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철학2」의 시작은 르네상스로부터 시작한다. 르네상스 시기를 기점으로 교회의 권위는 세속으로 옮겨간다. 그렇지만, 더 이상 세속의 주인은 군주와 귀족계급이 아니었다. 상인으로 대표되는 시민 계급의 성장은 ‘지배와 권력‘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게 되었다.

이러한 물음은 실락원 이후 자연 상태에 대한 가정으로부터 사회 권력의 성격에 대한 치열한 논박을 낳았다. 사회계약, 소유권, 권력, 자유, 평등, 역사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정치철학2」에서 다루어진다.

저자는 이러한 논의로부터 현대 정치 철학의 과제를 끌어내고 있다. 결론부에서 우리는 현대 정치를 감정의 문제, 오늘날 사회에서 인민 주권 문제, 가능성의 평등과 비지배 문제, 민주적 리더십 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저자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정치철학1」「정치철학2」에서는 이처럼 정치사를 통해 현대 정치사의 문제가 어떤 식으로 제기되어 왔는가를 제기하는 정치철학 입문서다. 전체적으로 사상의 변천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지만, 후반부 현대 정치철학의 과제에서는 갑자기 논의의 범위가 넓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는 복잡한 현대 사회의 특징과 분량의 제한이기 때문이겠지만,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고대부터 근대 시민 사회에 이르기까지 정치과제의 변천을 사상가 별로 잘 정리해 주었기에 좋은 정치 사상 입문서라 여겨진다.




13세기에 유럽의 상업 계층(mercatores)은 토지귀족들이 독점하던 정치권력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버릴 기세로 급속히 성장했다. 부의 축적(quaestus)에 대한 도덕적 멸시는 사라졌고, 교회와 정치를 독점하고 있던 귀족들도 앞을 다투어 상인들과 손을 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업적 변화가 기존 정치세력의 재편으로 곧바로 귀결되 지는 않았다.(p25)

  두 가지 과제를 종합하면, 정치인의 자질이나 사회경제적 조건에 천착하던 전통적인 연구에서 벗어나 민주적 절차를 따라가면서 정치적 환경을 스스로 구성하는 ‘민주적 리더십‘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정치 지도자들을 대중의 선호를 선취하는 수동식호를 선취하는 수동적 행위자가
아니라 대중의 선호 또는 의사를 형성하는 적극적 행위자로 재규정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자기 전복적 속성을 제도적 변화로 귀결시킬 수 있는 민주적 리더십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p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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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19-01-20 2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치철학 1권에 관한 좋은 리뷰보고 저도 구입했습니다!ㅎ

겨울호랑이 2019-01-20 22:47   좋아요 1 | URL
막시무스님 감사합니다. 좋은 독서 시간 되세요!^^:)
 
문명과 전쟁
아자 가트 지음, 오숙은.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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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이 걸어간 진화의 길이 전쟁을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든 것일까? 아니면 싸움은 나중에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후에야 등장한 것이고 따라서 인간에게 '부자연스러운' 것일까? (p22) <문명과 전쟁> 中


 <문명과 전쟁 War in human Civilization>에서 저자 아자 가트(Azar Gat)는 위와 같은 물음을 던진다. 이 질문을 요약하면 '전쟁'은 자연의 질서 속에서 태어난 것인지, 아니면 사회의 질서의 영향으로 태어난 것인지로 정리될 것이다. 그리고, <문명과 전쟁>은 이 질문에 대한 답(答)이다. 책 전반에 걸쳐 저자는 두 관점을 대조하면서 논의를 진행시키는데,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 ~ 1679)와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 ~ 1778)의 관점이 바로 그것이다.


[사진]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년 4월 5일 ~ 1679년 12월 4일) (출처 : 위키백과)


[사진]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년 6월 28일 ~ 1778년 7월 2일) (출처 : 위키백과)


 이런 질문에 대해 17세기와 18세기에 상반되는 두 가지 고전적 대답이 제시되었다... 토머스 홉스 Thomas Hobbes와 장 자크 루소 Jean-Jacques Rousseau가 내놓은 답이었다. 홉스에게 인간의 '자연 상태'는 고질적인 '투쟁 warre'의 하나로서 이익과 안전, 명성을 위한 살인적 다툼이자 만인 대 만인의 전쟁이며 삶을 '가난하고 힘들고 잔인하고 단명하게'만드는 원인이었다... 반면에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 Discours sur l'origine et les fonderments de l'inmegalite parmi les hommes>(1755)에 따르면, 원주민들은 자연 속에 드문드문 흩어져 자연의 풍부한 자원을 평화롭게 이용하면서 대체로 조화롭게 살았다. 그러다가 농업, 인구 성장, 사유 재산, 계급 분화, 국가의 강압이 드러나면서 비로소 전쟁이 등장했고 문명의 나머지 모든 병폐들도 함께 나타났다고 루소는 주장했다.(p22) <문명과 전쟁> 中


 <문명과 전쟁>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의 끝에 저자가 내린 결론은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저자는 루소보다는 홉스의 손을 들어준다. 에덴(Eden)과 같은 지상낙원을 전제로 한 루소의 이론보다는 한정되고 냉혹한 자연을 전제로 한 홉스의 이론이 보다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치명적인 폭력과 전쟁은 사실 전혀 특별하지 않다. 근본적으로 말해 '전쟁 수수께끼'의 해답은 그런 수수께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폭력적 경쟁, 일명 분쟁은 자연 전체의 통칙이다. 유기체들은 언제나 자원이 극히 부족한 조건에서, 그들 자신의 증식 과정 탓에 더욱 힘겨워지는 조건에서 생존하고 번식하기 위해 자기들끼리 경쟁하기 때문이다.(p855) <문명과 전쟁> 中


  저자는 이러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 일방적으로 논의를 진행시키지 않는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저자의 결론에 반(反)하는 주장 - 루소의 견해 - 역시 소개된다. 전쟁이 '문명'이 발달한 사회에서 더 빈번하게 발생했다는 이들의 주장 속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라 Return to Nature'라는 루소의 말을 떠올리는 것은 어색하지 않다.


 일부 인류학자들은 인간의 자연 상태에서 전쟁은 근본적으로 비적응적인 특질이었으며 농업과 국가의 등장으로 비로소 이 특질이 '청산'되기 시작했다고 믿고 있다... 젊은 남자들의 공격적 성향, 지도자가 없는 사회에서의 효과적인 사회 통제 부재, 서로 다른 집단 간의 상호 의심, 복수, 사회체제의 자기 유지 성질, 중재 제도를 발전시키는 일의 애로점, 전쟁의 성공과 전반적인 활력의 종교적 연관성 등이 그런 요인들이다.(p165) <문명과 전쟁> 中


 기본적으로 생산성과 인구가 꾸준히 늘어 근대 직전까지 100배 가까이 증가했다. 인구 팽창과 생산성 증대 사이에는 얼마간 상관관계가 있었으므로 잉여 생산은 크게 늘지 않았고,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계속 식량생산자로서 최저 생활수준 근처에서 위태롭게 살아갔다.... 권력과 자원 축적이 선순환 매커니즘에 따라 서로를 강화하는 가운데, 대규모 사회적 권력 구조들이 출현했다.(p525) <문명과 전쟁> 中


 산업-기술의 도약은 인류 역사에서 혁명이 일어났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 혁명은 부와 권력의 지속적이고도 기하급수적인 증대를 가져왔고, 이전 시대들을 지배했던 맬서스의 덫에서 사회를 구해주었다. 그렇지만 일단 강대국 간의 전쟁이 발발하고 나면 교전국들은 자원을 훨씬 많이 동원할 수 있었다.(p731)... 이 과정은 일부 강대국에서 근대 전체주의 체제의 등장을 촉진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세력권은 시장의 잠식 효과 못지않게 군사적 승리와 압력을 통해 확대되었다.(p733)  <문명과 전쟁> 中


 산업-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권력의 집중은 전쟁의 규모를 더 키웠고, 전쟁 양상은 총력전의 형태로 변모되어 왔다는 것이 루소파 학자들의 의견이다. 저자는 이러한 루소파 학자들의 의견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 안에 '홉스'가 말한 리바이어던(Leviathan)의 모습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강화해 나간다. 


 정치적 합병이라는 부단한 과정을 달성하기 위한 주요 수단은 무력 사용과 위협이었다.(p528)... 국가 내부와 국가들 사이에서 권력을 차지하려는 투쟁, 그리고 권력이 수반하는 이익을 차지하려는 투쟁은 동시에, 그리고 불가분하게 일어났다.(p528)... 이 모든 과정의 근간을 이룬 추세가 증대하는 규모였음에도, 국가가 성장하고 '홉스적 전쟁'에서 일반적인 전쟁으로 이행함에 따라 전반적으로 폭력적 죽음의 비율은 분명히 낮아졌다.(p534) <문명과 전쟁> 中


 리바이어던이 가져다 주는 작은 안정이 자연 상태의 무질서보다 낮다는 근거를 저자는 역사 속에서 발견한다. 저자에 따르면 폭력적 사망의 비율은 문명화에 따라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연 상태로 수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명화가 전쟁의 원인이라는 루소의 주장은 성립하지 않게 된다.


 이 싸움에 '의례적' 측면은 전혀 없었고, 루소주의의 에덴동산 같은 풍요롭고 천진한 환경에서 싸움이 벌어진 것도 아니었다. 진실에 한결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홉스였다... 부족한 자원과 여성을 둘러싼 생존 경쟁, 걸핏하면 폭력 사태로 변모한 경쟁이 인간의 삶을 지배했다... 폭력적 사망 비율은 국가사회보다 이런 수렵채집인 사회에서 훨씬 높은데, 국가사회에서의 비율은 가장 파괴적인 국가 간 전쟁을 치를 때에만 25퍼센트에 근접한다. 그러나 이 비율은 자연에서 동물들의 일반적인 종내 살해 비율과 일치한다.(p856) <문명과 전쟁> 中


 저자 아자 가트는 결국 전쟁이라는 현상이 '문명화 civilized'된 결과물이 아니라, 자연(nature)이 가지는 일반적인 특징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다만, 인간 사회에서의 전쟁은 사회 발전에 따라 '개인간 다툼'에서 '국가간 다툼'이라는 양상으로 흘러갔고 이러한 점을 루소파 학자들은 간과했다고 비판한다.(전투가 전쟁이 되는 규모의 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저자 아자 가트는 루소, 존 로크(John Locke, 1632 ~ 1704) 등으로 대표되는 사회계약론자들과 대척점에 서 있다. 


 인간 사회들의 크기와 복잡성이 극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인간 집단의 싸움도 덩달아 변화했다. 인간 집단 자체의 크기가 증가함에 따라 집단 싸움의 규모도 커진 것이다. '전쟁'을 관습적으로 대규모 조직 폭력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규모가 대폭 커지고 조직화된 사실을 반영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p857) <문명과 전쟁> 中


 사회 안에서 폭력적 죽음의 비율이 낮아진 까닭은 대개 폭력이 승리했기 때문이지 어떤 평화로운 합의 때문이 아니었다. '국내의 평화'를 강요하는 한편 사회에서 자원을 징수하고 흡사 마피아처럼 '보호'와 여타 서비스를 변덕스럽게 제공한 것은 승리한 통치자가 제도화를 통해 얼마나 효과적으로 독점한 폭력이었다.(p858) <문명과 전쟁> 中


 <문명과 전쟁>의 책 전반에서 저자가 말하는 주장은 위와 같이 요약된다. 이 책은 선사시대부터 최근 9.11 테러에까지 인류학, 고고학, 심리학, 경제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분석한 책이기에 금방 읽히지는 않지만, 여러 관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준다는 면에서 의미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가지는 한계 또한 분명하다. 미국 극우파의 주장을 떠올리는 아래의 글을 읽으면서 반발감이 생기게 되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이슬람의 대량살상무기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엄중한 단속'이 문제가 아니라 '팔레스타인 분쟁'을 종식시키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오늘날 대량살상무기 위협은 주로 급진적 이슬람과 연관되지만, 그 위협의 진짜 심각성은 어떤 '초강력 화난 사람'이나 집단이라도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현재로서는 대량살상을 초래하는 기술과 무기의 확산, 그런 기술과 무기를 사용할 법한 사람들을 전 세계에 걸쳐 엄중히 단속하는 것만이 그 위협에 맞서는 단 하나의 유효한 대응책이다.(p852) <문명과 전쟁> 中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 교수이며 홉스주의자인 저자의 입장이 책 곳곳에 담겨있기 때문에, 미국 '매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글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는 점이 그 한계점이라 생각된다. 여기서 말한 <문명의 전쟁>의 큰 줄기와 한계점을 한 번 짚은 후 책을 읽는다면 한결 즐거운 독서가 되리라 생각하며, 이번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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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6 11: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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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6 15: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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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읽는 유럽의 난민 - 구호 현장에서 쓴 생생한 기록 푸른지식 그래픽로직 11
케이트 에번스 지음, 황승구 옮김 / 푸른지식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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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으로 읽는 유럽의 난민>은 난민들이 영국에 가기 전 머물던 프랑스 칼레(Calais)의 난민촌 정글(jungle)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영국인인 저자는 자원봉사자로서 구호품을 배급과 그림 등을 통해 난민들과 소통하면서 그들을 깊이 이해하는데, 이는 단순한 인도주의에서 나오는 감정만은 아니다. 자신의 나라가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난민들이 발생한 것에 대한 책임감과 속죄의식 또한 저자의 행동 동기가 되었음을 책 곳곳에서 확인하게 된다. 이때문일까. 이 책은 난민에 의해 씌여진 책보다 오히려 더 절박하게 다가온다.

 

 지금부터 난민을 홍수에 비유해보자. 수백만  파운드의 비용을 들여 칼레에 울타리를 치고 감시는 강화하는 일은 물이 흐르는 개수대를 마개로 틀어막는 일과 같다. 하지만 물은 계속 흘러들어온다. 영국으로. 왜 그럴까? 아마 영어를 쓰는 나라여서 소통이 쉽고, 영국이 공정하고 관대할 것이라는(아마도 잘못된) 기대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난민들은 눈 앞에서 가족의 죽음을 목격한 아픔이 있다. 그래서 영국에 사는 친인척과 재회하려는 마음이 더 간절한 것 같다.

 

 물은 왜 넘치게 되었을까? 영국이 그들 땅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총을 쏘아댔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 무기를 팔아 이득을 취하기도 했다. 잿더미가 된 나라에서 극단적인 종교 무장 세력인 이슬람국가(IS)와 탈레반이라는 괴물이 탄생했다. 이들은 미친듯이 또 다른 사냥감을 찾아다닌다. 당신에게 어린아이가 있다고 상상해보라. 전 세계 난민의 절반이 아이들이다. 당신이 살고 있는 나라에 전쟁이 터졌다. 정부가 도시에 폭탄을 투하하고, 내일이면 테러단이 마을을 덮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부모가 떠나지 않겠는가? <그림으로 읽는 유럽의 난민> 中

 

 칼레에 건설된 난민촌 '정글'은 결국 2016년 10월 프랑스 당국에 의해 폐쇄된다. 그리고, 동시에 약 1만명에 달하는 난민들은 고통과 절망에 빠진 채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책 속의 처참하게 묘사된 그림과 당시 사진 속에서 자연스럽게 로댕(François-Auguste-René Rodin, 1840 ~1917)의 유명한 조각 <칼레의 시민들 The Burghers of Calais>을 떠올리게 된다. 백년전쟁 당시 시민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여섯 명의 시민들. 비록, 대의(大意)를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하지만, 이 조각상에서는 이들의 절망과 고통이 그대로 느껴진다. '칼레의 시민'의 진실은 극화(劇化)된 부분이 많다고 하나, 모든 것을 빼앗긴 난민들의 심정은 이 조각상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진] 칼레의 시민들(출처: https://sites.google.com/site/adairarthistory/iv-later-europe-and-americas/119-the-burghers-of-calais-auguste-rodin)

 

 1347, 잉글랜드 도버와 가장 가까운 거리였던 프랑스의 해안도시 칼레는 다른 해안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거리상의 이점 덕분에 집중 공격을 받게 된다. 이들은 기근 등의 악조건 속에서도 1년여간 영국군에게 대항하나, 결국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에드워드 3세는 칼레의 시민들에게 다음의 조건을 내걸게 되었다. “모든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그러나 시민들 중 6명을 뽑아와라. 그들을 칼레 시민 전체를 대신하여 처형하겠다.” 모든 시민들은 한편으론 기뻤으나 다른 한편으론 6명을 어떻게 골라야 하는지 고민하는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딱히 뽑기 힘드니 제비뽑기를 하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상위 부유층 중 한 사람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aint Pierre)'가 죽음을 자처하고 나서게 된다. 그 뒤로 고위관료, 상류층 등등이 직접 나서서 영국의 요구대로 목에 밧줄을 매고 자루옷을 입고 나오게 된다.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 '칼레의 시민'은 바로 이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출처 : 위키백과]

 

 결국, 칼레의 난민촌은 폐쇄되고, 거주하는 많은 난민들이 프랑스 당국에 의해 강제 등록되면서, 이들이 가지고 있던 영국이민의 꿈은 사라지게 되었다. (EU에서는 1997년 더블린 조약에 의해 난민이 최초로 발을 들인 국가에서 난민 신청을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저자는 '봄의 씨앗'을 발견한다.

 

 2016년 3월 7일. 됭케르크 시장과 구호단체 국경없는의사회는 됭케르크에 엄청나게 개선된 새로운 캠프를 연다. 사생활이 보장된 가족 오두막집, 식료품이 잘 갖춰진 공동 부엌,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고, 난민 등록을 강요받지도 않는다. 진짜 보금자리도 아니고, 그들의 종착지도 아니지만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전보다 따뜻하고, 안전하며, 깨끗하다. <그림으로 읽는 유럽의 난민>

 

 [사진] 덩케르크 철수 (출처 : http://www.insight.co.kr/newsRead.php?ArtNo=113735)

 

 살고자 하는 난민들의 꿈이 '칼레의 시민들'처럼 무너졌다면, 1940년 5월 덩케르크 전투 (Battle of Dunkirk)가 벌어진 그곳에서 33만명의 연합군 병사들이 도버해협을 건넜을 때 가졌던 삶에 대한 간절함이 난민들을 통해 재현되고 있음을 책 속에서 발견하고 조금이나마 안도하게 된다. 이처럼 이 책은  유럽 난민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결코 남의 일이라 느껴지지 않는 것은 바로 얼마전까지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었던 예멘 난민 문제의 경우에서처럼 이제는 우리도 난민 문제에 대해 고민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난민이 영국에 들어오면 영국이 과연 어떻게 될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영국에서 일하며 세금을 꼬박꼬박 내는데도 난민들에게 밀려 의료보험 혜택을 제때 받지 못하거나 원하는 학교에 아이들을 보낼 수 없다면 어떻겠는가? 난민은 그렇게 돕고 싶어하면서 왜 정작 자국민인 영국의 노숙자에게는 관심이 없는가? <그림으로 읽는 유럽의 난민>

 

 <그림으로 읽는 유럽의 난민> 여러 곳에서는 위와 같이 난민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의 목소리도 표현된다. 그리고, 난민들의 모습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에 대한 답(答)을 주고 있다. 이제는 우리 사회의 주장이기도 한 난민문제에 대해 잘 대처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러 면을 봐야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입장, 난민의 입장, 그리고 인류의 입장. 자칫 주관에 휩쓸려 판단을 그르칠 수 있는 난민 문제에 대해, 이 책은 난민의 입장에서 우리에게 생각할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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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3 09: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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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3 10: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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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4 08: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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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4 08: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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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4 09: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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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을 말하다
장 지글러 지음, 이현웅 옮김 / 갈라파고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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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을 말하다 Chemins d'esperance>는 유엔(UN)인권이사회 자문위원인 장 지글러(Jean Ziegler, 1934 ~ )이 내부에서 바라본 유엔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 한계와 문제점, 그리고 저자의 UN에 대한 낙관적 전망에 관한 이야기다. 


 이 세계가 겪은 가장 끔찍한 학살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났다. 그 결과 6년 동안 5,700만명의 시민과 군인이 사망했고, 부상자, 장애인, 실종자가 수십만 명에 달했다. 유엔이 창설된 건 이러한 살육 때문이었다.(p112) <유엔을 말하다> 中


 1951년 7월 28일, 전 세계의 국가들은 난민의 지위와 관련된 협정, 이른바 '제네바 협약'을 승인했다. 이 협약에 의해, 새로운 보편적 인권인 보호권이 생겨났다. 자국에서 정치, 종교, 인종차별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누구나 국경을 넘어 외국 정부에 보호와 피신처 제공을 요구할 수 있으며, 이것은 박탈할 수 없는 권리다. 그런데 유럽연합은 지금 이 협약을 폐지하려 한다.(p57) <유엔을 말하다> 中


  2차 대전의 참상으로부터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유엔. 저자가 생각하고 있는 유엔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하나는 과거보다 거대해진 금융자본의 힘이며, 다른 하나는 인권(人權)을 더이상 유엔이 지키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세계화와 거대화된 금융자본으로 인해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기아(飢兒)에 허덕이고 있음을 전작(前作)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통해 밝힌 바 있다. <유엔을 말하다>에서는 소득 불평등의 문제는 경제적인 문제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나아가 정치적으로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인다.


 오늘날 번영을 누리는 벌처펀드는 부자는 힘이 세고 국가는 힘이 약하다는 사실을 왜곡된 방식으로 뚜렷이 보여준다. 세계화된 금융자본은 각국에 지지자와 하수인을 두고 있다.(p45)... 세계는 지옥 같은 악순환에 빠져 있다. 매우 부유한 사람과 극도로 가난한 익명의 대중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은 끊임없이 커지고 있다.(p52) <유엔을 말하다> 中


 세계화의 결과이자 소수 지배집단이 엄청난 부를 쌓을 수 있었던 특권적 수단은 '역외회사'다. '조세회피처', 곧 재산이나 수입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으며 은폐되고 비밀스런 은행 업무를 수행하는 국가에 등록된 이 기업은 대부분 불법적인 돈을 세탁하는 데 이용된다.(p350)... 탈세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재앙의 많은 부분에 책임이 있다.(p351) <유엔을 말하다> 中


 유엔은 미국의 재정과 협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국제기구다. 공짜가 없는 국제 정치에서 미국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유엔을 원조하고, 이를 활용하고 있음은 더이상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문제다.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들의 거주지에서 탄압받고 쫓겨가지만, 이스라엘과 미국의 이익을 위해 유엔은 결코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어두운 현실 모습이다.


 유엔이라는 조직으로 구체화되고 있는 다자 외교와 헨리 키신저의 제국주의적 이론은 상반된다. 하지만 유엔은 미국의 지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은 중앙 행정기관 예산의 26퍼센트에 해당하는 100억 달러를 유엔에 매년 지원한다.(p153) <유엔을 말하다> 中


 미국은 이스라엘의 육해공군과 첩보 기관에 매년 약 30억 달러를 지원한다. 미국의 용병 국가인 이스라엘은 제국주의적 권력에 필수불가결한 기능을 맡는다. 미국은 세계 산업생산량의 25퍼센트를 점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 놀라운 기계를 먹여 살리는 것은 석유다. 극히 최근까지 미국은 그중 60퍼센트 조금 넘는 양을 수입에 의존했다... 미국으로서는 페르시아만과 아라비아 반도의 군주국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전략을 따라야 했고, 이 지역에서 미국 중심의 질서를 보장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다.(p163) <유엔을 말하다> 中


 현재 미국을 움직이고 있는 거대 권력이 금융자본의 힘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결국 현재 유엔이 인권(人權)문제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결과라 여겨진다. 그런 면에서 금융자본문제와 인권 보장 문제는 별개의 문제가 아닌 하나의 과제라 하겠다. 미국으로 대표되는 상임이사국의 전횡 속에서 유엔은 인류의 시급한 문제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고, 그 대가는 남반구의 가난한 지역에 사는 이들이 지불해야 했다.


 오늘날, 실질적인 정의는 의심의 여지없이 사라지고 있다. 인류 역사상 세계의 길 위에서 헤매는 피난민과 이주민의 수가 이토록 많았던 경우는 결코 없었다. 기아는 난민촌을 휩쓸고 있다. 사막과 건조한 초원이 경작 가능한 땅을 삼키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의 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지역은 지금 건조한 땅으로 덮여 있다.(p117) <유엔을 말하다> 中


 금융자본에 의한 세계 지배와 약해진 국가 권력과 유엔.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기아와 난민 문제.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저자 장 지글러는 유엔의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저자의 어둠 속에서 빛을 희망하는 마음을 <유엔을 말하다>를 통해 발견하게 된다.


 현재 소수 지배집단이 전파하는 신자유주의의 거짓말 때문에 이 세계에서 공동의 의식은 소외당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의 의식에는 모든 인간이 동일한 권리를 지닌다는 생각이 내재되어 있다... 타인에 대한 공포, 부정, 경멸이 전 세계에 더욱더 맹위를 떨칠수록, 신비하게도 희망은 더욱더 커진다. 사람들의 의식이 반기를 들 때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다시 시작할 때다.(p18) <유엔을 말하다> 中


 현재 이 세계 구석구석의 모든 사회적 계층인 종교단체, 국가, 민족, 정치단체의 사회운동가, 조합, 연합단체, 비정부기구, 개인은 지금과 같은 세계 질서에 근본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이들의 동력은 동일성에 대한 의식이다.(p352)... 확실히 시민사회에도 모순은 있다. 그리고 진행되는 저항이 많다면 해결책도 불확실해진다. 하지만 국제적인 시민사회, 무엇보다 어떤 변혁을 거듭한 유엔이라는 무기를 갖춘 시민사회는 마침내 인간적이 된 세계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 (p353) <유엔을 말하다> 中


 저자는 <유엔을 말하다>를 통해 인권에 대한 보편적 인식과 문제의식이 현재의 어두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힘이라고 주장한다. 동시에, 그는 책 속에서 현재의 유엔이 진정한 국제기구로 거듭나기 위한 코피 아난(Kofi Atta Annan, 1938 ~ 2018) 전 유엔 사무총장의 개혁안을 소개하고 있다.


 코피 아난 사무총장은 일종의 유언으로서 안전보장이사회 개혁안을 내놓았다. 이 개혁안은 두 가지 주요한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이제부터 반인도적 범죄와 관련되는 모든 갈등 상황에서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국의 지위는 모든 국가가 교대로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p339) <유엔을 말하다> 中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국의 지위 독점과 거부권에 대한 코피 아난의 개혁안은 비록 현재 상임 이사국들에 의해 거부되었지만, 우리는 이로부터 현재 유엔 문제 해결의 첫 걸음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사진] 코피 아난 전 사무총장(출처: 한계레 신문)


 장 지글러의 <유엔을 말하다>에서는 위와 같이 현재 유엔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혁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우리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세계 평화를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가도 부가적으로 알게 된다. 코피 아난 사무총장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번 리뷰를 마친다.


PS. 이와 대조적으로 코피 아난 사무총장 후임인 반기문 사무총장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매우 냉혹하다. 미국의 조력자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음을 통렬히 비판하는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우리 역시 유엔에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반기문 사무총장이 선출된 일은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빈기문은 진지함과 냉소가 섞인 태도로 우리에게 말했다. "저는 미군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p156)... 미국으로서는 남한이라는 가신 家臣 같은 공화국 출신의 국민이라면 자신들에게 충성심을 가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p158)... 특히 나는 친구이기도 했던 두 명의 협력자를 잃었다. 사무총장을 맡은 사람은 코피 아난에서 생명력 없는 엑스트라 같은 인물로 대체되었다.(p329)  <유엔을 말하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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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9-10 21: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반기문 전 사무총창 비판에 대해 한마디 거들면요... 그 오랜 기간 공적이 없는 것도 큰 공적이다...ㅎㅎ

겨울호랑이 2018-09-10 21:37   좋아요 3 | URL
그렇지요... 정말 공적이 없긴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나름 노력했다고 생각합니다. 503과 함께 아프리카에 새마을 운동을 전파시키려 노력했다는 점은 노력의 함정이겠지만요...ㅜㅜ

2018-09-10 2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10 2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알벨루치 2018-09-11 0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은 예전에 사놓고 아직도 먼지만 가득합니다 겨울호랑이님 덕에 한번 읽어봤음 싶은데~잘될지 ㅋ글 잘 읽고 갑니다 오늘도 건강하십시오^^

겨울호랑이 2018-09-11 09:30   좋아요 2 | URL
카알벨루치님께서는 평소 책을 많이 읽으시는데, 아직 먼지 쌓인 책이 있다는 것을 보면 정말 많은 책을 보유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카알벨루치님이라면 잠시 시간을 내시면 금방 읽으시리라 여겨집니다. 감사합니다. 선선한 좋은 가을 날 보내세요!

카알벨루치 2018-09-11 09:34   좋아요 1 | URL
읽고픈 책은 많고 머리는 안 따라주고 조급함보다는 느긋하게 즐기면서 읽어야하는게 젤 중요한 것 같아요 인생은 짧고 죽기전에 우린 세상의 모든 텍스트를 다 못 읽고 죽을것이니 하루하루 내 맘의 여유를 발견하고 읽고 깨닫고 쓰고 그리고 그렇게 살아진다면 그게 젤 큰 하루의 소확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겨울호랑이 2018-09-11 10:03   좋아요 2 | URL
^^:) 맞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여유있는 하루 보내세요!

나와같다면 2018-09-11 20: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nowhere man 어디에도 없는 사람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2014년 한해만 우려감(concerns)을 140번 나타냈다

제가 화가나는 부분은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서 그에 합당한 일을 하지못했다는 점

겨울호랑이님 말씀대로 우리 역시 유엔에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겨울호랑이 2018-09-11 18:34   좋아요 2 | URL
그렇습니다... 저는 그의 영향력을 임기직전 대선 출마 여부로 시끄러울 때 겨우 느낄정도였으니, 전 세계 분쟁국 사람들과 난민들이 느낀 배신감과 무력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2018-09-11 2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11 2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12 0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12 0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12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12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12 14: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12 2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14 0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9-16 2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끔 겨호 님 글 읽으면서 놀라곤 하는 부분은 호기심의 광역입니다. 정말 다양한 분야를 좋아하십니다... 진정한 독서계의 달인이시란 생각이 듭니다. 그나저나 연의는 그 유명한 뽀통령의 옆자리에 있으니 출세했군요... ㅎㅎ

겨울호랑이 2018-09-16 22:1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곰곰발님. 제가 많이 몰라서 그저 이것저것 찾아보게 됩니다. 모르는 것이 많다보니, 더 찾아보게 되는 것은 장점이 되기도 하는 것 같네요. 자세히 보시면 사진에서 연의는 풍선껌을 불고 있습니다. 나름 뽀로로와 풍선껌 대결을 하는 진검승부(?)의 긴장감 넘치는 현장입니다.^^:)
 
정당사회학 - 근대 민주주의의 과두적 경향에 관한 연구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6
로베르트 미헬스 지음, 김학이 옮김 / 한길사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모든 형태의 과두정을 분쇄하는 것에 이론적인 존립 근거를 두는 사회혁명 정당과 민주 정당들에게서, 그들이 공격하였던 그 경향이 나타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책의 핵심적인 과제는 바로 그 물음에 대하여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답변을 제시하는 것이다.(p55) <정당사회학> 中


[사진] 로베르트 미헬스(출처 : 뉴스앤조이)


  로베르트 미헬스(Robert Michels, 1876 ~ 1936)의 <정당사회학>은 민주주의(民主主義)를 추구하는 정당(政黨)에서 역설적으로 과두정(寡頭政)에 의한 운영이 일어나고 있는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미헬스가 생각하는 과두정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정당정치의 토대가 외면적으로 민주주의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에만 집중하다가는, 모든 정당이 귀족정,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과두정으로 변형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문제는 혁명을 지향하는 정당들조차 보수 정당 못지 않게 과두적 경향을 분명하게 드러낸다는 데 있다.(p54) <정당사회학> 中


1. 과두정의 배경 : 정당 조직의 필요성


 저자에 따르면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한 국가들에서 정당은 항상 전쟁 상태에 놓여 있게 된다. 표를 얻고 정권을 얻기 위해서는 중앙집권형 조직이 효율적이었기 때문에 근대 정당은 군대처럼 조직화 되었다.


  근대 정당은, 정당이란 단어의 정치적 의미에서 '전쟁 조직'이다. 정당이 준수해야 하는 전술학의 기본 법칙은 전투 태세이다... 중앙집권은 예나 지금이나 결정의 신속성을 보장한다. 대규모 조직은 그 자체로 둔중한 기구이다. 만일 대중 정당이 신속한 결정이 요청되는 일상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대중으로 하여금 제한적이나마 일정한 판단력을 갖추도록 조치해가면서 당을 운영한다면, 시간적 손실과 공간적 거리 때문에 순수한 형태의 민주주의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전쟁을 치르는 근대 정당에서는 엄격한 위계질서가 불가피하다.(p82) <정당사회학> 中


  조직은 과두화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당은 지도하는 소수와 이를 따르는 다수로 자연스럽게 나누어지게 된다. 결국 미헬스에 따르면  치열한 경쟁에 살아남기 위해 정당의 조직은 변화되어 왔으며, 그 과정에서 정당의 모습은 과두제(寡頭制, oligarchy)로 흘러간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의 밑바탕에는 '무지한 대중'이 놓여 있다.


 조직은 정치의 필수적인 원칙이다... 조직이란 곧 과두정에의 경향이며, 본질적 성향은 귀족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조직의 메커니즘은 견고한 구조를 창출함으로써 조직화된 대중을 심대하게 변화시킨다. 그리고 조직은 대중과 지도자의 관계를 역전시킨다. 조직은 정당과 노동조합을 지도하는 소수와 추종하는 다수로 이분(二分)시키는 것이다.(p68) <정당사회학> 中


 대중은 정당의 기본 문제를 정식화하거나, 정식화된 사항을 검토할 능력이 모자란다. 대중의 무능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몇몇의 문제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사실 지도자 권력의 가장 견고한 기반은 바로 대중의 무능이다. 대중의 무능은 지도자의 권력에게 현실정치적인 정상성뿐만 아니라, 일정한 정도의 도덕적 정당성까지 부여한다.(p124) <정당사회학> 中


2. 조직화의 조건 : 무지한 대중 


 참정권을 보유한 국민들 중에서 공무에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의 수가 극히 소수라는 주장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사적 이익과 공적 이익 사이의 내적 연관성을 그리 강렬하게 의식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국가라고 지칭되는 조직이 개인의 사적인 일과 안녕과 일상에 미치는 작용과 반작용을 명료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p88) <정당사회학> 中


 저자에 따르면 대중은 무지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공무(公務)에 많은 관심이 없다. 

 이들은 군중심리에 따라 움직이며 정치인의 말 한마디에 선동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가진 권리를 소수의 지배자들에게 위임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다수는 자신을 대신하는 소수가 있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소수의 지도를 받고자 하는 대중의 욕구는 곧잘 영웅 숭배로 연결되고, 그 욕구는 조직화된 노동자 정당에서도 한계를 모른다. 그 보편적인 구습집착증(Misoneismus)은 그렇지 않아도 각종의 진지한 개혁 노력을 좌절시켜 왔는데, 그 현상은 줄어들기는 커녕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p92) <정당사회학> 中


 대표의 도덕적 권리는 '위임'으로부터 발전된다. 일단 대표자로 선출된 자는, 정관이 바뀌거나 아주 특별한 일이 생겨 대표 업무에 지장이 초래되지 않는 한 그 직책을 유지한다. 그리하여 원래는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설치된 선출직이 종신직이 된다. 관습이 권리가 되는 것이다.(p84) <정당사회학> 中


3. 과두제의 정착


 반면, 지도자가 된 이들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자신이 맡은 지위에 따라 자신의 가치를 자각하게 된 지도자들은 다수를 지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자본(資本)과 같은 속성을 가진 권력(權力)은 점차 확대되고 세습화 된다. 


 대중은 지도를 욕구하지만 지도자에 무관심한 것과 대조적으로, 지도자에게는 타고난 권력욕이 있다. 그리하여 조직의 기술적 논리 때문에 발생한 과두 민주주의는 권력욕이라는 지도자의 보편적인 인성에 의하여 더욱 강화된다. 조직, 관리, 전략의 필요에서 시작되었던 것이 심리에 의하여 완성되는 것이다.(p229) <정당사회학> 中


 일단 지도자로 올라선 사람은 결코 정치적 지위가 낮았던 과거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이는 사회적 모세혈관의 법칙에 반(反)하는 것이다. 모든 권력 의식은 과대망상을 부여한다. 게다가 인간의 가슴에는 좋건 나쁘건 권력에의 욕망이 깃들어 있다. 이것은 심리학의 기초적 상식이다. 지도자가 자신의 가치를 인지하게 되고, 동시에 그가 대중 역시 지도자를 욕망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되면, 그의 지배자로서의 천성이 발휘되기 시작한다.(p233) <정당사회학> 中


  당직자들의 독재 욕구는 당의 재산을 관리하는 경제적 권력까지 장악하도록 만든다. 지도부는 정복한 당의 재정권력을, 자신의 권력 지위를 공고화하고 안정화시키는 데에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p163)... 권력은 권력을 확장하려는 경향이 있다. 권력을 수중에 넣은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확대하며 권력 지위를 방어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요새를 쌓아올리고, 대중의 주권과 통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노력한다.(p235) <정당사회학> 中


4. 근대 민주주의 : 그들만의 리그(League)


 대중이 지도자보다 강력하다는 것을 입증한 사례는 극히 드문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기존의 지도자들과 갈등에 빠져든 새로운 지도자가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힘있는 자로 거듭나는 경우, 즉 새로운 지도자가 기존의 지도자를 끌어내리고 그를 대체 하는데에 성공하는 경우가 통상적이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민주주의가 거둔 성취는 신속하게 무(無)로 돌아가고 만다.(p226) <정당사회학> 中


 이렇게 만들어진 근대민주주의 체제에서 대중은 권력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존재였다. 오랜 기간 잊혀졌던 대중이 다시 정치인들의 관심을 받게 될 때는 정권교체가 이루어질 때 뿐이었다. 결국, 민주주의가 향하는 길의 끝에는 과두정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정당사회학>은 마무리된다.


 오늘날 대중은 거의 언제나 지도자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설사 대중이 지도자들과 불화를 빚으면서 특정한 행동에 돌입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거의 언제나 대중이 지도자들을 오해하였기 때문에 발행한 것일 뿐이다(p193)... 대중은 가끔 의식적으로 봉기하려 하지만, 지도자들은 언제나 그들의 열정에 재갈을 물린다. 당 대중이 능동적인 배우로 역사의 무대 위로 등장하여 정당 과두 세력의 권력을 제거하는 때는, 오로지 지배계급이 혼망 속에서 억합을 과도하게 증대시키는 경우뿐이다.(p194) <정당사회학> 中


 저자 미헬스는 <정당사회학>을 통해 정권을 잡기위한 조직화가 소수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게 된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일반 대중은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는 방법도 의지도 없기 때문에 기꺼이 소수 지배자에게 권력을 위임하며 권력의 맛을 본 지배자들은 경제, 정치 권력을 유지하고 세습하기 때문에 결국 민주주의는 과두정으로 옮겨갈 수 밖에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결국 <정당사회학>은 민주주의에 대한 우울한 예언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후에 미헬스는 1914년에 이탈리아로 귀화하고,  파시즘(fascism)에 빠지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러한 그의 인생은 <정당사회학>과 무관하게 보이지 않는다.


 [사진] 무솔리니와 히틀러(출처 : 위키백과)


 <정당사회학>은 이처럼 민주주의에 대한 음울한 전망을 내놓고 있지만, 이러한 전망이 현재도 유효할 것인가에는 의문이 따른다. 소수에게 정보가 과점되던 과거와는 달리 정보가 다수에게 공개되고, 이에 대한 반응도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요즘 현실 속에서 미헬스의 '무지한 대중'이라는 전제는 절반 정도는 맞지 않아 보인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 또한 하게 된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야고 1:22)


 민주주의 제도 아래서 대중의 의사는 선거를 통해 나타나게 된다. <정당사회학>과 달리 대중이 무지하지 않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는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실행과 실천이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유권자의 적극적인 투표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라 여겨진다.

 


 얼마 전 tumblbug을 통해 6.13 지방선거 가이드인 <전국투표전도 2018> 제작을 후원했고, 책자를 받아 보았다. 현재 지방선거의 이슈와 지역별 투표율 등의 정보가 실려있는 책자 제작 후원은 예상보다 많은 후원을 받고 성공리에 종료되었다. 이러한 유권자들의 관심이 살아 있을 때 민주주의가 지켜질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홍보 광고 같은 결론을 마지막으로 이번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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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6 2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07 0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1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2 0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6-16 1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풀뿌리 민주주의, 지방자치 확대가 모색되는 거 아니겠나요? 정당, 중앙집권식으로 체제를 만들면 대중의 힘이 미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작은 정치로 분할시키면 더많은 대중이 참여할 수 있겠죠. 지금 체제도 결국 권력자들이 만들어놓은 판이고 뿌리가 깊어 궤도 수정이 어렵긴 하다고 생각하지만 다수의 의지가 있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겠죠.

겨울호랑이 2018-06-16 11:02   좋아요 1 | URL
저 역시 AgalmA님 말씀처럼 지금 당장은 기득권의 높은 벽에 가로막혀있지만, ‘우공이산‘의 마음으로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씩 걸어간다면 언젠가는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