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에는 죽음 그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전의 마음의 준비가 무서운 것이다. 그는 이미 그 두려움, 괴로움, 가련함을 <지나서>, 이미 슬픔을 뛰어넘어, 자기의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승복하고, 지금은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육체의 죽음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1918 ~ 2008)의 <수용소 군도 5>에서는 비참한 군도생활의 끝이 그려진다. 극한 상황에 몰린 이들의 탈주와 이들에 대한 엄한 처벌 그리고 반란. 죽음을 각오한 후에야 비로소 탈옥을 할 준비가 된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서 우리는 광산 갱도의 마지막 끝, 막장에 놓인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나는 의식적으로 나 자신을 밑바닥으로 내려가게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떤 공통된, 돌멩이가 많은 바닥에 단단하게 발을 디디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가 시작되었다. 나의 인격은 그 시기에 완성되어 갔으며, 그 이후에 내 인생에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나는 그때 익숙해진 시선과 습관에 충실했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그렇지만, <수용소 군도 5>에서 저자 솔제니친은 수용소에 수감된 이들 뿐 아니라 이들을 감시하는 경비병들 역시 같은 밑바닥에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벗어날 희망을 갖지 못한 버림받은 땅에 놓여진 이들은 분명히 같은 처지지만, 이들은 서로 다른 계급에 속한다. 때문에, 이들은 반목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들이 각자의 사회적 기반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한 계급이 '주인 계급'이라는 기반 위에 서 있다면, 다른 계급은 '노예 계급'이라는 기반에 있어 대립할 수 밖에 없었다.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


 우리를 가둔 자들도 우리처럼 세상과 단절되어 있다... 특수 수용소의 규율은 완전한 격리를 시키는 것이다. 즉, 누군가에게 호소할 수도 없고, 아무도 여기서는 석방되지 않고, 아무도 여기서는 도망치지 못한다... 어찌하여 이렇게 순종하게 되었는가? 이런 수용소는 따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지배받는 측도, 지배하는 측도 교정 노동 수용소에서 와서, 전자는 몇십 년의 노예의 전통을 짊어지고, 후자는 몇십 년의 주인의 전통을 짋어지고 왔기 때문이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결국, 문제는 정치적 자유가 아니다. 그래, 바로 그렇다! 인류가 발전시키고 있는 것은 내용이 없는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또 기능이 충분히 발휘되는 정치 기구를 가진 사회를 만들려는 것도 아니다. 그래, 바로 그것이다!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사회의 도덕적 기반에 있는 것이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이제 우리는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가 <도덕의 계보 Zur Genealogie der Moral>에서 말한 '노예 도덕'과 '주인 도덕'을 수용소 질서에 가져올 수 있겠다. 위력에 의해 강제로 수감된 이들이 갖는 '힘에의 열망'과 능동적인 힘에 의해 위협받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반동(Reaktion)에 의해 생겨난 르상티망(Ressentiment)의 모습은 니체의 도식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강자(경비병)=악인'으로 간주하지만, 강자인 경비병들에게 복종함으로서 겨우 살 수 있었던 노예(죄수)들이 여기에서 벗어나 개인적으로는 탈옥, 후에는 집단 항명 등을 통해 거부하는 모습은 글자그대로 '노예의 반란'이다. 그렇지만, 결국 진압된 항명과 구질서로의 회귀는 말 그대로 역사 속에서 '선과 악 Gut und Bose'의 반복의 전형으로 보여진다. 결국, 죄수들의 르상티망은 자신들을 선(善)으로 규정하고, 선이 악을 이길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면서 절망하게 된다.


 인간이 정서나 감정 없이 사고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떤 것을 일단 악이라고 보게 되면, 그 속에 있는 선마저도 좀체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끝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작은 있는가? 우리의 인생에 광명이란 있을까? 아니면 없는 것일까? 억압받는 사람들은 <선으로 악을 근절할 수는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그렇다면, 세상에서 버려진 땅 수용소 군도에도 나타난 '주인 - 노예'계급의 갈등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주인에게는 스스로 '좋음'이라는 우월 의식을, 노예에게는 '아니다'라는 부정의 답을 끌어내는 이 힘을 솔제니친은 '체제'에서 발견한다. 체제로부터 '반동'으로 낙인 찍힌 이들은 말 그대로 노예(죄수)로 강등되니, 수용소에 있는 이들에게 체제는 말 그대로 하늘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수용소의 천명(天命)은 동양의 천명인 민본(民本)과는 분명히 다르다.


  만일 경비대의 <장교>가 죄수들에게 어떤 친절을 베풀려고 한다면, 그는 그 친절을 병사들 앞에서, 그리고 병사들을 통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죄수들에 대하여 적의를 품고 있는 가운데서는 불가능한 일이며, 또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그를 밀고 했을 것이다. 이것이 체제라는 것이다!...  이 체제의 힘은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과 직접 이야기를 할 수 없고, 반드시 장교나 정치 지도원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데에 있다. 이 청년들의 힘은 그들의 무지에 있다. 수용소의 힘은 이 청년들에 있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수용소의 '체제'는 개인과 개인을 고립시키고, 새로운 정보를 차단하며, 명령을 주입함으로써 수용소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개인과 개인이, 개인과 집단이 의견을 나누며 교류를 하게 된다면, '여론'이 형성되고 꺾을 수 없는 힘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ebruary Revolution, 1917)으로 소련을 만든 이들 대부분이 시베리아 유형의 경험이 있어서인지, 솔제니친은 <수용소 군도> 곳곳에서 제정 시대보다 열악한 수용소 생활에 대해 언급한다.   

 

 결국, 수용소 내에서 빚어진 '주인 계급'과 '노예 계급'의 갈등이 더 첨예해진 것은 '무지'를 주입받은 이들은 별다른 죄책감 없이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 ~ 1975)가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가지고 인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책무에 충실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런 면에서 히틀러의 극우와 스탈린의 극좌가 만나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수용소 군도 5>를 통해 '선(善) - 악(惡)'의 문제를 잠시 생각하며, 이제 <수용소 군도 6>으로 넘어가도록 하자...


 자기의 양심을 남에게 맡긴 채 명령에 따라도 되는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20세기 최대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선악에 대해 스스로 가치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인쇄된 지령서나 상사의 구두 명령만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선서! 떨리는 음성으로 되풀이하는 이 엄숙한 맹세, 그 의미는 악당으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것이다 - 이런 선서를 통해 아주 간단히 그들은 악당의 편이 되어 국민들을 탄압하게 된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끄림반도 전쟁은 - 그것은 러시아에서 가장 행운의 전쟁이다 - 농노의 해방과 알렉산드로 황제의 여러 개혁을 가져오게 했다! 그와 동시에 러시아에는 가장 위대한 힘, 즉 <여론>이 탄생했다... 여론! 사회학자들이 여론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나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은 정부와 당의 견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자유롭게 표명되고, 서로 영향을 미치는 개인적 견해로서만 구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질서>를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배자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도적질을 하여 남을 짓밟고 살아가며, 죄수들을 흩어지게 하는 것이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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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2-15 22:4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 훌륭한 페이퍼로 니체와 아렌트를 다시 한번 복기합니다. 수용소군도가 엄청나군요! 글의 내용에서 조금 벗어나지만 요즘 고민해 보았던게 악의 평범성의 범위 내지 비난가능성은 어느 정도인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답이 쉽지는 않더라구요!ㅎ 6권까지 힘차게 정진하시길 응원합니다!ㅎ

겨울호랑이 2021-02-15 23:01   좋아요 4 | URL
작가 솔제니친의 말처럼 삶의 밑바닥까지 다녀온 이들에 관한 이야기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처참한 삶의 기록을 넘어선 무엇인가가 분명 작품 안에 있음을 느낍니다. 때문에 <수용소 군도>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모든 철학은 죽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실증하는 대작이라 여겨집니다. 막시무스님 감사합니다! ^^:)

바람돌이 2021-02-16 00: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수용소 군도의 사유의 깊이가 대단하네요. 저런 사유를 저렇게 엄청난 양의 페이지에 펼쳐놓는단 말입니까? 작가는 역시 위대합니다. ^^

겨울호랑이 2021-02-16 05:47   좋아요 2 | URL
분량도 많지만, 절박한 삶을 살아야 했던 서로 다른 이들의 인생은 하나하나가, 그리고 그들 전체가 철학의 실증으로 보입니다. 힘든 수용소 생활이었지만, 이로 인해 깊은 의미를 담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바람돌이님 말씀에 매우 공감합니다^^:)

scott 2021-02-16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예의 반란을 진압하며 권력에 위력과 정당성을 확립시킨 로마 제국 처럼 수용소 군도속 자리잡은 주인 계급과 노예계급 ,,,죽음의 끝자락에서도 글쓰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은 솔제니친 작가, 겨울호랑이님 덕분에 다시한번 더 역사를 상기 시켜보게 되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님은 겨울 동면을 안하쉼 ^ㅎ^

겨울호랑이 2021-02-16 10:35   좋아요 1 | URL
scott님 말씀처럼 지배계급에 대한 복종만이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대다수의 다른 이들처럼 소극적인 분노 표출에 그치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글을 쓴 솔제니친은 이를 통해 진정한 초인으로 거듭났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도 겨울잠을 자고 싶은데, 먹고 살다보니 봄이 가까이 와버렸네요.ㅋㅋ scott님께서 매일 들려주시는 음악 또한 봄이 왔음을 알려주니, 겨울잠 자기는 틀린 듯 합니다. scott님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2-16 1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학 졸업하고 읽었던 기억이 나요
고등학생이였던 남동생이 허락없이 친구에게 빌려주고 아직도 못돌려받은책예요 ㅠ
아저씨가 되서도 그 친구는 누나책 아직도 갖고 있다고 하면서 왜 안돌려주는지...
책장이 누렇게 바랬을텐데...ㅋ

겨울호랑이 2021-02-16 12:38   좋아요 2 | URL
그렇군요. 옛말에 ‘책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고 하지만, 제 책을 가져간 이를 그렇게 생각되지는... ㅋ 저도 돈을 빌려줘서 못 받으면 그러려니 하는데, 책을 못 받으면 잊히질 않더군요. 오랜 억류 생활로 수용소 생활을 겪고 있을 <수용소 군도>가 하루 빨리 그레이스님 품 안으로 돌아오길 바라봅니다! ^^:)
 


 '계몽'의 다층성은 회고적으로 '계몽' 개념의 의미 내용을 오직 두 정신사적 뿌리들로부터 연역하려는 시도가 문제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이 정신사적 뿌리들이란 첫째, 데카르트 인식론의 이념 영역, 그리고 이 인식론이 사유의 자기 확실성과 진리 인식 방법을 근거 지음.(p29)... 둘째, 종교적, 형이상학적 빛 이론들의 이념 영역. 이 영역은 "자연적인 빛 lumen naturale"이론의 근대적 변천을 걸쳐 앞에서 언급한 첫 이념 영역과 밀접하게 만난다.(p30)... 대략 1770년부터 '계몽'은 "앎의 수준"이라는 의미 변형과 연계되어 예컨대 공동체 Gemeinwesen나 민족과 같은 도덕적, 문화적 상태를 의미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해가 계속 형성되면서 '계몽'은 이후 한 공동체, 민족, 시대 또는 지리적 공간의 전형적인 정신적 능력들과 표현 형식들의 전체를, 그리고 똑같이 그러한 물질적, 기술적 숙련들과 자식들의 전체를 의미할 수 있게 된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 계몽>, p31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개념사 사전의 6번째 주제는 "계몽 Aufklarung"이다. 근대와 뗄 수 없는 관련있는 이 단어에 대한 의미는 사람마다 조금씩 달랐으며, 그 의미가 확장, 변형된 역사를 지녔기에 이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차게 느껴진다.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 계몽>을 읽다보면, 이 단어만큼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닌 단어도 별로 없을 듯하다.


 1786년 칸트는 한 시대를 계몽하는 것을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로 본 반면에, 한 개별 인간을 계몽하는 것을 당시로선 비교적 쉬운 일로 여겼다. 실러에겐 이 관계가 정확히 정반대다. 그에게 현 시대의 계몽은 문젯거리가 아니다. 이 시대는 이미 계몽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진리가 밝게 비추었는데도  동시대인들에게 진리 수용에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인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 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 계몽>, p147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계몽'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코젤렉의 조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누가, 누구에 의해, 무엇을, 어떤 근거로, 어떤 수단으로, 어디로 이끄는가. 이러한 코젤렉 조언은 '빛을 만들었다 en+light'는 영어 계몽(啓蒙 enlightment)을 잘 풀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추가적으로 계몽의 주체와 계몽의 대상을 넣고, 왜 그렇게 했는가를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시대마다 다른 색깔의 빛으로 표현된 '계몽'이라는 현상의 공통인자를 발견할 수 있다. 

 

참된 진리 자체가 빛으로 밝혀주고, 이로 인해 인식할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354 ~ 430)의 조명설(Illuminatio)의 구조 안에서, 심훈(沈熏, 1901 ~ 1936)의 소설 <상록수>에 나타난 브나로드 운동의 현상을 떠올린다면 계몽의 대강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계몽'의 의미들에서, 그리고 이 의미들로부터 전개되는 계몽 개념의 그때그때 행해지는 주제 선택과 파급 범위와 평가와 적용 방식은 누가 누구에 의해 무엇에 대해 어떤 근거에서 어떤 수단으로 어떤 목표를 향해 "계몽되어야"한다는 것인가라는 일반적인 물음에 그때마다 구체적으로 답변하는 것에 의존한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 계몽>, p33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에 수록된 여러 단어들 중 다수가 이르면 17세기, 늦어도  18세기 후반 이후에 변형되거나 새롭게 의미를 추가된다. 이는 독일어의 개념을 설명하는 사전의 성격 상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 ~ 1832),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 ~ 1805)라는 독일의 거장들이 출현한 시기라는 점과 영국의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과 프랑스 대혁명(French Revolution, 1789 ~ 1799)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시기였다는 점이 가장 클 것이다. 아마도, 이는 개념사들의 전반적인 설명이 되겠지만 적어도 '계몽'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조금 특별한 설명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 1744 ~ 1803)의 '계몽'인식을 살펴본다면, 그가 스파르타에 '애국심'이라는 사상을, 아테네에 '계몽'이라는 사상을 부여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헤르더는 헬라스의 두 도시국가가 충돌한 펠로폰네소스 전쟁( Peloponnesian War, BC 460 ~ BC 445)은 이들 이데올로기의 충돌로 해석한다고 볼 수 있을까.


 헤르더는 '계몽'을 '인본성'의 본질 인식이자, 그 정신적 영향들로 언급된다. 이 영향에 의해 세계 창조자인 유일신에 관한 이론이 모든 철학과 종교의 근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헤르더)는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비교하면서 애국심과 계몽에 있어 인간성의 모든 인륜 문화가 그 주위를 맴돌고 있는 두 개의 극점을... 포착해 스파르타엔 애국심의 극점을, 아테네엔 계몽의 극점을 부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계몽'을 '국가기술'과 연관시키며 이로써 민족에 어울리는 책무에 대해 그 민족의 계몽을 생각하고 있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 계몽>, p141


 일반적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을 아테네의 번영을 시기한 스파르타의 견제 때문이라고 해석한 투키티네스(Thucydides, BC 465 ~ BC 400)의 분석이 일반적이지만, 투키티데스와 헤르더의 해설을 결합하여 '경제적 원인으로 발생한 전쟁이 가져온 정치적인 의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스파르타의 '애국심'이 아테네의 '계몽'을 이겼다고 볼 수 있겠다.


 23 (4) 이번 전쟁은 아테나이인들과 펠로폰네소스인들이 에우보이아 섬을 함락하고 맺은 30년 평화조약을 파기함으로써 일어났다. (5) 앞으로 어느 누구도 왜 헬라스인들 사이에 이런 큰 전쟁이 일어났는지 묻지 않도록, 나는 그들이 조약을 파기하게 된 원인과 그들의 쟁점을 먼저 기술하겠다. (6) 그러나 진정한 원인은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아테나이의 세력 신장이 라케다이몬인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켜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든 것이다._투퀴티네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1권 , p46 

 

 그리스가 문화, 언어, 예술, 학문의 씨앗을 다른 곳으로부터 얻어왔음은 내가 보기에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각, 건축, 신화, 문학 등의 몇몇 예에서 이는 명백히 드러난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이 모든 것에 완전히 새로운 본성을 부여함으로써 결국 남들로부터 얻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는 점, 단어의 원래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을 모든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일이 그리스인들의 과업이었다는 점 - 그리스 문화에 나타난 몇몇 이념의 진보에서 이러한 사실이 분명히 확인된다고 나는 생각한다._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 <인류의 교육을 위한 새로운 역사 철학>, p61


 헤르더는 다른 책 <인류의 교육을 위한 새로운 역사 철학>에서는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창조한 그리스 문화와 뒤를 이어받는 로마 문화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다뤄진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그리스의 패권이 스파르나, 테베로 넘어가면서 그리스 문명 자체가 쇠퇴한 것을 생각해 본다면, 구조적으로 전쟁국가이면서 병영국가였던 로마가 계승한 그리스는 스파르타의 '애국심'과 군대사회였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러한 기반 위에 수립된 고대 제국 로마. 스파르타의 '애국심'은 로마 제국의 '시민 의식'의 기반이 되었고, 중세 '신앙'의 기반이 된 반면, 아테네의 '계몽'은 르네상스(Renaissance)때까지 겨울잠을 잘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인간의 능력과 노력의 방향은 장년의 나이에 도달했다. 로마인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로마 민족은 그 얼마나 높은 언덕 위에 서 있었던가! 그리고 이 언덕 위에 그 얼마나 거대한 신전을 건설했던가! 이들이 건설한 공공건물과 전투기구, 그 계획과 실행수단은 세계 전체의 콜로세움이 되었다! 로마에서 유희가 벌어졌을 때, 세 개의 대륙에 걸쳐 피가 흐르지 않는 경우가 있었던가? 이 제국의 위대하고 존엄한 국민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힘을 떨쳤던가!(p63)... 로마인들이 주둔했던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수세기에 걸친 로마의 지배는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 폭풍은 모든 민족이 지닌 민족적 사고방식의 가장 깊은 내실까지 휘몰아쳤다._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 <인류의 교육을 위한 새로운 역사 철학>, p64


 물론, 이처럼 생각하는 것에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닐것이다. 18세기 후반 이후 독일의 계몽주의가 민족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보다 복잡하게 흘러간 19세기의 현상을 모두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분명있다. 그렇지만, 이번에 수많은 사상가들의 다양하게 사용한 '계몽'이라는 의미 중 하나를 건져야 한다면, 헤르더의 개념을 가져가고 싶다. 이 정도로 '계몽'의 개념사를 일단 정리하고, 다른 연관 개념사와 관련해서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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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2-13 11: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계몽의 여러가지 층으로 나누는 의미를
돌이켜 생각하며
모든 사실로 증명하지 않고
추론함으로써
사유하는 정신의
큰 두가지 방법의
근원을 규명하는데
문제가
있다는거죠?

첫줄 읽고 또 읽고 댓글부터 씁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21-02-13 12:27   좋아요 3 | URL
초딩님께서는 이미 책을 읽으신 줄은 모르겠습니다만, 코젤렉의 글의 의미를 잘 짚으셨다 여겨집니다. 조금 부연하자면 근대 이후 여러 의미로 사용된 ‘계몽‘의 뿌리를 앞서 말한 두 영역에서 찾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의미로 여겨집니다. 많은 부분을 설명하지만, 초딩님께서 말씀하신 바처럼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 또한 개념을 알기 위해서는 필요한만큼, 상황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말로 생각되었습니다. 이러한 코젤렉의 생각 또한 현상학의 틀을 사용하기에 전부를 설명하기엔 부족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 봅니다. 초딩님 행복한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초딩 2021-02-13 14:34   좋아요 2 | URL
일제 시대 때의 브나르도 운동도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어떤 측면은 타협적 민족주의 운동으로 그 타협이 굴종으로 보이기도하고,
너무 오래지속했던 조선의 양반체제의 붕괴를 사회주의 운동으로 그리고 평등을 위한 신분타파 운동으로 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즉, 현상은 여러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고 ㅜㅜ 사실 현재에서는 화자의 색이 입혀질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시절로 돌아간다해도
현재의 우리도 현재 일어나는 일을 모두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따름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과거를 회고한다는 것은 반성과 긍정적인 미래를 위함이라는 관점에서보면
얻을 것을 취한다는 입장이 도움이 될 것 같구요.
그렇다 해도 긍정 또한 편향되면, 진실을 보지 못하니 비판의 냉정한 눈을 유지해야할 것이고요. 또 그러기 위해서는 편협하지 않기 위해 많이 알고 열려 있어야할 것 같습니다.
코젤렉 읽어 보고 싶은데 우아 씨리즈가 많네요. 마음을 비우고 언급하신 계몽만 봐도 좋겠다 생각합니다.
:-) 사유를 자극하는 글 언제나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1-02-13 14:57   좋아요 1 | URL
1919년 3.1 만세항쟁 이후 다양하게 전개된 독립투쟁 방식 중 하나가 교육을 통한 자각운동이었다고 여겨집니다. 마치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이루어진 투쟁을 생각하면 후손들을 생각했던 선조들의 사랑이 느껴져 뭉클해집니다. 브나로드 운동도 이러한 교육투쟁의 일환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결실을 맺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교육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결실을 보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 한 인간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 걸렸던 것은 아니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초딩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엄청난 대패배가 겹쳐진 결과, 두 수도(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와 볼가강에 이르는 광대한 농촌 지대와 몇백만이나 되는 농부들이 집단 농장 정권에서 떨어져 나가고, 모든 공화국들이 독립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농촌은 집단 농장에서 해방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농노제적 정령에서 해방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만일 침입자들이 이처럼 우둔하고 교만하지 않았더라면, 만일 독일 대제국한테 편리한 집단 농장 제도를 유지하지 않았더라면, 만일 러시아를 식민지화하겠다는 바보 같은 구상을 세우지 않았더라면, 민중의 애국심은 그것을 억누르기에 바빴던 자들을 위해서 사용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우리가 러시아 공산주의 25주년 기념일을 축하하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언젠가는 빨치산의 진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점령하의 농부들은 자기 위지로 빨치산이 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처음에는 빨치산에 빵이나 가축을 주지 않기 위해 무장했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1918 ~ 2008)의 <수용소 군도 5>를 읽던 중 한 구절에 시선이 머문다. 해당 구절에서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의 상황을 분석하면서 만일 독일의 침략이 영토를 병합하는 제국주의 침략이 아니었다면, 소련은 스스로 무너질 수 있었음을 지적한다. 만약, 소비에트 연방에 내재된 불만요소들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었다면,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독일군의 비참한 패퇴는 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렇지만,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와 유전을 손에 넣지 않고는 전쟁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라는 독일군의 분석도 현실적인 요청에 기반한 것이라 어느 편이 더 바람직한 전략이었을 것이라 판단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솔제니친의 생각처럼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이 적당히 물러났다고 해도, 미국이 가세한 서부전선에서 온전한 승기를 잡을수 있었을까. 


 역사에 '만약에' 라는 가정을 달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것이기에 독일군의 동부전선에 대한 이야기는 이만 접자. 다만, 이와 비슷한 사례가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도 있어 이를 옮겨본다. 역사는 언제나 반복되기 마련인 것일까.


 연 燕나라 신하가 왕을 해치고, 전횡을 앞세우던 시기 제 齊 선왕(宣王, BC 350 ~ BC 301)은 군대를 일으켜 신하를 죽이고, 연을 차지하였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는 <전국책 戰國策>, <사기열전 史記列傳> <맹자 孟子> 등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최근 읽고 있는 <자치통감 資治通鑑>에서 내용을 옮겨본다. 



 

제 齊나라 사람들이 그 북방에 있는 연 燕나라를 정벌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어떤 사람은 과인에게 연을 빼앗지 말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과인에게 이를 빼앗으라고 합니다. 만승 萬乘의 나라가 만승의 나라를 쳐서 50일에 이를 들어버렸으니 사람의 힘으로 여기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것이어서 빼앗지 않으면 반드시 하늘의 재앙이 있을 것이니, 이를 빼앗는 것이 어떻겠소?"... 맹자가 대답했다. "만승의 나라가 만승의 나라를 치는데, 단사호장 簞食壺漿으로 왕의 군대를 영접한다면, 어찌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물이나 불을 피하고자 합니다. 만약에 물은 더 깊어지고, 불은 더욱 뜨거워진다면 또한 돌아설 뿐입니다."_사마광, <자치통감 3> 中


 제 선왕은 맹자(孟子, BC 372 ~ BC 289)의 말을 듣지 않고 연나라를 합병하고 약탈하게 되었지만, 제나라가 커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다른 나라 연합군에 의해 결국 쫓겨 나게 된다. 제나라의 굴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아 그 후에는 오히려 연나라에게 국토의 거의 대부분을 잃는 수모를 당하면서, 전국시대 3강(强) - 진 秦, 초 楚, 제 齊 - 의 위상을 잃으면서 몰락하게 된다. 만약, 제나라의 정벌이 없었다면, 진나라의 통일 대신 삼국정립 三國鼎立이 이루어졌을까. 이 역시도 모를 일이겠다. 다만, 선왕의 연 정벌이 난왕(赧王) 원년(丁未, BC 314)에 이루어진 사건이었음을 생각한다면, 불과 40년도 안 된 시기에 뒤바뀌어진 제와 연의 운명은 참으로 얄궂다. 


 난왕 36년(壬午, BC 279), 연인 燕人들이 안평 安平(산동성 임치현의 동쪽)을 공격하였는데, 임치 臨淄의 시연 市掾으로 하여금 모두 쇠망으로 수레의 축을 싸도록 하였다. 성(安平城)이 무너지게 되자 사람들이 다투어 문으로 나가니 모두 수레의 축이 잘리고 수레가 부서져서 연에게 잡힌 바 되었지만 다만 전단의 종인들은 수레의 축을 쇠로 감싼 것 때문에 벗어나 드디어 즉묵 卽墨(산동성 즉묵현)으로 달아났다. 이때 제의 땅은 모두 연에 귀속하게 되었지만, 다만 거 莒, 즉묵만 아직 떨어지지 않았는데..._사마광, <자치통감 4> 中


 다시 시대를 바꾸어 보자.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군의 동부전선이 전격적의 전형이었다면, 같은 추축국이었던 일본의 동남아시아 전선, 대중국 전선 또한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만약, 일본제국이 동남아 전선에서 제국주의의 해방군으로 만족하고, 돌아갔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이 역시 의미없는 가정일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극히 최근까지(그리고 지금도) 동남아시아 지역에 이어지고 있는 친일(親日)정서는 보다 더 깊어졌을 것이라는 사실.  


 2차 세계대전 중 약 3년8개월에 걸친 일본의 점령은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동남아시아 사회에 여러모로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 지역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서구 식민지배를 일시에 종식하고, '대 大동아시아 공영권',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 같은 인종주의적 수사와 함께 동남아시아 사람들에게 백인불패 白人不敗 신화를 불식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쟁이란 특수한 환경에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일본군정에 동원되고, 전례 없는 혹독한 체험을 하는 동안 전반적으로 반식민주의 정서가 크게 고양되었다. 그결과 전후 강력한 재식민지화를 계획하던 서구 제국주의 세력은 예상치 못한 거센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_소병국, <동남아시아사>, p441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된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은 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는 <쇼와 육군>에서, 마리우스 B. 잰슨 (Marius B. Jansen, 1922 ~ 2000)은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들 저자들은 일본제국군의 문제를 실용주의적인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시대 정신의 상실에서 찾는다. 만약 일본이 직접적인 침략이 아닌 문화제국주의를 통한 간접지배를 펼쳤다면, 우리는 일본에 지금보다 우호적인 감정을 갖고 더 종속된 관계로 묶여있지 않았을까. 물론, 이른바 폭력을 반대한다는 일본 지식인들이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 이후 정한론(征韓論)을 주창하는 모순된 행동을 보면 역사의 흐름이 꼭 그렇게 흘렀으리라는 보장은 없었겠지만....

 

 만주국이 건국되면서 쇼와 육군의 군인들은 군사력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고, 그 착각을 '이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메이지 시기의 군인들과는 근본부터 다른 심리를 낳았다. 결국 군사는 국가의 위신과 안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국을 식민지화하는 유력한 무기라고 믿었던 셈이다._ 호사카 마사야스, <쇼와 육군>, p136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 무르익어 가던 시절 활동가들이 얻은 괄목할 만한 지적, 정치적 경험은 다름 아닌 일본 사회가 서양의 위협에 제대로 대처할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을 자각한 점이라는 것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p535)... 진정한 진보로 이어질 이성적인 계획에 눈을 뜨면서 폭력적인 수단을 버렸던 메이지 유신의 선각자들과, 입으로는 그들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실제로는 이성에 등을 돌리고 근거 없고 시대착오적인 미신의 불합리로 자신의 조국을 내모는 허망한 시도를 하면서 폭력에 호소한 후세의 아류들의 차이점을 보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_ 마리우스 B. 잰슨,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 p575


 마지막으로, 정치 사상으로 가지는 공자(孔子, BC 551 ~ BC 479)의 인(仁), 맹자의  의(義)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도덕사상으로 진부하게 다가오는 사상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정명(正名)의 이름으로 행해질 때 누가 그것을 쉽게 비판할 수 있을까... 이보다 더 큰 무력을 찾기 힘들 것이라는 점에서 <중용 中庸>에서 말한 강함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수용소 군도> 에서 묘사된 지옥도(地獄道)와 같은 삶 속에서 나온 작가의 작은 세상 이야기를 통해 여러 생각을 해본다. 이제 다시 <수용소 군도>안으로 들어가야겠다...


 10장 章. 故君子和而不流, 强哉矯! 中立而不倚, 强哉矯! 國有道, 不變塞焉, 强哉矯! 國無道, 至死不變, 强哉矯! 그러므로 군자는 화합하면서도 흐르지 않으니, 아~ 그러한 강 强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로다! 가운데 우뚝 서서 치우침이 없으니, 아~ 그러한 강 强함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로다! 나라에 도가 있어도 궁색한 시절에 품었던 지조를 변하지 아니하니, 아! 그러한 강 强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로다! 나라에 도가 없어도 평소에 지녔던 절개를 죽음이 이를지언정 변치 아니 하니, 아~ 그러한 강 强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로다! _도올 김용옥, <중용 한글 역주>,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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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2-09 16:1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제가 최근에 읽은 이와나미 신서 <독소전쟁>
을 보니, 히틀러의 대소전쟁은 이미 시작부터
실패했다고 하더군요.

뚜렷한 전쟁의 목표가 없었다. 폰 클루게와
구데리안의 중부집단군이 개전과 동시에 그
야말로 동부전선을 휩쓸면서 적도 모스크바
를 함락시켰어야 했는데, 쓸데 없이 키예프
공략전을 시도하면서 소련을 초반에 압도할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먹었지요.

다음해인 1942년에 모스크바 공략 대신 선택
한 우크라이나의 곡창과 카프카즈의 석유를
노리고 출발한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는
결국 독일 전쟁기계 베어마흐트의 몰락의 단초
를 제공했죠.

사실 독일 베어마흐트를 저지한 건 서유럽의
영미군이 주도한 제2전선이 아니라 스탈린이
이끄는 붉은군대였다고 생각합니다.

솔제니친이 지적한 대로,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맞이한 우크라이나 민중들의 불만을 잘 활용했다면
소련이 붕괴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가정해 봅니다.

겨울호랑이 2021-02-09 21:36   좋아요 4 | URL
레삭매냐님의 말씀처럼 독일군이 전격적으로 모스크바로 진군을 했다면, 제2의 나폴레옹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서부전선에서 적을 대서양 너머로 확실히 격퇴한 후에 동부전선으로 전선을 만들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그러기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라는 변수가 있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독일군은 제1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동부전선과 서부전선 모두에서 적을 맞이하는 상황에 놓였고, 더 안 좋았던 것은 양쪽 전선이 독일본토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긴 병참선이 요구되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전쟁 초기 지나치게 큰 승리를 거둔 것이 독일의 발목을 잡았다는 아이러니도 있습니다만....대충 몇 가지만 추려도 역사 속에서 고려해야할 변수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이처럼 많은 변수가 맞물려 만들어낸 역사의 흐름이 과연 몇 개의 가정이 바뀐다고 해서 달라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레삭매냐님, 감사합니다.^^:)

scott 2021-02-09 20:1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말에 동감 우크라이나를 지켰어야 했어요 소련에 곡식 저장고, 흑해 요새를 지켰어야 했는데 ,,,문제는 교묘했던 소련이 우크라이나 곳곳에 비밀 경찰들을 심어놔서 ,,,,

겨울호랑이 2021-02-09 21:39   좋아요 3 | URL
1941년 개전 초기 우크라이나인들은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여기고 실제로 환영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러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타지 못했던 것은 독일 패착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만, 생각보다 동부전선이 빠르게 확대되었고, 동절기에 대한 독일군의 대비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생각해 본다면, 현지 민심까지 고려하지 못했던 독일군의 행태도 서툴렀다고 비판만 하기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참 어렵네요^^:)

미미 2021-02-09 17: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프사 귀엽네요! (할 수 있는 얘기가 이것뿐ㅠ) 찜해놓고 몇번읽어봐야 이해될듯! 도올님 글은 기본지식이 없인 힘들던데 겨울호랑이님은 프루스트는 물론 어려운 책도 척척~♡♡항상 놀랍습니다.(계속 따라 읽다보면 저도 언젠가?^^;;) 위 두분도 대단하심👍👍🧐!!

겨울호랑이 2021-02-09 21:41   좋아요 4 | URL
아닙니다. 제게 어려운 책을 미미님께서는 쉽게 읽으시는 것을 보면 어려운 책은 배경지식의 차이에서 오는 상대적인 것 같습니다. 또, 제가 읽은 책을 제가 온전하게 이해한 것도 아닌 것을 보면 우리 모두가 같이 배워가는 이웃이라는 생각입니다. 미미님 감사합니다.^^:)

파이버 2021-02-09 20: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프로필 사진 보석십자수인가요? 너무 귀엽습니다!♡ 다가오는 설 명절 즐겁게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1-02-09 21:43   좋아요 4 | URL
아, 프로필 사진은 연의와 함께 만든 톡톡블럭 - 헬로키티편 - 입니다. 요즘 연의가 레고 프렌즈와 톡톡블럭에 빠져 있어서 부품을 찾아 세팅하는 업무 중입니다. 파이버님께서도 행복한 설 연휴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choimos 2021-02-17 1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히틀러의 소비예트 침공은 역사적 필연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유태인 박멸을 외쳤던 히틀러와 나찌스트들이 유태인의 최대 거주지역인 우크라이나을 침공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독일 폴란드의 유태인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지역의 아쉬케나지 포그롬 유태인이 박해를 피해서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생겨난 것이었습니다.유태인 최대거주 지역을 침공해서 유태인을 박멸한다는 것은 히틀러와 나찌스트에겐 필연이었습니다. 솔줴니쯴의 < 200년을 함꼐>이라는 유태인 문제를 다룬 두권의 큰 책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솔제니쯴은 상당한 극우적 입장을 가진 슬라브 민족주의자란 점을 안다면 그의 주장에서 편견과 극단적인 가정을 가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https://www.ozon.ru/context/detail/id/223375496/

겨울호랑이 2021-02-17 18:40   좋아요 0 | URL
우크라이나에 그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군요. choimos님 말씀처럼 히틀러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전략적 목적 이외에 정치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면, 더욱 그들의 승리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choimos님 감사합니다.
 

 

 <오! 한강>은 아버지 강토와 아들 석주를 통해 한국현대사를 그려낸다. 허영만 화백 초창기 만화의 주인공 이름인 '강토'라는 이름에서 지난 세월의 흔적을 느낀다. 반가움과 그리움, 추억과도 같은. 작품이 나왔던 1980년대에는 주인공들의 입에서 나오는 웅변과 연설에 담긴 내용이 충격적으로 다가왔겠지만, 이제는 어느정도 보편적으로 알려진 사실이 된 점 또한 강토의 이름만큼이나 세월의 흐름을 알려준다. 


 허영만 화백의 '강토'는 여러 작품에서 매번 다르게 그려진다. 강토의 모습, 강토의 성격... 등등.. . <오! 한강>에서는 강토 대신 시대가 매우 빠르게 변화한다. 해방과 분단, 전쟁과 군사독재, 그리고 맞이한 1987년. 급격하게 바뀌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혁명가에서 아나키스트로 서서히 바뀌어 가는 강토의 모습은 <오! 한강> 5권의 작품을 마치 서로 다른 별개의 작품으로 느끼게 한다. 돌아보면, 최근 100년간 한국 현대사는 얼마나 수많은 사건이 한꺼번에 일어난 시기였는가... 불과 70여년 남짓한 시기에 미국의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뒤이어 산업혁명이 이어지는 급변하는 시대 상황에서 매번 삶과 죽음의 선택을 강요받았던 시기. 이러한 시기를 살아가면서 겪어야 했던 개인의 변화는 우리들 자신이 시대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존재임을 일깨운다. 여기에 더해, 비록 우리나라에서는 서양과 같은 치열했던 종교전쟁은 없었지만, 종교 대신 자리를 차지한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깊은 영향을 갖고 있음도 돌아보게 된다. 


 

<오! 한강>은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한강>을 배경으로 하는 시대를 보다 압축적으로 그림과 함께 담아 독자들에게 보다 생생하게 시대상을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작품이다. 쉽고 빠르게 한국 현대사의 굵진한 사건들을 개인의 입장에서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라면, 대신 제한된 인물로 인해 놓치는 부분도 있음도 당연하면서도 아쉬운 부분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를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그 전에 <수용소 군도>부터 마무리를 지어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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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2-01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추억의 오! 한강. 저 이거 옛날에 잡지에 연재할 때부터 손꼽아 기다리면서 봣었어요. 87년 이후 사회의 변화를 확 느끼게 해준 만화였다죠. 지금 보면 뭐 그렇게 감격스러울 것 같지는 않은데 겨울호랑이님 덕분에 추억이 방울 방울입니다. ^^

겨울호랑이 2021-02-02 05:40   좋아요 0 | URL
^^:) 감사합니다. 저는 말로만 듣다가 이번에 처음 봤는데, 당시 시대상을 생각하면 적지 않은 충격을 줬을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바람돌이님 행복한 하루 되세요!^^:)
 

 <일러스트와 함께하는 유명 건축물 이야기 : Architecture Inside+Out>에서 세계에 널리 알려진 50여개의 건축물들이 공공 생활 public Life, 기념물 Monuments, 예술과 교육 Arts and Education, 주거 Living, 예배 Worship의 주제 아래 소개된다. 시간적으로는 고대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Parthenon부터 지금도 건설되고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Sagrada Familia에 이르기까지, 공간적으로는 서쪽 런던 아쿠아틱 센터 London Aquatics Centre부터 동쪽 구겐하임 미술관 Solomon R.Guggenheim Museum에 이르기까지. 고대 무명의 건축가로부터 르 코르지뷔에(Le Corbusier, 1887 ~ 1965)들이 이루어낸 건축들이 소개된다.


 이들 책을 통해 우리는 삶을 위해 인위적으로 나뉘어진 건축물 이라는 공간이 의미가 부여된 작품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 <공간이 만든 공간>의 저자 유현준은 바르셀로나 파빌리온 Barcelona Pavilion을 일본 건축물과 선(禪) 사상과 서양의 교점으로 해석하지만, <일러스트와 함께하는 유명 건축물 이야기>에서는 또 다르게 바라본다는 점에서 해석의 다양성을 일깨워준다. 이러한 전문가들의 객관적 해설이 본문을 통해 소개된다면, 독자들은 주관적인 감상을 떠올릴 수 있다.  


 개인적으로 파르테논 신전을 통해 페리클레스(Pericles, BC 495 ? ~ BC 429)가 이룬 아테네의 황금시기와 펠로폰네소스 전쟁( Peloponnesian War, BC 431 ~ BC 404)을, 1972년에 지어진 나카긴 캡슐 타워를 통해,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를 배경으로 하는 <20세기 소년>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금각사(Temple of the Gollen Pavilion)를 통해 동명의 소설 <금각사 金閣寺 >와 작가 미시마 유키오 三島由紀夫, 1925 ~ 1970)와 그의 극단적인 선택를 생각하게 된다. 또한, 책에 소개된 슈뢰더 하우스 안에서 몬드리안(Pieter Cornelis (Piet) Mondrian, 1872 ~ 1944)의 작품을 떠올리는 것은 3차원에서 2차원으로 차원을 감소시키며 미(美)를 확인하는 즐거움을 받는다.


[사진] Nakagin Capsule Tower(출처 : https://inhabitat.com/now-you-can-rent-a-room-in-japans-nakagin-capsule-tower-via-airbnb/)


[사진] Schoder House(출처 : https://archello.com/pt/project/rietveld-schroder-house)


 대중들에게 연필로 그린 건축 세밀화를 통해 건축의 아름다움을 안내하고, 평안한 느낌을 선사하는 <일러스트와 함께하는 유명 건축물 이야기>를 통해 비대면 세계 여행을 잠시나마 떠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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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1-30 12: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런 책 정말 좋아해요. 보관함으로 쏙 넣어둡니다

겨울호랑이 2021-01-30 12:33   좋아요 2 | URL
바람돌이님께서 직접 읽으시면 더 좋을 책이라 생각합니다. 즐거운 독서, 행복한 주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