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대항해』는 난파선과 선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그것들이 이야기의 주요 구성 요소이기는 하다. 이것은 물 위와 뭍 위 양쪽의 사건에 대한 것이다. 선구적인 수중 고고학자 조지 베이스가 한때 내게 강력하게 상기시켰듯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든 간에 난파선은 우리에게 바다 밑바닥에 남은 잔해보다는 육지의 사회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려 준다.

고대 항해자들이 마음속 깊이 새겼던 것 중 하나는 인명 피해의 불가피성, 결코 귀환하지 못한 카누들, 현대의 유럽과 미국 어부들 사이에 여전히 남아 있는 침몰과 좌초에 대한 거친 숙명론이었다. 모든 대양을 해독하는 작업은 오랜 경험과 냉정한 현실주의, 조심스러운 항해 그리고 깊은 바다 풍경과 얼마나 친숙한가의 문제였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자신들끼리 서로 협력하듯이 바다와 협력한다. 하루하루를 바다와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다. 바다의 힘은 저마다의 몸과 영혼의 일부이다. 성스러운 존재들의 바다 여정과 그들의 가르침은 이야기와 노래, 제의를 통해 대대로 전해졌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고기잡이들이 깊은 바다로 나가거나 상상의 여행을 떠날 때면 이 고대의 가치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

뗏목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에 충분한 인구를 실어 갈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수천 년에 걸친 바다 횡단을 통해 선박의 유형에 심대한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면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세 가지 유형의 다른 선박이 등장했는데 바로 갈대 보트와 나무껍질 보트, 그리고 통나무 카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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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세계사 - 네안데르탈인에서 신자유주의까지
닐 포크너 지음, 이윤정 옮김 / 엑스오북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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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역사적 국면은 역사의 '순환'과 역사의 '화살'이라는 양면성을 다 갖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국면과 다른 국면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역사의 '순환'이 지배적일 때 변화는 양 量적이고 제한적이다. 반면 역사의 '화살'이 지배적일 때 변화는 질 質적이며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역사는 세 가지 엔진에 의해 앞으로 나간다. 첫째는 지식, 기술, 생산성의 축적이다. 둘째는 잉여의 통제를 놓고 벌이는 지배계급 간의 경쟁과 투쟁이다. 셋째는 잉여의 크기와 배분을 놓고 벌이는 계급 간의 투쟁이 바로 그것이다. _ 닐 포크너, <좌파 세계사>, p192

닐 포크너(Neil Faulkner, 1958 ~ 2022)의 <좌파 세계사 A Marxist History of the World: From Neanderthals to Neoliberals>는 인류 탄생부터 최근까지 인류 역사를 생산성 향상과 계급 투쟁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계사다. 신석기 시대 농경 사회의 시작과 함께 생겨난 불평등 구조는 불안정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불안정이 가져온 변화는 잉여가치를 낳았다. 결과적으로 인류 역사는 이를 차지 하기 위한 쟁탈전이었다는 것이 저자가 바라보는 주된 관점이다.

'즉자적 卽自的 계급 class in itself'이란 사회관계와 경제적인 관점에서 계급이 처하게 되는 현실을 가리킨다. 반면 '대자적 對自的 계급 class for itself'은 계급의식을 갖고 노동조합을 조직하거나 적극적인 저항을 해내가는 것을 가리킨다. 노동자는 현실에 무심하고, 파편화되고, 수동적인 채로 역사의 피해자로 남아 있을 수 있다. 반면 자신들의 처지를 인식하고 동료들과 단합하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투쟁에 참여할 수도 있다. 이럴 때 역사의 주체가 된다. _ 닐 포크너, <좌파 세계사>, p367

저자 닐 포크너는 특히 중세에 뿌리를 두고 상업자본주의(1450 ~1800), 산업자본주의(1800 ~ 1875) , 제국자본주의(1875 ~ 1935), 국가자본주의(1935 ~ 1975), 신자유주의자본주의(1975 ~ ) 등 다른 이름으로 꾸준히 이어온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에 지면을 아끼지 않는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변용(變容)에 대한 대응이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 혁명(革命)이라는 저자의 역사는 '자본주의의 도전(挑戰)과 혁명이라는 응전(應戰)'이라는 도식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인류는 지배계급의 제국주의적 탐욕으로 끝없는 학살의 수렁으로 빠질 뻔했다. 이를 막은 것이 바로 혁명이었다. 처음엔 러시아, 그 다음엔 불가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로 혁명이 이어졌다. 패전한 동맹국에서만 혁명이 전염된 게 아니었다. 곧 영국, 프랑스, 이탈리에까지 퍼졌다. _ 닐 포크너, <좌파 세계사>, p496

저자는 본문에서 역사의 고비마다 실패한 혁명에 대한 아쉬움을 숨기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인 68운동 이후 신자유주의가 큰 흐름으로 자리잡은 요즘 저자는 '즉자적 계급'이 아닌 '대자적 계급'에 의한 궁극적 변화를 소망한다.

1차 대전 후 인류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었다.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하느냐 아니면 실업, 파시즘 그리고 전쟁이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 조직과 리더십은 실패로 끝났다. 그 실패의 대가는 전쟁이 완전히 종결되고 나서까지 치러야 헸다. 두 번의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유럽지역에서는 노동계급 운동이 붕괴되어 1917년 같은 혁명이 일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전쟁이 치러졌고 이후 나치가 최악의 폭력을 이끌었다. _ 닐 포크너, <좌파 세계사>, p598

<좌파 세계사>에서 저자 닐 포크너는 역사의 분기점마다 좌절된 혁명을 인간의 희망의 꺾여진 것으로 해석한다. 자본주의가 갖는 내재적 모순성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국가 권력을 이용하여 혁명을 번번히 좌절시켜왔다는 저자의 인식은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의 역사관을 잘 보여준다. 분명 1990년대 냉전 종식 후 세계의 주된 흐름은 신고전학파주의 경제학에 기반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임이 분명하기에 자본주의가 현대 사회 문제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회주의 혁명이 있었다면 이러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거나 해결되었을까?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는 항상 고도로 모순적이었다. 자본주의의 경제적 역동성은 우리의 능력을 놀랍도록 향상시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재화와 용역을 공급해준다.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때문에 세계의 부가 소수에 의해 통제됨으로써 인류 대중을 지속적인 박탈에 시달리게 한다. 18세기에 제국과 식민지의 모습이 정반대였다는 사실은 이런 모순을 확실히 입증해준다. _ 닐 포크너, <좌파 세계사>, p282

저자의 설명대로 자본주의의 모순성이 동일 대상을 '노동자-소비자'라는 다른 측면에서 양립할 수 없는 면을 극단으로 추구하는 것에서 비롯되었고, 마르크스가 설명한 계급투쟁이 결국 투입된 노동의 산출 가치에 대한 배분 문제라면, '최소 비용으로 최대 이윤'을 얻으려는 자본가의 탐욕이 '최소 노동으로 최대 임금'을 받으려는 노동자의 탐욕으로 대치된다고 해서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은 임금과 이윤을 합친 가치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임금은 생산과정에서 투입된 노동의 가치를 전부 반영하지 않는다. 자본가들이 임금을 지급하고 사들이는 것은 일정 시간 동안, 특정한 수준의 기술로 얼마만큼 일할 수 있는가에 대한 능력이다. 자본가는 임금에 지불된 가치 이상의 가치를 생산과정에서 얻기를 바란다. 이 가치의 차이가 바로 '잉여 가치' 즉 이윤이 된다. _ 닐 포크너, <좌파 세계사>, p360

문제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좌파의 세계사>를 읽으며 현대사회 문제에 대한 진정한 처방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경제적 헤게모니 이관 문제가 아니라, 마르크스가 부정한 시대정신(Zeitgeist)에 있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해본다. 마르크스는 헤겔을 비판하면서 관념론을 비판하고, 유물론을 주장하지만 그가 <공산당 선언>을 통해 주창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Proletarier aller Lander, vereinigt euch!"는 구호에서 보여지는 단결된 노동자의 행동은 결국 또 하나의 '시대정신'의 발현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런지.

'관념적인 시대정신'대신 '유물론적인 시대정신'을 도입하기 전에, 궁극적으로 변화된 개인, 계급의 물리적 결합 이전 개인 윤리의 화학적 변화를 먼저 강조했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정신사적인 혁명을 부정한다면, 결국 다수의 눈에 사회주의 혁명은 'Post Capitalism'을 표방한 '제2의 자본주의'에 불과해 보일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리뷰를 갈무리한다...

헤겔의 변증법은 관념적이었다. 그의 주된 관심은 인간의 사고 변화에 맞춰져 있었다. 특히 헤겔은 역사를 '절대정신'의 전개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절대정신은, 절대정신에 부합하지 못하는 현실과 절대정신 사이의 모순에 의해 세계를 변화시키게 된다. 마르크스는 이 같은 관념론적인 변증법을 유물론적인 변증법으로 바꿨다. 주요한 모순은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들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역사를 추동하는 것은 실재하는 사회적 세력 간의 충돌(모순)이다. 사고의 역할은 이런 세력을 이해함으로써 인간의 실천적 개입이 더 나은 방향을 향하고, 더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_ 닐 포크너, <좌파 세계사>,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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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3-06-06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 님 말씀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ㅋ
전 누구보다도 마르크스 이론 대부분에 공감하지만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구축한다는 말엔 아주 조금만 동의합니다. 오히려 상부구조(시대정신, 관념론)가 하부구조(유물론)을 구축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3-06-06 21:5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대의명분이 실은 허울 좋은 구실에 불과하고, 그 이면에 있는 실리가 실제적인 동인이라는 점에서 마르크스의 통찰은 분명 뛰어난 것이지만,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 상부구조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 여겨집니다. 마르크스 사상 자체가 이미 상부구조의 구성물임을 생각해본다면 공산주의 사상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비판하는 다른 형태의 종교‘로 다른 의미에서는 모순을 안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북다이제스터님, 평안한 밤 되세요! ^^:)
 

각각의 역사적 국면이 고유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하나의 국면 속에 역사의 ‘연속성‘과 ‘변화‘라는 이질적인 측면이 하나로 합해져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의 역사적 국면은 역사의 ‘순환‘과 역사의 ‘화살‘이라는 양면성을 다 갖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국면과 다른국면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역사의 ‘순환‘이 지배적일 때변화는 양적이고 제한적이다. 반면 역사의 ‘화살‘이 지배적일 때 변화는 질적이며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 P192

이쯤에서 역사의 세 가지 엔진을 다시 살펴보자. 첫째는 지식, 기술, 생산성의 축적이다. 둘째는 잉여의 통제를 놓고 벌이는 지배계급 간의 경쟁과 투쟁이다. 셋째는 잉여의 크기와 배분을 놓고 벌이는 계급 간의 투쟁이 그것이다. 바로 이 세 엔진의 상호작용이 역사를 앞으로 끌고 나간다. - P192

종교개혁의 핵심은 봉건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지주인 가톨릭교회와의 단절이었다. 자유로운 질문과 논쟁이 폭발했다. 프로테스탄트는 무엇보다도 중산층의 종교였다. 그들은 유럽에서 가장 발달된 지역에서 자본주의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던, 산업 성장의 개척자들이었다. - P239

결국 자본주의는 경쟁적으로 자본축적을 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이는 다음의 세 가지 요소가 융합한 결과다. 오직 이윤을 붙여팔기 위해서만 사야 하는 상인의 원리, 산업혁명이 초래한 노동생산성의 변화, 각각의 경제 파트가 자본들 사이의 경쟁 단위가 돼 버린 상황. - P359

노동에 대한 대가와 노동력에 대한 대가의 차이는 자본주의에 내재된 비밀이다. 임금이 노동에 대한 대가라면, 노동자들은 자신이 생산한 가치에 대한 정당한 지불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이윤이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임금이 노동력에 대한 대가인 경우, 임금은시장의 거래가격에 따라 결정되고, 자본가들은 이윤을 얻기 위해임금보다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내라고 노동자에게 요구하게 된다. - P360

보호무역과 식민지주의는 서로 경쟁해가면서 강도를 더해갔다. 이는 장기불황의 세 번째 결과를 낳았다. 바로 강대국들 간의 긴장고조와 군비지출 증가다. 이 때문에 주요 자본주의 국가 내부의 권력 관계는 재구성되었다. 정부, 군부, 무기업체는 서로 연계되어 군산 복합체‘를 구성했다. - P412

붕괴의 원인은 금융화 때문이었다. 그러나 은행부채가 없었다면호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시스템은 한마디로 깊이 병들어있었다. 1970년대부터 낮은 수익, 수용력 초과, 소비 부족에 시달린이 시스템이 수요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부채를 늘리는 것이었다. 금융투기가 거대한 거품으로 부풀어 오른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화려해 보이는 신자유주의 이면에는 영구적인 ‘부채 경제‘라는 현실이 존재했다. - P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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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 - 철학이 아닌 역사로 밝힌 18세기 계몽사상 현대의 고전 11
프랑코 벤투리 지음, 김민철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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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철학자 집단의 사상과 나머지 유럽의 사상 사이에 존재하던 틈을 메운 것은 <백과전서>였다. 그것이 과학과 예술에 관한 사전이었다는 사실이 새로운 관념의 유포를 가능케 했다. 기술적 문화는 노동과 기계, 철학과 일상의 관계, 그리고 사상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디드로가 구상하던 개념들에 연결되어 있었다... 정치와 법은 디드로와 그의 동료들이 반복적으로 독자들 앞에 제시한 관범위한 철학적/도덕적 문제의 일부로서 계속해서 논의되었다. _ 프랑코 벤투리,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 , p172


 프랑코 벤투리(Franco Venturi, 1914 ~ 1994)는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 Utopia and Reform in the Enlightenment>에서 정치사상의 관점에서 계몽사상을 바라본다. 역사적으로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정체였던 공화정이 16세기 절대왕정 국가들의 도전으로 쇠퇴하면서 공화정은 유럽의 중심 정체에서 주변부로 밀려나가기 시작한다. 절대왕정에 의한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이 근세 유럽 정치질서를 장악하던 시기. 저자 벤투리는 이 지점에서 주변부의 공화정 정신을 계몽사상의 근원으로 지목한다.


 공화국은 절대주의 국가와 구조적으로 동일하지만 그 외부에 위치한 독립적인 정치체다. 공화국의 존재는 절대주의 국가 내부에 있는 정치 형태처럼 때때로 미심쩍으며 형식에 치중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외부 구조물을 살아남아 유럽 대륙에서 공화주의 전통을 유지했다. 군주정의 대안 모형을 보존한 것도, 군주정의 최종적 승리를 정치적/군사적 차원뿐만 아니라 이념적인 차원에서 부정한 것도 바로 이 외부 구조물이었다. _ 프랑코 벤투리,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 , p43


 고대 그리스가 군사적으로는 로마에게 굴복하여 제국의 변방으로 편입되었지만, 사상적/예술적으로는 로마의 근원이 되었듯, 사도 바오로(Paul, CE 5 ? ~ 64 ?)의 기독교가 그들을 박해하던 로마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중세시대가 열렸듯, 벤투리는 절대주의 국가들에 의해 헤게모니를 상실한 도시국가들의 공화정신이 정신사적으로 절대왕정국가들에게 퍼져나가면서 계몽시대가 열렸다고 분석한다.  


 국가조직 형태로서의 공화정이 낡아 보이고 썩어가는 폐허 속에 누워 있을지라도 공화주의적 도덕은 분명 존속했다. 세상은 변했지만 공화주의적 우정, 공화주의적 의무감, 공화주의적 긍지는 살아남았다. 이들은 심지어 군주국의 심장부에서, 절대주의 세계에 완전히 통합되어 있는 듯이 보이는 사람들의 내면 깊은 곳에서도 존재했을 것이다. _ 프랑코 벤투리,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 , p105


 다만, 저자가 본문에서 소개되듯 계몽사상가들의 사상이 모두 일치했던 것은 아니었다. 디드로(Denis Diderot, 1713 ~ 1784), 볼테르(Voltaire, 1694 ~ 1778),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 ~ 1778) 등 서로 다른 계몽주의자들은 서로 다른 목표를 갖고 있었고 그 목표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사상적 결집은 백과전서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계몽사상은 특수성을 아우를 수 있는 보편성을 갖게 된다. 


 고대 도시들의 참사회, 원로원, 인민 사이의 균형은 몇 세기 동안 깨져 있는 상태였다. 고전적 민주정체는 사라졌다. 네덜란드와 베네치아 같은 근대 공화정/귀족적은 역사적 중요성을 잃어버렸다. 덕성은 여전히 최고의 정치적 이상이었다. 그러나 근대 공화국에 의해 제기된 역사적 문제는 오직 군주국 내에서만 해결할 수 있었다. 이는 오직 귀족, 시민, 사법부, 주권자의 구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까다롭지만 유익한 타협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구성된 권력기구들은 중계자가 되었다. 잉글랜드에서는 그들이 삼권분립과 균형의 기초였다. _ 프랑코 벤투리,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 , p71


 프랑코 벤투리의 <계몽사사의 유토피아와 개혁>은 역사 속에서 프랑스 혁명으로 대표되는 시민혁명이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에 대한 내부적 반발 뿐 아니라 절대주의의 팽창과 쇠퇴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공화정에 있음을 밝힌다. 저자가 보여주는 18세기를 전후한 역사적 사건의 연속성과 필연성 속에서 독자들은 계몽사상의 기원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백과전서파는 식자들과 전문가들로 구성된 소규모 엘리트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경제적 진보를 이끈 요소로서의 경제생활과 연결됐고, 그들이 개선하고 더욱 합리적으로 만들고자 했던 행정/정부 기구와도 긴밀히 연결됐다(p30)... 그들은 전통적인 사회 지도층을 대신하고자 열망할만큼 가장 높은 사회적 지위에 충분히 가까우면서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자신들의 무력함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국민이 직면한 실질적 문제들에 대해 정확한 시각을 갖지 못할 정도로 노동 인민과 괴뢰되어 있지도 않았다. 결국 그들은 이 문제들에 대한 기술적 해법을 구상하고, 일반적 혁명을 예측하지 못한 채 그것을 때때로 적용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었다. _ 프랑코 벤투리,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 , p31


 자유라 함은 곧 교역의 자유였다. 평등은 재산과 세금에 관한 문제였다. 정의는 더 나은 자본/노동 투입을 의미앴다. 당연하게도 비교의 결과는 잉글랜드의 완전한 승리였다. _ 프랑코 벤투리,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 , p175



프랑스인들에게도 몽테스키외부터 루소에 이르는 공화주의 사상의 뿌리들은 가까운 유럽적 경험에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결코 신화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사례들은 철학자, 지롱드파, 자코뱅파에 직접적으로 속하지지는 않았다. 그 사례들은 덜 지역적이고 덜 "개인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오직 신고전주의 모형만이 신화의 웅장함과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다. - P39

공화주의 전통의 관점에서 우리는 베네치아 과두정의 경직성보다는 잉글랜드 공화주의자, 이신론자, 자유사상가들이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에 넓게 퍼져서 벌였던 혹독한 투쟁을 보아야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분명해졌듯이, 공화주의의 유산에서 가장 역동적인 부분은 귀족적 요소가 아니라 자유지상주의적인 요소였다. - P101

루소가 비록 <사회계약론>에서 권력의 분립 및 균형을 일체 거부했지만, <산에서 쓴 편지>에서 그가 내린 최종 결론은 "최상의 정부는 그 안에서 모든 분파가 서로를 견제하면서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정부"라는 것이었다. 루소의 권위는 고대 공화국들의 바로 그 부동성의 기제를 떠받치는 기능을 했다. 부동성의 기제는 그들로 하여금 가분, 집단, 특권, 계급 등의 투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방해하고, 더 근대적인 정치투쟁에 돌입하는 것도 방해했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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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4-22 17: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조금 짓궂은 장난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계몽주의 시대의 백과전서파이면서 법학의 아버지이자 작가, 수필가 기타 등등이었던 볼테르 선생의 풀 네임을 원어면 더 좋고 우리 말이라도 알고 계신 분께 만원 드립니다!!!
ㅎㅎㅎ 저도 모릅니다.
같은 시절의 동료 몽테스키외의 철자를 정확하게 알고 계신 분께도 만 원 드립니다!!!
검색하지 않고 말입니다. ^^ 진짜로 저도 모릅니다. 알고 계신 분이 있는지 그게 궁금해서 애먼 겨울범 님 서재까지 와서 드리는 퀴즈입니다.
겨울 범님, 죄송합니다. ^^;;

겨울호랑이 2023-04-22 17:46   좋아요 1 | URL
ㅋㅋ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볼테르가 필명이라는 것만 알지만 굳이 본명까지 알려고 하진 않았네요. 골드문트님 퀴즈 덕분에 이번에 잘 기억할 것 같아요.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국과 네트워크 1 - 권력과 제국주의 케임브리지 세계사 7
크레이그 벤저민 지음, 류충기 옮김 / 소와당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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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고대 제국은 세 가지 기둥에 의지했다. 즉 군사력, 자기 정체성, 세금이 그것이다.이를 위하여 사람과 그들의 노동력을 관리했고, 이동, 잉여 생산물, 토지 , 교통로를 통제했다. 자원 개발이나 세금 수입 관련 제도와 기술도 제국 체제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경제가 발전할수록 사회적 계층도 복잡해졌다. 귀족(엘리트) 계층의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이들은 차별화된 소비를 통해 경쟁자와 자신을 구별하고자 했다. _ 크레이그 벤저민 외, <케임브리지 세계사 7 : 제국과 네트워크 1> , p81


 <케임브리지 세계사 7 : 제국과 네트워크 1 - 권력과 제국주의 Cambridge World History Vol. IV>에서 독자들은 농업 문명의 시작과 그 결과로 태어난 도시(都市)문명의 심화를 확인할 수 있다. 헤시오도스( Hesiodos, BCE 7세기 ? ~ ?)가 <일과 날 Erga kai Hemerai>에서 노래했듯, 철의 시대에 해당하는 농경 시대가 앞선 시기보다 결코 행복한 시기는 아니었다. 불평등은 커졌고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하는 시기. <제국과 네트워크 1>은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가 이러한 불평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전제 조건으로 종교(宗敎)를 언급한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 ~ 1969)는 도덕적 종교가 등장한 시기를 '축의 시대 Achsenzeit'로 언급한다. 종교를 통한 공동체의식의 함양은 동시에 일면식도 없는 이들을 '이웃'으로 통합하며 가족으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야스퍼스의 전제는 기원전 제1천년기 중엽을 전후한 몇 세기 동안 유라시아 세계의 몇몇 선진 문화권에서 중요한 지성적/제도적 전환이 일어났다는 가설이다. 이러한 현상은 여러 문명권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건 공통적으로, 인간의 사유 능력 및 심오한 사유의 증대를 텍스트로 정리했고, 직접적 대상을 넘어서는 이성(reason)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_ 크레이그 벤저민 외, <케임브리지 세계사 7 : 제국과 네트워크 1> , p224


 예후나 엘카나(Yehuda Elkana)에 따르면, 새로운 2차적 사고(second-order thinking) 덕분에  인류는 일상생활의 한계는 물론 기존 사회 의례에 내재된 우주론적 선입관을 넘어설 수 있었다. 신화적 사유가 당시의 사회를 주도했고, 그것이 의례에도 반영되어 있었다. 의례는 부족 사회 혹은 원시 사회의 응집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_ 크레이그 벤저민 외, <케임브리지 세계사 7 : 제국과 네트워크 1> , p206


 종교를 통해 일체화된 사회 내에서 불평등은 지식의 소유 정도와 어느 정도 비례했다.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도시를 유지하기 위한 제반 활동을 효율/효곽적으로 할 수 있는 지식 소유 집단의 등장은 엘리트 귀족가문의 탄생으로 연결되며, 이로부터 지배계급-피지배계급의 분화는 세습화된다. 그렇지만, 엘리트 계층의 지배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가뭄, 홍수와 같은 자연 재해는 물론 안정적인 삶을 유지시킬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해야 했고, 그 결과 도시국가들은 공동체의 번영과 유지를 끊임없이 전쟁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도시국가의 하부구조를 구성하며 공동체를 유지시켰던 계급인 노예층은 그 결과물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도시국가는 점차 왕국(王國) 그리고 제국(帝國)으로 성장해간다. 


 기원전 800년에서 기원후 800년 사이 유럽, 북아프리카, 아시아의 문명들은 심각한 변화의 시기를 거쳤다. 기원후 800년을 기준으로 자연과 기술에 관한 지식의 발전 정도를 보자면, 많은 지역에서 완성 단계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발전을 위한 기본바탕은 마련되어 있었다. 그 바탕 위에서 발달한 기술이 이후 시대의 지역 문화를 형성했다. _ 크레이그 벤저민 외, <케임브리지 세계사 7 : 제국과 네트워크 1> , p242


 올랜도 패터슨(Olando Patterson)이 정의한 노예란 "태생적으로 소외되고 일반적으로 천시받으며 영속적이고 폭력적인 압제에 놓여 있는 사람"이었다(p165) ... 오늘날의 노예는 말하자면 "내부에 존재하는 타자(outsiders within)"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일을 하더라도 거의 아무런 권리가 없는 사람들, 일자리의 안전성이 극히 유동적인 사람들이다. _ 크레이그 벤저민 외, <케임브리지 세계사 7 : 제국과 네트워크 1> , p200


 도시국가들의 생산 활동 중심에는 이들 노예층이 있었다. 노예가 생산하는 물품은 주인에게 귀속되는 반면, 노예들에게 지불되는 비용은 최저생활수준에 머물렀기에 막대한 이윤이 발생한다. 도시 내에서 더이상 소비될 수 없는 잉여제품들은 키루스( Kurosch-e bozorg, BCE 600 ~ 530), 알렉산드로스(Alexander III of Macedon, BCE 356 ~ 323) 등이 건설한 대제국의 네트워크를 통해 제국 내의 도시국가들로 흘러들어갔다.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된 명품(名品)의 사용은 신분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의례(儀禮)는 차이를 의식화시켰다. 


  <케임브리지 세계사 7 : 제국과 네트워크 1>에서는 농경화로 인한 분업과 집중화의 필요가 가속화되면서 불평등도 함께 커져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기 도시는 국가가 되고, 국가는 제국이 되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정치 경제의 주된 단위는도시와 인근 농촌에 한정된다. 제국과 세계가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뉘고, 종교를 대신한 또 다른 이데올로기가 등장하면서 제국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만드는 제국주의(Imperialism)의 출현은 아직 먼 훗날의 이야기다. <케임브리지 세계사 7 : 제국과 네트워크 2>에서는 BCE 1200 ~ CE 900년 시기 세계 여러 지역의 구체적인 역사가 소개된다. 이제 2권으로 넘어가자...


 도시화로 다양한 수공업 기술이 발달했는데, 특히 금속 제련과 도자기 생산 분야에서 고도로 복잡한 단계까지 수준이 높아졌다. 서양, 인도, 중국은 모두 거대한 기념비적 건물을 건설할 정도의 기술력과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사회 인프라 구조 건설과 관련해서 건축 기술의 수준이 높았다. _ 크레이그 벤저민 외, <케임브리지 세계사 7 : 제국과 네트워크 1> , p286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글로벌 관점에서 보자면 지역별로 나뉜 교환 체계라고 할 수 있는 네트워크들이 서로 연결되어 대륙 간 무역로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대륙 간 무역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무역로를 거친 개별 상품의 가치가 매우 비쌌다는 점, 그래서 그런 상품은 상당히 좁은 엘리트 계층의 소비 능력에 따라 유통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_ 크레이그 벤저민 외, <케임브리지 세계사 7 : 제국과 네트워크 1> , p113

고대 세계에서 국가, 제국, 지역 간 네트워크의 형성과 유지는 전통적으로 남성의 기획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와 대비되는 여성의 세계는 가정과 생활 경제였다. - P154

"파트롱(patron)"이란 후원자 혹은 작품의 구매자 혹은 작가의 고용주를 간단히 표현하는 말이다. 예술은, 특히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남아 있을 정도로 견고한 물질로 만들어진 작품은 대개 값비싼 재료를 사용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방대한 자원을 통제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 파트롱이 된다. 예를 들어 통치자, 국가, 교회 때로는 부유한 중산층 등이다. 파트롱은 자신들이 보기에 가장 좋은 것, 혹은 자신의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에 비용을 대줌으로써 예술의 발전 과정에 기여한다.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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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4-03 17: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느덧 7권까지 읽으셨군요^^ 저도 이 시리즈 찜해놓고 있는데 언제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계속 보관함에 들어있어요!ㅎㅎㅎ

겨울호랑이 2023-04-03 20:15   좋아요 1 | URL
네, 어찌어찌하다보니 7권까지 흘러왔습니다. 한 번 마음을 정하면 끝까지 파고 드는 거리의화가님이시라, 다른 책들이 마무리되면 금방 독파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평안한 저녁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