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이중섭은 날마다 두 가지에 집착했다. 하나는 그림, 또 하나는 가족. 화가들은 대부분 그림과 가족을 한자리에 두지 않았다. 그림을 그릴 땐 가족을 잊고, 가족과 머물 땐 그림을 잊었다. 이중섭은 그림 속에 가족을 두고, 가족 속에 그림을 두었다. 아내가 이남덕이기에 가능했다. 그녀 역시 문화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했기에, 그림을 향한 남편의 진심을 투명하게 받아들였다. 이중섭이 기쁠 땐
화가로 기쁜 것이고 슬픈 땐 화가로 슬픈 것이며 화날 땐 화가로 화난 것이다. 부부의 대화는 그림에서
시작하여 그림으로 끝났다. 태현과 태성은 부부가 나눈 화담(畫談)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두 아들이 훗날 아빠처럼 그림을 업으로 삼을지는
미지수지만, 그림을 평생 가까이 둘 것은 확실하다. 네 사람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일궜다. 한국의 예의와 상식도 아니고 일본의 예의도 상식도 아니었다. 사람으로서의 예의와 상식은 너무 거창한 이야기다. 그들은 그림이라는
나라에서 편안하고 자유로웠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35)
가족을 그렸다. 그림 속에서 가족은 굶주리지 않았고
울지 않았고 아프지 않았고 춥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평화로웠다. 부산과
서귀포의 참담한 현실과 정반대로 그린 까닭을, 아내와 두 아들은 따지지 않았다. 그림에 담긴 이야기들을 일용할 양식처럼 삼키며 하루를 나고 한 달을 나고 일 년을 났다.
(46-47)
밥은 굶어도 담배를 건너뛸 순 없었다. 술 또한
거의 매일 입으로 들어갔다. 이중섭에게 술과 담배는 갈매기의 두 날개처럼 어울리면서도 목적지는 상반된
생필품이었다. 술을 마시고 취기가 오르면 희망은 더 희망적으로 절망은 더 절망적이었다. 과장은 허풍이 술자리의 중요한 안주인 이유였다. 이중섭은 대부분
더 절망적인 쪽이지만, 그 감정을 이야기로 풀진 않았다. 담배는
혼자서는 피우지만, 술은 어울려 마셨다. 벗들이 희망적인
상상에 파안대소하고 절망적인 예감에 호곡성을 터뜨릴 때, 이중섭은 위장병이 도진 듯 우울하고 쓰린 얼굴로
듣기만 했다. 정말 견디기 힘들면 울음을 삼키며 눈물만 떨어뜨렸다. 울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서둘러 마시곤 아무 곳에서나 웅크려잤다.
(64)
빈센트 반 고흐에게 해바라기가 있다면 이중섭에겐 단연코 소다.
대작을 그리겠노라고는 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그릴지 밝힌 적은 없다. 화우(畫友)들도 따져
묻기보다는 꼭 그리라고, 이제 때가 되었다고 했다. 완성하고
나면 축하주를 마시자는 이도 있었다. 고흐는 해바라기를 오랫동안 많이 그렸다. 두 송이부터 시작해서 열다섯 송이까지, 파리에서도 그렸고, 아를에서도 그렸다. 이중섭 역시 소를 계속 그렸다. 맘을 다 쏟아 그림을 그릴 조건이 되면, 가장 먼저 떠올리고 그린
것이 소였다. 도쿄에서도 그렸고 원산에서도 그렸다. 서귀포에서는
그리지 않았고, 부산에서는 그리고 싶어 끼적이긴 했지만 흡족하지 않았다. 해바라기를 그린 사람이 고흐 이전에도 많았고 당대에도 많았으며 후대에도 많듯이, 소도 마찬가지다. 조선의 화인들이 그린 소가 몇 마리가 될까. 헤아리기 힘들다. 이중섭과 가까운 선배 중에도 1941년 조선신미술가협회를 함께 만든 진환이 소를 좋아했고 자주 그렸다. 누가
먼저 그렸는가 혹은 얼마나 많이 그렸는가 하는 물음은 어리석다. 문제는 수준이다. 대작이란 두 글자는 작품의 크기가 아니라 최고의 성취를 가리킨다. 이중섭은
통영에서 소를 완전히 새롭게 그려보리라 결심했다. 고흐가 아를에서 전혀 다른 해바라기를 선보였듯이.
(78)
통영은 붉다. 이렇게 밝히면 대부분 고개를 젓는다. ‘통영은 푸르다’를 잘못 말한 것이 아닌지 묻는 이도 있다. 이중섭도 통영을 방문객으로 오갈 때는 푸르름에 압도되었다. 전혁림의
그림에서 넘쳐나는 파랑이 과장이 아니라며,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였다.
부산에서 그림을 싣고 강구안에 내린 다음 날 새벽, 통영이 붉은 항구란 사실을 목도했다. 늦게까지 마신 환영주에 목이 말라 깨지 않았다면, 숙취로 두통이
심해 바람이라도 쐬자 싶어 산책을 나서지 않았다면, 밤길이 서툴러 되돌아오지 못하고 헤매다가 남망산에
닿지 않았다면, 비가 그치지 않았다면, 중절모를 눌러쓰고
목도리까지 두른 사내가 오르막을 경쾌하게 앞서 걷지 않았다면 통영의 새뜻한 붉음을 영영 몰랐을 것이다.
(89)
“시인을 견자(見者) 즉 보는 사람이라 하디. 무슨 것을 봔? 평범한 사람은 아니 보는 걸 본다 이거이야. 기렇게 본 걸, 글로 바꾸문 시인이구 그림으로 바꾸문 화가! 시인은 글 짓는 화가구, 화가는 그림 그리는 시인이다 이 말입네. 화가는 색깔에서 글자를
읽구, 시인은 글자에서 색깔을 본다! A는 흑색이구 E는 백색이며 I는 적색이구 U는
녹색이구 O는 청색이구, 불란서 시인 랭보래 말햇디. 시인이 모음들의 색깔을 맨들 듯, 화가는 색깔들의 모음으로 이야기를
발명해 왓어.”
(92)
통영에선 머리와 손이 따로 노는 이들을 최하로 친다. 말
대신 행동을 믿으며, 그 손으로 그 사람을 평한다. 재산도
학력도 품성도, 단련된 솜씨 앞에선 하찮다.
(118-119)
“요쪽은 ‘현실파’고 조쪽은 ‘아아파’입니더. 유치환 선생님은 ‘아아파’의
원로고 윤이상 선배는 허리고 지는 막내축에 속하지예. 삼일 운동 나고 두 파가 생깄십니더. ‘현실파’는 일본인들에게 협조해 돈도 벌고 기술도 익혀 실력을 기르자는
입장이고예, ‘아아파’는 굶어 죽어도 타협은 못한다는 입장이지예. 윤이상 선배가 운을 딱딱 맞차가 ‘아아파’를 설명하신 적이 있심더. 민족의 설움을 제 설움으로 받아들인 ‘아아아아파’는 호수같이 맑은 바다 위에 뜬 달을 보고 아아 하구, 봄날 아지랑이 전원서도 아아 하구, 가을 낙엽을 밟으믄서도 아아
한다구 말입니더. ‘아아파’들 중엔 옥살이한 사람도 많심더. 팔일오 해방 후에 ‘현실파’들은
빠져나간 일본인들 자리를 차지해가 토영 경제권을 잡겄다고 설쳤지예. ‘아아파’는 민족혼을 표현하구 가르칠라고 예술가도 되고 교육가도 됐심더. 문호협회도
맨들고…… 펭안남도 평원이 아이라 겡상남도 토영서 태어나싰다믄 돈이나 기술보단 민족의 양심을 지키는
‘아아파’셨을 깁니더.”
(131)
두 사람을 묶어 비교하는 역사는 오래되었다. 카인과
아벨이 그러하고, 유비와 조조가 그러하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그러하다. 음악가인 베토벤과 모차르트, 작가인 괴테와 실러도
이 범주에 든다. 화가들도 종종 언급되었는데, 대중은 고흐와
고갱을 제일 많이 입에 올렸다. 이중섭과 그의 친구들이 자주 논한 화가는 피카소와 마티스였다.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질투도 하고 경쟁도 한, 서로의 작품 세계를
인정한 라이벌이었다. 열에 일곱은 피카소를 우위에 뒀고 마티스를 선호하는 화가는 셋이 될까 말까였다. 이중섭은 소수파에 속했다.
(132)
피카소가 분방한 방외인이라면 마티스는 수도하는 교수다. 피카소는
무리와 어울리며 으뜸이 되기를 갈망했고 마티스는 홀로 숙고한 작품으로 무리에 충격을 주기를 바랐다. 피카소가
불이라면 마티스는 물이다. 물이긴 하되 그림 속에서 펄펄 끓는 물이다.
피카소는 그림 외에도 각종 기행(奇行)으로 유명했다. 때마다 바뀌는 뮤즈의 이름과 사진이 잡지와 신문에 실리고, 작업을
위해 사들인 저택과 사진이 잡지와 신문에 실리고, 작업을 위해 사들인 저택과 즐겨 참여한 파티도 세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기행은 그림값을 떨어뜨리기는커녕 몇 배 혹은 몇십 배 뛰어오르게 했다. 작품은 작품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들러붙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은 화가가 피카소였다. 스스로 이야깃감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귀찮아하지도
않았다.
(168-169)
“사람은 둘로 나뉘디. 전쟁을 겪은 사람과 겪디 않은 사람! 전쟁을 모르는 남해바닷가 사람들보다두
내래 니순신 장군님과 더 가깝다구 느께. 장군님두 나두 전쟁을 겪엇으니까니. 둥세전이냐 현대전이냐, 나라과 나라 사이 전쟁이냐 나라 안 전쟁이냐, 요딴 식으로 나누딘 말라마야…… 전쟁은 전쟁! 전사자보다 몇 배 많은 삶을 뒤흔들구 파괴해. 새로운 무서움이구
낯선 끔찍함이라 이거이야. 죽는 것두 두렵다만, 개진 걸
다 잃구 사는 것두 무시무시하긴 마찬가지디. 가솔두 친구두 돈두 직업두 없이 사는 자의 슬픔과 고통을
장군님께선 아셔. 하루라두 빨리 전쟁을 끝내구 싶으셨던 것이야. 길멘서두
서두르다 패하문 그 피핸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가. 냉정하게 버티며 견딘 사내! 전쟁이 무슨것인가를 온몸 온 맘으로 깨달은 사내! 통영 앞바다는
장군님이 오가신 물길이디. 내래 세빙관이나 충렬사나 착량묘에 가문 전쟁부터 떠올려. 장군님과 함께 고민할 문제니까니. 이 망할 전쟁이 몸과 맘에 새긴
상처를 장군님께 보여드리려구 붓을 놀렛던 것이야. 알것어?”
(174)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갓 넘어갔을 때, 이중섭은
전투하듯 예술을 하겠노라 말하곤 했다. 그만큼 치열하게, 죽을
각오로 임하겠다는 뜻이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더 이상 예술을 전쟁에 비유하지 않게 되었다. 전쟁과 예술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예술은 평화다. 평화여야 한다.
(202-203)
속삭이는 소, 친구가 많은 소, 여물을 맛보고 찡그리는 소, 코뚜레를 흔들며 나무 그늘에서 조는
소, 우는 소, 되새김질하며 거품 흘리는 소, 기뻐 껑충껑충 뛰는 소, 노리는 소, 송아지를 불러들이는 소, 뒷발질에 열심인 소, 실수하는 소, 떨어진 꽃잎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소, 교접하는 소, 어미 소에게 도움을 청하는 소, 코를 박고 물을 마시는 소, 올려다보다가 별을 발견하고 놀라는 소, 밭 가는 소, 날아가는 멧비둘기와 참새를 따라 고개 돌리는 소, 외톨이를 자처하는 소, 내달리는 소, 빼앗는 소, 머리에 머리를 부딪치는 소, 고집부리는 소, 벽을 들이받는 소,
엎드려 기다리는 소, 가지 않겠다고 버티며 뒷걸음질하는 소, 앞발을 땅을 파헤치는 소, 꼬리를 흔들어 벌레를 쫓는 소, 먼저 알아보고 다가와서 인사하는 소, 오르막길 앞에서 한숨 쉬는
소, 늙었지만 병들지 않은 소, 멍한 눈으로 세월을 되씹는
소, 웃는 소, 새끼 낳는 소, 먼저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소, 어미 소를 싫어하는 소, 숨는 소, 산책을 즐기는 소, 잠든
소, 병들어 마른 소, 절뚝거리는 소, 용서하는 소, 냄새 맡는 소, 멈춰
기다리는 소, 죽은 소.
(246)
이중섭이 가장 오래 가까이 두고 들여다본 화가는 루오였다. 루오를
접한 후부터는 마음의 시소에 얹는 화가들의 위치가 바뀌었다. 루오가 홀로 한쪽을 차지했고 고흐와 고갱과
마티스를 반대쪽에 묶어 얹었다. 고흐와 고갱과 마티스가 제 뜻을 발산하는 방식이라면, 루오는 그것을 색으로도 누르고 형상으로도 눌렀다. 곡진했다. 타인에게 내뿜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난타해 무너뜨렸다. 이중섭은
고흐처럼도 그려 보고 고갱처럼도 그려 보고 마티스처럼도 그려 보았다. 눌변과 머뭇거림과 내면을 파고드는
자신의 성향과 어울리는 화가는 루오였다.
(254)
아우슈비츠 이후, 역사에 대한 낙관을 아예 접은
예술가들도 나왔다. 한국전쟁과 맞닥뜨린 이중섭은 도쿄에서 연애할 때처럼 사랑이 충만한 세상을 줄기차게
그릴 수는 없었다. 피란민의 눈에 비친 세상은 만물이 화평하기는커녕 살아남기 위해 매일매일 죽고 죽이는
전쟁터였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러하기에, 아주 가끔은 아비규환을
잊을 만큼 강력한 유토피아를 그려보고 싶기도 했다. 사람은 희망 없인 살 수 없는 족속이다. 도쿄의 엽서화에서 둘만의 꿈을 속삭였다면, 월남 후 그린 유토피아는
끔찍한 체험에 바탕을 두되, 더 많은 이들이 따스함을 느끼고 미소 짓기를 바랐다. 현실엔 없는 행복이란 비판을 받았지만, 부산과 서귀포와 통영을 떠돈
이중섭만이 발견한 ‘신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