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총을 들고 싸운 사람들은 저잣거리 시민들이 아니었던가? 과거 민주화운동으로 얻은 어쭙잖은 명망을 업고 학생들을 모아 지도부를 결성한다고 하자, 그다음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한 번 간여한 우리는 싫든 좋든 학생 지도부와 함께 가야 할 것이고,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 저잣거리 시민들은 뒷전으로 밀려날 것이 아닌가?’

 

(185)

이종기 변호사의 제안에 장세균 목사와 남재희 신부가 조비오 신부를 돕겠다고 나섰다. 김성용 신부는 시민수습위원들의 주고받는 말에 흥미를 잃었다. 광주시민을 살상한 계엄사의 사과 없이 무기만 갖다바치면 수습이 될 것이라는 말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김성용 신부는 광주시민의 희생을 줄이겠다고 무기를 회수하러 나선 조비오 신부와는 생각이 달랐다. 일부 수습위원이 가해자인 계엄사 측에 끌려다니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어떤 조건을 요구하는 것은 협상이 아니었다. 무기를 회수해 오면 연행자를 석방하겠다, 보복을 금지하겠다, 광주에 재진입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본말이 바뀐 협상이었다. 김성용 신부는 수습위원의 태도를 비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187-188)

저는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극단 광대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는 동리소극장 대표인 박효선입니다. 비도 오고 있으니 저는 군더더기의 말을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겄습니다. 계엄사 측은 무기를 회수해어 갖다 주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처럼 시민수습위원들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계엄사 측이 순진하고 순수헌 시민수습위원들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무기를 갖다 주는 것은 신군부 야욕을 도와주는 꼴입니다. 계엄사 측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시민들이 무기로 철저하게 무장허고 있어야만 계엄군의 진입을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며칠만 기다리십시오. 광주항쟁의 불길이 서울, 부산, 대전 등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갈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항쟁은 세계 각국의 지지를 받을 것이고 신군부는 국제적인 비난에 직면하여 스스로 권력 찬탈의 야욕을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314)

고등학생들은 나가라. 우리가 싸와서 도청을 사수헐 테니 니들은 집으로 돌아가거라. 니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거라. 우리는 오늘 계엄군에게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니들이 우리를 잊지 않는다믄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기록헐 것이다. 도청을 나가는 니들은 비겁자가 아니다. 역사의 증인이 되기 위해 나가는 것이다.”

 

(350)

526, 우리의 피를 원한다면 하느님, 이 조그만 한 몸의 희생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희생하겠습니다. 하느님, 나는 무엇이오니까? 너무 가냘픈 존재이올시다. 너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올시다. 주님,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위해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더 큰 고통과 번뇌와 시련을 듬뿍 주셔서 세상을 이겨나갈 힘과 지혜를 주십시오. 고아라면 모두 이를 갈겠지요. 내 형제들, 어린 동생들, 이렇게 죽는 나로 말미암아 두세 겹의 고통과 멍에를 짊어지고 쓰레기처럼 살 수밖에 별 도리가 없겠지요. 하느님,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양심이 그 무엇입니까. 왜 이토록 무거운 멍에를 매게 하십니까. 이렇게 주께 갈급하게 구해야만 세상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하렵니다. 하느님, 도와주소서.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세상에는 관용과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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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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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2년 전 쯤 미국의 유명한 작가 폴 오스터의 부고 소식에 조금은 놀랐단다. 아빠가 기억하는 폴 오스터는 비교적 젊은 작가였는데 벌써 돌아가시다니... 부고 뉴스를 찾아보니 향년 77세였어. 장수하신 것은 아니지만 나이가 그리 적은 것도 아니었구나. 그런데 왜 아빠는 폴 오스터를 젊은 작가로 기억하고 있었을가? 그것은 아빠가 폴 오스터의 소설들을 읽었을 때 프로필 사진에서 본 폴 오스터의 사진만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누가 그를 77세의 노인으로 만들었는가. 세월이, 시간의 짓이라는 것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다시 한번 깜짝 놀라게 되는구나. 아빠가 읽은 폴 오스터의 작품은 세 권인데 마지막으로 읽은 것을 확인해 보니 2005, 20년도 더 되었구나.

그의 책들이 너무 미국적이면서 세세한 전개방식이 당시 아빠 취향과 맞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에 그의 책을 멀리 했었어.그것이 20년이 넘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세월의 무서움을 느꼈단다. 아빠의 기억 속에 폴 오스터는 20년 전에 머물러 있던 거야. 폴 오스터가 별세하고 얼마 후 그의 마지막 작품이 번역 출간되었단다. 아빠가 그 동안 멀리했지만 세 권이나 읽은 작가이니 추모할 겸 그의 마지막 책을 읽어보았단다.

 

1.

바움가트너. 소설의 제목이자 주인공이란다. 우리는 어떤 노년의 삶을 살게 될까. 사이 좋은 부부라면 둘이 함께 노년을 살아가겠지만, 사이 좋은 부부라도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수 있단다. 이 책의 주인공 바움가트너 역시 10년 아내 애나가 죽고 난 이후 쭉 혼자 지내는 노인이었단다. 지난 10년 혼자 살아오면서 그는 더 늙었고 최근에는 점점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줄어들었어. 깜빡 하고 냄비를 태워먹고 그 냄비를 치우다가 화상을 입기도 하고... 계량기 검침원과 약속을 잊고, 아니, 약속한 것이 전혀 기억나지 않고, 검침원과 함께 지하실에 내려가다가 계단에 굴러 넘어지는 등 일상 생활도 내 마음처럼 되지 않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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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얼마 전, 40대와 50대 초반 시절 자기보다 나이 많은 친구나 동료가 화장실을 다녀온 뒤 지퍼를 올리는 걸 잊고 나오는 게 눈에 띄기 시작했다. 허리띠 바로 아래 헛간 문이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레스토랑의 자기 자리로 느릿느릿 돌아오곤 하던 70대 중반과 80대 초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친구들. 처음에 바움가트너는 이 해로울 것 없는 실수가 재미있었다. 그러다가 재미는 없어졌다. 그때쯤에는 볼 만큼 봐서 열린 바지 앞자락이 종말의 시작임을, 세상의 바닥으로 내려가는 긴 비탈로 가는 첫걸음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일이 자신에게도 벌어지기 시작하자-지난 두 주 동안 네 번-그 클럽의 정회원이 되는 데 몇 달 또는 몇 년이 걸릴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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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내와 지난 시절을 생각해 보기도 했어. 아내와 처음 만났을 때와 이후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고 행복한 시간들. 안타까운 것은 아이를 가지고 싶었지만 잘 생기지 않았고 검사를 해보니 둘 모두 불임이었다는구나. 그래도 둘이 함께 행복하게 살았는데 10년 전 해변에 놀러 갔다가 아내 애나는 수영하다가 익사하고 말았단다. 불의의 사고로 아내를 잃은 바움가트너는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냈어. 애나는 작가 겸 번역가로 일했는데 바움가트너는 아내가 죽고 나서 아내의 원고를 보다가 <프랭키 보일>이라는 원고를 보았어. 이 책에는 그 원고의 전문이 실려 있어 또 다른 단편을 읽는 재미도 있단다. 바움가트너는 아내의 유고집을 작업하면서 아픔을 잊으려고 했단다.

바움가트너는 이제 일흔 살이 되었고 프린스턴 대학교 철학과 교수인데 이제는 현직에서 물러날 계획을 갖고 있어. 아내가 떠난 이후에는 주디스라는 같은 학교의 영화과 교수와 그나마 친했어. 애나도 죽기 전 영화에 관심이 많아서 주디스와 친하게 지내기도 했어. 주디스는 4년 전에 이혼했는데 이후 주디스도 바움가트너를 친구로 의지하게 되었고 일주일에 2~3일 같이 지내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어. 바움가트너는 긴 고민 끝에 청혼을 했어. 주디스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자유로움이 너무 좋다면서 현재 관계를 유지하자고 했단다. 이혼으로 결혼 생활을 끝낸 주디스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도 이해가 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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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외로움은 사람을 죽여요, 주디스. 그건 사람의 모든 부분을 한 덩어리씩 먹어 치우다 마침내 온몸을 삼켜 버려요.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삶이 없는 것과 같죠. 운이 좋아 다른 사람과 깊이 연결되면, 그 다른 사람이 자신만큼 중요해질 정도로 가까워지면, 삶은 단지 가능해질 뿐 아니라 좋은 것이 돼요. 우리가 가진 것은 좋은 거지만 이제는 이 정도 좋은 걸로는 충분하지가 않아요. 어쨌든 나에게는 충분하지 않아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어째서 나와 결혼한다는 생각이 당신에게 두려움을 주느냐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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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위와 같은 노년에 일어날 수 있는 소소한 이야기로 전개된단다. 사건이 일어나기보다는, 노년에 들어선 바움가트너의 생각과 기억, 그리고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따라가며 진행되지. 나이를 들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미래의 시간보다 과거의 시간과 과거의 사람들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진단다. 그 세월이란 놈이 너무 빨리 흘러가서 나의 일부분은 그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젊음에 머물러 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공감이 가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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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50여 년이 며칠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나니 내 인생이 흐릿하게 한 덩어리로 쏜살같이 흘러가 버린 듯한 느낌이다. 나는 늙었지만, 날들이 아주 빠르게 지나가는 바람에 나의 많은 부분이 아직 젊게 느껴진다. 따라서 손에 연필을 쥘 수 있고 눈앞의 문장을 볼 수만 있으면 여기 도착한 아침 이후 해온 일과를 똑같이 할 생각이다. 마침내 더 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일어나 떠나면 그뿐이다. 그때 너무 늙어 걸을 수 없다면 교도관에게 도와달라고 할 것이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나를 배웅해 줄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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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가 남아있는 삶이 줄어든다는 생각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시간이 지나면서 추억과 경험이 나의 몸 속에, 영혼에 더 축적되어 간다고 생각해야겠다. 아빠도 머지 않아 책 속의 주인공의 시간이 다가올 텐데... 시간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마음 속에 새겨야겠구나. 그 소중한 시간을 너희들과도 함께 하면 더욱 좋고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바움가트너는 서재, 코지토리엄, 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는 자신의 2층 방 책상에 앉아 있다.

책의 끝 문장: 그렇게 해서, 우리의 주인공은 이마의 상처에서 계속 피가 흐르는 채로 얼굴에 바람을 맞으며 도움을 찾아 길을 떠나고, 첫 번째 집에 이르러 문을 두드릴 때 S.T. 바움가트너 모험담의 마지막 장()이 시작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 죽으면 산 자가 죽은 자를 삶과 삶이 아닌 것 사이의 일시적 림보 같은 곳으로 계속 들어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 자마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죽은 자의 의식은 영원히 소멸한다. 애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쉬더니 그가 전화기를 든 이후 처음으로 질문을 한다. 지금 내가 한 말들 알아듣겠어? 바움가트너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애나의 숨이 멈추고, 말이 멈추고, 전화선이 죽어 버린다. - P77

어떤 사건이 진실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실제로 진실이어야 할까, 아니면 설사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어떤 사건의 진실성에 대한 믿음이 그것은 진실로 만드는 것일까?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느냐 아니냐를 알아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확실성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면 어떻게 될까?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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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두 번째는 지금까지 조명되지 않은 광주시민들을 중심에 두고 써보자는 관점이었다. 평전이 발간됐거나 신문과 방송 혹은 잡지에 집중인터뷰를 했던 분들은 널리 알려졌으므로 동어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인간의 보편적인 입장에서 참여한 신부님과 스님은 종교적 양심에 따라 행동한 분들이므로 뺄 이유는 없었다. 한편, 나중에 정치를 한 분은 순수성 측면에서 여러 해석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그분들의 역할은 가능한 한 줄였다. 따라서 <광주 아리랑>에 등장하는 인물은 식당주방장, 요리사, 시장 상인, 운전수, 페인트공, 용접공, 가구공, 선반공, 방직공장 여공, 예비군, 예비군 소대장, 대학교 교직원과 수위, 비운동권 학생, 영업사원, 재수생, 구두닦이, 농사꾼 등등이다. 이들도 805월에 계엄군과 맞서 싸웠던 엄연한 실존이자 최대 피해자였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나는 이분들을 한 분 한 분 광주 5.18 역사로서의 소설에 주인공이자 증인으로 영원히 기리고 싶었다. 화강암 같은 개결한 역사의 비석에 이름을 깊이깊이 새기듯.

 

(65-66)

김성섭이 여러 유인물 중에서 내민 것은 58일자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와 조선대학교 민주투쟁 위원회 이름으로 뿌려진 1시국 선언문이었다. 선언문 종류는 그것뿐이었으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민족적 양심과 민주적 지성의 부름으로 우리가 그간 역사앞에 외쳐왔던 목소리는, 타율과 강압에 의해 수그려들기도 여러차례 있어왔으나, 끝내 불붙은 민주에의 열정은 오늘의 역사적 전환기를 앞당겨 그 피의 도정을 계속 밟아왔고, 모골이 송연한 유산공포정치 아래서도 끝까지 투쟁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 중대한 역사적 시점에서 우리 대학인이 걸어야 할 길은, 무엇보다 구조적 수탈의 배후에 숨어있는 탐욕의 세력을 정확히 파헤치고, 이들이 어떻게 외세 매판자본과 결탁 반민족 작태를 멈추지 않고 있는가를 직시하여 조국의 민족정기를 진작시키는데 앞장서는 그 길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조국의 현실은, 독재자 한 사람의 영면이 마치 구약과 적폐의 일소인 양 오도시키려는 무리들 때문에, 민주민족 세력이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어쩌면 우리 세대의 미지막일지도 모르는 이 기회를 잃지나 않을까 하는 심한 우려를 낳고 있다....... “

 

(89)

14일 전남대생들의 시위는 처음 가두로 진출할 때는 최루탄을 쏘는 경찰과 격렬하게 맞선 양상이었는데, 오후 3시쯤에 시작한 민주성회와 이후 가두 행진 때는 뜻밖에 평화로웠다. 경찰이 수수방관하는 태도로 나왔던 것이다. 한복에 고무신을 신은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시민들에게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오후 6시까지 집회를 마치고 귀교하겠습니다라고 약속을 해서였다. 경찰은 전남대생들이 귀교할 때는 시위 행렬을 따라가며 교통정리까지 해주었다.

 

(98)

나라와 국민을 지키는 것이 군인이듯,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경찰의 본분이라고 안병하 경찰국장은 생각했다.

(중략)

시위진압 시 안전수칙 잘 지키기를 바란다. 시위 학생에게 돌멩이를 던지지 말라. 도망가는 학생은 쫓지 말라. 시민이 다치는 일 없도록 하라. 알겠는가?“

(중략)

부대 지휘관은 과격한 행동을 금하고 시위대를 추격하지 말라. 사과탄은 안면에 던지지 말고 공중에 투척하라. 최루탄도 각도를 유지해서 발사하라. 알겠는가?“

(중략)

시위 시민에게 절대로 자극적인 언행을 삼가라. 시민들의 야유와 비난이 있어도 절대 대응하지 말라. 시민과 우리 경찰의 안전을 최우선하라.“

 

(199-200)

문장우는 체격이 날렵하고 단단했지만 그의 친구는 둔하고 허약해 보였다. 허약한 친구가 문장우를 잡았지만 오히려 그가 끌려갔다. 창 너머는 바로 충장파출소였다. 학생 예닐곱 명이 진압봉을 든 공수부대원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그러나 충장로 지리에 밝은 학생들은 잽싸게 골목으로 달아나버렸다. 그러자 공수부대원들이 지나가는 행인을 아무나 붙들고 진압봉을 휘둘렀다. 청바지에 긴팔 티를 입은 여학생을 잡아당기더니 길바닥에 내팽개쳤다. 여학생의 티가 벗겨져 가슴이 보일 만큼 난폭하게 질질 끌고 갔다. 그뿐만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가던 사오십으로 보이는 남자를 붙잡은 뒤 진압봉으로 두들겨 팼다. 시민들 보란 듯이 자전거는 길바닥에 사정없이 던져 망가뜨렸다. 지켜보는 시민들은 두려움 때문에 아무도 항변을 못했다. 문장우 역시도 처음에는 말을 못하다가 꾸역꾸역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 개새끼들아. 니들이 대한민국 군인이냐? 죄읎는 사람들까지 왜 때려!“

 

(215)

선생님,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나도 답답하고 암울하기는 여러분 같아요.“

지금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합니까?“

여러분 마음을 나도 알아요.“

금남로에서 우리 형제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학생이 역시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울먹였다. 박행삼도 학생들과 같은 심정이었으므로 교사 신분을 잊어버리고 분필을 집어던지면서 눈물을 흘렸다. 박행삼이 비통하게 말했다.

여러분, 우리는 어째서 비극의 역사를 반복하는지 참담할 뿐입니다.“

 

(222)

국민들이 낸 방위세로 무장한 군인이 아닌가! 외적을 막으라고 지급한 총을 시민들에게 돌리고 있다니. 이런 군대는 필요 없다. 주인을 모르고 미쳐 날뛰는 군대는 없어져야 한다. 누가 이 군인들을 미치게 했는가? 시민을 살상하라고 명령한 원흉은 누구인가?’

 

(304-305)

전옥주의 가두방송 멘트는 전날보다 더 거칠었다.

형제 동생들이 죽어가는데 다리를 쭉 뻗고 잠이 옵니까. 공수들이 광주 시민을 다 죽이려고 하는데 도대체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갑니까. 일제 때 학생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난 광주입니다. 광주정신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광주시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팔십만 광주시민 모두가 나서 대한민국 군인이기를 포기한 공수 놈들과 싸워야 합니다.

 

(341)

그때였다. 바퀴 달린 시위 장갑차 한 대가 도청 분수대 쪽으로 달렸다. 장갑차 뚜껑을 열고 한 청년이 용감하게 상체를 드러냈다. 머리에 흰 띠를 두른 청년은 윗옷을 벗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도청 광장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원들이 그 청년을 향해 가차 없이 집중사격을 했다. 목에 총을 맞은 듯 청년의 머리가 푹 꺾였다. 공수부대원의 집중사격으로 충장로 입구 빌딩에 있는 노인과 동구청 앞의 학생과 처녀, 시민 등 여덟 명이 쓰러졌다. 도청 광장으로 돌진했던 시위 장갑차는 분수대를 돌아 노동청 쪽으로 빠져나갔다. 그제야 시민들이 쓰러진 사람들 중에 경상자는 동구청 뒤 홍안과로, 중상자는 전대병원과 적십자병원, 기독병원으로 시위 차량에 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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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 - 혼술에서 중독까지, 결핍과 갈망을 품은 술의 맨얼굴
캐럴라인 냅 지음, 고정아 옮김 / 나무처럼(알펍)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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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아빠가 몇 년 전에 인상 깊게 읽은 책 <명랑한 은둔자>의 지은이 캐럴라인 냅의 또 다른 대표작인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이라는 책이란다. <명랑한 은둔자> 책에서도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이라는 책에 대한 언급도 있어서 찾아보았다가 책 표지가 너무 유혹적이라서 그 유혹에 빠져서 책까지 구입하게 되었구나. 이 책은 알코올 중독에 빠진 지은이가 중독을 극복하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아는데, 책 표지의 그림만 보면 오히려 술을 먹고 싶게 만다는 디자인이구나. 술 끊었던 사람도 다시 먹고 싶게 만드는 그런 사진

아빠는 어딘가에 푹 빠지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몸에도 좋지 않다는 술에 중독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단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을 보니 알코올 중독은 일종의 병이라는 것을 이해했단다. 물론 자신의 의지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치료가 필요한 거야. 지은이는 어쩌다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되었는가. 안타까운 것은 힘들게 알코올 중독을 치료했는데, 마흔두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폐암에 걸려 죽고 말았다고 하는구나. 알코올 중독보다 더 시급한 것은 금연이 아니었나 싶구나.

 

1.

지은이는 자신을 고도 적응형 알코올 중독자라고 했어. 알코올 중독자에 여러 종류가 있나? 고도 적응형 알코올 중독자를 검색해 보니, 겉으로 보기에는 사회생활도 잘 하고, 직장에서도 유능하며 가정까지 잘 꾸려나가데 알고 보니 실상은 알코올 중독에 빠진 사람을 이야기하더구나. 지은이는 고등학교 이후 술을 거의 물처럼 먹었다고 했어. 자신의 손이 가는 곳에는 어디에든 술이 있었지. 지은이는 술이 안 좋다는 것을 알기에, 끊어보려고 노력하고 AA(Alcoholics Anonymous)에도 열심히 참석했어. 알코올 중독자들이 모여서 자신들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알코올 중독을 극복하려는 모임이지그렇게 술을 끊거나 줄이려는 노력을 했지만, 술 먹으면 오히려 글이 잘 써진다는 등 늘 술 먹으려는 이유, 아니 핑계를 찾는다고 했어. 이는 지은이뿐만 아니라 AA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라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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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나는 술 마시는 느낌을 사랑했고, 세상을 일그러뜨리는 그 특별한 힘을 사랑했고, 정신의 초점을 나 자신의 감정에 대한 고통스러운 자의식에서 덜 고통스러운 어떤 것들로 옮겨놓는 그 능력을 사랑했다. 나는 술이 내는 소리도 사랑했다. 와인 병에서 코르크가 뽑히는 소리, 술을 따를 때 찰랑거리는 소리, 유리잔 속에서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 술 마시는 분위기도 좋아했다. 술잔을 부딪치며 나누는 우정과 온기, 편안하게 한데 녹아드는 기분, 마음에 솟아나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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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쩌다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는가? 먼저 유전적 요인을 의심했어. 지은이의 아버지 직계 중에 알코올 중독자들이 몇 분 계셨지만 그것이 정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렇다면 가정 환경 때문인가? 지은이의 집안을 유복한 편이었단다. 정신과 의사였단 아버지 덕분이 상류층에 속해 있었지. 다만 무뚝뚝한 아버지가 집에서도 자신의 직업에서 하는 것처럼 무엇인가 분석하려고 하셨는데 그것이 소심한 지은이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었어. 그렇다면 성격 때문일까? 지은이는 자신의 성격이 소심하다고 했어. 그런데 술을 먹으면 용기가 생긴다고 하더구나. 소심함과 알코올 중독은 관계가 있을까. 지은이는 일란성 쌍둥이라고 하는구나. 쌍둥이 자매인 베키는 지은이와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라고 했어. 물론 알코올 중독자도 아니었고.

술은 분명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것이 분명하단다. 아빠도 적당량의 술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하지만 알코올 중독자들에게 충분한 것은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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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86)

충분하다니? 알코올 중독자에게 그것은 생경한 미지의 언어다. 충분히 마시는 일이란 없다. 우리는 언제나 술이라는 보험을 찾고 또 찾는다. 첫 잔을 마시고 따뜻한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면 그다음에는 그 느낌을 지속시키는 것, 그걸 강화하고 증대하는 것, 그걸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아는 리즈라는 여자는 알코올 중독을 탐욕의 병이라고 불렀다. 알코올 중독자들이 술에 느끼는 허기, 집착, 불안, 끝없는 결핍감을 일컬은 말이었다. 알코올 중독자에게 술이란 많을수록 좋고 많아야 한다. 석 잔을 마실 수 있다면 왜 두 잔만 마시는가? 네 잔을 마실 수 있는데 왜 석 잔만 마시는가? 도대체 왜 멈추는가? 그리고 어떻게 멈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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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에게 술이란 무엇일까. 술에 취하게 되면 성적 접근에 관대해진다고 했어. 술 때문에 사고 치는 경우가 많은데, 지은이도 그런 경험이 있다고 하는구나. 첫 남자친구도 술 취한 상태에서 생겼고 대학 졸업 후 지도교수의 접근도 술 취한 상태라 거절하지 못했다고 했어. 그러면서 성관계에 관대해지면서 밤을 함께 하고 다음날 죄책감을 가진 경험을 이야기했어. 남자 친구가 있는데, 교수님의 유혹에 넘어가 밤을 함께 했어. 결국 맨정신일 때 교수를 찾아가 자신의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아빠 같으면 숨기고 싶은 경험들에 대해서도 지은이는 솔직하게 모두 다 이야기해주었단다. 이 책은 알코올 중독을 극복하고 쓴 글일 텐데, 소심하다면서 이렇게 솔직하게 전부 이야기해도 되나 싶을 정도란다. 문화 차이인가?

 

2.

알코올 중독의 단계별로 이야기를 할 때 처음에는 술이 자신을 유혹하는 단계이고, 그 다음이 되면 혼술을 줄기는 단계가 된다고 하는구나. 한 가게에서 술을 너무 구입하면 사람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보아서, 지은이는 여러 가게에서 여러 술들을 구입한다고 하는구나. 정말 소심하긴 소심한가 보구나. 알코올 중독이 되면 술을 마시지 않고 혼자 있는 방법을 모른대. 지은이의 경우 직장에서는 유능한 기자로 인정받았지만 직장 밖에서는 술 없으면 생활을 못할 정도라고 했어.

이 정도 되면 스스로 알코올 중독임을 의심하고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자각하게 되지만 술을 멀리하기는 어려운 단계가 되었다는구나. 술 취하면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지만, 다음날 그걸 기억하지 못하거나 기억하더라도 후회하게 된다고 하는구나. 취중진담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자신이 기억도 못하는 말은 그저 술주정일 뿐이지.

지은이는 알코올 중독 자가테스트를 해보았대. 그 결과 자신은 이미 중기라고 했어. 이제부터 알코올 중독을 끊기 위한 노력을 했다고 했어. 상담도 받아보고 AA에도 나가서 다른 이들과 이야기 나누기 시작했어. 하지만 쉽지 않았지.

이 와중에 지은이는 알코올 말고 또 하나의 중독에 빠진 적이 있었어. 2년 반 동안 거식증으로 고생했다고 했어. 그 동안 먹는 양이 줄고 몸무게는 54kg에서 37kg까지 빠졌대. 이 때 다행히 술도 줄었다고 하는구나. 하지만, 거식증에서 빠져나올 때 먹는 음식량이 늘어나는 것처럼 술의 양도 같이 늘어났다고 하더구나.

....

지은이의 쌍둥이 자매 베카는 의사가 되고 결혼도 하는 등 부모님이 요구하는 것을 모두 완수한 것으로 보였어. 지은이는 베카와 친하게 지내고 힘들 때는 의지를 하곤 하지만, 베카와 비교해 보았을 때 아무래도 자신은 실패한 인생이라는 기분이 들기도 했어. 그러면 또 술에 빠지고술에 취했을 때면 남자친구와 싸우고 술 때문에 헤어지고.. 그럼 또 술을 찾고.. 필름이 끊긴 날이면 자신의 행동과 말 실수에 대한 걱정으로 일손이 잡히지 않지. 정말 최악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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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술 깬 아침의 막막한 걱정. 내가 아는 알코올 중독자들은 모두 그런 경험이 있고,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다. 파티 다음날 잠에서 깨어 전날 과연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짓을 했는지, 오전 내내 걱정에 잠겨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참다 못하면 파티 주최자에게 전화를 걸어 그 반응을 살핌으로써 우리 행동의 단서를 찾아내려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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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

술은 망상을 낳는다. 술과 함께 하는 인생은 모험 가득한 낭만의 행로로 여겨지고, 밝은 햇살 아래 출렁이는 눈부시고 역동적인 바다처럼 느껴진다. 단 한 잔의 술로도 우리 가슴은 에너지와 열정에 부풀어 오르고, 조금 전까지 가슴을 짓누르던 문제를 몽땅 해결할 수 있을 듯 자신만만해진다. 하지만 진실은 그 반대다. 술은 우리 인생을 정체시키고, 바위처럼 그 자리에 붙박아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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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술 깬 아침의 막막한 걱정. 내가 아는 알코올 중독자들은 모두 그런 경험이 있고,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다. 파티 다음날 잠에서 깨어 전날 과연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짓을 했는지, 오전 내내 걱정에 잠겨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참다 못하면 파티 주최자에게 전화를 걸어 그 반응을 살핌으로써 우리 행동의 단서를 찾아내려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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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 중독에 빠진 사람들의 특징에 이중생활이 있다는구나. 술에 취해서 실수를 하여 남자친구가 아닌 사람과 밤을 보내고 나면 그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려고 보니 동시에 두 명의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고, 들키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심지어 어떤 때는 임신을 했는데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있었대. 그 아이를 낙태하면서 자신은 타락했다는 생각을 하지만 술을 끝내 끊지 못하는 생활의 반복이었어.

지은이가 31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3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술을 더 많이 먹게 되었대.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지은이한테 한 이야기는 술 끊으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담배를 끊으라고 했대. 이 책에서는 담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지은이가 나중에 폐암으로 요절하게 되었으니, 어머니는 딸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계셨던 것 같구나.

지은이는 그렇게 인생의 밑바닥까지 추락했어. 쌍둥이 자매 베카의 계속된 잔소리와 자신도 더 이상 늦어지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병원과 재활센터를 찾아가게 된단다. 그곳에는 지은이처럼 자기혐오를 하면서 인생의 밑바닥을 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어. 재활센터에서 알코올 중독을 치유하는 비중이 3분의 1 정도 된다고 하는구나. 생각보다 높은 수치 같구나. 물론 나중에 다시 재발하는 사람들도 많다는구나. 지은이는 그 3분의 1에 포함되어 어둡고 긴 알코올 중독의 터널에서 빠져나왔단다. 이후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그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 담배를 물곤 했다는구나. 담배 말고 사탕이나 초콜릿을 선택했으면 어땠을까 싶구나. 알코올 중독에서 치유되고 나니, 삶이 더 명확해지고 남자 친구도 한 명으로 정리하고 제대로 된 삶을 찾기 시작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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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

술을 끊고 나서의 첫날 아침 느낌을 이야기하고 싶다. 마치 나의 옛 인생에서 쑥 뽑혀 나와 맑고 깨끗하고 독립적인, 꽃과 빛이 가득한 새 들판에 내려진 느낌이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런 느낌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처음 몇 주가 지나는 동안 내게는 자신감과 안도감, 드디어 내 인생의 개선에 나섰다는 인식에서 나온 희망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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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주기 위해서 AA에도 계속 나가서 성공 사례를 공유하기도 했대.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흔 두 살에 폐암에 걸려 죽고 말았구나. 그렇게 요절하지 않았다면 지은이 캐럴라인 냅의 책들을 더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아쉽구나. 만약 술을 끊지 않았다면 더 오래 살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도 들더구나. 그의 알코올과 싸움에서 이겨낸 것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좀더 일찍 그 싸움을 시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더구나.

….

아빠가 생각하기에, 식상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술은 사람 사는 세상에 어느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하되, 지나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그리고 담배는 백해무익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단다. 너희들도 아빠와 같은 생각을 갖길 바라면서, 오늘 독서 편지는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요약해서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책의 끝 문장: 그것은 사랑이었다.


다른 사람이 진정한 버전의 나를 눈치채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파티장이나 술집에서 다섯 잔째 와인을 기울이는 나를 본 사람들도 그지 조심스러운 사람이 어쩌다 긴장을 풀고 조금 흐트러지는 정도로 여겼을 뿐이다. 친한 친구들은 내 눈을 보면 술에 취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했다. 내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눈빛이 흐릿해지는 것이 보이면, 내가 내 속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약간 비틀거리거나 평소마다 목소리가 조금 커져도 사람들에게 취했다는 말을 듣는 적은 거의 없었다. 나는 조용하고 얌전하게 술에 취했다. 어수선해지는 건 내 머릿속일 뿐이었다. - P34

"술을 마시면 내 마음 가득한 더러운 기분이 사라졌어요." - P101

술을 마시면 내가 원하는 성숙한 모습의 내가 되어 메를로의 섬세한 맛을 논하고, 그것이 구이 요리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를 떠들 수 있었다. 나는 자리에 잘 어울렸고, 삼촌들, 숙모들, 부모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는 것도, 술잔을 입에 댄 채 다른 사람들이 술 따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다 편안했다. 나는 술을 통해서 상태를 변화시킨 것 같았고, 그런 느낌은 내게 안도감을 주었다. 여기에서 ‘두려움+술=용기’라는 또 하나의 방정식이 생겨난다. - P107

비극은 그 보호막이 작용을 멈추면서 시작한다. 변신의 수학은 바뀐다. 이것은 불가피한 결말이다. 장기간에 걸친 과음은 우리 인생을 망가뜨린다.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신과 맺은 관계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업무에 장애가 발생한다. 재정 문제, 법적 문제에 부딪히거나 경찰과 부딪힐 수도 있다. 고통이 커지면 어느 순간 옛 수학(불편+술=불편 없음)은 전처럼 들어맞지 않게 된다. 편안함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소심함이나 두려움, 분노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좀 더 깊고 근원적인 것을 찾게 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방정식은 더욱 강력하고 완전한 내용으로 바뀐다. ‘고통+술=자기 망각’이라는. - P114

알코올 중독자들은 책임 회피의 귀재들이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늘 타인이나 사물 탓으로 돌리는 것, 이것은 알코올 중독자를 가려내는 징후기도 하다. 이들은 관계가 꼬이는 엉켰을 때 자신이 잘못한 부분을 좀처럼 인정하지 못한다. 그해 여름 나는 데이비드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언제나 그에게 의문에 찬 눈길을 던졌다. 그에게는 뭔가 부족했다. 뭔가 마땅치 않았다. 나한테 문제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 내가 다른 사람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도, 내가 가진 거대한 결핍감의 크기도, 또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내 소망의 부조리함도 감지하지 못했다. - P139

술이 없으면 나는 우리에 갇힌 동물 같았다. 그러니 늘 술을 끼고 살 수밖에 없었다. 술이 없으면 나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 생각과 팔다리가 내 것이 아닌 듯했고, 그것들을 사용할 방법도 나를 멀리 비켜가 있는 것 같았다. 특히 일요일 아침이면 늘 그런 느낌을 받았다. 홀로 부스스 잠에서 깨어나면 텅 빈 하루의 시간밖에는 아무것도 나를 기다리는 것이 없었다. - P164

혼술이 역설은(그러면서 정말로 위험한 것은) 우리가 정서적으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만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혼자 술 마시던 시절, 술이야말로 내 진정한 감정의 문을 열어주는 유일한 도구라고 느꼈다. 술을 마시고 녹아내린다. 술을 마시고 녹아내린다. 술을 마시고 흐느낀다. 술을 마시고 다른 사람에게 전화 걸어 고통을 호소한다. - P166

그 순간 나에 대한 오기가 솟았다. 처참한 내 인생이 한눈에 들어왔다. 술 마시고 싸우고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뛰어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민망한 인생, 지루한 인생, 게다가 극도로 피곤한 인생이었다. 결국 남는 게 무엇인가? 이 모든 소동이 도대체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우리는 고통스러운 선택을 피하고자 술을 마시지만, 다음날 아침 깨어나면 그 선택은 그대로 남아 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은 개의 목에 걸린 줄처럼 우리를 끌어 내리고 우리의 전진을 방해한다. 모멸감, 이 모든 일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아찔함. 마이클, 줄리안, 우울증, 불안, 거짓말, 술, 술, 술…… 내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고 또 흘러갈 것이다. 아버지의 인생이 그랬듯이. - P330

‘나는 알코올 중독자다. 그러니까 술을 마실 수 없다’는 자시 인정은 밀물과 썰물처럼 한순간 차올랐다가 다음 순간 빠져버린다. 술 마시던 시절의 일을 돌이켜보면, 내가 올코올 중독자라는 증거는 많고도 많았다. 알코올을 들이켜면 내게는 강박 충동과 자제력 상실이라는, 다른 사람들은 겪지 않는 일련의 생리적 반응이 일어났다. 그래도 나는 아직 알코올 중독이 영구적인 진해성 질병이라는 개념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내가 술을 마시고 자제력을 잃지 않았던 적도 있지 않은가? 어쨌든 알코올에는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순기능도 있지 않은가? 그냥 꼭 한 잔만 하면 안 될까? 이런 질문은 수많은 알코올 중독자에게 같은 두려움과 걱정을 불러일으킨다. -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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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가
김진영 지음 / 반타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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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이야기할 책은 김진영 님의 <여기서 나가>라는 소설이란다. 아빠가 예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김진영 님은 아빠의 회사 지인의 누나라서 그런지 신간 소식이 더 반갑더구나. 김진영 님은 몇 년 전에 읽은 스릴러 <마당이 있는 집>로 소설가 데뷔를 하신 분인데, 그 이전에는 영화 감독도 하셨다고 하는구나. 아빠가 <마당이 있는 집>을 읽고 영화화가 시급하다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이후에 드라마로 만들어져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더구나. 이번에 나온 신작 <여기서 나가>는 오컬트가 가미된 스릴러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번 소설도 속도감 있는 전개로 쉴 틈을 주지 않고 읽게 만드는구나. 이번 소설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더구나.

 

1.

이상조 할아버지와 순화 할머니는 80대 노부부로 부안 지역에서 농사를 지내신단다. 그들에게는 가슴 아픈 상처가 있단다. 똑똑하고 착했던 큰아들 형진이 작년에 심장마비로 죽었기 때문이야. 이상조 할아버지의 가족 소개를 좀 해볼게. 작년에 죽은 형진은 생전에 공무원이었고, 마흔두 살이 되어서야 해령이라는 여자와 결혼했어. 그런데 해령은 재혼이었어. 전남편과 사별하고 형진과 만나 결혼한 것이야. 전남편과 해령 사이에는 수인이라는 딸이 있었어. 그리고 둘째 아들 형용은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최근에 구조조정으로 해고당하고 말았어. 돈 많이 들어가는 두 아이가 있어서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지. 형용의 아내 유화는 베이커리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그것으로 생활비 충당은 쉽지 않았어. 막내딸 성희는 중학교에서 선생님을 하고 있었고 결혼한지 10년이 되었는데 아직 아이가 없었단다. 이상조 할아버지의 가족 소개는 이쯤하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이상조 할아버지는 어느 폭우 내리던 밤, 물길을 내러 밭에 갔다가 밭에서 검은 형체를 보고 깜짝 놀랬어. 그 형체는 금방 사라지고 그 형체가 있던 자리에 가보니 불에 그을린 오 만원 지폐에 한자로 자신의 축은 아들 이름 이형진이 적혀 있었어.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이 일로 놀란 이상조 할아버지는 형용과 성희를 집으로 호출했단다. 그리고 이상조 할아버지는 한가지 고민이 있었단다. 자신의 아들이 죽고 나면 재산 상속을 해야 하는데, 자신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해령과 수인도 법적으로 상속인이 되는 거야. 형진이 죽은 이후 이상조에게는 남남처럼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자신이 죽기 전에 땅을 미리 형용과 성희에게 증여하기로 했어. 그 이야기를 이번에 내려온 형용과 성희에게 이야기했단다. 그 대신 자신이 죽기 전에는 그 땅을 매매도 하면 안되고, 담보로 돈을 빌려도 안 된다고 다짐을 받았단다.

평생 자신이 일군 땅에 애착이 있으니 자식에게 증여를 하더라도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공감이 가더구나. 그런데 형용은 엄마로부터 형의 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 형이 엄마의 명의로 1억짜리 땅을 산 것이 있다는 거야. 형용은 엄마에게 이야기해서 그 땅을 자신에게 증여하게 했단다. 형용은 형이 산 땅 청사동을 가보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베이커리 카페였어. 해 지는 바다가 보이는 위치에 베이커리 카페를 하면 잘 될 것 같았어. 그래서 아내 유화에게 이야기했더니 아내는 좀 내키지 않았어. 서울을 떠나 군산에 가는 것도 마음에 내키지 않고, 아이들 전학도 신경 쓰이고하지만 남편의 뜻에 따르기로 했단다.

 

2.

형용은 형의 친구 필석 형의 도움으로 베이커리 카페를 설계하고 짓기 시작했단다. 그 땅에는 일제시대 지은 집이 한 채 있었는데 그 집의 기둥을 그대로 두고 리모델링 하자고 했어. 건물의 컨셉을 일본식 건물과 현대식 건물의 콜라보라고 정했지. 그런데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어가게 되어 아버지와 약속을 어기고 아버지로부터 받은 땅을 담보로 대출까지 받았단다. 그래도 돈이 모자라 필석 형에게 1억원도 투자 받았어.

그런데 유화가 우연히 들린 이웃에 있는 중국집 주인으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어. 형용이 산 청사동 땅은 죽은 자의 땅이라는 거야. 귀신이 사람 잡는 땅이라서 오랫동안 건물을 안 짓고 방치한 것이라고 말이야. 유화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냥 괴담이라고 생각했어.

어느날 형진의 아내 해령이 상조 할아버지를 찾아와서 형용과 성희에게 땅 증여한 것에 대해 항의를 했어. 3분의 1은 수인의 땅 아니냐면서 말이야. 해령이라는 여자도 만만한 여자는 아닌가 보구나.  같이 산 시간도 얼마 안 된 남편이 죽었고 전 남편의 딸을 남편이 입양을 했더라도 그렇게 상속 지분을 주장하기 쉽지 않을 텐데 말이야. 상조 할아버지도 화를 내면서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큰소리치며 쫓아냈단다.

유화는 군산에 내려와서 해령을 외면할 수만은 없어서 만났단다. 해령이 대뜸 형진이 죽기 전에 대출한 1억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어. 자신이 그 대출 이자를 내고 있다면서 말이야. 유화는 뜨끔했어. 1억으로 산 땅이 바로 청사동 땅이니까 말이야. 형이 대출하고 해령이 이자를 내고 있는 돈으로 산 땅을 형용의 소유가 된 거야. 이 사실을 해령이 알면 가만 안 있을 것 같은데

상조 할아버지가 형용이 약속을 어기고 땅을 담보로 대출한 사실을 알고 크게 화를 내셨어. 형용도 대들어 크게 소리 지르고 집안 분위기를 점점 안 좋아졌단다. 유화는 그저 침묵할 수밖에. 유화는 공사중인 카페를 찾아갔다가 카페 안에서 검은 형제에 얼굴만 하얀 남자를 보고 깜짝 놀라 기절했단다. 그 남자는 데테이케라는 일본말을 계속 외쳤단다. 나중에 그 말을 찾아보니 나가라라는 뜻이었어.

우여곡절 끝에 카페 이름은 유메야로 하고 오픈을 했단다. 독특한 분위기에 노을 맛집으로 SNS에 소문이 나면서 금방 인기를 끌게 되었단다. 손님들도 늘면서 인근 상가에도 좋은 영향을 끼쳐서 다들 반기는 분위기였어. 어느날 해령이 찾아왔어. 상속 관련해서 소송 진행 중이고 청사동 땅도 실제 주인은 형이라면서 차명으로 된 땅을 증여 받은 것 아니냐면서 형용에게 추궁을 했단다. 형용은 모른다고 잡아 떼자, 유화에게도 물어보자 유화는 울먹이며 미안하다고 했어. 형용은 해령을 내쫓듯 보내고, 유화에게도 미안하다고 이야기했다고 잔소리를 쏟아 부었어. 한편 상조 할아버지는 밭에 나갔다가 형진이 꺼내달라는 소리와 형상에 이끌려 땅에 얼굴을 박고 땅을 파내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단다. 지나가던 이웃이 발견하지 못했다면 큰일 날 뻔 했어.

그런데 이상한 일들은 계속 일어났어. 카페의 음식과 빵이 너무 빨리 상하는 거야. 하루도 안되어 곰팡이가 생기기도 했어. 그러다 보니 리뷰도 음식과 빵이 맛없다는 안 좋은 내용들이 올라오기 시작했어. 형용은 그것이 유화의 짓이라고 의심했어. 서울로 돌아가고 싶어서 한 짓이라고 말이야.

유화는 읍내에 나갔다가 우연히 해령이 어떤 무당을 만나는 것을 보았어. 아니, 무당을 왜? 이걸 형용에게 이야기를 하자, 형용은 무당을 찾아가 만나보았어. 무당이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형용이 생각하기를, 해령은 무당으로부터 누군가를 저주하는 짓을 했다고 했어. 필석 형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단다. 형용은 혜령을 찾아가 경고하려고 했으나, 해령도 맞받아치며 강경하게 나오자, 화가 난 형용은 자신도 모르게 해령에 손찌검을 했단다. 곧 후회를 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지. 그런데 해령이 그런 형용을 보고 형진과 똑같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야? 형이 해령을 때렸다고? 문득 형용은 어렸을 적 형이 떠올랐어. 사실 형진은 내면에 폭력성을 품고 살았어. 가끔씩 욱하여 폭발하는 스타일이었어. 그래서 형용은 어렸을 때 형에게 심하게 구타를 당한 적도 있었어.

 

3.

유화는 청사동 땅에서 이상한 일과 안 좋은 일이 계속 생기자, 전 주인을 찾아가 보았어. 전 주인은 김규선이라는 사람인데 그 분은 치매로 요양병원에 있었어. 유화는 김규선을 만났는데, 알 수 없는 일본말만 지껄였어. 그러면서 김규선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녀를 유화에게 주었어. 그리고 유화는 해령을 만나러 갔어. 해령은 문뜩 형용을 도와주고 있는 필석을 멀리하라고 했어. 필석은 죽은 자를 불러내는 사람이라며 카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말까지 했어. 도대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유화는 청사동 땅에 있던 집의 주인들을 계속 추적했어. 김규선 이전의 주인은 일본인이었는데, 아내를 죽이고 자살을 했다는 끔찍한 사실도 알게 되었어. 어렵게 그 일본인의 사진을 찾았는데, 오래되긴 했지만 자신이 카페에서 본 사람과 비슷한 거야. 그러다 보니 그 땅이 저주받은 땅이라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어.

유화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굿을 하기로 했단다. 여기서 실수남편과 상의를 하고 했어야지. 굿판을 한창 벌이고 있을 때, 이 사실을 알게 된 형용이 와서 화를 내면서 깽판을 쳐서 굿은 중단되고 말았지유화는 자신의 마음도 이해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폭력까지 쓰는 남편에게 화도 나고 실망도 나고 서울 친정집으로 가겠다고 했어. 형용은 갈 때 가더라도 카페의 식자재만 제대로 정리하고 가라고 했어. 유화가 카페 안에 있는 베이커리 룸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형용은 베이커리 룸을 밖에서 잠갔단다. 유화가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갈까 봐 했다고 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것 같구나. 정말 카페에 저주가 그들을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싶구나.

형용은 필석 형의 글씨가 아버지가 밭에서 발견한 지폐에 써진 글씨체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형용은 필석 형이 살고 있는 당진으로 찾아갔어. 그런데 평소 잘 꾸미고 다니던 모습과 달리 그의 집은 다 쓰러져가는 폐허 같은 집이었어. 안을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어. 온갖 부적과 저주의 글이 적혀 있는 글들을 보았어. 그 속에서 형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도 보았어. 필석 형의 정체는 무엇?

그 때 필석 형이 왔어. 청사동 땅에 있는 집의 주인은 죽은 자의 주인이라고 했어. 이치카와 다케오. 그가 지은 집이었어. 일제 시대 군산에서 미곡수출업으로 떼돈을 번 갑부이자 지주였지. 해방 후 자신의 재산을 버릴 수 없다면서 귀화를 신청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어. 더욱이 그의 아내 마카오는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어했어. 그렇게 집에 돌아가려고 하는 아내를 창고에 가두었어. 마카오는 창고에 갇혀서 미쳐갔지. 창고로 들어온 다케오를 비녀로 찔렀고 다케오는 마카오의 목을 졸라 둘 모두 죽고 말았단다.

집은 다케오의 하녀였던 이효심이라는 사람에게 넘어갔는데, 이효심은 바로 유화가 만났던 김규선의 어머니였지. 청사동 땅에 저주를 내린 것이 필석 형이라는 걸 알고 그에게서 도망쳐 유화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다시 카페로 왔어. 유화는 베이커리 룸에 갇혀 미쳐갔어. 귀신에 들렸다고 볼 수도 있지. 자신이 그 옛날 마카오가 되어 창고로 들어오는 마케오를 비녀로 얼굴과 목을 찌르고 도망을 갔어. 이내 정신이 돌아오고 나서야 자신은 유화이고 자신이 찌른 사람은 형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필석은 결국 청사동 땅을 자신이 사들였단다. 사실 필석은 청사동 땅의 원주인 다케오의 손자였단다. 그는 그 땅을 다시 되찾기 위해 오랜 시간 준비했던 거야. 청사동 땅을 되찾았다는 것에 승리감까지 느꼈어. 그런데 그때 밖에서 카페 밖에서 불이 났어. 목조건물이었던 유메야 카페는 삽시간에 불이 번졌어. 그런데 창 밖에 보니 형진, 아니 형용의 모습이 보였단다. 형용이 죽지 않았나? 문이 다 밖에서 잠겨 있어서 탈출하지도 못했단다.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어.

소설은 재미있게 읽었으나 오컬트 스타일의 소설의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더구나. 그냥 흘러간 문장이 나중에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경우도 있고 말이지. 그래서 아빠가 오늘 줄거리를 이야기해주었지만, 매끄럽지 않아도 이해 바람. 일제시대 군산은 국내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빼돌리는 주요 항구로 엄청 발전했으나 그 이후 점점 쇠퇴하여 소멸 도시를 이야기를 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곳이란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아픈 근대사의 흔적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관광을 많이들 가기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 아빠는 지나가면서 유명하다는 짬뽕집을 들른 적은 있으나, 군산 여행을 제대로 해 본 적은 없는 것 같구나. 나중에 시간이 되면 함께 군산 여행을 가보면 좋겠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전라북도 군산부 청사정 남서쪽 해변에 자리한 언덕 위에, 일본인 이치카와 댜케오 씨의 신저택 준공식이 지난 13, 지방 유지 및 조선 유지를 초정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는바, 본 저택은 군산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명승지에 건축되었으며, 동씨의 개간사업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라 하겠노라.

책의 끝 문장: 그리고 누군가가 주인으로 모셔주기를, 자신과 같은 염원을 가진 이가 자신을 위해 삶을 빌려주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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