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1)

아무리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악한 수단을 사용한 데 따르는 정신적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죄를 지으면 벌을 면하지 못하는 게 삶의 이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다른 맥락에서 볼 수도 있다.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악한 수단으로 선한 목적을 이룰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나는 이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당성 여부를 따지기 전에, 악한 수단으로는 선한 목적을 절대 이루지 못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어떤 연역적, 논리적인 추론의 산물이 아니다.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을 보고 체험한 끝에 경험적, 직관적인 판단이다.


(32)

스탈린과 히틀러 같은 비범한 사람들인류를 구원하려는 신념에 입각해 모든 종류의 폭력을 사용할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구축했던 사회체제를 가리켜 우리는 전체주의라고 한다. 이 체제는 인간의 생명과 권리를 학살하고 억압하는 제도화된 악이었다. 스탈린과 히틀러, 그리고 이들의 지시를 받아 대량 학살을 저질렀던 수많은 부하들이 전당포 노파 자매를 죽인 것 때문에 라스꼴리니꼬프가 겪어야 했던 끔찍한 정신적 번민과 고통에 시달렸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한 죄악을 저지름으로써 어떤 선한 목적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핟. (전체주의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나치의 마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독일 출신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추천한다.) 인류는 20세기의 전체주의 경험을 통해 나쁜 수단으로는 결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51)

너는 지식인이야. 너는 무엇으로 사느냐. 너는 권력과 자본의 유혹 앞에서 얼마나 떳떳한 사람이었느냐. 관료화한 정당과 정부 안에서 국회의원, 장관으로 일하는 동안 비판적 지성을 상실했던 적은 없었느냐. 성찰을 게을리하면서 주어진 환경을 핑계 삼아 진실을 감추거나 외면하지 않았느냐. 너는 언제나 너의 인식을 바르게 하고 그 인식을 실천과 결부시키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느냐.


(71)

19세기 유럽 자본주의국가의 노동 대중이 처했던 극단적 빈곤과 전적인 무권리 상태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노에 공감한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그에 버금가는 고난을 겪는 것을 나는 보았다. 또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종식할 방법을 모색한 그의 집요한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우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노동권과 사회권은 마르크스와 같은 이상주의자 국유화를 핵심으로 하는 중앙 통제식 계획경제와 일당독재는 사회를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되는 연합체를 만드는 적절한 방법이 될 수 없다.


(94)

다시 <인구론>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우리 모두는 갖가지 편견과 고정관념을 지니고 산다.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모든 종류의 통념이 논리적 경험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일일이 시험하고 검토할 수 없는 일이기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관념과 사고방식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는 맬서스와 얼마나 다른가. 내가 옳다고 믿는 것, 내 신념을 받치고 있는 수많은 통념들 가운데 그릇된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없을 것인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 속에도 그런 것이 없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인구론>과 멜서스는 금이 간 거울이다. 내 생각도 그릇된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일그러져 있지 않은지 경계하면서 나를 비추어 본다. 생각은 때로 감옥이 될 수 있다!


(113)

푸시킨은 200년 전 전제정치와 농노제도가 실시되던 동토(凍土) 러시아에서 자유를 노래했다. 인류가 오늘날까지도 온전히 실현하지 못한 휴머니즘과 민중에 대한 사랑을 문학으로 꽃피웠다. 당대의 현실에 대해 그가 느꼈을 분노, 환희, 절망, 그 모든 것이 생생하게 전해 오기에, <대위의 딸>을 읽으면 가슴 깊은 곳이 아려 온다. 푸시킨은 황제의 권력으로 모독할 수 없었던 고귀한 영혼이었다. 얼어붙은 땅에서 솟아오른 꽃이었다. 두꺼운 먹구름도 빛을 가리지 못한 밤하늘의 별이었다. 그 별은 오늘도 문명의 하늘에서 빛나고 있다. 푸시킨!


(122)

맹자는 제후의 지위를 가진 자로서 왕을 죽이고 새 왕조를 세웠던 주 무왕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은나라 주왕이 폭정으로 인의를 해쳤고 간언하는 충신을 모두 죽였으며 백성을 도탄을 빠뜨렸으니 군주로서의 정당성 또는 정통성을 이미 상실했다고 본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무왕은 반역자가 아니며, 주나라의 정통성을 의심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왕조를 바꾸는 역성혁명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사상을 반길 왕이 있을까?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덕으로 선정을 펴라는 맹자의 왕도 정치 이론을 부국강병에 몰두하던 전국시대 왕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그 이후 여러 통일 왕조들에서도 맹자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의심해본다.


(134)

보수가 이념이 아니라 연속성과 안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전통적인 제도와 관습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라면, 맹자는 정말 멋진 보수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흔히들 보수가 물질적 이익과 세속적 출세를 탐낸다고 하지만 진짜 보수주의자는 이익이 아니라 가치를 탐한다. 진짜 보수주의자는 다른 누군가와 싸우는 전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에 정체성의 닻을 내린다. 타인을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을 성찰한다. 누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실의에 빠지지 않으며 깊은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난다.


(175)

권력을 스스로 일구어낸 사람은 이런 걱정을 피할 수 없다. 선거로 대통령이나 총리를 뽑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은 선거를 통해 권력을 차지한다. 선거에 이기는 데 큰 공을 세운 참모들이 있기 마련이다. ‘개국공신들은 높은 직위를 얻어 정권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선거전에 능한 사람이라고 해서 국정 운영이나 국가행정을 잘한다는 보장이 없다. 공은 있으나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자리를 주면 국정이 꼬이고 국민의 지지를 잃기 쉽다. 그러나 자리를 주지 않으면 불만을 터뜨리고 권력자를 원망한다. “술을 마시면 자신의 공을 다투고, 술에 취해서는 함부로 큰 소리를 지르고 칼을 뽑아 들고 기둥을 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중요한 자리를 주면 국정은 망가지고 최고 권력자는 민심을 잃게 된다.


(183)

정치는 위대한 사업이다. 짐승의 비천함을 감수하면서 야수적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일이다. 설사 한신과 유방이 빛을 좇는 불나방처럼 권력을 향한 본능에 이끌려 투쟁의 소용돌이에 뛰어들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덕()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인의(仁義)를 존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만하면 충분하지 아니한가. 비록 성인의 반열에 오를 만한 덕성을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때로 맹목적 욕망과 시기심에 휘둘렸다 할지라도, 그러한 마음과 능력을 발휘하여 결과적으로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었지 않은가. <사기>를 덮으며, 한신과 한고조가 겪었던 인간적 고통과 비극적 죽음에 대해, 이 모든 것들이 기록해 인류에게 선사한 역사가 사마천의 삶에 대해 깊은 존경과 높은 찬사를 바친다.


(200)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처음 읽은 후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솔제니친과 소련 국민을 가두고 죽였던 강제노동수용수와, 그런 야만적 장치를 불가결한 구성 요소로 보유했던 사회주의 체제는 사라졌다. 동서 이데올로기 전쟁의 포화 속에서 때로는 부당하게 비난받았고 때로는 터무니없이 이 찬양받았던 작가 솔제니친도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으면서, 엄청난 세상의 변화를 다 견디고 내 마음에 남는 것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결국 남은 것은 사람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혹독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는 사람. 땀 흘려 일하는 사람. 때로 보상받지 못하는 노동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게 유용한 것을 만드는 일에 즐거움에 느끼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런 사람의 모습에서 얻는 감명이 세월을 견디고 내 마음에 그대로 남아 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218)

곳곳에서 우생학회가 만들어졌는데 대표적인 것이 1926년 결성한 미국 우생학회였다. 이 학회는 부자와 권력자들이 우수한 유전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말할 것도 없고 유럽에서도 남부와 동부는 열등한 민족이 살기 때문에 이민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정신병, 발달 장애, 간질 환자들에 대해서는 강제로 불임 시술을 하자고 제안했다. 실제로 미국의 수많은 주들이 불임법을 도입했다. 독일 나치 정권은 미국의 불임법을 복제한 법률을 만들었으며, 우생학에 의거해 순수한 독일인 혈통을 보존하는 사업을 벌였고, 유대인과 유색인종과 동성애자 학살을 정당화했다. 진화론은 확실히 오남용의 위험이 큰 이론이다.


(258)

조지의 사상은 사실 그리 과격하지도 위험하지도 않았다. 토지소유권을 근거로 지주가 취득하는 지대를 공동체의 것으로 만들자고 했을 뿐이다. 그래서 조지의 사상을 가리켜 토지공개념또는 지공주의(地公主義)라고도 한다. 조지는 마르크스와 달리 사유재산제도의 폐지 또는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주장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폐기하자고 하지도 않았다. 토지를 국융화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조세 징수를 통해 생산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은 사람이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근거로 진보의 경제적 과실을 독점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진보와 빈곤이 동시에 존재하는 부조리를 해소하자고 했을 따름이다. 자연이 또는 하느님이 준 토지를 특정한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사회적 범죄라고 보았던 그의 사상은 전통적인 경제학의 울타리를 넘어 철학과 종교의 영역에 걸쳐져 있었다. 조지의 지대 이론은 논리적으로 명확하며 누구나 경험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 설명의 논리 구조는 리카도의 차액지대론과 똑같다.


(264-265)

조지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피에르 프루동과 샤를 푸리에, 카를 마르크스와 같은 19세기 유럽 사회주의자들과 달랐다. 하지만 한 가지,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만큼은 예외였다. 조지는 그 누구에게도 토지를 개인적으로 소유하면서 자식들에게 상속할 권리는 없다고 확신했다. 만인이 땅을 이용할 공동의 권리를 지닌다는 것이 그에게는 창조주의 뜻인 동시에 자연법의 당위적 요구였다.


(273-274)

우리는 정보의 바다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신문 방송이 시시각각 전하는 뉴스와 인터넷에서 만나는 정보들은 과연 얼마만큼의 진실을 함유하고 있을까? 누구도 알지 못한다. 모든 정보의 진실성 여부 또는 진실 함유도를 정확하게 따지려면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웬만한 것은 다, 누가 특별히 허위라는 문제 제기를 하고 분명하게 입증하지 않는 한, 대충 어느 정도는 사실이려니 여기게 된다. 이것이 평범한 사람들이 언론 보도를 대하는 기본자세이며, 우리네 삶의 어찌할 수 없는 한계다. 우리는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정보를 숨 쉬고, 왜곡과 거짓을 마시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의심해볼 수밖에 없다. 내가 가진 생각은 정말 내 생각일까?


(279-280)

처음 읽었을 때 숨이 막혔다. <차이퉁>이 카타리나 블룸의 명예를 짓밟은 방식이 너무나도 리얼했기 때문이다. 내가 현실에서 보고 경험했던, 그리고 현재에도 목격할 수 있는 언론의 행태와 정말로 똑같았다. <차이퉁>은 주로 두 가지 방법을 썼다. 첫째는 검찰청 조사실에서 오간 이야기를 악의적으로 왜곡해 중계방송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문명국가의 형법이 금지하는 불법적인 피의 사실 유포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다. 검사나 검찰 수사관 중에 누군가가 <차이퉁> 기자와 정보 밑거래를 하지 않는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국가기관과 언론기관이 한통속이 되어 저지르는 불법행위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결코 원치 않았던 S의 아파트 방문, 얼마짜리인지도 몰랐던 반지, S의 별장 열쇠 등에 관한 사항을 비롯하여 <차이퉁>이 내밀한 사생활 관련 정보를 왜곡 보도해 자신을 모욕하는 데 대해, 그리고 그런 일을 바로 잡을 방법이 사실상 전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카타리나 블룸은 절망감을 느낀다.


(313)

인생의 고비마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이번이 여섯 번째인 것 같다. 다시 카를 읽으며 사회와 역사의 진보,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생각한다. 카의 말마따나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그런 의미에서 모든 시대의 역사는 현대사임에 분명하다. 고대사 연구 프로젝트인 소위 동북공정은 만족할 줄 모르는 오늘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제어할 수 없는 영토 확장 욕망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다.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제국주의 침략 전쟁의 행동은 그들이 미래에도 침략 전쟁의 죄악을 부인하도록 역사 교과서 수정을 강제한 일본 정부 당국자들의 행동은 그들이 미래에도 침략 전쟁을 벌일 의사가 있음을 증명한다. 조선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고, 대한민국 건국 이후 국가권력이 저지른 인권유린 범죄를 정당화하려한 형태는 그들의 마음속에 극우 파시즘 사상이 똬리 틀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시대의 역사는 현대사임에 분명하다.


(327-328)

여기서 핵심은 표현의 자유. 생각과 감정은 그 사람만의 것이다. 표현하지 않으면 남이 알지 못한다. 사회가 간섭하거나 침해할 수 없다. 하지만 글이나 말로, 행동으로, 혼자 또는 여럿이 함께 그것을 표현하면, 같은 생각과 감정을 가진 이들이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면 사회가 알게 된다. 이것을 억압하면 절대적 양심의 자유와 생각의 자유, 삶을 원하는 대로 설계할 자유를 해치게 된다. 그래서 모든 민주주의 문명국가의 헌법은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불가침의 기본권으로 보장한다. 우리나라 헌법도 마찬가지다. 밀의 견해를 받아들인 것이다. 조심하자. 밀 혼자만 또한 밀이 최초로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와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를 비롯한 선각자들의 철학을 계승해 더 높은 수준에 올렸을 따름이다.


(346-347)

말은 1859년 그 옛날에 쓴 책에서 그런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어리석은 자를 대통령으로 뽑은 이후 화나고 아프고 어이없는 일들을 견디고 이겨낸 이들에게, 계엄의 밤 국회에서 계엄군을 막아섰던 시민들에게, 남태령의 기적을 만든 젊은이들에게, 눈보라를 맞으며 헌법재판소 앞에서 밤을 지새웠던 남녀노소에게, 무한히 큰 감사의 마음을 얹어 그 말을 전하고 싶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오늘 우리를 본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대들은 인간의 모든 자랑스러운 것의 근원을 보여주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해도 됩니다.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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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밀양, 약산 김원봉이 태어난 도시다. 약산의 평생지기 석정 윤세주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약산의 고모부 백민 황상규를 비롯해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독립유공 애국지사만 80여 명이다. 안동과 더불어 인구대비 가장 많은 숫자다. 한마디로 독립유공자의 산실과 같은 장소다. 2018년 봄 약산의 생가터에 밀양시가 의열기념관을 세우고 나서 밀양을 찾아야 할 이유가 더 분명해졌다. 그러나 2019년 들어 밀양시가 친일파 박시춘을 중심으로 한 <가요박물관> 건립을 추진 중이다. 지사들의 얼굴에 먹칠하는 부끄러운 일이다. 약산의 생질 김태영 박사와 밀양 출신 청년들을 중심으로 가요박물관 건립을 막고 있다.


(28-30)

반 토막 난 독립운동사에 약산의 이름을 올려야겠다고 결심한 첫 번째 이유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친일파 7인 김백일, 김홍준, 신응균, 이응준, 이종찬, 백낙준. 이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만주군에 복무하면서 독립군을 때려잡던 인사들이다. 게다가 해방 후에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아래 다시 국군으로 돌아와 보란 듯이 현역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더 높은 자리로 영전했고 각각 군 사령관과 참모총장, 국방부 장관이 됐다.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제2묘역에 묻힌 일본군 장교 출신 신태영과 이응준이 대표적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요 인사 묘역과 불과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들이 묻힌 장군 제2묘역이 있다. 의도했든 아니든 이들 친일파의 묘역이 애국지사 묘역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한 탓에 친일파 무덤이 애국지사 무덤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형태다. 더 화가 나는 건 이름 없이 쓰러져간 수만의 독립군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대한독립군 무명 용사 위령탑역시 친일파 묘역 입구 하단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위령탑 아래가 의열단 출신 김익상과 김상옥, 박재혁, 곽재기, 최수봉, 이종암 등이 잠든 애국지사 묘역이다. 한마디로 친일파의 무덤이 조국 독립을 위해 청춘과 목숨을 다 바친 애국지사와 순국선열보다 더 높고 양지바른 곳에 위치해 있다는 말이다.


(75-76)

1910년에 태어나, 약산보다 정확히 12살 어렸던 박차정 지사는, 집안이 모두 독립운동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대한제국 탁지부 주사를 지냈던 부친 박용한은 일제의 침략에 분노해 자결했다. 숙부 박일형과 친척들, 오빠들도 모두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 외가 쪽 역시 독립운동가 김두전과 김두봉이 친척인 집안이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신간회, 의열단 등에서 활동한 큰오빠 박문희, 둘째 오빠 박문호 등과 함께 박차정 지사 역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일찍이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일신여학교 시절부터 지역을 대표하는 독리운동가로 활약했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 1월 서울 여학생 시위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했다. 그러나 근우회 사건으로 구금된 다음 일경의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병석에 누워있던 박차정 지사를 의열단에 몸담고 있던 둘째 오빠 박문호가 불렀고, 지사는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합류했다. 1930년 봄의 일이다.


(100)

<의열단 공약 10>

1. 천하의 정의를 맹렬히 실행한다.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해 신명을 희생한다.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히 자라야 의열단원이 된다.

4. 단의(團義)를 우선하고, 단원의 의()도 급히 실행한다.

5. 의백 일인을 선출해 단체를 대표케 한다.

6.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매월 일차식 사정을 보고한다.

7.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초회(招會)(부름)에 반드시 응답한다.

8. 피사(被死)(죽음을 피하지) 아니하며 단의의 전력을 다한다.

9. 하나의 아홉을 위하여 아홉이 하나를 위해 헌신한다.

10. 단의(團義)를 배반한 자는 척살한다.


(103)

그러나 백민 황상규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우리 독립운동사의 큰 족적을 남겼다. 1차 의열단 의거 실패 후 감옥에서 6년여를 보냈다. 출소 후에도 밀양에서 지역 운동을 전개하며 지역 리더로서의 역할을 실천했다. 1927 12월부터는 신간회의 밀양지회장으로 선출되고 왕성한 활동을 벌인다. 하지만 고문 등으로 이미 몸이 쇠약해진 상태, 한때 관운장이라 불릴 정도로 강인한 그였지만 과로 등이 겹치며 결핵성 복막염을 앓았다. 1929 11월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황상규는 진상조사단이 돼 몸을 돌보지 않고 사건을 알렸다. 결국 더 이상 버티질 못했다. 1930년 초 황상규는 다시 고향에 돌아와야만 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듬해 9월 황상규는 눈을 감는다. 사인은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발생한 폐결핵과 복막염 악화. 의열단의 정신적 스승이자 행동하는 지성인이었던 백민 황상규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135)

부산 출신 박재혁은 1920 9월 초 상하이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에 도착한다. 1920 9 14일 고서상으로 위장한 박재혁은 부산경찰서 서장 하시모토 슈헤이와 마주한다. 그리곤 고서 상자 속에서 미리 준비한 폭탄을 꺼내들고 하시모토에게 나는 상하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들을 잡아 우리 계획을 깨뜨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인다라고 외치며 폭탄을 투척한다. 폭탄에 맞은 서장은 수일 뒤 사망했다.

박재혁 역시 현장에서 폭탄을 맞아 부상을 당하고 체포됐다. 1921 3,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과 상처로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사형 선고 전, ‘왜놈의 손에서 욕보지 말고 차라리 내 손으로 죽겠다라고 결심한 뒤 곡기를 끊고 단식하다 옥사하였다. 의열단다운 결기였다.


(149-150)

김산은 의열단 의백 김원봉과 의열단원 김성숙과 특히 사이가 가까웠다. 베이징에서 자주 모임을 가질 만큼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이였다. 이 만남은 훗날 황포군관학교라는 공통분모까지 이어진다. 그만큼 각별한 사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단 김산과 약산 모두 책벌레였다. 특히 두 사람이 다 러시아 문학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두 사람은 만나면 할 이야기가 많았다. 물론 그만큼 머리도 비상했다. 중앙학교-덕화학교당-금릉대-신흥무관학교를 거친 약산의 비상한 머리야 익히 알려진 바고, 김산 역시 신흥무관학교-난카이대-협화의대-황포군관학교-중산대 등을 거친 수재였다.


(232-233)

그런데 이곳(금릉대학)이 우리 역사에서 더욱 중요하게 평가돼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1935 7, 기라성 같은 애국지사들이 금릉대학교 강당인 대례당에 모여 민족혁명당을 만든다. 면면이 화려했는데 의열단 출신은 약산을 필두로 석정 윤세주, 진이로, 박효삼이 함께 했고, 신한독립당 출신으로 지청천과 신익희, 윤기섭이, 조선혁명당 출신은 최동오와 김학교가 함께 했다. 김두봉과 조소앙, 김규식, 김상덕, 최창익, 허정숙, 안광천 등도 동참했다. 220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함께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김구는 위해 중앙집행위원회의 집행위원장 자리를 공석으로 두었으나 마지막까지 고사했다. 임시정부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위원장이 공석인 상황에서 서기부와 조직부와 실질적으로 권한을 행사했다. 서기부의 부장은 약산, 조직부의 부장은 김두봉이 맡았다.


(302-303)

두 사람(김구, 김원봉)은 진심으로 화합해 조국 독립을 바랐다.

우리 두 사람은 3.1운동 이후 해외에서 일본제국주의를 향해 계속 분투했다. 그러나 과거에는 한 개의 강적에 대한 투쟁을 통일적으로 강하고 유력하게 진행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군중을 떠난 우리 두 사람의 특수환경의 영향도 없지 않았으나, 주로는 우리가 민족적 경각성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민족혁명의 전략적 임무를 정확히 파악 실천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과거 수십 년간 우리 민족운동 사상의 파쟁으로 인한 참담한 실패의 경험과 중국민족의 최후의 필승을 향하야 매진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민족적 총 단결의 교훈을 이전의 착오를 통해 통감한다. 우리 두 사람은 신성한 조선 민족 해방의 대업을 위해 동심협력할 것을 동지동포 앞에 고백하는 동시에 목전의 내외 정세와 현 단계의 우리 정치 주장을 이하에 진술하려 한다.”


(328)

다만 1942년 인도의 영국군 총사령부는 조선민족혁명당에게 인도 버마 전선에 공작원 파견을 요청한 것이 사실이다. 이 시기는 이미 약산이 임정과 광복군 참여를 결정한 상황, 약산은 최종적으로 광복군 이름으로 공작원을 인도에 파견한다. 그리고 43 5월 인도 주둔 영국군과 조선민족혁명당은 조선민족군선전연락대파견에 관한 협정을 맺었다. 이에 따라 43 8월 최성오와 주세민 등을 인도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추가 파병은 이뤄지지 못했다. 약산이 영국군과 가까워지는 상황을 임정 내부에서 용인하지 않았다. 영국군과 공동 작전을 수행했기에 훈장을 받은 것으로 파악되자 정확하게 확인된 바는 없다. 돌아보면 약산은 임정 참여 선언 후 광복군 부사령관 군무부장으로 역할했지만 내부에서 끊임없는 견제를 당하며 주요 작전에서 배제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특히 1945년 광복군과 미국 OSS측의 합작훈련 추진 과정에서 약산은 광복군 부사령임에도 불구하고 작전에서 배제됐다. 약산이 임정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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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

우리가 추상미술 앞에서 난해함을 느끼며 갸우뚱할지라도,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이미 추상적 이미지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상품은 추상적으로 디자인되어 있고, 우리는 그 추상적 이미지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느낍니다. 주변의 모든 건축물은 추상적으로 디자인된 공간을 무척 좋아하고, 심지어 그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휴식을 취하고 있죠. 21세기에 와서는 누구나 좋아하는 미적 취향이 된 기하학적 추상’. 기하학적 추상에 숨겨져 있는 거부할 수 없는 미적 매력을 누구보다 앞서 또렷이 느낄 수 있는 심미안을 갖췄던 사람.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떳떳이 예술가. 그가 바로 몬드리안입니다.

(37)

그렇습니다. 그림을 꼭 사진 찍은 것처럼 눈에 보이는 대로 똑같이 그려야 하는 절대적 이유가 있을까요? 그 고정관념을 제거하면, 그림은 평면 위에 화가가 그리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장이 됩니다. 이렇게 유럽의 회화는 20세기 초에 이르러 회화는 눈에 보이는 것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것이라는 오래된 고정관념을 깨고 벗어납니다. , 그리고 싶은 것이 무엇이든 화가가 더 자유롭게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죠. 바로 이것이 피카소와 브라크가 20세기 초에 활짝 연 현대미술 혁명의 요체입니다.

(69)

그렇다면, 몬드리안은 고작 십자 모양(+)으로 어떻게 미의 진리를 회화에 표현한 것일까? 그는 하얀 캔버스 평면 위에 여러 개의 수직선과 수평선을 직각 대립시켜 그렸을 때 자연스럽게사각형 평명()이 생성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수직선과 수평선을 많이 사용할수록 사각형 평면()의 수 역시 자연스럽게 늘어나는 것을 발견합니다. 더불어, 그 사각형 평면들이 놓인 위치크기모두 제각각임을 발견합니다. 몬드리안 화면 전체에 평형상태를 만들기 위해 수직선과 수평선을 이리저리 이동시키며, 사각형 평면()위치 관계크기 관계를 조율합니다. 그 목적은 캔버스 화면 전체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평화로운, 즉 평형상태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의 성취를 위해 필요하다면 사각형 평면()에 빨강, 파랑, 노랑, 흰색, 회색 등을 채워 사각형 색 평면을 만들어 색채 관계를 조율합니다.

(89)

수업이 트렌드에 매우 뒤처져 있다고 여긴 달리가 대학 울타리 안에서 고분고분할 리 만무했습니다. 교수보다 전위적이며 다른 학생보다 훨씬 뛰어난 그림을 그린다고 자신한 나르시시스트 달리는 반바지에 망토를 걸치고 다니며 괴짜 짓을 일삼기 시작합니다. 신임 교수 취임식에서 교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취임식장을 박차고 나사 1년 정학 처분을 받습니다. 그 이후에도 괴짜 기질을 참지 못한 달리는 대학 미술사 시험 도중 심사위원인 교수들에게 심사위원들을 합쳐놓은 것보다 내가 더 똑똑하고, 주어진 문제를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심사받기를 거부한다고 말하며 퇴학당합니다. 이렇게 착실히 학교 다녀 교수가 되리라 믿은 달리 아버지의 꿈은 산산조각이 됩니다.

(128-129)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폭발 이미지에서 크나큰 충격을 받은 달리. 이제 달리의 관심사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의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원자의 세계가 되었죠. 그는 세상의 모든 물질이 원자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 그리고 원자 속 세계가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과학적 사실에 흥분합니다. 그는 물질세계의 본질을 회화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해답이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에 있다고 여기며 원자물리학, 양자역학 공부에 빠져듭니다. 프로이트보다 하이젠베르크와 아인슈타인을 신봉하기 시작하죠.

(204-205)

제가 현대미술사에 기록되는 위대한예술가를 망나니라고 표현하는 것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에서 숱하게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을 살펴보면 아마 고개가 끄덕여질 겁니다. (정말 쓸지 말지 고민을 많이 했지만 잭슨 폴록의 진짜 면모를 허례허식 없이 전하기 위해) 한 가지 에피소드를 풀어보자면, 폴록은 자신을 아껴준 스승 벤턴의 아내 리카와 불륜을 저지릅니다. 한술 더 떠 25세 폴록은 술에 찌든 상태로 리타로 찾아가 청혼까지 하지만 리카는 거절하죠. 그녀의 거절에 화를 주체할 수 없었던 폴록은 벤턴을 찾아가 빌어먹을 놈, 내가 너보다 더 유명해지고 말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역사에 기록하는 위대한 인물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역사에 기록될 위대한 업적을 이룬 것과 인간성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죠.

(227)

세상이 돕는 이런 긍정적 상황에서 예술가로서 체면을 차리고 작업도 더욱 열심히 할 만했지만, 우리의 폴록은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벽화> 작업으로 창작의 고통을 느낀 것이 치유하기 어려운 큰 상처가 되었는지 알코올 중독과 그로 인한 난폭함은 점점 커져만 갔죠. 만취해 술집의 기물을 부수며 난동을 부리는 건 기본. 사람들과 싸우는 것도 예삿일. 급기야 술집에서 폴록의 출입을 제한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렇게 뉴욕 술집에서 블랙리스트에 오른 그는 눈이 오면 취한 채 도로를 나뒹굴며 차량의 통행을 방해하고, 눈 위에 오줌을 흩뿌리며 전 세계에 오줌을 싸겠다고 고성방가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보통 망나니라고 부르지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위대한 예술가상과는 꽤 다른 모습입니다.

(233)

폴록의 회화를 살펴보면 여전히 초현실주의 영향이 지대함을 알 수 있습니다.(무의식을 활용해 예술 창작을 하고 싶었던) 초현실주의자들이 작은 종이위에 이성의 통제 없이 자유롭게 손을 써서그림을 그리는 자동기술법. 그것을 폴록은 거대한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손만이 아닌 몸 전체를 써서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초현실주의자들과는 꽤 다른 점이 발견됩니다. 화가가 그림 안으로 들어가 그림의 일부가 된다는 느낌을 받고 싶어 한다는 것, 그림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며 화가가 그림을 그림으로써 그림이 자기만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고 믿는 것. 폴록이 창작 과정에서 중시하는 이런 생각과 느낌은 폴록이 스스로 일종의 샤먼이 되어 그림과 교신하는 행위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런 점은 초현실주의자들에게 발견되지 않는 플록의 특징이죠.

(282)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을 알리며 미국은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으로 명확히 헤게모니를 잡게 됩니다. 그때 뉴욕 미술계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전쟁을 피해 미국에 왔던 유럽 미술가들은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버렸고, 미술관과 갤러리 등 제도권에서 미국 미술가들을 차별하는 분위기는 여전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내부 상황은 크게 달라져 있었습니다. 유럽의 전위 예술가들과 수년간 교류했던 미국 미술가들의 예술 세계가 크게 성숙한 것이죠. 더불어, 승전국이자 세계의 패권을 잡은 국가의 국민으로서 생긴 자부심은 미국 미술가들 사이에 유럽의 예술을 추종하던 기성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자. 그리고 독자성을 가진 진정한 미국적 예술을 창조하자!’는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310)

내가 젊은 청년이었을 때 예술은 고독한 작업이었습니다. 갤러리도, 수집가도, 평론가도, 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황금기였습니다. 우리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대신 비전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상황이 그렇지 않습니다.”

비관적인 연설. 모든 것을 가졌기에 잃을 일만 남아서일까?” 66세의 로스코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비전만이 찬란히 넘쳐흐르던 젊은 날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심리 속 로스코의 내면에 남겨진 색채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오직 검정과 회색뿐이었습니다.

(319)

,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를 다른 시각으로 관찰하면, ‘복제의 시대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온라인 미디어에서 텍스트, 이미지, 영상이 무한히 반복적으로 복제되고 있고, 이제는 그 영향이 오프라인까지 범람하며 무엇이 원본이고 복제본인지’,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 되었죠. 이런 현대 사회의 특징을 (일찍이) 1960년대에 예리하게 간파해 예술에 절묘하게 녹인 예술가가 바로 앤디 워홀입니다.

(339-340)

더 나아가 워홀은 이런 미국의 사회 구조 속에서 하나의 진실을 발견합니다. 바로 기업이 상품을 반복적으로 생산하고, 미디어 광고를 반복적으로 노출하고, 소비자가 된 미국인은 광고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며 소비를 반복한다는 진실. 다시 말해, ‘반복 생산, 반복 노출, 반복 소비의 문화를 발견합니다. 워홀은 미국의 사회 구조 속에 숨겨진 이 진실을 자신의 전매특허 미학으로 승화시키기로 합니다. 한마디로 반복’. 캠벨 수프 캔 하나를 그리던 워홀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시중에 판매 중인 32종의 캠벨 수프 캔을 반복적으로 그리기 시작합니다. 크기도, 형태도, 형식도 모두 완벽하게 표준화된 32개의 <캠벨 수프 캔>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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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2)

바질은 이모진 비슬에게 달려가 자전거에 앉은 채 공연히 그녀 앞에 있었다. 그때 바질의 얼굴 무언가에 끌렸는지 이모진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를 똑바로 쳐다보다가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미인으로 자라 몇 년 후면 많은 무도회에서 여왕으로 뽑힐 아이였다. 지금은 큼직한 갈색 눈동자와 아름다운 모양의 큼직한 입술, 여윈 광대에 어린 짙은 홍조 때문에 땅의 요정처럼 보였고, 아이가 아이다워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 얼굴을 좋아하지 않았다. 잠깐이지만 바질은 미래를 내다보는 기분이었고, 이모진의 생기가 마력처럼 단숨에 그를 덮쳤다. 여자란 그와 정반대되는, 그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존재임을 난생처음 깨달으면서, 즐거움과 고통이 뒤섞인 포근한 냉기가 엄습해왔다. 이 명확한 경험을 그는 즉각적으로 의식했다. 여름 오후-보드라운 대기, 그늘진 산울타리와 소복이 핀 꽃들, 오렌지빛 햇살, 웃고 떠드는 소리, 길 건너편에서 뚱땅거리는 피아노-는 이모진에게로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이 모든 것을 떠난 향기는, 앉아서 방실거리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이모진의 얼굴로 스며들었다.


(63)

오랜 전통처럼 사내아이들은 어른이 된다는 개념에 집착한다. 어리다는 이유로 가해지는 제약을 이따금 푸념하면서 말이다. 반면에 소년으로 지내는 것이 마냥 좋은 시절도 오랜 기간 존재하는데, 그 만족감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표현된다. 바질은 조금만 더 나이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더러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그에게 긴 바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긴 바지가 갖고 싶긴 했지만, 의상으로 따지자면 풋볼 유니폼이나 경찰 제복, 심지어 밤에 뉴욕 거리를 누비는 괴도 신사들의 실크해트와 긴 망토만큼의 낭만도 없었다.


(112-113)

열다섯 살은 참으로 애매한 나이다. 손가락을 딱 짚으며 그땐 이랬었지라도 말하기가 곤란한 것이다. 우울한 제이퀴즈는 열다섯 살을 언급하지 않고,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이라곤 소년기의 한창인 열세 살과 일종의 가짜 청년인 열일곱 살 사이의 언젠가, 두 세계 사이를 끊임없이 오락가락하면서 생소한 경험들로 끊임없이 떠밀리고 어떤 대가도 치를 필요가 없던 시절로 되돌아가려 헛되이 몸부림치는 시기가 찾아온다는 것뿐이다. 다행히도 그 시절에 우리가 어떻게 처신했는지는 우리 자신도 또래들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해 여름 바질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는지 들여다보기 위해 커튼을 걷어보려 한다.


(175-176)

창밖으로는 지나가는 차들의 빛줄기가 가을의 황혼을 가르고 있었다. 이 자동차들 안에는 위대한 풋볼 선수들과 사랑스러운 데뷔탕트들, 신비로운 여성 모험가들과 국제 스파이들이 타고 있었다. 부유하고 유쾌하며 매혹적인 이 사람들은 뉴욕의 화려한 댄스파티와 비밀스러운 카페에서, 혹은 가을 달 아래의 옥상 정원에서 이루어질 눈부신 만남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바질은 한숨 지었다. 이런 낭만적인 일에는 나중에 낄 수 있으리라. 먼저, 가지 넘치고 화술이 능란한 동시에 강인하고 진중하며 과묵한 사람이 될 것. 너그럽고 솔직하고 헌신적이면서도, 약간은 신비롭고 섬세하며 애수 어린 비통함까지 깃든 사람이 될 것. 밝으면서도 어두운 사람이 될 것. 이런 점들을 조화롭게 버무려 단 한 사람으로 녹여낼 것. , 그러려면 할 일이 있었다. 완벽한 인생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바질은 야망의 황홀경에 취하고 말았다. 잠시 더 그의 영혼은 질주하는 빛을 따라 대도시로 향했다. 그러다 그는 결연히 일어나 담배를 창턱에 비벼 끈 다음 전기스탠드를 켜고 완벽한 인생의 요건들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257-258)

구제 불능의 주벌이 소유욕을 내뿜으며 다가오자, 바질의 심장은 분홍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장을 이리저리 배회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우유부단함의 안개에 갇혀버린 바질은 베란다로 나갔다. 때 이른 눈이 대기에 흩뿌려지고 있었고, 별들은 차가워 보였다. 별들을 올려다본 언제나처럼 그의 별들, 야망과 고투와 영광의 상징들이 보였다. 별들 사이로 바람은 그가 항상 귀 기울여 찾던 높은 원음(原音)을 나팔 소리처럼 울렸고, 전투를 위해 찢겨 가늘게 흩어진 구름은 열병식을 거행하며 지나갔다. 비할 데 없이 찬란하고 장엄한 광경 앞에, 사령관의 노련한 눈만이 그곳에서 하나의 별이 사라졌음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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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2)

도화서 화원들은 궁궐 외에 주문을 받곤 했던 양반 고객들은 대부분 북촌(北村))’에 살았다. 당시 북촌은 벌열 양반과 왕의 인척들이 사는 조선조 최고의 부촌이었다. 화원들의 후원자가 될 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북촌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화원 입장에서는 궁에서 멀지 않고, 부수 입을 올릴 수 있는 서화 가계들이 있는 광통교 근처이고, 자신들의 후원자가 사는 북촌에서도 멀지 않은 지역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었다. 이 세 곳이 모두 연결되는 중심부가 지금의 인사동 지역이었다. 이러한 입지는 후에 인사동이 서화와 전전(典籍), 고미술 거래의 중심지가 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29)

안중식은 솜씨 좋은 서화가였을 뿐 아니라 국민 계몽의 필요성을 느낀 개화사상가이기도 했다. 1906년에는 대표적인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대한자강회(大韓自彊會)에 회원으로 가입했으며, 이듬해 <대한자강회월보> 8호 첫 페이지에 을사늑약에 항의하다가 자결한 충신 민영환(閔泳煥)(1861~1905)을 기리는 <민중정공혈죽도>를 그려 싣기도 했다. 또한 이듬해에는 어린이용 교과서 <유년필독>과 진보적이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잡지 <청춘(靑春)>, <아이들보이>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1913년에 창간된 <아이들보이>에는 군복을 입고 백마를 탄 우리나라의 옛 무사를 그린 삽화가 표지화로 실리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근대적인 면모를 보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보면 전통적 기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한계도 있다.

 

(88)

고희동은 그동안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역사적 의미와 새로운 조형 방법을 후진에게 가르친 미술 교육자로서 높이 평가받았다. 화단을 형성하고 이끌어나간 미술 행정가의 성격이 강해 일부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최초였음에도 결국 서양화를 포기하고 동영화로 돌아온 화가로서의 정체성 문제는 더욱 그에 대한 평가를 박하게 만들었다. 이런 치우친 평가가 과연 정당한지 의문이다.

실제 전하는 그의 작품들은 당대에 활동한 대표적인 화가들 못지않은 개성과 미덕을 가지고 있다. 원근이 살아 있는 생동감 넘치는 산수화나 뛰어난 색채감을 보이는 개성적인 화면은 다른 화가들에게서 보기 어려운 새로운 면이다. 이는 현대에 와서 더욱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화가로서의 고희동에 대해 더욱 정치한 연구가 필요하다.

 

(154)

첫눈에 반한 김기창은 박래현이 도쿄로 돌아가자 계속 편지를 보내 그녀의 환심을 산다. 김기창의 4년간의 끊임없는 열정에 박래현에 처음에는 바위 덩어리처럼 시커먼 물체처럼 보였던 그에게 애정을 느끼게 되어, 결국 두 사람은 4년 뒤 결혼한다. 결혼한 두 사람은 부부 이전에 예술적 동반자였다. 미술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면서 미술세계를 넓혀갔다. 같은 공간에서 살며 작업하다 보니 두 사람의 예술세계는 서로 다른 듯 닮아갔다. 마치 피카소와 브라크의 그림이 서로 닮아 예술의 동반자임을 드러냈듯이, 김기창과 박래현의 그림은 어느 시기까지 서로 비슷한 면을 많이 보였다.

 

(205)

이렇듯 빼어난 감성으로 좋은 그림을 그렸던 최재덕이었지만, 북으로 가서는 자신의 화풍을 제대로 이어나가지 못했다. 그의 감성적이고 예민한 예술적 성향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주창하는 북한의 예술론과는 어울리지 않는 면이 많았을 것이다. 그가 계속 남쪽에 남아 그림을 그렸다면 또 어떤 작품을 남겼을지,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앞서 박고석은 최재덕이 북쪽으로 가고, 이중섭이 남쪽으로 왔으니 비긴 셈이다라고 했지만, “이중섭이 북쪽에 남고, 최재덕이 남쪽에 남았으면 또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혹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다면 어쩌면 남북의 미술이 지금보다 더 풍요롭지 않았을까? 역시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다.

 

(235)

사람들이 현대사옥을 정경 유착의 결과물로 이야기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이 건물 건축의 첫째 의문은 건축의 허가가 정당했는지의 문제이다. 우선 크기가 너무 크다. 지금도 너무 커 위압감을 느낄 정도인데 1983년에는 어떤 정도였을지 상상이 될 것이다. 더구나 이곳은 창덕궁이 바로 옆에 있어 건축법상 이렇게 높고 큰 규모의 건물이 들어서서는 안 된다. 실제 주변 다른 곳의 경우 고도제한을 받는다. 이런 높은 건물이 어떻게 허가를 받을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309-310)

2001년 월북한 서양화가 배운성의 작품 48점이 발견되자 한국미술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때 발견된 작품이 대부분 유화 작품이어서인지 주로 그의 유화 작품에 대해서만 언급되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이나 한국에서 배운성이 미술세계가 주목을 받은 것은 유화보다는 판화 부문이었다. 배운성이 한국에 돌아왔을 1940년 당시에도 한국 화단과 언론에서의 관심은 그의 기구한 삶과 함께 뛰어난 판화 실력이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서 대서특필한 기사도 세계적인 판화가라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실제 배운성은 여러 살롱전과 공모 전람회에서 판화로 입상했으며, 개인전에서도 유화 못지않게 판화를 전시하곤 했다.

 

(338)

2009년 일본의 명문 학교인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는 개교 80주년을 맞아 학교 역사를 대표할 만한 단 한 명의 작가를 선정하고자 했다. 교수와 학생들의 엄격한 추천과 심사를 거쳐 일본화, 서양화, 조각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가장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가 한 명을 선발했다. 그 한 명이 바로 1949년에서 1953년까지 이 학교를 다닌 한국인 조각가 권진규(1922~1973)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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