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산 국가(家産國家, patrimonial state)는 막스 베버(Max Weber)의 사회학에서 국가 체제를 분석할 때 등장하는 중심 개념 중 하나다. 베버에 의하면, 가산 국가란 가부장제하의 가정(oikos)을 확대한 개념이다... 베버에 따르면 가산 국가와 가장 잘 어울리는 경제 체제는 "특권 체제(liturgic governance)"다. 특권 체제란 특정 집단에게 세금을 부과하여 재화와 용역으로 세금을 납부하도록 하는 대신, 그 대가로 특정 집단이 추구하는 경제적 목표에 걸맞는 독점권을 부여하는 방식이다.(p43)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여기에서 말하는 자본주의란 서구에 특수한 근대적인 합리적 기업의 자본주의지, 3천 년 전부터 중국, 인도, 바빌로니아, 그리스, 로마, 피렌체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계 도처에 퍼져 있는 고리대금업자, 전쟁 물품 조달자, 관직 및 징세권 임차인, 대상인 기업가, 대금융업자 등의 자본주의가 아니다.(p112)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中 


 막스 베버(Max Weber, 1864 ~ 1920)는 중국의 경제체제를 봉건제(封建制, feudalism)를 기반으로 오랜 기간 정체, 유지되어 왔다고 결론을 내리지만,  리처드 폰 글란(Richard Von Glahn)은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The Economic History of China>를 통해 막스의 주장에 반박한다.


 내가 정의하는 가산 국가란 군주가 귀족 가문과 주권을 공유하는 국가다... 중국 역사상 기원전 450년 경 전제 군주 국가가 출현했는데, 그 이전까지가 가산 국가 체제였다. 막스 베버는 전형적인 가산 국가 체제가 왕조 시대 후기 중국의 정부 형태라고 했지만, 나의 견해는 다르다. 내가 보기에 기원전 3세기 최초의 통일 제국이 수립된 이후 중국에서 가산 국가 체제는 두 번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p44)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베버의 견해에 의하면 통치자와 신하가 일정 지역에 대해 '의무 - 독점권' 을 교환하지만, 글란은 중국경제사는 긴장과 화해가 교차하는 과정에서 급격한 변화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봉건제도는 주(周)나라 이후 춘추(春秋)/전국(戰國)시대를 거치면서 중국 경제 체제는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는데,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중원(中原)지역에서는 상업이 발달한 반면, 변경 지역에서는 중앙의 지배를 받는 체제가 발달하게 된다. 


 전국(戰國) 시대 말에 두 가지 분명한 경제 발전 패턴이 출현했다. 화북평원(華北平原) 일대의 위(魏), 한(韓), 조(趙)나라들에서 상공인 계층은 군주의 영향력을 벗어나 상당한 자율성을 누렸다. 이와 반대로 변경 지역의 진(秦), 초(楚), 연(燕) 나라는 전제 군주가 관료제를 공고히 하여 경제적 자원을 총괄했다. 여기서 재정 국가 체제가 비롯되었다... 강력한 국가가 나서서 경제를 통제하는 전국 시대 후기의 경제 체제는, 기원전 221년 진(秦)나라가 통일 제국을 건설한 이후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p164)<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중앙 집권 체제국가인 진(秦)과 뒤를 이은 한(漢)에 의해 중국 경제 체제의 전체 틀이 만들어진다. 특히, 한 무제(武帝, BC 156 ~ BC 87)이후 소금, 철의 전매 정책과 통화주조권은 황제의 경제지배권과 토지를 기반으로 한 호족의 저항은 이들의 갈등관계를 잘 보여준다. 


 소금과 철은 일반적인 수요 공급의 탄력성이 떨어지는(비탄력적인) 상품이므로, 통치자는 이로부터 상당한 수익을 끌어낼 수 있고, 이를 통해 일반적인 직접세의 부담을 아예 없앨 수는 없더라도 상당히 줄일 수는 있다.(p229)... 게다가 통치자는 오직 자신만 가진 강력한 무기가 하나 더 있다. 바로 화폐를 주조할 권리다.... 통치자는 화폐와 재정(財政) 정책을 통해, 화폐의 교환 가치를 조절할 수 있고, 그 연장선상에서 상품의 가격도 통제할 수 있다. 이처럼 교환 가치를 지렛대 삼아 국가는 거래의 조건을 통제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전체적 경제 행위를 관리할 수 있다.(p231)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무제(武帝)의 정책을 달가워 하지 않는 반-국가 개입주의 이데올로기와 중농주의 원칙이 젊은 관료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들은 무제가 실시했던 시장과 생산에 대한 국가의 광범위한 개입에 반대했다. 뿐만 아니라 시장 경제 자체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졌다... 호족(豪族)의 정치적 승리는 부와 투자의 중심이 상업에서 토지로 이동한 것이었다(p238)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반면, 이들의 협력 관계를 잘 보여주는 제도의 예로 '균전제(均田制)', '조용조(租庸調)'를 들 수 있다. 균전제의 목적이 안정적인 세수 확보라면, 이러한 제도 정착을 위해서는 지방 호족의 협조가 필요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중앙집권체제 경제 하에서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도 한다. 당나라 시대 확립된 이들 제도는 '안사의 난'을 통해 무너지게 되고, 중국 경제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균전제는 백성 간의 사적인 예속 관계를 끊고 국가가 직접 백성을 통제 및 관리하기 위한 폭넓은 노력 가운데 하나였다... 균전제의 목적은 토지 경작 면적을 최대한 늘리고 국가의 세수 안정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토지 할당 기준을 각 가구의 소비량이 아니라 노동량에 둔 것은 그 목적이 백성의 기본적 생존을 보장하기보다 세금 수입의 안정을 꾀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p322)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당(唐)나라 이전까지 '국가 - 지방' 권력자들의 긴밀한 협조 체제는 안·사의 난(安史之亂, An Lushan Rebellion, AD 755 ~ AD 763)을 통해 붕괴한다. 요(遼), 금(金), 원(元) 등 유목민족의 화북(華北)지역 지배는 이 지역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한 반면, 경제의 중심지는 시장 경제의 확대와 함께 강남(江南) 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안녹산의 난은 중국 경제사에서 가장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재정 시스템의 기본을 고정된 인두세에서 진보적인 토지세로 바꾸는 등의 몇 가지 변화는 반란의 직접적 결과로 촉발되었던 것이다. 토지 소유는 더이상 균전제의 규제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후한(後漢) 이후로 토지를 축적해온 귀족도 부침하는 시장 경제에 노출되었다. 농업이든 상업이든 사적인 기획이 번성했다. 특히 소금 산업처럼 경제의 일정 분야가 국가직속으로 편입되기도 했지만, 시장 경제를 규제하던 시스템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상인은 대체로 더 확대된 자유를 만끽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바로 남부의 벼농사 지역으로의 인구 이동이었다.(p393)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처음에 몽골은 북중국 평원을 가축을 기를 수 있는 초원으로 바꿀 계획이었으나, 실제로 집행하는 와중에 계획이 중단되었다. 계획은 중단되었지만 북중국의 농업 경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북중국은 극심한 인구 손실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1209년 금나라에서 실시한 인구 조사와 명(明)나라 설립에 즈음하여 실시된 1393년 의 인구 조사를 비교하면 3분의 1이 줄어들었다.(p495)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그렇지만, 원나라 시기에도 활기를 잃지 않았던 강남 경제는 명(明)나라 초기에 황제들의 압력으로 인해 다시 쇠퇴하게 된다. 영락제(永樂帝, AD 1360 ~ AD 1424) 당시 정화(鄭和, AD 1371 ~ AD 1434)의 해외원정 역시 제국주의 성격이 강한 해외 진출이었기에, 송나라 이후 강남을 중심으로 한 중국경제의 발전은 주춤하게 된다.



[그림] Zheng He Returns from Treasure Voyage (출처 : https://www.nationalgeographic.org/thisday/jul6/zheng-he-returns-treasure-voyage/)


 처음 제국을 수립할 때 명 홍무제(주원장)는 강남 지도층의 협력을 구하고자 했다. .. 1380년에 이르러 홍무제는 강남의 지도층이 정부 관료로 참여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일반 백성을 막론하고 모두가 황제의 계획에 방해가 되리라는 확신을 갖게되었다. 결국 홍무제는 흐름을 바꾸기 위해 수많은 관리를 숙청하고 강남 대지주의 막대한 재산을 몰수했다.(p507)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황제에 의한 경제통제와 화북/강남 지역의 경제 침체로 인해 명나라 경제는 쇠퇴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 침체에 활기를 불러일으킨 것은 유럽(정확하게는 라틴아메리카)로부터 은(銀)유입이었다. 오늘날의 양적완화(量的緩和, quantitative easing, QE) 정책을 연상시키는 통화팽창은 다시 명나라 경제를 끌어올렸으며, 이러한 명말의 경제성장은 청나라의 자유방임정책으로 이어지게 된다.


 명나라 후기 상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는데, 그 기폭제가 된 것은 바로 1570년 이후 외국에서 들여온 은(銀)이었다. 화폐로 사용되는 은은 여전히 주조되지 않은 형태로 유통되었지만, 그럼에도 화폐 공급량이 급격히 확대되자 시장 경제의 숨통을 죄던 핵심적 문제가 제거되었다.(p545)... 청나라는 이전 왕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내 민간 경제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 편이었다. 19세기 이전까지 상인 조합은 대개 거래 관계보다 출신지를 배경으로 형성되어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번성했다.(p559)... 기본적으로 중개인 시스템이나 의집(자유시장)은 모두 국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지역 상권으로부터 세금을 간접 징수하는 방식에 속했다. 청나라 정부는 해외 무역에 대해서도 자유방임 정책을 채택했다.(p561)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에서 저자는 베버의 주장과는 달리 중국 경제가 결코 정적인 체제가 아니었음을 지적한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한 무제 이후 지속적으로 경제지배력을 확대하려고 한 중앙정부와 토지에 기반한 지방실력자들의 협조와 긴장 관계 속에서 농업을 중심으로 상업이 부수적으로 발달되어왔으며, 화북에서 강남 지역으로 개발이 확대된 역동적인 중국경제사를 우리는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에서 발견한다. 또한, 저자는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안에서 다음과 같이 역동성을 발견하면서, 동시에 '기술 혁신의 부족'이라는 중국 경제의 한계성도 지적한다.


 중국의 역사에서도 우리는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슘페터식 경제 성장을 확인할 수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경제도 발전했지만, 정부와 제도도 함께 발전했다. 국가의 재정 운용과 폭넓은 사회경제의 상호 작용은 시대 상황이나 이념의 방향에 따라 달라졌다. 슘페터식 관점에서 보자면, 당시 중국 왕조는 시의 적절하게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p37)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18세기 경기 호황은 인구와 농업 생산량의 점진적 성장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p569)... 17세기 말부터 중국은 인구가 급격히 성장했는데, 1680년부터 1850년까지 무려 3배나 성장했다. 전근대 역사상 이런 사례는 없었다. 오래도록 유지된 국내 평화, 그리고 시장의 효율성, 생산의 지역별 전문화, 화폐 공급의 확대가 가져다 준 지속적 경제 성장이 이처럼 전례없는 인구 성장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양적 성장에 가려 보이지 않는 면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생산 기술의 혁신 부족이었다. 토지, 물, 식량, 에너지 등 자원의 압박은 갈수록 커졌고, 기술 혁신 없이는 이를 완화할 수 없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중국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p605)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이처럼 저자는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에서 중국 경제체제가 결코 봉건제에서 정체된 체제가 아니라, 춘추/전국 시대 이래 자유경제와 통제경제 사이에서 다양한 방향 모색의 결과임을 밝힌다. 그렇지만, 이러한 중국경제사에서 발견되는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이후 서양에 비해 뒤지게 된 것은 다른 원인이 있어서일까? 서양의 자본주의, 과학, 종교에는 중국에는 없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들을 통해 차차 알아볼 계획을 세우면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1. 중국 자본주의 관련 : <중국, 그 거대한 행보>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 <자본주의 역사와 중국의 21세기> <대분기>

2. 중국 과학 관련 : <중국의 과학과 문명>

3. 중국 철학 관련 : <중국철학사> <중국고대사상사론> <중국근대사상사론> <중국현대사상사론> <중국정치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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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19-08-27 2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두꺼운 책을 이렇게 잘 소화해주시다니.. 감탄입니다 ^^

겨울호랑이 2019-08-27 21:25   좋아요 1 | URL
사마천님 잘 지내셨는지요? 사마천님께 좋은 말씀을 들으니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이론에 따르면 다양한 통치 형태는 제각기 장점을 갖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안에서 가장 압제적인 형태로 바뀌다가 급기야 전복된다. 그러므로 군주정은 독재정이 되어 진보적 귀족들에게 전복당하고, 귀족정은 억압적인 과두제로 빠져들다가 민중 민주주의가 과두제 집권층을 타도하며, 민주정은 무정부 상태로의 문을 열어 또다시 상황을 안정시킬 군주정에 기회가 돌아오는 것이다... 로마 정치 체제에서 군주정 요소는 행정을 맡은 집정관들이었다.(p38)... 귀족정 요소는 당연히 원로원이었다... 마지막으로 민주정 요소는 모든 로마 시민에게 열려 있던 민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p39) <폭풍 전의 폭풍> 中


 <폭풍 전의 폭풍 The storm before the storm>은 로마 공화정이 붕괴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구체적인 시간 배경은 BC 146에 일어난 카르타고의 멸망부터 BC 78의  술라 죽음까지를 대상으로 한다. 작품은 공화정 말기 혼란한 상황에서 공화정의 토대가 흔들리는 과정을 흥미롭게 서술한다. 이 시기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가 <정치학 Politika>에서 말한 혼합정체의 요소를 가진 로마가 체제가 바뀌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한 답(答)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구해본다.


 관직에 있는 자들이 오만을 부리면서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할 때, 시민들은 서로에 맞서, 또 관직을 가진 자들에게 그런 권위를 준 정치체제에 맞서 파당을 형성하기 때문에(정치체제의 변화가 일어난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함, 즉 탐욕(pleonexia)은 어떤 때는 사적인 재산으로부터, 어떤 때는 공공의 재산으로부터 생겨난다. 명예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파당의 원인이 되는지도 또한 분명하다.(1302b 5 ~ 10) <정치학 제5권> 中


 포에니 전쟁(Bella Punica, BC 264 ~ BC 146) 결과 카르타고(Carthago)는 멸망하게 되었고, 넓어진 식민지로부터 제국의 중심으로 사람과 물자가 전에 없이 들어오면서 로마는 극심한 빈부격차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부의 불평등한 분배는 로마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사회규범을 무너뜨리게 된다. 새로운 시대 변화를 요구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라쿠스 형제 -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 BC 163 ~ BC 132)와 가이우스 그라쿠스(Gaius Gracchus, BC 154 ~ BC 121) - 의 개혁이 시작된다.


 귀족과 평민 간의 갈등이 공화정 초기를 규정짓는 요소로 작용하기는 했지만, 로마 정치는 계급 전쟁이 아니었다. 로마의 여러 가문은 엘리트층 귀족 보호자로부터 다수의 평민층 피호민들로 밀접하게 연결되는 복잡한 관계망을 구축했다... 그렇지만 진정 로마인을 하나로 묶어준 것은 암묵적인 사회/정치 행동규범이었다. 성문화되지 않은 규율, 전통, 상호 기대가 로마인들의 삶을 에워싸고 있는데 이를 통칭하여 '선조들의 관습'을 뜻하는 모스 마이오룸 mos maiorum이라 했다.(p32) <폭풍 전의 폭풍> 中


 <폭풍 전의 폭풍>의 시작은 그라쿠스의 개혁으로부터 시작되는데, 먼저 저자가 이 시기를 바라보는 관점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이 책의 저자 마이크 덩컨은 사임의 로마 혁명론을 따르고 있다. 세상에 느닷없이 불쑥 일어나는 혁명은 없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순전히 야망의 힘으로 파괴한 정치체계는 분명 출발부터 건전하지 않았다.(p8) <폭풍전의 폭풍> -추천사- 中


 해제를 통해 우리는 저자가 역사가 로널드 사임(Ronald Syme, 1903 ~ 1989)의 역사관을 따랐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임의 역사관은 무엇일까. 이는 그의 주저 <로마혁명사 The Roman Revolution>을 통해 살펴본다.


 사임은 과두 정치를 로마사에서 가장 중심적이고 영속적인 주제로 생각했다. "정부의 형태와 명칭이 군주정이든 공화정이든 민주정이든 상관없이 어느 시대에나 그러한 외관의 배후에는 과두 지배층이 숨어 있다. 그리고 공화정이었든 군주정이었든, 로마의 역사는 통치 계급의 역사이다. 혁명기의 대장군들, 외교가들, 금융가들은 아우구스투스의 공화정에서 사람은 같지만 다른 옷을 입은 권력의 집행자와 대리인으로 또다시 확인될 수 있다. 그들이 신(新)국가의 정부이다."(p30) <로마혁명사 1> - 해제 - 中


  사임의 역사관에서 로마사는 과두 집단의 의지가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인물들을 통해 나타난 구체적인 결과다. 이러한 이유로 사임은 인물 집단 전기(prosopography) 방식을 통해 <로마 혁명사>를 기술했고, 이 안에서 수많은 인물들의 말과 행동이 역사를 끌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라쿠스 형제와 마리우스(Gaius Marius, BC 157 ~ BC 86),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Felix, BC 138 ~ BC 78) 역시 이러한 인물들 중 하나로 자리매김된다.


 그라쿠스 형제 때문에 제국에나 속하는 모든 결과들이 로마 국가에서 터져나와 혁명의 한 세기를 열었다. 귀족 가문 간의 전통적인 경쟁이 사라지기는커녕, 주로 경제적 이해 관계에 기초한 당파 간의, 심지어는 계급 간의, 그리고 군사 지도자간의 알력으로 복잡해졌다. 이탈리아 전쟁(Bellum Italicum)에 이어서 내전이 일어났다. 마리우스와 킨나 그리고 카르보가 이끄는 당파가 패배했다. 코르넬리우스 술라(L. Cornelius Sulla)가 승리를 거두었고, 폭력과 유혈 덕분에 로마는 질서를 회복하였다. 술라는 기사들을 많이 죽이고, 호민관의 입을 막고, 콘술들에게는 재갈을 물렸다. 그러나 술루조차 그 자신의 사례가 재현되는 것을 막지 못했고, 한 후계자가 그의 지배권을 계승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p85) <로마혁명사 1> 中


 여기서 우리는 이 시기를 다룬 비슷한 유형의 책 하나를 <폭풍 전의 폭풍>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 1937 ~ )의 <로마인 이야기 3 : 승자의 혼미 ロ-マ人の 物語>가 그것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바라보는 로마의 역사의 중심은 인물(人物)이며, 특히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 BC 100 ~ BC 44)다. 로마 이전의 유럽사가 모두 로마라는 지중해로 흘러든다라면, 시오노 나나미의 세계에서 로마사는 카이사르라는 인물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로마인 이야기> 전 15권 중 카이사르에게 할당된 분량이 2권에 이르는 점이 저자의 카이사르 사랑을 뒷받침한다. 이런 시오노 나나미에게 이 시기 역사는 카이사르를 준비하는 시기에 불과하다. 일종의 대림시기(Advent)라 할까.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좌절한 요인을 대부분의 후세 연구자들은 시기상조론으로 돌린다. 인간은 사실을 눈앞에 들이대지 않는 한 눈을 뜨지 못하는 법이다... 실제로 그라쿠스 형제의 생각이 70년 뒤에나마 실현된 것은 무기를 가진, 즉 인간에게 눈을 뜨도록 강요할 수 있을 만한 권력을 가진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통해서였기 때문이다.(p86) <로마인 이야기 3> 中


 다분히 인물 중심의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관(歷史觀)에서 우리는 다른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le, 1795 ~ 1881)이 <영웅숭배론 On Heroes, Hero-Worship and the Heroic in HIstory>의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영웅숭배 및 영웅정신은 큰 주제입니다. 그것은 실로 큰 주제이며, 무한대한 주제로서, 세계 역사 그 자체만큼이나 광대한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볼 때, 세계 역사, 즉 인간이 이 세계에서 이룩해온 역사는 근본적으로 이 땅에서 활동한 위인들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이룩되어 있는 모든 것들은 정당히 말해서 이 세계에 보내졌던 위인들에게 깃들여 있던 사상의 외적/물질적 결과요, 실질적인 구현이자 체현입니다. 전세계 역사의 본질은 이들의 역사였다고 생각해도 틀림이 없습니다. 분명 그것은 이 자리에서 온당하게 다룰 수 없는 주제입니다.(p28) <영웅숭배론> 中


 개인적으로 <폭풍 속의 폭풍> 속 인물들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 ~ 1831)의 시대정신(時代精神, Zeitgeist)의 구현이라 여겨지는 반면, <로마인 이야기>  속 인물들은 카이사르 라는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세례자 요한을 비롯한 예언자들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저자들의 역사관 차이는 두 책에서 어떻게 표현될까. 술라가 폰투스 군을 맞아 싸운 카이로네이아 전투를 예로 살펴보자. <로마인 이야기>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마치 열띤 스포츠 경기를 중계하는 캐스터의 목소리로 전투를 설명한다. 박진감있게 전투를 설명하는 능력은 시오노 나나미의 장점이기도 한데, 카이사르를 주인공으로 한 <로마인이야기 4> <로마인 이야기 5>에 이르면 거의 국방 TV의 토크멘터리 전쟁사의 대본같다는 인상을 남긴다.



[그림] Battle of Chaeronea(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301530137522876802/)


 폰투스군과 로마군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본격적인 전투 결과는 폰투스 쪽의 전사자와 포로가 10만 명 이상, 도망친 병사가 1만 명 남짓한 반면, 로마 쪽의 전사자는 12명에 불과했다. 전투가 끝난 뒤 점호에 대답하지 않은 병사는 14명이었지만, 해가 진 뒤에 진영으로 돌아온 병사가 두 명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한니발의 전과를 웃도는 신기록이었다.(p172) <로마인 이야기 3> 中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에 대해 우호적인 자신의 인식을 바탕으로 사료의 내용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반해, <폭풍 속의 폭풍> 속의 카이로네이아 전투 모습은 한결 차분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점을 비교해볼 때 두 책 모두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역사 이야기지만, 차분하게 사실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폭풍 속의 폭풍>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만, <폭풍 속의 폭풍>이 다루는 시기는 공화정의 말기 일부를 다루기에 로마 전체 역사를 바라볼 수 없다는 점은 한계다.


 고대 사료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과장법을 맛보기로 살펴보자면, 술라는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10만 명 넘는 폰토스 병사가 죽은 반면 그 자신은 단 14명만 잃었다고 보고했다. 이는 뻔뻔스러운 거짓말이지만, 술라가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은 사실이다.(p373) <폭풍 전의 폭풍> 中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폭풍 전의 폭풍> 관점 역시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힘들었다. 사임의 말처럼 로마 역사를 움직인 시대정신은 과두정으로 대표되는 지배계층으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례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 ~ 1527)가 <로마사론 Discorsi sopra la prima deca di Tito Livio>에서 조명한 성산사건(聖山事件, BC 494)을 살펴보자. 평민들이 귀족의 독재에 대항하여 일으킨 성산사건에서 마키아벨리와 리비우스(Titus Livius Patavinus, BC 59 ~ AD 17)는 무엇을 보았는가.

 

 로마의 평민들은 비르기니아 사건 때문에 무장을 하고 성산(聖山)으로 몰려갔다. 원로원은 사절을 보내어 그들이 무슨 권위로 사령관을 내팽개치고 제멋대로 성산으로 이탈했느냐고 물어왔다. 원로원의 권위는 높이 존중되었고 또 평민들은 그들 중에 지도자가 없었으므로, 아무도 감히 대답을 하려 들지 않았다. 리비우스는 그들이 대답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그 대답을 해줄 사람이 없었다고 논평한다. 이것은 지도자가 없는 군중은 위력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p215) <로마사론> 中


 성산사건을 통해 평민과 귀족들은 다시 화해하게 되지만, 평민들은 성산사건을 통해 자신들의 부족함을 깨닫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들의 깨달음이 구체적으로 이들을 대표할 인물을 찾게 되는 노력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그라쿠스, 마리우스, 술라,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등이 시대의 요청에 따라 나타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평민들의 시대정신은 공화정이 붕괴된 오랜 시간이 지나 군인 황제 시대(軍人皇帝時代, AD 235 ~ 284)에도 이어졌던 것은 아닐까하는 추론을 해본다. 이의 근거로 율리아누스(Flavius Claudius Iulianus, AD 331 ~ 363)가 갈리아 군단에 의해 황제에 옹립된 사건을 기번(Edward Gibbo, 1737 ~ 1794)의 <로마제국 쇠망사 Gibbon's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를 통해 살펴보자. 


[사진] Flavius Claudius Iulianus (출처 : https://hellenicfaith.com/zeus-helios/)

 

 무장한 병사들의 슬픔은 곧 분노로 바뀌었으며, 거칠 것 없이 터져 나오는 불만스러운 웅얼거림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대담하게 막사 전체로 퍼져 나가면서 과격한 선동이라도 일으킬 듯한 기세로 치달았다. 또한 지휘관들의 묵인 속에서 율리아누스가 받은 치욕, 갈리아 군데애 데한 억압, 아시아 군주의 악덕을 생생하게 묘사한 비방의 글이 비밀스럽게 유포되었다.... 군대는 '율리아누스 황제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렇게 갈리아 군단은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선포했다.(p271) <로마제국 쇠망사 2> 中


  페이퍼의 처음으로 돌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체제의 변동이 탐욕과 명예라는 동기를 통해 파벌의 형성되고 이는 체제의 변동으로 이어졌음을 지적한다. 그렇지만, 로마의 경우 파벌의 형성된 원인이 민중들의 깨달음에서 비롯되었다면 이를 단순하게 탐욕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개인의견으로 그렇지 않다 생각된다. 


 정리하면, 로마의 정체(政體)가 과두정이었으며, 공화정과 제정 전반에 걸쳐 과두정이라는 시대정신에 초점을 두고 역사를 서술한 사임의 역사관, 그리고 이를 반영한 <로마 혁명사> <폭풍 전의 폭풍>이 <영웅숭배론>과 <로마인 이야기>보다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그렇지만, 과두정 이면에 위치한 로마 시민, 병사들의 관점있다는 전제 하에, <로마 혁명사>에서는 이 점이 충분하게 반영하지 못한 부분은 한계라 여겨지며, 대중 역사서인 <폭풍 전의 폭풍> 또한 마찬가지라 여겨진다. <폭풍 속의 폭풍>안에서 대중 교양서로서 가지는 즐거움과 한계를 동시에 확인하면서 이번 페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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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오늘날까지도 반복 인용되는 <평화의 경제적 결과>(1919년 출간)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좌절된 평화라는 개념을 통해 독일의 입장을 지지했다... 알자스 지방을 프랑스에 돌려주는 문제에 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고수해 프랑스 대표단을 충격에 빠뜨렸다. 클레망소 총리의 오른팔인 프랑스 외교관 앙드레 카르디외를 기준에서 보면, 협상에 임하는 케인스의 생각은 패전국의 입장에 가까웠다.(p1)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8월호> 中


 일반적으로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은 실패한 국제 조약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패전국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승전국의 요구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불러왔다는 것이 조약의 대강 내용인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 Monde Diplomatique> 2019년 8월호는 베르사유 조약 100주년에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 ~ 1946)의 <평화의 경제적 결과 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의 내용을 통해 베르사유 조약을 재평가한다. 베르사유 조약은 과연 기념할 수 없는 조약일까?


 케인스는 프로이센식의 군사적 계급주의, 제국주의적 야망에 취한 지식인 계급, 그리고 산업계가 이끄는 독일 경제에 매혹됐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케인스는 독일에 관대한 평화조약을 지지했다. 그는 유럽에 다시금 번영을 가져다줄 강국은 독일이 유일하다고 봤던 것이다. 반면 프랑스가 고수한 입장에 대해서는 적개심을 보였는데, 이는 그의 강력한 반(反) 프랑스적 정서에 기인한 것이었다. 영국은 1918년 1차 대전에서 승리를 거뒀음에도, 평화협정 시 독일을 상대로 '가혹한' 배상을 요구하는 데 반대했다. 이는 가혹한 평화협정이 이뤄질 경우 프랑스가 최강국이 될 것을 우려한 데 따른 것이었다.(p3)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8월호> 中


[사진] 케인즈 (출처 : https://fee.org/articles/three-times-keynes-was-not-a-keynesia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알랭 가리구, 장퐁 기샤르 명예교수는 베르사유 조약에 부정적인 케인즈의 입장은 공정하지 않다. 반(反) 프랑스주의, 반(反) 유대주의 성향을 가진 케인스가 전후 대륙의 강자로 프랑스가 떠오를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들 저자들의 해석이다. 이들에 따르면 케인즈는 개인의 질투와 편견에 사로잡혀 유럽정치를 그르친 어리석은 인물에 불과하다. 이러한 평가에 대해 케인즈는 동의할 것인가. 케인즈는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반론은 <평화의 경제적 결과>를 통해 해당 내용을 확인할 수 밖에 없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평화 예산은 기존 정책의 대폭적인 수정 없이는 균형을 맞출 길도 없었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이 나라들의 입장은 거의 절망적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이 나라들은 국가 파산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은 적국으로부터 받을 거액의 배상금에 대한 기대에 의해서만 숨겨질 수 있을 뿐이었다.(p146)... 클레망소의 목표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독일을 무력화시키고 파괴하는 것이었으며, 그는 배상에 대해서는 언제나 약간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그가 독일을 예전처럼 무역 활동을 거대하게 벌일 수 있는 상태로 남겨놓을 뜻을 전혀 품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p147) <평화의 경제적 결과> 中


  프랑스 정책의 솔직한 목적, 즉 독일 인구를 제한하고 독일 경제 체계를 악화시키는 것이 윌슨 대통령을 위해 자유와 국제적 평등이라는 장엄한 언어로 포장되었다.(p65) <평화의 경제적 결과> 中


 독일을 한 세대 동안 예속의 지위로 전락시키거나, 수백 만 명의 인간에게 모욕을 안기거나, 독일이라는 국가 전체의 행복을 몽땅 박탈하는 정책은 혐오스럽기도 하고 가증스럽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정책을 정의의 이름으로 설교한다. 인류 역사의 중대한 사건들 속에서, 그리고 국가들의 뒤엉킨 운명의 전개 속에서, 정의는 절대로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p206) <평화의 경제적 결과> 中


 케인즈는 <평화의 경제적 결과>에서 배상금을 통해 재정위기를 넘기려는 의도와 함께 독일경제를 무너뜨리려는 프랑스의 의도를 고발한다. 실제로 프랑스는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Deutsch-Franzosischer Krieg)의 상처 - 잃어버린 알사스-로렌( Alsace-Lorrain) 지방, 막대한 배상금 약 50억 프랑 - 를 잊지않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는 프랑스에게 반세기만에 찾아온 통쾌한 복수의 순간을 의미했고, 실제로 프랑스는 전후 배상금의 50%에 해당하는 청구권이 주어졌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케인즈의 이러한 지적은 일리가 있다.

 

 심각한 문제로 제기된 것이 배상 문제였다. 배상의 원칙은 독일이 윌슨 14개 항목을 수락함으로써 성립되었고 전쟁의 책임이 독일에 있다는 베르사유 조약 제231조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파리 회의에서는 구체적인 배상금의 확정에 관해서는 결정을 보지 못하였다.(p626)... 1920년 7월 스파spa 회의에서 배상금을 받는 비율을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즉 프랑스 52%, 영국 22%, 이탈리아 10%, 벨기에 8%, 그리스/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가 합해서 6.5% , 그리고 일본/포르투갈이 각각 0.75%였다....  1921년 4월 파리 회의에서 독일이 지불해야 할 배상금 총액을 1,320억 금 마르크로 결정하였다. 또 이 회의에서는 매년 20억 금 마르크의 지불과 독일 수출액의 26%를 징수키로 결정하였다.(p641) <세계외교사> 中


 그렇지만, <디플로마티크>에서는 베르사유 체제가 패전국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것이었다는 주장에 대해 반론을 편다. 전후 세계대공황은 미국에서 유래한 것이었으며, 독일은 1939년 배상금 지불 중지 이전 재무장을 할 수 있었기에 베르사유 조약이 제2차 세계대전을 가져왔다는 주장은 무리하다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베르사유 체제와 무관하게 독일은 이미 다음 전쟁을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베르사유 조약이 케인즈의 뜻대로 실행됐다면 나치즘의 급부상을 피할 수 있었을까? 조약 협정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결국 배상금 지불을 중단했으며 이전의 경제적 번영을 되찾았다.(p5)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8월> 中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다분히 프랑스의 입장에서 베르사유 조약을 바라본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戰場)이 되고 전체 프랑스 청년의 1/3이 부상 또는 사망한 막대한 피해를 입은 프랑스 입장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이 불평등 조약이라는 사실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분명 패전국에게 가혹한 면이 있다. 때문에, 베르사유 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을 가져온 주요 원인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전국 독일에 대해 관대한 조치를 주장한 케인즈의 <평화의 경제적 결과>에 대해서도 선뜻 동의하기 어려워지는데, 이는 우리가 패전국에 대한 관대한 조치가 반드시 평화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교훈을 일본을 통해서 배웠기 때문이다.


  독일을 돕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가 서부 유럽의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 채택되고 거기에 미국의 재정적 지원이 더해진다면, 하늘은 유럽인 모두를 도울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서유럽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교묘하게 중부 유럽을 빈곤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잡는다면, 감히 예견하건대, 머지않아 복수전이 펼쳐질 것이다.(p246) <평화의 경제적 결과> 中


  영국과 미국을 대변하고자 집필된 <평화의 경제적 결과>는 미국 상원에서 베르사유 조약의 비준 거부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조약이 조인된 후에도 케인스는 자신이 반대했던 조항들이 실행되는 것이 끝없이 압력을 가했다.(p3)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8월> 中


 케인즈의 주장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 일본에 대한 조치는 매우 관대했다. 여기에 독일과는 달리 분단되지 않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점령국이었던 한국과 베트남에서 일어난 전쟁특수를 통해 경제부흥을 일구어낼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일본은 진정한 <평화의 경제적 결과>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보여줄 사명이 있는 국가다.


 독일과는 달리 일본에 대한 전쟁은 주로 미국이 단독으로 담당하였고 따라서 전후 미국이 일본을 단독으로 점령하게 되어 일본은 분단을 모면할 수 있게 되었다. 1945년 4월 루스벨트 사망 이후에는 일본에게 어느 정도 온건한 입장을 취하는 견해가 우세하게 되었고 이것이 9월 6일 '항복 후에 있어서 미국의 초기 대(對)일정책'이란 선언에 구현되었다. 이 선언은 비무장화, 비군사화, 민주적 개혁을 핵심 내용으로 하고 민주적 개혁의 기본 방향으로 정치적 자유의 회복, 전범의 처벌, 재벌 해체 등을 정하였다.(p854) <세계외교사> 中


 미국 국내에서는 강화조약을 엄격히 할 것인지 아니면 관대히 할 것인지 끊임없는 논의가 되풀이되었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엄격이나 관대냐 하는 데 있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낡고 위험한 침략적 성격의 틀을 타파하고 새로운 목표를 세우는 데 꼭 알맞은 엄격함을 구사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어떤 수단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해당 국민의 성격 및 해당 나라의 전통적 사회질서에 따라 정해진다.(p387)... 프로이센적 강권주의가 일반인의 가정생활 및 일상적인 시민생활에 깊이 뿌리내린 독일에는 거기에 알맞은 강화 조건이 필요하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독일과는 다른 조건이 요구된다. 그것이 현명한 평화 정책이다.(p388).... 일본이 평화국가로 출발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참된 장점은 어떤 행동 방침에 대해 '실패로 끝났다'고 인정한 뒤부터는 다른 방향을 향해 노력한다는 점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인은 양자택일적 윤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p389) <국화와 칼> 中


<국화와 칼 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의 저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1887 ~ 1948)는 책에서 일본인들은 실패를 받아들인 후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성향이 있음을 말하면서 전후 일본에서 평화 정책을 펼것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일본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면을 보여왔다. 베네딕트가 말한 양자택일적 윤리는 이러한 점에서는 맞지만, 1,400회의 수요 집회가 있는 동안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해 반성없는 일본의 모습을 보면 케인즈가 말한 관용(寬容)이 평화를 보장하는가에 대해 우리는 분명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형제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주소서! 노동과 생업의 결실을 강탈해가는 강도를 증오하듯이, 영혼에 가해지는 폭압을 증오하게 해주소서. 전쟁이라는 재앙은 피할 수 없다고 해도, 평화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서로 미워하지 않고 서로 괴롭히지 않게 해주소서. 그리고 시암에서 캘리포니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언어로, 우리에게 이 삶을 주신 당신의 은혜를 찬양하면서 이 찰나 같은 삶을 살게 해주소서.(p165) <관용론> 中


 일찌기 볼테르(Francois-Marie Arouet, 1694 ~ 1778)는<관용론 Traite Sur La Tolerance>에서 관용을 통해 전쟁 없는 세상과 평화로운 세상을 기도했지만, 아직 그런 세상은 되지 않은 듯하다. 2019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일이자, 광복절(光復節)을 맞아 일본이 저승에 있는 케인즈와 베네딕트를 더는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면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사진] 1,400회 수요집회(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8/14/201908140164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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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8-14 2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랑스로서는 1871년 보불전쟁에서 패전한
뒤, 절치부심해서 드디어 복수의 시간이 왔
는데 패전국에게 양보할 생각이 조금도 없
었을 겁니다. 프로이센이 그전에 자신들에게
받아간 엄청난 전쟁 배상금과 영토할양이라
는 치욕을 잊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케인즈와의 영국이 추구한 합리적 사고가
프랑스에게는 먹히지 않았다는 점이 더 큰
전쟁의 도래를 초래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전후 일본에서는 총독 맥아더의 천황제
용인과 명확한 전쟁 책임의 소재를 명시하
지 않은 것이 작금의 역사 분쟁의 단초가
되지 않았나 뭐 그런 생각해 봅니다.

겨울호랑이 2019-08-14 22:35   좋아요 0 | URL
베르사유 조약 자체가 패전국에게 가혹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승전국에게도 전후 안정적인 재정상황을 보장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모두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체제였다 생각합니다. 1차 세계대전 승전국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가 출현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베르사유 체제 자체보다는 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는 식민지(시장)의 보유여부가 중요했기에 제국주의가 존재하는 한, 세계대전의 불씨 또한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의 연장에서 일본의 천황제가 남아있다는 자체가 제국주의의 유산이기에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전후 청산이 되지 않은 하나의 상징이라 여겨집니다. 가라타니 고진 등 일본의 여러 학자들도 레삭 매냐님과 같은 의견으로 알고 있습니다.^^:)

2019-08-15 0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5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9 1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9 14: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칭기스 카한의 뿌리 : 지고하신 하늘의 축복으로 태어난 부르테 치노(잿빛 푸른 이리)가 있었다. 그의 아내는 코아이 마랄(흰 암사슴)이었다. 그들이 텡기스를 건너와 오난 강의 발원인 보르칸 성산에 터를 잡으면서 태어난 것이 바타치 칸이다.(p23) <몽골비사 元朝秘史 제1권> 中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몽골제국의 건설자 칭기스 칸이 고구려인의 후예라는 주장을 펼친다. 저자는 책에서 고구려 멸망 후 연남생(淵男生, AD 634 ~ AD 679)으로 대표되는 대대로 집안과 고구려 유민과 말갈이 연합해서 세운 발해(渤海, 大震)과의 대립 구도가 타타르와 몽골 부족 사이 대립의 기원으로 이어내려왔음을 주장한다.


주몽(朱蒙)이 세운 고구려(高句麗)에서 그 후손 대조영(大祚榮)의 발해(渤海)가 나왔고, 이 발해에서 대조영의 아우 야발(野勃)의 4세손 금행(今幸)의 아들 함보(函普)에서 금(金)나라가 나왔다. 또 금행의 막내아들 보활리(保活里)에서 그 14대 후손 칭기스 칸(成吉思汗)으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원(元)나라 황가가 나왔다. 비록 우리 주제의 범위를 벗어나는 주제이기는 하나, 고구려(高句麗) 왕가에서 나온 이 계보는 지나 땅의 명明) 대를 거쳐, 금나라 유부(金國遺部)에서 태어난 "아이신교로 누르하지(愛新覺羅 努爾哈赤)"의 청(淸, 1616 ~ 192) 황실로까지 이어진다.(p91)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2> 中


 칭기스칸의 선조는 원리 "고구려왕족(高句麗王族)의 서자(殘蘗)"들로 지방통치자로 파견된 "말 골(말갈)"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고구려가 망해 정통 왕가의 적자(嫡子)들이 사라지자 이들을 대신하여 한 세대만에 신라와 당나라의 손에 찢기어 무너진 고려구의 옛 땅자리에 "발해(渤海) = 고려(高麗)"를 세운 고구려 왕족에서 갈라져 나온 씨앗("고려 별종") 말갈 대씨 가문이다. 당나라 장안으로 잡혀간 고구려 마지막 왕 보장왕이 당나라에서 안동(安東, 요동 고구려)으로 돌아오자마자 말갈과 접촉하여 고구려를 다시 세우려고 기도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p120)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2> 中


 저자에 따르면 중앙아시아의 북동부에 거대한 세력을 가진 고구려의 후손들이 존재하며, 이들의 세력을 통합한 것이 테무진, 후에 칭기스 칸(成吉思汗, AD 1162 ~ 1227)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구려인의 후예였던 장보고(張保皐, AD 787 ~ 846)의 손자인 궁예(金弓裔, AD 869 ~ AD 918). 금(金)을 세운 시조 역시 같은 고구려인의 후손임을 책에서 밝힌다. 이에 따르면, 고구려(高句麗) - 발해(渤海) - 금(金) - 몽골(元) - 청(淸) 순으로 고구려의 뜻을 이어받는 나라들이 북방에서 건립된 것으로 해석된다. 


 칭기스 칸은 대야발의 19세 손인데, 그 모골 가계와 숙적이었던 타타르 종족 두 가계는 알고보니 둘 다 한 할아버지에서 나온 가계였고, 그들의 태시조는 바로 고구려 주몽이었다.  참고로 "칭기스 칸"은 바로 이 "진국왕(震國王)" ="팅기스 콘"이 구개음화를 거친 소리의 이름이었고, 그의 어릴 적 이름 "테무진"은 좀더 나중에 보게될 것이나, 고구려 제3대왕 "대무신(大武神)"왕이라는 말이다... 그 주몽의 손자가 바로 어릴적 이름이 달리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었는데, 이 이의 성씨는 "대씨(大氏)"의 유래로 보이고, 그의 이름은 "무쿠리"는 "모굴/몽골"과도 같다.(p86)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1> 中


 후삼국 세 나라,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 가운데 스스로를 "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선포한 궁예의 경우를 보자. 그의 어머니는 사실은 궁파(弓巴) 장보고의 딸이자 고구려 왕가의 후손이었다. 그 어머니에게서 난 출신성분 때문에 궁예는 갓난아이 시절에 죽임을 당할 처지에 이르러 신라 궁정에서 버림을 받았다. 그는 그 때문에 애꾸눈이 된 불운의 왕자였다.(p188)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2> 中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今幸)"은 금 태조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7세 선조인 금시조 함보에게 아버지이자 동시에 칭기스 칸의 0대조 알란 고와의 4대조인 보활리의 아버지이다. 이 때문에 "고려왕(王)씨"와 조신(女眞)의 금(金)나라 황족 "완안(完顔)씨"는 서로 같은 것이다. <금사> "금국어해성씨"편의 "왕안은 곧 왕씨다(完顔曰王)"라고 한 말은 바로 이 뜻인 것이다!(p49)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2> 中


  저자는 <고구려 - 발해인 칭기스 칸>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다소 새롭게 느껴지는 저자의 주장을 우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고구려(高句麗) - 발해(渤海) - 금(金)나라 - 원(元)나라 - 청(淸)나라를 세운 이들이 한 사람의 선조 "주몽"에서 나온 한 집안 한 가계였다. 이런데도 아직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북아역사공정이 설 땅이 있겠는가?(p46)... 이 연구를 통해 나는 발해 - 금나라 - 원나라가 이룬 사적들이 이 땅을 떠나간 고구려 - 발해의 백성, 우리 민족의 한 갈래가 이룬 세계사적발전 과정이었음을 역사상 처음으로 발견하고 그 결과를 알린다.(p47)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1> 中


 먼저, '테무진'을 '대무신왕'으로 해석한 저자의 주장을 살펴보자. <몽골비사>에서는 칭기스 칸의 이름이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 부족의 테무진 우게를 죽이고, 적장의 이름을 따서 아이 이름을 지었다고 설명한다. 만약, 저자의 말이 맞는다면, '테무진  우게'야 말로 'original 대무신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때문에, '테무진'이 '대무신왕'이라는 의미가 맞다고 해도, 그것은 왕을 상징하는 고유명사가 아닌 용사(勇士)를 의미하는 보통명사의 뜻이 더 강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50 예수게이 용사가 타타르의 테무진 우게, 코리 보카를 비롯한 타타르족을 약탈하고 돌아온 바로 그때 임신중이던 후엘룬 부인은 오난강의 델리운 동산에서 칭기스 카한을 낳았다. 태어날 때 오른손에 주사위뼈만한 핏덩어리를 쥐고 태어났다. 타타르족의 테무진 우게를 잡아왔을 때 태어났다고 해서 테무진이라는 이름을 주었다.(p39) <몽골비사 元朝秘史 제1권> 中 


 또한, 저자는 <고구려 - 발해인 칭기스 칸>의 많은 내용을 '음(音)의 유사성'에 의해 설명하는데, 책에서 다른 저자의 내용을 비판할 때 자신이 주장하는 근거를 바탕으로 비판을 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주장하는 '음의 유사성' 역시 우리가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주류이론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들은 오늘날의 "아르군 강"이 "에르게네 쿤"과 음운적으로 상응하기 때문에, 곧 이 두 지명이 서로 비슷한 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한 가지 사실을 주요한 근거로 보고, 이 때문에 양자가 서로 같은 곳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름소리가 서로 비슷하거나 같다고 하는 사실 하나만으로 양자가 같은 것이라고는 결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에르게네쿤"이라고 보는 만주 서북방의 "아르군 하"와 정확히 소리가 같은 강이 또 하나 있기 때문이다.(p269)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1> 中

 또한, 저자가 주된 근거로 하는 <몽골비사>의 경우, 일종의 암호문이기에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몽골비사>의 내용이 전혀 다르게 읽혀질 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19세기에 베이징에서 한자로 적힌 문서 사본이 한 부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한자 그 자체는 쉽게 읽을 수 있었지만 의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한자들은 13세기의 몽골어 발음을 옮겨놓은 일종의 암호였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각 장에 딸린 간략한 한문 요약문만 읽을 수 있었다. 이 요약문을 통해 텍스트에 담긴 이야기의 암시는 얻을 수 있었지만, 문서 전체의 내용은 해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감질만 날 뿐이었다. 이 문건을 둘러싼 수수께끼 때문에 학자들은 이것을 <몽골 비사>라고 불렀고, 이것이 그후 이 문건의 이름이 되었다.(p27)... 이 텍스트를 이해하려면 암호를 판독하고 내용을 번역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 문건은 몽골의 왕가 내 소수를 대상으로 쓴 것이고, 이들은 당연히 13세기의 몽골 문화만이 아니라 지형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점 때문에 번역을 해놓아도 이해가 쉽지 않았다.(p30)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中


 그렇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생각해야할 부분은 '몽골 = 칭기스 칸'이라는 등식이다.   저자의 주장을 받아들여, '칭기스 칸 = 고구려인의 후예'라는 등식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몽골의 유라시아 제국 정복이 칭기스 칸 개인 또는 집안의 힘만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까. 그리고, 금 제국의 시조라는 함보가 한반도에 살았던 인물이라고 해서 청(淸)의 중국 정복을 한민족의 대외 정복이라고 볼 수 있을까. 개인 의견으로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몽골의 부마국(駙馬國)이었던 고려(高麗)와 몽골과의 관계처럼 지배층의 관계에 한정된 것이라 생각된다.

 여몽 관계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몽골인들이 지닌 정치 관념의 특수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외교관계를 '국가'나 '왕조'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칭기스 일족과 다른 나라 군주들과의 인신적, 개별적 관계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했다. 당시 고려 국왕은 제국의 외부에 별도로 존재하는 영토와 백성을 갖고 있는 군주임과 동시에 칭기스 일족의 부마로서 제국 내부에 존재하는 제왕이었다. 정동행성의 승상이라는 직책도 제국의 고위 관리라는 점에서 제국 내적 존재였다. 몽골 제국 시기 고려의 정치적 위상은 이러한 국왕의 지위와 연동했기 때문에 이중적인 특징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p155)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中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지배층의 관계가 아닌 사회 다수 구성원인 민중(民衆)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몽골의 세계 정복은 풍부한 물자를 안정적으로 얻으려는 욕구와 이를 충족하기 위한 움직임이 칭기스 칸이라는 인물과 맞물려 얻어진 결과이지, 개인의 힘만으로 이 거대한 정복사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런면에서 칭기스 칸은 몽골 역사의 한 방편(方便)이라 여겨지다. 극단적이지만, 만약 칭기스 칸이 없었더라도 이 시기 몽골부족의 통합과 남쪽으로의 진출은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졌을 것이라 생각된다.(칭기스 칸만큼의 성과는 거두기 힘들었을 것이지만.)


 몽골족에게 싸움이란 진짜 전쟁이나 지속적인 분쟁이라기보다도 생계를 위한 일상적인 약탈에 가까웠다. 복수도 약탈의 구실이 되곤 했지만, 진짜 동기가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중요한 것은 살인이 아니라 물자였다... 비단길의 교역 도시들에 가까이 사는 남쪽 부족들은 멀리 떨어진 북쪽 부족들보다 늘 물자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남쪽 부족들은 멀리 떨어진 북쪽 부족들보다 늘 물자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남쪽 사람들은 무기도 좋았다. 따라서 그들과 싸워서 이기려면 북쪽 사람들은 더 빨리 움직이고, 더 머리를 써야 하고, 더 열심히 싸워야 했다. 이렇게 교역과 습격을 번갈아 되풀이하면서 느리지만 꾸준하게 금속과 직물이 북방으로도 흘러들었다.(p59)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中


 유목민의 전투에서 중요한 화살촉은 철로 제작되었으며 대형화/다량화 양상이 나타난다. 경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무기의 재료인 철을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각종 무기와 물자가 유입되는 경로를 장악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에 따라 주요한 철의 산지나 교역 통로에 위치한 집단들과 제휴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p129)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中


 남쪽으로 진출을 위한 동기와 진출의 필요성이 오랜 기간 분열되어 온 몽골족을 통합했다고 바라봤을 때, '칭기스 칸'이라는 인물은 수없이 많이 존재하는 가능태(可能態) 중 실현된 하나의 현실태(現實態)가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칭기스 칸이 어느 민족의 피를 받고 있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의 연장선에서 70년대 우리 경제 발전사를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고구려 -발해인 칭기스 칸>은 저자 전원철 박사가 <몽골비사> <라시드 앗 딘의 집사>등 여러 자료를 참고하여 오랜기간 연구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매우 새롭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페이퍼에서 저자의 글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한 것이 사실이지만, 책의 내용 전체가 허무맹랑하다고 말할 위치에 있지 않기에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다만, 이 페이퍼는 다소 자극적으로 느껴지는 제목이 지나치게 민족주의쪽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는 마음으로 썼음을 말하고 싶다. 그렇지 않을 경우 '칭기스 칸 = 중국인'을 주장하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우리의 역사 연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PS. 조선의 왕 위만은 원래 연(燕)나라 출신이다. 연나라는 전성기 때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공격해 복속시키고 관원을 두어 요새를 쌓았다... 연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 땅으로 들어가자 노관 휘하에 있던 위만도 망명해 1,000여명의 무리를 모아 머리를 북상투 모양응로 튼 뒤 만이의 옷차림으로 동쪽 국경을 넘어 달아났다.<사기열전 史記列傳 조선열전 朝鮮列傳> 中


 같은 이유로 위만조선의 선조 위만이 중국 연나라 사람이라는 사실이 고조선(古朝鮮)이 중국 왕조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지 못할 것이다...  칭기스 칸의 일대기를 다룬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는 알기 쉬우면서도 <몽골 비사>의 대부분 이야기를 잘 다루고 있는 훌륭한 책이라 여겨지기에, 시간 되실 때 편한 맘으로 읽으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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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8-11 19: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우리가 스코틀랜드 인의 후예라는 책도 읽은 적 있습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19-08-11 21:56   좋아요 1 | URL
헉. 제가 들은 가장 먼 조상은 이스라엘 ‘단‘ 족과 수메르인, 훈족의 앗틸라 정도가 가장 멀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브레이브 하트」의 후예라는 상상은 감히 못했습니다 ㅋ

2019-08-11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1 2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2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2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 보내는 삶의 무의미함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저 너머에는 절대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 선하고 접근하기 힘들며 전부를 소유하는 게 불가능한 보다 견고한 현실인 <페드르>와 '라 베르마가 말하는 방식'이 있었으니까.(p7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Le cote de Guermantes> 에서 주인공 '나'는 아버지가 준 오페라 입장권을 가지고 공연장에 간다. 오페라 극장에서 '나'는 <페드르 Phedre> 와 라 베르마의 연기를 통해 예술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이 부분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 게르망트 쪽1> 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된다. 오페라 공연 후 주인공은 예술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그림] Phedre by Jean Racine(출처 : https://ticklemebrahms.wordpress.com/2013/06/01/phedre-by-jean-racine/)


 우리는 한 세계에서 느끼고 다른 세계에서는 생각하고 명명하며, 그리하여 이 두 세계 사이에 어떤 일치점을 설정할 수 있지만, 그 간격을 메울 수는 없다. 바로 이것이 내가 넘어서야 했던 거리감이자 균열이었다... 한 인간 또는 지극히 개인적인 작품과 아름다움의 관념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차이는, 그 인간이나 작품이 우리에게 느끼게 하는 것과 사랑이나 찬미의 관념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이나 찬미의 관념을 알아보지 못한다.(p8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中


 주인공이 느낀 거리감과 균열. 그것은 어디로부터 온 것이었을까.

 

 배역 자체에는 문학적 가치가 없었지만, 라 베르마는 이 배역에서도 페드르 역 못지않게 숭고했다. 나는 비극 배우에게서 작가의 작품이란 탁월한 연기 창조를 위해 그 자체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그저 하나의 질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p84)... 하나의 운(韻)을 듣고, 다시 말해 앞의 운과 비슷하면서 다른 뭔가가 앞의 운에 의해 유발되어 새로운 관념의 변주를 끼워 넣을 때, 우리는 사상과 운율이라는 두 체계가 포개지는 걸 느끼는데, 바로 이것이 이미 조직화된 복잡성, 아름다움의 첫 요소가 아닐까?(p8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中 


 주인공 '나'는 라 베르마의 연기를 통해 오페라에서 배우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라신(Jean Baptiste Racine, 1639 ~ 1699)의 비극 <페드르>는 널리 알려진 유명한 비극이지만, 관객은 배우의 해석과 표현에 따라 감동(感動)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주인공이 오페라를 통해 느꼈던 감정, 그것은 프세볼로트 에밀리예비치 메이예르홀트(Всеволод Эмильевич Мейерхольд, 1874 ~ 1940)의 <연극에 대해 О театре>에서 '연극 - 이것은 배우 예술이다.'에서 말한 '관객의 수동적 경험' 이기도 하지만, 조금은 다르다.


 관객은 오직 무대 곁에서 인지하고 수동적으로 경험할 뿐이다. 배우들과 관객 사이는 한쪽은 단지 행동하고 한쪽은 단지 받아들이는, 서로에게 낯선 두 개의 세계로 나누어 버리는 경계가 나타난 것이다.(p87) <연극에 대해> 中


 메이예르홀트가 말한 간극은 '배우 - 관객'의 다른 역할에서 온다. 때문에, 배우의 세계와 관객의 세계가 다르다는 주장을 한다. 반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 '나'는 연극에서 '배우 -> 관객'의 일방적 관계안에서 라 베르마의 연기에 큰 감동을 받게 된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세계'와 '배우의 세계'가 다르다는 생각 대신, '배우의 세계'와 '작가의 세계'가 다르다는 다른 간극을 생각해 낸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아가 '작품 = 질료(質料, hyle)'이며, '배우 = 형상(形相, eidos)'의 도식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찾는 것은 밑감(질료)의 원인이며, [이것은 꼴(형상)이다.] 이것 때문에 밑감은 어떤 (특정한) 것이 되고, 그리고 이것은 (그 사물의) 실체다. <형이상학 Metaphysica> (제7권, 1041b 8 ~ 10)(p351)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322)는 <형이상학>을 통해 세계는 위계질서로 모습을 드러내며, 가장 높은 단계에 있는 것들은 비물질적인 실체들인 반면, 현실태로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들은 형상안에 많은 질료가 복합되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W.D 로스) 다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로 돌아와 주인공에 따르면, '작품'은 '질료'가 되고, 배우는 '형상'이 된다.  연극(오페라)에서  작품은 배우를 통해 관객들에게 나타나기에 질료가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현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론과 주인공의 깨달음은 통하는 바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나'의 깨달음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미묘하게 다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다른 저작에서 찾아야 한다. 사실, <페드르>와 같은 비극(悲劇)관련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형이상학>이 아니라 <시학 Peri poietikes>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을 철저하게 '모방(Mimesis)'의 관점에서 바라보는데, 해당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배우가 스토리를 실제로 연기하기 때문에, 첫째로 볼거리가 불가피하게 비극의 일부분이 될 것이고, 그다음에는 노래와 조사(措辭)가 필요하다. 이 둘이 모방 수단이기 때문이다. 조사란 바로 운율의 배열을 의미하며, 노래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비극은 행동의 모방이고 행동은 행동하는 인간에 의해 행해지는데, 행동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성격과 사상의 측면에서 특정한 성질을 지니기 마련이다.(6장 1449b 30 ~ 38)(p362)... 모든 비극은 여섯 가지 구성 요소를 갖기 마련이며, 이 여섯 요소에 의해 비극의 일반적인 성질도 결정되는데 플롯, 성격, 조사, 사상, 볼거리, 노래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둘은 모방 수단이고, 하나는 모방 양식이며, 셋은 모방 대상이다. 그 밖에 다른 것은 없다.(6장 1450a 8 ~ 11)(p363) <시학>  中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극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짜임새(플롯 plot)이며, 이는 비극이 인간 행동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반면, 주인공 '나'에게 중요한 요소는 형상으로 나타난 '배우'이며, 배우의 발성(發聲)과 음운(音韻)에서 감동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주인공 '나'에게 큰 감동을 준 라 베르마의 연기는 실체(substance)가 아니라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들의 견해는 이 점에서 차이가 있다 여겨진다. 짜임새가 결국은 작가의 의도에 의해 조직된 것임을 생각한다면, 이라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감동의 근원은 작가일 것이다. 그리고, '모방'을 제목으로 한 <미메시스 Mimesis: The Representation of Reality in Western Literature >의 저자 에리히 아우어바흐 (Erich Auerbach, 1892 ~ 1957) 역시 <페드르>가 주는 감동의 근원을 작가 라신에게서 찾고 있다.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이 대상으로 한 소수 계층의 성격을 통하여 특히 그 사회적 이상을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바로크의 고양된 형식과 그것이 어떻게 예술 취미의 이성적인 개념과 결합되었던가를 이해하고 또는 적어도 그것을 공감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다... 비극의 인물을 치켜올려 보는 바로크 형식이 그 대표적 예가 되는 바, 비극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극단적인 분리를 설명할 수 있다.(p524)... 라신의 비극에 그려 있는 사랑의 정열은 관객을 압도한다. 결과가 비극적이라고 해도 비극에 그려 있는 거대하고 장엄한 운명을 찬양하고 모방하라고 관객을 유도한다. 이것은 특히 <페드르>의 경우에 그렇다. 페드르는 신의 은총을 거부했을 뿐 기독교적인 면을 가진 여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영향은 전혀 기독교적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p525) <미메시스> 中


 결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에서 주인공 '나'는 '분리된 세계'의 간극 측면에서는 메이예르홀트와 의견을 달리 하며, '감동의 근원' 측면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나 아우어바흐의 입장과는 다르기에 독창적인 예술관을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에서 주인공의 예술관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인공이 분리된 것으로 인식하는 두 세계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반의 '시간'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마들렌 과자 등의 어떤 기제(機制)를 통해서 현재와 구별되는 인식되지 않는 '잃어버린 시간'의 이야기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배우로 표현되는 '기억된 이미지'인지, 아니면, 나타나지 않은 숨겨진 '실체의 이미지'인지. 작품 전체를 통해 우리가 고민해야할 지점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안의 <페드르> 공연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작품 전체의 축소판으로 생각된다.


 추억은, 내가 불완전하게만 소유하는 추억은 이따금 내게서 빠져나갔다. 추억은 그저 아름다운 여인의 이미지처럼 내 마음속에 몇 시간 떠돌다가, 그 이미지가 나타나기 전에 품었던 낭만적인 관념과 더불어 점차 하나의 유일하고도 결정적인 연상 작용으로 발전했으며, 따라서 추억이 가장 잘 떠오르는 바로 이런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그 추억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아야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추억이 될지 전혀 알지 못했다.(p98)... 추억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추억을 간직하는 행운을 가졌던 이런 짧은 시간 동안 추억은 정말로 매혹적이었으리라. 그러다 점점 이 관념이 추억을 보다 결정적인 형태로 고정하면서 추억은 보다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되었지만, 추억 자체는 보다 흐릿해졋다. 나는 더 이상 추억을 되찾을 수 없었다.(p9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中


 우리는 한 존재에 대한 감정에, 그 존재가 일깨우지만 그 존재와는 무관한, 이미 예전에 다른 여인에 대해 느꼈던 많은 감정들을 집어넣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런 특별한 감정을 뭔가 우리 마음속에서 보다 일반적인 진리에 이르게 하려고 애쓰며, 다시 말해 인류 전체에 공통된 보편적 감정에 포함시키려 한다. 이 보편적 감정과 더불어 개인과 개인이 우리에게 야기하는 아픔은 과거의 우리와 소통하게 하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된다.(p19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中


 그리고, 이러한 배경 위에서 주인공의 게르망트 부인에 대한 사랑, 독백 등의 의미가 작가의 관점에서 보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읽은 페이지가 이제는 제법 많아졌지만, 그 이상으로 짙은 안개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하다. 짙은 어둠 속을 헤매는 마음을 뒤로 하고 일단 다음 권으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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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7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07 10: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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