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제법 찬지 코끝이 간질간질하다.
재채기도 자꾸 나고...
공부하는 사람에게 건강은 재산이니 늘 몸조심하기 바란다.
오늘은 김남조 시인의 시를 몇 편 살펴보자.
우선 그의 <설일>을 한번 읽어 보렴.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설일)
이 시는 고1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던 시다.
'설일'이란 제목이 낯설다.
'설날'이란 의미도 있을 것이고, '눈오는 날'의 의미도 담으려고 애매한 말을 썼는가 보다.
'설날'은 '섣달의 섣'에 붙은 날이다.
'숟가락'의 'ㄷ'이 'ㄹ'로 바뀌었듯, 섣달의 'ㄷ'이 'ㄹ'로 바뀐 예라고 볼 수 있다.
섣달은 한 해의 마지막 달을 일컫는다.
섣달의 마지막 날은 '섣달 그믐날'이라고 부르지.
요즈음처럼 한 해의 끝무렵을 한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라는 뜻으로 '세모(歲暮, 해 세, 저물 모)'란 한자를 쓴다.
한자어와 우리말을 섞어서 '세밑'이란 말을 쓰기도 하고...
아무튼 새해를 앞둔 사람의 마음은 조금 복잡하다.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보면서, 반성과 후회의 감정을 가지기도 하고,
맞이할 새해를 기대하면서, 희망을 품어 보기도 하게 되는 때인 것 같다.
이 시의 화자도 그런 마음이었을 거야.
그런데, 새해 첫날, 그만 하늘에서 함박눈이 쏟아졌던 모양이구나.
그래서 반가움에 눈물이 다 나려고 했던 것 같아.
눈녹은 눈물인지, 눈에서 나는 눈물인지...
1연의 '겨울나무'와 '바람'은 둘 다 '왕따'의 이미지다. 외로운 존재들.
잎사귀도 없는 앙상한 겨울나무와 차가운 겨울 바람.
그런데, 그 둘이 어울려서 친구가 되었구나.
바람을 '머리채 긴', '투명한 빨래처럼 가지 끝에 걸린' 것으로 표현해서 시각화 하고 있다.
2연에선, 겨울 나무와 바람이 혼자가 아니듯, 나도 혼자는 아니다.
외톨이로 서보는 날도, 하느님만은 나와 함께 계신다...
이런 기독교적 입장에 선 시라고 볼 수 있다.
101가지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 기억이 난다.
사후 세계에 가서, 자신의 삶을 비디오로 보던 사람이,
"하느님, 저의 삶에 항상 하느님의 발자국이 함께 해 주셨음을 이제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힘들었을 땐, 하느님의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제가 힘들었을 때 주님은 어디 계셨던 겁니까?"
이렇게 오만불손하게 따졌다.
하느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지.
"야, 이 싹퉁바가지야. 네가 힘들 때 찍힌 발자국은 다 내거다.
그 땐, 내가 널 안고 가지 않았느냐?"
삶은 '은총의 돌층계'이고,
사랑은 '섭리의 자갈밭'이라고 은유법을 쓰고 있다.
삶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득한 돌계단 어디쯤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이 없어서 서운한 마음일랑 거두고 살자는 긍정적 시선이 느껴지니?
그리고 사랑도 자연의 이치(섭리)에 따라 걸어가는 자갈밭과 같아서,
자갈길이 험난해 보여도, 발부리에 채이는 돌 하나하나도 다 자연의 이치에 의한 것이란다.
애인이 없다고 너무 상심할 일도 아닌 모양이다.
이제까지는(이적진) 항상 '불평'으로 가득하던 화자 자신을 반성한다.
말로써 풀던 마음...은 불평이겠지.
말없이 삭이고, 너그럽게 살고 싶다.
삶은 하루하루가 황송한 축복이라고 여기고 올해는 살고 싶다... 이런 기원.
새해가 되었는데 눈이 내린다.
그러니깐, 눈시울이 붉어지기라도 하는 듯, 눈물이 나려나보다.
눈이 녹은 물인지... 눈에서 나는 물인지...
그 눈물이 다시 승천하여 구름이 되었다 다시 눈이 되어 내리는
물의 순환이 마지막 연에 드러났구나.
우리 삶도 이렇게 돌고 도는 순환의 고리 어디쯤에 놓인 것이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득한 것이니,
불평 불만만 일삼지 말고, 늘 긍정적으로 살자는 이야기.
주제는 <신의 존재를 느낌으로써 고독을 극복하고, 너그러운 삶을 살아가려는 새해의 다짐> 정도가 되겠지.
다음엔 같은 시인의 <겨울 바다>를 감상해 보렴.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 이랑 위에 불 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겨울 바다)
이 시는 조금 어려워 보인다.
아이들이 간혹 도대체 이 시가 말하려는 바가 뭔지 모르겠단 질문도 해.
간단하게 줄여 말하면,
가슴속에 수심으로 가득한 화자가 겨울바다로 간다.
바다는 휑하니 썰렁하고 슬퍼 보이지.
절망으로 가득한 화자.
그렇지만... 화자는 바닷가를 거닐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면서 <기도>를 드리지.
기도 속에서 자신의 차가운 삶을 만든 것은 자신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는지도 몰라.
그래서 '남은 날'동안 뜨거운 마음으로 살리라는 생각을 하지.
그러고 나니, 앞부분의 <허무의 불>로 보이던 태양이 <수심 속 물기둥>으로 보이기도 해.
'불'은 소멸의 이미지지만, '물'은 생성의 이미지, 곧 희망의 의미로 읽을 수 있겠지.
이렇게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통하는 이미지를 '원형적 이미지'라고 한단다..
남은 날은/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적지만
이런 부분을 봐도 화자가 기독교 신자임을 짐작할 수 있겠지?
종교란 것은 이렇게 힘들 때, 스스로 재생의 힘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구실을 하기도 한단다.
마지막 부분을 한번 읽어 보자.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고통을 인내한 화자의 눈엔,
허무의 불인 태양이 드디어 물 속에 기둥을 이룬 장관을 이루고 있구나.
물 속에 기둥을 이룬 것이 이해가 안 다면, 위의 사진을 보렴.
해넘이(일몰) 가까운 시각의 햇살이 기둥을 이룬 모습 말이야.
앞의 사진은 왠지 쓸쓸한 것 같고, 뒤의 것은 뭔가 기운차 보이지 않니?
이 시의 주제는 <삶의 허무를 극복하려는 의지> 정도로 보면 되겠다.
김남조 시인은 아빠의 대학 선배라는데, 연애시로 유명하단다.
대학 다닐 때 남학생들이 졸졸 따랐다는구나. ^^
그의 유명한 연애시 한 편을 보자꾸나.
나의 밤 기도는
길고
한 가지 말만 되풀이한다
가만히 눈뜨는 건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 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나의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오직 너를 위하여
모든 것에 이름이 있고
기쁨이 있단다
나의 사람아 (너를 위하여)
뭐, 더 설명은 필요 없겠지?
이 시를 읽노라니, 왠지 '평화의 기도' 가 떠오른다.
성 프란시스코의 기도라고 알려져 있어. 한번 읽어 보렴.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 오는 자 되게 하소서.
주여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하게 하소서.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sow love;
where there is injury, pardon;
where there is discord, harmony;
where there is doubt, faith;
where there is error, truth;
where there is despair, hope;
where there is darkness, light;
and where there is sadness, joy.
O Divine Master,
grant that I may not so much seek
to be consoled as to console;
to be understood as to understand;
to be loved as to love;
for it is in giving that we receive,
it is in pardoning that we are pardoned,
and it is in dying that we are born to eternal life.
이탈리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St.FRANCIS of Assisi )는 12세기의 수도자란다.
평생 가난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고, 그래서 성인으로 모셔지는 인물이야.
성 프란치스코와 얽힌 일화는 참 많은데,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단다.
어느 날 저녁 프란치스코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대.
나가 보았더니 한 험상궂은 나병 환자가 서 있었어.
그는 몹시 추우니 잠시 방에서 몸을 녹이면 안 되겠느냐고 간청하였다는구나.
프란치스코는 그의 손을 잡고 방으로 안내해 주었어.
그러자 그 환자는 다시 저녁을 함께 먹도록 해달라는 거야.
두 사람은 같은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어.
밤이 깊어지자 그 환자는 다시 부탁하기를,
자기가 너무 추우니 프란치스코에게 알몸으로 자기를 녹여달라고 하더래.
프란치스코는 입었던 옷을 모두 벗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 나병 환자를 녹여주었단다.
이튿날 아침 프란치스코가 일어나보니 그 환자는 온 데 간 데가 없었어.
뿐만 아니라 왔다간 흔적조차 없었단다.
프란치스코는 곧 모든 것을 깨닫고는 자신과 같이
비천한 사람을 찾아와 주셨던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올렸다는구나.
내 곁의 가장 더럽고 낮은 이를 볼 때 바로 <예수>로 보라는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이런 이야길 하다 보니 고인이 되신 이태석 신부님 생각이 나는구나.
신부님은 인제대 의대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후 신부님이 되었단다.
2001년 사제품을 받자마자 수단으로 파견돼 2008년 11월까지 8년여간 봉사활동을 벌였단다.
40도가 넘는 더위 속에서 수단 남부 톤즈 마을 사람들을 위해 12개 병실을 갖춘 병원을 짓고
홍역과 결핵, 한센병 등 질병으로 고통받는 주민들을 위해 예방접종을 실시하고 진료활동을 진행하셨단다.
그러나 이태석 신부님은 귀국한 뒤 건강검진에서 대장암 판정을 받고 함암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올해 1월 선종하셨어.
요새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돈벌이의 수단으로 의대를 진학하곤 하는데,
신부님처럼, 가난하고 못가진 이들의 벗이 되는 진정한 슈바이처의 가슴이
어두운 세상의 등불이 되는 것 같기도 하구나.
과연 잘 사는 게 어떤 건지, 생각해 볼 만 하지 않니?
이왕 한 번 사는 인생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