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 일상생활의구조 -상 까치글방 97
페르낭 브로델 지음 / 까치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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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불투명한 영역, 흔히 기록이 불충분하여 관찰하기 힘든 영역이 시장 밑에 펼쳐져 있다. 그것은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고 어마어마한 규모로 존재하는 기본 활동의 영역이다. 지표면에 자리잡고 있는 이 폭넓은 영역을 나는, 더 알맞은 이름이 없어서, "물질생활(la vie materielle)" 혹은 "물질문명(la civilisation materielle)"이라고 명명하였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13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1902~1985)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Civilisation Materielle, Economie et Capitalisme 1-1>는 투명한 시장경제의 하부층인 일상생활의 구조인 '물질문명'을 다룬다. 그가 분석하는 15~18세기의 특징은 '느리지만 분명한 변화'로 규정지을 수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같은 시기 세계 전지역에서 동일하게 같은 규모로 발생하고 있었다는 것이 브로델의 분석이다.


15세기에서 18세기 사이의 물질 생활은 거의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히 느리게 변화해온 고대 사회와 경제의 연장이다. 그 과정에서 이것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이 오래된 사회와 경제 위에 필연적으로 그 무게를 짐지우는 상부사회(une societe superieure)를 조금씩 형성해갔다. 그리고 언제나 상부와 하부는 함께 공존하되 그 각각이 가지는 크기의 비율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공존해왔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19


 1300년부터 1800년까지 500년 동안 인구는 연평균 1.73퍼밀(천분율, 1/1,000) 정도의 비율로 증가했다. 이 장구한 시간 동안 인구가 아마도 두 배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인구학적인 전진 앞에서는 경제 위기도, 재앙이나 대규모 사망도 무력했다. 의심할 바 없이 이것이 15세기에서 18세기 사이 세계사의 핵심적인 사실이다. 그것은 생활수준의 차원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이 전체의 압력에 적응해야 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39


 무엇이 이러한 세계적인 단일성을 가능케 했는가? 그것은 극심한 파괴 뒤에 이어진 빠른 회복 덕분이었다. 질병은 많은 생명을 앗아갔지만, 모든 생명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비록 낮은 수준의 인구증가율이었지만, 꾸준히 인구는 증가되었고(몇몇 예외적인 상황은 있었지만), 이러한 상황은 농업으로 유지되었던 15~18세기의 전세계에 '팽창'의 압력으로 전세계인들의 생활 전반에 작용했다.

 

 앙시앵 레짐의 주요한 특성들을 요약하면,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갑작스러운 재앙만큼이나 강력한 단기적 회복능력일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비록 느낄 수는 없지만 계속 보상이 이루어져서 결국 최종 승리를 거두게 된다. 썰물은 그 이전의 밀물이 가져왔던 것을 결코 모조리 가져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힘들지만 놀라운 장기적 상승은 그렇게 많은 것들이 거기에 의존하게 될 수의 승리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117


 공간은 결국 언제나 제공되어 있었는데 왜 같은 시간에 "지리적 콩종크튀르(conjoncture geograpique)"가 작용했는가? 바로 이 동시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당시에 이미 효과적으로 작동하고는 있었지만 아직 허약했던 국제경제만으로는 그토록 일반적이고 강력한 움직임을 책임지지는 못한다. 그것은 원인인 만큼 동시에 결과인 것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50


 15-18세기 동안의 세계는 80-90퍼센트의 사람들이 땅으로부터 얻어내는 것만으로 살아가는 거대한 농업세계였다(p50)... 세계의 물질적인 통합성, 그리고 인류의 차원에서 생물학적 역사의 일반화의 가능성은 유럽의 신항로 발견, 산업혁명, 경제의 상호침투 이전에 이미 최초의 전(全)지구적인 단일성을 부여했을 수 있다... 기후는 대단히 복잡한 체계이며 그것이 식물, 동물, 사람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란 장소에 다라, 문화에 따라, 계절에 따라 굴곡이 심하고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52 


 브로델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에서 의(衣), 식(食), 주(住)의 전반적인 생활상 전반에서 팽창의 압력을 이하의 단원에서 분석한다. 먼저 '식'. '밀', '쌀', '옥수수'라는 각 문명권의 주식(主食)은 사회구조를 결정한다. 유럽의 주식인 밀은 목축과 연관되어 발전했고, 동양의 쌀은 관개시설과 관련되어 사회구조를 형성하면서, 문명권의 차이를 설명하지만, 이들 모두 '생산지=소비지'의 공식에서 벗어나지 않기에 세계적인 수준에서 각 문명(브로델은 '문화'와 '문명'을 구분한다. '문화'는 '문명'이전의 상태다)이 처한 '콩종크튀르(국면)'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이러한 한계점을 브로델은 '의'와 '주' 그리고 '상품으로서의 식'에서 극복해낸다. 바로 '사치(luxury)'다.


 결국 지배적인 작물이란 그것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세계의 좁은 지역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밀집한 인구, 완수된 문명 또는 완수중인 문명과 정확히 일치한다. 대규모의 사람들이 어떤 지배적 작물을 선택하면 그것이 그들의 생활양식에 뿌리를 내리고 그 결과 그 생활양식을 형성하며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 속에 그것을 가두게 되지만, 그 반대방향의 것 역시 사실이다. 즉 그 어떤 지배적 작물의 성공을 확립시키고 허용하는 것은 지배적인 문명인 것이다. 밀, 벼, 옥수수, 감자 등의 재배는 그것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변형되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236


  괭이를 사용하는 농민의 노동은 유럽의 농민이나 벼를 재배하는 아시아 농민의 노동보다도 더 생산적이지만 그 대신 이것으로는 인구가 밀집한 사회를 이룰 수는 없다. 이 원시적인 노동이 유리하도록 만든 것은 토양이나 기후가 아니라 거대한 휴경지를 얻을 수 있다는 점과 깨기 힘든 관습의 망을 구성하는 사회형태 덕분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239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에서는 '사치'를 통해 팽창을 할 수 있는 동인(動因)을 엿볼 수 있다. '남들과 다른 나'가 되고 싶다는 생각. 이러한 욕구는 매일 먹는 빵과 밥을 통해서는 결코 채울 수 없다.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필수품이 아니라 낯선 곳에서 구할 수 있는 귀중품인 차(茶)와 커피(coffee)를 마시고, 비단과 모피로 옷을 해 입으며, 한정된 주거 공간을 세련된 가구로 채우며 남들과 다름을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 이러한 마음은 여러 문화와 문명권에 여러 형태로 존재함을 브로델은 본문에서 세밀하게 실증한다. 


 사치는 시대, 나라, 문명에 따라 여러 가지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에 비해 거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끝도 시작도 없는 사회적인 코미디이다(p250)... 모든 사치는 낡아빠지게 되고 유행은 지나가게 된다는 것은 놀라울 것도 없는 교훈이다. 그러나 모든 사치는 타고 남은 재에서부터, 그 실패로부터 되살아난다. 사치는 사실 그 어느 것으로도 메울 수 없는 사회적 수준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며, 이 수준차이는 매번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새로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영원한 "계급투쟁"이다. 이 투쟁은 계급만이 아니라 문명의 투쟁이기도 하다. 문명은 끊임없이 감시하고, 또 부자들이 빈자들에 대해서 행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문명간에 사치의 사회적 코미디를 행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상호적인지라, 짧은 거리간이든 먼 거리간이든 문명들은 어떤 흐름들을 만들어내고 가속화된 교환을 유도해낸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253


 사실 모든 문명은 사치스러운 음식과 일련의 "흥분제"를 필요로 한다. 12-13세기에는 향신료와 후추에 대해서 열광했고, 16세기에는 초기의 증류주에 대해서, 그 다음에는 차, 커피, 담배에 대해서 열광했다. 19-20세기에는 새로운 사치품으로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마약이 생겨나게 되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369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한쪽에는 대다수의 불변성이 있고 또 다른 한 쪽에 사치라는 움직임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질생활의 모든 현실 - 음식, 음료, 주거, 의류,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행 - 은 그것들 사이를 한번에 결정적으로 표시할 수 있는 확고한 관계 또는 상호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치와 궁핍을 구분하는 것은 일차적 구분에 불과하며, 단순하고, 그 자체로는 아직 충분히 정확하지 않은 것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470


 세계 문명권의 지배계급에 공통된 '사치'를 소비하는 풍조는 단순한 소비가 아니었다. 소비는 하나의 행위였고, 행위는 예식(禮式)이 되었으며, 이러한 형식은 언어를 통해 의식구조를 형성한다. 하부구조의 변동에 의한 상부구조의 결정. 바로 이 지점에서 브로델의 이론은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 1918~1990)가 미처 구하지 못한 마르크스주의의 한계점에 한 줄기 빛을 던져주지 않았을까. 마음같아서는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말과 사물 Les mots et les choses> 또는 알튀세르의 <마르크스를 위하여>를 정리하고 싶지만, 일단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정주행한 후에 가는 것으로 하고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2>로 넘어가도록 하자...


 모든 현실이 강제적인 필요의 산물만은 아니다. 인간은 달리 어쩔 수 없으므로 먹고, 입고, 집을 짓고 살지만, 그래도 그가 하는 것과는 다르게 먹고, 입고, 집을 짓고 살 수도 있다. 유행의 급변은 이것을 "통시적으로(diachronique)" 이야기하고, 현재와 과거의 매 순간의 세계의 대립은 이것을 "공시적으로(synchronique)" 이야기한다. 사실상 우리는 다만 사물의 영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말"의 영역에 있다. 한 공기의 쌀밥이나 한조각의 빵을 먹는 일상생활 가운데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말의 노예가 되는데, 그때 거기에서 인간이 부여하고 암시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언어가 문제가 된다... 사치가 한 경제를 지탱해가고 진보시키는 좋은 수단은 아니라고 해도, 그것은 한 사회를 부양하고 매혹시키는 수단이다. 결국 상품과 상징과 환각과 환상과 지적 사고들의 이상한 조합인 문명이라는 것이 이 게임을 주도하게 된다. 간단히 말하여 물질생활의 심층에까지 까탈스럽게 복잡한 질서가 형성되며 여기에 경제, 사회, 문명이 가지는 함의, 경향, 무의식적 압력이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471


인구의 확대는 경우에 따라 이롭기도 하고 해롭기도 하다. 인구가 늘어나게 되면 그 인구가 차지하는 공간과 그 인구가 누리는 부(富)와의 관계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그 과정에서 해당 인구는 "문턱점(seuils crutiques ; critical threshold)"를 넘어서게 되고 그때마다 그 구조 전체가 새로이 문제가 된다. 간단히 말해서 이 게임은 간단하지도, 단선적이지도 않다. - P25

유럽에서는 기적의 농산물(옥수수, 감자)이 늦게야 자리잡았고 근대적인 집약농업도 서서히 확립되었다. 이러한 이유 등으로 늘 기근이 닥쳐와서 대륙 전체를 괴롭히고 황폐화시켰다. 1309-1318년 동안 연속적으로 찾아든 심각한 기근의 결과로 사람들이 겪었던 폐해만큼 비통한 관경은 없었으며, 그것은 이 세기 중반의 재앙(흑사병)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 P89

15-18세기에 사람들이 먹는 기본 음식은 주로 식물성 음식이었다. 이것은 콜럼버스 발견 이전의 아메리카나 블랙 아프리카에서는 자명한 진리였으며, 벼를 재배하는 아시아 문명권의 경우에는 과거에는 물론 현재에도 명백한 사실이다. 극동지방에서 일찍이 인구가 크게 증가하게 된 것도 육식을 아주 조금밖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단지 칼로리 수치만을 기준으로 하여 경제적 결정을 한다면 똑같은 면적의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 목축보다 월등히 유리하기 때문이다. 곡물 경작은 목축보다도 10~20배나 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릴 수 있다. - P135

유럽의 자본주의는 엄청난 양의 아메리카 산 가죽과 모피를 얻었으며, 이것은 조만간 먼 시베리아 삼림의 사냥꾼들과 모피를 얻었으며, 이것은 조만간 먼 시베리아 삼림의 사냥꾼들과 경쟁하게 될 것이었다. 우리는 수천년에 걸쳐 늘 다시 출발하는, 그리고 답보하는 인간의 모험이 하나이며, 공시성과 통시성이 함께 만난다는 것을 한번 더 확인하게 된다. "농업혁명"은 기원전 8000~7000년 전의 오리엔트에서와 같은 몇몇 특권적인 곳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인간의 경험들은 끝없이 긴 똑같은 여로를 따라가지만, 그것은 수세기의 간격을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 P247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은 브랜디, 럼 주, 아과 아르디엔테주(agua ardiente) 등은 유럽이 아메리카 문명에 제공한 독 묻은 선물이라는 점이다... 인디언들은 이렇게 해서 습관이 붙은 알콜 중독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멕시코 고원 문명의 경우 그들의 삶의 틀과 고래(古來)의 규제를 상실한 사람들은 거리낌없이 알콜의 유혹에 빠져들어갔는데 이것은 1600년 이후 엄청난 폐해를 입게 되었다. 뉴-스페인에서 용설란 주가 가져다주는 국가 수입이 은광 수입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음을 생각해보라! 더구나 그것은 새로운 지배자들의 의도적인 정책이었던 것이다. - P351

부잣집에서 변화를 주고 싶은 욕구가 아무리 커도, 실내장식이나 가구는 결코 빨리 바뀌지는 못했다. 유행은 바뀌기는 했지만 아주 느렸다. 이는 새로운 변화에 필요한 비용이 어마어마했으며 더욱이 생산 가능성이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p428)... 가구와 가구 사이의 게임에서는 사회가 심판이다. 그것은 종종 허영을 뜻한다. 식기장이 그런 식으로 부엌에서 생겨난 가구다. 이 식기장에는 몇줄의 선반이 열을 지어 있었는데 집주인의 지위에 따라 그 수가 정해지는 것이 에티켓이었다. - P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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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2-04-15 18: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오늘 <인종, 국민, 계급>이 출간된 것을 보았는데 판매지수가 상당히 높아서 놀랐습니다. 그 책의 저자 중 한 명인 월러스틴이 브로델과 연결되는 사람이다보니, 겨울호랑이 님의 다음 독서목록이 무엇일 될까 궁금하네요.

겨울호랑이 2022-04-15 19:15   좋아요 2 | URL
세계체제와 관련한 월러스틴의 저작들이 타계 후에도 번역되어 저 또한 반갑습니다. 일단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마저 정리하고, 페리 앤더슨의 2저작 <고대에서 봉건제로의 이행>, <절대주의국가의 계보>와 브로델의 <지중해>를 정리할 계획에 있습니다. 그 사이에 또 어떤 책이 들어올지는 잘 모르게습니다만... 초원님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저녁 되세요 ^^:)

초원 2022-04-17 08:52   좋아요 1 | URL
친절한 답변에 감사드려요. 저로서는 흉내낼 수 없는 독서력을 가지셔서 그저 감탄합니다.

어제 하루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침묵하는 시간을 갖는 것뿐이었지만, 우리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후‘를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댓글을 달고 있는 화면의 왼쪽에 겨울호랑이 님이 달아놓은 도서목록들을 보니 천천히 가더라도 언젠가는 어딘가에 닿겠구나 싶습니다.

일요일 오후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겨울호랑이 2022-04-17 10:36   좋아요 0 | URL
에고 아닙니다. 그저 호기심이 생겨 읽다보니 여러 책에 손이 갔네요. 아직 읽어야 할 책이 많기에 한없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초원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일요일 되세요! ^^:)
 

우리 인간은 추위의 산물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가 분령하게 시작되는 시기는 기온이 낮은 상태(기존 표현으로 빙하기가 지속되는 와중이었다. 그동안 특이한 문화적 분기가 발생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만 년 남짓 전의 일이었다. 그 뒤 지구의 기온이 다시 오르자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동아프리카에서 소규모 집단으로 거주했다. 다른 유인원들에 비해 호모 사피엔스는 한 무리에 속하는 개체 수가 엄청나게 많았다. 보통 수백 명 혹은 그 이상이었다. 또한 호모 사피엔스는 (인간의 몸속에 사는 박테리아를 제외하면) 다른어떤 생명체보다 더 많고 더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남았다.
- P61

기본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문화적 생물이 문화를 만들어내는 데는 타고나는 전제 조건이 있다. 자연환경이 개입되기 전에 먼저 유전적으로 물려받는 요소가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이다. 문화적 생물은 유전적 요소를 바탕으로 문화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그 요소가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역사학 전공에서 합의된 바가 없다. 그러나 인류를 다른 문화적 생물과 비교해보면, 인류의 문화에서 다른 생물과 구별되는 독특한 측면들이 있다. 다양한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데 상대적으로 유연성(Hexibility)이 높은 편이고, 또한 상대적으로 가변성(mutability)이 높은 편이다. 유연성과 가변성은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었다.  - P62

빙하기에서도 간간이 기온이 올라가는시기들이 있었다. 태양 흑점의 변화가 이러한 불규칙성의 원인으로 지5적되기도 했다. 온난기 때도 흐름을 역행하는 경향이 100년 정도 지속된 적이 있었다. 우리 이야기의 기본 틀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기후 변화는 딱 한차례뿐이다. 약 15만~20만 년 전으로, 빙하기 관련 고고학적 발굴 성과와 호모 사피엔스의 최초 출현이 연결되는 시기다.  - P65

우리 이야기가 펼쳐지는 무대가 기후라면, 그 무대의 주인공은 바로호모 사피엔스다. 가장 오래된 호모 사피엔스의 유골과 주거지 유적은 2003년 에티오피아의 헤르토(Herto)라는 곳에서 발굴되었다. 근처에서 하마의 유골도 같이 발견되었는데, 도살 해체된 흔적이 남아 있었다. 호모 사피엔스의 유골은 세 사람의 것으로, 어린이 한 명과 성인 두 명이었다. 시기는 약 15만 4000~16만 년 전 사이로 확인되었다. 이들의 두개골은 오늘날의 인류와 비슷해 보였으며, 다만 오늘날의 평균치보다 조금 컸다. 이들이 사망한 이후에 살이 제거된 상태로 두개골만 말끔히 관리한 것 같은데, 이는 당시의 장례 풍습과 관련되는 문제다.
- P67

이주의 원인은 모호하지만 이주의 결과는 명확하다. 이주 때문에 사람들의 관계, 집단의 규모와 조직, 세계를 보는 방식, 다른 생물들(인간과 경쟁하는 동물, 인간의 먹이가 되는 동식물 모두 포함)과 관계 맺는 방식등이 모두 바뀌었다. 이때 바뀐 여러 가지는 이후로도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가장 두드러지는 결과 중 하나는 성별에 따른 역할 구분이었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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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세계체제 4 - 중도적 자유주의의 승리, 1789-1914년 근대세계체제 4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박구병 옮김 / 까치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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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프랑스 혁명이 정치적 변화의 정상 상태라는 개념과 주권이 군주(통치자)가 아니라 인민에게 있다는 사상을 정당화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한 쌍의 신념이 빚어낸 결과는 다면적이고 복합적이었다. 첫 번째 결과는 이런 새롭게 보급된 개념들에 대한 반응으로서 세 가지 근대적 이데올로기 - 보수주의, 자유주의, 급진주의 - 의 출현이었다. 제4권 전체의 논지는 중도적 자유주의가 다른 두 가지 이데올로기를 "길들이고" 19세기의 승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뒤 이는 무엇보다 당대 가장 강력한 두 국가 - 영국, 프랑스 - 에서 자유주의 국가들의 탄생에 특권을 부여하는 형태를 취했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적 사회과학의 형성을 독려하고 구속하는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서문 , p16


 영국과 프랑스는 1651년부터 1815년까지 자본주의적 세계경제 내의 헤게모니를 두고 길고긴 전쟁을 벌였다. 1815년에야 영국은 마침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곧 두 국가는 주목할 만큼 신속하게 핵심 지역에 위치한 국가들의 새로운 정치적 모델을 확립하고자 함께 노력하는, 암묵적이지만 매우 뜻깊은 동맹관계에 돌입했다. 이는 자유주의 국가라는 모델로서 인민주권의 시대에 자본주의적 세계경제의 정당화에서 핵심적 요소를 차지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49


 이매뉴얼 월러스틴 (Immanuel Wallerstein, 1930~2019)의 <근대세계체제 4 The Modern World-system>의 주제는 '자본주의'가 아닌 '자유주의'다. 이 책이 그리는 19세기는 어떤 시대일까. 최후의 그리고 가장 강력했던 프랑스마저 영국의 헤게모니를 인정하면서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후반기까지 영국의 페권에 도전할 세력을 없을 터였다. 프랑스 혁명을 통해 영국의 헤게모니에 최대의 반격을 가하려던 시도는 이후 유럽 각국에 민족주의와 함께 인민주권의 개념을 확장시키면서 역설적으로 영국 헤게모니를 강화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이전 시대의 중심이 '자본주의'였다면, 이제 시대의 중심은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한 '이데올로기'로 옮겨간다.


 우리는 왜 프랑스 혁명이 "자본주의"를 설치한 부르주아 혁명으로 파악될 수 없는지를 설명했다. 그 까닭은 프랑스가 훨씬 전에 자본주의적 세계경제의 일부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프랑스 혁명을 부분적으로는 패권국이 되려는 투쟁에서 영국을 물리치기 위한 최후의 시도로, 그리고 어느 정도는 본질적으로 실패했지만, 근대세계체제의 역사에서 등장한 "반체제적"(말하자면 반자본주의적) 혁명으로 간주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412


  1815년 영국, 프랑스 그리고 세계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새로운 정치적 현실은 당시의 시대정신에서 정치적 변화가 당연시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주권의 자리는 군주나 입법부(의회)로부터 훨씬 더 눈에 띄지 않는 어떤 존재, 즉 "인민"으로 이동했다... 근본적인 정치적 문제는 변화라는 정상상태에 영향을 미치면서 인민주권 개념의 실행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이들의 요구와 각국에서 그리고 세계체제 전체 내에서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끝없이 자본을 축적하는 능력을 보증하려는 저명인사들의 욕망을 어떻게 조정하는가의 문제였다. 우리가 언뜻 보아 갈등을 일으키는 이해관계 사이에 도저히 좁혀질 것같지 않은 깊은 간극처럼 보이는 것을 해결하려는 이런 노력에 부여한 이름이 이데올로기(Ideology)이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21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사회주의'는 월러스틴이 분석한 이데올로기의 세 얼굴이다. 그리고, 월러스틴에 의하면 이들 중 최후의 승자는 '자유주의'다. 다만, 자유주의는 승리를 거두기 위해 처음에는 사회주의와, 나중에는 보수주의와 손잡으면서 조금씩 변화된 모습을 보였으며, 월러스틴은 이를 '중도적 자유주의'라 지칭하며, <근대세계체제 4>의 전체 주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장기의 19세기까지 세계체제의 정치경제학과 그것의 산만한 수사학 사이에 괴리가 존재해왔다고 주장했다. 제4권에서 우리는 근대세계체제의 세 가지 주요 이념인 보수주의, 자유주의, 급진주의의 발전에 의해서 이 괴리의 극복을 필수적이게 만든 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의 문화적 영향이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자유주의가 좌파도, 우파도 아니라 어떻게 항상 중도적 원칙이자 신조였는지를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중도적 자유주의가 어떻게 다른 두 이념을 사실상 중도적 자유주의의 화신(化身)으로 변형시키면서 "길들여왔는지"를 보여주고자 노력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장기의 19세기의 끝무렵에 중도적 자유주의가 세계체제의 지문화의 지배적인 신조였다는 점을 주장할 수 있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413


 세 가지 이데올로기가 우리에게 제공한 것은 적절한 역사적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단지 누가 인민의 주권을 구현하는가에 대한 탐색에서 요구되는 세 가지 출발점이었다. 자유주의자들에게 그것은 이른바 자유로운 개인이었다.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이른바 전통적 집단이었고,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사회"의 전체 구성원이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38


 확실히 중도는 단지 추상이며 수사적 기교이다. 누군가는 항상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단지 양극단을 규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중도적 위치에 자리잡게 할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런 일을 그들의 기본적 정치 전략으로 채택하고자 결정한 이들이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29


 자유주의자-사회주의자 동맹은 18세기의 자유롭고 평등주의적인 사상, 그리고 절대왕정에 맞선 투쟁 속에 뿌리를 내렸다. 그 동맹은 두 이데올로기가 근대 국가의 사회정책을 위한 기본 조건으로 인식한 생산성에 대한 관심이 계속해서 증대했기 때문에 19세기에도 지속적으로 융성했다(p43)... 다른 한편 1830년 이후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1848년 이후 그 구분은 훨씬 더분명해졋다. 동시에 1848년은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 사이에 화해와 조화가 시작된 해였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44


 자유주의 국가는 중간계급의 정치적 역할을 정당화하고 (따라서 그들에게 합법성을 부여받으면서) 지정학적 영역에서 그들의 지배를 보증하기 위해서 화친 협정에 불만을 품은 노동계급에 대한 국내적 억압을 결합시켰다. 이는 처음에는 잘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848년 유럽 대륙을 휩쓴 혁명이 보여주듯이 그것은 취약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139


 세계체제로서 중도적 자유주의는 어떻게 작동했는가? 이미 자본주의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된 상황에서, 월러스틴은 '인민주권'에 주목한다. 세계질서의 위계는 결정된 상황에서 문제는 얼마만큼 주변부가 확장되는가가 문제되던 19세기. 체제의 문제는 외부 확장이 아닌 내적 분화의 형태로 표현된다.


 우리는 어떻게 중도적 자유주의가 그 이념을 세 가지 중요한 영역에 부과했는지를 자세히 검토했다. 첫 번째는 영국과 프랑스가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모범 사례로 부각되었듯이, 세계체제의 중심부에 "자유주의 국가"가 창설된 것이었다. 두 번째는 포함에서 배제로 시민권의 원칙을 바꾸려는 시도였다. 우리는 여성, 노동계급, 그리고 종족적/인종적 "소수집단" 등 배제되었던 세 주요 집단들을 언급함으로써 이를 예시했다. 세 번째는 자유주의 이념의 반영이자 지배 집단들이 피지배층을 통제할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서 역사적 사회과학들의 출현이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414


 불평등은 잘 알려진 모든 역사적 체제에서 그랬듯이, 근대세계체제의 본질적인 현상이었다. 다른 점, 무엇보다 역사적 자본주의의 독특한 점은 평등, 즉 시장 내의 평등, 법 앞의 평등,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은 모든 개인들의 근본적인 사회적 평등이 체제의 목적으로 선포되었던 점이다. 근대 세계의 중요한 정치적, 문화적 질문은 평등에 대한 이론적 용인과, 그 결과로 생긴 현실의 기회와 만족의 양극화가 지속적일 뿐만 아니라 점점 더 극심해지는 상황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라는 과제였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217


'자유(自由)'라는 개념으로부터 주권(主權)이 1인으로부터 다수(多數)에게로 옮겨지면서, 당연하게도 예전에는 동질한 '인민들'이 주도권을 갖느냐에 따라 다시 분화(分化)되었다. 이로부터 생겨난 불평등 문제는 계급안으로의 '포함'과 '배제' 문제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화의 모습은 극단적으로는 '혁명'의 모습으로, 보다 온건한 형태로는 '선거권의 확대'로 나타난다. 18세기 이전의 '중심부-주변부' 문제가 국가 단위의 문제였다면, 이제 인민 내부의 문제로 들어왔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를 '시민혁명'이라는 또 다른 혁명의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홉스봄(Eric Hobsbawm, 1917~2012)의 시대 구분 '혁명의 시대 - 자본의 시대 - 제국의 시대' 도식 대신 다른 구분이 필요하지 않을까. 


 1830-1832년 무렵 자유주의 중도파가 통치하는 자유주의 국가는 영국, 프랑스, 벨기에 - 당시 산업화 수준이 가장 높았던 세 국가- 에서 수립되었다. 전체적으로 세 국가는 세계체제의 경제적, 문화적 핵심을 구성했다. 자유주의 국가의 모델은 자신의 활용뿐 아니라 그에 필적하는 번영과 안정을 달성하고자 열망하는 다른 이들의 활용을 위해서 고안되었다. 신성동맹과 핵심 지역의 과격파는 억제되었다. 실제로 그들은 완패했다. 보수주의자들과 급진파는 중도적 자유주의를 단순한 변형으로 사실상의 변모를 시작했다. 과격파가 효과적으로 제압을 당했다면, 봉기를 모색하던 혁명가들은 특히 세 곳의 전형적인 자유주의 국가에서 어떤 정치적 존재도 거의 과시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124


 19세기 세계질서의 전환점은 1866-1873년, 즉 "19세기 후반의 역사가 바뀌는 거대한 경첩(이음새)같은" 시기일 것이다. 미국은 연방을 유지했고, 1866년 독일 역시 그렇게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따라서 두 신흥 강국은 각기 지정학적 역할을 강화할 상황에 처해 있었다. 동시에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남성 보통선거권 도입이라는 대도약에 합류할 참이었다. 1867년 영국의 의회 개혁은 상당히 정확하게 "한 시대의 종말"로 비춰졌다. 1870-1871년 프랑스의 폭발과 더불어 1867년 영국의 개혁법은 1815년에 시작된 위험한 계급들 - 특히 도시 프롤레타리아 - 의 길들이기 과정, 즉 이들을 체제 내로 정치적으로 통합해서 이들이 양국의 기본적인 경제, 정치, 문화 구조를 뒤엎지 않도록 만드는 과정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상징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200


 한편, <근대세계체제>에서 언급된 인민주권에 의해 발생한 불평등 문제, 계급 문제는 다른 한편으로 이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계몽주의 전통에 의해 새로운 '사회과학(社會科學)'을 탄생시킨다. 과거 중세의 질서가 신학(神學)에 기초하였다면, 근대의 질서는 정량화된 과학(科學)에 근거하게 되었다. 인민이 분화되듯, 학문도 분화되면서 저마다의 이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론(理論)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이렇게 설명된 질서는 다시 근대세계체제를 강화하게 되었다... 


 다양한 사회적 출신을 가진 사람들의 차이와 불평등은 19세기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차이와 불평등은 오랫동안 존재해왔으며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것이며 실제로는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19세기의 새로운 점은 공동 협치(協治)의 기반이자 중도적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으로서 평등에 대한 수사학적 합법성과 시민권의 개념이었다. 이는 이분법의 이론화, 그 구별을 논리적으로 동결하고 사회의 규칙뿐만 아니라 과학의 규칙까지 반대하여 사실상 경계를 가로질러 횡단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또 새로운 점은 법적인 구속으로부터 그들의 해방이나 최소한 부분적 해방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이런 이분법의 구체화가 배제한 모든 사람들이 사회조직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시민권은 항상 누군가를 포함하는 것만큼 누군가를 배제시켰다. 19세기에는 정체성이라는 완전히 현대적인 개념 장치가 탄생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323


 순조롭게 기능하고 특히 위험한 계급들의 반자유주의적인 압력을 앞지르기 위해서 자유주의 국가들은 계속 진행 중인 현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세 가지 법칙정립적 사회과학 -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 의 기능이 되었다. 이 세 가지 분야에 관해서 주목해야 할 첫 번째 사항은 이것이 일종의 삼위일체라는 점이다. 과거에 대해서 기록할 때, 새롭게 떠오른 대학 조직은 이른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영역을 단일한 "분야"로 결합시켰다. 그러나 현재에 관심을 두자마자, 사회과학자들은 이 단일한 분야가 별도로 연구되어야 할 세 개의 개별적인 분야라고 강조했다. 무엇 때문에 이런 분열이 발생했는가? 원인은 단 하나이다. 그것은 "근대성(modernity)"의 주목할 만한 특징이 사회구조를 서로 상당히 다른 세 가지 구획으로 차별화하는 것이었다는 자유주의 사상의 강력한 주장이다. 이 세 가지 영역은 시장, 국가, 그리고 시민사회였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361


 월러스틴의 <근대세게체제> 시리즈는 4권에서 마무리되지만, 본인은 5권과 6권도 계획한 듯하지만, 아쉽게도 저자가 2019년 타계하면서 그 뒤를 알 수 없게 되버렸다. 시대의 흐름을 통찰하는 놀라운 저작을 더 읽지 못하는 부분은 분명 아쉬운 부분이지만, 개인적으로 이후 시대를 '세계체제'가 아닌 다른 체제로 해석할 여지가 남겨진 점은 다행이라 생각하며 리뷰를 갈무리한다...


 만일 내가 지금 계획하는 대로 제5권이 1873년부터 1968/1989년까지 펼쳐진다면, 내가 오래 살 수 있다면 제6권이 나와야 할 것이다. 그 주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구조적 위기로서 그것이 다루는 범위는 1945년/1968년부터 21세기 중엽, 예컨대 2050년쯤까지일 것이다. 그 무렵에는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상황에 들어서지 않을까 예상한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서문, p17

자유주의적 세계질서에는 2개의 기둥이 더 있었다. 바로 강력한 국가와 강력한 국가 간 체제였다. 우리가 이제 몰두할 문제는 그 2개의 기둥을 확보하는 과정이다. 절대군주제는 강력한 국가를 세운 적이 없었다. 절대주의 체제는 내부에서 약한 국가들이 더 강력해지려고 분투하는 발판일 뿐이었다. 진정으로 강력한 국가 - 즉 절절한 관료조직과 사리에 맞는 대중의 묵인을 갖춘 국가 - 의 수립은 1789년 이후 세계체제의 표준적 변화와 인민주권의 분위기 속에서만 가능할 것이었다. 그리고 세계체제의 핵심 지역에 그런 국가를 수립할 수 있었던 이들은 오직 자유주의자뿐이었다. 관료제의 성장은 경제 성장, 즉 최소한 당시 자본가들이 기대하고 기술적으로 가능했던 규모의 경제 성장에서 꼭 필요한 부속품이었다. - P173

국가가 주도하는 개혁의 정당성에 대한 동일한 자유주의적 확신은 자유무역에 적용되었다. 영국 정부는 일단 유럽 시장에서 인도의 경쟁자들이 초래한 어떤 위협에 맞서 랭커셔를 안전하게 보호하게 되자, 인도를 면직물 수출국에서 원면 수출국으로 강제로 변화시키면서 영국의 면직물 제조업자가 자유무역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허용했다... 한 휘그당파 의원은 1846년 의회토론에서 자유무역을 "우리에게 외국을 통치할 책임을 부과하지 않고 외국이 우리에게 가치 있는 식민지가 될" 유익한 원천으로 서설할 수 있었다. - P185

자유주의 제국은 개인 권리의 극대화에 대한 신의를 특징으로 삼지 않았다. 자유주의 제국을 구별해주는 것은 경제성장(또는 오히려 자본의 축적)을 촉진하는 동시에 위험한 계급을 길들이는 (그들을 시민으로 통합하고 작은 부분일지라도 그들에게 제국이 지닌 경제 규모의 일부를 제공함으로써) 국가의 지능적인 개혁에 대한 헌신이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자유주의 제국은 정치적 중도파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반동이나 혁명의 낌새가 있는 체제를 회피해야만 했다. 물론 이를 실행하려면 어떤 국가는 외부인들과의 관계에서 해결되지 않은 심각한 민족주의적 문제가 없어야 하고 국내에 불만을 품은 강력한 소수집단도 없어야 했다. 또한 그 국가는 집단적 번영의 전망이 비현실적이지 않을 정도로 세계경제에서 충분히 강력해야 했고 외세의 지나친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충분한 군사력이나 강력한 동맹국들을 보유해야 했다. - P208

전 세계적으로 19세기는 유럽의 절정기였다. 유럽 혈통의 백인 남성들이 [이토록] 도전을 덜 받으면서 [세계를] 지배한 적은 결코 없었다. 이는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의 군사력에 기초한 것이었지만 이데올로기적 구조물에 의해서 보증되었다. 유럽은 문명이라는 통합적 체계의 건설을 통해서 ‘유럽화‘되었다. 다른 모든 문화권들은 이를 기준으로 평가되고 분류될 수 있었다. 국가들은 균질적인 시민들로 이루어진 국민을 만들고자 시도하면서 동시에 생시몽이 옹호한 "세계의 후진 지역에 맞서 싸우는 성전(聖戰)"을 통해서 백인(유럽계) 인종을 창출하고자 했다. 성전은 식민화를 수반했다. - P317

중도적 자유주의는 항상 각종 제도들의 신중하고 정당한 개혁에 전념해왔고, 우리가 보아왔듯이 19세기 중엽에 이 목표는 현재를 연구하는 신흥 사회과학들에게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사회 운동가로서 또는 그저 사회 개혁가들이 목표를 시행하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분석 연구들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간주하기로 했는가? 비라보와 콩도르세와 같은 사상가들이 최초로 사회과학(social science)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그들은 그 용어를 사회적 기술(social art)과 동의어로 만들었다. 사회적 기술은 "공공정책과 사회의 재건에 대한 합리적인 지침으로 실용적이고 개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 P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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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세기에서) 핵심적 사건은 프랑스 혁명이 근대세계체제 전체에 제공한 문화적 결실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를 세계체제의 지문화의 출현이라고 생각했다. 지문화란 세계체제 전체에서 널리 수용되고 그 뒤 사회적 행위에제약을 가한 일련의 사상, 가치, 규범을 일컫는다. 나는 프랑스 혁명이 정치적 변화의 정상 상태라는 개념과 주권이 군주(통치자)가 아니라 인민에게 있다는 사상을 정당화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한 쌍의 신념이 빚어낸 결과는 다면적이고 복합적이었다. 첫 번째 결과는 이런 새롭게 보급된 개념들에  대한  반응으로서 세 가지 근대적 이데올로기 - 보수주의, 자유주의, 급진주의 의 출현이었다. 제4권 전체의 논지는 중도적 자유주의가 다른 두 가지 이데올로기를 길들이고, 19세기의 승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뒤 이는 무엇보다 당대 가장 강력한 두 국가 - 영국, 프랑스 - 에서 자유주의 국가들의 탄생에 특권을  부여하는 형태를 취했다. 더 나아가 그것은 중요한종류의 반체제 운동의 출현을 자극하고 그 충격을 제한하는 형태를 띠었다. 내가 시민권 개념이 승인한 진보와 그 혜택의 범위에 관한 환상을 다루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은 역사적 사회과학의 형성을 독려하고 구속하는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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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장기의 19세기까지 세계체제의 정치경제학과 그것의 산만한 수사학 사이에괴리가 존재해왔다고 주장했다. 제4권에서 우리는 근대세계체제의 세 가지 주요 이념인 보수주의, 자유주의, 급진주의의 발전에 의해서 이 괴리의 극복을 필수적이게 만든 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의 문화적 영향이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자유주의가 좌파도, 우파도 아니라 어떻게 항상 중도적  원칙이자 신조였는지를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중도적 자유주의가 어떻게 다른 두 이념을 사실상 중도적 자유주의의 화신(化身)으로 변형시키면서 "길들여 왔는지"를 보여주고자 노력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장기의 19세기의 끝무렵에 중도적 자유주의가 세계체제의 지문화의 지배적인 신조였다는 점을 주장할 수  있었다. - P413

우리는 어떻게 중도적 자유주의가 그 이념을 세 가지 중요한 영역에 부과했는지를 자세히 검토했다.  첫 번째는 영국과 프랑스가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모범 사례로 부각되었듯이, 세계체제의 중심부에 "자유주의 국가"가 창설된 것이었다. 두 번째는 포함에서 배제로 시민권의 원칙을 바꾸려는 시도였다. 우리는 여성, 노동계급, 그리고 종족적/인종적 "소수집단" 등 배제되었던  세 주요 집단들을 언급함으로서 이를 예시했다. 세 번째는 자유주의 이념의 반명이자 지배 집단들이 피지배층을 통제할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서 역사적 사회과학들의 출현이었다.  - P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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