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내리기 귀찮을 때....
제인 에어 한 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24)

신부, 인생과 사랑에서 그보다 더 빛나는 말은 없다. 꽃들의 향기, 벌의 선물, 샘물의 첫 모금, 종달새의 서곡, 창조의 칵테일에 얹힌 레몬 껍질-신부란 바로 그런 것이다. 아내는 신성하고, 어머니는 위대하고, 여름 여자는 눈부시다. 하지만 신부는 남자가 인간의 운명과 결혼할 때 신들에게 받는 결혼 선물 가운데 가장 확실한 보증수표다.


(567)

나는 이 도시의 목소리가 무엇인지 찾아야 해.” 내가 말했다. “다른 도시들은 목소리가 있어. 이건 과제야. 나는 찾아야 해.” 내 목소리가 커졌다. “뉴욕은 내게 시가나 건네면서 친구, 나는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어하면 안 돼. 다른 도시들은 그러지 않아. 시카고는 주저 없이 내가 하겠어. 필라델피아는 내가 해야 돼. 뉴올리언스는 나는 전에 했어. 루이빌은 해도 상관없어하지. 세인트루이스는 미안해하고 말해. 피츠버그는 다 말해라고. 그런데 뉴욕은……”


(614)

조용한 눈보라의 군대는 공기의 나룻배를 타고 음울한 이스트 강 너머에서 도시를 공격했다. 눈은 이미 도로를 30센티미터 두께로 덮었고, 눈 더미는 포위된 도시의 성벽을 기어오르는 접이사다리처럼 차곡차곡 쌓여 올라갔다. 대로는 폼페이 거리처럼 조용했다. 이따금 마차들이 흰 날개의 갈매기처럼 달빛 어린 대양을 스치고 날아갔다. 그보다 수가 적은 자동차들은 비유를 계속하자면- 유쾌하고 위험한 여행에 나선 잠수함처럼 거품 이는 물결을 헤치고 나아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15-116)

그리고 여자 애들한테는 차가운 분노가 있어야 해요. 여자 아이들은 싸늘하지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 사그라지지 않는 원한, 용서하지 않는 재능과 협상을 회피하는 자세를 가져야 해요. 무슨 얘기를 할 때는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야 하지요. 그건 세상에서 더 제한된 범위 내에서 살아야 하는 데 대한 보상이에요. 남자에게 맞서 싸움을 해 이기면 자기 방식대로 계속 가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 거죠. 여자한테 맞서면 온 우주가 다시 한번 다 바뀌어요. 왜냐하면 차가운 분노는 멸시와 모욕에 관한 한 어떤 문제에서든 언제까지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경계를 풀지 않는 법이니까요.” 사리마는 피예로에 대해, 리르에 대해 입 밖에 내지 않는 비난을 던지며 엘파바를 쏘아보았다.

 

(257)

약에 대한 진실은 여러분이 말한 것 중 그 어느 것도 아니야. 당신들은 악의 한쪽 면, 즉 인간적인 면만 발견했어. 영속적인 면은 그늘 속으로 들어가 버렸어. 아니면 그 반대이든가. 옛날 속담 같은 거지. 껍데기 속의 용이 어떻게 생겼을까?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지. 보려고 껍데기를 깨는 순간 용은 더 이상 껍데기 속에 없을 테니까. 악의 본질은 비밀스러움이기 때문에, 이 질문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어.”

 

(283)

종교라는 꼬챙이가 몸 전체를 꿰뚫고 있다면, 움직일 때마다 의식할 것이다. 그런 사람의 정신적, 도덕적 체계에서 종교라는 언월도를 뽑아낸다면 제대로 서 있기나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초원의 하마가 섬유질의 소화를 돕는 유독한 작은 미생물들을 몸속에 품어야 하듯이 인간도 종교를 품어야 하는 것일까? 종교를 벗어 버린 사람들의 역사는 종교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설득력 있게 와 닿지 않는다. 그 진부하고 아이러니한 종교란 그 자체로 필요악인가?

 

(284)

이름 없는 신에게서 인격이라고 할 만한 부분을 다 쳐내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거세게 몰아치는 한 줄기 공허한 바람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 바람은 모든 것을 쓸어 버리는 강풍일 수도 있지만, 도덕적인 힘은 없을지 모른다. 회오리바람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사육제의 호객꾼이 손님을 끄는 외침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이번만큼은 시대에 뒤떨어진 이교의 관념이 더 마음에 와 닿았다. 요정 마차를 타고 구름 속 보이지 않는 곳을 맴도는 럴라이나라면 우리가 누구인지 기억하고 천년왕국이든 어디든 언제고 하늘에서 내려와 덮칠 것이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름 없는 신이 갑자기 들이닥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71)

너는 왜 구레나룻을 기르고, 통바지를 입고, 그렇게 요란한 신발을 신는 거야?”

글쎄, 멋있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일종의 저항이라고나 할까. 그래, 멋으로 저항을 하는 거지. 이 재미없고 감옥 같은 학교를 향해서.”

 

(186)

이곳처럼 야생적이지 않았어. 이미 학생들도 학교를 초월한 어른들의 가치가 물들어 있었거든. 권력지향적이고 자본주의적이었다고 할까. 부모님이 어떤 직업이고 알만큼의 권력과 부를 소유했는지가 중요했어. 보다 중요한 건 권력과 부를 소유했는지가 중요했어. 보다 중요한 건 권력을 세습하고 부를 상속할 수 있는지의 여부였지. 그게 가능하다면 이미 무언가를 성취한 거나 다름없었거든. 또 어느 정도의 성적을 갖고 있으며 어떤 학교를 갈 수 있는지도 중요한 요인이었지. 이러한 잣대로 비슷한 조건을 가진 애들끼리 몰려다니며 어른들과 유사한 권력 놀이를 했어. 오히려 물리적인 힘에서 오는 권력은 야만스러운 것에 불과했지.

 

(245)

그를 따라 절을 하기 시작했다. 마음속으로는 하나, 둘 숫자를 세어 나갔다.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갖다 대며 절을 하니 마음 한편이 경건해지는 것만 같았다. 백 번을 하니 이마와 콧등에 땀이 맺히고 몸이 후끈후끈해지기 시작했다. 이젠 그와 속도도 달라졌다. 이백 번, 삼백 번똑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반복하니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아버지, 어머니, 상민이와의 우정, 지민이와의 사랑, 곁에 있는 민재 그리고 나에 대해서 말이다. 복잡했다. 모든 것들이 얽히고설켜 있었다. 내가 두 명이 된 것 같았다. 절을 반복해서 하고 있는 나와, 생각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나로 말이다. 오백 번, 육백 번어떤 정의도, 결론도 내리지 않기도 했다. 그저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땀은 비 오듯 쏟아졌고, 몸은 지쳐갔다. 그럼에도 끝까지 해보고 싶다는 묘한 오기가 생겨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3)

(김동춘) 그런데 왜 이들이 쿠데타라는 것까지 감행하게 되었을까요? 20세기 군사독재의 기억과 21세기 신자유주의 현실이 결합된 결과라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윤석열, 김용현 이 사람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민주화와 시민사회의 성장,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군부와 사법기관의 세계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동시대인이지만 우리와 전혀 다른 현실인식을 갖고 있는 거예요. 망상 속에 있으니까 쿠데타라는 터무니없는 일을 감행할 수 있는 것이죠. 한편 그 배경은 매우 현재적입니다. 제가 이번에 친위쿠데타 사례들-1900년대부터 페루, 튀니지, 터키 그리고 쿠데타는 아니지만 브라질과 미국에서 일어난 난동 사태를 죽 살펴봤는데, 모두 신자유주의시대에 우익들이 통치능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사회주의진영 몰락 이후 우파세력은 미국을 필두로 전 세계에서 경쟁 상대 없이 통치를 해왔는데, 양극화라든지 혐오라든지 계속 터져 나오는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관리할 능력이 없는 거예요. 구체적으로 행정권과 의회권력의 충돌을 관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쿠데타 같은 돌파구를 찾는 것입니다.

 

(26-27)

(김동춘) 오늘의 세계체제라고 하는 건 결국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타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체제는 자본주의적 모순을 민주주의로 적절하게 제어해온 것입니다. 거칠게 말해서 1 1표제로는 체제가 붕괴하게 생겼으니까 자본가들이 일정 정도 양보를 한 것이지요. 가장 진보적인 형태가 사민주의 복지국가라면 군사독재는 가장 퇴영적 모습입니다. 그런데 1992년 사회주의 붕괴 이후 민주주의와 타협할 필요가 없어지자 자본주의의 고삐가 풀려버린 거예요. 그렇게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의 폭주가 1990년대 이후 전 세계에서 나타나고 복지국가였던 영국과 미국이고, 그 정도로는 안 망가져도 세계화 여파로 이주노동자들이 밀려들자 유럽에서도 극우세력이 등장합니다. 사민당, 노동당도 몰락하거나 우경화됐죠. 이렇게 최근 한 20년 사이에 이른바 선진국들에서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징후들이 나타났는데 좀 극단적 형태가 미국, 영국, 브라질이라고 볼 수 있어요.

 

(43)

윤석열과 그 일당이 주장하는 통치행위라는 예외적 권력은, 왕에게 법을 지키지 않아도 특권을 주었던 중세에나 있을 법한 일로서 독재자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윤석열이 입에 달고 다니던 자유민주주의란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며 왕이나 권력자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법치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비상계엄도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발동한 것인지를 헌법과 법률에 규정해 놓았다. 그 규정을 지키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길이다. 윤석열이 진정으로 자유민주주의자였다면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해야 한다는 이 원리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전혀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니며 압제를 저지를 수 있는 이상성격자에 불과하다.

 

(55)

첫째, 9명 임명직 헌법재판관으로 구성된 헌재가 국민이 선출한 300인 국회 위에 군림하는 것이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둘째, 헌재 결정의 타당성 여부를 가릴 견제 기관이 존재하는가.

이 두 가지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 한국 헌법재판소는 (민주주의가 아니므로) 과두체제이며, (견제받지 않으므로) 독재기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과두적인 독재기관은 때때로 민의를 배반하고 독재지향적인 권력, 특권층의 이해에 영합하는 하수인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없지 않은 것이다.

 

(64)

시민의회는 일반시민 중에서 추첨으로 선발된 소규모 대표들이 공공정책에 대해 심도 있는 숙의를 거쳐 결정을 내리는 민주적 기구이다. 시민의회는 통계적으로 전체 시민을 대표할 수 있도록 추첨으로 구성되면, 운용은 숙의를 핵심으로 한다. 숙의는 단순히 사람들의 의견을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 이성적 토론을 통해 집단적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다. 흔히 다수가 참여하는 방식은 정제되지 않은 의견들의 충돌로 혼란을 초래할 수 있으나, 시민의회는 다양한 의견을 가진 개인들이 참여하더라도 숙의를 통해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중시한다.

 

(71)

한국사회가 보다 성숙한 민주주의로 발전하기 위해, 시민의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모델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필자는 시민의회와 양원제를 결합한 새로운 민주주의 모델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시민의회와 양원제의 도입은 일회성 개헌을 위해서도 유용하지만, 지속적인 민주주의 발전의 발판이 될 수 있다. 읍면동 민회에서 추첨으로 선발된 시민들이 기초지자체 민회, 광역지자체 민회를 거쳐 국가 민회를 구성하는 방식도 고려할 만하다. 이는 국민의 정치참여를 확대하고, 정치적 견제와 균형을 강화하며,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완화하는 유력한 방안이 될 것이다. 이제는 정치권이 아닌 국민이 주도하는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99-100)

취재 후 1 6개월가량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정치는 더욱 오염됐다. 그 결과 우리 앞에 남은 것은 폐허다. 가장 정치적이어야 할 대통령은 철저하게 정치를 버렸다. 가장 헌법을 할 대통령은 헌법을 무시하고 공화국을 배신했다. 이 위험하고 불성실하며 비민주적인 대통령은 분명 대가를 치를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 이후는 얼마나 다를까. 국민의힘은 내란우두머리 피의자 대통령과 절연하긴커녕 부정선거 음모론과 서울서부지법 폭동 사태마저 에둘러 감싸고 있다. 방탄 논란과 강경 일변의 전략에 갇힌 민주당은 갈등과 대립을 끊어내고 미래로 나아갈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두 정당의 적대적 공생만 견고해지는데,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만 말하는 것은 정확한 처방이 될 수 없다. 오랜 실패에서 확인됐듯 개헌은 신속한 방법도 아니다. 고양이에게 생선이 맡겨져 있는, 선거 직전에 반짝 다루다 거대 양당의 최대 이익만 반영하고 마는, “정말 중요한선거제도를 논의해야 할 때다.

 

(119)

나는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의 권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자연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그러한 관계 속에서 인간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이 인류사회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보장하는, 좋은 삶을 구성하는 불가결한 요소라고 믿는다. 자연의 가치와 권리에 대한 존중이 법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보는 나의 믿음이 법은 더 이상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위 그리고 집단 책임성에 대한 개인 권리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고 생태적 상호의존성을 인정해 인간 삶의 자연적 조건을 내재화하고, 이를 헌법과 인권법, 재산권, 기업의 권리 및 국가 주권을 포함하여 모든 법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오슬로선언의 취지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좋은 삶을 함께 생각하고, 이를 이뤄나가기 위한 개인적인, 또 집단적인 실천을 해야 한다. “나의 행동이 대양의 작은 물방울에 불과할지라도좋은 삶을 위해.

 

(155)

자연에는 나쁜 디자인이 없습니다. 나쁜 디자인은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에요. 자연의 어떤 부분을 살펴보더라도, 그 기능에 가장 적합한 디자인이 결합돼 있을 것을 알 수 있어요. 자연의 또다른 속성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거예요. 바로 이게 예술과 생명의 차이입니다. 학교에서 저는 예술은 완벽한 형태를 추구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예술작품은 단 하나의 요소를 더할 수도 뺄 수도 없을 만큼 완벽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 것이 미켈란젤로나 르 코르뷔지에 등으로 이어져 오는 고전예술 전통입니다. 그런데 제가 했던 작업은 그것과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어요. 우선 살아있는 세계를 작품 속에 들어오게 허용하면, 완벽함이라는 것은 순간적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자연은 쉴 새 없이 변하기 때문이죠.

 

(226)

기후는 지구생명체의 거대한 호흡과도 같은 것이다. 지구 못 생명체의 수많은 작은 날숨과 들숨이 어우러져 기후라는 거대한 순환과 리듬을 만들어낸다. 라투르는 지구 바깥에서의 시선을 멈추고 지구 안으로 다시 돌아오는 시선을 위해 임계지대(critical zone)’에 주목한 바 있다. 그곳은 지구에서 날씨가 바뀌고, 강과 산과 평지가 있고, 바다가 있는 영역이며, 중생들이 거기에 깃들어 생명을 이어가는 곳이다. 칠게, 생합, 흑꼬리도요는 이 임계지대 안의 갯벌에 깃들어 살고 있고, 인간은 이 임계지대 안의 건실한 땅을 부쳐 먹고산다. 존재들의 이 상호 의존을 캐런 버나드 같은 양자역학자는 내부작용(intra-action)’이라고 표현하며, 동아시아에서는 천인상을(天人相應)’이라는 말로 표현해왔다. 환경이라는 용어에는 주인공과 배경이 따로 있지만 천응상응이라는 말에는 주인공과 배경이 따로 없다. 천지는 서로 감응하며 살고 죽는 존재들로 꽉 차 있다. 주역의 언어로 말하자면, “만물은 생생(生生)한다.”

 

(237)

모태 신앙이 기독교이고 평생 예수가 긴 머리카락의 백인일 것이라 생각했던 나는 망치로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그렇다. 아무리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예수가 백인일 확률이 너무 낮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각을 갖추자 진실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담과 이브는 백인인가? 백인들이 그려놓은 모든 그림에서 아담과 이브는 명백한 백인이다. 그런데 성경에 따르면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홀딱 벗고 살았다. 선약과를 따 먹고 난 뒤에야 부끄러움을 느껴 중요 부위를 겨우 가렸다. 이건 애 주장이 아니라 성경이 기록이다. 그렇다면 지구에서 사시사철 홀딱 벗고 살 수 있는 지역이 어디인가? 열대지역뿐이다. 그리고 열대지역에서 태어난 인종의 피부는 결코 휠 수 없다. 유럽의 백인들이 아프리카를 짓밟을 때 그들은 에티오피아 지역을 에덴동산으로 추정했다. 그렇다면 에덴동산에서 태어난 아담과 이브는 명백하게 백인이 아니다. 창조론을 믿느냐, 진화론을 믿느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을 100% 따르더라도 그렇다는 이야기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2025-04-03 04: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연에 나쁜 디자인이 없다”는 아예 말이 될 수 없습니다. “나쁜 디자인은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다 다른 숨결이 다 다른 몸을 입고서 다 다르게 살기 때문입니다. 더 낫거나 좋은 모습(디자인)이기 때문에 살아남는 결이 아니라, 그저 다른 숨빛으로 살기에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숲을 제대로 본다면, 나무 한 그루에 달린 잎이 모두 다르게 생겼고, 강아지풀조차 잎이 모두 다르고, 토끼풀도 다 다른 크기와 모습인 줄 알 테지요. 다 다르기에 어울리며 살아가는 숲(자연)일 뿐, 나쁘거나 좋은 모습(디자인)이란 처음부터 없습니다.

이러한 결을 읽고서 마음에 새길 적에 비로소 사람 사이에서도 누구나 다르게 마련인 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잘못 여기는 대목 가운데 하나로, ‘흰사람(백인)’이기에 살갗이 희지는 않는데, 너무 모릅니다. 흰사람도 들숲에서 일하며 뛰놀 적에는 아이어른 모두 ‘구릿빛’이게 마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