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모차르트에게 돌렸어.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했어.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의 궁중 악사들을 흉보면서, 거기서 그런 궁중악사는 하기 싫다고 했어. 아버지는 모차르트의 의견을 무시하고 반협박을 해서 결국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단다. 오는 길에 만하임에 들렀지만, 사랑했던 알로이지아는 이미 뮌헨으로 떠났고, 다른 이와 결혼했다는 소식이었어. 쓸쓸한 귀향길이었단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너무 무책임한 것 같고, 아이들에게 모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빠가 생각하기에, 모차르트 엄마의 죽음은 아버지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해. 그런데, 자신은 옳고, 다른 이는 잘못이라는 생각.. .. 위험하고 무책임한 생각이야. 잘츠부르크에 돌아온 이후 18개월의 생활은 무미건조한 생활이었대. 이때 모차르트의 관심은 극음악이었던, 그것은 잘츠부르크에서는 없었어.. 이때 빈의 대주교로부터 연락이 와서 빈에서 생활하게 되는데, 대주교와 갈등으로 해고되었어. 아버지는 다시 복직을 하라고 했지만, 모차르트는 거절했어. 이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로 했어. 그만한 나이도 되었고. 모차르트는 여러 가지 음악활동을 하기 시작했단다.

모차르트가 있는 빈에서 예전에 사랑했던 알로이지아를 만났는데, 알로이지아는 이미 결혼을 했고, 그들은 친구로 다시 만났어. 모차르트는 알로이지아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알로이지아의 여동생 콘스탄체에 끌리게 되고, 그녀와 결혼하게 된단다. 아버지와 갈등은 있지만, 그래도 아버지에게 편지를 계속 썼고, 아버지는 무응답.. 결혼도 아버지의 허락 없이 했어.

오페라를 작곡하면서 <후궁 탈출> 등 성공적인 작품도 많았어.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아이를 낳았어. 이제 그에게도 행복한 시간이 찾아오는 것일까? 모차르트는 그제서야 가족들을 데리고 잘츠부르크에 갔어. 아버지와 화해하려고 했지만, 아버지는 그 손길을 받지 않았어. 그런 사랑을 받지 못해서였는지, 모차르트의 아들은 태어난 지 9주 만에 죽고 말았단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 사이에는 네 아이가 있었지만, 모두 죽고 한 아이만 살았대.

빈에서 계속 생활했어. 어느 날 아버지의 죽음 소식이 전해졌어. 끝내 아버지와 화해를 하지 못했어. 아빠가 생각하기에 모차르트와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 사이의 갈등은 레오폴트의 잘못이 더 크다고 생각해. 그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통제와 책임을 강요했던 거야. 이 책의 지은이의 아래와 같은 평가에 공감이 가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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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113)

언제나 그는가족이라는 단위에 방점을 찍었다. 어린 모차르트를 데리고 연주 여행을 돌아다니던 시절과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자기는 오로지 아들의 성공을 위해 헌신적으로 돈을 쏟아 부었으며, 그 결과 경제적으로 말할 수 없이 쪼들리게 되었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모차르트에게는 죄의식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실은 레오폴트는 자식들 덕에 한 재산을 벌었으며 그 대부분을 여기저기에 빼돌렸고, 그러면서도 남들에게는 쉬지 않고 돈이 없다고 불평을 해댔던 것이다. 레오폴트는 심리전의 명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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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적 활동으로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경우도 있는데, 콘스탄체가 임신을 하고 있거나 몸이 안 좋을 때도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어. 당시의 유럽 환경이 그리 위생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아. 모차르트 본인도 늘 크고 작은 병에 시달렸어. 가족과 자신의 건강 등으로 오페라 제안을 거절하기도 했어. 그리고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레퀴엠>. 어떤 귀족의 익명으로 의뢰하여 만들게 된 작품. <레퀴엠>은 진혼곡으로 보통 해석이 되고,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음악을 말해. 이 때 모차르트는 병을 심하게 앓고 있었는데, 이 곡을 결국 마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고 하는구나. 자신의 <레퀴엠>이 된 것이지. 마지막 작품이 <레퀴엠>이다 보니, 그의 인생은 더욱 극적인 것 같구나. 그리고 그 레퀴엠이 의뢰한 사람이 누군지 모르다 보니, 그의 사후 독살설이라는 등 여러 가지 소문이 돌았대. 그리고 그의 죽음의 수수께끼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나 소설 등에서 다루고 있었어. 모차르트가 미완성한 레퀴엠은 다른 사람이 나머지 부분을 완성했다고 하는구나.

 

4.

이 책을 읽고 나서, 아빠가 너희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잘 안 들려 주었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그래서 일상에서 들어 귀에 익숙한 음악들을 들려주었더니 너희들도 좋아하는구나. 그 노래 속에는 모차르트의 음악도 포함되어 있었지.. 앞으로는 너희들에게 클래식음악을 더욱 자주 접할 수 있도록 해야겠구나. 그리고 아빠도 그동안 모차르트 음악을 안 들었는데, 다시 모차르트와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너희들도 모차르트를 좋아했으면 좋겠구나.

 

(29)
모차르트는 알았을 리가 없지만 트럼펫은 이 세상 어느 인간 집단에서나 강력한 남성, 더 나아가 남근을 상징했다.(아직도 그런 지역이 많이 남아 있다) 다시 말해 꿰뚫는, 공격적인 독재적이고 위협적인 속성의 상징이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없지 않은 것이, 트럼펫은 어느 나라에서나 군대를 집합시키거나 적을 위협하기 위해 고안된 군악기이다. 18세기 유럽 음악, 특히 바로크 음악에서는 왕의 영광을 찬양하는 음악에서 가장 도드라진 악기로 쓰였다. 모차르트의 트럼펫 공포와 아버지에 대한 공포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면? 그의 어린 시절 모토는 ‘하느님 다음은 아빠’였다. 성인이 된 뒤에도 스트레스로 힘겨울 때면 종종 그 모토를 읊조리곤 했다. 하느님이 그러하듯이 아버지도 베풀기도 하고 거두기도 하는 존재였다. 그게 아버지의 주요한 교육 기법 중 하나였다. 모차르트에게 스승이라고는 오로지 아버지 한 사람밖에 없었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는 아이들을 학교 문전에도 데려가지 않고, 또래와의 우정을 거의 박탈한 채로 키웠다.

(134)
모차르트는 헨델 이래로 후원자라는 족쇄 대신에 자유를 선택한 첫 위대한 작곡가였다. 그는 오케스트라와 독주자를 함께 해방시켜 그들이 서로 끊임없이 대화하게 만든 첫 작곡가로 불려 마땅하다. K.271에 나오는 대화는 그 수준과 내용이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관악 파트(오보에와 호른)를 음악적 대화의 일선에 내세운 것도 마찬가지이다.(첫 악장 알레그로에서 오보에와 피아노가 나누는 대화는 이런 매력적인 자리바꿈의 첫 시도이다.) 이때부터 그는 협주곡에서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관악 밴드에게 이중의 역할을 주었다. 그 하나는 오케스트라라는 팔레트 위에서 색조를 혼합하는 마법의 중개자 역할이고, 또 하나는 독주자와 오케스트라 사이의 조정자 역할이다. 다수에 둘러싸인 독주자를 아우르고 각 파트를 하나의 위대한 전체로 연합해나간 것이 모차르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이다.

(169)
이 헌정의 편지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한 가지 특징은 모차르트의 ‘힘든 고생’에 대한 언급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은 모차르트가 그 어떤 일에도 힘들여 고생할 필요가 없었으며, 그저 음악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고 여겼다. 마치 모차르트는 하느님의 물길을 열어준 도랑이나 도구적인 존재였다는 듯이(언제나 악전고투하며 창작에 임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베토벤과 대조적이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이기도 했지만 비범하게 조직적인 두뇌의 소유자이기도 했으며, 따라서 사실상 모든 작곡 행위가 머릿속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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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예전에 본가, 그러니까 너희들 할아버지와 할머니 집에 가게 되면 가끔씩 들르는 곳이 있었단다. 파주출판단지에 아름다운 가게에서 운영하는 보물섬이라는 헌책방이었어. 헌책방은 비단 싼 가격으로 책을 살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는 것은 아니야. 헌책방에 한참 둘러보다 보면 아빠가 미처 알지 못했던 좋은 책들과 작가들을 알게 되는 행복이 있어. 그야말로 숨겨져 있던 보물을 얻는 기분이었어.. 보물섬이라는 헌책방 이름을 참 잘 지은 것 같구나. 그 보물섬에서 김수영 작가에 관한 책을 하나 산 적이 있어. 아빠가 당시 양장본 책을 유달리 좋아해서 양장본에 선뜻 눈이 갔었거든. 양장본의 우수에 찬 포즈의 김수영이라는 작가의 얼굴이 끌렸어. 그때는 김수영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지. 그렇게 산 김수영에 관한 책은 책장에 한 자리를 차지하였지만 읽지는 않았어. 사실 엄두가 좀 나지 않았어. 아빠가 김수영이라는 사람을 잘 알지도 못했고, 책이 워낙 전문서적처럼 보였거든. 그 책의 정체는 문광훈이라는 분이 쓴 <시의 희생자 김수영>이라는 책이야. 나중에 김수영이라는 시인의 책을 한 번 읽어보고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지.

그리고 그 이후, 한참 시간이 흐르고녹색평론에서 김수영을 한 꼭지로 다루었는데, 그때서야 김수영이 4.19혁명 때 저항시인이었다는 것을 조금 알게 되었어. 그리고 정재찬의 <시를 잊은 그대에게>에서 김수영의 멋진 시 한 편을 알게 되었어. <우선 그 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라는 시였어.. 이렇게 다른 책들을 통해서 우연히 김수영이라는 시인의 자취를 조금씩 알게 되었고, 그럴 때마다 그 책이 생각이 나서 읽어 보려다가좀더 읽기 쉬운 책 먼저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다 검색을 하다 보니, 몇 년 전에 강신주가 김수영에 관해 쓴 책이 있더구나. 강신주. 예전에 아빠가 그의 책 <강신주의 감정수업>을 너무 잘 읽고 나서 그의 다른 책들도 몇 권 더 읽었었거든. 강신주의 자유로운 영혼을 부러워했고, 그의 글발을 좋아하게 되었지. 그런 강신주가 아빠가 궁금해하던 김수영의 관한 책을 썼다? 읽어봐야겠다 싶었어. 책의 제목은 <김수영을 위하여>. 책 제목도 한번 잘 뽑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읽고 난 소감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라고 하면강신주가 어떻게 그런 자유로운 영혼을 갖게 되었는지 알겠더구나. 강신주는 김수영을 정신적 아버지라고 생각할 만큼 존경하였다고 하는구나. 그런 김수영의 삶은 그저 저항시인으로 표현하기에는 위대하고 더 컸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시인 김수영은 진정한 자유를 꿈꿨고, 그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 시대에 저항할 수 밖에 없었던 거야. 그 이야기가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단다. 이 책은 몇 년 전에 강신주가 김수영에 관한 강좌를 열었었는데, 그 강좌를 정리한 책이란다. 아빠가 이 책을 읽을 때 어떤 부분은 집중해서 읽고, 어떤 부분은 건성으로 읽었어. 건성으로 읽을 때는 글이 어렵게 느껴졌지만, 집중해서, 간혹 메모도 하고 꼼꼼하게 읽을 때는 뭔가 꽉 찬 느낌이고, 아빠의 영혼에도 차곡차곡 무엇인가 채워지는 기분이었단다.

 

1.

이 책에서 참 많은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결론을 한 단어로 이야기하자면 바로자유란다. 우리는 지금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대부분은 자유를 누린다고 이야기할 거라 생각한단다. 강신주는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강연을 하면서 “김일성 만세라는 시를 읽어주면 대부분 대학생들이 불편해 한다고 하는구나. 그 시는 이런 시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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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어서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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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도 불편하게 느껴졌단다. 그런데 이 시는 50여 년 전에 김수영이 쓴 시라고 하는구나. 이 시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자유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체제 안에서 제한적으로 누리는 자유라는 것을 깨우치게 하고자 지은 시라는 구나. “김일성만세”를 보고 불편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는 제한적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야. 그런 자유는 조선시대 규방 안에 있는 여인의 자유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거야. 그에 반해 시인 김수영은 진정한 자유를 노래했어. 그런 진정한 자유를 표현하는 것이 시라고 생각했어. 그러면 시인은 어떤 사람을 이야기하는가? 시인은 평범한 사람과 달라야 하며,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려는 사람을 시인이라고 했어. 그렇게 자시만의 목소리를 내다 보니 세상과 불화는 필연적이었던 것이야. 이것이 바로 시인의 가장 큰 덕목이라고 생각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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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이제 더욱더 궁금해진다. 김수영은 가슴에 어떤 이상을 품고 살았던 것일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김수영은 시인이 되려고 했고, 시인으로 살고자 했다. 다시 말해 김수영의 이상은 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시인이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지금부터 차근차근 시인이란 어떤 사람인지 숙고해 보도록 하자. 무엇보다도 먼저 시인은 평범한 일반 사람과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다. 일반 사람은 관습이나 교육에 따라 사물이나 자신을 이해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들이 세계와 불화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미 세계가 조율한 대로 소리를 내니, 타인이나 사회와 불화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 사람이다. 물론 이것이 가능하려면, 시인은 투철한 자기 이해에 이르러야만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관습의 목소리나 타인의 목소리를 자신의 목소리에서 추방할 수 있고, 나아가 잃어버린 자신만의 목소리를 되찾아 노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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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은 어떻게 이런 자유를 신봉하게 되었고, 자유를 노래하는 시인이 되었을까?

 

2.

1921년생인 김수영은 태어났어. 그리고 1941년 친구의 여동생을 짝사랑해서 그를 쫓아 일본 유학을 갔대. 하지만, 그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어. 다시 귀국한 그는 1950 4월 이화여전 출신의 김현경과 동거를 시작했어. 결혼식만 올리지 않았지, 결혼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어. 그에게 행복한 시간의 시작이었어. ... 1950 4월은 우리나라 현대사에 있어 가장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기 직전이었어. 그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어. 6,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의용군에 강제 징집되었단다. 그곳에서 도망을 쳤지만, 다시 붙잡혀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도망을 쳤어. 서울에 왔다가 이번에는 의용군이라면서 경찰에 붙잡혀 집에도 가보지 못하고 바로 거제포로수용소로 끌려갔어. 집에는 연락도 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김수영은 2년 동안 지냈어. 이 거제포로수용소의 강력한 억압을 통해 그는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2년이 지나고 서울 집에 왔는데, 아내 김현경은 생사를 모르는 남편은 둘째 치고, 아들 준까지 시댁에 맡기고, 김수영의 친구인 이종구와 재혼을 해서 부산에서 살고 있었어. 김수영은 심한 배신감에 빠지고, 부산에 내려가 김현경을 만났지만, 김현경은 김수영을 따라오지 않았어. 김수영은 다시 서울에 올라왔어. 그러다가 포로수용소 간호사였던 노봉실과 사랑에 빠졌어. 그런데 노봉실은 이미 유부녀였고, 노봉실은 선을 넘지 않고 지켰어. 그 와중에 1954년 김현경이 돌아왔어. 하지만, 그 이전의 사랑을 회복하지 못하고, 형식적인 부부생활을 했어. 자유의 영혼을 정착한 김수영은 김현경을 끝내 용서하지 못한 것이야.

그리고, 19686 16일 동료 문인들과 술을 먹고 크게 취해서 늦은 시간 집에 가다가 교통사고로 젊은 나이에 운명하고 만단다.

 

3.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자유에 대한 예찬이란다. 자유와 비슷하게 쓰인 말들로 단독성, 포즈, 자신만의 제스처 등으로 표현했어. 혹시 그 차이가 있다고 하면 아빠가 잘못 이해한 것이란다. 아빠는 같은 것으로 이해를 했거든. 책에서 위 단어들을 자주 나오는데, 그것을 자유로 받아들여도 된단다. 그는 자유롭기 때문에 비판도 솔직하게 했어. 당대 동료 시인들을 평하기도 했는데, 아주 가혹한 평이더구나. 다른 동료 시인들이 그를 싫어하기에 충분한 혹평들이었어. 김수영이 시를 보는 기준은 자유의 회복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시인들을 혹평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가 바라보는 시와 다른 시인들이 바라보는 시가 달랐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왜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정한 자유를 모르는 것일까? 제한적 자유를 누리면서 자유를 누린다고 이야기할까? 그것은 교육 때문이라고 하는구나. 교육은 단독성을 개화시키기보다는 기성세대가 신봉하는 가치를 주입하는 것으로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야. 그걸 깨닫고 단독성을 회복하려고 하면 탄압을 받게 된다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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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불행히도 모든 교육은 단독성을 개화시키기보다는 기성세대가 신봉하는 가치를 주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단독성을 회복하려는 순간, 당연히 가정이든 학교든 군대든 회사든 권력을 쥔 자들로부터 탄압받기 마련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생긴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이로부터 스스로 단독성을 부정하는 개인들이 탄생한다. 외적인 탄압과 억압이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너무나 두렵기 때문이다. 자신과 똑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나면 불쾌하게 느끼는 사람들과 달리, 이런 불행한 개인들은 오히려 타인이 자신과 같은 옷을 입고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기 쉽다. 그들이 유니폼, 즉 동일한 형식을 즐기는 것은 이런 이유인지 모른다. 결국 이들은 자신의 제스처를 버리고 권력이 허용하는 제스처를 취해서 자신의 단독성을 은폐하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시를 싫어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시는 자신들이 애써 은폐하려던 단독성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시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들은 조금씩 자신이니까 살 수 있는 삶, 자신이니까 느낄 수 있는 감성, 자신이니까 생각할 수 있는 사유를 영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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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학교에서 자유를 방종과 구별해야 한다고 배웠던 기억이 있단다. 책을 읽으면서 강수영이 이야기하는 자유와, 아빠가 생각한 것은 방종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이지?라는 의심이 계속 갔어. 김수영은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라고 했어. 사랑이 아닌 자유는 방종이라는 것이지. , 그가 자유 다음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나 싶구나. 비록 아내 김현경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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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

“자유의 방종은 그 척도가 기준이 사랑에 있다는 것만을 말해 두고 싶습니다.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자유는 여하한 행동도 방종이라고 볼 수 없지만, 사랑이 아닌 자유는 방종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호흡입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에도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사회환경에서는 여간 조심해서 보지 않으면 분간해 내기가 어렵습니다. 사랑이 순결하면 순결할수록 더 그렇습니다. 기도가 눈에 보이지 않듯이 사랑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자유의 방종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세우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사회에서는 백이면 백이 거의 다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의 자유가 사랑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를 방종이라고 탓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요즈음 느끼는 일>(19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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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 책은 김수영의 시와 산문을 많이 발췌하여 싣고 있단다. 그 발췌하고 싶은 글들이 상당히 많았어. 그 시와 산문들은 모두자유를 주제로 하고 있어. 이 책에 김수영의 글들 중에서 일부러 그런자유에 관련된 글들만 실은 건지, 아니면 김수영의 모든 글에자유라는 색깔이 칠해져 있는지는 모르겠구나. 아무튼,, 강신주는 김수영을 통해 초지일관 자유를 이야기하고 있단다. 그가 1961년에 발표한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시를 보면, 팽이를 통해 고독한 자유 정신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있어. 팽이는 혼자 자유롭게 평면에 돌아야 잘 돌잖아. 그런데 평면이 아니라면 돌 수 있는 힘이 있다 해도 저항이 생기잖아. 자유를 누릴 마음이 있어도, 세상이 그것을 막는다면 저항이 생기는 것을 팽이에 빗대어 노래한 것이란다.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시의 전문은 아래와 같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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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나라의 장난

                 -김수영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都會) 안에서 쫓겨 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小說)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生活)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餘裕)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別世界)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 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壁畵)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運命)과 사명(使命)에 놓여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放心)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記憶)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數千年 )의 성인(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

김수영은 이 시를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일까? 이 시에 대한 강신주의 설명은 이렇다.

===============================

(185-186)

모든 돌고 있는 팽이는 자시만의 중심을 가지고 돈다. 그런데 두 팽이가 마주친다는 것은, 어느 하나가 다른 팽이의 회전 스타일을 수용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허망하게도 팽이는 쓰러지고 만다. 팽이만 그런가. 인간도 마찬가지 아닐까? 자기만의 스타일로 살지 못하고 남의 스타일을 답습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 내지 못한다. 김수영의 말대로생각하면 서러운일이다. 보통은 인간이 고독하기 때문에 누군가와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거나 완성되기 위해 지혜로운 사람이 교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통찰이 옳다면, 이게 우리는 누구에게 기대서도 안 되고, 누가 기대는 것을 용납해서도 안 된다. 오직 철저하게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채찍질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삶을 마무리해야만 한다.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되기 때문이다.

===============================

사실 강신주의 설명이 없었다면, 아빠는 이 시를 통해서 그런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못 찾았을 것 같구나. 강신주는 또 이야기한단다. 시인은 자유를 노래하기 때문에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김수영은 7할의 고민과 3할의 시화가 행동이었대. 그런데 예술파 시인으로 부르는 사람들은 7할의 고민, 즉 사상이 없었다고 비판했대. 당시에 순수 문학과 실천 문학이 대립하는 양상도 보였는데, 실천 문학에 있던 그었지만, 순수 문학뿐만 아니라 참여파 시인도 비판을 했다는구나. 당시 참여파 시인들이 너무 투박한 나머지, 민족주의와 민중중의에만 근거를 두었다는 거야. 그게 뭐가 문제냐고? 강신주는 그 민족주의와 민중중의 또한 자유를 누리는데 제한이 된다는 것이었지.

강신주는 시인이란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많이 했어. 시인은 자유를 노래라는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뿐만 아니라 시인은 좋은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를 형식을 부정해야 한다고 했어. 그는 참여파 시인들이 그들 내부의 잠복해 있는 지배욕을 극복하는데 실패했다고 이야기했어. 그렇게 양쪽을 비판하면서도, 그래도 시인은, 모두 자유를 노래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어. 그리고 시인은 각자 가진 경향을 긍정하면서 내용이나 형식에서 모두 자유를 충족하는 시를 쓰려고 노력하면 된다고 했어. 시인의 최고 긍지는 자유이기 때문에 현실과 불화는 불가피했던 것이고 시는 형식이 없어야 한다고 했어. 진정한 시는 절대성과 단독성을 가져야 한다고 그는 이야기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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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 <시여, 침을 뱉어라>(1968.4)

===============================

 

5.

간혹 문학과 삶은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런 오해를 만든 것은 문학자 자신들이라고 강신주는 이야기하면서, 문학의 본질은혁명이란 이념민족이나 인류의 이념에 있다고 덧붙였어. 여기서 혁명이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의 힘을 얻는 것을 이야기했어. 문학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의 정치이데올로기를 피력은 하는 것은 배신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가능한 것이라고 했어. 왜냐하면 표현의 자유가 있으니까 말이야. 어떤 사회가 하나의 정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고, 권력은 자신이 신봉하는 이념과 사상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시인이라면 침묵할 수 없다고 그는 이야기했어. 그가 비록 50년 전의 당시 상황을 빗대 이야기한 것이지만, 오늘날에도 그런 정치가 문화를 탄압한 일이 불과 얼마 전까지 있었단다. 최근 속속 드러나고 있는 MB정권부터 이어진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 그 더러운 권력들은 시민의 힘의 위대함을 몰랐단 말인가? 그들에 대한 처벌은 공정하고 엄정하게 이루어지길 바라고 기도하고 있단다. 그리고 그 권력이 심어놓은 썩은 내 진동하는 씨앗이 아직 방송국들을 장악하고 있단다. 아직 언론 권력은 적폐 세력이 그대로 점령하고 있는 것이야. 최근 벌어지고 있는 마봉춘, 고봉순의 파업에 절대 지지한단다.

.

김수영이 꿈꾸는 세상.

앞서도 여러 번 이야기했듯이 자유 그 자체였어. 인간의 자유를 불온하다고 보지 않는 세상. 자시만의 삶을 살아내려는 의지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바라보는 세상. 이것이 그가 꿈꾸는 세상이란다. 사랑이 가득한 집안은 침묵할까? 늘 시끄럽고 야단법석일까? 당연히 늘 시끄럽겠지. 나라도 마찬가지야. 자기만의 삶을 살다 보면 시끄럽겠지. 그것을 저항이라고도 하지만, 그건 바로 자유의 소리인 것이란다.

이 책을 읽고 아빠도 아빠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제한적 자유였다는 점을 인정해야 했단다. 그리고 좀더 유연한 생각으로 자유의 폭을 넓혀볼까 싶다가도 소심한 아빠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싶기도 한단다. 지은이 강신주가 김수영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철학전공을 하면서 자신이 이상과 현실이 상충할 때였다고 하더구나. 그때 김수영을 처음 알게 되고, 이후 김수영은 그의 정신적 멘토가 되었대.

, 이제 김수영의 책을 읽어봐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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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테슬라 - 신과학 총서 4
마가렛 체니 지음, 이경복 옮김 / 양문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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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들국화의 노래 중에비교는 바보들의 놀이라는 가사가 있단다. 비교는 나 자신만 힘들게 해서 아빠는 될 수 있으면 비교를 하지 않는데, 니콜라 테슬라를 이야기하려면 토마스 에디슨과 비교를 해야 할 것 같구나. 이 비교는 니콜라 테슬라를 더 이해할 수 있는 비교라고 생각해. 어린 시절 위인전에 꼭 빠지지 않았던 토마스 에디슨에 비해 니콜라 테슬라는 어린 시절 읽던 위인전에서 만나기 힘든 인물이었단다. 최근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인터넷 서점에서 니콜라 테슬라로 검색을 하면 몇 권 안 나와. 그나마도 어른용이 대부분이고, 어린이용으로 나온 것은 학습만화 한 권뿐이더구나. 그런데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만 그런 것이 아닌가 봐. 이 책의 지은이 마가렛 체니라는 사람도 이 책을 쓰기 전까지 니콜라 테슬라에 대한 책이 거의 없었대. 그리고 자신이 니콜라 테슬라에 대한 책을 쓰려고 했는데, 자료 구하기도 무척 힘들었다고 하더구나. 그 이유를 니콜라 테슬라의 성격이나 생활습관 때문이라고 했어.

테슬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활을 고집했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일도 대부분 혼자 했고, 어떤 단체에 가입하지도 않았고,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았대. 그런 이유로 그에 대한 정보도 적고 사람들에게 덜 알려진 것 같아. 아무튼 에디슨보다 그리 유명하지는 않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 테슬라가 에디슨보다 더 똑똑하고 위대한 발명가라는 것. 그들이 비교 대상이 되었던 것은 아무래도 전기 방식을 놓고 직류 시스템과 교류 시스템으로 상반된 방식을 주장해서 그랬을 거야. 그리고 교류 시스템이 우수하고 장점이 많았기 때문에, 니콜라 테슬라가 만든 교류 시스템이 널리 퍼지게 된 거야. 그것은 니콜라 테슬라의 단편적인 업적이란다. 이론으로 바탕으로 한 그의 상상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단다. 그 당시 그는 이미 놀랍게도 스마트폰을 예견하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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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

“그 다음에는 주머니에 넣고 다닐 만큼 싸고 간단한 장비가 등장해 전 세계의 소식이나 원하는 정보를 전해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모든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거대한 두뇌로 바뀔 것이다. 수백만 개의 장비들을 100마력짜리 발전소 하나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거의 무한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이것은 정보의 전달이 더욱 싸고 대량으로 이루어지도록 촉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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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쓰여진 것이 1981년이고,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된 것이 2002년이었단다. 당시에도 스마트폰이라는 말 조차 만들어지기 전이었지. 그런데 그가 이야기했던 그 주머니 속의 장비는 현실이 된 세상이 되었단다. 그야말로 100년을 앞서 살았던 니콜라 테슬라.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간단히 이야기해줄게. 그가 연구는 더욱 간단히 이야기해줄게. 그가 한 연구는 기술적인 내용이니, 괜히 이야기했다가 오류 가득할 테니 말이야..

 

1.

1856 7 9일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났어. 어렸을 때부터 이것저것 발명하고 실험하는 것을 좋아했다는구나. 우산으로 나는 시험을 했다가 다치기도 했대. 어린 시절을 형을 따르고 좋아했는데, 그 형이 갑작스럽게 죽었는데, 그 이후 악몽에 시달릴 때도 있었고, 나중에 병적인 강박증이나 강박관념이 생긴 것도 어린 시절 겪은 형의 죽음이 영향을 주었을 거라고 하더구나. 테슬라도 어린 시절에 중병을 앓기도 했는데, 아플 때 마크 트웨인의 책들을 읽었다고 하는구나. 그 때부터 마크 트웨인의 책을 좋아했는데, 나중에 25년 뒤에 직접 만나고 마크 트웨인이 죽을 때까지 친분을 유지했다고 하는구나.

1875년 오스트리아에 있는 종합기술학교에 입학한 테슬라는 전기 장치에 푹 빠지게 된단다. 그래서 그와 관련된 물리학, 수학, 역학 공부를 열심히 했어. 머리는 좋고, 돈은 없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그 좋은 머리로 도박을 하다가 걸려서 학교에서 쫓겨나기도 했단다. 그러다가 에디슨이 차린 회사의 파리지사에서 일하게 되었어. 거기서 테슬라는 이미 교류유도모터를 창안했어. 그 파리지사에 테슬라의 능력을 눈여겨본 에디슨의 지인이 있었어. 그래서 추천서를 써주었고, 테슬라는 추천서를 들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단다. 에디슨을 만나러그의 나이 스물여덟 살 때였어.

 

2.

미국에 도착한 테슬라는 에디슨을 찾아갔어. 당시 에디슨은 직류시스템으로 전기를 공급하는 등 여러 가지 전기 장치로 돈을 많이 벌고 있는 발명가이자 사업가였단다. 에디슨은 테슬라를 처음 봤을 때 탐탁지 않게 생각했어. 발전기 수리를 맡겼는데, 아주 깔끔하게 고치는 것을 보고 능력을 인정하기는 했어. 에디슨은 직류시스템으로 전기 공급하기는 했는데, 잦은 고장으로 고생을 하고 있어. 테슬라는 이미 교류시스템에 대한 방안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에디슨에게 제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어. 사장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지, 지은이의 말에 따르면 에디슨은 테슬라처럼 지적이고, 이론적으로 실력을 갖춘 사람들을 싫어했대. 그래서 테슬라를 대하는 태도가 좋지 않았대. 결국 테슬라는 에디슨과 갈등이 고조되어 회사를 그만두었단다.

그러면 전기를 공급하는데 있어 교류시스템이 좋을까? 직류 시스템이 좋을까? 현재 전세계로 일반 전기 전송을 직류로 하는 곳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단다. 전기를 전송하는데 있어 교류시스템이 더 낫단다. 그 이유는 교류시스템은 훨씬 큰 전압을 만들 수 있어서 아주 먼 거리까지 전기를 전송할 수가 있고, 쉽게 직류로 바꿀 수 있어. 그러나 직류시스템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발전소를 많이 만들어야 했어. 하지만, 에디슨은 결국 자신의 주장을 굳히지 않았단다.

 

3.

테슬라는 투자자들의 지원을 받아서 전기조명 회사를 차리긴 했지만, 당시(1886) 미국 경제 침체기이기 때문에 회사 사정도 어려웠어. 그러다가 웨스턴 유니온 전신 회사의 경영자 A.K.브라운을 만나고, 브라운의 도움으로 테슬라 전기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어. 그리고 교류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발전기, 모터, 변압기를 차례로 개발했어. 그는 이런 제품 개발뿐만 아니라 학자로서 강의도 했었대. 테슬라에게 그런 강의에 대한 소질도 꽤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가 했던 강의들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유명해지게 되었고, 당시 미국의 유력한 사업가인 웨스팅하우스가 그를 찾아왔어. 웨스팅하우스와 함께 교류를 이용한 전기 공급을 시작했어. 이때부터 본격적인 에디슨의 직류와 웨스팅하우스/테슬라의 교류가 맞닥뜨린 거야. 에디슨은 교류의 위험성을 이야기하려고 코끼리 등도 죽이는 시범을 보였다고 하는구나. 알을 품어 병아리를 부화시키려고 했던 그 에디슨이 맞나 쉽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교류 시스템의 장점으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대. 그러니 에디슨의 입장에서 보면 테슬라가 얼마나 미웠겠니.

테슬라의 아이디어는 당대에는 황당하게 생각되는 것도 많았대.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그는 이미 무선통신을 생각하고 있었고, 번개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기상을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대. 그리고 지구 대기권에 있는 전리층을 이용하여 지구 전체를 밝게 빛나게 할 수도 있다고 했어. 이 책의 지은이는 테슬라의 꿈은 유토피아라고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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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테슬라의 꿈은 한마디로 유토피아였다. 지구를 굶주림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세계 곳곳으로 통신을 가능하게 하며, 기상을 조절하고, 충분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꺼지지 않는 빛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다른 행성에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있는 생명체와 연락하는 것 등이 바로 테슬라가 실현시키고자 했던 이상이었다. 테슬라는 통계적으로 확실히 화성인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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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보면 구현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 것들도 있지만, 테슬라 이후에 테슬라의 아이디어가 현실이 된 것이 꽤 많다고 하는구나. 그는 라디오 방송 원리에 대한 강연을 이미 1893년에 했고, 무선 통신 시범을 보이기도 했대. 박람회에서는 교류시스템 등 자신의 발명품을 전시해서 큰 인기를 끄기도 했어.

이렇게 유명해지다 보니 상류사회의 모임도 자연히 참석하게 되었어. 하지만 평생 독신이었던 테슬라는 진실로 사랑한 여인은 없었대. 그래서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대. 친구의 아내 캐더린의 적극적인 대쉬가 있기도 했지만, 테슬라는 끝까지 선을 지켰단다. 어쩌면 안 좋아했을 수도 있겠지… 테슬라에게는 오직 전기에 대한 연구가 삶의 이유였던 것 같아. 어렸을 때부터가 그가 가지고 있던 꿈이 있었는데 그걸 드디어 이루게 되었단다. 그것은 바로 나이아가라 폭포에 발전소를 건설하는 것이었어. 그것도 모두 교류시스템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란다. 이제 온 세계 언론이 테슬라를 극찬하고 있었어..

 

4.

그는 사업가 기질은 없었던 것 같아. 그는 성공은 했지만, 돈은 많이 모으지 못했단다. 뉴욕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연구와 실험만 했단다. 테슬라의 기준으로 봤을 때 행복한 시절이었지. 그런데 안 좋은 일도 생겼어. 실험실 자재를 보관하던 6층 건물이 무너져서 무선 통신 장비, 무선 에너지 전송에 관한 그의 장비들이 모두 망가지고 말았단다. 이 일은 심적 상태에 큰 상처를 주었고, 재정적으로도 파산 상태까지 가게 했어. 다행히 아담스라는 사람이 지원을 해주어 다시 무선통신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어. 뿐만 아니라 X레이를 연구하고, 방사능에 대한 위험한 실험들도 했다고 하는구나. 그가 한 연구들을 보면 과연 100년 전에 한 연구들인가 싶기도 하더구나. 앞서 이야기했던 무선 통신 뿐만 아니라, 무선 리모트컨트롤에 대한 특허를 냈고, 무선 전력 송신을 연구했어. 무선 전력 송신이 가능해지면 전선 없이 전기를 전달하게 되는 거겠지. 그는 아마 전봇대의 전선을 보면서, 돈도 많이 들고, 미관상에도 안 좋으니 무선으로 보내면 좋겠다고 생각했겠지. 무선 통신을 이용하면 화성과 통신도 가능하다고 생각했어. 그는 로봇도 만들었어. 무선 원격 장치를 이용하여 잠수함도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실제로 작은 기계를 만들어 무선으로 움직이는 것을 시범을 보였대. 그가 무선 통신을 하고 무선 에너지를 전송하겠다고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그가 발명한 교류시스템에서 발견한 고주파를 이용하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고주파와 교류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해서 테슬라 코일을 만들기도 했단다. 그 테슬라 코일을 기반으로 무선 에너지 전송을 위한 공진 변압기를 만들었어. 이 실험을 위해 그는 콜로라도에서 실험을 했는데, 그가 만든 고전압을 만들어내는 발전기 때문에 스프링스 발전소에 불이 나기도 했대. 그가 하는 실험과 연구는 당대에는 필요 없어 보이는 것들도 있었어. 그렇다 보니 실험으로 돈을 탕진하고, 투자자는 없고, 어려운 삶을 살았어. 그래도 특허를 많이 썼는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 그런데 그는 특허를 헐값에 주변 사람들한테 넘겼대. 재정이 어려워서 그의 회사에서 일하던 직원들도 뿔뿔이 흩어졌어.

그가 특허를 많이 내다 보니 주변 과학자들과 특허 분쟁도 많았다고 하는구나. 유명한 것이 무선 통신에 대한 특허분쟁이었어. 무선통신을 처음 한 사람이 마르코니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란다. 무선통신의 시작은 테슬라였어. 당시에도 논란이 있어서 오랜 무선통신특허분쟁으로 이어졌대. 결국 테슬라가 먼저였다고 판결이 났단다.

 

5.

그가 전기와 우리 삶에 대한 기대한 공을 세워서인지 테슬라에게 노벨상 수상자라는 소문이 날아왔어. 그런데 혼자가 아니고 에디슨과 공동수상이라는 소문이었어. 언론에서는 이미 노벨상이 정해진 것으로 생각하고 테슬라에게 인터뷰도 했단다. 그런데 정작 수상자는 다른 사람이었고, 노벨상 주최측에 소문의 진상을 물어보니 묵묵부답이었대. 에디슨이 앙숙인 테슬라와 같이 받느니 안받겠다고 하면서 테슬라도 못 받게 힘을 썼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하는구나. 테슬라도 노벨상에 크게 마음에 두진 않았대.

그는 나이가 들어도 아이디어는 쉬지 않았어. 레이더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서 해군에게 제안을 했지만, 해군은 받아들이지 않았어.. 미해군은 그 후 15년 뒤에 레이더를 개발했다고 하는구나. 노년에 들어선 테슬라는 호텔에서 홀로 생활을 하면서, 공원의 비둘기들과 친하게 지냈대. 병든 비둘기를 호텔로 데리고 와서 치료를 해주기도 했대. 가족이 없던 그도 노년이 되니 외로움을 느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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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

테슬라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서 마치 두 사람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얘기를 계속했다.

“그렇소. 그것은 환영이 아니라 진짜 빛이었소. 내가 실험실에서 만든 어떤 램프보다도 환하고 눈이 부실 정도로 강한 빛이었소. 그 비둘기가 죽자 내 삶에서 뭔가가 빠져나건 것 같았소. 그때까지는 아무리 거창한 계획이더라도 내가 그 일을 끝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소. 하지만 뭔가가 빠져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부터는 내가 할 일도 이제 끝났다는 사실을 알았소. 그렇소. 나는 아주 오랫동안 수천 마리의 비둘기들에게 모이를 주어 왔소. 하지만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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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과학으로 최적화된 두뇌를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성 인권 신장에 대해서도 진보적은 의견을 내놓았다는 것이 신선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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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일한 정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고 동일한 성취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왔으며, 여러 세대가 지나가면서 그 능력은 점점 더 크게 확대될 전망이다. 앞으로는 보통여성들이 보통남성들만큼 교육을 받을 것이고, 나중에는 오히려 남자들보다 더 높은 교육 수준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여성들의 뇌가 수세기 동안 휴식을 취해 와서 잠재된 능력을 자극하면 어느 때보다도 강하고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여성들이 지금까지 있었던 전례를 무시하고 크게 발전함으로써 문명 사회를 깜짝 놀라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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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도 꾸준히 연구하고 공상하던 테슬라는가끔씩 사회 활동도 했지만, 주로 호텔에서만 생활을 했고, 1943 1 7일 쓸쓸히 죽고 말았단다.

 

6.

테슬라가 죽고 난 다음 그의 논문과 연구자료가 사라지는 일이 일어났대. 지은이가 추적한 바로는 테슬라 논문의 사라진 행방의 배후에는 FBI가 있었다네. 테슬라의 자료들이 적국에 넘어가면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FBI가 테슬라의 행적을 늘 감시했고, 그가 죽고 난 후에는 그의 자료들을 가져갔다는 것이야. 그리고 지은이가 확인한 바로는 국방연구 기관에서 테슬라의 논문을 보관하고 있는데, 정보기관요원만이 열람이 가능하다고 하는구나.

이 책의 지은이가 이 책을 처음 쓴 것이 1981년이란다. 그리고 또 많은 시간이 지나갔단다. 그 이후에 테슬라에 대한 더 많은 자료가 나타났을 것 같구나. 인터넷 서점을 뒤져봤더니 2013년도에 출간된 니콜라 테슬라 평전이 있더구나. 그 책도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읽고 싶은 책목록에 적어두어야겠다.

아참, 과학자들이 테슬라의 공적을 기리는 뜻에서 자기장의 세기의 단위를 그의 이름을 따서 T(테슬라)라 정했다는구나.

 


(298)
"그 다음에는 주머니에 넣고 다닐 만큼 싸고 간단한 장비가 등장해 전 세계의 소식이나 원하는 정보를 전해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모든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거대한 두뇌로 바뀔 것이다. 수백만 개의 장비들을 100마력짜리 발전소 하나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거의 무한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이것은 정보의 전달이 더욱 싸고 대량으로 이루어지도록 촉진할 것이다."

(199)
테슬라의 꿈은 한마디로 유토피아였다. 지구를 굶주림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세계 곳곳으로 통신을 가능하게 하며, 기상을 조절하고, 충분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꺼지지 않는 빛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다른 행성에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있는 생명체와 연락하는 것 등이 바로 테슬라가 실현시키고자 했던 이상이었다. 테슬라는 통계적으로 확실히 화성인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376)
테슬라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서 마치 두 사람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얘기를 계속했다.
"그렇소. 그것은 환영이 아니라 진짜 빛이었소. 내가 실험실에서 만든 어떤 램프보다도 환하고 눈이 부실 정도로 강한 빛이었소. 그 비둘기가 죽자 내 삶에서 뭔가가 빠져나건 것 같았소. 그때까지는 아무리 거창한 계획이더라도 내가 그 일을 끝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소. 하지만 뭔가가 빠져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부터는 내가 할 일도 이제 끝났다는 사실을 알았소. 그렇소. 나는 아주 오랫동안 수천 마리의 비둘기들에게 모이를 주어 왔소. 하지만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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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 - 항일 무장투쟁의 영웅,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의 장렬한 삶
김삼웅 지음 / 현암사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학교 다닐 때 국사 시간에 배운 것에 의하면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 청산리 대첩은 김좌진이었단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절실히 깨닫게 만든 책이 이번에 아빠가 읽은 김삼웅의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이야.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아빠는 김삼웅이 쓰는 인물 평전을 좋아하기 때문에 종종 읽는단다. 이름만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어. 이번에 읽은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이라는 책도 마찬가지였단다. 홍범도라고 하면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지, 봉오동 전투 이전에 그가 어떻게 살았고 봉오동 전투 이후에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몰랐어. 그런데 이 책을 통해 혁명가로 평생을 살았던 홍범도를 알게 되었고, 그의 대표적인 전투는 봉오동 전투가 아닌 청산리 대첩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단다. 그의 업적에 비해 그에 대한 평가와 대접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대한민국 시민의 한 사람으로써 죄송함마저 들었어.

 

1.

홍범도는 1868년 평양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어. 홍범도의 어머니는 홍범도를 낳은 지 일주일 만에 돌아가시고, 아홉 살 때는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단다. 그래서 그는 아홉 살부터 머슴살이를 했어. 그러다가 열다섯 살에 군대에 들어갔어. 열다섯 나이면 원래 군대를 들어갈 수 없지만, 그는 나이를 두 살을 속여 군대에 들어갔단다. 그가 군대에 들어간 것은 대단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생계를 위해서였어. 군대에 들어간 그는 나팔수 역할을 했대. 그러다가 서울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난 이후 경비 인력이 부족해서 차출되어 서울로 갔어. 그는 군인이 백성을 탄압하는 것에 회의를 느꼈대. 그 와중에 부패한 상관을 폭행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일로 군대를 떠났대. 4 년 간의 군생활의 끝이었지. 그래도 그 4 년의 군생활이 나중에 그가 몸을 담은 의병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단다. 특히 홍범도는 신기의 총격술을 가지고 있었대. 백발백중.

그는 군대를 떠나서 제지공장에 취업을 했어. 제지 공장의 주인이 동학을 권유했고, 동학이 무엇인지 잘 몰랐던 홍범도는 거절을 했대. 그 일로 주인과 불화를 빚고, 주인이 임금도 주지 않았대. 그래서 그만 그 일을 그만 두었다고 하는구나. 그 때 나이 스물두 살. 그는 금강산의 신계사에 가서 승려 생활을 했는데, 상좌의 직책이었지만, 행자 노릇을 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그 절에서 비구니와 연정을 품게 되었고, 그 비구니가 임신까지 하게 되었대. 그런 일이 있었으니 절을 떠났을 수 밖에 없었지. 비구니의 고향인 함경도 북청으로 길을 떠났단다. 그가 절에 있으면서 임진왜란에 대한 지식을 얻고 처음으로 항일 정신을 키우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단다. 홍범도와 비구니는 북청을 가던 길에 건달을 만나 싸움이 붙고 그 일로 비구니와 헤어지게 되었단다. 그렇게 헤어져서 홍범도는 강원도 산중에서 은둔생활을 하게 돼. 이 은둔생활을 하던 중, 김수협이라는 청년을 만나는데, 김수협과 함께 의경운동을 시작하였단다.

 

2.

홍범도는 김수협과 단둘이 일본군 11명을 제압해서 무기를 빼앗았어. 이후 의병대를 만들어 의병을 시작했어. 그렇다고 군 기술을 배운 이들이 아니었어. 농민과 신포수로 이루어진 단체야. 홍범도는 유인석의 의병대와 합류해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어. 그런데 전투에서 져서, 의병대는 뿔뿔이 흩어지고 홍범도는 북천으로 향했단다. 북천은 자신이 사랑했던 비구니의 고향이었거든. 그런데, 그곳에서 사랑하는 이를 만날 수 있었어. 그리고 그의 아들 양순도….

그는 그곳에서 7~8년 동안 행복한 삶을 살았단다. 산포수로 생계를 꾸리면서 가족들과 지냈어. 그런데 점점 산포수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수탈이 심해져서 그는 저항을 했고, 다시 의병대를 조직했어. 차도선이라는 사람과 함께 의병을 이끌며 삼수, 갑산 지역에서 활동했단다. 일본군은 가족을 회유했지만, 오히려 아들 양순도 어린 나에 의병에 참가했단다. 홍범도가 이끄는 의병대는 규모가 커져서 500여명이 되었고, 주변의 작은 의병대들도 합류하고 연합을 했어.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야. 아들 양순이 1908년 전투 중에 죽고 말았고, 부인은 감옥에서 죽고 말았어. 혁명가의 가족이 가져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프구나. 홍범도가 이끄는 의병대는 왜 강한가에 대해 지은이는 다섯가지로 정리해 주었단다. 첫번째는 주로 포수들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는 점. 둘째 기동력이 좋다는 점. 셋째 평민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의견충돌이 적다는 점. 넷째 막강한 전투력을 가졌다는 점. 다섯째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점이었다고 하는구나.

 

3.

일제 탄압은 점점 커져서 홍범도는 국내 의병전에 한계를 느끼고 국경을 넘기로 했단다. 이때 그의 나이 어느덧 사십이었어. 모든 이들을 데리고 갈 수 없었어. 그는 측근들만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간도로 이동했단다. 1909년 초 홍범도는 다시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했어. 당시 블라디보스톡은 항일 운동의 중심지였어. 아무래도 일본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까 말이야. 그는 여기서 안중근을 만나기도 했대. 홍범도는 ‘13도 의군에 참가하기도 했고, 권업회에 참석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했어. 권업회는 최재형이 회장을 맡고, 홍범도가 부회장을 맡았어. 그리고 아빠가 존경하는 신채호가 주필이 되어 권업신문을 내기도 했어.

그런데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을 맺으면서 상황이 바뀌었어. 일본과 동맹을 맺은 러시아가 그냥 지켜볼 수 없었어. 1914년 러시아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추방했단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독립 운동은 타격을 입었어. 권업회도 이때 해산되었단다. 홍범도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쫓겨나서 봉밀산 등지에서 독립 운동 준비를 했어. 삼일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어졌단다. 약간의 변화가 있다면 러시아 혁명 이후 다시 러시아와 협력을 하게 되었다는 것.

3.1운동 이후 문창범이 회장으로 있는 대한국민회의에서 활동을 했어. 이 단체는 상해 임시정부와 함께 협력을 하였고 군무부에 있던 홍범도를 중심으로 대한독립군을 창설하게 되었단다. 대한독립군의 사령관은 홍범도였고, 이들은 북간도로 이동했어. 국내 진입 작전을 이끌면서 국경 지역과 가까운 갑산과 평북의 강계 지역에 진입해서 일제의 무기를 갈취하는 등의 성과를 냈단다.

 

4.

1920 6 7. 독립전쟁 제 1회전이라고도 부르는 봉오동 전투. 이것은 사실 작은 전투에서 시작했다고 하더구나. 소규모 헌병순찰대를 격파했는데, 이에 일본군의 반격이 있었고, 삼둔자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는데, 일본군을 전멸시키는 성과를 냈단다. 이에 일본군의 대대적인 보복전이 있었어. 홍범도는 전략을 세웠어. 먼저 마을의 사람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기는 마을 공동화 작전을 폈고, 이후 유인 작전 전술을 폈어. 그날 날씨는 천둥 번개를 동반하여 좋지 않았지만, 그것은 일본군에도 마찬가지. 봉오동에 있었던 전투에서 적군 500여명을 살상하는 대승을 거두었단다.

봉오동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다시 한번 대규모 보복전을 준비하였단다. 이번에는 중국군에 압력을 넣어 중국군까지 동원했어. 하지만 홍범도는 오히려 중국군을 회유했어. 하지만 계속된 일본군의 압박때문에 홍범도는 봉오동를 떠날 수 밖에 없었어. 봉오동 전투가 있고 4개월 뒤, 일본군을 간도 지역에 대규모 군대를 보냈어. 홍범도는 그들을 용정촌에서 100여 리 떨어진 화룡현 삼도구로 유인하려고 했어. 그곳은 깊은 계곡으로 전략적으로 먼저 진을 치면 유리한 곳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결전지로 정했단다. 이번 전투에는 김좌진이 이끄는북로군정서군도 함께 했단다.

한편, 일본군은 이 전투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전에 음모를 벌였어. 마적단을 돈주고 사서 간도 내 일본 영사관을 공격하여 아홉 명을 죽이는 자작극을 벌였어. 이 사건은 훈춘 사건이라고 한단다. 이 훈춘 사건을 빌미로 대규모 일본군은 간도에 주둔하게 되고, 1920 10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지역에서 대규모 교전을 벌이게 된단다.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 전투, 천수평 전투, 어랑촌 전투, 맹개골 전투, 만기구 전투, 쉬구 전투, 천불산 전투, 고등하 골짜기의 전투까지사전에 미리 진을 치고 있던 우리 군은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단다. 위에서 열거한 많은 전투들은 모두 홍범도의 연합독립군과 김좌진이 인솔하는 북로군정서군이 단독 혹은 연합적으로 수행했던 것이란다. 이 청산리 전투로 일본군은 1200 여명이 죽었어. 우리나라 독립군으로는 정말 큰 승리였단다. 홍범도도 이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단다.

이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왜, 청산리 대첩에서 홍범도가 빠진 교과서로 배워야 했을까. 홍범도가 나중에 소련공산당에 가입을 하긴 했지만, 그것보다는 한 사람의 의해서 역사의 왜곡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도 있어. 잠시 그 이야기를 해볼게. 나중에 해방이 된 후 북로군정서군의 장교로 있었던 이범석이 국무총리를 맡았는데, 그 이범석이 회고록을 썼어. 그런데 그 회고록에 자신의 업적을 과장해서 쓰면서, 홍범도를 나쁘게 왜곡을 해서 쓴 거야. 홍범도가 도망치다가 아랫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다고 말이야. 아주 노골적으로 왜곡했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이승만, 박정희 정권의 청산리대첩의 기록에는 홍범도가 전혀 없었다고 하는구나. 그러나 청산리 대첩의 진정한 주역은 홍범도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란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홍범도, 김좌진, 이범석의 세 주역들과

무명의 많은 독립군들, 그리고 간도 백성들의 적극적인 지지이것이 청산리 대첩 승리의 원동력이었던 거야. 정세윤 박사라는 분은 청산리 전쟁을 아래와 같이 평가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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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윤 박사는 청산리 전쟁의 주역은 북로군정서가 아닌 홍범도라는 주장을 편다.

홍범도 부대는 김좌진 부대와 같이 청산리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어떤 면에서 청산리 독립전쟁의 주역은 북로군정서 부대가 아니라 오히려 홍범도와 그를 중심으로 한 여러 독립군 부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북로군정서 군대가 독립군의 단위부대로서는 가장 큰 규모이며 기관총과 박격포까지 갖추고 있어 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군과의 전투 직전에 수백 리에 이르는 길을 강행군하여 이동하였고 도착 직후는 심한 식량난에 시달려야 했다. 반면 홍범도 부대는 9월 하순 가장 먼저 청산리 일대에 도착하여 훈련과 식량조달 등 적과의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

청산리 전쟁의 ‘3주역이라 할 홍범도, 김좌진, 이범석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각기 다른 행보를 걷다가 청산리에서 연합군 지휘자의 위치에서 일제와 싸워 대첩을 이루었다.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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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일본의 보복은 더욱 악랄했단다. 경신대학살이나 간도대학살이라고도 부르는 경신참변. 재만교포 5천여 명 학살을 했어. 시베리아에서도 최재형을 포함하여 70여명을 죽였단다. 이런 무자비한 만행으로 간도의 독립 운동은 위축될 수 밖에 없었어. 홍범도도 독립 운동은 잠시 접고, 이때 대종교와 단군계열 단학회에 참여하여 활동을 했어. 독립군들도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을 해서, 자유시 근방에 집결하였단다. 그런데, 러시아가 우리 독립군들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했어. 다른 나라의 무기를 사용한다는 이유야. , 힘없는 민족의 설움

홍범도는 고심 끝에 그들의 말을 따르기로 했어. 이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어. 자유시로 여러 독립군들이 모여들었다고 했잖아. 자유시에 모여든 여러 독립 단체들의 갈등이 고조되었어.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의 파쟁이 결국 비극을 만들었단다. 그들의 분쟁은 무고한 다수의 독립군 대원들이 희생당했어. 60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대. 이를 자유시 참변이라고 부르는데, 이 일로 홍범도 무장 투쟁도 크게 위축되었단다.

홍범도는 부대원 1745명과 함께 이르쿠츠크로 이동해서 소비에트 적군 조선독립여단 1대대장에 임명되었어.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극동민족대회에서 참석을 하기도 했어. 이때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났고, 레닌으로부터는 권총과 돈, 그리고 선물도 받았단다. 러시아 핵심 인물들과 안면을 텄으니, 독립 운동에 대한 지원에 희망을 걸 만 했어. 그러나, 이루쿠츠크로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

레닌이 죽었다는 소식, 트로츠키가 축출되었다는 소식. 스탈린이 서기장이 되었다는 안 좋은 소식이 전해졌어.

그래도 홍범도는 꾸준히 독립 운동에 도움이 될만한 일들을 했단다. 연해주에 농업조합을 만들었고, 청년들에게 사격 등 군사 훈련을 시켰어. 그리고 1926년 이인복이라는 여인과 재혼을 했단다. 전 부인과 사별한 지 18년 만이었고, 홍범도의 나이 어느덧 59세였어. 집단 농장을 운영하기 위해 1927넌 소련공산당에 입당을 했는데, 이 이력이 나중에 역사에서 그를 배제하는 빌미가 되었단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스탈린이 서기장이 된 것이 안 좋은 소식이라고 했잖아. 스탈린은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동을 명령했단다. 간첩과 외모가 비슷해서 어렵다는 이유였는데, 그러면 사람 대우를 해주면서, 보상을 해주면서,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보내줘야지한달 동안 기차를 타고 이동을 해야 하는, 그곳도 척박한 땅으로 먹을 것도 없는 중앙아시아라고 하니…. 우리 한인들 17만 명을 기차로 꽉꽉 채워서 강제 이동 시켰단다. 이때 많은 이들이 기차 안에서 죽었다고 하니, 또 가슴이 먹먹해 지는구나.

홍범도도 노구를 이끌고 이동을 했고, 카자흐스탄에 배치를 받았단다. 그곳 땅에 척박한 땅이었지만, 한인들은 또다시 개척을 했단다. 카자흐스탄에서 홍범도는 태장춘이라는 연극 연출가를 만나게 되었어. 태장춘은 홍범도의 파란만장 삶을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어. 홍범도를 설득해서 자서전을 쓰도록 했어. 그렇게 쓴 자서전이 <홍범도 일지>였어. 그리고 태장춘은 홍범도의 삶을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을 했단다.

1943 10 25…. 조금만 더 사셨으면 꿈에 그리던 해방을 보셨겠지만, 홍범도는 해방을 희망으로만 간직한 채 75세의 나이도 돌아가시고 말았단다. 사람은 죽어서 어떻게 될까. 영혼은 이 세상에 남아 있을 거야.. 분명히.. 그래서 홍범도의 영혼도 조국이 해방을 한 것으로 보고, 기뻐하셨을 거야. 비록 곧 둘로 나뉘어져 서로 총칼을 겨누어 많은 이들이 죽어서 다시 슬퍼하셨겠지만 말이야. 그렇게 나눈 둘이 여전히 다른 길을 가고 있어 가슴 아파하시겠지만, 그래도 일본 지배에서 벗어나 이 정도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고 발전했으니, 조금은 기뻐하고 계시지 않을까 생각한단다. 이국 땅에서, 특히 추운 만주, 연해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한 홍범도를 비롯한 많은 독립군들그들의 희생에 고마움을 늘 마음 속에 둘 수 있는 그런 책이었단다.

 

 

장세윤 박사는 청산리 전쟁의 주역은 북로군정서가 아닌 홍범도라는 주장을 편다.

홍범도 부대는 김좌진 부대와 같이 청산리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어떤 면에서 청산리 독립전쟁의 주역은 북로군정서 부대가 아니라 오히려 홍범도와 그를 중심으로 한 여러 독립군 부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북로군정서 군대가 독립군의 단위부대로서는 가장 큰 규모이며 기관총과 박격포까지 갖추고 있어 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군과의 전투 직전에 수백 리에 이르는 길을 강행군하여 이동하였고 도착 직후는 심한 식량난에 시달려야 했다. 반면 홍범도 부대는 9월 하순 가장 먼저 청산리 일대에 도착하여 훈련과 식량조달 등 적과의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

청산리 전쟁의 ‘3주역’이라 할 홍범도, 김좌진, 이범석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각기 다른 행보를 걷다가 청산리에서 연합군 지휘자의 위치에서 일제와 싸워 대첩을 이루었다. (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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