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세계체제 3 -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거대한 팽창의 두 번째 시대 1730-1840년대, 제2판 근대세계체제 3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김인중 외 옮김 / 까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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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저술 작업 전체는 "장기의 16세기"를 "자본주의 세계경제"로서 "근대세계체제"가 형성된 시점으로 보는 관점에 서 있기 때문에 1730년부터 1840년대까지의 시기를 전환점으로 간주하지 않는 논의를 주로 담고 있다... 내가 보기에 자본주의 체제를 규정하는 핵심요소는 그것이 끝없는 자본 축적의 추진력에 의거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문화적 가치가 아니라 일종의  구조적 필요조건이다. 이 말은, 그 논리에  따라서  움직이는 이들에게는 중기적 차원에서  보상을 해주지만 그것과는 다른 논리들에 따라서 움직이기를 고집하는 이들에게는 (물질적으로) 징벌을 가하는 메커니즘들이 체제 내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 서문


 이매뉴얼 월러스틴 (Immanuel Wallerstein, 1930~2019)의 <근대세계체제 3 The Modern World-system>의 시대적 배경은 1730-1840년대의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두번 째 팽창기다. 이 시기의 특징은 네덜란드에 뒤이어 헤게모니를 장악한 영국과 이에 도전하는 프랑스로 요약될 수 있겠지만, 최종적으로 프랑스의 도전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리고, 월러스틴에 따르면 영국의 헤게모니는 '7년 전쟁' 직후인 1770년대 확정되지만, 영국의 승리는 이미 17세기 네덜란드 금융의 이전으로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이전 단계들과는 달랐던 프랑스와 영국 간의 이 경쟁단계에서의 핵심적인 정책요인은 그 시기에 발생했던 모든 "혁명적" 투쟁에 대하여 서로 반대편에선 양국의 사실상의 자동적인 개입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이러한 양국의 싸움은 1789년에 시작되었던 것이 아니라 구체제하인 1770년대에 시작되었다... 농업, 공업, 무역 그리고 재정에서의 경제적인 격차를 결정적으로 증대시켰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정치적-군사적 승리였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 p173


 월러스틴은 '혁명 革命 recolution'을 '산업화 産業化 Industrialization)'의 전제조건으로 본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미 1770년대 제국의 중심부(영국 본토)와 주변부(인도, 중국)과 면직물, 아편, 은 등으로 삼각무역체제를 확정시킨 영국의 헤게모니에 1789년 혁명을 이룬 프랑스가 대적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프랑스 혁명은 또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 혁명이 미래를 예고했다는 점이다. 프랑스 혁명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대한 최초의 반체제혁명 - 부분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대부분은 실패했던 - 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만들어낸 "신화"는 부르주아 신화가 아니라 반부르주아 신화이다...프랑스는 영국보다 한 세기 이상 뒤에 "부르주아 혁명"을 겪었으며, "부르주아 혁명"은 "산업혁명"의 선결조건이라고 상정된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 p84


 7년전쟁 이후의 시기는 세계무역의 전반적인 침체기로, 일종의 콘트라티에프-B 시기였으며,  세계경제는 1792년경에 가서야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그러나 경제의 호전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할 수 있는 최상의 위치에 있었던 것은 프랑스라기보다는 영국이었고, 이러한 사실은 1780년대에 이르러서는 분명해졌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 p112


 프랑스 혁명은 무엇인가? 프랑스 혁명은 서로 매우 다르지만 모두가 깊게 맞물려 있는 세 개의 것이었다. 첫째로, 그것은 다양한 자본주의적 지배계층 그룹이 영국이 세계경제에서 헤게모니적 지위로 올라설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 절실하게 요구되는 프랑스 국가의 개혁을 강행하려는 비교적 의식적인 노력이었다... 둘째로, 프랑스 혁명은 근대 세계체제의 역사에서 최초로 의미 있는 반체제(즉 반자본주의적) 운동, 즉 프랑스 "민중"의 운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공공질서가 붕괴되는 상황을 창출했다(p170)... 셋째로, 프랑스 혁명은 근대 세계체제 전반에 걸쳐 문화적-이데올로기적 영역이 마침내 경제적, 정치적 현실과 합치되게끔 하는 데에 필요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 p171


 <근대세계체제> 전반에 걸쳐 큰 흐름이 만들어지는 시기는 16세기와 17세기다. 이때 만들어진 자본주의 체계가 50-60년 주기의 콘트라티에프 파동(Kondratiev wave)에 따라 팽창과 수축하는 것을 역사적으로 고증하는 것이 전체 시리즈를 관통하는 관점이라 하겠다. 월러스틴에 따르면 이후 시기의 변화는 일종의 변주에 불과하다. 때문에, 이후 기계화로 인한 대량생산이 가져온 변화보다 농업혁명을 통한 시초자본의 형성과 이의 증폭이 월러스틴의 주요 관점이다. 이 점에서 19세기 이후 영국의 헤게모니는 주변부의 확장을 통해 체제를 공고화한다.


 산업혁명 및 인구혁명에 덧붙여서 우리는 이제 농업혁명을 설명하고 그것의 위치를 찾아내라는 요구를 받는다. 이것은 이제 큰 주제가 되었다. 먼저 우리는 영국에서조차 그리고 심지어 19세기 전반기 내내 "농업이 제1의...... 산업"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경제혁명이 일어났다는 관념이 의미를 가지려면 그리고 특히 농업혁명이 있었다는 관념이 의미를 가지려면 어느 곳에선가 그리고 어떤 경제단위 전체에서 생산량의 증가가 있었어야만 한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 p25 


 이 책의 중심 테제는 예컨대 축적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라는 형태의 점증적이고 연쇄적인 변화가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탄생한 16세기 이후로 줄곧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중심 모티브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17세기의 장기적 침체가 이러한 점증적 과정의 중단이기는 커녕 그것의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고 분명하게 주장해왔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 p40


 결국, 근대세계체제의 핵심 요인은 분업(分業)과 독점(獨占)이다. 시장지배력이 없는 완전경쟁시장은 구조적으로 이윤을 발생시키지 않기에 축적을 가능케 하는 시스템없이는 팽창을 위한 동력을 획득할 수 없음을 우리는 재차 확인할 수 있다. 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의 차액지대(差額地代)론에서 표현되듯 한계지를 찾아 끊임없이 주변부로 확장해가는 시스템의 재배치는 19세기에 더 많은 세계를 주변부로 편입시켰다.


 우리는 그와 같은 체제가 유지되려면 몇 가지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우선, 기축적 노동 분업이 존재해야 한다. 즉 이윤은 낮은데 경쟁은 매우 치열한 (즉 주변부의) 필수품들과 이윤이 높고 준독점화된 (즉 중심부의) 상품들 간의 지속적인 교환 같은 것이다. 기업가들로 하여금 그 체제 내에서 성공적으로 일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효력(힘)의 정도가 서로 다른 의사주권 국가들로 구성된 국가간체제가 추가적으로 존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새로운 준독점적 이윤 창출 기업들의 항구적인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주기적 메커니즘들이 또한 필요하다. 그 결과로 그 체제의 특권적 중심들의 매우 느리지만 끊임없는 지리적 재배치가 생겨난다. 이 모든 것이  근대세계체제에서 발생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 서문


 자본주의는 끝없는 자본 축적이 존재 이유인 체제이다.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서 생산자는 그들의 활동으로부터 이윤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진정 상당한 이윤은 생산자가 오직 생산비용보다 훨씬 더 비싼 값에 생산물을 팔 때에만 획득이 가능하다. 완전경쟁 상황에서 상당한 이윤을 만드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상당한 이윤을 획득하려면 세계경제 권력의 독점 또는 적어도 유사 독점이 필요하다. 독점이 있는 곳에서 판매자는 수요로 인한 탄력성을 넘어서지 않는 한 어떤 가격이든 요구할 수 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 서문


 <근대세계체제 3>의 마지막은 영국의 헤게모니가 인도와 중국을 주변부로 편입시키고, 프랑스의 혁명 사상이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 영향을 미치며 해당 지역이 에스파냐, 포르투갈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이루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물론, 이러한 정치적 독립이 경제적으로 '주변부'라는 역할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정치적 행위는 영국의 헤게모니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미국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이제 네덜란드, 영국의 헤게모니를 이을 새로운 강국 미국이 다음 권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할 것이다...


 (대략) 1733-1817년 시기의 경제팽창(그리고 통화인플레이션)의 재개과정에서 유럽 세계경제는 장기 16세기에 자신이 만들어놓았던 경계들을 깨버리고 새로운 거대 지역권들을 자신이 포괄하고 있는 효율적인 노동분업 속으로 병합하기 시작했다. 이는 16세기 이래 이미 유럽세계경제의 외곽지대(external arena)에 놓여 있었던 지역권들 - 인도 아시아 대륙,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그리고 서아프리카 - 을 병합함으로써 시작된 것이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 p197


  (나폴레옹) 전쟁의 종료와 함께 영국은 세계체제에서 마침내 진정한 헤게모니를 쥐었다. 그것은  일련의 해상기지를 확보함으로써 영국의 세계권력을 공고하게 만들었는데, 이 해상기지들은 영국이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들과 합쳐져서 영국으로 하여금 이제 지구를 전략적으로 둘러싸게 했다... 더욱이 영국은 전쟁과정에서 네덜란드의 이전 헤게모니의 마지막 흔적인 유럽의 금융 중심지로서의 네덜란드의 역할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상업 및 금융 지배를 통해서 영국은 이제 통계에 잡히지 않는 대규모의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영국의 수출무역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존재했던 지속적이고 심지어는 팽창하는 무역적자를 상쇄하기에 충분했다. 그리하여 영국은 국제수지 흑자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 p187 


 세계경제로의 병합은 필연적으로 정치구조들이 국가간 체제에 삽입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 지역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국가들"이 "국가간 체제 내의 국가들"로 스스로를 변화시키든가, 아니면 그러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새로운 정치구조에 의해서 대체되든가, 아니면 이미 국가간 체제 내에 속한 다른 국가들에 흡수되든가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합된 노동분업의 원만한 작동은 상품, 화폐,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정상적으로 유통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일정한 보장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 p260


 신생 미국은 단지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진 아메리카 대륙의 새 열강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이주민 독립의 상징이기도 했다. 미국은 공화주의의 원칙을 지지했다.(p354)... 미국이 이주민 독립의 모델로 자신을 드러내고 또 그렇게 여겨지는 한, 장기적인 측면에서 세계체제에 더 중요했던 것은 미국이 이 시기에 자유로운 인간과 평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갔는가 하는 것이었다.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문제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둘러싸고는 제기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영역 바깥에 존재했다. 이주민들은 인디언들을 그들의 땅에서 소개시키려고 했지 그들을 노동력으로 자신들의 경제활동 속으로 병합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대개가 노예였던 흑인들은 그 영역 바깥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생산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실상의 중심 부분이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 p355

자본주의 세계에서 귀족의 자리를 차지한 대(大)부르주아지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신봉한 것이 아니라 이윤을 신봉했다. 재능 있는 자에게 열려 있는 성공의 기회, 보편적인 진리, 도덕적인 지상 명령은 무엇보다도 좁은 의미의 이데올로기적 테마들이다. 그것들은 자본의 최대한의 축적과 상충될 경우에는 언제나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고 포기되는, 도구적이며 주의를 딴 데로 쏠리게 만드는 신조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또한 자본주의적 과정의 구조적인 종착점, 즉 모든 이익이 과거의 지위에서보다는 경제구조 안에서의 현재의 지위에서 도출될, 상층계급들의 최종적인 부르주아화를 반영한다. - P84

핵심부 국가들의 견지에서 볼 때, 장기 17세기의 주요 성취는 이러한 국가들의 자본가들이 얻을 수 있을 만큼의 이윤을 독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주요 장애물은 전반적인 수요의 제한이었으며, 그 징후의 하나가 인구 증가의 정체였다. 세계경제 전역에 걸친 주변 생산자들의 제거와 (일차적으로 핵심부에서)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소득의 재분배는 새로운 팽창기의 토대를 이루었는데, 이것은 18세기 전반기의 어느 시점부터 시작되어 순이익을 남긴 혼란의 시기인 1792-1815년의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기에 절정에 달했다. - P93

영국의 이점은 1763년에 획득된 지위로부터 나온 셈이었다. 우리가 "[프랑스와 영국 간의 재개된] 전쟁 직전인 1792년의 실질적인 붐"에서 절정에 달한 1780년대 영국의 공업발전의 행복한 10년을 프랑스의 불행한 "혁명 전"과 비교할 때, 우리는 이것을 매우 달랐던 국가재정 상황이라는 맥락 안에 넣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재정적, 회계적 차이가 폭발을 초래하고 그래서 프랑스와 영국 간의 차이의 결과적인 엄청난 증폭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이러한 차이는 단지 "일시적인 골칫거리"였을지도 모른다. - P131

프랑스 혁명의 중심성은 세계경제의 헤게모니에 대한 프랑스와 영국 간 투쟁의 중심성의 한 결과이다. 프랑스 혁명은 이 투쟁에서 프랑스의 임박한 패배감에 뒤이어 그리고 그것의 한 결과로 일어났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은 헤게모니 투쟁에서 패배했던 바로 그 나라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그것이 미쳤던 바와 같은 영향을 세계체제에 미쳤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의 승리의 물결을 뒤집어 엎으리라고 기대했던 프랑스 혁명은 반대로 지속적인 영국의 승리를 확인시켜주는 데에 결정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지정학적, 지경학적(地經學的) 패배 때문에, 프랑스 혁명가들은 실제로 그들의 장기적인 이데올로기적 목표들을 달성했다. - P146

좀더 강력한 국가의 생존이란, 무역망을 유지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p204)... 무역 과정 자체가 각각의 국가기구들을 강화시킬 수도 있었다. 그 결과 세계경제의 외곽지대에서 몇몇 국가들의 힘이 커지자 유럽 세계경제의 권력담지자들은 병합에 대한 이러한 "독점적" 장벽을 깨기 위해서 외곽지대와의 관계에 더 많은 무력을 투입하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세계경제의 외곽지대에 있는 국가들은 일단 힘이 계속 강력해지다가 결국에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어갔다. - P205

18세기 말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전지구적 팽창기였다. 특정 지역에서 나오는 각 생산은 단지 전체 중 작은 비율일 뿐이었다. 전체 경제는 두드러지게 높은 수익을 보였으며 실제로 상당한 자본 축적에 이르게 되었다. 그 자본 축적은 우리가 이미 논의한 이유들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프랑스나 서유럽의 다른 지역들보다 영국에서 더 집중되었다. - P221

18세기 말의 대혁명들 - 이른바 산업혁명, 프랑스 혁명, 아메리카 대륙의 이주민 독립 - 중 어느 것도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것들은 그 체제의 계속적인 공고화와 견고화를 보여주었다. 민중세력은 억압당했고 그들의 잠재력은 사실상 정치적 변화들에 의해서 억제되었다. -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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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 자본주의 체제를 규정하는 핵심요소는 그것이 끝없는 자본 축적의 추진력에 의거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문화적 가치가 아니라  일종의  구조적 필요조건이다. 이 말은, 그 논리에  따라서  움직이는 이들에게는 중기적 차원에서  보상을 해주지만 그것과는 다른 논리들에 따라서 움직이기를 고집하는 이들에게는 (물질적으로)징벌을 가하는 메커니즘들이 체제 내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와 같은 체제가 유지되려면 몇 가지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우선, 기축적 노동 분업이 존재해야 한다. 즉 이윤은 낮은데 경쟁은 매우 치열한(즉 주변부의 필수품들과 이윤이 높고 준독점화된 (즉 중심부의) 상품들 간의지속적인 교환 같은 것이다. 기업가들로 하여금 그 체제 내에서 성공적으로일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효력(힘)의 정도가 서로 다른 의사주권 국가들로 구성된 국가간체제가 추가적으로 존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새로운 준독점적 이윤 창출 기업들의 항구적인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주기적 메커니즘들이 또한필요하다. 그 결과로 그 체제의 특권적 중심들의 매우 느리지만 끊임없는 지리적 재배치가 생겨난다. 이 모든 것이  근대세계체제에서 발생했다. 

그래서 나는 서로에게 외부인 두 지역들의 "평등" 교환과 자본주의 세계정제 내에서의 "불평등" 교환이 결정적인 이론적 차이를 만든다는 느낌을 지을수 없다. 바로 그와 같은 작동 양식 때문에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고도의 양극화체제이다. 그것이 이 체제의 가장 부정적인 특징이며, 장기적으로는 이 체제의 치명적 결함들 중의 하나이다.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는 장기의 16세기 이전에 존재했던 종류의 체제들과도 매우 다르다. 이 기본적인 현실을 놓치는 것은 분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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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세계체제 2 - 중상주의와 유럽 세계경제의 공고화 1600-1750년, 제2판 근대세계체제 2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유재건 외 옮김 / 까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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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서 개진한 두 번째 새롭고 중요한 주제는 헤게모니(hegemony)라는 것이다... 내 논지의 논리는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다. 중세의 장기적 흐름과 근대초의 장기적 흐름 사이에 모종의 기본적인 유사성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그 둘 모두를 팽창하는 A국면과 수축하는 B국면을 가진 장기적 흐름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지만 둘을 주의 깊게 비교하면, 둘 사이에 어떤 중요한 질적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장기적 흐름의 기본적 유형은 적어도 인구와 경제활동 그리고 물가의 세가지 중첩되는 팽창과 수축을 포함한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서문.


 헤게모니란 드문 상황으로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역사를 통틀어서 헤게모니 국가는 홀란트, 영국, 미국 뿐이며 더욱이 이들 나라가 그 위치를 유지했던 기간도 비교적 짧았다. 특히 홀란트는 그 시대의 군사적 거인이 아니었던 만큼 헤게모니 국가라는 것이 그럴싸해 보이지 않는다. 헤게모니는 핵심부 지위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핵심부 국가의 생산효율이 아주 높아져서 그 나라의 생산물이 대체로 다른 핵심부 국가들에서까지 경쟁력이 있는 상황, 그래서 그 핵심부 국가가 최대한 자유로운 세계시장에서 가장 큰 이익을 누릴 상황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63


 이매뉴얼 월러스틴 (Immanuel Wallerstein, 1930~2019)의 <근대세계체제 2 The Modern World-system>의 시대적 배경은 17세기와 18세기 중반의 유럽을 배경으로 한다. 1권에서 자본주의적 농업의 시작으로 이윤이 축적되고 이를 바탕으로 대외팽창(특히 아메리카 지역)이 이루어졌다면, 이어지는 17세기에서는 이러한 팽창이 본격화된다. 이 시기가 이전과 구분되는 점은 헤게모니(패권 覇權)이다. 이전 시대의 패권국인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합스부르크 제국(Habsburgerreich)의 일부로 전성기에 프랑스와 잉글랜드, 러시아, 이탈리아 일부 지역 등을 제외한 거의 전역을 장악했기에, 경제적 패권을 장악한 세력은 등장하지 못했지만, 2권이 배경이 된 시기에 이르면서 양상이 달라지게 되었다.  


 사회경제적 위기가 귀족계급을 크게 약화시켰으므로 1250년에서 1450년 또는 1500년까지 농민들은 꾸준히 자기들의 경제 잉여의 몫을 늘려가고 있었다. 이것은 동서를 막론하고 유럽 전역에 걸쳐 공통된 현상이었다. 상층계급에게 진짜 위기이자 직면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는 "연소"의 선행조건 따위가 아니라 하층민들의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인한 소득의 상대적 평등화 추세였다. 이제 격렬한 사회적 변화말고는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잇는 길이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그 길이란 바로 잉여 수탈의 새로운 형태인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봉건전 양식을 자본주의적 양식으로 바꾸는 것이 영주 반동의 실체였던 것이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54


 근대세계에서 자본주의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첫 번째 국가는 네던란드였다. 카를 5세( Karl V, 1500~1558)의 합스부르크 제국 전역에서 신교도들이 저지대 연합국으로 몰려들면서 높아진 인구밀도는 이 나라의 생산양식을 자본주의적으로 빠르게 변모시켰다. 농지 확보를 위한 풍차의 개발, 청어잡이를 위한 조선업의 발달은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적 농어업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이와 함께 상업, 조선업, 금융업의 발달이 동반되면서 네덜란드는 17세기 핵심부에서도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다.


 네덜란드의 높은 생산효율은 먼저 역사상 가장 오래된 형태의 식량 생산 형태인 채집경제에서 이루어졌으니 즉 물고기의 채집, 특히 "네덜란드의 금광"이라고도 불렸던 절임용 청어잡이 어업(그것만은 아니지만)으로 이룩되었다(p64)... 네덜란드인들의 농업은 지질학적으로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약점은 두 가지 방식에 의해서 강점으로 바뀌었다. 먼저 토지를 만들기(간척하기) 위해서 물을 퍼올려야 했는데 이 바람에 풍차가 발명되고 공학이 발전했으며 그래서 홀란트는 여러모로 "목제기계 시대의 중심"이 되었다... 척박한 자연조건이 낳은 두번째 결과는 한층 더 중요했다. 즉 어쩔 수 없이 네덜란드인들은 집약적 농업으로 나아갈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최초로는 그 이전의 불황과 곡물 가격 저하가 새로운 집약적 농업의 창안에 이르게 된 1300년 무렵에, 그뒤에는 집약적 농업이 더 크게 팽창한 1620년에서 1750년 사이에 일어났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66


 네덜란드의 상업적 우위의 이유는 이미 획득한 농-공업의 높은 생산효율과 관련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이러한 높은 효율은 주로 배삯, 보험비용, 일반적인 경상비를 통해서 상업상의 효율로도 옮겨갔다. 네덜란드의 배삯은 왜 그렇게 쌌을까? 가장 큰 요인은 선박 건조비가 적게 들었다는 점이었다. 페리는 비용절감의 이점을 여섯 가지로 꼽았다. 즉 네덜란드 선박 목공의 기술, 재료 사용의 경제성, 노동절감형 기계, 대규모 표준 규격 생산, 대규모 재료 구입, 네덜란드 배를 통한 건설자재의 값싼 수송이 그것이다(p88)... "[네덜란드] 무역의 기초가 해운이었다"면 가장 큰 이익은 거대한 암스테르담 화물집산지에서의 판매 및 거래에서 왔으며 그 성공은 네덜란드 상업조직의 형태가 뛰어난 덕분이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89


 네덜란드가 융성한 17세기는 기본적으로 유럽경제의 수축기였다. 30년 전쟁(1618~1648)에서 보여지듯 유럽 전역이 신구교의 대립으로 최초의 국제전이 독일 지방에서 일어난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으며,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국력이 내리막길에 들어섰기에 신흥강국  네덜란드의 패권에 도전장을 내밀 수 있는 국가는 많지 않았다. 유럽 전체의 인구는 감소하던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인구밀도와 앞선 산업생산력을 갖춘 네덜란드 북아메리카 지역과 인도네시아, 대만을 주변부로 하여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뒤를 이은 제국을 건설하게 된 것은 당시 유럽의 정세에 비추어 보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렇지만, 17세기 중반 이후 30년 전쟁이 종결되며 종교문제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며, '영토형 절대주의 국가'가 등장한 시기에 핵심부에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와 국토를 갖춘 네덜란드의 패권은 위협받게 되었다. 


 유럽 전역에서 1650년 이후 반세기는 인구가 감소하거나 보합세를 유지하여 전체적으로는 정체상태였던 시대였지만, 17세기 말에 인구는 다시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의심할 나위 없이 이는 30년전쟁의 참화, 일부 지역에서 지역적인 식량 부족으로 이어진 생태적 압박(그 결과 전염병의 유행) 그리고 세계경제 전체에서 과잉생산에 의한 곡물 가격의 세계적인 하락이 한데 어우러졌기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설명하는 데에 가장 정확한 것은 지역적인 편차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17세기 초에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 (플랑드르에서 북부 이탈리아에 이르는) 유럽의 구(舊) 등뼈 지역과 유럽 세계경제의 새로운 핵심부 지역(네덜란드 연합주 서부, 잉글랜드 남동부, 프랑스 북동부와 서부)에 주로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116    


17세기가 지나면서 농-공업 부문이 우위를 잃자 그 부문 쪽에서 관세를 요구한 적도 있었고(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영국 및 프랑스와 경쟁하면서 연합주 의회가 보복관세를 설정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국가의 역할은 보호주의 아닌 문제들에서 뚜렷했다. 국가의 역할은 사기업(私企業)의 성공조건을 만들어냈다(p96)... 네덜란드 국가는 자기 나라 기업가의 이익을 옹호했지만 그렇게 하는 데에 이데올로기적 일관성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네덜란드 헤게모니의 이데올로기는 해양자유론(mare liberum)이라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휴전협정이 맺어진 1609년에 출간된 책에서 그로티우스가 줄기차게 주장한 것이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97


 앤더슨에 의하면, "절대주의란 본질적으로...... 재정비되고 재충전된 봉건적 지배기구였다. 그것은 널리 퍼진 지대금납화로 농민 대중이 획득한 이익들을 무효화시키려고 농민 대중을 그들의 전통적인 사회적 지위에 되돌려 묶어두려는 것이었다."... 핵심적 요소는 국가가 얼마나 강했느냐이지 정부형태가 얼마나 절대적이었느냐가 아니다. 17세기에 가장 강한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지배한 국가들이었다. 이 점에서 연합주(네덜란드)가 첫째였고, 영국이 그 다음이었고, 프랑스는 고작 세번째였다. 영국 혁명은 영국의 국가를 강화시켰다. 이에 반해서 "짐이 곧 국가이다"라는 루이 14세의 주장은 국가의 상대적 약체성의 표지였다. 17세기의 수축은 체제의 위기가 아니었다. 정반대로 그것은 체제의 공고화 기간이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57


 그 결과 17세기 이후 네덜란드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지만, 네덜란드 제국은 이전 제국인 에스파냐와 포르투갈과 두 가지 면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첫째, 주변부를 금은의 산지가 아닌 사탕수수 재배 등 농산물의 산지로 활용했다는 점과 둘째, 은행과 회사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해외산물과 금은 등의 수입에 치중했기에 그들의 위치가 핵심부에 서지 못하고 주변부와 핵심부를 중개하는 역할에 그쳤던 반면, 네덜란드의 정책은 스스로를 핵심부에 위치시키고 나아가 헤게모니를 장악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단지 1621년 서인도회사가 세워진 후 네덜란드인들이 다음 사반세기 동안 대서양으로의 팽창을 꾀했던 것이었다... 세계경제에서 네덜란드의 헤게모니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이 짧은 기간에 과연 무엇이 이룩되었을까? 첫째로 네덜란드인들은 남북아메리카에서 에스파냐를 몰아내면서 "해군 방패막"을 제공했는데 그 덕분에 스코틀랜드인을 포함한 영국인과 프랑스인이 정착 식민지를 건설했다. 둘째로 남북 아메리카에서 사탕수수 재배를 시작한 것은 브라질이었는데 네덜란드인들이 브라질에서 쫓겨나자 바베이도스 점으로 그 재배가 옮아갔고 이 섬은 영국령 카리브 해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플랜테이션 식민지가 되었다. 셋째로 네덜란드인들을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인력을 대기 위해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노예무역에 손을 댔다. 플랜테이션을 잃을 후에도 네덜란드인들은 노예무역에 손을 댔다. 플랜테이션을 잃은 후에도 네덜란드인들은 노예무역 상인으로 이 지역에 남으려고 했지만 1675년이 되면 네덜란드의 우위가 끝나고 새로 설립된 영국 왕립 아프리카 회사에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83


 유럽의 구 등뼈 지역은 일찍부터 은행조직들을 발전시켜왔다. 17세기에는 홀란트가 선례에 따랐는데, 이는 홀란트 헤게모니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17세기 말에 프랑스보다 영국이 이러한 경로에 이를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두 가지 생각을 나란히 제시해보고자 한다. 첫째, 유럽 세계경제 내에서 세 가지 화폐용 금속의 사회적 용도는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즉 금은 국제결제와 국가적 사업 그리고 퇴장용으로 쓰이고, 은은 대규모 국내 상업용으로 쓰이며, 동은 가계 및 소규모 상업용으로 쓰인다... 두번째 생각은 동화의 역할, 아니 오히려 "세기의 악몽"이라고까지 하는 동화의 급증과 관련이 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172


 네덜란드가 선취한 자본주의 제국의 길은 그 뒤를 이은 영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사실 영국 이전의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이기고 네덜란드의 헤게모니를 계승할 가능성은 여러모로 희박해 보였다. 그렇지만, 레콩키스타(Reconquista)를 거치며 이베리아 반도의 유대인들과 신성로마제국과 에스파냐 지역의 신교도들, 프랑스의 위그노들이 모여들면서 네덜란드에 집중된 자본(資本)은 이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결합과 직물산업으로 대표되는 경제적 결합, 비(非)가톨릭지역이라는 종교적 이점 등으로 인해 신흥강국 영국으로 투자처를 옮기게 되고, 헤게모니 역시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된다. 


 우리는 영국을 프랑스보다 더 더 강하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질문으로 되돌아가야한다. 가장 간단한 대답은 그것이 1689-1714년 시기의 전쟁들에서 프랑스를 저지할 수 있었던 영국의 군사적 능력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러한 전쟁들에서 이길 수 있엇던 것은 영국과 네덜란드 간에 맺어진 동맹의 결과였는데, 이 동맹은 네덜란드의 군사적 원조 때문이 아니라 네덜란드인이 투자를 통해서 영국 국가에 제공한 재정적 뒷받침 때문에 이루어졌다. 네덜란드인과 맺은 관계는 영국의 신용을 높혔고, 이로 인해서 잉글랜드 은행의 창설이 가능했으며 나아가 잉글랜드 은행이 남해 거품 사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스튜어트 왕조 초기에 시작되었고 1689-1715년 시기의 첨예한 토리-휘그 투쟁에서 다른 형태로 계속된 영국 통치계급 내의 분열이 마침내 월폴 일당국가에서 해결될 수 있었다. 영국이 강력해지고 나아가 영국 기업가가 경제세계를 정복하게 된 것은 영국이 프랑스보다 더 민주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영국이 더 민주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434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 2>는 네덜란드의 자본의 이동과 금융제도의 영국이식을 영국이 프랑스를 물리치고 다음 세기의 패권을 장악한 핵심 요인으로 파악한다. 일례로 1907년 네덜란드와 영국의 합작기업인 로열 더치 쉘(Royal Dutch Shell)이 오늘날에도 석유 메이저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보듯  네덜란드-영국의 결합은 매우 긴밀했다. 이 결합이 이후 영국-미국의 결합의 전신으로 발전되었다고 파악한다면, 결국 오늘날 헤게모니 체제의 근간이 이미 17세기로부터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 사이 중심산업과 헤게모니 국가는 바뀌어도, 체제의 근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근대세계체제 2>의 배경이 되는 시대가 사실상 자본주의의 성격을 확정시켰음을 알게 된다. 뒤이은 <근대세계체제 3>에서는 팽창기의 영국 헤게모니를 확인하게 되는데, 이는 다음 리뷰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1600-1750년의 시기는 우선 네덜란드의 헤게모니를 파괴하고 다음으로 그 최고의 자리를 이어받기 위한 영국과 프랑스의 노력으로 특징지어졌다. 이 장기적인 상대적(즉 잘 알려진 장기 16세기의 경제적 확장에 비하여 상대적) 불황기에, 주변부 지역들에서는 직접생산자들에 대한 착취가 크게 심화되었고 토착 착취층의 이익은 줄어들었다(즉 핵심부 국가들의 같은 착취층이 얻은 이익에 비하여 줄어들었다). 반주변부 국가들은 훨씬 더 복잡한 모습을 보였다. 핵심부 국가들은 반주변부 국가들을 주변부와의 중개지로, 즉 잉여가치의 전달장치로 삼으려고 했다. 그것은 대부분 성공했지만, 핵심부간의 대규모 경쟁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일부 지역들은 자신의 상대적 지위를 개선할 수 있었다. 이것이 처음에는 스웨덴의 경우였고 뒤에는 브란데부르크-프로이센의 경우였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366


 네덜란드 은행들은 여전히 다른 은행들이 자신들의 금은을 맡길 수 있는 확실한 보관장소였고, 화폐주조율도 18세기 동안 계속해서 상승했다. 1763년 이후에야 세계 금융 중심지로서의 암스테르담에 대한 유럽의 신뢰가 흔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18세기로의 전환기에 네덜란드인들은 그들의 자금을 가장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곳으로 옮기고 있었고, 그곳이 바로 영국이었다. 그것은 "노골적인 상거래"였는데, 그 속에서 네덜란드인 투자자들은 높은 수익을 얻은 대신 영국 국가가 자신의 대부비용을 줄이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427


 앤 여왕의 치세기였던 1689-1714년의 전쟁기에, 영국인들은 장기 공공대부 제도를 창설하고 그리하여 공채제도를 설립하는 획기적 조치를 취했다. 이것은 국가를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드는 안정된 재정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1694년에는 잉글랜드 은행이 설립되었다. 그에 더하여 이 시기에 재편된 동인도회사가 세워졌고 남해회사가 새로 설립되었다. 이들 세 회사는 모두 국가에 대한 장기 대부를 해준 대가로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 세 회사의 대부금은 "유동공채를 정리국채로 전환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423

이 책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근대 세계체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라는 형태를 띠며 이 세계경제는 장기 16세기 유럽에 그 기원을 둔 것으로 여기에는 봉건 유럽의 특정한 재분배적 혹은 공납적 생산양식으로부터 질적으로 다른 사회체제로의 전환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1) 지리적으로 지구 전체를 뒤덮게 팽창하며 (2) 팽창과 수축의 주기적 유형을 나타내고, 경제적 역할을 맡는 지역이 지리적으로 이동한다는 것 그리고 (3) 기술의 진보, 공업화, 프롤레타리아트화, 체제에 대한 정치적 저항의 구조화 등 지금도 진행 중인 장기적인 이행과정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 P21

토폴스키에 따르면 17세기의 수축은 체제 전반에서 "불균형의 증대"에 있었다. 불균형의 증대란 수축에 대립된 어떤 것이 아니다. 수축의 시대에 불균형은 사실상 자본주의의 주요 메커니즘의 하나이자 자본의 집중과 축적의 증대를 가져오는 한 요인이었던 것이다. 빌라르의 다음 설명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 "전반적 상황이 어떻게 되든 각기 다른 나라들은 각기 다르게 대응하게 되며 거기서 불균등 발전이 생기고 결국 그것이 역사를 만들어간다." - P36

1600년에서 1750년 사이의 기간이 이 세계경제의 한 가지 결정적인 과정을 지속시키고 심화시켰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브로델과 스푸너의 조사가 보여주듯이 유럽의 기본적인 3대 물가권역 사이에 불가의 격차는 차츰 사라져갔다... 상인 자본주의는 물가 평준화의 진전과 교류 채널의 창출에 기여했으며 나아가 이를 통해서 조건이 더 나은 곳을 찾아다니도록 관심을 돌리는 데에도 기여했다. 바로 이 점이 핵심이다.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진행된 하나의 자본주의적 과정이 공업의 도약을 가능하게 했으며 물가의 평준화는 이 과정의 본질적인 일부였던 것이다. - P49

자본주의 세계경제 내의 계급투쟁들은 복잡해서 다양한 겉모습을 띠고 비틀어져 나타난다. 한 헤게모니 국가가 지배적 위치에 서기까지의 시대는 국가 내부가 주목받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시장에서 계급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전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국내의 정치적 제약을 쓸어버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헤게모니가 쇠퇴하는 시대는 국가간 형태에 주목하게 되는데 이는 시장에서 계급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전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국가간 정치적 제약을 쓸어버려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 P112

하강의 시기는 훨씬 더 복잡하다. 우선, 그 시기는 훨씬 더 뚜렷하게 불균등하다. 후퇴, 정체, 위축, 불경기의 시기이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불경기인 것은 아니다. 세계경제를 전체로 볼 때 총생산은 총가치로 보나 일인당 생산량으로 보나 일정 수준을 유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일부 지역에서 생산량으로 보나 일정 수준을 유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일부 지역에서 생산량 혹은 생산성 혹은 그 양자가 증가한 것이 다른 지역의 하락으로 상쇄된 결과이다. 피고용자들의 실질임금이 상승할 수도 있으나 실업률도 같이 증가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강조해야 할 점은 하강이 활동의 둔화이지 정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볼 때 그것은 이윤 추구를 가로막는 일련의 걸림돌이 되어서 말하자면 염소 무리에서 자본가라는 양을 솎아낸다. 강한 것은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곧잘 번영한다. - P196

경제의 경기후퇴, 토지와 노동력에 대한 압력의 증가, 토지와 노동의 집중과 상품화의 심화 등은 모두 실제로 동유럽에서처럼 남유럽에서도 나란히 진행되었다. 이제 "17세기의 불황"이 오랫동안 주된 논쟁거리였던 에스파냐령 아메리카로 눈을 돌려보자. 세계경제의 이 주변부에서 가장 중요한 농업제도인 아시엔다(hacienda)의 등장을 먼저 살펴보자(p221)... 16세기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주요 수출품인 은은 1590년에서 1630년까지의 시기에는 고원현상을 보였고 그뒤 수치는 갑자기 뚝 떨어졌다(p224)... 이른바 자급자족적인 대규모 아시엔다는 바로 시장의 힘에 민감하게 적용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었다. 그것은 이윤율의 변동에 따라서 생산을 줄이거나 늘릴 수 있었고 자원 이용의 속도를 빠르게 하거나 늦출 수 있어서 장기간에 걸쳐 농업생산과 세계경제의 연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시엔다는 새로운 직물 생산의 거점이었다. - P234

토지집중화 경향을 안정되게 유지하는 데에 중심적이었던 것은 장기적으로 지속된 낮은 곡물 가격이었다. 1600-1750년의 시기 전체 동안에 곡물 경기가 좋았던 해는 거의 없었다. 낮은 곡물 가격이라는 불행은 영국의 경우에는 그것이 농업혁신으로 이어졌기에 사실상 행운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주목할 만한 것은 영국이 유럽의 주된 곡물 수출국이 된 것이 바로 곡물 가격이 가장 낮았을 때인 18세기 초반이었다는 점이다. 그에 대한 가장 명료한 설명은 1688년에 영국 정부가 곡물 수출을 장려하기 위해서 제정한 곡물보조금법이 농업 확장에 "대체로 유리한" 조건을 창출해다는 것이다. - 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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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3-28 23: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근대세계체제 이론도 결국 세계 ‘분업’ 이론인 것으로 기억됩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22-03-29 06:42   좋아요 2 | URL
저 역시 동감합니다. 다만 핵심부의 의지에 따라 주변부에 분업의 내용과 역할이 강제된다는 점이 자발적인 분업과 다른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북다이제스터 2022-03-29 21:06   좋아요 1 | URL
저도 사회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분업’ 중인데요, 그런데 자발적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ㅠㅠ

겨울호랑이 2022-03-29 21:10   좋아요 1 | URL
^^:) 사실 직장에서 하는 업무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만... 직장 그만둔다고 해서 정치적, 경제적 억압이 들어오는 경우는 없기에, (울며 겨자먹기식이긴 합니다만) 자발적인 분업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ㅜㅜ
 

헤게모니란 드문 상황으로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역사를 통틀어서 헤게모니 국가는 홀란트, 영국, 미국뿐이며 더욱이 이들 나라가 그 위치를 유지했던 기간도 비교적잡았다. 특히 홀란트는 그 시대의 군사적 거인이 아니었던 만큼 헤게모니 국가라는것이 그럴싸해 보이지 않는다. 헤게모니는 핵심부 지위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핵심부 국가의 생산효율이 아주 높아져서 그 나라의 생산물이 대체로 다른 핵심부 국가들에서까지 경쟁력이 있는 상황, 그래서 그 맥심부 국가가 최대한 자유로운세계시장에서 가장 큰 이익을 누릴 상황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 P63

이러한 우위는 차례로 이루어지지만 서로 겹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우위를 잃을때도 같은 순서대로 먼저 (생산, 이어서 상업, 마지막으로 금융) 거의 차례로 잃게 된다. 따라서 특정한 핵심부 국가가 생산, 상업, 금융 모두에서 동시에 다른 모든 핵심부 국가들에 대하여 우위에 있는 상태는 극히 잡을 수밖에 없다. 이 일시적인 최정상의 상태가 바로 우리가 헤게모니라고 일컫는 것이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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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세계체제 1 - 자본주의적 농업과 16세기 유럽 세계경제의 기원, 제2판 근대세계체제 1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나종일 외 옮김 / 까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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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세계의 징표는 그 안에서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자들의 상상력과 억압받는 자들의 단호한 반대이다. 착취 그리고 착취를 불가피하거나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대한 거부는 근대의 끊임없는 모순을 이루고 있는데, 이 둘은 20세기에도 그 절정에 도달하기는  까마득한 하나의 변증법 속에 서로 결합되어 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545


 이매뉴얼 월러스틴 (Immanuel Wallerstein, 1930~2019)의 <근대세계체제 1 The Modern World-system>은 경제사(經濟史)의 관점에서 근대세계사를 조망한 책이다. 중세 말부터 시작해서 20세기 초반까지 다루는 <근대세계체제>의 전체를 통해 우리는 군주, 영주, 부르주아지 등의 개별 주체들이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한 경제적 행위들이 도시국가, 왕국, 제국의 체제를 변경시켰는가, 그 결과로 핵심부와 주변부의 이동과 이들의 관계를 역사의 흐름 속에서 파악하게 된다. <근대세계체제 1>은 그 시작이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유럽 세계경제(European world-economy)라 할 만한 것이 생겨났다. 그것은 제국은 아니었지만 대제국만큼이나 넓었으며 제국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제국과는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 그것은 이전의 세계에서는 실로 찾아볼 수 없는 일종의 사회체제였으며, 바로 이 점이 근대 세계체제(modern world-system)의 뚜렷한 특징이었다. 그것은 제국, 도시국가, 민족국가 등과 달리 경제적 실체이지 정치적 실체가 아니다. 사실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그 범위 안에 제국들, 도시국가들 그리고 이제 막 등장하는 "민족국가들"을 담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 체제이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경제"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제국은 하나의 정치적 단위이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33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 1>에서 우리는 제국(帝國 Empire)과 제국주의(帝國主義 Imperialism)을 구분해야 한다. 단순히 여러 나라들의 연합체, 왕중의 왕(king of king)인 황제(皇帝)가 다스리는 나라인 제국과는 달리 근대체제를 형성하는 제국주의는 '핵심부-주변부'의 불평등한 자본주의적 분업(分業)을 의미하기에 이들은  차이가 있다. 


 로마 제국의 골격은 희미한 어떤 기억으로 잔존했으며, 그 기억은 주로 하나의 공통된 교회에 의하여 중세적 현실로 이어졌다. 이와는 달리 중국인들은 비록 약화된 것이기는 했지만 제국의 정치구조를 그럭저럭 유지해나갈 수가 있었다. 이것이 봉건체제와 녹봉제적 관료체제에 입각한 세계제국 사이의 차이였다. 그 결과 중국은 여러 면에서 유럽보다 더 발전된 경제를 유지해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1,000여 년에 걸친 농민 착취가 그만큼 덜했으리라고 짐작되고도 남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차이에다가 또한 좀더 나중에 이 두 지역에서 추진된 농업경영의 차이, 즉 유럽은 가축 사육과 밀 경작 쪽으로, 중국은 쌀 경작 쪽으로 나아간 점을 덧붙여야만 하겠다. 쌀 경작에는 공간이 덜 필요했지만 더 많은 인력을 필요로 했으므로 장기간에 걸친 위기는 두 체제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타격을 주었다. 유럽은 중국보다 지리적으로 팽창하는 것이 더욱 절실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105


 제국의 중심부와 변경에 적용되는 법(法)이 고대제국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게 적용되었다면, 제국주의에서 핵심부와 주변부의 역할(role)은 차별적이었다. 녹봉제적 관료체제에 의해 유지된 고대제국과 자본주의적 관료체제에 의해 유지된 근대 유럽 제국. 이러한 제국주의는 어떻게 출현했는가? 이것이 근대세계체제를 이해하기 위한 첫 출발점이 된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중세말 유럽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과도한 영주의 농민계층 수탈과 착취, 그리고 이어지는 농민반란 여기에 더해 14세기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의 유행은 도시국가로 연결된 중세 유럽의 경제질서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유럽사회가 택한 돌파구는 '팽창'이었다.


 만성적인 과도한 착취와 그 결과로 일어난 반란들 때문에 경제적 침체가 먼저 있었고, 그뒤에 식량 부족과 역병이라는 두 요인에 기후적 요인이 더해졌다고 보는 경우, 사회물리학적 콩종크튀르가 어떻게 "위기"의 정도를 심화시킬 수 있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단 널리 퍼져나간 전염병의 풍토병화가 거꾸로 위기를 심화시켰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땅덩어리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사람 수가 적어지면 그만큼 식량이 많아지는 것을 의미했을 테지만, 이는 목장으로의 전환과 그에 따른 칼로리 산출량의 감소를 또한 의미했다. 이리하여 인구 감소 역시 풍토적 현상이 되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64


 우리는 14-15세기 영주계층의 수입 감소라는 핵심적 문제를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M.M. 포스턴은 수입 감소의 결과 나타난 영국 귀족들의 행동을 "악당행위(ganfsterism)"라고 불렀는데, 말인즉 소득수준의 감소를 메꾸기 위하여 불법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현상이 스웨덴, 덴마크, 독일에서도 나타났다. 이러한 폭력행위의 한 형태가 바로 팽창이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80


 팽창은 두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세금 혜택을 통한 자본 축적과 재투자는 초과이윤을 발생시켰으며, 16세기 합스부르크 제국를 지탱하던 정치적 구조 - 관료제 - 에 의해 이윤을 핵심부로 효과적으로 이전시킬 수 있었고, 이전된 이윤은 축적되고 재투자를 통해 팽창을 위한 동력은 커져갔다.  그렇지만, 그 동력은 한 방향으로 작용한 것이 아니었다. 관료제가 핵심부로 이윤을 이전시키는 구심력이라면, 제국 유지를 위한 군사비 지출은 주변부로 향하는 원심력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구심력과 원심력의 상반된 힘의 작용 속에서 제국의 체제는 팽창해 나갔다.


 제국의 정치적 중앙집권화는 그 강점이자 동시에 약점이었다. 강점이라는 것은 그것이 강압(공납과 과세)을 통해서 그리고 교역의 독점적 이익을 통해서 주변부에서 중심부로의 경제적 흐름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약점은 그 정치적 구조 때문에 필요했던 관료제가 너무나 많은 이윤을 거두어들이게 마련이라는 데에 있었는데, 그것은 특히 억압과 착취가 반란을 부르고 또 이것이 군사적 지출을 증대시켰기 때문이다. 정치적 제국들은 경제적 지배의 원시적 수단이다. 말썽 많은 정치적 상부구조의 "낭비"를 없앰으로써 더 많은 잉여가 하층에서 상층으로,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다수에서 소수로 흘러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기술을 발명한 것이야말로 근대세계가 이룩한 사회적 성과라고 할 만한 것이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34


 인플레이션은 소득의 재분배 - 유럽 세계경제가 여러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복잡한 재분배 - 를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정치적으로 취약한 부문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한 방식이었으며, 자본 축적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이 축적된 자본은 누군가에 의해서 다시 투자될 수 있었다. 특히 지주들은 농민들로부터 돈을 끌어내는 새로운 방식을 줄곧 찾고 있었다. 기억해둬야 할 점인데, 그와 같은 주장은 초과이윤이 존재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인플레이션이 투자를 자극했다는 것이기도 하다.(p134)... 인플레이션은 중요한 요인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강요된 저축, 따라서 자본 축적의 메커니즘이었고, 이러한 이윤을 세계경제 체제를 통해서, 주변부 및 반주변부로부터 우리가 세계경제의 신흥 핵심지역이라고 불러온 곳으로 불균등하게 배분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135


 이같은 상황 속에서 포르투갈이 앞장서고, 에스파냐에 의해 본격화된 제국주의 팽창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는 '관료제', 경제적으로는 '노동분업'을 활용하여 불균등한 팽창을 지속해 나갈 수 있었다. 정치와 경제의 효과적인 결합을 통해 보다 많은 수익을 끌어당길 수 있었기에, 결국 자본주의가 가장 발전한 곳에서 중앙집권화가 잘 되는 결과가 만들어졌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정치와 경제는 한 몸처럼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속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이베리아 반도의 제국들은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1450년 당시에 유럽에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등장을 위한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다른 곳에는 그러한 무대가 없었다. 이 체제는 두 가지 핵심적인 제도, 즉 어느 일정 지역 안에 자리잡은 "세계적" 범위의 분업과 관료제적인 국가기구들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106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범세계적인 노동분업 위에 구축되었는데, 이 노동분업에서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범세계적인 노동분업 위에 구축되었는데, 이 노동분업에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다양한 영역들(핵심부, 반주변부, 주변부)은 특별한 경제적 역할을 떠맡았고, 상이한 계급구조를 발전시켰으며, 그 결과 상이한 노동통제 방식을 발달시켰고, 그 체제의 작동으로부터 불균등하게 이득을 얻었다.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활동은 주로 국가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으며, 국가들은 세계경제 안에서 떠맡은 다양한 역할의 결과로 제각기 상이한 구조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중 핵심부 국가들이 가장 중앙집권화되어 있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249


  <근대세계체제 1>에서 월러스틴은 정치적 범위와 경제적 범위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핵심부-주변부'의 구조 안에서 정치적 권력의 작동은 핵심부 전역과 주변부의 일부로 한정된다. 주변부 외곽에 대한 정치권력의 공백은 끊임없이 자본가들의 진출을 자극하였고, 이로 인해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보다 더 일찍. 더 넓게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연준다. 역사적으로 영국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 East India Company, EIC)의 인도지배가 대영제국 이전에 있었다는 점은 이러한 월러스틴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자본주의란, 경제적 소득은 "개인의" 수중에 나누어 주면서, 경제적 손실은 정치체가 줄곧 감당하는 데 바탕을 두고 있다. 오히려 나의 주장은, 하나의 경제양식으로서의 자본주의는 경제적 요소들이 어느 한 정치체에 의해서 완전히 통제될 수 있는 범위보다 더 넓은 영역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가들에게 구조적으로 뒷받침되는 행동의 자유를 부여한다. 몹시 편중된 그 보수의 분배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세계체제의 부단한 경제적 팽창을 가능케 해왔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533


 자본주의는 세계제국의 구조 안에서는 번영할 수 없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로마에서 출현하지 못한 한 가지 이유이다. 상인들은 단일한 국가구조 안에서보다 새로운 세계경제에서 정치적으로 한층 수월하게 다양한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단일 국가의 지배자들은 다양한 이해관계와 압력에 대응해야만 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비밀이 단일한 민족국가의 구조 안에서보다는 비(非)제국적인 세계경제 구조 안에서의 노동분업의 확립에 있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199


  외부로 팽창하려는 자본가들의 팽창에 대해 에스파냐 제국의 제도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충분한 정치적 시스템의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과도한 팽창은 에스파냐의 광활한 아메리카 식민지 내에서 다양한 이해관계 충돌을 가져왔으며, 이러한 갈등 속에서 체제의 패권은 다른 나라로 넘어가고 말았다.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는 관료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제국의 핵심부로 충분한 힘이 쌓이지 않는 반면, 제국의 주변부는 자본가들에 의해 통제되는 상황에서 제국의 쇠락은 당연한 결말이었다. 


 해외팽창이 교역의 확대로 이윤을 얻게 되는 상인들의 이해관계 그리고 왕위의 영예와 수입을 확보하고자 하는 군주들의 이해관계와 전통적으로 맞물려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베리아인들이 탐험에 나서게 된 최초의 동기가 주로 귀족들의 이해관계, 특히 토지를 가지지 못한 그 악명 높은 "작은 아들들"의 이해관계에서 비롯했으며, 좀더 분별 있는 상인들이 탐험에 열중하게 된 것은 교역망이 일단 작동을 시작한 연후의 일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81


 에스파냐 제국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었을까? 제국이 다르게 구성되어 있었더라면 아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쾨니히스버거가 말하고 있듯이, "에스파냐 제국의 근본적 약점은..... 과세의 기반이 협소했다는 점이다. 카스티야와 은은 제국의 재정을 지원하고 제국을 보호했다 ; 그밖의 영토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모두 방관자들이었다."... 그러나 에스파냐 제국이 다르게 구성되어 있었더라면 그것은 제국이 아니었을 것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인 것이다. 만약 카탈루냐인들이 카스티야인들과 함께 하나의 국가 안에 통합되어 있었더라면 그리고 만약 카를 5세의 제국적 야망이 카스티야를 쇠진시키지 않고, 또 그로 하여금 그 제국의 다른 부분들과 불가피한 이해관계의 갈등, 자멸적이었던 그 갈등을 빚게 하지 않았더라면, 에스파냐는 사실 유럽 세계경제에서 핵심 국가가 될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거꾸로 과잉 팽창은 카를 5세와 그 후계자들을 지쳐버리게 할 따름이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278


 에스파냐는 아메리카에서 거대한 관료기구를 구축할 만한 행정적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제국들의 낡은 방편, 즉 국왕과 에스파냐 정착민들 사이의 중개자로서 지역의 족장들을 그 정치체제에 끌어들이는 편법을 사용했다. 에스파냐는 또 자신의 정착민들을 완전히 통제할 힘을 갖추지 못했다. 그들의 정치적 충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에스파냐는 많은 경제적 양보를 했다. 이런 것들 중 하나는 인디오들이 가축을 기르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그들에게 경제활동의 독립적 기반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었는데, 가축을 기르는 것은 그들이 새로운 자본주의 경제에서 효과적으로 경쟁할 수도 있었을 행위였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289


 효율적으로 운영되지 못한 정치제도(관료제)가 이베리아 반도의 두 제국의 몰락을 가져왔다면, 이로부터 얻어진 교훈은 명백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부르주아지와 정치권력(군주, 귀족)과의 명확한 관계설정이 필요했다. 보다 성공적인 팽창을 위해서는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이익을 일치시킬 필요가 있었고, 이는 혁명(革命 revolution)의 모습으로 네덜란드에서 먼저 출현했다. 이제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시대가 시작된다...


 당시 암스테르담의 성공은 경제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요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을 가능하게 한 정치적 틀은 무엇이었는가? 16세기 후반기는 암스테르담의 부상만이 아니라 이른바 네덜란드 혁명이 일어난 시기인데, 네덜란드 혁명의 시간적, 공간적 범위는 그 사회적 내용만큼이나 그 모습이 불분명하다. 먼저 그것은 혁명이었는가? 그리고 그것이 혁명이었다면 민족혁명이었는가, 부르주아 혁명이었는가? 그리고 이 두 개념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p312)... 나는 혁명의 발발에 대한 열쇠는 많은 "네덜란드" 귀족들이 군주는 자기들의 대변자가 아니며, 군주의 정책들은 중단기적으로 볼 때 그들의 이익을 현저히 해칠 것이고, 군주가 정책을 바꾸도록 설득하는 것은 그들의 정치적 능력 밖의 일이었다는 것을 갑자기 우려하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그들은 "민족주의적" 저항을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314


 투쟁은 자신을 보편적 계급이라고 생각하는 한 계급과 다른 모든 신분 사이의 투쟁으로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 세계체제에서는 사실 이것이 통상적인 상황이었다. 자본가 계급(부르주아지)은 보편적 계급을 자처해왔으며, 두 적대자들에 맞서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정치생활을 조직하고자 노력해왔다. 한편에는 전통적인 신분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경제적 기능과의 상관관계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신분 구분의 유지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사회구조를 이왕이면 비계급적인 구조로 규정하려고 든다. 부르주아지가 자의식을 가진 하나의 계급으로서 활동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537

16세기 유럽의 세계경제는 전체적으로 단일계급 체제가 되려는 경향을 띠었다. 그것은 경제적 팽창과 자본주의 체제를 통해서 이익을 얻고 있는 역동적인 세력들, 특히 핵심국가 내의 세력들이었는데, 이들은 계급의식을 갖추는 방향으로, 다시 말해서 주로 그 경제 내에서의 그들의 공통적인 역할에 따라 규정되는 하나의 집단으로서 그 정치적 장 안에서 활동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 P541

국가? 국가란 무엇이었는가? 이 당시에 국가는 군주, 그 이름이 칭송받고 위엄을 지키면서 점차로 신민들과 멀어져간 군주였다. 그리고 국가는 특별한 성격과 이해관계를 가진 하나의 독특한 사회집단으로 등장한 관료제였다. - P57

금은(金銀)은 하나의 보루였다. 가치의 측정과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는 언제든 하나의 상품으로도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금은의 사용은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금은이 없었다면, 이윤이 다양한 형태의 거치된 실현가치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를 발전시키는 데 유럽이 집단적인 확신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 P80

우리는 근대 전 시기를 통해서 국가권력이 장기적으로 증대했음을 보게 된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적어도 핵심부 국가들 내에서는, 이처럼 증대된 중앙집권화와 내부 통제의 장기적인 과정을 필요로 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가속화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16세기의 국가기구 관리자인 국왕들은 어떻게 그들 자신의 힘을 강화시켰는가? 그들은 관료제화, 권력의 독점, 정통성의 창출 그리고 신민의 동질화라는 네 가지 주요 메커니즘을 이용했다. - P209

근대세계사의 지속적인 주제들 중의 하나는 "민족주의(nationalism)"와 "국제주의(internationalism)" 사이의 시소놀이다... "제2차" 16세기의 산업변화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새로운 기술이나 사회조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공장과 대량 생산은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p347)... 핵심적인 변화는 공업의 지리적 배치에서 일어났다. 대략 1550년경부터 공업활동은 "북서부" 유럽의 몇몇 국가에 집중되고,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쇠퇴가 카를 5세 제국의 영토들에 차례차례로 놀라울 정도의 타격을 입혔다. - P348

유럽이 열심히 금은을 축적했던 것을 돌이켜 볼 때, 이처럼 공식적인 무역수지 불균형이 그토록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점은 실로 기이한 일이다. 그러나 유럽이 아시아가 제공하는 상품들을 원했다면, 이것은 그들이 치러야만 하는 대가였을 것이다. 이것이 나타내는 한 가지 본질적인 의미는 이 시기에 아시아가 유럽 세계경제의 일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1500년부터 1800년까지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는 "보통 아시아 민족들이 세워놓은 조건과 틀 속에서 이루어졌다. 몇몇 식민활동의 거점들에 사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유럽인들은 모두 그곳에서 [아시아인들의] 묵인 아래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유럽의 군사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군사적 우위가 단지 해군력의 우위에 불과했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 P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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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3-23 1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독이세요? ^^

겨울호랑이 2022-03-23 20:15   좋아요 1 | URL
네 예전에 페이퍼로 드문드문 정리했었는데, 이번에 리뷰로 4편까지 한 호흡으로 정리해 보려합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