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의 참새 캐드펠 수사 시리즈 7
엘리스 피터스 지음, 김훈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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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엘리스 피터스 캐드펠 수사 시리즈 7<성소의 참새>라는 책을 이야기할게. 캐드펠 수사 시리즈도 어느덧 7권이구나. 이번에도 기대만큼 재미있었단다.

1140년 봄. 늘 그렇듯 슈류즈베리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수도원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참고로 이전부터 이어진 스티븐 왕과 모드 왕후 세력간 내전은 계속 되고 있었어. 수도원에서는 한창 기도가 진행 중인데 멀리서부터 대기의 진동이 느껴지며 불안한 소리가 나더니 점점 가까워지며 커지는데... 한 젊은이가 도망치듯 수도원 본당으로 들어오고, 그 뒤를 이어 사냥개들이 그 소년을 쫓아 들어오고, 그 뒤를 이어 폭도처럼 보이는 이들이 따라 들어오며 소란을 일으켰어. 쫓겨 들어온 젊은이는 여기저기 멍이 들고 피도 났어. 라둘푸스 수도원장은 수도원 성역으로 피신한 사람을 보호하는 의무가 있다면서 사냥개들을 데리고 온 이들에게 물러나라고 했어. 그들은 살인자이자 절도범을 잡으러 왔다고 했어. 수도원장은 내일 행정장관에게 이야기하자면서 그들을 물리쳤단다. 쫓겨온 젊은이의 이름은 릴리윈이었고 스무 살쯤 되어 보였어. 캐드펠 수사가 릴리윈을 치료해 주었고, 릴리원은 수도원에서 묵었단다.

다음날 행정장관도 와서 다시 조사를 했어. 소동이 있었던 어제는 금세공업자 윌터의 아들 대니얼의 결혼식이었어. 음유시인인 릴리윈은 돈을 받고 결혼식 축하공연을 했어. 축하 잔치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어떤 취객이 릴리윈을 밀쳤고 그로 인해 릴리윈은 윌터가 아끼는 주전자를 깨뜨리고 말았대. 릴리윈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사람들이 릴리윈의 짓이라고 하자 대니얼의 할머니 줄리아나 부인은 릴리윈을 때리면서 내쫓았다고 했어. 보수도 약속한 금액보다 적은 1페니만 주었다는구나. 그런데 얼마 후 윌터의 금고가 털리고 윌터가 쓰러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어. 누군가 릴리윈의 짓이라고 소리치자, 잔치에 있던 사람들(아마 다들 술을 어느 정도 걸쳤겠지.)이 릴리윈을 쫓게 된 거였어.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윌터는 단순 타박상으로 다음날은 멀쩡했단다. 오히려 이 난리통에 깜짝 놀란 대니얼의 할머니 줄리아나 부인이 실신했다가 깨어났다고 했어.

줄리아나 부인은 자신을 치료를 위해 캐드펠을 불렀단다. 캐드펠이 그 집에 도착하자 줄리아나 부인은 어제 결혼한 신부 마저리와 대니얼의 누나 수재나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어. 신부 마저리는 결혼하자마자 쉽지 않은 일을 맡고 있구나. 캐드펠은 윌터의 집에 온 김에 어제 사건에 대해 조사했어. 그 집 사람 중에 하녀인 래닐트는 릴리윈의 결백을 강력하게 주장했어. 사실 래닐트과 릴리윈은 그날 처음 만나 둘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었단다. 사랑에 눈이 멀어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해. 대니얼과 이야기를 해보니 릴리윈 이외에 앙심을 품고 있을만한 사람은 세 들어 사는 자물쇠 제조공 페치가 의심스럽다고 했지만, 그는 사건 발생 당시 대니얼 옆에 있었다고 했어. 알리바이가 너무나 확실했던 거지.

….


1.

캐드펠은 수도원으로 다시 돌아왔어. 릴리윈은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 전부 다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뭔가 숨기는 느낌. 그래서 캐드펠은 릴리윈을 설득해서 어제 있었던 일을 더 이야기하게 했단다. 릴리윈이 주전자를 어쩔 수 없이 깨뜨리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금고 방에 있는 윌터를 찾아갔다고 했어. 그리고 1페니를 더 받고 나서 그곳을 떠났다고 했단다. 캐드펠은 다시 윌터를 찾아갔어. 윌터도 릴리윈이 한 말이 맞다고 했어. 그런데 그가 떠난 지 2분도 채 안되어 뒤통수를 공격받고 정신을 잃었다고 했어. 그 시간 안에 다시 자신을 공격할 사람은 릴리윈뿐이라고 했어. 그러면서도 자신을 때린 사람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단다.

릴리윈은 수도원에 머무르면서 안젤름 수사로부터 음악 수업을 받았단다. 음유시인을 일했던 경력의 이유가 있었어. 릴리윈은 음악에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어. 안젤름 수사도 더 열심히 가르쳤단다. 하지만 릴리윈을 곱지 않은 시산을 보는 제롬 수사 같은 사람도 있었어. 제롬 수사는 릴리원이 신성한 곳에서 이상한 노래를 부르고, 장난감으로 재주를 부린다고 크게 혼을 내기도 했어.

한편 윌터의 집에서는하인 래닐트가 릴리윈 걱정에 상심에 빠져 있었어. 윌터의 딸 수재나가 그런 래닐트를 책망하면서도 릴리윈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 보고 오라면서 휴가를 주었단다. 릴리원은 수재나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신의 마음을 알아봐주었다고 고마워하며 수도원에 와서 릴리윈을 만났단다. 제롬 수사는 가뜩이나 릴리원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봤는데 면회까지 왔으니 얼마나 눈에 거슬렸겠니. 면회 시간은 고작 30분만 주었어, 릴리윈은 꾀가 많은 젊은이였어. 30분만 만난 것처럼 꾸미고, 래닐트를 제단 뒤쪽 비밀 공간으로 데리고 갔단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둘 만의 밀애를 나누고 잠이 들고 말았단다. 그리고 밤이 되어서야 깨어났어. 큰일 났구나. 릴리윈도 릴리윈이지만 래닐트는 어떻게 집에 돌아가야지? 이번에도 릴리윈이 머리를 써서 안전하게 래닐트를 집까지 바래다 주고 자신도 아무에게도 걸리지 않고 다시 수도원에 도착했단다. 그런데 그렇게 돌아오면서 릴리윈은 한밤중에 외출하는 대니얼을 보았단다. 사실 대니얼은 사랑하는 여자가 따로 있었단다. 부모들에 의해 마저리와 결혼했지만, 대니얼은 세실리라는 여자와 만남을 갖고 있었어. 그런데 유부녀였단다.

다음날 자물쇠 제조공 볼드윈 페치가 강가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어. 페치의 행적을 조사해 보니 전날 오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있었고, 그 이후에는 아무도 그를 본 사람이 없었어. 시신은 절차대로 수도원으로 옮겼단다. 마을 사람들은 페치가 익사할 일이 없다면서 며칠 전 발생했던 금고 털이 사고와 연관 지으며 이야기하면서 다시 한번 릴리윈을 의심했단다.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자 릴리윈은 자신은 수도원을 떠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단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릴리윈은 레닐트를 데려다 준다고 외출 했었잖니. 우리는 릴리윈이 결백하다는 것을 알지는 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가 쉽지 않게 생겼구나. 거기에 거짓말까지 했으니 말이야. 캐드펠은 행정관이자 친구인 휴 베링어와 이 사건을 조사했어. 시신을 처음 발견한 뱃사공과 수도원장도 함께 시신을 살펴보았는데 익사가 아닌 타살임을 확인했단다.


2.

거짓말 한 것을 괴로워하던 릴리윈은 캐드펠을 찾아가서 어제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하면서 깊이 반성했단다. 캐드펠은 이전 시리즈에서도 본 것처럼 사랑이 늘 우선이었잖니. 그래서 릴리윈과 레닐트의 사랑을 이해해주었어. 그것보다 대니얼이 외출했다는 소식에 관심을 가졌어. 더욱이 대니얼과 죽은 페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지. 대니얼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 선상에 오르게 되었구나. 하지만 추리소설에서는 이런 사람은 범인이 아닐 확률이 높지.

휴 베링어는 대니얼의 외출을 확인하기 위해 식구들과 이웃을 탐문수사 했는데, 아무도 모른다고 했어. 하지만 신부 마저리는 알고 있었어. 남편이 몰래 나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던 사실들도 알고 있었어. 마저리는 남편 대니얼에게 이야기하기를, 세실리에게 가서 알리바이를 증언해 달라고 요청하라고 했어. 그래서 대니얼은 세실리에게 가서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언해 달라고 했지만 세실리도 바람 핀 입장에서 정말 사랑하지 않으면 그러기 쉽지 않지. 단칼에 거절했어. 마저리는 아마 이렇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을 거야. 다시 돌아온 대니얼은 어쩔 줄 모르고 있었는데, 마저리는 대니얼을 데리고 휴 베링어에게 가서, 지난 밤에 있었던 일을 솔직히 이야기하면서 대니얼의 혐의를 벗겨 주었단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대니얼은 마저리에게 꽉 잡혀 지내야 했어. 어차피 알리바이 건 때문에 세실리하고도 끝이 나버렸지. 마저리는 대니얼에게 요구하기를 자신이 집안의 살림을 도맡겠다고 했어. 아무래도 집안의 며느리가 집안의 살림을 담당하는 것이 순리니까 말이야. 그 동안 대니얼의 집은 할머니가 기력을 잃으신 다음부터는 며느리가 없어서 윌터의 딸인 수재나가 집안의 살림을 맡고 있었거든. 마저리는 수재나가 하던 것을 자신이 하겠다고 말할 테니, 대니얼에게는 옆에서 지지해달라고 했단다.  마저리는 수재나에게 기분 상하지 않게 잘 이야기한 것 같은데, 수재나는 이상하리만치 기겁을 했단다. 무엇인가 숨기는 것이 있는 것 같았어. 마저리의 말을 반박하기 어려운 수재나는 할머니에게 도움을 청했어. 그런데 할머니도 마저리에게 인수하는 것이 순리에 맞다고 했어.

결국 수재나는 하루 시간을 달라고 했어. 내일 인수인계 하겠다면서 말이야. 그날 밤 수재나는 집안을 정리정돈 했단다. 할머니인 줄리아나 부인이 옆에 함께 있었어. 그런데 할머니가 다시 발작을 일으켜서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어. 할머니가 들고 있던 등을 떨어뜨려서 불이 날뻔했는데 래닐트가 그 장면을 보고 달려가서 불을 끌 수 있었단다. 이 소동으로 식구들이 모두 깨어났어. 할머니 치료를 위해 캐드펠 수사를 모셔왔고, 캐드펠이 도착해서 할머니를 치료해 보았지만, 이번에는 할머니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단다. 캐드펠은 그날 있었던 일을 듣고는 수재나의 이상한 행동이 마음에 걸렸어.

최근 일어난 일이 모두 수재나와 관련 있어 보였어. 캐드펠과 휴 베링어는 여러 정황을 보고 수재나를 범인으로 의심했어. 금고의 보물을 훔쳐서 우물 속에 숨겨두었는데, 그걸 자물쇠 제조공 페치가 알게 되었고 페치는 수재나를 협박했을 것이라고 추측했어. 결국 수재나가 페치를 죽이고 강에 익사한 것처럼 꾸몄을 것이라고 했어. 그 일을 벌이려고 하녀 래닐트에게 휴가를 주었던 것이고 말이야. 그런데 이 모든 일을 혼자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 누가 공범일까? 이것을 조사하기 위해 캐드펠과 휴 베링어는 다시 대니얼의 집에 갔더니 이미 수재나는 사라졌어. 일꾼으로 일하던 예스턴도 사라졌고, 하녀 래닐트도 사라졌어.

래닐트는 수재나를 좋아했는데, 그날 짐을 들어달라고 해서 함께 길을 나선 거야. 일꾼 예스턴은 수재나와 비밀리에 사랑하던 사람이었어. 수재나는 임신까지 하고 있었어. 자신의 범죄가 발각될까 봐 수재나와 예스턴은 함께 도망가기로 한 거야. 그들의 아지트인 오두막에 도착을 해서 어떻게 할지 고민했어. 수재나는 래닐트가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죽이려고 했는데, 예스턴이 강하게 반대를 해서 래닐트만 남기도 둘이 떠나려고 했는데, 그 때 뒤쫓아오던 캐드펠과 휴 베링어가 도착을 했단다. 궁지에 몰린 수재나는 래닐트를 인질로 잡고 인질극을 벌였단다. 수재나와 래닐트에게 불리한 상황이었어. 오두막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 들기 시작했어. 릴리윈도 도착했단다. 꾀가 많은 릴리윈은 오두막 뒤쪽으로 해서 몰라 들어가 래닐트를 구해보겠다고 했고, 캐드펠도 그 작전이 괜찮을 것 같았어.

마지막 순간 예스턴이 보고 그들을 잡으려고 가다가 휴 베링어의 부하들의 표적 안으로 들어왔어. 지체 없이 화살이 날아갔고, 그것을 본 수재나가 대신 맞아 죽고 말았단다. 그렇게 상황은 종결되고 예스턴은 잡혀와 재판을 받으면서 이야기는 끝이 났단다. 수재나가 살인도 저지르고 잘못은 했지만, 페치가 협박만 하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살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하는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인데아버지한테 사실대로 이야기해 봤으면 어땠을까 싶구나.

이번 캐드펠 수사 시리즈도 좋았단다. 사건 사고를 해결하는 틀에 박힌 추리 소설이 아니고, 애틋한 사랑, 안타까운 사랑도 함께 해서 더 재미있는 것 같구나. 다음 편을 또 기대하면서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엄청난 폭풍의 전조처럼 그 사건은 시작되었다.

책의 끝 문장: “그렇지 않다면 우리 모두 길을 잃고 헤매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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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하 - 채만식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1
채만식 지음, 이주형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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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채만식의 <태평천하>라는 소설이란다. 얼마 전에 jiny가 학원 숙제로 채만식의 단편 소설 <치숙>을 읽었잖니. 아빠도 그 때 함께 <치숙>을 읽었는데, 단편이지만 재미있게 읽었단다. 채만식이라는 작가는 너무나 유명한 작가이니까 이름은 익히 알았지만,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은 것은 처음인 것 같았어. 어렸을 때 <레디메이드 인생>을 읽었던 것 같지만, 잘 기억도 나질 않는구나. <치숙>을 재미있게 읽어서 오래 전에 사두고 책장 속에서 발효되고 있던 채만식의 장편소설 <태평천하>를 찾아서 읽어 보았단다. 사회 비판적이면서도 재미를 놓치지 않은 수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구나. <태평천하>는 채만식이 잡지 ˝조광˝ 1938 1월부터 9월까지 연재한 장편소설이라고 하는구나. 그러면 바로 책 이야기부터 해보자.

 

1.

계동의 이름난 부자 윤두섭. 그는 향교의 맨 우두머리 가는 어른이라는 뜻의 직원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를 윤직원 영감이라고 불렀어. 72살이지만 몸에 좋은 것을 많이 먹어서 인지 아직 젊은 혈기가 왕성하였다. 하지만 부자이긴 하지만 자린고비가 따로 없었단다. 인력거 품삯도 깍으려고 실랑이를 벌일 정도로 자린고비다. 윤직원의 아버지 윤용규 때부터 운대가 좋아서 부자가 되었어. 그런데 화적떼가 침입해서 우발적 사고로 아버지 윤용규가 죽고 윤두섭은 도망갔다가 돌아왔단다. 아버지가 남긴 재산을 악착같은 구두쇠 정신으로 재산을 불려 삼천석 재산으로 불어났고, 서울로 이사 오게 되었지. 아내는 죽고 아들 부부랑 함께 살고 있었는데 아들부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단다. 며느리한테 매일 쌍욕을 퍼붓는 시아버지였어. 이 정도면 윤직원 영감의 캐릭터를 대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윤직원은 아이들을 양반가문들과 결혼을 시켰고, 자신도 돈을 써서 향교에 들어가 직원이라는 직함을 얻은 것이다. 첫째 아들 윤창식은 결혼 후 일본 유학을 갔는데, 그 때부터 딴살림을 차리고 첩이 여러 명이고, 국내에 와서도 집에 붙어 있는 적이 별로 없었단다. 윤창식의 아내이자 윤직원의 맏며느리는 고씨였고 창식과 고씨 사이는 아들 종수와 종학이 있었어. 종수 또한 아버지 창식을 닮아서 난봉꾼이었어. 윤직원 영감이 모아서 불려놓은 재산을 아들 창식과 손자 종수가 축내고 다녔어. 종수는 박씨와 결혼을 해서 열다섯 살 경손이 있었어. 그렇다고 윤직원 영감도 행실이 바른 것은 아니야. 첩한테 낳은 아들 윤태식이 있는데 증손자 경손과 동갑인 열다섯 살이었어.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이었어.

.....

 

2.

윤직원의 사채업을 맡아 하는 석서방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석서방을 통해 사채업을 하지만 윤직원은 원하는 이율을 얻지 못하면 짤 없었지. 석서방과 나라 밖 소식도 듣곤 했는데 당시는 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하고 있던 시기였어. 너희들도 역사 시간에 1930년대 일어난 중일전쟁을 배웠을 거야. 석서방이 이야기하기를 러시아가 중국에 사회주의를 전파하려고 중국을 도와준다고 했어. 설마 일본이 질까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윤직원이 생각하기에 일본은 부국강병에 있어서는 최강국이라고 생각했지. 당연히 일본에서 이길 거라고 생각했어.

...

윤직원 영감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전대복이란 사람이 있어. 전대복은 윤직원 영감의 진정한 심복으로 돈욕심도 없는 사람이었어. 윤직원 영감도 전대복은 철저히 신뢰하고 있었지. 돈도 알아서 챙기라고 했는데 전대복은 딱 필요한 것만 썼단다. 하지만 과부가 되어 윤직원 집에 기거하고 있는 윤직원의 딸 서울 아씨를 마음에 품고 있었어. 서울 아씨도 전대복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것 같지만,

전대복 자신도 윤직원 영감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

윤직원 영감은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태평천하라고 생각했어. 돈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으니 말이야. 그리고 그 돈을 보호해주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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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275)

화적패가 있너냐아? 부랑당 같은 수령(守令)들이 있더냐?...... 재산이 있대야 도적놈의 것이요. 목숨은 파리 목숨 같던 말세넌 다 지나고오…… 자 부아라, 거리거리 순사요, 골골마다 공명헌 정사(政事),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남은 수십만 명 동병(動兵)을 하여서, 우리 조선놈 보호하여주니, 오죽이나 고마운 세상이여? 으응?...... 제것 지니고 앉어서 편안허게 살 태평세상, 이걸 태평천하라구 허는 것이여, 태평천하!...... 그런디 이런 태평천하에 태어난 부잣놈의 자식이, 더군다나 왜지가 떵떵거리구 편안허게 살 것이지, 어찌서 지가 세상 망쳐놀 부랑당패에 참섭을 헌담 말이여, 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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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직원의 유일한 걱정은 죽음이었어. 어떻게 하면 영생불사 할 수 있을까. 윤직원 영감은 아이들의 오줌도 먹고, 각종 보약을 먹고, 체조도 하는 등 몸에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 했단다.

....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윤직원 영감은 칠십대 노인이지만 아직 혈기가 왕성하여 증손자 뻘 되는 기생들에게 수작부리다가 퇴짜를 여러 번 맞았단다. 최근에도 돈 주고 말상대를 해주고 있는 춘심이에게 수작을 부리려고 했어. 춘심이는 기존 아이들과 달리 사근사근 말도 잘 받아 주어서 조심스럽게 잠자리를 함께 하려고 수작부렸어. 춘심이도 바로 퇴짜를 놓았어. 그런데 마음이 돌아섰는지 반지를 사주면 원하는 것을 해주겠다고 했어.

그렇게 윤직원 영감은 춘심이와 반지를 사러 갔는데 거기서도 구두쇠 정신이 발휘되어 반지값을 계속 깎고 있었단다. 어차피 아들과 손자가 흥청망청 쓰고 있을 텐데... 아들 윤창식이 도박에 빠져 돈을 계속 잃고 손자 종수도 툭하면 윤직원 영감을 찾아와 돈을 달라고 했어. 윤창식은 도박에 빠져서 일본에서 둘째 아들로부터 온 급한 전보가 왔는데도 뒷전이었어. 그 전보 내용은 윤창식의 둘째 아들 종학이 사회주의에 빠졌다가 경시청에 붙잡혔다는 내용이었어. 사실 윤창식은 윤직원 영감의 마지막 희망이었어.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경찰서장이 되길 바라고 있었어. 그런데 윤직원 영감이 가장 극혐하는 사회주의에 빠져 경시청에 붙잡혔다니... 이 소식을 들은 윤직원 영감이 격분하는 장면으로 소설은 끝이 났단다.

....

이 소설의 제목 <태평천하>는 반어적인 표현으로 지은 제목 중 손가락에 들지 않을까 싶구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암울한 시기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제목이 태평천하라니... 소설의 주인공 윤직원 영감의 입장에서 태평천하일 수도 있지만 콩가루 집안이 아무리 태평천하라고 해봐야 실제를 들여다 보면 짐승만 못한 세상 아니더냐. 유일한 희망이었던 둘째 손자가 윤직원이 가장 혐오하는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얼마나 고소하던지...

그런데 지은이 채만식은 이 소설을 쓸 당시 윤직원 영감을 어떤 사람을 모델로 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친일을 하면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많았으니 말이야. 그들이 이 소설을 읽었을 때 찔릴 양심이 있었는지 모르겠구나. 안타까운 것은 채만식도 일제시대 말기 친일 행위를 했단다. 그래도 채만식은 양심이 있었던 것 같구나. 해방 후에 <민족의 죄인>이라는 소설을 통해 자신의 친일 행적을 깊이 반성하였단다. 반성도 없이 당당한 다른 친일파들과는 다른 행보가 그를 다른 친일파들과 구분 짓게 평가하는 것 같구나. 그렇게 반성을 하고 나서 작품활동을 좀더 하다가 병에 걸려 1950 6 11일 향년 47세로 세상을 등졌다고 하는구나. 47세의 적은 나이임에도 그는 2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고 하는데, 시대를 제대로 타고 났다면 더 훌륭한 작품들을 남기기 않았을까 싶구나.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추석을 지나 이윽고, 짙어가는 가을 해가 저물기 쉬운 어느 날 석양..

책의 끝 문장: 마치 장수의 죽음을 만난 군졸들처럼


만일 오늘이 우리한테 새것을 가져다주지 않고 어제와 꼬옥 같은 것만 되풀이를 한다면 참으로 우리는 숨이 막히고 모두 불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어제와 같으면서도 (어제 치면서도 더 자라난) 한 다른 오늘 치를 우리한테 가져다주고, 그러하기 때문에 그리하는 동안 인간은 늙어 백발로, 백발은 마침내 무덤으로…… 이렇게 하염없어도 인류는 하루하루 더 재미있어간답니다.
- P241

사람은 누구 없이 뱀을 섬뻑 만나면 대개는 깜짝 놀라 몸이 오싹해지고, 반사적으로 적의와 경계의 자세를 취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오래오랜 조상, 즉 사전(史前)인류(人類)가 파충류의 전성기대에 그들의 위협 밑에서 수백만 년을, 항상 공포와 투쟁과 경계를 하고 살아오는 동안, 그것이 어언간 한 개의 본능이 되어졌고, 그러한 조상의 피가 시방도 우리 인류의 몸에 흐르고 있는 때문이라고 말하는 학자가 있습니다.
- P260

지주가 소작인에게 토지를 소작으로 주는 것은 큰 선심이요, 따라서 그들을 구제하는 적선이라는 것이 윤직원 영감의 지론이던 것입니다. 윤직원 영감의 신경으로는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논이 나의 소유라는 결정적 주장도 크지만, 소작 경쟁이 언제고 심하여, 논 한 자리를 두고서 김서방 최서방 이서방 채서방 이렇게 여럿이, 제각기 서로 얻어 부치려고 청을 대다가는 필경 그중의 한 사람에게로 권리가 떨어지고 마는데, 김서방이나 혹은 이서방이나 또는 채서방이나에게로 줄 수 있는 논을 최서방 너를 준 것은 지주 된 내 뜻이니까. 더욱이나 내가 네게 적선을 한 것이 아니냐?...... 이것이 윤직원 영감이 소작권에 의한 자선사업의 방법론입니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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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6)

도란 백성들로 하여금 윗사람과 한마음 한뜻이 되어 공생공사하고 두려워하거나 의심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천은 천시(天時), 즉 기후 조건으로 밤과 낮, 맑고 흐린 날, 사계절의 변화 등을 말한다. 지는 지리(地利) 조건으로 도로의 멀고 가까움, 지세의 험준함과 평탄함, 지역의 넓고 좁음 그리고 사지(死地)와 생지(生地) 등을 말한다. 장은 장수(將帥)의 덕목으로 지모(智謀)가 뛰어난가, 충신(忠信)을 지녔는가, 부하를 인애(仁愛)하는가, 용맹하고 과단성이 있는가? 군령을 엄격히 다스리는가를 살펴야 한다. 마지막으로 법은 군대의 조직 편제, 직책과 관리 제도 그리고 군수물자 제도를 가리킨다. 장수는 이 다섯 가지 요소를 모두 깊이 파악해야 한다. 오직 이를 파악한 자만이 전쟁에서 승리를 획득할 수 있다.


(35)

맹자는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를 구별한다. 패도는 인의를 저버리고 힘으로 다스리는 방식이며, 왕도는 덕으로 다스리는 방식이다. 패도를 유지하려면 강력한 무력과 그 바탕이 되는 넓은 영토가 필요하지만, 왕도는 소국에서도 충분히 펼칠 수 있다. 성탕의 영토는 70리 남짓에 불과했으나 능히 왕도를 구현해냈다. 이처럼 왕도는 왕자라는 지위에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왕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애써 갖춰야 할 자격이었다.


(37)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치밀한 묘산(廟算)으로 유리한 조건과 불리한 조건을 충분히 평가하면 전쟁에서 승리하고, 반대로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묘산을 충분히 진행하지 않으면 실패한다. 계획(계산)이 치밀하면 승리할 수 있고, 계획이 치밀하지 못하면 실패할 것이다. 그럴진대 계획이 전혀 없다면 어떠하겠는가? 이러한 관찰에 근거하여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할 것인가를 명백히 할 수 있다.


(56-57)

이처럼 대군을 동원하는 전쟁은 반드시 단기간에 속승(速勝)을 거두어야 한다. 전쟁을 오래 끌면 병사는 피로해지고, 날카로운 기세는 꺾이기 마련이다. 성을 공격하는 공성에는 군사력의 손실이 따르며, 장기간의 출정은 국가 재정에 막대한 부담을 준다. 만약 병사들이 오랜 전쟁으로 피로해지고 예기가 꺾이며, 군사력이 소모되고 재정까지 고갈되면 주변 국가들이 기회를 노려 군사를 일으킨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지모가 출중한 자라도 이 위난을 해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용병 전쟁은 마땅히 신속한 승리를 추구해야 하며, 계책이 교묘한가 졸렬한가를 따지지 않는다. 오래 지속되는 전쟁이 국가에 이로웠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러므로 용병의 폐해를 모두 알지 못하는 자는 그 이로움 또한 온전히 알 수 없다.


(82)

따라서 용병의 최고 책략은 전쟁을 하지 않고 모략으로써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그다음은 적의 외교 동맹을 와해시켜 고립시키는 것이고, 다음은 무력으로써 승리를 거머쥐는 것이다. 적의 성을 격파하는 공성은 최악의 책략으로, 다른 선택이 없을 때 부득이하게 취하는 방식이다.


(111)

적이 승리할 수 없게 만드는 관건은 정확한 방비에 있고, 내가 승리할 수 있게 만드는 관건은 적절한 공격에 있다. 방비하는 까닭은 아직 힘이 부족해 승리할 조건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고, 공격하는 까닭은 힘에 여유가 있어 승리할 조건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방비에 능한 자는 아홉 겹 땅속에 숨어 있는 듯하여 적이 찾아낼 수 없고, 공격에 능한 자는 아홉 겹 하늘(구천, 九天)에 떠 있는 듯하여 적이 막을 수 없다. 이처럼 방비와 공격에 모두 능한 군대는 능히 스스로를 보전하며 적에게 완전히 승리할 수 있다.


(128)

를 비교해보면 개념이 한층 선명해진다. 철학적 관점으로 보면 은 사물의 외적 현상이자 구체적 상황으로 실재하는 반면, ‘는 사물의 성향으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요소다. 군사적으로는 이 작전 형량의 본체(本體), ‘는 그 작용에 해당한다. ‘은 군대의 병력과 장비 같은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역량으로, 비교적 고정되어 단기간에 변하지 않으며 수치로 측정할 수 있다. 반면 을 토대로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발휘되며, 지형, 기후, 보급 상황, 군의 사기, 작전 방식 등에 따라 달라지는 가변적이고 비가시적인 역량이다. 따라서 수시로 변하며 수치화하기 어렵다.


(159)

, 두 사람 모두 적을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만들고, 자신은 적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내용이 병법의 핵심이라 본 것이다. 전쟁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상황은 적의 의도에 말려들어 피동적으로 끌려다니는 것이다. 주도권을 쥐고 상대를 의도한 대로 움직여 내가 미리 구상한 시간, 장소, 조건에서 적을 상대하면 능히 승리할 수 있다.


(167)

그러므로 분석을 통해 적의 계획이 가진 득실과 강약을 가늠하고, 자극을 주어 행동 방식을 살필 수 있다. 또 아군의 거짓된 모습을 일부러 드러내어 적의 강점과 약점을 드러나게 하고, 시험적인 공격으로 병력 배치까지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기만책을 극도로 능숙하게 구사하면 아군의 실체는 흔적조차 감출 수 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아무리 깊숙이 숨어든 간자(間者)일지라도 나의 허실을 알아낼 수 없고, 아무리 지모가 출중한 적장일지라도 나의 계책에 대응할 수 없다.


(207)

<손자병법>은 말한다. “때로는 군주의 불합리한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을 줄도 알아야 한다. 이는 지휘관의 뜻을 무조건 꺾으라는 것이 아니다. 전쟁터에서 지휘관에게 항명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반드시 형세에 대한 통찰과 대의를 위한 희생정신이 전제되어야 한다.


(317)

군주는 일시적 분노로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되고, 장수는 일시적 원한으로 전쟁에 나가서는 안 된다. 국가의 장기적 이익에 부합하면 비로소 군대를 움직이고, 국가의 장기적 이익에 부합하지 않으면 군대를 움직이고, 국가의 장기적 이익에 부합하지 않으면 군대를 움직여서는 안 된다. 분노는 희열로 전화할 수 있고, 원한도 기쁨으로 전화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는 멸망하면 되돌릴 수 없고, 사람의 목숨은 더더욱 되살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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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 배제된 생명들의 작은 승리 EBS 다큐프라임 <생명, 40억년의 비밀> 3
김시준.김현우,박재용 외 지음 / Mid(엠아이디)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오래 전에 EBS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엮은 <멸종>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어. 그 책은 다큐멘터리 <생명, 40억 년의 비밀>을 책으로 엮은 세 권 중에 한 권이었어. 그 책을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또 다른 책이 <경계>를 구입했단다. <경계>라는 책은 책장 한쪽 구석에 박혀 있다가 얼마 전에 아빠가 다른 책을 찾다가 눈에 띄었단다. 그래서 이번에 읽은 거야.

<멸종>이라는 책을 언제 읽었는지 찾아봤더니 2017년에 읽었더구나. 정말 얼마 전에 읽은 것 같은데 이렇게 오래되다니… <멸종>을 통해 지구역사 상에 있었던 다섯 번의 대멸종과 현재 진행중인 여섯 번째 대멸종에 대해 알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구나. <경계>라는 책은 제목을 잘 지은 것 같구나. 그냥 진화라는 제목을 지어도 될 것 같았는데, ‘경계라는 단어를 선택했어. 여기서 경계란 서로 다른 환경의 경계를 이야기한단다. 물 속에서만 살던 생명체들이 왜 경계를 넘어 육지로 올라왔는데, 육지에 살던 생명체들이 왜 경계를 넘어 하늘로 날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란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렇게 경계를 넘어선 생명체들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단다. 원래 살고 있던 환경에서 경쟁에 져서 밀려나서 새로운 환경에 갈 수 밖에 없었던 거야.

 

1.

먼저 경계를 넘어선 식물들을 이야기를 해보자. 아주 오래 전에 대기 중에 산소가 부족하고 태양의 자외선 때문에 물 밖에서는 살 수가 없었어. 바닷속에서 개체수를 늘려가던 생명체들이 만들어낸 산소가 대기 중에 모이기 시작하면서 대기 중의 산소 농노가 늘어갔어. 그리고 산소가 성층권까지 올라가서 환원성 기체들을 만나 오존층을 만들게 되었어. 너희들도 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그 오존층은 자외선을 막아주어 물 밖에서도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기반은 만들어졌지. 하지만 굳이 바닷속을 벗어갈 이유는 없었어. 경쟁에서 밀려나지만 않았다면 말이야.

바닷속 개체수가 늘어나면서 경쟁에서 밀려난 녹조류들이 뭍으로 조금씩 올라와 살기 시작했단다. 처음에는 수심 낱은 바닷가에서 살았겠지. 그러다 점점 밀려 올라와 습지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때 생겨난 식물들이 양치식물과 선태식물들이었단다. 폐름기말의 대멸종을 거치면서 살아남은 고사리를 식물계의 제왕이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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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3)

대엽을 무기로 고사리는 폐름기말의 대멸종을 버티며 중생대를 자신의 시대로 맞을 준비를 한다. 더불어 고사리류는 엄청난 진화방산을 해낸다. 커다란 잎으로 광합성의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키운 덕분이다. 마치 영국이 산업혁명을 통한 대량생산으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것처럼 고사리는 고생대 말과 중생대 초의 식물계의 패권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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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에서 살아나던 식물들 중에 경쟁에서 밀려난 식물들은 또 다른 환경으로 이동하면서 다양한 식물들이 나타나면서 결국 종자식물까지 진화하게 된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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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중생대 전반을 거쳐 확연한 지상 생태계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한 겉씨식물의 경우 가장 살기 좋은 곳을 자신의 터전으로 삼았을 것이고 그곳에서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데 굳이 꽃을 피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과의 경쟁에서 밀려 점점 높은 산 위로 올라간 식물이다 건조한 지역으로 이동한 식물들은 살기 위한 시간과 진화의 싸움을 벌여야 했다. 이들은 좀 더 효율적으로 번식을 해야 했고 하나의 꽃가루도 하찮게 여기지 못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짧은 우기에, 혹은 짧은 여름에 재빠르게 번식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애써 수정한 씨앗이 이런 건조하고 추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특별한 장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투쟁의 결과가 꽃이고 배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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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번에는 더 흥미진진한 동물들의 경계 이야기를 해보자. 동물들도 바닷속에서 시작했어. 캄브리아기 대폭발 때 동물군들이 다수 발생하여 다양한 종들이 번성했단다. 척추동물도 이때 시작했어. 다양한 어류들이 나타났는데 그 중에 육기어류들도 있었어. 이 육기어류들은 폐가 있어 공기호흡도 했단다. 이런 육기어류들 중에 사지형 어류들이 있는데 이들이 바다에서 경계를 넘어 땅으로 올라오게 되었단다.

육지에 오면서 목이 길어지고 척추가 튼튼해지고 갈비뼈가 발달하는 등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진화를 했어. 그들이 이렇게 땅으로 올라온 것은 고생기 데본기였단다. 그런데 이때 대양한 육상 식물들도 폭발적으로 늘었어. 식물들이 늘어나다 보니 그들의 광합성 때문에 산소 농도가 급격하게 늘고 이산화탄소가 줄어들었어. 이산화탄소가 많으면 온실 효과로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잖니그렇다면 이산화탄소가 적다면 어떻게 될까? 온실효과가 줄어들어 지구의 온도는 급격하게 떨어졌단다. 이건 생명체들에게 치명타였어. 많은 육지의 생명체들이 멸종되고 말았단다. 뿐만 아니라 이때 조산운동도 많이 일어났는데, 이 조산운동으로 바다의 환경도 급격하게 변하면서 바다의 생명체들도 많이 멸종되었대. 이 때의 멸종을 데본기 대멸종이라고 불렀단다.

멸종기였지만 살아남은 종들도 분명 있단다. 그렇게 살아남은 이들은 또 경쟁을 하고 경쟁에서 지면 경계를 넘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진화했단다. 그런데 육지에 살던 육식동물 중에 먹이가 떨어져서 먹이를 찾아 다시 바다로 돌아간 동물들도 있다고 하는구나. 바다에 살고 있는 포유류 중에 대표적인 것이 고래잖니. 아빠는 고래가 처음부터 바다에 살았던 동물인줄 알았는데, 고래는 육지에서 살다가 다시 바다로 돌아간 동물들이라고 하는구나. 고래가 덩치가 크잖니. 그들이 육지에서 살 때도 덩치가 크고 덩치가 크다 보니 느렸대. 그렇다 보니 다른 육식동물에게 먹어 사냥 경쟁에서 지고 만 거야. 그래서 쉽게 먹이를 구할 수 있는 바닷가 주변에서 사냥하면서 살다가 완전히 바다로 가서 살게 된 것이란다. 바다에서 살면서 고래의 덩치는 점점 커졌는데 그 이유는 체온 때문이라고 하는구나. 포유류는 정온동물인데 온도를 유지하려면 덩치를 키워야 한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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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바다에 살기 시작한 이후 고래의 조상은 점점 덩치가 커진다. 가장 큰 이유는 체온 때문이다. 바닷물은 공기보다 체온을 빨리 뺏어간다. 체온을 보존하는 것이 바다에서 살기로 결정하는 순간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 특히 고래는 어떠한 조건에서도 항상 일정한 체온을 유지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포유동물, 즉 정온동물이었다. 몸 전체에 두꺼운 피하지방을 둘러 체온은 유지하는 것은 불가결한 선택이었고, 이로 인해 덩치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커진 덩치는 부피 대비 표면적을 줄여 체온이 손실을 방지해주었다. 추운 극지방에 사는 생물들이 덩치가 커진 것도 같은 이유다. 바닷속에서 사는 시간이 많은 펭귄이나 물개, 바다사자 같은 생물들도 육지의 친척들에 비해 덩치가 크고 피하지방층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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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이후 바다의 제왕으로 오랫동안 지내오다가 최근 3세기 동안 백인들의 무차별 고래잡이로 멸종 위기까지 겪게 된 것이란다. 바다소라는 동물도 있었대. 고래처럼 경쟁에서 밀려나서 바다로 갔다고 현재는 네 종만 빼고 모두 멸종했다는구나. 이들의 멸종은 먹이 부족의 원인도 있지만 무엇보다 인간들이 큰 책임을 지고 있단다. 남아 있는 네 종도 멸종 위기라고 하고 하는데, 이 책이 나온 지 십 년이 다 되어가는데 잘 버티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그 밖에 바다에 살고 있는 포유류들, 예를 들어 물개, 바다표범 등도 육지에서 경쟁에서 밀려나 바다로 가서 진화하여 오늘날에 이른 것이란다.

또 하나 땅 위에서 먹이 경쟁에서 진 생명체들 중에 나무 위에 있는 먹이를 먹다가 결국 날게 된 이들이 새가 된 것이란다. 처음에는 경쟁에서 져서 새로운 환경으로 밀려난 것이지만, 그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하면 더 멋진 삶을 살 수도 있다니, 전화위복이 따로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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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날개를 만들기까지의 고된 과정을 생각하면 이들이 스스로 원해서 날개를 가졌을 가능성은 없다. 드넓은 대지 위에 자신의 몸 하나 편안하게 누일 곳이 없었던 생명, 가는 잠이 들다가도 풀숲을 뒤척이는 작은 기척에 화들짝 놀라 큰 눈을 굴리며 사방을 살피던 생명, 먹이를 구하러 다니다가 천적의 냄새에 쪼르르 도망가던 생명. 이런 생명들이 나무를 타고 나무 위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것이 새의 비상을 위한 첫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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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에서 져서 땅 속으로 도망가서 진화한 종들도 있어. 지렁이, 두더지가 대표적인데 뱀도 그런 동물이라고 하면 의아해 할 거야. 뱀의 집도 땅 속에 있지만 주로 땅 위에서 생활하며 우리를 무섭게 하잖니. 뱀도 지렁이처럼 경쟁에서 밀려나 땅 속에서 살다가 백악기 대멸종 이후 경쟁자가 줄어든 땅 위로 다시 올라와 살기 시작했다는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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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238)

뱀이건 도마뱀이건 땅속으로 들어가야 했던 이유는 아마도 지상의 생태계에서 자신이 누리던 역할과 지위를 빼앗겼기 때문일 것이다. 벌레를 잡아먹자니 포유류의 선조들이 훨씬 더 빠르게 사냥을 해서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다른 작은 동물을 잡아먹고 살지니 지배파충류에서 진화한 공룔 중 덩치가 비교적 작은 이들에게 밀려난다. 변온동물이라 밤에는 움직이기가 힘들고 낮에는 다른 동물과의 경쟁이 버겁다. 그래서 갈 수 밖에 없었던 곳이 바로 흙 속이었으리라 추측해 본다. 포식자를 피해 땅속으로 숨어, 흙 속을 헤매는 다른 벌레를 먹으며 살아가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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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인류를 보자. 인류는 육식동물을 피해서 각박한 환경의 초원에 살 수밖에 없었어. 먹을 것도 제대로 없었어. 처음에는 다른 육식동물이 남긴 먹이를 먹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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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

익숙한 환경과 삶에서 내몰린 모든 생명이 그러하듯 인간의 선조 역시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미 나무를 타기에 적합하게 진화한 앞발로는 초원에서 사족보행을 할 수 없었다. 우리의 숲 친척인 고릴라와 침팬지 등은 손등은 땅에 대며 걷는 이른바 손등걷기를 한다. 손등걷기는 숲에서 잠시 걷는 것에는 괜찮을지 모르나 초원에서 천적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을 때 걷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나무를 타기에 적합한 손으로 오랜 기간 초원을 걷기가 힘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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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육식동물에 대항하기 위해 무리를 지어 같이 다니기 시작했어. 인류는 다른 동물과 달리 바뀐 생태계에 적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태계를 자신들에게 맞췄단다. .. 개척한 거지그런 인류의 생태계 개척은 그곳에 적응하여 살고 있는 다른 생명체들에게는 최악이었단다. 멸종되는 거야. 그런 인류의 개척은 오늘날까지 이어져서 지금은 지구상의 연쇄살해자가 되고 말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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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

이런 인간의 탈출은 기존의 생태계를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인간이 개척한 곳마다 기존의 생태계는 배제된다. 농경지를 일구면 그 곳에 살던 식물들이 사라지고, 식물과 함께 살던 동물과 균도 함께 사라진다. 도시를 세우면 숲이 사라지고 숲과 함께하던 동물들이 사라진다. 도로를 놓으면 도로 양쪽으로 자유롭게 오가던 동물들은 고립된다. 항구를 만들면 그 주변의 생태계가 파괴된다. 인간의 영역이 확장될수록 기존에 존재하던 지구 생태계는 줄어든다. 인간의 탈출은 이제 인간의 공습이 되었고, 한정된 지구에서 생태계는 지구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이후 최초로 영역이 축소되기 시작한 것이다.

=======================

지금은 제 6차 대멸종의 시대라고 하는구나. 그 전의 대멸종과 달리 이번 대멸종은 인류가 다른 생명체들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어 더 가슴 아프구나. 이전의 대멸종보다 멸종 속도가 빠르고 생태계를 황폐화시키고 있지만, 인류는 그리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구나. 그 이전에 모든 대멸종이 최상위 포식자가 사라졌다고 하는데, 지금 지구상의 최상위 포식자는 누구? 지구의 미래는 디스토피아를 피할 수 없는 것일까.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어린 시절 짧고 뭉툭한 손가락과 발가락이 콤플렉스였던 사람이었다.

책의 끝 문장: 넘을 수 없는 이 경계는 인간과 생물 모두에게 불행한 지금 이 시간에 대한 하나의 상징일 것이다.



그런데 은행나무는 생물분류상 은행문 은행목 은행과 은행속 은행종일뿐 아니라 놀랍게도 은행문에 속하는 유일한 생명이다. 그의 가까운 형제들은 2억 7천만 년 전 페름기에 처음 발견되었는데 중생대를 거쳐 번성하다가 신생대가 되자 모두 멸종해버리고 은행나무 하나만 남게 된 것이다. 신생대 이후 은행나무의 형제들은 화석으로도, 살아 있는 개체로도 보이지 않는다. - P30

딱정벌레부터 한 번 살펴보자. 곤충 중에서도 가장 많은 종수를 차지하는 딱정벌레목의 곤충은 현재 알려진 수만 35만여 종이다. 이는 곤충 전체로 봤을 때는 40%, 동물계 전체를 봤을 때 25% 가량을 차지하는 수치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종까지 염두에 두면 약 500~800만여 종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방아벌레, 잎벌레, 바구미, 풍뎅이, 곰보벌레, 물방개, 물진드기, 물맴이, 딱정벌레 등 다양한 곤충들이 딱정벌레목에 속한다. 두 번째로 종류가 많은 나비목에는 약 18만 종, 세 번째로 다양한 종수를 자랑하는 벌목에는 약 15만 종이 기록되어 있어 이들 셋이 종을 합치면 전체 곤충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 P59

이로써 피부는 기체 교환이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큰 임무를 내려놓게 되었다. 단순한 세포막이었던 시절부터 가져왔던 임무가 사라지자 피부는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역할에 더욱 매진하게 된다. 단단한 각질이 생겨 피부를 감싸기 시작했으며, 털이나 깃털이 나면서 외부의 온도변화로부터 몸 내부를 보호하는 역할도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어떤 피부에는 땀샘이 만들어지면서 보다 능동적으로 외부의 온도변화에 대응했다. - P96

뱀은 몸이 가늘고 길다. 이런 몸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허파도 대단히 좁고 길게 진화해 왔다. 많은 종류의 뱀에서 왼쪽 폐는 퇴화되어버리기까지 했다. 땅속으로 들어가니 사지도 소용이 없었다. 뱀의 앞발과 뒷발은 조금씩 퇴화되어 줄어들다가 마침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네 다리가 사라지고 난 뒤 대신 긴 척추를 얻었다. 수백 개에서 많게는 천 개가 넘는 척추가 뱀들이 유연하게 움직이며, 기어 다니고, 땅속을 헤집고 다닐 수 있는 힘이다. - P234

생태계 내에 강력한 경쟁자가 생기면 경쟁에 진 생물종은 생태계의 경계까지 쫓기고 되고 그 곳에서 새로운 생태계로 자리를 옮기든가, 아니면 종 자체가 사라지는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러나 강력한 경쟁자인 인간의 등장은 생태계의 모든 종들을 경계로 몰아붙이는 것도 모자라, 모든 생태계를 파괴해 나가며 경계를 넘어갈 수 있는 기회까지 차단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생물들은 지금 엄청난 속도로 멸종해 나가고 있다. 지난 역사 속의 5대 멸종 중 가장 거대한 규모의 멸종이었던 폐름기 대멸종보다도 더 빠르게 생명종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번성하는 종은 인간이 선택한 몇몇 가죽과 식물, 그리고 인간의 도시에서 살도록 진화한 특정한 생물들뿐이다.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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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8)

첫 여섯 달은 깊은 혼란에 빠진 상태에서 살았기 때문에 아침에 잠이 깼을 때 애나가 죽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기도 했다. 그녀는 늘 그보다 일찍 일어나, 그가 간신히 눈을 뜨기 적어도 40분이나 한 시간 전부터 돌아다녔고, 그래서 그는 빈 침대에서 기어 나와 잠이 덜 깬 상태로 빈 부엌에 들어가 자신이 마실 커피를 준비하는 데 익숙했다. 그럴 때마다 1층 반대편 끝 작은 방에서 그녀가 타자를 치는 딸깍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거나, 위층 어떤 방에서 그녀가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리곤 했다. 때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저 그녀가 책을 읽거나 창밖을 내다보거나 아니면 집 안 다른 곳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다는 뜻일 뿐이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기 전, 애나와 공유했던 평생의 삶 동안 형성된 오랜 습관의 영향하에서 몽롱한 채로 어떤 일을 할 때 그 모든 괴상한 기억의 실수가 벌어졌을 것이다. 장례가 끝나고 겨우 열흘이 지나고 난 아침에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들고 부엌 의자에 앉아 있다가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쌓인 펼쳐진 잡지들 쪽으로 우연히 눈길이 내려갔을 때 그랬다.

(68-69)

두 달 뒤 그는 환지통 에세이를 쓰는 일에 파묻혀 있다. 은유적 적합성이 점점 분명해졌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환지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게 어디로 튈지 지금 시점에서는 알 수 없고 이걸 끝낼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럽지만 당장은 이것이 어떤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있으며, 이것만으로도 그에게는 뇌 지도, 감각 수용체, 신경 회로 연구를 계속해 나갈 동기가 된다. 이것은 정신적, 영적 통증을 몸의 언어로 번역하려는 노력의 한 부분이다. 그는 죽은 자식을 애도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죽은 부모를 애도하는 자식, 죽은 남편을 애도하는 여자, 죽은 아내를 애도하는 남자를 떠올리며, 이들의 고통이 신체 절단의 후유증과 얼마나 닮았는지 생각해 본다. 사라진 다리나 팔은 한때 살아 있는 사람에게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절단된 일부, 자신의 환상에 속하는 부분이 여전히 깊고 지독한 통증의 원천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치료가 가끔 이 증상을 완화해 줄 수는 있지만 궁극적 치료법은 없다.

(77)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 죽으면 산 자가 죽은 자를 삶과 삶이 아닌 것 사이의 일시적 림보 같은 곳으로 계속 들어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 자마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죽은 자의 의식은 영원히 소멸한다. 애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쉬더니 그가 전화기를 든 이후 처음으로 질문을 한다. 지금 내가 한 말들 알아듣겠어? 바움가트너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애나의 숨이 멈추고, 말이 멈추고, 전화선이 죽어 버린다.

(123)

외로움은 사람을 죽여요, 주디스. 그건 사람의 모든 부분을 한 덩어리씩 먹어 치우다 마침내 온몸을 삼켜 버려요.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삶이 없는 것과 같죠. 운이 좋아 다른 사람과 깊이 연결되면, 그 다른 사람이 자신만큼 중요해질 정도로 가까워지면, 삶은 단지 가능해질 뿐 아니라 좋은 것이 돼요. 우리가 가진 것은 좋은 거지만 이제는 이 정도 좋은 걸로는 충분하지가 않아요. 어쨌든 나에게는 충분하지 않아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어째서 나와 결혼한다는 생각이 당신에게 두려움을 주느냐는 거예요.

(130)

50여 년이 며칠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나니 내 인생이 흐릿하게 한 덩어리로 쏜살같이 흘러가 버린 듯한 느낌이다. 나는 늙었지만, 날들이 아주 빠르게 지나가는 바람에 나의 많은 부분이 아직 젊게 느껴진다. 따라서 손에 연필을 쥘 수 있고 눈앞의 문장을 볼 수만 있으면 여기 도착한 아침 이후 해온 일과를 똑같이 할 생각이다. 마침내 더 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일어나 떠나면 그뿐이다. 그때 너무 늙어 걸을 수 없다면 교도관에게 도와달라고 할 것이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나를 배웅해 줄 게 분명하다.

(133)

얼마 전, 40대와 50대 초반 시절 자기보다 나이 많은 친구나 동료가 화장실을 다녀온 뒤 지퍼를 올리는 걸 잊고 나오는 게 눈에 띄기 시작했다. 허리띠 바로 아래 헛간 문이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레스토랑의 자기 자리로 느릿느릿 돌아오곤 하던 70대 중반과 80대 초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친구들. 처음에 바움가트너는 이 해로울 것 없는 실수가 재미있었다. 그러다가 재미는 없어졌다. 그때쯤에는 볼 만큼 봐서 열린 바지 앞자락이 종말의 시작임을, 세상의 바닥으로 내려가는 긴 비탈로 가는 첫걸음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일이 자신에게도 벌어지기 시작하자-지난 두 주 동안 네 번-그 클럽의 정회원이 되는 데 몇 달 또는 몇 년이 걸릴지 궁금해진다.

(151)

마흔두 살 된 남자가 막 처음으로 아버지가 되었다. 젊은 아내가 갓난아기를 병원에 두고 라이언스 애비뉴 양장점 위의 텅 빈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는 부엌 카운터에 있는 호밀빵 덩어리에서 한 조각을 잘라 내고 청어를 조금 준비하고, 작은 유리잔과 슬리보비츠 한 병이 이미 기다리고 있는 식탁에 앉는다. 그는 먹고 마시고, 먹을 게 사라진 뒤에도 두세 잔 더 마신다. 그에게는 엄숙하지만 의기양양한 순간, 평생 다른 어떤 때와도 다른 시간이다. 감정의 큰 파도가 일어 정신이 강인하고 때로는 마음마저 차갑고 단단한 이 남자를 삼킨다. 그의 내장에서 대양이 일렁이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며 그 자신으로부터 그를 끌어내고,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얼마나 작은지 깨닫는다. 우주를 구성하는 다른 수많은 작은 것들과 연결된 작은 것, 잠시 자기 자신을 떠나 삶이라는 둥둥 떠다니는 거대한 수수께끼의 일부가 된 느낌이 얼마나 좋은지. 마흔두 살에 마침내 아버지라, 그는 생각한다.

(184)

어떤 사건이 진실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실제로 진실이어야 할까, 아니면 설사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어떤 사건의 진실성에 대한 믿음이 그것은 진실로 만드는 것일까?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느냐 아니냐를 알아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확실성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면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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