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 어느 사상의 일생
에드먼드 포셋 지음, 신재성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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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초 자유주의는 크게 네 가지 이념을 기조로 하여 추구되었다. 첫째, 사회의 도덕적/물질적 갈등은 결코 제거될 수 없고, 그저 억제되거나 어쩌면 유익한 방향으로 길들여질 수 있을 뿐임을 받아들인다. 둘째, 정치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견제되지 않는 권력에 반대한다. 셋째, 사회적 병폐는 치유될 수 있고 인간의 삶은 개선될 수 있다고 믿는다. 넷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거나 어떤 존재이건 간에, 그들의 삶과 계획을 국가와 사회가 법에 기초해 존중한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서문 中


 에드먼드 포셋 (Edmund Fawcett)의 <자유주의 Liberalism>는 갈등, 권력, 진보, 존중이라는 네 가지 기조를 바탕으로 추구된 사상의 연대기다. 독자들은 본문을 통해 '자유주의'의 역사가 결국은 네 이념 중 어디에 방점을 두는가에 대한 해석의 문제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자유주의가 주도적인 사회사상이 된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자유주의, 경제적-자본주의' 사상은 자본의 시대(The Age of Capital)을 지나 제국의 시대(The Age of Empire)에 이르러 한계에 이르렀고, 자유주의는 그대로라면 유럽을 떠도는 하나의 유령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민주주의와 손을 잡게 된다. 이후 엑슨(Exxon)과 모빌(Mobil)의 합병과도 같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최선은 체제(system)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백가쟁명(百家爭鳴)처럼 펼쳐진다.


 자유주의(1880~1945)는 민주주의와 화해했다. 그 역사적인 타협으로, 자유민주주의로 알려진 자유주의 관행이 출현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대타협은 정치적 선택, 경제적 권력, 윤리적 권위를 수반했다(p43)... 네 가지 지도 이념 - 갈등, 권력에 대한 저항, 진보, 시민적 존중 - 은 자유주의의 익숙한 경쟁적 표어인 "자유", "개인", "권리", "평등"의 근간이자 그것들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의 약속은 서구적이거나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좁게 한정되지 않았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p45/487


 1880년에 이르러 자유주의자들은 정치, 윤리, 경제의 차원에서 민주주의와 굳건한 협정을 맺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민주주의와의 타협은 자유주의가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해 맞닥뜨린 대가였다. 1880년대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협상의 윤곽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만약 소수가 다수와 몫을 나누어야 한다면, 다수는 소수의 존재를 인정할 것이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p151/487


 자유주의는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보통선거권과 다수에 의한 지배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한 인련의 흐름 중 하나가 존 롤스(John Rawls, 1921~2002)가 강조하는 정의로운 사회,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1883~1946)가 주장하는 높은 고용율 유지를 통한 충분한 유효수요(Effective Demand)라면, 


 존 롤스(1921~2002)의 이력은 두 가지 질문을 천착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패배자들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으로 의견이 맞지 않는데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 수 있는가?"이다. 이 질문들은 롤스의 <정의론>(1971)을 관통하는 두 개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에 대한 답으로서 롤스는 "잘 짜인" 혹은 "정의로운" 어떤 사회를 묘사했다. 그것은 바로, 그 사회의 이점을 누림에 있어서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며, 시민의 평화를 조건으로 가치 있는 삶의 형태에 관한 심오한 의견 불일치를 수용하는 사회였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p326/487


 케인즈주의자들은 정부가 경제를 부양하고 실업을 저지할 필요가 있을 때 돈을 쓰고 돈을 빌려야 한다고 가르쳤다. 프리드먼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정부는 통화 안정을 제공하고 내버려둬야 한다. 프리드먼이 인정했듯이, 일자리 부족은 1930년대에 치유되어야 할 질병이었다. 그 자신은 루스벨트 정부에서 일하면서 전시 동안의 원천 과세 도입에 일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시대도 경제 사상도 변했다. 인플레이션이 위협 요소였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p359/487


 또 다른 하나의 큰 흐름은 최소정부를 강조한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 1938~2002)과 밀턴 프리드먼( Milton Friedman, 1912~2006)의 자유주의 시장경제이론이라 하겠다.(본문에는 이보다 다양한 흐름들이 소개되지만, 거칠게나마 크게 두 줄기로 묶어본다) 지금까지도 격렬한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그렇지만 이제는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일련의 흐름이 주류가 된 현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며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로버트 노직은 <무정부, 국가, 유토피아>(974)에서 정의에 대한 롤스의 원칙들이 화해할 수 없는 갈등 속에 있다고 주장했다. 노직은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부를 재분배하려는 시도는 사적인 권리를 침해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정치 시장에서 우파 논객들은 공정한 절차에 대한 롤스의 표면적 관심이 평등한 결과에 대한 평등주의적 욕망을 감추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노직의 비판을 환기했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p335/487


 공적 논쟁의 초점을 높은 고용률 유지에서 낮은 인플레이션 유지로 이동시키는 데 있어 밀턴 프리드먼(1912~2006)보다 더 큰 역할을 한 경제학자는 없었다. 일류 경제 이론가이자 통화 역사가이기도 한 프리드먼은 어빙 피셔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통화 관리가 1920년대 후반의 경기 침체를 10년에 걸친 장기 불황으로 바꾸어놓았다고 보았다. 프리드먼의 주장에 따르면, 올바른 통화정책을  취하는 것이 정부의 최우선적인 경제적 임무였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p359/487


 개인적으로 자유에 대한 논의는 결국 자유를 '리버티 liberty'로 볼 것인가, 아니면 '프리덤 freedom'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라 여겨진다. 그 전에 먼저 freedom을 'free from~'으로 바꿔써보자.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통해 보장한 보통선거권에서처럼 자유 또한 모든 이들에게 이득(gain)을 최대로 추구할 것을 보장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손실(loss)를 회피할 수 있어야 하는가. 국가 또는 사회가 보장해야 하는 자유가, 이사야 벌린이 말했듯 자아실현을 위한 적극적 자유 아니면, 생존을 위한 최저한으로부터의 자유인지에 따라 우리는 전혀 다른 해법이 훌륭한 논법에 의해 제시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리버티와 프리덤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다른 리뷰와 페이퍼를 통해 정리하도록 하자. 일전에 노직의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를 정리했으니, 공정하게 롤스에게도 기회를 줘야겠다... 


 데이비드 해킷 피셔는 <리버티와 프리덤>(2005)에서, '리버티 libety'와 '프리덤 freedom'이라는 이란성 쌍둥이가 미국의 수사적/정치적 상징에서 맡고 있는 역할을 탁월하게 파헤쳤다. 피셔에 따르면, "리버티!"라는 슬로건을 파악하고 지배하지 못한다면, 그 어떤 진지한 운동도 미국에서 오랫동안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었다. 설령 존재감을 드러낸다 해도, 일단 경쟁 운동들이 그 운동에 리버티의 적이라는 오명을 씌워버리면 좀체 성공할 수 없었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p110/487


 미국인의 혼동은 언어나 개념의 혼동이 아니었다. 그들은 "-으로부터 자유로운"과 "-을 하는 데 자유로운"이 갖는 어휘상의 문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유로움(막힘 없는 강이 자유롭게 흘러갈 때처럼)과 놓여남(개인이 권위에 의해 멈춰지거나 저지되지 않을 때처럼)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리버티"와 "프리덤"으로 각각 다른 것을 의미하고자 한 만큼, "리버티"와 "프리덤"의 차이는 실용적인 것이었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p112/487


자유주의자들은 전략적으로 한참 후퇴해 보통선거권을 인정했고, 다수에 의한 통치를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다수의 지배가 갖는 한계들에 대한 탐구를 결코 중단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 전략적 후퇴의 첫 번째 요소는 인민 주권에 대한 자유주의의 암묵적 합의를 확정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처럼, 국민에 의한 정부는 특히 대의 代議 representation, 정확히 표현하기 articulation, 관료화 bureaucratization, 절연 insulation이라는 제약을 받아야 했다. - P156

자유주의 정당들을 위해서는 아니라 할지라도, 19세기 말에 이르러 대중 민주주의는 자유주의 자체에 대한 일정한 보상을 약속했다. 반대당들이 집권하게 되면서 대중 정치에 더 능숙한 그 정당들은 자유주의 사상을 흡수하고 수용했다.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에 약속했듯이 민주주의도 자유주의에 양보한 것이었다. 이러한 타협의 자유주의는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훨씬 더 많았다. - P164

벌린이 제시한 극적인 대조에 따르면, 적극적 자유는 우리의 소질을 육성하거나 발현하기 위한, 혹은 벌린의 애매한 문구를 사용하자면 "우리의 참된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인간적 발전의 자유였다. 소극적 자유는 좀더 단순해 보였다. 그것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에 대한 외적 제약으로부터의 자유였다. - P313

근대 국가는 문화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근대 국가는 일종의 윤리적-문화적 실체로 여겨질 수도 있고 정치체로 여겨질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국가는 윤리적 이상과 문화적 애착을 공유하는 사람들, 즉 에토스 ethos로 간주될 수도 있고, 시민들의 조직체인 데모스 demos로 간주될 수도 있다. - P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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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디오니시우스 사상의 혁신적인 면은 첫 번째 가정과 두 번째 가정을 하나의 동일한 주체, 즉 신에 적용하면서 ‘보류’ 단계와 ‘발전’ 단계를 유일신의 두 측면으로 고려했다는 데 있다. 반대로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은 이 ‘보류’와 ‘발전’의 단계를 서로 구별된 근원실체, 다시 말해 존재를 초월하는 하나와 진정한 의미에서의 존재에 부여했다.

디오니시우스의 신은 사실상 보편적이고 유일무이한 원인인 동시에 이에 상응하는 모든 결과를 단순하고 불분명한 형태로나마 이미 품고 있는 신이다.

보에티우스(Anicius Manlius Severinus Boethius, 480년경~525년)는 로마의 뛰어난 정치인이자 정신적인 측면에서 후세대 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뛰어난 지성인이었다. 역사는 전기를 통해 그를 야만인들에게 박해당한 로마인으로 기억하지만 철학사적인 관점에서 보에티우스는 틀림없이 중세 사상에 기초를 마련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들 중에 한 명이었다.

보에티우스의 가장 널리 알려진 저서 『철학의 위안』 에서 표명된 몇몇 입장을 고려했을 때 보편적인 개념은 현실을 설명하는 데 감각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일종의 사상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이에 비하면 감각의 인식 영역은 훨씬 더 협소한 것으로 드러난다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게 될 일들을 예견한다는 차원에서 섭리가 영원하고 시간을 초월하며 모든 것을 파악하는 신의 관점과 일치한다면, 운명은 피조물에게만 적용되기 때문에 시간에 종속된다는 한계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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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그려낸 세계는 그가 일생을 바쳐 보고 듣고, 이야기를 수집하고, 자료를 모으고, 연구해 써낸 결과물이지, 한 인물의 증언만으로는 복원할 수 없는 세계였다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요즘 4·3을 다루는 많은 작품에서 때로 아쉬움을 느끼는 까닭은 바로 그 부분이 빠져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4·3 이전 제주 사람들이 어떻게 울고 웃고 노래하고 춤추며 살았는지, 어떤 일로 생계를 이었고 무엇을 믿고 받들며 살아왔는지, 그런 일상의 깊이 말이다.

강만길 역사학이 지닌 특징을 정리할 때 ‘현재성’은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선생은 역사학이 현실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민족과 사회가 한층 더 인간다운 삶을 이루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기여해야 한다고 보았다. 현재성을 강조한 강만길 역사학의 대표적인 예는 1970, 80년대 ‘분단시대 역사인식’을 제창하여 분단사학과 냉전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돌파구를 제공한 것이라 하겠다.

‘강만길 역사학’은 간단하지 않다. 무엇보다 선생 자신께서 평생 자신의 논지를 끊임없이 고치고 심화해간 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역사학은 언뜻 보면 평이해 보이지만 들여다볼수록 넓고 깊은 바다를 보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는 학문적 측면에서 보자면 선생이 ‘총체적인 역사’를 추구한 역사학자였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없지만 견디는 방법은 있다. 오래 걷고 깊은 잠을 자는 것. 야외에서 동물을 찾아다니면서 오래 걷는 날은 하루 7만보를 걸었다. 바닥이 고르지 않은 눈길에 미끄러지며 걷다보면 평지를 걷는 것보다 더 피곤했고, 기지에 돌아오면 지쳐서 금세 잠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체력단련실에서 러닝머신을 뛰거나 자전거를 타며 땀을 흘렸고 어떤 사람들은 늦게까지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고 영화를 봤다. 모두가 저마다의 방법으로 외로움을 견딘다.

노동력의 세계적 이동과 고령화 현상을 막을 수 없고 저출생 문제는 심각하잖아요? 그런데 이 상황에서 우리 고령자 인력을 어떻게 활용할지, 이 노동시장의 규율을 어떻게 구성할지 계획을 확실히 세우고 실행하다가 정말 인력이 절대 부족하다는 판단과 사회적 합의가 생길 때 외국인노동자가 들어와야 한다고 봅니다.

죽음이 공동체의 경계와 문턱을 설정하고 그것을 둘러싼 개인적·집단적 주체화의 문제에 개입하는 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감벤(G. Agamben)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가 ‘비국민’이라는 주체를 탄생시키는 통치성이 죽음의 이름으로 신체화된 형상이라면, 쁘리모 레비(Primo Levi)의 글쓰기는 홀로코스트가 우리의 ‘인간’됨을 재고하게 하는 객관적 사실이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행위였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실존주의 철학자인 장 아메리(Jean Amery)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후의 특권으로 죽음을 지목했다. 그 자신이 실행하기도 한 이른바 ‘자유죽음’은, 신이 내린 삶이라는 은총을 모독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배신하는 행위로서의 자살이 아니라 규범적 죽음에 굴복하지 않는 창조적 행위이다. 그의 죽음론은 주어진 삶의 고통에 저항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삶의 논리가 아닌 죽음의 논리로 인간과 그가 속한 사회를 통찰하기 위해 그는 ‘삶’이라는 연속성을 ‘죽음’이라는 불연속성으로 재편하고자 했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가 경험하는 죽음은 언제나 타인의 죽음이므로 1인칭일 수 없다. 특히 사회 내에서 공유되는 객관적 인식 대상으로서의 죽음은 3인칭의 속성을 띠며, 이때 죽음은 지식이나 정보의 형태로 "공동의 관념, 공동의 환상"이 된다.4 죽음이 일종의 담론이 된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이미 죽은 자들이 아닌 산 자들의 삶에 작용한다는 점은 죽음이 강한 행위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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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사 1 - 한국인의 역사적 전개 한국경제사 1
이영훈 지음 / 일조각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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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들은 지적 공백상태에서 서구의 학문이나 마르크스주의를 수입하였다. 지적으로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역사적 경험 자체가 빈약하고 단순하였다... 이같은 현실적 제약에 눌려 남한의 역사학자들은 알게 모르게 인간 사회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과정으로 그린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정립한 한국사상 韓國史像에 공감하거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24


  이영훈(李榮薰, 1951 ~)의 <한국경제사 1 : 한국인의 역사적 전개>는 저자 자신이 구분한 4개 시대 중 제1시대(기원전 3세기 ~ 기원후 7세기), 제2시대(8~14세기), 제3시대(15~19세기)의 3개 시대를 대상으로 하는데, 이 시기의 변곡점들은 고전 출현, 삼국통일, 조선건국과 일본에 의한 강점(저자에 따르면 일본에 의한 근대문명 이식)이다. 한국경제사지만 이 책의 주된 분석 대상은 조선시대이며, <한국경제사 1>에서의 초점 중 하나는 노비제 국가 조선이다.


 새로운 연구는 14~17세기가 한국사에 있어서 노비제의 전성기임을 명확히 하였다. 그 이전의 삼국, 통일신라, 고려 시대에 노비의 인구 비중은 그리 크지 않으며, 아무래도 10% 미만이었다. 그에 비해 15~17세기의 노비는 전체 인구의 30~40%에 달하였다. 그리고 노비의 일부분은 세계사적으로 노예의 범주에 속하였다. 노비 인구의 팽창은 생산자 대중에 가해진 인격적 예속이 심화되었음을 의미한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26


 저자는 15세기의 시대 변화에 주목한다. 앞선 시대인 고려시대 이전 사회의 특성이 공동체 중심 사회라면,  조선시대는 신분제 사회로 변화했고 그 과정에서 높은 조세(역)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많은 이들이 노비로 전락하면서 시대적 단절이 야기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15세기는 커다란 전환기였다. 토지가 개인의 재산으로 바뀜에 따라 사회가 신분관계로 분열하였다. 그 이전의 신라~고려 시대는 농민, 수공업자의 생산활동, 국왕/귀족의 수조 收租활동, 사원을 중심으로 한 종교활동에 이르기까지 공동체에 기반을 둔 사회였다. 왕도에 집결한 귀족, 관료, 중앙군의 공동체가 지방의 군현공동체를 지배하는 체제였다. 그 공동체사회가 15세기에 이르러 각 사람이 양반, 상민, 노비라는 신분으로 구분되고 대립하는 신분제사회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앞서 강조한 대로 인구의 13~40%가 노비로 떨어졌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47


 그렇다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단절을 가져온 계기는 무엇인가. 저자는 '정호(丁號)'에서 그 차이를 찾는데, 고려시대의 정호 제도가 토지와 인구에 대한 역(役)이 부과되었다면, 조선시대의 역은 오로지 인구에 대한 부과라는 점에서 일종의 퇴행이 일어났다고 파악한다. 


 고려의 정호는 토지와 인구의 구조적 결합이었다. 그에 비해 15세기 초의 호는 토지와 무관한 순수한 인적 구성이었다. 전술한 대로 조선왕조는 양전을 행함에 있어서 토지를 5결의 규격으로 구획하고 거기에 천자문으로 정호 丁號를 달았다. 그 과정에서 8결 또는 17결을 표준적 규모로 했던 고려의 정호가 크게 해체되었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348


 1468년, 보법을 시행한 지 4년 만에 세조가 사망하였다. 이후 양반관료들은 세조의 개혁을 하나씩 취소하거나 수정해 갔다 조선왕조의 지배체제는 양반관료의 이해관계를 각인하는 형태로 변질되어 갔다. 1471년 토지 5결을 1정으로 간주하는 보법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취소되었다. 이로써 토지와 인구의 구조적 결합으로서 정호를 기초로 했던 고려왕조의 백성 지배체제가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 조선왕조는 개별 호에 대해 호가 보유한 토지와 무관하게 호의 인정 수를 기준으로 군인을 선발하는 순수 인신지배체제로 전환하였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356


 토지와 인구에 대한 역 부과가 아닌 인구에 대한 역 부과가 극심한 신분의 양극화를 가져온 이유는 무엇일까. 토지를 고려하지 않은 역 부과는 대규모 토지, 농장을 소유한 계층에게 상대적으로 세부담을 경감시켜주었던 반면, 토지를 갖지 못한 이들에게는 과도한 부담을 안겨주게 된다. 특히, 역성(易姓)혁명과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과 같은 정치사건은 세조 이후 지방의 사림(士林)의 세력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양민들의 몰락이 가속화되었다. 


 중앙과 지방의 인적 교류는 왕조의 교체기를 맞아 더욱 활발해졌다. 역성혁명과 뒤이은 정치적 격변은 양반관료로서 실세한 많은 사람들을 농촌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처변 妻邊 등의 다양한 연고를 좇아 멀리 경상도와 전라도에까지 진출하였다. 그들은 그 지역의 강세한 지방세력을 피해 주로 속현이나 향/부곡에 정착하였다. 그렇게 그 모습을 드러낸 농촌사회의 새로운 지배세력을 가리켜 보통 품관 品官이라 하였다... 세조 연간에 군대 편성에서 진관체제 鎭管體制가 성립함에 따라 중앙군의 위상이 격하되었다. 한성은 더 이상 고려의 개경과 같은 지배세력의 공동체가 아니었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367

 

  저자는 이러한 논의를 조선시대 초기로부터 한국사 전반으로 확장시켜 일본 강점 시대 이전 사회를 전근대적 노예사회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나라 뉴라이트 사관의 주요 내용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다른 실증적 자료에 의한 반론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에 대한 반론은 <한국경제사 1>내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 이전 '정호제도'를 토지와 인신에 대한 역부과임을 저자가 밝히고, 이것이 조선시대와 앞선 시대의 다른 점이라고 언급했음에도 한국사회에서 토지지배로 가지 않았다는 설명은 무엇인가. 만약 이것이 온전한 토지에 대한 과세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오늘날에도 토지와 건물에 과세되는 재산세와 인구에 대해 과세되는 주민세가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선뜻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이렇게 토지지배와 무관한 인신지배는 이전의 왕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요컨대 한국사에서 지배계급의 생산자 대중에 대한 지배체제가 인신지배에서 토지지배로 이행한 적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생산자 대중이 노예에서 농노로 진화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역사의 진행은 14세기 이후 17세기까지 인격적 예속이 강화되는 역의 추세였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26


 다른 한편으로 저자는 조선시대를 노예제 사회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논지를 함께 제기한다. 납공노비를 노예로 볼 수 있는가하는 문제와 노예제 생산양식이 과연 지배적 생산양식인가 하는 물음을 통해 저자는 노예제로 단정할 수만은 없다는 점도 함께 제기한다.


 조선시대가 되어 전체 사회구성에 있어서 노예제 범주가 대폭 확장했음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의 노비 가운데는 주인가와 떨어져 자신의 가족과 토지를 보유한 납공노비의 범주가 있었다. 납공노비의 토지는 법적으로 그들의 소유였다. 납공노비는 그들의 토지에 부과된 조세와 공물을 조선왕조에 납부하였다. 그에 관한 한 납공노비는 일반 양인농민과 마찬가지로 공민이었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388


 15~17세기 조선시대 노예제 생산양식인 가작 家作농업이 동시대의 지배적 생산양식이었을까. 이 같은 가설을 논박하기는 어렵지 않다. 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생산양식은 조선왕조와 전부 佃夫와의 관계였다. 국가가 전국의 토지를 국전 國田으로 지배하고 일반 백성이 그 토지를 차경하면서 조세와 공물을 납부하는 관계야말로 동시대의 가장 규정적인 생산관계를 이루었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389


 <한국경제사 1>에서는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 후기>에서 제기된 여러 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보다 넓고 깊게 이루어진다. 좌파인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역사철학의 틀을 통해 극우 역사사상인 뉴라이트 역사관이 나오는 상황이 다소 역설적으로 보여지기도 하지만, 역사사료에 충실하고자 한 실증분석은 책이 갖는 장점이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제한적인 데이터에 대한 좁고 한정적인 해석은 경계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예를 들어, 세조 시대 이후 향촌에 정착한 양반들의 움직임을 단순하게 반(反)도시화, 근대화에 역행되는 움직임으로만 볼 수 있을까. 조카를 죽이고 숙부가 왕이 된 사건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들 사건은 지방 귀족에 의한 주민 착취의 의미를 결코 넘지 못할 것이다. 그런 부분에 대한 한계는 다른 자료를 통해 보완해 나가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16세기 후반이면 농촌사회에서 이른바 사족 士族으로 불리는 양반신분의 범주가 뚜력하게 대두하였다. 그렇게 양인의 범주로부터 양반신분이 분리되면서 양역을 부담하는 일반 양인을 상민 常民으로 천시하는 신분감각이 발달하였다. 요컨대 조선왕조의 신분제는 초기의 양천제에서 점차 양반-상민의 반상제 班常制로 바뀌어 갔다 - P359

조선왕조는 소규모 가족경영을 지배체제의 기초로 삼은 농노제 내지 공납제 국가였다. 조선왕조의 지배세력으로서 양반관료는 대규모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였다. 조선왕조는 양반관료와 대립하면서 결탁하였다. 그 같은 지배연합은 토지에 대해서는 소유자가 누구인지 묻지 않은 몰인격적 지배체제를, 인구에 대해서는 공적 예속의 양인과 사적 예속의 노비를 구분하는 지배체제를 창출하였다. - P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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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연 인천의료원 원장은 ‘재난 자본주의‘라는 표현을 썼다. "코로나19 환자를 보는 동안에는 손실보상금이 나와서 그때는 지방의료원의 재정도 안정적이었다. 시민들 사이에서 존재감도 커졌으니 오랫동안 외면당했던 한국의 공공의료가 성장하겠구나, 기대감을 품었다.
천문학적으로 풀린 정부 예산 대부분이 민간병원으로 가서 우리 의사와 간호사들을 빼가는 데 쓰일 줄은 몰랐다."  - P13

역설적 상황이다. 공공병원에 요구되는 시대적 과제는 점점 무거워지는 데 반해 지방의료원들은 경영난과 의료진 이탈 등 좀처럼 출구를 찾기 어려운 수렁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가뜩이나 취약했던 한국의 공공의료 기반도 나날이 침식되고 있다. - P15

한국 보건의료가 민간병원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는 것, 정말 맞는 얘기다. 농촌, 시골, 지방 소도시에도 다 민간병원이 들어가 있다. 공공병원인 지방의료원은 전국 통틀어 35개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지방 소멸이 심화되면서 지역에서 민간의료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게 돼버렸다. 심폐소생을 해서도 더이상 살아나기 힘든 지경이다.  - P18

우선은 현 정부의 국정 철학이 공공의료 확대와 배치되는 측면이 있다. 보건의료에 대해서는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되고, 기획재정부의 경제 논리에서도 어느 정도 보호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공공의료 강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과제이다. 구체적인 방안으로 ‘공공의료기금‘ 신설을 제안하고 싶다. - P19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는 백서에서, 이명박 정부 초기 블랙리스트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인물로 유인촌 문체부 장관 후보자를 지목한다. 총 10권(본책 4권, 부록 6권)에 유 후보자 이름만 총 104회 등장한다. 유후보자는 이명박 정부 초대 문체부 장관이었고, 최장수 장관 기록(3년)을 세우고퇴임했다가 윤석열 정부에서 다시 문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됐다. - P22

 김학의 사건 등 검찰의 권한남용에 대한 공수처의 역할을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이게 지금 사실관계가 다 맞다면, 또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았다면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똑같은 범죄를 저질렀는데 권력기관에 있는 사람은 처벌을 안 받는다, 그것은 법 앞의 평등원칙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다. 법의 지배 원리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헌법 질서 상 허용되지 않는다. 공수처의 의의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 P25

뉴스 유통 플랫폼인 포털사이트도 본격적으로 도마 위에 올라왔다. 5월12일국민의힘은 정부가 포털의 기사 배열 기준을 들여다보고 개입할 수 있는 법안을 발의했다. 방통위는 9월25일 네이버 사실 조사‘에 들어갔다. 지난 7월5일부터 실시해온 네이버 뉴스 서비스 실태점검 결과 언론사 제휴와 관련해 전기통신사업법 위반 사항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방송·신문·인터넷 뉴스 그리고 포털사이트까지, 임기 2년 차 윤석열 정부의 ‘언론 장악 의혹‘ 타임라인이 숨 가쁘게 전개되고 있다. - P31

부동산 PF는 한국경제의 핵심뇌관으로 지목받고 있다. 저금리 환경에서 시작된 부동산 PF가 고금리 환경에서 부실화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한국에서 PF를동원한 부동산 개발사업은 크게 3단계자금이 동원된다. 브리지론(1차 대출)을통해 토지를 구입하고, 인허가 후 본PF(2차 대출)로 대출을 갈아탄 뒤, 분양(판매)을 통해 공사비를 충당한다. 시행사가처음부터 자기자본을 대거 투자하는 방식이 아니다. - P40

서울시 역시 2004년 버스 준공영제도입 이후 2019년까지 총 4조320억원에달하는 운송 적자를 지원금 등으로 충당했다. 김형수 팀장은 민간사업자의 이윤보전을 위해 사용되는 비용을 대중교통의 공공성 확보 차원에서 지자체가 직접투자할 때라고 말한다. - P47

지금처럼 극소수 강경파가 판치는 상황을 끝내기 위해서는 우선 차기 의장과 공화당 주류 의원들이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강경파 의원들의요구로 지난 1월 개정된 하원 규칙, 즉 ‘단 한 명의 의원이라도 해임안을 제출하면 의장은 재신임 투표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부터 고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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