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하느님>에서 권정생은 이렇게 말한다. 


"겨울이면 아랫목에 생쥐들이 와서 이불 속에 들어와 잤다. 자다 보면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옷 속으로 비집고 겨등랑이까지 파고 들어오기도 했다. 처음 몇 번은 놀라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지내다 보니 그것들과 정이 들어 버려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을 놓아두고 기다렸다." <권정생의 낯선 사랑법> 中


 오늘 성당 주보에 실린 글을 읽다 낯익은 이름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 마음을 품고 집에 돌아와 아이책 중 <강아지똥>을 모처럼 꺼내어 다시 읽어본다.

 

 "뭐야! 내가 똥이라고? 더럽다고?"

 강아지똥은 화도 나고 서러워서 눈물이 나왔어요.(p2)


"난 더러운 똥인데, 어떻게 착하게 살 수 있을까? 아무짝에도 쓸 수 없을 텐데......." 강아지똥은 쓸쓸하게 혼자서 중얼거렸어요.(p8) 


 "네가 거름이 돼 줘야 한단다." "내가 거름이 되다니?" "네 몸뚱이를 고스란히 녹여 내  몸속으로 들어와야 해. 그래야만 별처럼 고운 꽃이 핀단다."(p10) 


 봄이 한창인 어느 날, 민들레 싹은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웠어요. 향긋한 꽃 냄새가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어요. 방긋방긋 웃는 꽃송이엔 귀여운 강아지똥의 눈물겨운 사랑이 가득 어려 있었어요.(p13) <강아지 똥> 中


 <강아지똥>의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지만, 몇 번을 읽어도 마음에 잔잔함을 퍼뜨린다.  말 그대로 강아지 똥이, 시간이 흘러 새로운 생명 민들레 싹을 틔워내는 이야기안에는 어떤 아름다움이 담겨있을까. 얼핏 <강아지똥>의 이야기는 다른 동화, 특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 ~ 1875)의 전래 동화와 많은 닮은 듯하다.  

 

 오리 새끼는 물 위로 날아가서는, 아름다운 백조들 쪽으로 헤엄쳤다. 백조들이 오리 새끼를 발견하더니 날개를 펼치고 그를 만나러 달려왔다. "좋아. 나를 죽여, 죽여봐"하며 불쌍한 새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죽음을 기다리듯이 머리를 물 쪽으로 숙였다. 그런데 맑은 물 표면에서 오리 새끼가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오리 새끼는 자신이 더 이상 꼴사나운 새가 아니며, 못생기고 불쾌한 얼굴도 아님을 깨달았다. 그 자신이 바로 한 마리 백조였다!(p382) <주석달린 고전동화집, 미운 오리 새끼> 中


  "한 인간이 너를 너무 사랑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보다 너를 더 소중히 여긴다면, 또한 그가 가슴과 영혼으로 너를 사랑하고 성직자 앞에서 지금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너에게 충실하고 진실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너의 손에 그의 오른손을 올려놓으면, 그의 영혼이 너에게로 미끄러지듯 들어오게 될 것이고, 너도 인간이 누리는 행복의 몫을 얻게 될지도 모르지.(p401)... 왕자님과 불멸의 영혼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난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p403) <주석달린 고전동화집, 어린 인어 공주> 中


  남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주인공이 새롭게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다는 이야기는 <미운 오리 새끼>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면에서는 <작은 인어 공주>유사점이 있는듯하다. 그렇지만, 내용적으로 보다 깊게 들어가면이들 안데르센 동화와 <강아지 똥>은 크게 2가지 면에서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오리 새끼가 아름다운 백조로 변신하는 이 고전동화는 여러 세대에 걸쳐 자신감 부족과 소외감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작품으로 읽혀왔다. 미운 오리 새끼는 자기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초라한 상황을 벗어난다. 오리 새끼는 때가 될 때까지 그저 묵묵히 굴욕과 궁핌 그리고 위험 요소들을 참아냈을 뿐이다.(p366)... 안데르센은 미운 오리 새끼의 타고난 우수성이 다른 혈통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오리들과는 다르게 미운 오리 새끼는 백조알에서 부화된 것이다. 안데르센의 이야기는 왕과 귀좃가회를 아름다음과 연관시키는 문화적 편견을 영속화할 뿐만 아니라,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뇌 속에서 미덕을 찾는 경향, 즉 고통의 숭배를 조장한다.(p367) <주석달린 고전동화집, 미운 오리 새끼 註> 中


 어린 인어공주에게는 조용한 인내심을 넘어서는 세속적인 야망이 있다.(p384)... 어린 인어는 처음에는 바다 마녀가 줄 수 있는 것에 유혹되어 마녀의 처소를 방문하는 데 따른 여러 위험에 용감하게 맞선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왕자를 찌를 칼을 바닷속으로 던져버림으로써, 바다 마녀의 검은 마술을 버리고 불멸의 삶을 얻을 기회를 얻는다.(p385)<주석달린 고전동화집, 어린 인어 공주 註> 中


 <미운 오리 새끼>와 <어린 인어 공주>는 모두 태생적으로 고귀한 존재들이다. 오리 새끼는 '백조'의 혈통을, <어린 인어 공주>는 말 그대로 공주다. 이들은 각각 시련을 겪기는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그들안에 내재(內在)한다. 특히, 미운 오리 새끼에서 그런 면이 두드러지지만, 인어 공주에서도 고귀함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크게 같은 부류로 묶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성령(聖靈)이 육화(肉化)'된 것처럼 보통 이하의 존재로 하강한 후 시간의 흐름 또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상승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마치 플라톤(Platon, BC 427 ~ BC 348) 의 동굴의 비유 또는 기독교의 메시아(Messiah)의 모습이 동화 안에 구현된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림] 무염시태 immaculata conceptio beatae virginis mariae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Feast_of_the_Immaculate_Conception) 


 그렇지만, 강아지똥은 그냥 똥이다... 안데르센 동화의 두 이야기가 금수저의 유학생활을 다룬 이야기라면, <강아지똥>은 흙수저의 삶을 다룬 이야기라고 해야할까. 평범한 이가 발견하는 삶의 의미. 이것이 첫 번째 차이라 생각된다.


 두 번째 차이는 두 이야기에서 고난을 겪고 얻어낸 성취가 '개인' 수준을 넘지 않는데 반해, <강아지 똥>에서는 자신을 넘어섰다는 점에 있다. <미운 오리 새끼>에서 오리 새끼는 '아름다운 미모'를 얻었고, <어린 인어 공주>는 다른 방식의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자신들이 열망하는 것이었지만, 그들을 둘러싼 주변은 이들로 인해 바뀌지 않는다.

 

 단순한 즐거움이나 고통이든 아니면 이들의 변형된 형태든, 사람의 마음에 강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관념들 거의 대부분을 우리는 자기 보존과 사회라는 두 가지 항목 아래 분류할 수 있다(p83)... 개인의 보존과 관련된 감정들은 주로 고통이나 위험이 있을 때 생겨나며 모든 감정들 중에서 가장 강한 감정이다. 어떤 형태로든 고통이나 위험의 관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모든 것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가장 강한 감정인 숭고의 원천이다.(p84) <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中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 1729 ~ 1797)는 <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A Philosophical Enquiry into the Origin of our Ideas of the Sublime and Beautiful>에서 숭고(崇高)의 기원 중 하나를 자기 보존에서 찾고 있다.    

 버크의 관점을 따른다면,  미운 오리 새끼, 어린 인어 공주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숭고미를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강아지똥에서 자신의 삶의 이유를 자신에게서 발견하지 않고, 민들레라는 타자(他者)에 의해 발견된다.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키워낸다는 점에서 이들의 숭고를 넘어선 다른 의미에서 거대함(greatness)이 있지 않을까. ('거대함'은 버크가 <탐구>에서 논하는 숭고함의 필수적 요소이다.) 


 만약, 우리가 <강아지 똥>에서 숭고미를 발견할 수 있다라고 했을 때, 그 숭고미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숭고미의 근원을 우리 문화와 작가에서 찾을 수 있다 생각한다. 먼저,  우리 신화(神話) 안에 담긴 숭고미를 살펴보자. 전국 여러 곳에서 폭넓게 이야기로 전해오는 <당금애기> 속에서 우리는 자기 희생의 신성(神性)을 발견할 수 있다.

 

 (당금애기에서) 운명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실현되는 무엇이 아니다. 거기 대면하여 감당하기를 시작할 때 비로소 그것은 나의 삶이 되어서 의미를 발하게 된다. 이 신화에서 당금애기는 무척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형태로 운명에 휘둘리는 존재로 보이지만, 되짚어보면 그렇지 않다.. 그는 방문 밖으로 나가서 시준님을 대면했고, 그를 방 안에서 들여서 자게 했으며, 그와의 만남을 운명으로 여겨 결연을 받아들였다. 뱃속에 버거운 생명이 자라났지만 마침내 그로부터 도피하지 않았다. 깜깜한 돌함 속에 홀로 갇혀서도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않고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세상의 조롱과 박해를 무릅쓰고서 그 아이들을 키워냈다. 누군가 하면 세상의 신령한 구원자로.(p92)...  당금애기는 이렇게 한 명의 딸로부터 여자가 되고 또 어머니가 된다. 키워지던 존재에서 홀로 선 존재가 되고 타인을 키우는 존재가 된다. 요컨대 당금애기는 자신의 운명과 대면하여 그것을 감당함으로써 존재를 실현한 자였다. 일컬어, 신(神)!(p93) <살아있는 한국 신화> 中 


 이러한 전통 문화의 바탕 위에 고된 삶에서 피어난 연꽃 같은 작가의 맑은 정신이 <강아지똥>안에 담겨 있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된 것은 아닐까. 마침 오늘 미사 주보에 실린 짧은 에세이 중 작가 권정생(權正生, 1937 ~ 2007)에 대한 이야기를 옮겨 본다.


 권정생은 살아있는 모든 목숨이 애틋했다. 개구리든 생쥐든 메뚜기든 굼벵이든 같은 햇빛 아래 같은 공기과 물을 마시며 고통도 슬픔도 겪으면서 살다 죽는게 아닌가, 연민을 느꼈다. 그에겐 위아래가 따로 없었다. 기름진 고깃국을 먹은 뱃속과 보리밥을 먹은 뱃속으로 위아래를 나누는 나누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 했다. 약탈과 실인으로 살찐 육체보다 성실하게 거둔 곡식으로 깨끗하게 살아가는 정신이야말로 참다운 인간의 길이라 믿었다. 그래서 제국주의도 전쟁도 빈부도 독재도 분단도 미워했다. <권정생의 낯선 사랑법> 中


  <강아지똥>안에서 <당금애기>에서와 같은 숭고를 넘어선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넘어선 타인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강아지똥>안의 아름다움은 이러한 전통의 아름다움 위에 작가 권정생의 아름다운 정신이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강아지똥>의 이야기는 순박하고 정겹다. 그리고, 이러한 숭고미가 있기에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널리 읽히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PS. <캘리번과 마녀 Caliban and the Witch>>의 저자 실비아 페더리치(Silvia Federici)가 말한 자본주의가 살해한 여신(女神)의 모습 안에는 위와 같은 숭고미도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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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9-08-05 0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서양의 차이만 보기보다 작가의 세계관(물론 사회 인식 반영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차가 크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어렸을 때 자신의 부모가 사실은 가짜이고 진짜 부모는 대단한 사람일 것이라고 착각하는 단계가 있잖아요. 그런 게 이야기에 반영된 게 더 크다고 저는 생각되네요^^;
그럼에도 권정생 선생의 아름다운 정신은 존경스럽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8-05 08:28   좋아요 1 | URL
AgalmA님 말씀처럼 작가 역시 사회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기 때문에, 이들을 구별하는 것이 사실 어렵다고 여겨집니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세계관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지요. 그렇지만, 동시에 이러한 작가의 진심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토양 또한 중요하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cyrus 2019-08-05 16: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버크가 말한 숭고는 거대한 자연(바다, 깎아지른 절벽이 있는 산)을 마주할 때 두려워서 아찔함을 느끼는 감정 상태라고 정의한 걸로 알고 있어요. 제가 버크의 책을 더 읽어보고 난 후에 제 의견을 밝혀야겠지만, 어떤 존재의 자기희생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을 버크의 숭고와 연관 짓는 겨울호랑이님의 설명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버크가 숭고의 개념을 말할 때 언급한 ‘거대함’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겨울호랑이 2019-08-05 18:46   좋아요 1 | URL
cyrus님께서 말씀하신 버크의 숭고와 관련된 부분을 옮겨보겠습니다.

‘자기 보존과 관련된 감정들은 고통이나 위험에서 생겨난다. 그 원인이 직접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경우 그러한 감정들은 그저 고통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상황에 처해있지 않으면서 고통이나 위험을 느낄 경우 그러한 감정들은 우리에게 안도감을 준다. 이러한 안도감은 고통에서 생겨나며 실질적인 즐거움과 다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즐거움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안도감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을 숭고하다고 부른다. 자기 보존과 관련된 이러한 감정들은 모든 감정 가운데서 가장 강한 것들이다.(p98)‘<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中

저는 위의 책에서 버크가 말한 ‘숭고‘의 개념을 절박한 위험이나, 두려움, 고통에서 벗어난 직후 경외감, 두려움 등이 짙게 배인 평온함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버크가 말한 ‘숭고의 원천‘ 중 자기 보존이 가장 강력하다는 것은 cyrus님께서 말씀하신 상황에서 자신의 안전 욕구가 가장 감정의 욕구라는 말이라 여겨집니다. 이는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이론과도 통한다 생각합니다... 잠시 엇나갔습니다만, 그렇게 본다면 버크의 ‘숭고‘는 ‘평안함을 주는 가장 강한 감정이 상태‘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신의 안전‘을 뛰어넘은 ‘자기의 희생‘은 더 숭고하다 생각됩니다. 자신의 안전이 ‘better‘라면 자기 희생은 ‘the best‘가 아닐까 생각해서 논리를 전개했습니다... 설명의 부족함이 있더라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019년 8월 2일 일본에서 한국을 백색 국가 리스트에서 제외함으로서, 사실상 양국은 경제전쟁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의 반발로 시작된 경제갈등의 기원이된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자.


 1947년  이래로 미국 외교정책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일본의 경제적 영향력을 한국에 다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p448)...  케네디의 취임 이전 혹은 1961년 군사쿠데타 이전 한일관계에서 중요한 진정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후 미국정부는 국교정상화를 강하게 밀어붙였고, 로스토우와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는 일본이 동북아시아 지역경제의 축이 되도록 압박하는 애치슨의 전략을 사실상 되살려놓았다.(p450)... 박정희와 김종필을 위해 일정 몫의 정치자금을 분담하는 문제에서도 일본인들은 쩨쩨하게 굴지는 않았다. 미국 CIA의 정보에 따르면 1961년에서 1965년까지 일본회사들이 한국 집권당 예산의 3분의 2를 제공했는데, 6개 기업들이 6,600만 달러라는 엄청난 액수를 기부했다. 그럼에도 정상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배상을 원하고, 일본인들은 '배상'이라고 불리지 않는 조건이라면 한 보따리의 원조와 차관을 내놓을 용의가 있었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의 대표들은 미해결로 남아 있는 모든 쟁점들에 대한 합의안을 발의했고, 대한민국 국회는 1965년 8월 14일 협정을 비준했다. 이 협정은 한국 경제에 경이로운 일을 해냈으나, 이 타결이 차후 일본에 대한 청구의 가능성을 없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p451)... 국교정상화로 대한민국은 일본으로부터 1965년 달러로 3억 달러의 무상 원조와 2억 달러의 차관을 받았으며, 일본의 민간기업들이 3억 달러를 더 투자했다. 결국 박정희는 1960년대 초에 미국으로부터 거절당한 강철공장을 건설하는데 이 돈과 일본의 최신기술을 사용했는데, 그는 이 공장을 자신의 고향에서 별로 멀지 않은 포항에다 세웠다.(p452)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中


 지난 2016년 체결된 한-일 정보보호협정(GSOMIA)가 미국의 이해를 위해 한-미-일 동맹의 수단으로 체결되었듯이, 그 이전의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역시 미국의 이해를 위한 방편이었다. 그 결과 일본은 '배상'이 아닌 '독립축하금' 명목의 과거 문제 해결을, 한국은 유/무상 원조와 차관을 통해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는 우리에게 양날의 검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1960년대 압축성장기에 공산주의 소련의 콤비나트(Kombinat)를 모방한  산업기지 조성과정에사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면, 환경 오염 문제, 지역불균형 발전의 문제 등이 대표적인 문제점이라 하겠다. 박정희 고향 지역인 경상도에 조성한 신흥공단들로 인해 식수원으로 활용되는 낙동강에 인근 공단의 폐수가 유입되는 공해 문제와 전라도 등 비경상도 지역의 불균형발전 문제가 이 시기부터 불거지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 대한 기술종속 문제 역시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기계공업 낙후의 보다 중요한 원인은 기계공업의 개발 주체인 대기업이 기초 기계공업 개발에 의욕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기업은 내부적으로 조립가공업에 집중함으로써 장기투자가 필요한 기계공업을 외면하고 있었다. 또한 기계공업은 종합도면 위에서 부품생산을 분업화하고 그 단위마다 전문화를 통한 기술개발 효과, 규모의 경제를 추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기업들은 도급업체에 중요한 결정권을 주어 매이는 것을 싫어해 비합리적인 한국형 도급구조를 만듦으로써 기계공업의 발전구조를 원천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결국 세계 일류제품을 만들면서도 핵심부품은 미국, 일본에 의존하는 기술구조가 지속되었고, 이는 부가가치율의 하락과 해외 요인에 의한 공업구조의 불안정이라는 한국공업의 약점으로 지속되었다.(p425) <새로운 한국경제발전사> 中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에 내재된 정치적 문제와 일본의존의 제조업 구조라는 경제적 문제가 얽힌 이 번 문제는 한국과 일본의 국가간 경제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모양새다. 당초 삼성전자, SK 하이닉스를 겨냥했던 수출규제가 한국수출품목 전반으로 확대되면서, 일본 상품/서비스 불매 운동도 한층 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오늘 있었던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 모두발언과 이를 보도하는 언론 보도를 접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을 분석한 <사생활의 역사 Histoire de la vie privee>의 내용을 떠올리게 된다. <사생활의 역사>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4년의 시간동안 지속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로 '민족주의(民族主義, ethnism'를 지목한다.


 양 진영에서 모두 짧게 끝나고 만 1917년 소요와 달리 병사들은 어떻게 4년 이상을 '버틸 수' 있었을까? 그리고 마지막 가설은 모든 병사들이 민족주의 윤리에 의해 움직였다는 것인데, 당시의 민족주의는 알자스와 로렌의 상실로 한층 더 격화되어 있었다. '독일놈'은 대대로 내려오는 원수이며 우리 두 지방을 빼앗아간 약탈자이며 침략자이다. 그리고 정의와 법은 프랑스 편이다. 진짜 '애국교'라고 할 만한 것이 생겨났다. 교회에 속하지 않은 일반 학교에서도 이러한 종교를 주입했으며 수도회 소속 학교들에서도 가르쳤다. 민족주의는 우파와 좌파 모두가 공유하는 '가치'였다. 오로지 극소수 좌파만이 이러한 가치에 이의를 제기했다. 1914년 국제 협력 제체의 완전한 붕괴는 바로 이러한 민족주의로 설명된다.(p287) <사생활의 역사> 中


 이번 사태의 시작은 과거 불완전하게 봉합된 국가 간 협약의 문제가 표출에서, 이에 불만을 품은 '국가'가 '글로벌 대자본'의 국제 공급망에 대한 제재가 이어졌고, '민족주의' 감정의 분출과 함께 수출규제 확대-보복으로 갈등이 확산되고 있는 모양새다. 이제는 갈등이 고조되어, 거의 절정에 이르렀다고 여겨지는 지금 에릭 홉스봄(Eric John Ernst Hobsbawm, 1917 ~ 2012)이 <제국의 시대 The Age of Empire 1875 ~ 1914>에서 규명하는 제1차 세계대전의 본질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경제적 세계는 19세기 중반에 그랬던 것처럼 유일한 항성인 영국을 둘러싸고 회전하는 태양계가 더 이상 아니었다. 영국의 상대적인 침체는 점차 분명해졌다. 이제 경쟁적인 다수의 산업경제국들이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하에서 경제적 경쟁은 국가들의 정치적인, 심지어 군사적인 행위와 맞물려 요동쳤다. 대공황기에 보호주의가 부활한 것은 이러한 현상이 초래한 최초의 결과물이었다.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정치적 지원은 외국과의 경쟁에서 보호받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으며, 일국적인 산업경제들이 상호 경쟁하는 세계의 일부에서도 마찬가지로 필수적인 것이었다. 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경제는 국제적인 힘과 그 범주를 충족시켜주는 기반 바로 그것이었다. '강력한 경제'를 동시에 갖지 않는 '강대국'은 이제 인정될 수 없었다.(p550) <제국의 시대> 中


  '저출산-고령화'와 빈부격차의 확대 등으로 인한 구조적인 경제침체 아래에서,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의 도약 등의 현상황 역시 본질은 같지 않을까. 여기에, 미국의 한-일 갈등 중재 시 호르무즈 해협 파병 요청을 대가로 요청했다는 사실도 함께 놓고 본다면 홉스봄의 제1차 세계대전 분석이 더 의미있게 다가온다. 만약, 그렇다면 '민족주의'의 이름 하에 수없이 죽어간 일반병사들은 누구를 위해 싸운 것일까? 이러한 물음과 함께 과거의 기억을 소환해 본다.


관련기사 : http://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903190.html


 경제적 그리고 정치-군사적 힘에 대한 정체성을 대단히 위험하게 몰아갔던 것은 세계시장과 원료를 둘러싼 국가들의 경쟁뿐 아니라, 경제적/전략적 이익이 흔히 중첩되고 있었던 중동과 근동 같은 지역의 통제를 둘러싼 것이기도 했다. 1914년 훨씬 이전에, 중동의 석유를 둘러싼 외교는 이미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p551) <제국의 시대> 中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이다. 1998년 지금은 사라진 을지포커스렌즈(Ulchi-Focus Lens) 훈련에 군단사령부에 소속되어 작전에 참가했었다. 당시 지휘부에 속했기 때문에 지하벙커에서 상황조치를 하면서 훈련을 경험할 수 있었다. 사령부는 지하벙커에 있어 한여름에도 안전하고, 편안하게 전쟁을 치룰 수 있었다. 일선부대에서 행군을 하면서 기동훈련과 사령부에서 경험한 훈련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야전에서는 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을테지만, 사령부에서는 상황판의 숫자로 표시되는 전쟁의 양상은 충격이었다. 차가운 전쟁. 그것이 사령부에서 내가 경험한 모의전쟁이었다. 그리고, 이번 경제 전쟁에서 사회 지도층이 겪는 전쟁 양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여겨진다. 


 삼성, 현대 같은 대기업들은 생산차질이 빚어지면, 생산물량을 줄이거나 감원을 하면서 생산라인을 바꾸며 글로벌 기업으로 생존하겠지만, 하청을 받아 사업을 운영하는 중소기업은 도산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소속된 가계는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소비자로서 불매운동을 하는 차원이 아닌, 가계가 생계위협에 노출되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그 가족들에게 '우리는 일본을 이길 수 있다'라는 구호가 의미있게 다가올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일이 지금 나와 내 가족에게 일어났을 때에도 우리는 막연하게 '일본을 이겨야한다'는 구호와 지금 이 분위기를 이어갈 수 있을까.


 베르됭에서 프랑스인들이 보여준 믿기 힘들 정도의 저항은 범상한 참모부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 병사들, 특히 '1914년의 용사들'에게 돌아가야 할 명예였다. 신념의 윤리와 인격의 윤리가 프랑스 병사들에게 전쟁의 운명은 그들의 용기에 달려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p283) <사생활의 역사> 中


 이번 한-일 경제갈등의 뿌리는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없음으로부터 출발했기에 한국인으로서 일본 정부의 이번 조치에 대한 분노가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한-일 경제전쟁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서는 분노 이전에 냉정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또한, 정부는 일본에 대한 보복카드를 뽑아들기 이전에 민간 피해 최소화에 대한 대책을 조속히 국민에게 알려야 할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유럽의 젊은이들이 전쟁이 단기전으로 끝날 것으로 예상하며 들뜬 마음으로 자원했다가, 실상이 기관총, 철조망, 독가스로 인한 학살의 현장임을 깨닫고 멘붕에 빠졌듯이, 이번 한-일 경제전쟁이 마찬가지 양상으로 빠지지 않고, 진정한 해방/독립의 원년이 되길 희망하며 이번 페이퍼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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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8-03 0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또다른 전범국가 독일과 다른 방식의
역사 왜곡이 이번 사태의 근원이 아닐까
추정해 봅니다.

과거에 대한 반성 없는 나라의 비극이
라고 해야 할까요.

겨울호랑이 2019-08-03 10:45   좋아요 0 | URL
레삭매냐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자신들 행동에 대한 반성보다 책임 떠넘기기식의 태도로 인해 과거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 전후 천황제의 존속이 전후 처리에 큰 문제임을을 지적하는데, 이또한 역사 인식의 문제와 직간접의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2019-08-03 0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03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8-03 1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 일로 한국사람이나 일본사람 모두에게 ‘국뽕’ 맞는 계기가 안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9-08-03 15:51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비록 이번 일이 경제 문제 외에 역사 문제도 연관되어 있지만,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여러모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일시적인 감정에 휩쓸려 일본 관광, 일본 맥주 불매 운동을 하기보다는 우리 주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일본어, 일본에 종속된 산업 구조, 식민 사관에 의해 왜곡된 역사 인식 등 우리 생활 전반을 돌아볼 때라 여겨집니다. 냉정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번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8-03 18:53   좋아요 1 | URL
네 그렇습니다, 국수주의가 아닌 칸트의 세계 시민주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9-08-03 18:55   좋아요 0 | URL
네 또한 가라타니 고진과도 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oren 2019-08-03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나라 사이에 켜켜이 쌓인 앙금을 최대한으로 가라앉히고 조금씩이나마 미래지향적으로 공존, 번영하는 길이 불행한 과거사를 극복하는 길임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독 아베 정권에 와서 한국 때리기가 나날이 극심해 지고, 우리 정부에서도 뾰족한 대책도 없이 줄곧 맞장을 뜨는 식으로 대응한 게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게 아닌가 싶어 몹시 속이 상합니다. 가증스런 일본놈들을 죽도록 두들겨 패고 꺾어 이기고 싶은 마음이야 누구에겐들 없겠습니까만, 죽창가니, 의병 운동이니, 단호한 대응이니, 국민들의 저력을 믿는다는 식의 공허한 구호만을 내세워서 이 난국이 타개될까 심히 우려됩니다. 국민들은 가뜩이나 어려워지는 경제 상황 때문에 앞이 캄캄하다고 하루하루 가슴을 졸이는데, 위정자들은 마치 국민 총동원령이라도 내리듯이 살벌한 ‘일전 불사‘만 외치고 있으니 그저 딱할 노릇입니다.

이번에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가장 중요한 계기는 개인의 청구권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일 텐데, 그 판결을 둘러싼 해법만이라도 양국이 좀 더 일찍 서로 머리를 맞대고 풀어봤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큽니다. 이제는 갈등의 골이 깊어져 ‘배상 문제 해결‘이 이뤄지더라도 ‘화이트리스트 배제‘가 원상복구되기 어렵다는 전망까지 나오는 판국이니, 양국의 통치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사태를 여기까지 이끌고 온 것이며, 무엇을 더 얻기 위해 ‘궁극적인 문제 해결‘은 한 켠으로 밀어놓은 채 끊임없이 싸움판만 키운단 말인가요.
* * *
˝진실로 옳구나! 이러한 말들이여. 법령이란 다스림의 도구일 뿐 백성의 맑고 탁함을 다스리는 근원은 아니다. …… 간사함과 거짓은 싹이 움트듯 일어나 극도에 이르러 …… 백성의 혼란이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관리들은 불을 그대로 둔 채 끓는 물만 식히려는 것처럼 정치를 조급하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하고 준엄하며 혹독한 사람이 아니고야 어떻게 그 임무를 즐겁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 사마천, 『사기 열전_2』, <혹리酷吏 열전> 중에서

겨울호랑이 2019-08-03 16:15   좋아요 2 | URL
그렇습니다. 경제 도발과 이에 상응하는 대응이 이어질 경우 일반가계의 피해가 염려됩니다. 예를들어 세븐일레븐 편의점주의 경우 불매운동으로 매출에 타격을 받으면서도, 일본 제품을 팔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입게 된 수천만원의 피해에 대해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경제 전쟁이 장기화된다면, 정치권에서는 총선에서 표를 얻을 것이고, 국내 글로벌 기업은 시장다변화와 구조조정의 기회를 얻게 되겠지만, 민간 가계에게 돌아가는 실리는 없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대책마련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여겨집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8-03 20:15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국가주의에 놀아나면 안 됩니다. 어설픈 애국주의에 결국 피해는 개인만 보는 것 같습니다.
 


 <환단고기 桓檀古記>는 계연수(桂延壽, ? ~ 1920)가 1911년 간행한 것으로 알려진 책이지만, 정통사학계에서는 이를 위서(僞書)로 판단하고 있어 역사사료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환(한)단고기>와 인연은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988년으로부터 시작된다. 중학생이었던 당시 <단 丹>과 함께 흥미롭게 읽었던 책으로 <환단고기>를 기억한다. 소설 <단 丹>도 역시 인상적인 소설이었는데, 특히 소련연방 해체 전에 이를 예언(?)한 내용이 담겨 있어서, <한단고기>는 강대한 우리 조상들의 역사가 담겨 있어 흥분하며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최근 <환단고기>를 다시 읽을 기회가 있어 다시 읽었지만, 예전과는 달리 <환단고기>는 벅찬 감동 대신 몇 가지 의문을 내게 주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환단고기>를 읽으면서 전에 읽었을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충격을 몇몇 대목에서 받았다. <환단고기>의 목적성이라고 해야할까. 역사서로서의 사실 여부를 떠나 그 안에 담긴 목적이 너무도 뚜렷하기에, 책을 읽기 많이 어려웠다. 그 중 한 대목을 살펴보자. 


於阿 於阿여 

我等百百千千人이 皆大弓堅勁同心하니 倍達國光榮이로다.

百百千千年의 大恩德은

我等大祖神이로다.

我等大祖神이로다.


어아어아

백백천천 우리모두 큰 활처럼 하나되어

굳세게 한마음 되니 배달나라 영광이로세

백백천천 오랜 세월 크나큰 은덕이시여!

우리 대조신이로세.

우리 대조신이로세.<檀君世紀> 中(p105)


 천조대신(天祖大御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을 연상하게 만드는 대조신(大祖神)이라는 단어에서 내선일체(内鮮一体)를 표방한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이 떠올랐다면 지나치게 나간 것일까. 일본인과 함께 아마테라스를 조상신으로 받아들이는 내용의 노래를 통해 전율을 느꼈는데, 역자의 주(註)는 나의 생각이 지나친 공상만은 아니라는 것을 뒷받침한다.


환국의 일곱 분(7세) 환인과 일본 창세기의 족보


<일본서기 日本書紀>와 <고사기 古事記>에 일본 건국신화의 신이 7세(대)로 되어 있음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일본 창세기의 신세 7대는 환국의 7세 환인과 유사성이 크다. 일본 역사는 우리 조상들이 건너가 세운 기록이기 때문에 일본의 창세기에서도 인류의 종주 민족인 한민족의 뿌리 역사가 당연히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桓國本紀> 註 中(p346)


그리고, 12환국과 그 위치를 알려주는 <환국본기 桓國本紀>의 내용 안에서 '국(國)'의 사용이 어딘지 어색하게 느껴진다.


天海以東之地를 亦稱波奈留國也라

基地廣이 南北五萬里오 東西二萬餘里니 摠言桓國이오 


천해 동쪽 땅을 또한 파내류국이라 부르는데, 그 땅의 넓이가 남북으로 5만 리요 동서로 2만여리이다. 이 땅을 모두 합하여 말하면 환국이오. <桓國本紀> 中(p340)


  '國'이라는 단어는 한자 사전에 의하면 회의(會意)이며. 갑골문(甲骨文)에는 마을을 본뜬 글자에 창을 뜻하는 과(戈)가 결합하여, 무장한 마을을 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환국이 오래되었다면, 갑골문이 형성된 시기이거나 또는 그보다 이른 시기에 존재했을텐데. 국(國)의 의미가 마을 또는 도시 정도의 규모를 넘지 않음에도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의 영토를 가진 나라를 같은 뜻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환단고기>에는 이에 대한 반박 또한 실려있다. 근대에 이르러 사용된 용어가 혼용(混用)된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며, 만일 그렇다고 해도 <환단고기>가 위서임을 증명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환단고기>p102 참조).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논거의 타당성에 대해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의심을 거둘 정도의 설명은 못 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환단고기>가 만약 위조되었다고 하다면 무슨 의도가 있을까? 이에 대해서 환단고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시점이 일제(日帝)강점기라는 상황을 고려해볼 때, 같은 시기 중국에서 등장한 <이하동서설 夷夏東西設>을 놓고 함께 바라본다면 어느 정도 의도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1933년 푸쓰녠(傅斯年, 1896 ~ 1950)에 의해 주장된 하상이원론(夏商二元論)에 따르면 역사 속의 하(夏)나라와 상(商, 은 殷)나라는 다른 민족에 의해 세워진 나라들이다. 푸쓰녠은 하나라는 서쪽의 화하족(華夏族)에 의해서, 상(은)나라는 동쪽의 동이족(東夷族)에 세워졌으며, 중국문명은 이러한 상이한 두 민족의 갈등과 대립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주장인데, 현재는 퇴조한 사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하동서설>은 이러한 푸쓰녠의 사상이 담긴 책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하동서설>의 문제점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전문적인 내용은  학자들의 몫이겠지만, 이 주장이 나온 1930년대에 대해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에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으로 일본 관동군이 만주(滿州)를 침략해 이듬해인 1932년 만주국(滿州國)을 세우게 된다. 대륙침략의 야욕이 드러난 이 시기에, '이하동서설'이 나온 것이다. 동쪽의 오랑캐와 중원 민족의 다툼이 1930년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있었다. 그러니, '중화민족이여 깨어나라!'라는 목소리가 '이하동서설'에 전혀 없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도] 만주사변(출처 : http://crisissome.blogspot.com/2016/03/manchurian-incident-and-manchukuo.html)


 이와 대칭적으로, <환단고기>에서는 몽골-만주-조선-일본의 대동이(大東夷)가 환국(桓國)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중국 왕조를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는 내용은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역사적 기원이 되기에 조금의 부족함이 없다 여겨진다. 그렇게 본다면, <이하동서설>과 <환단고기>는 20세기 민족주의(民族主義) 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일종의 어용(御用) 사학이 아니었을까.


 <이하동서설>과 <환단고기>의 내용을 실증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어, 말하기 어려우나 이들 책이 나온 시점은 그 의도가 불순하다는 의심을 하기에 충분하다 여겨진다. 


 사람은 부족함이 많기 때문에 많은 실수를 해왔다. 그리고, 역사(歷史)는 부족함이 많은 인류(人類)의 기록이다. 때문에, 마치 수험생들의 기출문제처럼 우리는 역사 속의 교훈을 통해 앞으로 나갈 방향을 찾는 것이고, 이것이 '과거와 미래의 대화'의 진정한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부끄러운 역사와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교훈을 깨닫지 못하는 부끄러운 자신 또는 역사의 교훈을 깨달은 똑똑한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이유로 현세의 이기적 목적을 위한 역사의 왜곡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지며, <이하동서설>과 <환단고기> 역시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吾桓建國이 最古라. 우리 환족이 세운 나라가 가장 오래 되었다.<삼성기전  상 三聖紀全 上>(p17)


 <환단고기>이 일부인 <삼성기전  상 三聖紀全 上>의 첫 문장을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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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owurself 2021-03-23 17: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국쪽에서 동이라는말은 대륙안에서의 동쪽한반도와만주간도 등 그 위치쪽에서 살고 활약했던 사람들 즉 한국쪽을 의미하지 애초에 대륙에 있지도 않은 일본은 포함되지 않으니 대동이를 그렇게 보는 것 자체가 이후대동아공영권이라는 헛소리를 한 일본의 생각을 대변해 주는 것이고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다고 봅니다. 삼국시대 사신들의벽화에서만 봐도 최대의 문명국 모습을 보여주는 우리삼국의 사신들과는 달리 왜는 신발조차 없는 맨발의 후진적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위대한 문명을 가진 동이족이었다고 묘사된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우리 삼국쪽에서 왜에게 문화와문명을 전수해 주었으니 더더욱이나 일본은 동이국에 속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대륙문명과는 무관합니다. 중국등의 역사서는 중국문명 위주로 쓰이고 타민족의 역사는 의도적으로 삭제축소시키거나 실존이 아닌 것으로 신화화했다고 많은 비판을 받았고, 일제에 의해서 우리 고역사서는 거의다 소멸되고 단군마저 없는 역사인양 이야기수준으로 만들어버렸는데 그나마 현존하는 우리의 역사서를 일부의퍼센트로위서판명운운하며 폄하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역사연구의 실마리로 삼고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더욱 적극적으로파고들어 고증보완하고 조상들의 대륙에서의 발생과활약들을 제대로 연구하여 후대에 소중하게 남겨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사족이긴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일본키티캐릭터라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웃음이나는군요..

겨울호랑이 2021-03-22 12:57   좋아요 0 | URL
먼저 제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답을 남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white님께서 남겨주신 글의 요점은 1) 일본은 동이족이 아니다. 2)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다 3) 일본 캐릭터인 헬로키티를 프로필 사진으로 쓰면서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주장을 하지 마라. 로 정리될 수 있을 듯 합니다. 먼저, 2) 환단고기가 위서가 아니다 ->이 주장은 white님의 주장이고, 위서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이는 white님의 인정 여부와는 관련이 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근거를 원하시면, white님께서 직접 찾아보시면 어렵지 않게 위서의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이와 관련된 반론이 있으시다면 비전문가인 제가 아닌 역사학계에 반론제기를 추천드립니다. 1) 일본은 동이족이 아니다. -> 제가 잘못 알고 있지 않다면, 황화와 양자강 사이 중원(中原)이라 부르는 지방 동쪽 민족을 통칭해서 동이(東夷)라고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일본이 동이에 포함된다고 보는 편이 보다 더 일반적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일본 또는 왜(倭)의 기록이 고대에는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일본은 동이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white님께서는 말씀하시겠습니다만... 정설이 없는 상황에 여러 주장이 난무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이 경우 일본을 동이에서 빼야한다고 말씀하시는 white님의 주장은 역사적 사실이라기 보다는 신념이라 생각되기에 3자인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됩니다. 마지막 3) 헬로키티라는 일본캐릭터를 프로필 사진으로 사용하면서 적절치 않은 말씀을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관점의 차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white님께서 프로필 사진을 보고 ‘일본 캐릭터‘라고 보시는 듯 합니다만, 제게는 ‘사랑스러운 딸아이가 만든 틱톡블록‘ 입니다. 이 정도면 3)에 대한 답변으로 충분하다 여겨집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white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담긴 책과 논문 등을 알려주시면 기쁜 마음으로 제 부족한 점을 채우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오후 되세요...

2021-03-22 1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22 1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knowurself 2021-03-23 0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님의 타인의 말을 1.2.3번으로 일축시켜버리고 특히 사족이라 밝힌 단순 느낌을 솔직히 표현한 3을 보고 타인의 말을 님 뜻대로 왜곡하는 솜씨를 잘 보았고 이로써 친절하게 말씀하시는 듯 하나 일면으로는 식민주의역사관을펼치는 사람들처럼 뒷받침도없이 강한 일방향의 주장을 하심으로 역시 처음의 찜찜한 느낌이 맞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환단고기는 일부의 내용에위서논란이 있었으나 식민사관역사학자들이 아니라면 모두에게 위서판명이 난 역사서가 아닙니다. 특히 당시 왜가 동이가 아닌 이유는 다양한 역사서에서 증명하고 있고 하나의 예만 들어 보더라도 뚜렷이 파악할 수 있습니다. - 중국을 대표하는 강은 양자강과 황하이다. 양자강 남부를 고대 중국인들은 월(越)이라 부르면서 자신들과는 다른 민족이 사는 땅으로 간주했다. 중국인들도 자신들의 발상지는 황하이므로 일반적으로 염황족 또는 화하족으로 불렀다. 그러므로 양자강 남쪽의 오늘날 절강성 일대는 화하족의 손이 미치지 않는 땅이므로 ‘백월(百越)’ 또는 ‘백오(百奧)’라고도 불렀다. 이는 중국 중원에서 볼 때 너무 멀고 외지라는 뜻이다. 중국과 다르다고 중국인조차 인정한 월족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중국 학계조차 이견이 많은데 가장 근접한 대답은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고 이들 풍습은 중국의 화하족과는 생활습관이나 언어, 문화 등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하튼 월족이 어디서 왔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월족의 조상으로 황하의 홍수를 다스렸다는 우(禹)의 후손이라는 설명이 사마천이 쓴 월왕구천세가에 나온다. ‘월왕 구천의 조상은 우의 후예이며 하왕조의 후제 소강의 아들로서 회계(會稽)에 봉해져 우의 사당을 지켜왔다.’ - 우리나라에 있는 우씨는 하나라 우임금의 후손이며 동이족이 세운 중국최초의 국가 하나라는 후에 갑골문자 등을 만든 은나라로 이어집니다. 우씨 자체를 한자로 찾아보면 하나라 우임금의 후손이라는 의미가 들어간 임금우 하우씨우를 씁니다. 이 역사에 비교 문명이랄 것도 없었던 왜나라가 들어갈 여지는 없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연구에 참가한 다른 유적으로도 그 증거를 밝힐 수 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3-23 08:16   좋아요 0 | URL
글을 읽다보니, 한 가지 의문점이 들어 여쭤봅니다. 오(吳) 월(越) 지역이면 동쪽 보다는 오히려 남만(南蠻)에 가깝지 않을까요? white님의 말씀대로라면 고대 중국에서 ‘남만‘이라고 불렀던 민족들도, 동이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인지요? 또한 <환단고기>의 내용대로라면, 주나라를 위협하여 낙읍으로 천도시킨 서융(西戎) 또한 대제국의 일부이며, 북적(北狄)이라 불리는 민족 또한 여기에 포함되겠지요. white님의 말씀대로 황하 지역 인근이 모두 하나의 제국이었다면, 이와 같이 중국어에 이와 같은 언어가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제게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이들이 서로 다른 민족 또는 집단이었기 때문에 다른 표현이 남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환제국 안에 12개 연방이 구성되고 고대 수메르 문명 또한 수밀이 왕국으로 제국의 일부라는 <환단고기>의 세계관 내에서는 황하 유역 바깥은 모두 하나의 제국으로 표현됩니다. white님께서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자료나 공인된 책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다만, 일방적인 주장이 아닌 객관적인 근거를 부탁드립니다.

knowurself 2021-03-22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기자는 중국 남방 지역의 월족과 한국인이 같은 부류라고 추정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에 주목했다. 우선 고인돌이 한국인과 월족과의 유대 관계를 설명해주는 실마리가 된다고 설명했다. 고인돌은 세계의 3분의 2가 한반도와 만주를 포함하는 지역에 분포되어 있어 동이족의 대표적인 유산이다. 특히 동이족의 고인돌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대부분의 경우 대형 고인돌이 중앙에 있고 그 주위에 소형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학자들은 고인돌 1톤을 옮기는 데 약 10명의 장정이 필요하다고 계산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고인돌의 상판만 해도 200톤이 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고인돌을 세울 당시에 2천여 명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에 2천명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고인돌을 고고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고인돌에부장품이없더라도 청동기로인정한다는데있다. 학자들은 청동기에 들어서서 비로소 국가라는 구조 형태가 성립될 수 있다고 인정한다.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 장정 2천명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초보적인 위계질서나 제도가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인돌의 건립 상한선이 중요한데 우리나라 전역에서 속속 확인되고 있는 고인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무려 5∼6천 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는 동이족이 중국의 화하족과는 전혀 다른 문명을 독자적으로 영위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일본에서는 2016년에나 와서야 작은탁자형태 고조선식 고인돌이 발견되었는데 이런 일본을 역사기록과도 다르게 동이족에 포함시키려는 님은 어떤 역사관을 지니신 것인지? 일본의 고조선식 고인돌은 학계에서 한반도의 문명이 전달된 증거로 평가되고 있으며 따라서 님이 우기고 싶건 아니건 이들이 동이족이라는 주장 또한 황당한 주장이 됩니다. 이런 2016년에 발견됐다는 고인돌마저 처음에는 의혹의 눈초리로 보아졌는데 그 이유는, 일본이 구석기문명을 통째로 위조하려고 고고학자와 함께 역사교과서에 역사를 실어온것이 가짜로 들통난 엄청난 사건이 있죠. 혹시 고대사의 문명자체가 일천하여 자신의 나라에 없는 구석기시대와 유적을 위조해서 교과서에 싣다가 들통난 후지무라신이치와 그 나라 심각한 역사왜곡을 옹호하고 우리의 역사를 폄하하는 그런 분은 아니시죠? 이게 20세기인 1999년에 있었던 일인데 이런 일본이라는 나라가 식민제국주의 당시 우리나라의 역사는 얼마나버리고 왜곡했을지? 딸의 작은 선물도 큰 의미로 간직하시는 분께서 설마 국적 한국인이라면 나라의 장구한 역사를 폄하하는 그런 분은 아니시기를. 식민주의시대의 심각하게 왜곡되고수정된역사는 모두 제대로 쓰여져야 합니다.

겨울호랑이 2021-03-23 08:02   좋아요 0 | URL
white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어느 부분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주장의 근거는 김상태의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이라는 책에 쉽게 잘 정리되어 있으니 확인하시면 되겠습니다. white님께서 역사 전문가라고 하신다면 저와 같은 비전문가와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는 편보다 학계 전문가들과 직접 논쟁을 하시면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긴 글을 주셨습니다만, 저는 white님께서 쓰신 근거의 출처가 궁굼해집니다. 사마천의 <월왕구천가> 짧은 인용문 뒤에 붙은 긴 수식어의 출처가 믿을만한 근거인지에 대해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그 근거가 믿을만하다면, 저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받아들일 ‘진실’이 되겠지요. 앞서 글에서 밝혔듯 저는 <환단고기>는 위서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 고대사에 대해서 왜곡된 부분이 많다는 것 또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고대사를 다시 들여다 볼 필요는 분명 있지만, 그 길이 <환단고기>는 아니라 여겨지네요. 개인적으로, 단재 신채호 선생, 윤내현 교수의 주장에 상당 부분 공감합니다.

white님의 글을 읽고 나서 님의 서재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이후 일본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white님께서는 제 서재의 다른 글을 읽어보셨는지요. 글이 많다면 제가 요즘 쓰고 있는 3.1 운동 100년 관련 리뷰를 읽으셨는지 궁금해집니다. 오늘도 이와 관련한 글을 올렸습니다. 그 안에 식민지 근대화론과 관련한 제 생각도 담았습니다만, 제가 식민사관론자가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제게 역사왜곡을 한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왜곡인지 white님이 기억하고 싶은 사실과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봅니다. 제게 white님의 주장의 근거를 댓글이 아닌 생각의 근거가 되는 책을 알려주세요. 그리고, 그 책을 통해 white님의 역사관을 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knowurself 2021-03-23 2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탄생정벌이동융성 등 다양한 역사가 펼쳐졌던 고대사에서한지역으로 국한시키거나 한가지 서적으로 모든 걸 말할수 있을까요? 님은 식민주의역사관을 옹호하는 분은 아니시겠지만 증거를 말해도 동이에 계속해서 왜를포함시키며 우기시는 것과 큰 증거보다 작은 사안으로 걸고넘어지는 모습이 항상 그래왔던 숫자하나라도 틀리면 그것봐라거짓이다전쟁범죄는없었다고 말하는 일본극우들의공식이 떠올려졌습니다. 역사서에 대해서 전문 역사가들하고만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건 아니며 소모적이라 생각하시는 것은 님 주장에는 틀린부분이 없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인정하고 싶지 않아 소모적이라 생각하시는 게 아닐지. 님의 생각에도 오류가 있다면 바꾸어야 님께서 말씀하시는 우리 고대사에 대한 왜곡이 많았다고 인정하신 부분이 진심에서 하신 말씀이 될 것입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동이족은 중국동북쪽에 살고 있었던 우리조상들을 지칭한다는 것이 많은 역사서에서의 주류이며 동이족의 초기거주지는 중국 황화하류 산해관이남 지역이었고 한반도지역으로 점차 이동한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중국 후한시대 설문해자에서는 동이의 이가 큰활과 관련되었다고 밝히고 있어 과거부터 활을잘다루어온 우리민족임이었음을 확인시켜줍니다. 동북공정을찬성하지않는 중국학자들마저도 자신들 본류로 여기는 화하의 문화보다 동이족의 문화가 우수했으며 한자의 유래 또한 동이족의 문화로부터 유래하였다고 보았습니다. 대만학자인 서량지교수는 한민족은 중국보다 더오래된역사를가진 민족으로 문자를창제한 민족인데 중국인이 한민족역사가기록된 포박자를감추고 중국역사로조작하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저는 님이 역사왜곡을 했다고 말한 적이 없으며 님께서 타인의 말을 본인 의도대로 123으로 일축하여 왜곡하심에 대한 부분을 지적하였고, 그 배경에는 님께서 말씀하셨듯 제리뷰가 일본에 대해서 부정적이라는 본인의 판단에 있다고 봅니다. 부정적이라 하셨는데 잘못된 식민사관학자에 대한 비판과 일본관련 책을 읽고 열악한 내용들 혹은 무분별하게 남발하는 일본어포함 외래어에 대해 비판하면 일본에 부정적인 것인가요? 읽어볼 가치조차 없는 매국역사왜곡의 책을 제외하고 부정적이기만 했다면 애초에 그런 책들을 사서 읽어보았을까요? 아베와극우일본이 실체를 드러내기 전까지는 일본인 지인들도 있었고 아무리 과거식민역사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과거이고 양국의 관계가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입장에서 일본에 대해서는 중립의 입장이었으나 일본에 대해서 그 실체를 알면 알수록 심각한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과거부터현재까지 도가 넘치는 혐한과 고대 문화전수를 해준 민족에게 침략식민지시대 하나로 말도 안되는 열등민족으로 비하하는 생각이 일본인들의 저변에 기본적으로 깔려있고 산업계로도 외교적으로도 공격을 계속해왔는데 거기에 비판하지 않고 경각심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한국인들은 너무 관대하거나 멍청한것이 되지않을지? 이런저런 이야기는 다 차치하고서라도 구석기시대 유적까지 조작하여 그들의 역사교과서에 실어오다가 탄로나니 한개인의 일탈식으로 무마시켜버린 그런 일본이 아무리 조작하려해도 고대문명의고인돌까지는 조작을 하려야 할수 없으며 동이족에 왜는 포함되지않는다가 최종 결론입니다. 님이 왜를 동이족본류에 포함시키는 한 더 이상 대화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고 님 말씀처럼 소모전일뿐이군요. 님께서 적어도 역사연구에 대해 대체로 중립적이거나 민족주의역사관에 더 관심을 보이시는 분이라면 식민사관역사관에대해서 비판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일견 일치되는 부분이 있을거라는 약간의 희망적인 생각을 해보면서 그만 마치겠습니다. 좋은하루 보내시기를.

겨울호랑이 2021-03-23 21:09   좋아요 0 | URL
white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와 가장 큰 인식의 차이가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습니다. 글을 읽다보니, white님께서는 ‘동이 東夷‘를 현재 우리 민족으로 생각하시는 듯 합니다. 저는 ‘동이‘를 하나의 민족이라 생각하지 않고 중국 동쪽의 여러 민족의 총칭이라고 생각합니다.white님과 제 생각의 차이는 ‘동이‘를 고유명사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일반명사로 받아들이는가의 차이라 여겨지네요. 사실, 제 생각이라기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학설이라는 편이 보다 정확할 것입니다. ‘동이‘를 어느 범주까지 보느냐부터 white님과 차이가 있다보니 제 입장에서도 소모적인 논쟁이라고 여겨집니다. 저는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보편적이고 받아들여지는 사실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에 대해 의미를 부여했을 때 역사관이 세워지고, 역사관을 바탕으로 바른 정신이 자리잡는다고 생각합니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열등의식을 주입하는 식민사관도 경계해야 하지만, 같은 정도로 민족의 영광을 강조하는 역사관 또한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환단고기>에 담긴 사관에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 역시 영광스러운 역사를 거부할 이유는 없지만, 그러한 영광이 근거없는 자화자찬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바른 역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white 님만큼 제가 고대사를 공부하지는 못했겠지만, 저도 다물총서 시리즈, 정신세계사에서 나온 <대동이>, <맥이> 등을 안 읽어본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일방적인 주장만 있고 또한 책들마다 주장도 서로 상이하기에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때문에, 제 생각이 잘 못되었다면 이와 관련된 서적 또는 고고학적 근거등을 알려주신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말씀을 드린 것 뿐입니다. 바쁘신 중에도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white님 좋은 저녁 시간 보내세요.


 

 개항 이후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비록 이민족(異民族)에 의한 타율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지기는 하였지만 당시의 각종 경제제도의 근대화과정이나 경제성장 및 구조적 변동이 얼마나 격렬하게 일어났는가 하는 점 등에 대한 실증적 연구성과가 그것이다. 이러한 실증적 경제사 연구성과를 토대로 하여 17~19세기 조선 후기 이후 오늘에 이르는 한국경제의 긴 역사적 전개과정을 놓고 어떤 측면에서든 기존의 통설과는 다른 시각에서 그것을 재평가/재해석해 보고자 한 것이 이 책을 기획하게 된 주체적 동기라 할 수 있다.(p22) <새로운 한국 경제 발전사> 中


 <새로운 한국경제발전사>는 한국경제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경제사책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수탈의 시대로 알고 있는 일반의 생각과는 달리 이를 통해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고 해석하는 이른바 뉴라이트(New Right) 사관에 입각해 쓰여진 경제사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바라보고 있는 근대화란 무엇일까. 이 책의 공동저자 중 한 명인 서울대 이영훈 교수의 <시장경제제도의 성립과 발전>의 내용을 들여다 보자. 


  1840년대 프랑스 앙뜨완 다블뤼(Antoine Daveluy)주교에 의하면 19세기 조선 사회는 양반 지배계급에 의한 지독한 폭정 아래 놓여있었다. 양반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평민들을 마음대로 구금하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였다. 다블뤼 주교의 기록에는 다소간의 과장도 있어 보이지만, 유사한 내용의 관찰은 이후 조선왕조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기까지 여러 서양인들의 기록에서도 쉽게 발견된다.(p193) <새로운 한국 경제 발전사> 中


 서양인들이 남긴 이러한 기록들은 당시 조선왕조 시대에는 근대적인 재산제도가 성림되어 있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와 더불어, 최근 일련의 연구에 의하면 조선왕조의 경제는 19세기 내내 침체하고 하강했던 것으로, 즉 산림의 황폐, 미곡생산성의 하락, 물가의 상승과 노동자 실질임금의 감소, 그리고 농촌시장의 분열이 행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조선왕조는 이러한 심각한 경제 침체의 결과로 일제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패망하고 말았다.(p194) <새로운 한국 경제 발전사> 中


 이영훈에 의하면 19세기 조선은 세도정치 하에서 지배계급의 수탈, 자원과 생산성의 부족 등으로 붕괴되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지배층인 조선왕조는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고, 그 결과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 하강의 주요 원인은 심한 수탈로 인한 사유 재산의 부재였다고 진단을 내린다. 사유재산에 대한 인식부족은 자본축적을 어렵게 만들었고, 결국 근대화는 일제 식민치하에서 겨우 달성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 '식민지 근대화론'의 골자다.


 경제를 이처럼 장기적으로 침체시킨 요인에 대해서는 여러 측면에서의 설명이 가능하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를 꼽으라면 근대적인 '재산제도'의 결여가 아닐까 한다.(p194)... 경제 성장 요인은 생산과 혁신을 위해 자본을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효율적인 제도(institutions)와 기구(organizations)의 존재이다. 이러한 제도와 기구를 통틀어 여기서는 '시장경제제도'라고 부르기로 한다. 식민지기에 개시된 근대적 경제성장은 그 전제조건으로서 그에 합당한 시장경제제도의 정비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p195) <새로운 한국 경제 발전사> 中


 조선의 경제는 19세기에 걸친 장기의 침체를 경과한 뒤 20세기 전반 일제하의 식민지기에 근대적 경제성장의 경로를 밟기 시작했다. 그러한 전환이 있게 된 데는 근대적인 사유재산제도의 확립을 중핵(中核)으로 하는 시장경제제도의 성립이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하였다.(p216) <새로운 한국 경제 발전사> 中


 그렇다면, 이러한 식민지 근대화론이 타당한가.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반론이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한국독립운동사 강의>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여기서는 그 중 일부의 내용만 간략히 다뤄보자.

 

 먼저 경제발전(經濟發展)에 대해 생각해보자. 경제발전이 단순히 전년 대비 몇 %의 경제성장을 이루었는가를 뜻한다면,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근거로 제시하는 통계수치에 의해 조선 시대보다 일제하에서 우리가 근대화를 이루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렇지만,  근대화가 경제 측면에서만 바라볼 수 있는 것인가? 일제 식민지 기간을 통해 여러 문제점이 생겨났고,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가 깊은 후유증을 앓고 있다면 우리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 만만찮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한 고려를 했을 때에도 우리는 식민지를 통해 근대화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사실 이러한 수량화 문제는 최근 GDP(國內總生産, Gross domestic product)가 가지는 한계(비시장상품 측정 불가, 소득 분배 상황 미반영 등)나 원자력 발전의 발전 단가 산정 시 고준위방사성 폐기물 비용을 고려해야 하는가 등에 대한 논란과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러한 비용-편익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본다. 우리 사회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없었다면 비용이 아무리 많이 지불되더라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갈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본다면, 조선말 시기에 변화의 움직임이 있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세기로 들어서면서 시작된 세도정권 시기에는 봉건 지배계층의 농민에 대한 수탈이 절정을 이루었다. 농민 수탈의 내용은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 등 소위 삼정문란으로 집약되었다.(p51)...  세도정권의 횡포 앞에 방치된 농민들은 이를 타개할 수 있는 합법적 방법과 통로를 갖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세도정권의 손발이 된 부패한 아전을 포함한 지방관에 대한 대한 합법적 고발의 길이 막혀 있었다.(p56) <고쳐 쓴 한국 근대사> 中


 <고쳐 쓴 한국 근대사>에서 바라본 19세기 상황은 <새로운 한국 경제 발전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까지 팩트(fact)지만, 지금부터 조금 달라진다.


 지배층의 부패와 수탈에 대해 일부 민중은 비밀결사로 저항을 기도했다.1684년에 발생한 검계(劍契), 살주계(殺主契) 사건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범죄들이 이 시기에 와서 크게 증가한 것은 기존의 사회질서와 가치관에 대한 민중의 저항과 함께 집권층의 반동화가 동시에 심해지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같은 각종 범죄는 점점 빈번히 발생하고 또 극렬화해서, 크게는 농민전쟁으로 작게는 민란으로 발전했다.(p58)... 임술민란 후부터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기까지 무려 40여건의 크고작은 민란이 계속되었다. 안동김씨 세도정권 말기에 우발적이고 산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민란이 30년 후의 갑오농민전쟁으로 연결되까지 농민들의 끊임없는 투쟁이 계속된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전봉준(全琫準, 1854~ 1895) 과 같은 몰락양반층을 중심으로 한 지도세력이 비로소 형성되어갔다.(p65) <고쳐 쓴 한국 근대사> 中


 <고쳐 쓴 한국 근대사>의 저자 강만길 교수는 조선 시대 세도 정치의 폐단을 바로잡는 움직임이 민중으로부터 있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이 홍경래의 난(洪景來의 亂, 1811 ~ 1812)부터 우리가 동학 농민 운동으로 알고 있는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 1894)까지 이어져왔음을 지적한다. 


[사진] 녹두장군 전봉준의 압송사진(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688417493019697683/)


 정리하면, <고쳐 쓴 한국 근대사>에서는 조선 말에 지배층의 문제를 아래에서부터 고치려는 자발적인 움직임이 있었으나, 이는 일본의 무력개입으로 좌절되었던 것으로 식민지를 겪지 않아도 근대화를 이룰 가능성이 충분했다고 논증한다. 그리고, 이 경우 기회비용(opportunity cost) 측면에서 일제를 겪지 않았을 때의 비용이 겪은 후보다 더 저렴하다는 설명으로 이어질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이를 뒷받침하는 실증주의 역사학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세기 일본 역사학은 랑케(Leopold von Ranke, 1795 ~ 1886)와 청나라 고증학(考證學)의 영향을 받으며 탄생하는데, 이에 대한 특성과 한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사료편찬계의 사업이 확정된 것은 제국대학을 중심으로 한 아카데미즘실증주의 일본 역사학의 성격이 시게노 야스쓰구, 구메 구니타케 등의 실증주의를 이어받아 국정의 추이를 중심에 두는 편년체식 정치사/외교사를 명확한 기본으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서 사료편찬계(뒷날 사료편찬소)를 중심으로 한 일본사 연구 체제 확립의 의미를 조금 더 다각도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고대와 중세, 특히 중세사 연구의 기초가 되는 사료의 독점 체제가 성립된 점이다. 둘째, 사회, 경제, 문화 등 정치 과정에 직접 관련이 없는여러 측면에 대한 연구가 불리하고 곤란해지거나 일차적으로는 중시되지않는 경향을 낳은 점이다. 셋째로 사료 고증과 고문서 연구가 역사학의 근간에 자리함으로써 역사가가 현대를 살아가는 자기의 주체성과 사상성을 통해 역사인식과 씨름하는 것을 탐탁찮게 여기는 풍조를 낳았다는 점도 놓칠 수 없다.(p56) <20세기 일본의 역사학> 中


 동경제국대학을 중심으로 한 실중주의 역사관이 경성제국대학(서울대 전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위의 글을 읽는다면 <새로운 한국 경제 발전사>에서 보여지는 뉴라이트 사관의 개략적인 모습이 설명된다.


 그렇다면, 사실에 근거한 실증주의 사관은 문제가 없는 것일까. 통계자료와 객관적 근거를 중시하는 실증사관은 수리 모형을 중시하는 오늘날의 경제학의 모습과도 통하는 바가 있는데, 이에 대해 피게티(Thomas Piketty)는 <21세기 자본>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너무나 오랫동안 경제학자들은 이른바 과학적 방법이라는 것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려 했다. 사실 그 방법들은 수학적 모형의 과도한 이용에 의존하는데, 이런 모형들은 흔히 자기 영역을 지키고 내용의 공허함을 가리는데 대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경제학자들은 통제된 실험에 바탕을 둔 실증적 방법에 대한 열의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 같은 새로운 접근 방식들 자체가 이따금 어떤 과학적 환상에 빠져들게 한다. 학자들은 예컨대 문제 자체는 그다지 큰 관심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잊어버린 채 순수하고 참된 인과관계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엄청난 시간을 보낼 수 있다.(694) <21세기 자본> 中


 한편, 피게티는 <21세기 자본>에서 세계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민주주의 국가들의 국제자본에 대한 과세, 누진적인 글로벌 자본세를 주장한다. 


 우리가 주목한 것은 20세기에 창안되었지만 미래에도 틀림없이 핵심적인 역할을 계속 수행해야만 할 사회적 국가와 누진적 소득세라는 두 가지 기본 제도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현 세기의 세계화된 금융자본주의를 다시 통제하려면,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개발해야만 할 것이다. 여기서 이상적인 수단은 매우 높은 수준의 국제적 금융 투명성과 결부된 누진적인 글로벌 자본세가 될 것이다.(p617)<21세기 자본> 中


 그리고, 이 속에서 우리는 과거 제국주의 시대 한 팀(국가, 자본, 종교, 과학)이 깨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가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지만, 피게티에 따르면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넘는 권력을 가진 글로벌 기업과 국가 연합간의 대립이 필요하다.


 다국적 기업은 복수의 나라의 기업가, 노동자, 소비자가 연결되어 만들어 낸 커뮤니티다. 문자 그대로 다국적 네트워크는 본래의 국가라는 개념이나 단위만으로 파악할 수 없는 초국가적(transnational)인 현상이다. 그리고 복수의 나라의 자본이나 노동을 결합하는 커뮤니티인 이상, 다국적 기업이 추구하는 것은 본래와 같은 특정 국가의 '국익'과는 다른 것이다. 전통적인 국가라는 틀 속에서 결코 해결될 수 없다. 그와 가은 글로벌한 존재는 비국가 행위자들(nonstate actors)로 한 국가의 거버넌스를 넘어설지도 모른다. 각 국가라는 구조와 법률 체계만으로 완전히 규제하기는 불가능하다.(p107) <역사가가 보는 현대 세계> 中


 그런 관점에서 최근(2019년 7월) 일본의 한국 수출 규제는 상당히 흥미롭다(?). 일본 강제징용피해 배상에 대한 일본 정부의 불만으로 한국 반도체 기업인 삼성과 SK 하이닉스에 대한 수출규제는, '국가'의 '글로벌 기업'에 대한 도발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피게티 모형과 비슷해 보인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피게티의 글로벌 기업이 글로벌 금융 자본을 의미하는 반면, 삼성전자/SK 하이닉스는 산업 자본이고, '민주주의 국가 연합'이 '정치 후진국 1개국'이라는 부분은 다소 차이나지만.(다시 생각해보니, 삼성그룹에서 금융계열사인 '삼성생명'과 '삼성화재' 등이 지배구조에서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하면, 삼성을 금융자본으로 구분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도 같다.) 


 피게티는 <21세기 자본>에서 금융자본을 잡기 위해서는 국가들이 연합해서 긴밀하게 정보를 공유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면에서, 1개국에 의해 이루어진 이번 봉쇄는 비록 대상이 산업자본이기는 하지만, 상당히 허술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중장기적으로 경제봉쇄령이 효과가 없을 것과 복잡하게 얽힌 국제 공급망(Global Supply Chain)에 타격을 입은 자본의 복수가 이어질 것이라는 것은 뻔한 결론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삼성과 SK 하이닉스를 일개 한국기업으로 생각하는 일본 정치인의 인식 수준은 20세기에 머물러있다 판단된다. 그런 일본의 도발에 대응하는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개인적으로는 이번 일을 계기로 일본이 싫어져 본의 아니게(?) 불매 운동에 동참하고 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이 문제에 대해 짚어볼 필요가 있다 여겨진다.

  

 많은 다국적 기업들이 점점 더 많이 자신의 생산 활동을 글로벌 경제 내 특정한 거시지역 내에서 조직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 ASEAN에서 통합 과정은 일본과 보다 최근에는 한국의 다국적기업들에 의해 주로 추동되고 있다... 삼성은 ASEAN에서 광범위한 거시지역적 생산 네트워크를 발전시켜 왔다. 삼성코닝(말레이시아)은 말레이시아에서 컬러 브라운관 생산을 위해 중요한 요소인 튜브 유리를 삼성전관의 공장에 제공한다. 삼성코닝은 또한 삼성전자(태국)와 인도네시아(컬러텔레비전), 말레이시아(컴퓨터 모니터), 베트남(컬러텔레비전) 등의 계열사에 중간제품과 조립품을 판매한다.(p284) <현대 경제지리학 강의> 中


 페이퍼가 다소 길어졌는데, 여기서 내용을 정리해 보자. 식민지 근대화론은 외세에 의한 조선의 문제 해결이 당연한 과정이었고, 이를 통해 우리가 발전을 이루었다는 이론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경제외적 측면에서 시대를 바라보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는가를 통해 식민지 근대화론을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일본의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는 글로벌 대자본(산업자본)에 대한 의미없는 봉쇄이며, 이제는 일본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탈피해야겠지만, 이제는 글로벌 대자본이 된 재벌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 또한 이번 기회에 점검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뉴라이트 사관의 지향점을 잘 표현한 <새로운 한국 경제 발전사>의 결론을 소개하며 길었던 페이퍼를 마치고자 한다. 


 종합해 보면, 결론적으로 한국경제의 국제화 전략의 기본은 '새 모델'을 어떻게 발전시키느냐 하는데 주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美, 日, 中 3국과의 국제적 분업관계를 어떻게 하면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느냐하는 문제로 귀착된다.(p545)... 결론적으로 오늘의 한국경제가 당면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경제 내부의 구조조정이나 거시정책적 수단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대외분업적 측면에서 경제의 '국제화 전략'을 올바로 수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강조해두고 싶다. 대국적 견지에서 경제의 글로벌化를 가로막는 反시장주의적이면서도 시대역행적인 편협한 민족주의 이념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선결과제라고 함을 여기에 강조해두고자 한다.(p547)  <새로운 한국 경제 발전사> 中


PS, 어쩌면, 이 결론은 우리보다 현재 일본에 더 필요한 조언이 아닐까. 뉴라이트 역사가들에게는 식민지 시절 근대화에 대한 답례를 할 기회가 주어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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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7 08: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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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7 08: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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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7 1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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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7 11: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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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7 09: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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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7 11: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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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과제는 희랍의 인간교육(paideia)을 희랍 고유의 특질과 역사 전개 가운데 설명하는 것이다. 인간 교육은 추상적 이념의 단순한 총합이 아니라 체험된 운명의 구체적 현실 가운데 발견되는 희랍역사 자체다... 희랍인은 최고 의지를 표현하는 개념을 그들 발전의 초기 단계엔 갖지 못했다. 하지만 앞을 내다보고 길을 걸어가면서 희랍인은 자신과 자신의 삶이 지향하는 목표를 점차 뚜렷이 의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더욱 훌륭한 인간의 조형이었다. 희랍인에게 교육사상은 모든 인간적 분투를 대표하며, 교육은 인간 공동체와 개인의 궁극적 존립 정당성이었다.(p20) <파이데이아 1> 中 


 베르너 예거(Werner Jaeger, 1888 ~ 1961)는 <파이데이아 1 Paideia: The Ideals of Greek Culture Volume 1>에서 고대 희랍의 문학, 철학, 정치 등의 작품에 담긴 교육의 대상과 내용을 분석하면서, 희랍 교육 사상안에 희랍 정신의 정수(精髓)가 담겨있다고 결론내린다.


[그림] Paideia(출처 : https://hellenicfaith.com/paideia/)


 희랍 교육사상은, 민족과 국가가 정신적으로 조형된 삶 속에서 외부로 뻗어 나가며 그 힘으로 타 민족과 타 국가를 빨아들이는 가장 숭고한 힘의 총체가 되었다. 인간교육의 이념 말고 희랍세계에서 아테네가 보여준 정치적 권력의지를 정당화해줄 근거는 달리 없을 것인데, 특히 아테네의 외적 좌절 이후에 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인간교육의 이념에서 아티카 정신은 영원한 존속이라는 위안을 얻었다.(p588) <파이데이아 1> 中


 고대 희랍에서 교육(敎育)은 공동체 유지를 위한 수단이었기에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예거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귀족계층은 흥망(興亡)을 거듭하며, 때로는 권력을 내주기도 하지만 빠른 시간내에 권력을 획득하면서 중심에 있었으며 이러한 귀족정신을 대표하는 덕목이 '탁월함(arete)'이라 해석한다. 


 귀족층은 민족교육의 정신적 원천이다.... 교육은 다만 점차 정신영역으로 옮겨간 민족적 귀족이념이다.(p39)... 지배와 탁월함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 하나다. '탁월함(arete)'의 어원은 뛰어남과 월등함의 최상급인 '제일 뛰어남'이며, 복수형으로 늘 귀족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p41)... 귀족교육은 각자가 평생 바라볼 이상(理想)에 대한 의무감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 의무감을 '염치(aidos)'라고 하는데 이는 언제든지 귀족에게 촉구될 수 있는 것이며, 그 훼손은 이와 밀접하게 연관된 '분노(nemesis)'를 다른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킨다.(p43) <파이데이아 1> 中


 예거는 호메로스(Homeros, ? ~ ? )의 <일리아스>, <오뒷세이아>가 이러한 귀족정신이 잘 반영된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되는 <일리아스>와 트로이아를 파괴한 후 많이도 떠돌았던 오뒤세우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오뒷세이아> 안에서 우리는 탁월한 귀족의 전형을 발견할 수 있다.

 

 <일리아스>는 탁월함의 고대적 영웅정신이 거의 전적으로 지배하던 세대를 배경으로 하며, 탁월함의 이상을 모든 영웅에게서 실현한다. <일리아스>는 노래로 전승된 신화 속 옛 영웅들의 모습에서, 무엇보다 이미 분명한 도시국가 생활을 익힌 헥토르와 트로이아의 모습에 담긴바 당대의 생생한 귀족전통을 통합하여 영원한 이상형을 제시했다.(p59) <파이데이아 1> 中


 <오뒷세이아>는 우리에게 옛 귀족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주요 자료다. 물론 그것은 <오뒷세이아>가 만들어졌음이 분명한 이오니아 지방의 귀족문화겠지만, 이를 우리의 연구대상인 전형적 귀족문화로 간주할 수 있다.(p60) <파이데이아 1> 中


  호메로스가 귀족문화의 전형을 제시했다면, 헤시오도스(Hesiodos, BC 7세기 ?)는 민중의 삶을 노래하면서 영웅이 아닌 일반인의 삶을 노래한다. 헤시오도스가 <일들과 날들> <신들의 계보>를 통해 신화를 민중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면서 이제 시민계급이 새로운 교육의 주체로 떠오르게 되었다.


 우리 관점에서 보면 이제까지 의식적 교육에서 배재되었던 민중계급은 헤시오도스 서사시에서 정신적 자기 형성을 완수한다. 이때 민중은 상류 사회의 문화가 그들에게 제공한 이점들, 특히 궁정문학의 정신적 형식들을 활용하고, 민중 삶의 근원에서 그들 고유의 내용과 정신을 길어 올린다.(p136) <파이데이아 1> 中

 

 <일들과 날들>의 근본사상, 정의와 노동의 관계가 바로 연결 고리였다. 평화로운 노동경쟁을 불러일으키는 선한 에리스만이, 대지에 질투와 갈등이 만연하는 것을 저지할 유일한 신성이다. 노동은 인간에게 힘겨운 강제이며 불가피한 것이다... 이런 경험을 시인 헤시오도스는 세계 질서의 영원한 법칙 가운데 근거 짓고, 사상가 헤시오도스는 이를 신화의 종교적 표상 가운데 깨닫는다. 호메로스 사유는 신화전승을 이런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 이르지 못했고, 반면 헤시오도스는 그의 다른 위대한 저작 <신들의 계보>에서 이를 최초로 시도한다.(p123) ... <신들의 계보>의 '인과적' 사유형식을 헤시오도스는 <일들과 날들>의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통해 노동의 실천적/윤리적/사회적 문제에 적용한다.(p125) <파이데이아 1> 中


 이후 아테네의 솔론(Solon, BC 640 ? ~ BC 560 ?)은 입법자에게 한층 더 높은 수준의 도덕 기준을 요구하며, 이른바 '솔론의 개혁'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아테네 민주주의는 한층 발전하지만, 통치 계급에 더 높은 수준의 '탁월함'을 요구하는 다른 기준은 후대 플라톤(Platon, BC 428 ~ BC 348)의 <국가>를 통해 '철인(哲人)' 지배를 주장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한계와 끝이라는 개념은 솔론과 동시대인들이 중요시했던 문제, 내면적 성찰을 통한 새로운 생활규범의 획득과 분명한 연관성을 가진다... 한계는 딱 잘라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 대중에게는 그들에게 주어진 법률을 지키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법을 만든 입법자에게는 어디에도 없는 좀 더 높은 기준이 요구된다. 그에게 이런 기준을 찾게 만든 아주 특별한 것을 솔론은 "판단"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늘 올바른 통찰과 확교한 실천 의지를 나타내는 "앎"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솔론이 가진 내면 세계의 통일성을 파악해야 하는 지점이다.(p246) <파이데이아 1> 中


 후대의 모든 교육이 고민했던 큰 사회 문제는 개인주의의 극복이고 공동체 전체를 위한 봉사라는 기준에 따른 인간교육이었다. 이런 문제의 실질적 해결방안으로 엄격한 규율의 스파르타 국가가 유력해 보였다. 이런 이유에서 플라톤의 사유는 스파르타 국가에 평생 매달렸다.(p149) <파이데이아 1> 中


 

도시국가는 각 형태마다 거기에 맞는 특별한 인간유형을 길러냈다는 플라톤의 말은 옳다.(p185)... 우리는 이오니아에서 시작되어 옛 희랍 귀족문화가 '보편적 인간교육'의 이념으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새로운 도시국가의 의미를 검토해야 한다.(p187)... 플라톤은 <법률>에서 모든 참된 교육 혹은 인간교육을, 상인과 장사꾼과 뱃사람 등 직업인의 특수 지식과 구별하여 "참된 교육은 법률의 토대 위에 통치하고 통치받을 줄 아는 완벽한 시민이 되려고 열망하는 인간을 그가 갖추어야 할 탁월함으로 이끄는 것이다."고 정의했다. 플라톤은 여기에서 초기 도시국가의 정신에 충실하게 '보편교육'의 근원적 의미를 천명했다.(p191) <파이데이아 1> 中


 고대 희랍에서 교육의 대상이 이처럼 귀족계층에서 시민 계급으로 확대되었다면, 교육의 내용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예거는 이를 아이스퀼로스(Aischylos, BC 525 ~ BC 456), 소포클레스(Sophocles, BC 497 ~ BC 406), 에우리피데스(Euripides, BC 480 ~ BC 406)의 비극을 통해 페리클레스 50년의 황금기 동안 고대 희랍인들의 인식이 얼마나 극적으로 바뀌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아이스퀼로스의 작품에서 인간은 신들의 주사위 게임의 말에 불과한 존재에 불과하다. 아이스퀼로스 작품 안에서 인간은 신에게 탄원하는 존재라면, 소포클레스의 작품에서 인간은 비로소 주체로서 생명을 부여받았다. 

 

 삼부작 형식은 아이스퀼로스 문학을 이해하는 출발점으로 삼을 만하다. 삼부작 형식이 보여주고자 한 것은 개인이 아니라 운명이기 때문인바 이때 운명의 담지자가 개인일 필연선은 없고 개인이 속한 가문 전체일 수도 있다. 아이스퀼로스 비극에서 인간은 아직 문제가 되지 않았고 운명의 담지자일 뿐이었고 문제는 운명이었다.... 극 전개의 주인공은 인간들이 아니라 초인간적인 신들이다. 신성은 권력의 정점에 서서 인간들의 싸움을 굽어보고 있고, 만물은 신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다.(p383) <파이데이아 1> 中


 소포클레스의 인물에는 억지스러운 궤변이나 인위적 과대과장이 없다. 소포클레스의 기념비적 성과는 억지스럽지 않은 자연 비율에서 나타난다. 소포클레스의 인물을 아이스퀼로스의 인물처럼 불쑥 땅에서 쏟아난 땅딱막한 진흙형상의 인물과 달랐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에서) 모든 인물을 필연성에서 태어난다. 전형이라는 공허한 보현성에서도 아니며, 개별 인물의 일회적 특수성에서도 아니며, 오로지 비본질적인 것을 배척하는 실체 자체에서 태어난다.(p407)... 소포클레스의 인물들은 미적 감각에서 탄생했는데, 그 출발점은 이제까지 전례가 없던 '영혼 부여'였다. 이로써 탁월함의 새로운 이상이 출현했고 이때 처음으로 '영혼'을 의식적으로 모든 인간교육의 출발점으로 삼았다.(p415) <파이데이아 1> 中


 예거에 따르면 소포클레스 작품에 보이는 이러한 극적인 변화는 문학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지식교사(소피스트 sophist)라 불리는 이들의 등장으로 인해 인간은 새롭게 조명되고, '만물의 척도'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영향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 짙게 영향을 끼친다.


 철학이 인간에 관심을 두고 점점 더 가까이 관심 대상에 다가갔다는 사실은 지식교사의 출현이 역사의 필연임을 입증하는 새로운 증거다. 물론 지식교사들이 충족시킨 요구란 학문적/이론적 요구가 아닌 철저히 실제적 요구였다.(p436)... 지식교사들은 교육요소가 아주 강하게 드러나는 여러 종류의 잠언투 운문문학을 새롭게 산문화했고 이를 가르쳤다. 그리하여 그들은 의식적으로 형식에서나 사상에서 운문문학과 경쟁했다.(p437)... 지식교사들의 공적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놀라운 형식교육 기술의 독창성에 있다. 그들의 약점은 그들 교육의 내적 실질을 채워줄 정신적/윤리적 실체의 결함에서 유래한다.(p484) <파이데이아 1> 中 

 

소포클레스는 시대의 가파른 정점을 걷고 있었고, 에우리피데스는 시대가 파괴할 교육비극의 계시자로 활동했다. 시대는 그의 정신사적 위치를 규정했고, 그의 문학을 오로지 시대적 표현으로 파악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적 구속성을 그에게 부여했다.(p486)... 에우리피데스의 인물들이 숨 쉬는 정신적 환경의 대기는 섬세하고 건조했다. 아이스퀼로스의 강력한 생명력에 비추어 다만 약점이었던 예민한 정신성은 이제, 새로운 주관적 공감 능력을 유지하고 자극하기 위해 끝없는 대화를 요구하는 비극의 정신적 매체가 되었다.(p506) <파이데이아 1> 中


 <파이데이아 1>에서 예거는 지식교사들의 교육이 한계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며 '진정으로 보편적인 것은 정치교육'이라는 사상은 결국 사유(思惟)를 극한으로 밀어붙이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하는 한계점을 노출하게 된다. 여기에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이들을 비판하는데, 우리는 <고르기아스> <프로타고라스>를 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진실로 '보편적인 것'은 프로타고라스가 보기에 오로지 정치교육 뿐이었다. 프로타고라스는 그의 '보편'인간교육이라는 개념 이해를 통해 희랍교육 역사의 발전 전체를 요약했을 뿐이다. 도덕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진정한 인간교육의 토대다. 한참 후에야 비로소 새로운 순수 미학적 유형의 인문주의가 추가되고 혹은 이것이 기존 인문주의를 대체한다.(p443) <파이데이아 1> 中


 매우 강력한 요구와 함께 등장한 교육이념은 그만큼 더 철학과 종교의 단단한 토대를 요구한다. 기본적으로 플라톤 철학이 새로운 형태를 부여한 호메로스에서 비극에 이르는 옛 희랍교육의 종교적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플라톤은 지식교사들의 교육이념을 극복하면서 지식교사들 이전으로 회귀한다. 지식교사들에서 결정적인 것은 의식적 교육사상 자체다. 교육사상은 희랍의 모든 문학창작과 모든 사유 노동이 인간형상의 규범적 특징을 찾으려 애쓴 지속적 노력의 표현이다.(p446) <파이데이아 1> 中


 탐구의 활동은 "오로지 교육을 위해"이며 교육이 필연적인 한에서일 뿐이다. 이 표어는 페리클레스 교육을 상징하는데, 페리클레스 교육은 철저하게 실용적이고 정치적이었다. 토대는 희랍의 패권을 지향하던 아테네 제국이었다.(p469).... 번성하는 학문의 엄격한 제한적 향유를 지시하는 이 문구는 플라톤의 <고르기아스>에서 '소크라테스'와 아테네 귀족 칼리클레스가 벌인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p468) <파이데이아 1> 中


 이번에는 역사학을 살펴보자. 헤로도토스(Herodotos, BC 484 ~ BC 425)는 <역사>를 통해 페르시아 전쟁을 두 세계의 격돌이라는 측면에서 조명했다면, 투퀴티데스(Tuchididdes, BC 465 ~ BC 400)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전쟁의 원인과 영향에 대해 분석한다. 헤로도토스의 작품이 전쟁의 원인을 형이상학적인 것에서 찾는다면, 투퀴티데스는 인간 내부에서 이를 찾아냈다. 이는 그리스 비극에서  아이스퀼로스가 신의 뜻을 강조한 반면, 소포클레스가 다양한 인간 군상을 강조한 것을 연상시킨다.


 헤로도토스는 헤카타이오스처럼 민족학과 지역학의 통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중점은 인간들에게 두었다... 그의 내적 통일성은 상고기적 화려한 다양성을 수용하는데, 이에 희랍인들과 크로이소스왕이 이끄는 이웃 뤼디아인들 사이에 벌어진 확인가능한 최초 격돌로부터 페르시아 전쟁까지의 동양과 서양의 대결이라는 커다란 주제가 중심이 되었다.(p552) <파이데이아 1> 中


  투퀴디데스는 정치사의 창시자다. 창조과정에서 아테네가 보여준 정치적 사유와 의지의 놀라운 집중은 투퀴디데스의 작품에서 합당한 정신적 표현을 발견했다.(p553)... 아테네 국가의 비극을 기록한 역사가 투퀴디데스는 아테네 권력의 몰락을 오로지 내적 와해의 결과로 보았다. 이 순간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을 펠로폰네소스 정쟁이라는 정치적 사건이 아니다. 여기서 관심은, 점차 표면으로 드러나고 더욱더 급격하게 진행된 사회 공동체의 붕괴에 대한 위대한 역사가의 진단이다.... 투퀴디데스는 현행 가치 전체의 파탄을 말한다. 이는 심지어 언어에서 완전한 어의변화로 감지된다. 고래로 최고 가치를 표현하던 단어들은 추락하여 일상언어에서 사고와 행동의 경멸적 지시에 사용되었고 이제까지 비난을 표현하던 언어들은 출세하여 칭송의 수식어로 상승했다.(p489)... 대체로 경제발전 흐름과 패권정치 흐름에 집중되어 그려진 과거사 영상은 동시대의 희랍인들에 대한 투퀴티데스의 입장을 반영한다.(p558) <파이데이아 1> 中


 <파이데이아 1 >에서는 이처럼 고대 희랍의 도시국가(polis)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정체(政體)를 고민했으며, 교육을 통해  바람직한 정체의 모습을 공유하고 공동체 의식을 강화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교육의 주체와 대상이 귀족에서 일반 시민으로 확대되었고, 교육의 내용이 신(또는 자연)에서 인간으로 변화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들이 교육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적인 국가정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국가정체는 희랍에서 오늘날 우리가 국헌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국가정체가 규정하는 한에서 도시국가의 삶 전체를 포함한다. 비록 시민의 모든 일상생활을 규율하는 스파르타 방식대로는 아니지만 아테네의 국가정체에서 국가의 영향은 보편정신으로서 모든 인간적 생활영역에 깊이 침투했다... 페리클레스가 그린 아테네 국가정체의 모습은 경제, 윤리, 문화, 교육 등 사적 생활과 공적 생활의 총체적 내용을 포함한다.(p587) <파이데이아 1> 中


 <파이데이아 1>은 고대 희랍의 교육을 주제로 삼고 있지만,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주요 문학, 철학, 역사서를 다루기에 결코 내용이 가볍지 않다. 그렇지만, 이들을 하나의 실로 꿰어 담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 문화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일독(一讀)을 권하며 이번 페이퍼를 마무리한다. 


PS. 그리스 비극을 다루었으니, 그리스 희극은 부록으로 옮긴다. 투퀴티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모든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 그 뒷 이야기가 궁금한 분들에게는 <헬레니카>를 추천한다. 

 

 희극도 비극의 영향으로 비로소 '주인공'이란 것을 도입했고, 서정시적 형식요소들도 마찬가지로 비극의 영향이다. 발전의 절정에서 희극은 비극으로부터 마침내 최종적 도야를 위한 영감을 획득했는바 비극의 교육적 소명을 받아들였다. 이는 희극 본질에 대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생각 전체를 관통하는 것으로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은 예술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동시대 비극과 대등한 창조물이라는 지위를 굳혔다.(p524).. 비극은 이미 오래전부터 아주 심호한 문제를 가지고 인간 내면으로 침잠했다. 반면 희극은 대중을 숨쉬는 공기로 삼아 대중을 통해 살아가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국가 미래와 정신 운명의 긴밀한 결합을 강조하고 대중 전체에 대한 창조적 정신의 책임감을 강조함으로써 희극은 그 교육적 소명의 정점에 도달한다.(p549) <파이데이아 1>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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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7-25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본주의 교육 문제의 원류가 희랍에 있었군요. ㅠㅠ

겨울호랑이 2019-07-25 22:30   좋아요 1 | URL
체제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서 교육이 악용된 사례가 반드시 희랍에만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만, 자본주의가 서양에서 자라난 제도이니만큼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에 일리가 있다 여겨집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7-25 22:32   좋아요 1 | URL
개인 행복이 아닌 항상 체제를 위한 교육이라는 말씀에 오뉴월 더위가 무척 섬뜩해 집니다. ㅠㅠ

겨울호랑이 2019-07-25 22:36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그런 면에서 찰리 채플린가 영화 <모던 타임스>에서 담아냈듯 부속품화된 개인을 양산하는 체제가 그들이 지향하는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들의 중장보병전술인 팔랑크스도 밀집대형으로 전체로서 싸우는 형태라는 사실도 떠오릅니다. 결국, 고대 희랍 사회는 거대한 파시즘 사회의 전형이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7-25 22:40   좋아요 1 | URL
어떻게 아이를 키우는 게 정말 바람직한지 많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겨울호랑이 2019-07-25 22:53   좋아요 1 | URL
네, 사회의 가치관을 아이에게 잘 심어주는 것이 바른 교육인지, 아니면 아이가 자신의 뜻을 펼 수 있도록 주관을 심어주는 것이 가야할 길인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는 북다이제스터님과 저만이 아닌 모든 부모들의 고민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