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미군들은 월남사람들을 이라고 부르며 노골적으로 멸시하고 차별했다. 그러나 이라는 비칭은 월남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은 원래 미국에 사는 중국인들을 천시해 생겨난 것이었고, 그 비하의 지칭에는 아시아 황색인종 전체를 업신여기는 의미가 포괄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군들은 한국군은 연합군으로 자기네와 같다고 애써 구분하면서 월남인들만 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이상재는 그 얍삽한 수작이 오히려 역겹고 기분 상했다. 그건 단순히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백인들은 아시아인들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간주한다는 글을 일찍이 읽었기 때문이다. 황인종들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취급해 버리는 백인들의 그 대책 없는 오만과 우월감, 그에 대한 반감이 이상재는 월남에 와서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미군들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해서 월남사람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6.25 때 한국사람들을 그렇게 취급했던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86)

상층부 몇 명이 북쪽에 가고, 노동당에 입당을 하고, 거액의 돈을 받아가지고 내려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악명 높은 중정의 고문수사에 의한 조작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공개된 재판을 하게 되면 조작이 폭로되고 말 텐데 그럴 수가 있을까. 더구나 한두 명이 연루된 사건도 아니고 70명이 넘게 구속된 대사건을 가지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보다 더 어리석고 어리석은 일은 없었다. 그런 행위가 온몸에 휘발유 뒤집어 쓰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위험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 자신들이 추구했던 운동이 김일성 정권을 편드는 것이었던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남쪽 사회의 모순과 문제점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동시에 직시하고 해결해 나아가는 것이 사회혁신이며, 진정한 통일운동의 길이라고 인식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상층부에서는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인가? 자금이 필요해서? 그건 전혀 말이 안 된다. 돈이 없으면 운동을 중단해야지 돈 때문에 운동의 순수한 목적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그게 아니면 상층부에서는 처음부터 그런 의식과 목적을 가지고 조직원들을 속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건 악질적인 흉계고, 속은 자들의 순수한 무참하게 짓밟혔을 뿐이다.

 

(150)

전태일은 다시 고개를 숙여 보이며 봉투에서 서류를 꺼냈다. 그러나 근로감독관은 이야기 들을 자세를 전혀 갖추지 않은 채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훅 내뿜으며 책상 옆구리에 붙여둔 빈 의자가 있는데도 자리를 권하지 않았다.

저어, 저희들이 일하는 봉제공장들은 작업환경부터 사람으로서 견딜 수 없도록 형편없이 나쁩니다. 먼저, 천장 높이가 1.5미터밖에 안 되어 모두 허리를 구부리고 일을 해야 합니다. 원래는 3미터 높이였는데 사장들이 임대료를 줄이고 돈을 많이 벌려고 절반을 막아 2층으로 쓰기 때문입니다. 그런 공장들은 대개 8평 정도고, 평균 32명씩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비좁은 공장이 복도로 통하는 문 외에는 세 벽이 모두 막혀 있어 통풍이 전혀 안 될 뿐만 아니라 환기장치도 일절 없다는 사실입니다. 감독관님, 봉제공장은 모두 옷감으로 옷을 만들어내는 곳입니다. 통풍도 안 되고 환기장치도 전혀 없으니 원단에서 풍기는 코를 찌르는 포르말린 냄새며, 옷감을 재단하고 옷들을 만들면서 끝없이 일어나는 실밥먼지는 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대로 공장 안에 갇혀 있어서 공장 안은 언제나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침침합니다. 공원들은 그 먼지를 다 마시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먼지가 많이 나는 옷감일 때는 서너 시간만 일해도 먼지가 앉아 머리가 허옇게 되고, 도시락을 펴놓고 첫숟가락을 넘기기도 전에 밥에 먼지가 허옇게 내려앉아 먼지밥을 먹는 실정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먼저구덩이에서 날마다 14시간씩 일을 하다 보니 기관지염, 진폐증, 폐결핵, 각종 눈병들이……”

 

(160)

자아, 그럼 내 말 똑똑히 들어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분명히 사람이야. 그리고 이 세상 사람은 그 누구나 다 똑같이 평등해. 사람이면 모두가 다 공평하게 한 번 태어나고 한 번 죽는 것처럼 말이야. 사람은 모두 평등하니까 이 세상 사람은 누구나 사람답게 살 권리를 가지고 있어. 이게 무슨 말인고 하면 말야. 우리 공원들도 일반 직장인들처럼 하루 여덟 시간 일하고 제대로 봉급받고, 야근을 하게 되면 야근수당을 따로 받고 해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법이 만들어져 있어. 그건 나라가 만든 법인데, 그 법 이름이 바로 근로기준법이야. 그런데 그 법이 정확하게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 공원들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기계처럼 뼛골 빠지게 혹사당하면서도 거지꼴을 못 면하고 살고 있는 거야. 그런데 왜 그 법이 안 지켜질까? 사장들이 돈 많이 벌 욕심으로 안 지키기 때문이라고? 그거 맞는 말이야. 그러나 그건 정확한 답이 아니야. 사장들의 잘못은 3분의 1밖에 없어. 그 법이 제대로 확실하게 지켜지게 하려면 사장들 말고 또 책임져야 할 데가 두 군데가 더 있다 그런 말이야. 자아, 이 대목에서 내 말 똑똑히 들어. 그 두 군데 중에 한 군데가 나라에서 만든 법을 제대로 잘 지키나, 안 지키나 감독해야 하는 공무원들이야. 그럼 나머지 한 군데는 어디지?”

전태일은 두 공원 아가씨를 응시했다.

 

(283-284)

원병균은 여러 가지 정황을 세밀하게 살피면서 말을 잃고 있었다. 산비탈은 45도가 족히 될 만큼 경사가 심했다. 그런 급경사에 단층짜리 주택도 아니고 5층이나 되는 아파트를 세운 것이다. 최신 장비나 최신 기술이 있더라도 신경 쓰고 조심해야 할 난공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모든 자재들을 등짐으로 져올리고, 콘크리트 반죽도 삽으로 적당적당 해치우는 형편에 그런 난공사를 한 것이다. 땅값 비싼 서울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평지보다 몇 배 더 강하고 튼튼하게 공사를 하도록 규정을 정하고, 감시했어야 한다. 그러나 산동네마다 솟아오르는 시민 아파트들이 너무 졸속이고 날림이라는 비판은 이미 오래 전부터 나돌고 있었다. 그렇지만 부르도자시장은 그런 우려와 비판을 그야말로 불도저처럼 깔아뭉개며 일을 몰아붙여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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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김왕규는 나를 심판할 자격이 없는 친일파이며 민족반역자요, 나는 적어도 우리 조선민족을 외세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김왕규는 일제시대에 일본정부의 관료로 출세한 친일파요. 그런 친일파가 해방된 세상에서도 여전히 애국자 행세를 하며 설치고 있소. 나는 그런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싸웠던 사람이오. 김왕규는 자기 입으로 자기를 애국자라 하며 나를 비애국민으로 매도하지만 과연 누가 애국자고 누가 비애국민이오? 내가 취조를 받기 위해 검사 방에 갈 때마다 김왕규는 양담배를 수북이 쌓아놓고 피워댔소. 전쟁이 끝나고 우리 민족의 경제를 부흥, 발전시켜야 할 이 마당에 양담배를 피워대다니! 그가 과연 애국자요?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기 마련이오. 누가 애국자였고 누가 이 민족을 위해 살았으며, 누가 사형을 언도받아야 할지는 역사가 반드시 증명할 것이오. 당신들이 나에게 사형이 아니라 능지처참형을 선고한다 할지라도 나는 지금까지 내가 했던 모든 애국적 행위를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미제의 앞잡이들이 선고하는 무엇도 인정하지 않소!”

 

(173)

아이를 낳던 날 방구들을 파내던 경찰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태어난 날부터 내쫓겼던 아이, 죽는 날까지 울음 한번 시원하게 터뜨려보지 못하고 쫓겨만 다니던 아이, 네 앞에서 결코 부끄러운 어미는 되지 않겠다. 무엇이 우리에게 이토록 질긴 운명과 슬픈 이별을 강요하는가. 어미는 그것을 부숴버리고야 말겠다. 이 땅의 모든 어미가 밥을 달라고 우는 아이 때문에 눈물 흘리지 않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야 말 테다.

언젠가 너를 다시 만나는 날 어미는 네게 당당한 모습을 보여줄 테다. 네가 큰 소리로 맑은 웃음을 터뜨려도 입을 막지 않고, 같이 웃으며 힘차고 뜨겁게 너를 안아줄 테다. 여기서 쓰러지는 건 아이를 두 전 죽이는 것과 다름없다고 그녀는 이를 악다물었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내색하지 않아도 아이를 잃은 충격은 역시 컸던 모양인지 뱀사골에서 좀 좋아지던 건강이 다시 나빠졌다. 당사업을 제대로 하려면 건강이 최우선이었다. 예전처럼 다른 동지들의 짐만 될 수는 없었다. 한 사람의 일꾼으로, 아니 아이까지 두 몫의 일꾼으로 이제는 제 할 일을 다하는 투사가 되어야 했다.

 

(305-306)

지리산의 가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산꼭대기에서부터 화려하게 타오르는 단풍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순간 낙엽이 지고 거센 북풍과 함께 겨울이 닥쳐오는 것이다. 남부군의 마지막 낙원도 순식간에 지나갔다. 11월 초 서남지구 경찰병력이 총동원되어 비행기까지 합동으로 달궁을 공격해 들어왔다. 대형폭탄과 기총사격에 밀려 남부군은 결국 한 달여의 천국을 버리고 그 달 말까지 지리산 곳곳의 골짜기를 전전하면서 월동준비에 바빴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깊어가는 겨울과 함께 남한 빨치산을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한 그 유명한 수도사단의 공세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후평에서 9백여 명에 가까운 대부대로 승승장구하던 남부군은 이 수도사단의 공세가 끝나고 난 후 150여 명 정도만이 간신히 살아남는다. 그 수많은 인민군 정규부대도 넘지 못한 낙동강을 넘어 종횡무진 적의 심장을 들쑤시고 다니던 남부군, 후평에서부터 지리산까지 몇 천 리 장정 동안 유격부대답게 후방의 적을 마음껏 섬멸하고 다니던 남부군의 사실상의 유격투쟁은 이제 막을 내리고 있었다.

 

(388-389)

남편의 얼굴이, 이현상, 박종하, 이진범, 양봉순, 다 기억할 수도 없는 수많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동지들의 피가 스미고 살이 썩은 이 산은 봄이면 더 눈부신 녹음을 피워낼 것이다. 이 산으로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역사는 소용돌이치며 저 거대한 지리산의 산맥처럼 수많은 봉우리를 만들며 흘러갔다. 우리는 어떤 봉우리를 만든 것일까. 우리는 정상에 오르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우리의 또 다른 동지들이 정상으로 오를 것이다. ‘평등이라는 말만큼 자신의 생명을 걸고 불꽃같은 열정으로 또다시 꿈꾸는 자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그 혁명의 물결 속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이현상도, 박종하도, 마실 동무도, 김 영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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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오래전에 쓴 글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다시 한번 역사라는 것을 돌아보게 된다. 한국 현대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하고 목숨까지 걸게 했던 사회주의는 이미 역사의 뒷장으로 사라지고 있다. 중국이나 베트남, 쿠바 정도가 사회주의의 명백을 이어가고 있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사회주의를 현실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하니 사회주의란 소련이나 중국으로 대표되는 어떤 제도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었다. 우리에게 사회주의는 지금보다 더 나은 무엇을 가리키는 추상명사였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사람은 언제나 지금보다 더 나은 무엇을 추구하는 동물이므로, 사회주의가 사멸했다고 하는 지금 이 시간에도 더 나은 어떤 세상,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었던 옛 사람들의 기록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위안에 불과한 것일까.

 

(33-34)

나에게 주어진 자유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어항 속의 금붕어였을 뿐이었다. 어항의 벽을 깨뜨릴 수 없다면 굴욕적으로 숨쉬느니 어항 벽에 머리를 박고 죽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내게는 벽을 깰 방법이 없었다.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 있을 따름이었다. 판검사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다든가, 판검사가 될 수 없으니까 가능한 한도 내에서 의사라도 되겠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되지 않음으로 해서 세상을 비웃어주고 싶었다. 나는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살기로 했다. 나를 소외시킨 세상을 오히려 내가 소외시킨면서 말이다.

 

(55-56)

역사란 세계사 책 속에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걷는 이 길, 내가 사는 이 반내골에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다는 게 신비로웠다. 구름 위로 솟은 지리산을 볼 때면 가슴이 뛰었다. 어머니 아버지의 삶이 비로소 구체적인 형상을 띠고 다가왔다. 할머니의 말대로 공산당이 모두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면, 설령 두 분 때문에 연좌제 정도가 아니라 목숨마저 허용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내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가 반쪽짜리 역사였거나 어쩌면 완전히 잘못된 역사인 것만은 분명했다. 영어단어와 수학공식은 배웠지만, 이승만과 박정희의 공적에 대해서는 배웠지만, 학교에서는 내 혼란의 일부분도 해결해주지 않았다. 왜 세상에는 차별이 있는지, 왜 나는 공산당의 딸로 태어나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지, 할머니를 통해서 모든 것을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할머니는 책에 씌어진 역사와는 다른, 보통사람들의 역사가 있다는 것, 내 부모는 그 역사의 와중에서 그것이 옳든 그르든, 없는 사람들의 세상을 건설하겠다는 신념으로 목숨까지 내던졌다는 것을 내게 알려주었다.

 

(92)

그러던 9월 전국적인 총파업이 시작됐다. 그가 소속해 있는 철도에서의 파업이 총파업이 불씨였다. 애당초 철도파업이 내건 요구사항은 쌀을 달라는 대부분 인민들의 요구와 별다른 바 없었다. 일급제 반대, 기본급료 인상, 가족수당 일인당 육백 원 지불, 물가수당 인상, 식량을 본인에게 네 홉, 가족에게 세 홉씩 지급할 것, 운수부 직원도 동등하게 대우할 것 등이 노조의 요구조건이었다. 당시 모든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엄청난 물가상승으로 일제시대의 삼분의 일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철도국장 맥크라인은 철도노조가 제출한 요구조건에 대하여 인도 사람은 굶고 있는데 조선 사람은 강냉이를 먹고 있으니 행복하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군정청의 회답이 없자 철도노조는 24일 오전 9시를 기해 사만여 노조원들이 일제파업에 돌입했고, 26일에는 서울지역 출판부문 노동자들이 동조파업에 들어갔다. 그들은 26경성지방 총파업 출판노동조합 투쟁위원회의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51-152)

천하의 개망나니 박종하는 46년 말이 되면서 차차 변하기 시작했다. 동네사람들은 천하의 박종하를 저렇게 얌전하게 만든 게 누구냐며 수군거렸다. 박종하를 변화시킨 장본인은 곧 밝혀졌다. 바로 공산당이었다. 주먹이나 휘두르는 것으로 터져나올 수밖에 없었던 말뿐인 해방조선 젊은이의 답답함이 무신자를 위한 평등한 새 세계 건설과, 친일파를 비호하며 조선을 새로운 식민지로 만들려는 미 제국주의로부터의 민족해방이라는 이 땅의 역사적 사명을 알아가면서 비로소 진정한 자기 길을 찾기 시작한 것이었다. 조직활동을 시작하면서 놀랍게 변해가는 박종하를 보며 마을사람들은 공산당의 위력에 혀를 내둘렀다. 당시 남조선 대부분의 인민이 그랬지만 박종하와 같은 동네 사람들이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노인네나 젊은이들이나 모두가 좌익의 열렬한 지지자가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동네에서 조금 말썽피우는 사람을 보면 으레 저놈 공산당 만들어야 사람 된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262)

동무들! 우리는 조선노동당 당원들이오. 굶주리고 짓밟힌 무산대중을 위한 프롤레타리아 계급혁명가들이오. 혁명가는 이미 자기를 버린 지 오래요, ……혁명가는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혁명당을 따라야 하오. 동무들은 한 지도자의 일시적인 오류로 혁명사업을 그르쳤다고 해서 영원히 혁명을 포기하겠다는 거요? …… 이번 전쟁은 언젠가 중앙에서 다시 검토될 것이오. 그때 모든 과오들이 가려지고 비판되겠지요. 이 점 명심하고 동무들 몇 명이서 북으로 가겠다는 거요? 이미 퇴로도 끊겼소. 지금까지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지금 당장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를 결정하시오. 내 말이 옳다고 생각되면 각자 자기 부서로 돌아가 자기 임무를 다하시오.”

 

(313-314)

여름과 함께 소련이 유엔에서 한국전의 휴전을 제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또 한번 해방이 물거품으로 사라자는 순간이었다. 여순사건, 작년 여름의 광주 입성, 그 짧았더니 해방의 순간들이 스쳐갔다. 의지만으로 움직여지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은가. 내일모레일 것 같던 해방은 미제의 참전으로 물거품이 되고, 미제의 완전한 한반도 점령은 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저지되었다. 세계의 복잡다양한 얽힘 속에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파괴되고 부서졌다. 그렇게 세상은 흘러가고 있었다. 얽히고설킨 거대한 역사의 덩어리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역사의 발전과 진보를 확신하면서도 웬일인지 정체 모를 허전함은 마음 깊숙이 똬리를 틀고 사라지지 않았다. 생성하고 성장하고 소멸하는 것은 모든 사물의 아름답고 분명한 법칙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에는 슬픔도 있는 것일까. 한 인간, 그 개체는 죽되 인류는 발전한다는 위대한 진리 앞에서도 그는 가끔씩 섬뜩한 두려움과 슬픔을 느꼈다.

 

(363)

묻혀진 역사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세계 어디에도 한국의 현대사와 같은 뼈아픈 비극은 없었고, 또 그렇게 철저하게 묻혀진 비극의 역사도 없다. 아직까지도 우리 역사에 있어 가장 치열했던 그 시기의 이야기는 금기로 묻혀져 있다. 최근 들어 간혹 한두 사람의 묻혀진 이야기들이 비밀스럽게 들춰지기도 하지만, 당시의 역사적 흐름이 사실대로 밝혀지지 않는 한 한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거대한 물줄기의 한 지류일 뿐이고, 그 작은 흐름이 정당한 평가를 받는 것도 도도한 원 물줄기가 제자리를 잡을 때뿐일 것이다.

 

(384)

박갑출도 전적으로 그의 견해에 동의했다. 이제 남한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은 보라빛 먼 날의 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간부들 중의 어느 누구도 이전과 같은 혁명의 결정적 시기가 당장 다시 오리라고 믿지 않았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최후까지 싸우다 죽는 것과, 언제일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다시 오고야 말 혁명의 결정적 시기에 대비해 도시로 들어가 지하조직을 구축하는 길뿐이었다. 그날이 언제쯤일까? 10년 뒤일 수도 있고 어쩌면 50년 뒤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뿌린 싹이 해방의 그날을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면 지금 당장 죽어도 좋았고, 살아서 볼 수 없는 날을 위해 준비하는 것도 좋았다. 단지 이 결정적 시기를 해방으로 성공시키지 못한 쓰라림이 남는 것뿐이었다. 이제 밀알이 되는 것, 땅에 뿌려져 더 많은 밀로 태어날 그날을 위해 자신을 죽이는 것, 그것이 남은 그들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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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김선오는 눈을 맞으며 한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아득한 눈발 저쪽에 무등산이 그 우람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광주에서는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산, 광주에 오면 누구나 바라보는 산, 언제나 중후하고 의연하고 듬직하고 넉넉한 자태의 무등산은 겹겹의 눈발이 지어내는 환상적인 옷을 입으며 묘한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광주를 내려다보듯 보듬듯 하고 있는 그 산을 무시로 바라보며 무등의 의미를 가슴에 새겼던 지난날을 김선오는 왠지 슬픈 감정으로 더듬고 있었다. 등수를 매길 필요가 없도록 으뜸이 되겠다는 꿈 속에는 고등고시 최연소 합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자신의 모습은 무엇인가……

꿈은 클수록 좋고, 욕망은 치열할수록 좋다.”

 

(37-38)

그게 말입니다…… 얼핏 보면 항아리에 담아놓는 것이 더 손해일 것 같은데, 전체적으로 따지고 보면 꼭 그럴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왜냐하면 딴 그릇에 따로 내와도 깍두기가 모자라게 되면 사람들은 또 달라고 합니다. 그럼 다시 갖다 주느라고 일손만 많아지게 됩니다. 그런데 항아리에 담아두면 그 일손을 덜게 됩니다. 그리고 또…… 딴 그릇에 두 번 내온 것이 많아서 남기게 되면 그건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항아리에서 각자가 먹을 만큼씩만 꺼내 먹으면 그런 낭비를 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항아리에 이렇게 담아두면 인심을 후하게 쓰는 것 같아 손님들을 기분 좋게 하고, 그게 더 손님을 끄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78)

허진으로서는 어쩔 수 없을 거야. 자기 할아버지와 집안을 생각하면 그 심정이 어떻겠어. 일본놈들이 백배사죄하며 돈을 싸짊어지고 와도 시원찮을 판인데, 오히려 이쪽에서 사죄 같은 건 상관없이 어서 돈이나 좀 달라고 매달리는 형국 아니냔 말야. 그러니 자기 할아버지가 짓밟히고 모독당하는 것 같고, 괜히 헛된 일 한 것 같고, 또 엉망이 된 집안 꼴을 보면 얼마나 기막히겠어. 우리가 허진의 심정을 다 알 수는 없는데, 어쩌면 죽고 싶은 심정으로 데모를 하는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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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1)

취리히는 늙어가기에 좋은 도시다. 죽기에도 좋다. 유럽의 나이 지형도 같은 게 있다면 분명 다음과 같이 분포되어 있을 것이다. 파리, 베를린, 암스테르담은 젊음을 위한 곳이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분위기, 어디선가 풍겨오는 대마초 냄새, 마우어파크에서 맥주를 마시고 풀밭에서 뒹굴거리는 사람들, 일요일의 벼룩시장, 가벼운 섹스…… 그 다음에는 빈이나 브뤼셀의 원숙함이 자리한다. 느려지는 박자, 안락함, 전차, 적절한 건강보험, 아이들을 위한 학교, 약간의 경력 쌓기, 유럽연합의 지루한 행정직 일자리. 그래, 좋다, 아직 늙기 싫은 사람들을 위해서는-로마,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맛있는 음식과 훈훈한 오후는 교통, 체증, 소음, 약간의 무질서를 상쇄할 것이다. 젊음의 막바지에 이른 이들에게는 뉴욕을 추가하겠다. 그렇다. 나는 그곳을 어떤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대서양 너머로 건너간 유럽 도시로 간주한다.

 

(73-74)

향을 기록하는 장비가 없다는 사실이 진정 놀랍지 않은가? 실은 하나가 있긴 하다. 기술보다 앞서 존재한 단 하나의 도구, 가장 오래된 아날로그 도구. 그것은 물론 언어다. 당분간은 언어 말고 다른 도구가 없으므로 나는 어쩔 수 없이 여러 향기를 말로 포착해 또다른 노트에 추가해야 한다. 우리는 묘사해봤거나 배교해본 향기만을 기억한다. 놀라운 점은 이런저런 냄새에 대한 이름도 없다는 사실이다. 하느님 혹은 아담은 일을 제대로 끝마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빨강, 파랑, 노랑, 보라 등등의 이름이 있는 색깔과는 다르다. 향기는 언제나 비교를 통해, 묘사를 통해 인식된다. 제비꽃 냄새가 난다. 토스트 냄새가, 해초 냄새가, 비 냄새가, 죽은 고양이 냄새가…… 하지만 제비꽃, 토스트, 해초, , 그리고 죽은 고양이는 향기의 이름이 아니다. 이 얼마나 부당한가. 아니 어쩌면 이 불가능성 아래에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다른 징조가 숨어 있는지도……

 

(79)

가만히 앉아서 인생 끝자락에 여기에 온 사람들과 함께 흘러가는 나의 불가리아 과거를 바라본다. 노인들은 언제나 나를 매혹한다. 나는 어렸을 때 노인들과 함께 살았다. 조부모와 더불어 자란 우리는 그들과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지만 다른 한 세대를 통째로 잃어버렸다. 바로 우리 부모들. 이제 나도 그들과 같은 대열에 합류했음을 깨닫는 지금, 나의 매혹에는 또다른 동기도 있다. 죽음을 직면하고 삶에서 계속 멀어지면서 어떻게 나이들 것인가? 구해낼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기억으로라도, 그러고 나면 그 개인적 과거는 다 어디로 가는가?

 

(169-170)

인생(과 시간)이란 얼마나 도둑 같은가, ? 얼마나 강도 같은가….. 평화로운 카라반을 매복 공격하는 악랄한 노상강도보다 더 악랄하다. 그런 노상강도들은 돈 가방과 숨겨둔 황금에만 관심이 있다. 그들은 당신이 유순하여 실랑이 없이 재물을 내놓으면 다른 것-목숨, 기억, 심장, 생기-은 빼앗지 않는다. 그러나 인생이나 시간이라는 이 강도는 어느덧 다가와 모든 것-기억, 심장, 청력, 생기-을 앗아간다. 심지어 고르지도 않고 닥치는 대로 손에 넣는다. 그걸로도 모자라는지 그 와중에 당신을 조롱하기까지 한다. 가슴을 축 늘어지게 하고, 엉덩이엔 뼈만 남게 하고, 허리를 굽게 하고, 머리칼을 성긴 백발로 변하게 하고, 귀에서 털이 자라게 하고, 온몸에 점을 뿌려놓고, 손과 얼굴에 검버섯을 돋게 하고, 앞뒤 안 맞는 말을 지껄이지 않으면 아예 입을 다물어버리게 하고, 모든 말을 빼앗아 아둔하고 망령 든 사람이 되게 한다. 그 개자식은-인생, 시간, 노년 다 똑같다, 똑 같은 쓰레기, 똑 같은 깡패다. 그 개자식은 처음에는 적어도 공손해지려는 노력이라도 한다. 솜씨 좋은 소매치기처럼 일정한 한계 안에서만 도둑질하는 것이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작은 것들을 훔쳐간다-단추 한 개, 양말 한 짝, 가슴 왼쪽 윗부분의 미세하게 찌릿한 통증, 몇 밀리미터쯤 두꺼워진 안경, 앨범 속 사진 세 장, 얼굴들, 그 여자 이름이 뭐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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