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전설은 초기부터 그리스 신화 - 예를 들어 레다와 백조의 신화나 다나에와 황금의 비(shower of Gold) 신화 - 와 조로아스터교의 사오샨트 신화 양쪽에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모티프를 채택하였다.(p387) <신의 가면 3 : 서양 신화> 中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 1904 ~ 1987)는 <신의 가면 III : 서양 신화 The Masks of God Vol.III: Occidental Mythology>에서 기독교에서 드러나는 페르시아/이집트 문명의 영향에 대해 말한다. 그는 <신의 가면>에서 페르시아/이집트 문명의 영향은 성모 영보(聖母領報 Annunciation), 그리스도 탄생, 동방박사의 방문에서 잘 드러남을 지적한다.


 진짜 기적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전설의 수준에서만 본다면, 동정녀의 탄생은 기독교 유산 가운데 헤브루 측면이 아니라 페르시아나 그리스 측면에서 나온 신화적 모티프로 해석해야 한다.(p389) <신의 가면 3 : 서양 신화> 中


[그림] 성모영보(출처 : https://www.visituffizi.org/artworks/annunciation-by-simone-martini-and-lippo-memmi/)


 그리스도의 탄생 장면에서는 미트라가 어머니 바위로부터 출생하는 전설에 나오는 귀에 익은 모티프를 되풀이한다. 하늘의 군대라는 것도 조로아스터교적인 배경을 암시한다. 특히 주님의 영광의 빛이 비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한 광채 - 아베스탄, Xvarnah, "영광의 빛" - 는 아후라 마즈다에 의한 태초의 창조의 빛이다. 이것은 후광으로 상징된다. 후광은 페르시아의 예술에 처음으로 나타나서, 동쪽으로는 불교도들에게, 서쪽으로는 기독교권에 전파되었다.(p389) <신의 가면 3 : 서양 신화> 中


[그림] 보티첼리, <신비한 탄생, 그리스도의 탄생> (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522769469215540357/)

 

 우리에게 예수는 여관 마굿간에서 태어난 전설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콥트 기독교 전승에서는 이집트의 영향을 보다 깊게 확인할 수 있다.


 중동 기독교는 예로부터 예수가 동굴에서 탄생하셨다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성지의 전통 촌락에 있는 많은 소박한 집들도 동굴에서 시작하여 그 수가 늘어갔다. 예수가 태어나신 곳을 동굴로 보는 전통은 2세기 중엽에 저술 활동을 했던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 Martyr)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p54)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中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탄생 일자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200년 무렵)는 4월 19일로 추정하는 연대기 학자에서부터 5월 20일로 보는 학자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탄생일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전한다. 클레멘트 자신은 기원전 3년 11월 17일을 그리스도 탄생일로 보았다. 서기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동방 그리스도교들은 1월 6일을 그리스도 탄생일로 축하했다. 354년에 로마 교회를 비롯한 일부 서방 교회들은 12월 25일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했다. 당시 이것은 낮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로 잘못 계산되었다. 동지는 이미 미트라교의 중심 축제로서, 정복당하지 않는 태양의 탄생일이었다.(p371) <문명이야기 3-2> 中 


 동방박사 방문은 1월 6일에 기념된다. 이 날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처녀" 코레에게서 새로운 아이온(오시리스가 통합주의적으로 인격화된 존재)이 태어나는 것을 기념하는 축제의 날이었다. 그곳에서 코레는 이시스와 동일시되었다. 지평선에 빛나는 별 시리우스(천랑성)가 떠오르는 것이 아이온의 탄생의 표시라고 하여,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때가 되면 그 별이 떠오르기를 기다려왔다(p390) <신의 가면 3 : 서양 신화> 中



[그림] 동방박사의 방문 <Adoration of the Magi> (출처 : https://smarthistory.org/gentile-da-fabriano-adoration-magi-reframed/)


 캠벨은 페르시아 미트라와 이집트 오시리스 신화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 탄생(성탄 聖誕)을 근거로 헬레니즘(Hellenism)과 헤브라이즘(Hebraism) 더 나아가 기독교에 미친 오리엔트 요소를 찾아낸다. 그리고, 이러한 캠벨의 관점은 마틴 버날(Martin Bernal, 1937 ~ 2013)의 <블랙아테나 Black Athena>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블랙아테나>는 이전에도 여러번 넘겼지만, 이번에도 훗날을 기약한다...


 그리스도 탄생을 12월 25일에 기념하는 현재의 관행은 353년이나 354년이 되어서야 제도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은 로마에서 교황 리베리우스가 시행한 것이다. 미트라가 어머니 바위에서 태어난 것을 기념하던 축제가 그날 열렸기 때문에, 그것을 흡수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12월 25일이 동지였다. 따라서 그때부터 그리스도는 미트라나 로마의 황제와 마찬가지로 다시 떠오른 태양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리스도 탄생 장면에는 2개의 신화와 2개의 날짜가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12월 25일과 1월 6일이라는 이 두 날짜는 각각 페르시아권과 이집트권을 가리키고 있다.(p391) <신의 가면 3 : 서양 신화> 中


 캠벨의 저작에서는 그리스도 탄생과 관련한 헬레니즘 영향을 간략하게 언급하기에,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칼 융(Carl Gustav Jung, 1875 ~ 1961)의 <인간과 상징 Man and His Symbols>의 내용을 옮겨본다. 칼 융은 이 안에서 디오니소스교를 계승한 오르페우스교(Orphicism)와 초기 기독교의 관계를 주목한다. 비록, 두 개의 종교는 지향하는 방향이 과거와 미래로 각각 다르지만, 로마 제국 대중에게 소망의 상징이라는 면에서 같은 의미로 다가갔다. 오르페우스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 ~ 1986)의 <세계종교사상사 2> 리뷰에서 자세히 다룰 계획이다... 이 역시 훗날에.


 디오니소스교는 정신에서 육체로, 육체에서 정신으로 끊임없이 변전하기 때문에 금욕적인 사람에게 이런 의례는 너무 야만적이고 너무 광폭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같은 사람들은 오르페우스 신앙을 통해 내적으로만 종교적 무아경을 체험하게 된다. 오르페우스는 실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가수, 예언자, 교사였던 그는 결국 학살당했고, 그의 무덤은 성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초기 기독교 교회가 오르페우스에게서 그리스도의 원형을 봤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못된다. 이 두 종교는 후기 헬레니즘 세계에 내세의 신성한 삶을 약속한다. 로마 제국의 치하에서 사라져 가는 그리스 문화를 지키려던 대중에게, 신의 중재자이자 인간이었던 오르페우스와 그리스도는 미래의 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의 상징이었다.(p214) <인간과 상징> 中


 페르시아/이집트 문명과 이의 영향을 받은 서양 문명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동지(冬至)는 큰 명절이었다. 과거 페이퍼에 올렸던 내용을 다시 올려본다. 팥죽을 먹으면서 액을 쫓는 행위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팥죽할멈과 호랑이 이야기에서 잘 재현되어있다. 이 책들은 딸아이가 좋아하는 책이므로 곁들어 올려 놓는다.


 동짓날은 작은 설(亞歲) 이라고 한다. 팥죽을 쑤고 찹쌀가루를 새알 모양으로 만들어 그 속에 넣어 심으로 삼는다. 꿀을 타서 명절 음식으로 제사에 올린다. 팥죽을 대문에 뿌려 액운을 없앤다. <형초세시기>를 보면 "공공씨(共工氏)에게 어리석은 아들이 있었는데 동짓날에 죽어서 역귀가 되었다. 팥을 무서워하므로 동짓날에는 죽을 만들어 쫓는다."하였다.(p215)... 동짓날 팥죽에 대한 기록은고려시대 문헌에도 보인다. 이제현(李齊賢, 1287 ~ 1367)의 <동지 冬至>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동지에 반드시 팥죽을 끓인다. 東人冬至必烹豆粥"라고 주석이 달려 있다.(p217)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 中


 밤이 가장 긴, 어둠의 힘이 가장 강한 때인 동지가 거의 모든 문명에서 명절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깊은 어둠이라는 현재 상황의 어려움보다 이제는 밝음이 길어질 것이라는 희망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 아닐까. 문학작품 <어린 성냥팔이 소녀>, <행복한 왕자>,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잘 나타나는 현세의 어두움이 밝은 미래로 바뀌는 순간. 이제는 낮이 밤보다 길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동지(크리스마스)를 명절로 만든 것이라 생각된다. 


 다음날 새벽 어린 소녀는 장밋빛 뺨을 하고 미소를 띤 채, 두 집 사이에 옴츠려 있었다. 소녀는 지난해 마지막 날 밤에 얼어죽은 것이었다.... 소녀가 보았던 것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할머니와 함께 행복한 새해를 맞이하러 간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웠는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었다.(p360) <주석달린 고전 동화집, 어린 성냥팔이 소녀> 中


 마침내 작은 제비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제비는 행복한 왕자에게 입맞춤을 하고는 왕자의 발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순간 동상 속에서 무엇이 쪼개지는 듯한 알 수 없는 소리가 났습니다. 납으로 된 왕자의 심장이 두 쪽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다음날 이른 아침, 흉해진 행복한 왕자의 동상을 본 사람들은 동상을 끌어내려 용광로에 넣고 녹여 버렸습니다. 그러나 쪼개진 심장은 아무리 해도 녹지 않았습니다.(p26)... 천사는 조각난 납 심장과 죽은 제비를 가지고 하느님께 돌아갔습니다. "이 새는 천국의 뜰에서 노래를 부르도록 할 것이며, 행복한 왕자는 이 곳에서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니라.(p28)  <행복한 왕자> 中


 페이퍼가 매우 길어졌는데, 우선 이번 페이퍼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교 신자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의미있는 날이라는 것이다. 힘든 한 해를 돌아보면서 수고한 자신과 주위를 위로하고 새로운 한 해에 대한 희망을 가지는 날로서. 그리고, 이러한 결론을 내려고 한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합니다. 무슨 선물을 받을까 설게기 때문이지요. 이때 왜 선물을 주고받는지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은 어떨까요?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는 사랑과 행복을 모두와 나누는 것이니까요. <크리스마스를 찾아서, 추천사> 中


 살펴본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이웃분들 모두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시길 바랍니다. 힘든 시간을 잘 이겨내심을 축하드리며, 어제보다 나은 오늘, 그리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


 페이퍼의 마지막은 크리스마스에 많이 공연되는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 ~ 1893)의 <호두까기 인형 Op.71 The nutcracker Op.71>을 소개하며 "Merry christmas!" 라고만 하면 썰렁할 것 같아 작성하다 늘어져버린 페이퍼를 갈무리합니다...



 <호두까기 인형>은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세 편의 발레 중에서도 가장 짧은 작품으로, 음악성이 원숙에 달한 만년의 시기에 만들어진 대표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공주> 등의 경험이 충분히 살아있는 작품으로서, 음악적으로도 앞의 두 곡에 필적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곡 전체를 통해서도 독특한 그의 어두운 음영이 보이지 않고, 프랑스 민요 등을 교묘히 인용해 시종 밝고 부드러운 분위기에 넘쳐 있다. 더욱이 동화적 세계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섬세하고 독창적인 수법으로 묘사되고 있다. 천진난만하고 사랑스런 소녀 클라라의 심리와 쥐의 대군을 대조적으로 표현한 것은 찬사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 당시의 발레음악으로서는 처음 시도되어지는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눈의 왈츠>에 어린이 합창을 첨가시켜 그 색채를 풍부하게 그려내었다는 점이다. 또한 첼레스타를 채용하여 훌륭한 효과를 거둔 점 등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p111) <차이코프스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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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4 19: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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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4 19: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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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19-12-27 09: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항상 건강하시고 댁내 두루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겨울호랑이 2019-12-27 10:09   좋아요 2 | URL
갱지님 감사합니다. 갱지님께서도 행복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시 인사드립니다.

2019-12-27 10: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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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7 19: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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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2 07: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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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2 08: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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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6 17: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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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6 18: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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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분은 그 자체로 총체적인 설명을 시도한다. 제1부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 역사, 곧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역사이다. 그것은 서서히 흐르고 서서히 변화하지만, 흔히 완강하게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역사, 늘 다시 시작하는 순환의 역사이다.(p20)... 이런 움직이지 않는 역사의 층위에 느린 리듬의 역사가 따로 형성된다. 이는 그 용어의 완전한 의미를 그대로 간직한다는 조건에서 사회사(histoire sociale)라고 부를 수 있다. 즉 집단과 집단화의 역사를 가리킨다. 이 큰 파도가 지중해의 삶 체를 어떻게 들어올리는가, 이것이 내가 이 책의 제2부에서 제기하려는 질문이다... 제3부는 전통적인 역사를 다룬다. 말하자면 인간의 차원이 아닌 개인 차원이며, 폴 라콩브와 프랑수아 시미앙이 말하는 사건사(ㅣ'histoire evenmentielle)이다. 비유하자면 조류가 자신의 강력한 움직임 위에 일으키는 파도, 곧 표면의 동요를 가리킨다. 이는 짧고 빠르고 신경질적인 요동의 역사이다.(p21)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 초판 서문 - > 中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 ~ 1985)는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La Mediterranee et le monde mediterraneen a l'epoque de Philippe II>에서 한정된 시공간에서 서로 다른 역사층위를 보여주며 이 시대를 역사적 시간 시간의 외부에서 조명한다.


 이렇게 우리는 여러 층위로 이루어진 역사를 해부해보았다. 달리 말하면 역사의 시간을 지리적 시간, 사회적 시간, 개인의 시간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다시 달리 표현하면 인간을 여러 성격으로 구분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p22)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 초판 서문 - > 中


  역사의 시간을 분할하여 사건을 바라보는 브로델의 역사관이 16세기 말 에스파냐 제국의 흥망을 어떻게 그려냈는지는 이후 리뷰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다른 이야기지만,  브로델의 역사 층위 개념을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Jonathan James Nolan, 1970 ~ ) 감독의 영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면 너무 나간 이야기일까?  개인적으로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 Dunkirk>에서 유사한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2017년 여름, '다이나모 작전 Operation Dynamo'을 소재로 한 <덩케르크>를 내놓는다... 영화는 수십 만 명의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고립되어 있던 덩케르크 해변을 배경으로 육지 The Mole, 바다 The Sea, 하늘 The air 세 군데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 상황을 보여준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그 공포의 여러 얼굴을 묘사하기 위해 세 개의 공간을 사용했다. 그런데 항구에서는 일주일, 바다에서는 하루, 하늘에서는 한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을 보여준다는 차이가 있다. 바로 이어지는 장면이라도 공간이 달라지면 그 사건들 사이에 시간차가 발생한다는 의미다... 각 공간이 당면하고 있는 상황, 위기에 집중하다 보면 세 개의 시간차는 점차 줄어들어 결말부에 가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일이 된다. 관객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때조차 영화는 바다와 공중, 해변의 시간이 만날 때까지 각기 다른 시공간을 정밀하게 직조해 나간다. 놀란의 지적인 연출은 이러한 부분에서 발휘된다.(p145) <미국영화감독 1> 中


[그림] 영화 <덩케르크 Dunkirk> 포스터 ( 출처 : https://www.ebay.com/itm/Dunkirk-original-DS-movie-poster-27x40-D-S-2017-Advance-Christopher-Nolan-/312699658008?hash=item48ce5a1f18) 


 덩케르크 해변가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바다, 공중, 해변의 서로 다른 시간 교차. 그리고, 이러한 다른 시간의 교차를 통해 '전쟁' '죽음' 을 바라보며 의미를 찾는다는 점에서 유사함을 느낀다. 물론, 브로델의 역사 층위는 서로 다른 시간의 기반 위에서 상호 영향을 미치는 반면, 놀란의 작품 안에서 이들은 각각 고립된 시간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이들은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종합적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브로델의 관점이나 영화 <덩케르크>에서 결론 부분에 이르러 서로 다른 시간들이 점점에서 만나면서 주제를 부각시키는 구성은 전체적으로 주제를 조망한다는 점에서 통한다 생각된다. 근거 없는 몇몇 생각으로 <지중해>의 인트로를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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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4 09: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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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4 14: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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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6 17: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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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6 18: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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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9-12-25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학기 영화보는 수업에서 덩케르크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나중에 올리겠습니다.ㅎ

겨울호랑이 2019-12-26 07:46   좋아요 0 | URL
네 NamGiKim 님의 리뷰를 기대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에 관해 고민하고 그들의 방어막을 뚫고 들어갈 전략을 알아내는 데 필요한 노력을 소모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게으르다. 사람들은 그냥 나 자신이고 싶고, 정직하게 말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게 무슨 대단한 도덕적 선택인 양 스스로 정당화하고 싶어 한다.(p299) <인간 본성의 법칙> 中


  로버트 그린(Robert Greene, 1959 ~ )의 <인간 본성의 법칙 The Laws of Human Nature>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가진 본성을 18가지 법칙으로 정리한 책으로 , 한 인물을 제시하면서 매 단원을 시작한다. 이 인물은 주인공이지만, 반드시 그가 성공적인 인물은 아니며, 성공한 인물이라고 해도 긍정적인 면만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17법칙. 세대 근시안의 법칙 인물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왕 루이 16세다.) 저자는 성공과 실패의 극단적인 결과를 이들을 통해 보여주면서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책 전반을 통해 제시한다.


 당신의 의도를 감출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상대나 그의 업적에 대한 약간의 비판을 섞는 것이다. 상대의 불안을 자극할 만한 비판은 아니면서 당신의 칭찬을 좀 더 현실적으로 보이게 만들어줄 비판 말이다... 최대한 진실하게 보여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이 실제로 높이 평가하는 자질을 칭찬해주는 게 가장 좋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 거짓 칭찬이 탄로나는 것은 비언어적 신호 때문이다. 당신이 표현하는 좋은 감정을 일부라도 직접 느끼려고 노력하면 다소의 과장도 덜 뻔해 보인다.(p312) <인간 본성의 법칙> 中


 그린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기만(欺瞞)하는 것도 주저하지 말 것을 제안한다. 이는 사람들의 본성(本性)이 악(惡)하다는 그의 관점에서 비롯된다. 그런 면에서 <인간의 본성의 법칙> 안에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 ~ 1527)의 <군주론 II Principe >의 인간관(人間觀)과 통함을 느낄 수 있다.


 사랑받는 것이 두려움을 주는 것보다 더 나은가 혹은 그 반대인가? ... 둘 중 하나가 결여되지 않을 수 없을 때에는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을 주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고마워할 줄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거짓을 꾸미고, 위험한 일은 피하며, 이익이 되는 일에는 욕심을 낸다.... 다른 준비는 전혀 하지 않고 전적으로 그들의 말에 스스로를 기초한 군주는 멸망한다.(p211)  <군주론> 中  


 사람들을 그냥 자연현상처럼 보라. 꽃이나 돌멩이처럼 사람도 정말 다양하다. 세상에는 바보도 있고, 성인군자도 있고, 사이코패스도 있다. 병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사람, 숭고한 전사도 있고, 예민한 사람도 있고 둔감한 사람도 있다.... 우리는 다양성을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p362) <인간 본성의 법칙> 中

 

 그런 면에서 <인간 본성의 법칙>은 일반 사람들의 부정적인 속성을 잘 활용(?)해서 성공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 성공학 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성공학 책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이 책은 역사 인물의 다양한 사례와 대처법을 제공한 유용한 책이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에 토니 라빈스(Tony Robbins)의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 Awaken the Giant Within> 시리즈가 좋은 짝이 되는 것 같다. 전자가 외면을 다룬 성공학 책인 반면, 후자는 자기계발을 집중적으로 강조한 전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들을 제대로 소화한다면, 자기계발서들의 많은 부분을 정리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한편, <인간 본성의 법칙>안에는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 ~ 1860)와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의 글들이 인용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의 글은 무의미하게 담긴 것이 아니라 책 전반을 관통하는 큰 흐름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인간 특유의 강력한 에너지를 타고났다. 그것을 의지력이라고 불러도 좋고 적극성, 심지어 공격성이라고 불러도 좋다. 동시에 우리는 지능과 영리함도 함께 타고났다.(p796) <인간 본성의 법칙> 中


 개인적으로는 세계를 의지와 표상의 관점에서 바라본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의 목소리가 <인간 본성의 법칙>에 짙게 배어 있다고 생각된다. 본성이 악한 인간들을 자연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표상(Vorstellung)으로 바라보고 의지(Wille)의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점과 인식의 확대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통하는 바가 있다 생각된다. <인간 본성의 법칙>의 대처법 전반이 1. 주위를 잘 관찰하고, 2. 자신의 처지를 잘 인식하고, 3. 이를 확대 적용하라는 큰 틀을 유지하고 있음을 본다면 더욱 그렇게 여겨진다.

 

 우리는 현상하는 세계를 의지의 거울, 의지의 객관성이라 부른다. 그리고 삶이란 표상에 대해 의지의 의욕이 나타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의지가 의욕하는 것은 언제나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단적으로 "의지"라고 하는 대신 "삶에의 의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같은 표현이고 췌언 贅言에 불과하다. 의지는 사물 자체고 세계의 내적 내용이며 본질적인 것이지만, 삶, 가시적 세계, 현상은 의지의 거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신체에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것처럼 의지에는 이 삶, 가시적 세계, 현상이 분리시킬 수없이 따라다닐 것이다. 또 의지가 현존하는 곳에는 삶, 세계도 현존할 것이다.(p447)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中


 개체는 자연에 아무런 가치도 없고 가치를 가질 수도 없다. 개체는 수없이 많은 방식을 하찮은 우연에 의해 파멸할 운명에 처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애당초부터 파멸하도록 정해져 있으며, 종족 보존에 봉사한 순간부터 자연에 의해 파멸로 이끌려 가고 있다. 이렇게 하여 자연 자신은 개체가 아닌 이념만이 본래적 실재성을 가지며, 즉 의지의 완전한 객관성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아주 소박하게 나타낸다. 그런데 인간은 그 자체고, 더구나 자연의 자기의식의 최고 단계에 있지만, 자연은 삶에의 의지의 객관화에 불과하다.(p449)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中


 그렇지만, <인간본성의 법칙>에 담긴 의지는 쇼펜하우어의 의지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성공에의 의지이기 때문에, 쇼펜하우어가 말한 삶에 대한 의지가 아닌 니체의 힘에의 의지(Wille zum Macht)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

 

 위대한 정복자들은 항상 감동적인 미덕의 언어를 입에 담아왔다. 그들에게는 의기를 끌어올리는 말만 듣고 싶어 하는 고양된 대중이 항상 주위에 있었다. 도덕적인 판단들의 놀랄 만한 어리석음이여! 인간은 힘의 감정을 가질 때, 자신이 선하다고 느끼고 자신을 선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가 자신의 힘을 방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대상인 타인들은 그를 악한 사람이라고 부른다!(p201) <아침놀> 189 中


 정리하자면, <인간 본성의 법칙>은 인간의 본성은 악(惡)하다고 바라보고, 이들을 바꾸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이들을 잘 활용해서 성공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으로, 여기에는 마키아벨리, 쇼펜하우어 그리고 니체의 철학이 담겨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저자의 관점에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주변의 대중들을 깨어있지 않은 존재로 바라보고, 이들과 다르게 행동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태도가 과연 올바른 것인가? 그리고, 인간들이 모두 이기적이라고 하지만, 그들 또한 <인간 본성의 법칙> 이나 같은 부류의 성공학 책들은 접한 이들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들 또한 그린의 방식대로 접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결국 모두가 기만하는 세상 홉스(Thomas Hobbes, 1588 ~ 1679)가 <리바이어던 Leviathan, or The Matter, Forme and Power of a Common-Wealth Ecclesiastical and Civil>에서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고보면, 홉스의 사상도 느껴진다.


 하나씩 놓고 볼때 사고는 보통 '대상(object)'이라고 불리는 우리 바깥에 있는 물체(body)의 어떤 성질 혹은 우유성(偶有性 accidents)의 '표상(表象, representation)' 또는 '현상(現像, appearance)'이다. 그 대상이 우리의 눈이나 귀와 같은 인체기관에 작용하는데, 이 작용의 다양성이 현상의 다양성을 낳는다.(p27) <리바이어던 1> 中


 그러한 부정적 상황인식 보다는 맹자(孟子, BC 372 ? ~ BC 289 ?)의 여민동락(與民同樂) 정신이 비록 속도는 더디겠지만, 인간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힘이 되지 않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此無他, 與民同樂也. 今王與百姓同樂, 則王矣. 이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왕께서 백성과 더불어 함께 즐기기 때문입니다. 지금 왕께서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즐기신다면 왕도를 행하는 제왕이 될 것입니다.(p73) <맹자정의 孟子正義> <양혜왕 梁惠王하 下 2편> 中  


 이와 함께 책 제목에서도 아쉬움을 느낀다.  '인간 본성의 법칙'에서 본성(本性)이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살펴 보면, 본디 가진 성질, 속성을 의미하는데, 원제 Human Nature에서 nature의 의미는 이와는 조금 다르다. 


nature : someone's nature is their character, which they show by the way they behave.


 작은 차이일 수 있겠지만, 책의 내용 중 인간 본성이라 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는 점에서 제목 선정의 아쉬움이 느껴진다.


 예를 들어, 저자가 말한 18법칙 죽음 부정의 법칙을 생각해보면, 저자가 본문에서 다룬 죽음에 대한 태도는 현대인의 태도다. 필리프 아리에스(Philippe Aries, 1914 ~ 1984)의 <죽음 앞의 인간 L'homme Devant la Mort>에서도 드러나지만, 죽음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19세기 이후 형성된 것으로 과거와는 달랐던 양상이다. 이처럼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여러 현상(phenomenon)중 현대인에 초점을 둔 인간의 속성을 과연 인간의 본성(本性)이라 볼 수 있을 것인지. 물론, 번역의 어려움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관점의 혼란은 아쉽게 생각된다.


 <인간 본성의 법칙>은 앞서 말했듯 역사를 통해 교훈을 제시하고, 방법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좋은 성공학책이지만, 개인적으로 저자의 접근 방식에 아쉬움이 느껴졌다는 말로 내용을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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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4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24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오바니 피코 델라 밀란돌라 군주(Frurst Giovanni Pico della randola, 1463 ~ 1463)와 더불어 르네상스 정신이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두 가지 관점에서 그렇다. 첫째로 종교적인 감정이 매우 가한 자연적인 감정, 즉 일반적인 인간들의 감정으로 되고, 그리스도교에만 있는 특별한 감정으로 되지 않는다.p16)... 다른 편으로 미란돌라는 새로운 인간상, 즉 무한한 인간상을 발전시켰다. 자기가 쓴 <인간의 존엄(위신)에 관해서>라는 책에서 그는 인간의 본질과 위대함은 무한하게 변형될 수 있는 그 능력에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하나의 무한한 과정 속에서,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이 창조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위대한 인간이다.(p17) <서양철학사> 中


 우리에게 르네상스(Renaissance) 시기는 다른 말로 계몽(啓夢 enlightment)시대의 다른 말로 알려져 있다. 인간이 이성(理性 reason)의 빛을 비춰 중세의 어둠을 이겨내고 새로운 근대(近代)를 열었다는 관점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을 대표하는 책은 야곱 부르크하르트(Jacob Christoph Burckhardt, 1818 ~ 1897)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Die Kultur der Renaissance in Italien>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부르크하르트는 우리에게 '르네상스 인 Renaissance man/재woman'이라는 개념을 소개하기도 한다.


 예리한 문화사적인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15세기에 들어서 완벽한 인성의 소유자들이 증가하는 현상을 단계별로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최고의 인격 완성을 향한 충동이 당대의 모든 문화적인 요소에 통달한 다재다능한 품성과 만나게 되면 이탈리아에서만 볼 수 있는 '만능인(l'uomo universale)'이 탄생하게 된다... 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에 이르면,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독창적이고 고유의 완벽한 작품을 창조하면서 동시에 인간으로서도 깊은 인상을 주는 예술가들을 만나게 된다(p207)... 여기에 새로운 종류의 외부 지향적인 가치가 호응하는데, 그것은 바로 근대적 명성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전제정치와 민주주의에 앞서서 이미 계급 사이에 평등의식이 일어나고 있었다. 명성이라는 새로운 삶의 요소를 싹틔우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토대가 필요했던 것이다.(p213)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中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에서 저자는 15세기 이탈리아의 분열된 도시국가 상황과 완벽을 추구하려는 개인, 명성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르네상스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음을 말하는데, 이는 이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엔트로피 Entropy: A New World View>의 저자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 1945 ~ )이 생각하는 르네상스 혁명의 발생원인은 다르다. 엔트로피 법칙의 결과로 인해 르네상스로 변화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엔트로피 Entropy(열역학 제2법칙)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우주 안의 모든 것은 일정한 구조와 가치로 시작해서 무질서한 혼돈과 낭비의 상태로 나아가며, 이 방향을 거꾸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엔트로피란 우주 내 어떤 시스템에 존재하는 유용한 에너지가 무용한 형태로 바뀌는 척도를 내는 척도이다.(p21) <엔트로피> 


 역사는 엔트로피 법칙을 따른다. 일반적인 역사 교과서를 보면 중세에서 현대로 옮겨가는 것이 인간 정신의 획기적인 각성의 결과라고 되어 있다. 13세기와 16세기 사이에 서유럽은 엔트로피 분수령을 거쳤다. 중세의 에너지 기반이었던 나무는 점점 구하기 힘들어졌고 인구증가로 인해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자 사람들은 그 대안으로 석탄을 발견했다. 이로 인해 서유럽의 생활방식도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즉 나무에서 석탄으로의 경제기반의 변화야말로 중세에 종말을 고함과 동시에 산업혁명의 첫 장을 연 것이다(p101)... 두 날 쟁기, 3포식 농업, 말에 의한 경작 등을 통해 사람들은 같은 땅에서 더욱 많은 소출을 올렸고 넓은 땅을 경작지로 개간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p103)... 14세기 중엽이 되자 유럽인들은 엔트로피 분수령에 도달했다. 인구가 에너지의 기반을 갉아먹었고 지력은 쇠퇴했으며, 나무는 부족해서 서유럽과 북유럽 사람들은 위기에 직면했다.(p103)... 목재위기의 대안은 석탄이었다. 목재를 석탄으로 바꾼 것은 단순이 에너지 기반의 변화에 그치지 않았다. 석탄이 도입되기 전까지 유럽문화는 철저하게 나무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에너지 기반이 바뀌자 생활 방식 전체가 뿌리째 변화될 필요가 생겼다. 사는 방식, 이동방식, 복장, 행동양식, 정부의 통치방식 등 모든 것들이 안팎으로, 위아래로 뒤집혀 버린 것이다.(p105) <엔트로피> 中


 중세 유럽의 풍부한 산림이 중세 사회를 떠받치는 기반이었다면, 늘어난 인구와 생산력은 이러한 기반을 붕괴시켰다. 엔트로피 법칙에 따르면 유용한 산림이 무용한 에너지로 소멸되고, 지구 생태계라는 폐쇄계(閉鎖系 closed system)안에서 한정된 자원은 고갈될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 석탄으로 대표되는 근대 사회로의 이행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리프킨의 이러한 주장은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의 유명한 명제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유물사관(唯物史觀)과 결합되었을 때 우리에게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특정한 양식으로 생산적 활동을 하고 있는 특정한 개인들은 이러한 특정한 사회적 및 정치적 관계들 속으로 들어간다... 이념들, 표상들, 의식 등의 생산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물리적 활동과 물질적 교류 속에, 현실적 생활의 언어 속에 직접적으로 연루된다....한 민족의 정치, 법률, 도덕, 종교, 형이상학 등등의 언어 속에 표현되는 정신적 생산에 관해서도 같은 말이 적용된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독일 철학과는 정반대로 여기에서 우리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인간들에서 출발하며, 또한 그들의 현실적 생활 과정으로부터 이 생활 과정의 이데올로기적 반영들과 반향 反響들의 발전을 표현한다.(p202)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독일이데올로기> 中


 리프킨에 따르면 이른바 역사의 진보(進步)는 엔트로피 법칙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처절한 몸부림에 불과하다. 거창한 이성의 승리가 아닌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한 궁여지책(窮餘之策)이 르네상스, 산업혁명을 가져왔을 뿐이라는 리프킨의 비판.  인간의 과도한 욕구(欲求)가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것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리프킨은 인류 역사를 칠정(七情) -기쁨(희,喜), 노여움(노,怒), 슬픔(애,哀), 두려움(구,懼), 사랑(애,愛), 싫어함(오,惡), 바람(욕, 欲) - 중 하나인 욕(慾)을 기(氣)의 부정적 발현으로 생각하는 입장과 통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세계의 유용한 에너지는 끊임없이 무용한 에너지의 형태로 분산된다 인간은 가장 먼저 손에 넣을 수 있는 에너지부터 쓰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후대의 사람들은 앞선 사람들보다 더 구하기 어려운 에너지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다. 나무를 베는 것보다 석탄을 캐고 처리하는 것이 더 힘들다. 유전을 개발하고 석유를 뽑아 올리는 것은 더 어렵다.(p106)...이것이 이른바 '진보'의 참모습인 것이다.(p110) <엔트로피> 中


  최근의 경제성장의 부작용인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하게 떠오르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리프킨의 비판에 수긍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생명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소비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앙리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 1859 ~ 1941)의 <창조적 진화 L'e'volution Cre'atrice>은 리프킨에 대한 반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매슬로(Abraham Harold Maslow, 1908 ~ 1970)의 <동기와 성격 Motivation and Personality>의 욕구 이론은 종족의 보존과 개체의 안전을 추구하는 본성 本性은 긍정해야 할 것이다.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섭취된 양분에서 생긴다. 왜냐하면 양분은 일종의 폭발물로서 이것은 스스로 축적한 에너지를 발산하기 위한 불똥만을 기다릴 뿐이기 때문이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명 전체는 그 본질적인 점에서 에너지를 축적하고 다음에는 그것을 유연하고 변형가능한 관(管) 속에 풀어 놓으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이 관들의 끝에서 생명은 무한히 다양한 일들을 수행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생명의 약동(엘랑 비탈)이 물질을 관통하면서 단번에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p379)... 종 種은 자신만을 생각하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간다. 그로부터 자연이라는 무대에서 무수한 투쟁이 유래한다. 또한 놀랍고도 충격적인 부조화도 거기서 유래한다. 그러나 그에 대해 생명 원리 자체에 책임이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p380) <창조적 진화> 中

 

 일반적으로 동기이론의 출발점이 되는 욕구는 이른바 생리적인 추동이다... 다른 모든 욕구 중에서 생리적 욕구가 가장 강력하다. 삶에서 모든 것이 극단적으로 결핍되어 있는 사람은 다른 어떤 욕구보다도 생리적 욕구에 따라서 동기화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뜻이다.(p85)... 일단 다른(상위) 욕구가 생기면 생리적인 배고픔보다는 그런 상위 욕구가 인간을 지배한다. 그리고 그 욕구가 충족되면 보다 더 높은 수준의 새로운 욕구가 생기며, 이런 과정은 계속해서 이어진다.(p88)... 생리적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새로운 욕구가 생기는데 그것을 안전 욕구라고 분류할 수 있다.(p89)<동기와 성격> 中


  인간과 생명체의 본성을 긍정하고 에너지를 소비하는 존재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의 욕구 또한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자체의 본성 문제가 아닌 극단적인 치우침이 문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바라봤을 때, 칠정이 악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이라는 면에서 선/악이 모두 내재한다는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1527 ~ 1572)의 주장에 더 공감하게 된다. 문제는 적도(適度), 중용(中庸)인 것이다.

 

 주자가 말한 정 情은 기쁨, 노여움, 슬픔, 두려움, 사랑함, 미워함, 하고픔의 정으로서, <중용 中庸>에서 말한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과 같은 정입니다. 무릇 이미 마음이 있으면 사물에 감응함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니, 정이 이 理와 기 氣를 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면 선과 악이 여기에서 나뉘니, 정에 선악이 있음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이 발현하여 모두 절도에 맞으면 곧 이 理이고 선 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발현하여 절도에 맞지 않으면 곧 기가 부여한 치우친 성질로 말미암아 선하지 않음이 있게 됩니다.(p481)... 칠정 七情이 비록 이와 기를 겸하지만, 이가 약하고 기가 강하여, 이가 기를 관리해도 되지 않고 악으로 쉽게 흐르기 때문에 기의 발현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발현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이에서 발현하여 언제나 선한 것이니 사단 四端과 더불어 애초에 다르지 않습니다.(p482)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中


 <중용 中庸>에서는 성(誠)을 인간의 본체로, 그리고 밝음(明)으로 나아가는 것을 성(性)으로 바라본다. 밝음(明)을 문명(文明 civilization)이나 계몽(enlightment)라 본다면 중세에서 르네상스로의 이행은 자연스러운 성(性)이라 할 것이다. 거칠게 말해서 역사의 엔트로피 법칙 또한 하나의 흐름이라 하겠다.


 중용  제21장 自誠明,謂之性;自明誠謂之?。誠則明矣;明則誠矣。중용 제21장


 성 誠에서부터 명 明으로 구현되어 나아가는 것을 성 性이라 일컫고, 명 明에서부터 성 誠으로 구현되어 나아가는 것을 교 敎라 일컫는다. 성 誠하면 곧 명 明해지고, 명 明하면 곧 성 誠해진다.(p533) <중용 한글 역주> 中


 존재자로서의 귀신이 아닌, 형용사적 귀신, 그리고 우주만물 전체에 편재해있는 귀신, 그 귀신을 헤겔은 "가이스트 Geist"라 표현했고, 자사는 "성 誠"이라 표현한 것이다.(p534)... "명 明"은 인간의 언어와의 관련을 떠날 수 없다. 명 明을 레게는 "intelligence"라고 번역했고, 찬(Wing-tsit Chan, 陳榮㨗)은 "enlightment"라고 번역했는데 모두가 언어적 사태라고 볼 수 있다.(p535)... 본체적인 성 誠으로부터 인간이 "밝음"을 획득하는 과정을 "성 性"이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의 본성 nature은 천지의 성 誠으로부터 밝음을 획득하는 과정 process이라는 말은 "천명지위성 天命之謂性"이라는 대명제와 쉽게 연관된다.(p536) <중용 한글 역주> 中


 이러한 흐름 속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주변환경에 기대어 사는 존재임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에너지가 고갈되는 속도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중용 제22장 惟天下至誠, 爲能盡其性; 能盡其性, 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 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 則可以贊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 則可以與天地參矣.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 誠이라야 자기의 타고난 성 性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다. 자기의 타고난 성 性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게 되어야 타인의 성 性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가 있다. 타인의 성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어야 모든 사물의 성 性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다. 모든 사물의 성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어야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다.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어야 비로소 천 天과 지 地와 더불어 온전한 일체가 되는 것이다.(p539) <중용 한글 역주> 中


 저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지구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지니는 것이야말로 뭔가 거대한 힘을 지닌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p270)... 이 지구는 실제입니다. 지구상의 생명 역시 실제이며, 오늘날 이 지구를 위험에 처하게 한 정치적 분열은 하나같이 인류의 고안품입니다.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서 직접 내린 계명 같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 작은 세계에 사는 모든 생명체들은 상호 의존적입니다.(p271)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中


 또한, 우리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바른 식견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우리 개인도 심리적 엔트로피 법칙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베르그송이 말한 엘랑 비탈(Elan Vital)이며, 엔트로피에 반하는 네겐트로피(negentropy)가 아닐까.


 중용 제26장 故至誠無息。不息則久,久則徵。徵則悠遠。悠遠,則博厚。博厚,則高明。博厚,所以載物也。


 그러므로 지성 至誠은 쉼이 없다. 쉼이 없으면 오래가고, 오래가면 징험이 드러난다. 징험이 드러나면 유원 悠遠하고, 유원하면 박후 博厚하고, 박후 하면 고명 高明하다. 박후 博厚하기 때문에 만물을 실을 수 있고, 고명 高明하기 때문에 만물을 덮을 수 있고, 유구 悠久하기 때문에 만물을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이다. (p564) <중용 한글 역주> 中


 우리의 의식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심리적 무질서(psychic disorer)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미 마음먹었던 의도나 이를 실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정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상태로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이는데, 바로 고통, 공포, 불안, 분노, 질투와 같은 것들이다.이러한 다양한 종류의 무질서들은 우리의 주의를 바람직하지 못한 여러 가지 사물에 분산시키고, 결국 우리가 원하는 활동들을 수행하지 못하게 만든다.(p80)... 심리적 엔트로피의 반대 상태는 최적 경험(optimal experience)이라고 할 수 있다... 최적 경험이란, 의식이 질서 있게 구성되고 또한 자아를 방어해야 하는 외적 위험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주의가 목표만을 위해서 자유롭게 사용될 때를 말하는 것이다. 이미 이러한 상태를 바로 플로우(flow) 경험이라고 이름 붙였다... 우리가 가능한 자주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도록 의식을 조절하면 삶의 질은 저절로 향상되게 마련이다.(p87) <몰입 flow> 中


 정리해보자. 역사의 발전은 역사 교과서에서 말하듯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처절한 생존의 기록이며, 물리 법칙에 대한 생물의 생존 투쟁이다. 오존층으로 외부로부터 보호받는 생태계라는 폐쇄된 시스템에서 우리는 자원의 고갈이라는 엔트로피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의 처지를 인식하고 올바르게 처신한다면 속도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어찌보면 당연한 결론이지만, 이 결론을 내리기 위해 정말 많은 인용을 했다는 생각을 하며 서둘러 마무리 한다.


 PS. 속도를 늦춘다고 해도 대략 50억년 정도만 버티면 될 듯하다. 50억년 뒤에는 태양이 적색거성(赤色巨星, red giant)이 되어 금성이나 지구 궤도까지 팽창한다고 하니, 이때는 자원 고갈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엘론 머스크가 화성 식민지를 개척한다고 하지만, 50억년 뒤에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해왕성 정도까지는 나가야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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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5 09: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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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5 10: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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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5 13: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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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5 18: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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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7 12: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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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7 14: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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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좋아하는 「추리천재 엉덩이 탐정」시리즈.

요즘 초등학생들 사이에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엉덩이 탐정 탐정은 도서관 대출도 어려울 정도로 대기자도 많고, 아이도 갖고 싶어해 매권을 갖고 있습니다.

책의 내용을 살펴보니 주된 갈등 구조는 엉덩이 탐정과 괴도 유를 통해 전형적인 선 vs 악 대립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가깝게는 「명탐정 코난」의 코난과 괴도 키드의 대립 구조를 이어받은 것으로, 멀게는 모리스 르블랑의 괴도 뤼팽과 명탐정 홈즈의 대결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듯 합니다.

뤼팽과 홈즈. 추리소설계의 전설과도 같은 라이벌 구도가 현대에까지 리메이크 되는 것을 보면서 고전의 생명력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엉덩이 탐정은 아이가, 명탐정 코난은 아내가, 괴도 뤼팽은 제가 좋아했던 인물들이라 살짝 다른 이야기 안에서 공감대를 형성해 봅니다...^^:) 이웃분들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ps. 개인적으로 이들 작품에서 그리는 라이벌 구도는 조금 차이가 느껴집니다. 엉덩이 탐정과 명탐정 코난은 홈즈가 주인공이어서 라이벌 구도에서 우세한 것으로 나오지만, 뤼팽과 홈즈의 대결에서는 르블랑이 저자여서인지, 뤼팽이 한 수 위로 나오는 점은 차이라 생각합니다. 특히,「기암성」에서 홈즈는 초기 탈락하며 안타까움을 더한다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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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19-12-08 18: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시적에 ㅎㅎ
그때가 참 아득하네요~
정말 뤼팽을 좋아했어요^^
저는 홈즈보다는 뤼팽쪽이 더 좋더라구요^^

겨울호랑이 2019-12-08 18:38   좋아요 2 | URL
저도 머리 쓰고 딱딱한 홈즈보다는 행동력있고 유머가 있는 뤼팽이 더 호감이 갑니다^^:) 두 사람을 보면 은근히 프앙스인과 영국인의 전형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2019-12-10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10 1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