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집>은 국제연맹 제출을, <혈사>는 중국인들과의 독립운동 제휴를, <사략 상편>은 <사료집>을 계승해 이후의 독립운동사 서술을 각각 목표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사료집>과 <사략 상편>은 안창호와 김병조라는 인물을 통해 일정한 연속성을 강하게 지녔고, '외교독립론'적인 입장에 기반해 독립운동사를 서술했다. 그에 비해 박은식의 <혈사>는 비(非)미국중심주의를 표방하며 '무장투쟁론'적인 입장에서 쓰였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세 역사서가 궁극적으로 대항했던 것은 일제가 생산해내고 있는 3.1운동상이었다... <사료집>과 <혈사>, <사략 상편>은 어느 한 저서가 압도적인 객관성을 지니기보다는 상호보완적인 성격을 지닌 동시대성의 저작들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1 메타역사>, p53


  metahistory 메타역사. 역사에 관한 역사가 <3.1운동 100년 : 1 메타역사>의 주제다. 우리는 <3.1운동 100년사>의 첫 번째 책에서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들을 만나게 된다.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사료(史料)도 누구를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는 것을 보면서 사관(史觀)에 따라 다르게 강조점이 찍히고, 왜곡된 역사상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역사에 대한 기억은 3.1항쟁을 마르크스(Marx) 사상 관점에서 해석한 관점 - 경제학자 안병직과 해방 직후 사회주의자들 - 이다. 역사를 계급투쟁의 산물로, 필연적 단계 이행으로 이해한 이들의 관점에서 3.1항쟁은 실패한 투쟁에 불과했다.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제반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난 혁명이라는 공통된 인식을 갖는 이들의 관점은 '정형화된 역사'와 '유물론 사관'이라는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일제 시대에 본격적으로 갖추어진 SOC만이 근대화의 증거이고, 발전된 역사의 과정에 있다는 인식으로 흐르고, 결과적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이 태어나게 된 것은 당연한 흐름이 아니었을까. 몇 년 전 논란의 베스트셀러 <반일종족주의>의 사상의 뿌리가 그토록 싫어하는 '좌파'사상이라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경제학자 안병직은 남한에서 3.1운동의 원인을 계급론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를 했다. 안병직은 중국에서 개발된 민족자본론을 이용하여 3.1운동 참여 세력을 예속자본가 중 식민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손병희 등 소극적 친일파, 중소지주 및 상인 등 민족 자본가, 노동자/농민계층 등으로 분류하고 그들을 운동에 참여하게 된 지도 사상을 각각 '독립청원', '독립시위' , '독립쟁취'라고 규정했다. 이 중 '민족 대표'는 그 투항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3.1운동의 시작 단계에 운동을 포기했고, 그 이후는 각 지방의 지식인, 학생, 유력자에 의해 운동이 독자적으로 추진되었다고 서술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1 메타역사>, p159


 해방 직후 사회주의자들은 3.1운동을 '실패한 운동'으로 규정했다. 특히 전위조직의 부재와 토지개혁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던 점을 3.1운동이 실패한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강조했다. 3.1운동은 반제투쟁 외에도 토지개혁이라는 반봉건투쟁이 병행되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공산당(남조선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자들에게 있어) 3.1운동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전위당의 필요와 토지문제의 농민적 해결이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1 메타역사>, p75


 <3.1운동 100년 : 1 메타역사> 속에서 우리는 다른 하나의 왜곡된 기억을 발견하게 된다. 임시정부의 정통성 문제와 건국절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3.1운동 100년 : 1 메타역사> 속에서 우리는 3.1혁명을 계승한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이 우파사상이며,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의 주장임을 확인하게 된다. 초대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이 아닌 '계승'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계승자'를 '건국자'로 만들고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좌파의 논리를 받아들이면서, '종북 좌파'로 매도하는 이들의 주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이것 또한 왜곡된 기억이 낳은 갈등이 아닐까... 


 '3.1운동에 의해 건립된 임시정부'라는 인식을 기반으로 하는 임정 법통성은 임시정부 시절부터 우파의 논리로 작동했다. 좌파가 임시정부 해체를 주장할 때마다 우파는 임정 법통성을 방어논리로 구사했다... 이후 군사정부에 의해 삭제되었던 임정 법통성은 1987년 개헌을 통해 다시 헌법 전문에 들어갔다. 북한과 체제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정부 수립의 정통성을 임정 법통성에서 찾고자 했던 정치세력은 별다른 갈등 없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헌법 전문에 부활시켰다. 이처럼 임정 법통성이 우파와 반공주의의 합작이라는 점은 해방 정국부터 일관된 것이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1 메타역사>, p108


 이승만 정부는 정부 수립 후 1949년 첫 3.1절 기념사에서 3.1운동으로 발휘된 독립의 정신이 임시정부로 계승되어 마침내 '대한민국주국(大韓民國主國)'이 탄생했다고 했다. 정부 수립의 정통성과 임시정부 계승의 정신을 표방한 것은 그 후 역대 정부에서도 공통적으로 이어졌다... 이승만은 집권 후 첫 번째 기념사에서 3.1운동의 정신이 '반공의 3.1정신'으로 부활할 것을 주장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1 메타역사>, p121


 

책을 읽다보면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읽어야 할 책들이 쏟아짐을 느낀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 식민지 근대화론과 관련하여 이영훈의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 후기> vs 강만길의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을 담아둔다. 이에 더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3월호에 실린 램지어 교수의 주장에 대한 비판의 연장선상에서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vs  고은광순외 <제국의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도 함께 담아둔다... 서로 다른 역사의 기억은  어떻게 우리를 바꾸어 왔는가. 역사의 힘에 대해 생각하면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기억이 구체화되어 있는 모든 장소들은 종교적, 정치적, 상징적 성격과 아울러 역사 및 족보 편찬의 성격을 띠기 마련이다. 그 기억의 주요한 측면들이 '유산(heritage)' 이라는 기호(記號) 아래 재편되어 나타나는 것은, 그런 기억이 펼쳐지는 바로 그 시대에 그것 자체가 스스로 시대를 초월한 하나의 의례처럼 표현되는 것에 관심을 쏟으며, 시간적으로 유한한 자신의 흔적을 초시간성 또는 초자연성의 낙인으로써 확증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 기억 속에는 아직 민족은 없지만 민족적 신성성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것은 이후에 나타난 민족적 기억의 온갖 형태들에 그러한 성격을 물려줄 것이며, 또 그런 신성성이 그 기억에 영속적인 정당성을 부여한다. _ 피에르 노라 외, <기억의 장소 2 : 민족>, p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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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1-03-22 22: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사와 기억이라면, 쑨꺼 선생의 <아시아라는 사유공간> 중 ‘중일전쟁- 감정과 기억의 구도‘, 쑹녠선의 <동아시아를 발견하다>, 정두희 등이 참여한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김시덕 <일본의 대외 전쟁>도 추천합니다..ㅎㅎ

겨울호랑이 2021-03-23 06:12   좋아요 0 | URL
^^:) 김민우님 감사합니다. 평소 역사와 관련해서 많은 책을 읽으시는 김민우님께서 추천하시는 도서라 믿고 읽을 수 있겠네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3 - 근대적 / 근대성, 근대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3
한스 울리히 굼브레히트 지음, 원석영 옮김 / 푸른역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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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세기들의 진행에서 그때그때 현재와 고대와의 관계가 변한다. 뛰어넘을 수 없는 고대인들의 우수성에 대한 의식을 여전히 가지고 있던 르네상스 시대 초기에는 고대인들에 대한 모방을 추천한 반면, 그 이후에는 "모방 imitatio"이라는 원리를 "경쟁 aemulatio"이라는 원리가 대신했다. 이와 함께 그리스와 로마 문화의 전성기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이, 나아가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3 : 근대적/근대성, 근대>, p24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개념사 사전 13번째 주제는 근대(Modern)다. 코젤렉에 의하면 '근대'는 '현재 gegenwartig', '새로운 neu', '일시적 vorubergehend'라는 대략 세 가지 의미를 가진 단어다. 얼핏 보면 큰 연관없는 의미지만, 개념사를 따라가다보면 '근대'의 의미영역 확장을 이해할 수 있다. 영광스러운 고대 그리스 문화를 기준으로 르네상스(Renissance)의 '근대'가 과거의 구분되는 시점을 의미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현재'가 된다. 또한, 과거는 이미 지난 것이라는 이미지를 가지면서 찰나의 '근대'는 '새로운'이라는 의미를 추가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과거가 오랜 기간의 축적이라는 면에서 '영원한 永遠 ewig'을 가져가면서, 이와 대립되는 '일시적'이 근대 안에 들어오게 된다. 


 일시적인 다양한 이상들에 대한 구상을 담지하고 있는 근대성 modernite 개념에는 이제 더 이상 과거의 본질로서 '고대 antiquite'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불멸적인 것만이 대립된다. 근대적인 것 Das Moderne과 영원이라는 두 원리는 "아름다움의 이중적인 본성" 속에서 서로를 보완한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3 : 근대적/근대성, 근대>, p52


 다만, 개인적으로 '현재'와 '일시적'의 차이는 미묘하게 다르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가 있다. 니체 이전 '과거'가 고대 그리스라는 '절대 과거'라면, 니체 이후의 과거는 개별 현재의 반대로서'상대 과거'가 된다. 절대 과거에서 '영원'은 아주 먼 옛날(long long time ago)가 되겠지만, 상대 과거에서 '영원'은 '지금 이순간'의 미분값의 합(合)이라는 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른 말로, 니체 이전의 idea가 고대 그리스라면, 니체 이후의 idea는 진보하는 역사의 최상(最上)이라고 생각된다. 개인의 생각이라 부족함이 있겠지만, 생각없이 사용해왔던 '근대'의 의미를 되새겨봤다는 점을 작은 성과로 하고, 책을 덮는다...


 유럽 문화의 데카당스에 대한 니체 Nietsche의 이론은 근대에 지금까지 인용되었던 텍스트들과는 전혀 다른 위상을 부여한다. 그 텍스트들은 그리스를 척도로 간주하지 않고, 각각의 시대에 바로 이전의 국가 고전주의를 척도로 간주했고, 경멸된 근대를 새로운 인간상을 통해 극복하는 대신, 그렇게 추정된 고전주의 국가 이상의 보전을 선전했다... 니체는 "평균화, 민주주의, '근대적'이념들에로의 전이"는 1871년의 "제국의 정초"와 함께 독일에서도 종결되었다고 보았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3 : 근대적/근대성, 근대>, p64


 모더니즘의 다양한 대변자들에 의해 특징적으로 거론되는 원리들을 나열할 경우, 우리는 통일된 독트린보다는 19세기의 예술적, 철학적, 정치적 이론들을 발견하게 된다... 모더니즘에게 내외적인 분쟁을 가져오는 방향 설정의 차이에 직면해서, 아직 설계되어야 할 현재의 시작에 서있다는 의식만이 공통적인 자기 이해의 토대로 남아있었다. "우리는 두 세계의 경계선에 서 있다. 우리가 이루는 것은 아직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한, 결코 알아챌 수 없는 미래의 위대함에 대한 준비에 불과하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3 : 근대적/근대성, 근대>,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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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3-21 2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최근에 니체에 대해 보면서 아 니체가 진짜 근대를 넘어 현대 철학의 시조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잠시 했는데, 이런 생각을 누군가는 저렇게 확고한 개념으로 정의했군요. ^^

겨울호랑이 2021-03-22 01:14   좋아요 0 | URL
^^:) 저는 니체의 사망연도(1900년)을 생각할 때마다 ‘최후의 근대인‘이라 생각했는데, 바람돌이님께서는 그의 사상을 보시고 ‘최초의 현대인‘이라 생각하셨군요. 바람돌이님의 말씀을 들으니, 코젤렉의 개념사 시리즈가 참 잘 짜여진 시리즈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윤리학 논고 대우고전총서 53
존 스튜어트 밀 지음, 박상혁 옮김 / 아카넷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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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의 윤리학 논고>에 실린 세 편의 에세이 중 <벤담>, <콜리지>는 두 편의 글이면서 하나의 구조를 만든다. <벤담>을 정(正)으로, <콜리지>를 반(反)으로 위치시킨 변증법(변 스튜어트 밀의 윤리학 논고>에 실린 세 편의 에세이 중 <벤담>, <콜리지>는 두 편의 글이면서 하나의 구조를 만든다. <벤담>을 정(正)으로, <콜리지>를 반(反)으로 위치시킨 변증법(辨證法)의 구조 안에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밀의 사상을 합(合)의 자리로 인식하게 된다. 원래 <존 스튜어트 밀 선집>을 정리할 계획이었으나, 그보다 서문 격으로 <존 스튜어트 밀의 윤리학 논고>를 간략하게 언급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일단 먼저 읽은 책을 정리한 한 후가 되겠지만...

밀은 진보주의자로서 벤담이 기존에 존재하는 것들에 의문을 제시하는 방법을, 보수주의자로서 콜리지가 기존에 존재하는 것들의 의미와 그것이 원래 실현하고자 했던 이념이 무엇이었는가를 묻고 그 이념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질문하게 했다고 밝히고 있다.(p265)... 밀은 벤담과 같이 진보주의 진영에 속한다고 밝히면서, 밀은 이 두 학파를 설득시키기 위해 벤담이 주장하는 진리가 단지 절반의 진리라는 것을, 그리고 콜리지가 중요한 나머지 절반의 진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려 한다._ 존 스튜어트 밀, <존 스튜어트 밀의 윤리학 논고> 해제, p266

밀에 의하면 자연의 틀은 그 전체로 보았을 때 인간이나 다른 유정적 존재들의 선을 주된 목적으로 해서 디자인된 것으로 볼 수 없다._ 존 스튜어트 밀, <존 스튜어트 밀의 윤리학 논고> 해제,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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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우리가 이런 식으로 정부의 권리와 권력(jus et potestas imperii)을 매우 큰 것으로 파악한다고 할지라도, 정부의 권리와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질 수 없다. 나는 이미 이 사실을 충분히 분명하게 밝혔다고 생각한다.... 이성과 경험은 국가의 보존은 무엇보다도 먼저 신민의 충성과 덕 그리고 명령 수행에 있어서 한결같은 마음에 가장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그러나 그들에게 충성과 덕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게 방법은 쉽게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지배자나 피지배자나 인간들이며 그들은 노동(labor)보다 욕망(libido)을 추구하기 때문이다.(p360)...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어떤 기만도 남지 않게 국가를 구성하고, 모든 사람들 각자의 기질이 어떻든지 간에 모든 사람들이 사적권리보다 공적 권리를 우선시하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할 과제이며 여기에서 해야할 일이다._B.스피노자, <신학-정치론>,p361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Benedictus de Spinoza,1632 ~ 1677)의 <신학-정치론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를 읽던 중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개인과 공동체 모두 소중한 존재이고, 자유를 비롯한 이들의 이익과 권리가 상호 충돌할 때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 잠시 이야기를 돌려 칸토어(Georg Ferdinand Ludwig Philipp Cantor, 1845~1918)의 집합론을 살펴보자. 칸토어는 집합론에서 일대일 대응을 통해 두 무한 집합의 크기가 다를 수 있음을 증명했다.


 집합론을 처음 연구한 사람은 칸토어로, 1874년에 그는 대수적 수(algebraic number)보다 실수가 더 많음을 보였다. 이는 두 무한 집합의 크기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었고, 더 나아가 초월수의 존재를 새롭게 보인 것이었다... 대수적 수와 실수가 모두 무한히 많은데도 실수가 대수적 수보다 '많다'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칸토어는 두 집합 A와 B 사이에 전단사함수(bijection)가 존재하면 그들의 크기, 즉 "기수(cardinality)가 같다"라고 정의했다. 이는 A의 원소와 B의 원소 사이에 일대일대응(one-to-one correspondence)이 있다는 뜻이다. 만일 A와 B 사이에 전단사함수가 존재하지 않고 A와 B의 부분집합 사이에 전단사함수가 있으면 A는 B보다 기수가 작다라고 한다. 결국 칸토어가 보인 것은 모든 대수적 수의 집합의 기수가 모든 실수의 집합의 기수보다 작다는 것이다._ 티모시 가워드 외, <Mathematics 1>, p1013


 칸토어의 설명이 다소 와닿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이 부분에 대해 보다 대중적으로 친숙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의 설명을 빌려보자. <수리철학의 기초 Introduction to Mathematical Philosophy>에서 러셀은 수열의 순서를 바꾸고, 수열수 비교를 통해 크기가 다른 무한 집합의 이야기를 쉽게 설명한다. 


  먼저 보기를 들어 설명하자. 다음의 수열로부터 출발해 보자.   1,2,3,4, ..., n, ... 

 이 수열은 가장 작은 무한수열수, 즉 칸토어가 w라고 부른 수열수를 가지고 있다. 지금 최초라 나타나는 짝수를 맨 마지막으로 옮기는 조작을 순차적으로 되풀이 해 이 수열을 띄엄띄엄 드물게 했다고 하자. 그러면 다음과 같은 수열을 얻을 수 있다. 1,3,5,7,...2n+1... 2,4,6,8... 2n . 이 수열의 수열수는 2w다. 


 여기에서 두 수열 1,2,3,4.... , n과 1,3,4,5,..., n+1,..., 2을 비교해 보면 첫째 수열은 둘째 수열에서 최후의 항, 즉 2를 제외한 부분부열과 대등하지만, 둘째 수열은 첫째 수열의 어떠한 부분수열과도 대등하지 않다. 이는 첫째 수열의 수열수가 w라고 했을 때, 둘째 수열의 수열수는 w+1로서 정의에 의해 둘째 수열이 첫째 수열보다 크다. _러셀, <수리철학의 기초>,p103


 두 무한 집합이 크기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잘 설명되지만, 개인적으로는 러셀의 설명 방식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가치가 충돌했을 때의 가치 판단의 기준을 세우게 된다. 러셀은 책에서 무한 집합에서 교환 법칙이 성립하지 않음을 말한다. 즉, 1+w와 w+1은 다르다는 것이다. 연장선상에서, 우리가 개인과 공동체의 이익과 권리가 충돌할 때 이는 종합적인 판단이 아닌, 사안별 접근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하나의 항을 수열의 마지막이 아닌 최초에 더하면 그것 또한 수열이므로 1+w=w이다. 따라서 1+w=w이다. 따라서 1+w는 w+1과 같지 않다. 이는 관계에 대한 산술 전체에 통용되는 성질이다._러셀, <수리철학의 기초>,p104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관점에 따라 어떨 때는 시장 경제의 자유를, 다른 때는 국민 정서를 언급하면서 다른 기준을 적용하며 비판을 일삼는 일부의 행태가 옳다는 것이 아니다. 사안 별로 개인과 이익의 상충점을 소거해가면서 결과적으로 일대일 대응이 될 수 없는 남는 부분수열이 어느 집합에 속하는지를 보다 납득할 기준(이 기준은 사회 전체의 합의가 필요하겠지만)에서 판단되면 좋을 것이다. 다만, 숫자로 표현되는 수학의 세계와 사회과학의 세계는 다르기에 쉽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다소 장황했지만, 이러한 생각이 시작된 시작점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 monde diplomatique>3월호에 실린 "분열을 팔아야 먹고 사는 언론"의 기사를 읽고서였다. 이와 연관해서 배리 글래스너(Barry Glassner)의 <공포의 문화 The Culture of Fear: Why Americans Are Afraid of the Wrong Things>를 읽으며, 언론이 어떻게 공포를 조장했는가를 살폈고 여기에서 다시 스피노자로 넘어가게 된 것이었다. <공포의 문화>에서 <신학-정치론>으로 넘어가게 된 것은 지나친 비약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본문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실로 대중의 변덕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대중에 대해서 거의 절망한다. 왜냐하면 대중은 이성이 아니라 오직 감정에 지배당하기 때문이며, 대중은 모든 것에 달려들고 탐욕이나 사치로 인해서 쉽게 타락한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며, 모든 것을 자기의 기질에 따라서 이끌어 가고자 한다._B.스피노자, <신학-정치론>,p360


 <공포의 문화>는 조만간 리뷰로 정리하도록 하고, <신학-정치론>은 스피노자 철학을 쉽게 설명한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와 함께 페이퍼에서 다루는 것으로 하며, 글을 마무리하자...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철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손실은 사회화되고, 이윤은 사유화된다는 것이다.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 monde diplomatique> 3월호 -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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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03-20 1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맘에 크게 와닿는 글이 넘 많습니다. ^^
손실은 사회화되고 이윤은 사유화 된다는 말은 넘 절감되고 멋입니다. ^^

개인과 공동체 이익이 서로 충돌할 때 종합적 판단이 아닌 사안별로 접근해야 한다는 말씀도 크게 맘에 와닿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큰 방향에서 어긋나면 각 개별 사항을 흔히 다르게 대우하는 상황이 넘 많아 좀 아쉽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1-03-20 18:35   좋아요 1 | URL
이번 페이퍼에서 많은 내용을 퍼와서 북다이제스터님께서 더 공감되셨으리라 생각해 봅니다.ㅋ 감사합니다. 사실, 물리의 법칙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자연과학과는 달리 사람 심리가 추가 변수가 들어간 사회과학은 예외 사항이 많음을 느낍니다. 그게 사회과학의 매력이기도 하겠지만요.. ^^:)

초란공 2021-03-20 2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세요^^ 잘 읽었습니다. 디플로마티크의 마지막 인용문이 한번 더 머리를 치네요^^;;

겨울호랑이 2021-03-20 22:26   좋아요 1 | URL
에고 아닙니다... 그냥 떠오르는 생각을 두서없이 썼네요. 초란공님 감사합니다! ^^:)

그레이스 2021-03-20 2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치에서 자신의 세를 불리는 방법이 분열이지요. 실제로 불리했던 후보나 정당이 케케묵은 이슈를 들고 나와도 그 아래 세력이 형성되는 것을 흔히 볼수 있습니다.
양분된 의견중 하나를 자신의 진영을 대표하는것처럼 주장하는 쪽에 이용당하지 않고 사안별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3-20 23:35   좋아요 1 | URL
동감입니다. 그레이스님 말씀처럼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분열을 많이 보게됩니다. 특히, 자신이 일정 집단을 대표한다는 생각이 믿음으로 나타났을 때, 갈등은 파국으로 이끌고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감이 퍼지는 악순환이 이루어지는 둣합니다...
 
3.1운동 100년 5 - 사상과 문화 3.1운동 100주년 총서 5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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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초에 신채호는 잡지 <천고 天鼓>에 실은 글에서 "우리는 평화행복을 기구하는 바이지만, 강적 제거와 동양의 평안 도모는 '유혈' 두 글자를 떠나서는 이뤄낼 수가 없다... 적과 혈전을 벌일 것을 마음에 깊이 새기어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여, 혈전을 통해서만 일제 타도와 동양평화의 길트기가 가능하다고 역설한 바 있다.(p42)... 한용운은 인간에 대한 종교적 성찰에 바탕을 두고 인간 생명의 존립 조건으로서 '평화'를 표상했다. 즉, 인간다운 행복한 삶은 평화가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평화를 지켜야 하며,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실천의지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것은 생명 있는 인간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_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 p75

3.1 항쟁은 비폭력 저항 활동이었는가. <3.1운동 100년 : 5 시상과 문화>는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알려진 3.1 항쟁의 뒷면을 보여준다. 독립 항쟁의 방법론에서 서로 다른 인식을 가진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1880 ~ 1936)과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 ~ 1944)처럼 3.1 항쟁안에는 여러 층의 다른 성격이 저항이 있었음을 우리는 확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서로 다른 목소리가 한데 어울어져 식민통치의 성격을 변화시킴으로써 새로운 전기(轉機)를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3.1 항쟁의 의의 중 하나를 발견한다.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 에서는 1919년을 전후하여 3.1항쟁을 만들어낸 시대 정신과 이를 공유했던 당대의 문화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영원히 '동포'가 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인종론의 틀을 견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는 데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약점을 폭로한 것이 바로 3.1운동이었다... 어쨌든 일본은 인종이라는 틀을 유지하면서도 조선인을 민족으로 '동화'시키는 전망을 갖지 못한 채 '문화정치'로 돌입했다. 그리고 민족 간의 차별이 온존되면서 오히려 조선인의 민족의식이 확대되어 갔다._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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