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수년 전, 아이가 마음껏 놀게 하려고 일부러 맨 아래층에 얻은 집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좀처럼 발을 구르거나 뛰어다니려 하지 않았다. 거실에서 줄넘기 연습을 해도 된다고 그녀가 말하자 아이는 물었다. 지렁이랑 달팽이들이 시끄러워하지 않을까?

 

(42-43)

그렇게 상상하며 사람들을 지켜보는 일이 지루해질 때쯤. 천천히 뒷산의 산책로를 오르기도 합니다. 연푸른 나무들은 한 덩어리로 일렁이고, 꽃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색채로 번져 있습니다. 산기슭에 있는 작은 절의 대중방 마루에 앉아 나는 쉽니다. 무거운 안경을 벗어들고,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진 흐릿한 세계를 둘러봅니다. 잘 보이지 않으면 가장 먼저 소리가 잘 들릴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감각되는 것은 시간입니다. 거대한 물질의 느리고 가혹한 흐름 같은 시간이 시시각각 내 몸을 통과하는 감각에 나는 서서히 압도됩니다.

 

(49)

진실이 어리석음을 파괴한다는 중간태의 희랍어 문장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진실이 어리석음을 파괴할 때, 진실 역시 어리석음에서 영향을 받아 변화할까요. 마찬가지로 어리석음이 진실을 파괴할 때, 어리석음에도 균열이 생겨 함께 부서질까요. 내 어리석음이 사랑을 파괴할 때, 그렇게 내 어리석음 역시 함께 부서졌다고 말하면 당신은 궤변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목소리. 당신의 목소리. 지난 이십 년 가까이 잊은 적 없는 소리. 내가 아직 그 목소리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면, 당신은 다시 내 얼굴에 그 단단한 주먹을 날리겠습니까.

 

(50)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귀신에 홀리는 일과 비슷하다는 것을 그 무렵 나는 처음으로 깨닫고 있었습니다. 새벽에 눈을 뜨기 전에 이미 당신의 얼굴은 내 눈꺼풀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눈꺼풀을 열면 당신은 천장으로, 옷장으로, 창유리로, 거리로, 먼 하늘로 순식간에 자리를 옮겨 어른거렸습니다. 어떤 죽은 사람의 혼령이라도 그토록 집요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 여름밤 내 책상 옆의 작은 거울 속에는 땀을 뻘뻘 흘리며 어설픈 수화를 연습하는 내 상반신이 비쳐 있었지만, 거기 어른을 나는 매 순간 알아보았습니다.

 

(62)

그에 비하면 언어는 수십 배 육체적인 접촉이었다. 폐와 목구멍과 혀와 입술을 움직여, 공기를 흔들어 상대에게 날아간다. 혀가 마르고 침이 튀고 입술이 갈라진다. 그 육체적인 과정을 견디기 어렵다고 느낄 때 그녀는 오히려 말이 많아졌다. 긴 문어체의 문장으로, 유동하는 구어의 생명을 없애며 말을 이어갔다. 목소리도 평소보다 커졌다.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수록 점점 사변적으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런 순간들이 반복되는 시기에는, 혼자 있는 시간에도 글을 쓰는 데 집중할 수 없었다.

 

(105)

아름다운 사물들을 믿으면서 아름다움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은 꿈을 꾸는 상태에 있는 거라고 플라톤은 생각했고, 그걸 누구에게든 논증을 통해 설득해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세계에선 그렇게 모든 것이 뒤집힙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오히려 모든 꿈에서 깨어난 상태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현실 속의 아름다운 사람들을 믿는 대신 아름다움 자체만-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아름다움만을-믿는 자신이.

 

(138)

네가 나를 처음으로 껴안았을 때, 그 몸짓에 어린, 간절한, 숨길 수 없는 욕망을 느꼈을 때, 소름 끼칠 만큼 명확하게 하는 깨달았던 것 같아.

인간의 몸은 슬픈 것이라는 걸.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 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한 인간의 몸은. 팔뚝은 겨드랑이는. 가슴은. 샅은. 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어지도록 태어난 그 몸은.

 

(176)

그 순간, 불쑥 오래된 한 단어의 기억이 절반쯤 잘린 채 떠올라 그녀는 그것을 붙들려 한다. 오래전에는 해가 진 직후와 해가 뜨기 직전의 어스름을 호()……로 시작하는 한자어로 불렀다고 했다. 멀리서 오는 사람을 알아볼 수 없어, 큰 소리로 불러 누구인지 물어야 한다는 뜻의 단어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란 서양식 표현과 비슷한 연원을 가진, ……로 시작되는, 끝끝내 완전해지지 않는 그 단어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뒤척인다.

 

(307)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어두운 것과 밝은 것, 따뜻함과 차가움, 노동과 휴식, 병과 치유, 꿈과 현실, 애정과 오해, 기대와 실망, 잠깐 마주잡는 손길, 잠깐 마주치는 눈빛들…… 속에서 우리는 나아간다. 사실 식구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아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도 아니며, 모든 기억을 공유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식구가 주는 애틋함을 말하려 할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은, 이 모든 삶의 국면들을 함께 매만지며, 상처를 공유하며 나아갔던 순간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308)

어느 순간, 갑자기 아버지의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자식에게 찾아온다. 그것이 자식의 운명이다. 인생은 꼭 그렇게 힘들어야 하는 건가, 하는 의문 없이. 불만도 연민도 없이. 말도 논리도 없이. 글썽거리는 눈물 따위 없이. 단 한 순간에.

 

(316)

지금 내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떠오른 이미지는, 펜촉 또는 송곳을 들고 자신이 뚫다 만 종이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어렴풋한 옆얼굴이다. 그들이 내쉬는 더운 숨이 구멍들을 통과해 가장 단순한 언어가 된다. 그들은 어떤 소리를 내지도 움직이지도 않는데, 간결한 부호 같은 언어들이 그 구멍들에서 새어나온다(들립니까, 나는 지금 온 힘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내 말을 듣고 있습니까). 실핏줄을 타고 흐르는 따뜻한 피 같은, 우리가 가진 생명의 가장 연한 부분, 또는 어떤 목소리의 이미지.

 

(331)

2012년 겨울부터 <소년이 온다>를 쓰기 위한 자료를 읽으면서 나는 내면의 투쟁을 치르고 있었다. 인간의 잔혹함을 증거하는 자료들과,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존엄을 증거하는 자료들 사이에서 나는 분열을 겪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에게 광주는 더 이상 하나의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인간의 폭력과 존엄이 극단적으로 공존한 시간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어 있었다. 신대륙의 학살, 아우슈비츠, 보스니아, 관동과 난징의 학살을 가로지르는 인간의 잔혹함과, 그럼에도 필사적으로 그 폭력 앞에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했던 연약한 몸짓들에 대해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이 소설을 쓰는 일을 거의 포기하려 했던 어느 날, 5 27일 새벽 군인들이 돌아와 모두를 죽일 것임을 알면서 광주의 도청에 남았던 한 시민군, 섬세한 성격의 야학 교사였던 스물여섯 살 청년의 마지막 일기를 읽었다. 기도의 형식을 한 그 일기의 앞부분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토록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순간 내가 쓰려는 소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든 폭력에서 존엄으로, 그 절벽들 사이로 난 허공의 길을 기어서 나아가는 일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355)

<작별하지 않는다>는 소설이 되기 이전에 노트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었나요?

 

죽음에서 삶으로 가는 소설, 절반 죽어 있던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 소설, 바다 아래에서 촛불을 켜는 소설, 어떻게 보면 좀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는데…… 항공기 조종사가 우울증을 앓다가 아주 많은 사람들과 함께 추락해서 자살한 사건이 있었잖아요. 살아 있던 사람들을 아주 많이 살해하며 죽었어요. 그런데 절반 죽은 또다른 사람이, 그 항공기 사건과는 정반대로, 삶으로 건너오면서 죽어 있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죽을 수 있지만, 죽은 사람들이 되살아나는 건 현실에서 불가능한 방향이죠. 하지만 어떤 한 순간에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반쯤 죽어 있던 사람이 혼들과 함께, 단 한 순간 삶으로 함께 건너올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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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테이아 - 매들린 밀러 짧은 소설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새의노래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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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아빠가 몇 년 전에 재미있게 읽은 책, <키르케> <아킬레우스의 노래>의 지은이 매들린 밀러의 책을 이야기할게. <키르케> <아킬레우스의 노래> 모두 고전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구성한 소설이란다. <아킬레우스의 노래> <일리아드>, <키르케> <오디세이아>를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닌, 소설 속 조연의 시각에서 재구성한 그런 소설이었어. 고전을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볼 수 있어서 좋았던 작품이었단다.오늘 이야기할 책도 위 소설들과 비슷한 성격이 책이란다.

<갈라테이아> 아빡가 갈라테이아가 누군인지 몰라서 검색을 해 보았단다. 피그말리온이 사랑한 조각상, 그래서 사람으로 변해 피그말리온의 아내가 된 그 조각상의 이름이 바로 갈라테이아라고 하는구나.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는 너무 유명한데도 그가 만든 조각상의 이름은 모르고 있었구나. 피그말리온이 그렇게 사랑했던 갈라테이아…. 결혼하여 아이도 낳고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이렇게 끝났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미처 갈라테이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구나.

만약 갈라테이아가 피그말리온을 사랑하지 않았다면조각상이었던 갈라테이아가 어느날 갑자기 사람으로 변했더니, 어떤 남자가 눈 앞에서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아무 것도 안 입고 있었다갈라테이아의 인권은 누가 보호해 주는가.. 지은이의 이런 발상은 아빠도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구나.

….

 

1.

소설은 갈라테이아가 사람으로 변한 지 11년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을 해. 남편 피그말리온과 결혼을 하여 딸 파포스나 낳았어. 파포스는 이제 열 살이 되었어. 남편은 시간은 갈수록 갈라테이아에 집착을 하고 질투를 하고.. 결국 갈라테이아를 때리기도 했단다그런 갈라테이아는 남편을 안고 바다에 빠져 자신이 원하지 않던 삶을 마감하였단다.

….

무슨 소설이 이러냐고? 이 소설은 엄청 짧은 단편 소설이란다. 그런데 출판사는 책 한 권으로 출간하는 모험을 했구나. 양장본으로 만들고, 책의 뒤편에는 <한국 독자들에게>, <옮긴이의 말> 까지 실었지만 다 합해서 72페이지구나. 짧지만 강렬하다는 등의 호평이 있었지만, 갈라테이아가 하고 싶었던 말은 더 있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었단다.

이 소설은 갈라테이아가 태어난 지 11년 뒤에 시작하여 아주 짧은 시간을 이야기했는데, 태어났을 때부터 그 동안의 심경 변화 등을 쭉 이야기해주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어. 쉽게 읽은 책 한 권을 늘려서 약간의 양심의 가책마저…^^ 매들린 밀러의 다음 책을 기다리며,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그들은 나를 걱정해주었다.

책의 끝 문장: 나는 거기에 몸을 눕히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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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작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41)

전태일은 두 손에 이마를 대고 차가운 방바닥에 엎드렸다.

주여, 약한 저에게 용기와 확신을 주소서. 제가 저의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저의 죽음이 절대 헛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주소서.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돈 많고 권력 가진 자들의 서로 작당해서 속이고 또 속이고, 거기에 정부까지 한통속이 되어 있습니다. 그 벽은 높고 높으며, 두껍고 두껍습니다. 그 벽을 어찌해야 깰 수 있겠나이까. 그 벽을 깨고 모든 사람끼리 빈부도, 강약도, 귀천도 없는 세상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이 한 몸을 육탄으로 날리는 길뿐이라고 여겨지옵니다. 이 미천한 몸 하나 육탄으로 날아가 산산이 부서져서 천대받고 억눌려 사는 모든 노동자들이 눈 똑바로 뜨고 자기들을 보게 하고자 하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다함께 뭉쳐 일어나 그 벽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인간다운 세상을 이룩해 내는 데 한 톨 불씨이고자 하나이다. 이 결심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번뇌하였으나 이 길이 가장 옳은 길이라 여겨지옵니다.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은 2천 년 동안 끝없이 부활하시기 위함이었나이다. 이 나약한 자 감히 주님의 가르침을 한 중 거름이 거고자 하오니 주여, 부축하여 주소서…..”

 

(57)

, 나도 이번 사건으로 모든 걸 알게 된 건데, 우리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사람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나라에서 법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근로조건이라는 게 있어. 하루에 일은 여덟 시간만 한다. 야근을 시키면 야근 수당을 따로 지급해야 한다, 일요일과 공휴일은 쉬어야 한다. 공장 안의 작업환경은 건강을 해치게 해서는 안 된다, 하는 식으로 정해놓은 거야. 그밖에도 노동자들을 위한 법이 많은데, 그 법들을 다 합해놓은 게 근로기준법이라는 거야. 그런데 사장들은 그 법을 하나도 안 지키잖아. 그래서 그 사람은 모든 걸 법이 정한 대로 하게 하려고 우리 노동자들이 힘을 모아 들고일어나게 하는 일을 시작했어. 그걸 노동운동이라고 해.”

 

(60)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일까…… 배운 것이 많은가…… 아니지, 스물두 살에 벌써 재단사 노릇을 했다면 아무리 짧아도 5년은 봉제공장밥을 먹었을 것 아닌가. 그럼 아무리 많이 배웠어야 중학교밖에 더 나왔겠는가. 그렇다면 많이 배웠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스텐공장은 일하는 모든 조건이 봉제공장에 비해 나빴으면 나빴지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은 막소주나 마시며 불평을 했을 뿐이지 그 사람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다른 공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어린 사람이 남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다니…… 그게 똑똑한 것인가…… 어리석은 것인가…… 이 야박하고 약아빠진 세상에서 그런 사람이 있다니……

 

(95)

월출산은 바위산의 아름다움이 더없이 빼어난 산이었다. 월출산의 신비스러움과 아름다움은 두 가지 사실이 합해져 이루어지고 있었다. 시방 그 어디를 둘러보아도 산줄기라고는 없이 질펀한 들녘일 뿐인데 어찌 그렇게 거대한 바위산이 솟을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바위산이 되 무작정 커서 위압적인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작은 봉우리들이 모여 산을 이루고, 그 산들은 겹겹이 큰 산을 이루어내며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하게 조화되어 있었다. 넓은 들판 가운데 솟아 더욱 우람해 보이고, 그러면서 수많은 봉우리들이 어우러져 섬세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월출산은 바위산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그 겹겹의 봉우리에 안개가 감겨 있을 때는 범접하기 어렵게 신령스럽기 그지없었고, 눈이 하얗게 내려 있으면 신선의 세상이 저기가 아닌가 싶게 신비스러움은 절정을 이루었다.

 

(155-156)

바로 그거요. 모든 신문들도 은근히 그런 냄새를 풍기고 있고, 세상 인심도 그리 돌아가고 있듯이 이번 선거는 분명 우리 경상도와 전라도의 싸움일 수밖에 없소. 여러분은 이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유권자들에게 주지시켜야 해요. 우리끼리니까 터놓고 하는 얘긴데, 유권자 설득작전에서 그냥 막연하게 우리가 같은 경상도니까 경상도를 찍자 해서는 효과가 좋지 않아요. 특히 지식수준이 낮고 단순한 사람들일수록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이건 된장이고 간장이고 고추장이다 하는 식으로 꼭꼭 찍어서 쉽게 말해야 효과가 나요. 다시 말하면, 우리 경상도가 이렇게 잘살게 된 건 누구 덕이냐? 다 각하 덕이다. 왜냐하면 각하께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1, 2차 단행하시면서 덕을 제일 많이 입히신 데가 우리 경상도 아니냐. 부산, 대구를 양대 중심으로 해서 발전시키는 것은 더 말할 것 없고, 울산을 개발했고, 마산에 수출자유지역을 만들었고,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하지 않았느냐. 다 이런 혜택으로 딴 데보다 더 잘살게 된 것이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폐일언하고 우리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똘똘 뭉쳐 또다시 각하를 찍어 대통령으로 받들어야 한다. 만약에 우리가 힘을 합치지 않아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면 어떻게 되느냐. 지금까지 누렸던 그 모든 혜택이 다 전라도땅으로 가버린다. 여러분, 이런 사실들을 명백하게 주지시켜야 한다 그겁니다.”

 

(270)

으응, 그거야 뭐……” 김명숙은 그까짓 거야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심드렁하게 말끝을 흐리고는, “이런 말 들으면 우리 원장님 또 싫은 기색할지 모르지만 말야, 디자이너로 말하자면 노력으로나 능력으로나 앙드레 김을 당할 사람이 없어. 네가 말을 꺼냈으니까 솔직하게 하는 말인데 우리한테는 신동파나 박신자보다는 앙드레 김이 훨씬 더 중요하고 본받아야 될 인물이야. 너도 소문 들어서 좀 알고 있겠지만 앙드레 김은 벌써 15년 전에 순전히 독학으로 디자인 공부를 시작했는데, 거짓말 하나도 보태지 않고 기본 스케치를 1천 번, 1만 번, 수백만 번을 해서 2년이 지나지 않아 어둠 속에서도 마음먹은 대로 디자인 스케치를 해낼 수 있었다는 거야. 그 실력이 얼마나 짱짱하면 벌써 6~7년 전에 프랑스 정부에서 초청해 세계 디자인의 최고 도시인 파리에서 패션쇼를 열게 했겠니. 너 국민학교 때 명필 한석봉 얘기 들었지? 등잔불 없는 밤중에 천자문을 획 하나 틀리지 않고 다 썼다는 거. 난 그게 지어낸 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앙드레 김이 살아 있는 한석봉이야. …… 그 사람처럼 되는 게 꿈이야.”

 

(302-303)

그 길을 따라 사나이의 젊은 꿈도 접고, 야속한 운명에 절망하며 절룩절룩 걸어가고 있는 한 남자의 외롭고 슬픈 모습이 영화의 라스트 씬처럼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지금의 영상이 아니라 그 시를 외웠던 중학생 때의 영상이었다. 그 영상은 변함이 없는데 왜 시는 떠오르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야 간간하게 말하면 세월 따라 잊혀진 것이었다. 그런데 최주한은 야릇한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을 마치 누구한테 빼앗겨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느낌의 배면에는, 그럼 나는 서울에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회의가 도사리고 있었다. 결국 그것을 빼앗아간 것은 서울이었다. 중학생 시절에 비해 서울에서 보낸 세월은 긴 세월이었다. 그 세월은 중학생인 어린 시절 한때 외웠던 시를 잊혀지게 할만도 했다. 그런데도 엉뚱하게 상실감이 드는 것은 자신이 처한 궁색한 처지 때문일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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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코스트
테스 게리첸 지음, 박지민 옮김 / 미래지향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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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소개해줄 책은 얼마 전에 신간 코너에서 본 책이란다. 지은이가 낯익은 사람이라서 더 관심이 갔단다. 테스 게리첸이란 사람인데, 오래 전에 <의과의사>라는 스릴러 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단다. 테스 게리첸은 의사 출신 작가로 <의과의사>라는 소설에서도 의사라는 직업의 장점을 유감없이 드러냈던 것으로 기억한단다. 그런 테스 게리첸의 신작이라면서 홍보를 했는데 아빠가 제대로 걸려 들었단다. 아빠가 추리 소설도 좋아하는 편이니 재미있겠다 싶어서 읽었단다.

제목은 <스파이 코스트> 스파이에 관한 이야기인가 보구나. 그런데 코스트는 무얼 의미하지? 코스트(coast)는 해안이라는 뜻인데, ‘스파이 코스트라고 하면 다른 숨어 있는 뜻이 있으려나? 책에서 이야기를 해주었는지 모르겠는데, 재미있게 다 읽었지만 아빠는 책에서는 스파이 코스트라는 문구를 본 적이 없는 것 같구나. 문득 이 소설의 주무대인 메인 주 퓨리티와 관련이 있나 싶어, 검색을 해보니, 메인 주가 미국 북동부 끝에 바다랑 붙어 있더구나. 소설 속 장소가 해안 마을이라서, <스파이 코스트>라고 한 것인가?

 

1.

메인주 퓨리티라는 해안 마을에 전직 스파이 출신 매기 버드가 출신을 숨긴 채 농장 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었단다. 은퇴한 지 16년이나 되었으니 스파이가 전직이라고 하기에도 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이구나. 그렇게 스파이 생활은 뭔 과거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비앙카라는 젊은 요원이 찾아와서 시라노 작전의 파일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매기와 함께 시라노 작전에 참여했었던 다이애나가 사라졌다면서, 매기에도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남기고 갔단다. 그런데 그날 저녁 비앙카는 매기의 집 진입로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어. 이것은 누가 봐도 매기에게 경고를 날린 것이라고 볼 수 있었지.

이 사건은 조 티보듀라는 경찰이 담당하였단다. 비앙카가 시신으로 발견되었을 때 매기는 북클럽 친구들과, 정확히 이야기하면 은퇴한 다른 요원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단다. 매기가 살고 있는 마을에는 매기뿐만 아니라 잉그리드, 로이드, , 데클란 등 은퇴한 요원들도 살고 있었어. 서로의 비밀을 알고 있으면서 친하게 지내던 옛 동료들에게 이 마을을 추천하여 하나 둘 이곳에 정착하게 된 거야. 그들은 북클럽 이름은 마티니 클럽이었는데, 그들은 비앙카 살인 사건을 조사하게 되었단다. 그들은 사건 장소에서 가서 시신을 살펴보고 서로 의논하고 그랬는데 그 모습을 보던 경찰관 조가 가장 황당했을 것 거야. 시골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시신에 놀라지도 않고 시신에 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니 말이야. 그들은 그저 취미로 추리소설을 많이 읽어서 관심이 있을 뿐이라고 했단다. 그렇다면 비앙카가 이야기한 시라노 사건이란 어떤 사건일까.

 

2.

스파이 소설에 사랑이 빠질 수 없지. 24년 전. 매기의 나이는 서른다섯 살. 방콕에서 휴가 중이었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의료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대니 겔러거라는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단다. 그런데 홀로 된 대니의 어머니가 대니에게 영국으로 돌아와 달라고 애원을 해서, 대니는 영국으로 돌아갔단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더 뜨거워졌어. 장거리 연애를 했단다. 물론 매기는 자신이 CIA 요원이라는 것을 숨기고 무역업을 한다고 했어. 그들의 장거리 연애는 6년이 넘어도 식지 않았단다. 18년 전 매기는 임무 수행을 위해 터키 이스탄불에 있었단다. 그곳에서 매기에서 정보를 주던 체첸의 정보원 도쿠가 암살 당하고 그의 가족들도 모두 의문사하고 말았단다. 매기는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았단다. 이 일을 겪고 런던에 가서 대니 겔러거를 만났는데, 대니로부터 청혼을 받았단다 매기도 이제 CIA 요원을 은퇴하고 대니와 결혼하기로 마음 먹었단다.

임무를 정리하려고 이스탄불에 왔는데, 다이애나 로드라는 요원이 찾아왔어. 대니의 고객 중에 하드윅이라는 자가 있는데, 그 자가 러시아 쪽 스파이로 추정된다는 거야. 그리고 시라노라는 러시아의 핵심 요원도 활동한다고 했어. 하드윅을 조사하면 사라노의 정체도 밝힐 수 있다고 했어. 그들은 얼마 전에 죽은 체첸 정보원 도쿠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었어. 그래서 하드윅의 정보를 빼 달라고 부탁하러 온 거야. 매기는 갈등을 했단다. 가뜩이나 대니에게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그의 고객의 정보를 빼내야 하니 말이야. 하지만 자신의 불쌍한 정보원 도쿠와 그의 가족에 대한 원한도 생각해야 했단다.

문득 재미있게 본 <얼라이드>라는 영화가 생각이 나는구나. 동료 스파이인줄 알았던 아내가 이중간첩 의심을 받고 그것을 증명해야 하는 임무를 맡은 주인공그 괴로운 심정….. 혹시 매기의 남자친구 대니도 혹시 러시아 스파이 시라노가 아닐까? 방콕에서 만남도 우연한 만남이 아닌 고의적인 접근은 아닐까? 이런 추측을 하면서 다음 장을 열심히 넘겼단다.

 

3.

매기는 다이애나의 요청을 수락했단다. 지금처럼 충분이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매기는 대니와 결혼을 하고, 결혼식장에 온 하드윅과 인사도 했어. 하드윅은 이혼하고 젊은 여자와 사귀고 있었는데, 15살짜리 딸 벨라도 함께 지내고 있었어. 엄마와 떨어져 지내는 벨라는 파티에서 알게 된 매기를 잘 따르게 되었단다. 결혼하고 나서 얼마 후 대니와 매기는 하드윅의 초대한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어. 파티가 끝나고 대니와 매기는 하드윅의 집에서 잤는데, 매기는 밤에 조사를 하다가 마구간에서 시체를 발견하게 되었고, 곧 이어 그 시체를 치우는 이들과 마주칠 뻔한 위기도 있었어.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시신은 CIA에서 심어 놓은 또 다른 요원이었어. 만일 매기의 정체도 밝혀졌다면

하드윅이 업무 차 몰타에 출장을 가는데, 대니도 함께 가야 한다고 했어. 사실 하드윅이 간질 증상이 있는데 언제 간질이 나타날지 몰라서, 주치의인 대니도 함께 가야만 했어. 대니의 제안으로 여행도 할 겸 매기도 함께 가게 되었단다. 그런데 몰타에서 매기는 자신의 신분을 대니에게 들키고 말았단다. 어차피 이 임무만 끝나면 다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인데대니는 매기의 정체를 알고 나서 매기의 사랑을 의심했어. 매기는 대니를 사랑하는 것은 진심이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대니는 여전히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어. 그러면서 시간을 갖자고 하면서, 다른 일반 비행기로 따로 타고 오라고 했어. 그런데…. 하드윅과 대니가 타고 있던 전용 비행기가 폭발로 추락하고 말았단다. CIA의 짓이었어. 이 사고로 CIA의 타겟인 시라노와 하드윅뿐만 아니라 대니와 하드윅의 딸 벨라 등 죄 없는 이들도 죽고 말았단다. 이 사건으로 매기를 은퇴를 하고 메인 주 시골 마을에 정착을 했던 거야. 매기는 참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었구나.

 

4.

다시 현재로 돌아와 보자. 비앙카가 죽고 나서 얼마 후 이번에는 매기를 직접 노린 암살 시도가 있었어. 다행히 매기도 대응 사격을 했고, 범인도 도망 갔단다. 경찰관 조는 다시 매기를 조사했어. 총 쏘는 것이 아주 능숙한 할머니 매기를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당연한 거지. 뿐만 아니라 할머니의 친구들도 탄피만 보고도 무슨 총인지 아는 것도 이상하고조는 이 때부터 이들의 전직을 의심했을 거야.

범인이 안 잡혀서 일단 매기는 숨어 지내기로 했단다. 시라노 작전에 참여했던 또 다른 요원인 개빈을 만나러 방콕에 갔어. 개빈은 루게릭 병으로 투병 중이었어. 개빈도 이야기하기를 하드윅이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어. 그 근거로 최근 그의 계좌에서 돈이 인출되었다고 했어. 매기는 하드윅의 마지막 애인이었던 실비아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밀라노에 갔단다. 다이애나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곳에서 매기는 다이애나를 만났단다. 매기와 다이애나가 그곳으로 올 곳을 예상을 했던지 그들에게 다시 총격이 가해졌고, 총격 중에 다이애나는 죽고 말았단다. 그런데 그 일당을 이끈 이는 다름 아닌 벨라였단다. 그 비행기에 벨라가 탄 줄 알았는데, 벨라는 친어머니의 만류로 비행기를 타지 않았던 거야. 벨라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했던 거야….

그리고 매기와 마주 친 벨라.. 벨라는 어렸을 때 엄마와 헤어져 있을 때 매기에게 의지를 많이 했었단다. 벨라는 끝내 매기까지는 죽일 수 없었어. 인지상정. 벨라와 헤어진 매기는 다시 메인 주로 돌아왔단다.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단다.

지은이 테스 게리첸의 글들은 여전히 재미있구나. 그리고 황당해하는 경찰관 조의 모습에 유머 코드도 더해졌구나. 전에 읽었던 <외과의사>는 지은이의 전직의 장점을 살렸다면 이번에 읽은 <스파이 코스트>는 순수한 필력으로 끝장내준 것 같구나. 이 정도 이야기라면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볼만하구나. 그런데 어렴풋이아빠가 오래 전에 테스 게리첸의 <소멸>이란 책을 산 기억이 있구나. 도서 정가인하도서로 분류되어 싼 사격에 판매되고 있어서 샀었는데, 언젠가 읽겠지 하면서 지금껏 읽지 않았구나.. 그런데 그 책이 어디에 있을까? 나중에 책장 정리하다가 보게 되면 읽어봐야겠구나. ,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그녀는 한때 멋진 황금빛의 소녀였다.

책의 끝 문장: “그리고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어디에서 우리를 찾아야 하는지도 이제 잘 알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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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2-25 2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 보고싶던데...별 5개를 보니 꼭 봐야하겠네요. ^^ 하지만 리뷰는 흐린 눈으로 읽습니다. ㅎㅎ

bookholic 2025-02-26 16:32   좋아요 1 | URL
ㅎㅎ 잘하셨습니다~~
제가 기억력 보조수단으로 줄거리를 주저리 적어놓아서..^^
바람돌이 님도 취향에 맞길 바랍니다^^
 














(42)

행복하기 위해선 콜센터에서 일하지 않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것이 내가 첫 근무를 마치고 내린 결론이었다. 출발은 무난했다. 다음 날 아침, 이 상태로 과연 전화를 받을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을 안고 정식 출근길에 올랐다. 내 심정을 대변해 주듯 새벽부터 두툼한 봄 안개가 도시를 뒤덮었다. 온 세상이 뿌옇고 축축한 것이 마치 서울이 쌀뜨물 아래 잠긴 것 같았다. 양돈장을 그만둔 이후로 이렇게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타로 나선 게 얼마 만인가. 그나 저나 지하철의 흡입력은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었다. 진공청소기가 먼지를 빨아들이듯이 전철역 인근의 직장인들을 무서운 기세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55)

상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럴 때가 가장 두려운 순간이다. 극도로 화가 난 고객이 갑자기 조용해졌을 때, 이런 상황은 상담사에게 이런 이미지로 다가온다. 두 사람이 격렬하게 말다툼을 벌인다. 침이 튀고 삿대질이 오간다. 분노에 눈이 뒤집힌 이가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상식적인 방식으로는 더 이상 자신이 느낀 좌절감을 담아낼 수가 없다. 뒷일은 상관없다. 어떻게든 이 분노를 해소해야만 한다. , 망치, 포트, 연필, 젓가락 무엇이든 상대를 한 방에 보내버릴 무기를 찾는다. 이 순간의 정적은 수화기 너머의 고객이 상담사에게 휘두를 언어적 흉기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뜻이다.

 

(82)

텅 빈 집에 홀로 있는 동안에도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소프트폰을 대기 상태에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때처럼. 그러다가 전화벨이 울리거나 메시지 수신음이 울리면 매번 깜짝깜짝 놀란다. 내 핸드폰으로 연락을 할 사람은 가족이나 친구밖에 없는 걸 아는데도 그렇다. 시간이 지나면 적응이 될 줄 알았는데 아니다. 매일 첫날 근무를 끝마쳤을 때처럼 똑같이 불안하고 똑같이 짜증 난다. 불안과 짜증이 모든 사람을 대하는 일반적인 상태가 된다. 일을 그만둔 후에도 완전히 예전처럼 되돌아가지는 못한다. 이 일은 사람을 뿌리까지 바꿔놓는다. 전쟁터가 젊은이들을 바꿔놓듯이.

 

(139)

첫날 근무가 끝나고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는 막장에 다다랐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막장은 본래 탄광에서 석탄층이 드러난 갱도의 끝을 가리키는 단어다. 암벽의 석탄을 떼어내야 하는 막장에서의 작업이 탄광에서도 가장 고된 일인 데다 그 위치도 가장 깊숙한 지점이다. 여기에 사회적인 추락의 맥락까지 더해져서 갈 데까지 가버렸다라는 의미로 굳어진 것이다. 까대기의 면면이 탄광의 막장을 떠올리게 한다. 한여름의 컨테이너는 그 자체로 굴이다. 철판은 한낮의 열기를 그대로 머금고 있어 자정이 넘어 문을 열었을 때도 후텁지근한 열기가 가득 차 있다. 내부엔 바람도 빛도 들지 않고 레인 끝에 달린 희미한 전등 빛에 기대 작업한다.

 

(177)

나 처음 일한 날이었는데 새벽 내내 땀 뻘뻘 흘리면서 일하다가 다 끝나고 밖에 나왔는데어떤 건지 알죠? 진짜 그지꼴로 간신히 서 있을 힘만 남아서근데 나가니까 햇빛이 막 쏙아지는데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게, 와아아 세상이 어떻게 그렇게 달라 보이냐. 오기 전엔 나도 걱정 많이 했어요. 20대 때 노가다 좀 뛰었지만 그거야 30년 전 일이고 젊은 애들도 골골댄다는데 내가 할 수 있을까, 처음엔 좀 버벅댔지만 끝날 때쯤 되니까 할 수 있겠더라고. 나는 거뜬히 하는데 등치 막 이따만 한 노랭이들이 힘들다면서 집에 가는 거 보니까 기분도 좋고 흐흐.

그러면서 밖에 나왔는데노오오오란 해가 떠 있는 걸 딱 보고 있는데그럴 뭐랄고 할까, 뭐라고 하면 좋을까나 살 수 있겠다충분히 살 수 있겠다. 그런 기분이 들어요. 그게 참 희한해. 밤새 술 퍼마시다가 해 뜨는 걸 볼 때는 세상에 그렇게 비참한 게 없는데, 내가 너무 별 볼 일 없고 쓰레기 같고 이렇게 또 하루 사느니 그냥 콱 뒤져버리는 게 낫겠다 싶은데, 알 끝나고 해 뜨는 걸 보면 나도 뭔지 모르겠는데, 보고 있으면 그냥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더라고.

 

(190)

근무 첫날은 어디서나 정신이 없는 법이지만 식당 근무 경력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주방에서의 첫날은 어느 정도는 생과 사를 오가는 경험이다. 칼질과 불길이 난무하는 가운데 한쪽에선 기름이 끓고 바닥은 미끈거리고 어디 하나 긴장을 풀 구석이 없었다. 똑같이 요리하는 공간이라고 해도 가정 주방과 업소 주방은 엄연히 달랐다. 업소 주방에서는 오감이 극대화됐다. 이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닌 게 각종 재료며 양념을 항상 대용량으로 사용하고 칼은 집에서 쓰는 것보다 훨씬 큼지막하고 화구의 불길은 가정용보다 두세 배는 강력했다. 사방이 맵고 뜨겁고 날카로운 것투성인 데 깔끔하게 정리한 서커스 차력 쇼의 한 귀퉁이 같았다.

 

(195)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화상을 입힐 수 있는 눈빛이 있다면 신입 직원이 요리하는 꼴을 쳐다보는 주방장의 시선이 그럴 듯싶다. 느닷없이 살기가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조윤진 씨가, 눈에 조금만 더 힘을 줬다간 관통상까지 남길 법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사극에서 성난 왕이 주변의 신하들을 물리칠 때 사용하는 손짓을 해 보이며 주방으로 들어섰다. 전문가가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절망감과 즐거움을 동시에 안겨주는 경험이다. 불과 칼을 이토록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점에서 요리사들은 현대 사회에서 간달프에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201)

당장 먹어도 아무 문제 없는 음식을 버릴 때는 뭔가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는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한 해에도 수백만 명이 굶어 죽는 시대에 이렇게 멀쩡한 음식을 필요 이상으로 만들어서 버리는 건 범죄다. 하지만 뷔페라는 공간이 그렇다. 마감되기 전까지 빈 접시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이래저래 낭비할 수밖에 없다. 만약 현명한 소비가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어려운 일이라면 최소한 상식적으로 낭비할 수는 없을까? 주방에서 일하기 부적합한 사람은 위생 관념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멀쩡한 음식이 버려지는 꼴을 두고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베이비부머들을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정신이상으로 몰고 갈 만큼 고문하고 싶다면 뷔페 짬밥을 처리하는 알바를시켜보라.

 

(226-227)

나는 민재를 보면서 질량 불변의 법칙이야말로 만고 불변의 진리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얘는 뇌세포 만드는 데 쓸 단백질을 끌어다가 죄다 가슴근육으로 바꾼 게 분명했다. 그는 말도 거칠고 체격도 우람해서인지 선준 씨가 한 번도 시비를 걸지 않은 유일한 주방 직원이었다. 나는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떠올리며 선준이와 민재가 서로 치고받고 싸우다 둘다 사이좋게 동반으로 그만두는 날을 고대했지만 놀랍게도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사이코는 사이코까리 통한다는 슬픈 진실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별수 없이 그간의 선례를 따라 부검 시 검출되지 않는 독약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는데, 안타깝게도 민재는 이미 내가 만든 요리를 입에 대지 못할 음식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랑스러운 물질을 손에 넣는다 하더라도 사용할 기회는 없었을 거다. (그나저나 그런 마법 같은 약이 정말 존재하긴 하는 거예요? 화학자 여러분, 독약이 필요한 선량한 사람들 괴롭히지 말고 대답해 주세요!)

 

(244)

너는 내가 이렇게 말하면 기분 나쁠지 모르겠지만 알바는 정말 몰라. 안 겪어본 사람은 알 수가 없어. 내가 <동물의 세계> 이런 거 보는 거 좋아하거든. 거기 보면 아프리카 초원에서 표범이 토끼나 새끼 가젤 같은 거 잡으려고 전속력으로 막 달려가. 그러면 조그만 동물이 눈에 핏발 세우고 도망을 친다고. 목숨을 걸고 도망가. 내가 그걸 보고 있으면 무슨 생각이 드는 줄 알아? 쟤네들은 내 마음 알 거라고. 온 세상에 딱 쟤네들만 내 기분 이해할 거라고. 장사하는 사람 심정이 딱 그거야. 사자가 등 뒤에서 입 벌리고 쫓아오는데 어떻게든 안 잡히려고 도망치는 거. 인건비에 배달비에 재료비에 대출에 적자에 어? ? 하다가 따라잡히면 그대로 끝장나는 거거든. 그러니까 똥구멍에서 피가 나게 뛰어다니는 거지. 그나마 야생은 편한 거야. 사자는 한 5분 따라오다 안 된다 싶으면 포기라도 하지. 우리는 안 끝나. 혀가 입 밖으로 빠져나와서 너덜거릴 정도로 도망을 치는데 그게 안 끝나. 계속 쫓아오고 계속 도망가. 그렇게 19년을 살아봐. 식당 하는 게 그런 거야.”

 

(259)

보면은 직장에서 젊은 사람들 힘센 남자들, 이런 사람들 뽑으려고 하잖아요? 그게 뭘 모르는 거예요. 그런 젊은 애들, 덩치 좋은 남자들은 언제든지 내키지 않으면 그만둬요. 우리 남편만 해도 누구랑 싸웠다고 누가 기분 나쁘게 했다고 그만둔 게 몇 번째예요. 그치만 결혼해서 애까지 있는 여자들은 가게가 망하기 전까진 절대 안 그만둬요. 그런 사람들은 정말 필사적이에요. 절대 중간에 일을 그만두지 않는 사람들은 애 있는 엄마들이에요. 직원들이 자꾸 들락날락해서 골치가 아픈 사람은 애 키우는 엄마들만 뽑아야 돼요.”

 

(326)

반면에 퇴근길은 순간순간을 음미해야 하는 정찬이다. 건물을 빠져나오는 순간 피부에 닿는 서늘한 공기, 거리에서 지나쳐 가는 사람들의 얼굴, 뿌옇게 저물어가는 햇빛, 교복 입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하나하나를 최고급 코스 요리처럼 색, 소리, 냄새 모두 온전하게 맛보고 싶어진다. 서울 사람들이 하루 중 유일하게 인류애를 잠시 회복하는 시기가 이때다. 회사를 빠져나와서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서울의 모든 것이 조금씩 덜 구리고 덜 괴상하게 느껴진다. 가래와 담배꽁초는 조금 줄어든 것 같고 음식 쓰레기를 쪼아대는 비둘기는 조금 덜 흉측해 보인다. 때마침 거리는 언제부턴가 가로수로 각광받기 시작한 벚나무 때문에 홍단 났다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은 풍경의 연속이었다.

 

(399)

문제는 돈이란 존재는, 얻기 위해 평생을 쏟아부은 다음에야 자신이 그들 삶의 정답이었는지 아닌지를 알려준다는 거다. 다시 말해 삶의 가능성이 말기 위암 아니면 고독사 중 하나만 남았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돈이었는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다. 물론 열심히 돈을 모으지 않은 사람 역시 말기 암, 고독사와 마주한다. 결국 어느 쪽이든 그 순간을 피할 수 없다면 청춘의 굴라그마다 가득했던 외침에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응답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특권이라고 한승태는 생각했다. 단순히 글을 쓰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 글을 쓸 줄 안다는 것, 스스로를 온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다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 생각을 어떻게 조리 있게 아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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