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회는 빈민을 '위험한 계급'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렀고 그 대응으로서 빈민들을 추방하거나 가혹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는 빈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빈민 정책이 나타나게 되었다.(p368)... 새로운 해결 방식은 대단히 강압적이라는 특징을 띠었다. 빈민들을 파악하고 분류하는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위해서는 대개 중앙 집중적인 조치들을 시행했다... 또 근대 사회정책의 기본 방향은 노동의 강조였다. 노동을 통해 그것이 기본적인 매개가 되어 사회에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 근대사회의 기본원칙이 된 이상 그것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노동을 강제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었다... 권력 당국이 노동을 통해 빈민들을 단속하고 순치시켜 이들을 위험하지 않은 계급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야말로 근대사회의 중요한 특징인 것이다.(p369) <빈곤의 역사> 中


 브로니슬라프 게레멕 (Bronislaw Geremek, 1932 ~ 2008)은 <빈곤의 역사>에서 근대 사회의 특징을 중앙 권력 기구에 의한 빈민 감시와 노동을 통한 빈민 교화를 지적한다. 이러한 근대의 유산을 이어 받아 오늘날 우리는 가난한 이들이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할 수 밖에 없다고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Poor Economics: A Radical Rethinking of the Way to Fight Global Poverty >의 저자 아비지트 배너지 (Abhijit Banerjee,1961 ~ )와 에스테르 뒤플로 (Esther Duflo,1972 ~ ) 는 가난의 이유를 게으름이 아닌 '빈곤의 덫'에서 찾는다. 그리고, 현대 빈곤의 문제는 부족이 아닌 배분 문제임을 지적한다.


 소득이 늘어나면 더 많은 식량을 살 수 있다. 기본적인 신진대사에 필요한 열량보다 많은 열량을 섭취하는 사람은 체력이 좋아져 생존에 필요한 양 이상의 식량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이처럼 단순한 생물학적 메커니즘은 현재 소득과 미래 소득 사이에 S자형 관계를 형성한다. 소득이 적은 가난한 사람은 음식 섭취량이 충분치 않아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반면, 음식을 충분히 섭취한 사람은 체력이 좋아 힘든 일도 잘할 수 있다. 바로 여기서 빈곤의 덫이 생긴다. 그리고 이들의 소득 격차는 갈수록 커진다.(p44)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中

 

  아마르티아 쿠마르 센이 지적했듯 최근에 일어난 기근의 원인은 대부분 절대적인 식량 부족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식량의 부적절한 분배, 즉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굶주리는데도 다른 한쪽에서는 식량을 산더미처럼 쌓아논는 관행을 허용하는 제도적 실패 때문에 일어난다.(p53)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中


 그렇다면, 가난한 이들이 '빈곤의 덫'을 벗어나도록 자원을 배분하기 위한 효율적인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저자들은 <넛지 Nudge>에서 제시한 디폴트 옵션 default option에 주목한다.


 동태적 비일관성을 고려해 올바른 행동을 회피할 자유를 허용하는 동시에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최대한 열어주는 방향으로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 시카고대학교의 경제학교수 리처드 탈러 Richard Thaler와 법학 교수 캐스 선스타인 Cass Sunstein은 공저 <넛지 Nudge>에서 이러한 행동을 촉발하는 여러 가지 개입 방식을 권고한다. 핵심은 '디폴트 옵션 default option'이라는 개념이다. 디폴트 옵션이란 개인이 특정 행동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대다수 국민에게 가장 유익한 대안이 자동으로 선택되고, 개인이 특정 행동을 할 경우에는 그 대안을 기피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p103)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中


 <넛지>에서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경향을 고려하여 특정한 행동을 행하지 않을 경우 대상자들에게 가장 유리한 선택안을 디폴트 옵션으로 설정할 것을 제안한다. 마찬가지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최선의 정책이 사전에 고려되어 실시될 필요가 있음이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에서는 강조된다. 


 넛지는 선택 설계자가 취하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사람들에게 어떤 선택을 금지하거나 그들의 경제적 인센티브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고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그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넛지 형태의 간섭은 쉽게 피할 수 있는 동시에 그렇게 하는데 비용도 적게 들어야 한다. 넛지는 명령이나 지시가 아니다.(p21) <넛지> 中 


 지금까지 논의한 바를 토대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최소한의 노력을 요하는 옵션, 즉 최소 저항 경로(path of least resistance)를 취할 거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모든 요소들은, 주어진 선택에 디폴트 옵션이 있으면 그것이 자신에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많은 사람들이 결국 그것을 택한다고 예상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해당 디폴트 옵션이 암묵적으로든 노골적으로든 표준을, 심지어는 권고되는 행동 요령을 표상할 경우에는 이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동 경향, 즉 디폴트 옵션을 택하는 경향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p139) <넛지> 中


 그렇다면, 어떤 분야에서 '넛지'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에서는 예방보다 치료에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하는 의료비 지출 구조를 예를 든다. 이러한 경우 '치료'보다는 '예방'에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하는 디폴트 옵션은 가난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기 이전 행동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일 수 있다. 


 문제는 가난한 사람들이 건강에 돈을 얼마나 쓰느냐가 아니라 어디에 쓰느냐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개 비용이 적게 드는 '예방'보다 비용이 많이 드는 '치료'에 돈을 쓴다. (p82)... 가난한 사람들은 대체로 무상 의료 시스템을 이용하지 않는다. 우다이푸르의 가난한 사람들은 대부분 더 많은 비용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예방보다 치료를, 정부가 무상으로 제공하는 간호사와 의사의 진료보다 사설 개업의를 선호한다.(p83)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中


 또한,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에서는 넛지와 함께 국가 등 중앙권력기구의 적극적 시장 개입을 통해 기회불평등을 해소할 것을 제안한다. 소득의 양극화가 교육 기회의 불평등을 가져오고, 교육 기회의 불평등은 부와 빈곤의 세습을 낳기 때문에 이러한 악순환을 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부모의 소득이 교육 투자를 결정하는 핵심 요인이라면 부모가 부유한 아이는 재능이 뛰어나지 않아도 교육을 더 받고, 부모가 가난한 아이는 재능이 뛰어나도 교육을 받지 못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결국 교육 문제를 시장에만 맡겨둘 경우 모든 아이가 가정형편과 관계없이 자신의 능력에 따라 교육받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소득 격차를 완전히 해소할 수 없다면 공적 주체가 공급에 개입해 교육비 부담을 덜어줌으로써 모든 아이가 동등한 기회를 누리게 하는 것이 사회적 효율성에 근접하는 길이다.(p121)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中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에서는 가난을 개인의 문제를 바라보지 않고, '빈곤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사회적 장치(넛지, 시장 개입)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노력으로 모든 빈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저자들도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듯, 이것은 작은 출발에 불과하다. 


 소액금융은 가난한 사람이 장기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할 수 있도록 돕는 여러 방법 중 하나다. 자녀에게 보다 좋은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직업도 똑같은 효과를 낸다.(p278)... 그들은 여전히 가난하다. 단지 초기에 지급한 자산과 금융 지원이 서서히 선순환을 일으키고 있을 뿐이다. 어쨌든 그런 기회 덕분에 극빈자들이 자신의 힘겨운 삶을 책임지는 동시에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려운 첫걸음을 뗐다는 것이 중요하다.(p289)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中


그렇지만, 이 작은 발걸음이 엘로라 드르농쿠르(ellora derenoncourt)가 <애프터 피게티 After Piketty: The Agenda for Economics and Inequality>에서 말한 제도적 차별주의까지 폐지로까지 이어진다면, 신석기 혁명 이후 인류의 오랜 고민이었던 부의 불평등 문제도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이들이 2019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것은 이러한 작은 희망의 불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전 세계의 재분배정책은 그저 세계 부유세를 통해 초기 자원을 재분배하기보다는 피지배자 집단이 경제 성장의 결실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모종의 역사적 세력이 있음을 시민들이 인식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엘리트 권력의 지배를 받는 피지배자 집단이 많은 지역의 제도를 강화하고 개선하는 것은 여러 파급 효과를 가져온다.(p600)... 제도의 격차와 피지배자를 지배하는 제도적 특권이 확장되는 현상을 설명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초기 자원에 근거한 배상금은 불충분하고 일시적일 것이다. 꾸준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재분배 정책은 시민과 피지배자에게 보장돼야 할 경제적/정치적 권리가 확장된 개념으로, 제도적인 인종차별주의를 폐지하는 것이다.(p601) <애프터 피게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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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1-12 14: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만 보자면, 가난한 사람이 부유한 사람보다 더 합리적일 것 같아요. 부유한 사람은 돈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쓸 필요가 덜 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돈이 적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돈을 적게 쓰면서 효과가 더 클까, 를 고심하게 될 것 같아요. 예방과 치료 면에서는 안타까운 현실이네요.

새해 인사 하러 왔습니다. 새해에 좋은 일 가득하시길. 건필을 기원합니다.

겨울호랑이 2020-01-12 20:04   좋아요 2 | URL
페크님 말씀처럼 가난한 이들이 합리적인 것은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극한 상황에서 생활을 위해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이들에게 가르침보다 정확한 사실 제공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길을 결정할 수 있는 여건 조성이 필요하다 여겨집니다. 페크님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 한 해도 잘 부탁 드립니다.^^:)

2020-01-12 14: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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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2 20: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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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혈자리 이야기 - 인문학으로 본 내 몸을 소통시키는 단추
최성진 지음 / 좋은땅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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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자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의사 선생님처럼 의학공부를 엄청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수치를 매일 바라보면서 애만 태우는 것도 아니며, 퇴원해 숙소로 돌아가면 침돌이의 원기 회복을 도울 수 있는 전통의술인 침과 소쿠리 뜸을 열심히 정성스럽게 해주는 일밖에 없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는 계기만 되었다.(p62)

얼마전 이웃분으로부터 새해 선물로 <나의 이야기, 혈자리 이야기>를 선물받았다. 생활 수기와 침술 관련한 생활 지식이 담긴 책은 쉽게 읽히면서도 잔잔하게 다가온다. 아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아버지의 마음.

책에는 어린 나이에 암으로 투병해야 하는 아들과 이를 지켜봐야 하는 아빠의 마음이 담겨있다. 얼마전 암으로 가까운 가족을 떠나보내야 했기에, 책에 담긴 아픈 이를 지켜봐야하는 마음이 낯설지 않다. 아픈 가족이 겪는 무력감. 환자가 겪는 고통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어쩌지 못하는 안타까움의 크기 역시 적지 않음을 담담하게 적힌 문장을 통해 느낀다.

침돌이가 입원한 병원은 최고의 인재들이 모이는 대학병원이다. 그곳에 입원을 했으니 모든 것은 서양의학 기준으로 만들어진 치료법에 따라야 한다. 당연한 일이다.(p65)

<나의 이야기, 혈자리 이야기>가 잔잔하게 다가오는 다른 이유는 저자의 열린 마음이 아닐까. 책에는 제목 그대로 침술을 전공한 저자의 이야기가 담겨있지만, 저자는 동양의학이 최고다라는 방식의 접근을 하지 않는다. 상황에 맞게 아들의 간암을 수술로 치료하는 방법을 선택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아들을 간호하는 아빠의 모습은 만용이 아닌 용기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침술이나 지압은 혈자리 자극이다. 침술은 혈자리에 침을 놓는 것이고, 지압은 혈자리를 손가락으로 누르는 것이다.(p116)

본문에는 혈자리와 관련된 내용도 있지만, 많은 분량은 아니다. 아마도 침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전문적인 내용을 풀어 놓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저자의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혈자리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보다는 혈자리를 통해 생활 건강을 지키자는 저자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될 듯 하다.

이런 면에서 <나의 이야기, 혈자리 이야기>는 지식을 주는 책이 아니라, 부모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책이라 생각된다. 모처럼 딱딱한 지식이 아닌 부드러워지는 경험을 선물해 주신 이웃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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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0 17: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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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0 21: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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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 집단적 운명과 전체적 움직임 - 상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
페르낭 브로델 지음, 남종국.윤은주 옮김 / 까치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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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증가 없이 그 모든 영광의 역사가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인구혁명은 ˝가격혁명˝보다 더 중요했으며, 어떻게 이 사건이 아메리카의 은이 대량으로 유입되기 전에 일어날 수 있었는가를 설명해 준다. 인구 증가야말로 인간이 능력 있는 일꾼이었다가 점차 큰 부담으로 바뀌는 16세기의 승리와 재앙을 만들었다.(p72)

13세기의 경제적 도약은 16세기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진정을 유발시켰고, 정치적 대격변을 예비했다. 그후의 경제적인 후퇴는 도처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다음 세기 내내 계속될 이러한 파괴는 장지적은 경제적 침체 국면에 의한 것이었다. ˝중세의 가을˝은 독일의 신성 로마 제국을 포함하여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그라나다 왕국에 이르기까지 연약한 나무들을 베어버렸다. 이 모든 것이 완만하고 자연스러운 하나의 과정이다. 대체로 15세기 중반경 경기 회복의 징후가 분명해지자, 파괴와 혁신과 재생 과정이 다시 시작되었다.(p411)

16세기에 발생한 갑작스러운 인구 증가는 부양능력의 증대를 요구했다. 16세기 지중해 세계는 이러한 부양능력의 증대 요구에 대해 삼림파괴로 응답하게 되었고, 이는 에너지 수단의 변화를 가져온다. 결국, 이러한 상황는 나무에서 석탄으로의 에너지 변환은 진보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한 것이라는 「엔트로피」제러미 리프킨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60일 동안에 일주가 가능한 지중해 세계는 오랫동안 아주 간헐적으로만 다른 세계와 접촉했으며, 특히 극동지역과는 거의 아무런 연계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왔다.(p35)

상품 순환의 지체는 이 세계의 고질적인 병폐였다. 상품, 화폐, 환어음이 사방으로 움직이고, 서로 스치고 마주치고, 서로를 기다려야 했다. 모든 상거래 중심지는 상품, 화폐, 환어음이 만들어 내는 다각적이고 변화무쌍한 콩종튀르를 끊임없이 경험했다. 그러나 느리게 순환하는 상품, 화폐, 환어음은 오랫동안 길 위에 머물러 있었다.(p42)

공증인 문서에 바탕을 둔 계보학적 연구를 통해서 결혼, 친척관계, 우정, 결탁이 암스테르담으로부터 리스본, 베네치아, 포르투갈령 인도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밝혀냈다... 바로 이러한 인적 네트워크를 이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 지중해가 북유럽과 달리 곧 출현하게 될 주식회사와 같은 대규모 회사가 필요하지 않았던 이유가 될 것이다.(p124)

그렇지만,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지중해 세계는 폐쇄적인 자급경제 체제였다. 새로운 체제를 수용할 여건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지중해 세계의 쇠퇴는 예견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한 에스파냐 제국은 두 갈래 선택지에 놓인다. 동지중해의 새로운 제국 투르크와 일전을 벌여 지중해 패권을 장악할 것인가, 아니면 제국의 보화가 모이는 저지대국가(네덜란드)의 부를 제국의 손아래 둘 것인가.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이제 더이상 지중해는 유럽세계의 중심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1571년 레판토 해전과 1588년 칼레 해전(아르마다 해전)은 이러한 상황에서 에스파냐 제국의 선택을 보여주는 발자취가 된다...

16세기 베네치아는 15세기보다 더 부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을 중요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지중해의 중심이 아니었다. 지중해의 주요 활동 영역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면서, 오랫동안 부의 핵심 분배자 역할을 했던 동쪽 해안 대신 서쪽 해안이 확실히 유리해졌기 때문이다.(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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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9 15: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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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9 1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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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0 18: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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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0 21: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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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척 길벗 어린이 문학 12
우메다 슌사코 글, 우메다 요시코 그림, 송영숙 옮김 / 길벗어린이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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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초등학교의 이지메(집단따돌림) 이야기. 한 학급에서 약한 아이 ‘돈짱‘이 당하는 괴롭힘과 이를 지켜보는 ‘나‘. ‘나‘는 돈짱이 겪는 어려움을 알지만, 자신 또한 괴롭힘을 당할 수 있기에 이를 외면한다. 자신이 괴롭힘을 당할 때까지.

「모르는 척」은 학교폭력이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려준다. 집단따돌림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교사와 아이들의 문제를 귀기울이지 않는 부모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학교폭력이 사회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을 읽고난 후 아이에게 무엇을 알려줘야 할까를 잠시 생각해 본다. 친구를 괴롭혀서는 안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가 이 책의 결론이자 학교폭력의 답이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 ‘나‘도 엄밀하게는 돈짱을 따돌림하지 않았지만,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나‘가 괴롭힘을 목격했을 때 약자의 편에 서지 않았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우리는 아이들에게 친구가 괴롭힘을 당할 때 그것을 그냥 바라봐서는 안돤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선뜻 그런 이야기가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내 자신이 사회에서 약자를 방관하는 다 자란 ‘나‘이기 때문 아닐까.

돌이켜보면 나는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내 주변의 약자를 외면하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런 우리가 만든 구조에서 학교 폭력과 같은 사회 폭력이 태어났기에, 내가 아이에게 약자 편에 서라는 말을 선뜻 못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약자의 괴롭힘에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그 결과로 우리의 아이들 역시 폭력의 희생양이 될 수 있으며, 결국은 우리 자신이 희생될 차례가 되었을 때는 늦는다는 ‘순망치한‘의 고사를 떠올리며 책을 덮는다.

「모르는 척」에는 학교 폭력에 대한 해결책은 던져 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런 열린 결말을 통해 한 명의 시민으로, 아이를 둔 아빠로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담담하게 제시한 좋은 책이라 생각하며 리뷰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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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9 15: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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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9 16: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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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0 18: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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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1 16: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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