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400.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처음부터 장애물이 있던 책이다. 저자가 일본인이라니, 그런데 영국의 전통 있는 가문의 집사가 화자라니. '섬긴다'라는 말과 '주인님'이라는 말이 자꾸 걸려서 이야기 속으로 빨리 들어설 수가 없었다. 일본 출생의 영국 작가의 눈으로 제2차 대전중 벌어진 영국귀족의 집사 이야기를, 그 집사의 프로페셔널한 눈으로 돌이켜본 인생과 역사를 나는 어떤 눈으로 읽어야하나,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주 천천히 화자의 얼굴이 영국인, 그것도 '품위'있는 신사들의 신사라고 자부하는 깨끗한 오십대 남자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허당이다.

 

다른 이들이 다들 보는 사실을 이 사람만 못 보고 (혹은 못 본 체하고) 지나간다. 자신의 개인적 사무라고 미뤄두었던 아버지의 임종, 사랑스런 여인의 구애와 이별도 지나고 나서야, 아, 그때 내 가슴 속엔 어떤 감정이 있었던가 곰곰 생각해볼 뿐이다.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세계사의 축에 근접했었기에 자신도 벅찬 긍지를 느꼈다고 결론낸다. 하지만 그 역사의 축이 얼마나 잘못 돌아갔는지, 지금도 그는 인정하기 힘들다. 

 

이 답답하고 어이없지만, 겉모습만은 완벽한 귀족인 아저씨는 지난날을 돌아보며 처음 휴가에 나섰다. 주인을 위해선 아주 작은 불편함을 느낄 가능성도 이삼중으로 계산해서 발을 놀리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선 외출복도 장만하지 못했고, 자동차의 냉각수나 연료도 미리 챙기질 못한다. 그리고 남들에게서 받는 환대에 어쩔줄 몰라한다. 모른다. 이 남자의 동사는 바로 '모른다'로 입을 닫는 것일까. 책임을 지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없다'.

 

그러다 이 남자도 깨닫고, 알게되고, 가슴이 찢어지는 경험을 한다. 그는 자신이 실수했다, 고 후회의 말을 할 수도 없다. 그는 그저 충직한 하인으로 믿고 따랐을 뿐. 이제 그는 바쁜 일로 서둘러 자리를 뜨는 대신, 바로 서서 그 여인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가 울고 있지 않았을까). 하루 중 제일 좋은 저녁때, 전등이 들어오는 해변에서 하루쯤 더 머물까, 생각하는 이 허당, 혹은 허깨비 남자는 이제라도 '알게' 될까. 자신의 이름이 스티븐스 말고 그 앞에 퍼스트 네임도 있다는 걸. 격조있는 농담이 실은 아주 썰렁해서 웃기는 하지만 아주 재미있지는 않다는 걸. 그런데 묘하게 재미있는 이 소설이 그를 참 쓸쓸하게 그리고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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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5-04-07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리가 늘 잘 되어 있는 유부만두님의 리뷰!!

유부만두 2015-04-07 18:52   좋아요 0 | URL
늘 칭찬해주시는 아롬님!!

라로 2015-04-07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위에 글에는 댓글을 못 달아요????? 댓글 허용하지 않는다고???ㅠㅠ

유부만두 2015-04-07 18:53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 지금 고쳤으니 댓글 달아주셔요? ^^

북극곰 2015-07-01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엄청 좋아하는 책! 젊은 애들 연애이야기도 간질간질 달달해서 좋지만, 중년을 넘긴 이 사람의 연애는 그와는 비교할 수 없게 아주 가슴이 아리더라구요. ^^

유부만두 2015-07-04 15:38   좋아요 0 | URL
아, 북극곰 님께서도 이 책을 좋아하셨군요! 맞아요, 스티븐스 씨의 연애는 너무 쓸쓸해서 가슴이 아렸습니다.
 

144/400. Wild (Cheryl Strayed)

 

영화보다 더 솔직하게 저자의 밑바닥 생활과 생각을 보여준다. 영화 속 전남편 폴의 다정함도 많은 부분 의붓아버지 에디와 마약친구 조의 몫이었다. 그리고 엄마와의 특별한 관계를 다시 복기하고 응어리를 푸는 과정이 영화보다 더 설득력 있었다. 영어 문장도 그리 까다롭지 않아서 걱정할 것 보다는 잘 읽혔다. 젊은 남자들을 만나면 핡, 거리는 저자의 속마음은 귀엽기도 했지만 각 챕터마다 의도적으로 넣은 설정이 (아무리 사실이라고 저자가 강조했을지라도) 억지스럽다. 지지리 고생한 이야기인데 왜 읽게 되는지 신기하다. 발톱이 빠지고 피나고 산속에서 동물을, 낯선 놈을 만나서 떨면서, 이 무모한 여행을 해낸 그녀가 (아마 한비야도 비슷한 캐릭터일듯) 대단하다 싶기도했다. 난 동네 산책길도 왕복 3킬로미터가 한계인데. 책을 덮으면서 저자가 그 무거운 배낭 Monster에 넣었다던 쇼팽과 포크너의 소설은 나도 읽어보리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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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400.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라우라 에스키벨)

 

열두 장에 열두 가지 요리법과 인생이야기를 버무린 이 소설은 수십년 동안 적어도 다섯 대에 걸친 사랑과 열정에 대한 이야기다. 아들 없는 집안에서는 막내딸이 부모를 봉양해야하는 법이라니. 이런 멍청한 "전통" 때문에 티타는 열여덟이 되기 전에 첫사랑을 언니에게 빼앗기는 경험을 한다. 맛있게 만든 음식에도 작은 절차 상의 흠을 찾아서 딸을 구박하는 농장주 마마 엘레나는 모든 동화에 나오는 엄마/마녀/여자의 적은 여자 의 화신이다. 그러나.... 티타는 마마 엘레나의 손에서 벗어난 다음에도, 마마 엘레나의 죽음과 또 그 혼령의 사라짐에도 (삼단계의 소멸) 절대 자유롭지 않았다. 티타는 자기가 뭘 원하는지, 누구를 택해야 할 지 몰라서 계속 우왕좌왕이다. 심지어 임신인지 아닌지도 엄마의 유령이 결정해 주다니. 그러니 천하의 대인배 존도 속이 상해 어쩔 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선 목소리 큰 페드로가 이기는 걸까. 티타가 주도권을 잡는 순간은 그 절정의 환한 터널로 자기 '혼자' 들어설 때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 밖에 모르는 응석쟁이 페드로와 모든 게 엄마탓인 티타를 응원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티타의 아이덴디티는 자녀를 키우는 , 하지만 자기 속으로는 아이를 낳아본 적이 없는 니타였다. 뭐 이런 시시한 여주인공이라니. 차라리 난 몰라, 내 잘못 아니야. 내 껀 뺏기지 않을래, 라고 고집 부리는 거구의 로사우라 (혹은 마마 엘레나)가 더 주인공 스러웠다. 확실한 밉상이니까. 하지만 그들 보다 더 우위에서 호령하는 건 헤르트루디스. 장미향으로 폭발하고 집을 나가 혁명군의 지도자가 되는 맏언니. 그녀가 자유를 찾아 멕시코로 온 흑인의 후예, 자유연애의 증거라 더 멋지다. 하지만, 왜, 이런 근사한 캐릭터마저 집/거리, 요리/힘, 여자/남자, 식의 이분법에 묶어 놓았는지 아쉽다. 뜨겁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끝내 뭔가 빠진 느낌이었다. 이제 마르케스를 읽어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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뽈쥐의 독서일기 2015-04-03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래서 리뷰읽는 재미가 나요. 전 이 소설을 관능적인 마법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젤 나쁜 넘은 페드로고.. 마마고..티타가 불쌍해ㅠㅜ 이렇게요ㅎㅎ
신데렐라 이야기 안 좋아해서 드라마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실은 좋아했봐요. 아님 음식이야기만 있으면 뭐든 유해지는건지..ㅎㅎ 그나저나 저도 헤르트루디스 이야기가 넘 짧은 건 아쉬웠어요. 장교랑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장미가 어쩌고 하는 비유도 넘 좋았구요..ㅎㅎ

유부만두 2015-04-03 20:45   좋아요 0 | URL
ㅎㅎ 제가 너무 삐딱하게 읽었나요;;; 첫 두어장은 완전 푹 빠져서 읽었는데 티타가 영 철이 안들쟎아요. 음식 만드는 이야기 저도 정말 좋아하는데 티타가 너무 부엌데기 처럼 되버려서 속상했어요. ^^;;

뽈쥐의 독서일기 2015-04-03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아녀요. 유부만두님이 객관적이시라는 뜻이었어요.ㅎㅎ 음식에 대한 얘기랑 마법같은 이야기를 빼면 사실 거의 고전소설급의 주인공 편애가 화가 나죠.ㅎㅎ 저는 음식, 성애 묘사 같은 거에 아주 관대한 사람이라 편애를 하고 예쁘게 봤다가 유부만두님 리뷰보고 아 좀 웃기는 소설이긴 했지.. 떠올렸어요.ㅎㅎ 타인의 리뷰보는 재미가 이럴 때 정말 크지요.^^

유부만두 2015-04-03 21:16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제 리뷰도 엄청 주관적 애정 식도락 편중되었어요....그래도 이 소설은 저에겐 음식 마법 조미료 빼면 인물들은 기대보다 심심했나봐요...
 

142/400.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레이먼드 카버)

 

아무 문제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그 말을 믿고 싶었던 부모들. 그리고 다친 다른 아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그저 가만히 있었다는 다른 집 아이가 괜찮은지 확인하려는 부모들. 그들은 빵집 아저씨네서 따뜻한 시나몬 롤로 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대화를 가진 다음, 아침이 밝아오는 대로 뺑소니 차량 수배에 나설 것이다. 그리고 그 무책임하게 차창 밖으로 쓰러진 여덟살 짜리 꼬마를 바라만 보다 그 자리를 떠 버린 그 나쁜 놈을 찾아내서 정당한 법의 심판을 받게 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의 스커티는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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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400. 피리술사 (미야베 미유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지만 시대극은 영 읽기 불편해서, 이름도 복잡하고 이런저런 역사 관련어들이 헷갈리는데다 거북했기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옛이야기" 풍의 짧은 글을 읽고 싶어서 손에 들었다. 시시한 귀신 이야기 쯤으로 취급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흔한 '괴담'을 책으로 묶어내도 찾아 읽는 독자들이 생기는 이유는, 사건과 문장을,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심정을 호흡을 조절해 내가며 풀어놓는 미야베 미유키의 힘이다. (그게 바로 '요재지이' 와 이 책의 큰 차이점이다)

 

원한이 남아서 사람을 씹어 삼킨다, 는 피리술사 이야기는 공포스럽지만, 한강의 괴물처럼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다. 얼굴을 빌려주는 사내 이야기는 어떤가. 꿈마다 친구 집을 찾아가 술래잡기를 하는 꼬마, 그리고 아이의 수명을 지켜내는 어머니의 마음. 이상하게 귀신이며 혼령, 등 으스스한 존재들이 어깨 뒤로 다가올 듯도 했지만, 책을 덮고나면 마음은 따뜻해진다. 그러니 청자로 나선 당찬 아가씨 오치카도 위안을 얻겠지. 말하고 버리고, 듣고 버린다. 그런데 나는 읽고 버린다, 와는 조금 다른 독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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