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1 - 세계의 시간 -상
페르낭 브로델 지음, 주경철 옮김 / 까치 / 199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계경제(world economy)는 지구 전역에 걸쳐 있다. 시스몽디가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전지구적인 시장" 또는 "함께 교역을 하여 오늘날에는 일종의 단일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인류 전체, 또는 인류의 어느 부분 전체"를 가리킨다. 세계-경제(world-economy)는 우선 전지구의 일부분에만 관련된 말임을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은 경제적으로 독자적이며, 핵심적인 것들을 자급자족할 수 있고, 내부적인 연결과 교역이 유기적인 통일성을 이루는 단위를 말한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1>, p18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1902~1985)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1 Civilisation Materielle, Economie et Capitalisme 3-1>에서는 세계-경제 체제에서 헤게모니 hegemony)에 대해 다룬다.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 1930~2019)의 세계체제론(world-systems theory)에서 다루어진 중심부-주변부의 문제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권 : 세계의 시간> 에서 패권국의 흥망으로 그려진다.


 세계-경제에는 일정한 경계가 있는데,  그 경계선은 마치 해안선이 육지로부터 바다를 구획하듯이 그 세계-경제를 규정한다 ; 세계-경제는 하나의 중심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도시와 하나의 지배적인 자본주의가 맡고 있다. 여러 개의 중심들이 형성된다면 그것은 이 세계-경제가 아직 젊거나 아니면 반대로 퇴화해가거나 격변을 겪고 있다는 표시이다 ; 이 공간 내에서는 각각의 개별 경제들이 계서제를 이루고 있다. 그중 어떤 것들은 가난하고 어떤 것들은 소박한 수준을 면치 못하는 가운데 중심에 위치한 하나의 경제만이 상대적으로 부유하다. 이로부터 불평등, 전압차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이 전체를 작동시키는 힘이 된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1>, p24


 브로델의 3층 구조에서 아래 층위인 물질문명과 시장경제에서는 다양한 극점(極點)이 존재한다. 지배층의 사치품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활발한 교역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었지만, 자본주의 단계에서는 최상위 정점(頂點)만이 존재한다. 정점이 갖는 헤게모니는 역사를 통해 도시에서 점차 영토형 국가로 넘어가는 진행과정을 갖는다. 구체적으로 도시의 패권은 베네치아에서 시작되어 안트워프, 제노바, 암스테르담으로 넘어가며 마무리되고, 이후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한 네덜란드 패권이 영국(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으로 이전되며 영토형 국가의 승리로 완결되는 것을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무엇보다도 계서제를 내포하며, 그 계서제의 최상층을 차지한다. 자본주의가 이 계서제를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다. 자본주의가 제일 마지막에 개입하는 곳에서는 하나의 중개점만 있으면 충분하다. 이것은 이질적이면서도 적극 협조를 아끼지 않을 사회계서제로서 이것은 자본주의의 활동을 확장하고 활성화시키는 일을 한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1>, p82


 영토국가는 잘 성장하지 못했거나 적어도 빨리 성장하지 못했고, 여기에 더해서 14세기의 장기적인 경기후퇴가 악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여러 국가들이 곤경을 겪고 해체되었으며 그 결과 도시들이 다시금 활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그렇지만 도시와 국가는 여전히 잠재적인 적대관계를 유지했다. 도시가 국가를 지배할 것인가, 국가가 도시를 지배할 것인가? 이것이 유럽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1>, p120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이전 단계 패권국가의 요건이 다음 세대에서 계승되었다는 점이다. 베네치아 상회, 안트워프의 채무증서, 암스테르담(네덜란드)의 거대 보관 창고 등은 한 시대를 장식하고 소멸되는 요소가 아니었다. 세계-경제 체제에서 이들이 갖는 경쟁력은 분명했고, 이들의 장점을 갖는 자본(資本)은 도시와 국가의 흥망과는 무관하게 빠르게 자신에게 유리한 곳으로 흘러들어가서 경쟁력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오늘날 다국적기업에서 보이는 초국가적 월경(越境.)행태는 이처럼 오랜 역사를 갖는다. 


 전국시장(marche national ; national market)이라는 고전적인 개념만큼 자명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이 말은 주어진 한 정치적 공간 속에서 획득된 경제적 응집성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공간이란 어느 정도 넓은 범위, 무엇보다도 영토국가(Etat territorial) 또는 지난 날에 흔히 민족국가(Etat national)라고 불렀던 틀을 가리킨다. 이 틀 내에서 정치적인 성숙이 경제적인 성숙보다 앞서 있었으므로 우리가 알고 싶은 문제는 언제, 어떻게 그리고 어떤 이유로 해서 이 국가가 경제적으로 내적 응집성을 얻었으며, 또 나머지 세계에 대응하여 하나의 단일한 총체로서 행동하는 능력을 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도시가 주도권을 쥐고 있던 경제적인 총체들이 뒷전으로 밀려남으로써 유럽 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은 현상의 기원을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을 뜻한다... 전국시장의 등장은 당연히 유통의 가속화, 농업 및 비농업 생산의 증대 그리고 총수요의 확대에 조응하는 것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1>, p385


 브로델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1>에서 영토형 국가의 자본주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전국시장의 구축을 지적하고, 이러한 차이로부터 프랑스와 영국의 이후 명운이 갈라지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브로델은 백년전쟁(1337 ~ 1453)을 통해 프랑스 내 자국의 영토를 모두 잃고 섬나라로 전락한 영국은 이로부터 경제적 응집력을 가질 수 있었던 반면, 프랑스는 광대한 영토를 관리하기 위해 국가 역량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응집력을 발휘하는 것이 늦었기에 자본주의 단계에서 영국에 뒤처질 수 밖에 없었고, 산업화단계를 통해 그 차이는 넘어설 수 없었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이러한 브로델의 분석으로부터 자본주의가 갖는 근원적인 불평등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세계 체제 내에서 중심부, 중심부에서도 런던, 암스테르담과 같은 핵심 도시와 외부를 연결하는 무역로가 혈관(vein)과 같이 연결된 체계 - 동맥을 따라 금과 은의 화폐가 주변부로 흘러나가고, 정맥을 따라 각종 노동력과 상품이 흘러 들어오는 세계 체제 - 가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보다 높은 수준의 불평등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수력발전에서 높은 낙차가 더 많은 양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요건인 것처럼. 


  실제로 헤게모니 국가들은 구조적인 불평등을 해소하기보다 높은 수준의 불평등을 활용해 체제의 발전기를 가동시켜왔음을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1>에서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 이른 시기에 이미 결정된 영국의 패권. 이제 우리는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마지막을 남겨놓고 있다. 브로델은 마지막 권을 통해 물질문명, 시장경제, 자본주의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다음 권에서 확인해 보도록 하자...


 프랑스는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희생자, 즉 자신의 두께, 자신의 양, 자신의 거대성의 희생자인 것이다. 물론 크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이점을 가지고 있다 : 프랑스가 외침을 겪을 때마다 잘 견뎌낸 것은 우선 나라가 크기 때문이었다 ; 외적들이 이 나라를 관통해서 심장부를 공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위한 연결들, 정부의 명령전달, 내부의 운동과 맥동, 기술의 진보 역시 그 넓은 땅을 가로지르는 것이 힘들다는 똑같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전염성이 강한 혁명적 운동이었던 종교전쟁도 한번에 이 공간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1>, p451


 영국이 어떻게 응집성 있는 전국시장이 되었는가 하는 중요한 물음은 곧 다음의 물음으로 이어진다 : 유럽의 확대된 경제 속에서 어떻게 영국의 전국시장이 자가 자신의 무게와 주변 상황을 이용하여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는가? 서서히 형성된 이 우의는 위트레흐트 조약(1713)때부터 명백하게 천명되었다 ; 영국의 우위는 7년 전쟁이 끝나는 1763년에 분명해졌고, 베르사유 조약(1783) 직후에 더 이상 논의의 여지 없이 확고히 굳어졌다. 이 첫번째의 승리는 산업혁명이라는 다음번의 승리를 불러왔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1>, p490

베네치아에서 상업은 무엇보다도 레반트 무역을 의미했다. 이것은 분명히 막대한 자본을 요구하는 상업이므로 베네치아의 거대한 화폐자본이 여기에 투입되어서 시리아로 갤리 선단이 떠나고 나면 도시 내에 현찰이 문자 그대로 바닥나는 정도였다. 자본의 순환은 제법 빠른 편이어서 6개월 혹은 1년 정도면 회수되었다. 그래서 선박의 왕복이 이 도시의 모든 활동에 리듬을 부여했다. 그러므로 베네치아가 독특한 성격을 띠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레반트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든 것에 책임을 지고 있고 상인들의 행동 전체에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닐까? - P179

핵심적인 것은 안트워프에서 채무증서(cedule obligatoire), 어음 제도가 가진 극도의 편의성과 효율성이다. 편의성이라는 것은 환어음이 안트워프의 거래에 유입되었을 때 지참인 어음으로 변형되어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통용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효율성이라는 것은 제도화된 것은 아니지만 이 유통이 중대한 문제 - 동시에 교묘한 성격의 문제로서 교환의 출발에서부터 제기되는 문제 - 를 해결해준다는 점을 두고 한 말이다. 그것은 할인(escpmpte), 즉 시간의 차이에 따른 대가를 말한다... 이것은 기존의 환어음이나 은행의 전통적 체제 바깥에서 형성되어 크게 발달한 유연한 체제이다. - P196

유럽의 다른 지역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이 작은 네덜란드는 과도하게 도시화, 조직화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인구밀도가 "상대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높기" 때문이었다(p245)... 네덜란드 도시들은 함께 살기 위해서 공동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 도시들은 하나의 세력집단을 형성했고, 업무를 분담함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했고 연결망들을 구성했으며 피라미드 모양의 중첩된 여러 층 중에서 하나를 차지하는 식으로 계서제를 이루었다. 이 말은 이 도시들의 중심에, 또는 정상에 다른 도시들과 연결되어 있되 동시에 그 도시들보다 비중이 크고 구속력을 가지는 지배적인 도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덜란드 연방의 도시들에 대해서 암스테르담이 가지는 위치는 베네치아가 테라피르마의 도시들에 대해서 가지는 위치와 비슷하다. - P247

근대 초에 영국인들이 여하튼 자기 나라 안에 갇혀 있어야만 했던 것은 자신의 대지, 숲, 황무지, 늪지를 개간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때부터 영국은 스코틀랜드와의 위험한 변경, 지나치게 가까이 있어서 두려움을 주는 아일랜드, 15세기 초에 일시적으로 독립을 획득했고 그 봉기가 진압된 이후에도 "흡수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던 웨일스가 불러일으킨 걱정거리에 더 주의를 기울였다. 결국 영국은 자신의 소규모 영토 내에 머물러 있어야 했으므로 표면적으로는 패배를 겪었으나 이것은 다음 시기에 전국시장이 급속도로 형성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 P492

영국의 파운드 스털링화(pound sterling)는 다른 많은 명목화폐(monnaire de compte)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다른 다른 나라의 명목화폐들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국가에 의해서 증대되며 불리한 콩종크튀르에 의해서 큰 변화를 당하는 것과는 달리 이것은 1560-1561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서 가치가 안정된 이후 더 이상 변화하지 않았으며 1920년까지, 더 나아가서 1931년까지 내재적인 가치를 유지했다(p495)...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다 ; 파운드 화의 가치가 고정되어 있는 것은 영국의 위대함의 핵심요소였다. - P496

영국은 계속해서 은을 수출하고 금이 유입되는 곳이었다. 이 체제는 18세기 내내 지속되어서 사실상 금본위제로 연결되었다. 금본위제가 명백하게 천명되는 것은 1816년의 공신적인 선포 이후의 일이다. 이제 파운드 스털링 화는 소브린 금화(gold sovereign)가 되었다. 그러나 1774년부터 이미 금은 은에 뒤이어 확실한 화폐 조정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오래 사용된 금화는 회수해서 정확한 무게대로 재주조했지만 은화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비싼 처리과정을 적용하지 않았으며 25파운드 이상의 금액에 대한 채무변제(discharge payment)로는 은화를 받지 않았다. 파운드 스털링 화는 법률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금에 연계되었고 그리하여 갑자기 새로운 안정화 기능을 담당했다 - P503

공채는 영국이 승리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것은 영국에게 가장 필요한 순간에 거액의 자금을 확보해주었다. 이것은 영국에게 가장 필요한 순간에 거액의 자금을 확보해 주었다. 이사크 데 핀토는 이점을 명백하게 이야기했다(1771) : "[국채]이자를 꼼꼼히 그리고 거르지 않고 정확히 지불한다는 것, 또 의회가 보증을 선다는 것이 영국의 크레딧을 만들었고 결국은 유럽을 경악시킨 국채발행 정책을 수행하도록 했다." - P52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붉은돼지 2022-06-14 12: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이제 거의 다 읽으셨네요. 대단하세요...유럽사에 관심이 있다면 브로델을 안 읽을 수가 없는데, 몇 년전에 지중해 시리즈 다 사놓고 1권 조금 읽다가 포기했어요...물질문명과 자본주의도 책은 다 사놓았었는데......지금은 지중해도 물질문명도 모두 중고처분하고 없습니다만..... ㅜㅜ 뭐 언젠가 또 살 겁니다. 아마. ㅋㅋㅋㅋ 제가 원래 샀다팔았다샀다 전문입니다. 언젠가는 읽어야죠. 다시한번 굳은 다짐을 해봅니다.ㅎㅎㅎ.

겨울호랑이 2022-06-14 14:21   좋아요 2 | URL
이번에 리뷰를 정리하고 있습니다만, 워낙 대작이라 정리하다보니 빠져나가는 것이 많네요... 브로델의 저작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여러차례 정독해야 함을 깊이 느낍니다. 그런 면에서 읽었다고 말하기 부끄러운 점이 많습니다. 붉은돼지님 말씀처럼 브로델 역사학에는 역사적 층위가 있어 쉽게 본론으로 나가지 않고 돌아가는 면이 있어 내용도 많고, 쉽게 내용이 잡히질 않네요. 일반 독자의 처지에서는 여러차례 읽는 방법밖에 없는 듯합니다. 저도 시간을 두고 다시 볼 계획입니다. 나중에 붉은돼지님 리뷰로 제 이해가 증진되길 기대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
 

세계경제(world economy)는 지구 전역에 걸쳐 있다. 시스몽디가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전지구적인 시장" 또는 "함께 교역을 하여 오늘날에는 일종의 단일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인류 전체, 또는 인류의 어느 부분 전체"를 가리킨다. 세계-경제(world-economy)는 우선  전지구의 일부분에만 관련된 말임을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은 경제적으로 독자적이며, 핵심적인 것들을 자급자족할 수 있고, 내부적인 연결과 교역이유기적인 통일성을 이루는 단위를 말한다.  - P18

세계-경제에는 일정한 경계가 있는데, 그 경계선은  마치 해안선이 육지로부터 바다를 구획하듯이 그 세계-경제를 규정한다. 세계-경제는 하나의 중심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도시와 하나의 지배적인  자본주의가 맡고 있다. 여러 개의 중심들이형성된다면 그것은 이 세계-경제가 아직 젊거나 아니면 반대로  퇴화해가거나 격변을겪고 있다는 표시이다. 이 공간  내에서는 각각의 개별 경제들이 계서제를 이루고 있다. 그중 어떤 것들은 가난하고 어떤 것들은 소박한 수준을 면치 못하는 가운데 중심에 위치한 하나의 경제만이 상대적으로 부유한다. 이로부터 불평등, 전압차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이 전체를 작동시키는 힘이 된다. - P24

자본주의는 무엇보다도 계서제를 내포하며, 그 계서제의 최상층을 차지한다. 자본주의가 이 계서제를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다. 자본주의가 제일 마지막에 개입하는 곳에서는 하나의 중개점만 있으면 충분하다. 이것은 이질적이면서도 적극 협조를 아끼지 않을 사회계서제로서 이것은 자본주의의 활동을 확장하고 활성화시키는일을 한다.  - P82

금방 알아볼 수는 없지만 늘 한 방향으로 자신의 진로를 따라가고 있는 장기추세는 누적적인 과정, 즉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더해지는 과정이다.  이것은 물가과 경제활동들의 덩어리를 조금씩 조금씩 쌓아가는 듯이 움직이다가 어느 시점 이후에는 마찬가지로 끈질기게 반대방향으로 하강을 계속한다. 이 움직임은 파악할 수 없을 정도의느린 속도로 아주 장기적으로 계속된다. 1년 단위로는 거의 아무런 계산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1세기 별로 보면 이것은 아주 중요한 동인이다. - P100

유럽 위에 건설된 경제적 복합체가 일련의 정기시 도시들로 귀결되는 것, 더구나 내륙지방의 정기시 도시들로 귀결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또한 프랑스 내에 서유럽 경제의 중심이 건설된 것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것은 프랑스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던  사람들이 의식하지도 못한 새에 쥐고 있다가 놓쳐버린 보물이었다. 독일과 이탈리아를 잇는 남북간 도로, 지중해와 북해 사이의 해상 연결로 등은 13세기가 끝나기도  전에 자본주의와 근대성의 특권적 유통로를 만들어놓았다. 이 유통로는 프랑스를 건드리지도 않은 채 먼 거리를 두고 돌아가고 있었다. 대교역과 그 대교역이  실어나르는  자본주의는 프랑스 영역의 거의  바깥에  놓여 있었다.  - P1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특한 인지 능력을 갖춘 호모 사피엔스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면서부터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우월한 사냥 능력과 더 정교해진 새로운 무기도 있었지만, 사냥감과 인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은것은 무엇보다도 이성적인 사고였다.

적어도 1만 5,000년 전, 인간과 늑대의 관계는 친숙함과 존중에서 협력과 동료애로 발전했고, 그 후손은 인간 가족의 일원이 된 첫 번째 동물이었다.

약 1만 2,000년 전부터 사람들이 가축을 길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염소, 양, 돼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까지, 현재는 일반적인 가축이 된 동물들은 서로 두려움이 없는 상태에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길들여졌다. 역사를 뒤바꾼 동반자 관계는 양쪽 모두에게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동물의 권리에 대한 관심이 가축 사육장과 실험실까지 확장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오늘날에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동물의 권리를 더 넓은 시각에서 보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인간이 역사를 형성하는 과정에 도움을 준 동물을 억압하고 학대한다. 현재 인간은 대부분의 동물을 종처럼 부리거나 먹거나 착취하고 있다. 도덕적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이 과정을 계속해야 할까? 아니면 변화를 모색해야 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페인 은의 세계사 - 1500~1800년, 아메리카의 은은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 지음, 장문석 옮김 / 미지북스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레알은 약 3.4그램이었으므로 8레알 은화는 27~27.5그램이었는데, 이는 굴디너보다는 가볍고 초창기 탈러와는 동등한 무게였다. 순도는 천분율로 930.555퍼밀이었으므로 순은 함유량은 약 25.5그램에 달했을 것이다. 두께는 약3밀리미터였고 지름은 40밀리미터였다. 그러므로 이 은화는 대형 은화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몇몇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 형편없이 주조되어 쉽게 부러지는 나쁜 주화였다. 그럼에도 이 은화는 엄청난 양으로 시장에서 유통되었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96


 카를로 M. 치폴라 (Carlo Maria Cipolla,1922 ~ 2000)의 <스페인 은의 세계사 Conquistadores, pirati, mercatanti: La saga dell'argento spagnuolo>는 페소(peso)라 불리는 16~17세기 기축 통화였던 8레알 은화를 다룬다. 그렇지만,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 Bad money drives out good'는 그레샴의 법칙(Gresham's law)을 실증이라도 하듯, 세상에서 가장 널리 사용된 8레알 은화는 양질의 화폐가 아니었다. 조악한 품질에도 불구하고 레알화가 표준이 되었던 것은 거대 은(銀)의 생산지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지속적인 공급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8레알 은화의 힘이 본질적으로 물량 공세에 있었다. 16세기와 17세기 동안에 국제 무역의 거대한 발전은 레알 은화가 세계 각지로 대량으로 확산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했다. 당시 국제 무역이 도달한 수준이 유지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대량의 레알로 대표되는 유동성이 시장에 지속적으로 공급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만일 레알이 거부되어 유통량이 감소한다면, 국제 무역은 급격한 쇠퇴를 감수해야 했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129


  아메리카 대륙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걸쳐 식민 영토를 가졌던 스페인이었기에 수입된 은은 곧바로 제국 전역으로 흩어져 공급되었는데 제국에 공급된 은은 오늘날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 QE)에 견줄 정도로 빠르게 회전되었기에 세계경제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합스부르크 스페인 왕실은 검소한 검은 색의 의상을 선호했다지만, 의상을 제외한 나머지 영역에서는 그다지 절약하는 편은 아닌듯하다.


 왜 스페인은 식민지들이 공급해 준, 또 계속해서 공급하게 될 이 막대한 양의 은을 잃어버렸을까? 아메리카에서 스페인에 도착한 보물 중 약 75~80퍼센트가 사적 거래로 획득된 것이었고, 나머지 20~25퍼센트만이 왕실 수입, 즉 신민들의 광산 활동과 물품의 수출입 관세, 기타 다양한 증여에 대해 징수한 세금 수입이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알마덴 광산의 수은 판매 수입과 왕실이 도처에서 푸거 가문과 싸우며 확립한 독점체제를 통해 발생한 판매 수입이 덧붙어야 한다. 그럼에도 스페인 왕실은 줄기차게 빚을 지곤 하는 나쁜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스페인에 도착한 왕실 소속의 보물은 통상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소비되고 말았다. 왕실의 채무가 무엇보다 다양한 전선에서 군대를 유지하느라 발생했으므로 왕실이 빚을 청산하기 위해 지불한 보물들은 스페인에서 빠져나와 교전 구역에서 재등장했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104


 마치 오늘날의 기축통화인 달러를 무제한으로 찍어낼 수 있는 권한을 갖는 미 FRB(Federal Reserve Board, 연방준비제도)처럼 막대한 은을 보유한 스페인은 세계 경제에 유동성을 공급할 수 있는 16세기 기축통화국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몰락 또한 예정된 것이다, 책의 본문에서 치폴라는 피셔의 교환방정식(Quantity theory of Money)을 통해 이를 뒷받침한다.


 은(銀)은 국제 시장에 무제한적인 유동성을 부여한 재화이자 너 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가지려고 한 재화였다. 바로 이 때문에 스페인은 아메리카로부터 막대한 양의 은을 건네받아 인적 자원으로나 물적 자원으로나 보잘적없던 나라(카스티야)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 그리하여 스페인 신학자 토마스 데 메르카도는 1569년에 올바르게도 "세비야와 대서양 연안 스페인은 예전에는 세상의 끝이었으나 이제 중심이 되었다."라고 쓸 수 있었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83


 교환방정식 MV=PY 에서 M : 통화량, V : 화폐유통속도, P : 물가수준, Y: 실질소득을 의미한다고 했을 때, 은의 공급과 세계 각지로의 활발한 공급은 각각 통화량 M과 화폐유통속도 V를 증가시킨다. 이에 대응해서 실질소득이 충분하게 증가하지 않는다면, 결국 물가 상승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아메리카로부터 은을 수입해 구입한 물품을 다시 아메리카로 보내야 하는 스페인으로서는 교역조건이 불리해지지만, 다른 대안이 없기에 결국 더 많은 은을 식민지로부터 가져올 수밖에 없는 셈이 된다. 이러한 악순환 속에서 스페인의 식민지 수탈은 가속화될 수 밖에 없었고, 생산량이 한계점에 이르는 순간 스페인 제국은 급격하게 붕괴되고 만다. 스페인 제국은 아르마다(Armada)가 칼레에서 불타 멸망한 것이 아니라, 포토시(Potosi) 은 광산의 산출량이 감소하면서 몰락한 것이다.


 지금 경제 균형 상태에 있는 A국, B국, C국 세 나라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특정 시점에 A국에서 통화량이 급격히 증가하여 균형 상태가 깨졌다고 가정하자. 만일 문제의 나라가 그들의 생산 체제로는 유통 화폐량이 증가한 만큼 총생산량을 증대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하면, 경제 이론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바는 A국은 가격 상승과 B국, C국으로의 귀금속 유출을 겪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B국, C국으로부터 A국으로 재화와 용역의 수출이 증가할 것임에 틀림없다. 아메리카에서 유입된 막대한 은을 소유한 스페인에서 일어난 일은 이러한 이론 모델을 완전히 증명한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106


 <스페인 은의 세계사>는 이처럼 중상주의(重商主義) 제국주의 국가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오늘날처럼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이 긴밀하게 엮이지 않은 과거 16세기 기축통화국은 껍데기에 불과했음을 우리는 스페인 제국과 8레알 은화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교훈을 확인 한 것은 우리만이 아니다. 스페인 이후 헤게모니(Hegemony)를 잡은 네덜란드와 영국은 식민지를 보다 현명하게 수탈한다. 플랜테이션(Plantation)으로 화폐가 아닌 생산물을 식민지로부터 들여옴으로써, 화폐수량방정식의 대변을 증가시키고, 차변의 금융부분은 중앙은행의 통제 하에 두면서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을 활용하며 제국주의 통치수단을 한 단계 발전시켜 나갔다.


 16세기와 17세기의 국제 무역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은화로건 은괴로건 멕시코와 페루에서 스페인으로 이동한 대량의 은이 다시 스페인에서 유럽 각지로 흩어졌다. 그리고 유럽 각지로부터 많은 양의 은이 다시 동양으로 향했고, 궁극적으로 인도와 중국에 기착했다. 거꾸로, 대량의 아시아 생산물이 유럽으로 향했고, 대량의 유럽 생산물은 다시 아메리카로 갔다. 주로 8레알 은화로 대표되는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은은 이와 같은 무역체제가 기능하는 데 필요한 유동성을 공급했다. 이러한 체제는 적절한 유동성이 결핍되어 있던 중세에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121


 이처럼 <스페인 은의 세계사>를 통해 16세기 세계 경제의 단면과 함께 중상주의 제국주의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아메리카의 자원, 아프리카의 인력 유출이 이 대륙에 미친 부정적 영향은 오늘날 세계 체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스페인 은의 세계사>는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1492년 콜롬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0~1506)의 항해가 만들어낸 문명간의 만남은 <1492: Conquest of Paradise>의 OST처럼 장중하지도 아름답지도 못한 비참한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체제의 서막이라는 점은 오늘날 세계화(gloabalization)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잘 알려준다...


 점점 더 많은 8레알 은화가 시장에 쇄도함에 따라, 점점 더 이 화폐는 환대받고 선호되었다. 중요한 사실은, 유럽인들이 은을 지불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의 생산품에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는 비유럽 시장에서 물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8레알 은화를 소지한 사람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통하는 구매력을 소유했다. 그 반면, 레알이 없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시장에서 퇴출당했다. 레알 은화는 유럽 민족들에게 동양과의 무역을 현저하게 팽창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111


 정복자들의 용기와 근면함, 과감함과 희생정신은 그들의 원주민과의 관계 속에서 확인되는 잔혹함, 비인간성과 짝을 이루고 있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적어놓은 항해일지의 명시적인 기록들에 따르면, 그가 자신들의 숙원이었던 운명적인 항해를 완수했을 때 그의 궁극적인 항해 동기는 명백히 금으로 가득 찬 땅의 발견과 정복에 있었다. 이 제노바 제독의 기록들에는 "금"이라는 표현이 강박적이란 느낌이 들 정도로 도돌이표처럼 등장한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41




우리는 스페인에 유입된 모든 은 - 은괴, 식민지에서 주조된 은화, 스페인에서 주조된 은화 - 중에서 매우 적은 양만이 스페인에 남았고, 나머지 거의 모든 양이 나라 밖으로 빠져나갔음을 확실히 알고 있다. 중상주의 신조가 우세했던 시대에 밖으로 바져나갔음을 확실히 알고 있다. 중상주의 신조가 우세했던 시대에 일어난 이렇듯 지속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은 유출은 각별한 관심 속에서 평가되었다. - P103

중국에서는 그들이 귀금속으로 직접 주조한 화폐가 없었으나, 은은 은괴나 외국에서 수입한 주화의 형태로 풍부하게 유통되었다. 중국인들은 은으로 지불할 필요가 있을 때면, 가위로 은괴나 8레알 은화 등의 주화를 편리한 무게만큼 조각들로 잘라냈다. 각 조각은 무게에 상응하는 가치를 가질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해, 중국에서 은은 화폐라기보다는 물품으로, 즉 무게 단위로 다루어졌다 - P118

식민지 정착과 인적 이동에 대한 통제 조치는 매뉴팩처와 일부 농업 생산물의 식민지 이식에 대한 통제 조치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즉 스페인 정부가 정복 초기부터 행했던 엄격한 일체의 통제 조치들을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아메리카로 오가는 일체의 물품 교역과 인적 이동을 모국 스페인의 항구 한곳에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식민지로 통하는 유일한 항구로는 1503년 이래 통상원 건물이 있던 세비야가 선택되었다. - P5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근대시기 지중해 지역에서 사망 원인은 주로 장(腸)과 관련된 질병이었다. 그래서 사망률이 여름에  집중되었다. 더 춥고 비가 더 많이 내리는 겨울 날씨는 인구의폭발적 성장을 가져왔다. 구체적으로 증거 자료를 수집한 사람은 없겠지만, 기원전 800~500년 이베리아반도에서 서부 이란 지역까지 거의 어디서나 인구가  성장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기원전 제천년기 말엽에 이르러 지중해 연안의 인구는 거의 2배로 늘어났다.
- P101

그중 가장 중요한 주제는 규모와 지속성의 문제다. 식량 생산에서부터 도시 내 다양한 공동체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 관계에 이르기까지도시의 다양한 영역에 영향을 미친 일시적 혼란의 빈도와 강도가 모두 포함된다.  내부적으로 권력 구조에 대한 도전이 생겼을 때는 (인구가 성장하거나 감소하거나 분산되는 등의 급격한 인구 변화가 나타날 테고, 이는 기존 조직의 안정성에 문제를 초래할 것이다. 급속한 변화란 것이서로 다른 역사적 맥락과 서로 다른 환경에서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은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도시의 다양한 구조에 따라 그러한 변화에 더 유리하게 (혹은 더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들이 사례 비교 연구를  통해  검토해야 할 주제다. - P159

분명 뉴 카호키아는 근본적인 구조의 변화였다. 도시 중심 구역에는다양한 요소들이 조직화되어 있었고, 주거지의 배열은 기준을 지키면서도 변화를 꾀했으며, 장례 행사 장면은 세계의 다른 초기 도시들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결국 카호키아의 역사는 새롭게 정착하고 조직화된 토착민과 이주민 가족에 의한 옥수수 생산 확장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카호키아의 유산은, 혹은 유산의 부재는 아마도 건축 재료 때문일 수도 있다.  - P260

도시국가(아슈르Assur)에서 아시리아(Assyria) 제국으로 발전하면서주민의 생활에는 뚜렷한 변화가 생겨났고, 도시에는 왕국의 수도라는성격이 부가되었다. 예전의 전통적인 수도 아슈르는 더 이상 왕국의 정부 소재지가 아니게 되었고, 몇몇 왕들이 아시리아 핵심 지대에서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다. 이러한 변화를 거치면서 인구 압력이 높아졌고, 경제가 성장했으며, 안전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리고 왕국의 권위를 세우고자 하는 시각적 수요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에 못지않은 아시리아 왕들의 욕망도 있었다. 그들은 오랜 라이벌이었던 바빌론(Babylon) 왕국을 규모나 화려함, 그리고 종교적 명성에서  능가하고자 했다. 아슈르 사원이 제국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중심으로 남아 있는 한, 제국을 통치하는 정부의 소재지는 왕에 따라 또한 필요에 따라 옮겨 다녀도 무방한 일이었다. - P318

놀랍게도 로마에 관한 기존 이미지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다른 제국과 확연히 달랐던 로마의 특색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민족적·문화적 포용이었다. 로마인은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가지고 있었다. 그 대신 팽창기의 로마인은 사회정치적 입장과 시민의지위에 주로 관심을 두었는데, 그것이 제국 포함 여부의 핵심이었다.  - P38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