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가 있고 나도 이런저런 행사가 겹쳐서 한 열흘 쉬었구나.
이제 기말고사도 마쳤고, 제대로 고3 올라가기 위한 공부를 시작해야 하는 기간이다.
학생 시절에 내내 공부만 하는 일은 참 피곤하고 힘든 일이다.
아빠는 아들이 그렇게 살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제 마지막 고교 1년은 좀 열심히 살아주었으면...
너의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
탐구과목 강사로 유명한 손주은 씨 말대로 '스스로 감동받는 공부'를 해봤으면 한다.
그런 경험 자체가 인생에 큰 밑거름이 될 것이라 믿으므로... 

오늘은 조금 어려운 시들을 살펴보려 해.
김춘수의 '꽃을 위한 서시'를 우선 읽어 보자.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꽃을 위한 서시, 김춘수> 

전에 한번 본 적이 있니? 
느낌이 어때?
뭔가 좀 있어 보이기도 하고, 그런데... 그 뭔가가 과연 뭔지, ㅋㅋ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거 같다. 결혼식장의 조금 경건하고 신비스런 신부처럼... 베일을 쓰고. 

시를 그냥 분위기가 좋아서 낭송하면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좋은 감상법이다.
그게 오히려 가장 좋은 방법이야. 
시를 꼭꼭 입에 넣고 씹듯이,
딱딱한 부분은 한참을 입에 넣고 불린 뒤에 쪽쪽 빨아먹을 수도 있겠지.
아빠가 설명하는 것도 정답은 아니고,
시를, 그리고 문학을 읽어가는 방법 중의 하나니깐, 편안하게 읽기 바란다.

이 시는 우선 제목이 멋지다.
꽃을 위한 서시, 캬,

우리 나라 시 중에 젤 유명하고, 젤 멋진 시가 뭐겠어?
여기서 다른 시 대면 안 되지?
윤동주의 <서시>라고 해야지. ^^
윤동주가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생각하며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음을 부끄리며 쓴 시.
그 시집의 제목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란 시집이고, 그 처음에 올린 시가 바로 <서시>야.
서시의 뜻은 시집의 <서론>격인 시란 뜻인데, 시집 전체를 아우르는 상징적인 권두시란다. 

꽃을 위한 서시니깐, 이 시를 누구한테 바친다고? 바로 꽃이지.
그런데, 똑, 잘라서 마지막에 뭐라고 했지?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라고 했단다.

이 시는 꽃에게 바친 시인데, 그 꽃을 한 단어로 뭐라고 비유했다고?
신부. 

아, 신부...
결혼식 첫날밤 이야기를 어린 시절엔 다들 궁금해 하듯,
신랑...이란 말에 비하자면, 신부...란 말은 뭔가 조금 신비스럽고(발음도 비슷하네 ㅋㅋ)
비밀스런 구석이 있어 보이고, 순수하고 깨끗하면서도 모든 걸 알수 없는 존재.
아름다우면서도 함부로 가까이하긴 어려운 존재... 이런 느낌이 있지 않을까?

사실 결혼식은 신부를 위한 거란다.
엄청난 가격과 엄청난 부피를 자랑하는 신부의 웨딩드레스에 비하면,
양복이든 턱시도든... 신랑이란 참, 들러리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
이 시는 꽃을 위한 서시,이면서, 신부를 위한 서시이기도 해.
아, 얼마나 매력적이야.
아내도 아니고(음, 아내 하니깐 느낌이 팍 삭지. 한 순간에 ㅍㅎㅎㅎ)
신,부.
신부는 말 그대로 결혼식의 꽃이란다.
환하게 웃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그날의 꽃.
그날 찍는 수백 장의 결혼식 사진은 사실은 신부를 위한 거야!
야외촬영, 특수분장 촬영 모두 그런 거지.

그 신부를 사랑하는 화자는 신부를 꽃, 같대.   

자, 여기까지... 읽고 나서,
이 시의 첫 구절을 읽으시면, 허걱, 할걸.
아깐 안 보였던 구절이 바로보이니깐. ㅍㅎㅎ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캬, 요즘 유행이 짐승이지?
'내 귀의 캔디'를 속삭이는 백지영 뒤로 보여주는 짐승돌의 식스팩!!!@_@
꺅~~~, 짐승 중에서도 <위험한 짐승>.
드디어 첫날밤이 시작되는구만.
오늘의 꽃, 신부와 '시방 위험한 짐승'의 한판 승부. 

자, 19금은 요기까지.

<19 금>이 표지에 적힌 책을 오빠 방에서 본 여동생이
긴장하면서 그 페이지를 넘겼더니, 뭐가 나왔게요?
<20 토>

이제 수능 모드로 돌입해보자. 수능 320일 전이니까. 좀 경건하게 ㅋㅋ
여기서 '위험한 짐승'은 '윤리적'으로 위험한 짐승이 아니야.
이 위험한 짐승은,
지적으로 불완전한 인식을 가진 인간,을 뜻하는 말이란다. 

갑자기 재미없어졌지?
자, 정말 알고 싶은 신부, 오늘의 주인공 꽃, 그의 베일을 걷고 싶지만,
<존재>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순간, 그 <존재>는 알 수 없는 존재로 되어버리고 만다는 거야답니다. 

내가 엄마랑 결혼한 때
원래는 아빠 친구들 중에 여자라곤 어머니밖에 모르는 두 녀석에게 미팅을 제가 주선했거든.
그랬는데 대전 카이스트 있던 한 녀석이 펑크를 낸 거야. 토요일인데 못올라오겠단 거지.
그래서 내가 대타로 미팅을 했는데, 그 중의 한 여인이 지금 너의 엄마란다.

처음엔, 얼굴과 이름과 직업 정도만 알았지.
그러니깐, 그 아가씨가 '아는 아가씨'가 된 거지.
그런데, 그날 새벽 1시까지 놀다가 택시로 집앞까지 바래다 주고(이때부터 흑심이 있었던 건 아니고. 매너남 ㅋ)
집에 왔는데, 잠자리에서도 계속 얼굴이 얼른거리는 거야.
전번도 못 땄는데...ㅠㅜ
그래서 다음날 엄마가 근무하는 아산병원 응급실로 전화를 해서 아내를 바꿔달라고 했지.
그래서 그날 오후에 또 만났어.
아, 둘이 만나니깐 얼마나 좋던지. ^^
근데, 그날 딱, 만나니까...
알고 싶은 게 너무 많아지는 거야. 
그래서 묻고 또 묻고... 그게 사랑인 모양이지.
알고 싶어요...가 무한대로 나올 수 있는 거.
듣고 또 들어도, 또 묻고 묻는 거... 그래서 엄마랑 일주일에 두세번 만나면서 급 친해졌지.
그런데, 만나고 만날수록 정말 궁금한 건 계속 생기더라고. 

이런 이야기를 이 글의 화자는 하고 싶은 거란다.
인간의 <존재>의 본질은 알고자 하면 끝도 없이 알 수 없게 되는 것 같다. 이런 거.
나는 쟤 알아~ 라고 하지만, 그 사람과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정말 아는 건 없는 거잖아.
심지어, 나는 내가 제일 잘 알아. 하고 뻐기지만,
정말 곤란에 빠지면 정신과 가서 '제가 누구래요?' 이렇게 묻게 되는 거. 
나를 알려고 절간에 들어가서 '스님, 제가 누군지 알고 싶어 왔습니다.' 이렇게 물으면,
큰 스님은 '너를 가져오너라, 네가 누군지 가르쳐 주마.' 이러실 걸?

'위험한 나'는 너를 정말 알고 싶어 해.
그런데, 내 손이 닿으면, 너는 까무룩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그리고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피었다 지는 꽃.
그 아름다운 꽃은 '이름도 없이'(無名 무명) 피었다 진다.
그 예쁜 것들의 한 송이 한 송이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지만,
아, 그것들은 그 아이들의 특색을 깨닫기도 전에 져버리고 말아. 

그래서 이 맘 보드라운 아저씨는 눈물이 난대.
그 아름다운 하나하나의 존재들을 인식도 하기 전에, 져버리고 마니까.
그래서 이 <이름없음 無名, 무명>의 존재들을 기리기 위해서
나는 불을 밝히고 한밤내내 운단다.
아, 어떡하면 너희 존재를 내가 알아챌 수 있겠니~~

이렇게 우는 사람은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지.
관심이 많은 사람이고.
바로 옆에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은데, 바쁘다는 핑계로 다들 외면하고 살아간단다. 슬프게도.
그래서 울던 이 화자는,
밤늦게 어떤 앎의 문을 두드린다.
돌개바람처럼 탑을 흔들기도 하지만, 여전히 탑의 본질을 알 수는 없어.
그렇지만, 그 정성이 돌에 스며들면
그 탑의 돌이 의미있는 존재, 금이 될는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금과 가장 연관있는 탑이 뭘까?
한자로 '쇠 금 金'자와 비슷하게 생긴 '금자 탑'은?
바로 피라미드란다.
보잘것없는 나의 관심이
상대의 본질을 알고자 노력한다면... 피라미드처럼 훌륭한 결과물을 얻을지도 모르지.
크기가 모든 것의 다는 아니지만...

어린 왕자에서 생 텍쥐베리가 그러잖아.
길들이면, 의미있는 존재가 된다고.  

자, 이 시를 다시 읽어보자.
이 시는 사실은 꽃,을 위한 시도 아니고, 신부를 위한 시도 아니란다.
이런 시를 <철학시>라고 한대.
헐~ 철학은 또 뭐람... 금속 공학이면 몰라도...
철학은 생각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인데,
철학, 종교에서 관심을 가지는 것 중의 가장 기본이, <존재의 본질>을 인식하는 일이라고 하더라. 
그 <존재의 본질>을 새침떼기이며, 말해주지 않고 배시시 웃기만 하는 <신부>에 비유하는 시란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너는 이름도 없이/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탑을 흔들다가/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꽃을 위한 서시, 김춘수>

  
뭔가 좀 알 것 같아? 알쏭달쏭 하다고?
그럼 이런 시 중에 또 유명한 게 있으니 같이 보자.
하는 짓은 비슷하니깐, 그냥 한번 읽어 보자고. 
신동집의 <오렌지>라는 시야.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할 수 없는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는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도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는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도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에 있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에 있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거죽엔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오렌지 ,신동집)

역시 똑같은 상황이 나온단다.
이렇게 알려고 하는 순간부터, '어떤 상태'가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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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모든 <진리 탐구의 상대>는 <의문 덩어리>라는 걸 생각하는 사람들은 머리가 좀 복잡하겠지? 
그렇지만, 노력하면,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기도 해. 잘은 아직 몰라도.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박남수, 새, 부분> 

박남수의 <새>에서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란. 
'새'를 소유하고 싶은,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은 포수가,
그만 새의 순수를 겨냥하여 빵! 하고 쏘아 봤자...
그러나, 새의 순수, 새의 본질, 새의 진정한 모습을 알기 전에,
포수의 한덩이 납,이란 방법은, 도구는, 모두 존재의 본질을 상하게 하고 만다는...

 

좀더 유명한 김춘수의 <꽃>을 다시 한번 보자.
이 시는 워낙 유명하고, 주제도 쉽게 드러나니깐, 설명은 굳이 필요하지 않을 거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싶다. <김춘수, 꽃> 

아까 꽃을 위한 서시에서 <무명>이란 말이 나왔거든.
기억 나니? 이름 없음. 無名.
그토록 아름다운 꽃들에게 이름도 없이 스러지게 해서, 기억하지 못해 미안해~ 이런 거였잖아. 

삶도 마찬가지일걸?
우리 모두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도 존재하긴 했지만, 그저 거기 있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할 따름이란 거야.
친구들이 네 이름을 불러주면 괜히 금세 친해지잖아.
특히 칭찬이라도 해주면...
이름을 불러주면, 그렇게 신이 나는 거지. 그게 바로 알아주는 거니깐.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거지.
그게 바로 <명명 命名, 이름붙임>의 힘이란다. 

명상록으로 유명한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마르코만 인들과 싸울 때 용맹스런 사자들을 데리고 갔대.
마구 달려오는 사자를 난생 처음 본 마르코만 인들이 장군에게 물었어.
저 괴수가 뭐냐고.
그랬더니, '저것은 개다. 로마의 개다.'이랬대. 결과는 뻔하지?
로마의 개를 몽둥이로 다 때려 잡았다는 거야.
사자라면 무서워했을 텐데, 개라니깐 우습게 보고 때려 잡을 수 있었던 거지.

명명의 힘은 그렇게 크단다. 이름을 불러주는 일. 상대를 알아주는 일...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는데, 칭찬은 '빈말'과 완전 다르잖아?
정말 그 사람의 장점을 들추어 칭찬해 주는 일. 얼마나 사람을 기쁘게 하겠어?
휴 =3=3 선생님들이 제일 못하는 게 이거야. 꼬집기는 도가 텄는데 말이지. ㅎㅎㅎ   
가끔 아빠가 조금 미안하기도 하구나.

조지훈의 <민들레 꽃>이란 시가 있어.

까닭 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도
애처롭게 그리워지는데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距離)에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느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는
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

잊어 버린다. 못 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조지훈, 민들레 꽃> 

마음이 한없이 외로울 때,
아, 내 존재는 도대체 이게 뭐야~~~>?
아, 짱나~~~ 이런 날,
까닭없이 마음이 외로운 날이 있지?
그런 날, 지금은 이별했는지, 사별했는지 내 곁에 없는 그대가 생각나고.
그대는 민들레 꽃 안에서,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고 있구나.
당신과 나 사이엔 저바다 보다 먼 아득한 거리가 있지만,
그대는 조용히 나를 찾아온단다.
그대와 내가 말했던 <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가 나의 존재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몰라요~
이런 시야. 

존재의 외로움은 근원적인 것이겠지.
본질적인 거. 
어차피 '너 날 수 있어?' 이렇게 묻는다면,
'응, 나는 너 일수 있어...'이렇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
얼마나 되겠니?
만일, 있다면, 정말 아끼고 사랑해야겠지?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ㅎㅎㅎ  

그렇지만. 또 우리는,
서로는,
영원히 단 하나의 세포도 공유할 수 없는 남남인 것이란다.
서로의 본질을 알지 못해 눈물짓는 것보다는,
민들레꽃처럼 한 순간이라도 서로 위로해 주는 존재가 되면 그것도 성공한 존재들 아닐까? 

아, 얼마만한 위로이랴! 

이렇게 말이야.
또 정공채의 <간이역>을 잠시 보자.
우리는 서로의 존재들에게 <목적지>는 될 수 없을 거야.
나의 목적지는 <나의 완성>일텐데,
도대체 나는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그 완성을 어떻게 꿈이나 꾸겠어?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우물쭈물 하다 그리 되어버리는 것'이 인생인데 말이지.
그나마, 서로가 잊혀진 얼굴들 사이에서
간혹 스쳐지나간 것으로 기억되는 <간이역>으로 남는 것도 뭐, 괜찮겠지. ^^
꿈도 슬림하게... ㅎㅎ

피어나는 꽃은 아무래도 간이역
지나치고 나면 아아,
그 도정(道程)에 꽃이 피어 있었던가

잠깐 멈추어서
그때 펼 것을, 설계(設計)
찬란한 그 햇빛을......

오랜 동안 걸어온 뒤에
돌아다 보면
비뚤어진 포도(鋪道)에
아득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제 그 꽃은 지고
지금 그 꽃에 미련은 오래 머물지만
져버린 꽃은 다시 피지 않는 걸.

여숙(旅宿)에서
서로 즐긴 사랑의 수표처럼
기억의 언덕 위에 잠간 섰다가
흘러가 버린 바람이었는걸......

지나치고 나면 아아, 그 도정에 작은
간이역 하나가 있었던가

간이역 하나가
꽃과 같이 있었던가. (정공채, 간이역)

<존재의 본질> 하니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구나.
일본 애니메이션의 명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최고봉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고 아빠는 생각해.
정말 이쁜 만화거든. ^^ 
어렸을 때 같이 보러간 기억 나니?

 

일부러 일본어로 적었는데.
센과 치히로는 한자로 한 글자 차이야. 센 또 치히로 노 카미카쿠시...
'센'은 음으로, '치히로'는 뜻으로 읽은 거지.

부모님이랑 즐겁게 지내던 치히로는 이상한 할망구를 만나게 되고,
거기서 '네 이름은 너무 거창하구나.' 이런 명령에 뒷글자를 잃고 '센'으로 전락하고 만단다.
그런 뒤에 센은 맨날 목욕탕 때밀이를 하지.
목욕탕을 들락거리는 괴물들은 모두 '가오나시(얼굴없는)'들이고 말이야.

존재의 본질을 망각한 존재들은 모두 센이 되어서 무의미한 일상을 하루하루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 애니메이션이었단다.
친구로 나오는 하쿠가 그런 말을 반복해.

<네 이름을 절대 잊어서는 안돼!> 
이 말은 곧,
너는 이런 무의미한 일을 하고 있어야 할 센이 아니야.
너는 행복했던 때의 너,
치히로란 너의 본질을 찾아 가야해~~ 이런 외침 아닐까...  

아빠는 이런 생각들을 하곤 한단다.

 

자, 오늘은 좀 어려운 시를 다루고 나니, 나도 정신이 좀 멍~ 하구나.
그래도, 암튼, 만화영화 이야기도 나오고 하니 좀 맘편하게 읽어 주렴. ^^
센과 치히로 이야기 하면, 수업 시간에 아이들도 진지하게 듣거든.
김춘수, 신동집, 또는 박남수의 <새> 같은 시가 나오면 아이들이 울상이 되어버리는데,
그때 <센또 치히로노 카미카쿠시> 이야기 해주면 또 헤헤거리더라구. 

이 세상에서 아빠와 민우로 만나고 가족이 되었는데,
한국에서 사는 것. 학생으로 사는 것. 21세기에 사는 것.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다 보니 사는 일이 복잡하고,
어떨 땐, 내가 뭔가~~~
이렇게 <센>의 무의미한 나날을 보낼 수도 있을 것 같구나.

그렇지만, 우리의 하루하루가
살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면, 센처럼 목욕탕 청소나 하는 사람으로 살진 않을 거야. 그치?
좀더 의미있고 재미있는 날들을 만들면서 행복하게 살자꾸나.
또 시작된 아빠의 강의를 재미있게 읽어주기 바란다.
추운 날씨에도 힘내서 살자~
사랑해,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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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유명한 시 '성북동 비둘기'를 읽어 보자.
문명, 문화는 인간을 편리하게 해주기도 했지만, 환경을 파괴하기도 했단다.
개발의 이면에는 늘 파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곤 하지.

   

 

성북동 산에 번지(番地)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廣場)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祝福)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採石場) 포성(砲聲)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九孔炭)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平和)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성북동 비둘기)

별로 어려울 것 없는 시야.
새 번지(문명)가 생기면서 본래 살던 번지(자연)가 없어졌대.
1연에선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가 마을을 한 바퀴 도는 여유가 있어.
그치만, 2연에선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게 되고 말지.
연탄(구멍 9개짜리는 9공탄, 요즘엔 19공탄을 쓴다) 때는 문명 옆에서
자연의 향수를 느끼는 비둘기.
3연에선 사람과 가깝게 평화를 즐기던 비둘기였는데
이제 모든 것을 잃고 아무 것도 낳지 못하는 새가 되고 말았다는 시. 

지금은 환경에 대한 이야기가 보편적인 것 같지만,
이 시가 발표되던 1960년대엔 그런 이야기는 쉽사리 하지 못한 것이란다. 

이 시의 화자는 <문명 파괴의 폭력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무얼 이야기했지?
성북동이란 조용하던 동네의 비둘기를 바라본 것이지.
이렇게 뭔가를 바라보고(볼 관 觀), 그것을 마음 영상에 비추어(비출 조 照) 생각하는 것을 <관조>라고 해.
좀 어려운 말 같지만, 추상적인 마음, 보이지 않는 마음을
듣는이에게 확~ 다가가게 하려면, 관조가 필요하지.
누구에게나 보이는 겉모습은 다르지만, 그 내면적 의미까지 파악하는 관조적 시선을 가지려면,
깊은 사고의 과정이 필요하단다. 

인생에 대한 관조가 두드러진 김광섭의 <생의 감각>을 한번 읽어 보자.

여명(黎明)에서 종이 울린다.
새벽별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같이 산다.
닭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오는 사람이 있고 가는 사람이 있다.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

아픔에 하늘이 무너지는 때가 있었다.
깨진 그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르른 빛은 장마에
황야(荒野)처럼 넘쳐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 갔다.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서 있었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生)의 감각(感覺)을 흔들어 주었다. (생의 감각) 

 

여명은 '검을 려, 밝을 명'이니깐, 아직 어둑어둑한데 밝아지려는 기미가 보이는 시간이란다.
이른 새벽으로 보면 돼.
이른 새벽에 종이 울리는 소리.
반짝이는 새벽 별과 닭 소리, 개 소리, 오가는 사람 소리. 

이런 것은 새로울 것이 없지만, 화자에게는 신선하게 들려.
어떤 때 이런 소리들이 들릴까?
닫힌 공간에 갇혔다 나온 사람이 아닐까?
군대나, 감옥이나, 병원처럼 일상과 격리된 생활 끝에 들리는 소리들... 

2연의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내게서 간다>는 '나'의 중심성을 이야기한 것 같아.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 곧 세상 모든 일은 오직 마음이 만들 뿐...
내가 없다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무 존재의 이유가 없지 않겠니? 

3연의 <무너진 하늘>과 <깨진 그 하늘>은 희망이 무너지고 절망의 나락에 빠진 화자의 심정을 나타내고 있어.
실제로 화자는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일주일만에 깨어난 뒤의 감각을 쓴 시란다.
죽음에서 소생한 사람의 생생한 생환기라고 볼 수 있지. 

깨진 그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르른 빛은 장마에
황야(荒野)처럼 넘쳐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 갔다.

깨진 하늘이 아무는 일은, 회복이겠지.
가슴에 뼈가 서는 일은 <희망과 의지> 같은 것일 거야.
회복기에 의지가 약해서 푸르른 <희망>의 빛은
장마에 황야를 넘쳐흐르는 강물처럼 <흐린> 것이었대.
절망이 그만큼 깊었단 이야기가 되겠지. 

그러다가 무너지는 둑 옆에 선 어느 순간,
작고 보잘것도 없이 무더기지어 피어있는 채송화가
"사는 것은 질긴 거예요." 이렇게 "당신도 살아 있잖아요." 이렇게
"일단 살아 있단 것이 중요해요." 이렇게 살아있음에 대한 이야기를 던져주는 것 같단 이야기지. 

힘들 때 한번씩 보면 좋을 그런 시일 것 같구나.
오늘은 요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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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많이 풀렸구나.
나는 추운 걸 싫어하다보니 따뜻한 날이 좋다.
지구 온난화니 뭐니 해도 사람은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야. 

아빠가 자랄 때만 해도, 집안은 겨울이면 추운 곳이었단다.
아궁이의 연탄 한 장의 힘으로 방은 1/10만큼 아랫목이고, 남은 곳은 윗목이었단다.
기형도 시에 나오잖아. '내 유년의 윗목'
아파트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성정에도 시린 유년의 기억이 담겼을지 몰라.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한반도의 특성상,
아래위가 집들로 둘러싸인 아파트가 난방과 통풍에 유리했단 생각이 든다. 

오늘은 '슬픔이 기쁨에게'로 유명한 시인 정호승에 대해 시 몇 가지를 찾아 본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슬픔이 기쁨에게)

이 시에서는 '나'와 '너'가 상정되어 있다.
'내'가 화자가 되고 '네'가 청자가 되어서...
그리고 제목은 슬픔이 기쁨에게...니까,
<슬픔, 남의 아픔을 함께 슬퍼하는 존재>로서의 <내>가,
<기쁨, 남의 아픔을 진정으로 아파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존재>로서의 <너>에게 보내는 메시지라 볼 수 있지.
어쩌면 조금 계몽적인 내용으로 볼 수 있어. 

지난 시간 1970년대 노동자들의 삶을 이야기했지?
이 시에서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은 역설적 표현으로서
남의 아픔을 진정으로 같이 아파해주는 마음이 소중함을 나타낸 구절이야. 

사랑의 반대말이 뭐라고 하든?
미움, 싫어함이 아니야.
'너를 정말 사랑해~'의 마음이 변하면 '네가 싫어'가 되겠지만,
그 마음이 정말 식으면, '나는 너한테 관심 없거든~'이 되는 거지. 무관심이란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잖아.
"여자들의 no는 maybe라고"
여자들이 '싫어~'하고 말하면 정말 싫은 게 아니란다.
진짜 싫어할 때는 '너랑 좋은 친구로 지내고 싶어~~' 이렇게 말하는 거지. 무관심 ㅋ 

무관심한 너,
부자이면서 할머니의 귤값을 깎는 이기적인 너, 
그렇지만 세상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어. 시대적 배경이 혹독하고 가혹하지.
가난한 사람들은 "추워 떨고" 있고, "슬픔"에 싸여 있어.
그래서 화자는 '함박눈'을 멈추고 싶대.
그리고 '봄눈', 아무래도 따스해 보이지?
봄눈을 데리고 오겠대.

그리고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고 하고 있어.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걸으며, 슬픔에 대한 이야길 하>고 싶대.
그래서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고 하는구나.
그건, 곧 사랑을 모르는 너에게 <세상의 그늘진 곳, 어두운 곳>에 대한 관심, 사랑을 가르치겠다는
좀 오만한 발상이기도 한 것 같아.
그렇지만, 1970년대는 전태일이 온 몸을 불살라서 밝히려 했던,
무지의 시대, 어두움의 시대였단다.
시대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교훈적>이며 <계몽적>인 시지. 

주제라면, 소외된 이웃에 대한 사랑과 관심 촉구... 정도가 될 거야.

비슷한 시대의 노래로, 소외된 이웃에 대한 시 '맹인 부부 가수'를 소개할게.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
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 뿐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 (맹인 부부 가수) 

제목을 봐도, 세상에서 가장 가엾어 보이는 맹인이 부부가 되어 주인공으로 등장해.
시대적 배경을 <눈 내려 어두워서>라고 표현하고 있단다.
암울한 현실 상황, 미래에 대한 불투명한 상황을 나타낸 말이지. 

어두운데,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이렇게 앞날이 어두움을 표현했어.
사람이 아니라 <눈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눈사람도 없다고 했으니 참 희망이 없고 외롭겠지.
맹인 부부는 아마 거지였을지도 몰라.
그래서 작은 바구니 하나 들고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관심'을 보여주는...
그런데, 자기 옆을 지나가는 사람은 없고... 
< 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이야. 참 부정적 세상이지.

그렇지만, 이 부부는 절망에 빠지지만은 않는구나.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두 사람은 노래를 부른다.
눈사람을... 사람을 기다리면서 말이야.
<기다림>의 노래를 말이다.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에서 간절한 기다림을 이야기했듯이,
이 기다림은 <밝은 시대의 도래>에 대한 기다림, <희망>에 대한 기다림이란다. 

어두워만 보이는 세상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 간다고 했어.
시인은 자신의 노래에 담긴 희망과 염원이 미래의 길을 열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나봐.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랠 부르며

이 부분은 '슬픔이 기쁨에게'를 다시 읽는 기분이지?
음악으로 치자면 variation, 즉 변주 부분이 되겠지.
주제에 대한 변화된 연주.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란 주제에 대한 변주곡. 

그렇게 어둡던 시대,
서울 하늘엔 힘든 사람들을 위하여 네온빛 십자가들이 가득했단다.
힘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주여, 내 기도 들으소서...>했겠지.
그렇지만, 서울은 다시 <예수>님에게 시련을 주는 공간이었을지도 몰라.
전쟁 이후, 독재 개발 시대의 무법 천지는 <가난한 자의 친구, 예수>를 유린했단다.
그래서 나온 시가 <서울의 예수> 연작이야.

1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꽃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2
술 취한 저녁. 지평선 너머로 예수의 긴 그림자가 넘어간다.
인생의 찬밥 한 그릇 얻어먹은 예수의 등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오른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속에
그리운 자유는 있었을까. 서울의 빵과 사랑과,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람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사람들이 모래를
씹으며 잠드는 밤. 낙엽들은 떠나기 위하여 서울에 잠시
머물고, 예수는 절망의 끝으로 걸어간다. 

3
목이 마르다. 서울이 잠들기 전에 인간의 꿈이 먼저
잠들어 목이 마르다. 등불을 들고 걷는 자는 어디 있느냐.
서울의 들길은 보이지 않고, 밤마다 잿더미에 주저앉아서
겉옷만 찢으며 우는 자여. 총소리가 들리고 눈이 내리더니,
사랑과 믿음의 깊이 사이로 첫눈이 내리더니,
서울에서 잡힌 돌 하나, 그 어디 던질 데가 없도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운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
눈 내리는 서울의 밤하늘 어디에도 내 잠시 머리 둘 곳이 없나니,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
술잔을 들고 어둠 속으로 이 세상 칼끝을 피해 가다가,
가슴으로 칼끝에 쓰러진 그대들은 눈 그친 서울밤의 눈길을 걸어가라.
아직 악인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서울의 새벽에
귀를 기울이는 고요한 인간의 귀는 풀잎에 젖어,
목이 마르다. 인간이 잠들기 전에 서울의 꿈이 먼저 잠이
들어 아, 목이 마르다.

4
사람의 잔을 마시고 싶다. 추억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소주잔을 나누며 눈물의 빈대떡을 나눠 먹고 싶다.
꽃잎 하나 칼처럼 떨어지는 봄날에 풀잎을 스치는
사람의 옷자락 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나라보다 사람의 나라에 살고 싶다.
새벽마다 사람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서울의 등잔에 홀로 불을 켜고 가난한 사람의 창에 기대어
서울의 그리움을 그리워하고 싶다. 

5
나를 섬기는 자는 슬프고, 나를 슬퍼하는 자는 슬프다.
나를 위하여 기뻐하는 자는 슬프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는 더욱 슬프다.
나는 내 이웃을 위하여 괴로워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별들을 바라보지 않았나니,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은 불행하고,
내 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은 더욱 불행하다 (서울의 예수) 

1부에서는 서울, 한강에 예수님이 나타나고 있어.
젖은 옷을 말리다,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민주화 투쟁하다 가는 감옥)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대.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함>이야. 

2부에서는 해가 지고 있어. 초승달이 떠오르고...
찬밥 한 그릇, 서울의 빵과 눈물, 담배...를 통하여 가난이 형상화되고 있구나.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운 자유.
예수가 간절히 바라던 평화와 자유는 없고, 고통과 눈물로 가득한 <서울>
곧 <한국인>의 삶을 바라보는 슬픈 예수의 눈...

3부에서는 목마른 예수님이 등장해. 
잿더미, 찢는 겉옷과 울음, 총소리, 그리고 또 <눈>... 시련과 고행의 도시 서울
함께 술잔을 들자고 하셔.
예수도 머리 둘 곳이 없어,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 <눈길>을 <걸어가라>고 하셔. 힘들어도 살아야 겠지.

4부에서는 <사람>을 그리워하시는 예수님이야.
<눈길>의 시련과 <사람>을 <그리워>하는 예수...
'슬픔이 기쁨에게'의 주제와 변주... 보이니?

5부에서는 <나를 섬기지 말고, 슬퍼하지 말고, 나를 위하여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말라>고 하셔.
예수는 세상의 모든 원죄를 대신 속죄(대속)하고 희생하셨는데,
아직도 서울에서는 예수를 부르는 목소리가 높고 높았으니,
서울은 참 슬픈 도시구나~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은 불행하고,
내 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은 더욱 불행하다  

불행한 시대를 노래했던 정호승의 노래는 이만큼 듣고, 그의 사랑 노래를 두 편 보자.
그의 노래 중, <이별 노래>는 가수 이동원이 불러 대중 가요로 널리 알려졌을 만큼 유명한단다.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 내 먼저 떠나가서
나는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이별 노래)

제목을 보니 <이별의 상황>이구나.
그대는 <떠나는 그대>니까, 떠나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그대가 떠나긴 떠나야 하는데,
조금만 더 늦게 떠나주길 바란대. 정말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지지?
그대가 떠난 뒤에도, 그러니깐 사랑이 끝난 후에도,
화자는 그대를 사랑한대. 그래서 사랑은 끝났지만, 끝난 게 아니란 역설이지. 

그대가 떠나갈 곳.
그곳에 화자가 먼저 달려가서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배경)이 될 거래.
또 어둠이 오면, 나는 그대를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될 거란다.
희생적인 사랑, 순정적인 사랑의 모습이야. 

마지막 연은 <수미상관>으로 주제를 더 강조하면서,
<이별의 상황에도 변치 않는 사랑의 마음>을 깊게 하고 있어.

정호승의 시 중에 <눈부처>란 시도 읽어보자.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그대는 이 세상
그 누구의 곁에도 있지 못하고
오늘도 곤고히
마음의 길을 걸어며 슬퍼하노니
저무는 눈동자 어두운 골목
바람이 불고 저녁별 뜰 때
내 그대 인생의 눈부처 되리
내 죽을때 망초꽃 되어
그대 맑은 눈동자 눈부처 되리. (눈부처)



눈부처는 "사람의 눈동자에 생긴 사람의 형상"을 일컫는 말이야.
눈동자는 세상을 대뇌로 시각적 영상으로 전달하는 기관인데,
세상이 비취이고 있어서 마주앉은 사람의 형상을 보여준단다.

근데, <그리운 눈부처>라고 했으니 마주앉을 수 없는 상황인가보다.
<일평생> 눈부처 되겠다 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스토커 비슷하기도 하네. ㅋㅋ

<그대는 이 세상 / 그 누구의 곁에도 있지 못하고 / 오늘도 곤고히 /마음의 길을 걸어며 슬퍼하는 사람>이래.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고 싶고,
<노래하는 별>이 되고 싶은 사랑하는 마음의 주제와 변주! 

이렇게 한 시인의 비슷한 시들은 같은 주제를 조금 다르게 연주하는 변주의 맛을 보게 된단다.
그런 것이 같은 시인의 시를 또 읽게 만드는 힘이기도 해.

정호승의 노래 중에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시가 있단다.
사람의 그늘...
사람은 밝은 곳만 가고 싶어하고, 높은 곳을 즐기는 존재긴 하지만,
조금 어두운 곳, 눈사람을 기다리는 마음의 시인이니... 이런 시가 나왔을 법도 해.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 기쁨도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 다른 사람의 눈물을 /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눈물묻은 빵을 먹지 않은 사람과 대화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세상의 그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그도 참 불쌍한 사람이고, 비인간적인 사람이지.
그늘이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슬픔>의 사람이고, <눈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이고,
따뜻한 눈으로 <맹인 부부 가수>를 바라보는 <서울의 예수>같은 사람일 거야.

나무 그늘에 앉아 /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 햇살을 바라보면 /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데... 눈물에 젖은 사람 이야기와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느낌도 난다.
그가 이적지 바라보던 세상은,
너무 추워서 눈물조차 제대로 나지 않던 혹한을 견디는 사람들의 세상이었는데
갑자기 <아름다운 세상>이 나오니깐 좀 어색한 느낌이 들기도 해.
세상도 변했지만, 시인도 변한 것 같은... 

일본어에 <고모레 비>란 단어가 있어.
나뭇잎 사이로 비친 햇살이란 뜻인데, 이렇게 단어가 있을 정도로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은
사람에게 인상적으로 남는 건가 싶기도 해.

이렇게 슬픔과 기쁨, 무관심에 대한 계몽에 대한 시를 쓰던 <사랑의 시인, 정호승>이
지난 봄에 있었던 천안함 사건 때, 이상한 말을 해서 욕을 먹기도 했단다.

북한이 기습 공격한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북한의 소행일지도 모른다고 짐작만 하기에는
오늘 조국을 위해 전사한 천안함 장병의 슬픔은 너무 크다
햇볕정책의 결과가 바로 이것인가.
그동안 남한이 북한에 보낸 '화해의 햇빛'은
지금 '기습공격의 그늘'이 되어 우리 아들들을 수장시키고 말았다. …(중략)…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천안함 사건만이라도 북한 소행이 아니라는 주장은 하지 말아야 한다  
                                                                         출처 : "천안함 침몰=북한짓", 정호승 시인 왜 이러나 - 오마이뉴스

천안함 사건은 참 슬픈 사건이었다.
한국이 전쟁중임을 일깨워주는 슬픈 사건.
멀쩡한 아들들이 멀쩡하게 배타고 쉴 시간에, 배가 두동강 나서 46명이 죽은 사건.
그런데, 진실은 조사되지 않고,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한 사건. 

최근에 연평도에서 일어난 폭격 사건도 그렇지만, 진실이 뭔지 알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누가 거짓을 이야기하는지는 알 수 있어야 지식인이란다.
그런데, 글을 써서 사회적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사람이,
이런 망언을 마구 내뱉으면,
어찌 보면 개인적 의견일 수 있지만,
쉽게 자기 주장을 내세울 수 없는 입장이기도 한 것이다. 아쉽지.

햇볕은 북풍보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데 효과적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우화지 논리적인 것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란다.
북측과 남측이 갈라져 싸운 원인은, 외부에 있는 거야.
2차 대전의 책임을 지워 독일을 분단시켰다면, 당연히 일본을 분단시켰어야 할 상황에서,
섬나라 일본은 지정학적으로 별로 도움이 안 되니 한반도를 쪼갠 거지.
통일을 가로막는 외부 조건을 생각하면, 참 불쌍한 민족이야.
정말, 서울에 예수가 재림하셔야 할 나라인지도 모르겠다. 

글이 조금 길어졌다.
이제 기말고사까지는 하루 한두 편의 시만 소개하는 정도로 가볍게 갈게.
피곤해도 힘내고 열심히 해봐~  
사랑해,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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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신경림의 시를 몇 편 살펴볼까 한다.
신경림은 '시인을 찾아서 1,2와 같은 책도 쓰신 분이고, 민요에도 관심이 많으신 분이란다.
원래 이 땅에도 이런 시 말고, <민요>라는 것과 <시조창> 같은 것이 있었는데,
민요는 보통 노동요로서 경쾌한 일꾼들의 노래이고,
시조창은 느릿한 절제의 미학을 갖춘 노래였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문화에 기가 눌린 일본놈들은 일체의 조선 시가를 금지했어.
다만, 술집의 기생들에게만 허용해 주었더란다.
그래서, 지금도 간혹 텔레비전에 한복입은 국악인들이 민요를 부르기도 하는데 거의 만나기 힘들지.
1970년대만 해도 명절때면 꼭 등장했고, 1980년대에도 민속 씨름 등에서 볼 수 있었으며,
전국 노래자랑에서도 간혹 시조창을 부르는 노인들이 있었는데... 이제 씨가 말랐다 볼 수 있지. 

신경림의 초기 시 중, 가장 멋진 작품은 역시 '갈대'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갈대)

갈대는 사진처럼 '갈색 대'의 일종이야. 억새랑 다르지.
억새는 은빛으로 반짝이고 산중턱에 살고, 갈대는 갈색이며 물가에 많이 자란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이~ 이런 노래도 있고,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파스칼이 <팡세>에서 말한 적도 있다.
그만큼 갈대는 '흔들리는' 속성으로 비유되는 소재구나.
여자의 마음은 잘 흔들리고, 인간도 나약하게 흔들리는 존재라고 말이야. 

화자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지.
산다는 것은 슬픈 것이다. 뭐, 이런 것.
그것을 석자씩 묶어서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있는 것 

이렇게 정의한 것이구나. 

인간은 자의에 의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잖아.
민우도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한국에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야.
철학 용어로, 하이데거의 말에 따르면,
그런 것을 <피투성>이란 말을 쓴단다. 입을 피, 던질 투, 성품 성 해서 피투성.
내던져짐을 입은 존재의 성질. 

그래서 산다는 일은 원래 슬프고 고된 것이야.
바람이 흔들어서도 아니고,
달빛이 슬퍼서도 아니야.
제 조용한 울음...
그렇지만 드러내놓고 힘들어 죽겠어요~~~ 이렇게 징징댈 순 없잖아.
누구에게나 삶은 이렇게 속으로 조용히 울고있는 상태임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어.
시험에 나오는 말로 쓰자면 <존재의 근원적 고독>이나 <숙명적 비애>에 대한 깨달음... 뭐, 이런 말로 쓸 수도 있다.
힘들 때 누구나 그렇다는 이런 시를 읽으면 힘이 되지 않을까? 

문학 교과서에서 배운 <농무>를 간단히 보자꾸나.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조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벼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농무> 

농무 農舞는 농사꾼의 춤, 곧 농악놀이를 의미한단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일본 놈들은 조선의 모든 문화를 말살하려 했다.
농악놀이 역시 마찬가지 말살의 대상이었지.
농촌 공동체가 한데 어울려 고된 일을 나누고 이겨내는 의식은 저항정신이 담겨있는 것이기도 해서,
식민지 시대가 끝나고 독재 시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금지된 것이었단다.
그래서 <남,보,원>처럼 자기 주장을 하는 자리에서 북같은 것이 등장하는 거야. 

농악놀이를 해 보지만, 도통 신이 나지 않는구나.
6행에서 <답답하고, 고달프고, 원통한> 심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그래서 꽹과리를 앞장세우고 농악을 한바탕 울리는데,
건장한 남정네들은 농촌에 없고 꼬마들만 졸랑거리고 처녀들이나 킬킬댈 뿐이야.
농촌은 이미 <막이 내리는> 시대인 거지.
하강의 이미지. 

1960년대 박정희 개발 독재 시대에는 도시의 공업화는 가속화되었지만, 농촌은 말라죽고 만단다.
농촌의 인력을 도시로 끌어낼 수밖에 없었지.
도시는 엉망으로 더러워졌고, 도시 빈민 문제도 일어날 수밖에 없었단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처럼 말이야. 

조선 왕조 때, 농민에 대한 핍박에 저항하고 일어선 이 중에 '임꺽정'이 있었지.
'서림'이는 양반 나부랑인데 '모사꾼'이라고 브레인 역할을 하고 있었지. 
조선 왕조 때 더럽던 농부들의 처지나,
산업 역군 시대의 볼품없는 농부들의 처지나, 거기서 거리라는 의미로,
꺽정이와 서림이가 등장한단다. 

쇠전(소시장)을 지나 도수장(도살장) 앞에 와서 농악놀이를 벌이는데,
점점 신명이 난대.
이 사람들이 정말 신명나는 노래일까?
아니랬지? 화나고 짜증난다 그랬잖아. 직설적으로. 6행에서.
근데 신명난다고 했으니, <반어법>
또, 어떻게 보면, 도살장 앞은 죽음의 공간인데 거기다가 <신명>을 덜커덕 붙였으니 <역설법>으로 보기도 해. 
제목도 그렇고, 신명나는 농악놀이인데,
그 농촌의 삶을 보면 참 팍팍하고 힘들다는 것을 담고 있단다.

암튼, 이 시는 몰락해가는 농촌의 모습을 '농악놀이'를 통해 그려낸 시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이런 구절에서는 쓴웃음을 짓는,
스스로 비웃는 듯한 <자조적>인 의식을 읽을 수 있어.
상당히 현실 참여적이고 비판적인 시라고 볼 수 있지. 

예전에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시 중에 이런 아름다운 시가 있었어.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난한 사랑노래 -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가난하다고 해서~ 모르겠는가?가 의미를 담은 한 부분으로 본다면 대충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단다.
가난해도 잘 안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설의법>이 쓰인 부분이지.  

가난해도, 외로움을 알아.
몰락한 농촌에서 도시로 나온 젊은 청년들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야 했단다.
그러고도 제대로 급여를 받지 못했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골목길에 달빛이 부서지는 늦은 밤.
젊은이들은 한없이 외로웠을 거야. 

가난해도, 두려움도 있어.
뭐가 젤 두렵겠니? 새벽 두시가 되었는데 어쩌다 호각소리나 장사꾼 소리에 잠을 깼더니...
멀리서,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어.
그 당시엔 기계만 돌아가지 않았지. 밤새워 철야 작업을 하는 끔찍한 작업장...
어휴, 생각만해도 무섭대. 

가난해도, 그리움을 잘 알아.
가난한 공원들(공돌이, 공순이라고 불렀지)은 1년에 휴가라고는 설과 추석에 4,5일 정도 가는 게 두번이 다야.
일요일이라고 푹 쉴 수 없었고, 지금처럼 교통도 좋지 않았단다.
10대 후반의 공원들은 늘 고향을 그리워 했을 거야.
보름달 쳐다보며 고향의 새빨간 감에 스쳐가는 바람소리도 떠올리며 어머니를 그리워했겠지.
<새빨간 감바람 소리> 바람소리에 빨간을 합친 공감각적 표현(청각의 시각화)이란다. 

가난해도 사랑을 알지.
울고, 웃는 사랑의 마음. 

그러나,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대.
가난한 넘은 외로움을 느끼는 건 사치고,
두려움 따위 모르고 열심히 근무해야 하고,
그리움 같은 배부른 고민 버리고 일해야 하고,
사랑 따위 사치스런 감정 느낄 필요 없다는 현실.
오로지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죽도록 기계처럼 일만 해야하는 이웃의 젊은이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내는 시란다.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에서 전태일 열사가 온 몸에 불을 붙인 채,
근로기준법이란 법전을 끌어 안고,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하고 외치며 산화해 갔단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이 인정되고, 임금 협상이 이뤄지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지. 

경찰들은 사장님의 말을 잘 듣고 노동자를 탄압했지만,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났을 때,
올림픽 개최지라는 시선때문에 노동자를 총칼로 짓누를 수 없었단다. 
그때 노동조합도 합법화되고, 상당히 임금도 많이 올랐지.
노동자도 이제 일요일에 놀러가고, 자동차도 살 수 있었단다. 해외 여행도 가고 말이야. 

그렇지만, 그때부터 세계화 시대가 시작되었단다.
가난한 나라들이 조금 잘살게 되면서 부자 나라들이 독점하던 이윤이 줄어들게 된 거지.
세계화 시대는 한 나라의 빈부격차를 세계적 범위로 확대시킨 거라 보면 된다.
그 이전에는 한국 내에서 가진자, 못가진자였던 것이 이제 세계적인 빈부의 격차로 확대된 거지.
주식회사들도 외국인들이 주식을 많이 가지게 되고, 결국 외국인 회사가 되니까, 이름을 다 영어로 바꾸게 되는 거야.
국민은행도 KB 이렇게, 포항제철도 posco... 이렇게 말이야.
노동자들도 단결하지 못하도록 <정규직> 조금과 <비정규직> 많이... 이렇게 구성이 바뀌고 말았어. 

1988년에 발표된 가난한 사랑 노래의 시대는 갔지만,
아직도 <비정규직의 사랑 노래>는 계속되고 있는 거란다.
이때부터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공부, 공부> 노래를 부르게 된 거야.
워낙 직장이 불안해 지니깐 말이야.
너라도 열공해서 <정규직> 직원이 되거라~ 이런 시대가 온 거지.
학원이 마구 생기고, 과외가 엄청 늘어난 시대...

신경림의 1970년대 노래, <목계 장터>의 떠돌이 시대가 다시 올는지 모르겠다.
요즘 유행하는 말이 <노마드>인데, 이게 곧 유목의 시대, 떠돌이의 시대가 온다는 이야기거든.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靑龍) 흑룡(黑龍)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 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天痴)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있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목계장터)

 

 
각 행은 읽기 좋게 4음보로 구성되어 있단다.  

하늘은 나에게 '구름, 바람, 잔바람, 방물장수, 떠돌이'가 되라고 그래.
정착하지 못하고 방랑하는 자의 이미지잖아. 

신경림의 고향은 아빠와 같은 충청북도 충주란다.
지금은 충주댐으로 막혀서 배가 다닐 수 없지만,
예전엔 단양 - 충주 - 팔당 - 서울까지 뱃길로 다니던 곳이었단다.
목계 나루터는 그 중의 한 나루터겠지. 

아흐레 나흘에 장이 서니 5일마다 장이 서는 거지.
오일장에서 박가분(박하분이라고 한단다.) 파는 방물장수라도 되려는 듯.
그렇지만, 그 방물장수가, <농무>의 농민보다, <가난한 사랑 노래>의 노동자보다 불행할까? 

오로지 돈을 더 벌려는 농민, 노동자보다
운명에 순응하면서 떠도는 방물장수가,
3년에 한 7일정도는 천치처럼 멍청하게 있어도 먹고 사는 일에 크게 변화는 없는 삶. 

물론 부유하고 풍족한 삶은 아니겠지만,
문학 시간에 배운 김동리의 <역마>의 주제도 그런 거잖아.
운명에 대한 순응. 

굳이 큰 돌이 되어 우뚝하니 솟을 필요 없이,
잔돌이 되어 시류에 맞게 살아가는 인생. 그것을 보잘것없다고 무시할 수 있을까?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맵고 차고 모진 시대를 만나면,
소심하게 들꽃이 되어 풀 속에 얼굴 묻고 살기도 하고,
바위 뒤에 붙은 잔돌처럼 살기도 하자...

이렇게 떠도는 민중들의 애환, 그 생명력... 이런 것이 이 시의 주제란다.
목계 나루를 배경으로 한 풍물과 토속적인 분위기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떠돌 수밖에 없는 뿌리 뽑힌 민중들의 삶의 애환과 억센 생명력을 
다양한 상징과 비유를 통해 형상화시키고 있는 작품이지. 

민우야.
삶은 언제나 만만하지 않단다.
맵고 찬 시대가 올 수도 있고, 물살이 모질게 빨라질 수도 있고 그래.
그렇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 세상을 이겨낼 힘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한다. 
민우가 무엇이 되든 너를 응원할 거란 이야기 한 적이 있었지?
공부를 해야 되는 이유도,
한국의 학생들이 지나치게 공부란 노동에 내몰리는 배경도 오늘 다 이야기를 했구나.
물론 불만을 가지고 있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없다.
다만, 네가 어디쯤 걸어가고 있는지 안다면, 스스로 해결책도 찾을 수 있을 것 같구나. 

이제 기말고사 1주일 전이다.
어디 서든, 얼마나 가든, 성실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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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2-01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의 작품은 엉뚱하게도 과거에 TV에 많이 소개되었던 <시인을 찾아서>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신경림 씨가 시인인줄 몰랐었습니다.
그러다가 <목계장터><가난한 사랑 노래> 등을 접하면서
그 분의 시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가난한 사랑 노래>를 다시 읽을 수 있어서
좋네요. 언제나 다시 읽어도 가슴이 짠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며칠 피곤해서 쉬었다.
민우도 곧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고 하니, 간단간단하게 읽을 거리를 마련해 둘게. 

오늘은 '어떻게 살까?'를 생각하는 시를 두어 편 골라 볼까 해.
우선, 김준태의 '참깨를 털면서'를 읽어 보자.

산그늘 내린 밭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 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내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 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낸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 번만 기분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김준태, 참깨를 털면서) 

참깨를 터는 일은 이런 거야.
참깨가 가득 붙어있는 줄기를 잘라서 볕이 잘 드는 곳에서 말린단다.
바삭하게 마르면 마당에 넓게 비닐 포장을 깔고 참깨를 툭툭 턴대.
그러면 참깨가 들어있는 씨주머니가 톡톡 터지면서 참깨가 튀어나오는 거지.  

이 시에서 화자는 할머니와 함께 참깨를 터는구나.
젊은이인 나는 빨리 일을 하고 가려고 힘을 들여서 탁탁 털었나봐. 

그런데, 할머니는 '모가지까지 털어지'는 나의 작업을 보고, 그러지 말라고 야단을 하지.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시는데, 나는 신이 나서 마구 쏟아지는 참깨를 보면서 속도를 냈던 거야.
도시의 삶은 <속도>와 <양>으로 승부하잖아.
빨리 많이 해야하는 것.
그렇지만 할머니의 철학은 '빨리와 많이'가 아니라 '천천히 해도 정확히'였던가봐. 

할머니는 오랜 연륜을 통한 삶의 지혜를 터득한 사람일지도 몰라.
나는 여유로움이 없이 조급해하는 모습으로 할머니와 대조되는 젊은이고.
세상을 살다 보면 빨리와 많이라는 <욕망>에 휩싸이기도 한단다. 그럴 때,
지혜로운 할머니의 말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하는 말을 되새길 필요도 있겠지.
한자 성어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있잖아.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다고... 적절하게 필요한 만큼이 중요하단 이야기겠지. 

매년 노벨 문학상에 후보로 거론되곤 하는 고은 시인의 시도 한 편 보자꾸나.
문학 교과서에 실린 '머슴 대길이'도 참 멋진 시다.
한국어란 낯선 언어가 비록 노벨 문학상을 거머쥐기에는 시기상조란 생각도 들지만,
고은이란 시인의 한평생이 <한국적인 인물> 만 명의 삶을 노래하리라던 '만인보'에 어우러진 것이라면,
이미 그는 노벨상 이상의 업적을 쌓은 거나 마찬가지 일거야.

새터 관전이네 머슴 대길이는
상머슴으로
누룩도야지 한 마리 번쩍 들어
도야지 우리에 넘겼지요.
그야말로 도야지 멱 따는 소리까지도 후딱 넘겼지요.
밥 때 늦어도 투얼댈 줄 통 모르고
이른 아침 동네길 이슬도 털고 잘도 치워 훤히 가리마 났지요.
그러나 낮보다 어둠에 빛나는 먹눈이었지요.
머슴 방 등잔불 아래
나는 대길이 아저씨한테 가갸거겨 배웠지요.
그리하여 장화홍련전을 주룩주룩 비 오듯 읽었지요.
어린아이 세상에 눈 떴지요.
일제 36년 지나간 뒤 가갸거겨 아는 놈은 나밖에 없었지요.

대길이 아저씨더러는
주인도 동네 어른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요.
살구꽃 핀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홑적삼 큰아기 따위에는 눈요기도 안하고
지게 작대기 뉘어 놓고 먼데 바다를 바라보았지요.
나도 따라 바라보았지요.
우르르르 달려가는 바다 울음소리 들었지요.

찬 겨울 눈 더미 가운데서도
덜렁 겨드랑이에 바람 잘도 드나들었지요.
그가 말했지요.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
남하고 사는 세상인데

대길이 아저씨
그는 나에게 불빛이었지요.
자다 깨어도 그대로 켜져서 밤새우는 불빛이었지요. (고은, 머슴 대길이) 

이 시를 보면, 머슴이란 신분이 등장한다.
머슴은 '종, 노비'와 달라.
1894년 갑오개혁 때, 신분제는 모두 철폐되었단다. 그렇지만 그건 공식적인 서류상 이야기고,
실제로 종들은 주인집에서 땅을 부쳐먹고 살았지.
그런 신분을 머슴이라고 했고, 머슴에게는 사경(새경)이라는 급여를 줘야 했단다.
그렇지만, 양심적인 주인이야 사경을 제대로 쳐 줬겠지만,
대부분의 주인은 그저 먹이고 재우는 일로 넘어가다가 아이들 혼사라도 있으면 재산을 좀 주고 했다고 그래. 

머슴 중에도 상머슴은 일을 아주 잘 하는 사람으로,
주인의 신임을 얻어 나중에는 '마름'처럼 관리자가 되기도 했단다. 

머슴 신분인 대길이는 일 잘하고, 성실한 젊은이었어.
그런데, 그는 <까막눈>이 아닌 <먹눈>이었지. 글을 알았단 의미야.
지식인은 무식한 사람보다 많은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지.
그리고 글자로 증거를 남길 줄도 알고 말이야. 
화자도 대길이 아저씨에게서 글을 배우고,
일제 강점기 36년이 지났단다. 

근데, 해방 이후 이 땅은 참으로 살기 힘든 곳이었단다.
가진 자들은 더욱 많이 가지기 위해서 온갖 협잡을 다 벌이고,
무산자들의 정권이라는 북한 정권도 부패하긴 마찬가지였지.
대길이 아저씨는 먼데 바다를 바라보듯, 세상 일에 관심을 가졌을 거야.
바다 울음소리 듣듯, 세상의 고통에 마음 아파했을 거라고.  

근데, 세상은 너무 잘 사는 놈들 위주로 돌아가고 말았지.
일제 강점기가 끝났는데도, 친일파와 지주 놈들은 더욱 부자가 되고 떵떵거리고 살았고,
독립운동하던 이들의 후손들은 거지처럼 살고 있었지.
아니, 오히려 친일파가 독립운동가들을 빨갱이로 몰아붙이기도 했단다.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
남하고 사는 세상인데 

대길이 아저씨가 가진 철학은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이런 거창한 것이 아니었단다.
그저, '도리'라는 것이지.
인간은 <혼자서 너무 호강하는 저밖에 모르는 존재>여서는 안된다는 도리.
인간은 <남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도리.

대길이 아저씨는 화자에게 <등불>같은 존재였어.
시적 화자가 주장하는 바가 뭘까?
어떤 삶을 살자는 걸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쉬운 도리를 지키며 살자는 것이겠지.

이 시의 언어는 친근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투로 이뤄져 있단다.
그럼으로써 진실된 민중의 삶, 함께 사는 삶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지. 

박남수의 '할머니 꽃씨를 받으시다'를 읽고 마치자.

할머니 꽃씨를 받으시다
방공호 위에
어쩌다 핀
채송화 꽃씨를 받으신다

호 안에는
아예 들어오시질 않고
말이 숫제 적어지신
할머니는 그저 노여우시다

-진작 죽었더라면
이런 꼴
저런 꼴
다 보지 않았으련만.....

글쎄 할머니
그걸 어쩌란 말씀이셔요
숫제 말이 적어지신
할머니의 노여움을
풀 수는 없었다.

할머니 꽃씨를 받으신다.
인젠 지구가 깨어져 없어진대도
할머니는 역시 살아계시는 동안은
그 작은 꽃씨를 받으시리라. (박남수, 할머니 꽃씨를 받으시다)  

이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시제'야.
과거 시제였을 <받으셨다>를 <받으시다>로 표현한 거지.
그저 과거에 있었던 사소한 사건이던 <받으셨다>를
할머니가 남긴 큰 의미를 가진 사건으로 <받으시다>라고 표현한 것 같아. 

<방공호>는 공격을 방어하려고 파 놓은 참호인데,
그러니깐, 전쟁 중이고, 그 위에 핀 작은 채송화 꽃씨를 받으신대. 

<아예> 방공호에는 들어오지 않으시는 할머니.
<숫제> 말도 없으신 할머니.
<그저> 노여우신 할머니. 

이런 두 글자짜리 부사어로 할머니가 뭔가에 무척 집중하고 계심을 표현하고 있구나. 
3연의 말씀을 통하여, 살아서 보고 있는 세상의 참혹함에 대하여 표현하고 있어. 

전쟁 중에 <꽃씨>는 생명과 희망의 상징이란다.
늘상 죽음의 위협에 가득한 전쟁 중에, 할머니는 생명따위 돌보지 않고,
꽃씨를 거두시는 모습으로 강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어.

사랑이 가장 강하게 부정되는 전쟁이라는 부조리한 상황.
거기서 할머니의 정성스런 마음을 통해서 애정의 숭고함이 꽃핀 것이란다.
남들이 숨는 방공호 그 위의 안전하지 못한 곳에 핀 채송화 꽃씨. 

생명이란 것은, 그 소중함은 그런 것이란다.
꼭 활짝 핀 장미만, 상품성이 있는 것만 소중한 것은 아니겠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일인지... 

머슴 대길이와, 참깨터는 화자를 통해서, 또 채송화 꽃씨 받는 할머니를 통해서 생각해 보자꾸나.
정말 돈 많이 벌고, 남들 위에서 떵떵거리고 사는 일만 소중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가치를 위해서 소중한 자신의 삶을 투자할 것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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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11-29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낮에는 이거 안 보였는데...^^
참깨를 털면서, 전에 내가 참깨 사진이랑 올렸던 시라 반갑네요.
김준태 시인과 김남주 시인은 광주의 5월을 노래한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분들이죠.

글샘 2010-11-29 21:45   좋아요 0 | URL
착실한 학생이군요. ㅎㅎ
어제 엉뚱한 폴더에 넣어 뒀더라구요. ^^
맞습니다. 김준태, 황석영... 뜨거운 시들이 한 시대를 풍미했죠.

반딧불이 2010-12-02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준태, 박남수 시인의 시를 요즈음 학교에서도 배우는가요? 글샘님 덕분에 누렇게 변한 <참깨를 털면서> <국밥과 희망>을 꺼내보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