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제법 차구나. 

아까 저녁 나절에, 우리집 앞 지하도에 불이 나는 바람에 정전 사태가 있었다.
잠시의 정전으로도 우리는 어쩔 줄을 몰라야 했구나.
촛불을 켜 놓고, 수돗물도 끊긴 집에 있자니... 인간이 참 나약하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수익의 '결빙의 아버지'와 나희덕의 '못 위의 잠'을 읽어 보자.

어머님, 
제 예닐곱 살 적 겨울은
목조 적산 가옥 이층 다다미방의
벌거숭이 유리창 깨질 듯 울어 대던 외풍 탓으로
한없이 추웠지요, 밤마다 나는 벌벌 떨면서
아버지 가랭이 사이로 시린 발을 밀어 넣고
그 가슴팍에 벌레처럼 파고들어 얼굴을 묻은 채
겨우 잠이 들곤 했었지요. 
 
요즈음도 추운 밤이면
곁에서 잠든 아이들 이불깃을 덮어 주며
늘 그런 추억으로 마음이 아프고,
나를 품어 주던 그 가슴이 이제는 한 줌 뼛가루로 삭아
붉은 흙에 자취 없이 뒤섞여 있음을 생각하면
옛날처럼 나는 다시 아버지 곁에 눕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머님,
오늘은 영하(零下)의 한강교를 지나면서 문득
나를 품에 안고 추위를 막아 주던
예닐곱 살 적 그 겨울밤의 아버지가
이승의 물로 화신(化身)해 있음을 보았습니다.
품 안에 부드럽고 여린 물살은 무사히 흘러
바다로 가라고,
꽝 꽝 얼어붙은 잔등으로 혹한을 막으며
하얗게 얼음으로 엎드려 있던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이수익, 결빙의 아버지) 

3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시간의 흐름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구나.
1연에선 과거의 유년시절을 회상하는 부분으로, '예닐곱 살 적 겨울 외풍을 막아주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2연에선 성년이 된 현재 '자기 자식을 통하여 아버지를 그리워 하'는 모습이,
3연에선 오늘 영하의 한강 얼음을 통하여 '아버지를 연상'하는 모습이 드러나 있다. 

동일한 감각적 이미지가 나타나 있어.
'차가운 얼음'은 유년 시절의 추억을 통해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표현한 소재가 되겠구나.
이 시의 주제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정도가 되겠지.

'목조 적산 가옥 이층 다다미방'은 일본식 가옥이란다.
적산은 '적군의 재산'인데, 일본놈들의 가옥을 적산가옥으로 불렀지.
일본은 '온돌'과 같은 난방이 없어서 '다다미'방에서 살았대.
기껏 난방기구라고는 밥상 밑에 난로를 넣고 이불을 덮은 '고타츠' 정도였지.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날마다 뜨끈한 물에서 몸을 녹이곤 했다고 해. 

어린 시절을 추억하면 민우는 어떤 기억이 떠오르니?
화자는 <추위>라는 '촉각'이 떠오르는 모양이구나.
추위로 인해 아버지의 가슴팍이 떠오르고...

요즈음도 추운 밤이면 화자의 자식들이 옹송그리며 잠든 모습을 보고,
아버지를 추억한단다.
오늘은 문득 한강물의 얼음을 보고, 그 아버지가 <이승의 물로 화신(化身)해 있음>을 보았단다.
<하얗게 얼음으로 엎드려 있던 아버지>의 이미지는 차가움 속에서 뜨거운 사랑이 보이는 것이지.  

민우도 나중에 아이를 낳아 기르다 보면 사랑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거다. ^^ 
이 시는 과거 회상이 드러난 감각적이고 고백적인 시다.
분위기가 차분하면서도 애틋하지.

대화체를 사용한 특징, 시간의 흐름에 따른 주제의 심화. 이런 것들을 읽을 수 있다.
이 시가 실린 시집의 제목이 <불과 얼음의 콘서트(2002)>라고 하니 재미있는 제목이구나. 

지난번에 읽었던 김종길의 '성탄제'에서도 아버지의 사랑이 형상화되기도 했었지.
비슷한 주제가 드러난 '나희덕'의 <못 위의 잠>을 한번 읽어 보자.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 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 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나희덕, 못 위의 잠)

이 시에서 공간적 배경이 되는 <저 지붕 아래 제비집>은 '화자의 보잘것 없는 집'에서 '가난'을 떠올리게 한다.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도 가득 차는 작은 집.
어미는 새끼들에게 보온을 해주느라 날개로 둥지를 덮고 간신히 잠들었대. 

그 둥지 옆에, 누군가 박아 놓은 못 하나가 있는데,
바로 그 못에서 아비는 밤을 지냈단다. 
아비 제비는 그 못 위에 앉아 가족을 걱정하며 밤새 꾸벅거리고 졸고 있단다.
화자는 그 모습을 보면서 <눈이 뜨거워> 진다.
바로 제 아버지를 떠올리기 때문이겠지.

화자가 살던 동네는 서울에서도 조금은 외진 곳, 종암동이었던 모양.
흙먼지 섞인 바람이 부는 어느 버스 정류장에서 아버지와 세 아이가 엄마를 마중나와있어.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오래오래 기다리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엄마가 내렸어.
창백한 엄마 얼굴과 하늘의 반달은 가냘프게 새하얀 게, 조금 슬퍼 보이는구나.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도 잡고 재잘거리며 떠드는데,
정류장에서 멈춰서 있는 그 사내, 남편의 안쓰런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밤 늦도록 일하고 오는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마음도 힘겹기는 마찬가지였겠지. 

직장을 잃고 집에서 쉬고 있던 아버지.
그 실업의 힘겨운 나날에,
심심할 때면 주머니 속에서 두 알의 호두를 만지곤 했는데,
그럴듯한 집 한 채 장만하지 못하고,
마치 못 위에서 잠든 제비 아빠처럼,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화자의 아버지.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 소리가 날카롭게 울린다.
그 여자가 힘들게 퇴근하는 길.
희미한 달빛에 비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는 그런대고 따스하기도 했지만,
그 좁던 골목길은 너무도 가난했고,
실업자의 잃어버린 자신감과 놓쳐버린 자존심이
지친 아내의 한 걸음 뒤에서 느릿느릿 따라갈 수밖에 없던 아비의 발걸음. 슬픈 그림자. 

과거의 그 아버지의 꾸벅거림을 떠올리게 하는,
오늘의 못 하나, 그 위의 제비 애비의 잠. 

흙바람이란 시련 속 과거를 회상하는 화자의 시구나.
아버지는 실업의 고통 속에서 힘겨워하는데, 아버지를 대신해 생계를 책임지던 어머니가 떠오르고,
그 궁핍한 삶이 영위되던 '골목'의 추억은 화자를 애상에 잠기게 만든다. 

벽에 박힌 못 위에서 잠을 자는 아비 제비를 보고 떠올린,
유년 시절의 화자의 아버지의 모습은 쓸쓸하고 처량하다.
아버지의 모습에서 '연민'을 느끼는 화자의 눈에 보이는 '못 하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안간 힘을 쓰는 아비의 마음을 되돌아보게 하는 소재였구나. 

일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삶의 의의를 찾는 시로는 '고정희'의 '우리 동네 구자명 씨'도 있다.
한번 읽어 보렴. 

맞벌이부부 우리 동네 구자명 씨
일곱 달 된 아기엄마 구자명씨는
출근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경적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옆으로 앞으로 꾸벅꾸벅 존다
차창 밖으론 사계절이 흐르고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씨,
그래 저 십 분은
간밤 아기에게 젖물린 시간이고
또 저 십 분은
간밤 시어머니 약시중 든 시간이고
그래그래 저 십 분은
새벽녘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을 위하여 버린 시간일 거야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잠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식탁에 놓인 안개꽃 멍에
그러나 부엌문이 여닫기는 지붕마다
여자가 받쳐든 한 식구의 안식이
아무도 모르게
죽음의 잠을 향하여
거부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 (고정희, 우리 동네 구자명 씨)

 

아침 출근 버스에서 정신없이 졸고 있는 어머니.
일곱 달 된 아기 엄마인데, 오늘도 출근을 하는구나.
왜 그렇게 졸고 있나 곰곰 살펴 보니,
아기에게 젖도 물리고, 시어머니 약시중도 들고, 남편의 술주정도 좀 받아 주고
그렇게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
마약처럼 달콤한 통근 버스의 잠자리가 마련되어 있구나. 

'팬지꽃 아픔'과 '안개꽃 멍에'는 역설법으로 볼 수 있겠다.
팬지꽃과 안개꽃같이 이쁜 꽃에다가 '아픔과 멍에(동물의 머리나 목에 끼워 짐을 끌도록 하는 막대)'가 붙었으니 말이다. 

여성 한 명에 하나씩 부여된 <부엌>이란 공간은,
한 식구의 '안식'을 위하여 어머니가 희생하는 삶을 사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집에 천사들을 보낼 수 없어
어머니를 대신 보내 주셨다는 이야기도 있지.
<죽음과도 같은 잠>을 잘 수 없는 상황을 <거부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고 표현했구나.
잠도 제대로 자지 못 하고 일해야 하는 어머니의 삶과 그 의미를 한번쯤 생각해 보자. 
왜 잠을 못 잔다고 하지 않고 <거부>한다고 했을까?
못 자는 상황이라기보다는, 안 자는 상황이라고 봐야겠지?
어쩔 수 없이 깨있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사랑의 마음으로 깨어있는 어머니 말이야.

구자명 씨에게는 동정과 연민을 느끼지만,
그건 그저 불쌍한 상황이 아니란다. 가족의 안식을 위해서 희생하는 모습이지.
시인은 출근길에서 정신없이 졸고 있는 한 여성을 보았겠지.
그래서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여성의 <전형>으로 구자명 씨를 창조했겠지.

생계를 꾸려나가는 여성의 고단한 삶이 잘 형상화 된 시란다.
민우도 힘들게 일하시는 어머니를 도와드리려면 네 방 청소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겠지?
오늘은 시를 통해서 힘들게 살아가는 어른들의 모습을 잠시 들여다 보았단다.
시를 읽는 일은 이렇게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하여 인생을 배우는 길이란다.
매일 간단하게나마 시를 읽고, 인생을 배우자꾸나. 
엄마 아빠는 언제나 네 편임을 잊지 말자고, 만화 한 편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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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1-13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10월 30일날 시작하신게...어느덧 32회네요.
거의 매일 한두 편씩 올라올 때에 비하면 못내 아쉽지만, 이런 글 쓰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어요.
근데, 요즘 좀 심하게 뜸한 건 알고 계시죠~?^^

전 시를 한 연, 한 행 헤쳐 분석하는 것도 그렇지만,
시 한편에서 연결되는 삶과 생각의 깊이를 만나게 되는 게 참 좋아요.
민우는 참 좋겠어요, 이런 글샘을 아빠로 둬서...

글샘 2011-01-13 22:05   좋아요 0 | URL
요즘 심하게 뜸했던 게요...
1월 5일부터 10일까지 합숙으로 시험문제를 내는 팀에 들어가서 콘도에 갇혀 살았거든요.
인터넷 없는 데 가서 사니깐 좋더군요. ㅎㅎ

시를 이렇게 읽노라면, 저도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끼곤 한답니다.
아들 덕에 시를 많이 만나서 저도 좋습니다. ^^
 

아빠가 출장을 가느라 며칠 이야기를 하지 못했구나.
오늘은 간단한 시 한 편만 같이 읽자.
이수익의 <승천>이란 시야.
승천, 이라면, 하늘로 오른다는 뜻이겠지.
우선 한번 읽어 보렴. 

내 목소리가
저 물소리의 벽을 깨고 나아가
하늘로 힘껏 솟구쳐올라야만 한다.

소리로써 마침내 소리를 이기려고
歌人은
심산유곡 폭포수 아래에서 날마다
목청에 핏물 어리도록 발성을 연습하지만,

열 길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쉽게 그의 목소리를 덮쳐
계곡을 가득 물소리 하나로만 채워버린다.

그래도 그는 날이면 날마다
산에 올라
제 목소리가 물소리를 뛰어넘기를 수없이 기도(企圖)하지만,

한번도 자세를 흐뜨리지 않는
폭포는
준엄한 스승처럼 곧추앉아
수직의 말씀만 내리실 뿐이다.

끝내
절망의 유복자를 안고 하산(下山)한 그가
발길 닿는 대로 정처없이 마을과 마을을 흘러다니면서
소리의 승천(昇天)을 이루지 못한 제 한(恨)을 토해냈을 때,

그 핏빛 소리에 취한 사람들이
그를 일러
참으로 하늘이 내리신 소리꾼이라 하더라. (이수익, 승천)  

이수익의 이 시는 왠지 영화 <서편제>를 생각나게 한다.
영화 서편제는 임권택 감독의 유명한 영화란다.
1969년이 한국인에게 영화를 가장 많이 보던 해로 기록된 것은 텔레비전의 영향이었다.
텔레비전이 가정에 보급되고 영화보러 가는 일은 급격히 줄었고,
1980년대 가정에 비디오가 들어오고는 영화 산업이 급속히 가라앉았다.
그런데 1993년 여름에 발표된 임권택의 <서편제>는 '전통'과 '한'을 주제로 하여 백만 관객의 시대를 열었지.
그리고 십 년이 지나지 않아서 <학교 괴담> 열풍으로 시작해서,
<쉬리>가 500만을 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단다.
이후 한국 영화는 <가문의 영광>같은 코미디 영화도 툭하면 500만을 넘는 양적 발전을 보였고,
시나리오도 튼튼하고 사운드도 많이 좋아졌다는 평을 받곤 한다.  

서편제란 영화에서 주인공 여자아이 송화는 판소리를 배우는데,
한이 맺히게 한다고 약을 먹여 눈이 멀게 된다는 사연을 담고 있다.
배다른 오라비와 헤어지게 되는데, 이 오누이가 다시 만나 한맺힌 소리를 들으며 영화는 닫힌다. 

한반도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숱한 전란에 휘말리곤 했는데,
그래서 사람들 가슴에 '한'이 서리는 일이 많았다.
그 한이 가장 절절하게 표출되는 장르가 바로 <판소리> 같은 곡인데, 참으로 절절한 소리는 절창이다. 

그 가인들은 소리를 얻는 경지, 곧 득음(得音)을 위하여 폭포수 앞에서 연습을 한다고 그래.
폭포수 떨어지는 그 큰 소리를 뛰어넘는 소리가 목에서 터져 나와야 명창이 될 수 있다는구나.
이 시에서 '시적 화자' 인 <나>는 바로 그 가인이야.
그의 <목소리가 저 물소리의 벽을 깨고 나아가
하늘로 힘껏 솟구쳐올라야만 한다>는 것이 현실을 보여주는구나.  

그 가인은 <소리로써 마침내 소리를 이기려고 
심산유곡 폭포수 아래에서 날마다
목청에 핏물 어리도록 발성을 연습하지만,
열 길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쉽게 그의 목소리를 덮쳐
계곡을 가득 물소리 하나로만 채워버린다>고 하여
쉽게 득음의 경지에 오를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쉽게 포기하면 명창이 되는 날은 오지 않겠지.
<그래도 그는 날이면 날마다
산에 올라
제 목소리가 물소리를 뛰어넘기를 수없이 기도(企圖)하지만,
한번도 자세를 흐뜨리지 않는
폭포는
준엄한 스승처럼 곧추앉아
수직의 말씀만 내리실 뿐이다>에서 보듯,
한계를 느끼고 폭포 앞에 무릎을 꿇을 뿐이야. 

그래서 그는 <끝내> 하산하고 만단다.
아비가 죽어 뱃속 아기를 홀로 낳아야 하는 서러운 과부 같이,
절망의 유복자처럼 여겨지는 <가인의 노래>는
득음에 닿지 못해 마음이 아프구나.
결국 그는 <발길 닿는 대로 정처없이 마을과 마을을 흘러다니면서> 살아 간다.
뜨내기처럼 돌아다니다 시비도 붙었을 게고,
남이 집에서 품팔이도 해서 겨우 먹고 살았을 거야.
그러다 우연히 잔칫집이라도 만나서 술 한 잔 얻어 마시고는 노래 한 자락을 했으렷다!
<소리의 승천(昇天)을 이루지 못한 제 한(恨)을 토해냈을 때,> 

이 가인은 무대에서 노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성공하지 못했지.
그렇지만, 좌절해버린 그의 소리를 듣고도,
<그 핏빛 소리에 취한 사람들이
그를 일러
참으로 하늘이 내리신 소리꾼>이라고 부르더라는 이야기야. 

이야기가 들어있는 것 같은 <서사적>인 시라고 부를 수 있겠구나. 

가인의 삶을 생각해 보면,
성공하지 못한 인생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과연 인생에서 성공이란 남들에게 인정받으면서
스포트 라이트를 환하게 받는 무대의 주연으로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시의 가인처럼,
최선을 다하여 삶을 가다듬노라면,
어느 날엔가는 <참으로 하늘이 내리신 사람>이란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싶다. 

아빠는 이 시를 만날 때마다,
하루하루를 참 소중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단다.
차곡차곡 쌓아가기는 힘든 게 삶의 보람이지만,
그걸 한 순간에 흩어버리기는 쉽기 때문이다.

이수익의 '결빙의 아버지'라는 시도 좋은데 다음에 나희덕의 '못 위의 잠'과 묶어서 한번 이야기 할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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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0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1-03-11 09:37   좋아요 0 | URL
감동 씩이야... ^^
 

어제 김광규의 70년대 시 이야기를 하다가 황동규와 황지우 이야기가 나왔다.
나온 김에 이야기를 계속 하자.

황동규의 시는 상당히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는데,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는 조금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단다.
바퀴는 원래 굴러가라고 만든 것인데,
왜 화자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 것인지... 한번 읽어 보자꾸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자전거 유모차 리어카의 바퀴
마차의 바퀴
굴러가는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가쁜 언덕길을 오를 때
자동차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길 속에 모든 것이 안 보이고
보인다, 망가뜨리고 싶은 어린날도 안 보이고
보이고, 서로 다른 새떼 지저귀던 앞뒷숲이
보이고 안 보인다, 숨찬 공화국이 안 보이고
보인다, 굴리고 싶어진다. 노점에 쌓여있는 귤,
옹기점에 엎어져 있는 항아리, 둥그렇게 누워 있는 사람들,
모든 것 떨어지기 전에 한 번 날으는 길 위로. (황동규,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어렵니? 아니면 조금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한지... 

바퀴는 원래 마찰력을 줄여서 잘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든 것이지.
그러니, 바퀴는 잘 돌아야 하는 것이야. 잘 굴러가야 하는 것.
그런데, 이 바퀴가 잘 구르지 않는구나.
뭔가 문제가 많은 현실이지?
그래서 화자는 세상이 잘 굴러가기를 희망하는 거야. 

3연에서 <모든 것이 안 보이고/ 보인다> 이런 구절이 나오지?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은 상반된 주장이니까, 한 문장 안에 상반된 주장을 나타내는 것.
역설법이지.
근데, 뭐가 '안 보이고, 보이는' 걸까?
3연의 <숨찬 공화국>이 힌트가 될 수도 있겠구나. 

<공화국>이란 말은 <republic>을 옮긴 말인데, '함께 공', '화할 화', '나라 국'을 쓴단다.
말 그대로 옮기자면 '함께 사는 나라'라고 볼 수 있지.
정치의 대상은 'public'일거고... 대중. 민중을 위해 함께 살도록 정치를 하는 나라.
반대는 군주제겠다.
민주주의 국가를 용어로 만든 것이 공화국이라고 보면 되겠다.
어떤 나라든, 약한 계층이 있게 마련이니 그들에게 복지적 차원이든 시혜적 차원이든
국가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미의 소극적 공화국에서부터,
인종과 민족을 차별하지 않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자는 적극적 공화국까지...
참 바람직한 정체 체제라고 보면 되겠다. 
그러니 <부패 공화국> 이니 <삼성 공화국> 같은 말은 어불성설(말도 안 됨)이지.
어떻게 공화국이 부패할 수 있겠느냐고... 

그 공화국이 <숨찬 공화국>이 되어버렸구나.
말로만 공화국이지, 사실상 <독재국가>였던 시절.
너무도 구르지 않는 사회를 보니 굴리고 싶어지는 마음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지. 



반복되는 문장 구조(통사 구조라고 부르기도 한단다)를 통해 시상을 강조하고 있지.
마지막 구절.

모든 것 떨어지기 전에 한 번 날으는 길 위로... 

이 말은 조금 숙연한 마음이 들게도 하는구나.
모든 존재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만들어진 그릇은 깨어지게 마련이고,
낙엽은 떨어지게 마련이고... 인생도 그렇지.
모든 건 마침표를 찍게 마련인데,
그 전에 한 번 날으는 길 위로... 화자가 하고 싶은 것은?
바퀴를 굴려보고 싶은 거겠지.
삐걱거리고 사고투성이인 이 세상에 윤활유가 되듯,
제 한몸 바쳐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그래서 세상이 구르는 모습을 보면, 화자는 <떨어져 한번 날아가서> 끝이 나더라도
후회가 없을 것 같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 같구나.

다음엔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쓰는구나>를 읽어 보자.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들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기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은 국민을 통제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방법을 썼다.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것을 학생들에게 강제로 암기하게 하였으며,
'교련'이라는 수업으로 학생을 군사화하였다.
무엇보다도 아침 저녁으로 국가 게양과 강하식을 하면서 온국민에게 '얼음'을 외치기도 했지.
길거리에 애국가가 울려퍼지면 모든 사람이 스톱하게 되어있었단다.
무서운 사회였지.
우스운 것은 '가장 은밀한 곳' 영화관에서 조차도 영화보기 전에 '애국가'를 틀었단다.
블랙 코미디지. 

그 애국가 장면을 보던 화자는
화면 속에서 자유롭게 나는 새들과,
애국가의 노래 가사와,
국민의 삶의 현실이 어디선가 삐걱거리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은 아름답기만 하고,
'을숙도의 새떼들'은 자유롭기만 한데,
'민중의 삶'은 부자유스럽고 가난하기만 하지.

우리들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이런 상상을 하는 동안, 애국가는 끝이 나는구나.
그래서 좌석에 앉으면서, <주저 앉는다>는 표현을 하여 <좌절감>을 나타냈단다.

강요된 애국심, 군사문화의 맹목적 복종... 이런 것에 강하진 않지만 반발의식을 드러내고 있지. 

오늘은 황동규와 황지우의 시 두 편을 간단하게 살폈다.
책을 읽는다는 일은...
시험 공부를 하는 일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뭘 외워서 시험을 치는 일은 하기 싫은 공부도 해야한다는 전제가 들어있어.
근데, 평생 살면서 인간답게 살고, 보이지 않는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알렉산더 대왕이
자유로이 살기로 유명한 '통'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하고 물었더니
"저쪽으로 비켜 서 주십시오. 그늘이 집니다." 라고 말했다는 것은 생각해볼 만한 구절이 아닌가 한다.
대왕은 자신이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었다고 하는 말도 그렇고... 

자유롭게 산다는 일은 어떤 것일지...
평생 머릿속에 담아두고 살 만한 가치있는 구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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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김광규란 시인을 소개해 볼까 한다.
김광규의 시는 우리가 늘상 보는 것들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눈'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우선 <도다리를 먹으며>를 보자.

일찍부터 우리는 믿어왔다
우리가 하느님과 비슷하거나
하느님이 우리를 닮았으리라고

말하고 싶은 입과 가리고 싶은 성기의
왼쪽과 오른쪽 또는 오른쪽과 왼쪽에
눈과 귀와 팔과 다리를 하나씩 나누어 가진
우리는 언제나 왼쪽과 오른쪽을 견주어
저울과 바퀴를 만들고 벽을 쌓았다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자유롭게 널려진 산과 들과 바다를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고

우리의 몸과 똑같은 모양으로
인형과 훈장과 무기를 만들고
우리의 머리를 흉내내어
교회와 관청과 학교를 세웠다
마침내는 소리와 빛과 별까지도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고

이제는 우리의 머리와 몸을 나누는 수밖에 없어
생선회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신다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온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도다리의 몸뚱이를 산 채로 뜯어먹으며
묘하게도 두 눈이 오른쪽에 몰려붙었다고 웃지만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오른쪽과 왼쪽 또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결코 나눌 수 없는
도다리가 도대체 무엇을 닮았는지를 (도다리를 먹으며)

도다리는 가자미과에 속한 생선 이름이다.
생선 머리를 잡고 봤을 때,
눈이 <왼쪽>으로 붙은 놈은 <광어>, 2글자 ㅋ
눈이 <오른쪽>으로 붙은 놈은 <도다리>, 3글자 라고 '국립수산과학관' 박사님이 가르쳐 주시더구나. 

도다리를 보면서 화자는 의문을 가진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과연 그런 것인가를...
그것은 그저 <통념>에 불과할 뿐이지, 진실이 그러하지는 않을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 부호를... 

첫 연에서 <인간>은 <하느님>과 비슷하다고 <믿어> 왔다는 주장을 한다.
알고 있다거나,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을 그렇다고 <믿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2연에서는 <왼쪽>과 <오른쪽>을 구분하려 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들이댄다.
세상에는 '입'이나 '성기'처럼 가운데 하나만 있어 구분할 수 없는 것도 많은데 말이다.

20세기는 <좌우>의 시대였단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주의 세력과 자본주의 세력이 서로 발돋움을 하며 키재기를 해왔다.
그 와중에 세계대전도 일어나고 온갖 내전과 지역전쟁이 일어났다.
한국에서 벌어진 한국 전쟁도 <좌우>의 전쟁이었단다. 

도대체 인간은 왜 그렇게 <좌우>로 나뉘어 싸우는 것인지...
3연에서 화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라고... 
그래서 산과 들을 좌우로 나누고,
그것을 나누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며 잘난 체 하지만,
인간은 <온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도다리의 몸뚱이를 산 채로 뜯어먹으며
묘하게도 두 눈이 오른쪽에 몰려붙었다고 웃>는 징그러운 존재다.
그런 인간의 모습은 참으로 낯설지 않은가? 

세상은 결코 <좌우>로 나눌 수 없다.
마찬가지로 <도다리>도 나눌 수 없는데, 진실이 무엇인지...
화자의 생각은 이렇다.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 

그런데도, 인간은 얼마나 자기가 옳다며 서로 싸우고 죽도록 헐뜯는 존재인지...
인간의 <허위 의식>을 밝혀서 고발하는 시로 보면 되겠다.
인간 본위의 사고방식에 얽매인 무지한 존재인 주제에
<허위 의식>으로 가득차서 자신만 옳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존재임을...
그런 세상을 비판적으로 풍자하는 시다.

그의 유명한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좀 길지만 한번 읽어 보자.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마로니에 공원>

이 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1960년 4.19가 나던 해의 <순수한 젊은 시절> 이야기와,
그로부터 18년 지난 1978년 <생활에 찌든 소시민>의 이야기. 

제목인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도 그런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옛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다.
옛사랑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볼이 발그레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그 옛사랑의 시절은 '희미한' 것이고, '그림자'로만 남았다. 

1961년 5.16에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기 전까지,
상당히 혼란스러운 시기였지만, 한국에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울 절호의 찬스였다.
젊은 혈기들은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고 적었다.
그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토론을 <끝낸 밤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그 젊은이들의 순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18년 후.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인 그들은
회비를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묻고
물가를 걱정하며
세상을 개탄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소심한 소시민들의 평범한 삶이지만,
젊었던 시절의 뜨거운 열정에 비하면, 반성할 점이 많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1973년 지금의 서울대학교 자리로 옮기기 전까지는 종로구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 자리가
옛날 서울대학교 자리였다. 지금은 대학로라고 부르는 그 거리다.
툭하면 서울대에서 길거리로 시위를 나가곤 하던 그 혜화동, 동숭동, 이화동 거리...
나이든 화자는 그 젊었던 시절을 <옛사랑>에 비유하곤 하는 것이다.
이제는 <희미해진 옛사랑의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화자는 좀 부끄러워진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그렇지만 생활 속으로 그 늪 같은 깊이로 발을 옮길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부끄러움을 안고... 

젊은 시절의 대가 바라지 않던 뜨거운 마음이 사라진 '생활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반성.
순종적으로 변해버린 자신을 돌아보면서 반성하는 이 시는,
'3등 3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하고 부푼 꿈을 소리지르던 젊은 시절이 자취도 없이 사라진 시대에 대한 고백이다.
비슷한 시기의 비슷한 세대들에게 가슴 뜨끔한 기억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세밑은 연말이라고 했다.
연말이면 송년 모임이 많은데, 그 모임 속에서 속물적으로 살고 있는 자신의 삶에 반성의 계기를 갖게 되었다는 시.
다음은 그의 <상행>이란 시를 읽어 보자.
상행은 서울행이란 이야기다.
시골에서 서울로 서울로 살아 보겠다고 올라가는 그 기차를 <상행선>이라고 불렀다. 

가을 연기 자욱한 저녁 들판으로
상행 열차를 타고 평택을 지나갈 때
흔들리는 차창에서 너는
문득 낯선 얼굴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너의 모습이라고 생각지 말아 다오.
오징어를 씹으며 화투판을 벌이는
낯익은 얼굴들이 네 곁에 있지 않느냐.
황혼 속에 고함치는 원색의 지붕들과
잠자리처럼 파들거리는 TV 안테나들
흥미 있는 주간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다오.
농약으로 질식한 풀벌레의 울음 같은
심야 방송이 잠든 뒤의 전파 소리 같은
듣기 힘든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 다오.
확성기마다 울려 나오는 힘찬 노래와
고속 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는 얼마나 경쾌하냐.
예부터 인생은 여행에 비유되었으니
맥주나 콜라를 마시며
즐거운 여행을 해 다오.
되도록 생각을 하지 말아 다오.
놀라울 때는 다만 '아!'라고 말해 다오.
보다 긴 말을 하고 싶으면 침묵해 다오.
침묵이 어색할 때는
오랫동안 가문 날씨에 관하여
아르헨티나의 축구 경기에 관하여
성장하는 GNP와 증권 시세에 관하여
이야기해 다오.
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상행(上行))

이 시가 씌어진 1970년대는 '서울 중심의 불균형 개발'로 '농촌 황폐화'가 급속하게 이뤄지던 시기였다.
어려운 한자어로 이촌향도라고 하지. 촌을 떠나 도시를 향하는...

가슴 속에 가득 '발전해가는 세상과 뒤처지는 자신'의 괴리감이 점점 커져감을 느끼게 되는 화자의 마음은
이 시의 서술어들을 모아 보면 잘 드러난다.
말이 기니깐, 서술어들만 모아 볼게.

문득 낯선 얼굴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너의 모습이라고 생각지 말아 다오.
고개를 끄덕여 다오.
듣기 힘든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 다오.
고속 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는 얼마나 경쾌하냐.
즐거운 여행을 해 다오.
되도록 생각을 하지 말아 다오.
놀라울 때는 다만 '아!'라고 말해 다오.
보다 긴 말을 하고 싶으면 침묵해 다오
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스스로 부끄럽고 소외된 인생이라고... 낯선 얼굴을 발견하게 될 지라도...
너의 모습을 잊어 달라는 부탁.
국가에서 세뇌세키는 대로 제발, 문제의식을 갖지 말고 고개를 끄덕여 달라는 부탁.
자동차 소리도 경쾌하니, 즐겁게 여행을 해 달라는 부탁.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라는 부탁.
놀라운 일이 날마다 일어나겠지만, 그저 '아!'하고 나서 입 다물어 달라는 부탁.
그래서, 그저 시시한 축구 이야기나 증권 시세에 대한 이야기나 하라는 부탁.
그것은 '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그래야 한다는 것인데... 

화자는 <독재 시대> 날마다 벌어지는 사건 사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여기서 <현실의 문제를 외면해 다오> <생각지 말아 다오> 하는 이야기는 반어법으로 보는게 좋겠다.
<현실에 관심을 가지자> <생각을 바로 하자> 이렇게... 

텔레비전에서는 회형적 성장 위주의 획일적인 근대화를 과장하여 자랑하고 있지만,
실제는 농약으로 질식한 풀벌레처럼 <근대화로 황폐해진 농촌>이 죽어가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박정희에 대한 <용비어천가>만 틀어지고 있었지만,
낮은 소리로 <듣기 힘든 소리>는 부정한 현실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았던 시대다.
확성기에선 '새마을 노래' 소리 높아갔지만,
성장 위주의 근대화는 <재벌들>에게만 <당신들의 천국>을 안겨주었다. 

독재 시대에 찍소리도 말고 있어야 한다.
그게 <너>에게도 좋고 <나>에게도 좋다.
이건 정말 화자가 하고 싶은 목소릴까?
찍소리도 못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며,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소시민적 근성에 대한 반성이다. 

이런 것을 시인 '김수영'은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부분) 

중요한 일에 대하여는 비판하지 못하고, 그저 사소한 일에만 욕을 해대는 사람으로...  

'왕궁'과 '왕궁의 음탕함'은 '권력자의 부패'가 되겠다.
박정희는 말년에 엄청 술자리를 많이 가졌다고 그러더구나.
그런 데는 비판의 혓바닥을 놀리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반성. 
갈빗집 주인에게 옹졸하게 욕을 할 뿐인 자신. 

소설가가 정권을 비판했다고 붙잡아가고,
신문이 맘에 안 들면 광고주를 협박하고,
국민의 아들들을 제멋대로 월남에 파병하던 무서운 시절.
그런 정권에 비판의 날을 세우지 못하고,
잡부금을 걷으러 오는 야경꾼에게나 욕설을 날리는 자신에 대한 반성. 

무서운 시대였다. 지금 그 딸이 다시 대통령 자리에 앉겠다고 어리대고 있다만,
그 무서운 시대를 잊지 않았다면, 독재자의 딸이 다시 권력을 잡는 일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그 무섭던 시대...
'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그저 침묵하거나
별볼일 없는 이야기나 주절거리고 있어야 하는 현실이 참으로 부끄러워,
김광규는 서울 가는 기찻간(상행)에서 들었던 좌절스런 생각을 그렇게 시로 쓴 것이다.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하여 제대로 비판의 날을 간 시가 <어린 게의 죽음>이다.

어미를 따라 잡힌
어린 게 한 마리 

큰 게들이 새끼줄에 묶여
거품을 뿜으며 헛발질할 때
게장수의 구럭을 빠져나와
옆으로 옆으로 아스팔트를 기어간다
개펄에서 숨바꼭질하던 시절
바다의 자유는 어디 있을까
눈을 세워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깔려
길바닥에 터져 죽는다

먼지 속에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아무도 보지 않는 찬란한 빛 (어린 게의 죽음) 

어미게와 어린 게가 잡혀서 게장수의 구럭에서 허우적댄다.
<바다의 자유>를 찾아 <구럭을 빠져나와 아스팔트를 기어가>는 어린 게는
저항의 상징이다.
그러나 <군용 트럭>으로 상징된 <군사 독재>의 억압에 깔려
<길바닥에 터져죽는> 어린 게.
먼지 속에서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그러나, 그 저항 정신에서는 <찬란한 빛>을 만나게 된다.
저항 정신의 숭고함. 이런 이야기다. 

김광규의 시 몇 편을 보다 보니,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나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도 이야기하고 싶다만,
오늘은 여기까지~
오늘 수업 끝! (누가 수업 끝이래~ 하던 왕비호도 이제 박수칠 때 떠난다더구나. ^^) 

세상은 갈수록 뻔뻔스런 나쁜 놈들로 뒤덮이고 있다.
<슈퍼 배드 Super-Bad>로 부족해서,
<메가 마인드 Mega-Mind>까지 생겨났다. 

  

비록 만화영화지만, <아주 나쁜 놈>부터 <왕비호>까지
그 이름이 세상을 대변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세상을 바로보는 눈들을 읽는 일은 그래서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내일 계속하자꾸나. 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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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날이다.
매일매일이 그저 그렇고 그런 날이지만, 인간은 해가 길어지기 시작할 때,
음양론으로 이야기하자만, 음기가 기운을 다하고 양기가 발하기 시작하는 이 때,
그 때를 한 해가 시작하는 때로 정하였다.
'동지'가 그렇게 한 해를 시작하는 의미이기도 하였고,
'크리스마스'도 연말연시를 시작하는 날이 되기도 한다. 

한 해가 시작되는 날,
누구나 특별한 기분이 들 수 있겠다.
민우는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니?
오늘은 그런 의미로, 김종길의 '설날 아침에'부터 한번 읽어 보자.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險難)하고 각박(刻薄)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설날 아침에)


 

화자는 '새해는 매양(매번) 추위 속에 가고 오고 하지만, 따스한 마음으로 맞'자는 의견을 내고 있다.
그리고 '꿈도 좀 가지고 맞'자고도 하는구나. 

아직은 봄이 오지 않았지만,
원래 '봄을 시작하는 이 때'가 '음양설'에서 '태양'에 속한단다.
한창 봄이 무르익어 철쭉이 온 강산을 물들일 때는 '소양'에 불과하지.
곧 '음'이 다가설 미래를 본다면 그렇다는 거야. 

얼음이 아직 얼었고, 미나리 싹도 봄을 꿈꿀 뿐인 이 추위에,
아직도 추위는 맹위를 떨치지만, 그래도 '참고 꿈을 가지자'는 이야기.

설날 아침에 떡국과 '차례' 지낸 후의 따끈한 '음복' 한 잔 앞에 두고,
부족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행복'을 생각하자는 것은,
현실은 춥고 배고픈 것이라는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단다.

세상은 험난(險難)하고 각박(刻薄)하다.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이런 역설이 있나! ^^
험하고 각박한 곳이면, 살기 힘든 곳인데...
어차피 살아야 할 곳인데,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할 거 뭐 있나? 이런 의도겠다.
김남조의 '설일'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긍정적으로 살자' 이런 것.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아, 이 부분이 이 시의 '백미'겠구나.
어린 아이들을 길러본 사람이라면, 잇바디(이가 난 치열)로 들쭉날쭉한 이가 돋는 자기 새끼를 보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살맛나는 일이란 걸 안단다.
새해는 그렇게...
가장 행복한 마음을 가지고,
제 자식의 행복을 기도드리는 마음으로, 희망을 가지고... 그렇게 시작하자는 시 같구나.


시의 화자는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에 이 시를 썼겠다.
가난한 시기에 쓴 풍요로운 노래.
현실은 힘들지만 마음 속에서 풍요로움을 노래하는 소박하고 넉넉한 의지.
이 시의 특징은 '교훈적'이지?
삶은 힘들지만, 희망을 가지고 살자꾸나... 이런.

김종길의 시로 시험에 잘 등장하는 것이 '성탄제'다.
'성탄절'은 연말이고, 왠지 흥성거리는 들뜬 마음이 들게하는 시기겠다.


어두운 방 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都市)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山茱萸)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성탄제)


   <산수유 열매와 꽃> 




 

이 시는 시각적 이미지, 곧 색상의 확연한 대비가 나타난 시다.
'어두운 방 안'과 '빠알간 숯불'의 대조적 이미지.
'늙으신 할머니'와 '어린 목숨',
'흰 눈'과 '붉은 산수유 열매'
'서느런 옷자락'과 '열로 상기한 볼' 

이런 시각적, 촉각적 이미지들이 화자의 마음 속에선 그대로 살아 남았다가,
서른 살이 넘은 현재.
도시에서 쓸쓸한 성탄절을 맞는 오늘, 과거의 장면이 시각적, 촉각적으로 살아난다는 시란다.

'서러운 서른 살'은 '언어 유희'가 되겠지?
'서럽다'와 '서른'이 발음이 유사하니깐... 뭐, 서른 살이라고 서럽겠니? ㅋ 

화자는 나이가 들어 고향의 아늑한 방 안과,
그 시절의 '정감'이 그리워 지는 것이겠지.
왠지 도시 생활에서는 느끼기 힘든 그런 정감 말이야.
'혈액'과 비슷한 색의 '산수유 열매'가 주는 그런 정감의 유전자.

다분히 문명 비판적인 시이기도 하단다. 

서러운 서른 살...을 읽노라니, 김삿갓으로 유명한 김병연의 시가 생각나는구나. 

옛날에 김삿갓이 떠돌다가 밥을 얻으려 하는데, 춘궁기라 밥 얻기가 어려웠단다.
그러던 어느날 몇 집을 거쳐 수무나무 있는 집으로 또 갔단다.
수무나무는 가시에 찔리면 아무는데 20일 걸린다하여 수무나무라 불리기도 하는데,
한자로는 수무(壽無, 목숨이 끝이 없는)의 뜻으로 쓰인 나무이기도 하다. 

가서 또 요란스럽게 “주인 계시오. 밥 좀 주시오.”하고 야단을 쳤대.
주인 놈은 거지가 와서 시끄럽게 자꾸 야단을 하니까 할 수 없이 “그럼 한 술 줄게 먹고 가라.”
하고는 먹다 남은 쉰 찬밥 덩어리를 더럭 내 주었댄다.
받아 들고 냄새를 맡아보니까 퀘퀘 쉰 찬밥이었으니, 화가 나서 이런 시를 썼다는구나.

二十樹下三十客   이십수하삼십객
四十家中五十飯   사십가중오십반
이라고 글 한 구를 지어 들여보냈단다.  

 <수무나무>

즉 무슨 말인고 하니 ‘수무나무 아래 서른 손이(서러운 손님)
마흔 놈의(망할 놈이라는 뜻) 집에 쉰밥’ 이라는 욕이었지.

주인이 받아 보니까 이런 욕이 없거든.
‘야 이놈 봐라 글 잘 하는 거지로구나!’ 하고 따라 나와 보니까 벌써 달아나고 없더란다. 

힘겨웠던 조선 후기의 삶과 지혜로운 민중의 지혜가 함께 드러난 이야기로 볼 수 있겠지. 

사는 일은 힘들다.
그렇지만, 낙관적으로 생각하면 즐겁기도 하단다. 

민우도 네 젊은 날을 어떻게 즐겁게 보낼 것인지, 잘 고민해 보기 바란다.
행복한 인생을 위해 네 삶을 어떻게 꾸릴 것인지.
하루의 계획은 아침에 세우고,
일년의 계획은 연초에 세우라고 했다.
하루는 두 번 오지 않으니, 마땅히 인생 공부를 꾸준히 해야 한다고 그랬다.
그 공부는 '국영수'가 아니란다.
민우가 수능 마치면, 인생에 꼭 필요한 책들을 아빠가 소개해 주고 싶다.
흔히 하는 말로 '고전'이란 것인데, 그런 것들은 살면서 두고두고 친구처럼 읽어나가야 할 것들 같다.
올해, 계획 잘 세우고, 뜻한 바 잘 이루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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