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 입은 남자
이상훈 지음 / 박하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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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입은 남자/이상훈/박하] 천재 과학자 장영실과 천재 화가 다빈치가 만나다.

 

루벤스의 그림 <한복 입은 남자>를 기억한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서 노예로 팔려간 한 소년이 이탈리아에 정착했고, 그 소년이 자라 안토니오 꼬레아라는 이름으로 루벤스의 모델이 되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베니스의 개성상인>이라는 소설로도 나왔던 한복 입은 남자. 그는 정말 누구일까.

 

가제본으로 만난 <한복 입은 남자>는 상인이 아니라 과학자다. 우선 그가 입은 옷 중에서 철릭은 조선 초기 사대부들이 입던 옷이었기에 노예 소년이라는 기록도 맞지 않지만, 임진왜란 이라는 시기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시절에 살았던 다빈치의 노트에 그려진 비행기나 자명종 등의 기구들이 조선 최대의 과학자였던 장영실의 비차, 자격루와 너무나 비슷하다는 점이다. 장영실이 다빈치의 아이디어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장영실은 한글 창제에도 관여했고, <칠정산내외편>에도 참여한 것은 물론, 해시계, 물시계, 간의, 혼천의, 갑인자, 신기전 등 많은 발명품을 만든 천재가 아니었던가.

그런 천재가 임금의 가마를 잘못 지었다는 구실로 곤장을 맞고 관직을 박탈당한 뒤 어느 날 갑자기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조선에 버뮤다 삼각지가 있는 것도 아닌데……. 더구나 역사적인 기록에 철저했던 조선이었지만 유독 장영실의 관직박탈 이후의 기록이 전혀 없다니.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장영실은 유배 간 기록도 없고, 죽음에 대한 기록조차도 없다. 노비 출신에서 세종의 사랑과 인정을 받아 종3품 대호군의 지위까지 오른 천재 과학자 장영실이었지만 그의 기록은 의심스러울 정도로 실종상태다.

게다가 이탈리아에는 꼬레아라는 성을 가진 마을도 있다. 루벤스가 그린 <한복 입은 남자>와 관련 있지 않을까.

저자는 그런 의문에서 시작해서 조선 세종 때의 천재 과학자 장영실의 실종, 세종이 그의 실종을 비밀스럽게 진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 명나라 환관이었던 정화의 대원정에 장영실이 합류한 배경, 로마 교황청이 정화원정대를 배척하게 된 이유, 장영실이 피렌체에서 소년인 다빈치를 만나 교류한 이야기, 다빈치의 그림을 루벤스가 모사한 이야기 등을 소설로 펴냈다.

 

어떤 진리도 처음에는 부정되기 쉽다. 하지만 진리, 그 자체가 변화하진 않는다. 그것은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511)

 

잘 짜인 소설,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엘레나 꼬레아가 조상의 물건이라며 가져온 장영실의 비망록에서 출발해서 헌책방 주인 강배의 한문해석, 이탈리아에 있는 꼬레아 성씨에 대한 의문점, <한복 입은 남자>의 복식의 특징으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장영실로 연결된다. 더구나 정화 원정대까지 연결되다니. 15세기 조선의 과학자 장영실이 유럽으로 건너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교류하다니.

 

소설이지만 사실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생생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 세계의 역사는 새로 써야 하는데……. 소설이라고 해도 멋진 아이디어에 전율이 흐른다.

 

 

조선 복식사를 찾고, 사료를 찾고 그림을 분석하고 상상을 구체화하여 소설을 준비하는데 무려 10년의 공을 들인 소설이라고 한다. 역사 속에서 하루아침에 실종된 천재 과학자 장영실 미스터리를 읽은 느낌이다.

 

장영실이 지금의 비행기를 본다면, 지금의 시계를 본다면, 물시계와 비슷한 윈리로 돌아가는 인형 시계를 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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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인간 - 일러스트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호세 무뇨스 그림 / 미메시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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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최초의 인간/알베르 카뮈/호세 무뇨스/미메시스]미완의 유작이 된 최초의 장편소설…….

 

 

프랑스가 자랑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1957)인 알베르 카뮈의 소설을 정말 오랜만에 접한다. 여고 시절 페스트, 이방인으로 만났던 카뮈의 문체는 호흡이 길었다는 기억이 난다. 특히 유럽을 죽음의 공포로 물들였던 흑사병을 다룬 페스트를 읽으면서 재앙 앞에 무기력한 인간의 존재를 느끼기도 했다. 카뮈에게 미발표의 미완성 유작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최초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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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1913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몽도비에서 태어났다. 1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아버지가 마른 전투에서 전사하자, 귀머거리 어머니와 외할머니 밑에서 가난한 시절을 보내게 된다. 공장에서 일하라는 할머니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고학으로 대학 졸업까지 하게 된다. 좋은 스승을 만나 교수의 꿈을 가졌지만 생계를 위해 신문 기자가 된다. 이후 시인의 기질을 발견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안과 겉, 결혼, 이방인, 시지프스의 신화, 페스트등을 쓰면서 프랑스 문단의 총아, 20세기 문단의 정점에 오른 작가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최초의 인간을 집필하던 중, 1960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면서 이 소설은 미발표 장편소설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최초의 인간은 다듬어지지 않은 초고 그대로 1994년에 출간하게 되었다는데…….

 

돌투성이의 길 위를 오랜 시간 달린 작은 포장마차에서 여자가 내리고, 다시 찾은 고향집에서 여자는 아이를 낳는다. 자크 코르므르라는 사내아이를. 그로부터 40년의 시간이 흐른 뒤 그 사내는 아버지의 무덤을 찾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와 가족, 자신의 이야기를 엮어 간다.

 

읽다가 보면 카뮈 자신의 삶을 자크에게 투영한 소설이다.

자크가 어린 시절, 29 살의 나이로 전몰장병이 된 아버지의 묘지 방문, 아버지의 전사로 가난하게 살았던 알제리에서의 삶, 자신을 이끌어준 선생님들, 그렇게 진학하고 자수성가하기까지의 삶,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카뮈를 상상하게 한다.

 

 

 

그의 내면의 그 어둠 속에서 태어나고 있는 저 굶주린 열정, 그의 혼속에 언제나 깃들어 있었고 심지어 지금도 그의 존재를 고스란히 간직해 주고 있는 살려는 광기, 다시 만난 가족들 한가운데서, 어린 시절의 영상 앞에서 젊은 시절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저 돌연 끔찍해지는 감정을 더욱 쓰디쓰게 만드는 살려는 광기, 마치 그가 사랑했던 그 여자처럼, 오 그렇다, 그는 마음과 몸을 다 바친 엄청난 사랑으로 그 여자를 사랑했었다, 그렇다, 그 여자와는 욕망도 당당했었다, 그리하여 (이하 생략)(343)

    

구절들이 나열된 긴 문장이기에 난해한 느낌도 있다. 전혀 손대지 않은 초고본인데다 문장부호까지 없고 알아보기 힘든 글자도 수두룩하다. 하지만 특유의 아름다운 문체들, 배경 묘사, 심리적 사유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 소설이 완성되었다면 얼마나 감동적이었을까. 얼마나 아름다운 문장의 향연이었을까.

 

 

 

그리고 그 역시, 어쩌면 그녀보다도 더, 조상도 기억도 없는 땅, 그에 앞서 이 세상에 왔던 사람들의 소멸이 더욱 완벽했었던 고장, 늙어가면서도 문명된 나라들 [ ] 에서처럼 우수를 통한 위안을 얻을 수 없는 고장에서 태어났기에, 어쩌면 그녀보다도 더, 단번에 그리고 영영 으깨져 버릴 운명인 고독하고 항상 진동하는 큰 파도처럼, 완전한 죽음과 맞서 있는 순수한 삶의 열정인 그는 (이하 생략) (348)

    

[ ] 표시는 판독 불가능한 단어라는 표시로 비워 둔 것이다. 따옴표도 없고 문단도 없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문장은 더욱 길어진다. 자신의 생각을 일단 적어둔 것일까. 카뮈의 최초의 장편소설이 미완성 유작이 되다니……. 카뮈가 사망하던 그날까지도 집필 중이던 작품이었다니, 더구나 한 번도 손질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미완의 육필원고였다니, 읽으면서 그의 마지막 숨결이 와 닿는 듯하다. 미완의 유작이라기에 마지막 부분에서는 안타까움마저 든다.

 

책 속의 일러스트가 특색 있다.

아르헨티나 태생의 호세 무뇨스의 작품이다. 흑과 백의 독특한 그림체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화가다. 굵지만 날카로운 선, 묵직한 명암 대비, 과장과 그로테스크한 분위기 등이 어울려 얼굴과 골격 표현이 입체적이다. 마치 먹과 붓으로 그려낸 동양화를 보는 듯 하고, 판화를 보는 느낌도 든다.

 

 

책의 뒷부분엔 최초의 인간 원고에 낀 낱장들과 <최초의 인간(노트와 구상)>이란 제목의 공책, 두 통의 편지도 첨부되어 있다. ‘노트와 구상은 카뮈가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전개해 나갈 것인지 독자들이 짐작할 수 있게끔 하는 노트다,

 

 

실을 꿰어서 제본하는 전통적인 사철 방식으로 튼튼하게 만들어졌다니, 카뮈에 대한 애정 표현일까. 일러스트마저도 카뮈에 대한 오마주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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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히 리베 디히 바다로 간 달팽이 12
변소영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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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히 리베 디히/북멘토] 낯선 문화가 만나 이해와 사랑으로 성장해 가는 다문화 가족 이야기

 

 

이히 리베 디히(너를 사랑해).

여고 시절, 독일어를 배우면서 독일어의 매력에 빠진 적이 있다. 이히 리베 디히는 음악 시간에도 독일 가곡을 즐겨 불렀기에 지금도 잊히지 않는 말이다.

 

<이히 리베 디히>

제목에서 느껴지듯, 이 소설은 아픔을 이겨낸 성숙한 사랑 이야기다. 한국에서 태어나 독일 남자를 만나 독일 땅에서 살아가는 한 한국 여성의 가정을 들여다보는 다큐 같다. 한국인 엄마에 독일인 아빠가 만들어 낸 다문화가정에서 일어나는 가족 모두의 성장을 담은 이야기다.

 

외국에서도 다문화가정의 문제들이 있음을 처음 알았다. 워낙 자유분방한 유럽이고 국적 불문하고 사귀기에 다문화 가정문제가 있을 줄이야. 

 

 

성숙은 대학 시절, 한국에서 어학코스를 밟는 카이에게 끌리게 된다. 카이의 친절한 행동을 사랑이라고 여겨 졸업 후 카이를 찾아 무작정 독일로 오게 된다. 카이는 사랑이 아닌 관심 정도였기에 당황해 한다. 하지만 성숙이 카이의 아기를 갖게 되면서 둘은 결혼을 하게 된다. 사랑 없는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사랑 없이 팀을 낳고 살다가 8년 전부터는 별거에 들어갔고, 둘은 이혼은 하지 않고 친구처럼 지내는 중이다. 아들이 있으니까.

 

성숙과 카이의 결실인 팀은 졸업을 앞둔 고3 수험생이다. 독일의 대입시험이자 고교졸업시험인 아비투어를 통과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아비투어를 볼 수 잇는 자격을 얻기 위한 예비시험점수를 올려야 하는 탐은 놀기에 바쁘다. 시험 스트레스를 풀려면 그때그때 놀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때로는 여자 친구를 데려와 자겠다고 하기도 하고, 때로는 디스코텍에 가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네 집 지하방에서 친구들과 혼숙하기도 한다.

 

성숙은 한국과 독일이 비교되지만 독일문화에 익숙해지려 노력한다. 결국 성숙은 대화와 노력을 통해 아들 팀과의 거리감도 좁히게 되고 카이과의 관계도 개선되는데......

 

책을 읽다 보면 한국 상황과 달라서 낯선 대목들이 많다.

이성문제에 대해서 우리보단 개방적인 모습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은 물론 대마초까지 피우는 아이들이 있다니. 아프리카 봉사활동 프로그램, 3졸업파티팀, 3골탕팁, 수학구두시험 등도 우리와 많이 다른 풍경들이다

 

    

그래도 세상어디에나 있을 비슷한 풍경들도 있다.

우울증 치료를 받는 아이, 학교 폭력, 집안일을 돕거나 가족을 걱정하는 건강한 아이들의 모습도 있다.

 

독일 학생들의 생활 모습, 학교 프로그램들, 아이들의 문화, 다문화 가정의 문화적 혼란, 언어적 문제들을 알 수 있는 소설이다.

 

문화가 다르다면, 가치관이 다르다면, 성장 과정이 다르다면, 그렇게 다르다면 서로 부딪치는 것은 당연지사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기에 시간을 두고 이해의 과정을 거친다면 누구나 사랑으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서로에 대한 신뢰, 서로에 대한 인정만 있어도 다문화 가정의 혼란은 줄어들 것이다.

 

서로 낯선 문화가 만나 충돌하지만 이해와 사랑으로 극복하게 된다는 해피엔딩의 가족 성장드라마다.

 

 

 

*북멘토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한우리북카페 서평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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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라는 우주에 나를 부치다
김경 지음 / 이야기나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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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라는 우주에 나를 부치다/김경/이야기나무] 아날로그적 편지로 운명 같은 인연 찾기…….

 

 

우연이 인연이 되고, 인연이 운명이 되려면 몇 번의 우연을 겹쳐야 할까. 우연이 인연을 거쳐 운명이 되는 증거들은 서로에게 감동하고 경탄하는 것이리라. ‘할 때 하는 사이고,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 사이일 것이다. 소위 하면 되는 거다.

 

 

김영희 차장은 패션 잡지사의 애디터다. 서른일곱의 나이가 되도록 직업 상 많은 분야의 남자들을 만났다. 소설가, 영화감독, 와인평론가, 인테리어 디자이너, 보석 감정사 등 다양한 남자들과 연애했지만 늘 유통기한에 걸려 끝내버렸다. 직업 덕분에 열정의 대상을 끊임없이 바꿀 수 있었지만, 반대로 다양한 기사거리와 새로운 이슈를 갈망하는 직업 특성 상 그녀의 열정이 한 곳에 머무르기란 불가능한 거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색다른 방법으로 연애를 시작한다. 아날로그적인 편지로 말이다. 기질 상 연애는 계속해야 한다는 연애주의자이지만 나이와 체력을 고려해 이번에는 연애편지 방식을 택한 것이다. 소모적인 연애를 할 나이도 지났고 사랑에는 늘 변화가 필요한 법이니까. 변화는 살아 있다는 삶의 증거니까.

 

선배로부터 영혼이 아름다운 남자의 주소를 받아들고 찾은 곳은 논밭 한가운데의 농가 주택이었다. 통계청 조사요원으로 가장해 그 남자에 대한 탐색을 시작하게 된다.

마흔 넘은 화가는 싱글에 피아노곡을 좋아하고 책을 좋아한다고 했다. 일단 착한 이미지에 수수한데다 자신의 일에 열정적으로 몰입한다는 점에 끌리게 된다.

 

그리고 영희는 영혼이 아름다운 남자파스칼님에게 일방적인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편지의 내용은 일상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해 주변 이야기, 자신의 이야기로 연결 된다. 물론 자신의 직업을 숨긴 채, 책과 영화, 음악과 인물, 패션과 예술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다.

    

-삶은 인간에게 무엇이든 줄 수 있고 또 인간은 삶에서 무엇이든 얻을 수 있네. 그러나 인간의 취향, 성향, 사람의 리듬은 바꿀 수 없어.

-같은 리듬의 사람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전 생애를 허비하기도 한다.(책에서)

 

어느 날, 전시장에서 우연히 파스칼과 조우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연애를 하게 된다. 가난하지만 솔직하고 순박한 화가와의 만남은 그런 영희를 감동시키는데...... 몇 번의 만남 후 결국 결혼식 없는 결혼을 하기에 이른다. 화려했던 여자가 소박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직업적 특성 상 호화로운 패션쇼, 우아한 파티장, 비행기 일등급 좌석, 유명 인사들과의 만남 등 호화로운 일상이었지만 그런 지위에 걸맞은 집을 얻기 위해 1억의 대출을 내야했던 영희였다. 매달 150만 원을 갚아야 했던 그녀는 결국 가난한 화가를 선택한 것이다.

 

유통기한이 지난 사랑도 가능하다면 우정으로 보존하고 싶어 하는 조금은 칠칠한 로맨티스트이자 어쩌면 털털한 휴머니스트였던 영희의 선택이 의외다. 하지만 사랑은 통해야 하고, 감동과 설렘이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통하면 되는 거고, ‘할 때 할 수 있으면 되는 거고,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으면 되는 거니까.

 

 

패션지 기자의 이야기이기에 책에서는 많은 지식과 감성적인 영감들을 얻을 수 있다.

 

존 버거의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세계적으로 성공한 모델의 자살, 쇼팽의 <녹턴> 이야기, 마르셀 뒤상의 ’, 아티스트 마우리치오 카텔란, 산도르 마리아의 소설 <열정>, 미국 금융의 문제점......

 

참고로, 쇼팽의 <녹턴>은 쇼팽이 러시아의 침공을 피해 조국 폴란드를 떠나 파리에 왔을 때의 파리의 밤을 피아노곡에 담은 음악이라고 한다.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아날로그적 편지로 운명 같은 인연 찾기를 한 영희를 통해 인연과 운명을 생각하게 된다. 소박한 삶이지만 감동적이고 끌리며 설레는 삶을 찾아 나선 소설 속 영희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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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빌라
전경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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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 빌라/전경린/자음과모음]부유물처럼 해변에 떠밀려오는 사람들의 이야기

 

 

세상엔 이런 삶도 있나보다. 소설 같은 세상이니까. 무심한 관계, 시크한 관계이면서도 끈질기게 얽혀 있다. 여섯 단계만 거치면 세상의 모든 이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던가. 소설을 읽으면서 관계 파악에 몰입하기는 생전 처음이다. 무슨 미스터리도 아닌데, 인물 관계를 도식화해야 한다. 외면적으론 단순해 보이지만 내면적으론 꽤나 복잡한 인물 관계다.

    

여자의 진짜 능력이란, 제 남자를 알아보는 거란다.

(중략) 남자란 세상의 들판을 지나가는 바람과 같아. 하지만 자기를 알아보고 계산 없이 인생을 내놓는 여자를 만나면 자기가 줄 수 있는 것을 몽땅 주지. 거기에 제 생명을 쏟는 거다. 그게 남자와 여자의 비밀 논리야. (책에서)

 

주인공은 부모 없이 자라다가 어느 날 윤유지에서 손유지로 바뀌게 된다. 작은 고모 손이린이 자신의 생모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고모가 사는 바닷가의 해변빌라로 이사하게 된다.

 

 

 

  

 

엄마는 그렇다 치고 아빠는 또 누구일까. 유지는 늘 아빠의 존재가 궁금하지만 그 누구도 아빠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유지는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늘 피아노를 치며 마음의 허기를 달랜다. 그녀는 아버지 부재에 대한 갈망에서 중년 남자들을 관찰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생물 선생님인 이사경이 눈에 들어온다. 늘 자신을 관찰하며 무심한 듯 말을 건네던 선생님이었기에.

 

어느 날, 생물실에서 새로 들여온 신체 모형을 구경하다가 모형 앞에서 벌거벗고 서게 된다. 이 일로 교사인 이사형과 추문에 휘말리고 급기야 이사형의 어머니인 노부인의 호출을 받게 된다.

 

네 나이에 피아노를 잘 치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말, 차라리 적게 치고 많이 들으라는 말,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생각하면서 피아노를 치라는 말, 중요한 것은 네 목소리를 내는 것이라는 말 등을 듣게 된다. 그리고 괴이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노부인 집에 와서 피아노를 배우라는 말을 듣게 된다.

 

노부인에게 피아노를 배우게 되면서 이사경 선생님과 고모이자 생모인 손이린의 사이를 간파하지만 그저 속으로 삼킬 뿐이다. 사경 선생님에 대한 알 수 없는 끌림은 무엇일까. 이사경은 유지의 생부일까. 사경의 몸이 불편해진 시점에서 사경의 처로부터 사경과 이린의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고......

 

기억한다는 것은 마음이 멈추었다는 것이다.(책에서)

 

타인의 눈엔 제멋대로이거나 당찬 아이, 누구도 닳을 수 없는 아이, 중심에 고독을 담고 있는 아이, 그래서 때로는 제법 어른스런 소녀의 이야기가 무덤덤한 속에서 슬픔을 자아낸다.

 

생모를 사랑하는 이사경 선생님, 그런 사경에게 끌리는 유지, 사경의 아들인 연조와의 관계, 오랜 연인 오휘와의 이별과 만남의 반복, 이사경의 아들인 연조와의 관계, 해변의 소박한 가게들, 부유물처럼 해변에 떠밀려오는 사람들......

 

아빠라는 근원에 대한 무지가 그녀를 투명인간 같은 삶으로 이끌었을까. 투명인간처럼 행하는 시크한 아이의 성장 이야기다. 태생적인 슬픔을 지닌, 태생의 존재를 들은 적 없는 아이의 무덤덤한 외로움이 더욱 깊은 슬픔을 느끼게 한다.

 

    

파도를 통해 전해지는 바다 소리, 피아노 음률이 들리는 소설이다.

피아노에 대한 몰입으로 사랑의 허기를 채우거나 바닷가 산책을 통해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이야기다. 모든 만남은 바닷가에서 이뤄지고 모든 헤어짐도 바닷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바닷가 옆에 있는 카페 해변의 가능성처럼, 소설에서는 사랑도 이별도 모두에게 열려 있는 세상이다.

 

매사가 기회의 여신이 주는 운이 필요한 법이다. 매사에 밀물과 썰물처럼 때가 맞아야 되는 법이다. 그리고 관계는 언제나 조금씩 변해간다. 삶이 원래 그런 거다.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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