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400. 모든 영광은 (황순원)
자책과 뒤틀림에서 아주 조금 움트는 희망이 보인다. 현실이 시궁창, 아니 지옥인데 작가는 순하고 선한 인간이 되어 독자들을 위한 보호막을 두르고 있다.
"저, 선생님, 사람을 죽이는 데는 무기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이 손가락 하나면 족하죠."
그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그 손 둘째손가락 하나를 곧게 펴 보이며, "이 손가락 하나루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어느 급소를 찔러서가 아닙니다. 먼발치루 그저 뒤통수를 가리키는 것으루 충분합니다. 충분하다마다요." (126)
모든 영광은 술에게, 그리고 다시 모든 영광은 지금 새로운 생활을 향해 어두운 계단 위에서 저렇듯 자기 신체의 한 부분을 닦달질하고 있는 저 가엾도록 착한 한 사람의 사내에게. (150)
135/400. 학 (황순원)
그 보호막은 진짜가 아닌줄 알면서도 현실을 잠깐, 동화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동료가 친구가 서로를 '손가락질' 하던 시대에, 이렇게 포승줄을 풀고, 사람 사냥 대신 학 사냥을 할 수 있을까. 실은 그 학도 진짜 사냥꾼이 오기 전에 풀어 날려보낸 순둥이들인데.
오랫만에 다시 읽는 작품인데도 첫 장면은 마치 외우고 있던 것처럼 매우 낯익었다. " 삼팔 접경의 이 북쪽 마을은 드높이 갠 가을 하늘 아래 한껏 고즈넉했다." 아,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야기의 아름다운 우정과 인간애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부질없이 금세 사라지는 동화였는데. 덕재는 아마 죽었을꺼야. 성삼이 손에 간 게 아니라면 성삼이도 친구 옆에 쓰러졌을 거고. ..... 묵념.
"얘, 우리 학 사냥이나 한번 하구 가자."
성삼이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덕재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데,
"내 이걸루 올가미를 만들어놀께 너 학을 몰아오너라."
포승줄을 풀어 쥐더니, 어느새 성삼이는 잡풀 새로 기는 걸음을 쳤다. (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