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

가족과 일 외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뭘까 생각하니 예나 지금이나 소설 읽는 즐거움만 한 것이 없었다. 읽은 소설을 통틀어 내 즐거움이 비교 기준은 제인 오스틴의 작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오스틴의 여자 주인공들에게서 내가 되고 싶은 여성상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 작품들에 대한 향수가 가슴에 밀려들었다. 그래서 나는 재활 치료라 생각하고 다시 독서에 열중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우선은 오스틴의 소설 여섯 편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나를 오스틴의 애독자로 만들어준 그 촌철살인의 위트와 귀가 닳도록 인용되는 문구들과 생기 넘치는 대화들을 다시 읽어보고 싶었다. 당시에는 미처 몰랐지만, 나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독서법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오스틴의 작품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그 세계관의 프레임에 비추어 내 인생의 만족과 불만족을 탐색해보기로 했다.


(51)

제인 오스틴이 보여준 언어의 가능성을 활자로, 또 내 귀로 발견했을 때 내 앞에 소설로 통하는 새로운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다른 문이 닫혔다. 어머니와 내가 일주일에 한 번 울타리 너머에서 우리 앞마당에 던져놓고 가는 잡지를 손꼽아 기다리다가 어머니는 유명 인사의 가십에 대한 갈증을 채우고 나는 틈새에 실린 단편소설을 읽어치우던 그런 시절이 안녕을 고했다. 클리셰니 스테레오타입이니 하는 말은 모를 때였지만, 햄릿식으로 말하자면, 그런 작법과 인물들이 어딘지 식상하고 밋밋하고 쓸모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아침에 흥미가 사라져버렸다.


(84-85)

오스틴은 엇나가기 좋아하는 습성으로 진득한 책 읽기를 거부하는 인물을 <에마>의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독어야말로 무지와 무분별함과 도덕의식의 결여 같은 인간 본성의 과오는 바로잡을 해독제라고 이야기한다. 주인공 에마는 독서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읽겠다고 마음먹은 책들의 목록을 작성하는 것 이상으로 열정을 발전시키는 경우가 거의 없다. 에마가 나이 차가 나지만 그녀의 친구이자 멘토이면서 서사가 충분히 무르익으면 결국 그녀의 연인이 될 운명인 나이틀리 씨는 에마의 예전 가정 교사에게 마음먹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어쩌면 다소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에마의 공상의 나래를 독서가 바로잡아줄지도 모른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과연 에마는 자신에게 유독 타인과 타인의 의도를 이해하는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이때 깨달음의 매개는 경험이다. 어떤 인생이든 태반은 의심, 불확실, 실망이 뒤죽박죽되기 마련일 텐데, 큰 틀에서 볼 때 내 경우에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것들을 다스리는 치유법을 찾아갔던 것 같다.


(157)

사춘기에 접어든 그때 나는 현실에서처럼 빛과 그림자가 불가분하게 뒤섞인 세상으로 들어가 그것들을 체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신이 창조한 세상이 아닌 한 작가가 창조한 허구의 세계였다. 그가 소리와 인격과 생각을 불어넣어 완성한 정연한 패턴 안에 단순한 결혼 플롯을 뛰어넘는 인생의 비전이 담겨 있었다. 내가 평생 이어갈, 궁극적으로 내 삶의 암흑기에 빛을 비춰줄 허구의 경험 읽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167-168)

나는 세월이 쌓이고 과거를 기억하는 일이 호락호락하지 않게 느껴질수록 소설 안에서 역사가 다뤄지는 방식에 관해서 관심이 증폭되다 못해 이제는 역사적 호기심의 노예라고 해도 될 판이다. 소설이 어떻게 과거로 현재를 재구성하는지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고 소설 안에서 인생살이에 대한 신선한 시각을 발견하는 유익한 효과도 따라온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캐서린은 역사책이 온통 짜증 나고 지루한이야기뿐이라고 불평을 늘어놓는데, 그 말을 듣고 있는 틸니 양은 친구의 의견을 받아주는 것 같으면서도 역사를 집필하는 사람들 쪽으로 슬쩍 주제를 선회한다. “역사가들은 기꺼이 공상의 나래를 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군요. 흥미를 자아내지 않더라도 그들도 상상력을 발휘하긴 하죠.” 이런 식으로 대화가 이리저리 튀며 두 아가씨의 정신세계를 비춰 보인다.


(225)

그리하여 나는 팔십 줄에 접어들어서도 여전히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모든 여학생들이 졸업 앨범 방명록을 간직하던 시절, 브레인 선생님으로 짐작되는 이가 내 졸업 앨범 방명록에 대략 이런 의미의 글귀를 남겼다. 공중에 누각을 지은들 이떠랴, 토대만 단단히 세우면 그만이지. 글귀 아래에는 철학자 소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이미 나만의 누각에서 살고 있었고, 어쩐지 앞으로 10년 안에 그럭저럭 토대를 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어떤 예감이 찾아오고 있었다. 흔히들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는 그런 황홀한 도취가 다시 한번 나에게 다가오는 느낌. 이번 상대는 인생이라는 것도.


(310)

나는 <맨스필드 파크>를 내려놓고 창밖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이제 내 감정들은 폭풍우가 지난 뒤 에마가 경험하는 고요함과 온화함과 화사함에 한결 가까워져 있었다. 소설 속에서는 패니의 위상이 높아지는 게 아니꼬운 노리스 부인과 패니 사이에 한창 긴장이 심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노르스 부인이 발버둥 쳐봤자 장차 맨스필드 파크 안에서는 영지 관리의 공정성이 검토될 것이고 그러면서 개인의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이 부각될 것이고 그럴수록 패니의 역할은 더욱 확실해지리라. 억압적인 남성이 권위에 꺾이지 않는 패니 프라이스는 얼마나 용감한가. 두 번째로 그 사실을 확인하며 나도 재삼 결의를 다졌다. 내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되 결코 내 이익을 팽개치지 않으리라.


(352-353)

물론 에마의 마음을 이 정도로 이해하게 되었을 때의 내 나이는 에마보다 예순 몇 살이 더 많았지만, 지금도 늦은 건 아니지 싶다. 인간의 변화 의지에 시간 제약이 따로 있겠나. 에마가 자신과 타자에 대한 더 나은 이해에 다다랐을 때 그런 마음 상태를 가리켜 비평가 라이어널 트릴링은 지적인 사랑이라고 부르는데, 꽤나 의미가 마음에 든다. 사랑을 기억력처럼 지능의 한 형태로 본다니 위안이 좀 되지 않나. 대관절 오스틴의 여주인공들은 사랑에 관해 학습할 기회를 얼마나 끝없이 제공하려는 건지. 중요한 건 몇 번이고 되풀이하되 매번 세심하게 읽는 것이겠지. 오스틴은 세심한 독서에도 끄떡없다라고 오스틴의 팬인 손턴 와일더는 말하더라. 제인 오스틴 개인의 삶의 반경이나 소설의 사회적 반경이 제한적이었다고(성 경험이 부족했으리라는 추정과 함께) 이야기할 수는 있는지 몰라도 그의 관찰과 사유가 길러지는 상상력이라는 토양은 더없이 비옥하고 풍요롭다. 나도 그 토양의 기운을 끌어와 내 인생의 중심에 사랑을 길러보련다. 흔한 사랑 말고 다른 사랑들, 공감적 독서에 대한 사랑이나 자신에 대한 사랑 같은 것 말이다.


(375)

어떻게 해야 더 명료하게 내 뜻이 전달되려나. 나는 목소리를 조금 더 높였다. “까놓고 말하자면 관습의 틀 안에 살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스스로를 기망한 거야. 안전한 삶에 안주한 줄 알았는데, 언젠가부터 튕겨 나가고 있더라. 내 자리를 지키기는커녕 밖으로 밀려나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라니, 내가 고작 이 정도인가, 인생에서 얻은 게 고작 이 정도인가 싶어서 감당하기 힘들 만큼 좌절했어.”


(398)

그런 여성들이 있는가 하면 세상을 뒤흔든 강고한 의지의 여성들이 있다. 소설을 통해 조심스러우나 신랄하게 세상을 동요시킨 제인 오스틴이 있었고, 저술과 삶 양쪽 모두에서 당대 사회의 존립 기반에 파문을 몰고 왔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 외에, 오스틴처럼 재능이 있지도 못하고 울스턴크래프트처럼 대담하지도 못한 우리들이 있다. 단지 우리 인생의 정형화된 패턴을 바꾸고 싶은 소박한 욕구를 가진 우리를 말이다. 솔직히 이미 어지간한 축복을 욕구를 가진 우리들 말이다. 솔직히 이미 어지간한 축복을 누리지 않으냐고 묻는다면 차마 부인하기는 어렵겠다. 그러나 개인적이든 문화적이든 이유가 어떤 것이든 우리가 누리는 축복에는 제인 오스틴의 <에마>에서처럼 가정법이 전제되어 있다. 세상만사가 에마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상황일지라도 실상은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고 오스틴의 언어와 상상이 귀띔해주지 않던가. 에마는 그렇게까지 축복을 한 몸에 받은 사람이 못 된다. 핀홀로 보이는 세상 바깥에 놓인 것까지 보는 능력은 못 가졌으니 말이다. 대신에 오스틴은 이 인물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준다. 완벽하지 못한 여주인공의 완벽한 소설은 그렇게 탄생하더라.


(407)

소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들은 가능성의 영역이고, 현실의 우리는 우리 나름의 선택을 내리고 이럭저럭 그 선택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보면 내가 한때 나의 남주인공으로 착각했던 사람, 그러나 먼 길을 돌고 돌아 결국 나의 친밀한 동반자가 된 사람과 따로 또 같이 사는 지금의 내 인생에는 소중한 우정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편과 내가 공유하는 관계도 있고 애정의 방향이 갈라질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 나한테 더 중요한 건 정녕 진실로만족스러운 인생을 꾸려갈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준 일등 공신이 지금도 내 책상에 앉아 있는 나의 길잡이 제인 오스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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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

거기에 악취까지 동반되어 공포스러운 광경은 더욱 끔찍하게 와닿았다. 썩어 가는 살에서 나오는 역겨우면서 달착지근한 냄새가 사방으로 수 km까지 뒤덮었다. 다가가는 병사는 시신을 눈으로 보기 전에 냄새부터 맡을 수 있었다. 악취는 그가 먹는 상한 빵에도, 마시는 고인 물에도, 입고 있는 넝마가 된 군복에도 배어 있었다. 1차 세계대전 때 싸운 로버트 C. 호프먼 중위는 20여 년 뒤 미국이 두 번째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이렇게 경고했다. “죽은 지의 악취를 맡아본 적이 있나요? 모래알 하나를 보고서 애틀랜틱시티의 해변을 떠올린다고 상상해 보세요. 생지의 악취와 오래 전에 죽어 쌓여 있는 병사들에게서 나오는 악취의 차이가 그 정도는 될 겁니다.” 호프먼은 시신을 묻은 뒤에도 <여전히 악취가 지독해서 몇몇 장교가 심하게 알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34-35)

클레어에게는 다행히도 헤럴드 길리스라는 선견지명을 지닌 외과의사가 얼마 전부터 영국 시드컵의 퀸스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얼굴 재건만을 전담하는 세계 최초의 외과의사 중 한 명이었다.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길리스는 기존에 초보적인 성형 수술 기법들을 개선하고 상황에 맞게 변형시킨 끝에 완전히 새로운 수술법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오로지 지옥 같은 참호에서 망가진 얼굴과 정신을 복구하겠다는 사명감으로 흔들림 없이 일에 매달렸다. 이 엄청난 도전 과제를 해내기 위해서 그는 사람들을 모아 독특한 의료진을 조직했다. 그들은 찢겨 나간 부위를 복원하고 파괴된 것을 재창조하는 일을 맡았다. 외과 의사, 내과 의사, 치과 의사, 방사선 의학자, 화가, 조각가, 가면 제작자, 사진사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재건 과정을 도왔다. 길리스의 주도하에 성형 수술 분야는 진화를 거듭했고 새로 개척된 방법들을 표준화하면서 이윽고 현대 의학의 한 분야로 적법하게 자리 잡기에 이른다. 그 뒤로 이 분야는 전 세계 성형외과 의사들의 재건과 미적 혁신을 통해 우리 자신과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방식에 도전하면서 점점 번창해 왔다.


(80)

그 해 봄에 새로운 이들이 길리스와 모리슨만은 아니었다. 저명한 과학자 마리 퀴리도 병원을 방문했다. 퀴리는 라듐을 발견한 유명 인사했다. 1903년에 여성 최초로 노벨상을 받았고 1911년에 또 한 번 받았다. 전쟁이 터졌을 때 퀴리는 연구를 중단하고서 자신이 연구하던 방사성 원소를 모두 납으로 코팅된 용기에 담아 보르도의 안전 금고로 옮겨 독일군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런 뒤 자신의 재능을 전쟁 쪽으로 돌려 병상, 발전기, 엑스선 기계, 사진 현상 암실 설비를 갖춘 차량을 고안했다. <꼬마 퀴리>라는 별명이 붙은 이 차량은 전쟁터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 세계적인 물리학자이자 화학자는 전시에 엑스선 기계를 갖춘 진료소 200곳을 세우고, 여성 방사선학 전문가 150명을 훈련하여 운영을 돕도록 했다.


(193)

길리스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칼을 움직여 환자의 가슴에서 특징이 사라진 얼굴에 이식할 피부를 떼어 내기 시작했다. 그 의료진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가슴에 그려진 얼굴 전체를 떼어내어 손상된 얼굴을 덮을 거예요. 코는 갈비뼈에서 떼어낸 연골을 넣어 만들 거고요. 살아있는 진짜 피부로 덮을 겁니다. 피부 조직은 자연적으로 공급되는 피를 받아서 이식편처럼 새 자리에서 자랄 거예요. 그런 뒤 남은 흉터를 다 없앨 겁니다.”


(262-263)

온갖 교훈을 터득하고 혁신을 이루었음에도 퀸스 병원의 길리스 곁에는 환영받지 못하는 동료가 늘 함께했다. 바로 실패였다. 전쟁의 막바지에도 초창기 못지 않게 환자의 죽음은 심한 타격을 안겨주었고 그는 조종사의 죽음에 황망해했다. 길리스는 스스로를 비난했고 <완벽한 결과를 얻으려는> 욕망에 빠진 바람에 수술 시기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고 나중에 인정했다. 그는 럼리의 얼굴 전체를 한꺼번에 재건하려고 시도하는 대신 얼굴의 4분의 1씩을 단계적으로 재건했어야 한다고 회상했다. 그는 럼리에게 <아주 단호한 태도를 취해서> 수술 시기를 미루고자 설득했다면 결과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온갖 질문을 했다. 무거운 심경으로 그는 이렇게 토로했다. <이 용감한 친구가 좀 더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다면 좋았을 것을.>


(272)

길리스는 으레 그랬듯이 수술을 앞두고 자신의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는 발라디에의 편지를 옆에 두고서 벨의 얼굴을 재건할 계획을 마음속으로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가장 걱정되는 부분은 코였다. 코는 감염되었음에도 기적처럼 남아 있었다. 하지만 코가 허약해진 상태이기에 사소한 실수만 해도 아예 망가질 수도 있다는 것도 알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수술 시간이 다가오자 길리스는 자신이 적고 스케치한 내용들을 살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을 시간이 되었을 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전 프로그널 땅의 중심이었던 본관을 나섰다. 그는 새로 깎은 잔디밭을 가로질러서 새로 지어진 건물로 향했다. 환자들이 지내고 있는 병실과 그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는 수술실이 거기에 있었다.


(309)

그 소식이 알려지자 수십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한 사람은 길리스가 기사 작위를 받자 이렇게 썼다. <선생님께서 제게 보여 준 경이로운 친절과 제 삶을 살 가치로 있게 만들어 준 모든 일을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또 한 환자는 자신의 위턱 일부가 사라진 적이 있다고 말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고 편지를 보냈다. <너무나 멀쩡해 보여서 11년 전에 거의 불에 다 죽을 뻔했다고 말하면 믿으려 하지 않아요.> 길리스의 노련한 손이 닿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삶이 과연 어찌 되었겠느냐고 말하는 편지도 많았다. 이렇게 쓴 사람도 있었다. <선생님이 있는 곳으로 가기 전의 나 자신을 생각하면 정말로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길리스는 그들의 얼굴을 복원했지만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이 워낙 많았기에 그에게는 얼굴 없는 이들로 남았다. 한 병사는 이렇게 썼다. <선생님이 저를 기억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부상병 중 한 명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우리가 선생님을 기억하니까요.>


(316-317)

성형수술로 돈을 벌었든 못 벌었든 간에 딜리스는 미용 수술의 정당성을 둘러싸고 대중뿐 아니라 의료계 내부에서 나오는 의문들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오로지 허영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수술을 한다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환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만들어 줄 코가 헛수고가 된다면 내가 이런 일을 굳이 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길리스가 때때로 내면의 갈등을 느꼈다는 것은 분명하다. 얼굴의 주름을 제거하다가 문득 내가 그저 돈을 벌기 위해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들면서도 수술을 받은 이들의 얼굴에 피어나는 환한 표정을 볼 때면 과연 환자를 거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딜리스는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에게는 사소해 보일 일탈이 당사자에게는 심한 고민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당시의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미용 수술이 원하는 이에게 약간의 추가 행복을 안겨주기에 정당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결국 그는 그렇다고 결론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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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110)

제 심장을 손안에 쥐었대도 못하시고

제가 그걸 보관하고 있는 한 안 됩니다.

, 질투심을 조심해요.

그것은 희생물을 비웃으며 잡아먹는

푸른 눈의 괴물이랍니다. 오쟁이 진 자가

운명임을 확신하고 죄인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는 더없이 행복 속에 산답니다.

오 그러나, 푹 빠졌지만 의심하고

수상히 여기지만 강렬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얼마나 저주받은 시간을 헤아리겠습니까!


(118)

이 손수선을 카시오의 숙소에 떨구고

그가 발견토록 해야지. 질투하는 사람에겐

공기처럼 가볍고 하찮은 물건도

성경 말씀처럼 강력한 확증이야.

이게 무슨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

무어인은 벌써 내가 준 독약 먹고 변했어.

위험한 상상은 그 본질이 독약인데

맛이 고약한 줄 처음엔 거의 모르다가

약간씩 핏속으로 퍼지기 시작하면

유황불처럼 타는 거야. 그렇다고 했잖아.


(156-157)

저 하늘이 뜻하여

고난으로 날 시험하려고 낸 맨머리 위에다

갖가지 아픔과 치욕을 쏟아 붓고

이 몸을 가난에 뼛속까지 빠뜨리며

나와 내 희망을 포로로 넘겨줬다 하더라도

난 내 영혼 어디선가 한 줌의 인내심을

찾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나더러

경멸하는 시간의 느린 부동의 손가락질

시계판 숫자처럼 받으라고 하는 건…… , ,

하지만 난 그것도 잘, 아주 잘 견딜 거다.

그러나 내 심장을 갈무리해 둔 곳

내가 살거나 아니면 삶을 유지 못하는 곳

내 생명수가 흐르거나 말라붙은 샘

바로 그곳에서 버림을 당하거나

또는 더러운 두꺼비 쌍쌍이 뒤엉키어

알 까는 웅덩이로 그곳을 지키게 된다면!

그럴 경우 얼굴빛을 바꾸어라

그대 장밋빛 입술의 어린 천사 인내심아,

맞아, 지옥처럼 험악하게 보이거라!


(169-170)

있어요, 수십 명이. 게다가 그들이 놀고 얻은

이 세상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많이요.

하지만 전 아내들이 타락하게 되는 건

남편들 잘못이라 생각해요. 예를 들면

그들이 밤일을 소홀히 하면서

우리의 보물을 딴 여자 허벅지에 싼다든지

아니면 유치한 질투심을 터뜨리고

우릴 구속하거나 또는 우릴 때린다든지

약심 품고 용돈을 줄이면, 원 참,

우리도 성깔이 있잖아요. 남편들은 아내들도

자기들과 꼭 같은 감각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고요. 보고, 냄새 맡고

단 것과 신 것을 둘 다 맛보는

혓바닥을 가진 건 남편들과 같다고요.

남편들이 우리를 단 여자와 바꿀 때

하는 짓이 무엇이죠? 재미 보는 건가요?

그렇게 생각해요. 그게 정으로 시작되요?

그렇다고 생각해요. 약하니까 실수해요?

그도 맞죠. 그럼 우린 정 없어요?

놀고픈 욕망도 약함도 남자처럼 없냐구요?

그러니까 그들은 우리한테 잘해야죠.

안 그러면 그들이 잘못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함을 알려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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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나 역시 전쟁이 끝없이 이어진다고 느꼈었어요. 아들 이언이 이집트 알라메인에서 죽었을 때(엘리의 아버지인 존과 함께 전사했지요.) 조문객들이 찾아와 나를 위로한답시고 하는 말이 삶은 계속되는 거예요였어요. 엉터리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연히 삶은 계속되지 않아요. 계속되는 건 죽음이죠. 이언은 이제 죽었고 내일도 내년에도 그 후로도 영원히 죽어 있을 테니까. 죽음에는 끝이 없어요. 하지만 어쩌면 슬픔에는 끝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엄청난 슬픔이 노아의 대홍수처럼 나의 세상을 휩쓸어버렸고, 여기서 벗어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죠. 그런데 벌써 물 위로 솟은 작은 섬들이 있네요. 희망? 행복? 뭐 그런 것들로 부를 수 있겠죠. 당신이 의자 위로 올라서서 부서진 건물 더미를 애써 외면한 채 반짝이는 햇빛을 받는 모습을 기분 좋게 상상해본답니다.


(173)

(…) 건지의 역사에 대해 말하자면, , 말은 적을수록 좋은 법, 섬은 한때 노르망디공국에 속했으나 노르망디 대공이던 윌리엄이 정복자 윌리엄으로 등극하면서 채널제도를 뒷주머니에 챙겨 와 잉글랜드에게 넘겨주었다. 여러 가지 특권도 함께. 훗날 존왕이 이런 특권들을 강화했고, 에드워드 3세가 또다시 확대했다. 도대체 왜? 그들이 이곳을 특별히 선호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없다, 하나도 없다! 그 후 유약한 헨리 6세가 프랑스 영토 대부분을 프랑스인들에게 돌려주었을 때, 채널제도는 잉글랜드 왕실 소유지로 남겨졌다. 굳이 돌려받을 이유도 없으니까.

채널제도는 기꺼이 영국 왕실에 충성과 애정을 바치지만 친애하는 독자들이여, 이 점을 유의하라. 왕실은 채널제도가 원치 않는 일은 그 어떤 것도 강요할 수 없다!


(305)

나는 잘못됐다고 사과하고는 오빠 말이 전적으로 옳다, <오만과 편견>이야말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훌륭한 러브 스토리다, 라고 말해줬어요. 긴장감이 엄청난 작품이기 때문에 끝까지 읽기도 전에 애간장이 녹아서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고도 얘기해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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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예전에 그 사람 앞에서 무릎을 끓었다는 기억이 이번에는 그 사람 머리 위에 발을 올리게 하는 거라네. 나는 미래의 모욕을 받지 않기 위해 지금의 존경을 물리치고 싶은 거지. 난 지금보다 한층 외로움 미래의 나를 견디는 대신에 외로운 지금의 나를 견디고 싶은 거야. 자유와 독립과 자기 자신으로 충만한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 이 외로움을 맛봐야 하는 거겠지.”


(82-83)

시골 사람들은 도회지 사람들보다 오히려 나쁘다고 해야 할 사람들이지. 그리고 지금 자네는 친척들 중에 이렇다 하게 나쁜 사람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지? 하지만 나쁜 사람이라는 부류가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세상에 그렇게 틀에 박은 듯한 나쁜 사람이 있을 리 없지. 평소에는 다들 착한 사람들이네. 다들 적어도 평범한 사람들이지. 그런데 막상 어떤 일이 닥치면 갑자기 악인으로 변하니까 무서운 거네. 그래서 방심할 수 없는 거지.”


(123)

나는 아버지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아버지를 떠난다면 부모와 자식 사이의 정이라는 점에서 미련이 남을 뿐이었다. 나는 아직 선생님의 대부분을 모르고 있었다. 이야기해주겠다고 약속한 선생님의 과거도 아직 들을 기회가 없었다. 요컨대 선생님은 나에게 어스레했다. 나는 반드시 그곳을 지나 밝은 곳까지 가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았다. 선생님과의 관계가 끊기는 것은 큰 고통이었다. 어머니가 좋은 날을 잡아줘 떠날 날이 정해졌다.


(152)

자네가 현대의 사상 문제에 대해 나에게 자주 의견을 물었던 걸 기억할 거네. 그 문제에 대한 내 태도도 잘 알고 있겠지. 나는 자네의 의견을 경멸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결코 존중할 수가 없었어. 자네의 생각에는 아무런 배경도 없었고, 자네는 자신의 과거를 갖기에는 너무 젊었기 때문이지. 나는 때때로 웃었어. 자네는 이따금 어딘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보여주었지. 그러다가 결국 내 과거를 두루마리 그림처럼 자네 앞에 펼쳐 보이라고 졸라댔어. 나는 그제야 속으로 자네를 존중했네. 자네가 멋대로 내 마음속에서 살아 있는 뭔가를 붙잡으려는 결심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지. 내 심장을 가르고 따뜻하게 흐르는 피를 마시려고 했기 때문이네. 그때 나는 아직 살아 있었어. 죽는 것이 싫었지. 그래서 훗날을 기약하고 자네의 요구를 물리쳤어. 나는 지금 스스로 자신의 심장을 가르고 그 피를 자네의 요구를 물리쳤어. 나는 지금 스스로 자신의 심장을 가르고 그 피를 자네의 얼굴에 끼얹으려고 하네. 내 심장의 고동이 멈췄을 때 자네의 가슴에 새로운 생명이 깃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네.


(178-179)

그토록 여자를 업신여겼던 내가 아가씨는 도저히 업신여길 수 없었네. 내 이론은 아가씨 앞에서는 무용지물일 만큼 힘을 쓰지 못했지. 나는 아가씨에게 거의 신앙에 가까운 애정을 갖고 있었네. 내가 종교에만 쓰는 이 말을 젊은 여자에게 쓰는 것을 보고 자네는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도 굳게 믿고 있네. 진정한 사랑은 신앙심과 그다지 다르게 않다는 것을. 나는 아가씨의 얼굴을 볼 때마다 자신이 아름다워지는 기분이 들었네. 아가씨를 생각하면 고상한 기분이 금방이라도 자신에게 옮겨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 만약 사랑이라는 불가사의한 것에 양쪽 끝이 있고 높은 쪽 끝에는 신성한 느낌이 작동하고 낮은 쪽 끝에는 성욕이 작동하고 있다면 나의 사랑은 분명히 제일 높은 쪽에 매달려 있었을 거야. 나는 물론 인간으로서 육체를 떠날 수 없는 몸이지. 하지만 아가씨를 보는 내 눈은, 아가씨를 생각하는 내 마음은 전혀 육체의 냄새를 띠지 않았어.


(200-201)

K는 나보다 의지가 굳었네. 공부도 나보다 배는 했을 거야. 게다가 타고난 머리도 나보다 훨씬 좋았지. 나중에는 전공이 달랐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같은 반에 있을 때는 K가 늘 나보다 성적이 좋았어. 나는 평소 뭘 해도 K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자각했을 정도라네. 하지만 억지로 K를 내 하숙으로 데려왔을 때는 내가 더 사리 판단을 잘하고 있다고 믿었지. 내가 보기에 그는 자제와 인내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았거든. 이 말은 특히 자네를 위해 덧붙이는 거니 잘 들어주게. 육체든 정신이든 우리의 모든 능력은 외부의 자극으로 발달하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하는데, 어느 쪽이든 자극을 점점 세게 할 필요할 있다는 것은 당연하네. 그렇기 때문에 잘 생각하지 않으면 아주 험악한 방향으로 나아가는데도 자신은 물론이고 옆 사람도 깨닫지 못할 우려가 생기는 거지. 의사의 설명을 듣자니 사람의 위장만큼 태만한 건 없다고 하네. 죽만 먹다 보면 그보다 더 단단한 것을 소화할 힘이 어느새 없어진다는 거야. 그러니 의사는 뭐든지 먹는 연습을 해두라는 거지. 하지만 그건 단순히 익숙해진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하네. 만약 반대로 위의 힘이 조금씩 약해지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상상해보면 금방 말 수 있는 일이야. K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지만 그걸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네. 그저 어려움에 익숙해지면 점차 그 어려움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고 혼자 정해놓고 있었던 것 같더군. 어려움을 되풀이하면 되풀이한 만큼의 공덕으로 그 어려움이 신경 쓰이지 않게 되는 시기가 온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모양이네.


(269-270)

죽었다 생각하고 살아가려고 결심한 내 마음은 때때로 외계의 자극에 펄쩍 뛰어올랐지. 하지만 내가 어떤 방면으로 나아가려고 생각하자마자 어딘가에서 엄청난 힘이 나와서 내 마음을 꽉 쥐고 전혀 움직일 수 없게 하네. 그리고 그 힘이 나에게 너는 뭔가를 할 자격이 없는 놈이라며 억누르듯이 말하지. 그러면 나는 그 한마디에 곧 위축되고 마네. 얼마쯤 지나 다시 일어나려고 하면 다시 단단히 죄어오지. 나는 이를 악물고 왜 남을 방해하는 거냐고 호통을 친다네. 불가사의한 힘은 차가운 목소리로 웃지. 네가 잘 알 텐데, 하는 거야. 나는 다시 축 늘어지고 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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