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난설헌의 본명은 초희(楚姬)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며 난설헌(蘭雪軒)은 당호입니다. 초희는 미녀와 재원을 뜻함이고 경번은 중국의 여성시인 번희를 사모해서 지은 이름입니다. 난설헌의 난은 여성의 미덕을 찬미한다는 뜻이며 설은 지혜롭고 문학적 재능을 지닌 여성또는 고결하면서도 뛰어난 문재를 지닌 여성이라는 뜻으로 지은 당호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소망을 마음껏 담은 이름들이라 하겠습니다.


(27)

가을날 깨끗한 긴 호수는

푸른 옥이 흐르는 듯 흘러

연꽃 수북한 곳에

작은 배를 매두었지요.


그대 만나려고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

멀리서 남에게 들켜

반나절이 부끄러웠답니다.


(32)

사는 집이 장간리 마을에 있어

장간리 길을 오가며 살았었지요.

꽃가지 꺾어 님에게 묻기도 했었죠.

내가 더 예쁜가요, 꽃이 더 예쁜가요?


(40-41)

1

이웃집 벗님네와 내기 그네 뛰었어요.

띠를 매고 수건 쓰고 신선놀음 같았지요.

바람 차고 오색 그넷줄 하늘로 높이 오르자

쟁그랑 노리개 소리 버들에 먼지가 일었지요.


2

그네뛰기 마치고는 꽃신을 신었지요.

숨이 가빠 말도 못하고 층계에 섰어요.

매미 날개 배적삼에 땀이 촉촉이 스며

떨어진 비녀 주워달라는 말도 못 하고 말았지요.


(47)

자줏빛 퉁소 소리 붉은 구름 흩어지니

주렴 밖 찬 서릿발 우지짖는 앵무새

깊은 밤 비단 휘장 비추는 그윽한 촛불

때때로 성긴 별이 은하수 건너는 것 바라보아요.


또르륵 물시계 소리 서풍에 묻어오고

이슬 맺힌 오동나무 저녁 벌레 우는데

명주 수건으로 훔치는 깊은 밤의 눈물

내일이면 점점이 붉은 자국으로 남겠지요.


(48-49)

고요해요, 뜨락은. 살구 꽃잎 위에 봄비 내리고

나는 꾀꼬리, 백목련 핀 언덕에서 울어요.

수실 늘어진 비단 휘장에 꽃샘추위 스며들고

박산 향로에서 한 줄기 연기가 올라요.


어여쁜 사람 잠에서 깨어 화장을 고치니

향그런 비단옷 허리띠에 새겨진 원앙 무믜.

겹으로 드리워진 발을 거두고 비취 휘장 치고서

시름없이 은쟁을 잡고 한가락 봉황곡을 타지요.


금 굴레 잡고 안장 위에 계시던 내 님은 어디 가셨나?

다정한 앵무새만 둘이서 창가에 속삭여요.

풀섶에서 노닐던 나비는 뜨락을 날아 사라지고

꽃그네 줄 엮어 난간 밖까지 날아올라요.


어느 집 연못가에서 피리소리 들려오는가.

금 술잔 위로 요요한 달빛만 노니는데

시름 많은 아낙은 밤새 홀로 잠 못 이루어

날 밝으면 비단 수건에 눈물 자국만 가득하여요.


(55)

난간에 기대어 멀리 계신 님 그리워하니

말 타고 창 꼬나잡고 청해 물가를 달리시겠지.

휘몰아치는 모래와 눈보라에 갖옷은 해어졌을 테고

향그런 안방 그리워하며 눈물로 수건 적시겠지요.


(66)

공령 여울 어구에 내린 비 이내 개이고

무협의 어스름 안개 자욱해요.

한스러워라, 님의 마음도 저 물과 같이

아침에 나가더라도 저녁엔 돌아왔으면!


(76)

창가에 놓아둔 난초 화분

난초꽃 벙글어 향기 그윽했는데

건듯 가을바람 불어와

서리 맞은 듯 그만 시들었어요.


어여쁜 모습 비록 시들었지만

여전히 코끝에 맴도는 난초의 향기.

마치도 시든 난초가 나인 듯 싶어

흐르는 눈물 옷소매로 닦아요.


(80-81)

이웃집 살림은 날로 좋아져

높은 다락에 풍악 소리 일어나는데

또 다른 이웃은 입을 옷도 없고요

쑥대밭 어우러진 집 배곯고 있다네요.


그런데 어찌 짐작이나 했을까요.

하루아침에 높은 다락 기울어지고

오히려 가난한 집을 부러워해요.

하늘의 운명은 어떨 수 없는 일인가 봐요.


(85)

지난해 귀여운 딸을 잃었고

올해는 또 사랑하는 아들이 떠났네.

슬프고도 슬프다.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이 나란히 마주 보고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에는 오슬오슬 바람이 일고

숲속에선 도깨비를 반짝이는데

지전 태우며 너의 넋을 부르며

너의 무덤 앞에 술잔을 붓는다.


안다, 안다. 어미가 너희들 넋이나마

밤마다 만나 정답게 논다는 것.

비록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하지만

어찌 제대로 자라기나 바랄 것이냐.


하염없이 슬픈 노래 부르며

피눈물 슬픈 울음 혼자 삼키네.


(98-99)

1

얼굴이며 맵시, 남들한테 빠지는 게 아니에요.

바느질에 길쌈 솜씨는 또 어떠하구요.

다만 어려서부터 가난한 집안에 자라난 탓에

중매쟁이들 모두 날 몰라라 해서 그래요.


2

춥고 굶주려도 얼굴에 내색을 않고

하루 종일 창가에서 베만 짭니다.

부모님만은 가엾어라 여기시지만

이웃의 남들이야 어찌 이런 나 알겠나요?


3

밤 깊도록 쉬지 않고 베를 짜노라니

베틀 소리만 삐걱삐걱 처량하게 울려요.

베틀에는 베가 한 필 짜여 있지만

이 베가 마침내 누구의 옷감 될까요!


4

손에 가위 들고 옷감 자르면

밤도 차가워 열 손가락이 곱아와요.

남들 위해서 시집갈 옷 짓는다지만

해마다 나는 홀로 잠을 잔답니다.


(106-107)

봄바람 화창하여 온갖 꽃 피어나고

철 따라 만물이 번성하니 감회가 새로워요.

깊은 방에 묻혀서 그리움 끊으려 해도

님 생각 가슴에 머물면 심장이 터질 듯해요.


밤 이슥토록 잠을 이룰 수 없음이요!

새벽닭 우는 소리 꼬끼오 들리네요.

빈방에 비단 휘장이 둘러지고

옥돌계단에 푸른 이끼만 돋았어요.


깜빡이던 등불도 꺼져 벽에 기대어 있으려니

비단 이불 어설퍼 추위가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요.

베틀 소리 내며 회문금을 짜 보지만

무늬도 시원치 않고 마음만 어지러워요.


인생 운명을 타고남이여, 사람마다 치아가 많아

남들은 즐기며 살건만 이 내 몸은 쓸쓸하기만 하답니다.


(132)

머나먼 갑산으로 귀양 가는 나그네여

함경도 길 가시는 걸음 바쁘시리다.

쫓겨나는 신하야 가태부지만

상감이야 어찌 초나라 희왕이시겠는지요!


가을 햇살 비낀 언덕엔 강물이 찰랑찰랑

변방의 구름은 저녁놀에 얼굴 붉혀요.

서릿바람 맞으며 기러기떼 날아가는데

걸음마저 더디어 차마 길 가지 못하시리.


(155)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를 넘나들고

파란 난새가 채색 난새와 어울렸구나.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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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한창 냉소적인 딤카에게는 뭔가 경멸받아 마땅한 일로 보였다. 자본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나라에서는 인민의 뜻에 따라 귀족적인 수상을 해고하고 사회민주주의자를 앉히는 마당에, 세계를 선도하는 공산주의국가에서는 같은 일이 비밀리에 소규모 지배 엘리트층의 음모로 진행되고 며칠이 지나서야 무력하고 다루기 쉬운 인민들에게 발표되는 것이다.

 

(158)

시베리아에 다녀온 뒤 그녀는 변했다. 이전에는 공산주의를 좋은 의도의 실험이지만 실패했으니 폐기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이제는 사악한 지도자들의 잔혹한 압제 행위로 보았다. 바실리를 떠올릴 때마다 그녀의 가슴은 그에게 그런 짓을 저지른 사람들을 향한 증오로 가득찼다. 심지어 쌍둥이 오빠에게도 말하기 어려웠다. 딤카는 아직도 공산주의의 폐지되기보다는 개선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딤카를 사랑했지만 그는 현실에 눈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디든 잔인한 억압이 있는 곳에는-이를 테면 미국의 최남동부, 영국의 북아일랜드, 그리고 동독-그녀의 가족처럼 소름끼치는 진실을 외면하는 착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타냐는 그 가운데 하나가 되지 않을 터였다. 끝까지 싸울 작정이었다.

 

(420)

정치에서는 거짓말이 많잖아요.” 조지가 말했다.

사회의 다른 많은 분야에서도 그렇지. 하지만 닉슨처럼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 그는 사기꾼에다 간교한 자야. 지금까지는 안 걸리고 빠져나왔어. 사람들은 그렇게들 하지. 하지만 대통령이 되면 달라. 기자들은 그들이 베트남에 대해 속았다는 걸 알아. 그리고 정부의 말을 점점 더 면밀하게 살피고 있어. 딕은 덜미를 잡힐 거고 그래서 무너질 거야. 뭐가 더 있는 줄 알아? 그는 왜 그렇게 됐는지 절대 이해 못할걸. 언론이 내내 자신을 망치려 들었다고 말할 거다.”

 

(472)

딤카는 변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침공이 그를 변하게 했다. 그 순간까지 그는 공산주의를 개혁할 수 있다는 믿음에 고집스럽게 매달렸다. 하지만 1968, 소수의 인사가 공산주의 정부의 성격을 바꾸는 일에 착수하면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는 자들에게 그 노력을 분쇄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브레즈네프와 안드로포프 같은 사람들은 권력과 신분과 특권을 즐겼다. 그들이 왜 그런 모든 위험을 감수하겠는가? 딤카는 이제 여동생과 의견을 같이 했다. 공산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당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권한이 늘 변화를 억누른다는 점이었다. 소련의 체제는 그의 할아버지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푸틸로프 기계공장에서 감독으로 일하던 육십 년 전 차르 정권과 다를 바 없이 무시무시한 보수주의에 속수무책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763)

의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헝가리 문제였다. 딤카는 그 안건을 포함시킨 사람이 에리히 호네커라는 것을 알았다. 헝가리의 자유화는 개혁을 진행하지 않는 정권의 억압적인 태도에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다른 모든 바르샤바조약기구 국가를 위협했는데, 그중 동독이 최악의 의기를 맞고 있었다. 헝가리에서 휴가를 보내던 수백 명의 동독인이 텐트를 벗어나 숲속으로 가서 낡은 울타리에 난 구멍을 통해 오스트리아로 넘어가 자유를 찾았다. 벌러촌 호수에서 국경으로 향하는 도로는 그들이 후회 없이 버린 싸구려 트라반트, 바르트부르크 자동차로 어지러웠다. 대부분은 여권이 없었지만 문제되지 않았다. 그들은 서독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자동으로 시민권을 받고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았다. 낡은 차는 곧 더 믿음직스럽고 편안한 폭스바겐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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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

파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이 공격당할 경우 핵무기를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흐루쇼프 서기는 소련이 공격당하면 핵무기를 사용할 겁니다. 프랑스의 드골이나, 누가 지도자인지 모르지만 영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그들 가운데 누구라도 달리 말한다면 몇 시간 안에 물러나게 될 겁니다.” 그는 시가 끝이 빨갛게 타오르도록 빨아들이더니 연기를 내뿜었다. “내가 미쳤다면 그들 모두 미친 거죠.”

 

(530)

자유를 향한 우리의 발걸음에 가장 큰 장애물은 백인 시민들이 뽑은 위원장도 아니고, KKK도 아니오. 정의보다는 질서에 더 매달리는 백인 중도층이야. 그들은 늘 보비 케네디처럼 말하지. ‘당신이 추구하는 목표에는 동의하지만 당신의 방식을 묵과할 수는 없소.’ 그는 온정주의적인 태도로 타인의 자유를 위한 일정을 자기가 정할 수 있다고 믿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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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캥거루는 새끼를 배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닌다. 엄마의 배주머니 속에서 땅 위를 통통 튀어 오르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어미가 무척 힘들 것 같지만, 새끼를 품 안에 넣고 뛰는 편이 탄성에너지를 받아 오히려 힘이 덜 든다고 한다. 캥거루 어미는 애기 집 청소를 할 때 앞주머니를 벌리고 얼굴을 밀어 넣어 혀로 핥는다. 캥거루가 뛸 수 있는 높이에 대해서는, 삼 미터부터 십삼 미터까지 의견이 분분했다.


(46)

사람은 누구나, 아무리 못난 인간이라 해도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다. 새삼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는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자기중심적인 꿈을 통해 그 사실을 학습한다.


(95)

일상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적 고뇌를 가족과 나누는 것은 무리이다. 일상과 존재의 경계에서 가족 간의 절망이 생겨나는 것이다. 성장기 내내 가족과 소원하게 살아온 엄마는, 아마도 천성적으로 그랬듯이, 이모와 외할머니 앞에서 입을 굳게 다물어버렸다. 가족 공동체의 내부는 다정과 간섭이 넘치지만 사실, 한 치만 건너서 들으면 또 얼마나 이기적이고 흉한 공모인가.


(103)

꿈은 상실되고 자신을 돈과 바꾸어 살아야 하니, 삶 자체가 하루하루 이렇게 소모적이기만 한 건가 싶죠. 참 다들 고독하고 가련해요.


(115)

낮과 밤은 서로 잘려진 단면이 얼마나 아플까? 해 뜰 때나 달이 뜰 무렵이면 무한히 긴 절단면이 아파하는 경련을 나는 느낀다. 삶을 위해 나누어진, 누구의 아픔도 아닌 이 세상의 본질적인 아픔이 내 마음에도 사무쳐 해와 달 사이에서 눈이 아프다.


(115-116)

봄이란 하나의 계절이라기보다 겨울과 여름 사이의 격렬한 신경전 같다. 비와 바람과 햇빛과 눈이 서로의 매력과 무기를 다 동원해 밀고 당기고 엎치락뒤치락거렸다. 한겨울같이 기온이 떨어졌다가 삼월 마지막 날엔 깃털 같은 바람이 목덜미를 간질이더니 사월 첫날에는 눈이 내렸고 다음 날엔 황사 때문에 모든 것이 바랜 사진처럼 누렇게 보였다. 그런 날은 의식조차 현실감각을 잃고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그 사이로 개나리와 목련, 벚꽃이 귀신들처럼 피어났다. 꽃은 한 송이 한 송이마다 자기의 세계를 열며 피어난다고 한다. 그래서 꽃 하나가 필 때마다 세계가 하나씩 생긴다고. 사람도 그렇게 자기를 꽃피워야 한다고.


(144)

실제로 사람이 만나는 건, 드라마와 달라. 말할 수 있는 게 아냐. 질서 있는 인과관계도 없고. 착각과 도취, 혹은 무지한 고집과 자기합리화와 이상한 자포자기 같은 것이 운명을 만들기도 하지.


(155)

그래서 엄마의 사랑엔 죄의식과 슬픔과 희생과 희망이 뒤섞여 있지.


(160)

내 그림 때문에 너도, 아빠도 힘들었다는 거 알아.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림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해. 네 아빠에게도, 스무 살 시절에 한 친구가 그런 말을 했지.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네 아빤 즉각적으로 화를 냈어. 5.18, 군사정권도, 국가보안법도, 다국적기업 노동자의 현실도, 이 살벌한 현실도 피할 수 없으니 즐기자고? 나도 아빠와 한편이었어. 인간인 이상, 피할 수도 없고 즐길 수도 없는 게 있어. 그래서 싸우는 거지. 난 모두에게 저마다의 잠과 저마다의 싸움이 있다고 생각해. 그 잠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을 즐기면, 영영 꿈에서 깨어날 수 없어.”


(180)

사랑이 다시 온다 해도 난 뒷걸음질할 것만 같다. 사랑은 나를 격정적으로 만들고, 균형 잡힌 관계들을 훼손시키고, 내 일상의 페이스를 무너뜨린다. 내 사랑에 대해 내가 보는 눈과 다른 사람들이 보는 눈은 다를 것이다. 무엇보다 사랑은 반드시 끝이 난다. 대체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것일까?


(192-193)

사랑은, 어쩌면 달나라에 가는 것과 비슷할 거야. 지구의 중력을 이탈해 별들이 보석처럼 빛나는 무한의 우주를 지나 꿈꾸어 온 달에 착륙하는 여행 말이야. 그 여행이 엄청난 것은 우주선도 없고 연료도 없이 오직 단둘이 끌어안고 스스로 발사체가 되어 날아간다는 점이지. 그리고 달나라에 갈 수는 있지만 그곳에서 살 수는 없는 것처럼, 사랑 속에 안주해서 살 수도 없단다. 실제로 달은 채석장처럼 끔찍하게 척박한 곳이고 인간의 발을 둥둥 뜨게 만드는 곳이지. 단지 지구와 달 사이, 원심분리기같이 굉장한 속도로 회전하는 허공만이 사랑의 현장인 거야. 사랑이 끝나고 지상으로 돌아올 때는 우주선을 버리고 각자의 낙하산을 펴야 하지. 이 지상에 따로따로 떨어져 착륙해야 하는 것, 사랑은 그런 거야.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그때 함께 있든, 혹은 헤어져 있든, 무사한지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결국 끝이 나. 삶은 사랑의 열정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로 사는 거거든.”


(202-203)

엄마와 아빤 너무 일찍 만났어. 세상을 모를 때 말이야. 그 시대의 대담한 청춘들이 그랬듯 엄마와 아빤 세속적인 모든 것을 경멸했어. 권위적인 것, 관습적이고 통념적인 것, 집단적인 것, 가족주의, 유교적인 위계질서와 의례들을 비롯한 모든 고착된 질서들, 유명 브랜드 제품들, 공교육, …… 우린 그런 것들을 우습게만 여겼어. 그땐 정말 둘이 의기투합이 됐었단다. 우린 평생 가난하고 자유롭게 살자고 맹세했으니까. 가난하게, 간결하게, 자유롭게. 그게 네 아빠의 모토였지.”


(216-217)

부모가 내게 무슨 짓을 했건, 우린 그것을 원망하기보다 극복해야 한다.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부모의 운명을 가엾게 여기고 자신의 자아를 강화하는 것이다. 자기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을 긍정하며 스스로를 키워야 한다. 알고 보면, 모든 부모는 자기 인생의 많은 부분을 후회한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들의 최선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게 아니라 그들의 불가능성과 실패와 희망과 좌절이 교차하는 시행착오 속에서 잉태되고 성장해 부모의 운명을  온몸에 덕지덕지 묻힌 채로 분가하는 것이다.”


(262)

호은아, 사랑이든 삶이든, 난 그게 내 몫의 강물을 헤엄쳐 건너는 일 같아. 그 물은 내 존재로부터 솟아 나와 큰 강을 이루어, 누구에게나 혼자 건너야 하는 강이 있는 거야. 언젠가 아저씨와 내가 헤엄쳐 건너야 할 물을 다 건너고 햇살 따스한 기슭에 닿아 옷을 말리면 좋겠다. 그게 결혼이라도 좋고 아니라도 좋아. 넌 사랑의 결실이 뭐라고 생각하니?”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흔히 말하듯 아이, 하나의 가정 같은 거 아닐까……

사랑의 결실은 변태야. 변화를 겪고 달라지는 것. 계속 사랑하는 건 계속 달라져 가는 거야.”


(266)

그러니, 내가 태어난 이유는 모른다 해도 그 의미는 앞으로 내가 만들어가야 할 과제인 것이다.


(273)

사랑은 바라지 않아도 늘 있어. 너를 바라보는 이 순간에, 햇빛 속을 걸을 때나 비 오는 날 우산을 펼칠 때, 한밤중에 창문 밖에 걸린 반달을 볼 때도,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할 때도, 차 한 잔을 마시거나, 홀로 밥을 끓일 때에도, 아침 일곱 시와 오후 두 시와 밤 열한 시에, 사랑은 늘 거기 있어. 많은 마음이 차오를 때까지 깊은 숨을 쉬어봐. 그러면 알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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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72) 

나이의 역사에는 어떤 정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오십 세에 쓰러집니다. 우리가 동경하던 성격적 특징은 왜곡되고, 오만함은 희한으로 변하며, 유머에는 요실금 환자의 지린내가 나고, 매력은 변절되어 버립니다. 청소년기의 변화와 비교할 수 있겠으나 더 비참하죠. 목소리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이거나 사유의 융통성이 그대로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랜 친구들을 보석처럼 간직하세요. 여전히 함께 있을 때 편한 사람을요. 점점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더 지혜로워지거나 더 흥미로워지거나 더 관대해진 사람들이죠. 끔찍한 난파 사고의 생존자라도 되는 양 곁에 그들을 잡아두세요.


(73)

빅토르 위고가 <파리의 노트르담>을 출간했을 때 당시 상류사회가 전적으로 그 작품을 추앙해주었다면, 그거야말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에요. 위고가 충분히 버텨온 일이라면 당신에게도 분명 괜찮을 겁니다. 그는 사람들의 혹평을 받았지만 한탄하는 데 시간을 보내지 않았어요. 조용히 살고 싶었다면 사륜마차 속에서 지방 촌구석의 후작 부인에게 무도회가 얼마나 좋았는지 알려주는 편지 따위나 썼겠죠. 사람들이 당신 면전에 침 뱉는 걸 원치 않는다면서 지금 당신은 개판 오 분 전인 작가 행세를 하고 있네요.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고 남자답게 대처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77)

오늘날은 모두들 좋은 소리만 듣고 싶어하죠. 모두들 착실한 학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교실 구석 난방기 옆에 앉아, 헛소리를 지껄이며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얼간이는 오늘날엔 인기가 없죠. 프레베르의 시에 나오는 열등생은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기업에서 쓰는 언어밖에 모르니까요. 진지함, 책임감, 고위직의 관점, 최고 수치의 기록, 우리가 견뎌야 할 유일한 도전은 흥미롭지 않습니다. 난장판은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 손에서 시작해야 즐거운 일이 되는 겁니다.


(89)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내게 무척이나 새로운 문제가 제기된 셈입니다. 열정은 더는 원할 때 진열장에서 꺼낼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나를 끌어당기는 게 없어요. 빛나는 것도 없고 나를 뒤흔드는 것도 없습니다. 나는 백만 번이라도 홀로 하는 사랑으로 고통받거나 죽는 편을 택할 거예요. 버림받거나 배신당하거나 창피를 당하거나 학대받는 편을 택할 거예요. 권태에 빠지는 것보다 그 어떤 상처라도 받는 편을 택할 겁니다.


(131-132)

중독. 단어의 어원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봤습니다. “중세 시대에 ‘addictus(‘바친, 헌신한이라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라는 단어는 맹세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약속을 어긴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주인에게 속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주인에게 속한 존재는 여성 혹은 노예, 타인의 선한 의지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시민의 단계까지 지위가 강등되었다는 뜻으로, 자신의 이익은 고려하지 않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므로 중독된다는 것은 언제나 자신의 전적인 권력을 포기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의 우선권을 망가뜨리기, 약속을 지키거나 빚을 갚을 수 없는 상태로 스스로를 몰아가기, 아기는 요람에서부터 부모에게 빚을 물려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아기가 자란 먼 훗날 DNA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시기가 오면, 아버지가 자장가를 불러주는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어머니를 때리고 가정을 파괴하는 사람이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겁니다. 당신이 물려받은 이야기가 관건이죠. 나는 어떤 약속을 저버렸기에 중독자가 될 만했는가? 그 질문은 내가 어떤 배신을 물려받았는가에 가깝습니다. 부르주아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내가 살아온 삶을 초월합니다. 부자들은 자신들의 소박한 가족사에 열렬한 애착을 가지고 있죠. 우리가 중독에 빠져드는 과정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맥락과 늘 맞닿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빚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방식인 동시에 빚을 제거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나의 호흡을 방해해서, 엄청난 양의 마약을 스스로 주입함으로써 그 언어를 뱉어내는 겁니다. 혹은 마약을 통해 인식을 끊어버림으로써 나를 둘러싼 어른들의 수치심을 쫓아버리려는 건지도요. 상황을 잠시 떠나고, 간신히 빠져나오는 겁니다.


(221)

팬데믹이 끝나도 이성의 이대로 되돌아지 못하리라는 걸 모두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계 신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휴대전화 신, 인터넷 신, 핵폭탄 신, 비행기 신…… 이 모든 신은 우리를 무가치하다고 느끼게 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죽는 것에만 가치를 둡니다. 우리는 기계를 통해 진보한 존재가 아닙니다. 기계에 잡아먹힌 존재입니다. 우리가 만든 피조물이 권능에 경악하고 말았습니다. 기계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 속 하나님은 믿음을 입증하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의 몸을 내려치라고 요구했죠. 절대 권력을 숭배함을 입증할 때 우리가 아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권능을 위해 죽는 것, 바로 그 점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조잡한 바이러스로 죽는 걸 참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동차 사고는 멋진 죽음이 되는 겁니다!


(254-255)

사회적 명성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커다란 격차에서 발생한 산물이에요. 자기 마을이나 계층에서 이름을 얻는 그런 문제가 더는 아닙니다. 19세기 초 세공 장인의 명성이 어떤 것이었는지 잘 모르지만, 아마도 당시에는 가치가 있었을 겁니다. 어떤 영역에서 노력을 제공하고 그 분야에서 재능을 가지고 있었겠죠. 최선을 다해 윤리적 방식으로 작업하면, 주변 사람에게서 존경과 애정이 보상으로 따라왔을 테고요. 사실 그에 대해 잘 모릅니다. 내가 아는 범위는 20세기입니다. 미디어로 전파되는 명성이죠. 어떤 계층이 선택한 개인에게, 그를 바라보는 이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권리가 부여되었습니다. 대형 스크린 앞 관객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연기가 어떠하든 변화시킬 수 없고, 절대적으로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러요. 영화는 전개될 것이라고 예고한 대로 전개됩니다. 텔레비전 방송이 방영될 때도 마찬가지요. 브라운관 앞에서 무슨 짓을 하든지 상관 없어요. 그 과정에서 어떤 충격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이 도입되면서 상황이 바뀌었어요. 사람들이 개입하게 된 거죠. 개입에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 모욕임을 다들 바로 이해했습니다.


(285-286)

헛소리입니다. 감정은 오존층에 뚫린 구멍이고 기후변화이며 변함없는 화산 용암이자 바이러스의 폭격입니다. 공장이나 극장이 아니라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감정을 기쁘게 맞이할 수 없습니다. 감정은 당신을 복종시키기도 합니다. 늘 미소를 따다가도, 겁을 집어먹을 수도 있어요. 감정은 당신을 뒤죽박죽으로 휘저어 놓습니다. 감정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다듬을 수 있는 수공예품이나 개인의 창작물이 아닙니다. 감정은 도자기 그릇이 아니니까요. 우리 세대에 급격히 퍼진 감정은 절망입니다. 집단적으로 퍼져 있어요. 지구 중심에 요란하게 상륙했습니다. 우리 모두를 봉기시킨 것은 바로 그 감정입니다. 각자 사소한 메시지, 자신만의 공식을 가지고 돌진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당신이 세계의 지도자이든 대양의 중심을 떠다니는 표류물이든 상관없이 감정은 동일합니다. 우리는 감정에 구애받습니다. 그것은 다른 무엇도 대적할 수 없는 화음이며, 무슨 일이 발생하든 울려 퍼질 것입니다.


(286)

당신의 절망을 파괴하는 유일한 기술은 희망입니다. 무척 간단한 문제죠. 희망은 절망을 지우는 단 하나의 해독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압수당한 것 또한 희망입니다. 디스토피아가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지평선이 되어버린 겁니다. 미래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되리라 믿는 건 머저리라는 방증입니다. 그것은 승리한 전체주의입니다. 획일화된 신념이 우리 상상의 세계를 빼앗은 셈이죠. 대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희망은 멍청이들에게나 유익한 겁니다.


(398-399)

클레망틴과 오 일간 휴가를 다녀왔어요. 부끄러운 아버지 증후군에 시달리는 것 같아요. 아이와 함께 있을 때 불편하고 지루하거든요. 봉쇄 기간에 아이와 마음을 털어놓고 지내겠다는 계획은 흐지부지되었어요. 함께 있는 시간이 싫은 건 아니지만 같이 나눌 이야기가 없더군요. 아이는 주말 내내 휴대전화에 붙어 지냈습니다. 그 나이대의 전형적인 모습이죠. 누군가 뭘 좋아한다고 하자마자, 최신 트랜드를 알기 위해 휴대전화를 손데 쥐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쉬지 않고 셀카를 찍어대는데, 그때가 아이의 생기 있는 얼굴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에요. 한번은 세관원에게 가는 길에 아이가 한 장 찍어달라고 부탁했어요. 결국 사진을 잘 찍지 못했습니다. 예전에 제가 찍은 꼴불견 사진에 얽힌 우스꽝스러운 추억을 말해주려고 했는데, 정면 포즈를 피하라고 말하는 순간 아이가 움츠러들더군요. 늙다리 바보가 된 기분이었고, 아이와는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괜히 아이가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제가 아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겁니다. 노력하고 싶은 기분조차 들지 않아서 제가 얼마나 자책하고 있는지 상상도 못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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