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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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무언가를 주었을 때 그것을 거절한 것은 제 생에서 그때 단 한 번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 불행은 거절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권하는데 거절하면 상대방 마음에도 제 마음에도 영원히 치유할 길 없는 생생한 금이 갈 것 같은 공포에 위협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p154)...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155/232


 거절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 다자이 오사무 (太宰治, 1909~1948)의 <인간실격 人間失格>에서 주인공 요조가 돌아본 자신의 인생이다. 그는 신에게 묻는다. 공포에 대한 무저항이 자신이 저지른 죄(罪)이며 불행의 근원인가를. 요조는 어떤 공포를 느꼈던가. 다른 이들과 자신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근원적인 불안과 공포. 이를 피하기 위해 요조는 '내가 원하는 나'가 아닌 '주변에서 원하는 나'가 되고, 그는 모든 이들에게 사람받는 듯 보이지만 정작 자신으로부터는 사랑받지 못한다.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저는 그 불안 때문에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p18)...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익살이라는 가는 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필사적인, 그야말로 천 번에 한 번밖에 안 되는 기회를 잡아야 하는 위기일발의 진땀 나는 서비스였습니다.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20/232


 겉으로는 웃음과 미소짓고 있지만, 가면 속 자신의 모습은 이와는 달랐다. 겉과 다른 자신 안의 괴물을 발견했기에, 그는 그는 괴물을 닮은 자화상을 보며 진(眞)정한 아름다움(美)을 발견한 것은 아닐까. 다른 이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추(醜)의 미학을.


 인간을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무시무시한 요괴를 자기 눈으로 확실히 보기를 바라는 심리. 신경이 날카롭고 쉽게 겁먹는 사람일수록 폭풍우가 몰아치기를 바라는 심리. 아아, 이 일군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도깨비에게 상처 입고 위협받다 끝내는 환영을 믿게 되었고 대낮의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요괴를 본 것입니다.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46/232


 세상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지 못한 요조는 결국 죽음을 선택했지만, 그는 죽지 않는다. 그는 대신 죽음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 세상이란 결국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아닐까 하는. 요조는 사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고, 사회는 신뢰할만한 곳이라고 회심(metanoia)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새롭게 태어나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에게 관심을 갖는다. 요조의 사회는 아버지와 같은 무서운 곳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사회로, 다시 사회 계약론의 사회로 옮겨간다. 이처럼 요조의 사회는 죽음을 통해 달라졌다.


 여자도 누웠고, 새벽녘에 여자 입에서 '죽음'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왔습니다. 여자도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해 나가는 데 완전히 지쳐버린 것 같았습니다. 또 저도 세상에 대한 공포, 번거로움, 돈, 예의 운동, 여자, 학업 등을 생각하면 도저히 더 이상 견뎌내며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 그 사람의 제안에 쉽게 동의했습니다.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78/232


 세상, 저도 그럭저럭 그것을 희미하게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노예조차도 노예다운 비굴한 보복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의 한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럴싸한 대의명분 비슷한 것을 늘어놓지만,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개인. 개인을 넘어 또다시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大洋)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115/232


  요조의 변화는 호리키와의 대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죄(罪)의 반의어를 죄를 짓지 않게 하는 법(法)과 선(善)에서 찾는 호리키와 그렇지 않은 요조. 호리키에게 법과 도덕은 다르지만, 요조는 그렇지 않다. 그에게 법과 선악(善惡)은 분리된 개념과 현실의 세계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그의 인식은 곧 깨지고 만다. 


 "죄, 죄의 반의어는 뭘까. 이건 어렵다."

 "법이지." 죄의 반의어가 법이라니!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 정도로 안이하게 생각하며 시치미를 떼고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 뭔데? 신이야?"

 "설마....... 죄의 반의어는 선이지. 선량한 시민. 즉 나 같은 것이지."

 "농담은 그만두자고. 그러나 선은 악의 반의어지 죄의 반의어는 아니야."

 "악과 죄는 다른가?"

 "다르다고 생각해. 선악의 개념은 인간이 만든 것에 지나지 않아. 인간이 멋대로 만들어낸 도덕이라는 것을 말로 표현한 거지."

"말이 많군. 그렇다면 역시 신이겠지. 신, 신. 뭐든지 신으로 해두면 틀림없어."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132/232


 엄청난 불행이 닥쳤을 때, 그는 사회에 대한 신뢰가 처절하게 깨져 나가면서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리바이어던이 다시 뛰쳐나왔음을 실감한다. 사회에 대한 신뢰가 깨졌을 때 그는 신에게 묻는다. 신뢰는 죄인가? 선량한 상대에 대한 믿음의 대가가 과연 공포로 귀결되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그때 저를 엄습한 감정은 노여움도 아니고 혐오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엄청난 공포였습니다. 그것은 묘지의 유령 따위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신사(神社)의 삼나무에서 흰 옷을 입은 신령과 부딪쳤을 때 느낄지도 모를, 아무 소리도 안 나오게 만드는 고대의 거칠고 난폭한 공포였습니다. 저의 새치는 그날 밤부터 나기 시작하였으며 점점 더 모든 일에 자신감을 잃게 되었고, 점점 더 인간을 한없이 의심하게 되었고, 이 세상에서 삶에 대한 일체의 기대, 기쁨, 공명 등에서 영원히 멀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137/232


 그렇지만, 신은 대답하지 않는다. 요조는 선과 악, 죄에 대한 신의 대답을 기다린다.  자신의 불행이 죄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면 그에 대한 신의 해명을 요조는 기다리지만, 신의 심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연기되는 심판 속에서 그는 불안감을 느끼고, 이제 그는 '익살'이라는 끈으로 사회에 맞춰 사람 사이에(人間)사는 대신 비합법의 영역에서 사람(人)으로 머문다. 이제 그가 생각하기에 감당할 수 없이 커져버린 죄로 인해 그는 사회에서 원하는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요조는 결국 어렸을 때부터 그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공포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사회에 대한 신뢰가 잘못된 것이었을까, 아니면 거절하지 못하는 무저항이 문제였을까.


 비합법. 저는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즐겼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고 그 구조가 불가해해서, 도저히 창문도 없고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그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깥이 비합법의 바다라 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헤엄치다 죽음에 이르는 편이 저한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59/232


 요조는 죽음으로부터의 귀환에서 선악이라는 도덕적 관념과 죄악은 구분되는 것임을 깨닫는다. 죄에 대한 요조의 질문과 신의 침묵, 그 사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요조는 죄인이자 악한이 되버리고 말았으며, 결국 자신 스스로 선악이라는 도덕과 죄악이 분리될 수 없음을 입증하고 말았다. 


 신에게 묻겠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p138)... 과연 무구한 신뢰심은 죄의 원천인가요?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139/232


 <인간실격>에서 요조는 신에게 신뢰심과 무저항에 대해 묻는다. 그렇지만, 먼저 요조는 자신의 불행이 죄의 결과인지에 대해 먼저 물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에 앞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에 대한 직시(直視)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지 않았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인간실격>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에 맞춰 변화되는 불안정 속에서 근원적인 실체에 대한 추구 -  인간이란 무엇인가 - 란 덧없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피의 무게랄까 생명의 깊은 맛이랄까, 그런 충실감이 전혀 없는, 새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깃털처럼 가벼운, 그냥 하얀 종이 한 장처럼 그렇게 웃고 있다. 즉 하나부터 열까지 꾸민 느낌이 드는 것이다.

불행. 이 세상에는 갖가지 불행한 사람이, 아니 불행한 사람만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그러나 그 사람들의 불행은 소위 세상이라는 것에 당당하게 항의할 수 있는 것이고, 또 ‘세상‘도 그 사람들의 항의를 쉽게 이해하고 동정해 줍니다. 그러나 제 불행은 모두 제 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항의할 수 없었고, 또 우물쭈물 한마디라도 항의 비슷한 얘기를 하려 하면 넙치가 아니더라도 세상 사람들 전부가, 잘도 뻔뻔스럽게 그런 말을 하는군 하고 어이없어할 것이 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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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0-23 0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읽었던 <인간실격>을 호랑이 님의 리뷰로 다시 보니 생각이 새록새록 납니다. 저하고 다른 포인트를 잡으셨네요~ 신선한 리뷰 잘 봤습니다!^^

겨울호랑이 2023-10-23 10:3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인간실격>은 뒤늦게 읽은 만큼 더 강렬하게 다가오네요. yamoo님 활기찬 한 주 여시기 바랍니다! ^^:)
 

"대통령과 핫라인이 있다"라고 여러 차례강조했다. 그 결과 "기초 지자체 226개 중한 곳"이라던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는 전국구급 선거가 되었다. 대통령과의 ‘핫라인‘을 부각시키는 게 영리한 선택이었을까. 그렇게 보기 힘들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높지 않아서다. 부정 평가의 주요 이유로 경제 상황, 이념 전쟁, 일방적 국정 운영 등이 꼽힌다.경기·인천에 비해 서울 지지율이 나은 편이라고 해도, 평균을 맴돌고 있다. - P13

민주당 친이재명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여당이 정권심판론을 자초한 이유를모르겠다고 말했다. "정권심판론은 야당으로서는 너무 좋은 구도다. 일개 구청장선거로 끝날 수도 있는 선거판을 정부·여당이 키웠다. 이번 선거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게 도움이 된다고 본 건가? 판돈도 세게 걸었다. 합리적인 사고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다." - P13

그는 "권리 행사를 위해 투표하긴 했지만 절망스러운 마음이다. (진교훈과 김태우) 두 후보 중누가 구청장이 되건 구민의 삶은 크게 변하지 않을 거다. 특히 두 후보의 연설을기사로 보다 보면, 강서구청장이 되기 위해 선거를 치르는지 아니면 상대 정당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선거를 치르는지 헷갈렸다"라고 말했다. 구청장은 구민 삶의 현장과 민원에 밀착해야 할 ‘생활 정치인‘이라는 지적이다. - P15

온라인 투표 방식의 허점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실은 계속 온라인 투표로 국민여론을 수렴했다. 올해 1월부터는 도서정가제적용 예외 허용, 3월부터는 KBS 수신료 분리 징수, 6월부터는 집회·시위 제재 강화 등 논쟁적이고 이해관계가 첨예한 주제를 온라인 국민투표에 부쳤다. 투표 시스템상 동일인이 아이디를 여러 개 만들어 중복 투표할 수 있고, 유튜브나SNS에서 조직적 투표 독려가 발생한 사례 등이 지적되면서 여론조작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대통령실은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세 주제 모두 ‘추천‘에 압도적으로 많은 표가 몰렸고 정부는 이 결과를 실제 국정 운영에 반영했다.  - P21

중대재해처벌법은 기업의 경영책임자 등이 안전조치를 안 해 사람이 죽으면1년 이상 징역에 처하게 한 법이다. 고용노동부 산업안전감독관들이 검찰의 수사지휘를 받아 수사한다(과실치사 혐의가인정되면 해당 부분은 같은 검사의 수사지휘를 받아 경찰이 수사한다). 수사 개시와 종결, 기소여부 판단은 검찰이 한다.  - P23

문제는 응급의료체계의 꼭짓점인 권역응급의료센터에서도 상당수가 증상에 따라 소아 응급진료가 불가하다고 답했다는 점이다. 권역응급의료센터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해당 ‘권역‘에서 응급환자에 대한 최종 진료가 가능하도록전국에 40곳이 지정돼 있다. 최소 300병상에서 최대 1700병상까지 갖춘 규모 있는 종합병원 혹은 상급종합병원들이다. 그런데 권역응급의료센터 40개 가운데19개 병원이 소아 응급진료에서 치료가불가능한 증상이 있다고 답했다. - P27

 투자자들(시장)은 물가 인상이 어느 정도 진정되면서 올해 하반기에 기준금리의 동결, 심지어 인하까지 기대했다. 그러나 연준은 안심할 수 없었다. 역설적이지만 지난해부터 미국의 경기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고용 실적이 사상 최대의증가율을 시현하고 임금도 따라 오른다. 경제성장률도 높아졌다. 이런 호황이라면, 기준금리 인상을 중단하겠다는 신호만으로 물가 급등이 재개될 수 있다. 그렇다고 인상을 밀어붙이려니 경기침체가 두렵다. - P37

 케빈 워시 전 연준 이사는<월스트리트저널>(10월4일) 칼럼에서기준금리 관련 논란에 매우 냉소적인 의견을 개진했다. 미국 정부와 월스트리트는 연준이 하반기에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더 올리느냐 마느냐를 두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지만, 이는 "미국 국채수익률의 변동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라는 것이다. "연준은 지난 5월 이후 ‘단기 정책금리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올렸지만 10년물 국채수익률은 봄 이후 1.5%포인트나 상승했다." - P37

미국채 수익률 상승이 ‘뉴노멀‘이라면, 그동안의 ‘싼 돈‘에 익숙해져 있는 글로벌 경제엔 격변이 불가피하다. 우선 자동차나 주택 관련 대출에서 설비투자에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차입비용이 크게오르며 가계와 기업의 지출을 제약할 것이다. 각국 정부들의 경우, 이자 부담이급증해 재정건전성이 악화된다. 이렇게 되면 국채를 발행할 때마다 점점 더 높은금리를 약속해야 한다. - P39

EU 규정을 보면,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나뉜다. 구체적인 거래 공정화 방안을 마련했다. 판매업체의 상품 공급을 제한·유보·중단할 때 사전에 고지하도록 했다. 투명성 강화 방안도 두었다. 검색 결과로노출되는 순위를 결정하는 알고리즘의 핵심 매개변수를 공개하도록 하는 조항이 눈에 띈다. 아울러 피해구제 방안으로조정절차의 지원과 단체소송 제도를 도입했다.  - P43

독일 언론은 이번 선거를 통해 유권자들이 연방정부 내 연정 파트너 사이의불협화음과 물가상승, 에너지 가격 상승, 주거 문제 등 대응 실패를 심판했다고 평가했다. 이에 따라 올라프 숄츠 총리의 연방정부는 향후 정책 추진에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 또한 AfD가 독일 정치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동안 각종 여론조사에서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 AfD가 옛 동독 지역을 넘어 옛 서독 지역의 주요 선거에서 실제로 2위를 거둔 것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P49

배출원이 다양하고 피해도 광범위한 생태계 오염 통제에 비하면, 작업 현장에서 수은을 관리하는 것은 훨씬 쉽다. 수은증기를 흡입하거나 수은 액체가 피부에닿지 않도록, 용기와 공정을 밀폐하고 배기장치와 호흡보호구를 활용하면 된다. 주기적으로 실내 대기와 노동자 소변의수은 농도를 모니터하는 것도 혹시 모를노출을 감시하는 수단이다. 하지만 쉬운 일보다 더 쉬운 것은, 아예 그 일을 하지않는 것이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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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군주와 소원한 자가 신임과 사랑을 받는 신하와 겨루면 이길 승산이 없고, 떠돌이 유세객이 군주와 오랜 친분을 쌓아온 신하와 다투면 이길 승산이 없다. 또 군주의 뜻을 거스르는 자가 군주의 좋고 싫음을 잘 맞추는 신하와 겨루면 이길 승산이 없다. 무시당하고 비천한 자가 존귀하고 권세 있는 신하와 다투면 이길 승산이 없으며, 혼자만의 입을 가지고 온 나라가 칭송하는 자와 싸우면 이길 승산이 없다.

술術을 아는 인사는 반드시 멀리 내다보고 명확하게 꿰뚫는다. 명확하게 꿰뚫지 않으면 사적인 음모를 밝혀낼 수 없다. 법法에 능한 인사는 반드시 굳세며 강직하다. 굳세고 강직하지 않으면 간사한 자들을 바로잡을 수 없다.

지혜로운 사람의 의견이 어리석은 자들에 의해 결정되고, 현명한 자의 품행이 현명하지 못한 자들에 의해 평가받게 되면 현명하고 지혜로운 자들이 치욕을 당할 것이고, 군주의 판단도 어긋나게 될 것이다.

무릇 설득의 어려움이란 내가 알고 있는 바를 가지고 남을 설득시키기가 어렵다는 것이 아니다. 또 내 말주변이 나의 뜻을 분명하게 전할 수 있느냐의 어려움도 아니며, 또 내가 과감하고 거리낌 없이 나의 능력을 모두 다 펼쳐 보일 수 있느냐의 어려움도 아니다. 무릇 설득의 어려움이란 설득하려는 상대방의 마음을 잘 헤아려 내가 설득하려는 것을 그에게 맞출 수 있느냐 하는 점에 있다.

따라서 간언을 하거나 논의를 하고자 하는 신하는 군주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미리 살핀 뒤에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용이라는 동물은 유순해 길들이면 탈 수 있다. 그러나 턱밑에 직경 한 자쯤 되는 역린(逆鱗, 거꾸로 난 비늘)이 있는데, 만약 사람이 그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그 사람을 죽인다. 군주에게도 역린이 있어, 설득하려는 자는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을 수 있어야만 성공을 기대할 수 있다.

대체로 주옥珠玉은 제왕들이 조바심내는 것이다. 비록 화씨가 바친 옥덩어리가 아름답지 못할지라도 왕에게 해로움이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오히려 두 발을 잘리고 나서야 보배로 인정을 받았으니, 보물로 인정받기란 이처럼 어려운 것이다. 지금의 군주들에게 법과 술은 결코 화씨의 옥을 얻는 것만큼 조바심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 법술이 있어야 여러 신하와 사민들이 사사로움과 간사한 행동을 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법과 술의 이치에 밝은 자가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 것은 단지 제왕의 보옥이라고 할 법술이 아직 바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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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10-22 1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설득의 성공 비결은 상대의 마음을 잘 헤아리기, 인 거군요. 결국 인간에 대해 잘 알기, 가 되겠습니다.

겨울호랑이 2023-10-22 17:45   좋아요 0 | URL
페크님이 정리하신 내용에 공감합니다. 상대와 같은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관계는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존 H. 엘리엇 지음, 김원중 옮김 / 까치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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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6세기 스페인의 성취는 본질적으로 카스티야의 성취였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17세기 스페인의 재난 역시 카스티야의 재난이었다. 오르테카 이 가세트는 합스부르크가 스페인에 대한 비명(碑銘)으로 사용할 수 있을 다음과 같은 글을 씀으로써 이 역설을 가장 명백하게 표현했다. "카스티야가 스페인을 만들었고, 카스티야가 스페인을 파괴했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438


 존 H. 엘리엇(John Huxtable Elliott, 1930 ~ 2022)의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Imperial Spain>는 15세기 중반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졌던 세 왕국 - 카스티야, 아라곤, 포르투갈 - 의 전성기를 배경으로 한다. 포르투갈은 16세기에 일시적으로 스페인(에스파냐)에 병합되고 다시 분리되지만. 위에서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e Ortega y Gasset, 1883~1955)가 언급했듯 스페인 제국 역사의 중심은 카스티야였으며, 시작 또한 여왕 이사벨 1세(Isabel I de Castilla y Aragon, 1451~1504)였다. 제국 스페인의 역사는 이사벨의 선택의 결과였다.


 이사벨이 왕위계승자로서 인정을 받자 그녀의 혼인은 국제적 관심사가 되었다. 그녀의 배우자감으로 세 명의 유력 후보자가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샤를 7세의 아들 발루아의 샤를과 결혼하여 전통적인 프랑스-카스티야 동맹을 강화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그의 오빠가 원했던 것처럼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와 결혼하여 카스티야의 미래를 서쪽 이웃과 연결시킬 수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그녀는 아라곤의 후안 2세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페르난도와 결혼함으로써 후안 2세가 강력하게 책동했던 카스티야-아라곤 간의 통합을 성사시킬 수도 있었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19


  상업 중심, 지중해 연안의 아라곤과 목축 중심, 대서양 연안의 카스티야는 분명 상이한 조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척박한 토양의 카스티야의 전사들을 뒷받침하는 아라곤의 관료제가 없었다면 제국은 유지될 수 없을 터였고 그런 면에서 이들은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 


 제국을 창조한 역동성은 거의 전적으로 카스티야에 의해서 제공되었다. 카스티야의 활력과 자신감은 카스티야인들에게 새로운 스페인 제국에서 자연스럽게 지배권을 쥐게 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뒤에는 행정 경험이 풍부하고 외교술과 통치술이 숙달되었던 아라곤 연합왕국이 있었다. 이 점에서 두 연합왕국간의 통합은 상호 보완적인 파트너간의 통합이었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43


 그렇지만, 오늘날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CF 간의 유명한 엘 클라시코(El Clasico)에서 보듯  과거로부터 치열한 라이벌이었던 두 지역을 하나로 묶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가능했지만, 문화적, 경제적으로는 매우 힘든 일이었고 그 결과 제국은 초기부터 매우 연약한 구조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제국의 구조를 유지시키기 위해 그들은 결국 철저한 신앙의 힘에 의존하게 되고 그 결과 순수 가톨릭 중심주의는 이전까지 이베리아 반도에서 활력을 주던 무슬림과 유대인을 축출하는 정책으로 이어지면서 폐쇄적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종교재판소의 설치가 무엇보다도 스페인 왕들의 지배영역에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고안된 종교적 조치이기는 했지만 그것의 중요성이 결코 종교적 영역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신생 스페인의 경우처럼 정치적 통일이 절대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나라에서 신앙의 통일은 카스티야인, 아라곤인, 카탈루냐인을 성(聖) 교회의 궁극적 승리를 보장하는 단일한 목적 속에 하나로 결속하게 하는 대체물로서 작용했다.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117 


 여기에 더해 결혼을 통해 제국을 정치적으로 유지시키려는 노력은 페르난드의 지나친 반(反)프랑스 움직임과 만나 스페인을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원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카스티야와 신대륙은 신성로마제국의 보급창고로 전락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만들었으나, 스페인은 카를 5세의 정복전쟁을 위해 다른 의미에서 식민지가 된 것이었다.


 카를 5세가 엄청난 돈이 드는 외교정책을 추진하고 그 비용을 대기 위해서 부채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인 것은 카스티야에 비참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국가의 수입원들은 황제의 비용을 대기 위해서 수년 후의 것까지 저당잡혔고, 그중 많은 부분은 국외에서 이루어졌다. 부채에의 의존은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는 데에 한 몫을 했다. 무엇보다도 국왕의 재정정책에서 장기적 전망의 부재는 재원의 헛된 낭비를 의미했고, 그 재원을 끌어내기 위해서 사용된 방법들이 카스티야의 경제 성장을 방해하려고 일부러 고안한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228


 카를 5세( Karl V, 1500~1558)의 뒤를 이은 펠리페 2세(Felipe II de Habsburgo, 1527~1598) 시기 스페인은 오스트리아와 분리된 별도의 제국이 되어 포르투갈을 병합하는 등 전성기를 맞지만, 여전히 독립을 둘러싼 네덜란드와의 전쟁, 대서양에서의 사략(私掠)행위를 둘러싼 잉글랜드와의 대립은 결국 스페인을 외부에서 무너뜨렸고, 스페인 제국 내에서 식민지 경제가 독자적으로 운용되면서 일어나는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결국 제국은 몰락하고 말았다.


  아메리카가 새로운 제국정책을 뒷받침하는 재원을 제공하는 동안 그 제국 정책은 11580년 포르투갈의 합병이라고 하는 펠리페의 대성공으로부터 지리적 방향성을 획득했다. 포르투갈의 스페인 제국에의 통합은 펠리페에게 새로운 대서양 해안과 그것을 보호하는 데에 도움을 줄 함대를 제공했고, 아프리카로부터 브리질 그리고 캘리컷으로부터 몰루카 제도에 이르는 제2의 제국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치세 후반기의 제국주의를 가능케 한 것은 새로운 귀금속 유입과 함께 이 포르투갈 영토의 합병이었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303


  이처럼 <스페인 제국사 1469-1716>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정치적 결합으로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척박한 토양과 상대적으로 열등한 산업, 통합되지 않은 지역간의 갈등 등 여러 문제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기 위한 정치적 선택으로 태어난 국가가 대항해시대라는 시대의 흐름을 타고 극적으로 일어났으나, 결국 태생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스페인 역사 형성에서 중요한 이 시기 역사는 오늘날의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 이해의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일독(一讀)을 권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1576-79년 동안 아메리카가 유럽에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들었다. 광산 채굴에 소요되는 비용이 높아졌기 때문에 은이 줄어들었고 이민자들을 위한 기회도 줄어들었다. 동시에 유럽으로부터 아메리카로 들어오는 물건도 점점 적어졌다. 그러나 스페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보다 훨씬 심각했던 것은 아메리카 식민지에 스페인 경제와 유사한 형태의 경제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스페인이 아메리카에 수출해온 주요 품목들이 아메리카 정주자들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었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332

안달루시아는 귀족이 지배하는 대규모 라티푼디움(Latifundium)이 되어갔고, 이 거대한 새로운 부에 의해서 부유해진 카스티야의 귀족들은 아직 부르주아지가 취약하고 그것도 북쪽 몇몇 도시들에 산재해 있었던 상황에서 거의 무제한의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강력한 존재가 되었다. 반면에 발렌시아에서는 국왕이 식민화와 재정주 과정을 보다 면밀하게 감독할 수 있었다. - P25

중세 아라곤 연합왕국에는 부유하고 역동적인 도시 과두귀족들이 있었고, 때문에 해외의 상어적 이해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곳에는 또한 왕과 신민 간의 관계에서 계약적 개념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었고, 그것은 여러 제도들 속에 효과적으로 실현되고 있었으며 제국을 운영하는 데에 좋은 경험이 되었다. - P30

동시대의 카스티야는 외부적이기보다는 내부적 지향성을 띠고 있었고 교역보다는 전쟁에 경도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카스티야는 목축적이고 유목적인 사회였고, 그런 습관과 태도는 끊임없는 전쟁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레콩키스타는 여러 가지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이교도에 대한 십자군 원정이기도 했지만 약탈을 위한 군사 원정이기도 했고, 또한 사람들의 이주이기도 했다. 레콩키스타의 이 세 가지 측면 모두가 카스티야인들의 생활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 P30

전통적으로 카스티야의 메세타(meseta)는 풍년이 들면 곡물을 수출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량을 생산했다. 그러나 갈리시아, 아스투리아스, 비스카야 등 일부 지역은 식량을 자급하지 못하고 대개 카스티야로부터 배편으로 식량을 공급받아야 했으며, 아라곤 연합왕국도 안달루시아나 시칠리아로부터 곡물을 수입했다. 그러나 흉년이 들면 카스티야 역시 외국 곡물의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 P128

카를 5세의 유럽 영토들 가운데 치세 초반에 제국을 운영하는 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한 곳은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였다. 그러나 이들 두 영토의 재원이 차례로 고갈되자 카를은 새로운 수입원을 찾아 다른 영토로 눈을 돌리지 않았을 수 없었다. 1540년에 그는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이제 나의 스페인 왕국들에 의하지 않고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다." - P221

카탈루냐의 점진적 회복은 프랑스와의 끊임없는 전쟁에도 불구하고 근대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경제 변화의 전조였다. 이제 반도에서의 경제적 무게 중심이 중심부로부터 주변부로 이동해가고 있었다. 주변부는 과세부담이 중심부보다 덜했고, 경제적 피로도 덜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에는 카스티야가 스페인을 만들었다. 이제 17세기에 와서 처음으로 스페인이 카스티야를 개조시킬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 P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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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자립적 근대화를 일본은 부정했다. 그로부터 1세기 이상 지난 지금도 남북한과 일본 사이에 가로 놓인 역사 문제로서 이러한 경험은 여전히 살아있다.

도쿠가와 막번 체제는 그 후의 메이지明治 일본과 비교해도, 또한 동시대의 조선과 비교해도 현저하게 지방분권적인 체제였다. 사람들에게 ‘나라’란 ‘번’을 의미하는 것으로 에도江戶 말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은 희박했다. 여러 다이묘大名를 통제하는 막부의 권력은 강대했지만, 각 번의 독립성이 높았다. 그에 비해, 조선은 훨씬 중앙집권적이었다.

역사적으로 중화 질서에 근거한 조공 시스템에 편입되어있었던 조선에 비해, 일본은 중국과는 거리를 두고 중화 질서 밖에 존재하고 있었다.

‘조선의 근대화는 아무래도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 이대로 놔두게 되면 조선은 청나라?러시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일본의 안전보장에 중대한 위기가 된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 대한 배타적 영향력 확보를 목표로 삼게 되었다.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은 일본의 안전보장 정책으로 귀결하였다.

한반도 상황에서 보면 다른 얘기가 된다. 조선의 근대화를 통한 자립의 가능성을 망쳐버린 장본인이 다름 아닌 일본이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마치 일본이 없으면 조선이 청나라나 러시아에 지배당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것은 스스로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자국의 안전보장을 목적으로 했다는 것은 구실이 될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은 조선의 자립, 근대화의 기회를 박탈했으며 그 자체만으로도 도의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침략행위이다. 게다가 애초에는 구미 열강에 대항하기 위해 협력하자는 자세를 취해 놓고, 차츰 그 협력을 포기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침략이라는 ‘배신’ 행위를 했다.

통계에 따르면 식민지지배기(1912~1939년)의 국내총생산GDP 연평균 증가율은 광공업, 전기 가스 및 건설업에서 각각 9.4퍼센트, 9.2퍼센트였다. 특히, 1930년대에 들어서 증가율이 더 커지고 1939년에는 각각 13.5퍼센트, 14.5퍼센트를 기록했다. 이것은 1960년대의 성장률과 거의 필적할 만한 수치였다. 다만, 이러한 경제 발전에 따라 식민지 조선 사람들의 생활 수준도 그에 비례하여 상승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중국 국내 거점을 전전하다가 최종적으로 충칭重慶을 거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존속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한국 현대사에서 적지 않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결과적으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의에 한국의 초대와 평화조약에 서명국으로서의 가능성이 한때나마 논의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존재하고 ‘대일선전’을 포고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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